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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전 9시 45분 서울 종로구 그라운드시소 서촌. 전시관 개장 15분 전에 도착했지만 이미 20여 명이 줄을 서고 있었다. 평일 오전인데도 휴일 못지않게 붐볐다. 지난달 23일 시작된 스페인 사진가 요시고(본명 호세 하비에르 세라노·40)의 ‘요시고 사진전: 따뜻한 휴일의 기록’에는 10일까지 총 4만 명의 관람객이 찾았다. 그가 처음 국내에서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문화콘텐츠 크라우드 펀딩 ‘펀더풀’을 통해 전시비용을 조달했다. 지난달 9∼22일 495명이 펀딩에 참여해 전시 개최에 필요한 5억 원 이상이 모였다. 전시 2주 만에 투자 손익분기점(관람객 8만 명)의 절반을 채웠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350여 점의 사진은 평범한 일상을 소중하게 만드는 매력을 담고 있다. 작가의 렌즈가 향한 곳은 한가로운 장소다. 그는 순간적인 장면을 빠르게 촬영하는 스냅사진의 거장 스티븐 쇼어(74)의 영향을 받았다. 그가 처음 구입한 사진집은 쇼어의 ‘American surfaces’였다. 보통의 것에 특별함을 부여하는 건 이국적 풍경이다. 전시는 건축, 다큐멘터리, 풍경의 3개 섹션으로 나뉘어 일본, 아랍에미리트, 헝가리, 스페인, 미국, 포르투갈, 프랑스 등 7개국의 자연과 사람을 담았다. 노곤한 오렌지 빛부터 시원한 바람이 불 것 같은 옥빛까지. 그는 자연이 선물한 다채로운 색을 자유자재로 표현했다. 작품 ‘Dubai, UAE’(2018년)는 강렬한 햇빛이 비추는 사막의 모래와 산맥의 그림자가 인상적이다. “지루하게만 보이던 대상도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각도에 따라 마법 같은 장면이 연출된다”는 그에게 빛은 중요한 도구다. 요시고는 장소와 시간에 따른 태양의 각도를 보여주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참고해 필름 혹은 디지털 카메라를 선택했다. 그가 즐겨 촬영한 곳은 고향인 스페인 도시 ‘산세바스타인’. 작품 ‘San Sebastian, Spain’(2019년)은 해수욕을 즐기러 온 아이들을 담았다. 다수의 관광객이 작품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70∼200mm 망원 줌 렌즈로 당겨 촬영했다. 전시 포스터로 쓰인 대표작 ‘Mallorca, Spain’은 스페인 마요르카섬 해변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남성의 모습을 다뤘다. 이 작품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며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다. 의류업계 종사자였던 그가 유명 사진가가 될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후원 덕분이었다고 한다. 사진 촬영에 재능이 없다며 주눅이 들었을 때 아버지는 시를 한 편 지어 아들에게 선물했다. 시의 한 문구였던 ‘Yo sigo(계속 나아가다)’는 이후 그의 활동명이 됐다. 이후 그는 지인들에게 작품을 보여주려고 시작한 인스타그램을 통해 이름이 알려졌다. 현재 약 19만 명의 팔로어를 보유한 그는 ‘잭 다니엘’ 등 유명 브랜드로부터 러브 콜을 받고 있다. 이번 전시도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젊은층에 입소문이 나 관람객의 90%가 20, 30대다. 크라우드 펀딩 투자자의 80%도 20, 30대였다. 윤성욱 펀더풀 대표는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고 지지하는 젊은층의 문화적 팬덤에 힘입은 전시”라며 “코로나로 좌절된 해외여행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는 작품 소재도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전시는 12월 5일까지. 성인 1만5000원, 아동·청소년 1만2000원.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빨간 니트와 바지를 입은 개는 시크하게 오른쪽으로 고개를 꺾고 있다. 지루한 듯 허공을 바라보는 무심한 개의 눈빛이란. 어처구니없어 웃음이 터진다. 작품 ‘캐주얼’(2002년)이다. 현대 사진의 거장 윌리엄 웨그만(78·미국)이 포착하는 순간에는 항상 개가 있다. 자신의 바이마라너종 반려견들이다. 1979년 그는 존경하는 미국 사진작가 만 레이(1890∼1976)의 이름을 붙인 첫 반려견 ‘만 레이’와의 작품 활동을 시작으로 총 15마리의 반려견을 의인화해 사진을 찍으며 인간 세상을 풍자했다. 혁신이었다. 그의 작품은 미국 방송사 NBC의 ‘생방송 토요일 밤’과 PBS의 ‘세서미 스트리트’에 소개됐고 뉴욕현대미술관(MoMA), 휘트니미술관 등이 앞다퉈 그의 작품을 소장했다. 웨그만의 작품 84점이 한국에 왔다. 2018년 프랑스 아를 국제사진축제를 시작으로 호주, 뉴질랜드, 스위스, 네덜란드를 거친 세계 순회 사진전 ‘윌리엄 웨그만: 비잉 휴먼(William Wegman Being Human)’이 8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막했다. 디지털카메라 작품은 18점이고, 대형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찍은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무게 106kg, 냉장고만 한 크기의 사진기로 촬영한 가로 51cm, 세로 61cm의 사진들에는 반려견에 대한 웨그만의 애정이 담겼다. ‘슬로 기타’(1987년)에서 개는 기타를 껴안은 채 비스듬하게 누워 있다. 위를 향하는 눈동자를 보면 악상을 떠올리는 음악가 같기도 하고, 피곤에 절어 쉬고 있는 직장인 같기도 하다. 인내심이 강하다고 알려진 바이마라너가 보여주는 모델로서의 감각을 확인할 수 있다. ‘모자와 목걸이를 한 개’(2000년)에서는 카메라를 등진 채 고개만 돌려 정면을 응시하고, ‘키’(2017년)에서는 유명 브랜드 마크 제이컵스의 옷을 입고 근엄한 표정을 짓는다. 합성한 사진은 없다. 사람처럼 옷을 입고 서 있는 사진의 경우 실제 개에게 옷을 입힌 다음 의자 등을 설치해 설 수 있게 했다. 손 같은 사람의 신체가 필요하면 조수가 개 뒤에 몸을 숨기고 손만 내밀게 했다. 색상에 대한 웨그만의 감각은 빼어나다. 미국 매사추세츠미술대를 졸업하고 일리노이대 예술대 석사과정을 마친 그는 어려서부터 회화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깊은 바다 빛 바탕에 흰색 오브제가 어우러진 ‘흘린 모양새’(2013년), 터키석 색과 노란색이 조화를 이루는 ‘오션뷰’(2015년). 배경 색채들이 이루는 조화 속에 회갈색 털을 가진 바이마라너가 도드라진다. 즉석에서 인화되는 폴라로이드 카메라 사진은 후보정을 할 수 없기에 그는 색의 조화와 도구, 모델의 구도를 치밀하게 준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부산한 촬영장에서는 반려견의 눈높이를 렌즈 눈높이와 맞춰 모델의 집중을 끌어냈다. 물론 쉽진 않았다. ‘캐주얼’의 모델인 캔디는 기분 내키는 대로 달리거나 쉴 새 없이 점프를 했다고 한다. 카메라 앞에 설 때마다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활동적인 캔디를 어르고 달래며 한 컷 한 컷 찍었을 웨그만의 모습이 그려진다. 전시는 개를 통해 사회 여러 계층을 보여주는 ‘우리 같은 사람들’, 나비부인 같은 오페라와 연극에서 모티브를 따온 ‘이야기’ 등 모두 9개 세션으로 구성된다. “사진을 찍는 과정에서 그는 내 안에 스며든다”는 웨그만의 말처럼 사진에선 그와 반려견 간의 교감이 느껴진다. 차분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는 반려견의 눈동자에서는 당시 카메라 뒤에 있던 웨그만에 대한 신뢰가 담겨 있다. 9월 26일까지. 성인 1만5000원, 청소년 1만2000원, 어린이 1만 원.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전통은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현대에 헌정된다. 