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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이 의사당 갤러리에는 로런스 스노든 미 해병대 중장이 앉아 계십니다.” 지난달 29일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에 나선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연설 초반 이렇게 말하며 갑자기 손을 들어 청중석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한 백발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순간 의사당 안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의 눈은 모두 노인에게로 향했고 이어 약속이나 한 듯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주인공은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5년 미군 중대를 이끌고 일본 이오(硫黃) 섬에 상륙했던 참전용사 스노든 중장이었다. 이오지마(硫黃島) 전투는 미국으로서는 상처가 깊은 전쟁이다. 태평양전쟁 전투 중에서 유일하게 미군이 일본군에 패한 전투이며 사상자도 많았다. 아베 총리가 이날 연설에서 미국에 뼈아픈 과거사인 이오지마 전투를 언급하며 여기에 참전했던 미군까지 섭외해 등장시킨 것은 미국에 대한 극진한 사과의 의미와 함께 일본은 과거사를 극복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청중의 반응이 뜨거워지자 직전까지만 해도 다소 긴장했던 표정이 역력했던 아베 총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날 오전 11시 17분부터 약 45분 동안 진행된 총리의 미 상하 양원 합동연설에서는 이 박수를 포함해 모두 45번의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10여 건이 전원 기립박수였다. 참고로 3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경우 22번의 기립박수를 받았고 2013년 5월 박근혜 대통령은 6차례의 기립박수를 포함해 40여 차례 박수를 받았다. 연설이 후반부에 접어들어 다소 지루하다고 느껴질 무렵 아베 총리가 “우리(일본)는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rebalancing) 노력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first, last, and throughout) 지지할 것”이라고 말하며 미국의 글로벌 동반자로서 책임을 다하겠다고 다짐하자 다시 한 번 큰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동맹관계를 확인한 아베 총리의 미 의회 연설에 대해 미국 언론은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과거사 사과 여부보다는 미일 동맹의 격상이나 미국의 주요 관심사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타결 여부에 더 초점을 맞추는 분위기였다. 워싱턴포스트(WP)는 ‘아베 총리가 일본을 위해 더 적극적인 역할을 천명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아베 연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수준으로 미일 동맹이 격상될 것임을 예고한다”고 강조했다. 로이터통신은 “자신(아베 총리)을 향한 비판론자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할 것으로 보이지만, 보수주의자로서 미국과 일본의 군사동맹 등 미래에 초점을 맞추는 데 연설의 무게중심을 두었다”고 평가했다. CNN은 “아베 총리가 의회 연설에서 ‘강한 일본’을 밀어붙였다(push)”고 표현한 기사에서 “미국의 글로벌 전략과 아시아 내 안보 질서에 일본이 더욱 깊이 관여하겠다는 비전을 대내외에 천명했다”고 평가했다. 미국 내 전문가들도 연설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 평가를 내놓았다. 제럴드 커티스 미 컬럼비아대 정치학과 교수는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방미와 의회 연설로 미일 군사동맹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진 계기가 됐다. 미 정부는 특히 이 점에 주목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예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비판적인 논평을 한 전문가도 있었다. 한미외교전문가 칼 프리도프 시카고국제문제협회 연구원은 WSJ 4월 30일 자에 기고한 글에서 “발 빠르고 능수능란한 아베 총리의 외교술이 박근혜 대통령을 압박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6월 미국에서 열릴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한일 관계 개선을 촉구할 것에 대비해야 한다”며 “아베 총리의 진취적 태도와는 달리 박 대통령은 한일 관계를 국익에 대한 문제보다는 개인적 이슈로 여기고 있다는 인식도 있다”는 식으로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이어 “박 대통령이 한일 정상회담을 계속 거부한다면 아베 총리의 역사관 때문이 아니라 한국의 고집이 (한일 관계 개선에) 문제라는 인식이 더 커질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아베 총리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사과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하는 시각도 많았다. 에드 로이스 하원 외교위원장은 “아베 총리가 동아시아 외교관계를 악화시키는 과거사 문제를 적절하게 다룰 기회를 활용하지 못해 매우 실망스러웠다”고 강조했다. 의회 전문매체인 ‘더 힐’은 “제2차 세계대전 위안부에 대한 사과가 부족했다”고 했다.워싱턴=신석호 kyle@donga.com·이승헌 특파원}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 전날 열린 미일 정상회담은 양국 밀월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28일 정상회담 후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는 통상의 외교적 표현을 뛰어넘는 이례적인 수사와 평가가 잇따랐다. 두 정상은 회담 후 발표한 공동비전성명에서 미일 관계를 ‘부동의 동맹(unshakable alliance)’이자 ‘글로벌 협력을 위한 플랫폼’으로 규정했다. 또 “미일 양국의 안보와 번영은 서로 얽혀 있으며(intertwined) 떼어놓을 수 없고(inseparable) 국경을 초월한다(not defined by national border)”고도 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 개정 등 정상회담 성과를 설명하면서 아베 총리 이름을 부르며 일본말로 “신조, 아리가토 고자이마스(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버락, 생큐”라고 화답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서툰 일본어로 “오타가이노 다메니(お互いのために·서로를 위해)”라고 말한 뒤 “바로 이런 정신이야말로 미일 동맹의 근간이며 전 세계에 본보기가 될 수 있는 동맹의 정신”이라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일본어로 말하는 모습은 NHK 등 일본 방송을 통해 반복적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밀월 분위기는 이날 저녁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열린 국빈 만찬에서 절정에 달했다. 3000여 명이 참석한 만찬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건배사를 하며 일본의 전통 단시(短詩)인 ‘하이쿠(俳句)’를 읊조리는 파격을 선보였다. 그는 “어린 시절을 보낸 하와이에서 유독 일본계 친구가 많았다”고 말한 뒤 “봄, 녹색 그리고 우정/미국과 일본/조화로운 감정”이라고 낭송했다. 마지막 대목은 일본어로 말했다. 이어 “찬란한 동맹(magnificent alliance)이 사계절 내내 오래가기를 바란다”며 건배를 제의했다. 백악관 측은 이스트룸을 벚꽃 생화로 장식했고 일본 술인 사케를 건배주로 선택했다. 아베 총리도 시종일관 여유로 가득했다. 그는 “어제도 숙소에서 의회 연설을 연습했다. 