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식

김갑식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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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갑식 부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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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6~202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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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종정(宗正)은 법통의 상징으로 존재해야”

    “…불도저를 동원하고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스님은 더 이상 스님이 아니다. 불법(佛法)과 불도(佛道)를 이미 벗어났기 때문이다. 쇠파이프와 각목을 든 승려, 가사장삼(袈裟長衫)을 입고 헬멧을 쓴 승려들이 종권(宗權)을 놓고 시중의 깡패 같은 집단싸움을 벌인 30일 밤 조계종 사태의 현장을 고발하고….”1998년 12월 2일자 동아일보 기사의 일부다. 이른바 ‘1998년 종단 사태’는 나를 포함한 종단 구성원 모두의 부끄러운 과거다. 이후 십수 년이 지났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했다. 내가 잘했다는 게 아니라 종단의 미래를 위해 과거의 상처를 언급한다.그해 11월 예정된 총무원장 선거가 다가오면서 나의 3선(選) 여부가 논란이 됐다. 그러나 3선 논란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고, 이면에는 수십 년간 종단 분규의 원인이 됐던 종정 중심제와 총무원장 중심제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한마디로 종단 운영의 권한과 책임을 누가 갖느냐의 문제다. 돌이켜보면 이미 분규의 조짐이 보였다. 1995년 말 당시 종정인 월하 스님이 멸빈(승가에서 영원히 추방) 상태에 있던 사제(師弟)의 사면 복권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분규가 계속되고 있고 개혁종단의 분위기를 감안할 때 당분간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월하 스님은 1997년 다시 멸빈자의 사면복권 추진과 종정 중심제로의 종헌종법 개정을 요구하지만 나는 거부했다. 이에 월하 스님이 종정 사임서를 원로회의에 제출하자 종단이 발칵 뒤집혔다. 그래서 나와 원로회의 의장인 혜암 스님이 급히 종정 스님이 주석하던 통도사로 내려갔다. 3배(三拜)로 예를 올린 뒤 사임서 철회를 간곡하게 요청했지만 월하 스님은 “종정 자리가 시위소찬(尸位素餐)”이라며 거절했다. 이 말은 시동의 공짜 밥이란 뜻으로 하는 일 없이 국가의 녹을 축내는 것을 의미한다. 밖으로 나온 혜암 스님은 “이렇게까지 설득하는데 같은 말만 하신다. 이제부터 종정으로 모실 수 없다”며 화를 냈다.원로회의는 종정 사임을 임기가 끝날 때까지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의하고 월하 스님은 직무수행을 거부했다. 그 탓에 1998년 초파일은 종정의 봉축 법어 없이 진행했다.오랜 인연을 맺은 종정 스님과의 관계가 불편해진 것은 예상 밖이었다. 1970년대 말 월하 스님과 나는 개운사 측 편에서 총무원장 중심제를 함께 지지했다.내가 총무원장에 다시 출마한 것은 개혁종단의 성과를 유지 발전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4년의 임기 동안 제도 개혁과 깨달음의 사회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지속적으로 처리해야 할 개혁 과제가 많았다. 1994년 바뀐 종헌은 총무원장 임기에 관해 1차에 한해 중임(重任)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당시 법조계에 폭넓은 자문을 한 끝에 나는 1980년 10·27법난으로 강제로 물러난 데다, 1994년 이전 상황이기 때문에 제한 규정이 해당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반대 측에서는 최초 종헌 시행 이후 전 기간을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해 9월 말 실천불교전국승가회 등 14개 단체가 연합해 ‘총무원장 3선 출마 반대를 위한 범불교도연대회의’를 발족했고, 10월에는 종단 중진들을 중심으로 나를 지지하는 추대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그동안 종무를 거부하던 월하 스님이 “총무원장의 3선 부당, 종헌종법 개정, 모든 종도는 제2의 정화불사라는 마음으로 종단을 바로잡기 바란다”는 종정 교시를 발표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흐를 때 통도사를 찾아 월하 스님의 측근과 대화를 나눴다. “멸빈자 구제와 종정 중심제에 동의해 달라. 그러면 (송월주 스님의) 총무원장 연임을 지지하겠다.”(월하 스님 측)“총무원장 중심제는 역사적 요청이다. 제대로 한 번 시행했는데 바꾸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보완해야 한다.”(월주 스님)결국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종정 중심제의 폐해는 종단사에서 충분히 드러났다. 종정은 종단의 법통을 계승하는 권위의 상징이다. 만약 종정이 종단 행정에 나서면 법률 소송까지 종정 이름으로 하고 잘잘못의 대상이 되는 등 권위의 손상이 불가피하다. 종정 중심제는 개혁종단의 화두인 ‘개혁’과 맞지 않았다. 물레방아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었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우여곡절 끝에 총무원장 후보에서 사퇴합니다.}

    • 201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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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총무원장의 일거수일투족은 중천금(重千金)”

    14년 만에 총무원장에 복귀했다. 감회가 새로웠다. 법난으로 한 차례 좌절했지만 나는 이미 종단 개혁을 위한 청사진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서의현 총무원장 체제를 무너뜨리고 사태를 수습한 개혁회의의 개혁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당시를 종단사(史)에서는 개혁종단으로 부른다. 개혁회의는 정법종단의 구현, 불교 자주화 실현, 종단 운영 민주화, 청정교단의 구현, 불교의 사회 역할 확대라는 5대 지표를 설정했다. 총무원장 선출 권한을 가진 중앙종회 의원이 과거 50명 수준에서 300여 명으로 늘어난 것은 의미가 있다. 의현 스님 때는 종회 의원 수가 적어 특정인에 의해 쉽게 장악됐기 때문이다. 총무원장과 종회 의원 등 주요 직책은 겸직을 금지해 절대적 권력이 생길 가능성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불교의 체계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총무원과 교육원, 포교원의 역할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전문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원산 스님이 교육원장, 정락 스님이 포교원장을 맡게 됐다. 과거 출가한 이후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스님이 되던 관행을 바꿔 지속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는 틀을 마련했다. 교육원은 승가고시 제도를 통해 일정 자격을 갖춘 승려에게만 법계를 주도록 했다. 재임 중 승적을 정비한 스님만 3000명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개혁불사와 총무원장 선거 과정에서 생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조치도 단행했다. 선거에서 월탄 스님을 지지했던 정휴 스님과 현근 스님을 각각 불교신문 사장과 종단 본산인 조계사 주지로 임명했다. 종단은 오랜 분규로 만신창이 상태였고 제도적으로 정비할 것도 많았다. 승가교육 체계의 정비, 교육원과 포교원의 별원 정착, 사찰운영위원회와 중앙신도회 구성, 교구종회와 산중총회, 사설 사암 및 법인의 관리 등 3년간 45개의 종령법을 개정했다. 개혁 이전에는 총무원장이 본사와 말사 주지를 임명해 총무원장에게 지나치게 힘이 집중됐다. 그랬던 것을 본사 주지는 소속 스님들이 추천해 총무원장이 임명하고, 말사 주지는 본사 주지가 임명하도록 했다. 최근 서울 강남구 봉은사를 둘러싼 논란이 불거졌지만 총무원 직영사찰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직영사찰을 확대해 중앙 종무기관들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재정을 확보하는 것은 역대 총무원장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개혁종단이 힘을 집중한 것은 ‘깨달음의 사회화’다. 불교가 산중에만 머물러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나의 오랜 신조였다. 이는 불교의 현대화와 사회화, 복지 지원 등과 맞물려 있다. 1995년부터 범종단 차원에서 ‘깨사(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펼쳤다. 여기에는 불교가 분규에 휩싸여 본연의 사명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해 국민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자기반성이 깔려 있다. 사찰의 사회 참여 일환인 ‘자비의 탁발 운동’, 의식 계몽 운동인 ‘초발심으로’ 등 캠페인을 펼쳤다. 1995년 2월 사회복지재단과 96년 4월 사회복지법인 승가원을 설립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복지사업의 틀을 마련했다.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보금자리인 ‘나눔의 집’도 세웠다. 조계종 사회복지재단에 따르면 1995년 118개였던 불교계 복지시설이 2003년 469개로 4배 가까이로 늘어나는 급성장세를 보였다. 종단과 정부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것도 큰 과제였다. 총무원장 취임 뒤 청와대에서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정부 실세들을 만났다. 의현 스님 체제를 지지했던 일부 측근들이 “월주 스님이 총무원장이 될 줄 예측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협조할 것은 협조하겠다”며 “투명하고 정정당당한 것이 대정부 관계의 원칙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50년 가깝게 종무를 담당한 내 경험에 비출 때 총무원장은 종단 전체를 보듬으면서 책임져야 하는 자리다. 특정 그룹의 이해를 대변해 정치투쟁을 벌인다면 그것은 정당이나 할 일이다. 종교인, 종교단체는 나라 전체의 안정을 위해서는 때로 물러설 줄도 아는 대승(大乘)의 지혜를 가져야 한다. 종권을 지키기 위해 권력과 유착하거나 목소리 큰 쪽에 끌려다닌다면 총무원장 자격이 없다. 총무원장의 일거수일투족은 중천금(重千金)이다. 자신의 이익과 대중적인 인기에 영합해 종단의 운명이야 어찌됐든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이들과 달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총무원 청사가 화염에 휩싸이는 등 치열했던 ‘98년 종단사태’의 현장에 있게됩니다.}

    • 2011-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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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빛과 소금으로]남서울은혜교회

