김갑식

김갑식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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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갑식 부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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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6~202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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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성철 스님 1… “일일부작 일일불식”

    “처음에 들어갈 때는 우봉 스님이 살림 맡고, 보문 스님하고 자운 스님하고, 내(나)하고 이렇게 넷이 들어갔습니다. 청담 스님은 해인사에서 가야총림 한다고 처음 시작할 때는 못 들어오고, 서로 약속은 했었지만 그 뒤로 향곡, 월산, 종수 스님, 젊은 사람으로는 도우, 보경, 법전, 성수, 혜암, 종회의장 하는 의현이는 그때 나이 열 서너 댓 살 되었을까. 이렇게 해서 멤버가 20명 됐습니다.”성철 스님은 1982년 법문을 통해 봉암사 결사의 분위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1947년의 일이다. 당시 봉암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경북 문경시 봉암사는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로 879년 창건된 고찰이다. 내가 출가하기 이전 일이지만 청담 스님과 사형 월산 스님 등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적지 않다. 나뿐이랴. 봉암사 결사는 불문에 귀의한 스님뿐 아니라 재가 불자도 귀가 따갑도록 들은 하나의 ‘전설’이다.성철 스님은 1941년 충남 예산군 정혜사에서 동안거를 지냈다. 이곳 능인선원에는 당대의 선지식(善知識) 만공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성철 스님은 여기서 도반 청담 스님을 만났다. 둘은 처음 보는 순간 상대방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존재가 될지를 한눈에 알아차린 모양이다. 앞서 밝힌 것처럼 청담 스님이 열 살 위였지만 문제 될 게 없었다. 나중에 총무원 주변에서는 나이 어린 성철 스님이 말을 놓는다며 수군거렸다. 이에 청담 스님이 “그런 지 한참 됐다”며 웃던 기억이 난다. 성철 스님은 “청담 스님과 나 사이는 물을 부어도 새지 않는 그런 사이”, 청담 스님은 “우리는 전생에 부부였던 모양”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1945년 광복 뒤 두 스님은 우리 불교를 바로잡자는 대의에 의기투합했다. 결론은 선원, 율원, 강원을 모두 갖춘 전통적인 방식의 총림(叢林)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해인사에 총림을 세우려고 했지만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대처 측의 반대로 무산됐다. 두 스님은 서울의 한 거사가 갖고 있던 희귀 불서를 구해 봉암사로 보냈다. 그 뒤 1947년 가을 걸망을 멘 성철 스님이 봉암사로 향했다. 처음 넷이서 시작한 결사는 보안, 법웅 스님이 가세해 10여 명이 됐고 다음 해 청담, 향곡, 월산, 법전, 성수, 혜암 스님이 합류했다. 해인사 일로 청담 스님이 뒤늦게 합류하자 성철 스님은 “와 이리 늦었노. 그래 가지고 공부하것나. 퍼뜩 들어오그라”며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로 맞이했다고 한다.이들은 결사대중이 늘어나자 결사의 이론적 기초와 방향, 원칙을 담은 ‘공주규약(共住規約)’을 정했다. 비불교적 요소부터 없앴다. 절에서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를 없애고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만 모셨다. 스님이 불공 중간에 축원한다며 목탁 치는 것도 본래 없었다며 없앴다.더 중요한 것은 외형적 변화가 아니라 엄격한 수행공동체의 규율이었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 중국 당나라 때의 백장 선사가 남긴 백장청규(百丈淸規)에서 유래한 것이다.봉암사에서 불공을 하지 않고 기도 염불을 폐지하니 신도들도 떨어져 절집 살림살이는 더 어려웠지만 결사대중들은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성철 스님은 한술 더 떴다. 제대로 수행하라며 “밥값을 내놓아라”라는 호통과 함께 세숫물로 떠놓은 양철통의 물을 한 스님의 머리 위에 끼얹는가 하면 다른 스님에게는 재가 가득 찬 놋 향로를 씌우기도 했다.그러나 6·25전쟁의 여파로 군경과 빨치산이 번갈아 드나들며 스님들의 안전마저 위험한 상태가 됐다. 1950년 3월 동안거 해제 직후 결사는 해체되었다.종단사를 돌이켜볼 때, 봉암사 결사는 수행자들의 유토피아적 공동체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현실과 직접 부딪쳐 싸워야 했던 정화운동과는 결이 다르다. 우리 불교계의 결사로는 지눌 스님의 정혜결사, 한암 스님의 건봉사 결사, 용성 스님의 참선만일 결사 등이 알려져 있다. 공통적으로 불교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선 수행, 후 참여’의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고 봉암사 결사의 의미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니다. 봉암사 결사는 4년에 불과했지만 그 파장은 컸다. 결사 참가자 가운데 청담 성철 혜암 법전 4명의 종정이 나왔다. 부처님 법대로 살기 위해 모인 이들은 스스로 모였고, 철저했고, 위엄이 있었고, 건강했다. 종단 안팎의 위기가 올 때마다 그 결사의 정신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도 성철 스님의 이야기, “내 말 잘 들어. 중한테 속지 말아”가 이어집니다.}

    • 201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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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청담 스님 3…“육신은 유한 하지만 법신은 영원하다.”

    1971년 11월 15일 청담 스님이 입적하자 동아일보를 비롯한 주요 신문들은 그 내용을 일제히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16일자 1면에 “이청담 스님 입적 향년 70세 뇌일혈로”라는 제목의 1면 기사와 사회면 기사로 불교계 안팎의 분위기를 상세하게 전했다. 신문들의 보도는 대개 15일 오전 7시경 주석하던 도선사 앞뜰에서 쓰러진 청담 스님이 오전 9시 40분경 우석대병원으로 이송돼 응급치료를 받았지만 회생 가망성이 없다는 주치의의 소견에 따라 오후 5시경 조계사로 옮겨진 후 입적한 걸로 돼 있다.실제는 조금 다르다. 내가 급보를 듣고 병원으로 갔을 때 스님은 이미 입적한 상태였다. 입적 장소가 조계사로 발표된 것은 종단 어른에 대한 배려였다.스님의 입적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입적 하루 전인 14일에 도선사에 머물면서 오후에는 법문까지 했다. 이에 앞서 13일 강원 원주시 1군사령부 내 군법당인 법웅사 준공 법회에는 내가 스님과 동행한 뒤 서울 우이동의 모임 장소까지 배웅했다. 법회에는 사령관 한신 장군과 정권 실세이던 이후락 씨, 강창성 장군 등 1000여 명이 참석했다. 그날 스님은 장병들에게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뚜렷한 뜻을 깨쳐 통일에 이바지하라는 당부와 함께 “육신은 유한하지만 법신은 영원하다”는 유명한 법문을 했다. 이 법회가 스님의 마지막 외부행사가 됐다. 장례 절차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통상 큰스님의 입적 때 남기는 임종게(臨終偈) 때문이었다.당시 나는 장례홍보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런 말로 그 의견을 물리쳤다. “청담 스님의 생애가 보살입니다. 살아온 생애가 훌륭한데, 굳이 준비되지 않은 임종게를 남길 필요가 없습니다.”임종게는 따로 발표되지 않았다.영결식은 19일 오전 11시 동국대 운동장에서 종단장으로 거행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비서실장을 보내 조문하도록 했고 빈소에는 김종필 국무총리, 백두진 국회의장, 가톨릭의 노기남 대주교와 김수환 추기경, 최덕신 천도교 교령 등이 다녀갔다.도선사에서 치러진 다비식에서 8과의 사리가 수습됐다. 처음 100여 과의 사리가 나왔는데 이 과정에서 사리가 부스러지자 스님들이 술렁거렸다. 사리는 단단해 쉽게 부서지지 않고, 색이 영롱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이었다.이때 성철 스님의 일갈이 나왔다.“사리에는 구슬 모양의 쇄신사리뿐 아니라 화장 중 바람에 날아가 나뭇가지에 맺히는 응결사리도 있다.… 청담 스님은 타다 남은 뼈 전체가 사리다.”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 청담 스님이 열 살이나 위였지만 두 분은 평생 도반이자 친구로 지냈다. 청담 스님은 정화운동 초기를 빼면 두문불출한 채 수행에 전념하는 성철 스님에 대한 시비가 나올 때마다 줄곧 성철 스님의 편이었다. “성철 스님과 팔만대장경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난 성철 스님을 택하겠다”는 청담 스님의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성철 스님은 청담 스님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도반의 둘째 딸 인순이(묘엄 스님)를 발심시켜 출가하도록 했다.청담 스님을 잃은 종단은 휘청거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종단이 얼마나 스님에게 크게 의지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내 생각으로, 광복 이후 여러 고승들이 명멸했지만 청담 스님은 수행과 행정 능력, 즉 이사(理事)를 겸비한 최고봉의 하나였다. 개신교 한경직 목사, 가톨릭 노기남 대주교와 교류하며 종교 간 벽을 허물고 사회와 소통하기에 부단히 노력했다.40여 년 전 스님이 행한 법문은 나를 포함한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둘을 가진 자는 하나를 나누어 주고 하나를 가진 자는 반을 나누어 주고 반도 없는 자는 내 몸을 바쳐서라도 봉사해야 합니다.…이 혼탁한 사회 속에 뛰어들어 비록 내 몸에 때가 묻는 한이 있더라도 주변을 정화하는 것이야말로 오늘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는 불자의 본연한 자세입니다.”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성철 스님을 회고합니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모토로 유명한 ‘봉암사 결사’의 사연이 소개됩니다.}

    • 2011-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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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훈 목사 “한국 교회들 권력화 경계해야… 설교 어려워, 60점이나 될는지”