오늘날 ‘한국의 미(美)’로 꼽히는 예술에는 수백 년의 시공간을 초월해온 예술가들의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8일부터 10월 10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무료로 선보이는 ‘DNA: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 전시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문화재 및 미술품을 교직하며 한국적 아름다움의 뿌리를 찾는다. 전시에는 국보와 보물 등 문화재 35점과 근현대 미술 130여 점이 나왔다. 단원 김홍도 같은 조선시대 화가부터 김환기, 천경자 등 근현대 화가에 이르기까지 유명 작가 97명의 작품들이 대거 포함됐다. 이 중 이중섭의 ‘은지화’(1950년대), 도상봉의 ‘정물 A’(1974년)와 ‘포도 항아리가 있는 정물’(1970년), 박영선의 ‘소와 소녀’(1956년)는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기증한 작품이다. 천재는 홀로 탄생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중섭에겐 고려청자가 직간접적 영향을 끼쳤다. 그림 재료를 살 돈이 없던 가난한 화가는 양담배를 싸는 종이에 입혀진 은박에 뾰족한 도구로 드로잉을 하는 은지화 기법을 창안했다. 은박 위에 긁힌 부분은 미세한 음각이 된다. 그 위에 물감을 바르고 닦으면 마치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처럼 물감이 파인 부분을 메우며 작품으로 탄생한다. 작품 ‘봄의 아동’(1952∼1953년)은 ‘청자상감 포도동자무늬 주전자’에 보이는 동자들의 문양을 평면적으로 펼쳐놓은 듯하다. ‘최순우가 김환기에게 보낸 연하장’에서는 추사 김정희의 힘도 살펴볼 수 있다. 김정희는 수묵으로만 간략하게 그림을 그린 조선시대 문인화의 대가다. 연하장에는 김정희 초상과 대표작 ‘불이선란도’의 인쇄본이 수록돼 당대 화가들의 김정희에 대한 존경을 확인할 수 있다. 김환기와 최순우, 이 연하장의 소장자 윤형근은 모두 1970, 80년대 한국 단색화의 선두주자다. 조선 백자는 우아함의 절정을 보여준다. 도상봉의 회화 ‘라일락’(1975년)은 달항아리 특유의 티 없는 깨끗함에 수더분한 흰 라일락꽃을 더했다. 박영선의 ‘소와 소녀’와 함께 서민적 성격의 백자가 세련된 가정에 어울리는 예술 작품으로 이미지가 변주됨을 볼 수 있다. 아호를 ‘도천(陶泉·도자기의 샘)’이라 지을 정도로 도자기를 좋아했던 도상봉은 ‘정물 A’ ‘포도 항아리가 있는 정물’ 등 정물화 곳곳에도 도자기 그림을 넣었다. 수백 년의 간격을 지닌 작품들이 한 공간에 공존하는 걸 바라보노라면, 과거와 현대의 경계가 흐릿해 보이기도 한다. 신윤복의 ‘미인도’(18세기 후반)는 1957년 전후 한국문화를 알리기 위해 기획된 ‘고미술전람회’ 출품작을 다룬 신문 기사를 통해 알려졌다. 작품은 공개되자마자 전통적인 한국 여성의 아름다움을 담은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미인도는 우수한 전통으로 여겨지며 현대 작가들에게 자극을 줬다. 장운상이 ‘청향’(1973년)을 통해 온건한 형태로 미인도를 계승했다면, 천경자는 현대 여성 작가들의 정체성을 그림에 담았다. ‘탱고가 흐르는 황혼’(1978년)은 니코틴의 힘을 빌려 잠시나마 안정에 든 순간을 담담하게 묘사한 자화상 성격의 작품이다. 배원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소박하고 자연스럽다고만 알려진 한국적 미를 재정의하고 싶었다. 다양한 시대에 만들어진 성과들은 다면적이다. 한국미술사의 성과들이 사각지대 없이 다시 읽혔으면 한다”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 전시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이건희 컬렉션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달 21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한국 근현대 작품 60여 점을 공개한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유기동물을 돕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인플루언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동아일보와 한국사회공헌협회는 2일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서 ‘FF(유기동물 인식개선) 캠페인’ 공식 앰버서더를 위촉했다. FF 캠페인은 유기동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고 유기동물 보호소를 지원하기 위한 캠페인이다. 이날 위촉식에서 그룹 에이핑크의 박초롱과 윤보미를 포함한 앰버서더 33명은 “나는 친구를 버리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 앞에 서서 유기동물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바꾸는 데 앞장서기로 약속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매년 동물 10만 마리 이상이 유기되고 있다. 유기동물 대부분이 시설이 열악한 민간보호소 등에 있는데, 수용 정원이 찰 경우 20% 이상이 안락사 된다. 이에 한국사회공헌협회 등은 4월부터 유기동물 관련 활동을 기획했다. 여기에 게임 방송으로 유명한 유튜브 채널 ‘Mnics에투샤’의 운영자 권영민 씨 등이 합세하면서 ‘인플루언서들의 캠페인’으로 확대됐다. 앰버서더 명예단장을 맡은 권 씨는 “33명 중에 유기동물과 관련한 봉사를 해본 사람도 있고, 나처럼 경험이 없는 사람도 있다. ‘내게 맞는 자리인가?’ 고민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번 기회에 인플루언서로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앰버서더 중에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도, 그렇지 않은 이도 있다. 한의학자이자 유튜브 채널 ‘허준할매’를 운영하는 최정원 씨는 후자. 10년 전만 해도 어떤 동물보다도 사람을 먼저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그러나 최근 반려동물의 영향력을 보면서 동물의 생명이 지닌 가치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반려동물이 인간과 교류하는 존재로서 주는 위안과 행복감이 상당하다. 단순히 입양하고 키우는 존재 그 이상이 됐는데도 유기되는 동물이 많다. 이 문제는 이젠 반려동물 보호자들만의 문제가 아니게 됐다”고 말했다. 앰버서더들은 앞으로 유기동물과 관련한 다양한 온·오프라인 활동을 하고, 이를 각자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유튜브 등을 통해 알릴 예정이다. 국도형 한국사회공헌협회 회장은 “이 캠페인이 누군가에겐 작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그 수가 늘면서 사회가 점진적으로 나아질 거라 믿는다”며 “대중의 사랑으로 성장한 인플루언서들인 만큼 사회적 책임인 ‘ISR(influencer Social Responsibility)’ 문화 또한 함께 확산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FF 캠페인은 8일부터 9월 26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사진전 ‘윌리엄 웨그만: 비잉 휴먼(William Wegman Being Human)’과 시작과 끝을 같이한다. 전시 수익의 2%는 동물자유연대에 기부된다. 유기동물 보호소 운영비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료를 지원하는 데에 쓰일 예정이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지난해 3월 미국에서는 갑자기 14세기에 쓰인 한 책이 서점에서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문호 조반니 보카치오(1313∼1375)의 ‘데카메론’이었다. 14세기 유럽에는 인류사상 최악의 전염병인 흑사병이 돌았다. 