    “하나님, 제발 제가 세상을 떠나기 전 아이를 먼저 보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1988년 그는 한 신자의 기도를 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어떻게 아이가 먼저 죽기를 부모가 바랄 수 있을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기도했다. 장애아를 둔 부모들의 피눈물 나는 기도가 반드시 끝나도록 해달라고. 고 옥한흠 하용조 목사,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원로목사)와 함께 한국 복음주의를 이끄는 네 수레바퀴로 불려온 홍정길 목사(69·남서울은혜교회) 얘기다. 올해 말 담임목사에서 물러나는 그를 13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밀알학교에서 만났다. 1997년 자폐아를 위한 이 학교의 개교는 그 기도의 첫 응답이었다. 1975년 서울 반포에 남서울교회를 개척한 홍 목사는 강남을 기반으로 이른바 ‘잘나가는’ 목회자였다. 교회 개척 20년 만에 그는 밀알학교에 전념하기 위해 첫 둥지였던 남서울교회를 떠난다. “교회 개척은 그래도 힘 있는 사람이 해야죠. 교회는 소유하지 않아야 건강합니다.” 그래서 이 학교는 교회에 속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리저리 둘러봐도 교회를 찾기가 어렵다. 별도의 예배당 없이 주일(일요일) 예배는 평소 체육관으로 쓰이는 2400석 규모의 그레이스홀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6000여 명의 출석 신자 중 600여 명이 장애가 있는 신자다. 예배는 수화로 통역하며 예배 중 자폐아들이 나와 뛰고 뒹굴기도 한다. 분위기가 경건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교회를 떠난 신자들도 있지만 이제 이런 예배 광경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됐다. 학교는 지역 주민들에게 문화공간으로도 개방된다. 갤러리와 공연장, 카페가 들어서 있다. 홍 목사에게 밀알학교는 새로운 목회 인생을 안겨줬다. 학교가 우여곡절 끝에 개교한 것은 큰 축복이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매일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졸업해 집으로 복귀하면 ‘원위치’ 된다는 게 고민이었다. 그가 발견한 열쇠는 일과 돈이었다. “아이들이 일한 대가로 푼돈을 받아 들더니 눈빛이 달라지더군요.(웃음) 아이들은 점점 자주 웃고 건강해지면서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찾아갔습니다.” 장애인의 자립을 위해서는 교육뿐 아니라 일이, 여기서 만들어진 상품을 판매할 방법이 필요했다. 재단이 위탁 운영하는 강남구 직업재활센터에서는 90여 명이 빵과 비누 등을 만들고 있다. 송파구 마천동에는 기증 받은 물품을 장애인들이 손질해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함께 하는 재단-굿 윌 스토어’가 최근 들어섰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고동락하는 그룹 홈의 활성화도 준비하고 있다. 최근 개신교 상황이 화제에 오르자 그는 심각한 표정이 됐다. “1970, 80년대 기적 같은 부흥기를 경험한 교계 선배의 한 사람으로 후배들에게 좋은 교회와 전통을 물려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연못이 흐려도 맑은 물이 솟는 작은 샘구멍 하나만 있으면 연못은 맑아집니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한국교회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아요…한밤중 통화하며 함께 걱정했었는데…” ▼To. 보고싶은 옥한흠-하용조 목사님From 홍정길 한국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을 맞게 됩니다. 어느 날 정말 보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을 찾아보려고 지금껏 쌓아둔 사진을 꺼내 봤습니다. 평생 찍은 사진들이니 족히 수천 장은 넘었습니다. 그러나 참 많이 그리운 옥한흠 목사님, 하용조 목사님의 사진은 그중에서 20여 장도 되지 않았습니다. 굳이 사진을 찍지 않아도 될 만큼 가까운 사이였고, 그래서 서로 엽서 한 장 나눈 적이 없었습니다. 보고 싶을 때면 만났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면 한밤중이라도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옥한흠 형님, 당신이 우리를 떠난 지 벌써 1년 6개월이 됐습니다. 목사님 계시지 않는 자리가 너무 커 아직도 한쪽이 비어 있는 것 같습니다. 1968년 총회 신학교에서 처음 만난 후 같이 보낸 40여 년의 세월은 제 생애 정말 큰 축복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5개월 전, 하용조 목사님마저 떠났습니다. 그를 향한 많은 사람의 애도는 우리에게 적게나마 위안이 됐습니다. 교회에 줄곧 비판적이던 언론마저 그의 삶을 따뜻하게 다뤄주는 것을 보고 진실한 것은 누구에게나 소중히 여겨지는 것 같아 기뻤습니다. 두 분이 이 땅에 계셨던 것이 많은 사람에게 축복이었습니다. 이 땅의 삶과 그 속에서 행한 일들, 또 떠남마저 축복이라면 그 인생이야말로 복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 목사님의 후임 문제로 이동원 목사님과 온누리교회 장로님들의 금식기도회와 회의에 참석하며 함께 기도했던 시간은 참으로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교회의 후임 선정이 축제로 끝나고 한국교회의 귀감이 된 것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두 분께 글을 쓰다 보니 정말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찾아갈 터이니 기쁨의 해후를 기다려 주십시오.}

    • 201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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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종단개혁을 이끈 사람들

    1994년은 종단사(史)에서 기념비적 해였다. 1962년 정화운동의 와중에 통합종단이 출범한 뒤 처음으로 자생적인 힘에 의한 종단 개혁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종단 내부 개혁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권력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려는 몸부림이었다. 지하 지선 청화 도법 학담 현응 지홍 영담 시현 정우 수경 스님…. 1980년 법난 이후 종단을 쥐고 흔들던 서의현 총무원장 체제를 무너뜨린 것은 소장 개혁그룹이었다. 당시 개혁을 주도했던 그룹은 현재까지 중책을 맡아 종단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종단의 수행 풍토가 흐려진 것은 정화운동의 부작용도 깔려 있다. 정화운동은 비구 300여 명이 7000여 명의 대처승에 맞서는 싸움이었다. 한마디로 당시에는 스님 되기가 너무 쉬웠다. 수행할 자질이 없는 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과 수행도 하지 않은 채 가사장삼을 입었다. 정화운동 시점부터 수만 명이 출가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절반 이상 환속한 것으로 여겨진다. 종단도 이들을 위한 경제 문화적 복지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사찰의 관할을 둘러싼 내부 분규가 있을 때면 생존권 차원의 극렬한 폭력사태로 치달은 이유의 하나다. 그러나 1994년의 종단개혁을 주도한 그룹은 달랐다. 종단 안팎에 많은 문제점이 있었지만, 개혁의지가 강하고 사회에서 체계적 교육을 받은 눈 밝은 이들이 속속 출가했기 때문이다. 1986년 9월 해인사에서 열린 승려대회는 이 같은 새 흐름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5공 치하였지만 사회민주화 흐름과 맞물려 스님 2000여 명이 참여해 불교자주화와 사회민주화를 천명했다. 이에 앞서 6월에는 지선 청화 진관 법성 스님 등 221명이 발기인으로 참가한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가 출범했다. 1988년 대승불교승가회에 이어 1992년에는 실천불교전국승가회가 잇따라 창립됐다. 청화 지선 효림 스님 등이 참여한 실천불교전국승가회는 이후 종단개혁과 개혁회의 구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1990년 11월 발족한 선우도량은 이 단체들과 달리 승풍(僧風) 진작과 바람직한 수행자 상 확립 등 승가결사체를 표방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결사(結社)라는 한국 불교의 전통을 재해석해 승가운동으로 이끌어냈다. 도법 수경 현봉 혜담 현응 학담 스님 등 수좌 출신들과 개혁적 스님들이 주축이 됐다. 이들은 수련결사를 통해 행자교육부터 깨달음, 청규, 수행론, 간화선, 종헌종법 등 불교의 전반적인 대안마련에 주력했다. 이처럼 종단 개혁의 힘은 한순간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지하 스님은 선방과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공부했다. 스님은 부드럽고 학구적인 성격에 행정력이 뛰어났고 1994년 출범한 개혁종단에서 설정 스님에 이어 종회의장을 맡았다. 선 수행과 경(經)에 밝은 학담 스님은 종헌종법 개정과 제정 과정에서 공이 많았다. 글 솜씨가 뛰어나 당시 성명서를 발표할 때 작업을 많이 했다. 서옹 스님의 상좌인 지선 스님은 1980년대부터 민중불교운동에 뛰어들었고 사회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실제 선교(禪敎)에 두루 밝고, 자신의 논리에 대해 이론적 정리가 확실히 돼 있었다. 청화 스님은 민족자주통일에 관심이 많아 문익환, 계훈제 씨 그룹과 무척 가까웠다. 도법 스님은 알려진 대로 내 상좌다. 수행에 대한 의지와 집념이 출가 초기나 지금이나 한결 같이 강하다. 겉으로 부드럽지만 의지는 무쇠처럼 단단하다는 것이 수십 년간 그를 지켜본 내 판단이다. 명진 스님에 관해서는 조계사에서 열린 개혁회의 출범식이 기억이 난다. 내가 스님 2000여 명이 참석한 행사에서 선언문을 낭독했다. 행사 중 명진 스님이 가사를 벗더니 갑자기 개혁이 안 되면 종단을 떠나겠다고 했다. 이미 의현 스님이 사퇴한 데다 개혁의 흐름이 도도한 상태였기에 난데없는 행동이라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불교환경운동을 이끌다 은둔에 들어간 수경 스님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아까운 수행자다. 수행력도 있고 귀도 열려 있는 합리적인 스타일이다. 환경운동을 하면서 3보1배로 무릎이 모두 닳아버렸다. 몸을 잘 추슬러 종단 발전을 위해 역할을 해 주기 바란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1994년 출범한 개혁종단의 여러 조치와 그 안팎의 사연을 말합니다.}

    • 201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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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불교의 대표적 선지식, 조계종 13대 종정에 진제 스님

    “대지여우인막측(大智如愚人莫測)이요 수래방거역비구(收來放去亦非拘)로다.”(큰 지혜를 가진 이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헤아리지 못함이요 진리를 거두고 놓는 데 또한 걸림이 없음이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3대 종정으로 추대된 진제 스님은 14일 미리 준비한 자료를 통해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는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치관이 전도되어 지구상의 질서가 허물어지고 점점 혼탁해 가고 있다”며 “정신 수행을 통해 모든 이들이 대자유와 밝은 지혜를 얻기 바란다”고 밝혔다.당초 종정 추대를 앞두고 쌍계사 조실인 고산 스님과 원로회의 의장인 종산 스님도 후보로 거론됐으나 추대위원회에서는 진제 스님이 단독으로 추대됐다. 추대위원회는 20여 분 만에 만장일치로 끝났다. 대표적인 선지식(善知識·수행자들의 스승)으로 불리는 스님의 출가 스토리는 유명하다. 1953년 경남 남해 출신의 스무 살 청년은 친척과 함께 가까운 암자를 찾았다. 종정을 지낸 석우 스님이 있던 해관암이었다. 스님은 이 청년의 자질이 뛰어난 것을 보고 “한번 ‘중놀이’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청년이 다시 “중놀이를 하면 어떠한 좋은 점들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스님은 “범부가 위대한 부처가 되는 법이 있다”고 말했다. 이 대화를 인연으로 출가한 청년은 50여 년 뒤 종단 최고 어른인 종정에 추대됐다. 1967년 당대의 선지식인 향곡 스님의 법을 이어 받은 진제 스님이 평생 심혈을 기울인 것은 참선의 즐거움을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었다. 1971년 부산에 해운정사를 창건한 뒤 선원을 개설해 선의 대중화, 생활화를 위해 노력했다.1994년 대구 동화사 조실로 추대된 이후 해마다 안거 때마다 전국 수좌들과 재가 수행자들의 참선 수행을 지도하며 공부를 점검했다. 이후 선학원 중앙선원 조실, 봉암사 태고선원 조실 등을 지냈고 현재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 등을 맡고 있다.진제 스님은 1998년, 2000년 백양사 ‘1, 2차 무차선대법회’에서 법주로 초청되어 서옹 스님과 함께 대회를 지도했고, 2002년에는 부산 해운정사에서 중국, 일본의 선지식들을 초청해 국제무차선대법회를 개최하는 등 선의 국제화에 힘써 왔다. 최근에는 미국 뉴욕의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간화선(看話禪)의 세계화를 위한 법회를 열었다.진제 스님은 종정 추대를 수락하면서 “부덕한 산승(山僧)을 종정에 추대해 고맙다”며 “앞으로 동양정신문화의 정수인 간화선을 널리 전파하는 데 노력하겠다”며 선에 깊은 관심을 표시했다. 종정은 계(戒)를 주는 전계대화상 위촉권을 가지며 포상, 징계의 사면, 경감, 복권을 행할 수 있다. 종단 비상시에 원로회의 재적 3분의 2 이상의 제청으로 중앙종회를 해산할 수 있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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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14년 만의 총무원장 복귀

