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취임 때처럼… 28년된 자가용 몰고 집으로■ 우루과이 무히카 대통령 퇴임‘세계에서 가장 검소한 대통령’으로 불리던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80·사진)이 1일 퇴임했다. 이날 무히카 대통령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1987년형 하늘색 폴크스바겐 비틀을 손수 몰고 대통령궁을 떠났다. 대통령에 당선됐던 5년 전에도 그는 이 차를 직접 몰고 출근했다. 거리엔 많은 시민들이 나와 “굿바이, 페페(할아버지)”를 외치며 떠나는 대통령을 배웅했다. 무히카 대통령은 재임 내내 실제로 ‘친근한 페페’의 삶을 살았다. 수도 몬테비데오 외곽에 있는 그의 자택은 검소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 집은 거실과 방, 부엌이 1개씩밖에 없는 허름한 농가로 대통령의 자택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다. 무히카 대통령은 취임 직후 직원 42명이 관리해 오던 대통령 관저를 노숙인 쉼터로 개방하고 해변 휴양도시에 있던 대통령 별장을 팔아버렸다. 자신은 농가에서 직접 낡은 비틀을 몰고 출퇴근했다. 집엔 가정부도 없어 집수리와 가사노동을 직접 했다. 대통령이 된 뒤 달라진 것이라면 경호를 위해 경찰 2명이 인근에서 대기했다는 것뿐이었다. 무히카 대통령은 취임 당시 자신의 재산으로 1800달러(약 190만 원)를 신고했다. 낡은 승용차가 사실상 전부였다. 대통령 재임 중에도 월급 1만2000달러(약 1300만 원) 가운데 90% 이상을 자신이 속한 정당과 사회단체, 서민주택 건설 사업 등에 기부했다. 그가 살고 있는 농가와 인근 농지는 부인인 루시아 토폴란스키 상원의원의 소유다. 땅과 승용차, 농기계 등 부부의 자산을 다 합쳐도 20만 달러(약 2억2000만 원) 남짓이다. 무히카 대통령은 지난해 아랍의 한 부호로부터 28년 된 낡은 폴크스바겐 비틀을 100만 달러(약 11억 원)에 사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무히카 대통령은 사고로 다리를 하나 잃어 운신이 불편한 자신의 애견이 그 차를 좋아하기 때문에 팔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무히카 대통령은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며 “대통령으로 선출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돈을 다 갖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자신의 인생관을 밝혔다. 자신의 검소함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세상이 제정신이 아니다. 내가 평범하게 산다고 놀라워하는데, 그런 관점이 오히려 걱정스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민은 그를 열렬하게 지지한다. 물러나는 대통령의 지지율이 65%에 이른다. 당선 당시 지지율 52%를 뛰어넘는 수치다. 이런 지지율의 밑바탕엔 비단 그의 검소한 모습만 작용한 것이 아니다. 주말에 농사를 짓고, 태풍이 오면 동네 이웃의 집을 고쳐주기 위해 뛰어다니는 와중에도 재임 기간 평균 5%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 무히카 대통령은 1960, 70년대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좌익 무장 게릴라 조직 ‘투파마로스’에서 활동했다. 1971년 그는 경찰 2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자신도 6곳이나 총상을 입은 채 체포돼 14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게릴라 동료였던 지금의 부인도 수감 시절 만나 동거해오다 2005년 결혼했다. 둘 사이에 자식은 없다. 한편 1일 몬테비데오 시내에서 주목을 받은 사람은 무히카 대통령뿐만이 아니다. 타바레 바스케스 신임 대통령(75)도 1951년에 생산된 포드슨 자동차를 개조해 판자로 두 사람이 겨우 설 만한 적재함을 만든 뒤 수도를 돌며 시민들에게 인사했다. 이 차는 그가 젊은 시절 의사로 일할 때 처음 구입했던 차라고 한다. 바스케스 신임 대통령은 2005년부터 2010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무히카 대통령의 전임이자 후임이 되는 셈이다. 두 대통령이 보여준 도덕성과 검소함은 왜 국민이 이들을 좋아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현재 우루과이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만6000달러 이상으로 남미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이다. 또 지난해 발표된 국제투명성기구(TI)의 부패인식지수 순위에서 세계 21위에 오르는 등 남미에서 가장 부패가 적은 나라이기도 하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선거자금 모으는 데 시간낭비 하느니… 봉사로 40년 정치인생 마무리” ▼■ 여성 최장수 美의원 미컬스키“선거 치르려고 또 정치자금 모으는 데 시간을 쓰라고? 그냥 남은 기간 지역 유권자에게 봉사하고 마무리하겠다.” 2일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시의 한 호텔. 미국 역사상 여성으로 가장 오랜 기간 연방 의원을 지내고 있는 민주당 바버라 미컬스키 상원의원(79·메릴랜드·사진)이 기자회견을 자청해서 한 말이다. 38년 전인 1977년 하원의원으로 의회에 입성한 뒤 1986년부터는 메릴랜드 주 상원의원으로 내리 5선을 지내고 있는 그가 돌연 2016년 중간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회견 참석자들은 술렁였고, 일부는 눈물까지 보였지만 이내 미 정치권 대표적인 여걸의 결단에 박수로 화답했다. 고령이지만 지난해까지 상원의 알짜 상임위원회인 세출위 위원장을 맡을 정도로 정력적인 활동을 보였던 그는 2016년 선거에서 6선 고지가 유력했다. 지난해 메릴랜드 주 가우처칼리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50%의 지지율을 기록했을 정도. 그런 그가 밝힌 불출마 이유는 솔직하면서도 울림이 컸다. “내년 선거에 출마할지 말지 고민을 많이 했다. 결국 시간을 어떻게 쓸지의 문제였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다. (상원의원이란) 내 직업을 위해 시간을 쓸 것이냐, 아니면 유권자들을 보호하는 데 쓸 것이냐. 결론은 다음 세대를 위해 남은 시간을 쓰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렇다고 메릴랜드 유권자 여러분, 걱정하지 마라. 남은 기간 내 힘의 120%를 여러분에게 바친 뒤 떠나겠다”고 덧붙였다. 뉴욕타임스 등 미 현지 언론은 미컬스키 의원이 천문학적 규모의 선거 자금 조달에 한계를 느낀 현실적 이유 때문에 불출마를 선언한 측면이 있지만 자신의 정치적 업적이 빛을 바래기 전에 현명하고 아름다운 선택을 했다고 평가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성명을 내고 “미컬스키 의원이 보여 준 업적은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사우디아라비아 감옥에선 이슬람국가(IS)나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일반 수감자와 비교할 수 없는 ‘특급 대우’를 받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1일 보도했다. 사우디 당국은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가 자국의 수감시설을 비판하자 테러리스트를 전문적으로 수감하는 교도소를 외신 기자들에게 공개했다.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8㎞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하이르 감옥은 호텔에 가까웠다. 방에는 퀸사이즈 침대와 냉장고, TV, 샤워시설이 갖춰져 있다. 수감자들은 피트니스 클럽과 수영장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 수감자들은 신문과 책도 읽을 수 있다. 복지 수준은 입을 벌리게 만든다. 수감자 가족에겐 매달 생활비와 집세, 학비까지 다 대준다. 외국인을 포함한 수감자 가족이 면회를 올 경우 비행기표와 호텔 숙박비용을 준다. 결혼한 수감자는 매달 호텔급 스위트룸에서 아내와 5시간까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수감자의 가까운 친지가 결혼할 때는 이틀간의 외박이 보장되는데, 결혼 축의금으로 최대 2600달러까지 준다. 테러리스트들에게 특급 대우를 해주는 이유에 대해 사우디 당국은 “수감의 목적이 격리가 아니라 새로운 삶을 선택하도록 교화하는 데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우디의 감옥 공개에 대해 휴먼라이츠워치는 테러리스트들에게만 적용되는 특례라고 비판했다. 수감시설과 별개로 사우디의 형사법은 국제적 비난을 받아왔다. 