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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자동차 등록대수는 늘어도 교통사고 건수는 줄고 있다. 자동차 안전 기술이 좋아지고, 교통안전 시설과 정책이 선진화하며, 국민 안전 의식 수준이 높아진 덕분이다. 그런데 유독 65세 이상 고령자들이 내는 사고는 증가 추세다. 22일 새벽에는 강원 춘천에서 82세 남성이 몰던 차가 파란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던 3명을 덮쳐 숨지게 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운전자는 “신호등과 보행자들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지난해 65세 이상 운전자가 낸 사고는 3만4652건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5년간 전체 교통사고는 9.7% 줄었는데 고령자 사고는 29.7% 급증했다. 교통사고를 가장 많이 내는 연령대는 20세 이하로 면허 소지자 1만 명당 121건이다. 다음이 65세 이상으로 79건. 하지만 교통사고 사망자를 가장 많이 내는 연령대는 65세 이상이다. 고령 운전자가 일으킨 교통사고는 전체 사고의 16%인데 사망 사고는 24%였다(2021년 기준). ▷운전은 확인, 예측, 결정, 실행 과정을 거친다. ‘확인’ 단계에선 시력 청력 등 감각능력, ‘예측’과 ‘결정’엔 주의력과 정보 처리 등 인지능력, ‘실행’엔 운동능력이 필요하다. 이 중 운전에 가장 중요한 시력은 60대가 되면 30대의 80% 수준이 되고, 돌발상황 반응 시간은 1.4초로 젊은 운전자들의 2배로 늘어난다. 교통사고에 영향을 주는 질환은 백내장, 퇴행성 관절염 등 모두 23종인데 70세 전후로 발병률이 증가해 교통사고 위험도도 높아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 고령자 교통사고 사망자 비율이 월등히 높다며 주요 원인으로 허술한 면허 관리를 꼽았다. 현행 면허 갱신 주기는 65∼74세는 5년, 75세 이상은 3년이다. 80세 이상이 되면 교통사고 위험도가 60대의 2배가 되므로 갱신 주기를 단축할 필요가 있다. 영국은 70∼79세는 3년, 80세 이상은 1년이다. 일본은 71세 이상은 3년인데 75세부터는 인지 및 운전 기능 검사를 통과하고 2시간짜리 고령자 강습을 받아야 하며 교통법규 위반 이력이 있으면 실기시험도 봐야 한다. ▷많은 나라가 면허 자진 반납 제도를 운영 중이지만 반납률은 높지 않다. 나이 들수록 건강하고 독립적인 생활을 위해 이동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생계 활동을 하는 노년도 많다. OECD는 고령자의 이동권을 제한하면 행복도를 떨어뜨려 교통사고 못지않은 사회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공공의 안전을 위해 고령자를 도로에서 몰아내려 하지만 말고 이들이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도록 관련 시설을 정비하고, 안전장치 장착을 지원하며, 취약지역의 대체 교통수단도 늘려야 한다. 2040년이면 고령 운전면허 소지자가 1300만 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박민 KBS 신임 사장이 첫 공식 행보로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했다. “공영방송의 핵심 가치인 공정성을 훼손해 국민의 신뢰를 잃은 상황에 정중히 사과한다”며 배석한 간부들과 10초 넘게 고개를 숙였다. 진행자가 “KBS 임원진들의 사과 기자회견은 KBS 역사상 처음인 듯하다”며 의미 부여를 했지만 감동은 없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반성이 아니었다. 박 사장이 “불공정 편파 보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며 사례로 든 윤지오 출연, 검언유착 오보, 생태탕 집중 보도, 김만배 녹취록 인용 보도 모두 전임 사장 시절 있었던 일이다. 정권이 바뀌면 새 사장이 전임자 시절 과오를 반성하는 건 KBS의 관례인 듯하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임명된 이병순 사장은 취임사에서 “KBS는 지난 몇 년간 공정성과 중립성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며 “KBS 제작자와 진행자들은 공영방송의 공정성과 중립성의 중요성을 깊이 가슴에 되새겨야 한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양승동 사장은 보수 정부 시절 KBS 방송을 “10년의 실패”로 규정하고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좌우 가리지 않고 줄곧 어용 방송을 해왔다는 ‘자백’으로 들린다. 반성 후엔 모두 “새롭게 태어나겠다”고 했지만 사장들 스스로가 거듭나지 못하고 끝이 안 좋았던 전임자들의 전철을 밟았다. 1987년 민주화 성과로 개정된 한국방송공사법에 따라 KBS 이사회가 신설돼 사장의 임명 제청권을 행사하면서 집권당이 사장을 내려보내는 흑역사를 청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다. 1988년 취임한 서영훈 사장은 “KBS 최초의 민선 사장”이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KBS의 역대 ‘민선’ 사장 13명 가운데 법정 3년 임기를 채운 사람은 이명박 정부의 김인규 사장과 문 정부의 양 사장 둘뿐이다. 두 사람은 정권이 바뀌기 전 임기가 끝나는 덕을 봤다. 홍두표, 박권상 사장은 연임 후 정권이 교체되자 사퇴했고, 2명은 정권교체 전 전임자의 잔여임기만 마치고 물러났으며, 나머지는 초대 민선 사장을 포함해 대부분 권력과 갈등하다 사퇴하거나 해임됐다. 박민 사장도 문 정부에서 임명된 김의철 사장이 임기를 1년여 남겨두고 대규모 적자와 편향 방송 등을 이유로 해임된 후 임명된 경우다. 사장이 이 지경이니 회사가 거듭날 수 있겠나. KBS는 박민 사장의 표현대로 “미증유의 위기” “절체절명의 생존위기”로 빠져들고 있다. 연간 6000억∼7000억 원의 수신료를 보장받으면서도 시청점유율은 급감 중이고, “뉴스 신뢰도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예능과 드라마의 경쟁력 또한 저하됐다”는 평가와 함께 2017년과 2020년 정부의 재허가 심사에서 최저 기준에도 못 미치는 점수를 받았다. KBS를 보기 위해 시청자들이 지불할 의사가 있는 최고 금액(Willingness to Pay)은 계속 줄어들어 2019년엔 현행 수신료인 월 2500원도 안 되는 1667원까지 떨어졌고, 올 7월 수신료 분리징수제가 시행되자 수신료 수입이 두 달간 56억9000만 원 줄었다. ‘신뢰의 위기’를 이만큼 명료하게 보여주는 숫자도 없을 것이다. 박민 사장은 “공영방송의 주인인 국민의 회초리를 맞을 각오가 돼 있다”고 했는데 진짜 각오해야 한다. 그는 수신료 분리징수 시행 이후 첫 KBS 수장이다. 이제는 시청자들의 신뢰도가 수신료 수입으로 나타난다. 사장 바뀐 뒤로도 9시 뉴스가 ‘땡윤 뉴스’가 됐을 뿐 무보직 고연봉의 ‘기둥 뒤 직원들’은 그대로라면 수신료 납부 거부 사태가 일어나 사장부터 임기를 채우기 어려울 수 있다. 반대로 “(정치적) 외풍을 막고 파괴적 혁신을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면 “수신료가 아깝지 않다”는 시청자들의 신뢰가 KBS와 박민 사장을 ‘외풍’에서 지켜줄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한국인만큼 병원에 자주 가는 나라도 드물다. 미국인이 한 해 평균 3.4회, 일본 사람이 11.1회 병원을 찾는 동안 한국인은 15.7회 병원에 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5.9회)의 2.7배다. 사람들은 건강보험 덕에 진료비 부담이 크지 않아 병원을 자주 찾고, 병원은 의사 수가 적은 대신 박리다매식 3분 진료로 의료 수요를 감당한다. 이 정도면 의료 접근성이 좋다고 해야 할까. ▷의료 접근성을 평가하는 또 다른 지표로 ‘미충족 의료 경험률’이 있다. 최근 1년간 진료가 필요했지만 받지 못한 비율을 뜻하는데 한국의 경우 11.7%라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10명 중 1명 이상이 아파도 의사 얼굴을 못 봤다는 뜻이다. 비교 대상이 된 유럽연합(EU) 회원국 33개국 가운데 미충족 의료 경험률이 가장 낮은 오스트리아(0.4%)의 30배, 네덜란드(0.8%)의 15배 수준이다. 한국보다 높은 나라는 세르비아(11.8%), 에스토니아(18.9%), 알바니아(21.5%)뿐이다(정우진 연세대 보건대학원 교수 논문). ▷아파도 병원에 못 간 이유 중 82%는 진료비 부담보다는 ‘돌봄 부족’이나 ‘시간 제약’과 같은 비경제적 요인이었는데 이는 다른 연구에서도 일관되게 확인된 경향이다. 