    “저를 포함한 교회 구성원 모두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 하용조 목사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두 ‘하 심(心)’이 작용한 거죠.”(웃음) 8월 소천(召天)한 하용조 목사의 뒤를 이은 온누리교회 이재훈 담임목사(43·사진)는 후임 목사 청빙이 축제 분위기 속에 끝난 비결을 이렇게 설명했다. 40대 초반의 그가 신자 7만5000여 명의 대형교회를 맡게 되자 교계 안팎의 관심이 집중됐다. 최근 서울 온누리교회 서빙고 본당에서 그를 만났다. ―부목사가 곧바로 담임목사가 되는 것을 금지한 예장 통합의 교단법 등 우려가 많았다. “청빙 절차가 시작된 뒤 46일 만에 29인 후보 중에서 제가 선출됐다. 분열과 갈등을 용납하지 않는 교회 문화의 뒷받침이 있었고, 교단도 원만하게 타협책을 제시했다.” ―지난해 말 부산 호산나교회의 청빙을 고사했다. 온누리교회를 염두에 뒀나. “큰 영광이지만 판단이 서지 않아 하 목사님과 상의했다. 그리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때 후임 담임목사로 ‘낙점’받은 것 아닌가.(웃음) “하하, 물론 아니다. 저도 소천 때까지 곁에서 지켜봤지만 후임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아마, 목사님이 계신 상태에서 청빙했어도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 목사의 유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것은 외형적인 것이 아니다. 바로 성숙한 장로다. 신자들 위에 있는 장로가 아니라 화장실 청소부터 시작하는, 청지기의 리더십을 갖춘 장로들이다.” ―앞으로 교회 내 역할은 어떻게 되나. “최종 2인 후보의 한 사람인 미국 어바인 온누리교회 박종길 목사가 올해 말 돌아와 양재 캠퍼스(교회)를 맡는 것을 빼면 큰 변화가 없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갈등을 치유하기보다는 조장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기본적으로 사회는 민주적 가치를 지향하는 반면 신앙공동체는 ‘신주적(神主的)’ 가치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최근 교회들의 문제는 이 차이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권위가 권력화하면서 생긴 것이다.” ―보수적 성향의 개신교단 연합체인 한기총을 해체하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대표를 하고 싶어 하는 분보다는 싫다고 마다하는 분을 모셔야 진정한 대표성과 권위가 사는 것 아닌가. 국회의원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려는 사람보다는 하기 싫다는 이를 시켜야 하는 것처럼….” 40대의 젊은 목회자는 겸손했지만 화법은 명쾌하고 분명했다. 때로 껄끄러운 대목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밝혔다. ―자신의 설교에 몇 점이나 줄 수 있나. “설교? 아직 어렵다. 때로 설교는 요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성경과 역사, 사회에서 좋은 재료를 찾아 정성스럽게 다듬고, 제때에 알맞은 양념을 넣고, 적당한 온도에서 끓여, 먹기 좋게 차려내야 한다.” ―그래서 몇 점인가. “한 60점 될까?”(옆에 있던 부목사는 ‘80점은 줄 수 있다’고 했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1-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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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청담스님2… “중 밥상 삼찬이면 족한 기다”

    “스님, 공양상이 허술해서 우짭니까.”“그래도 오늘은 간장 한 가지가 더 올라왔구먼. 중 밥상 삼찬이면 족한 기다.”종단 총무원장이던 청담 스님과 속가 딸로 동국대 불교학과에 다니던 묘엄 스님의 대화다. 청담 스님의 밥상에 오른 것은 밥과 시래깃국, 김치, 간장 종지가 전부였다. 이 사연을 전해 들었을 때 고개를 끄덕거리며 애틋한 느낌에 잠겼다. 어찌 여염집 부녀와 같을 수 있으랴. 그럼에도 묘엄 스님의 그 마음이 전해졌다. 그랬다. 청담 스님은 불교정화운동의 대의뿐 아니라 흐르는 시냇물도 아낄 정도로 검소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이 1962년 출범한 뒤 7년 만에 종단은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청담 스님이 1969년 8월 종단 탈퇴를 선언한 것이다. 초유의 일이었다. 정화운동의 상징이자 종정을 지낸 어른이니 종단 안팎이 벌컥 뒤집어졌다. 스님의 탈퇴 선언에는 종단 내부의 복잡한 흐름이 배경으로 깔려 있었다. 스님은 초대 종정 효봉 스님에 이어 1966년 제2대 종정으로 취임했다. 1967년에는 3000여 명이 참석한 전국불교도대표자대회를 주도해 경전 번역과 도제 육성의 현대화, 포교, 군승제 촉구, 신도 조직화,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불교회관 건립, 승가대 설립, 불교방송국 설립 등 9개항을 결의했다. 이 결의는 불교 정화의 이념을 계승해 불교 발전을 위한 기본 틀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종단의 변화는 지지부진했고 급기야 1968년 12월 불국사 공금 유용을 둘러싸고 스님들 사이에 폭력 사태가 발생해 사회 문제로 비화됐다. 내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스님은 이런 상황을 걸음마를 걷고 있는 종단이 쓰러질 수도 있는 심각한 위기로 받아들였다. 더구나 종단의 국회 격인 종회가 스님의 종단 유신 재건안을 거부하자 종단 탈퇴를 선언한 것이다. 그 파문은 컸다. 진통 끝에 나의 사형인 월산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선출된 뒤 청담 스님은 장로원장으로 복귀했다.상황은 다시 급박하게 흘렀다. 정화운동 이후 통합종단 출범 뒤에도 계속 갈등 관계에 있던 대처승(帶妻僧)들이 1970년 5월 태고종을 등록했다.그때나 지금이나 내 소신은 종단의 최고 어른인 종정은 상징적 존재이고, 종단의 운영은 총무원장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을 밝히자 청담 스님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총무원 교무부장으로 있던 나는 스님의 총무원장 복귀를 강력하게 권유하고 도왔다. 청담 스님은 2개월 뒤 열린 종회에서 총무원장으로 선출됐다. 청담 스님의 종단 탈퇴도 그렇지만 종정을 지낸 분이 총무원장을 맡은 것도 초유의 일이었다.어찌 보면 종단은 아직 청담 스님의 리더십과 힘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전례가 없지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종정과 총무원장의 역할이 명확하지 않아 혼란도 적지 않았다.청담 스님은 대의가 있다면 자리에 연연하거나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1967년 스님이 종정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총무원과 동국대가 모 회사 운영에 관여하다 어음부도로 몇천만 원의 손실을 보게 됐다. 총무원장 경산 스님은 거센 사퇴 압력에도 불구하고 일단 수습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종정이던 청담 스님이 먼저 사퇴하는 바람에 결국 종정과 총무원장이 함께 물러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종단 안팎에 복잡다단한 사안이 많았다. 그럼에도 총무원장이던 청담 스님이 조계사에 머무르면서 대중공양 때마다 참회한다는 의미의 자자법회(自恣法會)를 자주 거행한 것은 수행자의 자세를 흩뜨리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때 스님은 “자자에 의해 마음의 편안을 되찾게 되고, 마음의 편안을 되찾으려면 잘못을 참회하고, 참회하려면 허물을 고백하고, 고백함으로써 마음이 청정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스님은 당시 최고 권력자인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를, 표현은 안 했지만 딸처럼 허물없이 대했다. 어느 날 육 여사가 서울 도선사를 찾아 인사를 청했다. 그러자 스님은 누구든 절에 왔으면 먼저 부처님께 절부터 올려야 한다며 법당으로 안내했다. 스님은 이 만남을 계기로 청와대에서 열리는 모임에 이따금 참석하면서 여러 문제에 대해 박 대통령을 설득한 것으로 들었다. 박 대통령은 비구와 대처승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불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스님은 육 여사에게 대덕화(大德花)라는 법명을 지어주면서 항상 공덕을 쌓으라고 이렇게 강조했다. “남을 위해 살면 보살이요, 자기를 위해 살면 중생인 게야.”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청담 스님의 입적 당시를 회고합니다. 청담 스님은 입적 전 법문을 통해 “육신은 유한하지만, 법신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 2011-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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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청담 스님…“난 파계승이다. 정화 끝나면 처사로 살겠다”

    “성불(成佛)을 한 생 늦추더라도 중생을 건지겠다. 다시 생을 받아도 이 길을 다시 걷겠다. 육신은 죽어도 법신(法身)은 살아있다.”비구승과 대처승의 대립 속에 불교 정화 운동을 이끌면서 대한불교 조계종의 기틀을 잡은 청담(靑潭) 스님(1902∼1971)의 말이다. 청담은 법호이며 순호(淳浩)가 법명이다. 25세 때인 1926년 경남 고성군 옥천사로 출가한 스님은 박한영 스님과 만공 스님을 사사했다. 조계종 총무원장과 종회의장, 장로원장, 종정을 지냈으며 1971년 11월 15일 세수 70세, 법랍 45세로 입적했다.나는 1950년대 중반 조계사와 선학원에서 스님을 만난 뒤 총무원 간부로 정화운동을 도우면서 오랜 시간 곁에서 스님을 지켜봤다.참고 인내한다는 의미의 ‘인욕제일(忍辱第一) 이청담’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었다. 다음은 나의 사형인 탄성 스님의 말이다. “비구 수백 명이 정화를 촉구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있던 경무대로 몰려갔다. 그러나 경찰의 봉쇄로 가지 못했고 조계사로 돌아왔다. 서로 화가 나서 책임을 묻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젊은 비구가 통솔을 잘못했다며 대뜸 청담 스님의 뺨을 때렸다. 그런데 청담 스님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이런 일도 있었다. 종정이던 동산 스님이 대처승 측과의 협상에 불만을 표시하며 청담 스님에게 “네 이놈, (넌) 대처승 편”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역시 변명도 없었고 표정도 바뀌지 않았다. 나중에 동산 스님은 “내가 성질이 급해 그랬네” 하며 미안함을 표했다.청담 스님은 정화운동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나의 은사 금오 스님을 비롯해 동산, 성철 스님 등이 함께 정화운동의 씨앗을 뿌린 뒤 수행과 이런저런 이유로 산속으로 돌아갔다. 도심 한복판에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마다하지 않고 끝내 정화의 꽃봉오리를 피운 분이 청담 스님이다.헌칠한 모습의 스님은 금강경과 능엄경 법문이 특히 뛰어났고, 신바람이 나면 30분의 법문이 세 시간, 네 시간으로 길어졌다. 30대 중반일 때 당대의 대소설가인 춘원 이광수를 만나서는 일주일간 불교사상에 관한 격론을 펼쳐 춘원이 불교에 귀의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 스님도 20대 초반 출가하려고 했지만 이미 처자가 있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 가족사는 스님을 오랫동안 괴롭힌 고질이자 그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고리다. 있는 사실을 감춰 우상화하기보다는 언급해 스님의 뜻과 교훈을 읽는 게 낫겠다. 알려진 대로 스님은 출가 뒤 경남 진주의 속가를 찾았다가 유언이라며 가문의 대를 이어 달라는 노모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한다. 지옥에 갈 각오를 하고 하룻밤 파계를 한 스님은 참회를 위해 10년 세월 동안 맨발의 고행을 감행한다. 그후 청담 스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가 있다. 오대산에 머물던 스님은 속가로부터 딸을 낳았다는 전보를 받는다. 효도행(孝道行)을 위해 지옥행을 각오한 파계임에도 대를 잇지 못한 스님은 방성대곡하고 땅에 칼을 박아놓고 자결을 시도한다. 이때 오대산 원보산 스님이 ‘그 목숨을 불교를 위해 대신 써 달라’고 설득했다는 것이다. 훗날 청담 스님은 노모를 직지사로 모셔 출가하도록 했다. 하룻밤 파계로 얻은 둘째 딸은 성철 스님의 권유로 출가해 묘엄 스님이 됐다. 1971년 청담 스님 입적 뒤 묘엄 스님이 다시 속가 어머니를 삭발 출가시켜 청담 스님 집안에서 네 식구가 출가했다.정화운동 초기 대처 쪽에서 청담 스님의 호적등본을 떼어 출가 뒤 낳은 아이가 있다는 것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정화를 이끄는 수장에 대한 공격으로, 비구 쪽에서는 몹시 난처한 일이었다. 젊은 스님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쌓였다.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젊은 스님들 앞에서 “맞다. 난 파계승이다. 정화가 끝나면 난 뒷방으로 돌아가 참회하며 살겠다”고 선언했다. 순간, 그 자리는 얼어붙은 듯 침묵이 감돌았고 이후 스님들 사이에 시비가 없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다. 당시 청담 스님의 위치를 생각하면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당대의 어느 누가 이처럼 솔직하고 파격적일 수 있겠는가.나는 스님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아마 혁명가가 됐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철저한 수행과 뛰어난 법문, 포기하지 않는 열정과 인내, 남의 허물을 인정하는 그릇까지 세상을 바꿀 자질을 두루 갖췄다. 불교계의 시각에서 청담 스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큰 복이었다.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종정을 지낸 청담 스님의 충격적인 종단 탈퇴 선언과,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와의 인연을 얘기합니다.}

