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차장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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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차장입니다.

jjj@donga.com

취재분야

2026-02-27~202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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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가 독살 확실… 고종 근대화업적 재평가해야”

    《‘망국에 책임이 있는 유약한 군주’인가 ‘자주 독립과 근대화에 힘쓴 비운의 황제’인가. 조선 고종(1852∼1919)만큼 역사적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인물도 드물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지만 고종이 독살됐다는 소문이 3·1운동의 직접적인 단초가 됐다는 사실은 잊기 일쑤다. 21일로 광무황제, 곧 고종이 서거한 지 100주기를 맞는다. 근대사와 고종, 대한제국 연구의 권위자로 한일 강제병합 조약의 불법·무효를 밝히기도 했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76)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18일 만났다.》  이 교수는 2009년 ‘역사학보’에 실은 논문에서 고종 독살은 풍문이 아니라 “일본 정부 수뇌부가 지시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1918년 1월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자 고종이 항일전선에 다시 나설 것을 우려한 일제가 독살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당시 일본 궁내성 제실회계심사국 장관이었던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의 1919년 10, 11월 일기 등을 독살의 근거로 들었다. 이 일기에는 구라토미가 송병준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나온다. 정리하면 총리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1852∼1919)가 조선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에게 어떤 뜻을 전했고, 하세가와는 ‘이태왕’ 곧 고종을 찾아가 이를 전달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수락하지 않자 이를 감추기 위해 윤덕영, 민병석 등을 시켜 독살했다는 것이다. 일기에서 구라토미는 궁내성에서 다른 이들을 만나 반복적으로 집요하게 독살에 관해 확인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교수는 논문에서 “총독부가 한일합병은 양국의 협의로 된 것이라는 문서를 만들어 고종의 날인을 받아내려 했지만 고종이 문서를 들고 온 윤덕영 등을 꾸짖어 내쫓자 독살이 자행됐다는 걸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전하고 있다”고 했다. 고종 독살은 ‘스모킹 건’만 빼고는 모든 요소가 갖춰진 셈이다. ―구라토미 역시 ‘풍설’을 옮긴 것 아닌가. “일기에는 들은 얘기 형식으로 옮겨놨지만 구라토미는 사실이라고 믿었다.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나중에 수기에서 시아버지인 고종의 죽음에 대해 ‘나도 처음에는 뇌일혈일 줄 알았으나 독살이었다’고 반복해 적었다. 그걸 누구에게 들었을까. 이방자 여사가 1922년 아이를 데리고 순종에게 인사하러 창덕궁에 왔을 때 일본 궁내성 직함을 가지고 수행한 사람이 구라토미다. 바로 구라토미에게 들었던 것이다.” ―고종은 유약하다는 이미지가 있다. “우리가 고종을 아직도 너무 모르고 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일본 기자들도 조선 군주가 군주로서 자질이 있다고 평가했는데, 1907년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을 계기로 완전히 바뀐다. 이토 히로부미가 굉장히 화를 내고, 고종을 끌어내린 뒤 ‘암군(暗君)’이라는 말이 나온다. 뒤집어 보면 자기네 말을 안 듣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일제는 한국 통치를 정당화하려고 고종이 유약한 군주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가르쳤다. 객관적 평가는 호머 헐버트 박사와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 등으로부터 들을 수 있다. 그들이 1896년 낸 잡지에 고종 인터뷰가 8쪽 정도 실렸다. 고종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서양 문명에 대한 관심이 많아 서양인을 초대한 파티를 열면 한 명씩 모두 얘기를 나누며 서양 문물을 묻고 난 뒤 정좌한다고 했다. 고종이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라고도 했다. 서재(집옥재)에 수많은 장서가 있고, 신하들이 역사와 고전에 관해서 의문이 생기면, 군주를 찾아와서 묻는데 즉답이 나온다는 것이다.” ―고종의 업적이 무엇인가. “국력을 키우려 한 고종의 근대화 사업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가장 먼저 경복궁 건청궁에 전기 시설을 설치한 건 사치가 아니다. 유자(儒者)들이 거부하는 신문명 도입에 왕실이 앞장섰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1880년대 꾸준히 전신선을 설치한다. 경운궁으로 돌아온 뒤에는 서울을 현대 도시로 만든다. 길을 넓히고, 1898년 서울 시내에 전차가 달리게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남북철도뿐 아니라 함경도 경흥에서 의주까지 동서횡단철도도 계획했다. 1902년에는 중앙은행 설립을 계획하고 지폐 발행 등 근대화를 위한 준비를 모두 했다. 러시아 차관을 도입했고, 벨기에 프랑스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고자 했으나 일본에 의해 가로막힌다. 1902년 즉위 40년 축하의식은 통상조약을 체결한 12개국을 초대해 서울의 현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중립국 승인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영일동맹의 영향과 콜레라 유행으로 실패했다.” ―동학농민군을 관군이 함께 진압하지 않았나. “1893년 동학교도의 교조신원운동이 벌어질 때 ‘난동분자니까 토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종은 ‘동학교도도 내 백성’이라며 물리친다. 고종은 나라의 주인이 왕과 소민(小民·백성)이라는 정조 이래 철학을 이었다. 전주 화약(1894년) 뒤에도 고종은 ‘동학교도와는 협상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최근 일본 학계에는 당시 조선 관군이 청일 양국군이 나온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출동했다가 일본군의 위계에 걸렸다는 연구도 있다.” ―3·1운동의 성격은 무엇인가. “항일 ‘국민’ 운동으로 조명될 필요가 있다. 고종은 1895년 홍범14조를 순한글과 국한문혼용으로도 선포했다. 소민 보호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조서는 ‘덕체지’ 3육(育)을 강조하는데, 이게 육영공원의 서양 선교사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국민’ 의식이 바탕이 돼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다. 1907년을 계기로 ‘국민’이라는 말이 폭발적으로 많이 쓰였다. 이후 독립운동 단체 이름에도 국민회가 많다. 국민국가를 의식하고 민이 주권을 찾기 위해서 싸운 것이다. 3·1독립만세 역시 근대화사업을 하던 황제가 독살됐다는 소문이 흩어져 있던 각 단체를 하나로 뭉쳐놓은 것이다. 그래서 거민족적 거국적 규모로 일어날 수 있었다.” ―국민에 대한 고종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있나. “태황제(고종)가 1909년 3월 서북간도민에게 내린 교유서 내용이 남아있다. 거기서 고종은 ‘대한은 나의 것이 아니다. 너희 만성(萬姓·백성)의 것’이라고 선언한다. ‘자유라야 민이며, 독립이라야 나라(國)다. 민이 쌓여서(積民·적민)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더냐’라고 했다. 이게 서양 근대 정치사상이다. 내가 부덕해서 나라가 일본의 침략을 받아 이 지경이 됐지만 망했다고 하지 말자는 것이다. 고종이 황실을 대표해서 사실상 국민주권을 선언한 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의 의미는 무엇인가. “3·1운동은 국제평화운동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고종은 일제와 힘으로 싸우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189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떠오른 국제평화운동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나 노벨평화상 제정, 민족자결주의와도 같은 흐름 속에서 3·1운동이 폭발한 것이다.” ―최근 한일관계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일본이 ‘군국주의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인류가 가야 할 길에 역행하는 반동이다. 이는 동아시아 역사가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게 만든다. 100주년을 기해 3·1운동의 평화공존 논리를 밀고 나가 일본도 그 길을 걷도록 해야 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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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김구 주석-광복군 관인은 6·25때 행방불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의 관인은 현재 소재가 확인된 임시정부의 유일한 국새다. 임정은 26년간 임시 헌장 제정과 5번의 개헌을 거치며 정체가 변화했지만 대체로 의회가 중심에 있었다. 1927년 3차 개정 헌법에는 “대한민국은 최고 권력이 임시의정원에 있음”(제2조)을 명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환국 당시에는 주석제였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환국 당시 임정은 당·정·군의 형태였고 주석과 총사령관, 의정원 관인의 가치는 동렬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구 주석이 사용한 주석의 관인은 정부 문서와 함께 6·25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지청천 장군이 썼던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의 관인도 마찬가지다. 북한에 두 개의 관인이 남아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이번에 공개된 의정원 관인은 소재가 확인된 유일한 국새인 셈이다. 국회의 홍진 선생 흉상 건립 안건은 2003년 발의됐다가 제16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국회는 2010년 5월 ‘홍진 임시의정원 의장 기념전시실’을 국회도서관에 설치했으나 흉상 건립에는 합의하지 못했다. 한 교수는 “홍진 선생 손자 홍석주 씨가 흉상 건립과 관인 기증을 협의하러 한국에 7, 8번 왔을 때마다 만났다”며 “석주 씨가 ‘살아 있을 때 꼭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했는데 끝내 생전에 결실을 못 봤다”고 설명했다. 홍 씨의 아내 신창휴 씨는 2017년 7월 본보와의 통화에서 “남편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편하게 돌아가시지도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취임 후 홍진 선생 흉상 건립을 다시 추진했고 지난해 11월 23일 국회 본회의에서 건립 안건이 마침내 통과(재석 의원 226명, 찬성 196명)됐다. 문 의장은 통과 직후 “홍진 의장님의 상(像)을 건립하는 것은 의회민주주의의 역사적 가치를 보전하고 독립정신의 참뜻을 계승하는 숭고한 일”이라고 유족에게 편지를 보냈다.조종엽 jjj@donga.com·박효목 기자}

