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

이소연 기자

동아일보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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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소연 기자입니다.

always99@donga.com

취재분야

2025-06-21~2025-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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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화집 함께 펴낸 화가 신부와 시인 스님… “不二 공감… 우리 만남이 화합 꽃씨 되길”

    “시를 짓는 원경 스님은 진흙 속에 핀 연꽃 같지요. 제 수도복은 백합의 순결함을 상징합니다. 연꽃과 백합은 본래 같은 하늘 아래 피어 같은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김인중 신부) “(김인중 신부의 한) 작품에서 불교의 무용 승무처럼 긴 옷깃을 펼쳐 너울대는 움직임이 여지없이 제게 와 닿았습니다.”(원경 스님) ‘빛의 화가’ 김인중 신부(83)와 ‘꽃의 대부’ 심곡암(서울 성북구) 주지 원경 스님(61)이 28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나 서로의 작품에 대해 말했다. ‘세계 10대 스테인드글라스 예술의 거장’으로 꼽히는 김 신부와 서울 종로구 원각사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는 시인 원경 스님이 최근 시화집 ‘빛섬에 꽃비 내리거든’(파람북·사진)을 함께 펴냈다. 지난해 봄, 출판사 의뢰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뤄졌다. 책에는 김 신부의 화집을 보며 원경 스님이 쓴 시 54편과 함께 김 신부의 작품 사진 60여 점이 담겼다. 예술은 종교를 뛰어넘어 이들을 한데 엮었다. 김 신부와 원경 스님은 시화집을 함께 펴내며 “예술과 수행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김 신부는 원경 스님에게 묵주를, 원경 스님은 김 신부에게 염주를 선물했다.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1974년 도미니크수도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김 신부는 “예술가는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열어 내는 데 그 뜻이 있다. 원경 스님과 나는 서로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어선지 오래전부터 만나 온 사이 같다”며 웃었다. 1984년 송광사에서 현호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원경 스님은 “출가와 더불어 시인의 꿈도 함께 움텄다”며 “말씀 언(言)자와 절 사(寺)가 합쳐져 시(詩)가 됐듯 수행과 예술의 길이 다르지 않다”고 했다. “참된 진리는 이름을 떠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선미라는 가치 아래 종교의 이름마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불이(不二)적 가르침에 공감했습니다.” (원경 스님) 원경 스님은 김 신부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보며 ‘창(窓)’이라는 시를 지었다. “계절이 흐르는 창에는/이웃의 일상이 흐르고/생각이 많을 땐/사유가 흐르고/휴식이 필요할 땐 차향이 피어나고…이 고운 창을 내신 그대/그 손결 빛나셔라”(‘창(窓)’ 중에서) ‘님을 위한 기도’는 김 신부에게 바치는 시다. 원경 스님은 이 시에서 “소박과 순수의 가없는 사랑 속/그 눈빛에/뭇 군생을 비추시기를”이라고 썼다. 화집과 시집으로 교류했던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올 4월 어느 날에는 비가 내렸다고 한다. 빛을 나눠 주는 섬이란 뜻의 ‘빛섬’을 한글 호로 쓰는 김 신부와 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 원경 스님이 비오는 날 만나 책제목(‘빛섬에 꽃비 내리거든’)이 정해졌다. 원경 스님은 “우리의 만남이 사회를 화합하고 사랑을 구현하는 자그마한 꽃씨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김 신부는 “사람이 방 안에 갇혀 있으면 다른 데 빛이 있음을 모른다”며 “꽃이 자신을 피워 하늘을 바라보듯 이 책을 읽은 이들이 열린 하늘을 바라봤으면 한다”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3-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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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인사 홍하문 등 일주문 6건… 문화재청, 보물 지정 예고

    경남 ‘합천 해인사 홍하문’(사진) 등 사찰 일주문(一柱門) 6건이 보물로 지정된다. 일주문은 절에 갈 때 맨 먼저 마주하게 되는 건축물로 조선시대 사찰의 삼문(三門) 체계가 성립되면서 만들어진 문이다. 문화재청은 홍하문과 경남 ‘함양 용추사 일주문’, ‘하동 쌍계사 일주문’, 전남 ‘곡성 태안사 일주문’, ‘순천 송광사 일주문’, 대구 ‘달성 용연사 자운문’ 등을 보물로 지정 예고한다고 25일 밝혔다. 해인사 홍하문은 총 14개 공포(栱包)를 올린 다포(多包·기둥머리 위뿐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 공간에도 공포를 짜 올리는 방식) 구조로 화려한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주문은 30일간의 의견 수렴 및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로 최종 지정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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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대자의 민낯… 실록으로 엿보는 황제의 원초적 욕망

    “조선 국왕에게 이야기해서 예쁜 여자를 몇 명 골라서 데리고 오라.” 1406년 4월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1360∼1424)가 조선 태종(1367∼1422)에게 보낸 사신은 이 같은 황제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영락제가 ‘조선으로부터 말 3000필을 받은 대가로 은 1000냥을 지불한다’는 칙서를 함께 보내기는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명분이었고, 황제의 본의는 차마 글에 담지 못한 말 속에 숨어 있었다. 명나라 황제의 ‘언서(言書) 불일치’를 폭로한 책이다.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를 연구해온 서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등 국내 사료와 ‘명실록(明實錄)’을 비교, 분석했다. 명은 황제가 한 말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기록한 ‘선유성지(宣諭聖旨)’를 대부분 파기했고, 명실록엔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 윤색한 결과만 담았다. 반면 성지를 받은 고려·조선의 사료에선 황제가 전한 날것의 말이 그대로 확인된다. 황제는 점잖은 글엔 담지 못하는 속내나 기록으로 남기고 싶지 않은 욕망을 전하기 위해 선유성지를 고려와 조선의 왕에게 내렸다. 황제의 말과 조선의 대응에선 당시의 비대칭적 외교관계가 그대로 엿보인다. 태종은 영락제가 공녀를 요구한 1408년 4월 이후 7개월간 심사를 거쳐 공녀 5명을 뽑아 보냈는데, 당시는 아버지 태조(1335∼1408)의 상중이었다. 영락제는 공녀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1409년 5월 또다시 사신을 보내 앞선 공녀들의 외모에 대해 하나하나 흠을 잡으며 “왕은 지금 찾아놓은 여자가 있거든 많으면 두 명, 적으면 한 명이라도 다시 보내라”고 했다. 저자는 두 차례 정변을 거쳐 즉위한 태종이 집권의 정당성을 명 황제가 보낸 고명(誥命·외국 국왕을 책봉할 때 작성한 황제의 명령문서)에 크게 의지했기에 이 같은 무리한 요구를 받들 수밖에 없었다고 봤다. 영락제는 사망하기 두 달 전에도 조선 사신에게 “짐이 늙어 입맛이 없으니 밴댕이젓이나 곤쟁이젓, 문어 같은 것을 좀 가지고 오라. … 아울러 스무 살 이상 서른 살 이하로 음식 잘하고 술 잘 빚는 시비(侍婢) 대여섯도 뽑아 보내라”는 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나온다. 세종(1397∼1450)은 환관들이 전하는 명 선덕제(1399∼1435)의 요구가 정말 황제의 명이 맞는지 의심하기도 했다. 세종실록에는 1429년 사신으로 온 조선 출신 환관 김만이 석등잔을 요구하자 “사신이 황제의 명이라 하여 석등잔을 요구하는 것이 너무 심하다”고 한 기록이 있다. 등불을 켜는 돌로 만든 그릇인 석등잔까지 요구한 건 사적이고 자질구레하다는 게 저자의 해석이다. 이에 조선은 명 조정에 보낼 문서에 이 같은 요구를 기록하는 방안도 궁리했다. 세종의 의구심을 선덕제도 눈치챘던 것 같다. 그해 말 선덕제는 “조정에서 요구하는 모든 물건은 반드시 어보를 찍은 칙서에 근거해 지급하라”는 칙서를 조선에 전했다. 저자는 명 황제 가운데 성군으로 꼽히는 선덕제의 이미지는 왜곡된 것임을 우리 측 사료를 통해 밝힌다. 명실록엔 선덕제가 1429년 9월 “왕국(조선)에 진기한 짐승이 많다고는 하나 짐이 바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니 앞으로는 바치지 말라”고 했다고 나온다. 이는 선덕제의 인자한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로 꼽혀 왔다. 그러나 세종실록엔 그해 11월 선덕제가 “좋은 매와 사냥개가 있거든 이를 찾아 바쳐 왕의 아름다운 뜻을 더욱 보이도록 하라”는 칙서가 도착했다고 나온다. 조선 조정은 실제 매와 사냥개를 명에 바쳤다. 명나라뿐일까. 저자는 “역사 기록에 남은 황제의 글은 대부분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고 지적했다. “기록에 묘사된 황제는 언제나 성인과 고전의 가르침을 준수하고 유교적 덕목에 기초하여 선정과 덕정을 펼치는 절대자였다. 그러나 그런 인간이 있을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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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기억해야 폭력의 역사 끊어”