    1994년 3월 26일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이하 범종추) 소속 스님 300여 명이 총무원장 의현 스님의 3선 반대와 종단 개혁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스님들은 물론이고 재가불자들 사이에서도 항의 농성이 이어지자 의현 스님이 경찰 경비를 요청하면서 총무원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사흘 뒤인 3월 29일 새벽, 괴청년 수백 명이 조계사에 난입해 스님들을 폭행하며 해산시키려고 했다. 스님들이 완강히 버티자 이번에는 경찰 1600여 명이 투입돼 법당의 스님들을 내쫓았다. 30일 새벽 경찰은 다시 조계사 경내에서 농성하던 스님 470여 명을 강제 해산 연행했다. 의현 스님의 3선에 대한 의지는 강했다. 이날 오전 경찰의 비호 속에 열린 임시종회에서 거수 표결을 통해 의현 스님은 다시 총무원장에 선출됐다. 이에 범종추는 정부의 경찰 투입을 ‘제2의 법난’으로 규정하고 정부의 공식 사과, 총무원장 선출 무효, 의현 스님의 즉각 사퇴를 요구했다. 의현 스님은 3선 연임을 기정사실화하려고 했지만 사태는 다르게 흘러갔다. “총무원이 조계사 부근 호텔에 조직폭력배들을 집결시켜 기습작전을 준비했다. 서울 종로경찰서도 당시 폭력배들의 호텔 숙박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들이 묵은 청진동 호텔의 숙박비 490만 원은 총무원 소속의 스님이 결제하기로 했다.” 일간지들이 총무원이 조직폭력배를 동원한 사실을 폭로하자 불교계는 물론이고 국민들 사이에서 공분이 일어났다. 4월 5일 서울 대각사에서 혜암 스님 등 원로 11명이 총무원장 사퇴와 전국승려대회 소집을 결의했다. 의현 스님은 원로들의 결의와 승려대회 개최를 금지하라는 종정 서암 스님의 교시로 맞섰다. 10일에는 조계사에서 2500여 명이 참여하는 전국승려대회가 열려 종정 불신임과 총무원장의 멸빈(승가에서 영원히 추방), 개혁회의의 출범을 결의했다. 양측의 대립이 격화될 무렵 범종추에 속한 스님들이 찾아와 협조를 구했다. “바깥 작업(정치권)을 해 주십시오. 지선 스님은 민주당 위주로만 문제를 풀려고 하고… 싸움도 싸움이지만 정치권의 입장도 바꿔야 하는데 그게 어렵습니다.” 나는 “정권의 개입도 큰 문제이지만 핵심은 종단 개혁입니다. 교권 수호로 가야지, 정권투쟁으로 변질돼서는 안 됩니다”라고 응답했다. 며칠 뒤 영화사가 지역구에 있어 인연이 있는 김도현 당시 문화체육부 차관이 찾아와 사태 수습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나는 ‘무조건 경찰 병력을 철수시켜야 한다, 정부는 사태에 개입해선 안 된다, 종단 내부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차관은 정부 내에 최형우 내무부 장관 등 의현 스님과 가까운 인사가 많다는 어려움을 얘기하며 YS(김영삼 전 대통령)를 설득하겠다고 말했다. 4월 12일 김 차관이 개혁회의 지도부와 의견을 나눴다. 13일 오전 1시 경찰이 총무원 청사를 떠난 뒤 오전 6시 의현 스님이 사퇴했다. 권력의 비호가 없는 의현 스님 체제는 이미 빈껍데기였다. 18일 임시종회가 열려 총무원장 불신임과 개혁회의 법 제정, 종회 해산 등을 결의해 개혁회의의 합법적 탄생을 종헌종법으로 뒷받침했다. 이후 개혁을 위한 후속 조치들이 차례로 이어졌지만 YS 정부와의 관계는 소원했다. 종단과 정부의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다 7월 YS는 새 종정으로 추대된 월하 스님, 총무원장 탄성 스님을 초청해 유감을 표명했다. 1994년 종단 사태로 60명이 징계됐고, 의현 스님 등 9명이 멸빈됐다. 그해 11월 총무원장 선거를 1개월여 앞둔 시점에 지하 스님이 찾아왔다. 스님은 지선 청화 도법 학담 현응 스님 등 개혁을 이끌었던 그룹에서 나의 총무원장 출마를 지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큰 뜻이 없었기에 이유를 물었다. 지하 스님은 ‘개혁적이다, 행정력이 있다, 법난 때 탄압을 받았다’는 세 가지를 크게 꼽았다. 총무원장 선거에는 공교롭게도 사제 월탄 스님도 출마해 사형사제 간의 대결이 됐다. 11월 21일 나는 총무원장에 당선됐고 23일 원로회의 인준을 받아 제28대 총무원장에 취임했다. 1980년 10·27법난으로 쫓겨난 뒤 14년 만이었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본격적으로 종단 개혁에 나섭니다. 우선, 조계종의 ‘1994년 체제’ 중 종단사(史)를 함께 새로 쓴 스님들을 이야기합니다.}

    • 201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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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계종 새 종정 진제 스님 추대

    대구 동화사 조실인 진제(眞際·77·사진) 스님이 14일 대한불교 조계종의 최고 어른인 제13대 종정(宗正)에 추대됐다. 조계종 종정추대위원회는 이날 오후 한국불교역사문화회관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진제 스님이 단독 추천돼 만장일치로 추대했다고 밝혔다. 진제 스님은 1934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1953년 해인사에서 석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1958년 같은 사찰에서 혜운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1967년 향곡 스님으로부터 법을 인가받아 경허-혜월-운봉-향곡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이었다. 당대를 대표하는 선지식(善知識·수행자들의 스승)으로서 인천 용화선원의 송담 스님과 함께 ‘남진제 북송담’으로 불리고 있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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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정교(政敎)유착의 폐해

    정치와 종교, 정교(政敎)의 분리는 나의 소신이다. 서로가 넘어서는 안 될 선(線)이 있다. 정치가 종교를 표를 모으는 수단으로 보거나 종교가 권력을 종권(宗權) 획득에 이용하면 양자 모두 불행한 결과를 맞을 수밖에 없다. 1980년대 들어 종단의 정치권 유착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1987년 총무원장 의현 스님은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고뇌에 찬 충정의 구국 의지’라며 지지했다. 6·29 선언에 이어 대통령선거가 다가오자 이번에는 ‘불자 대통령’ 운운하며 노태우 후보를 지원했다. 그러다 1992년 대선에서는 정주영 후보를 밀다가 다시 YS(김영삼 전 대통령) 쪽으로 돌아섰다. 불교계를 대표하는 수장이 선거 때마다 스스로 정치적인 중립성을 훼손하자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그럼에도 스님은 1962년 통합 종단 출범 이후 처음으로 4년의 총무원장 임기를 마친 데 이어 1990년 8월 재임에 성공했다. 내가 아는 의현 스님은 실익 없는 싸움을 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대체로 권력을 움켜쥐는 쪽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종권을 지키는 밑거름으로 삼았다. 자금을 만드는 수완도 뛰어났다. 5공 말기 총무원장에 선출된 의현 스님은 당시 집권층의 다수를 이루던 대구 경북(TK)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 은둔할 때는 여러 차례 방문해 의리를 과시하기도 했다. 1980년 법난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스님이 종회 의장과 총무원장을 거치면서 생긴 힘과 정치권력의 지원을 앞세워 종단을 장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봉은사 사태와 종단 안팎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3선에까지 도전하는 서의현 체제의 비결이다. 1987, 88년 봉은사 사태를 겪은 종단은 1991년 종정 추대를 둘러싸고 다시 양분됐다. 성철 스님의 종정 재추대가 원인이 됐다. 그해 8월 원로회의는 성철 스님 재추대를 결정하지만 월산 스님을 지지하는 세력이 반발하고 나섰다. 월산 스님 쪽은 통도사에서 승려대회를 개최한 뒤 서울 강남에 따로 총무원을 개원했다. 법정 공방 끝에 강남 총무원이 강북에 흡수되는 것으로 마무리됐지만 종단사에서 또 하나의 오점이었다. 월산 스님은 나의 사형이고, 스님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혜정 스님은 고향 친구이자 둘도 없는 도반이었다. 혜정 스님이 어느 날 찾아와 월산 스님을 지지할 것을 권유했지만 거절했다. 월산 스님 측은 종정중심제를 지지했고, 나는 오래전부터 그 폐해를 지적하며 총무원장 중심제를 고수해왔다. 같은 문중에 인간적 관계까지 감안하면 미안한 일이지만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의 문제였다. 1994년 들어 종단은 다시 난기류에 휩싸였다. 의현 스님이 3선 도전에 나선 가운데 상무대 비리가 터졌다. 종단의 젊은 스님들은 조기현 전국신도회장이 상무대 이전 공사를 맡은 대가로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의현 스님에게 80억 원이 전달됐다며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법난 이후 십수 년 종단을 장악해온 의현 스님은 퇴진 요구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개혁에 대한 종단 내부의 열망은 이제 힘으로 억누를 수 없는 것이었다. 그해 2월 석림동문회, 선우도량, 중앙승가대 동문회, 동국대 동림동문회, 실천불교전국승가회 등 8개 승가 단체가 의현 스님의 3선 저지와 종단 개혁에 뜻을 모아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범종추)’를 출범시켰다. 종단 개혁 요구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범종추 스님 300여 명이 조계사에서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고, 재가불자들의 항의 집회와 단식이 이어졌다. 조계사의 1994년은 이전과 달랐다. 과거 종권을 둘러싼 몇몇 스님과 문중을 중심으로 벌어진 갈등이 아니었다. 이들의 요구는 부패한 종단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이었다. 따라서 종권을 나누는 타협이나 미봉책은 해법이 될 수 없었다. 10·27 법난으로 짓밟혔던 조계사의 봄이 14년 만에 다시 찾아왔다. 그것은 권력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임이 곧 드러난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의현 스님의 퇴진에 이어 선거를 통해 총무원장으로 복귀합니다. 1980년 법난 이후 14년 만입니다.}