    • 2011-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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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금오 스님… “숙여라, 깊이 숙여라, 더 숙여라”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또는 말하고 잠잠하고 움직이고 조용히 하는 것들이 모두 마음이며,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도 마음이며, 노래 부르고 춤추며 웃는 것도 다 마음인 것이다. 이 마음이 범부(凡夫)도 되고 성인도 되는가 하면, 삼계에 윤회하여 천만 가지로 과보를 받게 되나니….”은사인 금오 스님(1896∼1968·사진)은 마음밭의 이치를 이렇게 밝혔다. 금오(金烏)는 법호, 태전(太田)이 법명이다. 16세 때 금강산 마하연 선원에서 도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충남 예산 보덕사의 보월 스님 곁에서 정진했다. 보월 스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만공 스님(1871∼1946)에게서 보월 스님의 법을 이어받은 제자임을 증명 받았다. 1954년 전국 비구승대회 추진위원장으로 선출돼 정화불사의 선봉이 됐고 종단의 부종정과 총무원장을 지냈다.나는 1954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은사의 성품은 불같았다. 하도 엄한 데다 금산사, 화엄사 주지를 지내 ‘지리산 호랑이’로 불렸다. 지금도 은사를 생각하면 부리부리한 달마상이 떠오른다.나의 사형 탄성 스님은 소문난 ‘효(孝)상좌’였다. 어느 날 사형이 솥을 놓는데, 은사가 “여기 놓아라, 저기 놓아라” 하며 수차례 말을 바꿨다. 그러다 은사는 사형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던지 그 자리에서 따귀를 때렸다. 이른바 솥을 아홉 차례나 옮겨 걸면서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구정(九鼎) 선사의 일화를 연상시키는 가르침이었다.은사는 수행 잘하는 제자에게는 더 엄했다.출가 초기 은사가 화엄사 주지로 있을 때 나는 교무 일을 보고 있었다. 실내에서는 삼배(三拜), 밖에서 마주치면 90도 각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하는 게 예법이다. 무릎을 구부려 더욱 낮은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어느 날 내가 인사를 했더니, 은사는 “숙여라, 깊이 숙여라, 더 숙여라”고 했다.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다시 “네놈 전생에 아만(我慢·스스로 높은 척하는 교만)이 있어, 그걸 버리라”고 했다. 살면서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아만을 버리는 것은 남에게 자신을 낮추는 하심(下心)이다. 하심 없이 어찌 남을 설득하고, 종단을 개혁하고, 세상에서 보살행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굴곡이 많은 종단 개혁 과정에서 나를 원칙주의자로 보는 사람이 많지만 하심을 잊은 적이 없다. 은사의 하심에 대한 욕구는 너무나 강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행을 위해 거지들의 무리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첫째 어느 밥이든 가리지 않고 먹는다, 둘째 옷이 떨어져 살이 나와도 탓하지 않는다, 셋째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잠을 잔다고 결심했다. 움막을 짓고 2년간 거지 행세를 하며 수행해 ‘움막 스님’으로 불리기도 했다. 훗날 은사는 “인간생활의 기본인 의식주에 매이지 않고 수행한 시기였다”고 회고했다.당대의 선지식(善知識)인 수월 스님을 찾아 만주로 갔다가 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기도 했던 은사는 제자들의 교육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월산·범행·월남·탄성·이두·혜정·월성·월주·월서·월만·월탄 등 제자가 49명에 이른다. 손자상좌까지 합하면 600명이 넘는다. 특히 ‘월’ 자를 딴 제자가 많아 불교계에서는 ‘월자문중(月字門中)’이라는 말까지 나왔다.은사는 참선 공부를 소홀히 하는 제자에게 엄해 “나를 알려고 중노릇을 하는데 참선하지 않으면 중이 아니다”며 크게 야단을 쳤다. 어느 날 용맹정진 기간에 수마(睡魔)를 이기지 못하는 한 제자를 불러 “네 이놈, 다음 생에 짐승이 되려고 수마에게 지느냐. 그러려면 차라리 목숨을 버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전한다.내가 깊은 산속에만 머물지 않고 종단 개혁과 비정부기구(NGO)를 통한 사회활동에 뛰어든 것은 은사의 영향이 적지 않다. 다만, ‘참선하라’ ‘계행(戒行)을 지켜라’ ‘보살행을 실천하라’라는 은사의 가르침은 내게 각각의 셋이 아니라 하나였다.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청담 스님을 회고합니다. 1950년대 불교계에서는 “설법 제일 동산, 정진 제일 효봉, 인욕 제일 청담, 지혜 제일 전강”이라 했다고 합니다.}

    • 201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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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直指 대모… 기부 代母… 故박병선 박사, 유산 2억-장서 9박스 인천가톨릭대에 기부

    23일 프랑스에서 타계한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가 유산 2억 원과 장서 9박스 분량을 인천가톨릭대에 기부했다. 천주교 인천교구는 24일 박 박사가 이 교구의 정신철 보좌 주교와의 인연으로 인천가톨릭대에 유산을 기부하게 됐다고 밝혔다. 가톨릭 신자인 고인은 1998년 지인들과 함께 떠난 성지 순례에서 정 주교와 처음 만난 뒤 친분을 유지해 왔다. 인천교구에 따르면 1970년대 고인이 병인양요 때 빼앗긴 외규장각 도서를 발견해 반환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뒤 정 주교를 통해 인천교구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고인은 2000년경 자신이 소장한 도서를 여러 대학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보관과 관리 등의 문제가 발생하자 책 일부를 정 주교에게 맡기기도 했다.인천교구는 박 박사의 유산을 인천가톨릭대 신학생들을 위해 사용할 계획이며 전달식은 26일 인천교구 설정 50주년 폐막 미사에서 진행한다. 인천가톨릭대는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박병선 루갈다 전용 도서 공간을 마련하기로 했다.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은 이날 발표한 애도 메시지를 통해 “우리나라 문화재 반환을 위해 평생토록 노력한 고인의 애국심에 깊은 사의를 표하며, 하늘나라에서도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기원한다”면서 “지상의 삶을 충실히 마치고 선종한 고인이 평소 늘 바라고 기도한 대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길 기도한다”고 밝혔다.한편 “국립묘지안장대상심의위원회(위원장 국가보훈처 차장)는 서면 심의를 통해 고인이 국가와 사회에 현저하게 공헌한 업적을 인정해 고인의 국립묘지 안장을 의결했다”고 24일 문화체육관광부가 밝혔다.장례식은 25일 오전 10시 반(현지 시간) 파리외방선교회에서 거행된다. 고인의 유해는 장례 미사가 끝나면 화장돼 현지 절차가 마무리되는 대로 다음 주 중 인천공항에 도착해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에 안장된다. 구체적인 안장 의식 절차와 일정은 확정되지 않았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

    • 201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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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고건… “좋은 대통령감, 그러나 좋은 후보는 아니었다.”

    “DJ(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쪽에서는 나가라고 합니다.”(고건 명지대 총장)“당신은 여당 체질인데 안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송월주 총무원장)1995년 민선 1기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고건 명지대 총장이 찾아왔다. 큰일을 앞두고 원로들의 조언을 많이 구하던 그는 김수환 추기경과 강원용 목사에 이어 나를 찾아왔다. 고 총장은 그 선거에 나서지 않았고, 나중에 조순 씨가 출마해 당선됐다.3년 뒤 비슷한 주제의 대화가 이어졌다.“조세형 총재 권한대행이 출마를 권유하던데요. DJ의 뜻이라는데….”“지금은 때가 된 것 같습니다.”그때는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였다. 결국 그는 출마해 민선 2기 시장이 됐다.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 탄핵 사태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을 뿐 아니라 총리와 서울시장을 두 차례씩이나 지낸, 말 그대로 ‘행정의 달인’이다. 유능함과 청렴,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인 성향도 그의 매력이다.고 전 총리와의 인연은 전북대 총장을 지낸 그의 부친 고형곤 박사(1906∼2004)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 박사는 한때 국회의원도 했지만 철학자이자 불교학자로 큰 업적을 남겼다. 고 박사 생전에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아들에게 세 가지를 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어느 파당에도 휩쓸리지 마라, 돈을 멀리해라,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겁니다. 근데 돈과 파당 문제는 잘 지키는데 술은 못 끊는 것 같습니다. 그걸 빼면 내 아들이지만 믿을 만합니다.”(고 박사)바둑도 아닌 정치에서 ‘복기’가 큰 의미는 없다. 그러나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나는 고건이란 인물에게 정치는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그는 2006년경 한때 3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하며 대선 출마를 준비했다. 당시 그를 만나 “정말 대권에 뜻이 있다면 북한 핵실험 등 이슈에 대해 명확하게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침묵을 지켰고, 지지율이 떨어지자 2007년 1월 대권 포기를 선언했다.나는 출가 인생 50여 년을 불교정화와 종단개혁이라는 필생의 목표를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은 때로 쓸개가 바싹바싹 마를 듯 힘겨웠지만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물며 나라를 경영하는 대권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다.훗날 고 전 총리는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DJ와 노무현 대통령, 호남 그룹 등에서 지지하기로 약속한 사람들이 계속 이탈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따르는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물론 그는 “아쉬웠다” “후회한다”는 식의 언급은 하지 않았다.내가 지켜본 고 전 총리는 본인이 섭섭해할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정치인이 아니다. 누구를 공격하거나, 돈을 끌어 모으거나,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엮는 것과는 체질적으로 거리가 멀다. 밥상을 차리기보다는, 차려진 밥상을 다른 이들과 골고루 나눠 맛있게 잘 먹는 스타일이다.역대 정권의 권력자와 관련해 이런저런 말이 나올 때가 있다. 누구보다 그들을 잘 아는 고 전 총리는 “이 대목은 내가 알고 있는데 잘못됐다”고 할 뿐, 흐름에 편승하는 법이 없다. 딱 거기까지다. 대선 과정에서 그를 지지한 한 분은 “고 총리는 좋은 대통령 감이지만 좋은 대통령 후보는 아니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개신교 신자인 고 전 총리는 불교계와도 인연이 각별해 1995년 연등축제의 제등행렬을 시 문화행사로 등록하고, 우정로 정비사업에도 큰 도움을 줬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개신교 등 다른 종교계에도 비슷한 형태의 지원이 가능한가를 타진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공평무사(公平無私)가 몸에 밴 행정가다. 극단적인 주장이 힘을 얻는 요즘 분위기에서 그가 설 입지는 매우 좁다. 그래서 그의 경륜이 아깝다. 언젠가 그의 부친과 나눈 술 얘기를 꺼냈더니 그는 “아, 그렇지요”라며 특유의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은사인 ‘지리산 호랑이’ 금오 스님을 회고합니다.}