젊은 사람들은 ‘바빠서’ ‘내가 갈 수 있는 시간에 병원이 문을 닫아서’ ‘오래 기다리기 싫어서’ ‘참을 수 있는 정도여서’ 못 가거나 안 간다. 출산한 여성들은 ‘출산 후엔 아픈 게 당연한 줄 알고’ ‘아이를 대신 봐줄 사람이 없어서’ 못 간다. ‘무서워서’ ‘의사가 불친절해서’ 못 가는 사람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미충족 의료 경험률은 올라간다. 병원 갈 일은 많아지는데 소득은 줄어드는 이중적 부담을 안게 되는 것이다. ‘병원이 멀어서’ ‘거동이 불편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못 가는 경우도 많다. 요즘 대형병원들은 예약부터 진료까지 무인 단말기를 줄줄이 통과해야 해 디지털 장벽도 높다. 배우자가 없거나 자녀 없이 혼자 사는 경우 병원 가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강원의 미충족 경험률(22.9%)이 전남(4.9%)의 4.7배나 되는 등 지역마다 편차도 크다. ▷불필요한 ‘의료 쇼핑’도 문제지만 병원에 가야 할 사람이 못 가는 건 더 큰 문제다. 진료를 못 받는 대신 술과 담배로 스트레스를 달래거나, 작은 병을 크게 키우거나, 통증과 우울감에 삶의 질이 떨어지기 쉽다. 일과 육아에 바쁜 사람들을 위해 비대면 진료를 활성화하고, 병원 갈 엄두를 못 내는 고령자와 의료취약계층을 위해 돌봄과 의료 체계를 통합해야 한다. 누구나 아프면 언제든 진료를 받을 수 있어야 성공한 의료 보장 제도라 할 수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2006년 이후 17년 만에 의대를 증원한다는 소식에 여기저기서 의대를 신설해 달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정부가 기존의 소규모 의대를 증원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는데도 의대 설립을 요구하는 법안이 16개로 늘어났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지역구에 의대를 유치하려고 머리까지 밀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의대 설립은 공항 신설보다 더 신중해야 하는 일이다. 한국은 의사 숫자는 적어도 의대는 많다. 인구와 국토 면적을 감안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세계의학교육연맹은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적정 의대 수로 인구 200만∼250만 명당 1개 의대를 권고한다. 이 국제 기준에 따르면 한국의 적정 의대 수는 21∼26개인데 지금은 40개, 한의대를 포함하면 52개다. 의대 1개당 인구가 100만∼130만 명이다. 미국은 의대가 198개로 1개당 167만 명, 일본은 81개로 156만 명이다. 기대수명과 회피가능사망률을 포함해 보건의료 지표가 우리보다 나은 일본을 기준으로 하면 한국의 의대는 33개면 충분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의대가 너무 많다 보니 의대 정원은 너무 적어서 또 문제다. 적정 의대 입학정원은 80∼120명으로 다른 학문 분야보다 많은 편이다. 기초와 임상을 포함해 가르치는 과목이 많아 전임교원만 최소 110명이 필요하고 수련을 위해 부속병원도 있어야 한다. 미국 의대는 평균 입학정원이 153명, 일본은 116명이지만 한국은 77명밖에 안 된다. 박정희 전두환 정부(각각 11개)와 김영삼 정부(9개)가 대대적으로 의대를 신설했는데 1985년 이후 13년간 신설된 18개 의대가 한결같이 입학정원이 50명 미만인 미니대학이다. 교육적 고려보다 이곳저곳에 고루 선심 쓴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무상 전 한국의학교육평가원장은 “영세한 의대가 많다는 건 아주 비싼 비용으로 의사를 양성하거나, 부실한 교육을 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고비용 구조를 감당하기 위해 부속병원을 임상 실습보다는 돈벌이 수단으로 운영하고, 이만한 형편도 안 되는 의대는 정상적인 교육은 포기한 채 고시학원처럼 의사 면허시험 준비만 시킨다는 것이다. 관동의대는 부속병원도 없이 개교해 학생들을 이 병원 저 병원 떠돌게 하다가 다른 학원에 인수됐고, 서남의대는 설립자의 비리 문제까지 겹쳐 결국 폐교됐다. 무리한 의대 신설로 정치인들만 재미 보고 부실 교육으로 의대생들과 의료 수요자인 국민들만 피해를 본 셈이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의대 신설법안에 따라 의대 설치와 부속병원 설립에 드는 비용을 추산한 결과 8년간 지역에 따라 768억∼3666억 원이라는 수치가 나왔다. 국립 의대를 신설할 경우 교직원들 정년까지 월급을 감당하려면 그 이상의 세금 부담이 생겨 ‘혈세 의대’가 되기 쉽다. 설사 돈이 있어도 가르칠 교수가 없는 상황이다. 있던 교수들은 강의에 연구에 환자 진료까지 너무 힘들다며 나가서 개업하고, 젊은 의사들은 워라밸 찾아 개원하지 대학에 남으려 하지 않는다. 2000년대 초반엔 의사가 과다 배출되고 있다며 2006년 3058명이 될 때까지 줄였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2016년부터 의사가 부족하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에 의대 정원을 늘려도 10년 후엔 다시 줄여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가뜩이나 의대가 너무 많아서 문제인데 더 늘려 놓으면 나중에 정원을 줄이기도 힘들어진다. 의대 증원은 제대로 된 의사를 키워낼 수 있는지 교육 여건을 평가해 기존 의대 정원을 늘리는 쪽으로 가는 게 맞다. 공항은 고추라도 널 수 있지만 의대는 사람 생명이 달린 문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5년 전 가을 일본 오사카는 들떠 있었다. 2025년 세계박람회(엑스포) 개최지로 오사카가 결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새벽 시간임에도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해냈다”며 만세를 불렀다. 전후 일본의 부흥을 만방에 알렸던 1970년 오사카 엑스포의 영광을 재현하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엑스포 개최를 1년 6개월 남겨두고 특파원이 전하는 현지 분위기는 개최지 선정 때와는 다르다. ▷2025년 오사카·간사이 엑스포 개최 지역은 인공섬 유메시마다. 특파원들이 헬기를 타고 둘러본 유메시마는 ‘꿈의 섬’이란 뜻과 달리 아직 허허벌판이다. 엑스포 상징물은 지름 615m의 세계 최대 목조 건축물이 될 ‘링’인데 둥그런 윤곽을 드러냈을 뿐이다. 링 안쪽엔 ‘엑스포의 꽃’인 해외 각국의 전시장이 들어설 예정이나 텅 비어 있다. 현지 건설업체들이 원자재와 인건비가 급등했다며 건설 수주를 꺼린다. 엑스포 현장 건설비는 당초 예상의 2배인 2350억 엔(약 2조2920억 원)으로 불어났다. ▷오사카 현지에서는 지난해 초부터 “행사 개최 전 전시관 완공이 어려울 수 있다”고 호소했지만 중앙정부는 올여름에야 건설업체와 참가국들에 협조를 요청하는 등 느리게 움직였다. 이대로 가면 2820만 명이 방문해 18조 원의 경제효과를 내리라는 기대와 달리 역대 올림픽 중 가장 많이 쓰고 최악의 적자를 본 2021년 도쿄 올림픽처럼 되는 것 아니냐는 비관론까지 나온다. 코로나로 연기돼 무관중으로 치러진 도쿄 올림픽은 계획했던 예산의 2배인 13조5000억 원이 들어 최소 7조 원의 적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오사카 엑스포는 올림픽과는 다를 것이라는 낙관론도 여전하다. 엑스포 개최 기간은 6개월로 3주간 열리는 올림픽보다 길어 훨씬 많은 방문객이 찾는다. 가장 성공한 엑스포로 꼽히는 2010 상하이 엑스포는 7500만 명이 방문해 직접적 경제효과만 베이징 올림픽의 3.5배인 13조 원을 거두어 중국 국내총생산(GDP)이 2%포인트 높아졌다고 한다. 엑스포 이후 코로나 이전까지 연간 상하이 방문객은 엑스포 전보다 배로 늘어났고 외국인 투자도 15% 증가했다. ▷상하이 엑스포는 지역 행사가 아닌 국가 프로젝트였다. 중국 정부는 상하이 엑스포를 통해 중국 전체의 경제 성장을 이끌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개최지 선정 후 7년간 인프라에 집중 투자하며 전력을 쏟았다. 공교롭게도 2030 엑스포 유치에 도전한 부산은 상하이의 자매 도시다. 부산 엑스포를 침체 일로의 한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기회로 만들려면 ‘한국 엑스포’인 듯 온 국민이 마음을 모아야 할 것이다. 전후 폐허 속에서 첨단 도시로 성장한 부산이 엑스포를 개최해 평화 속에서 인류 번영을 이끄는 기술의 경연장이 되길 응원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은 mRNA(메신저 리보핵산) 백신 개발에 기여한 과학자들이 받는다는 소식을 들으며 의과학의 힘을 절감한다. 