    • 201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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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종단개혁 전야(前夜)- 봉은사에 무슨 허물이 있으랴

    1980년 4월 출범한 제17대 총무원은 불교 자주화와 종단 개혁을 추진했지만 총칼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공작에 무너졌다. 그해 10·27 법난(法難) 이후 조계종은 한마디로 혼돈의 상태가 계속됐다. 나는 23일간의 조사 끝에 2년간 공직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보안사에서 풀려난 뒤 1982년 11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85년 11월까지 3년 간 미주와 유럽, 인도, 동남아 불교 국가를 순례하며 포교를 도왔다. JP(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법난 이후 종단 수뇌부와 정권의 유착은 더욱 심각해졌다. 종권(宗權)을 잡으려는 세력은 전두환-노태우-YS(김영삼 전 대통령)로 이어진 권력의 핵심부에 줄을 대기 바빴다. 또 하나, 종단 내부의 갈등은 이전보다 훨씬 복잡하고 치열해졌다. 정화운동 시기에는 비구와 대처승의 대립이 분쟁의 주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1970년 태고종 창종으로 대처 측이 통합종단에서 떨어져 나간 뒤에는 집안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종정과 총무원장 역할에 대한 구분이 모호한 것도 원인을 제공했다. 스승과 출가 문중을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는 불교계 풍토도 이 싸움을 부채질했다. 나의 사형인 탄성 스님이 법난 뒤 총무원장 권한대행을 맡은 이후 1986년 의현 총무원장이 들어설 때까지 역대 총무원장들은 모두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임기는 4년이었지만 진경(1년 5개월), 녹원 스님(2년)을 빼면 3∼7개월의 단명에 그쳤다. 의현 원장은 총무원장이 되기 이전부터 중앙 종회의장 등으로 종단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83년 8월 이른바 ‘신흥사 사건’이 터졌다. 설악산 신흥사에서 신임 주지 부임을 둘러싼 갈등 끝에 유혈 난투극이 벌어져 1명이 사망했다. 경찰은 당시 사찰에 있던 스님 31명을 모두 연행해 이 중 19명을 구속했다. 이 사건으로 총무원장 진경 스님을 비롯한 간부들이 퇴진했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진경 스님과 종회의장으로 사사건건 대립하던 의현 스님의 갈등이 깔려 있었다. 종정 성철 스님은 다음과 같은 교시를 내렸다. “자비로 생명을 삼는 불문에서 이러한 불상사가 발생한 것은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민이 들끓고 있으며, 곤충미물들도 조계종단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시적 돌발사고가 아니요, 오랫동안 계속된 종단 분쟁의 결말이며, 조계종단이 극도로 타락한 증좌입니다.” 그러나 신흥사 사건은 추락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해 9월 소장파 승려들이 중심이 된 이른바 ‘비상종단’이 발족된다. 이들은 비상종단운영회의를 설치해 개혁을 추진하지만 반발을 초래하자 서울 강남구 봉은사에 총무원 간판을 걸었다. 비상종단은 다시 반대 세력이 승려대회를 열어 비상종단 해체를 결의하자 폭력배들을 동원해 조계사 총무원을 점령했다. 이 사태는 총무원장 녹원 스님과 비상종단 초우 스님의 화합 성명으로 일단락됐다. 공교롭고도 안타깝다. 우리 불교를 대표하는 도심 도량인 봉은사는 다시 종단 분쟁의 현장으로 등장한다. 1987년 10월 31일 ‘봉은사 사태’가 터졌다. 당시 주지였던 밀운 스님이 ‘노태우 총재 대통령 당선 기원 법회’를 계획하면서 시작됐다. 밀운 스님은 차기 총무원장 선거에서 의현 원장의 강력한 경쟁자였다. 밀운 스님에게 총무원장 자리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노 후보를 지지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설이 퍼졌다. 법회 당일 밀운 스님 측 지지자와 이 법회를 저지하려는 세력들이 충돌해 부상자가 발생했다. 의현 원장은 다음 해 주지 임면권을 종정에서 총무원장으로 옮기는 종헌 개정에 성공한 뒤 4월 밀운 스님을 해임했다. 결국 신임 주지가 부임하는 과정에서 난투극이 벌어졌고, 12월 밀운 스님 측은 봉은사에 총무원 간판을 내걸었다. 당시 나는 중진 스님들과 이 사태를 중재하기 위해 애썼지만 이해관계가 엇갈려 쉽지 않았다. 사사건건 대립하던 밀운 스님과 의현 원장은 1989년 5월 분규로 발생한 채무를 탕감한다는 조건으로 사태를 끝내기로 합의했다. 종단 분규 때마다 현장이 된 봉은사에 무슨 허물이 있으랴. 신도들에게도 미안할 따름이다. 모두 부처님을 제대로 못 모시고 있는 불제자들의 죄다.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권력과의 유착으로 흔들리는 의현 총무원장 체제와 개혁세력의 충돌 속으로 들어갑니다.}

    • 201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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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통합종단 분열과 태고종 창종

    대한불교 조계종과 한국불교 태고종은 올 2월 전남 순천 선암사에 대한 재산관리권을 공동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선암사는 1954년 시작된 정화운동 이후 비구와 대처승의 갈등을 상징했던 사찰이다. 조계종이 소유권, 태고종이 점유권을 행사하면서 다툼이 치열해지자 1970년 당시 문화공보부가 재산관리권을 순천시에 위탁했다. 이번 합의가 시사하는 의미는 실로 크다. 50여 년에 걸친 분쟁에 사실상 마침표를 찍는 것이기 때문이다. 1962년 4월 비구와 대처승이 함께 참여하는 통합종단이 탄생했다. 그러나 통합종단의 출범은 분쟁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갈등의 출발점이었다. 무엇보다 통합의 힘 자체가 갈등 당사자인 비구와 대처 측으로부터가 아니라 5·16군사정변 이후 초법적인 존재였던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처 측은 비구 위주의 통합 과정에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최고회의의 위세에 눌려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대처 측의 불만은 곧 종단의 국회 격인 초대 종회를 구성하면서 터져 나왔다. 종회의원을 50인으로 구성했는데 비구 32인, 대처 18인이었다. 대처 측은 동일 비율로 종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반발했다. 이어 서울 서대문에 별도의 총무원을 설립한 뒤 ‘한국불교 조계종’ 간판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제정된 불교재산관리법은 통합종단을 유일한 불교 종단으로 인정하고 있었기에 서대문 총무원을 불법단체로 규정했다. 이후 비구와 대처의 갈등은 통합종단과 서대문 총무원, 통합종단에 잔류해 있던 대처 측의 화동(和同)파가 얽혀 법률 소송과 함께 물리적 충돌까지 초래하며 복잡하게 진행된다. 1970년 1월 통합종단의 총무원장을 지낸 대처 측 박대륜 스님 등이 태고종을 창립한다. 당시 문화공보부에 의해 몇 차례 서류 보완 지시를 받은 태고종은 5월 불교단체 등록을 끝내고 정식 종단으로 출범했다. 통합종단이 도의 국사를 종조(宗祖)로 한 반면, 태고종은 태고 보우(太古 普愚·1301∼1382) 국사를 종조로 했다. 태고종은 보우 국사의 사상에서 교와 선의 일치, 정토와 선의 융합, 세간과 출세간의 원융도 강조했다. 정화운동은 태고종 창종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차원이다. 다른 살림으로 갈라서 종권 분쟁은 끝났지만 선암사, 봉원사 등 개별 사찰을 둘러싼 갈등은 최근까지 계속됐기 때문이다. 사실 태고종 창종은 어쩔 수 없는 길이었다. 1969년 10월 대처 측이 제기했던 종헌 결의 무효 소송에 대해 이유 없다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왔다. 법적 소송을 통해 통합종단을 부정하려던 대처 측의 기도가 최종적으로 무산된 것이다. 이어 몇몇 사찰의 관할권을 둘러싼 소송 역시 불교재산관리법을 근거로 모두 통합종단에 유리하게 판결이 나왔다. 나는 정화운동이 첫걸음을 내딛는 시기에 출가했다. 돌이켜보면 심각한 폭력 사태가 일어나 사회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이 같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양측은 물론이고 권력이 주도한 중재 노력도 여러 차례 있었다. 정화운동의 본질은 일제가 강점하면서 초래된 우리 불교의 청정성(淸淨性)과 수행 풍토의 회복이었다. 그러기에 승려의 자격 문제, 곧 대처(帶妻) 문제는 타협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태고종의 정화운동에 대한 공식적인 주장은 이렇다. “광복 이후 ‘불교법난의 시련’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동안 시종일관 주창하며 그의 실천을 다짐했던 것이 종조인 태고 보우 국사의 중심사상을 계승….” 비구의 정화운동은 대처의 입장에서는 ‘광복 이후 불교법난(佛敎法難)’이었던 셈이다. 나는 정화운동 과정에서 조정래 소설가의 부친인 조종현 스님 등 대처 측 스님들과 적지 않은 인연을 맺었다. 교육과 역경, 포교에서 기여한 대처 스님도 적지 않았다. 정화운동의 세세한 줄기에는 다양한 사연과 문제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불교를 바로세우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던 도도한 시대적 흐름이었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조계종 50년 종단사(史)에서 가장 뜨거운 시기로 평가받는 94∼98년 종단개혁의 격류 속으로 들어갑니다.}

    • 201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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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박정희 이승만 대통령과 정화운동