보카치오는 흑사병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펴냈고, 공포에 떨던 동시대 사람들에게 이 책을 바쳤다. 동료들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읽었고, 그들의 눈물과 웃음이 모여 이 책은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700여 년이 흐른 지금 이 고전이 다시 회자되는 이유는 단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이다. 데카메론 프로젝트를 기획한 미국 뉴욕타임스(NYT)의 케이틀린 로퍼 책임 프로듀서에 따르면 팬데믹이 시작될 무렵 소설가 리브카 갈첸이 NYT에 연락해 데카메론 리뷰를 쓰고 싶다고 했다. 이에 NYT는 한발 더 나아가 당대 최고 소설가들이 격리 중에 쓴 신작 단편소설들을 모아 ‘우리 시대의 데카메론’을 만들고자 했다. 로퍼는 서문에서 “암울한 시기에 독자들에게 즐거움과 위안을 제공하는 것보다 더 큰 야망은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단편 29편이 모였다. 책은 지난해 7월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단편들을 다시 단행본으로 묶은 것이다. 소설가들은 전염병 시대를 배경으로 사랑, 욕망, 행복 등을 다룬 일상 혹은 그 너머의 세계를 상상해 그린다. 책의 시작인 ‘알아보다’는 봉쇄조치가 내려진 미국 뉴욕시의 한 아파트에 사는 두 여인의 우정을 다뤘다. ‘블랙 톰의 발라드’(2016년)로 미국 문학상인 셜리 잭슨상을 받은 소설가 빅터 라발의 작품이다. 작가는 마스크 착용, 원격 수업 등 코로나19 시대상을 작품에 녹여냈다. ‘눈 먼 암살자’, ‘증언’, ‘시녀 이야기’ 등을 쓴 유명 캐나다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격리 중인 지구인들을 도와주러 온 문어 모습의 외계인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을 그린다. 작품 ‘참을성 없는 그리젤다’ 속 외계인은 결혼을 통해 궁전에 들어가게 된 신분 낮은 그리젤다가 못된 궁전 사람들을 물리치고 사는 이야기를 전한다. 외계인은 만담꾼 역할에 대해 “재밌는 일이 아니다”라면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지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언뜻 보면 별것 아닌 내용이다. 700년 전 책 데카메론도 그랬다. 데카메론은 흑사병을 피해 이탈리아 도심 밖에 모인 젊은 남녀 10명이 10일 동안 각각 하루에 하나씩 총 100편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내용을 액자소설 형태로 모은 책이다. 수녀가 실수로 두건 대신 내연남의 바지를 뒤집어쓰는 내용처럼 대개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이다. 전염병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데카메론은 인간의 일상과 내면을 구체적인 체험으로 풀어내며 서로의 결속을 돕는다. 데카메론 프로젝트 역시 소설 속 불안정한 주인공의 일상에 공감해 씁쓸해하다가도 발랄한 문체에 웃음 짓게 된다. NYT 메일함이 이 소설이 준 위안에 대해 쓴 독자들의 편지들로 가득 찬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 소설을 읽는 건 그 시기를 이해하는 방식이자 상황을 끈기 있게 버텨내는 방법이다. 책은 동시대 독자들이 누구도 상상해본 적 없는 현재를 이해하고 연대하는 데, 또 이 시기를 무사히 넘긴 미래의 독자들이 이 시기를 기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재벌가에는 남성들이 산다. 남성들은 차기 회장 자리를 두고 암투를 벌인다. 적자와 서자, 친모와 양모를 가려가며 서로가 우위를 차지하려 으르렁댄다. 이곳의 여성들은 주변인일 뿐이다. 시대가 지나도 바뀌지 않을 듯했던 재벌가 클리셰다. 하지만 이제 재벌가에는 여성들도 산다. 가부장적 폐습에 갇혀 ‘나’를 지우고 살던 이들은 클리셰를 보란 듯이 전복시키고 자신과 스스로의 것들을 지켜 나간다. tvN 드라마 ‘마인’이 말하는 시대상이다. 드라마는 6월 27일 마지막 회에서 최고 시청률 10.5%를 찍고 종영했다. 부계 상속이 주가 되는 세계 속에서 스스로 주체가 되는 여성들, 그리고 그들의 연대는 마지막 회 부제 ‘빛나는 여인들’처럼 반짝인다. 그중에서도 효원가의 중심에 서서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는 여인은 첫째 며느리 정서현(김서형)이다. 정서현은 둘째 며느리 서희수(이보영)의 ‘키다리 언니’를 자처하며 워맨스(여성들 간의 우정)를 선보인다.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보고받고 행동하는 해결사이기도 하다. 6월 28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서형(48)은 “오지랖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며 “비슷한 장면을 촬영할 때마다 대사 앞뒤로 군더더기 감정을 뺀 채 표정으로 담백하게 연기하려 했다”고 밝혔다. “짧은 장면에 캐릭터가 살아온 인생 전체를 표현하는 연기력이 놀랍다”는 연출자 이나정 PD의 말처럼 김서형은 권력형 드라마에 새로운 캐릭터를 입혔다. 마찬가지로 배우 김서형에게도 이 작품은 새로운 세계였다. 1994년 K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이래 로맨스 주인공을 별로 맡지 않은 그에게 서정적인 멜로 연기를 시도할 기회였기 때문이다. 김서형은 “첫째 며느리로서의 멋진 모습도 많았지만 이 작품에서 내 주안점은 멜로였다”고 밝혔다. 정서현은 수지 최(김정화)와 연인인 여성 성소수자다. 김서형은 “성소수자의 멜로가 다른 이들의 사랑과 다르거나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얼마만큼 아름다운 멜로를 그릴 수 있겠냐만 고민했다”고 말했다. 극중 수지 최와 헤어진 뒤 효원가에 들어온 정서현은 초반부터 내내 그를 그리워하지만, 사실 두 배우의 첫 만남은 촬영 중후반부에 이뤄졌다고 한다. 정서현이 엠마 수녀(예수정)를 찾아가 수지 최와 헤어진 날을 털어놓던 6회 장면이었다. 그는 촬영일에 가까워졌을 때에야 김정화가 상대역인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김서형은 “모호한 누군가를 떠올리며 연기를 해왔기에 촬영 날 정화 씨와 처음 본 사이였는데도 애틋했다”며 “‘그리워하라고 촬영을 늦게 잡았나 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포옹을 한 번 한 뒤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김서형은 “이번 작품은 멜로 촬영을 통해 무거운 감정들을 해소할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그는 드라마 ‘아내의 유혹’(2008∼2009년)의 내연녀 신애리, ‘스카이캐슬’(2018∼2019년)에서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영 등 강렬한 연기를 보여 왔다. 보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개인적으론 힘겨웠다고 한다. “늘 움켜쥐고 에너지 있게만 극을 끌다가 끝나는 건 인간 김서형에게는 아쉽고 힘든 일이었다”는 것이다. “신나서 연기하기 바빴다”는 그는 이번 촬영 내내 이 PD에게 의지했다고 한다. 평소 모니터링에 집착하지 않은 것도 이 PD를 믿고 연기에만 집중하자는 뜻이었다. 이 PD는 사전 조사 후 스태프와 만들고 싶은 콘셉트를 4개월간 준비할 정도로 철저한 지휘자였다. “고급스러움과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엉망진창의 관계들과 공허한 욕망을 아이러니하게 펼치고 싶었다”는 그의 이번 연출은 세련됐다는 평을 받았다. 