수상자인 커리코 커털린 독일 바이오엔테크 수석부사장과 드루 와이스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의대 교수는 mRNA 기술로 코로나 위기에서 인류를 구해내고 새로운 의료 시장까지 개척했다. 바이오엔테크와 화이자 모더나가 코로나 백신으로 이미 떼돈을 벌었는데 이제는 이 기술을 활용해 암 백신까지 개발하고 있다. 세계적인 의학 연구와 상용화는 의사들이 주도한다. 이른바 의과학자들이다. 노벨상 첫 수상자가 나온 1901년부터 올해까지 생리의학상 수상자 227명 가운데 올해 수상자인 와이스먼 교수를 포함해 절반이 넘는 119명이 의사 출신이다. 글로벌 10대 바이오기업 CTO(최고기술책임자)의 70%가 의과학자라고 한다. 한국은 상위 1%의 수재들이 의사가 되지만 의과학계에선 존재감이 없다. 당장 돈이 되고 성과를 낼 수 있는 임상의학만 하려 들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 추산에 따르면 국내 의과학자는 1300명으로 전체 활동 의사의 1.2% 수준이다. 미국에선 매년 의대 졸업생의 3.7%인 1700명이 의과학자의 길을 가는데 국내 40개 의대에서 같은 진로를 택하는 이는 30명에 불과하다. 학교당 1명도 안 되는 숫자다. 절대 숫자가 적으니 연구 성과가 초라하다. 한국연구재단은 2019년 노벨상에 근접한 국내 과학자 17명을 선정한 적이 있다. 생리의학 분야 학자로는 5명을 꼽았는데 이 중 의사는 방영주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가 유일했다. 2010∼2020년 주요국의 피인용 상위 1% 논문의 국가별 점유율을 집계한 결과 임상의학은 17위로 전국의 의대 정원 다 채우고 남은 학생들이 간다는 재료과학(3위), 화학(6위), 공학(12위)보다 순위가 낮았다. 미국 비영리 학술사이트 리서치닷컴이 전 세계 의과학자들의 연구 영향력과 수상 경력 등을 지수화한 ‘2023 최고의 의과학자’ 순위는 충격적이다. 국내 1위는 앞서 언급한 방 교수였는데 세계 순위는 3315위다. 일본의 1위는 면역학의 석학인 아키라 시즈오 오사카대 교수로 세계 순위는 7위다. 한국의 1위 학자보다 앞선 일본 학자가 63명이나 된다. 반도체 시장(4400억 달러·약 600조 원)의 4배 규모인 세계 바이오헬스 시장(1조7600억 달러)에서 한국 점유율이 2%밖에 안 되는 데는 이런 사정이 있는 것이다(2020년 기준). 우리도 임상의학 기초의학 이학 공학을 아우르는 의과학자를 매년 150명은 키워내야 한다는 얘기가 몇 년 전부터 나왔다. 그런데 의료계는 연구 중심 의대를 선정해 밀어 달라고 하고, KAIST 등은 새로운 의전원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논의가 멈춰 서 있는 상태다. 의전원을 설립하려면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해 의료계 반발이 더욱 크다. 의대는 임상경험이 풍부한 대신 시야가 좁고, KAIST는 새로운 접근이 가능하나 임상경험이 없다. 어느 쪽이 주도하든 의학과 공학을 융합해야 새로운 활로가 생긴다. 보건복지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이제는 결론을 내줘야 한다. 의과학의 길로 접어들었다가 임상 쪽으로 이탈하지 않도록 돈 걱정 없이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더 어렵고 더 중요한 일이다. 박세리 키즈, 김연아 키즈에 이어 박태환 키즈들이 한국 스포츠의 새 기록을 쓰는 모습을 보며 롤모델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롤모델을 꼭 국내에서만 찾아야 할까. mRNA 연구로 백신과 치료제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올해 노벨 의학상 수상자를 좇아 소수의 병을 고치기보다 인류의 건강을 지키고 바이오산업계의 삼성이 되겠다는 큰 뜻을 품은 젊은이들이 한국 의과학의 황금시대를 열어가길 기대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폭행이나 협박을 동원한 강제추행죄는 세 차례의 전환점이 되는 대법원 판례를 통해 처벌 범위를 넓혀왔다. ‘선 폭행 후 추행’이 아니라 폭행 자체가 추행이 되는 ‘기습추행’을 인정한 판례, 성욕을 채우려는 동기가 없어도 추행이 성립한다는 판례, 그리고 흉기로 위협하며 자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신체 접촉 없이도 강제추행이 가능하다는 판례다. 대법원이 21일 강제추행죄의 인정 범위를 확대하는 또 한 차례의 전환점이 될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강제추행죄로 기소된 A 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유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A 씨는 현역 군인이던 2014년 사촌 여동생 B 양을 침대에 쓰러뜨리고 신체를 만진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사건의 쟁점은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느냐는 것. 군사법원에서 열린 1심에선 징역 3년을 선고했지만 2심 재판부는 폭력의 정도가 저항을 어렵게 할 수준이 아니라며 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을 무죄로 판단했다. B 양이 저항하지 않았다는 점이 근거가 됐다. ▷하지만 대법원은 “강제추행에서 폭행 또는 협박에 의해 피해자의 항거가 곤란할 정도일 것을 요구하는 종례의 판례 법리를 폐기한다”며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폭행)하거나 공포심을 일으킬 정도의 해악을 고지(협박)하는 경우에도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고 밝혔다. 강제추행죄는 성적 자기결정권 보호가 목적이므로 원치 않는 성적 접촉을 당했다면 폭행·협박이 반드시 항거 곤란 수준일 필요는 없고, 피해자에게 저항을 요구하는 것은 형평과 정의에 맞지 않는다는 논리다. ▷이번에 대법원이 폐기한 ‘항거 곤란’이라는 법리가 등장했던 1983년은 폭행과 협박이 선행되지 않아도 강제추행이 성립한다는 전향적인 결정이 내려진 해이기도 하다. 당시 대법원은 피해자를 힘껏 껴안고 강제로 키스한 사건에서 ‘추행 그 자체로도 폭행이 될 수 있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이른바 기습추행의 경우 폭행의 정도는 상대방 의사에 반하는 정도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후 직장 상사가 여직원 어깨를 주무르고, 찜질방 수면실에서 자는 사람을 만지고, 남의 옷 위로 엉덩이를 만지는 행위는 모두 기습추행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강제추행에서 ‘강제’의 기준을 완화하면 단순추행이나 비동의 추행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묻는다.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따라 피고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법 규정을 확장 또는 유추 해석하는 것을 금지하는 대법원 판례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의 해석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이 더 안전하고 건강한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코로나가 한창일 때는 코로나로 고생하는 사람은 많아도 독감 유행은 없었다. 코로나 첫해의 경우 감기 환자는 전년도의 절반으로, 독감 환자는 2%로 뚝 떨어졌다. 코로나 무서워 마스크 쓰고 손 자주 씻은 결과 예방 효과를 본 것이다. 독감 백신 업체들이 재고가 쌓여 경영난을 호소하던 시절이다. 코로나 유행이 끝나자 이번에는 1년 내내 독감이 떨어지지 않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대개 독감 유행주의보는 늦가을에 발령돼 이듬해 5월이면 해제된다. 그런데 이례적인 여름 독감으로 지난해 9월 발령된 주의보가 해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질병관리청이 15일부로 새로운 주의보를 내렸다. 1년 넘게 주의보가 이어진 건 처음이다. 코로나 거리 두기로 호흡기 감염이 줄어들자 감염으로 얻는 자연 면역력까지 약해져 계절성 독감이 사계절 독감이 됐다. 코로나 3년간 쌓인 ‘면역 빚(immune debt)’이 무섭다. ▷감기 증세가 오면 이게 코로나인지 독감인지 헷갈린다. 코로나와 독감의 가장 큰 차이는 발열이다. 코로나는 열부터 나고 기침 인후통 근육통 구토와 설사가 뒤따른다. 