최근엔 사우디의 종교 통치를 비난한 블로거가 10년형과 1000대의 공개태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또 종교 교리에 따라 2013년에만 79명이 참수형을 당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남쪽에 처음 와서 ‘남이나 북이나 사람 사는 게 똑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때는 쉬는 시간이었다. 직장 한쪽 구석에 몰려가 남자끼리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아무개는 오늘 왜 저러는 거야” “아무개 상사는 또 왜 저런대” 하며 뒷소리를 하는 것은 남북이 어찌 그리 똑같은지…. 하지만 남쪽에 와서 ‘진일보’ 한 것이 있으니 왼손에 커피가 담긴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는 점이었다. 처음 몇 년 동안 나는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가 제일 맛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비싼 커피를 코와 혀끝이 알아본다. 나를 이렇게 만든 건 환경적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동아일보 주변만 봐도 언젠가부터 유명 브랜드 커피숍 수십 개가 생겨났다. 그렇게 많은데도 점심시간이면 길게 줄을 서야 한다. 반면 담배는 피울 곳도, 피우는 사람도 줄었다. 남북 사이 공통점을 느꼈던 ‘한 대 물고 한담’ 문화는 어느덧 ‘한 잔 들고 한담’ 문화로 바뀐 지 오래다. 최근 북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빠르게 바뀌는 것은 한국뿐만이 아닌 것 같다. 평양에서도 이젠 커피가 더이상 귀한 음료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물론 아직 지방엔 커피 맛을 모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만 적어도 평양에선 커피 수요층이 급격히 늘고 있다. 나는 북에 살 때 커피란 것을 딱 한 번, 그것도 한 모금도 안 되게 조금 마셔봤다. 커피란 말은 수없이 들어봐서 맛이 궁금했었는데, 맛을 보고 나서는 ‘뭘 이런 걸 돈 주고 사 먹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에 중독성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1990년대엔 외화상점에서만 캔커피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커피를 마셔봤던, 돈 많은 북송 귀국자들이 사 먹는 맛이 이상한 음료 정도로만 여겼다. 커피 맛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비싼 커피를 살 돈이면 외제 담배 한 갑을 사는 게 훨씬 더 경제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평양에선 중산층 집에 가도 커피를 마실 수 있다. 대학입학시험 준비를 하는 학생들이 각성제로 마시는 것이 커피다. 좀 괜찮은 직장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야근을 서면서 인스턴트커피를 마신다. 내가 10여 년 전 남쪽에 와서 경험했던 ‘한 손에 커피, 한 손엔 담배’ 문화가 바야흐로 북한에서 막 시작되는 것이다. 평양에서 팔리는 커피는 당연히 중국산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진짜인지, 중국산 짝퉁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산 ‘막대커피’도 시중에서 많이 팔린다. 커피에 대해선 북한 당국이 크게 통제하지 않는다. 하긴 통제해야 할 간부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한국산 커피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커피 문화가 발달하면서 평양에도 커피숍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해 이젠 ‘24시간 커피숍’도 등장했다. 가격도 크게 비싸지 않다. 커피 한 잔이 밥 한 끼 값과 맞먹는 남쪽과 체감 가격은 거의 비슷하다. 북한에 커피숍이 늘어난다는 소식은 개인적으론 반가웠다. 이제 당장 통일이 돼도 평양에 가서 그곳 사람들과 커피 한 잔 앞에 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통의 문화적 코드가 생겨서이다. 사실 남북의 70년간의 분단은 문화에서도 큰 장벽을 만들었다. 남쪽에 처음 와서 이곳에서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나폴레옹을 패퇴시킨 러시아 명장 쿠투조프 원수를 모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지만 나 역시 19세기에 활약했던 미국의 명장 로버트 리 장군이나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러시아나 중국 영화만 보면서 자랐지만, 남쪽 사람들은 할리우드 문화권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언어만 통한다면 북한 사람들은 남쪽 사람들보다는 중국이나 러시아 사람과 더 문화적 동질성을 느끼리라 생각한다. 반대로 남쪽 사람들도 북한 사람보다는 미국 사람과 훨씬 더 이야깃거리가 많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커피라는 대화 매개체라도 생긴다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평양의 커피 문화가 앞으로 확대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커피가 일상화되자 이젠 북한 부유층들 속에서 차별화를 위해 차 문화가 발달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손님에게 차를 꺼내 놓고 이 차가 얼마나 괜찮은 차인지 유래 정도는 읊어줘야 교양 있는 부유층이라 인정받는 분위기라 한다. 중국과 흡사한 모습이다. 이 역시 생필품의 90% 이상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고, 여전히 중국 문화권에 머무르고 있는 북한이기에 벌어지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최근 북한 장마당엔 수십 가지의 차가 팔리고 있고 평양 시내에 찻집도 생겨나고 있다. 중국의 유명 차는 물론이고 강령녹차 같은 북한산 차도 인기가 있다. 장차 북한 음료계의 판세는 커피로 기울 것인가, 차로 기울 것인가. 남쪽을 빠르게 휘어잡은 커피의 중독성에 기대를 걸어본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올 1월 터키에서 실종된 김모 군(18)이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에 가담해 훈련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IS의 이슬람 전사(지하디스트) 훈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외신들은 최근 IS가 외국인 대원들, 특히 어린 외국인 청소년들을 어떻게 훈련시키는지 집중 보도했다. 인디펜던트가 23일 공개한 IS 훈련 캠프 동영상에는 청소년들이 ‘순교자’로 세뇌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캠프에는 어린이 80여 명이 군복을 입고 머리에는 IS의 상징인 까만 머리띠를 두른 채 성인 교관의 지휘에 따라 훈련을 받고 있다. 이들 중에는 외국인 출신 IS 가담자 자녀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띄며 가장 어린 아이는 5세 정도에 불과하다고 신문이 전했다. 동영상 속 청소년들은 교관의 구령에 따라 훈련 중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를 수시로 외쳤다. 이 캠프는 IS가 수도로 삼은 시리아 락까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IS가 어린아이들을 집단 수용해 교육시키는 이유는 전장에서 투입하기 위해서보다는 미래의 전사들을 키워내는 데 목적이 있다. 어른들은 죽더라도 세뇌된 아이들이 커서 대를 이어 계속 싸우게 만든다는 것이다. 김 군처럼 10대 후반 이상 외국인 자원자들은 주로 실전용 교육을 받는다. 영국 일간 가디언의 일요판 옵서버는 최근 IS에 가담한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IS 훈련 캠프의 교육 방식을 전했다. 이에 따르면 외국인 대원은 주요 전선이나 자살 폭탄테러 등에 투입되기 전에 2주∼1년의 훈련 과정을 거친다. 신입대원의 효용 가치와 충성도에 따라 2주, 한 달, 45일, 6개월, 1년의 훈련 기간이 결정된다. 테러 분석 매체인 롱워저널은 지난해 11월 IS의 훈련소가 시리아 내 15곳과 이라크 내 11곳 등 모두 26곳이라고 분석했다. 외국인 훈련 캠프는 터키와 국경을 맞댄 시리아 북부 사막 지대에 있다. 터키를 통해 시리아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진 김 군도 시리아 북부에서 훈련을 받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캠프에 입소하면 첫날 이슬람 이해 정도, IS 자원 동기 등에 대한 조사가 이뤄진다. 훈련은 크게 군사와 정치, 종교 등 세 가지로 나눠 전담 교관들이 맡는다. 초반에는 주로 이슬람 율법(샤리아)으로 세뇌시키는 데 큰 비중을 둔다. 