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민

박성민 차장

동아일보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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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부터 죽음까지, 보건복지 분야를 취재합니다. 원인의 원인의 원인이 뭘까 고민합니다.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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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9~202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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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고거래 신뢰 쌓이니 이용자 머무는 시간도 늘어”

    가입자 2100만 명. 주간 순이용자(WAU) 1000만 명. 이 정도면 ‘국민 애플리케이션(앱)’이라고 부를 만하다. 전국 가구 수(약 2336만 가구)를 감안하면 가족 중 한 명은 이 앱을 쓰는 셈이다. 중고 거래에서 시작해 지역 밀착 커뮤니티 서비스로 진화 중인 당근마켓 이야기다. 당근은 ‘당신 근처’의 줄임말이다. 2015년 직장인 기반 플랫폼인 판교장터로 시작해 2018년 전국으로 무대를 넓혔다. 2018년 1월 50만 명이었던 월간 순이용자(MAU)는 최근 1500만 명을 넘었다. 당근마켓 김재현 공동대표(42)를 최근 서울 강남구 본사에서 만났다. 문방구, 기찻길 등 회사 곳곳에 붙여 놓은 공간 이름이 독특했다. 지역 기반 서비스를 지향하는 당근마켓의 정체성과 닮아 있었다. 김 대표는 “인터넷과 모바일이 발달하면서 먼 거리를 연결하는 것만을 가치 있게 여겨 왔다. 반대로 내가 사는 동네, 내 이웃을 연결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근마켓의 아이디어는 김 대표와 김용현 공동대표가 함께 근무하던 카카오의 사내 중고 거래 게시판에서 얻었다. 좁은 서비스 범위, 거래자 간 높은 신뢰도, 이용자의 높은 체류 시간 등 게시판의 성공 요인을 당근마켓에 그대로 옮겼다. 당근마켓은 중고 거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기를 당하거나 거래에 실망했다는 ‘거래 불만’ 비율은 0.7% 미만이다. 신뢰도를 높인 요인 중 하나가 매너온도다. 36.5도로 시작해 상대의 평가에 따라 변화한다. 김 대표는 “일주일에 서너 번씩 앱을 업데이트할 만큼 고객의 요구를 적극 반영한 결과”라고 말했다. 이용자 간 신뢰가 쌓이면서 기존 지역카페 기능도 대체하고 있다. 맛집 문의, 취미 공유 등이 이뤄지는 동네친구 서비스는 최근 MAU가 600만 명을 넘었다. 김 대표는 “네이버 검색보다 내 지역 정보 찾기에 유리하고, 폐쇄형 커뮤니티인 맘카페보다는 접근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커뮤니티로 진화하면서 이용자들이 머무는 시간도 늘었다. 글로벌 데이터 조사기관 앱애니에 따르면 가입자 1명당 월평균 64회 당근마켓에 들어와 2시간 2분 동안 머물렀다.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미국의 넥스트도어(25회, 51분)보다 이용자들과 더 깊은 친밀도를 유지했다는 의미다. 당근마켓은 최근 1789억 원 규모의 시리즈D 투자를 유치했다. 시장에서 평가받는 기업가치는 3조 원. 유통 대기업들의 시가총액과 맞먹는 규모다. 2019년 글로벌 버전 캐롯(Karrot)을 출시한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일본 등 4개국 72개 지역에 진출했다. 아직 갈 길은 멀다. 당근마켓의 목표는 전 세계 이용자 20억 명이 쓰는 글로벌 서비스다. 가입자 수 2000만 명을 넘겼으니 목표의 1%를 이룬 셈이다. “증시 상장보다는 탄탄한 수익구조를 만드는 게 먼저예요. 무리한 투자보다는 원래 속도대로 조금씩 앞을 바라보고 갈 겁니다. 당근마켓이 이렇게 잘될 줄 만들 땐 몰랐으니까요.”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 2021-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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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소리만 들어도 고객의 미세한 감정 떨림이 보여요”

    지난달 23일 서울 강남구의 한 공유 오피스. 바닥만 볼 수 있게 시야를 가린 특수 안경을 쓰고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기자를 방으로 안내한 직원은 작은 호출기를 건넸다. 나가고 싶어지면 버튼을 누르라고 했다. 푹신한 의자와 나지막한 음악에 마음이 착 가라앉다가도 낯선 어둠에 이내 신경이 곤두섰다. 그 순간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어둠이 불편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그는 자신을 ‘어린왕자’라고 소개했다. 이곳은 익명이 원칙이다. 기자도 ‘노트’라는 대화명을 정했다. “어떤 고민 때문에 오셨나요.” 잠깐 체험만 하고 나올 생각이었지만 종료 3분을 알리는 신호가 울릴 때까지 속엣말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들이었다. 녹취를 들어보니 50분의 대화 중 어린왕자의 목소리는 5분 남짓. 45분 동안 고민을 털어놓은 기자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안정과 여유를 찾는 것처럼 들렸다.○ 어둠 속에서 327명의 마음을 보듬다 이날 기자가 이용한 서비스는 여느 상담과 다르다. 정확한 이름은 ‘블라인드 마음보듬’이다. 시각장애인 ‘마음보듬사’와 50분간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는 서비스다. 철저한 익명으로 진행되고 끝날 때까지 상대방의 얼굴도, 방의 구조까지도 알 수 없다. 모든 걸 지우고 오직 대화에만 집중하기 위해서다. 일반 심리상담이 진단이나 치유가 목적이라면 이곳은 경청과 공감이 중심이다. 활동 중인 마음보듬사는 7명. 보건복지부와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 인증한 마음보듬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주체는 서울대 동아리 ‘봄 그늘’이다. 창업 동아리실에 모인 친구들은 누구에게나 ‘터놓고 말할 곳’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우울감에 시달리거나 고민이 있어도 병원에 가거나 심리상담 받기를 꺼려하는 친구가 많았다. 상담 기록이 남는 걸 원치 않았고 비용 부담도 진입 장벽이었다. 그러다 떠올린 게 ‘어둠’이다. 어둠 속에선 상대의 시선을 신경 쓰거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 오직 내 목소리에만 집중한다. 그런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적임자가 시각장애인이었다. 정서현 매니저(20)는 “시각장애인은 어둠 속에서 장시간 일하는 데 비장애인보다 적응이 쉽다”고 말했다. 2018년 5월부터 강남구 공유 오피스와 관악구 사무실 등 2곳에서 ‘봄 그늘’ 소속 학생들이 운영하기 시작한 마음보듬 서비스에는 지금까지 327명이 다녀갔다. 총 마음보듬 횟수는 679회. 평균 2회 이상 이용할 만큼 재방문 고객이 많다. 3년째 꾸준히 대화하러 오는 고객도 있다. 평점은 5점 만점에 4.82점을 기록할 정도로 만족도가 높다. 정 매니저는 “전문 상담을 받다가 마음보듬으로 옮겨 오신 분도 있다. 상담의 대체재 혹은 보완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보이지 않아서 더 잘 보인다 마음보듬을 받은 뒤 밝은 곳으로 나와 어린왕자 A 씨(54)와 마주 앉았다. 2018년 봄 그늘에 합류해 지금까지 약 200회의 마음보듬을 진행한 베테랑이다. 그는 망막색소변성증으로 2008년 장애 판정을 받았다. 점차 시력이 나빠져 완전히 시각을 잃게 되는 질병이다. 지금도 볼 수 있는 범위가 90도가 채 안 된다.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던 A 씨는 2003년부터 심리상담을 배우기 시작했다. 공부에 욕심이 생겨 3년 뒤엔 대학에도 진학했다. 하지만 비장애인 석박사가 넘치는 심리상담 영역에서 상담사로 일할 기회를 얻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10년 넘게 공부한 게 물거품이 되나 싶었던 순간 마음모듬사 모집 공고를 보게 됐다. A 씨에게 상대의 표정이나 반응을 보지 못하면 대화가 더 어렵지는 않은지 물었다. “청각에만 의존하면서 상대를 더 깊게 알게 돼요. 호흡이나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에서 고객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느껴져요. 들어와서 앉을 때 의자 소리에서도 감정이나 심리 상태가 드러나거든요.” 오전엔 병원 사무보조원으로, 오후엔 마음보듬사로 일하는 A 씨는 저녁엔 대학원까지 다닌다. 전공은 예술심리다. 음악 심리상담과 미술 심리상담 자격증도 있다. 시각을 잃어가는 중에도 색채 심리상담을 공부하는 이유를 A 씨는 “빛을 보는 순간까지는 색을 느끼고 싶어서”라고 말했다.○직업의 한계를 넓히다 마음보듬이나 심리상담은 시각장애인에게 어울리는 직업이지만 기회는 제한적이다. A 씨는 “시각장애인 중에는 사회복지나 심리상담 자격증을 가진 분이 많다. 그런데 이들이 일할 기회는 충분치 않다”고 아쉬워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15세 이상 시각장애인은 25만1565명. 이들의 고용률은 42.3%에 그쳤다. 전체 장애인 고용률 34.9%보다는 높지만 전체 고용률(60.2%)에는 한참 못 미친다. 마음보듬사가 의미 있는 것도 시각장애인의 직업적 한계를 넓혔다는 점이다. B 씨(26·활동명 ‘좋은’)는 2017년 레버 시신경 위축증으로 중증 장애 판정을 받았다. 재활 과정의 동료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상담의 매력에 빠졌다. B 씨는 “장애 판정을 받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크게 좌절했다. 그때 마음보듬사를 알게 되면서 다시 꿈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대화를 통해 스스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됐다는 고객들, 어둠이 예전처럼 무섭지 않고 포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는 후기를 보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어릴 적 의료사고로 시각장애가 생긴 C 씨(38)는 헬스키퍼(안마사)와 마음보듬사를 병행하고 있다. 그는 “특수학교를 다니면 대부분 안마를 배우고 다른 직업을 선택할 기회는 거의 없다”며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직업 영역을 나눠 생각하는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요정 할머니가 나타난 기분” 마음보듬 50분 이용료는 3만5000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대면 서비스에 제약이 생기면서 전화 상담(2만5000원)도 시작했다. 이 중 1만3000원이 마음보듬사 몫이다. 남은 수익은 거의 운영비로 쓰인다. 사회 경험이 많지 않은 학생들이 프로젝트까지 운영하는 게 쉽지는 않다. 급여도 없다. 공간 대여료 외에 운영비는 격월로 진행되는 마음보듬사 교육에 쓴다. 전문기관에 상담 교육을 의뢰한다. 마음보듬을 시작하기 전 80시간의 사전 교육을 받고 실습도 하지만 다양한 고객의 고민을 보듬으려면 역량을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봄 그늘 멤버들이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고객 후기를 볼 때다. 한 고객은 “동화 같았다. 언제나 내 편인 요정 할머니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다”는 후기를 남겼다. 정 매니저는 “학업과 병행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활동 기간 1년 동안 마음보듬사와 고객들께 배우는 게 더 많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A 씨에게 ‘어린왕자’라는 활동명을 정한 이유를 물었다. “어린왕자가 낙천적이잖아요. 저랑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점점 시각을 잃어 전맹(全盲)이 될 때까지 저 역시 사막을 여행하고 있거든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그날을 대비해 배우고 깨칠 것도 많고요.” 10월 15일은 시각장애인의 자립과 성취, 기본권을 생각하자는 의미로 제정된 ‘흰 지팡이의 날’이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 2021-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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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고거래 하러 왔다가 위로 받고 간다…할머니부터 손자까지 ‘1일 1당근’ 시대[박성민의 이노베이터]