하도 많이 하니까 아내가 짜증을 내서 다른 방에서 잤다”며 좌중의 웃음을 유도한 뒤 “전 세계 어디에도 미일동맹과 같은 양자 관계는 없다. 미국과 버락이 어떤 도전에 직면해도 일본이 함께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그러고는 미국 여가수 다이애나 로스의 노래 ‘그 어떤 산도 높지 않아요(Ain‘t No Mountain High Enough)’의 한 대목을 인용하겠다면서 “그 어떤 높은 산도, 그 어떤 깊은 계곡도 내가 미국에 다가서려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워싱턴 외교 소식통은 “두 정상은 매우 친밀한 모습을 연출했다”며 “미일 양국은 이번 회담을 통해 양국 관계가 역내 동맹을 넘어 글로벌 동맹으로 격상되고 있음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시종일관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기존 입장을 재확인한, 우려했던 그대로의 연설이었다. ‘희망이라는 동맹을 향해(Toward an Alliance of Hope)’라는 제목처럼 미일동맹을 향한 강한 의지로 가득했지만 한국 등 피해국에 대한 배려와 사과는 없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사진)는 29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의사당에서 일본 총리로서는 사상 첫 상·하원 합동 연설을 하면서 “전후 일본은 앞선 대전(大戰)에 대한 ‘통절한 반성(deep remorse)’을 가슴에 안고 걸음을 시작했다. ‘(일본) 스스로의 행동(action)’이 아시아 여러 국가들에 고통(suffering)을 안겨 준 사실로부터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 대한 (내) 생각은 역대 총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이 ‘(일본) 스스로의 행동’이라는 말로 대체됐고 사죄라는 단어는 없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 대신 “분쟁 때 늘 상처받는 것은 여성이었다. 우리의 시대야말로 여성 인권이 침해받지 않는 세상을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돌려 말했다. 아베 총리는 또 “전후 눈부신 성장을 이룬 일본은 자본과 기술을 헌신적으로 쏟아 부어 다른 국가들의 성장을 지지했다”며 대표적인 사례로 한국을 강조하면서 일본이 선의를 갖고 한국의 경제 발전을 이끌었다는 취지로 말했다. 지역 안보에 대해서는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추진하는 미국의 노력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지할 것”이라며 중국 견제를 위한 미국의 전략적 파트너는 일본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미 상·하원 의원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하원 본회의장에 입장한 아베 총리는 40분간에 걸쳐 영어로 연설했다. 이날 아베 총리의 연설로 미일동맹은 강화되는 한편 한국을 비롯한 중국 등 아시아 주변국과 일본의 관계는 더 냉각될 것으로 보여 향후 동아시아 외교 안보 지형에 적지 않은 소용돌이가 예상된다.워싱턴=이승헌 ddr@donga.com / 도쿄=배극인 특파원}
아베 신조 총리는 이날 연설에서 굳건한 미일 동맹을 위해서는 양국이 최종 조율 중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반드시 필요하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TPP는 단지 경제적 이익을 넘어 미일 양국의 안보에 관한 협정”이라며 “장기적 관점에서 미일 양국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최종 타결이 임박했다(goal is near)”고 했다. 한 단계 격상된 미일 동맹을 위해서는 군사협력은 물론이고 TPP를 축으로 하는 미일 간 경제협력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또 “미일 양국은 법치,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라는 공통의 가치를 TPP 타결을 계기로 전 세계에 확산시켜야 한다”고도 해 TPP가 단순히 경제동맹 차원을 넘어서는 가치동맹의 의미가 있음도 시사했다. 아베 총리는 “TPP 타결을 계기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일 양국이 향후 경제협력 및 무역과 관련한 기준을 주도적으로 제시하고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역내 경제주도권을 회복해보겠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미일 양국은 공정하고 역동적이며 지속가능한 시장의 건설을 주도해야 한다. 아태 지역 내 시장은 어느 특정 국가의 독단적 의도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기후 변화 등 환경 문제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밝혀 사실상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을 주도한 중국의 부상을 미국과 함께 견제하겠다는 뜻도 분명히 했다. ‘아베노믹스’를 홍보하는 데에도 연설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즉 ‘잃어버린 10년’ 등 일본의 장기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주도하에 대폭적인 규제 개혁 및 대대적인 사회 구조 혁신을 전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기업 관련 정책은 철저하게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고 있으며 돌처럼 깨지지 않던 각종 규제도 의료 및 에너지 분야에서 깨지기 시작하고 있다. 인구 감소에 따른 노동력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치라도 하겠다고 결심했다. 일본 사회의 오랜 관습을 바꿔 각 직종에서 여성이 더 활발히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어 “곧 일본이 대대적인 도약을 앞두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일본은 구조 개혁을 통해 오로지 앞만 보고 가고 있다. 이와 관련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대안이 없다(TINA·There is No Alternative)’.”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미국을 방문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과거사 물타기’ 전략이 노골화되고 있다. 아베 총리는 27일(현지 시간) 보스턴 하버드대 강연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하지 않은 채 이날 오후 워싱턴으로 이동해 알링턴 국립묘지와 링컨 기념관,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잇달아 방문했다. 위안부 동원, 식민지배, 침략 등 자국의 과거 행위는 사과하지 않으면서 타국의 전쟁 관련 추모시설을 찾아 ‘역사를 기억하자’ ‘평화를 지키자’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강조한 것. 알링턴 묘지 참배로 제2차 세계대전 발발에 대해 미국 측에 사과한다는 메시지를 거듭 표명하고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선 자신의 과거사 왜곡 행보에 비판적인 미국 내 유대계를 끌어안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예정에 없던 링컨 기념관을 방문한 것은 노예 해방을 일궈낸 링컨 전 대통령의 통합과 화해 정신을 자신의 행보와 연결시키려는 정치적 노림수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아베 총리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단둘이 30분간 링컨 기념관을 방문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강조한 게티즈버그 연설이 새겨진 문구 등을 둘러봤다. 백악관 측은 “이번 달에 남북전쟁 종식과 링컨 대통령 서거 150주년을 맞는 만큼 두 정상이 미국 역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장소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설명했다. 