교리 전담 성직자들이 “신은 하나뿐이며 타 종교는 적”이라는 점을 집중 주입한다. 10대 청소년의 경우 보통 4개월간의 신앙 집중 교육을 받은 뒤 곧바로 군사훈련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각종 무기를 다루는 법과 자살 폭탄테러 방법 등을 교육한다. 군사훈련 단계에서 역점을 두는 것은 잔인함을 기르는 교육이다. 이를 위해 인질과 포로를 잔인하게 참수하거나 학살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한다. 이어 인형을 사용해 사람을 참수하는 방법도 가르쳐준다. 이 과정을 거치면 교육생이 직접 처형을 집행하기도 한다. 지난달 IS 선전매체에 올라온 동영상에는 10대 초반 소년이 러시아 출신 남성 2명을 권총으로 쏘는 장면이 담겨 있다. 잔혹행위에 익숙해지면 죄책감이 사라져 집단 광기에 빠져든다고 가디언은 분석했다. 훈련이 끝나면 전투병이나 인간 방패, 자살 폭탄테러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선전병 등으로 분류돼 현장에 투입된다. 일정 기간 감시자들도 따라붙는다. 명령을 어기거나 머뭇거리면 처벌은 물론이고 처형까지 된다. 지난달 말 IS가 격전지인 시리아 코바니에서 밀리게 되자 10대 소년병 부대가 마지막으로 투입돼 사상자가 속출했다. 소년병들이 인간방패 역할을 한 셈이다. 훈련 캠프에선 최근 영어 학교도 열었다. IS가 23일 락까에 배포한 ‘영어로 말하는 무하지룬(이민자)에 대한 공지’라는 안내문에는 “영어가 모국어인 6∼14세 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과정을 열었으니 학교에 등록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남학생은 ‘아부 무사브 자르카위 스쿨’에 다니고, 그 옆에 ‘아이샤 스쿨’이란 여학생 학교도 따로 문을 열었다. 자르카위는 IS의 전신인 알카에다 이라크지부(AQI) 지도자로 2006년 미군 공습으로 사망했으며 아이샤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아내다. 이 학교는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3시간 동안 주 5일 영어로 수업한다. 한편 IS가 24일 시리아 북동부 아시리아 기독교도 마을 2곳을 공격해 최소 90명의 기독교인을 납치했다고 시리아인권관측소(SOHR)가 이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이 에볼라 바이러스 전염을 막겠다며 4월 평양에서 열리는 제28회 만경대상 국제마라톤대회에 외국인 선수 출전을 금지하기로 했다. 중국 베이징에 있는 북한관광 전문 고려여행사는 23일 “2015 평양 국제마라톤에 아마추어 및 프로 외국인 참가자의 출전을 금지한다는 통보를 평양에서 받았다”고 밝혔다. 여행사는 “이번 결정은 에볼라 바이러스가 확산될 것을 우려해 내려진 조치의 연장선이라는 북한의 설명을 들었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부터 북한은 에볼라 확산을 막기 위해 외국인 관광객의 입국을 금지하고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유럽으로 밀려드는 난민들 속에 테러리스트들을 침투시킬 것이란 첩보가 돌면서 각국이 긴장하고 있다. 가뜩이나 프랑스와 덴마크에서 무슬림 이민자에 의한 테러가 연이어 발생한 와중에 새로운 테러리스트들이 합세한다면 유럽은 또 다른 위기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외신들은 난민을 이용한 IS의 전략을 ‘21세기판 트로이 목마’라고 명명하고 있다. 가장 긴장한 나라는 이탈리아. 아프리카 출신 난민이 가장 많이 몰려가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난민들이 주로 향하는 곳은 이탈리아령 람페두사 섬으로, 북아프리카에 가장 가까운 유럽의 섬이다. 이 섬은 튀니지에선 130km,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선 300km 떨어져 있다. 이곳에만 도착해도 난민 심사를 거쳐 유럽에 체류할 권리를 얻게 된다. 현재 리비아 해변에서 이 섬으로 가기 위해 대기 중인 난민은 70만 명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IS는 이집트 콥트교도 21명 참수 동영상을 공개한 15일 “알라의 허락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약속에 따라 가톨릭교 중심지인 로마를 정복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날 이탈리아 당국은 지중해에서 리비아 난민 2164명을 태운 12척의 난민선을 구조했다. 그런데 난민 구조 과정에서 리비아 쪽에서 AK-47 소총으로 무장한 괴한 4명이 쾌속정을 타고 접근한 뒤 구조를 벌이던 경찰을 협박해 난민이 탔던 배를 빼앗아 달아난 사건이 벌어졌다. 무장 괴한들이 지중해에서 해상경찰까지 협박해 배를 빼앗아 달아난 것은 유례가 없던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탈리아 일간 ‘일메사제로’는 자국 정보기관 말을 인용해 ‘IS의 트로이 목마’ 작전을 알렸다. 이 신문은 18일 “최근 IS의 통화 내용을 감청한 결과 이탈리아가 리비아에 군사 개입을 하면 IS 조직원들이 난민 50만 명을 태운 선박 수백 척을 이탈리아로 보내는 방안을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또 “북아프리카에서 IS를 자칭하던 테러리스트들이 최근 사라져 종적이 묘연한 상태에서 정보 당국이 많은 어선이 난민 수송용으로 바뀌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해 분석하고 있다”고 당국의 대응을 전했다. IS가 난민들 속에 테러리스트를 끼워 보낸다면 경제위기로 안보 예산이 대폭 삭감된 남유럽 국가들은 속수무책이다. 이탈리아의 경우 경제위기로 최근 2년 동안 국방 및 안보 예산이 40% 삭감됐다. 이탈리아군에서 현재 즉각 작전이 가능한 병력은 5000명 남짓하다. 안젤리노 알파노 내무장관은 IS의 경고가 있은 직후인 17일 저녁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해 4800명의 군 병력을 주요 시설 경비에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이탈리아가 ‘트로이 목마’에 휘말리면 난민 대량 구조에 동의했던 북유럽도 안심할 수 없다. 지난해 4월 유럽연합(EU)은 난민들이 스스로 EU 영토를 밟기 전에 이들을 구조하는 것을 금지하던 법을 폐기하고 난민 구조에 더 적극적으로 대처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즉, 바다에서 ‘밀어내기’ 정책을 ‘건져 올리기’ 정책으로 바꾼 셈인데 이때부터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이 급증했다. 지난해 이탈리아에만 17만 명이 넘는 난민이 도착했다. 전년보다 64% 늘어난 규모다. 증가한 대다수 난민은 정세가 불안정한 리비아 등에서 왔다. 유럽에 도착한 아프리카 난민의 90%는 남부 유럽에 정착했다. 앞으로 난민들 속에 테러리스트까지 포함된다면 지금까지 이민정책에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보여 온 유럽의 여론도 크게 바뀔 가능성이 높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체포된 뒤 사형된 안중근 의사를 변호했던 일본 변호사들이 “안 의사에게 극형 선고는 안 된다”며 “3년 수감이면 충분하다”는 주장을 했다고 뉴시스가 14일 보도했다. 뉴시스는 1911년 뉴욕에서 발행된 신문 ‘디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가 펴낸 연감에 실린 존 하이드 디포러스트의 글을 공개했다. 일본 선교사였던 필자는 ‘1910년의 일본’이란 제목의 글에서 안 의사의 재판을 ‘1910년의 문을 여는 일대 사건’으로 규정한 뒤 당시 그를 변호했던 일본인 관선 변호사들의 변론 내용을 상세히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일제는 안 의사에게 무료 변론을 하겠다는 러시아인과 영국인 변호사의 제안을 거절하고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 기타로(水野吉太郞)와 가마타 세이지(鎌田政治) 2명을 지정했다. 그러나 이들조차도 양심적인 변호를 했다고 디포러스트는 기록했다. 두 변호인은 재판부에 “(안 의사를) 극형에 처하는 것은 오늘날 법의 목적에 상치되는 것이다. 1891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러시아 황태자를 살해하려 한 자도 사형선고를 받지 않았다. (1908년 3월 미국에서) 스티븐스(일본의 조선 지배가 합당하다고 주장하던 조선통감부 외교관)를 죽인 암살자(장인환 의사)도 단지 25년형이 구형됐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안 의사에게 극형이 선고될 경우 도리어 영웅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논리도 폈다. 변호인들은 “판사의 결정은 세계가 안중근을 작게 평가하도록 만들 수 있다. 모든 관점에서 볼 때 그에게 3년형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일제는 1910년 2월 14일 안 의사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디포러스트는 “안중근은 진정한 애국자로서 자신의 행위를 찬양했다. 