    • 2019-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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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임정 국새, 100년 유랑 끝내고 고국 품으로

    올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정의 국새(임시의정원 관인·官印)가 46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다. 임정 임시의정원 의장 및 국무령을 지낸 만오 홍진(晩悟 洪震·1877∼1946) 선생의 손자며느리 신창휴 씨(85·미국 거주)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홍진 선생의 동상이 국회에 건립되는 날 남편이 보관해 온 임시의정원 관인을 국회에 기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관인은 오늘날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의 각종 공문서에 찍었던 도장이다. “대한민국은 최고 권력이 임시의정원에 있음”(1927년 개정 임시약헌 제2조)을 비롯한 임정 임시헌법 조항으로 볼 때 임정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국새 가운데 하나에 해당한다. 임정과 더불어 중국에서만 4000km를 옮겨 다녔고, 홍진 선생의 손자인 고(故) 석주(錫柱) 씨의 도일과 귀국, 도미까지 100년 동안 바다를 4번 건너며 수만 km를 이동한 관인이 한국에서 제자리를 찾는 셈이다. 신 씨가 본보에 공개한 이 관인은 ‘臨時議政院印(임시의정원인)’이라고 새겨진 검은색 목제 도장이다. 석주 씨는 이 관인이 “할아버지(홍진)가 1945년 충칭에서 갖고 돌아왔다. 1919년부터 의정원 인장으로 쓰인 임시의정원인”이라고 설명한 문서를 남겼다. 석주 씨는 6·25전쟁을 비롯한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도 각고의 노력 끝에 이 관인을 온전히 간직해 왔다. 1973년 미국 이민 뒤에도 조부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길 바라며 여러 차례 관인을 한국에 기증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16년 87세로 눈을 감았다. 관인은 중국 상하이에서 첫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린 지 100주년이 되는 올 4월 10일에 맞춰 기증될 것으로 전망된다. 문희상 국회의장실은 “임정 100주년을 맞는 올해 국회도서관에 임시의정원의 마지막 의장을 지낸 홍진 선생의 흉상을 건립한다”며 “상징적 의미가 큰 4월 10일 전 관인이 고국에 돌아올 수 있도록 흉상 건립을 서두르고 있다”고 밝혔다. 문 의장은 “이 관인은 임시의정원을 상징하는 물건”이라며 “역사적으로 소중한 이 관인을 후손에 길이 보전할 것”이라고 밝혔다.▼ 임정 국새 100년간 바다 4번 건너… 홍진 가문, 목숨처럼 지켰다 ▼ “남편이 숨지기 석 달 전 이 도장을 꺼내더니 ‘나 대신 잘 보관했다가 할아버지 흉상이 세워지는 날 국가에 기증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과 국무령을 지낸 만오(晩悟) 홍진 선생의 손자며느리 신창휴 씨(85)가 18일(현지 시간) 미국 동부 모처에서 진행된 동아일보 및 채널A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2016년 87세로 작고한 남편(홍석주)의 유언대로 도장을 안전한 모처에 두고 가보로 지키고 있다”고 했다. 그는 보안을 이유로 인터뷰 장소 공개를 극구 꺼렸다. 취재팀이 확인한 임시정부 의정원 관인 등 도장 4개는 만오 선생이 1945년 중국 충칭(重慶)에서 허리춤에 차고 귀국한 허리띠 및 지퍼가 달린 남색 주머니에 담겨 있었다. 신 씨에 따르면 남편 홍 씨는 이 도장을 목숨처럼 지켰다. 6·25전쟁, 일본 유학(교환교수), 미국 이민 등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그는 “남편이 6·25전쟁 피란 당시 도장주머니를 베개에 돌돌 말아 넣고 잠을 잘 때도 그 베개만 썼다”며 “가족들에게도 도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취재팀에 홍 씨가 가족에게 남긴 ‘홍진 도장 및 문서 원본’이라는 3장짜리 문서도 공개했다. 문서에는 “영구 가보로 보관할 것, 햇볕과 습기에 쬐이지 말 것”이란 당부 사항과 설명이 빼곡했다. ‘임시의정원인(臨時議政院印)’이라고 새겨진 가로 5cm, 높이 6cm의 검은색 목재 도장에는 ‘1919년부터의 의정원 인장’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홍 씨는 이 문서에 “임시의정원인은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수립 때부터 유일한 도장으로 임시정부 및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상징한다”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적었다. ‘홍진(洪震)’이라고 새겨진 옥돌로 만든 작은 도장에는 ‘관용’ 및 ‘공문서’에 쓰였다는 말도 있었다. 이 외 만오 선생이 1919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법관과 변호사로 일하며 썼던 그의 본명 홍면희(洪冕熹)가 새겨진 도장, 또 다른 호 ‘만호(晩湖)’가 새겨진 도장도 1점씩 있었다. 신 씨는 “시조부께서는 ‘독립운동을 하는 의병들에게 벌을 줄 수 없다’며 법관을 그만두고 변호사로 일하다 중국으로 망명했다”며 “가산까지 팔아 독립운동을 위해 떠난 뒤 남은 가족들이 일제의 감시 및 생활고로 힘들게 살았다고 들었다”고 했다. 그의 남편 홍 씨는 생전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이끈 조부의 업적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을 늘 안타까워했다. 이에 코닥에서 일했던 홍 씨와 약사 신 씨 부부는 직접 조부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일에 매달렸다. 신 씨는 “정확한 금액은 기억나지 않지만 국가에서 독립유공자에게 주는 지원금 대부분을 홍진 학술대회 개최 및 홍진 선생 연구서 출판에 썼다”며 “남편이 ‘조부의 흉상이라도 세워 달라’는 유언을 남긴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 씨는 “남편의 유언대로 국회에 흉상이 세워진다니 그날 내 손으로 이 도장을 국가에 기증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홍진 선생은 좌우, 여야를 떠나 민족이 모두 하나가 되길 원하셨다”며 “임시정부 100주년이 되는 올해 시조부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이 하나로 똘똘 뭉쳐 훌륭한 나라를 건설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단독]홍진 선생, 유일하게 임정 행정-입법 수장 모두 역임 ▼ 만오 홍진 선생은 우리나라 의회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독립운동의 거목이다. 임시정부 연구의 권위자인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임정에서 행정부 수반(국무령)과 입법부 수반(임시의정원 의장)을 모두 지낸 분은 홍진 선생이 유일하다”며 “가장 오랜 기간 의장으로 활동하며 의회정치의 기틀을 닦은 분”이라고 설명했다. 1877년 명문가 후예로 태어난 홍진 선생은 1904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동지들을 규합해 인천에서 13도 대표자 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를 조직한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해 9월 한성정부를 법통으로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21년 5월에는 이동녕 손정도에 이어 임시의정원의 3대 의장으로 선출됐고 이어 1939, 1942년에도 의장에 선출됐다. 한 교수는 저서에서 “홍진 선생이 이념과 당파를 초월한 인물이었기에 좌우익 세력이 참여한 통일의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홍진 선생은 임시의정원의 마지막 의장이었고 임정 환국 뒤 의정원을 계승한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도 선출됐다. 홍진 선생의 후손이 의정원 관인을 보관하게 된 데에는 이 같은 사연이 있다. 홍진 선생이 1945년 12월 1일 환국하면서 가져온 의정원 문서는 손자 홍석주 씨가 보관하다가 국회에 기증해 1974년 국회도서관이 발간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최초로 규정된 ‘대한민국 임시약헌’(헌법) 개정안 초안(원본)과 건국강령, 광복군 작전보고 등 귀중한 자료들이었다. 임시정부 문서는 이들 자료 말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의정원 문서를 온전하게 보존해 후대에 남긴 것 역시 홍진 선생의 큰 공헌으로 평가된다. 홍진 선생은 1946년 9월 9일 병환으로 숨을 거뒀고 장례식은 9월 13일 김구 선생, 이승만 박사를 비롯해 각계 인사가 운집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됐다.▼ [단독]김구 주석-광복군 관인은 6·25때 행방불명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의 관인은 현재 소재가 확인된 임시정부의 유일한 국새다. 임정은 26년간 임시 헌장 제정과 5번의 개헌을 거치며 정체가 변화했지만 대체로 의회가 중심에 있었다. 1927년 3차 개정 헌법에는 “대한민국은 최고 권력이 임시의정원에 있음”(제2조)을 명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환국 당시에는 주석제였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환국 당시 임정은 당·정·군의 형태였고 주석과 총사령관, 의정원 관인의 가치는 동렬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구 주석이 사용한 주석의 관인은 정부 문서와 함께 6·25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지청천 장군이 썼던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의 관인도 마찬가지다. 북한에 두 개의 관인이 남아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이번에 공개된 의정원 관인은 소재가 확인된 유일한 국새인 셈이다. 국회의 홍진 선생 흉상 건립 안건은 2003년 발의됐다가 제16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국회는 2010년 5월 ‘홍진 임시의정원 의장 기념전시실’을 국회도서관에 설치했으나 흉상 건립에는 합의하지 못했다. 한 교수는 “홍진 선생 손자 홍석주 씨가 흉상 건립과 관인 기증을 협의하러 한국에 7, 8번 왔을 때마다 만났다”며 “석주 씨가 ‘살아 있을 때 꼭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했는데 끝내 생전에 결실을 못 봤다”고 설명했다. 홍 씨의 아내 신창휴 씨는 2017년 7월 본보와의 통화에서 “남편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편하게 돌아가시지도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취임 후 홍진 선생 흉상 건립을 다시 추진했고 지난해 11월 23일 국회 본회의에서 건립 안건이 마침내 통과(재석 의원 226명, 찬성 196명)됐다. 문 의장은 통과 직후 “홍진 의장님의 상(像)을 건립하는 것은 의회민주주의의 역사적 가치를 보전하고 독립정신의 참뜻을 계승하는 숭고한 일”이라고 유족에게 편지를 보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뉴욕=박용 특파원/박효목 기자}