링컨 기념관 방문은 아베 총리 방미 스케줄에 없던 것으로 일본 측이 물밑에서 백악관에 오바마 대통령과 동행할 것을 수차례 요청한 끝에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 총리는 이어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찾아 45분간 추모했다. 특히 이날 방문에는 1940년 당시 리투아니아 주재 일본대사관의 공사였던 스기하라 지우네(杉原千畝) 씨로부터 비자를 발급받아 나치 수용소에서 탈출했던 줄리 바스크, 마샤 네온, 레오 말라메드 씨 등 홀로코스트 생존 유대인들을 초청하는 이벤트도 마련했다. 스기하라 씨는 당시 2000여 명의 유대인에게 비자를 발급했다. 아베 총리는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스기하라 씨의 행동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낀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이 수천 명의 목숨을 살렸다”고 말했다. 위안부 강제 동원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제가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인도주의적 조치에 나섰다는 점을 강조한 것. 그러면서 박물관 정문에 걸려 있는 ‘네버 어게인(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이라는 현수막을 언급하며 “(저 문구처럼) 엄숙해지는 것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다. 앞서 아베 총리는 이날 오전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 매사추세츠공대(MIT)를 방문해 일본 현대정치, 외교에 관한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MIT와 컬럼비아대(뉴욕), 조지타운대(워싱턴)에 각각 500만 달러(약 54억 원) 등 총 160억 원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고 일본 산케이신문이 전했다. 이는 미국 학계에 지일파를 늘리고, 일본에 대한 우호적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시도로 해석된다.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지난해 4월 도쿄 정상회담 이후 1년 만에 다시 만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백악관 정상회담은 최고의 의전 속에 치러졌다. 아베 총리는 이날 오전 9시경 백악관 남쪽 뜰에 도착해 공식 환영을 받고 오바마 대통령의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에서 회담을 시작했다. 오바마 대통령과 비슷한 푸른색 넥타이를 맞춰 멘 아베 총리는 30여 분간의 공식 환영식에서 시종 일관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나눴다.○ ‘중국 견제’ 초점 정상회담에 이어 발표된 미일 비전 공동성명은 “양국 간 파트너십을 변환시킬 역사적인 한 걸음”이라는 표현으로 일본의 자위대가 미군과 함께 세계 어느 곳에서라도 다양한 분쟁과 위기상황에 대처할 수 있게 된 새로운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양국 정상은 가이드라인 개정과 관련해 아시아태평양 지역 내 안보 이슈를 점검했다. 가장 큰 이슈는 단연 군사 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이었다. 성명은 “힘과 강압에 의한 일방적인 현상 변경으로 주권에 대한 존중과 영토의 일체성을 해치는 행동은 국제 질서에 대한 도전”이라는 문구도 포함시켜 중국을 직접적으로 겨냥했다.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영유권을 둘러싸고 중국과 일본이 대립할 경우 미국은 일본의 편에 서겠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미국은 성명에 “일본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에 일본을 포함하도록 개혁되길 바란다”고 명시해 일본이 군사 대국에서 국제정치 대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길까지 제시했다. 대신 일본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체결에 속도를 내는 데 합의하는 것으로 화답한 것으로 평가된다. 두 정상은 성명에서 “적대국에서 동맹으로 발전한 양국의 경험은 모든 당사자들이 그것을 얻기 위해 전념하면 화해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며 과거사 문제에 대한 ‘화해’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북한 핵·미사일 프로그램 개발 문제도 논의했다. 두 정상은 별도로 발표한 핵확산금지조약(NPT) 공동성명에서 “북한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이 금지한 추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하는 대신 완벽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통해 NPT 체제로 복귀하라”고 촉구했다.○ 백악관 만찬 준비에 일식 요리사 초청 두 정상이 만난 28일은 일본이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부의 통치에서 벗어난 날이었다. 63년이 지난 이날 일본은 명실상부한 미국의 최강 동맹국으로 부상한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환영식 인사말에서 일본어로 말하며 친밀감을 드러냈다. 오바마 대통령은 ‘굿모닝’ 대신 일본말로 ‘오하요 고자이마스’(아침 인사)라고 말한 뒤 아베 총리 내외의 이름을 부르며 “신조와 아키에의 방문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아베 총리는 “3년 전 총리가 됐을 때는 미일 관계를 복원하는 게 급선무였는데 지금은 다시 정상화돼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28일 백악관 공식만찬에는 300여 명의 내외 귀빈들이 초대된다. 백악관이 미리 공개한 정상회담 관련 자료에 따르면 만찬이 진행될 백악관 내 ‘이스트 룸’은 이날 저녁 사실상 ‘일본 식당’으로 변신한다. 메인 요리로는 고베 쇠고기로 알려진 와규의 미국종(아메리칸 와규)을 사용한 안심 스테이크가 준비된다. 특히 만찬 건배주로는 통상 사용되는 와인이 아니라 아베 총리가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진 최고급 사케인 ‘닷사이 준마이 다이긴조(獺祭 純米大吟釀)’가 사용된다. 백악관은 이번 만찬 준비를 위해 미국의 유명 일식 요리사인 모리모토 마사하루 씨를 ‘게스트 셰프’로 초청했다. 모리모토 씨는 미국의 인기 요리 대결 프로그램인 ‘아이언 셰프’에서 우승하기도 한 유명 인사다. 워싱턴=신석호 kyle@donga.com·이승헌 특파원}
미국을 방문 중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27일(현지 시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제2차 세계대전 시 벌어진) 인신매매(human trafficking)에 대해 가슴이 아프고 고통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고노 담화(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하고 사과한 담화)와 입장이 다르지 않다”고 말했으나 사과나 사죄의 뜻은 밝히지 않았다. 이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한 것으로 29일 일본 총리 최초의 미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사과하라는 한국, 중국 및 미국 내 일각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으로 해석된다. 아베 총리는 이날 보스턴 하버드대 케네디행정대학원에서 열린 특강에서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개입했는지 여부에 대해 여전히 부인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이전 총리들과 심정이 다를 게 없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여러 현실적인 노력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20세기에는 역사적인 충돌로 여성 인권이 침해받았지만 (적어도) 21세기에는 그렇지 않다”며 “일본 정부는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 전력을 다해 노력해왔다”고 주장했다.