청춘의 성장기를 담은 ‘쌈, 마이웨이’(2017년), 로맨틱 코미디 ‘오 마이 비너스’(2015∼2016년) 등을 연출해온 그는 “때론 즐겁게, 때론 의미 있게 제 작품이 시청자에게 다가갔으면 한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가 1600점 이상 대거 쏟아져 나왔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법을 따른 가장 오래된 한글 금속활자와 1440년대 구텐베르크가 서양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개발하기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자 금속활자도 포함됐다.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세종 시대 과학유산의 부품들도 함께 출토됐다. 문화재청은 29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종로구 인사동 일대에서 발굴된 한글 금속활자 580여 점과 한자 금속활자 1000여 점을 공개했다. 한글 활자 중에는 15세기에 사용된 동국정운(東國正韻)식 표기법을 따른 활자들이 포함됐다. 동국정운은 조선 한자음을 정리해 1448년 간행된 음운서로, 이번 발견은 한글 창제 연구에 주요 사료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기존에 발굴된 한글 금속활자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능엄경언해(1461년)에 쓰인 활자였다. 한자 금속활자 중 최소 6점은 1434년에 만든 ‘갑인자(甲寅字)’로 추정된다. 추후 연구를 통해 1434년에 제작된 것이 최종 확인된다면 세종 재위 기간(1418∼1450년)에 만들어진 금속활자의 최초 실물이자,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앞선 것이 된다.세종의 꿈 새겨진 最古 한글 금속활자 찾았다 ‘ㅱ, ㅸ’ 등 초기 한글 활자 첫 발견1434년 제작 추정 ‘갑인자’ 확인땐구텐베르크보다 제작 시기 앞서이번 발견은 최고(最古)이자 최고(最高) 수준의 금속활자를 발견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이승철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 팀장은 갑인자 추정 활자를 두고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금속활자 40여 종 가운데 기술적인 측면에서 가장 완벽하다”며 “세종, 세조 시대 문화 황금기를 이끈 데 영향이 컸던 조선 활자 인쇄술 규명에 매우 중요한 사료”라고 말했다. 동국정운식 표기가 실물 활자로 확인된 것도 획기적인 일이다. ‘ㅱ, ㅸ, ㆆ, ㆅ’ 등 동국정운식 표기는 인쇄본으로는 여러 책이 있지만 활자로는 전해진 것이 없었다. 백두현 경북대 국어국문과 교수는 “현재 실물 한글 금속활자 중에는 ㅱ, ㆆ, ㆅ 글자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러한 글자는 1480년대까지만 사용됐기 때문에 이번에 나온 한글 활자가 확실히 가장 오래됐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 발견된 활자 중에는 한문 사이에 쓰는 한글 토씨인 ‘이며’ ‘이고’ 등을 편의상 한 번에 주조한 ‘연주활자(連鑄活字)’도 10여 점 있다. 이번 발굴은 수도문물연구원이 지난해 3월부터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는 ‘서울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 내 유적(종로구 인사동 79번지)’ 발굴 조사 중에 이뤄졌다. 이곳은 조선시대 한양 도성의 중심부였다. 수도문물연구원 관계자는 “출토 지역에 관한 조선 전·후기 기록을 찾아본 결과 관(官)이 지은 건물은 아닌 듯하다”며 “건물 터 형태를 보면 양반도 살았겠지만 시장에서 살았던 중인, 관아의 아속들이 주로 거주했던 집의 일자형 혹은 ㄱ자형 창고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금속활자는 해당 장소 지표면으로부터 3m 아래에 있는 도기 항아리 안에서 발견됐다. 항아리에는 주전(籌箭·작은 구슬을 저장했다 방출해 자동 물시계의 시보 장치를 작동시키는 부속품)도 함께 있었다. 문화재청은 1438년(세종 20년)에 제작된 흠경각 옥루이거나 1536년(중종 31년) 창덕궁에 새로 설치한 보루각의 자격루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조선시대 자동 물시계의 주전 실체도 이번에 처음 확인된 것이다. 항아리 바깥쪽에서는 상대적으로 크기가 큰 유물들이 나왔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가 부품 형태로 출토된 것. 이는 낮에는 해시계, 밤에는 별자리를 이용해 시간을 가늠했던 기계다. 세종실록에는 1437년 세종이 4개의 일성정시의를 만든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실물은 전무했다. 이 외에도 동종(銅鐘), 동판(銅板), 총통(銃筒) 등도 함께 발견됐다. 이처럼 귀한 유물들이 언제 어떤 이유로 이곳에 대거 묻혔는지에 대해서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것이 문화재청 및 수도문물연구원의 입장이다. 발굴 유물 중에 158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소승자총통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1588년 이후에 묻힌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각종 동제 유물 출토에 대해 수도문물연구원 관계자는 “성분 분석 전이지만 색깔을 봤을 때 순동에 가깝다”며 “조선시대에 동 자체가 귀한 재료라 수습한 유물이 일반 민가에서 소유할 만한 물건은 아니라는 점에서 출토 위치가 상당히 미스터리”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누군가 금속품을 모아 고의로 묻고 나중에 녹여 다른 물건으로 만드는 재활용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누군가가 유물을 모아서 폐기했을 수도 있다”며 “이곳에 금속 유물을 무더기로 묻은 이유는 추가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가 1600점 이상 대거 쏟아져나왔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법을 따른 가장 오래된 한글 금속활자와 1440년대 구텐베르크가 서양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개발하기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자 금속활자도 포함됐다.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세종 시대 과학유산의 부품들도 함께 출토됐다. 문화재청은 29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지난해 종로구 인사동 일대에서 항아리에 담긴 채 발굴된 한글 금속활자 580여 점과 한자 금속활자 1000여 점을 공개했다. 한글 활자 중에는 15세기에 사용된 동국정운(東國正韻)식 표기법을 따른 활자들이 포함됐다. 동국정운은 조선 한자음을 정리해 표준음을 정립하기 위해 1448년 간행된 음운서로, 이번 발견은 한글 창제 연구에 주요 사료가 될 전망이다. 기존에 발굴된 한글 금속활자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능엄경언해본(1461년)에 쓰인 활자였다. 한자 금속활자 중 최소 6개는 1434년에 만든 ‘갑인자(甲寅字)’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나온 한자 금속활자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현종실록(1677년) 인쇄에 쓰인 것이었다. 갑인자 추정 활자가 추후 연구를 통해 최종 확인된다면 세종 재위 기간(1418~1450년)에 만들어진 금속활자의 최초 실물이자,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앞선 것이 된다. 이번 발견은 최고(最古)이자 최고(最高) 수준의 금속활자를 발견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이승철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 팀장은 갑인자 추정 활자를 두고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금속활자 40여 종 가운데 기술적인 측면에서 가장 완벽하다”며 “세종, 세조 시대 문화 황금기를 이끈 데 영향이 컸던 조선 활자 인쇄술 규명에 매우 중요한 사료”라고 말했다. 