그는 순교자로서 두려움 없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전하고 “우리는 (이토) 저격이 한 나라의 잘못을 바로잡는 마지막 교훈이 되기를 바란다”고 썼다. 싱가포르 영자신문 ‘더 스트레이트 타임스’도 안 의사가 체포된 지 두 달 만인 1909년 12월 21일 ‘저격자에게 사형이 선고될지는 아주 회의적(too doubt)’이라고 언급하는 등 과도한 선고가 내려질 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日, 윤동주 옥중사망 21개월뒤 사면 ▼오늘 尹시인 70주기윤동주 시인의 70주기인 이달 16일을 앞두고 시인이 일본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 뒤 20개월여 만에 사면된 것으로 보인다고 연합뉴스가 당시 일본 법원(교토지법)의 판결문을 공개해 보도했다. 교토지검이 보관 중인 판결문에는 윤 시인의 성이 ‘윤’이 아닌 ‘히라누마(平沼)’로 표기돼 있으며 성명 표기 바로 위에 “쇼와(昭和) 21년(1946년) 칙령 제511호 대사령에 의해 사면됐다”는 문구의 도장이 찍혀 있다. 이 대사령은 일본 헌법 공포일인 1946년 11월 3일 발표된 사면 조치의 일종이다. 윤동주는 1944년 3월 31일 일본 교토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이 유죄로 인정돼 징역 2년 판결을 받았고 상소를 포기해 다음 날 형이 확정됐다. 윤동주 사면은 타계일인 1945년 2월 16일 이후 20개월이 훨씬 지나 단행된 것으로 분석된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한국의 지난해 국방예산 지출 규모가 344억 달러(약 38조700억 원)로 세계 10위를 차지했다고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가 11일 정례보고서에서 밝혔다. 한국은 2012년 12위, 2013년 11위에 이어 지난해 10위권에 진입했다. 미국이 5810억 달러(약 643조 원)로 부동의 1위를 지켰다. 2위는 중국으로 지난해 1294억 달러를 국방비로 지출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국방예산과 관련돼 가장 눈길을 끄는 국가는 사우디아라비아다. 인구 2700만 명에 병력 23만 명을 보유한 사우디는 지난해 808억 달러의 국방비를 지출해 러시아(700억 달러), 영국(618억 달러) 등 군사 강국을 제치고 3위를 차지했다. 2004년 사우디의 국방비는 193억 달러로 세계 9위였다. 일본은 477억 달러로 프랑스에 이어 세계 7위에 올랐다. 이번 국방비 지출 순위에 북한은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IISS는 북한에 대해 “미사일 기술과 대량살상무기 능력을 크게 늘렸다”고 평가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국방체육만큼은 남조선 괴뢰들에게 밀려서는 절대 안 된다. 일당백의 군인정신으로 싸워 전 종목 우승을 쟁취해야 한다.” 북한 체육계가 올 10월 경북 문경시에서 열리는 2015 세계군인체육대회를 앞두고 이 같은 김정은의 지시에 비상이 걸렸다고 탈북자들이 운영하는 대북 방송인 ‘자유북한방송’이 12일 보도했다. 이 방송은 평양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은이 이번 대회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김정은이 내린 지시에 따라 북한군 선수들의 합숙 훈련이 3월 1일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혼자서 5종목의 경기를 치러야 하는 5종 종목과 고공 낙하 훈련은 특수 8군단으로 알려진 폭풍군단 소속 ‘초병체육단’이 맡아 평양시 상원군에 있는 전투훈련장에서 훈련에 들어간다. 빈약한 군인 선수층을 보충하기 위해 북한 당국은 지난해 말부터 유도 펜싱 사이클 수영 종목에서 우수한 선수들을 군에 입대시켜 신분을 세탁하고 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이에 따라 문경 대회에는 거의 올림픽급 북한 선수단이 참가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소식통은 “당초 관계자들은 승산이 보이는 일부 종목만 선수를 파견하려 했지만 김정은이 전 종목에 선수를 파견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며 “여성 군인들로 구성된 100명 규모의 ‘군사 응원단’도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북한은 문경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린 뒤 이를 김정은의 치적으로 포장하고 주민들을 대상으로 북한군이 남한군보다 우세하다는 선전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10월 2일부터 11일까지 열리는 이번 대회에는 110개국에서 9000여명이 출전할 예정이며 현재 83개국 8634명이 접수를 하였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11개 종목에 213명의 선수단을 파견하겠다고 주최 측에 통보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대표적인 유럽 부자 나라인 노르웨이에서는 앞으로 거지에게 돈을 주면 감옥에 가는 법이 만들어진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노르웨이 정부가 구걸하는 사람뿐 아니라 그들에게 돈이나 음식, 숙소를 제공하는 사람까지 처벌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해 15일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고 4일 보도했다. 일명 ‘구걸 금지법(Anti-Begging Law)’으로 불리는 이 법안은 지난해 말부터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실행에 옮기고 있다. 법안이 통과되면 전국적으로 구걸은 물론이고 거지에게 돈을 주는 행위도 금지된다. 노르웨이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6만5000달러로 세계 6위(2013년 세계은행 기준)다. 사회복지 제도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런 부자 국가가 거지의 구걸을 막으려는 이유는 최근 외국에서 거지들이 몰려들면서 사회적 골칫거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노르웨이에는 ‘구걸 금지법’이 존재했다가 2005년 폐기됐다. 법이 사라지자 거지가 늘었다는 불만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이에 2013년 9월 집권한 중도 우파 정부는 구걸하는 사람을 도와주는 행위까지 최소 1년형에 처하는 더욱 강화된 법안을 마련했다. 노르웨이 정부는 매년 평균 500∼1000명의 외국 거지가 자국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이들이 조직적 범죄의 근원이 되고 있다고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구걸 금지 법안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거지들의 삶을 조사해 보면 거지들은 대부분 조직적이지 않으며 오직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독립적으로 구걸할 뿐이라는 것이 이들의 반론이다. 좀 더 중요한 반대 이유는 노르웨이의 국가 이미지가 추락하고, 유럽 인권협약에도 위배된다는 것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르웨이 국민의 60%는 구걸 금지 법안에 찬성하고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파죽지세로 세력을 확장하던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고 있다. 지난해 9월 시작된 미국 등 서방의 공습으로 IS 조직의 핵심 간부들이 대거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2일 IS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사진)의 핵심 이너서클 18명 중 이미 9명이 공습으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6월 30일 IS 출범을 선포할 당시 바그다디를 ‘칼리파(지도자)’로 선출한 이슬람 ‘슈라 위원회’ 멤버가 바로 이 18인이다. 사망자 중 가장 고위 인물은 IS의 2인자이자 바그다디의 오른팔인 아부 무슬림 알 투르크마니. 이라크군 특수부대 중령 출신인 투르크마니는 군사총책으로 이라크 지역을 담당해 왔다. IS 조직의 종교 및 전략담당 고문인 아부 알 빌라위도 지난해 공습으로 사망했다. 이 밖에 바그다디가 가장 신뢰하는 참모인 아부 하자르 알 수피도 지난해 9월 연합군의 첫 공습 때 숨졌다. 바그다디도 지난해 7월부터 행적이 묘연하다. 그가 공습으로 심각한 중상을 입고 치료 중 숨졌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이 신문은 “IS는 바그다디가 신뢰하는 부하들을 통해 지시를 내리는 극단적으로 폐쇄된 조직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심복의 절반이 사망하면 지휘 체계가 급격히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다른 부하가 사망자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수년간의 전투를 통해 끈끈한 전우애를 쌓은 기존 멤버들에 비해 신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이 신문은 분석했다. 