    “간토대지진에서 조선인 학살 사건을 지우려는 ‘삭제의 죄악’에 맞서 당시의 기억을 복원해온 이들이 있음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책 ‘백년 동안의 증언’(책읽는고양이·사진)을 펴낸 김응교 숙명여대 기초교양학부 교수(61)는 23일 서울 노원구의 한 카페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김 교수는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다룬 한국과 일본의 문학 작품을 연구해왔다. 책에는 그간의 연구와 함께 학살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 자료를 수집해 온 일본 시민의 목소리를 담았다. 김 교수가 이 사건에 주목한 건 일본 와세다대 객원교수로 있던 2001년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문학을 연구하고 있나’ 고민하던 때였다. 윤동주 시인을 연구한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명예교수(1933∼2023)가 그를 학살이 자행됐던 지바 지역과, 도쿄에 조성된 ‘간토대지진 조선인희생자 추모비’ 앞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사건과 관련된 자료집을 말없이 그에게 건넸다. 그중 일본 시인 쓰보이 시게지(壺井繁治·1898∼1975)가 1948년 쓴 시 ‘15엔 50전’이 있었다. “자기가 흘린 핏물 웅덩이에 쓰러져 있는 조선인 노동자 같은 사내를 이 눈으로 보았다/그것은 거기뿐만 아니라/가는 곳마다 행해진 테러였던 것이다”(‘15엔 50전’ 중에서) 시의 제목은 학살을 자행한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겐 어려운 발음이 있는 ‘15엔 50전’을 일본어로 말하도록 강요한 뒤, 제대로 못하면 살해했던 데서 비롯됐다. 김 교수는 “학살을 목격한 시인은 어둠에 압도되지 않고 현실을 고발했다”며 “이 시를 만난 뒤 폭력을 증언하고 희생자를 애도하는 것이 내가 문학을 연구하는 이유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해 김 교수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다룬 문학작품을 연구해 논문 ‘1923년 9월 1일, 도쿄’를 발표했다. 자비를 들여 희생자 추모비를 세우고, 목격자의 증언을 수집해 온 일본 시민들의 이야기도 책에 담았다. 1982년부터 학살 사건 진상 규명 운동을 펼쳐온 시민 니시자키 마사오 씨는 김 교수에게 “난 그저 100년 전 이곳에서 조선인 학살 사건이 있었음을 증언할 뿐”이라고 했다. 1973년부터 해마다 9월 1일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을 열고 있는 미야카와 야스히코 씨(일조협회 도쿄도 연합회장)는 “이 사건의 진실을 아는 것은 폭력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주춧돌이 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기억의 힘이 반복되는 폭력의 역사를 끊어낼 거라고 믿습니다. (이 책이) 이들의 뒤를 이어 미래의 100년을 제대로 걸어가기 위한 첫 발자국이 되길 바랍니다.”(김 교수)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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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라바조의 그림은 장식이 아닌 진실 그 자체였죠”

    “카라바조에게 그림은 장식이 아닌 진실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정물화를 그리며 과일의 썩어가는 단면과 시든 이파리까지 담아냈습니다. 싱그럽고 아름다운 순간뿐 아니라 썩어가며 누추해지는 과정까지 세상의 일부라는 진실을 밝힌 것이죠.” ‘바로크 미술의 창시자’로 불리는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1571∼1610)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담은 책 ‘불멸의 화가 카라바조’(한길사)를 출간한 고종희 한양여대 산업디자인과 명예교수(62)는 22일 서울 중구 복합문화공간 순화동천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40년 전 이탈리아 피사대 미술사학과에 입학한 후 카라바조에게 매료된 고 교수는 이후 밀라노와 로마, 나폴리 등을 다니며 카라바조의 발자취를 좇았다. 그는 “시대를 풍미했던 거장이 지나간 곳에는 흔적이 남기 마련”이라며 “그 흔적을 따라가며 카라바조와 영향을 주고받은 사람과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고 했다. 고 교수는 카라바조가 추구했던 진실성이 당대 세상과 조응했다고 봤다. 당시는 마르틴 루터(1483∼1546) 등이 종교 개혁을 한 직후였다. 화려하면서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선호했던 로마 교황청과 달리 개신교는 청빈함을 추구했다. 고 교수는 “카라바조가 그린 종교 인물들은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라며 “꾸밈없는 진실한 인간 세상을 그린 카라바조의 작품이 개신교가 추구하는 시대정신과 맞아떨어졌기에 한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고 설명했다. 책은 카라바조와 영향을 주고받은 예술가의 관계도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바로크 시대 플랑드르의 화가 루벤스(1577∼1640)가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고 교수는 이들의 접점을 삶에서도 찾아냈다. 1605년 루벤스의 친형이 당대 카라바조의 후원자였던 보르메오 가문의 대주교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 루벤스와 카라바조가 같은 이에게 후원을 받는 기간이 있었다는 것. 이 기간 루벤스가 카라바조의 작품 ‘그리스도의 매장’(1602∼1604년)을 접하고 구도 등이 비슷한 동명의 작품(1612년)을 그렸다고 분석했다. 고 교수는 카라바조의 대표작 중 하나로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을 꼽았다. 그는 “당대엔 가만히 손을 모으고 있는 인물화가 주종이었는데, 얼굴을 찡그리는 찰나의 순간도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으며 화들짝 놀라는 손짓으로도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음을 증명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이 그림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0월 9일까지 열리는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에서 만날 수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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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무 오래 쉰다고요? 제 인생엔 공백기 없어요”