    • 2019-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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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홍진 선생, 유일하게 임정 행정-입법 수장 모두 역임

    만오 홍진 선생은 우리나라 의회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독립운동의 거목이다. 임시정부 연구의 권위자인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임정에서 행정부 수반(국무령)과 입법부 수반(임시의정원 의장)을 모두 지낸 분은 홍진 선생이 유일하다”며 “가장 오랜 기간 의장으로 활동하며 의회정치의 기틀을 닦은 분”이라고 설명했다. 1877년 명문가 후예로 태어난 홍진 선생은 1904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동지들을 규합해 인천에서 13도 대표자 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를 조직한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해 9월 한성정부를 법통으로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21년 5월에는 이동녕 손정도에 이어 임시의정원의 3대 의장으로 선출됐고 이어 1939, 1942년에도 의장에 선출됐다. 한 교수는 저서에서 “홍진 선생이 이념과 당파를 초월한 인물이었기에 좌우익 세력이 참여한 통일의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홍진 선생은 임시의정원의 마지막 의장이었고 임정 환국 뒤 의정원을 계승한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도 선출됐다. 홍진 선생의 후손이 의정원 관인을 보관하게 된 데에는 이 같은 사연이 있다. 홍진 선생이 1945년 12월 1일 환국하면서 가져온 의정원 문서는 손자 홍석주 씨가 보관하다가 국회에 기증해 1974년 국회도서관이 발간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최초로 규정된 ‘대한민국 임시약헌’(헌법) 개정안 초안(원본)과 건국강령, 광복군 작전보고 등 귀중한 자료들이었다. 임시정부 문서는 이들 자료 말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의정원 문서를 온전하게 보존해 후대에 남긴 것 역시 홍진 선생의 큰 공헌으로 평가된다. 홍진 선생은 1946년 9월 9일 병환으로 숨을 거뒀고 장례식은 9월 13일 김구 선생, 이승만 박사를 비롯해 각계 인사가 운집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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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중세시대 왕의 식욕은 자격 평가의 잣대였다”

    서양 중세는 암흑기일까 황금기일까. 극단적인 평가가 오가는 이 시대를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들여다본 책이다. 중세 서양인들의 의식주는 오늘날과는 많이 달랐다. 중세에 많이 먹을 수 있다는 건 사회적 우월과 특권의 표지였다. 배가 나오고 뚱뚱한 것은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식욕이 별로 없는 사람은 지배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9세기 말 한 공작이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지 못한 이유를 두고 “적은 식사로 만족하는 그는 우리를 지배할 자격이 없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중세 말이 되면 음식의 질이 중요해진다. 13세기부터는 먹는 음식의 질에 따라 인격을 평가하기도 했다. 농가는 한집에서 사람과 가축이 서로의 온기에 기대 함께 사는 ‘롱 하우스(long house)’가 보통이었다. 폭 5m, 길이 15m 정도의 이 집에는 출입문을 중심으로 한쪽에 가족 4, 5명이 살았고 다른 한쪽에 건초 창고와 가축 우리가 있었다. 인간과 가축은 한 식구처럼 한 지붕 아래 동숙했다. 농민들은 “느릅나무 잎이 나올 때” “딱총나무 꽃이 필 때”처럼 자연현상으로 달과 계절을 구분했고, 민간에서는 무수한 부적을 사용했다. 고려대 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유럽인들은 18세기까지도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의 치유 기적을 믿었고, 인구 급증도 18세기부터 시작됐다. 집단 심성과 물질문화의 차원에서 보면 중세는 18세기에야 끝이 났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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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 낫게 만들려는 기업 후원, 재벌 3세로서 해야할 일이죠”

    혐오와 차별에 맞서는 미디어 창업자, 장애가 있는 아동을 위한 학습 애플리케이션 회사 창업자, 세계의 빈곤 퇴치를 목표로 활동하는 ‘임팩트 투자’(사회 혁신 추구 기업에 투자)자…. 신간 ‘당신은 체인지메이커입니까?’(김영사)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체인지 메이커’ 20명을 인터뷰해 소개한 책이다. 저자 정경선 ‘루트임팩트’ CIO(최고상상책임자·33)의 프로필도 흥미롭다. 정 씨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손자이자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의 아들. 소셜 벤처(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벤처 기업) 창업가 등을 지원하는 비영리 사단법인 ‘루트임팩트’와 임팩트 투자회사 ‘HGI’를 설립해 운영한다. 2017년 6월에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공유 오피스이자 소셜 벤처의 협업 커뮤니티인 ‘헤이그라운드’를 열었다. 헤이그라운드는 소셜 벤처 80개사의 둥지가 되고 있다. 8일 만난 정 씨는 “책을 내기 위해 인터뷰를 하면서 창업, 투자, 봉사뿐 아니라 윤리를 중요시하는 소비까지 사회문제 해결 노력은 정말 형태가 다양하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고 말했다. ―각종 지원금에 의존하다 좌초하는 사회적 기업도 적지 않다. ‘좋은 일’과 ‘돈 버는 일’이 양립 가능한가. “그렇다. 물론 소비자의 선의에만 의존하지 않고 고객이 매력을 느끼는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야 한다. 일례로 헤이그라운드 안에는 단시간 보육 서비스 회사 ‘째깍악어’를 비롯해 꼭 필요하지만 전에는 없던 보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소셜 벤처들이 있다. 몽골 양치기에게는 적정 가격을 지불하면서도 중간 마진을 줄여 양질의 캐시미어 의류를 저렴하게 파는 공정무역 기업도 있다.” ―창업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체인지 메이커’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사회문제가 왜 생겼는가,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계속 던진다. 또한 다른 이들과 협업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닷페이스’의 조소담 대표가 ‘참고 사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한 말에 십분 동의한다. 이런 면에서 ‘체인지 메이킹’은 일종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루트임팩트의 설립과 운영은 ‘재벌 3세’라서 할 수 있는 일 아닌지…. “당연한 말이다. 나는 이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보다 쉽게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체인지 메이킹’을 잘할 수 있는 분들을 지원하는 게 사회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기업의 미래는…. “사회, 환경을 고려해 지속가능한 제품과 서비스를 선택하는 ‘의식적 소비’가 확산되고 있다. 양질의 교육 제공 애플리케이션이나 특수질환 환자를 위한 식단 제공 서비스 등 신기술 바탕의 해결책도 확산되고 있다. 단숨에 바뀌지는 않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기업과 일반 기업의 경계가 희미해져야 한다고 본다.” 정 씨는 “미래를 살아갈 당사자인 청년들에게 더 많은 권한과 자원, 영향력을 부여해야 앞으로의 세상에 꼭 필요한 것을 만들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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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3·1만세 국경일로… 臨政의 첫 달력