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케네디행정대학원 교수는 특강 시작 전 학생들에게 “일본 역사상 가장 강력한 (리더십을 보이고 있는) 총리”라고 아베 총리를 소개하기도 했다. 아베 총리는 “(중국 한국 등) 아시아 지역 내 다른 국가와의 갈등 해소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에는 “2차 대전과 관련해 깊은 후회(deep remorse)를 표명한 바 있다”고 말한 뒤 “일본은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과 서로 협력하고 발전하기 위해 관계 개선을 원한다”고 답변했다. 그는 특히 중국의 부상과 관련해선 “중국의 군사주의는 이웃 국가들이 우려할 만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아베 총리는 앞서 이날 오전 마틴 월시 보스턴 시장과 함께 2013년 보스턴 마라톤 테러 사건이 발생한 결승선 현장을 찾아 헌화했다. 보스턴 마라톤 테러 사건에 대한 최종 재판이 진행 중인 점을 의식해 미국 여론을 잡겠다는 행보로 풀이된다. 그는 26일에는 방미 첫 일정으로 보스턴에 도착해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유일한 생존 자녀인 캐럴라인 케네디 주일본 미국대사의 안내를 받고 케네디 도서관 내 기념관을 방문했으며, 이날 오후엔 존 케리 미 국무장관과 보스턴 자택에서 비공개 만찬을 갖고 방미 기간의 주요 의제를 논의했다.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미국과 일본이 아베 신조(安倍晋三·사진) 총리의 방미를 계기로 양국 간 군사협력의 수준과 범위를 규정한 미일 방위협력지침(일명 가이드라인)을 27일 개정해 사상 최고 수준의 군사동맹을 구축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전제로 한 이번 가이드라인 개정으로 군사 대국화로 가는 교두보를 확보하게 됐다. 미국의 존 케리 국무장관과 애슈턴 카터 국방장관, 일본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상과 나카타니 겐(中谷元) 방위상은 이날 미국 뉴욕에서 외교·국방장관 안전보장협의위원회(2+2회의)를 갖고 1997년 이후 18년 만에 미일 안보 가이드라인을 개정했다. 새 지침은 미군과 자위대의 협력 범위를 원유 수송로인 중동 호르무즈 해협을 포함한 범지구적으로 확대했다. 우주 공간과 사이버 공간에서의 협력도 규정했다. 새 지침은 또 제3국에 대한 무력공격 대처와 관련해 “주권의 충분한 존중을 포함한 국제법에 따른다”고 규정했다. 한국을 직접 명기하지는 않았지만 유사시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진입을 우려하는 한국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한국 정부 당국자는 “우리의 지속적인 요구사항이 반영된 점에 주목한다”며 “향후 일본의 안보 법제화와 가이드라인 실행 과정에서도 이런 정신이 잘 반영되는지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개정은 한반도 유사시 주한미군 및 주일미군의 기동성과 전력을 보강하는 측면이 있어 한국에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아베 정부의 막무가내 식으로 왜곡된 역사인식으로 한국의 불신이 높은 상황이라 일본의 군사 대국화에 대한 한국의 경계감을 높이고 동북아 군비경쟁을 부추기는 역효과도 우려된다. 미국은 강화된 미일 동맹을 향후 한미일 동맹으로 확장하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지만 중국의 반감도 한층 거칠어질 것으로 보여 한국 정부는 한미 동맹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국익을 지키는 지혜로운 외교를 펼쳐야 할 당위성이 한층 높아졌다. 한편 미국을 방문 중인 아베 총리는 27일 보스턴 하버드대 케네디행정대학원 특강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나는 가슴이 아프고 고통과 비애를 느낀다”고 입장을 밝혔으나 사죄나 사과는 하지 않았다. 아베 총리는 이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전임 총리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면서 “일본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여러 현실적인 노력을 했다”고 주장했다.워싱턴=이승헌 ddr@donga.com / 도쿄=배극인 특파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부인인 미셸 여사(사진)도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방미 기간에 ‘내조 외교’에 적극 나선다. 특히 아베 총리의 부인 아키에 여사와 여러 차례 만날 예정이어서 어느 때보다 강화되고 있는 미일 관계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셸 여사는 지난달에도 ‘나홀로’ 일본을 방문해 아키에 여사와 함께 여러 일정을 소화하기도 했다. 그동안 미셸 여사는 외국 정상의 부인들과 교류하는 데 적극적인 편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미셸 여사는 2009년 백악관 입성 이후 오바마 대통령의 네 차례 방한에 한 번도 동행한 적이 없다. 미셸 여사는 27일 오전 백악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28일 미일 국빈만찬에 사용할 그릇 등 국빈만찬 식기(state china service)에 대해 직접 설명한다. 오바마 대통령 취임 후 여덟 번째 백악관 국빈만찬을 맞아 미셸 여사는 관례대로 만찬 식기의 디자인을 직접 고르는 등 만찬 행사 전반에 관여했다고 백악관 측은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 임기 중 한국 대통령과의 백악관 국빈 만찬은 2011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의 만찬이 유일하다. 이에 앞서 미셸 여사는 만찬 당일 오전에는 아키에 여사와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 주의 그레이트폴스 초등학교를 방문해 미국인 학생들의 일본어 몰입교육 수업을 참관할 예정이다. 아베 총리 내외는 미국에서 대표적인 일본어 몰입교육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이 학교를 이전에도 방문한 적이 있다. 학교 측은 이들의 방문을 기념해 교내 ‘일본정원’에 벚나무를 심을 계획이라고 백악관 측은 밝혔다.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자신이 참여한 대화라면 폭넓게 음성 및 통화녹음을 허용하는 한국과 달리 해외에서는 녹음 자체를 규제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미국이다. 미국 연방법은 원칙적으로 ‘구두 의사교환(oral communication)’을 의도적으로 가로채는 자에 대해 벌금형 또는 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자신과 다른 사람 간의 통화 내용을 녹음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부 예외를 인정하기도 하지만 메릴랜드와 코네티컷 등 12개 주는 양측의 동의 없는 대화녹음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 워싱턴 정가에선 대화 또는 통화 시 녹음에 대해 꽤 민감한 편이다. 미국 언론이 주요 인터뷰를 위해 통화하면서 녹취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중진급 연방의원들이 전화 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민주당 4선인 제리 코널리 연방하원의원 측은 “사무실로 무수히 많은 인터뷰 요청 전화가 오지만 보안상의 이유 등으로 대부분 응하지 않는다. 직접 만나거나 TV를 통한 인터뷰에 주로 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가별로 다른 녹음 법령 때문에 스마트폰의 녹음 기능도 국가에 따라 관련 기능을 따로 넣거나 빼고 있다. 민감한 부분은 일반 녹음이 아닌 ‘통화 중 녹음’ 기능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국내 모델의 경우 스마트폰에 ‘통화 중 녹음’을 기본 기능으로 넣고 있다. 하지만 북미와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사생활 보호 등에 관련 법률 때문에 이 기능을 뺀 채 공급하고 있다. 국내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러시아 브라질 인도 등 몇 개 국가에서 판매하는 물량에만 통화 중 녹음 기능을 지원하고 있다. 반면 애플 아이폰이나 캐나다 블랙베리 등은 통화 중 녹음 기능 자체가 아예 없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는 나라에서 판매되는 물량에만 소프트웨어(SW) 변경을 통해 통화 중 녹음 기능을 추가해 판매한다”고 설명했다. 반면 스마트폰 화면에서 쓸 수 있는 녹음 기능은 법적인 문제가 없어 나라 구분 없이 폭넓게 탑재된다. LG전자 관계자는 “녹음기는 각 이동통신사들의 요청에 따라 탑재 여부를 결정한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판매되는 아이폰에도 ‘음성 메모’라는 이름의 앱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 김창덕 기자}