    “연기 활동에는 공백기가 있었지만, 제 인생에서는 공백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몇 년이었습니다.” 첫 에세이 ‘반은 미치고 반은 행복했으면’(달)을 최근 펴낸 배우 강혜정(41)은 21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2018년 종영한 KBS 드라마 ‘저글러스’ 이후 연기 활동을 잠시 쉬었던 그는 그동안 글을 쓰며 ‘나’를 채워나갔다. 배우이기에 앞서 강혜정 자신으로 산 시간이었을 터이다. 그렇게 4년간 휴대전화에 짬짬이 일상과 생각을 기록한 짧은 글 60편이 책으로 엮였다. 강혜정은 “언제 어디서든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으면 휴대전화를 들어 문자를 쓰듯 글을 썼다”며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는 말 풍선을 적은 글”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책을 낸 건 “한마디 말이 가진 힘을 나누고 싶어서”였다. 마지막 장에 실린 글 ‘말이 이끄는 힘’은 지인에게 “종종 보고 싶다”는 새해 인사 메시지를 보냈을 때 “난 자주 보고 싶다”는 예상치 못한 답장을 받고 썼다고 한다. 강혜정은 이 순간에 대해 “두 팔을 활짝 펴고 반갑게 맞아주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그가 끌어당긴 말의 힘으로 한 발짝 나아가야 한다”고 적었다. 강혜정은 “한마디 말로 갑갑한 새장 속에 사는 누군가가 마음의 문을 열 수도 있다”며 “(이 책이) 누군가에게 그런 순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애초에 출간할 계획 없이 쓴 글들이었기에 남에겐 숨기고 싶은 감정까지 가감 없이 담겼다. ‘스타트라인’이란 제목의 글에선 “또 한번의 총성이 울린다면 나는 완주해낼 수 있을까. 어쩌면 스타트라인에 서 있을 용기가 있을지 모르겠다”며 시작에 대한 두려움을 털어놓는다. ‘그런 날’에선 “당장에 결과물이 있어야 할 듯 어깨가 무거운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날 … 그냥 아무 존재도 아니었으면 하는 날”의 무기력함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는 “누구나 피하고 싶고 숨기고 싶은 생각마저 함께 나누고 싶었다”고 했다. 딸(13)이 성장하면서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고 한다. 글이 하나둘 쌓이다 보니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첫 독자는 남편이자 래퍼인 타블로(본명 이선웅·43)였다. “계속 써보라”는 응원 덕에 글이 더 쌓였고, 타블로가 출판사 대표에게 원고를 보내 독자를 만나게 됐다. 강혜정은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나만 이런 생각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님’을 이해받고 덜 외로워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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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네서점에 책만 사러 가나요? 난 취미 공유-산책하러 가요

    “엄마 얼굴을 자세히 보니까 내가 생각했던 거랑 다르게 생겼어!” 서울 용산구에 있는 책방 ‘죄책감’에서 12일 엄마의 얼굴을 그리던 한 아이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날 약 33㎡(10평) 규모의 작은 책방에서는 부모와 자녀가 서로의 얼굴을 관찰한 뒤 그림을 그리는 가족 프로그램 ‘우린 서로 잘 알지만, 잘 몰라요’가 열렸다. 한 엄마는 자신의 어깨 위로 훌쩍 커버린 딸의 얼굴을 스케치북에 그리며 “매일 봐서 몰랐는데 우리 딸 언제 이렇게 컸느냐”고 말했다. 지난해 문을 연 이 책방에서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홍진일 책방 죄책감 대표(47)는 “최근 사회에서 벌어진 사건사고를 지켜보며 인간관계의 단절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됐다”며 “책방을 운영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다가 관계의 기본인 가족과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동네 책방에서 독서 및 북토크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취미 생활을 공유하고, 가족 간 대화를 장려하는 프로그램이 생겨나고 있다. 숲 해설가와 함께 동네에 있는 나무를 탐방하는 산책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종로구 책방 ‘일일호일’과 낮엔 서점, 밤엔 극장으로 변신하는 마포구 책방 ‘라블레’가 대표적이다. 책방이 단지 책을 사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을 공통의 취미로 엮고, 서로의 일상을 나누는 커뮤니티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동네 책방이 이런 프로그램을 도입한 건 대형 서점은 할 수 없는 동네 책방만의 역할을 찾기 위해서다. 관악구의 책방 ‘회전문서재’는 올해 3월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4∼6명이 모여 자신의 이야기를 적은 글을 읽는 낭독회를 열고 있다.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1인당 7만5000원(한 달 기준)을 내고 참여한 이들은 “내 얘기에 다정한 마음을 드러내줘 기뻤다” “나만의 색깔을 찾을 수 있게 됐다”며 호평을 남긴 것. 안서진 회전문서재 대표(35)는 “앞서 4년간 독서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사람들이 결국 책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며 “회사나 학교, 가족에게는 말할 수 없는 개개인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고 타인에게 터놓기에는 소규모 동네 책방이 제격”이라고 했다. 장은수 출판평론가는 “인간관계가 단절된 요즘, 동네 책방이 사람들 사이를 연결해주는 구심점이 될 수 있다”며 “이는 책방이 지닌 중요한 사회적 역할일 뿐 아니라 대형 서점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동네 책방만의 경쟁력”이라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3-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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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호, 대동지지에 장시 기록… 조선 변화 알아본 선각자”