    태극기가 엇갈려 내걸린 ① 독립문 아래 개선하는 독립군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진다. 선두에 선 장군은 말을 탔고, 구름같이 몰린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광복의 감격에 겨워 독립만세를 외친다…. 100년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새해(1920년)를 앞두고 제작해 배포한 임시정부 첫 달력인 ‘대한민력(大韓民曆)’이 발견됐다. 북간도 한인사 전문가인 김시덕 박사(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교육과장)는 “중국 지린(吉林)성 연변조선족자치주박물관에 있는 북간도 명동학교 건축기(建築記) 뒷면에 그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임정의 첫 ‘대한민력’이 숨어 있었다”며 13일 본보에 그 사진을 공개했다. 대한민력 상단의 그림은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한 임정의 꿈을 그대로 보여준다. 임정의 독자적 역서(曆書·달력) 발행은 독립국의 지위를 드러내는 수단이었고, 통치권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대한민력은 아직 국경일 공식 제정 전임에도 ② ‘개천절’과 ‘3·1 독립선언일’을 기념일로 명기해 국민을 통합하려 했다. 달력 하단에 ③ “경성표준시(京城標準時)를 본(本)함”이라고 명시해 임정이 도쿄 표준시가 아닌 동경 127.5도 기준의 ‘서울 표준시’를 채택했다는 점도 새로 드러났다. 김 박사는 “이 달력은 임정이 주권을 가진 독립 자주국임을 선포하고, 독립군의 작전 시간을 비롯해 독립운동 전선을 통일하고자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도쿄 아닌 서울표준시로 ‘시간 독립’… 독립군 연합작전 길 열어 ▼임시정부 발행 달력 ‘대한민력’, 역사박물관 김시덕 박사 첫 공개 이번에 발견된 대한민력은 임시정부의 국경일 제정 등을 알려주는 증거로 활용된 ‘대한민국4년역서(大韓民國四年曆書)’(1922년 달력)보다 2년 앞선 것이다. 당시 수천∼수만 부를 인쇄해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뿐 아니라 한반도와 해외 각지에 배포했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유일한 1920년(대한민국 2년) 대한민력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통합 임정 출범 석 달도 안 된 1919년 12월 1일 국무회의에서 국경일 제정과 함께 역서(달력) 발행을 논의했다. 대한민력을 발견한 김시덕 박사(사진)는 “이는 역서 발행이 식민 통치하 국민의 주권을 보장하는 일이고, 임시정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통치행위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적국의 표준시보다 30분이 늦음” 임정이 표준시를 정해 대한민력으로 공표한 것도 세계 각지의 독립운동가와 단체, 국민이 시간을 통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군 부대가 연합 작전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 통일이 필수적이었다. 대한민력은 “경성(京城)표준시를 본(本)함으로 중국 북경시보다는 44분이 이르고(봉천·奉天보다는 31분, 길림·吉林보다는 3분이 이르고) 적국(敵國·일본)의 표준시보다는 30분이 느즘”이라고 명시했다. 조선의 표준시는 한반도의 중앙을 지나는 동경 127.5도가 기준이었다가, 일제가 1912년 일본을 지나는 동경 135도 기준으로 바꾼 상황이었다. 김 박사는 “대한민력이 독립전쟁을 통일하고자 했던 임정의 비밀지령이었기에 일제는 불온문서(不穩文書)로 분류해 단속했다”고 밝혔다. 평안북도 압록강 연안의 농민 이종욱(李鍾旭·당시 33세)은 임정 요원 이일선이 가져온 이 대한민력과 독립신문을 황해도와 서울, 인천, 평양 등지로 보내려다 1920년 정치범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일제는 당시 대한민력 384매를 압수했다고 기록했다. 일제의 영향력이 닿는 곳에서 대한민력을 사용하는 건 이처럼 극도로 위험했다. 학계 연구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조선민력을 만들었고, 천문 관측과 사적인 역서 발행을 금지했다. 인천관측소가 제작하고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가 인쇄, 반포하는 조선민력의 역법만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보통 천세력이나 만세력 등 전통 달력을 많이 썼다.○ ‘대한민국 2년’ 명기 대한민력은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하는 대한민국 기년법(紀年法)을 대표 기년법으로 썼다. 단기(檀紀), 서력(西曆), 중화민국 기년도 병기했다. 대한민국 기년은 국명을 연호로 사용해 근대 국민국가임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단군을 시조로 하는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임을 나타내기 위해 단군교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단기도 사용했다. 단기는 당시 지식인들이 선호했다. 세계 정세를 읽고 대응하기 위해 세계의 표준 시간 격인 서력도 사용했다. 1912년부터 시작된 중화민국 기년은 중국 영토에 임정을 세웠기에 중국과 시간 정보를 공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대한민력은 1919년 12월 만들어졌다. 임정이 국경일을 공식 제정한 건 대한민력이 만들어진 이듬해(1920년) 봄. 그럼에도 대한민력에는 개천절과 독립선언일이 기념일 형식으로 오른쪽 위 태극기 아래 따로 표기돼 있다. 김 박사는 “짧은 시간에 민력을 제작해야 했기에 비록 법적으로 정해지지 않았지만 내부의 합의에 따라 표기했을 것”이라며 “기념일 표기는 집단적 단일성을 부여하는 통치 행위의 하나”라고 강조했다.○ 한인 농민에게 농사 정보 제공 대한민력의 크기는 가로 28.7cm, 세로 39.2cm로 임정의 신문인 독립신문 타블로이드판과 비슷하다. 복잡한 문양으로 된 테두리 네 모퉁이에는 4괘를 배치했다. 왼쪽 상단에서 시계 방향으로 감(,), 곤(+), 리(-), 건(*)의 순이다. 상단 가운데 독립문을 통과해 국내로 진공하는 독립군의 그림은 1920년 독립전쟁을 선포한 임시정부의 노선을 홍보하기 위한 것이다. 날짜는 양력을 기본으로 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1∼12월을 배치하고 해당 월 아래 별도 칸에 해당 월의 대소(大小)와 윤달을 표기했다. 날짜는 그 아래에 세로로 검은색 아라비아 숫자로 썼고, 오른쪽에 작은 글씨로 음력을 부기했다. 양편으로 ‘월월요람(月月要覽)’을 두어 24절기와 일출몰 시각, 삭망, 달의 상하현 정보도 실었다. 김 박사는 “만주에서 수전(水田·무논)을 개발해 경작하던 농민 등 임정의 국민에게 생업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려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발행부서는 임정 학무부 편집국이었다. 중국 상하이에 있던 ‘송가격서적해송양행(宋家格書籍海松洋行)’이 발송처다. 이곳은 나중에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한진교(1887∼1973)가 1914년 6월 20일 상하이에 설립한 무역상점이다. 이곳에서 인쇄했을 가능성도 있다. 김 박사는 “임정의 대한민력 발간은 국민이 임정과 동일한 시간체계를 공유하고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든 민주공화정치적 행위였다”고 강조했다.  ▼ 뒷면의 북간도 학교 건축기 살펴보다 발견 ▼대한민력은 수많은 독립지사를 배출한 북간도 명동촌의 명동학교 옛 교사에서 발견됐다. 100년 전 만든 임정의 첫 달력이 오늘날 조명될 수 있었던 건 김시덕 박사(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교육과장)의 꼼꼼한 연구와 눈썰미 덕이 크다. 김 박사는 북간도 독립운동의 지도자 규암 김약연(1868∼1942) 기념사업회 김재홍 사무총장이 수집해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한 자료를 살펴보다 사진 속 ‘명동학교 건축기(建築記)’에 흐릿하게 뒷면의 태극기가 비쳐 찍힌 데 주목했다. 명동학교는 일제가 간도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한 ‘간도참변’ 당시 전소됐고 1922, 23년 중건됐다. 그 중건 과정을 바로 대한민력 뒷면에 적어 남겼던 것. 이 건축기는 명동학교가 1973년 현재의 대룡동으로 이전하면서 옛 교사를 철거할 때 대들보와 기둥 사이에서 발견됐다. 하지만 40여 년이 흐르는 동안 뒷면 대한민력에 주목한 이는 없었다. 1997년 한 연구서가 “‘대한민력’ 뒷면의 명동학교 건축 시말기록이 관심을 끌었다”고 언급한 정도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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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세계 첫 원자로 설계, ‘물리학 천재’ 페르미