하지만 여전히 서방이 노리고 있는 주요 인물 몇 명은 건재한 것으로 전해졌다. 가장 상징적인 제거 대상은 일본인 기자 고토 겐지 씨를 참수한 지하디 존이라는 참수 전문가다. 지하디 존은 18인 지도부는 아니지만 지난해부터 영국인과 미국인 인질을 참수하며 악명을 떨쳤다. 미국은 그에게 1000만 달러(약 110억 원)의 현상금을 걸었고 영국도 특수부대를 파견했지만 그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 밖에 IS의 핵심 거점인 이라크 안바르 주 책임자 아부 와히브와 시리아 군사총책인 아부 알 시스하니도 여전히 살아있다. 이 둘은 28세에 불과하다. 서방의 공습으로 지난 5개월간 IS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대원도 6000여 명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급로도 막히고 있다. 내륙 지역을 차지한 IS는 사막을 통해 보급품을 조달하는데, 서방의 공습으로 이미 차량 1000여 대가 파괴됐다. 중무장한 호송부대를 보내자니 공습이 무섭고, 공습을 피해 소규모로 은밀히 움직이자니 반(反)IS 세력의 공격에 노출돼 피해가 큰 것으로 알려졌다. IS의 악행이 이어지면서 민심도 급격히 이탈하고 있다. 며칠 전 이라크 티크리트에서 IS에 처형된 아들의 복수를 위해 60대 노인이 자동소총을 들고 IS 검문소를 습격해 7명의 대원을 사살한 뒤 자신도 총에 맞아 숨졌다. IS는 지난달 노인의 18세 아들을 정부군 스파이로 몰아 다른 7명과 함께 공개 처형한 뒤 이 장면을 인터넷에 공개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에서 석 달 넘게 계속되는 에볼라 방역 소동을 보면 내가 더 황당해진다. 북한은 지구상에서 가장 고립되고 폐쇄적인 나라인 데다 에볼라 발병지인 아프리카 기니와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에서 제일 멀리 있다. 이웃 13억 인구의 중국도 조용하고, 한국과 일본 등 주변국도 무탈한데 유독 북한만 당장 에볼라 바이러스가 국경에서 입국 수속이라도 밟고 있는 듯이 생난리다. 노동신문과 중앙방송은 주기적으로 지면과 시간을 크게 할애해 에볼라의 위험성을 다루고, 주민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에볼라 방역 상식 교육도 대대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질병을 놓고 이렇게 호들갑인 모습은 처음 봤다. 과거 홍역,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전국에 창궐할 때도 이런 일은 없었다. 외국에서 들어온 사람은 예외 없이 무조건 격리된다. 영문 모르고 입국했던 중국인 관광객들도 21일간이나 호텔에 감금됐다. 심지어 명목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의장, 최룡해 노동당 비서,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같은 북한 최고 실세도 외국에 다녀와선 외진 곳에 21일간 격리됐다. 에볼라 최장 잠복기가 21일이기 때문이란다. 북한에서 열리기로 예정된 각종 국제대회도 올 8월까지 줄줄이 취소됐다. 북한이 에볼라를 이유로 지난해 10월 24일 국경을 전격적으로 폐쇄했을 때만 해도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볼라 공포를 이용해 집권 3년이 넘도록 성과가 없는 김정은에게 주민의 불만이 쏠리는 것을 막고 반미 감정도 북돋우려 할지 모른다고 추정했다. 하지만 이후 상황을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북한은 진짜로 에볼라에 끔찍한 공포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오죽하면 남쪽에 에볼라 예방 의약품을 달라고 요구했을까. 이번 소동을 보며 2년 전 개봉된 좀비 영화 ‘월드워Z’가 떠올랐다. 영화 속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은 이런 말을 한다. “지금 세계에서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북한이다. 이에 물리면 좀비가 되기 때문에 당국이 하루 만에 주민 2300만 명의 이를 모두 뽑아버렸다.” 영화를 볼 땐 작가의 상상력과 재치에 감탄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요즘의 북한을 보니 에볼라가 들어오는 걸 막을 수만 있다면 진짜로 주민의 이라도 다 뽑아 버릴 기세다. 이번 호들갑의 배후엔 김정은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가 에볼라에 엄청난 관심을 돌리며 열심히 부채질하지 않고서야 북한이 저렇게 일사불란하게, 최고위 실세까지 가둘 정도로 소동을 벌일 순 없다. 그렇다면 김정은은 왜 에볼라를 그토록 두려워할까. 노동신문의 9월 7일자 ‘에볼라는 미국의 생물무기’, 11월 7일자 ‘에볼라 비루스를 전파시킨 장본인은 누구인가’ 기사에서 일말의 단초를 발견했다. 기사에서 북한은 에볼라 바이러스는 미국이 생물무기용으로 개발한 것이며 아프리카에서 시험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정은은 미국이 에볼라를 북한에 퍼뜨릴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을지 모른다. 공공보건이 마비된 북한에 에볼라가 퍼지게 되면 아프리카 못지않게 막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민심이 크게 흔들리면서 김정은 체제도 매우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올 1월 22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북한은 결국엔 붕괴될 것”이라고 말한 뒤 북한의 공포감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더 큰 이유도 있을 것 같다. 미국이 외국에 온 북한 고위 인사에게 몰래 에볼라 바이러스를 감염시킬지 모른다는 공포다. 이들이 돌아가 김정은을 만나 감염시킬 수도 있고 최소한 지도부에 에볼라를 퍼뜨릴지 모른다. 최룡해조차 예외 없이 격리되는 것을 보면 이런 공포는 진짜로 있는 것 같다. 제아무리 신격화된 김정은이라 해도 에볼라 앞에선 한갓 인간에 불과하니 말이다. 요즘 북한엔 “김정은이 과거엔 시찰 때 인파와 어울리는 것을 즐겼지만 요즘엔 악수도 꺼린다”는 소문도 퍼지고 있다. 이쯤에서 하나 궁금해진다. 러시아 정부는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70주년 행사에 김정은이 참석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에볼라가 무서워 진짜 갈 수 있을까. 동행한 대표단에 악수 금지령이 내려질지 모른다. 숙소의 모든 물건을 에볼라 바이러스 취급해 북한에서 별걸 다 바리바리 싸들고 갈지 모른다. 귀국해 북한에 발을 딛자마자 동행했던 고위층을 모두 격리시켜 21일간 가둬두고 혼자 집에 갈 김정은을 상상해봤다. 해외 언론이 반길 엽기 기록이 또 하나 생길 것 같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이 탈북자 신동혁 씨(33)의 증언을 거짓이라고 주장한 데 이어 이번엔 탈북자 박연미 씨(22)의 증언을 문제 삼았다. 두 사람 모두 국제무대에서 북한 인권의 문제점을 널리 알려온 유명 탈북자다. 북한의 대외선전용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는 지난달 29일 북한 인권 증언으로 조명을 받고 있는 박 씨의 증언을 반박하는 동영상을 공개했다. 북한은 ‘인권모략극의 꼭두각시 박연미’라는 제목의 동영상에 박 씨의 큰아버지 고모 외삼촌 등 친인척들을 출연시켜 박 씨의 주장을 날조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11월 제14호 정치범수용소 출신이라고 주장한 신 씨의 증언을 북에 사는 아버지를 내세워 반박한 것과 방식이 판박이다. 우선 북한은 박 씨의 아버지 박진식 씨는 중국에 건너간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박진식 씨의 형은 동생이 구리를 밀수하다 2003년 교화 10년형을 받았으며 2007년 췌장암에 걸려 병보석으로 풀려나 그해 남포에서 숨졌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박진식 씨의 죽음을 최초로 확인했다는 남포 강서구역 양탄진료소 소장 인터뷰도 내보냈다. 이 같은 북한의 주장은 “함께 탈북했던 아버지가 중국에서 사망해 눈도 감지 못한 아버지를 겨울에 묻어야 했다”며 눈물 흘렸던 박 씨의 주장과 배치된다. 북한은 또 할리우드 영화를 보았다는 죄로 친구 어머니가 경기장에서 기관총으로 처형되는 장면을 9세 때인 2002년에 목격했다는 박 씨의 주장과 관련해 “경기장에서 처형이 진행되진 않는다”고 반박했다. 북한의 주장과는 별개로 국내 탈북자 사회에서도 박 씨의 증언 중 일부가 과장된 게 아니냐는 문제 제기가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탈북자는 “미국 영화를 봤다고 해서 총살하는 경우는 없다”고 말했다. 