    • 201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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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 “소설로, 소리로 보살행을 실천”

    ‘천지개벽이야/눈이 번쩍 뜨인다/불덩이가 솟는구나/가슴이 용솟음친다/여보게/저것 좀 보아/후끈하지 않은가.’동해가 탁 트여 있는 강원 양양 낙산사의 의상대 가는 길목에는 아담한 시비가 있다. 시조시인 조종현(1906∼1989)의 ‘의상대 해돋이’. 종현(宗玄)은 법명이고 본명은 용제다. 나중 그는 ‘태백산맥’으로 유명한 조정래 소설가의 부친으로 더 알려지게 된다. 작가의 홈페이지에는 ‘1943년 전남 승주군 선암사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일제시대 종교의 황국화 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시범적인 대처승이었음’이라고 돼 있다.나는 아들인 소설가보다는 스님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홈페이지의 표현이 틀렸다고 할 것은 없다. 그러나 너무 짧아 나의 기억을 보태고 싶다. 스님은 총무원장을 지낸 경산 스님과 가까웠다. 그래서 종단 소임을 맡고 있는 나는 스님을 만날 기회가 적지 않았다.일제강점기 상당수 스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스님은 대처승(帶妻僧)이었다.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스님의 삶은 세 갈래 길로 읽힌다. 13세에 선암사로 출가한 뒤 동국대 전신인 혜화전문학교를 나왔다. 동요 발표에 이어 1930년 동아일보에 시조 ‘그리운 정’을 발표하면서 시조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그의 시 정신은 만해 한용운, 창작 실기는 노산 이은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보성고 등에서 18년간 교단을 지키기도 했다. 스님은 처세라기보다는 세상의 순리를 잘 아는 분이었다. 대처승이지만 불교 정화(淨化)라는 큰 흐름이 맞았기에 협조했다.그는 온화한 성품으로 여러 가지에 두루 뛰어났다. 불교 선리(禪理)에 특히 밝았고 노년에는 불교 교육과 포교에 힘을 쏟았다. 대처라는 일종의 낙인이 그의 족적을 낮추어 보게 되는 이유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불심(佛心)과 시심(詩心), 교육이 따로 있지 않았으리라. 광복 뒤 잠시 선암사 부주지로 있으면서 사회개혁을 위해 사찰 전답을 소작인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던 스님은 1948년 여수·순천 10·19사건 와중에 몰매를 맞는 등 가족과 함께 수난을 겪었다. 나는 소설에 이어 영화로 만들어진 ‘태백산맥’을 보면서 이때의 기억이 소설을 잉태하는 실마리가 됐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태백산맥은 그곳 토박이도 잃어버린 사투리와 문화를 제대로 살려냈다. 그러나 빨치산은 의롭고, 경찰과 반공청년단은 그렇지 않다는 이분법적인 편향을 심어준 것은 문제라고 느낀다.1998년 조계종이 운영하는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나눔의 집의 역사관 개관을 앞두고 소설가를 만났다. 역사관 위원으로 위촉된 강만길 교수와 조정래 작가 등 4, 5명이 전시물을 검토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 자리에서 조 씨는 “일본인 관광객들도 올 테니 일왕의 항복 선언을 육성으로 들려주는 것은 자극적이다.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합리적이면서도 차분했다.종현 스님은 말년에 영화사를 가끔 찾았다. 스님은 아들 얘기가 화제에 오르면 “문재(文才)가 있다. 소설가로 주목받고 있어 다행”이라며 미소를 지었다.“내가 지금 꿈을 꾸느냐. 죽고 없는 내 딸 청이, 여기가 어디라고, 살아오다니 웬 말이냐. 내 딸이면 어디 보자. 어디 내 딸 좀 보자. 아이고, 내가 눈이 있어야, 내 딸을 보제.”그러다 심 봉사는 두 눈을 끔쩍하더니 눈을 번쩍 뜬다. 심청가의 심 봉사 눈뜨는 대목이다.나는 2003년 금산사에서 열린 국제개발구호 비정부기구(NGO)인 지구촌공생회 창립 행사를 비롯해 국악인 안숙선 씨에게 창을 청할 때는 어김없이 이 대목을 부탁했다.불가에서 눈을 뜬다는 것은 지혜를 얻는다는 것이다. 집착과 애착을 떨쳐야 얻어지는 것이 바로 지혜의 눈이다. 그것은 또한 성불이다. 그는 소리를 통해 보살행을 실천하고 있다.언젠가 그는 전통 소리하는 사람이 드물어졌다고 아쉬워했다. 수입의 3분의 1은 후학 양성을 위해 쓰려고 애쓴다고도 했다. 그에게는 친절하고 자신을 낮추는 하심(下心)이 몸에 배어 있다. 그 작은 체격에서 어찌 그리도 넉넉하고 힘 있는 소리가 나오는지, 감탄할 뿐이다.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고건 전 총리와의 인연을 얘기합니다. 스님은 “고 총리, 대권 (大權)을 잡을 기회를 놓쳤어요”라고 말합니다.}

    • 2011-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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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 ⑮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이 장관, 좀 섭섭해요.”

    “우리 정부는 국가의 정통성을 계승하며 짧은 시간에 경제발전과 자유민주주의의 신장이라는 큰 성과를 거뒀습니다. 그럼에도 교과서에는 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왜곡과 자학사관으로 가득합니다.”(송월주 스님)“스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신문과 TV만 보는 우리 방식으로는 젊은 세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른 꿈속에 있습니다. 그들 방식으로 파고 들어가 소통해야 합니다.”(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2008년 6월 19일 청와대에서 열린 건국60주년기념사업위원회 분위기는 무거웠다. 회의에는 각계 원로로 구성된 10여 명의 고문과 시도지사, 장차관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가 가라앉지 않자 이명박 대통령이 두 번째 대국민 사과를 한 날이다. 이 전 장관은 이 시위를 염두에 둔 듯 정부가 젊은 세대와의 소통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발언은 15분 이상 이어졌다. 평소 회의 관행과는 달리 긴 편이었다.내가 본 이 전 장관은 ‘언제나 청춘’이다. 말을 끊기 어려운 특유의 달변과 촌철살인의 재치, 동서양을 아우르는 해박한 지식…. 그를 수식할 수 있는 단어는 많다. 그러나 이보다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려는 젊은 마인드와 어느 순간 한 가지에 푹 빠지는 몰입 능력이다. 그래서 “이 장관은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그는 다른 사람이 돼 있다.나는 그를 교수와 문화평론가, 장관, 사회원로 등 다양한 모습으로 수십 차례 만났다. 특히 인상 깊은 모습은 1990년대 초반 노태우 대통령 시절 만난 문화부 장관 이어령이다. 당시 종단은 조계사와 봉은사 쪽으로 나뉘어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나는 사태 해결을 위해 벽암 스님과 함께 장관을 만났다. 정작 종단 분쟁에 대해서는 ‘원만히 수습되어야 한다’는 짧은 언급이 전부였다. 그 다음 이 장관의 말이 종횡무진 이어졌다.“유생(儒生)들이 젊었을 때는 통치이념으로 유교를 받아들이지만 나이가 들면 무상함을 느껴 불교의 공(空) 사상에 많이 빠집니다. 이른바 선유후불(先儒後佛)이죠.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이 사상이야말로 인류사에서 값지고 빛나는 진리입니다.”명색이 스님인 내가 한동안 그의 불교 강의를 들었다. 그는 토정 이지함 선생과 관련한 얘기도 했다. 하여간 동서양 철학과 문학 등 주제를 가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때 받은 강렬한 인상이 남아서인지 나는 1994년 총무원장을 맡고 있을 때 스님들을 위한 교육시간에 그를 강사로 초청했다. 연기론 예찬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우주만물의 생성소멸이 독립적인 게 아니라 원인과 조건에 따라 그 결과로 나타난다는 연기론을 현대식으로 풀이해 큰 박수를 받았다. 2006년 동국대에서 열린 ‘한국 인문학의 뿌리는 불교’라는 강연회를 통해 그는 “조화와 중도의 불교적 동양사상으로 인류의 정신적 문화를 이끌어 가는 것이 바로 우리 인문학의 과제이자 인류 평화공존을 위한 희망의 등불을 찾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던 그가 몇 해 전 개신교 신자가 됐다고 한다. 무신론자를 자처하던 그는 ‘이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도 냈다. 그가 개신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은 가족의 영향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원인이 있을지도 모른다.어쨌든 과거의 그를 기억하는 불교계에서는 이런 말도 나온다. “그때 (이 장관) 말은 입으로 한 얘기였나? 마음으로 한 얘기가 아닌 게지.”종교와 학문은 다를 것이다. 개신교 신자가 된 그의 변화에 대해서도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신앙의 자유가 엄연한데 그럴 생각도 없다. 다만, 불교의 가치와 미덕을 그처럼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인은 드물다. 어쩌면 내가 속으로 이 전 장관과 불교의 인연이 더 깊어지기를 바란 것일지도 모른다. 불가에 몸을 담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좀 아깝고 아쉽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16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태백산맥’의 소설가 조정래 씨와 2대에 걸친 인연과 국악인 안숙선 씨를 얘기합니다.}

    • 201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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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 ⑭ 고은 시인 “고얀 놈, 일초를 잡아라.”