    “김정호가 자신의 연구와 앞서 존재한 수많은 지리서를 종합해 만든 대동지지(大東地志)는 한민족 지도문화의 총화입니다.” 조선의 지리학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1804?∼1866?)가 집필한 지리서 ‘대동지지’를 최근 처음으로 국역한 이상태 한국영토학회 회장(80)은 18일 이렇게 강조했다. 이 회장은 30권 15책 분량에 달하는 원본을 총 8권 2170쪽으로 옮긴 ‘대동지지’(경인문화사)를 최근 출간했다. 국역에는 이 회장을 비롯해 고혜령 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 이영춘 전 국사편찬위원회 연구편찬실장 등 학자 8명이 참여했다. 대동지지는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직후인 1862년부터 죽을 때까지 집필한 유작이다. 대동지지 김정호 육필본을 소장하고 있는 서울 성북구 고려대 대학원 도서관에서 만난 이 회장은 “김정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동지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동지지엔 김정호가 앞서 편찬한 ‘동여도지(東輿圖志)’와 ‘여도비지(輿圖備志)’에는 없는 정보가 기록돼 있다. 바로 전국의 장날을 기록한 ‘장시(場市)’다. 강원도 편에서 원주목에 대해 설명하며 ‘읍내 장날은 2일과 7일’이라고 기록하는 식이다. 이 회장은 “김정호는 팔도를 돌아다니며 상업의 발달 과정을 목격했다. 백성이 무슨 정보를 원하는지 명확히 포착했고 그것이 바로 장시”라고 했다. 당대 지리서 가운데 장시 정보를 기록한 건 대동지지뿐이다. 조선에 닥친 외세의 흔적도 엿볼 수 있다. 충청도 편에선 ‘홍주목’(현재 충남 홍성)을 설명하는 대목에 “순조 32년 7월에 서양의 상선 호하미 등이 고대도에 도착하여 그 지방의 토산물을 헌납하였다. … 그 나라는 대영국(大英國)이라 칭하고 … 그 나라 서울의 지명이 란돈(蘭墩)…”이라고 나온다. 그해(1832년)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 애머스트호가 고대도에 들어온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 회장은 “대동지지에는 조선을 향해 불어오는 외세의 바람과 당대 백성들의 높아진 상업적 열망 등 격변하는 사회상이 그대로 기록돼 있다”며 “김정호는 19세기 조선에 불어닥친 변화를 알아본 선각자였다”고 말했다. 50년 넘게 김정호를 연구해온 이 회장은 “김정호를 둘러싼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어 고지도 연구를 시작했다”고 했다. 일본의 측량가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1745∼1818)에 맞설 만한 인물을 내세우기 위해 김정호가 신화화된 측면이 있다는 것. 그는 “흔히 김정호가 일일이 측량해서 지도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측량과 함께 역대 한반도에서 제작된 지도와 지리서를 총합한 편집지도를 제작했다”며 “김정호는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낸 창조자가 아니라 한민족의 역대 지도 문화를 계승한 학자”라고 평했다. 김정호가 위대한 이유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김정호가 1851∼1856년 편찬한 여도비지에는 전국 334개 군현의 모든 좌표가 기록돼 있다. 위도는 현재의 것과 같고, 경도는 북경을 기준으로 한 좌표다. 당대 조선에 유입된 서구의 기하학과 확대축소법을 토대로 과학적으로 한 단계 더 발전한 지리서를 집필한 성과라는 분석이다. 이 회장은 현존하는 ‘대동여지도 목판본’ 30여 점을 비교하면서 김정호가 기존에 잘못 새겼거나 새로 바뀐 부분을 수정한 흔적 30여 군데를 찾아내기도 했다. “김정호는 언제고 고치는 학자였습니다. 그는 세상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3-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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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동 대학살때, 조선인 폭동 기사는 오보”

    “간토(關東)대지진 직후 통신과 교통이 모두 단절된 환경에서 제작된 오보가 오늘날 간토대지진 학살부정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사실이 아닌 가짜뉴스가 긴 시간 동안 정정되지 못한 채 방치돼 있었던 탓입니다.” 최근 신간 ‘관동대지진, 학살 부정의 진상’(삼인)을 펴낸 전 아사히신문 역사전문기자 와타나베 노부유키 씨(68)가 18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올해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이 벌어진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23년 9월 1일 간토대지진 직후 요코하마 등지에서 ‘무장한 조선인들이 방화를 하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나가며 전국적으로 조직된 3689개 일본인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이 벌어졌다. 당시 살해된 조선인은 약 6000명에서 1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우익단체들은 조선인 학살 사건을 두고 조선인이 벌인 방화·봉기 등 범죄로부터 일본인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였다는 내용의 ‘학살부정론’을 주장하고 있다. 와타나베 씨는 신간에서 학살부정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활용되는 옛 신문 기사가 오보였음을 밝혔다. ‘조선인 폭도들의 방화 및 봉기 사건’을 가장 먼저 보도한 1923년 9월 3, 4일자 오사카 아사히신문의 기사가 대표적이다. 해당 기사에는 ‘고베의 모 무선전신으로 감청한 바에 따르면’이라는 인용 출처가 드러나는데, 이미 9월 1일 밤부터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무장한 조선인들이 방화와 봉기를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퍼진 뒤였다. 와타나베 씨는 아사히신문 사사(社史)를 토대로 이 기사가 쓰인 과정을 역추적했다. 그 결과 지진 발생 직후 오사카 현장으로 급파된 기자들은 4일 무렵 현장에 도착했고, 감청 정보의 팩트 체크를 충분히 하지 못한 채 당일 기사를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와타나베 씨는 “당시 보도된 기사는 확인되지 않은 오보였다”며 “‘조선인 학살 사건은 봉기를 일으킨 조선인으로부터 일본인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정당방위’란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간토대지진 직후 내무대신을 지낸 고토 신페이(後藤新平)가 1923년 11월 15일 조사를 토대로 남긴 ‘지진 후 형사사범 관련 사항 조사서’에 따르면 간토대지진 직후 조선인이 저지른 살상 사건은 5건으로 기록돼 있으나 피의자와 피해자 신원 모두 미상으로 확인됐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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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헌법은 혁명 열기 아닌 전쟁 잿더미에서 탄생”

    “모든 나라에 헌법이 있습니다. 오직 튀르키예만 그것을 선언해 놓고 폐지하는 바람에 국민이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군인들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1908년 반란을 일으킨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술탄 압둘하미드 2세에게 보낸 글의 일부다. 당시 오스만 제국에는 러시아와 영국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마케도니아를 장악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전쟁의 위협에 직면했던 오스만 제국군 일부는 의회 정치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중요한 건 20세기 초 ‘이미 모든 나라에 헌법이 있다’는 인식이 지식인 집단이 아닌 가장 평범한 군인들 사이에서 싹텄다는 것이다. 반군은 민주주의적 요구로서가 아니라 외세에 맞설 더 견고한 정치체제를 갖추기 위해 헌법을 원했다. 미국 프린스턴대 역사학 교수인 저자는 “헌법은 혁명의 열기가 아닌 전쟁의 잿더미에서 태어났다”고 본다. 이는 성문 헌법의 부상을 1770년대 미국과 프랑스에서 벌어진 대규모 혁명과 연결 지어 ‘민주주의의 진보’로 평해 왔던 관점과는 다른 접근이다. 저자는 1750년대부터 20세기까지 세계 각국에서 태동한 성문 헌법의 역사를 추적하며 근대 세계의 토대가 된 헌법의 뿌리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저자는 헌법 제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1756∼1763년 슐레지엔 영유를 둘러싸고 유럽 대국이 벌인 ‘7년 전쟁’을 꼽는다. 윈스턴 처칠(1874∼1965)이 “최초의 세계 전쟁”이라고 명명한 이 전쟁 이후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다. 전쟁의 지리적 규모가 커졌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수의 군인이 필요해졌다. 전쟁과 세수 확보에 책임 있는 군인을 양적으로 확장하기 위한 움직임이 헌법 제정을 통한 시민권 확장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저자에 따르면 실제 1776∼1870년 전 세계에 걸쳐 공식적으로 작성된 헌법 초안들에는 육군·해군·민병대·징집과 관련한 조항이 3400개에 이른다. 페루가 에스파냐의 통치에 항거한 투쟁에서 성공한 뒤 1828년 발표한 새 헌법엔 ‘군에 복무했거나 복무할 예정인 외국인’에게까지 시민권을 부여했다. 프랑스 정부는 잇따른 전쟁으로 재정적 붕괴 상태에 이르자, 새로운 수입원을 찾기 위해 1789년 어쩔 수 없이 성직자와 귀족, 평민으로 구성된 삼부회를 소집했다. 재정난을 극복할 세제 개혁안을 만들기 위해 모였던 이 회의에서 평민과 귀족 간 갈등이 분출되며 프랑스 대혁명이 촉발됐다. 성문 헌법안이 인쇄돼 널리 배포된 이유 역시 전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18, 19세기 전 세계 각국 정부는 전쟁으로 새롭게 확보한 영토에서 벌어질 내란을 우려했다. 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국경 지역에 사는 이들에게까지 ‘자국민’이라는 관념을 심어 내적 갈등을 저지하는 일이 과제로 떠올랐다. 이 과정에서 인쇄술의 발전은 자국민으로서 누리게 될 권리를 담은 헌법을 명문화해 전역으로 퍼뜨리는 데 일조했다. 일례로 러시아 여황제 예카테리나 2세(1729∼1796)는 1767년 총 655개 조항에 이르는 훈시 ‘나카즈’를 만든 뒤 영어와 독일어본까지 만들어 러시아 접경지역에 뿌렸다. 이렇게 국경을 넘나든 헌법 초안은 세계화의 흐름 속에 각국으로 퍼져 나가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저자는 “(헌법은) 단언컨대 천진난만한 장치가 아니며, 지금껏 그랬던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성문 헌법은 처음 출현했을 때부터 권력을 제한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권력을 가능케 하는 것과 연관돼 있었다”고 말한다. 원제는 ‘The Gun, the Ship, and the Pen’.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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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덕궁 달빛기행’ 22일 예매 시작… 올해부터 추첨해 배정