    어니스트 러더퍼드(1871∼1937)가 금박에 쏜 알파입자가 튕겨 나오는 걸 관찰해 원자핵을 발견하고 31년이 지난 1942년 12월, 미국 시카고대의 스쿼시 코트에서 세계 최초의 원자로가 가동된다. 실험의 주역은 ‘페르미 연구소’, ‘페르미 역설’, ‘페르미 우주망원경’ 등 과학사 곳곳에 이름을 남긴 이탈리아 출신의 과학자 엔리코 페르미(1901∼1954)다. 이론과 실험 모두에서 천재로 평가받은 이 과학자의 인간적 면모가 풍부하게 담겼다. 아내가 유대인이었던 그는 무솔리니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1938년 노벨상 수상을 기화로 스웨덴으로 출국했다가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자신이 이탈리아를 떠나기 전까지 미국 컬럼비아대 물리학과 교수 자리를 얻었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컬럼비아대 학과장에게 간청하면서, 유대인 차별로 직위를 잃은 동료 유대인 물리학자 5명의 일자리를 부탁하기도 했다.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의 사막에서 인류는 처음으로 핵폭탄을 폭발시키며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현장에는 설계의 핵심 인물인 페르미도 있었다. 그는 나중에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얻은 힘을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할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우리는 그렇게 되기를 모두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했다. 원제는 페르미의 별명이었던 ‘The Pope of Physics’(물리학의 교황).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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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 영주 제민루는 조선 最古 지방병원”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 지방 의원은 경북 영주의 ‘제민루(濟民樓)’인 것으로 나타났다. 김호 경인교대 교수는 학술지 ‘국학연구’ 최근호에 게재한 논문 ‘16∼17세기 조선의 지방 의국 운영’에서 “조선 최고(最古)의 지방 의국(醫局)은 사족(士族)들이 주도해 운영한 제민루”라고 밝혔다. 논문에 따르면 제민루는 1433년(세종15년) 영주군수가 학교와 의국을 겸하는 건물로 세웠다. 오랫동안 의국보다는 서당과 학자들이 공부하는 곳으로 사용하다가 1591년 군수 이대진이 북쪽에 큰 건물을 재건해 의국으로 삼으면서 기능을 회복했다. 김 교수는 논문에서 “제민루는 내의원에 납입할 약재를 관리하기 위해 국가 주도로 세워졌지만 지방민을 위한 의료 혜택과 환난상휼(患難相恤·재앙을 당하면 서로 도와줌)의 플랫폼으로 활용됐다”고 밝혔다. 제민루에서 만든 환약과 탕약은 영주를 비롯한 경북 사람들이 두루 복용했다. 의술에 밝았던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아들에게 제민루에서 제조한 환약을 꾸준히 복용하라고 권했다는 기록도 있다. 운영 재원도 상당한 규모였다. 1596년 기준 제민루에 속한 전답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과 비교해도 적지 않았다. 김 교수는 “재원은 국가가 마련한 제민루 둔전(屯田)에서 충당하는 한편 사족들이 일부를 기부해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제민루는 임진왜란 등 전란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16세기 말∼17세기 중엽 사족들이 책임 있게 운영하면서 새로 의서를 구비하거나 여러 물건을 보충했고, 문서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17세기 제민루는 13, 14종의 의서 100여 권을 소장했다. 당시 소수서원 소장 도서가 500여 권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양이다. 제민루는 향촌 사회가 자율적으로 운영했으므로 사족들의 참여는 필수적이었고 양반과 상민, 천민, 승려를 비롯해 100여 명이 운영에 관여했다. 17세기 말∼18세기 초에는 의국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1748년 영주의 사족들이 제민루를 중건했다. 김 교수는 “역사상 사회적 자본은 저절로 확충된 적이 한 번도 없다”며 “제민루에서 제민(濟民·백성을 구제함)을 국가의 임무로 한정하지 않은 향촌 사족들의 의지를 볼 수 있다”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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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후기, 북간도 영유권 지키려는 강한 의지 있었다”

    조선 후기 함경북도와 백두산 일대, 두만강 너머 북간도 등 북방(北方)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지리서 3종이 번역 출간됐다. 한국고전번역원은 “조선 후기 북방 영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북새기략(北塞記略)’과 ‘북관기사(北關紀事)’, ‘북여요선(北輿要選)’을 번역해 한 권으로 묶어 펴냈다”고 8일 밝혔다. ‘북새기략’은 1777년(정조 1년) 10월부터 1년 남짓 함경도 경흥부사(慶興府使)로 재직한 홍양호(1724∼1802)의 ‘삭방풍토기(朔方風土記)’를 그 손자가 내용을 보완해 편찬했다. 경흥의 풍속, 북관(함경북도)의 역사와 유적에 관한 내용뿐 아니라 백두산과 만주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내용이 체계적으로 담겼다. ‘북관기사’는 1807년(순조 7년) 함경도 북병영(北兵營)의 북평사(北評事)로 부임한 홍의영(1750∼1815)이 북관 지역의 정보와 그에 대한 의견을 담아 순조에게 바친 책으로 북방에 대한 국가 차원의 관심을 보여준다. ‘북여요선’은 19세기 말 청나라와 영유권 분쟁이 발생한 북간도 지역이 조선 영토임을 입증하고자 자료를 수집해 정리한 책이다. 백두산 옛 사적, 강역, 백두산정계비 내용에 대한 고찰과 함께 강역 경계 조사에 대한 자료가 담겼다. 1902년 북간도 시찰사 이범윤(1856∼1940)이 편집한 원고를 바탕으로 1904년 간행됐다. 북간도 영유권을 지키려는 조정과 지역민의 강한 의지가 드러나 있다. 이번 서적은 고전번역원의 손성필 선임연구원, 오세옥 이정욱 책임연구원 등 3명이 번역했다. 손 선임연구원은 해제에서 “이들 조선 후기 북방지리서는 당시 국토의식, 역사의식, 민족의식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이는 근·현대 우리나라 정체성 인식의 토대가 됐다”고 설명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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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의전당 평일 공연 오후 7시30분… 30분 당겨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은 평일 공연 시작 시간을 오후 8시에서 오후 7시 반으로 앞당길 수 있도록 했다고 6일 밝혔다. 예술의전당은 올해부터 적용하는 콘서트홀 대관규약을 ‘평일 공연 시작은 오후 8시가 원칙이지만, 신청을 통해 오후 7시 30분으로 변경할 수 있다’고 고쳤으며, 내년엔 공연 시작 시간을 원칙적으로 오후 7시 반으로 변경한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에 발맞춘 것이다. 다만 올해 대관 공연은 규약 개정 전인 지난해 대부분 대관 계약을 마무리해 원래 예정했던 8시에 시작할 가능성이 높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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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조종엽]독립운동사, 증강현실로 재미있게 가르치자

    한파가 몰아치던 지난해 말, 중국 상하이도 수은주가 0도 아래로 깊이 떨어졌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취재차 나선 길이었다. 황푸(黃浦)강의 습기를 머금은 찬바람은 무겁게 옷깃을 파고들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창장(長江)강 이남에서는 겨울에도 난방을 하지 않는다. 100년 전 이역만리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임정 요인들 역시 고향집의 뜨끈한 구들장이 그리웠을 것이다. 상하이는 발 닿는 곳마다 독립운동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다. 흔히 ‘상하이 청사’라고 부르는 임정 마당로(馬當路) 청사(1926∼1932년 사용)는 1993년 복구해 문을 연 지 25년이 넘었다. 지금도 한국인들의 발길이 끊일 새가 없었다. 현장에서 역사를 배우고자 하는 수요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적 건물과 장소는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없기도 했다. 1921년 임정 신년축하식 기념촬영 장소(영안백화점 옥상)는 벽돌 하나 달라진 게 없었지만, 1920년 신년축하회가 열렸던 ‘일품향여사(一品香旅社)’는 진즉에 헐리고 ‘래플스 시티’라는 복합쇼핑몰이 들어서 있었다.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이 지난해 위치를 밝힌 임정 하비로(霞飛路) 321호 청사도 마찬가지다. 한성, 노령 등 국내외 조직된 임시정부가 이 청사에서 통합했다. 현재 주소로 화이하이중루(淮海中路) 651호인 이곳에는 의류 매장이 들어서 있었다. 서쪽으로 100m 정도 가면 독립임시사무소 자리가 있지만 역시 지금은 대형 스포츠의류 매장이 서 있다. 번화한 화이하이중루에는 프랑스 조계 가로 조경의 특징인 플라타너스 나무가 여전히 줄지어 서 있었지만, 거리를 지나가는 누구도 이곳에 임정의 두 번째 청사가 있었다는 걸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막상 현장에 가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면 당대 독립운동가들의 결기를 떠올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독립운동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고자 하는 사람조차 어디가 어딘지 찾기 어렵다는 것은 문제다. 일부 장소의 위치가 최근에 드러나기도 했지만, 임정 수립 100년이 지나도록 역사적 장소에 표석 하나 없다고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다. 한중 관계는 수교 뒤에도 여러 정세에 따라 좋다 나쁘다 했다. 남의 나라 땅에 기념물이나 표석을 세우는 게 쉬울 리 없다. 대신 우리 정부가 당장 할 수 있는 비교적 간단한 일이 있다. 해외 독립운동 역사 유적의 당대 모습을 역사 지도와 함께 증강현실(AR)로 제작해 교육에 활용하는 것이다. 상하이 여행자가 스마트폰의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켜고 이 증강현실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면 표석이 없어도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얼마나 역사적인 장소인지 쉽게 알 수 있을 테니 얼마나 근사할까. 가상현실(VR) 콘텐츠도 좋다. 고려 말 문인 길재(吉再·1353∼1419)는 “산천은 의구(依舊·옛날 그대로 변함없음)하되 인걸(人傑)은 간데없고”라고 읊었다. 하지만 근대 도시는 순식간에 변하기에 10년만 지나도 모습이 의구하지 않다. 대신 오늘날은 옛 모습을 재현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 3·1운동 및 임정 100주년 디지털 기념사업에 정부가 나서는 건 어떤가. 조종엽 문화부 기자 jjj@donga.com}

    • 2019-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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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 현장에 꼿꼿이 선 기념비들, 지금도 만세를 외친다