    가입자 2100만 명, 월간이용자(MAU) 1500만 명. 주간이용자(WAU) 1000만 명. 이 정도면 가히 ‘국민 애플리케이션(앱)’이라고 부를 만하다. 전국 가구수(약 2336만 가구)를 감안하면 가족 중 한 명은 이 앱을 쓰는 셈이다. ‘1가구 1당근’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거래 상대를 확인하며 건네는 첫 인사 “당근이세요?”는 유행어가 됐다. 중고 거래에서 시작해 지역 밀착 커뮤니티 서비스로 진화 중인 당근마켓 얘기다. 앱 다운로드 수가 많다고 그 서비스가 반드시 성공적인 건 아니다. 방문 빈도가 높고 체류 시간이 길어야 한다. 글로벌 데이터 조사기관 앱애니에 따르면 가입자 1명당 월 평균 64회 당근마켓에 들어와 2시간 2분 동안 머물렀다.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미국의 넥스트도어(25회, 51분)보다 이용자들과 더 깊은 친밀도를 유지했다는 의미다. 당근은 ‘당신 근처’의 줄임말이다. 2015년 판교장터로 시작, 2018년 전국으로 무대를 넓힌 당근마켓은 MAU 기준으로 3년 새 30배의 성장을 이뤘다. 유니콘(가치 1조 원 이상 스타트업) 기준도 훌쩍 뛰어넘었다. 이런 성공을 거뒀음에도 스스로를 “홈런 치는 개발자는 아니다”라고 소개하는 김재현(42) 공동대표를 최근 서울 강남구 당근마켓 본사에서 만났다. ● 비대면의 시대에 대면을 강조한 서비스 문방구, 기찻길, 나무그늘…. 회의실, 휴게실, 복도 등 사무실 곳곳에 붙여 놓은 이름이 독특했다. 동네에서 봄직한 장소들이다. 지역 기반 서비스를 제공하는 당근마켓의 정체성을 옮겨 놓은 것. 동네 아저씨 같은 수수한 옷차림으로 나타난 김 대표에게 ‘지역’에 그렇게 집중하는 이유를 물었다. “인터넷이 대중화 된 게 20년, 모바일은 10년쯤 됐지만 그동안 많은 서비스들이 먼 거리 연결만을 가치 있게 여겼던 것 같아요. 저희는 반대로 생각했어요. 내가 사는 동네가 궁금하고, 이웃과 교류하고 싶은 욕구가 분명 있으니까요. 그런 연결에서 새로운 가치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당근마켓의 아이디어는 김 대표와 김용현 공동대표가 함께 근무하던 카카오의 사내 중고거래 게시판에서 얻었다. 서비스 범위가 좁으니 거래가 편했고, 같은 직원들끼리 거래라 신뢰도 높았다. 가성비 좋은 물건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직원들은 수시로 드나들었고, 체류 시간도 길었다. 이런 성공 비결을 당근마켓에 그대로 옮겼다. 판교장터에서 서비스 지역을 넓히면서 바뀐 이름이 당근마켓이다. 당시 김 대표가 생각한 회사명은 ‘끼리장터’, ‘완소비’ 등이다. 완소비는 ‘완전한 소비’의 줄임말이다. 생산과 소비 주기가 빨라지면서 피할 수 없게 된 환경 문제에서 착안한 작명이었다. 사명으로 채택되진 않았지만 ‘완소비’는 당근마켓 경영 철학의 하나로 남았다. 당근마켓은 매달 자원 재사용으로 얻게 된 탄소저감 효과를 수치로 보여 준다. 지난해엔 당근 거래로 약 2777만 그루의 나무를 심은 효과를 냈다. 김 대표는 수시로 환경 동향이나 관련한 유튜브 콘텐츠를 찾아본다. 원래 물건을 버리는 걸 싫어하는 성격인데다가 아파트 단지의 넘쳐나는 재활용 쓰레기를 보면서 중고거래의 필요성을 더 실감했다. 그는 “최근 수도권의 쓰레기 매립지 문제가 심각하다고 들었다”며 “당근마켓이 이런 문제를 해소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개발자들이 가고 싶어하는 회사취업 준비생이나 이직을 꿈꾸는 직장인 사이에선 ‘네카라쿠배당토’가 최근 화제다. 네이버, 카카오, 라인, 쿠팡, 배달의민족, 당근마켓, 토스 등 성공한 스타트업을 선망하는 젊은 세대의 바람을 담은 신조어다. 몇 달 전엔 애플 개발자 공모전에서 입상한 한 고교생이 “당근마켓이나 쿠팡 개발자로 취직하는 것이 목표”이라는 포부를 밝혀 업계에서 화제가 된 적도 있다. 거침없는 성장세를 보이고 있지만 정작 김 대표는 몸을 낮췄다. “저희 빼곤 모두 직원 1000명 이상 기업이잖아요. 그런 기업들 사이에 낀 것만으로도 영광이죠. 아직 개척이 덜 된 ‘로컬’이라는 시장에 많은 개발자들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아요.”여느 스타트업처럼 당근마켓도 새로운 시도, 직원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다만 그런 분위기가 성과로 이어지도록 판을 깔아주는 건 리더의 몫이다. 개발자 출신인 김 대표는 누구보다도 그 중요성을 잘 안다. “어떤 프로젝트를 두고 어디선가 회의적인 반응이 나올 때면 ‘처음엔 부족해 보일 수 있지만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얘길 많이 해요. 그 팀을 믿어보는 거죠. 당근마켓을 시작할 때도 ‘이게 되겠어?’라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지만 토론하고 개선점을 찾으면서 결국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당근마켓에선 연차나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 수시로 팀을 꾸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데 주니어 직원, 심지어 인턴사원이 PM(프로젝트 매니저)을 맡는 팀도 있다. 김 대표는 “PM은 전통적인 회사의 팀장, 리더와는 성격이 다르다. 팀이 잘 돌아가도록 업무를 조율하고 뭘 더 해야 하는지 설득하는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연공서열에 얽매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연차가 적다고 역량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당근마켓은 최근 월 20~30명씩 채용할 만큼 몸집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 직원 수는 올해 안에 300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초기 스타트업의 수평적 문화를 유지하기 쉽지 않은 규모다. 