    가을 밤 서울 종로구 창덕궁 경내를 거니는 ‘창덕궁 달빛기행’ 행사가 다음 달 7일부터 10월 22일까지 매주 목∼일요일 저녁에 열린다. 기존에는 티켓을 선착순으로 판매했지만 올해부터는 추첨제로 바뀐다. 올해 14년째를 맞는 ‘창덕궁 달빛기행’은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창덕궁의 역사와 문화, 조경을 살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에서 출발해 1시간 40분 동안 진선문과 낙선재, 연경당 등으로 이어진다. 효명세자(1809∼1830)가 잔치를 베풀기 위해 지은 연경당(演慶堂)과 ‘시원한 곳에 오른다’는 뜻을 지닌 상량정(上凉亭)에서는 전통 공연도 펼쳐진다. 예매는 이달 22일 오후 2시부터 27일까지 티켓링크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고, 티켓은 추첨 방식으로 배정된다고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밝혔다. 1인당 최대 2장까지 응모할 수 있다. 당첨이 되면 29일 오후 2시부터 다음 달 3일까지 선착순으로 관람을 원하는 날짜와 시간(오후 7시, 오후 7시 50분)을 선택해 예매하면 된다. 입장객 수는 하루 150명이다. 만 65세 이상과 장애인, 국가유공자는 별도의 응모 절차 없이 22일 오후 2시부터 1인 2장까지 하루 30명에 한해 전화로 선착순 예매할 수 있다. 관람료는 1인당 3만 원.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3-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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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정고무신’ 故 이우영 작가, 단독 저작자로 인정

    고(故) 이우영 작가가 ‘기영이’와 ‘기철이’ 등 1990년대 인기 만화 ‘검정고무신’ 캐릭터의 단독 저작자로 인정받았다. 한국저작권위원회는 ‘검정고무신’ 캐릭터 9종의 공동 저작자로 등록된 4인 중 이 작가를 제외한 3인에 대해 등록 직권말소 처분이 확정됐다고 16일 밝혔다. 위원회는 “2008년 검정고무신 캐릭터 9종의 저작자 등록 당시 실제 캐릭터 창작에 참여한 사람은 이 작가뿐인 것으로 확인됐다”며 “나머지 3인은 캐릭터가 창작된 뒤 참여한 만화가와 스토리 작가, 수익배분 차원에서 등록한 회사 대표”라고 설명했다. 위원회는 지난달 12일 검정고무신 캐릭터의 공동저작자로 이름을 올린 △이우진 만화가(이 작가의 동생) △이영일 스토리 작가 △장진혁 형설앤 대표의 저작자 등록을 직권으로 말소 처분하고 당사자에게 통지했다. 이후 30일간 당사자의 이의 제기가 없어 처분이 확정됐다. 앞서 올해 4월 이 작가의 유족 측은 검정고무신 캐릭터 저작자 등록 당시 창작자가 아닌 이가 공동저작자로 등록돼 있다며 위원회에 저작자 등록 말소를 요청했다. 이 작가는 형설앤과 3년 넘게 검정고무신 관련 저작권 분쟁을 벌여오다 올해 3월 11일 세상을 등졌다. 위원회가 직권으로 저작자 등록을 말소한 것은 2020년 8월 ‘직권 말소등록제도’ 도입 이후 처음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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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군정의 ‘독도 출장명령서’ 처음 공개… “학술조사 승인, 한국 관할로 관리 증명”

    1947년 8월 조선산악회(현 한국산악회)가 남조선과도정부 독도조사단과 함께 실시한 ‘울릉도·독도 학술조사’에 미 군정청이 직접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문건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서울 영등포구 타임스퀘어 내 독도체험관에서 17일 개막하는 기획전시 ‘1947,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를 가다’에서 제1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 당시 작성된 문건 5건을 처음 선보인다. 조선해안경비대 손원일 총사령관(1909∼1980)이 조선산악회장이자 울릉도학술조사대장 송석하(1904∼1948)에게 보낸 ‘울릉도학술조사대 일행 해상 수송의 건’과 학술조사에 참여한 대원 이름이 적힌 ‘울릉도학술조사대 편성 명부’, 1차 학술조사를 마친 뒤 송석하가 국제보도연맹에 투고한 ‘고색창연한 역사적 유적 울릉도를 찾아서’ 초고 등이다. 특히 1947년 8월 15일 미 군정청 소속 아처 러치 군정장관이 승인한 ‘미 군정청의 출장명령서’는 독도 조사가 군정장관 명령에 따라 이뤄졌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료로 꼽힌다. 2장 분량의 이 공문에는 미 군정청이 1947년 8월 허가한 공무원들의 지방 출정 일정과 목적지 등이 기록됐는데, 송석하 등 한국인 6명의 독도 출장을 허가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홍성근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은 “미 군정청이 독도를 한국의 관할구역으로 관리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제1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는 1947년 4월 일본인이 독도에 침입해 우리 어선에 총격을 가한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추진됐다. 과도정부를 이끌던 민정장관 안재홍(1891∼1965)이 조선산악회에 의뢰해 전문가 63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민관조사단이 꾸려졌다. 10월 31일까지. 무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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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합방 반대 상소’ 척암 김도화의 애국활동 조명

    “한 치의 땅도 한 명의 백성도 폐하의 사유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어찌 독단으로 나라를 주고받는 일을 필부필부가 밭과 농산물을 사고팔 듯 하실 수 있습니까.”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때 척암 김도화(1825∼1912)가 고종에게 올린 ‘합병하지 말 것을 청하는 상소’의 일부다. 당시 85세였던 척암은 대문 앞에 ‘合邦大反對之家(합방대반대지가·합방을 크게 반대하는 집)’라는 현판을 내걸고 스스로 자택 문을 걸어 잠갔다. 이후 일제의 감시를 받다가 2년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와 글로 일제의 침략에 맞선 유림이자 문장가였다. 경북 안동시 한국국학진흥원에서 22일 오후 2시 ‘척암 김도화의 학문과 애국활동’을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린다. 한국국학진흥원 한문교육원은 한일합방에 분개한 척암의 시와 서간, 상소문 등이 수록된 문집 총 55권을 국역해 올해 전자책으로 펴냈다. 이번 학술대회는 지난 4년간의 국역 성과물을 토대로 마련했다. 척암은 을미사변(1895년 10월 8일) 이후 1896년 1월 안동의 의병을 규합해 안동의진(安東義陣)을 결성했고 2대 의병장으로 추대됐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에는 ‘을사늑약을 당장 폐기하라’는 내용의 상소문 ‘청파오조약소(請破五條約疏)’를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척암은 을사오적을 두고 “그들을 용서하지 못할 죄가 셋 있으니 첫째는 나라를 팔아먹은 죄요, 둘째는 외적과 은밀히 통한 죄요, 셋째는 임금을 협박한 죄”라고 썼다.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됐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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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1945년 韓美, 하나의 군단 됐다”… ‘항일 독수리작전’ 미군 회고록