    ‘육(六) 비구 할복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어쨌든 정화운동에 대한 비구들의 굳은 의지를 보여줬다. 비구승과 대처승(帶妻僧)의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권력을 잡은 군부는 모든 혼란을 사회악으로 규정했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종권과 사찰 관할 문제로 폭력사태까지 초래했던 정화운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청담, 경산 스님 등 당시 정화운동을 주도했던 지도부는 군사정부의 냉정한 태도에 당혹감을 느꼈다. 종단은 1961년 6월, 5·16 후 처음으로 종회를 개최해 정화 촉진을 위한 진정서를 제출하고 혁명 세력에 적극 협조하기로 결의했다. 당시 불교신문 사설이다.‘군사의 혁명이 국민의 정화운동에 불과한 것이요, 승려의 정화가 역시 국민의 정화요 사찰의 정화가 곧 국가의 정화인 것이다. … 혁명의 근원이 불교의 정화에 있다고 할 것이다. 사찰의 청정과 함께 승려는 독신으로 청정하여야 한다.’사설은 나아가 불교 정화운동은 단지 불교 내부에 그치지 않고 국민성을 계도하는 도덕운동과 직결되므로 국가 혁명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이렇게까지 해야 했느냐는 의문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혁명정부는 초법적인 권력이었다. 게다가 정화운동은 비구 300명이 대처 7000여 명과 맞서는 것으로 시작한, 계란으로 바위를 때리는 싸움이었다. 대처승들은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며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최고 권력자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의 관계였다. 종단에서는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였다. 비구니 덕수 스님이 박 의장의 장모 이경영 씨(법명 대각화)를 어머니처럼 모셨다. 이 씨는 사위가 5·16을 일으키자 개운사로 찾아와 불공을 올렸고, 이를 계기로 덕수 스님과 가깝게 지냈다. 스님은 속가 언니도 함께 출가한 자매 비구니였다. 청담, 경산 스님이 진정서를 쓰거나 종단의 입장을 정리하면 덕수 스님의 손을 거쳐 이 씨와 박 의장에게 전달했다. 개운사를 다니던 육영수 여사도 남들의 이목이 우려된다며 사찰을 소개받아 도선사의 청담 스님과 인연을 맺게 된다.청담, 경산 스님 등은 박 의장 등 권력 핵심부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화운동의 대의를 집요하게 설득했다. 박 의장 일가의 적극적인 도움이 정화운동에 기여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당시 비구 측에 불리하게 전개되던 대처 측과의 소송까지 모두 취하시켰다. 박 의장 일가의 태도가 비구 측에 우호적으로 바뀌자 정부 측 인사들도 직간접으로 정화운동에 힘을 실어줬다.이승만 대통령 역시 정화운동에 호의적이었다. 그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지만 삼각산 문수사, 경국사를 자주 찾는 등 불교와의 인연도 적지 않았다. 특히 종교에 관계없이 성직자는 청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 승려도 독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이 대통령이 충남 논산 관촉사와 경기 광주 장경사 등 대처승이 관리하는 절을 방문했다가 아이 빨래가 걸려 있는 등 어수선한 사찰 분위기를 보고 크게 화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1954년 5월 발표된 이 대통령의 담화 요지는 ‘교단과 사찰은 독신 비구승이 담당하고, 대처승은 사찰 밖으로 나가라’는 것이었다. 이 담화는 실제 정화운동 과정에서 큰 힘이 됐다. 1962년 3월 25일, 우여곡절 끝에 비구와 대처가 합의한 종헌(宗憲)이 확정 공포됐다. 종단의 이름은 현재의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종조(宗祖)는 도의국사로 확정했다. 양측이 합의해 종단을 출범시켰으므로 통합종단으로 불린다. 종정은 효봉 스님(비구), 총무원장은 임석진 스님(대처)을 선출했다. 종단은 4월 11일 정식 출범했다.현재의 시각에서 정화운동이 지나치게 권력에 의지했다는 비판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정화운동을 둘러싼 역사적,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비판을 위한 비판에 그칠 것이다. 그만큼 비구의 입장에서 이 싸움은 명분만 갖고 시작한 처절한 과정이었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통합종단의 갈등과 태고종 창종을 얘기합니다.}

    • 2011-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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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빛과 소금으로] 서울 고척교회

    매주 화, 목요일이면 서울 구로구 작은 교회의 목회자 20여 명이 고척2동 고척교회(예장 통합 교단)에 모인다. 교회 한쪽에는 위생적으로 작은 팩에 담은 다양한 음식이 사람들의 손을 기다리고 있다. 차량으로 옮겨진 이 음식들은 구로구 내의 홀몸노인들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전달된다. 고척교회의 ‘희망 푸드뱅크(Food Bank)’다.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푸드뱅크는 음식 업체나 대형마트에서 팔다 남은 식품을 무상으로 기부 받아 굶거나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게 나눠주는 것을 말한다. “미국의 한 교회를 방문했을 때 주일(일요일)이면 각종 음식과 옷 등을 진열한 장(場)이 서더군요. 인근 마트나 음식점에서 기부 받은 물건인데 사람들이 부담 없이 가져갔습니다. 바로 ‘이거다’ 하며 무릎을 쳤죠.” 조재호 담임목사(56)의 말이다. 오래 벼르다 지난해 1월 푸드뱅크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인근 가산디지털단지 내에 있는 뷔페와 음식 유통업체를 설득했다. 처음에는 음식을 추가로 만들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거나 별도의 일손이 들어간다며 거절하는 업체들도 있었다. 그래서 푸드뱅크는 남아서 버려지는 음식을 가져가는 것이고, 혹시 생길지 모를 위생사고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현재 10여 곳이 푸드뱅크 후원 기업으로 등록돼 있다. 교회가 반찬통을 보내면 후원업체는 남은 음식을 채운다. 이 음식들을 냉동차량으로 가져온 뒤 영양사의 감독 하에 재조리와 위생 포장 등의 과정을 거친다. 흥미로운 것은 이 교회를 중심으로 지역의 작은 교회 20곳이 푸드뱅크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핏줄처럼 퍼져 있는 작은 교회들이 지역 사정을 구석구석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뤄진 일이다. 이 때문에 푸드뱅크는 자연스럽게 지역 주민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면서 교회끼리도 서로 돕는 교회연합사업이 됐다. 한 주에 1000여 개의 도시락을 만들어 320여 가정에 전달하고 있다. 기부 업체의 경우 법률에 따라 세금 감면 혜택을 받고, 희망 푸드뱅크를 후원하고 있다는 인증서도 받는다. “한쪽은 음식이 남아 음식물쓰레기 처리에 애를 먹고, 다른 쪽은 음식이 부족해 고통받습니다. 푸드뱅크를 통해 제때에 음식물을 받아 위생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면 사회적으로 크게 기여할 수 있습니다.”(조 목사) 이 교회는 1954년 설립된 뒤 줄곧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네에서 사람들의 애환을 지켜본 ‘느티나무’를 닮았다. 개신교 단체에서 선정하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상’을 받는 등 지역밀착형 교회의 모범적 사례로도 꼽힌다. 이렇게 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고척교회는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홀몸노인 생활비 지원과 보육원, 장애인, 소년소녀가장 사역, 사랑의 간식, 사랑의 식탁, 경로대학, 아기학교, 문화교실, 취미교실, 병원봉사, 결식학생 급식 지원, 방과후교실, 나눔가게…. 신자 1004명이 헌금과 기도를 통해 어려운 이웃을 돕는 ‘1004운동’도 있다. 이 운동은 기존 봉사와는 별도로 북한 주민 개안수술과 난치성 환자 등을 돕기 위해 부정기적으로 진행한다. 2003년부터 지금까지 총 9차례 진행했다. 한 달 전부터 후원 대상을 위한 기도문을 작성해 교회 벽면에 붙이고 기도하면서 헌금에 동참한다. 이 교회는 이제 비좁아져 주차장 공간에 새 건물을 건축하고 있다. 담장 없는 교회를 만들어 지역 주민을 위한 문화센터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복음과 봉사에 대해서도 교회는 명확한 입장을 갖고 있다. 봉사가 복음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복음은 편협하지 않습니다. 복음과 봉사 중 무엇이 우선인가를 따지기보다는 그 사람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언인지를 봐야 합니다. 푸드뱅크는 돕는 곳이나 도움을 받는 사람들 모두 이익이 됩니다. 그런 만큼 많은 관심이 필요합니다. 목회를 ‘선한 유통업’이라고도 하죠.(웃음)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이 중간에서 잘 소통되도록 도와야죠.”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조재호 목사의 ‘내가 배우고 싶은 목회자’ 김제건 목사 ▼ “지표수가 아닌 지하수 되라”는 말씀 가슴에 새겨고척교회 원로목사인 김제건 목사(84)는 지금 미국 시애틀에 살고 있다. 후임인 내가 이 교회를 더 잘 섬기도록, 이 교회가 지역 사회에 더 유익한 공동체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라며 조기 은퇴했다. 19년 전 일이다. 김 목사는 인내와 희생의 목자상을 보여주었는데 마지막까지 한 번 더 희생한 것이다. 그는 6·25전쟁 때 이북에서 혈혈단신으로 내려왔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어려운 시절 목사로서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 건강한 교회를 일구었다. 꾸밈이 없는 순박한 시골 할아버지 같은 인자함은 오랜 세월 고난과 인내의 목회 경륜에서 배어 나오는 인품이다. 이 시대에 지표수가 아니라 땅속을 면면히 흐르는 지하수와 같은 교회가 필요하다고 말하던 그분의 교훈이 새롭다. 드러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건강한 교회론이다.}

    • 2011-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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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육 비구 할복사건과 정화운동