김 대표는 그럴수록 전 직원들의 소통을 강조한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문화의 날’은 모든 직원이 모여 조직 문화를 토론하는 시간이다. 구체적인 답을 찾기보단 회사의 리더십, 지켜야 할 가치 등을 터놓고 얘기하는 자리다. “규모가 커질수록 상위 직급자만 공유하는 정보가 생길 수밖에 없죠. 그래도 꾸준히 타운홀 미팅을 해요. 각 팀들이 서로의 업무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궁극적으로는 회사와 함께 구성원들도 성장하는 문화를 만들고 싶어요.” ● 취업, 스카우트, 창업, 인수, 또 창업 김 대표도 취업과 창업을 반복하며 회사와 함께 성장한 경우다. 두 번째 회사를 다니다 2007년 네이버 개발자로 스카우트됐다. 안정적인 직장인 네이버를 박차고 나오게 만든 건 아이폰이었다. 모바일의 시대, 새로운 놀이터가 생기는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창업을 꿈꿨던 김 대표에겐 기회의 문이 열린 것처럼 느껴졌다. 2009년 11월 아이폰이 국내 출시되자마자 사표를 내고 이듬해 2월 첫 회사를 차렸다. “전부터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만드는 데 관심이 많았어요. 회사 다니면서는 네이버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에 왜 올랐는지 알려주는 웹사이트를 만든 적도 있어요. 트위터가 처음 나왔을 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잘 안 됐죠.” 첫 창업(씽크리얼즈)은 성공적이었다. 온라인 의류 쇼핑몰을 모아 놓은 포켓스타일, 소셜커머스 검색 서비스 쿠폰모아 등이 연달아 히트했다. 설립 1년 만에 흑자를 낸 젊은 개발자들을 업계에서 가만둘 리 없었다. 씽크리얼즈는 창업 2년 만에 카카오에서 57억 원에 인수됐다. 재밌는 건 카카오가 곧 서비스를 양도했다는 사실. 결국 카카오는 김 대표를 포함한 개발자들의 가능성에 배팅한 셈이다. ‘천재 개발자’라는 수식어가 뒤따랐지만 늘 성공만 했던 건 아니다. 카카오에서 김용현 대표와 야심차게 준비했던 맛집 리뷰 서비스인 카카오 플레이스는 대실패였다. “모든 프로젝트, 모든 스타트업이 성공할 순 없어요. 시행착오를 어떻게 경험과 실력으로 만드는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홈런 치는 개발자’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고객이 뭘 좋아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했던 게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아요.”● 사기 걱정 없는 중고거래 문화 정착 당근마켓을 써본 뒤 이웃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는 이용자가 많다. 당근마켓에서 이웃은 ‘믿고 거래할 수 있는 타인’이고, 예전 품앗이처럼 ‘시간과 노동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거래 후기에서 ‘별로에요’를 선택한 비율은 0.7% 수준이다. 그만큼 사기를 당하거나 실망한 경험이 적다는 의미다. 이용자 간의 신뢰를 높인 요인 중 하나가 매너온도다. 36.5도로 시작해 거래 후기 등 상대의 평가에 따라 올라가거나 내려간다. “언제나 답을 주는 건 이용자들이었어요. 매너온도도 상대방이 얼마나 믿을만한 거래자인지 알고 싶어 하는 이용자들의 요구를 반영한거죠. 서비스 초기엔 이용자 반응에 따라 일주일에 서너 번씩 앱을 업데이트 한 적도 있어요.”중고거래로 시작했지만 당근마켓의 목표는 지역 밀착 커뮤니티 서비스다. 올 5월 선보인 ‘내근처’도 그 중 하나다. 이웃들이 직접 입력하고 추천한 맛집, 알바 구인 정보 등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동네생활’은 커뮤니티 서비스다. 특정 아이스크림을 파는 편의점을 궁금해 하면 몇 분 안에 “OO아파트 정문 옆 편의점에 있다”는 답이 올라온다. 같이 배드민턴을 칠 친구를 찾고, 붕어빵 파는 곳이 어디인지 묻는다. “취업 준비하면서 생긴 우울증 때문에 갈 만한 병원을 찾는다”는 글엔 응원 글이 줄줄이 달린다. “병원 정보는 몰라도 네일이라도 해 주고 싶으니 연락달라”는 이웃도 있다. 김 대표는 “네이버 검색 서비스보단 내 지역 정보를 더 빨리 찾을 수 있고, 폐쇄형 커뮤니티인 맘카페보단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동네생활은 최근 MAU가 600만 명에 이를 만큼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당근마켓은 최근 1789억 원 규모의 시리즈D 투자를 유치했다. 시장에서 평가하는 기업 가치는 3조 원에 이른다. 유통 대기업들의 시가총액과 맞먹는 규모다. 2019년 영국에서 출시한 글로벌 버전 앱 캐롯(Karrot)을 시작으로 캐나다, 미국, 일본 등 4개국 72개 지역에 진출했다. 그동안 ‘국민 앱’이라고 불려 온 서비스들은 상당수가 거리 제약을 없앤 ‘비대면’ 기반이다. 카카오톡, 배달의민족, 쿠팡 등이 그렇다. 만나지 않고서도 대화하고 쇼핑하는, 오프라인의 일상을 온라인으로 옮긴 서비스다. 당근마켓은 이런 성공 문법을 바꿨다. 지역을 세분화하고, 이웃과의 연결을 강조했다. “당근마켓 안에서는 세대간 장벽도 무너지는 걸 느낍니다. ‘첫 월급으로 부모님 선물을 사 드리고 싶은데 어떤 옷이 좋을지 모르겠다. 골라 달라’는 글과 사진이 올라오면 중장년 이용자들이 ‘이 나이엔 이런 걸 좋아한다’고 답을 해줘요. 할머니와 손자가 함께 이용하는 거의 유일한 커뮤니티 아닐까요.” 당근마켓의 목표는 전 세계 이용자 20억 명이 쓰는 글로벌 서비스다. 가입자수 2000만 명을 넘겼으니 목표의 1%를 이룬 셈이다. 가야할 길이 멀지만 김 대표는 한 발짝씩 천천히 걸음을 옮길 생각이다. “상장을 서두르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탄탄한 수익구조를 만드는 게 먼저겠죠. 우리의 속도대로 조금씩 앞을 바라보고 하는 게 사업인 것 같아요. 당근마켓이 이렇게 잘 될 줄도 만들 땐 몰랐으니까요.”박성민 기자 min@donga.com}