미국 연방 하원의원들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29일)에서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라고 공개 촉구하고 나섰다. 마이크 혼다, 찰스 랭걸, 스티브 이스라엘, 빌 패스크렐, 그레이스 멍 등 민주당 지한파 의원 5명은 21일(현지 시간) 하원 전체회의 중에 사전 예고 없이 자유발언을 신청해 아베 총리의 과거사 사과를 촉구했다. 이들이 발언한 하원 본회의장은 아베 총리가 연설할 바로 그 장소다. 2007년 미국 하원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87)는 이날 직접 하원 본회의장을 찾아 방청석에서 의원들의 발언을 지켜봤다. 혼다 의원은 약 18분간의 발언을 통해 “어떤 사람들은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충분히 사과했다고 말하지만 최근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시도를 보면 우리가 평화와 화해를 위해 한 걸음 뗄 때 일본 정부는 두 걸음씩 후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연설 도중 왜곡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를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이에 앞서 발언대에 선 이스라엘 의원은 “아베 총리는 성노예로 끌려간 수십만 명의 여성들에 대한 잔학행위를 솔직히 자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패스크렐 의원도 “아베 정권은 식민지 여성들이 성노예로 끌려가 겪었던 상처와 고통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6·25전쟁 참전 용사인 랭걸 의원은 “일본이 아베 총리 연설을 계기로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신뢰가 부족하다’는 낙인에서 벗어나도록 미 의회가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중국계인 멍 의원은 서면으로 제출한 발언을 통해 “아베 총리가 고노 담화를 무력화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듯한 과거 언급들에 대해 해명하라”고 촉구했다. 이 할머니는 의원들의 발언이 끝난 후 본회의장에서 기자들과 만나 “(아베 총리는 나 같은) 역사의 증인들을 지금이라도 눈을 크게 뜨고 똑똑히 보라”며 울먹였다. 하지만 일본은 모르쇠로 일관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사에 겐이치로(佐佐江賢一郞) 주미 일본대사는 이날 워싱턴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아베 총리는 이미 고노 담화 등 역대 정권의 역사 인식 전체를 계승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며 아베 총리의 사과 가능성을 사실상 일축했다. 한편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아베 총리를 미국 방문 첫날인 26일 보스턴 자택으로 초대해 만찬을 함께하기로 했다고 마리 하프 국무부 대변인 대행이 21일 밝혔다. 케리 장관이 아베 총리를 초대한 것은 개인적 친밀도를 높여 양국 사이의 민감한 현안을 풀려는 이벤트로 풀이된다. 이와 함께 아베 총리는 미국 방문 기간에 워싱턴에 있는 제2차 세계대전 국립기념비를 방문할 계획이라고 AFP통신이 22일 보도했다. 아베 총리의 기념비 방문은 과거 전쟁 역사에 대한 주변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상징적 행보라고 이 통신은 전했다. 워싱턴=이승헌 ddr@donga.com·신석호 특파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29일)을 앞두고 미 정치권이 일본 정부의 ‘금품 로비’ 때문에 아베 총리의 연설을 무리하게 허용했다는 주장이 유력 언론매체에 실려 파장이 예상된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인 에몬 핑글턴 씨(사진)는 19일(현지 시간)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실린 ‘존 베이너 미 하원의장이 위안부 피해자를 모욕하면서까지 일본 역사상 가장 해악스러운(most toxic) 총리에게 아부하다’란 제목의 칼럼에서 이같이 지적했다. 핑글턴 씨는 “지금 미 의회는 그 어느 때보다 돈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일본만큼 미 의회에 돈다발(greenbacks)을 살포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며 “베이너 의장이 아베 총리의 의회 연설을 결정한 이유는 바로 돈”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어 그는 “외국인이 미국 정치를 후원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법이지만 외국 기업이 미국 내 자회사를 통해 완벽하게 합법적으로 미국 정치권에 돈을 넣을 수 있다”며 “‘주식회사 일본’은 자동차와 전자산업 분야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바탕으로 미 의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독특하게 자리매김돼 있다”고 주장했다. 포브스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편집장을 지낸 핑글턴 씨는 아베 총리에 대해 “일본 총리로서 처음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을 하는 특권을 받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래 의회 연설에 가장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까지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 샤를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등이 연설 초청을 받았는데 (아베 총리의 연설로) 미 상·하원 합동연설의 가치가 추락됐다(debased)”고 직격탄을 날렸다. 핑글턴 씨는 “(과거사 이슈와 관련한) 아베 총리의 가장 중요한 어젠다는 ‘사과 안 하기’”라며 “아베 총리는 ‘오웰리안’(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체주의자라는 뜻) 같은 태도로 일제의 악행으로 고통을 겪은 아시아와 미국, 서유럽, 러시아의 수백만 명을 모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조차 위안부 관련 증거를 부인하지 않는다. 이미 일본 지도자들이 공개 사과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 사안이라는 점에서 (아베 총리의 발언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은 “아베 총리가 의회 연설에서 과거사 문제에 대해 원론적인 수준에서 언급하고 넘어갈 경우 만만찮은 후폭풍이 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경제정책과 통화정책의 수장(首長)들이 금리 문제에서 모처럼 한목소리를 냈다. 