박 씨는 지난해 ‘세계 젊은 지도자 회의’에 참석하고 영국 의회의 증언대에 서면서 ‘북한 인권의 아이콘’으로 새롭게 떠올랐다. 또 지난해 영국 BBC 선정 ‘올해의 여성 100인’에 포함되기도 했다. 그의 수기는 미국의 유력 출판사에서 곧 발간될 예정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내전이 한창인 시리아에서 시민으로 구성된 다국적 민병대가 이슬람수니파원리주의 ‘이슬람국가(IS)’를 치열한 교전 끝에 몰아내 국제사회의 화제가 되고 있다. 쿠르드족 민병대를 주축으로 한 국제동맹군이 26일 시리아 북부 전략 요충지 코바니의 도심에서 IS 병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131일 동안 1500명이 넘는 전사자가 발생한 치열한 교전 끝에 얻어 낸 ‘값진 승리’다.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발호한 IS를 장기전투 끝에 격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IS의 코바니 공세 개시 IS가 코바니 진격을 시작한 것은 지난해 9월 17일. 탱크를 앞세운 IS의 파상공세 앞에 코바니 인근 마을들은 추풍낙엽처럼 IS 수중에 들어갔다. IS는 공격 첫날에만 코바니 인근 24개 마을을 함락시켰고 이후 이틀 사이에 39개 마을을 추가로 점령했다. IS가 코바니 시내 외곽 4km까지 밀고 들어오자 다급해진 미군은 9월 27일을 기해 코바니 일대에 공습을 시작했다. IS의 공격으로 코바니에서 살던 쿠르드 주민 4만5000명은 터키로 피란을 떠났다. 쿠르드계 터키 청년 1800여 명은 위기에 처한 쿠르드 민병대 인민수비대(YPG)를 돕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10월 2일 코바니 주변 마을 354곳 중 350곳을 장악한 IS가 시내 진입을 시도하면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날 IS 측은 하루 최다인 57명이 전사했다. 쿠르드 여성 전사는 폭탄을 안고 적진에 뛰어들었다. 10월 4일까지 코바니 주민 거의 전부가 터키로 넘어갔고 이날 마지막 외신기자도 코바니를 떠났다. 이때부터 건물 하나, 언덕 하나를 두고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시가전의 결정적 순간들 10월 10일 코바니 절반이 IS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수비대가 최대 위기를 맞았다. IS의 탱크가 코바니 시내를 휘젓는 가운데 YPG 사령부까지 점령당했다. 수비대는 서쪽 외곽의 톨세어 언덕으로 후퇴했다. 이곳도 이틀 전까지 IS 수중에 있었으나 미군의 공습 덕분에 되찾았다. 톨세어 언덕까지 IS가 장악하고 있었다면 코바니 방어 자체가 붕괴됐을 수 있었다. 코바니 수비대는 한 걸음씩 후퇴하면서도 주유소와 우물 등을 파괴했다. IS 탱크들은 연료가 바닥이 났다. 치열하게 버티던 수비대에 10월 말 드디어 지원군이 도착했다. 시리아자유군 400여 명과 이라크 쿠르드자치정부 군사조직 페시메르가 소속 160명의 정예 병력이 수비대에 합류했다. 이때부터 수비대는 후퇴를 멈췄다. IS도 점점 지쳐 갔다. 미군 주도의 연합군 공습에 보급로도 끊겼다. 올해 1월 2일에는 코바니 전투를 지휘하던 IS의 세이크 알 나지 사령관이 공습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를 계기로 수비대는 총반격을 개시했다. 25일 IS는 마지막 예비군 140명을 투입했다. 대부분이 18세 미만 소년이었다. 전세는 바뀌지 않았다. 이날 IS 대원 41명이 전사했다.○ 물러설 수 없는 자존심 전략적 요충지인 코바니는 양측 모두에 자존심이 걸린 상징적 도시였다. 국제동맹군은 이곳에서 IS의 불패 신화를 깨려 했고, IS는 파죽지세의 기세가 깨지는 걸 원치 않았다. 이런 점에서 치열했던 코바니 시가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과 히틀러의 군대가 혈투를 벌였던 스탈린그라드 방어전을 연상시킨다. 터키로 건너간 코바니 주민들은 매일 고향이 보이는 언덕에 올라 YPG를 응원했다. 이들은 자기 집이 미군 공습에 날아가도 박수를 쳤다. 반면 IS가 공격할 때면 불안한 표정으로 변했다. 코바니 전투 패배로 IS가 수세에 몰릴지도 관심사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신동혁.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해 9월 면담한 뒤 “북한 인권탄압을 알리는 산 표본”이라고 했던 탈북 청년이다. 신 씨의 증언을 쓴 책 ‘14호 수용소 탈출’은 북한 인권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는 대표적 저서가 됐다.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통과에도 신 씨의 증언이 기여한 바가 크다. 하지만 며칠 전 신 씨가 자신의 저서에 부분적 오류가 있다고 고백하면서 그의 증언 전체가 신뢰를 잃었다. 신 씨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들은 크게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당장 북한은 탈북자 증언이 모두 거짓이라며 맹비난을 퍼붓고 있다. 탈북자인 기자의 입장에선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신 씨가 ‘일부 오류’라는 표현을 쓰며 내용을 번복한 부분과 관련해, 기자의 판단엔 오류 차원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이 14호 수용소 출신이 아닌 18호 수용소 출신이라고 정정했다. 일각에선 18호 수용소면 어떻고 14호면 어떠냐고 하지만 둘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여러 18호 수용소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1958년에 생겨난 북창 18호 수용소는 초기에 정치적 숙청을 당한 사람들과 국군포로 등을 수감했다. 대다수 정치범수용소가 그렇듯 수감자들은 여러 마을에 분산 거주하며 농장과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그러다 1975년 정치범 대다수가 다른 수용소로 옮겨가면서 18호 수용소는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사회안전부(현 인민보안부) 관할로 넘겨졌다. 이때부터는 주로 경제범과 출신 성분이 나쁜 ‘신해방지구’ 추방자들이 수감됐다(‘신해방지구’는 6·25전쟁 이후 북한 땅이 된 황해남도 남부 및 개성 지역을 말한다). 1980년대 초반부터 18호에선 사안이 경미한 사람들의 죄수 신분을 벗겨주었다. 이들을 ‘해제민’이라고 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해제민을 받기 꺼려 보통 그대로 수용소에 눌러앉았다. 이때부터 18호 수용소에는 ‘이주민’ ‘해제민’ ‘외부인’이라 불리는 3가지 신분의 주민들이 섞여 살았다. 이주민은 아직 죄수 신분인 사람들로 공민권과 이동의 자유 등이 박탈됐으며, 외부인은 탄광 등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 18호 수감자 약 5만 명 중 80%에 해당하는 4만 명이 해제됐다고 한다. 나머지 1만 명은 봉창리라는 곳에 여전히 격리됐다. 2000년대 중반 마지막까지 해제가 안 된 봉창리 정치범 5000여 명이 개천 14호 수용소로 이전되고 18호 수용소는 완전히 사라졌다. 신 씨는 이런 곳에서 나서 자랐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가족이 언제 해제민이 됐는지는 밝히진 않는다. 그걸 밝히는 순간 김일성도 모르고 자랐다는 등의 그의 대다수 증언은 거짓말이 되게 된다. 신 씨가 나이도 숨겼다는 증언까지 있다. 물론 그가 마지막 격리지역이었던 봉창리 출신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가 1999년과 2001년 두 차례나 탈북했다가 체포됐다는 것은 설명되지 않는다. 격리지역에선 탈북하다 체포되면 총살이다. 북한이 공개한 신 씨의 6세 때 사진이 본인이 맞는다면 그의 가족은 1980년대에 해제됐다고 볼 수 있다. 신 씨의 증언 중 특히 충격적이었던, 1996년 어머니와 형을 고발해 처형되게 했다는 대목도 사실과 다르다는 증언이 있다. 당시 처형장에 있었던 탈북자가 훗날 한국에 온 것이다. 그는 신 씨의 어머니와 형은 살인죄로 총살됐다고 기억한다. 이외에도 신 씨의 증언엔 의문점이 많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가 자란 곳이 북한에서 출신 성분이 가장 나쁜 사람들이 살았던 열악한 지역이란 사실이다. 북한이 공개한 사진이 바로 이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북한은 신 씨가 중학교까지 졸업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가 동창들과 찍은 사진을 한 장도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 그곳은 졸업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할 정도로 천대받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란 의미다. 신 씨가 처음부터 진실을 이야기했다 해도 국제사회의 공분을 얻었을 것이다. 