    • 202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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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이 마지막 생일파티 아니길”… 병원-집 오가며 ‘재활사투’

    《‘멘케스병’은 선천적으로 구리의 흡수와 전달에 문제가 있는 희귀 유전 질환이다. 남자 아이 10만∼25만 명 중 1명꼴로 발병한다. 국내에서도 한 해 1, 2명이 진단을 받는다. 퇴행성 신경장애를 겪다 대개 3세 이전에 사망한다. 현재 국내 생존자는 10명 남짓으로 알려졌다. 2018년 엄마 3명이 단체 채팅방을 만들었다. 현재는 일곱 가족이 있다. 응급 입원 후 경과는 어떤지 묻고, 신약 개발 소식이 들리면 공유한다. 남은 시간이 얼마가 됐든 아직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는 멘케스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2019년 3월. 임서영 씨(34·여)는 아들 지오 군(3)이 멘케스병 의심 진단을 받은 그날을 잊지 못한다. 병명만 듣고선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소식을 듣고 직장에서 먼저 멘케스병을 검색해 본 남편 김효곤 씨(40)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3세 이전 사망.’ 여섯 글자만 눈에 들어왔다. 인터넷을 더 뒤져봐도 생존율이나 치료법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기적은 없지만 포기도 없다 지오는 백일이 지났는데도 좀처럼 목을 가누지 못했다. 처음엔 그저 발달이 조금 느린 줄만 알았다. 감기 때문에 간 동네 소아과에서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워낙 드문 병이라 대학병원에서도 정확한 진단을 못 내렸다. “유전자 검사를 해 봐야겠지만 멘케스가 맞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간 병원에서 마침 이 병에 관한 박사논문을 쓴 전문의를 만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몇 주 동안 지오를 유심히 관찰했다. 멘케스병이 아니라는 근거를 찾고 싶었다. “멘케스병 아이들은 경련도 잦고, 음식 섭취도 잘 못한다고 하는데 지오는 달랐어요. 주위에서도 ‘늦되는 아이들이 있다. 걱정 마라’고 했죠.”(임 씨) 확진 후에는 ‘경증 멘케스는 아닐까’ 기대도 했다. 찾아보니 해외에는 지적 장애가 있어도 일상생활이 가능한 환자도 더러 있었다. 걷고 말도 했다. 그래서 재활도 더 열심히 했다. 병원에선 뼈가 잘 부러질 수 있으니 운동을 조심하라고 했지만 아랑곳 않고 일주일에 5번씩 재활을 다녔다. 기특하게도 지오는 힘든 과정을 잘 버텨줬다. 멘케스 가족들은 다른 난치병 환자들처럼 완치의 기적을 꿈꾸지 않는다. 임 씨는 “처음에는 ‘왜 아직도 못 고치는 병이 있나’ 원망도 많이 했다. 몇 년을 사느냐의 차이일 뿐 결론이 정해져 있다는 게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했다. ○“어린이집에서 보내 온 사진에 울컥” 멘케스병의 3분의 2는 모계 유전으로, 나머지는 가족력 없이도 발병한다. 지오는 후자다. 임 씨는 보인자가 아니지만 지난해 둘째를 가졌을 때 부부는 덜컥 겁이 났다. 아들이라 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정확한 검사가 가능한 14주차까지 두 달 넘게 마음을 졸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태명도 짓지 않았다. 생후 6개월인 도아는 다행히 또래보다 크고 건강하게 자랐다. 들쭉날쭉하던 지오의 컨디션도 올 들어 눈에 띄게 안정됐다. 올 초 음식물을 넣어주는 위루관과 오줌을 빼는 도뇨 장치를 단 뒤부턴 부기가 빠지고 체중은 부쩍 늘었다. 최근엔 네 식구가 처음으로 2박 3일 강원 속초 여행을 다녀왔다. 지오의 첫 여행, 첫 바다였다. 둘째 덕에 입소 대기 순위가 높아져 장애 전문 어린이집에도 다닐 수 있게 됐다. 남들 다 다니는 어린이집이지만 부부에겐 더없이 특별하다. 임 씨는 “병원과 집 외에도 지오가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하다”며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신기하고 울컥한다”고 했다.○부모의 ‘마음 건강’도 중요 “예전처럼 마음껏 못 안아주는 게 가장 미안해요.” 14일 경기 화성시 자택에서 만난 ‘멘케스 맘’ 정현주(가명·46) 씨는 누워 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박정인(가명·10) 군은 다음 달 열 번째 생일을 맞는다. 국내 멘케스 환자 중 가장 나이가 많다. 부모는 매년 이번이 마지막 생일이 아니길 기도한다. 정 씨는 “2년 전까지는 병원에서 그만 내려놓으라고 할 정도로 들어서 안고 있었는데, 이젠 혼자 일으키기도 힘들다”며 안타까워했다. 보통 아이들은 클수록 활동 반경이 넓어지지만 멘케스병은 반대다. 침대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진다. 근육의 수축하는 힘(근긴장)이 떨어져 거동이 부자연스럽다. 정인이도 고관절이 빠져 있는 상태다. 수술을 받아야 하지만 출혈이 많고 위험을 감수해야 해 엄두가 안 난다. 10년째 거동이 힘든 아이를 돌보면서도 정 씨는 “별로 힘들었던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5년 전 기관절개 수술을 받은 뒤 정인이 상태가 안정된 것도 있지만 정 씨 스스로가 마음의 여유를 찾은 게 컸다. 3년째 활동보조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정인이에게 쓸 에너지를 아끼는 법을 배웠다. 올 4월부턴 정인이가 다니는 병원의 소아완화의료팀 상담도 시작했다. 정 씨는 “아픈 아이를 돌보려면 부모의 마음 건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어린이집, 재활센터는 항상 ‘대기 중’ 멘케스병은 아직 마땅한 치료법이 없다. 일찍 발견했을 경우 구리를 투약하기도 하지만 병의 진행을 막기보다는 생명을 조금 더 연장시키는 정도다. 그마저도 유전적 결함이 심하거나 병세가 진행된 후에는 효과가 거의 없다. 이범희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센터 교수는 “늦어도 생후 한 달 이내, 더 빨리는 태아 단계에서 치료를 시작해야 구리 주사의 효과가 있다지만 멘케스병의 특성상 조기 발견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아이가 커 갈수록 부모의 어깨는 무거워진다. 가래 흡입 장치를 달고 있는, 20kg이 넘는 아이를 엄마 혼자 옮기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장애인 택시를 부르면 2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 집에 가는 길에 산소가 부족할까 봐 병원 복도에서 산소공급 장치를 충전하며 기다리는 일도 허다하다. 멘케스병 부모들에겐 아이가 집과 병원 외엔 갈 곳이 없다는 게 가장 서글프다. 지오가 다니는 어린이집은 경기 하남시에서 유일한 장애 전문 어린이집이다. 서울 8곳, 경기 21곳 등 전국에 176개소(2019년 기준)가 있다. 장애 통합 어린이집(1100개소)도 있지만 장애 아동의 몫은 정원의 20% 이내다. 중증 장애를 다룰 인력도 부족해 주로 경증 장애 아동들이 이용한다. 재활시설은 ‘재활 난민’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부족하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올 1월 기준 국내 장애 아동 29만 명 중 재활치료를 받는 아동은 6.7%에 불과하다. 지오도 여러 재활기관에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씩 대기를 걸어 두고 순서가 돌아오면 치료를 받고 있다. 김 씨는 “재활을 다니면 몸에 버티는 힘이 생기고 눈빛도 또렷해지는 게 보인다”며 재활 기회가 더 늘어나길 희망했다. 멘케스병 아이를 키우며 가족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가족이 함께 외식하고 산책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 아주 감사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정 씨) “둘째 도아도 형을 기억하겠죠.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친구에 대한 편견 없이 자라줬으면 좋겠어요.”(임 씨)하남·화성=박성민 기자 min@donga.com}