    1960년 11월 24일 오후 3시경 당시 서울 서소문 대법원장실에서 이른바 ‘육(六) 비구 할복 사건’이 발생했다. 스님들은 불교 정화의 정당성과 이유를 설명한 뒤 준비한 칼로 복부를 찔렀고,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400여 명의 스님과 재가 불자들이 대법원에 들어가 소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300여 명이 연행됐고 20여 명이 구속됐다. 동아일보가 육 비구 할복을 그해 10대 사건의 하나로 선정하는 등 사회적 파장이 컸다.할복은 과격하게 느껴지고, 특히 불교 신도가 아니면 거부감이 더욱 클 수도 있다.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불교 상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사건이기에 당시 많이 쓰던 승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일제 말기 승려의 수는 7000여 명으로 추산됐다. 이 중 결혼해 부인이 있는 대처승(帶妻僧)이 아닌 비구승(比丘僧)은 300여 명에 불과했다.일제는 현대화한다는 명분으로 사실상 불교의 일본화를 추진했다. 총독부의 지원을 받은 일본 불교가 급격하게 유입되면서 우리 불교는 급속하게 청정성(淸淨性)을 상실했다. 이는 승려의 대처와 사찰 내 음주, 선 수행보다는 행정실무 선호, 친일 등으로 나타났다.1954년 5월 시작된 불교정화운동은 수행과 청정성의 회복이라는 한국 불교 고유의 전통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시기로는 1962년 4월 통합종단인 지금의 대한불교 조계종 출범까지가 해당된다.불교 정화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었다. “불법(佛法)에 대처승 없다”는 구호야말로 정화운동을 한마디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 같은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불교 정화는 쉽지 않았다. 수적 열세뿐 아니라 종단 자체가 수십 년간 대처승 위주로 운영돼 왔기 때문이다.비구승들은 1954년 6월 불교정화운동 발기위원회를 발족하고 위원장에 나의 은사 금오 스님을 추대했다. 은사는 당시 세태를 이렇게 표현했다.“심산의 대사찰뿐 아니라 각급 사원까지 놀이터 내지는 유흥장으로 변해 법당 앞의 누각에는 술동이가 놓여 있고 기둥에는 돼지 다리가 걸렸으며, 취객의 가무음곡이 끊이지 않았다. …큰 사찰이 수도, 기도하는 도량이 아니고 사업장화돼 승려들은 양복에 가방을 들고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이면 처자가 있는 속가로 퇴근했다.”비구승들은 그해 9월 전국비구승대회 임시 종회를 개최해 비구승 중심의 종단을 구성했다. 종정은 만암, 부종정은 동산, 도총섭은 청담 스님이었다. 다시 11월 불교 정화를 촉구하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제2차 유시(담화)에 힘입어 비구승들은 대처 측 총본산인 태고사 간판을 제거하고, 그 대신 조계사와 불교 조계종 중앙총무원 간판을 달았다.대의명분이야 당연히 비구 측에 있었지만 생존권이 걸린 대처 측의 저항도 격렬했다. 종단과 사찰의 관할 등을 둘러싼 양측의 갈등은 점차 폭력화됐고, 법정 소송도 계속됐다.이 문제가 사회문제로 비화된 가운데 양측은 1955년 2월 정부의 중재로 승려의 자격으로 독신, 삭발염의(削髮染衣·머리카락을 깎고 승복을 입음), 수도, 20세 이상 등 8개 항을 합의했다. 정부는 이 기준에 맞는 승려가 1189명이라고 발표했다. 이어 8월 조계사에서 열린 전국승려대회에서 종정 석우, 총무원장 청담, 감찰원장 금오 스님이 당선됐다.이후 정화운동은 급물살을 타지만 대처 측은 비구 종단을 정부의 지원을 받는 ‘관제불교 단체’로 규정한 뒤 사찰 재점거를 시도했다.비구 측은 4·19혁명 뒤 어수선한 정치적 상황과 강력한 대처 측의 저항에 큰 위기감을 느꼈다. 청담 스님은 종단 운영을 좌우할 수 있는 대법원 판결에서 비구 측이 불리하다는 내용을 미리 입수했다.이에 청담, 숭산 스님 등은 비밀리에 순교단을 모집했다. 20, 30대의 젊은 승려 6명이 자원했다. 당시 청담 스님은 이들에게 물리적으로 충돌하지 말 것을 여러 차례 당부했다. 6명 중 한 명인 사제 월탄 스님에게 들은 얘기지만 청담 스님은 헝겊 등으로 칼을 감고 끝 부분만 남겨 생명에 지장이 없도록 했다고 한다. 육 비구 중 성각(입적), 월탄 스님은 종단을 지켰고 나머지 4명은 환속했다.이 사건은 세속적으로는 적지 않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비구승들의 결연한 의지와 정화운동이 대세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스님은 이승만·박정희 대통령 등 권력과 정화운동에 대해 얘기합니다.}

    • 2011-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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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지통]구세군 냄비도 놀란 1억1000만원 수표

    한국 구세군의 자선냄비 거리 모금에서 역대 최고 금액인 1억1000만 원짜리 수표가 모금됐다. 구세군은 4일 오후 5시 20분 정장 차림의 60대 초반 남성이 서울 중구 명동 우리은행 앞 자선냄비에 ‘좋은 곳에 써 주십시오’라고 쓴 봉투를 자선냄비에 넣었고, 이후 금액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이 수표가 담겨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6일 밝혔다.1928년 구세군 거리 모금이 시작된 뒤 2005년 경기 고양시 일산에서 현금 3000만 원 봉투가 나왔고, 지난해에는 서울의 한 자선냄비에서 수표 4500만 원이 모금됐지만 1억 원이 넘는 액수는 처음이다.기부자는 봉투에 남긴 글에서 ‘항상 좋은 일을 하시는 구세군께 존경을 표합니다. 제 작은 성의지만 거동이 불편하고 소외된 어르신들한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밝혔다. 구세군에 따르면 익명성을 지켜온 자선냄비 기부 원칙에 따라 이 내용을 공개하지 않을 방침이었다. 그러나 구세군의 한 직원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사례를 미담으로 소개하면서 알려져 기부 내용을 확인하게 됐다. 박만희 구세군 사령관은 “얼굴도 이름도 알리지 않고 1억1000만 원을 후원해 주신 후원자의 마음을 모든 구세군 가족과 자원봉사자들이 깊이 간직하고, 기부금은 어르신들의 복지 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용하겠다”고 밝혔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1-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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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광덕 스님… “전법(傳法)이 구도(求道)다”

    “나는 불자다. 부처님의 진리생명이다. 오늘 하루 좋은 일이 찾아온다고 매일 10번 이상 소리를 내서 말하고 일어납시다. 그리고 내 생명 가득히 부처님의 진리가 태양처럼 솟아오른 것을 마음의 눈으로 지켜봅시다. 진리의 태양이 나의 생명, 나의 가정, 나의 사업, 우리 겨레 위에, 다시 온 누리 중생에게 퍼지는 것을 생각하고 저들 모두의 평화, 행복을 기원합시다.”한국 불교의 도심포교와 현대화에 큰 업적을 남긴 광덕 스님(光德·1927∼1999)의 생전 법문이다. 스님은 1952년 동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종정을 지낸 성철 스님의 사제다.나와 광덕 스님은 1950년대 처음 만나 종단 소임을 맡아 오랜 인연을 맺었다. 1971년 청담 스님이 입적했을 때에는 내가 교무부장, 광덕 스님이 총무부장이었다. 광덕 스님은 청담 스님의 갑작스러운 입적 뒤 총무원장 직무대행을 맡기도 했다. 두 사람은 젊은 스님들답게 한국 불교의 미래에 대한 우려와 고민을 자주 토로했다. 광덕 스님은 “출가해 수행하지만 한국 불교는 무상하고 지나치게 허무주의가 짙다”며 “선문답에 머물러 있으면 어떻게 세상을 구할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광덕 스님은 당대를 대표하는 선지식인 동산 스님의 제자였고 선(禪)수행과 금강경에도 밝았다. 그러나 현실세계와 거리를 두는 불교의 초세간적인 분위기를 자주 비판했다. 결국 스님은 산에서 내려왔고, 종단을 거쳐, 다시 도심으로 걸어 들어갔다. 도심의 불자들 사이에 스님의 길이 있었다. 철저하게 수행 위주로 살아간 성철스님과는 다른 길이다.1950, 60년대 종단에는 젊은 인재가 적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법명을 높인 이들이 숭산, 광덕, 법정 스님이다. 이런 비유도 있었다. ‘선(禪)은 숭산, 글은 법정이지만 두루 갖춘 이는 광덕이다.’스님은 1965년 창립된 대학생불교연합회의 초대법사를 맡고, 다시 서울 강남구 봉은사에 대불련 수도원을 설립했다. 수도원이라는 명칭도 그렇지만 획기적인 시도였다. 학생들은 낮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아침, 저녁에는 정진했다. 하루 1000배 기도와 철야 정진 등 수좌처럼 생활했다. 당시 서울 혜화동의 서울대나 장충동 동국대 등 강북에서 봉은사에 오려면 배를 타고 건너는 고된 일과였다. 박세일(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박성배 씨(미국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 교수) 등이 이곳에서 수행했다.스님은 1974년 불광회(佛光會)를 창립해 불교 대중화 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세우고 추진력을 얻는다. 불광회를 시작으로 1975년 대중법회인 불광법회 창립, 1982년 잠실 불광사 창건이 이어진다. 불광사는 서울 구룡사, 능인선원 등 대규모 도심 포교당의 모델이 됐다.불광은 부처님의 반야(般若·지혜)다. 반야 사상을 통해 인간의 마음과 삶을 밝게 비추고 나아가 사회의 성공과 행복, 번영을 실현한다는 것이다.지금은 불교와 관련한 잡지나 출판사가 많지만 당시에는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1974년 창간한 월간 잡지 ‘불광’은 지금까지 이어지며 문서포교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고, 불광출판사 역시 불교계의 대표적인 출판사가 됐다.생전 스님은 아이처럼 해맑은 표정과 솔직담백한 말이 매력적이었다.“제가 책 좀 읽었다고 해서 종단에 징발되어 10년 가까이 종단 행정에 관여한 것을 아실 겁니다. 그러다가도 틈만 있으면 팽개치고 산으로 달아났습니다. 꿩이 생각은 콩밭에 가 있다더니 도시에 나와 있으면서도 산중으로 달아나서 참선만 하는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월간 ‘불광’을 만들게 되었고 우리 형제들을 만나게 되고, 불광 형제들을 만나 여러 형제와 더불어 이렇게 살게 됐습니다.”스님은 입적 전 10여 년간 투병했다. 몸의 고통 때문에 누워 있다가도 ‘나는 죽지 않아’라며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그만큼 불교를 위한 원력(願力)이 강했다. 병색이 완연했지만 법문에 들어서면 언제나 힘 있는 목소리로 대중을 만났다. 말하는 사람이 힘 있어야 그 기운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것이 스님의 지론이었다. 스님이 건강을 잃지 않고 더 살 수 있다면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스님이 추구한 불광의 길, 그것은 하나하나의 갈래까지 새로운 것이었다.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육비구할복’ 등 비구와 대처승의 갈등으로 파란이 많았던 불교정화운동의 초기를 회고합니다.}

    • 2011-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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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고]살레시오 수도회 구천규 신부 外