독감은 기침과 근육통이 몸살처럼 나타나다 열이 나기 시작한다. 요즘 독감에 걸리면 코로나보다 더 아프고 오래간다는 이들이 많다. A형 바이러스에 감염됐다가 B형 바이러스에 또 감염되는 경우로 보인다. 올겨울엔 코로나, 독감, RSV(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까지 동시에 유행하는 ‘트리플데믹’이 닥칠 수 있다고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전망했다. ▷RSV는 대표적인 감기 바이러스다. 콧물 발열 기침 인후통 등 증상은 일반 감기와 비슷하지만 하부 호흡기 쪽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영유아나 고령자들의 경우 폐렴으로 악화될 수 있다. 대개는 대증요법으로 치료하는데 최근 미국에서는 세계 최초로 RSV 백신이 개발돼 식품의약국(FDA)의 사용 승인을 받았다. 미국 전문가 집단에서는 코로나, 독감, RSV 세 가지 백신을 동시에 맞아도 되는지에 관한 논의가 한창이다. 국내 전문가들은 RSV의 낮은 치명률을 감안하면 아직 데이터가 충분히 쌓이지 않은 새로운 백신까지 맞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트리플데믹이 닥쳐도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독감은 백신이 있고 치료제인 타미플루도 1000만 명분 넘게 비축돼 있다. 코로나 위험도는 이미 독감 수준으로 낮아졌다. 코로나 이전 11년간 발생한 독감 환자 수는 한 해 21만∼303만 명으로 변동이 크다. 전체 환자의 65%는 20세 미만이지만 사망자의 80%는 60세 이상이다. 나이 들면 면역력도 늙는다. 고령자들은 독감과 코로나 백신을 꼭 맞는 것이 좋다. 두 백신은 동시에 맞아도 된다는 것이 국내외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교권 회복 대책을 고민 중인 이주호 교육부 장관이 교원평가 폐지 카드를 꺼냈다. 교권을 위해서라면 교원평가 유예나 폐지까지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전국초등교사노조는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15일 예정된 장관과 교사들 간 대화에서 어떻게 방향이 잡힐지 모르지만 교원평가를 폐지하자는 건 너무 나간 얘기다. 초중고교 교사들은 두 가지 평가를 받는다. 하나는 학교에서 하는 업적평가로 이에 따라 승진이 결정된다. 다른 하나는 학생과 학부모가 하는 교원능력개발평가, 즉 이번에 폐지 얘기가 나오는 교원평가다. 교원평가는 공교육 위기감이 고조되던 김대중 정부 시절 ‘자질 부족 교사들로부터 학생 권익을 보호하고 교사 전문성을 향상시키려면 평가를 강화해야 한다’는 OECD 평가단의 권고로 추진하기 시작해 노무현 정부의 시범 운영을 거쳐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10년 전면 시행했다. 교사의 수업과 학생 지도 역량을 5점 척도와 서술형으로 평가하고 평가 결과 최상위권은 1년간 특별연수 인센티브를, 2.5점 미만이면 최소 60시간 최장 6개월간 ‘능력향상연수’라는 페널티를 받는다. 교원단체는 “전문성 없는 평가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 “교원평가는 교권 추락의 원인과 맞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서술형 평가란에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써내는 경우가 있어 문제지만 제도 자체를 교권 하락의 원인으로 몰아가는 건 무리가 있다. 교원평가가 제대로 이뤄지던 시기의 연구에 따르면 낙제점을 받아 페널티 연수를 받은 교사의 95%는 다음번 평가에서 보통 이상의 점수를 받았다. 연수가 효과적이어서가 아니라 학생들 보기 부끄러워 분발했기 때문이다. 교사가 학생의 관점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부족한 점을 개선해 가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교사 권위가 추락할까 올라갈까. 전교조 출신인 김용서 교사노조위원장은 올 2월 언론 인터뷰에서 “전교조 조합원이 제일 많이 줄었던 두 사건 중 하나가 교원평가 도입에 반대 투쟁을 하던 때”라고 했다. “학부모나 일반 국민이 ‘교사들이 평가도 안 받는다’고 인식하면서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노조 입지가 약화됐다”는 것이다. 교원평가는 폐지 운운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유명무실화한 상태다. 문재인 정부가 코로나를 핑계로 2020년 평가를 건너뛰었고, 2021년부터는 평가를 축소하고 평가 결과 활용법도 시도교육청에 떠넘겨 이제는 페널티 연수를 받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교사 권위를 세우려면 교원평가를 폐지할 게 아니라 제대로 평가하고, 연수 프로그램 질도 높이고, 반복해서 낙제점을 받는 교사는 걸러내야 한다. 사실 교사의 성과를 가늠하는 핵심 지표는 학생의 학업 성취도다. 학생이 교사를 평가하는 제도를 두지 않는 나라에서도 교사의 책무성을 담보하기 위해 학교별 학업 성취도와 입시 성적은 공개한다. 우리만 좌파 교육감들이 장기 집권하면서 시험을 하나둘 없앴고 그 결과 기초학력만 떨어진 게 아니라 교사의 권위도 함께 추락했다. 학생의 학력이라는 최소한의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 교사와 학교를 누가 신뢰하겠나. 지금은 온통 갑질하는 학부모 얘기뿐이지만 중요한 교육 정책 결정 과정에서 학부모는 소외돼 왔다. 교원평가에 대해 학부모들은 “교사들의 수업과 학급 운영에 관해 진솔하게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며 88%가 찬성이다. 왜 10년 넘게 운영해 온 제도 폐지를 검토하면서 교사들하고만 얘기하고 학부모 의견은 듣지 않나. 학부모들이 공감하지 않는 정책으로 교사들의 권위를 세우기는 어렵다. 교사 없인 학교도 교육도 없듯 학생과 학부모 없이는 학교도 교육도 있을 수 없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발암물질의 피해를 입증하기는 어렵다. 급성 독성물질과 달리 장기간 지속적으로 노출돼야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같은 증상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 회사를 상대로 낸 1심 소송에서 패소한 원인도 흡연과 암 발병 간 인과성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의 폐암 유발 가능성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발생한 지 12년 만이다. ▷환경부는 5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위원회를 열어 가습기 살균제 성분 물질 중 하나인 PHMG에 노출된 후 폐암으로 숨진 1명의 피해를 인정하기로 의결했다. 피해자는 30대 남성으로 비흡연자였다. 이번 결정은 고려대 안산병원 가습기 살균제 보건센터의 독성실험 결과를 근거로 내려졌는데, PHMG에 쥐의 기도를 노출시켰더니 40주 지나자 폐에 악성 종양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내용이다. 피해자 유족은 약 1억1700만 원의 특별유족조위금과 장의비를 받는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암 진단자는 206명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인정받는 질환은 몇 가지 안 된다. 처음엔 폐섬유증만 인정받았고, 천식과 태아 피해는 참사 발생 6년 후인 2017년에야 피해 질환에 포함됐다. 정부는 2020년 피해 질환을 특정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인정하겠다고 했지만 인과성 입증의 장벽이 높다. 독성물질의 인체 시험은 금지돼 있어 동물 실험으로 인과성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과 동물은 생리 구조가 달라 동물에게 나타나지 않는 증상이 사람에게 나타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이번 결정으로 폐암 진단자 전원이 구제받는 것은 아니다. 다른 요인으로 발병했을 수도 있으니 개별적으로 구제 여부를 검토한다는 것이다. 고령자와 흡연자의 경우 구제가 어려울 수 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피해자 개개인의 인과성을 따지기보다 피해자 전체를 정밀 진단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에 대해서는 인과관계를 인정하고 보상했어야 한다고 아쉬워한다. 