수용소가 존재했던 시절 북창 수감자들은 짐승보다 못한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신 씨의 책을 보면 그가 자라면서 들었을 과거 수용소 시절의 이야기가 자신의 체험담처럼 둔갑돼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10여 년 전에도 14호 정치범수용소 출신임을 주장하며 “그곳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쇳물을 부어 죽인다”고 했던 탈북 여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14호 출신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거짓 간증으로 큰돈을 벌어 지금은 미국에서 상점을 운영한다고 한다. 북한 인권과 관련해 자극적인 거짓 증언은 진짜 증언까지 의심을 받게 하는 범죄이다. 거짓으론 악을 이길 수 없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정은이 설날 첫 방문지로 평양육아원과 애육원을 찾아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노동당 선전부서의 녹슬지 않은 치밀함에 새삼 놀랐다. 그걸 보니 한 50대 탈북 여성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마 대다수 북한 주민은 이 말에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김일성은 눈물이 많았어. 아이 때 봤는데 애들이 ‘아버지 원수님’ 하며 뛰어갔더니 그가 ‘내가 이 애들에게 해준 것도 없는데 아버지라고 하누먼’ 하면서 그러안고 눈물을 흘리더군. 하지만 김정일이 우는 걸 한 번이라도 봤어? 김일성이 사망한 지 며칠 만에 사람들 앞에서 크게 웃는 걸 봐. 피도 눈물도 없는 것 같아. 그러니 인민이 굶어 죽어도 꿈쩍도 안 하지.” 정치인이 흘리는 눈물의 힘은 남쪽 사람들도 잘 알고 있다. 외모에서부터 할아버지 향수를 노린 것이 역력한 김정은은 집권 이후 눈물 흘리는 모습을 자주 노출했다. 이것이 우연이란 말인가. 고아를 돌보는 이미지는 또 어떤가. 북한 교과서엔 김일성과 고아에 관련된 내용이 많다. 김일성이 빨치산 시절과 6·25전쟁 때도 부대와 집무실에서 고아를 돌봤다는 것이다. 특히 고아인 최영옥 4남매에게 돌려주었다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런 이야기는 교과서와 강연 등으로 전해 내려오며 “김일성은 인자했다”라고 끝없이 세뇌하고 있다. 김정은이 보육원에 깊은 관심을 돌리는 것도 우연일까. 물론 치밀한 이미지 메이킹 전략이라고 해도 설날 군부대에 가기보다는 보육원이 낫다고 평가하고 싶다. 보육원은 부모가 죽어 꽃제비가 된 아이들을 키우는 곳이다. 어려서 구걸하며 살다 보니 보육원 아이들의 평균 키는 세 살 밑의 또래와 비슷하다. 고아가 많다는 것은 북한이 선전처럼 인민의 낙원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해 주는 생생한 증거다. 그래서인지 김정일은 보육원을 찾아간 적이 없고 관심을 가진 적도 없다. 하지만 김정은은 아버지 시대의 치부를 수용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대동강 기슭의 노른자위 땅에 보육원도 건설했다. 또 김정은은 고아를 돌보라는 지시를 전국에 하달했다. 중국에서 구걸하던 꽃제비들이 재작년 초부터 거의 보이지 않기에 알아보니 “북한 보육원에서 이젠 밥은 먹여 준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김정은이 요즘 고아는 물론이고 홀몸노인에게까지 관심이 크다니 이런 점은 얼마든지 환영할 수 있다. 물론 그 순수성엔 의심이 간다. 김정은이 보육원에 처음 간 때는 공교롭게 장성택을 처형하고 한 달 남짓 지난 지난해 2월 3일이다. 따뜻하고 인자한 지도자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절실할 때였다. 왠지 올해 설맞이 무대에 북한의 명곡인 ‘세상에 부럼 없어라’를 부르는 고아 합창단이 등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아들이 “우리의 아버진 김정은 원수님, 우리의 집은 당의 품”이란 가사를 눈물 펑펑 흘리며 부르고 김정은도 같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전국에 중계된다면. 이런 장면은 분명 주민들을 크게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노동당 선전 담당자들 역시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쇼라고 해도 좋다. 그 덕분에 전국의 꽃제비들이 따뜻한 밥과 숙소를 얻을 수 있다면 다른 쇼보단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차역에 방치된 꽃제비들의 시체 앞에서 주먹을 쥐어 본 사람이다. 석탄재 속에서 자고 나온 꽃제비 아이들에게 밥을 나눠주며 눈물을 흘려본 사람이다. 그래서 솔직한 심정은 이렇다. “좋다. 이용해도 좋으니 애들을 제발, 죽게 내버려두지 말라. 그리고 진짜로 사랑을 주면 좋겠다.” 김정은은 아는지 모르겠다. 지난해 김정은 지시로 갓 개장한 송도원야영소에 갔던 원산 보육원 아이들이 야영이 끝난 뒤 옷과 배낭은 물론이고 신발과 양말까지 다 바쳐야 했었던 것을. 다음 차례로 갈 아이들이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누구 앞에서나 “원수님의 배려로 부러운 것 없이 지낸다”고 줄줄 대답하는 아이들이 실은 선생만 보면 겁에 질려 입을 다문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솔직히 배가 고파요”라는 고백을 들으려면 최소한 며칠간 친분이 쌓여야 한다. 그나마 김정은이 찾은 평양 보육원은 지방보다 사정이 훨씬 낫다. 이곳은 평양 꽃제비만 받기 때문이다. 꽃제비마저 차별을 받는 셈이다. 현재 이뤄지는 보육원 지원도 김정은의 관심이 식는 순간 끝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 꽃제비는 또다시 거리로 내몰리게 된다. 개인적으론 김정은에게 꼭 묻고 싶은 말이 있다. 과거 탈북했다 체포돼 북송된 뒤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 이들 중엔 18세 미만의 미성년자 고아들도 있다. 김정은이 보육원에서 눈물을 흘릴 때 어느 수용소에선 철모르는 고아가 채찍 아래 죽어가고 있다. 당신은 정치범이 된 그 고아들을 위해서도 울어줄 수 있는가.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독일에서 한 남성 간호사가 심심하다는 이유로 입원 환자들에게 과다한 약물을 주입해 30여명을 살해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주장이 사실일 경우 2차 대전 이후 독일의 최대의 연쇄 살인범으로 ‘죽음의 천사’로 불렸던 20대 후반의 남자 간호사 슈테판 레터가 노인 환자 28명을 살해해 2006년 종신형에 처해진 사건보다 더 큰 충격적인 사건이 된다. 8일 독일 북부 도시 올덴부르크에서 열린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정신의학 전문가는 살인죄로 기소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남성 간호사(38)를 면담하는 과정에 그가 30명을 살해했음을 고백했다고 밝혔다. 문제의 간호사는 2005년 환자에게 약물을 주입하다가 동료들에게 발각돼 2008년 살인미수 혐의로 7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작년 9월 환자 3명 살해와 다른 2명에 대한 살인 미수 혐의가 추가로 밝혀져 재판을 받고 있는 상태다. 이 간호사는 2003년부터 2005년 사이에 올덴부르크의 한 병원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면서 심장박동을 교란시키고 혈압을 낮추는 약제를 환자들에게 주입한 혐의를 받고 있다. 수사관들은 이 남자 간호사가 자신의 심폐소생술을 과시하기 위해 응급상황을 만들려 했거나 심심하다는 이유로 환자들에게 약물을 과다 주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법원 대변인에 따르면 이날 증언에 나선 정신의학 전문가는 피고가 3명 살인과 2명에 대한 살인 미수를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90명의 환자들에게 약물을 과다 주입해 이 가운데 30명을 숨지게 했다는 것도 시인했다고 말했다. 그는 피고를 최근 4차례 면담했으며 피고가 다른 병원과 노인요양원, 응급의료센터 등에서도 근무했지만 이들 기관에서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내용도 증언했다. 법원 대변인은 그러나 정신의학 전문가의 증언은 법적으로 피고 본인의 자백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이 간호사는 지금까지 법정에서 일절 발언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이슬람 극단주의 추종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테러에 대한 공포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지난해 12월 15일에 발생한 호주 시드니 인질극에 7일 발생한 파리 참사는 세계 최고 관광지의 중심부가 공격을 당했다는 점에서 지구촌에 안전지대가 없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 사건이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이슬람 테러 최근 공격을 받고 있는 나라들은 프랑스를 포함해 캐나다 호주 등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공격에 동참한 국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프랑스에선 이미 지난해 12월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자생적 테러 공격이 이틀 연속 잇따라 발생해 대형 테러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팽배해있었다. 