    ■ 살레시오 수도회 구천규 신부벨기에 출신으로 한국 청소년의 직업 교육을 위해 헌신해온 살레시오 수도회 구천규(마르코 퀴블리에·사진) 신부가 4일 오후 6시 서울성모병원에서 선종했다. 향년 73세. 1938년 벨기에에서 태어난 고인은 58년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한 뒤 65년 한국으로 파견됐다. 67년 벨기에 루벤대에서 신학 과정을 마친 뒤 70년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한국에 복귀해 살레시오 수도회 한국 관구를 이끌며 돈보스코 청소년센터를 통해 청소년 직업 교육에 힘썼고 83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울지 마 톤즈’로 널리 알려진 이태석 신부 등 많은 후진을 받아들여 수도회 발전에 기여했다. 빈소는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살레시오 수도회 관구관 7층 대성당, 장례식은 6일 오전 8시. 02-828-3500 ■ 애국지사 민영수 선생애국지사 민영수 선생(사진)이 5일 별세했다. 향년 90세.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민필호 선생의 장남으로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되자 제2지대에 파견돼 총무조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5월 이범석 장군 아래서 한미 합작 특수훈련에 참여했고 8월 국내 진입작전을 준비하던 도중 광복을 맞았다. 주홍콩 부총영사, 주대만 대리대사, 독립유공자협회장, 독립기념관 이사장 등을 지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봉숙 여사와 아들 근식(개인사업) 범식(국토연구원 본부장) 붕식(캐나다 거주), 딸 현식 씨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호, 발인 7일 오전 7시 반, 장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4묘역. 010-5767-1279 ◇권용직 컴볼트시스템즈 이사 모친상·김대홍 미래에셋증권 온라인비즈니스본부장 장모상=4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6일 오전 8시 02-3010-2265 ◇박종철 종대 종영 씨 종운 대호인더스트리 대표 모친상=5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7일 오전 9시 02-3410-6916 ◇박종환 CBS 산업부 차장 장인상=5일 인천 길병원, 발인 7일 오전 7시 032-472-9262 ◇안명호 대명정공 대표 준호 리라 씨 모친상=3일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6일 오전 9시 02-2227-7563 ◇윤의근 전 한국장로교복지재단 이사장 별세·혜진 경기 부천중 교사 부친상·김준수 태영건설 대리·김재석 이랜드 팀장·성준오 인천주안장로교회 부목사 장인상=5일 대구 파티마병원 장례식장, 발인 7일 오전 10시 053-955-7755 ◇이세목 북광주신협 이사장 세덕 이천송정초교 교사 세경 카멤버스 실장 세정 아시아경제신문 편집국장 모친상=5일 광주 그린장례식장, 발인 7일 오전 9시 반 062-250-4406 ◇이승준 GCS 매니저 의진 서울신현고 교사 신정 네오위즈게임즈 실장 부친상·김일회 서울시립은평병원 가정의학과장 김정환 삼우설계 소장 장훈기 엘비세미콘 마케팅팀 과장 장인상=5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7일 오전 9시 02-3010-2291 ◇이주형 국방일보 기자 장모상=4일 서울 건국대병원, 발인 6일 오전 11시 02-2030-7907 ◇전익희 재경영원면향우회장 명희 씨 모친상·재문 우리금융지주 과장 재성 대한석유협회 대리 영주 트랜스퍼펙트 프로젝트매니저 조모상·신현기 경기북부법무사회장 장모상=4일 서울성모병원, 발인 7일 오전 7시 02-2258-5977 ◇정준섭 TBWA코리아 매체팀 국장 성섭 삼성물산 건설부문 과장 부친상=4일 경기 성남시 분당서울대병원, 발인 6일 오전 6시 반 031-787-1510 ◇주창순 전 하원제약 대표 별세·상현 NASA 수석연구원 상우 씨 부친상=5일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7일 오전 5시 반 02-2227-7597}

    • 2011-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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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숭산 스님… “대통령, 당신은 ‘나’를 아시오? 자기도 모르면서 어떻게 나라를 다스립니까”

    “대통령이 되신 것도 대통령님의 운이요, 우리 한국 운이올시다. 엿장수 마음대로 되는 법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유(我有)하니 피유(彼有)하고, 아멸(我滅)하니 피멸(彼滅)이라. ‘나’가 있을 때 저것이 있고, ‘나’가 없으면 저것도 없네. 이것이 불교 소학교 과정입니다. 대통령이시여, 당신은 ‘나’를 아시오? 무엇이오? 말해 보세요. 모르지요? 자기도 모르면서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말입니다.”한국 선불교의 세계화에 기여한 숭산(崇山·1927∼2004) 스님이 1982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 앞으로 미국에서 보낸 편지의 일부다. 스님은 귀국할 때 공항에서 안기부의 남산 청사로 연행돼 몇 시간 동안 고초를 당했다.얼마나 당당하고 거침이 없나. 생전 스님 모습이 그랬다. 1950년대 불교정화 운동과 종단 행정 때문에 자주 만난 스님은 항상 원만하면서도 적극적이었다. 숭산은 법호이고 행원(行願)이 법명이다. 스님은 동국대 불교학과를 다니다 1947년 마곡사로 출가했다. 스님은 정혜사에서 용맹정진하며 고봉, 춘성, 일엽, 금봉, 전강 스님 등 당대의 이름난 여러 선지식들을 차례로 만났다. 그러던 차에 선문답 중 말문이 막혀 고심하게 한 고봉 스님을 두 번째 만났다.“제가 어제 저녁에 삼세제불(三世諸佛)을 다 죽였기 때문에 송장을 치우고 오는 길입니다.”(숭산 스님)“그걸 어떻게 내가 믿을 수 있느냐? 그놈 고약한 놈인데?”(고봉 스님)그러면서 스님은 1700공안(公案·화두)을 차례로 물어 나갔다. 숭산 스님이 막힘없이 답하자 고봉 스님은 마침내 “네가 꽃이 피었는데, 내가 왜 네 나비 노릇을 못하겠느냐”며 숭산이라는 법호를 주며 인가했다. 1949년 숭산 스님은 고봉 스님을 법사로 수덕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숭산 스님의 생애는 종단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보배처럼 귀하다. 스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실천하기 위해 초기에는 교단 정화, 이후에는 해외 포교에 전념했다. 불교신문사 사장을 거쳐 총무원 총무부장, 감찰부장 등을 지내며 교단 발전에 초석을 다졌다.스님의 해외 포교는 1966년 일본에 홍법원을 개원하면서 시작된다. 이후 1969년 홍콩과 미국, 캐나다, 영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등 해외 각지에 선원을 열었고, 2000년에는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를 개원했다.40여 년 전 종단이 어수선한 가운데 해외 포교는 스님들의 개인 원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앞서 진출한 티베트와 일본, 미얀마 불교가 성한 데다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도 만만치 않았다. 스님은 나이 마흔이 넘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도올 김용옥은 스님의 영어에 대해 “짧은 영어지만 촌철살인의 메시지를 담아낸다”고 평가한 바 있다.스님은 해외에서 항상 ‘오직 모를 뿐’이라는 화두로 외국 엘리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부처의 길로 이끌었다. 스님이 뿌린 해외 포교의 씨앗은 30여 개국에 120여 개의 선원으로 늘어났고 제자들은 하버드대 출신으로 유명한 현각 스님, 대봉 스님 등 5만 명에 이른다.“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가네. 동서남북 지구촌을 돌고 돌아 35년. 올바른 생활을 보여 주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네.”2001년 해외 포교 35주년을 기념한 숭산 스님의 법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성철 스님의 유명한 법어를 빗대어 자신의 삶을 담아낸 스님의 혜안이 번뜩인다.숭산 스님 생전 미국의 선원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관음선종이라는 이름이 붙은 선원들에는 염불과 위파사나, 달라이라마의 옴마니반메훔 등 다양한 수행법이 섞여 있었다.내가 “조계종 식은 아닌데” 하고 묻자 스님은 “외국인의 경우 기(氣)가 강해 참선만 하라고 할 수 없다. 전통적인 수행법보다는 현지 사정에 맞는 여러 방편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스님의 말년에는 오랜 세월 괴롭혀온 당뇨라는 육체적 고통이 계속됐다. 육체가 무너진 상태에서도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원력을 포기하지 않던 스님의 마지막 모습들이 생생하다. 스님은 대표적인 선지식이지만, 스님의 삶은 때로 공허해 보이는 선문답(禪問答)에 갇혀 있지 않았다.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불교 대중화와 도심 포교를 선도했던 광덕스님을 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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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성철스님3  성철스님 불 지핀 ‘돈점’논쟁