중증 피해자들은 이미 사망한 상태다. 신고된 사망자만 1700명이 넘는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에 따르면 신고되지 않은 사례까지 포함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95만 명, 사망자는 2만 명이 넘는다. 업체는 치명적인 제품을 인체 무해성을 강조하며 내놓았고, 정부는 ‘세계 최초의 창의적 제품’이라며 KC마크까지 달아줬다. 국민을 보호하기는커녕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환경 참사의 원인을 제공한 정부가 가해 기업들에서 거둬들여 조성한 피해구제기금을 나눠주는 일에도 속도를 못 내고 있다. 참사 12년이 지났지만 피해 구제 신청자는 7862명, 이 중 2686명이 아직 구제를 받지 못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서울역 고가를 재활용한 공중 산책로 ‘서울로 7017’이 서울역 일대를 국가상징공간으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철거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리라던 기대와 달리 찾는 사람도 없고 막대한 관리비로 세금만 축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산책로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시정 철학인 ‘보행 친화적 도시 재생’을 상징하는 프로젝트다. 철거가 최선인지와는 별개로 647억 원을 들인 역대 시장의 대표 사업이 완공된 지 6년 만에 애물단지가 된 내막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서울역 고가도로는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주도하고 건축가 김수근이 구상한 ‘서울 입체도시화 프로젝트’로 1970년 완공돼 2006년 안전진단에서 철거 대상 판정을 받았다. 전임 시장들처럼 박 전 시장도 “빠른 시간 안에 철거”하자는 쪽이었으나 2014년 재선에 도전하면서 돌연 입장을 바꿔 미국 뉴욕의 명물인 ‘하이라인’처럼 재활용하겠다고 공약한 뒤 당선 직후 하이라인까지 날아가 사업 개시를 선언했다. “대권까지 내다보려면 청계천 복원 같은 한 방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시장의 일방적인 사업 추진과 정치적 야심에 관한 의혹에도 반대 여론이 사납지 않았던 건 하이라인의 이름값 덕분이다. 하이라인은 맨해튼을 관통해 지상 9m 높이에 건설된 열차 선로를 공원으로 개조한 프로젝트다. 하이라인이 뉴욕의 관광명소로 뜨자 세계 180여 곳에서 유행처럼 이를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는데 서울시는 이름부터 ‘서울역 하이라인’으로 정하고 노골적인 베끼기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미지만 그럴듯하게 모방해서는 성공하기 어려운 법이다. 하이라인은 폐철로가 보존할 만한 산업유산인지, 보존한다면 어떻게 재활용할지 치열한 공론화 과정부터 거쳤지만 서울로는 이 과정을 생략한 채 결과만 따라 하느라 맥락의 차이를 놓쳐버렸다. 하이라인은 도심 빌딩 사이를 관통한다. 고층 건물이 그늘을 만들어주고 산책로를 걷다 연결된 주거지나 건물로 내려갈 수 있으니 이용자가 많다. 반면 서울역 고가는 동서를 연결하는 1024m의 거대한 육교다. 일단 올라서면 반대쪽으로 내려가거나 오던 길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겨울엔 추워서 못 가고, 여름엔 그늘 하나 없이 콘크리트 복사열까지 더해지니 더워서 못 다닌다. 하이라인은 2009년 1차 완공까지 10년 걸렸는데 서울로 7017은 3년도 안 걸렸다. 신축보다 어려운 게 재생임에도 공개 현상공모로 널리 아이디어를 구하는 대신 국내외 작가 7명을 지명해 졸속으로 진행했다. 콘크리트 화분 안에 수목을 심은 뒤 퇴계로에서 중림동까지 가나다순으로 배열한 최종 결과물에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긴 화분’이라며 황당해한다. 네덜란드 출신인 작가의 변이 이렇다. “박 시장이 오래 기다릴 수 없다고 여러 차례 당부해 10년 걸릴 프로젝트를 서둘러 하느라 놓친 부분이 꽤 있다.” 도시 개발에서 성공한 해외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행위를 학계에서는 정책 이동(policy mobility)이라고 한다. 정책 이동의 전제는 완전한 모방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이라인 설계자도 “하이라인을 성공시킨 맨해튼이라는 맥락은 쉽게 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도시는 자신의 장점을 인식하고 독창적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옛것이면 가치 불문하고 다시 살려 써야 한다는 강박증적 재생 이데올로기’(배정한 서울대 교수)에 빠져 쫓기듯 겉만 엉성하게 베낀 결과 스케일만 다를 뿐 ‘물 새는 거북선’과 ‘밥 못 짓는 거대 가마솥’ 같은 애물단지가 돼 버렸다. 해외 유명 랜드마크를 돌면서 비슷한 사업을 발표하느라 바쁜 오세훈 시장이 반면교사 삼을 만한 도시 재개발의 실패 사례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예부터 남의 자식 고운 데 없고 내 자식 미운 데 없다고 했다. 부모 눈에 제 자식은 다 ‘공주님’이고 ‘왕자님’이다. 그런데 한 학부모가 초등학생 자녀를 “왕의 DNA를 가진 아이”라며 담임교사에게 특별대우를 요구한 사실이 드러났다. 사석에서도 아니고 공식적으로 ‘왕자 대우’를 요구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학부모가 5급 교육공무원이라니 더 충격적이다. ▷대전시교육청의 A 사무관은 초3 자녀의 담임교사들에게 ‘갑질’한 의혹이 제기돼 어제 직위 해제됐다. 교사노조에 따르면 A 사무관은 담임이 자녀를 학대한 일이 없는데도 아동학대로 신고했다. 새로 온 담임에게는 자녀를 대할 때 주의사항 9가지를 교육공무원 인증이 필요한 공직자 메일로 보냈다. “왕의 DNA를 가진 아이이므로 왕자에게 말하듯 듣기 좋게 돌려 말해도 다 알아 듣는다” “고개 숙이는 인사를 강요하지 않는다” “또래의 갈등이 생겼을 때 철저히 편들어 달라”는 내용들이다. ▷A 사무관의 독특한 ‘교육관’은 약 없이도 정신질환을 치료한다는 모 연구소의 육아지침과 비슷하다. 그의 아이는 경계성 지능장애를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9가지 요구사항에는 ‘극우뇌’라는 표현도 나온다. 이 연구소는 자폐나 ADHD 같은 병명 대신 우뇌가 극도로 발달했다는 뜻의 ‘극우뇌인’이라는 용어를 쓰고 이 환자들은 왕의 DNA를 갖고 태어났다고 본다. 극우뇌인은 천재이고 분노조절이 어려우나 상담만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치료법에는 ‘왕자나 공주라 불러 우월한 존재임을 확인시켜주기’도 있다. 의학계에선 약물치료가 필요한 환자를 ‘천재적인 극우뇌인’으로 호도하며 치료를 방해하는 위험한 주장이라고 본다. ▷내 아이는 진짜 유전자가 다른 왕자라 생각했을까. 아니면 대인관계에 어려움이 있지만 그건 천재라서 그렇다고 믿고 싶었던 걸까. 교사노조에 따르면 A 사무관은 자녀의 특별대우를 요구하며 “나는 담임 교체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압박하고, 학급 내 다른 학생들의 행동까지 매일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사실이라면 교권을 보호해야 할 공무원이 직위를 이용해 교권을 침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교사들이 학부모와 상담할 때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 학생의 단점이다. “아이가 쉽게 포기하는 성향이 있다”고 하면 “끈기 있는 영재한테 무슨 소리냐”고 반발하고, “문해력이 떨어지니 독서 습관을 길러주라”고 조언하면 “집에선 활자중독일 정도로 책을 좋아한다”며 적개심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제 자식 못난 꼴 못 보는 맹목이 아이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 ‘교육은 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교육은 학부모 수준도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요즘 대입 수험생들에게 재수는 필수다. 고교를 ‘4년제’라 하고 사수, 오수생도 많아 삼수생부터는 ‘장수생’으로 묶어 부른다. 대학 1학기만 다니고 수능을 준비하는 ‘반수생’, 군대에서 수능 공부하는 ‘군수생’도 있다. 