    “기미 3·1운동은 우리 민족정기를 민중의 토대 위에 꽃피게 한 장엄한 역사의 한 페이지였습니다.” 1965년 동아일보 4월 1일자 1면에는 ‘3·1유적보존운동’을 알리는 사고(社告)가 실렸다. 동아일보는 그해부터 3·1운동의 주요 현장에 기념비를 세우는 사업에 착수했다. “남녀노소, 전국의 모든 애국동포의 협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취지에 따라 3·1운동 기념탑 건립 모금에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기념비건립위원회가 구성됐다. 국사편찬위와 합동으로 유적지 조사를 거쳐 1971년 8월 15일 전북 이리(현 익산시) 역전광장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열었다. 이후 1987년 10월 충남 서천까지 모두 12개의 비가 세워졌다. 기념비가 세워진 곳은 △충북 영동 △강원 횡성 △서울 중앙고 △전북 남원 △강원 양양 △전남 강진 △전북 임실 △강원 홍천 △전남 영암 △경북 안동 등이다. 해마다 그 앞에서 참배행사가 열리는 등 기념비는 3·1정신을 기리는 공간이 됐다. 충남 서천군은 마산면 신장리 마산초등학교 옆 ‘3·1운동 기념비’ 주변에 무궁화를 심고 누각을 지어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 왔다. 2008년부터는 해마다 만세운동 재연 행사를 열고 있다. 3·1정신을 잇고자 하는 시민들이 기념비를 정성으로 관리했다. 충북 영동군 영동읍 중심가에 위치한 ‘영동 3·1운동 기념비’는 그 앞에서 2대째 자전거 수리·판매점을 운영한 신달식 씨(62)와 그의 부친 신동우 씨(1992년 72세로 작고)가 대를 이어 헌신적으로 관리했다. 2017년 본보 인터뷰에서 신 씨는 “조국의 독립을 외치던 3·1운동 당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이 일을 멈추지 않겠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2013년부터 관리 소홀로 녹슬고 얼룩이 생긴 기념비들을 점검하고 개·보수해 새로 단장하는 사업도 펼쳐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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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 항일 넘어 공존의 국제질서 추구”

    “3·1운동은 당대 세계 사조의 변화를 가장 첨단에서 반영해 일어났던 운동입니다. 독립선언서의 지향은 오늘날 세계질서가 지향할 바와도 같지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66·사진)을 지난해 12월 26일 서울 서대문구 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김 이사장은 “3·1운동과 독립선언서, 이후의 민족운동을 단순히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반일(反日)운동으로만 보는 건 운동의 성격을 굉장히 낮춰 파악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러시아혁명의 발발을 비롯한 20세기 초의 정세 변화는 새로운 세계질서와 평화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념을 필요로 했다. 19세기 말부터 유행했던 사회진화론은 우월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강대국이 약소국가를 지배하는 것을 자연법칙에 비유함으로써 제국주의를 정당화했던 사상이었다. 그러나 ‘3·1독립선언서’에 이러한 사회진화론을 일거에 깨부수는 핵심 정신이 담겨 있다고 김 이사장이 지적했다. 그는 “1차 대전 종전 뒤 강자와 약자가 균등하게 존재하는 질서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의와 인도주의, 민족자결의 원칙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3·1독립선언서 속에 모두 담겨 있다”고 밝혔다. 중국 5·4운동도 3·1운동과 마찬가지로 당시 세계 사조의 변화를 반영해 일어난 것이라고 덧붙였다. 3·1독립선언서에서 33인의 민족대표들은 “일본의 배신을 죄(罪)하려는 것이 아니다.…일본의 의리 없음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다.…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한때는 ‘일본을 탓하지 않는다’는 3·1독립선언서의 이 같은 표현을 두고 ‘무기력하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저도 젊은 시절 공부하며 그렇게 오해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민족대표들은 조심스러웠던 게 아니라 사회진화론을 극복하고 정의와 인도주의를 추구하는 세계 사조를 그대로 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3·1운동은 단순한 반일운동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고 김 이사장은 설명했다. “3·1운동은 제국주의 질서가 아니라 강대국과 약소국이 공존하는 국제질서를, 그것도 비폭력으로 구축하려 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평화적 국제질서를 향한 노력은 사실상 3·1운동으로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죠.” 3·1독립선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향한 민주공화제도 세계 사조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1차 대전 뒤 민족자결의 원칙 아래 새로 태어난 약소국들이 거의 공화주의를 택했다. 조선 독립운동 역시 1917년 ‘대동단결 선언’ 등에서 국민 주권을 주장했다. 김 이사장은 그동안 3·1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의 의미를 지나치게 조선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시각 측면에서만 평가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 민족운동은 1930년대 후반으로 가면 반전·반파시즘 운동의 성격을 지닙니다. 조선의 독립을 매개로 새로운 세계 평화질서와 민권 이념, 사회를 지향했던 것입니다.” 김 이사장은 동북아시아 평화 구축을 위한 실마리도 3·1운동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해 11월 학술대회에 이어 올해 4월 개최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도 사회진화론의 극복과 민주공화제의 확산을 집중 조명할 예정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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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 유엔규약 50년 앞서 인간기본권 지평 넓힌 사건”

    “3·1운동은 모든 민족은 국가를 가질 권리가 있다고 천명하며, 유엔 규약보다 약 50년 앞서 인간 기본권의 지평을 넓힌 사건입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조광 국사편찬위원장(74)을 지난해 12월 21일 경기 과천시 국사편찬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3·1운동 100주년의 의미에 대해 “대한민국의 민주공화제 성립뿐 아니라 사회 전 분야에 걸쳐서 광범하게 영향을 준 혁명적 사건”이라고 말했다. 조 위원장은 3·1운동이 서울에서 시작해 지방으로 확산됐고, 지식인·학생이 중심이 됐다가 민중으로 전파됐다는 인식은 오해라고 강조했다. “거의 모든 지역이 3·1운동의 중심지였고, 주역은 민족 전체였다”는 것이다. 조 위원장은 “독립은 이뤘으니 분단의 극복과 민주, 복지국가 건설이 앞으로의 과업”이라며 “그 전범이 100년 전 3·1운동”이라고 강조했다. 동아일보와 국사편찬위원회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2월 하순에 공동주최한다. 조 위원장은 “동아일보사는 1950∼70년대에도 3·1운동 기념비를 세우고, 대규모 3·1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을 간행하고, 강연·토론회를 여는 등 3·1운동을 기억하는 사업을 꾸준히 펼쳐왔다”며 “이는 민족지로서 동아일보가 우리 민족운동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3·1운동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것이다. 동아일보의 그런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3·1운동이 우리 역사에서 갖는 의미는…. “우리의 독립의지를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일본은 조선이 자발적으로 합병을 바랐다고 거짓 선전을 일삼았다. 그런 ‘페이크 뉴스’에 일격을 먹인 것이다. 독립 의지 표시 없이 독립국가가 생길 수 없다. 이렇게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직접적 계기를 마련했다. 또 일제 식민통치 정책의 변경을 강박했다.” ―정치 측면 이외 다른 의미는…. “3·1운동은 우리가 스스로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 사건이다. 3·1운동은 1920년대 이후 사회운동의 근원이 됐다. 민족적 각성이 이뤄지면서 사회문화적 변화가 일어났다. 일례로 학교 진학률이 급격히 증가했고, 형평(衡平) 운동 같은 신분타파운동도 본격 전개됐다. 민족주의 사학의 발전과 민족 종교도 발전했다. 3·1운동은 근대적 사회 변화의 내재적 기점이다. 임정 탄생 등 정치적 결과만 강조하면 3·1운동의 의의를 오히려 축소하게 된다.” ―오늘날 새로 주목할 만한 의의가 있다면…. “인간 기본권의 인식지평을 넓혀준 사건이라는 것이다. 1966년 유엔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대한 국제규약’보다 47년 앞서 민족이 독립된 국가를 가질 권리가 기본적 권리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세계 인권사의 발전에서도 3·1운동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3·1운동의 규모는…. “당시 조선 인구가 1679만 명이었는데 총독부 기록에 참여자가 106만 명이었다. 전체 인구의 6.3%가 참여했다. 물론 근거가 미흡한 구석이 있다. 야마베 겐타로나 신복룡 등의 연구자는 50만 명 내외로 본다. 그래도 인구의 3.0%다. 이 정도면 거의 전 국민이 참여했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인류사에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을 정도의 규모다. 독립선언서만 봐도 최남선이 기초한 것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약 200건의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이 있다.” ―대한민국의 오늘과 미래에 던지는 메시지는…. “3·1운동은 전근대 왕조체제에서 탈피해 민주공화제의 성립을 전망하고 추진한 사건이다. 오늘의 한국은 민주주의의 신념을 키워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공화정을 발전시킬 책임을 확인해야 한다. 또 독립된 국가를 모든 국민을 위한 복지국가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책임을 확인시켜 준다. 100년 전 3·1운동을 벌인 선조들은 불가능에 도전해 마침내 독립을 이뤘다. 우리도 불가능에 대한 도전을 현실화해야 한다.” ―국제적인 측면은…. “3·1운동은 국제적 불의·부당한 일에 대한 저항이고 경고였다. 한국은 인류의 인권에 대한 기본적 감수성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탄압받는 민족과 인류에 대한 보편적 인류애를 강화해야 한다. 민족과 인류의 기아와 빈곤, 난민 문제를 비롯해 문화적 제반 권리를 제약하는 악조건을 개선하고 국제평화를 위하는 활동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3·1운동은 죽은 화석이 될 것이다.” ―독립은 이뤘지만 분단은 계속되고 있다. “3·1운동은 사회적 계급을 초월한 전 민족이 일치해서 일으킨 운동이다. 분단 극복을 위한 노력이 제2의 민족운동이고, 두 번째 3·1운동이다.” ―일부에서는 3·1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용어를 바꾸자는 주장도 나온다. “일리가 있다. 3·1운동은 사회의 질적 전환을 추진하는 혁명적 성격이 있다. 사회 전반에 걸쳐서 광범하게 영향을 준 3·1운동은 프랑스 대혁명 못지않은 혁명적 사건이다. 혁명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이라는 ‘뉴 아이디어’와 그 생각을 실천하는 힘, 즉 무력·폭력을 갖춰야 한다. 3·1운동은 기존 사회질서를 바꾸자는 것이었고, 비록 비폭력을 표방했지만 엄청난 희생자가 나오고 참여자도 넓었다. ‘파워’도 결합됐던 것이다. 물론 독립선언서가 비폭력을 지향했기에 ‘운동’으로 보는 게 적합하다는 견해도 성립된다. ‘운동’으로 지칭하는 이들도 3·1운동의 혁명적 측면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3·1운동의 혁명적 의미를 충분히 인정하지만 광복 전부터 계속 사용했던 용어와 관행을 존중해 3·1운동으로 불러도 된다고 본다.” ―3·1운동에 대한 오해는…. “3·1운동은 순식간에 확 번졌다. 소식만 듣고 너나 할 것 없이 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거의 모든 지역이 3·1운동의 중심지였다. 운동의 확산 과정을 데이터베이스로 보면 드러날 것이다. 서울·중앙의 지식인·학생과 연계되지 않은 사람도 다 만세의 주역이었다. 각자가 그 지역에 맞는 조건과 인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해서 전반적으로 일으킨 것이다. 운동 양상도 횃불투쟁, 만세시위, 주재소습격, 격문배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했다.”:: 조광 국사편찬위원장(74) ::1983∼2010년 고려대 사학과·한국사학과 교수2001년 한국사상사학회 회장, 조선시대사학회 회장 2002∼2005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총간사2003∼2006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2005년 고려대 문과대학 학장 2005년 안중근전집편찬위원회 위원장 2005∼2009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장2006년 전국사립대인문대학장협의회 초대 회장2008년 한국사연구회 회장2008∼2010년 고려대 박물관 관장 2010년∼ 고려대 명예교수2017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취임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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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독립만세!” 100년 메아리