    너무 괘씸했다. 그래서 종무원 몇 사람을 불러 그를 잡아오라고 했다. 그가 자주 왕래하는 잡지사 주변에서 여러 번 기다리기도 했다. 허사였다. 이쪽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좀체 잡을 수가 없었다. ‘일초(一超)가 정말 이럴 수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일초는 일초 스님, 나중 시인으로 유명해지는 고은이다. 그는 1962년 환속하자마자 절집을 비난하는 글을 싣기 시작했다. 불교가 기복(祈福)만 하고 있다, 여 시주 치마폭에 싸여 있다, 사회성이 없다 등 거친 얘기였다. 이에 나이 지긋한 스님들은 “매우 고얀 놈”이라 했고, 총무원과 선학원에서 한솥밥 먹던 스님들의 불만도 쌓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초 체포령’이 떨어진 것이다.1950년대 후반 처음 만난 일초 스님은 효봉 스님의 상좌로 나보다 두 살이 많지만 격의 없이 지냈다. 이미 서정주 시인과 가깝게 지내며 ‘폐결핵’으로 등단한 스님은 당시에도 언행에 거침이 없었다. 어느 날 내가 전진한 김두한 정일형 씨의 선거 유세를 보고 그 분위기를 전했다. 그랬더니 방 안에 누운 채 책을 보다 무언가를 긁적거리던 스님은 “화상(和尙·스님의 다른 호칭)은 정치 좋아하네”라며 빙긋이 웃었다. 스님은 일어도 능숙하고 영어 책도 보는 등 천재형이었다.“은행 나무/한 구루와/한 구루가/오직 한 임을 보고, 가는 바람에 잎이 깨이다.//어디 한 임 뿐이리요 허, 허, 히,//청담(靑潭)스님 석주(昔珠)스님/미산(彌山)스님도 깨이다 자다 하다./다 그러 하다….”일초 스님이 주필로 있던 불교신문에 쓴 시 ‘선학원에서’의 일부다. 속명이 고은태인 그는 ‘고일초’ ‘일초’ ‘고은’ 등 여러 이름으로 시를 썼다. 그때 이미 스님과 불가와의 인연이 그리 길지 못할 조짐이 보였다. 술에 얽힌 기행이 계속됐고, 찾아오는 여성도 적지 않았다. 수행자라기보다는 예술가적 자유분방함이 훨씬 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양복을 입고 나왔다. 스님은 이리저리 물어도 대꾸 없이 웃다 짐을 꾸려 떠났다. 일초 스님이 아닌 시인 고은이 된 것이다.고얀 놈 사건 뒤 2년이 지났을까. 1967년경 시인이 동국대 옆에 있던 옛 총무원 청사를 찾아왔다. 경산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있던 시기였다. 불쑥 찾아온 그는 경산 스님 앞에서 대뜸 무릎을 꿇고 참회의 뜻을 밝혔다. 이유야 어찌됐든 참회하는 이를 내치지 않고 품는 것이 불가의 모습이다.이후 그는 민주화운동과 민족문학작가회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나는 종단 개혁과 불교 자주화를 위해 노력했다. 피차 마주칠 기회는 드물어졌다. 시인이 제주 원명사에서 팔만대장경을 공부하면서 암송 뒤 종이를 씹어 삼킬 정도로 독하게 공부했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그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재판을 받을 때에는 팔만대장경을 의역하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오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 한 모임에서 시인을 다시 만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나는 환속 뒤 우리 사회의 열악한 현실에 눈을 뜨고 문학과 실천을 통해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스님은 종단 개혁에 이어 이제는 비정부기구(NGO)를 통해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대안을 찾으려고 합니다. 정말 좋은 선택을 했습니다.”1996년 내가 화갑기념논총 ‘보살사상’을 낼 때, 시인은 ‘세상의 보배’라는 축시를 통해 나를 과찬하기도 했다.노벨문학상이 대수일까. 거꾸로 이미 그는 불교계뿐 아니라 세상의 보배다. 언젠가 그는 자신의 작품들이 불교를 벗어난 적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일초에서 시인 고은까지. 어쩌면 그의 삶은 불가의 전통적 방법을 따를 수 없었던 그가 선택한 그만의 수행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⑮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의 인연을 얘기합니다. 스님은 개신교 신자가 된 이 전 장관에 대해 “불교의 공(空) 사상을 그렇게 예찬했는데…”라며 좀 섭섭해하는 눈치입니다.}

    • 201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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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 ⑬ 김종필 자민련 전 총재…“풍운과 풍류 사이에서”

    “건국과 산업화 시기를 거쳐 이제는 권력이 독점되는 대통령 중심제보다는 민주화와 지역감정 극복을 위해 내각책임제가 필요합니다. 개헌해야 합니다.”1997년 대선을 앞두고 조계종 총무원을 방문한 당시 김종필(JP) 자민련 총재는 자리에 앉자마자 특유의 소신을 피력했다. 미묘한 시점이었다.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DJ) 후보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대권을 두고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이른바 ‘DJP 연합’은 나중 일이었다. 어쨌든 이 시기 JP는 내각제 개헌을 요구하며 세를 모으고 있었다. 그때 내 답변은 이랬다. “조계종 역시 종정 중심제와 총무원장 중심제를 둘러싼 오랜 갈등 때문에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종정이 상징적 존재가 아니라 직접 권한을 행사할 때의 폐해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김 총재의 취지에 공감합니다.”JP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는 총무원 방문에 앞서 준비해 달라고 요청한 지필묵을 찾았다. 그러더니 붓을 잡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짓는다)라고 단숨에 써 내려갔다. “스님, 불교는 일체유심조입니다”라며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조금 뒤 JP를 수행했던 김용채 씨가 다시 찾아왔다. 원장 스님이 내각책임제에 찬성한다는 내용의 성명에 이름을 넣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속으로 ‘아뿔싸’ 했다. 정치제도로서의 내각책임제가 장점이 있고 개인적 판단에서 공감한다는 것과 종단 대표의 공개적 지지는 차원이 달랐다. 이런 뜻을 밝히자 김 씨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섰다.그는 5·16 군사쿠데타와 유신체제의 한 정점으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또 다른 이미지는 킹메이커이자 만년 2인자 아닐까. JP는 ‘모 아니면 도’ 식의 정면대결은 피했다. 절호의 기회 또는 위기가 닥칠 때마다 시류를 거스르기보다는 긍정적으로 인정하면서 자신의 뜻을 펼쳤다. 내 기준으로 볼 때 JP는 DJ와 김영삼(YS) 전 대통령 등 당대의 정치인들과는 좀 달랐다. 풍류(風流)? 이 표현이 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그는 박식하고 유머와 여유, 예술적 끼가 있었다. 1990년대 중반 경실련 공동대표로 한국은행 민영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4당 대표를 면담했다. 그때 JP는 “스님, 예고도 없이 이렇게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느냐”면서도 반갑게 맞이하던 기억이 난다.내가 30대 때 부여에서 그의 자취를 만난 적이 있다. 지금은 그 자리에서 철거됐지만 부여에 가면 계백장군 동상이 있었다. JP는 동상의 기록에 ‘백제의 역사를 최후로 빛낸 위대한 충신’이라고 썼다. JP는 젊은 시절 백제권의 소외감을 느꼈던 것 아닌가 싶다. 그가 부여에 오면 단골로 묵었다는 부여여관에서는 “JP가 진짜 인물이다. 그의 시대가 온다”며 JP 자랑에 여념이 없던 40대 여주인장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3김의 휘호와 이따금 보내온 글씨를 보면서 이런 평가도 내려본다. YS의 글씨는 힘이 있지만 여백이 적어 부담스러웠다, DJ는 달변만큼 달필이었다, JP는 서법을 제대로 익혔고 여유가 있어 좋았다.김동길 연세대명예교수의 말도 기억이 난다. DJ는 공부 양은 많은데 억지로 채운 듯하고, YS는 공부보다는 타고난 감에 의지했고, JP는 체계적 공부에 예술가적 몽상이 섞여 있다. 지난해 우연히 부여에 들렀다가 사라진 계백장군 동상의 흔적을 찾기도 했다. 돌아와서 지병으로 손을 제대로 못 쓰는 JP를 위로하는 난을 하나 보냈다. JP는 개신교 신자이지만 형 김종락 씨는 불교신자, 한 동생은 서울 우이동 기슭에 절을 모실 정도로 종교에 열려 있었다. 중도라면 덮어놓고 회색분자로 모는 세상이다. 극단론이 진리의 탈을 쓰고 행세한다. 중도의 지혜와 경험이 아쉬운 때다. 하루 빨리 건강을 회복했으면 한다. ‘불생불멸 불상부단(不生不滅 不常不斷), 불일불이 불래불출(不一不異 不來不出).’ 용수보살은 삶과 죽음, 영속과 단절, 같음과 다름, 오고 감 등이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른바 8가지 그릇된 견해를 부정함으로써 얻는 팔부중도(八不中道)의 경지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⑭회에서 송월주스님은 일초(一超) 라는 법명으로 출가했던 고은 시인과의 인연을 말합니다. 시쳇말로 젊은 시절 한방에서 뒹굴었던 젊은 출가자들의 속살과 고민이 보입니다.}

    • 201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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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빛과 소금으로] 서울 동선교회