수능 지원자 중 20%대를 차지하던 n수생 비중이 올해는 34.1%로 28년 만에 최고치를 찍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종로학원 추산에 따르면 11월 16일 치러지는 수능 지원자 49만1700명 중 재학생은 역대 최저인 32만4200명이고, 졸업생은 16만7500명으로 1996학년도(37.3%) 이후 최고 비율이다. 지난해 n수생보다 2만5000명 늘었다. 의대 쏠림 현상에 첨단 학과 신설 및 증원, 킬러 문항 빠진 ‘물수능’ 기대감 때문이다. 통합 수능으로 대학 간판 보고 문과에 갔다 실망한 이과생들, 이과생들에게 밀려난 문과생들도 대거 n수 대열에 합류했다. ▷수능 성적만 보는 정시는 n수생 합격자 비중이 더 높다. 최근 4년간 SKY 3개 대학 정시 합격자 중 n수생이 61.2%였다. 이과생들은 ‘의치한약수’에 들어가려고, 문과생들은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건동홍숙, 국숭세단, 광명상가…’의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n수를 감수한다. 의대는 더 심하다. 최근 4년간 의대 정시 합격자 가운데 78%가 n수생이다. 합격자의 92%가 n수생인 의대도 있다. 요즘 의대 가려면 고교 3년은 내신에만 매달리고, 재수로 수능 성적 끌어올려 수시 최저기준을 맞추거나 아예 수능으로 진학하는 게 공식이 됐다. ▷일타강사들의 인강으로 재수의 문턱이 낮아졌다지만 대부분 ‘재종’(재수종합학원)을 다니고 드물게는 ‘독재’(독학재수학원)를 찾는다. 통학형 재종은 월 200만 원, 기숙형 재종은 월 400만 원이다. 9개월간 1800만∼3600만 원이 드는 셈이다. 급식비, 교재비, 모의고사비, 특강비는 별도다. 자녀가 재수하겠다고 하면 부모들은 “징역 9개월에 벌금 4000만 원 선고받는 심정”이 된다고 한다. 올해 n수생 16만7500명이 1인당 1800만 원씩 들였다면 총 3조 원이 넘는다. 사회 진출이 늦어지는 점까지 감안하면 n수의 사회경제적 비용은 훨씬 늘어나게 된다. ▷n수생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학생들은 “외환위기가 오든 코로나가 오든 흔들림 없는 안정된 삶”을 위해 n수를 한다. 의사면 제일 좋고, 비정규직 아닌 정규직, 중소기업 아닌 대기업이라야 한다. 이를 위해 2년이고 3년이고 책상에 붙어 앉아 똑같은 문제를 풀면서 허리와 목 디스크, 섭식장애와 만성소화불량에 시달린다. 실력이 느는 공부가 아니라 학벌을 위한 공부다. 개인으로도 사회 전체로도 긍정적 가치를 찾기 힘든 사회적 병리 현상이 n수 열풍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초등교사의 죽음을 계기로 교사들이 쏟아내는 ‘괴물 학부모’ 경험담을 들으며 “학부모와 교사는 천적”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교육사회학의 고전인 ‘가르침의 사회학’(윌러드 월러)에 나오는 구절로 교사와 학부모는 원래 교육관이 달라 적대감으로 경쟁하는 관계라는 뜻이다. 옛날엔 교사를 어려워하는 학부모는 있어도 학부모 무서워하는 교사는 드물었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학부모가 교육기본법상 자녀 교육의 권리와 책임을 지닌 당사자 지위에 오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학부모의 참여를 독려하는 정책에 따라 교사가 독점하던 교육 권한을 나눠 갖게 되자 서로 다른 교육 철학으로 대립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교육학자들에 따르면 교사는 과정 중심적이고 학부모는 결과 중심적이다. 학부모는 ‘내 아이’가 우선이고 교사는 ‘우리 반’이 중요하다. 학부모는 예외적 대우를 기대하지만 교사는 공평해야 한다. 학부모가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면 안 된다”며 짝꿍 교체를 요구하면 교사는 “모든 친구들과 잘 지내야 한다”며 설득해야 하는 존재다. 교육 정책은 학부모와 교사의 ‘수평적 파트너십’을 지향하지만 현실에선 서로 “내가 을”이라며 싸운다. 교육 수준에 권리의식까지 높아진 학부모들은 “선생 알기를 우습게 안다”는 것이 교사들 주장이다. “수업은 이렇게, 시험은 저렇게” 하고 학교 일에 간섭하면서 밤낮 주말 가리지 않고 문자 하고 전화하며 집에서 챙길 일까지 떠넘긴다는 것이다. 학부모들의 피해의식도 만만치 않다. 시험 감독, 바자회, 교통안전 지도 등 필요할 때는 ‘도우미’ 부르듯 하고는 ‘부르기 전엔 오지 말라’고 선을 긋는단다. “준비물을 넉넉히 챙겨 보냈더니 ‘한 개라고 하면 한 개만 보내라’는 알림장 답글을 받았다”며 학교의 권위주의 문화가 여전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교사와 학부모 간 소통의 어려움도 불신을 키우는 요인이다. 학생의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집에 TV나 에어컨이 있는지까지 시시콜콜 묻던 가정환경 조사서와 일기 검사가 사라져 교사로서는 학생 사정을 짐작하기 어렵다. 김영란법으로 거리감은 더해졌다. 교사를 만날 기회가 없는 학부모들은 자녀가 자기 위주로 들려주는 말, 알림장의 요약된 언어, 맘카페의 ‘카더라’ 정보에 의지해 별일 아닌 일을 큰일로 오해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껄끄러운 관계를 방치하다 다다른 곳이 전쟁터 같은 학교다. 교사는 악성 민원에 시달리다 보험 들고, 병가 내고, 일찍 명퇴한다. 학부모는 아이 가방에 녹음기를 넣어 보낸다. 교사의 자질과 능력을 ‘신뢰한다’는 학부모가 2001년 27.6%에서 2021년 21.8%로 하락했다. 미국의 경우 교사에 대한 신뢰도가 63%이고 일본은 학부모의 학교교육 만족도가 꾸준히 오르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뼈아픈 현실이다(한국교육개발원). 정부는 뒤늦게 교사들의 소송을 지원하고, 학부모 면담실에 감시카메라 달고, 민원처리 매뉴얼을 만들겠다고 한다. 이는 맨몸으로 당하던 교사들에게 방패를 쥐여줄 뿐 ‘천적’들의 전쟁을 막지는 못한다. 교사와 학부모가 오랫동안 불화해온 이유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식 학교에 맡겨놓은 학부모들은 자문해 보자. 학부모의 교육 참여를 명분으로 공교육이야 어찌 되든 내 자녀 민원 처리에만 몰두해온 것 아닌가. 교사들도 분노를 가라앉히고 돌아봤으면 한다. 교권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는 신성주의에 빠져 개방과 자율이라는 시대 흐름을 외면하다 불신을 자초한 것은 아닐까. 왜 아이 교육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도 싸우는 적이 됐는지 반성하고 평화로운 협력자가 되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녹음기와 감시카메라 없이 교사와 학부모가 마주할 수 없다면 그 교육은 시작도 전에 실패한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동물은 이유 없이 죽이지 않는다. 인간의 살인에도 대개는 이유가 있다. 돈 때문에, 사랑에 눈이 멀어, 복수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현대 사회 들어 이득 없는 ‘쾌락으로서의 살인’ ‘살인을 위한 살인’ ‘동기 없는 살인’이 등장했다는 것이 살인의 역사를 탐구해 온 영국 문명비평가 콜린 윌슨의 진단이다. 서울 신림동 묻지 마 살인도 지극히 현대적인 살인이다. ▷신림동 사건의 피의자 조모 씨(33)는 21일 오후 2시경 신림역 일대를 돌아다니며 남자 4명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이 중 20대 남성이 숨졌는데 이 남성이 쓰러진 후로도 10차례 넘게 찔렀다고 한다. 피해자들은 조 씨와 모르는 사이였고, 범행 동기가 없으며, 수법이 잔인하다는 점 모두 묻지 마 범죄의 전형이다. 조 씨는 “분노에 차” 범행을 저질렀는데 분노를 표출할 장소로 “사람이 많은 곳”을 택한 점도 묻지 마 범죄의 특징으로 꼽힌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묻지 마 범죄의 유형은 세 가지다. 첫째 사회에 불만이 있거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현실 불만형이다. 주로 여름에 거리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범행 후에도 현장을 떠나지 않는다. 둘째 정신과 치료 경험이 있고 대인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정신장애형이다. 셋째 만성 분노형은 다른 사람의 의도를 오해해서, 분풀이를 위해, 재미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다. 