미국의 금리 인상에 한국이 즉각 따라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회의 참석차 미국 워싱턴을 방문 중인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7일(이하 현지 시간) 기자들과 만나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이 꼭 한국의 금리 인상으로 이어져야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이 금리를 올린다고 일본이나 중국도 함께 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미국의 금리 움직임 뿐 아니라 주변 국가나 한국의 경제 상황을 종합해 한국은행에서 판단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18일에도 최 부총리는 기자들과 만나 미국이 9월경 금리를 올려도 한국이 동조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피력했다. 같은 행사에 참석 중인 이주열 한은 총재 역시 18일 기자간담회에서 “미국 금리가 우리로서 중요한 고려사항이지만 (미국이 올린다고) 곧바로 올려야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인상) 속도 및 일본, 유럽 쪽 정책 방향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양측은 노사정 대타협, 공무원연금 개혁 등 구조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한목소리를 냈다. 최 부총리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서 청년을 고용한 기업에 정부 재정지원을 하겠다”고 밝혔다. 노사정 합의 불발과는 별개로 정부가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가동하겠다는 얘기다. 이 총재도 구조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각국 경제수장들은 공동선언문에서 “금융시장 변동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부정적 파급 효과를 최소화하기 위해 각국이 정책 기조를 신중히 조정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세종=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사진)이 16일(현지 시간) 자신의 차기 대선 출마를 막기 위해 정권 차원에서 경남기업에 대한 수사가 진행됐다는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의 주장과 관련해 “(성 회장을) ‘충청포럼’ 등 공식 석상에서 본 적이 있어 알고 있지만 특별한 관계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반 총장은 이날 미국 워싱턴 의회에서 공화당 소속 에드 로이스 하원 외교위원장과 회동한 뒤 기자들과 만나 “언론 보도를 봐서 (성 회장과 관련된) 내용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안은 나와 전혀 관계가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국내 정치에 관심이 없고 (사무총장 일로 바빠) 그럴 여력도 없다”며 “이런 입장을 이전에도 분명히 밝힌 적이 있는데 이런 게 또 나와 당혹스럽다”고 덧붙였다. 반 총장은 이날 오후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열린 한 행사에선 퇴임 이후 자신의 노후 계획을 스스로 공개하기도 했다. 그는 이 행사의 만찬 연설에서 “퇴임 후에는 그동안 나를 위해 고생한 아내를 좋은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고 특히 손자 손녀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이는 대권 도전과 같은 정치적 욕심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별한 관계가 아니다”라는 반 총장의 직접 해명에도 성 회장 측에선 다른 목소리가 계속 나오고 있다. 성 회장의 측근인 충남 서산 지역 관계자 A 씨는 17일 “두 사람이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며 반 총장과 관련된 2013년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2013년 8월 26일 성 회장이 충남 서산, 태안 지역 주민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서울의 한 호텔에서 서산장학재단 주관 세미나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 반 총장이 와서 인사말을 하고 기념촬영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반 총장이 당시 ‘(유엔 업무로 바빠) 이런 자리에 올 수 없는 형편인데, 성 회장에게 큰 신세를 진 사람이기 때문에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언론인 출신인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송승호 특임교수도 “성 회장은 반 총장을 업고 킹메이커가 되려고 했다. 성 회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서산장학회는 그 같은 프로젝트를 추진할 전국적 네트워크였던 셈”이라며 “반 총장도 그 사실을 알고 용인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새뮤얼 라클리어 미국 태평양사령관(사진)은 16일(현지 시간)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의 한반도 배치와 관련해 “우리는 (현재 사드 포대가 있는) 괌이 아닌 한반도에 사드 포대를 잠정적으로 추가 배치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날 미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라클리어 사령관은 북한 탄도미사일에 대한 방어 능력 강화와 관련해 “(미국의) 동맹인 일본, 한국과 협력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생산적”이라고 평가하며 이같이 말했다. 이는 미군의 최고위 관계자가 사드의 한반도 배치가 ‘현재진행형’임을 공개적으로 확인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한국 정부는 논의 자체가 없었다는 입장을 거듭 밝힌 바 있다. 이날 청문회에 함께 나온 커티스 스캐퍼로티 주한미군 사령관은 공화당 뎁 피셔 의원이 ‘사드 포대를 한반도에 배치하는 데 대한 중국의 반대 목소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사드 배치) 문제는 한국이 결정할 문제이고, 그들을 방어하는 문제 그리고 그곳(한국)에 주둔한 아군(미군)을 방어하는 문제와 연관돼 있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이어 “만약 사드 체계의 영향력이 실제로 적용된다면 한반도의 방어에 집중될 것”이라며 “그 너머로는 영향력을 갖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한미일 3국이 16일(현지 시간) 미 국무부 청사에서 외교차관 협의를 가졌으나 29일로 예정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 메시지 내용에 대해선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아베 총리가 올바른 역사인식을 담은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는 한국의 요구에 사이키 아키타카(齋木昭隆)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은 “연설문 초안을 보지 못했다”며 구체적 언급을 피했다. 그는 “우리(일본)도 역사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으며 아베 총리가 그동안 공개적으로 과거사 문제에 대한 견해를 표명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아베 총리가 연설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이슈에 대해 한국 정부와 여론이 납득할 만한 수준의 사과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워싱턴 외교가의 관측을 뒷받침하는 것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이어 사이키 차관은 “한국과 일본은 지난 50년간 매우 긍정적인 관계를 보여 왔다”며 “이를 더 나은 관계로 발전시켜 나갈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과거보다는 미래에 초점을 맞추자는 의도가 담긴 말로 해석된다. 