    《 빚이 많아서 즐겁다? 부끄럽기는커녕 자랑스럽다. 서울 강동구 천호3동 동선교회 얘기다. 최근 만난 박재열 담임목사(62)는 2002년 ‘작은 교회 살리기 운동본부’를 설립했다. 신자가 30명 미만인 미자립 교회들이 지원 대상이다. 올해 150개 교회를 포함해 지난 10년간 900여 개의 교회를 지원했다. 지원하는 교회는 초기 15개에서 50개로, 이제는 150개까지 해가 갈수록 늘었다. 그사이 작은 교회 지원과 교회 건축으로 쌓인 빚은 50억 원에 달한다. “교회 일부에서 남 돕는 것은 나중이고 우선 내 빚부터 갚자는 의견도 있어요. 그러나 빚이 있어야 바쁘게 열심히 살아요. 빚 대신 재산이 많으면 일부 교회에서 본 것처럼 싸우느라 바쁩니다. 빚이 100억 원은 되어야 빚 좀 졌다고 하는 것 아닌가요.(웃음)”(박 목사) 이런 적지 않은 빚이 교회에서 용납되는 것은 그 스스로 ‘사랑의 빚’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작은 교회 돕기에 나서면서 지원비의 절반을 본인이 부담하겠다고 약속했다. 월급은 물론이고 부흥회와 연간 60∼70회 강연으로 받는 돈의 대부분이 지원비로 들어간다. 자신의 퇴직금 3억 원도 가불해 이미 작은 교회 돕기에 써버렸다. 》 1982년 교인 6명으로 시작한 이 교회의 출석신자는 5000여 명이다. 그는 중형 교회 담임목사이지만 25평 연립주택에 산다. 박 목사는 예장 대신 교단의 총회장을 지냈지만 작은 교회 지원은 교단과 관계없는 초교파 프로그램이다. 그래서 물었다. 굳이 담임목사나 신자들 모두 버거운 이 길을 갈 필요가 있을까? 답변은 간단했다. 교회 이름의 동선(東船)은 강동구, 즉 동쪽에 있는 신앙의 구원선을 의미한다. “그럼 작은 배보다 큰 배가 구원선으로 유리하지 않습니까.”(기자) “큰 배는 가진 것이 많아 제 역할을 못합니다. 냇물이 살아나야 강이 사는 것처럼 작은 교회가 살아야 한국 개신교 전체가 살 수 있습니다.”(박 목사) “작건 크건 교회가 너무 많다는 비판도 있습니다.”(기자) “교회는 많을지 몰라도 제 역할을 하는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박 목사) 이 본부 자료에 따르면 전국 교회는 5만여 개로 추산되는데 매년 500∼600개가 사라지고 있다. 무엇보다 신자가 30명 미만으로 존립 자체가 어려운 교회가 많아 교회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이 큰 문제다. 이 교회는 단지 돈만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매우 까다롭다.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목회자들은 훈련 서약서를 쓰게 된다. 청장년 출석 신자가 100명이 될 때까지 휴가나 해외여행 금지, 매주 3일 이상 교회에서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고 설교 준비를 할 것, 월 1회 부부가 함께 훈련 프로그램에 참석할 것…. 평가점수에 따라 월 30만 원의 지원비가 차등 지급된다. 이 교회의 활동에 영향을 받아 생긴 ‘작은 교회 살리기 연합’ 총무 이창호 목사는 “실핏줄 같은 작은 교회들이 자립해야 한국 개신교가 건강해진다”며 “작은 교회 운동이 뿌리를 내리면 일부 대형 교회에서 보이는 세습과 교회 내부 갈등 등 많은 문제가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동선교회의 또 다른 날개는 나눔 프로그램이다. 이 교회에는 일요일마다 필리핀 교회가 생긴다. 필리핀 출신 노동자와 다문화 가정 여성 30∼40명이 교회 공간을 빌려 예배를 올리고 있다. 2008년부터 이들을 대상으로 무료 예식 지원 사업을 시작해 10쌍의 결혼식을 지원했다. 은퇴 목사를 위한 프로그램도 있다. 은퇴 목회자들의 활동 공간이 없는 것도 우리 개신교회의 문제점이다. 이 교회는 은퇴 목회자들을 경제적으로 돕고 직접 전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 교회는 지역 노인 150여 명을 제주도로 효도여행을 보내고, 크리스마스 전후에는 선물 1000여 개를 준비해 주변의 이웃들과 나누고 있다. 교회에서 만난 신자 신희철 씨는 “우리 교회는 다른 곳에서 생각지도 않는 일을 하고 있다”며 “교회의 울타리를 넘은 활동이 많아 벅차기도 하지만 보람이 크다”고 말했다.▼박재열 목사의 ‘내가 배우고 싶은 목회자’ 김진호 목사▼감리교 감독회장을 지낸 김진호 목사(72)가 2008년 갑자기 교회를 찾아왔다. 그분은 교계 원로이지만 교단도 다르고 일면식도 없어 뜻밖의 방문이었다. 내가 하고 있는 미자립 교회 돕기가 정말 필요하다며 우선 감리교 내부에서도 이런 바람을 일으키고 싶다고 했다. 아들딸 같은 목회자들이 미자립 교회를 맡아 건강을 해치고 목회를 포기하는 사례가 많아 안타까웠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교단장을 지냈지만 권위 대신 어려운 후배들을 위한 헌신을 선택했다. 나이와 경력에 관계없이 한국 교회의 밀알이 되겠다는 그분의 간절한 소망이 느껴졌다. 그 뒤 그분은 ‘비전교회와 함께하기 운동본부’를 설립해 미자립 교회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목사인 남편과 사별한 ‘홀사모’ 돕기 운동도 펼치고 있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 201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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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 ⑫ 이명박 대통령… “대통령은 자기 종교 버려야”

    2008년 8월경 건국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모임이 청와대에서 열렸다. 기념사진을 찍은 뒤 박재완 청와대국정기획수석의 요청으로 별실에 갔더니 이명박 대통령(MB)이 있었다. MB는 대뜸 촛불시위를 화제에 올렸다.“광우병 촛불시위와 관련된 사람들이 조계사로 갔는데 내보낼 방법은 없습니까. (총무원장) 지관 스님의 승용차 트렁크 검사는 우발적인 것입니다. 불교계와의 갈등을 풀 방법이 있습니까.”(MB)“내가 총무원장으로 있을 때에도 노동자와 농민들이 조계사에 오래 있었습니다. 힘으로 해결하려면 부작용이 큽니다. 때가 될 때까지 두어야지 손대면 덧납니다.”(송월주 스님)MB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서 지관 스님과의 전화통화 내용도 소개했다. 지관 스님이 “(트렁크) 검사가 고의는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여기 조계사 분위기가 너무 나쁘다. 어쩔 수 없다고 했다”고 전했다. 집권 초기 촛불시위로 흔들렸던 MB의 고민이 그대로 느껴졌다.2002년 서울시장 후보였던 MB를 만난 것을 시작으로 20여 회 그를 만났다. 서울시장 재임 때에는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발언해 불교계가 벌컥 뒤집혔다. 그 무렵 한 식당에서 만나 해명을 요구하자 MB는 “행사에 뒤늦게 도착해 준비된 원고를 그대로 읽었다. 본뜻은 그게 아니었다”고 말했다.MB가 대통령 후보이던 시절에는 친형인 이상득 의원, 불교통인 주호영 의원, KBS 앵커로 이름을 날린 길종섭 씨가 내가 있는 서울 광진구 영화사를 찾아왔다. 이들은 MB에 대한 불교계의 거부감을 누그러뜨리려고 노력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불교계는 박근혜 씨가 절에 오지 않아도 대체로 호의적인 분위기다. 그러나 이 후보의 경우 불교계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노력 자체가 부족한 것 같다.”내가 본 바로는 역대 대통령 중 김대중 대통령(DJ)과 MB가 국정 현안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떤 사안이든 막힘없이 내용을 제대로 전달했다. DJ가 이상주의적 웅변으로 설득하려고 했던 반면 MB는 매우 현실적으로 접근했다. MB의 말은 길지는 않지만 나름 설득력이 있다.나는 집권 내내 MB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소통문제라고 생각한다. MB는 경제 성장이나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유치 등을 통해 국격(國格)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빈부 격차의 해소를 위한 노력은 성과가 부족했고 20, 30대 젊은 세대와의 소통에도 약점을 보였다. 어찌 보면 자신이 속하지 않은 종교와 세대, 정파(政派) 등과의 소통을 태생적으로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MB는 이전의 대통령들과 달리 정치인보다 경제인에 가깝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계산이 명확한 경제 감각과 개신교 신앙관이 아닌가 싶다. 물의를 빚은 MB의 통성기도는 유난히 복음주의적인 한국 개신교 특성과 대통령이기에 앞서 독실한 신자를 자처하는 그의 정서를 감안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가 없다. 시킨 사람이나 따른 사람 모두 딱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과 만나 예를 올리고 싶지만 나라 법을 이유로 합장만 한 것과도 비교가 된다. 대통령, 그 무겁고 외롭고 서러운 자리는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신앙을 포기하라는 게 아니라 오해가 될 만한 종교 색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야 국민이 마음을 내주고 따를 수 있지 않나. 소통과 관련해 한 모임에서 한 MB의 말이 떠오른다.“다들 소통, 소통하는데 이게 마음대로 쉽지 않습니다. 소통하려고 그렇게 애쓰고 만나자고 하는데 아예 문을 닫아버리니…. 외교 결과나 현안을 설명하려고 해도 정세균 대표도 그렇고, 박근혜 씨도 만날 수가 있어야지요.”나와 남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연기적 세계관을 담은 의상대사의 게송은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라고 했다. 그렇다.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하나이며 티끌같이 작은 속에서도 우주가 있고 낱낱의 티끌마다 우주가 들어 있다.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⑬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김종필 자민련 전 총재(JP)를 회고합니다. 대권은 못 잡았지만 글씨 하나만은 3김 씨 중 JP가 최고랍니다.}

    • 201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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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 ⑪ 노무현 전 대통령…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2003년 9월 19일 노무현 대통령이 종교계 원로를 초청한 오찬 모임이 있었다. 나와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가 참석했다. 사형제도폐지운동에 적극적인 가톨릭의 요청으로 면담이 성사됐다. 나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 공동대표 자격으로 방북했다 오찬 때문에 일정을 하루 단축하고 청와대로 향했다. 대통령은 사형폐지와 관련해 “검토하겠지만 법 감정도 있어 쉽지 않다”고 밝혔다. 사형폐지 문제보다는 오히려 사회 현안에 대한 의견 교환이 더 많았다.뜻밖에 평소 과묵한 추기경이 말문을 열었다. 추기경은 “(대통령이) 동아 조선 중앙, 보수신문도 품어야 한다.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젊은 대통령은 특히 언론에 민감했다.“권위주의는 버려야 하지만 대통령의 권위는 지켜야 합니다. 대통령이 언론을 상대로 일일이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송월주 스님)“광화문통에 큰 건물(신문) 셋이 버티고 있습니다. 비서실장이나 정무수석으로는 대번에 ‘작살’나기 때문에 (내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노 대통령)“그렇지만 비판적인 여론도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스님)“원로들 말씀이시니 잘 참고하겠습니다.”(노 대통령)노 전 대통령은 원로들에게 예의를 지키면서도 평소처럼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관례를 깨고 오찬 장소였던 2층에서 내려와 현관까지 원로들을 배웅했다. 노 전 대통령은 김대중(DJ) 전 대통령처럼 말수가 많은 편이었지만 스타일은 달랐다. 강의식인 DJ의 화법과 달리 똑 부러지고 도전적이었다. 노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은 앞에서 밝힌 1988년 서울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김영삼(YS) 통일민주당 총재를 면담할 때였다. 당시 김동영 노무현 의원 등이 배석했다. 청문회에서 이름을 알린 노 의원은 “부산 범어사에서 아버지 49재를 모셨다”며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했다. 그는 불교계의 법난 진상 규명 요구에 “불교가 그렇게 탄압 받고도 왜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느냐”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YS보다 노 의원이 자주 말했던 기억이 난다. 노 전 대통령을 다시 만난 것은 2002년 6월 속리산 법주사에서 열린 금동미륵대불 회향 대법회에서다. 민주당 대선 주자였던 노 후보를 비롯해 박근혜 이인제 정동영 정몽준 한화갑 씨 등 정치인이 대거 참석했다. 월산 스님의 방에 원로 스님 30여 명이 모였다. 큰절로 예를 올린 노 후보는 “법회에서 정말 말씀을 잘하더라”고 했더니 큰절을 다시 하기도 했다. 2009년 5월 23일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를 접했다. 사흘 뒤 열린 대통령 자문 국민원로회의에 40여 명이 참석했다. 사건 이전에 날짜를 잡았다 취소를 검토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한 참석자가 “우리 모두 노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수사 압박이 너무 강해 이런 사태가 왔다”고 주장했다. 이에 내 입장을 밝혔다.“당연히 깊은 애도를 표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자살을 살인으로 보고, 유교에서도 신체를 훼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최진실 씨 자살에 이어 이번 사태로 아까운 생명을 포기하는 풍조가 생길까봐 걱정입니다.”지금도 내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잘못이 있으면 조사를 받고, 당당하게 맞섰어야 했다. 살아서 더 할 일이 많은 분인데 너무 안타깝다.노 전 대통령은 영세를 받은 가톨릭 신자였지만 이른바 ‘냉담자’였고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는 등 불교계와 인연이 깊었다. 부인은 2002년 경남 합천 해인사를 방문해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에게 고 육영수 여사와 같은 ‘대덕화(大德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총무원장을 지낸 지관 스님과는 스님이 해인사 주지로 있을 때부터 가깝게 지냈다. 이런 인연으로 지관 스님은 묘역의 너럭바위에 새긴 ‘대통령 노무현’이란 글씨를 쓰기도 했다. 해인사 승려 300여 명이 이례적으로 하안거를 깨고 빈소를 조문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생사관은 불교적 영향을 받은 듯하다. 유서에서 언급한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라는 표현은 서산대사가 입적 전에 남긴 게송을 떠올리게 한다. ‘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삶도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도 한 조각 뜬구름이 스러짐이다) 부운자체본무실 생사거래역여시(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뜬 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나고 죽고 오고 감이 역시 그와 같다네)’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⑫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이명박 대통령(MB)과의 인연을 말합니다. 꼬이다 못해 꽈배기처럼 틀어진 불교계와 MB의 사연입니다.}