세 유형 모두 부모와 불화하고, 경미한 폭행 사건 같은 전조를 보이며, 압도적 다수가 남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5월 과외 중개 앱에서 만난 또래 여성을 살해한 정유정 사건은 묻지 마 살인이면서도 범죄의 전형에서 벗어나 있다. 피해자와 일면식도 없고, 흉기로 110회 넘게 찌르는 잔혹성을 보였으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점은 다른 묻지 마 범죄자와 같지만, 여성이고 전과가 없으며 ‘광장’이 아니라 피해자의 집이라는 ‘밀실’을 범행 장소로 고른 점은 일반적 유형과 거리가 멀다. 전과자의 재범 방지 등 기존의 묻지 마 범죄 분석에 근거한 예방 정책은 한계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동기 없는 살인이 대두된 배경에 대해 전문가들은 개개인이 귀한 존재라는 자각이 생겨난 동시에 지나친 경쟁과 양극화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분노감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전통 가족제도 해체 후 헐거워진 인간관계도 분노의 압력을 줄여주지 못하고 있다. 조 씨는 “나는 불행하게 사는데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 정유정은 “혼자 죽기 억울했다”고 했다. 그게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국적 불문 동기 없는 살인자들의 공통된 범행 동기다. 윌슨이 말한 ‘문명의 과부하에 짓눌린 인간이 내지르는 비명’에 귀 기울여 해법을 찾아야겠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사립 민사고→자립형사립 민사고→자율형사립 민사고→대안학교 민사고. 1996년 개교한 민족사관고의 설립 유형 변천사는 ‘백년대계’ 교육이 정권에 따라 변화무쌍했음을 보여준다. 지난 정부의 자사고 폐지 정책으로 일반고가 되거나 폐교될 뻔했던 ‘원조 자사고’ 민사고가 대안학교 전환을 추진 중이다. 현 정부가 자사고를 유지하기로 했지만 정책이 언제 또 바뀔지 알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민사고는 정치에 휘둘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학교를 운영하기로는 대안학교가 낫다고 판단한 듯하다. 민사고가 추진 중인 대안학교는 학력이 인정되는 인가형이다. 수업시수의 절반까지 교육과정을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고 교과서를 자체 개발하는 것도 가능하다. 자사고는 영재학교나 과학고와 달리 일반고와 함께 후기에 신입생을 선발하고 지역인재를 20% 뽑아야 하는 데 비해 대안학교는 학생 선발 시기와 전형이 자유로운 장점도 있다. ▷민사고는 국내에선 SKY와 아이비리그 많이 보내는 학교로 유명하지만 해외에선 한국형 영재교육 모델로 주목받는 학교다. ‘민족정신으로 무장한 세계적 지도자 양성’이라는 교육 목표에 따라 명심보감을 외우고 전 과목 영어로 수업을 듣는다. 계열 구분 없이 관심사에 따라 수업을 골라 듣는 민사고의 수업 방식은 문·이과 통합과 고교학점제로 전체 고교가 채택하는 표준이 됐다. 융합 독서에서 시작해 융합 상상력을 거쳐 융합 프로젝트로 이어지는 3단계 융합 교육은 인공지능(AI) 시대 인재 교육 방식으로 평가받는다. ▷민사고의 교육 실험은 자사고와 외고를 없애는 지난 정부의 ‘제2 평준화’ 정책으로 중단될 뻔했다. 학교 서열화와 과열 입시경쟁의 주범으로 몰린 것이다. 주요 선진국은 다양한 학교를 운영하며 학교 선택권을 강화하고 학교 간 경쟁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미국의 차터스쿨, 스웨덴 프리스쿨, 영국 아카데미스쿨이 그 사례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평준화주의자들이 세계적 추세에 역행하며 새로운 시도에 계속 제동을 건다. 한 해 100만 명이 태어나던 산업화 시대의 ‘붕어빵’ 교육을 25만 명이 태어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고수하자는 것인가. ▷민사고 캠퍼스에 맞춘 목발 설계, 횡성지역 대기질 연구를 위한 로켓 제작 및 측정, 수학적 수익 모델을 통한 주식시장 분석, 분자 미식학을 이용한 식습관 개선 방법…. 민사고 학생들의 융합 과제 주제들이다. 정답 찾기에서 벗어나 질문하는 능력을 키우던 명문고가 정규학교가 아닌 대안학교가 되려 한다. 지방 소멸을 걱정하면서 지방에 명문고 하나 못 키워내는 교육 풍토가 안타깝다. 대안학교 시행령을 바꿔 규제를 하려 들면 그때 민사고는 또 어디로 가야 할까.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지금, 여기는 천문학과 지질학으로 정의한다. ‘여기’는 은하계 속 태양계 주위를 도는 지구이고, ‘지금’은 공룡이 멸종된 신생대(代·era) 중에서―현생 인류가 진화한 4기(紀·period)의―인류 문명이 시작된 홀로세(世·epoch)다. 그런데 1만1000년 전 시작된 홀로세는 끝났고 지금은 ‘인류세’라는 지질학 논의가 한창이다. 인간의 개발 활동이 지구 환경을 바꿔 놓은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세의 화석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후보 지역도 선정됐다.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있는 크로퍼드 호수다. ▷인류세는 2000년 오존층 파괴 메커니즘 연구로 노벨 화학상을 받은 파울 크뤼천이 제안한 개념이다. 이후 과학자들은 인류세 시작점을 1950년대로 정하는 데 합의했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고 핵무기 실험이 시작돼 환경 파괴가 본격화한 시기다. 인류세를 새로운 지질시대로 정의하려면 기준이 될 장소가 있어야 한다. 최근 연구자들이 전 세계 9개 후보 지역 중 선택한 곳이 크로퍼드 호수다. 작지만 수심이 깊어 1000년간의 인류 활동 퇴적물이 벌레나 물살의 방해를 받지 않고 쌓여 있는 곳이다. ▷중생대 쥐라기와 백악기의 대표 화석인 공룡처럼 인류세의 시작점을 알리는 대표 물질도 정해야 한다. 그 영향력이 전 지구적이고 측정 가능해야 하는데 후보군에는 핵무기 개발로 인한 방사성 원소, 화석연료의 흔적, 플라스틱과 콘크리트 같은 ‘기술 화석’, 그리고 닭 뼈가 있다. 한 해 인류가 먹어 치우는 닭은 700억 마리. 세상에서 가장 흔한 조류가 닭이고 세계 곳곳의 쓰레기 매립지에서 닭 뼈가 화석화되고 있다. ▷인류세 인정 여부는 국제지질과학연맹 산하 국제층서위원회에서 세 차례 투표를 거쳐 내년 8월 부산서 열리는 국제지질학 총회에서 최종 결정된다. 전망은 엇갈린다. 인류세를 주장하는 이들은 인간이 만든 인공물의 무게가 1조 t으로 전체 생명체 무게보다 무거워 지질학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반대쪽에선 지구는 인간이 영향을 주기엔 너무나 거대한 존재이고, 인류세는 기후위기를 강조하는 정치적 수사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과학의 역사는 인간을 주변화하는 역사였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믿음은 지동설로 깨졌고, 지질학의 발달로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인간의 역사는 왜소하기 짝이 없으며, 진화론으로 인간은 우월한 종이 아니라 ‘생명의 계통수’의 작은 가지에 불과함이 드러났다. 인류세 논쟁에서는 반대로 인간이 지구 환경을 바꿔 놓은 중심이다. 주인공이지만 난개발로 지구적 위기를 초래한 악역이다. 인류세가 인정되면 인류는 45억 년 지구 역사에서 당대를 스스로 정의하는 최초의 생명체가 된다. 말 그대로 신기원을 여는 일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전기요금에 합쳐 내던 공영방송 수신료를 따로 낼 수 있게 됐다. 1994년 수신료 전기료 통합징수제가 시행된 지 30년 만의 변화다. KBS는 비상경영 체제 돌입을 선포했다. “분골쇄신하겠다”는 대국민 호소문도 냈다. 거듭되는 편파 방송, 방만 경영 비판에 꿈쩍도 않던 KBS가 분리 징수제 덕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가 방송법 시행령을 바꿔 분리 징수제를 시행하자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의원들은 공영방송 발전과 징수의 효율을 명분으로 통합 징수를 못 박은 방송법 개정안을 내놨다. KBS도 시행령으로 수신료 징수 방식을 바꾸는 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한마디로 통합 징수제 시절로 돌아가자는 주장인데 동의할 수 없다. TV 수신료는 방송법에 따라 TV가 있으면 KBS를 보든 안 보든 내야 하는 돈이다. 공영방송은 공공재이므로 누구나 공평하게 부담해야 한다는 취지다. 그런데 방송법에는 시청자의 수신료 낼 의무만 있지 수신료가 허투루 쓰일 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권한은 없다. 