    • 2021-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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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타버스’로 그려낸 지구촌 어린이 135만명의 꿈

    천장과 벽이 온통 하얗게 뒤덮인 미술관 로비를 지나 서너 개의 문을 통과하면 아프리카 잠비아의 한 초등학교 교실 앞에 도착한다. 교실 벽에는 아이들의 그림 15점이 걸려 있다. 뭉가 오스왈드 군은 병원을 그렸다. “안과 의사가 돼 앞을 못 보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고 쓴 작품 설명에선 잠비아의 열악한 의료환경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곳은 진짜 학교가 아니다. 월드비전 엽서그리기 대회에 참여한 잠비아 초등학생들의 작품을 전시한 가상현실(VR) 전시장이다. 다른 방에는 한국 학생들의 작품도 전시돼 있다. 대상(교육부장관상)을 받은 당선혜 양(매포초 3년)은 인종별로 다양한 색깔로 채색한 얼굴과 무럭무럭 자라는 벼를 같이 그렸다. 당 양은 “배고픈 사람이 없는 세상을 그렸다”며 작품을 소개했다. 월드비전 엽서그리기 대회는 ‘함께 꿈꾸는 세상’을 그림으로 표현해 전 세계 모든 아이들의 꿈을 응원하는 캠페인이다. 2013년 지역 대회로 시작해 2019년부터 전국대회로 확대됐다. 올해 참가자는 135만5585명으로 지난해(70만 명)의 거의 두 배로 늘었다. 그동안 오프라인으로 진행됐던 이 대회는 올해 처음으로 메타버스(가상세계)를 접목했다. 어린이들에게 인기 있는 게임인 마인크래프트를 통해 ‘랜선 자립마을’을 지었다. 아프리카 케냐의 학교, 보건소 등 현지 모습을 실감 나게 재현해 지구촌 반대편 아이들의 삶을 간접 체험하는 경험을 제공했다. 올해 대회에는 잠비아 학생 100명도 참가했다. 아이들은 그림에 선생님이 돼 아이들을 가르치고, 목수가 돼 마을 사람을 돕겠다는 꿈을 담았다. 1등 학생에게는 염소 한 마리와 책가방, 책 등 교구가 수여됐다. 장민혁 월드비전 차장은 “내가 무엇이 되고 싶다는 개인적 꿈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꿈을 고민하도록 돕고 싶었다”고 대회 취지를 설명했다. 내년부터는 대회를 전 세계로 확대할 예정이다. 국내 참가자들의 작품은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엽서로 전달된다. 수상작 3개 작품은 현지 학교에 벽화로 그려질 예정이다. 수상작은 VR 전시관에서 상시 관람할 수 있다. 월드비전 홍보대사인 전이수 작가의 작품도 전시 중이다. 올해는 PC를 통해서만 접속할 수 있지만 내년부터는 모바일로 들어올 수 있는 메타버스 환경을 구축할 예정이다. 월드비전이 메타버스 등 새로운 기술을 적극 활용하는 것은 10대와 MZ세대 등 젊은층과의 접점을 늘려 기부 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해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로 대면 캠페인 진행이 어려워지면서 디지털 콘텐츠 구축의 필요성도 커졌다. 조광남 월드비전 커뮤니케이션본부장은 “메타버스는 현실 공간의 경계를 허물어 지구촌 반대편의 취약 아동들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후원자들의 도움이 현지 아이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메타버스 콘텐츠를 통해서도 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 2021-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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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산보다 많아진 죽음… ‘웰다잉’은 어떻게 준비할까[박성민의 더블케어]

    지난해 한국은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넘어서는 인구 ‘데드크로스(dead cross)’를 겪었다. 0.8명대까지 떨어진 출산율을 감안하면 교차했던 그래프가 다시 만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앞으로 가까운 이들의 출산보다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이 더 많아진다는 뜻이다. 죽음에 대한 준비는 얼마나 돼 있을까. 국내에서 준비된 죽음에 대한 관심이 커진 건 2000년대 중반부터다. 이른바 ‘웰다잉(well dying)’ 문화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자신이 원하는 장례식의 형태를 이야기하고, 유언장 작성과 연명 의료를 받을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누구나 준비된 죽음을 맞이하는 건 아니다. 죽음을 아직 먼 일이라고 생각해 준비를 미루다가 갑자기 생을 마감하거나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이달 선보일 웰다잉 플랫폼 ‘아이백(iback)’도 이런 고민에서 출발했다. 서비스를 기획한 스타트업 빅웨이브의 채백련 대표(34)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채 대표를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 준비된 죽음, 상조면 충분할까흔히 스타트업과 ‘장례, 죽음, 추모’라는 주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다양한 사업 아이템을 두고 웰다잉 플랫폼을 기획한 이유가 궁금했다. “인구 구조와 가족 구성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으니까요. 언제까지 자식이 부모의 죽음을 당연히 챙기는 시대가 계속될까요. 자식을 안 낳는 부부도 적지 않습니다. 죽음이 꼭 고령자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도 아니죠. 최근 세계를 덮친 팬데믹에서 보듯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닥칠 수 있는 문제지요.” 한국인은 죽음을 준비하는 데 서툴다. 대개 상조서비스에 가입해 장례식을 준비하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장례식은 죽음 후 며칠간 벌어지는 추모행사일 뿐이다. 상속과 증여 설계부터 유품 정리, 사후 추모까지 죽음이 남기는 숙제는 많다. 채 대표는 “생을 갑자기 마감하면서 장례 형태나 재산 기부 등 고인의 유지(遺旨)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다양한 웰다잉 서비스를 하나로 모아 제공하는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이백이 제공하는 서비스에는 ‘디지털 음성 유언장’도 있다. 국내 한 금융회사의 2015년 설문조사에서 ‘사망 전 유언장을 작성하겠다’는 응답은 54%에 달했지만 실제 유언장을 작성한 경우는 5%도 채 안 됐다. 채 대표는 “한국인들은 유언장 작성을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며 “엄청난 재산 정리가 아니더라도 유언장은 생의 마지막 메시지로서 꼭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반려 동물은 어떻게 관리하길 원하는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지도 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준비 안 된 죽음은 모두에게 불행”채 대표는 서비스를 기획하면서 150여 명을 인터뷰했다. 갓 성인이 된 젊은층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고령층까지 죽음에 대한 생각, 좋은 죽음의 의미를 물었다. “부모 세대들은 ‘죽음마저도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다’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30, 40대에선 ‘부모들의 삶을 반영해 장례를 치르고 싶다’고 하더군요. 한국 사회에서 아직은 생의 마무리를 가족과 터놓고 얘기하는 게 낯설다. 하지만 그 필요성은 서로 느낀다는 의미다. 2019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웰다잉에 관한 전 국민 인식조사’에서 응답자(40~79세) 1500명 중 64%는 좋은 죽음의 조건을 ‘미리 준비하고 주변에 피해가 없는 죽음’이라고 답했다. 채 대표는 ”코로나19 이후에 미국도 웰다잉 플랫폼에 가입하는 2040 세대가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아이백의 기본 서비스는 무료로 제공될 것이라고 한다. 상속이나 증여세 계산, 유언장 작성,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등이다. 채 대표는 ”장례를 치르고 대개 3주 뒤부터 극심한 상실감이 몰려온다고 한다. 이런 유족들을 위한 애도 및 심리상담 서비스, 고인의 디지털 기록을 보관, 정리해주는 클라우딩 서비스 등을 유료로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 삶의 마침표를 미리 그려보자 채 대표는 ”삶의 마침표를 미리 그려보는 것은 현재의 삶에 충실해지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인지하기 위해선 은행 계좌처럼 내 삶을 총망라한 ‘인생 계좌’를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엔 재산뿐 아니라 인간 관계, 성취한 것과 아직 이루지 못한 꿈 등이 포함된다. 채 대표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중간 점검“이라고 했다. 아직 서비스도 선보이지 않은 신생 스타트업을 만난 건 숫자로 평가되는 기업의 가치보다 이 서비스가 던지는 화두가 무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채 대표는 ”좋은 죽음에 필요한 비용을 낮추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 빅웨이브는 글로벌 벤처캐피털 500스타트업과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 전문 투자사 DHP의 투자를 받았다. 채 대표는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가 진행된 일본의 웰다잉 시장이 2019년 54조 원 규모로 커졌다. 한국도 인구 규모로 따졌을 때 수십 조 원의 시장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기업설명회(IR)에서 만난 투자자들에게 채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매출이 얼마가 되든지 모든 돈에는 꼬리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빅웨이브는 고객 한 분 한 분이 준비되고 존엄한 죽음을 맞이했을 때 성장하는 기업입니다. 그게 이 플랫폼이 갖는 의미입니다.“박성민 기자 min@donga.com}