동국정운식 표기가 실물 활자로 확인된 것도 획기적인 일이다. ‘ㅱ, ㅸ, ㆆ, ㆅ’ 등 동국정운식 표기는 인쇄본으로는 여러 책이 있지만 활자로는 전해진 것이 없었다. 백두현 경북대 국어국문과 교수는 “현재 실물 한글 금속활자 중에는 ㅱ, ㆆ, ㆅ 글자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러한 글자는 1480년대까지만 사용됐기 때문에 이번에 나온 한글 활자가 확실히 가장 오래됐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 발견된 활자 중에는 한문 사이에 쓰는 한글 토씨인 ‘이며’ ‘이고’ 등을 편의상 한 번에 주조한 ‘연주활자’(連鑄活字)도 10여 점 있다. 이번 발굴은 수도문물연구원이 지난해 3월부터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는 서울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내 유적(종로구 인사동 79번지)’ 발굴조사 중에 이뤄졌다. 이곳은 조선 시대 한양도성의 중심부였다. 수도문물연구원 관계자는 “출토지역에 관한 조선 전·후기 기록을 찾아본 결과 관(官)이 지은 건물은 아닌 듯하다”며 “건물터 형태를 보면 양반도 살았겠지만 시장에서 살았던 중인, 관악의 아속들이 주로 거주했던 집의 일자형 혹은 ㄱ자형 창고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금속활자는 해당 장소 지표면으로부터 3m 아래에 있는 도기 항아리 안에서 발견됐다. 항아리에는 주전(籌箭·작은 구슬을 저장했다 방출해 자동 물시계의 시보 장치를 작동시키는 부속품)도 함께 있었다. 문화재청은 1438년(세종 20년)에 제작된 흠경각 옥루이거나 1536년(중종 31년) 창덕궁의 새로 설치한 보루각의 자격루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조선시대 자동 물시계의 주전 실체도 이번에 처음 확인된 것이다. 항아리 바깥쪽에서는 상대적으로 크기가 큰 유물들이 나왔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가 부품 형태로 출토된 것. 이는 낮에는 해시계, 밤에는 별자리를 이용해 시간을 가늠했던 기계다. 세종실록에는 1437년 세종이 4개의 일성정시의를 만든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실물은 전무했다. 이 외에도 동종(銅鐘), 동판(銅板), 총통(銃筒) 등도 함께 발견됐다. 이처럼 귀한 유물들이 언제 어떤 이유로 이 곳에 대거 묻혔는지에 대해서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것이 문화재청 및 수도문물연구원의 입장이다. 발굴 유물 중에 158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소승자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1588년 이후에 묻힌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각종 동제 유물 출토에 대해 수도문물연구원 관계자는 “성분분석 전이지만 색깔을 봤을 때 순동에 가깝다”며 “조선시대에 동 자체가 귀한 재료라 수습한 유물이 일반 민가에서 소유할 만한 물건은 아니라는 점에서 출토 위치가 상당히 미스터리”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누군가 금속품을 모아 고의로 묻고 나중에 녹여 다른 물건으로 만드는 재활용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누군가가 유물을 모아서 폐기했을 수도 있다”며 “이 곳에 금속 유물을 무더기로 묻은 이유는 추가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전남 고흥군 팔영산 자락에 위치한 남포미술관은 척박한 지역 문화계에서 의미 있는 존재다. 곽형수 관장(71·사진)은 1965년 부친이 설립한 영남중이 학생이 줄어 2003년 폐교되자 이를 미술관으로 바꿔 2005년 개관했다. 돈도, 사람도 부족했지만 소록도 주민들을 위한 문화 활동도 펼쳤다. 주변에선 “미쳤다”고 했다. 최근 그간의 활동을 기록한 백서를 발간한 곽 관장은 “지난 시간이 꿈만 같다”고 말했다. 곽 관장에 따르면 지방의 작은 미술관은 운영이 힘들었다. 매년 5, 6회 전시를 열 때마다 사비를 보태야만 했다. 작가 섭외, 전시 기획·연출은 모두 곽 관장과 부인 조해정 씨(67)의 몫이었다. 부부는 미술관 설립 후 2년 반 동안 야간대학원을 다니며 예술학 석사 학위를 땄다. 그는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싶었다”면서 “교육을 통해 낙후된 지역사회에 기여한 선친의 뜻을 잇기 위해 미술관 이름에 아버지의 호인 남포(南浦)를 붙였다”고 설명했다. 곽 관장이 꼽은 남포미술관의 정체성도 ‘베풂’이다. 그는 2011년부터 소록도 주민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문화 활동을 하고 있다. 2013년 진행한 ‘아름다운 동행―소록도 사람들’은 소록도의 역사와 한센병 환자들의 애환이 담긴 삶을 담은 대형 벽화 제작 프로젝트로, 예술을 통한 치유의 사례가 됐다. 곽 관장은 “재정이나 선호도 문제로 학예사 2명을 채용할 수 없는 지역 미술관들은 경력 인정 대상 기관에 포함되지 못해 학예사 지망생들에게 더 외면받고 있다”며 “양극화되는 도시-지역 간 인력 문제를 해소해 지역에서도 문화를 더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이달 7일 SBS 월화 드라마 ‘라켓소년단’을 시청 중이었다. 극 후반부, 전남 해남군 땅끝마을에서 배드민턴 부원들이 함께 사진을 찍는 장면이 나왔다. 이들의 휴대전화에 찍힌 사진이 보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인스타그램에 무더기로 사진이 올라왔다. 해남서중 배드민턴부 주장이자 인스타그램 중독자 캐릭터인 방윤담(손상연)의 계정이었다. 본방송에서 해당 장면이 나가는 순간 칼같이 맞춰 올라온 게시물을 보고는 ‘정말 윤담이라는 캐릭터가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게시글은 정말 윤담이 쓴 것 같았다. 극중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윤담의 말투가 고스란히 담겨 있고, 드라마가 방송되지 않는 때에도 중학생들의 일상이나 시골 풍경 사진이 올라온다. 평일 오전에 올라온 게시글에 팬 한 명이 “방윤담, 이 시간에 왜 아직 학교 안 갔냐”며 나무라자 윤담이 “쉬는 시간∼”이라고 답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방윤담 계정을 운영하는 SBS 콘텐츠프로모션팀 관계자는 “TV를 넘어 실제로 중학교 배드민턴부가 있는 것처럼 만들어 팬들의 몰입도를 높이고 싶었다”고 밝혔다. 드라마 속 캐릭터가 운영하는 듯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게시물이 팬들과 넓고 깊게 소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전에는 주로 드라마 시청자들이 팬 계정을 만들어 스틸컷 등을 소장했다면 이제는 배우나 방송사가 직접 SNS를 운영하며 소통의 밀도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맛집에 갈 때마다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tvN ‘호텔 델루나’(2019년)의 주인공 장만월(이지은)도 비슷한 사례였다. 이지은은 자신이 직접 장만월 계정을 운영하며 만월의 일상인 척 글을 올렸다. 실제 이지은의 계정에는 드라마 홍보 문구가 올라온 것과는 사뭇 달랐다. SBS ‘하이에나’(2020년)의 경우 주인공 정금자(김혜수)의 인스타그램 계정은 방송사가 운영하다가 김혜수가 관심을 보이며 계정을 이어받아 글을 올렸다고 한다. 드라마가 끝난 뒤 아이디를 변경해 현재 개인 계정으로 사용 중이다. 드라마가 끝났다고 SNS 활동이 마무리되는 건 아니다. 