불량 방송과 도덕적 해이로부터 시청자를 보호하기는커녕 수신료 안 내면 전기 끊겠다고 협박하는 야만적 제도가 통합 징수제다. KBS와 야당은 공영방송이 공적 책무를 다하려면 통합 징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통합 징수제 시절 KBS를 떠올려 보라. 안정적 재원으로 공영방송다운 방송을 해왔다고 인정해줄 시청자가 몇이나 될까. KBS는 2017년과 2020년 정부의 재허가 최저 기준 점수에 미달돼 간신히 조건부 재허가를 받았다. 당시 심사평을 몇 줄 옮겨본다. “한국 방송 문화의 표준을 제시해야 함에도 일반적 방송에 대한 기대에도 못 미치는 성과” “뉴스 공정성과 신뢰도가 지속적으로 떨어져” “2TV는 콘텐츠 차별성도 없고 재방송 비율이 타 방송사에 비해 높아 공영방송의 정체성 훼손…”. 수신료 쉽게 걷어 쓰다 문 닫을 위기에 처한 KBS와 달리 일본 NHK는 수신료 징수가 너무 어려운 덕에 세계적 공영방송으로서 명망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 방송법에는 수신료 납부 의무가 없다. NHK와 수신 계약 의무만 있을 뿐이다. 최근 법 개정으로 도입된 수신료 미납 시 할증료 규정을 제외하면 처벌 조항도 없다. 시청자의 자발적 납부에 생존이 달려 있으니 끊임없이 자정 노력을 하고 존재 가치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 2000년대 중반 NHK 내부 비리와 정권 외압설이 터져 나오자 시청자들은 수신료 납부 거부로 불신임을 표시했고 NHK는 대대적인 개혁과 창사 이래 첫 수신료 인하까지 발표했다. 정지희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는 시청자의 선의에 의존하는 일본 수신료 제도에 대해 “공영방송이 소임을 다하지 않을 때 시청자가 변화를 촉구할 수 있는 최후의 무기”라며 “공영방송 존속의 중요한 열쇠”라고 평가했다. 우리에게도 1980년대 전국적인 시청료 납부 거부 운동으로 ‘땡전 뉴스’를 단죄했던 경험이 있다. 당시 성명서 내용이 이랬다. “KBS는 공영방송임을 자처하며 시청료와 독점적 광고료 수입으로 운영하면서도 왜곡 편향 보도를 일삼는 등 … 시청료는 공정보도를 하고 그 대가로 받는다는 국민과의 계약으로, KBS가 이를 지키지 아니할 때 시청료 납부를 거부하는 것은 정당한 국민의 권리다.” 이후 통합 징수제로 가지 않았다면 KBS는 시청자 무서운 줄 알고 정신을 차렸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전기료 합산이라는 꼼수를 부린 것이 결과적으로 KBS에 독이 됐다. 시청료 납부 거부 운동을 공영방송을 바로잡고 민주화를 앞당긴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통합 징수제 시절로 돌아가자는 말은 꺼낼 수 없는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요즘 딸들은 매사에 똑 부러진다. 초중고교 시상식은 알파걸들 잔치이고 대학 진학률은 2009년부터 남학생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졸업 후 취업 시장에서도 여성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한창 사회 경력을 쌓을 즈음이 되면 더 올라가지 못하고 마(魔)의 취업곡선인 ‘M’의 계곡에 빠지는 이들이 많다. 알파걸에서 시작해 커리어우먼으로 성장하려다 ‘경단녀’가 되고 마는 것이다. ▷통계청과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지난해 경력단절여성은 139만7000명이다. 다행히 매년 줄고는 있지만 기혼 여성의 17%가 경단녀이고, 핵심노동인구(25∼54세)로 좁히면 10명 중 4명이 경력 단절을 겪고 있다. 20대 후반 70%가 훌쩍 넘는 여성 고용률은 30대 후반이 되면 60%로 떨어졌다가 50이 돼서야 회복되는 ‘M’자형을 나타낸다. 고용률이 푹 꺼지는 시기는 결혼과 육아의 시기다. 회사 어린이집이나 국공립 어린이집에 운 좋게 빈자리가 있지 않고서는 200만 원이 넘는 ‘이모님’ 비용과 연봉 사이에서 고민하다 애써 쌓아온 경력을 포기하고 집에 들어앉게 된다. ▷한번 단절된 경력을 잇기는 힘들다. 경력 단절이 시작되는 평균 연령은 29세, 경력 단절 기간은 8.9년이다. 벤처기업협회가 40세 이상 경단녀 1000명에게 물었더니 재취업을 원하는 일자리로 대기업이나 ‘네카라쿠배’의 첨단산업 관련 직무 혹은 홍보·마케팅 업무를 꼽았다. 하지만 경단녀 일자리는 전일제 사무직이나 전문직종은 드물고 판매직이나 서비스직이 대부분이다. 재취업 후 처음 받는 월급은 경력 단절 이전, 그러니까 9년 전에 받았던 월급의 85%밖에 안 된다. ▷선진국 가운데 여성의 노동생애 고용률이 M자형을 그리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밖에 없다. 다른 나라는 25∼54세 고용률이 70%대를 유지하는 ‘∩’자형이다.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54.6%)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53.2%)보다 높지만, 35∼39세 고용률 순위는 OECD 38개 회원국 중 34위다. 일본은 경단녀 재취업을 지원하고 보육시설을 늘리는 적극적인 ‘M자 커브 해소’ 정책으로 0∼14세 자녀를 둔 여성 고용률을 70%로 끌어올렸다. 한국은 60%가 안 된다. ▷승승장구하던 알파걸들은 선배 경단녀들을 보며 결혼과 출산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까. 지금처럼 인구가 줄다가는 45년 후엔 인구의 절반이 일해 나머지 절반을 먹여 살려야 하는 시기가 온다. 아이가 생겨도 하던 일 계속하고 언제든 취업 시장에 다시 뛰어들 수 있도록 보육 인프라는 탄탄해지고 노동시장은 유연해져야겠다. 140만 경단녀를 ‘경보녀’, 경력보유여성으로 바꿔 부를 수 있어야 저출산 극복도, 경제성장도 가능해진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고령화시대 암보다 무서운 질병이 치매다. 65세 이상 한국인 10명 중 1명이 치매를 앓고 있다. 대부분 퇴행성 뇌질환인 알츠하이머 환자다. 지금까지 알츠하이머 치료제는 150가지가 개발됐는데 모두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해줄 뿐 병의 진행을 늦추지는 못했다. 7일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정식 승인을 받은 레켐비(성분명 레카네맙)는 알츠하이머의 진행 속도를 늦춰주는 최초의 치료제다. ▷일본 제약사 에이사이와 미국 바이오젠이 공동 개발한 레켐비는 치매 원인인 단백질 침전물 아밀로이드를 제거해 뇌세포가 파괴되는 것을 막는다. 치료제라고는 해도 효능은 제한적이다. 우선 발병 초기 환자에게만 효과가 있다. 병을 낫게 하는 건 아니다. 기억력이나 인지능력이 나빠지는 속도를 늦출 수 있을 뿐 개선하지는 못한다. 임상시험에서는 18개월간 약물을 투여하면 치매 증세가 악화하는 속도를 5개월 지연시키는 효과가 나타났다. 환자나 가족이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의 변화는 아니라고 한다. ▷부작용도 작지 않다. 임상시험 참가자의 13%가 뇌부종(대조군은 2%)을, 17%는 뇌출혈(대조군 9%)을 겪었다. 2주에 한 번씩 정맥 주사로 투여하는데 약값이 연간 2만6500달러(약 3460만 원)다. 뇌도 주기적으로 스캔해야 한다. 이 비용까지 합치면 연간 치료비는 9만 달러(약 1억1700만 원)로 추산된다. 미국은 알츠하이머 환자 650만 명 가운데 150만 명을 레켐비 투여 가능 대상으로 보고 이들 약값의 80%를 의료보험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레켐비는 2021년 FDA의 조건부 승인을 받았던 아두헬름(성분명 아두카누맙)을 개량한 것이다. 아두헬름은 치매 진행을 늦추는 최초의 치료제가 될 것으로 기대됐으나 효능 논란이 일면서 정식 승인은 받지 못했다. 레켐비를 바짝 뒤쫓는 치료제로 미국 일라이릴리의 도나네맙이 있다. FDA 허가를 기다리고 있는데 레켐비보다 약효는 낫고 투약 주기도 4주에 1회로 길지만 부작용은 더 크다고 한다. 이 밖에 국내 회사 아리바이오의 먹는 치료제 ‘AR1001’을 포함해 30종의 치료제가 개발 막바지 단계에 있다. ▷이르면 내년 하반기 레켐비의 식약처 승인 여부가 결정된다. 사용 허가가 나더라도 제한적인 약효와 부작용 가능성을 저울질하느라, 혹은 비싼 약값 탓에 찾는 사람이 많을지는 의문이다. 국내 60세 이상 치매 환자는 96만 명, 치매 관리 비용으로 매년 21조 원을 쓰고 있다. 치매 환자 가족의 64%는 하루 10시간 동안 환자 돌봄에 매여 지낸다. 효과 좋고 안전하고 비용 부담은 적은 꿈의 치료제가 개발돼 ‘나를 잃어가는 병’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날이 앞당겨지기를 기대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