    “이범석(한국광복군 제2지대장)과 내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조성한 평등, 존중, 협동의 분위기 속에서 뛰어난 정신을 지닌 하나의 군단이 힘을 얻었다.” 태평양전쟁 말인 1945년, 한국광복군과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이 공동 추진했던 ‘독수리작전’의 미국 측 책임자 클라이드 사전트 대위(1909∼1981)는 당시 대원들의 훈련 분위기를 회고록에서 이같이 밝혔다. 독수리작전은 한국광복군과 OSS가 합작해 한국 청년을 대일전 정보요원으로 양성한 뒤 한반도에 침투시키려 한 계획이다. 사전트 대위는 당시 한국인 청년들과 미군이 일제에 맞서기 위해 하나가 돼 합력(合力)했다고 봤다. 사전트 대위가 남긴 회고록과 관련 자료를 최근 확보한 독립기념관은 78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이를 14일 동아일보에 공개했다. 미국 메인주에 사는 사전트 대위의 아들 로버트 사전트 씨가 소장한 기록물들로 연구를 위해 일부 공유됐을 뿐 일반에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회고록은 독수리작전에 참여한 미군 관계자가 공식 문서 외 따로 남긴 유일한 현존 기록으로 평가된다. 김도형 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이 자료를 번역 분석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한미 양국 군인들은 숙식과 훈련을 위해 중국 시안(西安)의 버려진 사당을 손수 고쳐 쓰는 등 훈련 준비에도 함께 힘을 모았다. 사전트 대위는 “생존과 조정을 위한 합리적인 것(결과)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도전에 직면했다”면서도 “거대한 개축과 재건, 건축에 (함께) 힘을 쏟았고, 전후 중국을 떠날 때 미국인, 중국인, 한국인들이 자랑스럽게 떠날 수 있었다”고 했다. 사전트 대위는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인 1980년 3월 7일 독수리작전을 회고하며 레터(Letter) 용지 10쪽 분량의 타자본으로 이 회고록을 완성했다. 학계에서는 이 회고록이 최초의 한미 동맹을 보여주는 핵심 문서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 연구위원은 “회고록은 한국과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군사기관이 펼쳤던 최초의 공동 군사작전을 입증하는 귀중한 기록으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강조했다.독수리작전 1945년 미국 전략사무국(OSS)이 한국광복군과 합작해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을 대일전 정보요원으로 양성한 군사계획이다. 중국 시안에 있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가 훈련에 참여했다. 1945년 8월 4일 1기 훈련 과정이 끝나고 ‘공작반’ 편성 뒤 한반도 침투 작전이 추진됐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2차대전때 독수리작전, ‘최초의 한미동맹’으로 재평가해야” 사전트 대위 회고록 ‘한미공조 관점에서 본 작전’ 첫 공개작전 기획부터 해산까지 기록독수리작전, 미완으로 끝났지만…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한미 공조활동의 관점에서 본 독수리작전(Note on an aspect of U.S.-Korean collaborative activities during World War Ⅱ: The Eagle Project).’ OSS 중국전구(戰區) 비밀첩보과 소속으로 독수리작전의 미국 측 책임자였던 클라이드 사전트 대위가 쓴 회고록 제목이다. 회고록에는 △독수리작전 기획 △훈련 △광복 후 일본 전쟁포로수용소 내 미군 구출을 위한 서울 작전 등 시작부터 해산까지의 과정이 담겼다.● “대(對)일본 정보작전에 한인 청년 활용” 사전트 대위와 한국광복군의 첫 만남은 1945년 1월이었다. 이범석 한국광복군 제2지대장(1900∼1972·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은 OSS 내 중국 정보 분석가였던 사전트 대위 등 중국에서 활동하던 OSS 장교들에게 군사합작을 제안했다. 일본군에 강제 동원됐다가 중국에서 탈주한 조선 청년 수백 명을 훈련시켜 연합군의 대일전에 참여시키자는 제안이었다. 그해 1월 31일 사전트 대위는 일본군으로 중국 전선에 배치됐다가 탈출한 조선인 청년들을 중국 충칭(重慶)에서 만났다. 사전트 대위는 작전의 시작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이 계획(독수리작전)이 이범석이 중국 동부에 있는 한국 청년들의 존재를 내게 말했을 때 고안됐다고 기억하고 있다. 한국 청년들은 일본에 있는 학생들이 일본군에 징병됐다가 탈주해 중국 동부에서 발견된다고 했다. (나는) 한인 청년들을 일본에 대한 정보작전에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전트 대위는 ‘OSS-한국광복군 연합 작전 계획’을 수립했고, 그해 2월 24일 ‘비밀정보국의 한국 침투를 위한 독수리작전’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에 소장된 이 보고서에는 요원 60명을 선발해 3개월간 첩보·통신 훈련을 거친 뒤 이들 가운데 적격 요원 45명을 선발하겠다는 훈련 계획과 함께, 이들을 한반도 5개 전략 지점(서울, 부산, 평양, 신의주, 청진)에 침투시킨다는 계획이 담겼다.● “군사집단으로서 가장 지적인 집단” 사전트 대위는 중국에서 만난 조선 청년들에게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1945년 4월 3일 사전트 대위가 OSS에 보고한 문건에는 이날 충칭에서 25km 떨어진 지역에서 그가 만나고 온 조선인 청년 37명에 대해 “군사집단으로서 내가 본 가장 지적인 집단으로, 미군 청년 장교들과 알맞게 비교될 것 같다”며 “그들 모두를 독수리작전 훈련에 참가시키는 것을 제안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한국광복군과 OSS는 제2지대 본부가 있었던 시안에 ‘한미합동지휘본부’를 설치하고, 이범석과 사전트가 양측 지휘관을 맡아 1945년 5월 21일부터 훈련을 진행했다. 사격·폭파를 비롯한 특수훈련과 첩보활동을 위한 무선교신 훈련이 3개월간 진행됐고, 1945년 8월 4일 제1기생이 훈련을 마쳐 적격 요원 50명을 선발했다. 1945년 6월 25일 1차 훈련을 마친 뒤 사전트 대위가 OSS 측에 보고한 문건에는 “기율과 사기가 훌륭하다”며 “(한국인 청년들은) 연합군 전체의 노력에 귀중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범석의 지도력에 대해선 “경의를 표한다”고도 했다. ● 최초의 한미동맹, 독수리작전 OSS 중국본부는 1945년 3월 3일 독수리작전 훈련 계획을 승인했다. 4월 3일에는 김구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1876∼1949)이 계획을 승인했다. 김 주석과 OSS 최고책임자 윌리엄 도너번 소장(1883∼1959)은 1945년 8월 7일 중국 시안에서 만나 국내 침투 작전에 합의했다. 한미가 정식으로 한반도로 진입하는 공동 군사작전에 합의한 것이다. 도너번은 “오늘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미합중국 사이에 적 일제에 대한 공동작전이 추진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며 독수리작전은 미완으로 남았다. 광복 후 OSS는 일제의 수용소에 갇힌 미군 포로를 구하기 위해 서울에 사전트 대위와 독수리작전 대원을 파견했다. 사전트 대위는 “(독수리작전은) 1945년 9월 27일에 끝났다”고 기록했다. 독립기념관이 회고록과 함께 사전트 대위의 아들로부터 입수한 ‘기지 반환 공고문’은 독수리작전이 끝나던 날 작성됐다. 레터 용지 1장 분량의 문서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가 중국 산시성 시안에서 작전기지로 점유해 왔던 사당 두 곳의 토지와 가옥을 미국 OSS가 점유해 사용하는 구두계약을 1945년 4월 15일 체결했는데, 협정이 종결되면서 해당 토지와 가옥을 다시 한국광복군에 양도한다’는 내용이다. 양도 계약의 주체로는 “OSS에 의해 대표되는 미국 정부”가 명시돼 있다. 문서 하단에는 이범석 지대장의 한자 성명과 직인이 찍혀 있고, 증인으로 사전트 대위가 영문 서명을 남겼다. 김도형 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은 “독수리작전과 관련된 한미 간 계약 문건은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에서도 지금껏 확인된 적 없다.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를 대표하는 두 군사기관이 맺은 동맹 관계를 입증하는 문건이 나온 건 처음이다”라고 했다. 그는 “일제에 맞서 한국 독립을 위해 공동의 군사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미동맹 체계의 원형이 갖춰졌다고 본다”고 했다.美 OSS “한국인들 굳건히 조국 위해 맞서 완전 독립 약속해야” “일제 지배하의 한국인들은 용감하게 그리고 굳건하게 그들의 조국을 위해 고문을 받아 왔다. 그러나 희망도 없고 궁극적인 성공에 대한 확신도 없이 그들이 집단적으로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최소한 할 수 있는 것은 그들 개인의 희생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다.”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이 소장한 전략사무국(OSS) 1급 기밀 보고서 ‘한국 독립 승인과 그것이 전쟁에 미치는 효과(Recognition of Korean Independence and Its Effect on the War)’의 일부다. 태평양 전쟁 당시 작성된 5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한국인들에게 전적이고 완전한 독립을 약속하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 반대로 우리(미국)는 이 전쟁을 단축시킬 수 있고 귀중한 미국인의 생명을 아낄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김도형 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은 ‘Project Eagle(독수리작전)’이라는 책을 2017년 미국에서 출간한 한인 2세 로버트 김 변호사로부터 이 보고서를 입수했다. 김 전 연구위원은 “미국 정보기관이 대일전 승리를 위해 한국의 완전한 독립 보장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보고서”라고 설명했다. OSS가 ‘한국의 완전한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한 배경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 요원들과의 두터운 신뢰 관계가 있었다는 분석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3-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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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OSS “한국인들 굳건히 조국 위해 맞서… 완전 독립 약속해야”