이에 조태용 외교부 제1차관은 사이키 차관과의 양자 회동에서 “과거사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은 확고한 원칙과 신념이 있다”며 거듭 일본의 성의 있는 과거사 반성과 입장 표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북한 핵문제와 경제 등 다른 분야에서는 협력을 증대시켜 나갈 것이라고 밝혀 과거사와 안보를 떼어내는 ‘투 트랙’ 접근을 공식화했다. 한편 일본의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아베 총리가 22일부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리는 반둥회의 60주년 기념 정상회의 연설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을 표명하되 사죄는 언급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17일 보도했다. 또 이 신문은 아베 총리가 29일 미 의회 연설에서도 미국과의 ‘화해’와 미일동맹을 통한 국제사회 공헌을 강조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아베 총리는 사죄 언급이 없는 두 연설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을 보고 8월 전후 70년을 기념해 발표할 아베담화 내용을 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워싱턴=이승헌 ddr@donga.com / 도쿄=박형준 특파원}
“박근혜 정권이 미국처럼 전임 정권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평가를 역사에 맡겼다면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점입가경으로 전개되고 있는 ‘성완종 게이트’를 한발 떨어진 미국 워싱턴에서 지켜보는 기자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현 정권이 이전 정권의 역사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이전 정권도 현 정권에 대놓고 부담을 주는 우리의 후진적 전·현직 정권 문화 말이다. 이번 논란도 박근혜 정권이 이명박 정권이 ‘치적’으로 내세우는 자원개발 관련 의혹을 파헤치던 중 성완종 전 회장의 경남기업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제 발등 찍기’와 아노미 수준의 정치적 폭풍을 불러온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불법 정치자금 문제는 경위를 막론하고 언제라도 불거지면 검찰이나 필요하면 특검이 수사해 이를 명백히 밝히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이전 정권 손보기 과정에서 전혀 예상치않은 부산물로 터져 나오고, 결국 국정이 올스톱 돼 주요 이슈가 발붙일 틈이 없는 ‘블랙홀’이 되는 상황은 생산적이고 체계적인 정치 선진화 논의와는 다른 문제다. 미국 현대 정치사에서도 현 정권이 이전 정권과 대립각을 세운 경우는 많았다. 하지만 검찰 등 사정기관을 동원해 손보기에 나서다 자신들도 감당하기 힘든 정치·사회적 소용돌이를 만드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그렇다. 그는 2009년 집권 전 이라크 전쟁 중단을 대표 공약으로 내세울 정도로 전임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을 비판하고 공격했다. 우리 같으면 집권 후 당장 의회 ‘이라크전 청문회’에 세울 수준이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그대로의 역사는 인정했다. 그는 2012년 6월 부시 전 대통령을 백악관에 초청해 “취임 후 하얀 머리가 늘면서 부시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전직 대통령이 직면했던 도전과 고뇌를 이해할 수 있었다”며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전을 결정한 당시 상황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정치적 행보는 거꾸로 자신에게 ‘정치적 공간’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당초 계획과 달리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군 철수 시점을 추후로 연기한다고 밝혔으나 공화당에서 이를 말 바꾸기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다. 한미 간 민주주의 역사가 다른 만큼 전·현직 문화를 수평 비교하긴 어렵다. 그러나 전·현직 정권이 서로를 최소한 인정하고 ‘윈윈’한다면 그만큼 안정된 정치·사회적 환경에서 정치 개혁 등 주요 이슈를 논의하고 추진할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당장은 ‘성완종 게이트’의 엄정한 수사와 진상 규명이 최우선이겠지만, 사건이 잦아들면 우리 정치권이 이번 논란을 야기한 배경 중 하나인 전·현직 정권 문화를 한번 진지하게 들여다봤으면 한다.워싱턴=이승헌 특파원ddr@donga.com}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이 12일 공개한 ‘시작합니다(Getting started)’라는 제목의 2분 19초 분량의 대선 출마 동영상에는 한동안 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2009년 금융위기 이후 각자 분야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중산층, 서민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딸을 혼자 키우는 젊은 엄마, 창업을 고민하는 청년, 2세를 기다리는 부부, 은퇴한 노인 등이 잇따라 나와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백인은 물론이고 흑인, 아시아인, 히스패닉 등 다양한 인종을 등장시켜 ‘표의 확장성’을 노린 것도 눈에 띈다. 클린턴 전 장관은 동영상 시작 1분 30초 후에야 비로소 나온다. 빨간색 블라우스에 감색 정장 재킷을 차려입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그는 “평범한 미국인들은 챔피언을 필요로 하고 있고 내가 그 챔피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출마 영상은 2008년 대선 때와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클린턴 전 장관은 2007년 1월 출마 영상에서 워싱턴 인근 자신의 대저택 소파에 앉아 1분 44초 내내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는 다소 거만한 모습이었으나 이날 영상에선 다소곳하게 느껴질 정도로 ‘낮은 자세’를 유지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번 대선에선 7년 전과 전혀 다른 힐러리를 보게 될 듯하다”고 평가했다. ‘힐러리 캠프’의 핵심 멤버에 대한 관심도 집중되고 있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우선 클린턴 전 장관의 핵심 측근 중에서는 셰릴 밀스 전 국무장관 비서실장, 후마 애버딘 전 국무장관 수행실장, 제이크 설리번 전 대선캠프 정책부의장, 닉 메릴 현 캠프 대변인, 필립 라인스 전 국무장관 대변인 등이 핵심 역할을 맡게 될 것으로 보인다. 클린턴가의 ‘돈줄’로 통하는 테리 매콜리프 버지니아 주지사는 이번에도 선거자금 모금에 깊이 관여할 것으로 보인다. 2월까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을 도운 존 포데스타 전 백악관 선임고문은 캠프 운영을 총괄하게 된다. 오바마 캠프에서 여론조사를 전담한 조엘 베넨슨도 가세한다. 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12일 공개한 ‘시작합니다(Getting started)’라는 제목의 2분19초 분량의 대선 출마 동영상에는 한동안 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2009년 금융위기 이후 각자 분야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중산층, 서민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딸을 혼자 키우는 젊은 엄마, 창업을 고민하는 청년, 2세를 기다리는 부부, 은퇴한 노인 등이 잇따라 나와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백인은 물론 흑인, 아시아인, 히스패닉 등 다양한 인종을 등장시켜 ‘표의 확장성’을 노린 것도 눈에 띈다. 클린턴 전 장관은 동영상 시작 1분30초 후에야 비로소 나온다. 