    “내년 이날은 우리 서울에서 신년축하회를 열고야 만다. 금년 1년 안에는 우리의 신성 국토를 회복하고야 만다. 독립은 하고야 만다!” 1920년 1월 1일 중국 상하이(上海) 남경로(南京路). 당시 고급 호텔 ‘일품향여사(一品香旅社)’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요인 및 직원 60여 명이 임정 수립(1919년 4월 11일) 뒤 처음 맞는 신년축하회를 열었다. 행사장 전면에는 대형 태극기가 내걸렸고, 낮 12시 정각 애국가를 제창했다. 호텔 양악대가 당시 애국가 곡조로 쓰였던 스코틀랜드 민요를 계속 연주했으며, 벅찬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지난해 12월 27일 동아일보 취재팀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국내 언론 중 처음으로 이곳을 찾았다. 동행한 중국 내 독립운동·한인사(史) 전문가인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에 따르면 일품향이 있던 자리(당시 주소 서장로·西藏路 270호)는 현재 영화관까지 들어선 7층짜리 복합쇼핑몰 ‘래플스 시티’(현주소 시짱중루·西藏中路 268호)로 바뀌었다. 건물 모습은 바뀌었지만 당시 참석자들의 우렁찬 만세 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들리는 듯했다. 당시 임정 인사 58명은 행사를 마치고 오후 4시경 호텔 옥상에서 대형 태극기 2개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임정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진 중 하나다. 이곳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논문에 밝힌 김 연구관은 “임정은 이 기념사진을 통해 임정의 정통성을 과시하고 독립운동을 고무하고자 했다”며 “행사 장소도 정부 행사의 품격에 맞는 곳을 골랐다”고 말했다.상하이=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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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벽력같은 만세소리로…” 3·1절 기념식뒤 자동차 시위

    《“대한민국 만세! 대통령 이하 총리와 각 총장 만세, 삼십삼인 만세! 광복의 대사에 진췌(盡瘁·쓰러질 정도로 힘을 다함)하는 동포형제자매 만세! 왜놈의 악형에 영어(囹圄)에 신음하는 동포만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신문이었던 독립신문에 따르면 1920년 1월 1일 신년축하회에서 임정 인사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목 놓아 외쳤다. 행사장인 일품향여사는 당시 중국 상하이에서 손꼽히는 고급 호텔이자 일류 요리점이었다. 1919년 8월 22일 한인들이 친한파 미국인의 송별회를 여는 등 여러 단체의 모임이 열리던 장소였다.》 기념촬영을 위해 일품향 옥상에 오른 임정 요인들의 눈앞으로는 당시 경마장이 펼쳐져 있었다.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임정 인사들은 광활한 경마장이 표상하는 서구 열강의 힘을 절감하면서 부강한 독립 국가를 꿈꿨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마장 자리는 오늘날 상하이의 대표적 명소인 런민(人民)광장이다. 임정은 1920년 당시 사진 속 위치에 맞춰 별지에 명단을 인쇄해 함께 배부했다. 임정의 정통성을 과시하고 “이런 사람들이 여기 모여 독립투쟁을 다짐했으니 여러분도 힘을 다하라”는 메시지를 타 지역 독립운동단체에 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현장을 취재한 해일생(海日生)이란 필명의 독립신문 기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썼다. “삼삼오오로 헤어져 가는 우리 형제의 얼굴에는 새 용기, 새 결심, 새 희망의 빛이 빛나다. 내일부터는 더욱 조국을 위해 성충(誠忠)을 다하리라.” 임정은 이듬해 1921년 1월 1일에는 상하이의 대표적 번화가인 난징둥루(南京東路)에 있는 영안(永安)백화점에서 신년축하회를 열었다. 프랑스조계 대한교민단 사무소에서 간단한 축하식을 치른 뒤 대동여사 대채루(大菜樓)에서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임정 인사 59인은 이날도 백화점 옥상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을 엽서로 만들어 홍보에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지난해 12월 28일 방문한 영안백화점은 지금도 당시의 웅장한 서양식 석조건물 그대로 서 있었다. 임정 인사들의 눈앞에는 번화한 남경로의 고층 건물, 멀리 황포강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1921년 1월 1일 신년축하식 기념촬영 사진은 등장한 59명 가운데 10명이 아직도 성명 미상으로 남아있다. 1920년과 1921년에 3·1절 기념식이 열렸던 올림픽극장(현재 난징시루·南京西路 742호)도 역사적인 장소다. 현재는 은행과 커피숍, 치과 등이 빼곡한 오피스 건물로 바뀌었다. 올림픽 극장은 당시 공공조계의 최신식 극장이었다. “여러 대 자동차에 나눠 타고 국기를 높이 내건 뒤 벽력같은 만세소리로 하비로를 질주하고…러시아인은 ‘우라’(만세)를 부르고, 영미인은 모자를 두르며, 중국인은 박수로 환영하는데 일본인은 비슬비슬 보기만 하였다고.” 1920년 기념식 행사 뒤 한인 청년들이 벌인 자동차 시위를 묘사한 독립신문 기사다. 시위대는 프랑스조계 하비로와 공공조계 서장로를 지나 남경로에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더 나아가 일본인이 밀집해 살던 홍구 지역의 일본총영사관 앞에서도 시위를 했다. 당시 일본 관헌들은 경악하면서도 어쩔 줄 몰라 했다고 한다. 시위는 이듬해인 1921년과 1923년 3·1절 기념식 때도 재연됐다.○ 광복 50주년, 동아일보가 보도한 임정 58인 실명 1920년 1월 1일 신년축하회 사진은 아래쪽에 ‘대한민국 2년 원월(元月) 원일(元旦) 대한민국임시정부 신년축하회 기념촬영’이라고 기록돼 있다. 사진에 등장하는 58명이 누구인지 모두 드러난 것은 촬영 75년 만인 1995년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서였다. 이전까지는 등장인물 가운데 20여 명만 신원이 파악돼 있었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동아일보는 사진에 등장하는 58인의 명단을 발견한 사실을 1월 1일 신년호에서 보도했다. 본보는 이 별지 명단을 일본 외무성 사료관의 자료 속에서 한일 근대사 연구가 최서면 씨가 발견했다고 소개했다. 사진과 별지 명단은 1920년 2월 14일 일본의 간도총영사관이 외무대신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 포함돼 있었다. 당시 간도일본경찰은 임정 국무원 비서장 김립의 동생인 김철용의 가택을 수색하던 중 압수했던 것이다. 당시 상하이 일본영사관은 사진 속 인물들에 대해 지도급 인사 말고는 거의 파악하지 못했다. 기념사진만 입수했고, 별지 명단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김광재 편사연구관은 “이로 볼 때 일본영사관이 밀정을 활용해 프랑스조계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 진영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는 종래의 설명이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국내의 교통부와 연통국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면서 임시정부는 재정난을 겪었고, 1922년 이후 임정이 신년축하회를 성대하게 열었다는 기록이나 사진은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 랜드마크 영안백화점은 도산선생 즐겨 이용… 현재 메트로폴로 호텔선 백범-윤봉길 마지막 점심 ▼상하이 곳곳 독립운동 흔적 상하이에서는 가는 곳마다 우리의 독립운동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저서 ‘근현대 상해 한인사 연구’(경인문화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산파 역할을 했던 독립임시사무소의 현 위치도 밝혔다. 1919년 민족 대표의 위임을 받고 3월 1일 상하이에 도착한 독립운동가 현순 목사(1880∼1968) 등이 여기서 3·1운동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한편으로 임정 수립을 준비한 역사적 장소다. 김 연구관이 1920년 당시 프랑스 조계 지적도와 대조한 결과 독립임시사무소가 있던 하비로(霞飛路) 329호는 오늘날 화이하이중루(淮海中路) 717호의 일부가 됐다. 지난해 김 연구관이 밝힌 임정 두 번째 청사(하비로 청사) 자리(본보 2018년 4월 10일자 1·21면 참조)에서 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위치다. 당시에는 주택이었지만 지금은 대형 스포츠의류 매장이 들어섰다. 또한 비교적 최근에 알려진 곳 중 하나가 대표적 번화가인 난징둥루(南京東路)에 있는 영안(永安) 백화점이다. 당시 주소로 공공조계 남경로(南京路)에 있던 이 백화점은 상하이의 랜드마크였다. 1918년 문을 연 이 백화점 부속 대동여사(大東旅社)는 도산 안창호가 회의나 손님 접견을 위해 즐겨 찾았던 건물이다. 1920년 미국의원단의 환영회도 여기에서 열었다. 김 연구관은 “남경로의 고층 백화점으로 대표되는 중국 민족자본의 흥기는 식산흥업과 실력 양성을 통한 근대를 추구하던 도산에게 자극제가 아닐 수 없었다”며 “남경로 중국 백화점의 번영에서 조국의 근대화를 위한 희망을 보았던 것은 아닐까”라고 설명했다. 현재의 메트로폴로 호텔(시짱난루·西藏南路 123호)은 윤봉길 의사가 1932년 의거 전날 백범과 점심을 먹으며 거사를 협의한 곳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상하이 YMCA 사무소가 있다. 윤 의사의 의거 뒤 백범 김구를 숨겨준 피치 목사가 YMCA 간사를 지냈다. 윤 의사가 의거 당일 폭탄을 건네받고 백범과 함께 아침을 먹은 독립운동가 김해산(金海山)의 집(안탕로·雁蕩路 원창리·元昌里 13호)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임정의 초기 주요 행사가 열린 기념식장은 대체로 공공조계에 있다. 당시 공공조계는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 한인 독립운동가에게 극도로 위험한 지역이었다는 일반적 인식과는 괴리가 있다. 김 연구관은 “열강을 의식한 일제도 독립운동가 체포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고, 공공조계가 초기부터 위험했던 것은 아니다”라며 “한인들은 일상생활, 기념행사, 생업 등을 위해 공공조계에 일상적으로 드나들었다”고 말했다.상하이=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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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도전은 나의 힘”… 12명의 한국인이 쏘아올린 해외 성공신화