    • 2021-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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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약처, 스마트 HACCP 도입 늘려 식품 불량률 대폭 낮춘다

    부산의 식육가공업체 A사는 지난해 완제품 중 불량 발생 비율이 전년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고객 불만 건수도 30%가량 감소했다. 특별히 위생을 더 철저히 관리했거나 검사 인원을 늘렸던 것은 아니다. 달라진 건 지난해 도입한 ‘스마트 식품안전관리인증(HACCP)’ 시스템이다. 스마트 HACCP는 식품 및 축산물 생산 과정의 위해 요소를 모니터링하는 기존의 HACCP를 디지털로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식품 가열 온도가 적절한지, 가공 중 이물질이 유입되지 않았는지 등을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등을 활용해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다. 기존에도 일부 업체들은 HACCP를 디지털로 전환해 업무 효율과 정확도를 높여 왔다. 정부가 구축한 스마트 HACCP는 이와 별개로 지난해 4월부터 도입됐다. 업체마다 달랐던 시스템 운영 방식을 표준화한 것이다. 이를 통해 식품 생산 관련 데이터를 더욱 광범위하게 확보할 수 있고 영세 업체도 활용할 수 있는 스마트 HACCP 개발도 용이해진다. 7일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에 따르면 올 8월 말 기준 스마트 HACCP를 도입한 식품 제조 및 가공 업체는 90곳이다. 스마트 HACCP가 HACCP보다 뛰어난 점은 기록을 디지털화해 모니터링 역량을 높였다는 점이다. 가령 기존 시스템은 2시간마다 담당 직원이 직접 중요관리점(CCP) 공정에 이상이 없는지 점검해 수기로 결과를 기록한다. 점검 시간 사이에 발생한 문제는 놓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위해 요소를 발견해도 구두나 이메일로 이를 전달하기 때문에 즉각적인 대응이 어렵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응 속도와 손실 규모도 다르다. 문제 발생을 2시간 만에 알아차렸다면 그 사이 공정이 진행된 식품은 폐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스마트 HACCP는 ‘한계 기준’ 이탈을 감지하면 즉시 관리자에게 통보한다. 생산 라인 가동을 바로 멈추게 돼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 또 공정 전반의 세밀한 데이터도 확보하고 있어 문제 원인을 찾기도 쉽다. 스마트 HACCP를 도입한 업체들의 만족도도 높다. 지난해 스마트 HACCP를 구축한 54개소의 운영 성과를 분석한 결과 공정 불량률은 도입 전보다 56.2%, 완제품 불량률은 58.4%, 검사 불량률은 50%, 고객 불만 건수는 27.8%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향후 과제는 아직 걸음마 단계인 스마트 HACCP 도입률을 높이는 것이다. 현재 국내에서 유통되는 가공식품의 87.5%가 HACCP 인증을 받은 제품이다. HACCP보다 위해 요소를 더 깐깐하게 잡아낼 수 있다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김치, 만두, 비빔밥 등 ‘K푸드’에 대한 신뢰도를 더욱 높일 수 있다. 스마트 HACCP를 구축하려면 아무리 작은 사업장도 수천만 원의 비용 부담이 생긴다. 가열 온도 검사부터 금속 검출, 소독과 냉동 기준 유지 등 공정이 복잡할수록 관리 비용이 높다. 식약처는 이런 부담을 낮추기 위해 소규모 업체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표준 모듈을 개발해 제공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의 ‘스마트공장 사업’과 연계해 중소 식품업체의 스마트 HACCP 구축도 지원하고 있다. 이르면 올해 안에 스마트 HACCP 인증 마크도 선보인다. 제조사가 원하면 포장지에 인증 마크를 넣을 수 있도록 했다. 이제명 식약처 식품안전인증과 사무관은 “스마트 HACCP 도입 업체에 지원을 강화해 국민의 식품 안전에 대한 신뢰도를 더욱 높이겠다”고 말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 2021-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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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매정복 앞당기려면 ‘뇌 기증’ 문화 확산돼야”[박성민의 더블케어]