    “일제 지배하의 한국인들은 용감하게 그리고 굳건하게 그들의 조국을 위해 고문을 받아 왔다. 그러나 희망도 없고 궁극적인 성공에 대한 확신도 없이 그들이 집단적으로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최소한 할 수 있는 것은 그들 개인의 희생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다.”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이 소장한 전략사무국(OSS) 1급 기밀 보고서 ‘한국 독립 승인과 그것이 전쟁에 미치는 효과(Recognition of Korean Independence and Its Effect on the War)’의 일부다. 태평양 전쟁 당시 작성된 5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한국인들에게 전적이고 완전한 독립을 약속하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 반대로 우리(미국)는 이 전쟁을 단축시킬 수 있고 귀중한 미국인의 생명을 아낄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김도형 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은 ‘Project Eagle(독수리작전)’이라는 책을 2017년 미국에서 출간한 한인 2세 로버트 김 변호사로부터 이 보고서를 입수했다. 김 전 연구위원은 “미국 정보기관이 대일전 승리를 위해 한국의 완전한 독립 보장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보고서”라고 설명했다. OSS가 ‘한국의 완전한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한 배경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 요원들과의 두터운 신뢰 관계가 있었다는 분석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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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평양전쟁 ‘조선출신 군인-군속 사망자’ 2000여명 명부 첫 공개

    ‘경남 진주 태생 1907년생 김○숙. 1944년 7월 24일 제233설영대(노동부대) 군속으로 티니언섬에서 식량 운반 작업 중 단총으로 사살돼 사망.’ 국사편찬위원회는 일제가 벌인 태평양전쟁 당시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조선 출신 군인·군속 사망자 약 2000명의 개인정보와 사망 원인 등이 정리된 명부를 발굴해 14일 처음으로 공개했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해당 명부는 일본 국립공문서관이 소장한 ‘전몰자등원호관계자료(戰没者等援護關係資料)’에 포함돼 있던 ‘조선사연(朝鮮死連·조선인 사망자 연명부)’, ‘사망자원부’, ‘조선육상군인군속유수명부’ 등이다. 1946∼1949년 일본 후생노동성 사회원호국에서 작성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일본 후생노동성이 전후 보상 문제 제기에 대한 기초 자료를 준비하기 위해 자료를 작성했을 것”이라고 봤다. 명부에는 사망-행방불명된 사람의 개인정보를 비롯해 사망 일시와 장소, 사후 처리 내용 등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징병된 조선 출신 인물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지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핵심 사료”라고 설명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3-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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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 전, 간토대지진 피해자 목소리… 상상력으로 되살리고 싶었다”