빨간색 블라우스에 감색 정장 재킷을 차려입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그는 “평범한 미국인들은 챔피언을 필요로 하고 있고 내가 그 챔피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출마 영상은 2008년 대선 때와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클린턴 전 장관은 2007년 1월 출마 영상에서 워싱턴 인근 자신의 대저택 소파에 앉아 1분44초 내내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는 다소 거만한 모습이었으나 이날 영상에선 다소곳하게 느껴질 정도로 ‘낮은 자세’를 유지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번 대선에선 7년 전과 전혀 다른 힐러리를 보게 될 듯 하다”고 평가했다. ‘힐러리 캠프’의 핵심 멤버에 대한 관심도 집중되고 있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우선 클린턴 전 장관의 핵심 측근 중에서는 셰릴 밀스 전 국무장관 비서실장, 후마 에버딘 전 국무장관 수행실장, 제이크 설리반 전 대선캠프 정책부의장, 닉 메릴 현 캠프대변인, 필립 라인스 전 국무장관 대변인 등이 핵심 역할을 맡게 될 것으로 보인다. 클린턴가의 ‘돈줄’로 통하는 테리 맥컬리프 버지니아 주지사는 이번에도 선거자금 모금에 깊이 관여할 것으로 보인다. 2월까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을 도운 존 포데스타 전 백악관 선임고문은 캠프운영을 총괄하게 된다. 오바마 캠프에서 여론조사를 전담한 조엘 베넨슨도 가세한다. 그는 민주당 진영에서 가장 실력 있는 여론조사 전문가로 꼽혀 클린턴 전 장관이 오랫동안 영입에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68·사진)이 2016년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다시 대권 도전에 나섰다. 민주당과 공화당을 통틀어 각종 여론조사에서 대선 후보 지지도 1위를 달리고 있는 클린턴 전 장관이 출마를 공식화하면서 워싱턴 정가는 급속히 대선 정국으로 재편될 것으로 보인다. 클린턴 전 장관은 12일 트위터에 공개된 온라인 동영상을 통해 “2016년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미 언론들은 2008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클린턴 전 장관이 이번에는 다른 선거 전략을 들고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귀족 정치인 이미지에서 중산층 지킴이로 클린턴 전 장관은 2008년 경선에서 패한 뒤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민주당 의원들을 대상으로 ‘살생부’까지 작성해 가며 분루(憤淚)를 삼켰다. 그러다 오바마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여 2009년부터 4년간 국무장관을 지내면서 대통령직 수행에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 외교 안보 현안과 행정 경험을 쌓았다. 그래서인지 정치 전문 매체인 ‘폴리티코’는 “클린턴 전 장관이 이번 대선에선 전혀 다른 선거 캠페인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클린턴 전 장관 측은 이를 ‘힐러리 2.0’이라고 부른다”고 덧붙였다. 그가 내건 새로운 선거 전략의 핵심은 귀족 정치인 이미지를 벗고 중산층을 보듬으며 밑바닥 표심을 잡는 이른바 ‘로 키(low key)’ 전략인 것으로 전해졌다. 화려한 출정식을 피하고 출마 선언으로 ‘트위터’를 활용한 것도 중산층과 미래 세대인 젊은 유권자층을 껴안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일대 법학대학원 출신 변호사, 40대 백악관 안주인, 뉴욕 주 연방 상원의원 등 화려한 길을 걸어왔던 클린턴 전 장관은 2008년 대선에서는 ‘이기기 위해 대선 판에 왔다(I’m in it to win it)’는 도발적인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며 미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을 꿈꿨다. 당시 그가 내건 구호는 ‘힐러리 대세론’을 강조한 것이었지만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어투와 이를 반영한 공격적인 선거 전략으로 일부 중산층과 흑인 위주 민주당 지지층의 반감을 형성했다는 게 중론이었다. 실제로 흑인인 오바마 대통령은 이 점을 파고들어 힐러리 대세론을 꺾었다. 워싱턴포스트(WP)는 “클린턴 전 장관은 이번 선거에서 2009년 금융위기 후 여전히 먹고살기 어려운 중산층을 보듬는 정책을 집중적으로 내놓을 계획”이라며 “선거 유세도 대규모 행사를 자제하고 당분간 서민들과의 타운홀 미팅을 중심으로 꾸려갈 것”이라고 전했다. 그가 내걸 구체적인 정책으로는 △최저임금 인상 △기업의 세금 탈루 방지와 중산층 감세 △근로자와 이익을 공유하는 기업에 대한 인센티브 확대 등이 거론된다. 클린턴 전 장관은 출마 선언 후 첫 행선지로 2008년 경선에서 패배가 확정된 아이오와 주를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의 선거 전략 전문가인 조 트리피 씨는 ‘더 힐’과의 인터뷰에서 “지난번 패배가 확정된 곳에서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는 이벤트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과연 미국 첫 여성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2008년과 달리 민주당 내 뚜렷한 경쟁자가 없는 만큼 클린턴 전 장관의 민주당 내 경선 통과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ABC방송과 워싱턴포스트가 지난달 26일부터 29일까지 민주당 지지층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민주당 주자 중 클린턴 전 장관의 지지율은 69%로 공동 2위인 조 바이든 부통령,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상 12%)을 큰 폭으로 제쳤다. 선거 자금 모금도 지금까진 파란불이다. 폴리티코는 최대 20억 달러(약 2조1876억 원)대의 선거 자금 마련이 무난할 것으로 내다봤다. 주요 정책과 선거 전략은 백악관 선임고문을 지내다 2월 ‘힐러리 선거캠프’로 간 ‘원조 클린턴맨’인 존 포데스타 씨가 총괄할 계획이다. 오바마 대통령도 공개적인 지지를 보냈다. 11일 파나마에서 열린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의 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클린턴 전 장관은 훌륭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며 “특히 외교정책에 관한 한 어떤 대화도 잘 다뤄 나갈 능력이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힐러리 대세론에 숨어있는 복병들도 있다. 공화당은 클린턴 전 장관의 출마 선언에 맞춰 ‘스톱 힐러리(Stop Hillary·힐러리는 이제 그만)’ 캠페인을 조기에 시작하는 방안을 계획하고 있다고 WP가 전했다. 우선 클린턴 전 장관의 국무장관 시절 가장 큰 외교적 실패로 꼽히는 2012년 리비아 벵가지 테러 사태를 놓고 ‘힐러리 때리기’를 본격화할 태세다. 최근 국무장관 시절 개인 e메일을 공무에 사용한 논란이나 클린턴 전 장관 입장에선 지긋지긋한 ‘르윈스키 스캔들’도 선거 국면에서 언제든 부상할 수 있다. 나이가 많다는 점도 걸린다. 집권할 경우 70세로 비교적 고령인 데다 그동안 워낙 대중에게 오래 노출되어 있다 보니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이러다 보니 민주당 일각에서는 신선한 ‘개혁 아이콘’으로 여성 상원의원인 워런 의원 띄우기가 계속 나오는 상황이다. 한편 클린턴 전 장관의 외교 안보 공약 중 한반도 관련 정책은 오바마 정권과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본인 스스로가 국무장관으로서 오바마 정권 1기 외교 안보 이슈를 총괄한 데다 최근 주요 대북 이슈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과 큰 이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중동 및 우크라이나 사태 등 다른 국제 이슈에 대해서는 미국의 역할을 보다 강조하는 쪽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있다.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