    《끝나지 않는 팬데믹이 ‘돌봄’의 방향을 고민하게 합니다. 직장을 잃고 가정이 무너지면서 스스로를 돌보기 버거운 이웃도 늘고 있습니다. 정신건강 관리부터 비대면 의료까지 ‘위드 코로나’ 시대엔 보건의료 패러다임도 달라집니다. 의료와 복지, 일자리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 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더블케어’가 들여다봅니다.》 60대 전문의 A 씨는 올 초 서울대병원 치매 뇌은행에 사망한 아버지의 뇌를 기증했다. 아버지는 수년간 치매를 앓았다. 아버지의 형제들도 치매와 싸우느라 힘든 노년을 보냈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슬픔이 컸지만 치매 치료법이 하루빨리 개발되길 바라는 마음이 더 간절했다. 생전 뇌 기증에 동의한 아버지의 뜻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뇌 기증 덕분에 치매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됐다. 뇌 부검 결과 A 씨 아버지는 치매에 걸릴 확률이 일반인보다 19배 높은 유전 요인을 갖고 있었다. 생전에 진단받지 못했던 파킨슨병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1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의학연구혁신센터에서 만난 박성혜 치매 뇌은행장(병리과 교수)은 “유족이 고인의 임상정보까지 제공해 준 덕분에 치매 초기부터 사망까지 질환을 심도있게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7년 간 누적 뇌 기증 300건 미만 한국인에게 뇌 기증은 아직 낯설다. 2014년 한국뇌연구원 산하 국가뇌조직은행(현 한국뇌은행)이 설립됐고, 2016년부터는 국립보건연구원이 치매 뇌은행 네트워크를 운영 중이다. 주무 부처가 각각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질병관리청으로 나뉘어 있다. 7개 병원이 참여 중인 한국뇌은행에는 지난해까지 151명, 4개 병원이 참여한 치매 뇌은행에는 지난달까지 135명이 뇌를 기증했다. 병이 생기면 직접 조직을 떼어 내 검사할 수 있는 다른 인체 기관과 달리 뇌는 생검(生檢)을 거의 하지 않는다. 자칫 뇌 기능을 더 저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치매, 파킨슨병 등 퇴행성 뇌질환은 사실상 사망 후에야 조직 검사를 할 수 있다. 부검이 제한적으로 이뤄지는 한국에서는 이마저도 쉽지 않다. 연구 자원이 부족하니 질환의 원인 규명이나 치료제 개발은 더딜 수밖에 없다. 급증하는 치매 인구를 생각하면 뇌 기증은 더 절실하다.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올 2월 기준 60세 이상 치매 추정환자는 86만3542명, 65세 이상의 유병률은 10.3%에 이른다. 이르면 2024년 치매 인구는 1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박 교수는 “뇌 질환 연구를 위한 동물실험 결과는 인간의 뇌에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치매 없는 100세 시대를 위해선 뇌은행의 역할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치매, 파킨슨병 연구할 뇌 조직은 특히 부족” 대개 뇌사자의 장기를 이식하는 장기 기증과 달리 뇌 기증은 사망 후에 이뤄진다. 뇌 조직을 온전히 보존하려면 늦어도 사망 후 24시간 안에 뇌를 꺼내야 한다. 뇌는 다른 장기보다 괴사가 빨리 진행되기 때문이다. 뇌 전문가들은 12시간 내 적출을 권장한다. 생전에 뇌 기증에 서약했지만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유족 동의가 지체돼 뇌 기증이 무산되는 경우도 있다. 뇌를 보관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1.4kg가량인 뇌의 절반은 약 1cm 두께로 잘라 영하 80도 이하의 초저온 상태로 냉동 보관한다. 나머지는 병리학적 진단을 위해 포르말린에 담가 약 한 달간 고정시킨다. 이를 절개와 보존이 쉽도록 파라핀 블록으로 만든다. 그리고 두께 약 4μm(마이크로미터·1μm는 100만분의 1m)의 절편으로 잘라 염색한 뒤 병인 등을 분석한다. 이렇게 만든 뇌 조직은 대학과 연구소 등에 분양된다. 연구의 타당성과 윤리성 등을 심의해 분양을 결정한다. 한국뇌은행이 보유 중인 파라핀 블록은 약 1만5000개. 언뜻 충분한 것 같지만 질환별로 필요한 부위가 달라 뇌 기증자 수는 연구 수요에 비해 부족하다. 류연진 한국뇌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치매와 파킨슨병 연구에 필요한 조직은 해마와 흑질인데 전체 뇌에서 얻을 수 있는 양은 2∼3g에 불과하다”며 “연구 수요만큼 충분히 분양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반드시 뇌 질환이 있어야만 기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건강한 뇌는 대조군으로 활용된다. 현재까지 기증된 뇌의 약 30%는 질환이 없는 뇌다. 김인범 가톨릭대 의대 해부학교실 교수(서울성모병원 뇌은행장)는 “다른 질환으로 사망했지만 뇌 부검에서 문제가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며 “질환이 없는 뇌도 의학적으로 연구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뇌 기증이 알츠하이머 시작점 규명으로 이어져 선진국들은 일찌감치 뇌은행을 구축해 뇌 질환 정복을 꿈꾸고 있다. 유럽 뇌은행 중 가장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네덜란드 뇌은행은 1987년부터 4500건 이상의 뇌 기증을 받았다. 일본은 1967년 개소한 니가타대 뇌연구소에서만 3500개 이상의 전뇌를 확보해 연구 중이다. 류 선임연구원은 “일본은 모든 장기를 함께 기증받고 있어 여러 질환과 뇌의 연관성을 연구하기에도 유리한 환경”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뇌 연구로 가장 주목받는 나라는 브라질이다. 2003년 뇌은행을 설립한 브라질은 정부가 사망자의 부검을 의무화하면서 뇌 조직 확보가 용이해졌다. 상파울루대는 세계 최대 규모의 뇌은행이다. 김 교수는 “브라질 연구진이 알츠하이머가 뇌간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도 다양한 뇌 조직을 연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약 1000억 개의 신경세포(뉴런)가 활동하는 뇌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뇌 자원 확보와 투자만 뒷받침되면 삶의 질을 높이는 연구 성과를 기대할 여지가 크다. 의학계에서는 조현병과 각종 중독 등 정신질환도 뇌 기증을 통한 연구가 필요한 분야로 본다. 문제는 뇌의 확보다. 류 선임연구원은 “본인이나 가족의 동의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정신질환을 앓은 뇌는 특히 기증받기 어렵다”고 말했다.○내년 ‘태아 뇌은행’ 추진…신경 발달 이상 연구한국은 질병의 치료에 있어서는 의료 선진국으로 손꼽히지만 뇌 연구는 후발주자다. 의료계에선 한국의 뇌 연구 역량을 선진국의 70% 수준으로 평가한다. 특히 뇌 연구의 바탕이 될 뇌 기증과 뇌은행 구축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시신 기증은 장례를 치른 후에도 가능하지만 뇌 기증은 사망 후 바로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거부감이 더 큰 측면도 있다. 뇌은행 출범 후 꾸준히 증가하던 기증 희망자도 최근 감소 추세다. 치매 뇌은행의 기증 희망 서약은 2019년 341건에서 지난해 211건, 올해는 8월까지 104건으로 줄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홍보가 부족했던 영향도 있다. 김 교수는 “기증 등록 후 실제 기증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며 “올해 서울성모병원의 뇌 기증 5건도 시신 기증 희망자가 뇌 기증까지 결심한 경우”라고 말했다. 내년부터는 뇌은행 운영과 연구를 심화시키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다. 한국뇌은행은 내년부터 ‘태아 뇌은행’ 시범사업을 계획 중이다. 신경 발달 이상으로 인해 성장에 이상이 생긴 태아 연구를 위해서다. 뇌 연구 성과를 높이려면 의료 데이터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사후 뇌 조직 확보에 그치지 않고 발병부터 사망까지 임상 기록을 얻게 되면 더 과학적인 연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뇌은행 소속의 한 교수는 “의료 기록은 유족만 열람과 확보가 가능한데, 뇌은행이 직접 접근할 수 있어야 유족의 불편함을 줄이고 연구 성과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최근 뇌 기증에 대해 문의하는 30, 40대 젊은층이 많아졌다”며 “장기 기증이 당장 내 곁의 생명을 살린다는 의미가 있다면 뇌 기증은 다음 세대의 무수한 생명을 살리는 소중한 나눔”이라고 말했다.박성민 기자 min@donga.com}

    • 2021-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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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휠체어여행 책부터 패럴림픽 NFT까지…하버드대 졸업 20대 장애 청년의 도전[박성민의 더블케어]