    “학살에 가담한 일본인들의 증언에서 조선인 학살 피해자들은 잔인하게 난도질당한 시체로 그려졌습니다. 저는 총칼에 스러져간 피해자의 목소리를 되살려내 역사의 빈칸을 채우고 싶었습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다룬 소설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래빗홀·사진)를 15일 출간하는 황모과 작가가 말했다. 일본에서 유학 중인 그를 10일 화상으로 만났다. 황 작가는 2014년 일본 지바(千葉)현 다카쓰칸논지(高津觀音寺)에서 열린 간토대지진 학살 피해자 추도식에 처음 참여한 뒤 9년간 일본인 생존자 증언 자료집과 그들의 후손을 찾아 나섰다. 그는 “처음에는 관찰자로서 참석했지만 9년간 매년 추도식에 참여하며 나 역시 이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하는 주체임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찾아낸 증언에는 학살에 가담하거나 방관했던 일본인의 목소리만 있을 뿐, 조선인 학살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악’, ‘어머니, 아버지’, ‘아이고’와 같은 외마디 비명이 전부였다. 황 작가는 “기록되지 않은 목소리를 소설적 상상력으로 되살려내고 싶었다”고 했다. 소설은 1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1923년과 2023년을 교차한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기술을 이용해 조선인유족회 대리인인 한국 청년 민호와 일본인 유족회 대리인 일본 청년 다카야가 1923년 9월 1∼4일 학살 현장을 조사하는 이야기다. 황 작가는 “오늘을 살아가는 한일 양국의 두 청년이 100년 전 학살의 자리에 존재했던 조선 청년들을 만나게 하고 싶었다. 오늘과 과거가 얼굴을 마주함으로써 그날의 죽음이 학살이란 통칭으로서가 아니라 꿈과 재능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죽음으로 기억되길 바랐다”고 말했다. 황 작가는 학살 현장에 있었던 조선 청년들을 가장 평범한 모습으로 되살려냈다. 주인공 달출과 평세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소시민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조선인에 대한 혐오가 퍼지고 학살이 벌어지자, 죽을 줄 알면서도 위험에 처한 다른 조선인들에게 손을 내민다. 황 작가는 “이들에게도 지키고 싶은 가족과 친구가 있었다”며 “학살의 한복판에서 누군가를 지키며 같이 살고자 했던 평범한 이들을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싶었다”고 했다. ‘살아 있는’ 한 사람의 얼굴로 그날의 진실을 목격한 21세기 청년 민호와 다카야가 내린 선택은 더 이상 방관자로 살지 않는 것이다. 학살 피해를 말하는 조선인유족회 측 주장을 뒤집기 위해 현장 조사에 참여한 다카야는 달라진다. 1∼3차 조사 때만 해도 학살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외면했던 다카야가 4차 조사 땐 다른 선택을 한 것. 황 작가는 “방관자였던 다카야가 학살 현장을 반복적으로 목격하면서 학살의 역사에 책임 의식을 갖게 된 것은 작지만 큰 변화”라고 했다. “스스로를 책임의 주체로 인식하게 된 한일 양국의 미래 세대가 결국 고통스러운 과거사를 새 역사로 만들어낼 열쇠입니다. 이들이 기억하는 한 역사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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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미국의 X세대, 소확행 인류의 탄생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 배꼽이 훤히 보이는 티셔츠에 펑퍼짐한 청바지를 입은 한 20대 여성에게 리포터가 다가가 “남의 시선은 느껴지지 않느냐”고 묻자 나온 대답이다. 1994년 국내 한 방송 뉴스에 나온 이 영상은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던 ‘쿨’한 X세대를 보여주는 밈으로 떠올랐다. 미국 문화평론가가 1990년대 미국의 사회문화를 분석한 이 책의 내용은 이 같은 당대 한국 상황과도 닮은 구석이 많다. 1990년대는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길었던 냉전이 종식되면서 열렸다. 이전 세대가 전쟁과 냉전 등으로 자기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없었다면 1990년대는 달랐다. 저자가 199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로 꼽은 ‘청춘 스케치’(1994년)의 명대사 “거 봐, 우린 이것만 있으면 돼. 담배 몇 개비, 커피 한 잔, 그리고 약간의 대화”처럼,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을 누리게 된 개인이 등장한 것이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정서는 ‘냉소’와 ‘회의주의’다. 저자는 “X세대는 냉전 이데올로기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베이비붐 세대에 대해 반사적 혐오감을 가졌다”며 “1990년대 초 젊은이들의 새로운 목표는 재미없는 주류 사회로부터 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고 봤다. 록 밴드 너바나가 1991년 발매한 앨범 ‘Nevermind’는 당대 정서를 대표한다. 싱어송라이터 커트 코베인이 무미건조하게 읊조리는 “신경 꺼”란 가사는 세상일과 거리를 두려 했던 X세대의 공감을 샀다는 분석이 나온다. 저자는 1990년대를 끝낸 결정적 사건으로 1999년 컬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과 2001년 9·11테러 사건을 꼽는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 벌어진 두 사건 이후 사람들은 세상일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게 됐다. 너무 평범해서 때론 지루하다고 냉소해왔던 일상이 사실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쉬운 것임을 자각한 것. 한국의 X세대 영화평론가 김도훈 씨는 “지구 역사상 마지막 낭만의 시절에 바치는 사랑 고백이자 이별 노래”라며 이 책을 추천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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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갈데 없는 아이들 707명… 월급쟁이였던 나를 선생 만들어”

    “‘하룻밤만 재워 달라’며 저를 찾아온 아이들의 용기가 ‘월급쟁이’였던 저를 선생으로 만들었습니다.” 최근 에세이 ‘선생 박주정과 707명의 아이들’(김영사)을 펴낸 박주정 광주 진남중 교장(60)은 8일 전화 인터뷰에서 아이들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박 교장은 1993∼2003년 광주 자신의 집에서 가난과 학교폭력 등으로 학업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들과 함께 살았던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 아이들과의 첫 만남은 1993년 6월 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2년차 교사였던 그의 집에 학생 8명이 들이닥쳤다. 그가 담임을 맡은 광주의 실업계고 학급의 ‘문제아’들이었다. 술 냄새가 났다. 오밤중에 아이들을 내쫓을 수 없어 받아줬는데, 그렇게 4개월이 흘렀다. 그는 “33㎡ 집에서 세 식구 살기도 빠듯했지만 가족마저 외면한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내쫓을 수 없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시작한 동거가 아이들을 바꿨다. 그와 함께 산 학생들이 기말고사에서 전교 1∼7등을 차지한 것. 박 교장은 “‘문제아’들인 줄 알았는데, 사실 강한 삶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했다. 꿈이 생긴 아이들은 그해 10월 박 교장의 집을 떠나며 오토바이 절도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던 학생 무리를 데려왔다. “이젠 이놈들 사람 만들어 달라”면서. 박 교장은 결국 4000만 원을 대출받아 학교 근처에 방 다섯 칸짜리 전셋집을 얻었다. “10년간 그 집을 거쳐 간 학생들이 707명입니다. 제가 선택해 집으로 데려온 아이는 한 명도 없었어요. 아이들 스스로 자기와 닮은 아이들을 데려왔습니다.” 진수(가명)는 그에게 주먹을 휘둘렀던 학생이었다. 어느 날 새벽 곁에 말없이 앉아 아이가 쏟아내는 폭언을 4시간 동안 들어주자 그제야 속내를 털어놨다.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자신을 학대하는 할아버지와 살며 자살충동에 사로잡혔다는 얘기였다. 그는 “붙들고 같이 울어준 것밖에 없는데, 진수는 그날 이후 마음을 다잡고 학업에 열중해 대학을 졸업한 뒤 지금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며 “아이들의 몸부림엔 ‘살려 달라’는 외침이 담겨 있었다”고 했다. 박 교장은 2004년부터 광주시교육청 장학사로 근무하며 학교 부적응 학생을 위한 단기 위탁교육시설 ‘금란교실’을 개설했고, 2008년엔 대안학교 ‘용연학교’를 설립했다. “제도를 만들어 사회와 함께 아이들을 지키고 싶어서”였다. 약 20년간 장학사로 일하며 교권 침해 현장을 봤던 그는 후배 교사를 향해 이렇게 당부했다. “교권 침해로 괴로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하지만 어떤 때에도 교사의 책임과 의무는 변하지 않아요. 우리의 한마디가 한 아이에게 평생의 원망이 될 수도, 희망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3-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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