    • 201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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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 ⑩ 김대중 전 대통령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외환위기는 여야가 함께 수습해야 합니다. 정부·여당의 책임이 크지만 야당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IMF(국제통화기금)를 공격하거나 정부만 비판해서는 환란(換亂)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송월주 총무원장)“…….”(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대통령 후보)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선거를 며칠 앞둔 시기,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DJ)가 총무원을 찾았다. 그날 탁자에 있는 신문의 제목을 인용해 이 얘기를 꺼내자 DJ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나중에 “스님, 덕담이나 하시지 왜 그랬어요. 분위기가 무거웠다”고 말했다. 어쨌든 DJ는 “잘 수습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한 뒤 돌아갔다. 당시는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의 이른바 ‘DJP 연합’으로 DJ 당선이 점쳐지던 때였다. 얼마 뒤, 이 자리에 있었던 김민석 의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후보님이 원장스님의 말씀을 반영하라고 하셨다”고 전했다. 그로부터 4개월여 뒤 ‘대통령 DJ’를 만났다. 1998년 4월 서울의 한 호텔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원법회’가 열렸다. 조계종이 주관하고 불교 종단들이 연합으로 공동 주최했다. 역대 대통령 취임 뒤 불교계가 관례적으로 개최해온 자리였다. 나는 “첫 수평적인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앞으로 성공한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는 요지의 인사말을 했다.DJ와의 첫 만남은 1961년 5·16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여름 그는 전북 도의원을 지낸 이희종 씨와 함께 내가 주지로 있던 금산사를 찾았다. 눈이 유난히 빛나던 젊은 시절의 DJ였다. 그는 “강원 인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는데 세상이 바뀌어서 선서도 못했다”고 말했다. 대통령 취임 뒤 만난 자리에서 그때 이 씨랑 금산사에 오지 않았냐고 묻자 DJ는 “스님, 기억력이 대단하다”고 말했다.DJ는 같이 있으면 질문할 것이 없을 정도로 조리 있게 말했다. 숫자에 밝고 박학다식했다. 그러나 “내가 책임지겠다”는 식의 말은 거의 없었다. 명분과 합리적인 근거, 가능성 등 고려하는 게 많았다. 1988년 내가 10·27법난규명대책위원장으로 YS(김영삼 전 대통령)에 이어 DJ를 10여 일 사이 잇달아 만난 적이 있다. YS는 법난의 진상 규명 요청에 “한번 해보자”고 했지만 DJ는 “알았다.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했다.지금 조계사 경내에 있는 불교중앙박물관 건립 과정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연이 있다. DJ가 대통령 후보 시절 총무원을 방문한 뒤 불교계를 위한 공약을 서류로 전달했다. 공약에는 당내 불교단체인 연등회 이름으로 박물관 건립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대통령이 된 DJ와 만났을 때 박물관 건립이 다시 화제에 올랐다. 내가 “중앙에도 박물관이 있으면 좋겠다. 종단에서 예산의 절반을 준비하겠다”고 했더니 DJ가 “천도교 수운회관도 여러 목적으로 잘 사용되고 있다”며 지원을 약속했다. 그 뒤 총무원장이 된 정대 스님에게 “대통령 공약이 총무원 금고 안에 있다”고 알려줬더니 나중에 정대 스님이 “그 서류 덕을 톡톡히 봤다”고 말했다. 박물관이 포함된 불교역사문화기념관은 정대·지관 스님의 원력이 더해져 2005년 완공됐다.DJ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불교와도 멀지 않았다. 한 호텔에서 마주쳐 대화하다 그가 “스님, 실유불성(悉有佛性·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수 있는 품성이 있음)이죠”라고 말해 내가 “유정무정개유불성(有情無情皆有佛性)이라고 할 수도 있다”고 응수하기도 했다.‘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모름지기 발걸음 하나라도 어지럽게 가지 마라)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오늘 내가 걸어가는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DJ가 애송한 서산대사의 시다. 김구 선생도 1948년 남북협상을 위해 38선을 넘으면서 읊었던 시로, 절대 부끄럽지 않은 길을 가겠다는 강한 신념이 담겨 있다.“스님과는 이상스럽게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거리가 있다.” DJ가 측근에게 했다는 말이 기억난다. 실제 그랬다. 어쩌면 내가 종단의 위신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데다 DJ만큼 원칙을 중시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⑪회에서는 송월주 스님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회고합니다. 1988년 당시 청문회 스타였던 노무현 의원을 처음 만났던 스님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해 “왜 돌아가셨나. 돌아가실 필요 없었다”고 잘라 말합니다.}

    • 201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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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 ⑨ 김영삼 前 대통령- 대도무문(大道無門)

    1997년 말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김영삼 대통령(YS)과 독대했다. 네 차례 독대를 비롯해 20회 가깝게 만났지만 당시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민주화운동의 동지이자 최대의 정치적 라이벌인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상태였다. 금융위기로 나라가 흔들렸고 정치권 안팎에서는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경제수석비서관의 처벌을 요구했다.“관 주도로 경제성장할 때는 규모가 작아 모든 걸 파악하기 쉬웠지만 국제화된 지금은 손바닥 뒤집듯 쉽게 경제 상황을 예측할 수 있는 때가 아닙니다. …정책적 결정과 판단을 이유로 담당자를 구속해서는 안 됩니다.”(YS)“잘 수습 바랍니다.”(송월주 총무원장)“책임이 있다면 대통령인 내게 있습니다.”(YS)YS는 “얼른 (모든 것을) 인계하고 청와대를 나서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차분하지만 체념한 듯한 목소리였다. 외환위기의 실상을 축소 보고해 환란을 초래한 혐의(직무유기)로 1998년 구속 기소됐던 두 경제 관료는 YS의 말처럼 2004년 무죄가 확정됐다.YS는 인간미가 넘쳤다.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스타일이었다. 여론에 민감했고 문제가 생기면 빨리 사과했다.1995년 12월 국방부 예배 사건이 터졌다. YS가 용산 국방부 내 중앙교회 예배에 참석하자 경호팀이 인접한 원광사 불자들에 대해 경호를 이유로 출입을 통제했다. 한 달쯤 지났을까, 다시 같은 장소에서 YS가 김광일 대통령비서실장, 이양호 국방부 장관, 권영해 안기부장 등 공직자들과 예배를 봤다. 총무원으로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예배에 개신교 장병을 참여시키려고 당일 일직과 당직을 불자나 가톨릭 신자로 바꿨다는 것이다. 경호팀이 법회가 끝난 불교 신도를 못나오도록 막았다는 얘기도 들렸다. 1992년 장로 대통령의 탄생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던 불교계는 비판 여론으로 들끓었다. 며칠 뒤 이 장관이 총무원을 찾아왔다. 이 장관이 거듭 사과하기에 “지금 말씀을 문안으로 만들어 발표하라”고 말했다. 얼마 뒤 이 장관이 기자들 앞에서 그 내용을 읽으면서 사과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됐다. 그 뒤 청와대에서 열린 모임에서 YS는 “내 종교가 소중하면 남의 종교도 소중하다”는 말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YS는 세심함이 부족했다거나 주변의 실수라면 몰라도 불교를 경시한 정치인은 아니다. 그는 전통적으로 불교세가 강한 영남 출신으로 불교 민심에 예민했다. 서석재 황명수 최형우 등 불교에 밝은 측근도 많았다. 부인 손명순 씨는 1992년 서의현 총무원장 재직 당시 YS 당선 축하 법회에서 삼배를 하기도 했다.YS와의 인연은 1988년으로 거슬러간다. 나는 10·27법난진상규명위원회 대표 자격으로 혜성 스님과 서울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통일민주당 총재이던 그를 만났다. 김동영 노무현 의원 등이 그 자리에 있었다. YS는 “10만여 명이 모인 마산 유세에서 법난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진상 규명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종단을 책임지다 보면 정치권력과의 관계는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주변에서 당시 실력자이던 YS의 차남 김현철을 만나 보라는 권유도 있었다. 그러나 종단 현안을 위해 한 번 두 번 의지하다 보면 결국 자신뿐 아니라 모두를 해치게 된다.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 “무슨 소리냐. 필요하면 적법한 길을 통해 해결하면 된다”고 일축했다.빨리 청와대를 떠나고 싶다던 YS를 다시 만난 것은 2000년 무렵 그의 서화전에서였다. 그는 퇴임 뒤 의기소침해 두문불출하다 막 산에 다니기 시작했다. 유명한 ‘대도무문(大道無門)’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휘호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 말은 송나라 선승 혜개 스님이 수행의 이치를 담은 화두를 모은 책 ‘무문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뒤에 나오는 말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대도무문 천차유로(大道無門 千差有路·대도에는 문이 없으나 갈래길이 천이로다) 투득차관 건곤독보(透得此關 乾坤獨步·이 빗장을 뚫고 나가면 하늘과 땅에 홀로 걸으리).’3당 합당이나 외환위기 등을 내가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세월의 깊이가 더해진 역사의 혜안이 더 객관적이고 무섭기 때문이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⑩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김대중 전 대통령(DJ)과의 인연을 회고합니다. 1997년 대통령선거 2, 3일 전 만난 스님의 말에 DJ의 안색이 굳어졌다고 합니다.}