드라마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로 진출하면서 시청 기간이 늘어난 만큼 계속 영향을 주고받는다. tvN ‘나빌레라’는 올해 4월 종영했지만 주인공인 70대 발레리노 심덕출(박인환)이 운영하는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이달까지도 글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밥은 잘 먹고 다니냐’며 팬들에게 안부를 묻는 글이 많다. 최은화 tvN 마케팅팀 과장은 “종영 후에도 사랑받는 콘텐츠가 있고, 그 사랑이 감사했기에 시청자들을 응원하고 안부를 확인하고 싶었다”며 “드라마는 끝났지만 계정을 팔로하는 사람이 0명이 될 때까지 운영하고자 한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이종욱이 2003년 한국인 최초로 국제기구 수장에 오른 과정은 험난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여수 세계엑스포 유치에 외교력을 총동원하던 터라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선거를 지원할 수 있는 여력이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국내에서는 그의 당선 가능성 자체를 낮게 봤다. “감이 되느냐”는 비아냥거림을 들으면서도 이종욱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4대 강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해외 인맥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러시아, 중국,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정작 우리 정부의 공식 추천서를 받는 게 쉽지 않았다. 반전은 그와 친했던 셰러드 캠벨 브라운 미 하원의원 등 동료 의원 54명이 지지 서명에 이름을 올린 후 시작됐다. 청와대와 외교부는 당초 입장을 바꿔 추천 결정을 내렸다. 당선 이후에는 정부 관계자들의 민원에 시달리기도 했다. 현직 언론인인 저자가 유가족을 취재한 내용에 따르면 2004, 2005년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가 노벨의학상을 받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종욱의 막냇동생으로 정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한 이종구는 “형이 전화를 많이 해와 ‘굉장히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형은 의료인으로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책에는 집안 살림이 어려워진 1960년대 그가 5수 끝에 서울대 의대에 입학한 이야기와 미국 유학 준비 중 일본인 여성 레이코 여사를 만난 일화 등도 소개됐다. 사회의 반일 분위기에서 가족과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한다. 이후 이종욱은 남태평양 외딴 섬의 응급실 의사를 거쳐 세계 각지의 원시림을 누비며 한센병 퇴치에 나섰다. 이 책은 2012년 이종욱이 WHO 사무총장에 재직할 당시 그의 연설담당 비서였던 데스먼드 에버리가 펴낸 평전을 참고했다. 저자는 한국인의 시선에서 평전을 쓰면서 이종욱의 성장기와 연애사부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사(秘史)까지 폭넓게 취재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5주년을 맞아 출간된 이 책을 통해 한 거인의 생생한 인생 역정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한옥 사이로 곰 모양 풍선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머리 하나가 문 한 칸을 다 채우는 큰 곰이 한쪽 귀가 접힌 채 두 팔로 행인들을 반긴다. 곰 풍선을 만든 건 임지빈 팝아트 작가(37). 임 작가는 “관객이 갤러리로 오지 않는다면 작가가 찾아 나서겠다”며 ‘딜리버리 아트’를 시도하는 예술가다. 이름도 ‘에브리웨어 프로젝트(Everywhere Project)’다. 그는 2009년 중국 상하이 애니마믹스 비엔날레에서 작품 ‘슈퍼파더’로 데뷔했다. 이는 늙고 배 나온 슈퍼맨을 조각으로 만들어 우리 시대 아버지들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가 에브리웨어 프로젝트를 시작한 건 2011년부터였다. 전시를 열어도 일반인보다는 업계 관계자나 지인들만 찾아오는 데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 작가는 슈퍼파더 시절부터 삶의 예리한 문제들을 위트 있게 표현해왔다. 곰 모양 풍선도 마찬가지다. 대개 이들은 가만히 서 있는 형태가 아니다. 틈새에 끼어 있거나 바닥에 엎어진 형상이다. 어쩐지 짠하다가도 포근한 곰을 보고 있노라면 위안이 된다. 23일 만난 임 작가는 “각자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표현하면서도 그들을 응원하고 싶었다”고 했다. 조각이 아닌 풍선인 데에도 이유가 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집도 사람처럼 각자의 스토리와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고택들에 작품을 융화하고 싶었는데 조각보다는 풍선이 덜 이질감이 느껴지고 변형 가능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곰이 나타나는 장소는 ‘어디든(Everywhere)’이다. 그는 게릴라성 전시를 표방한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N서울타워 등 한국의 랜드마크에서 시작됐던 프로젝트는 2016년부터는 미국, 대만, 중동 등 전 세계 다양한 장소로 뻗어나갔다. 임 작가는 “코로나19 전에는 1년에 최소 5개국을 목표로 6개월 정도는 해외에 나가 있었다. 한 도시에서 한 달 정도 거주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을 찾아 설치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올해 그가 도전하는 장소는 국내 문화재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 등에서 주관하는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의 일환. 8, 9월경 시작해 3개월간 5곳 이상의 문화유산 거점에 풍선을 설치한다. 임 작가는 “한국적인 느낌을 굉장히 좋아한다. 계속 자리를 지켜왔던 문화유산을 같이 즐길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기관 등과 함께하는 프로젝트를 제외하면 그의 활동은 모두 자비로 이뤄진다. 그는 세계적 브랜드인 구찌, MCM 등과도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해왔는데, 이때 얻은 돈으로 개인 활동을 재개한다고 한다. 공공미술에 관심이 많았다는 그의 목표는 ‘이동식 놀이터’다. “2016년 베트남 하노이의 재개발 지역에서 작업할 때 아이들이 제 작품을 보고 굉장히 기뻐하는 걸 봤어요. ‘어디든 나타난다’는 콘셉트이지만 사실 미술이 필요한 곳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아프리카 곳곳을 돌면서 에어바운스 등을 설치해보고 싶습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4년 전 극본 공모전 심사위원이던 이태곤 PD(53)의 눈에 낙선작 하나가 걸렸다. 그대로 지나치기는 아쉬운 마음에 작가를 따로 만나 보완할 부분을 세세히 알려줬다. 이로부터 3년여에 걸쳐 수정 작업이 이뤄졌다. 21일 종영한 카카오TV 드라마 ‘이 구역의 미친 ×’는 이렇게 나왔다. 이 PD가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진 데에는 간혹 홀로 집에 있을 때 누군가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경험도 한몫했다. 1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인간에게는 다 이런 이상한 면이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 구역의 미친 ×’에는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노휘오(정우)는 다짜고짜 대로변에서 소리를 지르고, 망상장애에 시달리는 이민경(오연서)은 누군가 자신을 쫓아온다며 두려워한다. 