    1981년 당시 종정인 성철 스님이 저서 ‘선문정로(禪門正路)’에서 깨달음과 관련해 돈오점수(頓悟漸修·깨친 후에도 계속 닦아야 한다)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돈오돈수(頓悟頓修·깨달은 뒤에는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다)를 주장하자 불교계가 벌컥 뒤집혔다. 깨달음과 닦음(수행)은 선불교의 핵심 문제로 이전에는 보조국사 지눌 스님(1158∼1210)의 돈오점수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이른바 ‘돈점논쟁’은 성철 스님이 속한 해인사와 지눌 스님이 말년을 보낸 송광사의 대립으로 번졌고 불교계를 넘어 학자들까지 가세했다.말을 조금 보태면 성철 스님은 돈오의 기준으로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를 제시했다. 동정일여는 일상생활에서 변함없이 화두참구가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잠들어 꿈을 꾸면 화두는 사라진다. 꿈속에서도 한결같은 것이 몽중일여다. 마지막으로 깊은 잠에 들어도 깨어 있을 때처럼 수행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오매일여다. 스님은 오매일여를 통과하지 못하면 돈오가 아니고, ‘깨달은 뒤에도 닦아야 하는 것은 깨달은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몹쓸 나무가 뜰 안에 돋아났으니 베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며 해인총림 스님들에게 지눌 스님의 돈오점수 수행법을 경계하도록 했다.과연 그런가? 돈오돈수에 묻혔지만 다른 목소리들도 적지 않았다. 보조사상연구원 등 송광사 쪽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돈오점수의 입장이다. 수덕사 주지와 덕숭총림 방장을 지낸 벽초 스님은 당시 성철 스님 쪽에서 보낸 책 ‘선문정로’를 백련암으로 돌려보냈다.봉암사 결사에 참여했던 월산 스님은 생전 이런 말을 남겼다.“아무려면 어떤가. 누가 내게 와서 어떤 게 옳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런 거 모른다고 할 거야. 다들 부질없는 짓이다.” 실제 월산 스님의 생애를 토대로 고은 시인이 쓴 스님 비문에는 “돈오돈수고 돈오점수고, 둘 다 동해 바다에 빠뜨려라”라고 적혀 있다.2000년 초반에 만난 숭산 스님은 돈점논쟁이 화제에 오르자 과거 성철 스님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일부를 소개했다. 숭산 스님은 “오직 수행할 뿐이다. 돈오돈수도 서른 방망이(서른 번 방망이를 맞아야 한다는 뜻), 돈오점수도 서른 방망이라고 썼다”고 말했다.당대를 대표했던 학승(學僧) 탄허 스님도 불교계가 돈오돈수로 치닫는 분위기에 아쉬움과 염려를 나타냈다.“성철 스님이 돈오점수를 죽이고, 일방적으로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바람에 스님들을 까막눈으로 만들고 있다. 내가 불교계 원로인데 종정 스님과 다른 얘기를 하면 큰 싸움이 날 거다. 싸움 벌이는 것 같아서 안 한다. 훗날 눈 밝은 수행자가 나오면 돈오돈수가 문제가 될 거다.”성철 스님의 돈오돈수는 우선 여기저기서 깨달았다는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내놓지 말고 제대로 수행하라는 경책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논쟁은 불교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한때 종권 다툼과 잿밥 싸움으로 끝없이 추락하던 불교계가 선의 본질을 둘러싼 철학적인 논쟁을 벌인 것이다.그렇지만 아쉬움이 더 크다. 당시 향곡, 서옹 스님 등이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를 지지하면서 돈점논쟁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채 중심이 돈오돈수 쪽으로 쏠렸기 때문이다.중국 선종(禪宗) 사서의 하나인 ‘전등록’의 육조 혜능(六祖 慧能·638∼713)과 제자 남악 회양(南岳 懷讓·677∼744) 선사의 대화에도 ‘깨달음을 얻은 뒤에 닦음도 있고 증(證)함도 있다’고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깨달음을 위해서는 ‘살불살조(殺佛殺祖)’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선불교의 전통이라지만 심도 깊은 논쟁 없이 지눌 스님까지 쉽게 ‘죽이는’ 것은 맞지 않다. 더구나 종단은 지눌 스님을 조계종의 종지를 밝히고 널리 알린 중천조(重闡祖)로 삼고 있다.내가 보기에 돈점논쟁은 하나를 택하고 다른 하나는 버려야 하는 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수행은 수행자의 근기(根氣)에 맞춰 행해야 한다. 간화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이 맞지만, 절대선으로 여겨 다양한 수행법을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 된다. 실제 돈오의 경지를 오매일여까지 높였을 때 정말 이 관문을 뚫은 이가 있을지 의문이다.‘선문정로’ 발표 이후 20년이 흘렀다. 이제야말로 과거의 돈점논쟁을 냉정하게 짚어보고 다시 논의할 때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신념으로 국제 포교의 선구자가 됐던 숭산 스님을 회고합니다.}

    • 201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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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담스님의 딸… 한국 비구니 역사 새로 써

    “이제 그대는 사미니가 됐으니 법명은 묘할 묘(妙)자, 장엄할 엄(嚴)자, 묘엄이라 할 것이다.”1945년 열네살이던 인순은 묘엄 스님이 됐다. 나중에 조계종 제6, 7대 종정이 되는 성철 스님이 사미니(비구니가 되기 전의 예비 스님)계를 주는 계사였다. 인순은 대를 이어달라는 노모의 간청에 못 이긴 청담 스님의 하룻밤 파계로 태어난 딸이다. 총무원장과 제2대 종정을 지낸 청담 스님의 딸이자 성철 스님의 유일한 비구니 제자로 한국 불교 비구니사(史)의 산증인인 묘엄 스님이 2일 오전 9시 5분 경기 수원시 봉녕사에서 입적했다. 법랍 67년, 세수 80세.1931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묘엄 스님의 출가는 청담, 성철 스님과의 기막힌 인연이 계기가 됐다. 인순은 1944년경 일본군 위안부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의 편지를 품고 경북 문경시 대승사로 청담 스님을 찾아갔다. 이곳에서 청담 스님과 함께 수행하던 성철 스님은 도반의 딸이 불가와 인연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니하고 나하고 말로 주고받기 시합하자. 내가 이기면 니가 중이 되고, 니가 이기면 중 안 되는 걸로 하자”고 권유했다. 이에 인순은 “스님이 아시는 것, 그걸 다 나한테 가르쳐 주신다면 중이 되겠다”고 대답했다. 결국 인순은 청담 스님의 법문에 영향을 받아 출가한 월혜 스님과 사제지연을 맺었다.묘엄 스님의 생애는 이 인연이 시작이 되어 각고의 공부와 수행으로 비구니사를 새로 쓰는 삶이었다. 비구니로서는 드물게 1947년부터 청담 성철 향곡 자운 스님이 주도한 봉암사 결사에 참여했다. 당시 7, 8명의 비구니가 봉암사 뒤 백련암에서 수행했다.불교 계율의 중흥조 자운 스님으로부터 ‘범망경’ ‘비구니계율’ 등을 배웠고 경전 해석에서 최고로 꼽히던 운허 스님을 만나 7년여 동안 공부한 뒤 경전을 가르치는 자격인 ‘전강(傳講)’을 받았다. 정식으로 인가받아 강맥을 이은 비구니는 처음이었다. 1959년 비구니 전문 강원인 동학사에서 최초의 비구니 강사로 본격적으로 교육에 나선다. 1971년부터 봉녕사를 대표적인 비구니 도량으로 육성했고 1999년 국내 첫 비구니 율원인 금강율원을 열어 800여 명의 제자를 키웠다. 2007년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종단 사상 처음으로 비구니로서는 최고 지위인 명사(明師) 법계를 받은 데 이어 2009년 비구니 전계화상(傳戒和尙)으로 위촉됐다.스님은 “마음공부는 상대적인 부처님을 뵙고 절대적인 나 자신을 찾는 것이다”라는 임종 유훈을 남겼다. 장례는 전국비구니회장으로 치러지며 빈소는 봉녕사. 6일 오전 11시 같은 장소에서 영결식과 다비식이 이어진다. 031-256-4127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1-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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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성철스님2… “내 말 잘 들어. 중한테 속지마라.”

    1993년 11월 10일 경남 합천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에는 만장(輓章)과 인파의 물결이 이어졌다. 마침내 인파가 멈춘 곳은 해인사에서 3km 떨어진 다비장이었다. 성철 스님 열반 7일째. 여기 모인 이들은 물론이고 이 땅의 많은 사람이 함께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다.“스님! 집에 불 들어갑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세 번의 외침에 이어 화답이라도 하듯 불길이 하늘로 높이 치솟았다. 다비식에서는 100여 과의 사리가 수습됐다. 청담 스님은 생전에 “팔만대장경과 성철 스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성철 스님”이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11월 3일, 국보 제32호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경판 석 장이 해인사 방장인 성철 스님의 허락을 받고 특별전시회를 위해 600여 년 만에 해인사를 떠났다. 다음 날 상좌 원택 스님이 대장경판의 서울행을 알리자 스님은 “나도 이제 갈 때가 되었나보다”라고 했다. 하루 뒤인 4일 오전 제자들과 유일한 혈육인 딸 불필(不必) 스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님은 “내가 너무 오래 세상에 머문 것 같다” “참선 잘하라”는 말과 함께 불생불멸의 길을 떠났으니 공교롭지 않을 수 없다. 가야산 영결식에는 30여 만 명이 몰렸다. 다비식 뒤 사리 친견 기간까지 포함하면 100여만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1936년 해인사에서 동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성철 스님은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며 종단의 선풍을 되살렸다. 스님은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서 두문불출한 채 수행에 전념하다 입적 전까지 해인사 퇴설당과 백련암에 머물렀다. 1967년 해인총림의 초대 방장으로 추대됐고 조계종 제6, 7대 종정을 지냈다.사실 성철 스님은 정화운동 초기를 빼면 현실과는 거리를 두고 수행에 전념했다. 청담 스님과도 달랐고 현실 참여가 적지 않았던 다른 종교인들과도 달랐다.그러나 스님이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면 피할수록 그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스님은 큰스님들이 법문할 때 쓰는 ‘불교계의 주장자(주杖子)’ 같은 존재였다. 배가 고프거나 배가 불러 정도(正道)를 벗어날 때 “정신차리라”며 벼락같이 내려떨어지는 주장자였다.실제 스님의 죽비는 정말 매서웠다고 한다. 낮의 울력에 이어 밤에 참선하는 스님들의 눈꺼풀은 천근이고, 몸은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노장은 불시에 선방에 들어왔다, 한 손에 죽비를 들고서. 스님은 ‘졸지 말고, 밥 값 내놓아라’는 호통과 함께 죽비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간식하지 말라, 돌아다니지 말라, 말하지 말라, 잠을 적게 자라, 책 보지 말라’ 등 수좌 5계는 자신에게도 무섭도록 철저했던 스님의 수행관을 보여준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아아, 시회대중(示會大衆)은 알겠는가?/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1981년 종정으로 추대된 스님은 취임식장에 가지 않았다. 그 대신 이 종정수락법어는 스님의 법명이 산문을 넘어 세간에까지 알려지게 했다. 해인사 방장 시절 스님은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수행이 어려워지자 ‘나를 만나려거든 3000배를 하고 오라’고 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여기에는 다른 의미가 깔려 있다. 생전 스님의 말이다.“대구 파계사 성전암에 있을 때 어떻게나 사람이 많이 찾아오는지, 산으로 피해 달아나기도 했지요. …한 말씀만 해 달라 이거라. 그래 내가 그랬지요. ‘그럼 내 말 잘 들어, 중한테 속지 마라. 나는 승려인데 스님네한테 속지 말란 말이야….”처음에는 억지로 절을 해도, 하다 보면 저절로 심중에 변화가 온다고 한다. 누구든 부처님께 3000배를 하면서 스스로 부처가 되는 길을 찾으라는 뜻이다. 1980년 10·27법난 뒤 14년 만에 총무원장으로 복귀한 나는 2주기 추모사를 통해 “나라가 어렵고 국민의 마음이 불안할 때 큰스님의 말씀과 위엄이 더욱 그립다. 성철 큰스님의 열반 2주기를 맞아 모든 사부대중의 의식개혁으로 새로운 한국불교를 이룰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고 말했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도 성철 스님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불교계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돈오돈수 돈오점수 (頓悟頓修 頓悟漸修)’ 논쟁입니다.}

    • 2011-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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