    • 201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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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 ⑧ 노태우 전 대통령… “인과의 짐을 내려놓아야”

    “고뇌에 찬 결단이었고, 군인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가와 불교 공부를 오래 해서 숨을 한 번 들이켜면 남산터널 나올 때까지 참을 수 있습니다.”(노태우 보안사령관)“…그렇습니까.”(송월주 총무원장)1980년, 서울에 개원하는 군 법당 행사에 참석했을 때 당시 노태우 보안사령관을 처음 만났다. 뛰어난 학승이었던 탄허 스님(1913∼1983)과 내가 “이 법당에서 나라를 지키고 불법을 지키는 재목이 배출되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법문을 했다. 행사 뒤 사석에서 노 사령관은 12·12사태에 이어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고 싶은 듯 갑자기 남산터널 얘기를 꺼냈다. 그의 인상은 부드러웠다. 엉뚱하다 싶었지만 그런가 보다 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당시는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의 권력이 세상을 옥죄고 있던 시기였다.1980년 법난과 5공의 출범, 1987년 6·29선언까지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독실한 불자로 알려진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그가 대통령 후보였던 시절이었다. 6·29선언 다음 날인 30일경 당시 서의현 총무원장이 서울 세검정 부근의 한 호텔에서 노 후보를 초청한 불교 모임을 개최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6·29선언을 언급하면서 “국민적 요청에 따라 직선제를 결심했다. 고뇌에 찬 결단이었다”고 강조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노 후보 집에 종단 간부 스님들이 초청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 스님이 “불교 신자임을 분명히 밝혀 달라”고 요청하자 노 후보는 “모든 국민의 표를 얻어야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표를 얻겠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출퇴근 때마다 차 안에서 금강경 독송 테이프를 듣는다” “스님, 천수심경을 누가 더 잘 외우는지 겨뤄 보자”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노태우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불교계와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직지사 주지와 동국대 이사장을 지낸 녹원 스님과 돈독한 관계였다. 이를 계기로 부인 김옥숙 씨의 법명을 딴 ‘만덕전(萬德殿)’이 직지사에 세워졌다. 대구 동화사 약사여래불을 조성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줬다. 당선 뒤 10원짜리 동전의 다보탑 도안에 불상을 새겨 넣어 대통령이 됐다는 말도 나돌았다. 소문은 그 도안이 대선보다 한참 전에 적용된 것이라는 한국은행의 해명에도 한동안 사그라지지 않았다. ‘고뇌에 찬 결단.’ 한동안 유행한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한꺼번에 떠올릴 수밖에 없다. 두 사람 사이의 인연도 기막히지만, 두 사람이 불교와 가진 인연도 만만치 않다.두 사람의 어머니는 무릎이 닳도록 절에 다닌 걸로 알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생가는 팔공산 파계사 아래에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파계사 신도회장까지 지낼 정도로 독실한 신도였다. 가톨릭 신자였던 전 전 대통령은 권력을 잃은 뒤 백담사로 가서 천수심경을 외우게 됐고, 노 전 대통령은 권력을 잡기 전에 달달 외웠다.요즘 노 전 대통령은 건강이 좋지 않고, 자녀들의 영향으로 개신교에 가까워졌다는 얘기도 들린다. 무엇을 믿든지 그것을 탓할 이유도, 생각도 없다. 그러나 최근 법난 31년 만에 비로소 자서전을 통해 ‘내가 불교정화를 지시했다’ ‘불교를 너무 아껴 그랬다’는 얘기를 들으니 불교인의 한 사람으로 어이가 없다. 독실했던 불교 신자의 입장에서 현대 불교사 최대의 수난을 저지른 것을 오랜 시간 마음에 담고 있었으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측은지심도 생긴다. 부처님이 세상을 떠날 때의 설법을 기록한 열반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제행무상 시생멸법(諸行無常 是生滅法·일체 모든 행위는 무상해 생멸하고), 생멸멸이 적멸위락(生滅滅已 寂滅爲樂·생멸을 넘어서면 열반의 즐거움이라).’모든 존재는 생사를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결코 동일한 상태로 머물 수 없다. 이 이치를 깨달아야 참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럴진대 무슨 비밀이 있겠는가? 건강도 회복하고 밝힐 것은 밝혀, 편안한 마음이 됐으면 한다.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⑨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개신교 장로였지만 불교계와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을 회고합니다.}

    • 201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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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템플스테이 국제화 허브로

    도시 속 템플스테이 허브 도량으로 자리 잡은 서울 양천구 목동의 대한불교 조계종 국제선센터가 개원 1주년을 앞두고 13일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한다. 선센터는 아름다운동행·인드라망생명공동체·양천구 후원으로 이날 오전 10시부터 ‘자비 나눔의 실천’ 행사를 진행한다.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인 월탄 스님의 특별 초청 법문, 이웃과 함께하는 자비 나눔 장터가 열린다.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공연팀의 전통가무 공연과 범주 스님의 달마도 시연 특별 퍼포먼스,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학생들의 다도(茶道) 시연, 인근 목동중학교 밴드부·마술부의 공연이 이어진다. 자비 나눔 장터에서는 먹거리 장터와 북 카페 ‘수다원’의 일일찻집, 불교생협의 김장 준비물 판매 행사가 열린다. 이 센터의 템플스테이에는 개원 이후 현재까지 국내외에서 2600여 명이 참가했다. 매주 토요일마다 영어 사용자를 대상으로 한 참선 지도와 강좌 등을 통해 불교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센터는 주말에 수행 공간인 금차선원(今此禪院)을 개방해 지역 주민들이 불교를 자연스럽게 접할 기회를 마련해왔다. 매주 수요일 열리는 ‘선가귀감’ 특강은 수준 높은 선에 대한 강의로 호평을 받았다. 5월에는 사찰음식 전문점 ‘발우공양 공감’을 열었다. 주지 현조 스님은 “선센터는 국내 불자는 물론이고 외국인을 대상으로 간화선과 선 문화 강좌, 템플스테이 등을 통해 한국 불교와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며 “앞으로 선센터가 도시 속 포교 거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02-2650-2214, www.seoncenter.or.kr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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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 ⑦ 전두환 前대통령… “인과의 수레바퀴 기억해야”

    “(그 일은) 아랫사람이 했고, 몰랐지만 대통령으로서 미안합니다.”(전두환 전 대통령)“개인뿐 아니라 불교 전체에 끼친 피해가 막대합니다.”(송월주 총무원장)“보안사서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이순자 씨)“무엇을 따지려고 모신 건 아닙니다만, 그건 맞지 않은 말들입니다.”(총무원장)1997년 말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종 총무원 청사. 불교식 합장으로 정중하게 인사를 나눈 뒤 1시간 남짓 진행된 대화는 10·27법난이 화제에 오르는 순간 어색함과 냉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앞서 불교계에 참혹한 피해를 끼친 1980년 10·27법난을 언급한 바 있다. 나는 당시 ‘구국영웅 전두환 장군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세 차례 거절한 뒤 23일간의 불법 구금 끝에 총무원장에서 물러났다. 당시 보안사령관으로 합동수사본부장을 겸하고 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자신이 지시했다고 밝혔지만, 최고 권력자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법난의 최종 책임자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전 전 대통령은 그해 8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데 이어 1981년 2월 간접선거를 통해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7년간의 철권통치가 이어졌다. 국가원로자문회의 등 여러 방책으로 자신의 손에 권력을 붙들어 매려 했던 권력자는 결국 5공·광주청문회를 거쳐 백담사에서 769일을 보냈다. 나는 1994년 12월 제28대 총무원장으로 복귀했다. 법난 이후 돌고 돌아 이렇게 17년 만에 마주한 것이다. 몇 차례 짧은 조우는 있었지만 제대로 된 대화는 처음이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이런 말들이 떠올랐다. 권력은 무상하다. 역사는 인과(因果)의 수레바퀴다. 한치 앞을 모르는 인간들은 그 역사 앞에서 얼마나 작고 초라한가.말 그대로 이 만남은 누구를 추궁하고 따지려고 만든 자리가 아니었다. 어느 날 조계사 주지 현근 스님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조계사에서 매주 한 차례 참회기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왜 기도만 하고 가냐”며 보자고 한 것이었다. 불교는 무상(無常)의 이치다. 기억은 생생했지만 평정심 속에서 그를 만났다.이에 앞서 10월 설악산 신흥사에서 열린 통일대불 점안 법회에서도 잠깐 만났다. 그의 축사는 자신이 물가를 잡고 경제를 살렸는데, 뒷사람이 망쳐놓고 있다는 게 요지였다. 백담사 주지로 인연을 맺은 도후 스님이 신흥사 주지여서 참석한 모양이었다. 도후 스님은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가 천수심경(千手心經)을 달달 외운다. 추울 때도 108배를 거르는 법이 없었다”며 백담사 생활을 전하기도 했다.전 전 대통령과의 악연은 제11대 대통령 취임식 때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참석하면서 시작됐다. 그때 나는 이 모습을 지켜보며 “쿠데타로 권력을 빼앗고 5·18민주화운동을 총칼로 진압했다. 이런 방식으로는 국민들 마음을 살 수 없다. 끝이 좋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급기야 그는 대통령 퇴임 뒤 여론에 밀려 1988년 대국민 사죄와 함께 재산 헌납을 약속하고 백담사행을 발표했다. 그때 절집에서는 “불교를 패가망신시켰는데 왜 하필 사찰이냐”는 반대가 비등했다. 당시 법난진상규명추진위원회 대표였던 나는 “참회하러 가는데 막지 않는 게 좋겠다. 절집서는 흉악한 짐승도, 죄인도 내쫓지 않고 받아들이는데 그런 법이 아니다”라며 만류했다. 지옥중생도 건져야 하는 불가에서 죄과가 많다고 자비심을 버려서는 안 된다. 원래 가톨릭 신자로 세례명이 베드로였던 전 전 대통령은 백담사 생활 뒤 불교 신자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물가 잡고, 경제만은 내가 잘했다는 식의 큰소리보다는 지금보다 훨씬 자신을 낮추는, 끝없는 하심(下心)을 권하고 싶다.‘욕지전생사 금생수자시(欲知前生事 今生受者是·전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받는 것이 그것이라네) 욕지래생사 금생작자시(欲知來生事 今生作者是·내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하는 일이 그것이라네).’웬만한 스님보다 경전에 밝다고 하니, 이 뜻을 잘 알리라 본다. 모든 인과는 실오라기에서 시작된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⑧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 달리 독실한 불자였지만 법난의 주모자가 됐던 노태우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회고합니다.}

    • 201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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