    박호선 사장(58)은 대평원의 나라 몽골에서 승강기를 판다. 수도 울란바토르를 비롯해 몽골의 주요 도시에서 사용하는 승강기 3000여 대 중 절반 이상이 박 사장의 회사에서 설치한 제품이다. 그는 지독한 가난으로 초등학생 때부터 공장에서 일해야 했고, 이후에도 수십 가지 직업을 거쳤다. 1999년 몽골로 건너가 인테리어 사업을 벌였지만 2003년 완전히 망했다. 돈이 없어 영양실조로 쓰러졌다가 한인식당을 하는 교민이 보내준 설렁탕을 먹고 한 달 만에 기운을 차리기도 했다. 그러다 러시아인이 갖고 있던 한국 승강기의 몽골 판매권을 확보하며 기적적으로 재기했다.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사업으로 성공한 한국인 12명을 인터뷰한 책이다. 주인공들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늘 안주하기보다는 모험과 도전을 택했다. 윤용섭 사장(56)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 다니던 직장인이었다. 1995년 브라질 발령을 받고 거대한 시장에 매력을 느꼈다. 1997년 회사를 나와 오퍼상을 시작했지만 브라질은 이듬해 11월 혹독한 불황에 빠져들었다. 윤 사장은 브라질에는 생소했던, 향기를 자동으로 뿜어주는 분사기를 파는 데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사업은 곤궁함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브라질 주요 언론에 소개된 것을 계기로 역전했다. 이제는 세계 최대 향수 시장인 브라질에서 향수를 직접 생산하는 데 이르렀다. 읽다보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싶다. 카리브해의 전력 사업가, 인도네시아의 의료기기 사업가, 베트남의 건설 사업가 등 해외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한 이들의 사연이 차례로 소개된다. 세계를 돌며 이들을 만난 저자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이산·離散)’는 인구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지구촌 어느 구석을 가든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채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성공한 이들 뒤에는 실패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고, 개발도상국에서 사업을 벌이는 이들이 양지만 걷지는 않았을 것이다. 숱한 역경을 이겨내고 해피 엔딩을 맞은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이야기가 유쾌하고 통쾌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8-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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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 서재]폐허를 바라보며

    “모든 폐허는 저마다 찬란한 번성과 비참한 쇠락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축소된 제국이다.” 신간 ‘세상이 버린 위대한 폐허 60’(리처드 하퍼 지음·예담아카이브)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기원전 3세기에 건설된 요르단의 도시 페트라에서 시작해, 신도시로 계획됐지만 부동산 거품이 빠지면서 유령 도시가 된 중국 내몽골의 캉바스까지 폐허 60곳의 사진과 설명이 담긴 책입니다. 고대 문명의 흔적은 한숨이 나오도록 아름답지만 근대 들어 전쟁으로 버려진 마을에는 차마 그런 생각이 안 드는군요. 폐허가 된 데에는 경제 몰락, 자연재해, 질병, 외침, 제국의 멸망, 종교적 이유나 전쟁, 핵발전소 사고 등 정말 다양한 요인이 있네요.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타투인 행성 촬영 세트장도 제작진이 그대로 남겨두고 떠나면서 튀니지의 사막에 폐허로 남았습니다. 폐허를 보면 인간사의 무상함이 떠오르는 한편 여러 상상의 날개가 펼쳐지지요. 오래된 것을 부수고 새것을 짓기 좋은 연말연시입니다. 폐허를 바라보며 또 다른 새해를 구상해보면 어떨까요.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8-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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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몽골서 승강기 파는 박사장님

    박호선 사장(58)은 대평원의 나라 몽골에서 승강기를 판다. 수도 울란바토르를 비롯해 몽골의 주요 도시에서 사용하는 승강기 3000여 대 중 절반 이상이 박 사장의 회사에서 설치한 제품이다. 그는 지독한 가난으로 초등학생 때부터 공장에서 일해야 했고, 이후에도 수십 가지 직업을 거쳤다. 1999년 몽골로 건너가 인테리어 사업을 벌였지만 2003년 완전히 망했다. 돈이 없어 영양실조로 쓰러졌다가 한인식당을 하는 교민이 보내준 설렁탕을 먹고 한 달 만에 기운을 차리기도 했다. 그러다 러시아인이 갖고 있던 한국 승강기의 몽골 판매권을 확보하며 기적적으로 재기했다.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사업으로 성공한 한국인 12명을 인터뷰한 책이다. 주인공들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늘 안주하기보다는 모험과 도전을 택했다. 윤용섭 사장(56)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 다니던 직장인이었다. 1995년 브라질 발령을 받고 거대한 시장에 매력을 느꼈다. 1997년 회사를 나와 오퍼상을 시작했지만 브라질은 이듬해 11월 혹독한 불황에 빠져들었다. 윤 사장은 브라질에는 생소했던, 향기를 자동으로 뿜어주는 분사기를 파는데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사업은 곤궁함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브라질 주요 언론에 소개된 것을 계기로 역전했다. 이제는 세계 최대 향수 시장인 브라질에서 향수를 직접 생산하는 데 이르렀다. 읽다보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싶다. 카리브해의 전력 사업가, 인도네시아의 의료기기 사업가, 베트남의 건설 사업가 등 해외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한 이들의 사연이 차례로 소개된다. 세계를 돌며 이들을 만난 저자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이산·離散)’는 인구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지구촌 어느 구석을 가든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채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성공한 이들 뒤에는 실패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고, 개발도상국에서 사업을 벌이는 이들이 양지만 걷지는 않았을 것이다. 숱한 역경을 이겨내고 해피 엔딩을 맞은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는 유쾌하고 통쾌하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 2018-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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