일견 이해할 수 없지만 이들에겐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휘오는 강력계 형사로 마약사범을 검거하려다 룸살롱에 출입했다는 누명을 쓰고 파면당한다. 애인이 유부남인 걸 뒤늦게 안 민경은 주변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헤어지려 하지만 몰래 촬영한 동영상으로 애인에게 협박을 당한다. 이 PD는 “남이었을 땐 범죄자나 미친 사람 같지만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정말 다른 사람인 때가 있다. 외모나 언행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그만둬야 한다”고 했다. 극중 취미로 여장을 즐기는 아파트 주민이 나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를 두고 주인공들은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이상한’ 모습을 내보이면서도 서로를 존중하고 치유받는다. 드라마는 앙숙이던 휘오와 민경이 싸우다 사랑에 빠지는 정통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따르지만, 휴먼 장르의 특색이 강하다. 사회에서 소외된 자에 대한 이 PD의 애정이 작품 전반에 깔려 있어서다. 이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으면 비정상적인 상황과 인물들이 정상으로 보이면서 ‘우리는 모두 이상한 면이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이 PD는 “시청자들이 쉽게 캐릭터에 동화되는 것도 이들의 모습에서 자신과 비슷한 면모를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청춘의 성장기를 담은 ‘청춘시대 시리즈’(2016, 2017년)를 통해 따뜻한 연출을 선보인 이 PD는 ‘코믹하자’는 철학을 갖고 작품에 임한다고 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2월까지 부산에서 진행한 이 드라마 촬영 현장 분위기도 즐거웠다고. 그는 “제작 과정에서 배우, 관계자들 모두 만족스러워해 잘될 거라고 예상했다”며 웃었다. 드라마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에서 6월 국내 콘텐츠 중 1위(21일 기준)를 차지했다. 작품은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이 PD는 “세상을 살면서 상처받는 것도 사람, 치유받는 것도 사람 때문이라고 하지 않나. 그럼 이왕이면 치유로 나아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드라마가 사회에서 무시당하는 이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그는 주인공 휘오와 민경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을 잊지 않았다. “무엇을 하든 이제는 서로가 있기에 견딜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두 사람이 그러길 바랍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동해안의 대표적인 반촌(班村·양반이 모여 사는 동네)인 경북 영덕 괴시마을이 국가민속문화재로 21일 지정됐다. 괴시마을은 고려 말 거학인 목은 이색(1328∼1396)이 태어난 곳으로, 조선 인조 연간인 1630년 무렵 영양 남씨가 정착해 남씨 집성촌이 형성됐다. 본래 이곳은 호지촌(濠池村)으로 불렸으나, 이 마을이 중국 원나라 학자 구양현(1273∼1357)의 고향인 괴시(槐市)와 비슷하다는 목은의 말을 계기로 현재의 명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괴시마을에는 전통가옥 40여 호가 들어서 있는 등 옛 마을 경관이 잘 보존돼 있다. 안동지역 상류층이 주로 거주한 뜰집에 사랑채가 튀어나온 이른바 날개집이 대부분이다. 뜰집은 안채와 사랑채, 부속채가 하나로 이어져 ㅁ자형을 이루는 주택이다. 전국 뜰집의 약 70%가 경북 북부지역에 몰려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괴시마을 뜰집은 17세기 영양 남씨에 의해 도입돼 혼인과 분가, 학맥 등을 통해 확산됐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괴시마을의 뜰집은 안동에서 태백산맥을 넘어 영덕에 이르기까지 건축문화 전파와 인적 교류의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1868년에서 1869년으로 이어지는 겨울. 프랑스 화가 에드가르 드가(1834∼1917)의 캔버스 앞에 에두아르 마네(1832∼1883)와 그의 부인 수잔이 앉았다. 부부는 초상화 모델이 됐다. 며칠 후 오른편에 그려진 수잔의 얼굴이 칼로 찢겼다. 그림을 훼손한 이는 남편 마네였다.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드가와 마네는 이 사건으로 소원해졌고, 10여 년 뒤 마네는 세상을 떠났다. 마네가 아내 그림을 훼손한 이유는 무얼까. 이 사건의 배경에는 예술에 대한 두 거장의 철학적 차이가 감춰져 있다. 마네에게 진실이란 파악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는 늘 모델에게 화려한 의상을 입히는 등 예술에서 유희와 위트를 추구했다. 이에 비해 드가는 외형에 드리워진 베일을 걷어내려는 의지가 강했다. 드가는 진실은 어떻게든 드러나기 마련이라며 집요하게 진실을 추구했다. 즉, 드가가 그린 마네 부부의 초상화는 그저 두 개인을 묘사한 게 아니라 둘의 결혼 생활에 숨겨진 진실을 읽어내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마네에게는 곤욕이었다.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었기 때문. 마네는 아내뿐 아니라 화가 베르트 모리조도 사랑했다. 절친 드가는 이를 알았지만 자신도 모리조에게 끌렸다. 초상화 속 수잔은 남편에게 등을 돌린 채 연주에 몰두해 있다. 마네는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한 모습이다. 누군가를 꿈꾸는 듯한데 그 대상은 아마도 모리조일 것이다. 결혼 생활의 잔인한 진실이 담긴 이 초상화는 마네를 자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에서 미술 비평가로 활동 중인 저자는 네 쌍의 위대한 미술가들이 친구이자 라이벌로서 상대에게 끼친 영향을 심층 분석하고 있다. 이들에게 동료 미술가의 존재는 각별했다. 전통 화법을 거부하고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낸 이들에게는 자신의 예술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줄 이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당대 비평가들은 화가의 관점에서 투쟁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저자는 빌럼 더코닝(1904∼1997)과 잭슨 폴록(1912∼1956), 루치안 프로이트(1922∼2011)와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이 상대로부터 예술적 돌파구를 찾아내는 과정을 생생히 보여준다. 파블로 피카소(1881∼1973)도 마찬가지였다. 천재였던 그에게도 라이벌이 있었으니 후원자의 요청으로 만난 앙리 마티스(1869∼1954)였다. 피카소는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마티스를 초대한 순간부터 괴로웠다. 뛰어난 언변과 냉철한 태도의 마티스는 왠지 그를 주눅 들게 했다. 반면 마티스는 자신보다 어린 그를 존중하고 친구가 되는 걸 반겼다. 피카소와의 만남 이후 마티스는 ‘삶의 기쁨’ 등 세간의 이목을 끄는 명작을 잇달아 내놓았다. 당시 작품에는 풍성한 색채와 자유분방함이 가득하다. 피카소는 마티스의 야수파를 거부하고 차분한 색채의 균형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또 마티스가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며 강조한 평면에서 벗어나 3차원을 파고들었다. 