지난해 12월 21일 프랑스 동부 디종에선 40세 남성이 이슬람 신앙고백인 ‘알라후 아끄바르(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치며 군중을 향해 돌진해 2명이 중상을 입는 등 11명이 다쳤다. 전날엔 이슬람으로 개종한 20세 남성이 프랑스 중서부 도시 주레투르 교외지역의 경찰서에서 흉기를 휘둘러 경찰관 3명이 다쳤다. 아프리카 부룬디 태생의 프랑스 국적자인 이 남성 역시 ‘알라후 아끄바르’라는 말을 반복해 외쳤으며 결국 경찰에게 사살됐다. 호주 시드니에선 지난해 12월 15일 IS를 추종하는 이란계 50대 남성이 도심 카페에서 17시간 동안 인질극을 벌여 범인을 포함해 3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캐나다 오타와에선 지난해 10월 22일 이슬람으로 개종한 32세 남성이 경찰을 사살한 뒤 총리가 일하는 의사당으로 난입해 총격전을 벌이다 사살되기도 했다. 영국 런던에서도 2013년 5월 이슬람 극단주의자 2명이 대낮에 거리 한복판에서 군인을 참수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서방국가가 아닌 지역에서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공격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12월 16일 파키스탄 페샤와르 지역에서 탈레반 반군 6명이 정부군 부설 학교를 공격해 학생 130여 명과 교사 9명 등 140여 명이 숨진 사건이 대표적이다. 올해 들어서도 4일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 국제공항 인근에서 차량을 이용한 자살 폭탄테러가 발생해 시민 4명이 숨졌다. 서방국가에서 벌어지는 테러가 주로 테러 단체와의 연계가 없이 자생적으로 벌이는 ‘외로운 늑대형’ 테러라면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등 이슬람 국가들에서 벌어지는 테러는 IS와 보코하람 같은 악명 높은 테러조직의 소행이라는 특징이 있다. 미국 크리스천포스트에 따르면 지난해 11월부터 1년 동안 보코하람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은 1만340명에 달한다. 또 유엔 통계에 따르면 같은 기간 IS에 테러로 희생당한 사람은 1만733명이다.○ 이번 일로 반이슬람 증오 범죄도 빈발할 듯 샤를리 엡도 테러를 계기로 유럽에서 또다시 반(反)이슬람 정서가 고조돼 극우정당들이 힘을 얻고 이슬람 증오 범죄가 빈발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반이슬람 정서는 다시 이슬람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테러의 악순환을 만들게 된다. 독일에선 지난해 12월 반이슬람 시위에 1만7000여 명이 모이기도 했다. 이들은 “무슬림 이민자가 너무 많아 서구의 전통적인 기독교문화와 전통이 퇴색되고 있다”며 “피부색이나 종교가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현재 유럽 인구의 3% 정도가 무슬림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중 상당수는 과거 유럽의 식민지배를 받던 북아프리카 출신이다. 유럽에 부는 ‘이슬라모포비아(이슬람 공포증)’는 극단적 이슬람 증오 범죄를 낳는다. 스웨덴에선 연말연시 일주일 동안 세 차례나 모스크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영국에선 지난해 6월 이슬람 복장인 아바야를 입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여성이 산책 중에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장 대표적인 이슬람 증오 범죄는 2011년 7월 노르웨이에서 안데르스 브레이비크(32)가 “이슬람의 침공을 받은 유럽을 구출하겠다”며 무고한 시민과 학생 76명을 사살한 사건이다. ‘톨레랑스(관용)’의 나라 프랑스도 반이슬람 정서 확산에서 예외는 아니다. 프랑스의 무슬림 인구는 500만 명이 넘는다. 서유럽에서 무슬림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이다. 프랑스에선 지난해 5월 반이슬람 정책을 표방한 국민전선(FN)이 유럽의회 선거에서 선전해 프랑스 제1당에 올랐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군 탈영병이 중국으로 넘어가 주민 4명을 살해한 사건이 벌어진 허룽(和龍) 시 난핑(南坪) 촌은 기자가 2000년대 초반 탈북할 때 두만강을 건너 반나절가량 머물던 바로 그곳이다. 탈영병이 강을 건넌 지점도 기자가 강을 건넜던 바로 그 장소이다. 이번 사건 소식을 듣고 기자는 10여 년 전 목숨을 걸고 북한을 빠져나온 탈북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안내인의 재촉 속에 대낮에 무릎 깊이의 두만강을 전력 질주해 건너던 기억, 난핑 뒷산에 올라 북한 쪽을 바라보며 안도하는 한편으로, 과연 내 운명이 어찌 될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으며 밤을 기다리던 순간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어둠이 깔리고 주위가 어두워진 뒤 기자는 난핑 마을로 내려와 미리 소개받은 집을 찾으려 돌아다녔지만 수십 채의 농가가 비슷비슷하고 문패마저 없어 찾기 어려웠다. 할 수 없이 어느 민가에 들어가 “이러이러한 집을 찾고 있다”고 했더니 집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인이 친절하게 알려줬다. 기자가 탈북자라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조선족 마을이라 한국말로 통할 수 있었다. 기자가 마침내 소개받은 집을 찾아 들어가 “집을 가르쳐준 중년 여인이 나를 신고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했더니 “숟가락까지 몇 개인지 서로들 알고 있는 뻔한 동네에서 그런 짓은 안할 테니 걱정 말라”는 답이 돌아와 안심했다. 음식을 푸짐하게 얻어먹고, 여비까지 얻어 밤길을 타고 다음 목적지인 허룽 시내로 가기 위해 마을 입구에서 버스를 타려 했지만 검문하는 군인들 때문에 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산길을 타고 걷다가 산에서 노숙을 하고 다음 날 저녁까지 걷고 또 걸었다. 너무 배고파 외딴 집으로 들어가 “탈북자이다. 먹을 것을 좀 줄 수 있느냐”고 하자 집주인인 한족 남자가 직접 된장찌개를 끓여 주었다. 그때만 해도 옌볜의 민심은 탈북자들에게 비교적 동정적이었다. 기자는 두만강을 다섯 번이나 건너고 탈북에 성공했다. 처음 강을 건넜을 때 허룽 시내에서 중국 공안에게 체포됐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서글서글한 눈매였던 공안은 조사를 마친 뒤 내게 “김일성대 졸업생이라고? 그러면 우리 베이징대 졸업생이나 마찬가지”라며 “인재가 북에 끌려가서 죽는 걸 바라지 않아 풀어주니 다시는 잡히지 말라”고 당부했다. 지금 북-중 국경의 민심은 기자가 탈북할 때와는 판이했다. 국경에는 감시카메라가 설치됐고, 집집마다 비상신고 전화가 지급돼 있다. 이웃 주민들이 탈북자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일을 겪은, 그 인심 좋던 난핑 촌 주민들은 앞으로 탈북자를 보면 분노하지 않을까.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넌 탈북자들 역시 살기 위해 더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을지 모른다. 어쩌면 북-중 국경의 이 같은 현실은 통일에 대한 장밋빛 꿈에 대한 경종일지도 모른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뇌물을 받은 혐의 등으로 2008년부터 교도소에 수감됐던 천수이볜(陳水扁·64) 대만 전 총통이 6년 2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 나왔다. 대만 법무부는 5일 우울증과 뇌 수축 증세를 보이고 있는 천 전 총통에 대한 병보석 신청을 비준했다고 밝혔다. 천 전 총통은 이날 오후 수감 중인 타이중(臺中) 교도소 밖으로 나왔으며 1개월 간 외부 의료기관에 입원해 정밀 검사를 받게 된다. 그 이후에는 계속 치료를 받게 할지, 아니면 재수감돼 남은 형기를 마저 채울지가 다시 결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2000년부터 8년간 대만을 이끌던 천 전 총통은 2008년 11월 공문서 위조와 수천 만 달러의 뇌물 및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20년 형을 선고받고 이날까지 복역해 왔다. 그의 아내도 같은 혐의로 2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