이는 곧 ‘두 여인의 누드’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피카소의 입체파 작품 세계의 시작이었다. 경쟁의 성격을 띤 이들의 우정은 훗날 세상에 걸출한 명작들을 남겼다. 세상의 범인들이 그렇듯 그들의 경쟁 역시 세속적인 이유가 깔려 있었지만 말이다. 친밀해지기도 혹은 살벌해지기도 한 예술가들의 관계를 통해 각자가 거장으로 우뚝 선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나훈아(74·사진)가 올해 7, 8월 대구 부산 서울에서 콘서트 ‘어게인 테스형’을 연다고 소속사 예아라 예소리가 18일 밝혔다. 나훈아 측은 “힘들고 답답한 세상, 어렵게 콘서트를 개최하게 됐다. 평범한 일상마저 가두어 버린 세상, 요놈의 코로나19를 멱살이라도 비틀어 답답한 세상에 희망가를 소리쳐 부를까 한다”고 전했다. 대구 콘서트는 다음 달 16∼18일 엑스코(EXCO) 동관에서 열린다. 이어 부산 벡스코(BEXCO)에서 다음 달 23∼25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8월 27∼29일 공연이 각각 개최된다. 공연은 하루 2회씩(오후 2시, 오후 7시 반) 총 18회 열린다. 나훈아는 지난해 코로나19로 인해 연말 공연을 모두 취소했다. 지난해 추석 연휴 나훈아는 KBS에서 방송한 비대면 콘서트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로 큰 화제를 모았다. 이후 12월 부산 서울 대구 공연에서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다시 확산돼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가 격상되면서 공연을 전면 취소했다. 대중음악 콘서트는 ‘모임·행사’로 분류돼 100명 이상 모일 수 없었다. 최근 정부가 공연장 방역수칙을 일원화해 이달 14일부터 관객이 4000명까지 입장할 수 있게 됐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배우 옥주현(41·사진)이 뮤지컬 ‘위키드’ 공연 중 컨디션 난조로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못해 사과했다. 위키드 제작사 에스앤코는 관람료 전액을 환불하기로 했다고 18일 밝혔다. 에스앤코에 따르면 옥주현은 부산 남구 드림씨어터에서 17일 열린 ‘위키드’ 공연 2막에서 고음이 올라가는 일부 곡부터 갑자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이후 노래에서도 내레이션하듯 연기를 이어가며 주요 곡을 소화하지 못한 채 공연을 마쳤다. 옥주현은 공연 후 무대 인사를 할 때 눈물을 흘리며 관객들에게 사과했다. 옥주현은 초록 마녀 엘파바 역을 맡았다. 에스앤코는 “해당 공연은 별도 수수료 없이 예매처를 통해 순차적으로 전액 환불 처리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가수 CL(본명 이채린·30)이 최근 미국 인기 코미디 시리즈 ‘데이브’(Dave)에 카메오로 등장했다. CL은 16일(현지시간) 공개된 데이브 두 번째 시즌 첫 에피소드에 K팝 스타로 출연했다. 데이브는 미국 인기 코미디언이자 래퍼인 릴 디키가 공동 제작하고 주연을 맡은 프로그램이다. 본명이 데이비드 앤드루 버드인 릴 디키는 자신을 극에서 표현한 인물 데이브를 연기한다. CL 역시 실제 자신처럼 K팝 스타로 나왔다. 데이브가 K팝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곡의 뮤직비디오에 CL이 출연하도록 섭외하는 내용이다. 데이브 측은 시간을 잘못 알려줘 CL을 오래 기다리게 만들고는 오히려 CL이 늦었다고 탓한다. 이들이 K팝의 인기를 이용하면서도 K팝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느낀 CL은 이를 따끔하게 지적하고 뮤직비디오 촬영장을 떠나버린다. CL은 디자이너 고 앙드레 김의 드레스를 입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데이브에는 팝스타 저스틴 비버와 유명 래퍼 YG, 영 서그(Young Thug) 등이 카메오로 출연한 바 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호주 원주민 출신의 30대 작가는 독특한 점묘법을 사용한다. 캔버스에 입체적으로 도드라진 점들이 신기해 다가갔다가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서면 점 밑에 깔린 그림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서구의 역사관이 놓친 시선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복원해 온 대니얼 보이드(39·사진)의 개인전 ‘보물섬’이 17일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에서 열렸다. 2019년 부산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 전시로, 신작 23점을 선보인다. 2014년 모스크바 국제비엔날레,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이름을 알린 작가는 자신의 뿌리에 대한 고찰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왔다. 그가 나고 자란 호주의 문화적, 역사적 사건들은 고스란히 캔버스에 담겼다. 전시 제목 ‘보물섬’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쓴 동명의 소설에서 따왔다. 보물섬은 작가의 초창기 작업부터 등장했다. 작가는 호주 식민지 역사의 영웅으로 추앙 받아온 제임스 쿡 선장과 조지프 뱅크스 경을 해적으로 재해석한 바 있다. 작가는 소설에서 언급된 보물섬의 지도, 스티븐슨이 사용하던 접시를 화폭에 담았다. 문학, 대중문화를 차용한 그의 작품을 보면 유럽인의 관점으로 기술된 역사가 견고해진 과정을 유추할 수 있다. 작가 개인사와 관련된 작품도 많다. 증조할아버지, 친누나가 살았던 고향의 풍경을 그리며 그는 자신의 뿌리를 찾아간다. ‘Untitled(GGASOLIWPS)’에 담긴 증조할아버지 해리 모스먼은 호주 정부가 원주민 어린이들을 가족과 강제로 분리시킨 정책의 희생자로, 이른바 ‘도둑맞은 세대’에 속했다. 다른 작품 ‘Untitled(TDHFTC)’에서는 전통 춤 공연을 준비 중인 누나의 모습을 재현했다. 움직이는 작은 점 사이로 강이 흐르는 모습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영상 작품 ‘RIVERS’도 관람할 수 있다. 작가는 밑그림을 그린 뒤 그 위에 투명한 풀로 볼록한 점들을 찍는다고 한다. 검은 물감을 캔버스 전체에 펴 바른 뒤 닦아낸다. 그러면 검은 테두리 사이로 점들이 보이면서 숨겨진 그림이 나타난다. 무수한 점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렌즈’다. 역사와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한 작가의 의도다. 엄연히 존재하지만 전부 다 보이지 않는 밑그림은 서구에 의해 소실됐던 역사를 뜻한다. “나의 작품은 모두 ‘나’라는 사람에 대한 고찰 그리고 ‘나’라는 사람을 이루는 선조들의 존재로부터 시작한다”는 그의 말은 모든 작품을 관통한다. 8월 1일까지. 무료.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가수 겸 화가 솔비(37)가 그린 미술작품이 자신의 작품 중 최고가를 경신하며 2010만 원에 낙찰됐다. 17일 소속사 엠에이피크루에 따르면 그의 미술작품 ‘플라워 프롬 헤븐(Flower from Heaven)’이 16일 서울옥션 경매에서 2010만 원에 팔렸다. 앞서 2017년에는 그가 서울옥션블루에 출품한 ‘MAZE’가 1300만 원에 낙찰됐다. 이번 경매는 71회의 경합 끝에 성사됐으며, 당초 추정가(400만 원)의 5배 수준으로 가격이 형성됐다. ‘플라워 프롬 헤븐’은 솔비가 지난해 12월부터 선보인 ‘케이크’ 시리즈 중 하나다. 블루투스 스피커에 케이크 크림의 질감을 더한 부조 작품. 작품명처럼 천국에서 온 꽃을 표현했다. 초를 오브제로 기쁨, 슬픔, 희망, 그리움 등을 표현했다. 작품 속에는 새로 작업한 음악도 삽입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