    “기술은 불가능을 없애려고 개발되는데 정작 상용화되면 장애인은 배제되곤 합니다. 또 다른 벽이 생기는 셈이죠.” NFT(대체 불가 자산) 스타트업 도어랩스 김건호 대표(28)는 세계 첫 패럴림픽 NFT를 개발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도쿄 패럴림픽에 출전한 14개 종목 선수들 사진을 담은 디지털 카드인 이 NFT는 패럴림픽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장애인을 향한 편견을 없애자는 바람을 담았다. 김 대표도 11년 전 교환학생으로 간 미국에서 스키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다.● 세계 첫 패럴림픽 NFT 출시지난달 31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만난 김 대표 명함에는 휠체어를 탄 캐릭터와 ‘#2514’가 새겨져 있었다. 올 초 도어랩스가 발행한 NFT ‘휠카드(휠체어 카드)’ 캐릭터다. 디자인이 모두 다른 휠카드 1만 개를 매일 30개씩 세계 최대 가상화폐 거래소인 바이낸스에서 팔고 있다. 2514는 카드 고유번호. 100달러(약 11만6000원)짜리 카드가 2만 달러에 재판매 될 만큼 인기다. 휠카드마다 캐릭터 생김새나 휠체어 모양이 다르다. 농구공이나 테니스라켓을 들고 있는 캐릭터도 눈에 띄었다. 김 대표는 “휠체어를 탄 사람도 개성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환경공학을 전공하던 하버드대에서 블록체인에 빠졌다. 2017년 귀국해서 만든 블록체인 업체는 하버드대가 지원하는 첫 블록체인 스타트업으로 선정됐고 이후 지금의 도어랩스로 성장했다. 지난해에는 음식점 등에서 NFT로 경품을 받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국내 특허를 받았다. 패럴림픽 NFT를 만들기로 결심한 건 올해 초. 김 대표는 대학 시절부터 장애인 조정 선수 생활을 했다. 서울시 팀에서도 뛰었다. 그는 “패럴림픽이 비장애인 올림픽과 같은 장소, 같은 시기에 개최된 건 1988년 서울이 처음”이라며 “한국 스타트업이 세계 최초로 패럴림픽 NFT를 만들었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패럴림픽 NFT는 금 은 동 일반 등 4가지 형태로 출시됐다. 종류에 따라 실물카드와 티셔츠, 휴대전화 케이스 같은 기념품도 함께 제공한다. 금 카드(15만 원)를 구입하면 해당 선수들과 메타버스 공간에서 만나 소통할 수도 있다. 세계 최대 메타버스 기업인 게더타운이 서비스를 지원한다. NFT는 대개 가상화폐로 거래되기 때문에 소비자가 쉽게 구매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패럴림픽 NFT는 카카오페이로 결제가 가능하다. 구입은 도어랩스 웹사이트 ‘카드미(kaard.me)’에서 할 수 있다. 카카오 디지털 지갑 ‘클립’을 통해 디지털 카드 형태의 패럴림픽 NFT를 받아 보관할 수 있다. 티셔츠 제작도 의류 스타트업이 제작을 맡아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수익금은 전액 대한장애인체육회에 기부할 예정이다. ● 휠카드 장학생 후원하고, 휠체어도 기부김 대표는 장애인도 살기 편한 세상을 꿈꾼다. 그는 2014년 미국 20개 주 주요 관광지를 휠체어로 돌아본 뒤 장애인용 여행 가이드북을 온라인에 공개했다. 장애인 시각으로 세상의 불편한 것을 바꿔보기로 결심한 것도 이때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서울 인천 편도 제작했다. 그 무렵 장애인 이동권 개선 운동을 하는 ‘무의(MUUI)’라는 사회적 기업을 운영했다. 그 공로로 2018년 장애인인권상을 받았다. 무의는 ‘장애를 무의미하게’라는 뜻이다. 휠카드와 패럴림픽 NFT에 이은 새로운 프로젝트도 구상 중이다. 김 대표는 “NFT가 일상에서 보상 수단으로 어느 정도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관심이 크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구글 지도를 통해 휠체어 접근성을 알려주면 NFT를 보내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얼마나 자발적으로 참여할지 보려고 일부러 홍보도 하지 않고 개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만 프로젝트 소식을 올렸다. 그런데 며칠 만에 25개국에서 ‘휠체어 지도’에 필요한 정보가 쏟아졌다. 그는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과도 관련 프로젝트를 논하고 있다”고 말했다.사업가로서 김 대표는 한국 스타트업 환경에 대해 고민이 많다. “사람들이 빠른 변화에 익숙해 기술업체가 사업을 펼치기에는 좋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자산에 대한 잣대가 불명확한 점은 아쉬워요.” 블록체인과 NFT 관련 회사라는 이유로 은행계좌 개설이 취소된 적도 있다. 그는 “한국은 메타버스에는 큰 관심을 보이는데 가상화폐 때문인지 블록체인이나 NFT에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한 것 같다”며 “메타버스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게 NFT인데 둘을 따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수익이 많이 나지 않은 스타트업이지만 기부에는 적극적이다. 휠카드 하나 팔릴 때마다 국제 구호개발기구인 미국 월드비전이 세계 각국 장애인에게 휠체어를 기부한다. 이달부터는 베트남 풀브라이트대학에 수익금 일부를 기부해 휠카드 장학생을 후원할 계획이다. 이 대학은 미국과 베트남 정부, 하버드대가 함께 세운 비영리 사립대학이다. 해외 발령을 받은 아버지를 따라 중학교 때부터 베트남에서 공부한 김 대표에게는 현지 장애인을 지원하는 일이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제가 길에서 3시간을 허비했다면 장애인 100명의 300시간이 버려지는 셈이에요. 저희 기술로 장애인이 삶이 조금이나마 나아지길 바랍니다.”박성민 기자 min@donga.com}

    • 2021-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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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첫 패럴림픽 NFT 만들어 자부심”

    “기술은 불가능을 없애려고 개발되는데 정작 상용화되면 장애인은 배제되곤 합니다.” NFT(대체 불가 토큰) 스타트업 도어랩스 김건호 대표(28)는 세계 첫 패럴림픽 NFT를 개발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도쿄 패럴림픽에 출전한 14개 종목 선수들 사진을 담은 디지털 카드인 이 NFT는 패럴림픽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장애인을 향한 편견을 없애자는 바람을 담았다. 김 대표도 11년 전 교환학생으로 간 미국에서 스키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다. 지난달 31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만난 김 대표 명함에는 휠체어를 탄 캐릭터와 ‘#2514’가 담겨 있었다. 올 초 도어랩스가 발행한 NFT 휠카드(휠체어 카드) 캐릭터다. 디자인이 모두 다른 휠카드 1만 개를 매일 30개씩 세계 최대 가상화폐 거래소인 바이낸스에서 판다. 2514는 고유번호. 100달러(약 11만6000원)짜리가 2만 달러에 재판매될 만큼 인기다. 김 대표는 “휠체어를 탄 사람도 개성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환경공학을 전공하던 하버드대에서 블록체인에 빠졌다. 2017년 귀국해 만든 블록체인 업체는 하버드대가 지원하는 첫 블록체인 스타트업으로 선정돼 도어랩스로 성장했다. 지난해에는 음식점 등에서 NFT로 경품을 받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국내 특허를 받았다. 대학 때 장애인 조정 선수로도 뛴 김 대표는 “패럴림픽이 비장애인 올림픽과 같은 장소, 같은 시기에 열린 건 1988년 서울이 처음”이라며 “한국 스타트업이 세계 최초로 패럴림픽 NFT를 만들었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패럴림픽 NFT는 금 은 동 일반 등 네 가지 형태다. 실물카드와 티셔츠, 휴대전화 케이스도 제공한다. 금 카드(15만 원)를 구입하면 세계 최대 메타버스 기업 게더타운의 메타버스 공간에서 해당 선수와 소통할 수도 있다. 수익금은 전액 대한장애인체육회에 기부한다. 김 대표는 장애인도 살기 편한 세상을 꿈꾼다. 그는 2014년 미국 20개 주 주요 관광지를 휠체어로 돌아본 뒤 장애인용 여행 가이드북을 온라인에 공개했다. 서울 인천편도 제작했다. 휠카드가 하나 팔릴 때마다 미 월드비전이 각국에 휠체어를 기부한다. “제가 길에서 3시간을 허비했다면 장애인 100명의 300시간이 버려지는 셈이죠. 저희 기술로 장애인이 삶이 나아지길 바랍니다.”박성민 기자 min@donga.com}

    • 2021-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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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린수소 등 산학연계 생태계 만들어 지역발전 이끌어야”

    《지역에서 대학이 갖는 가치는 어느 때보다 크다. ‘수도권 일극(一極)’ 문제를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역 거점 대학 육성이다. 대학은 청년 인구 유입, 신산업 육성, 일자리 창출 등 거의 모든 지역 현안과 연관돼 있다. 지방 소멸 위기 극복 방법으로도 거론된다. 다만 ‘대학은 성장동력’이라는 인식이 실천으로 이어지려면 대학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실효성 있는 지원 정책도 뒷받침돼야 한다.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이중희 전북대 나노융합공학과 교수는 13일 전북대에서 열린 ‘지역발전과 거점 국립대의 역할’ 대담에서 대학 육성이 지역 발전 선순환의 시작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그러기 위해선 대학 스스로의 혁신과 함께 광역자치단체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두 사람이 생각하는 전북과 전북대의 미래 비전은 무엇인가.안 의원=침체된 전북 경제의 ‘게임체인저’가 될 큰 축은 신재생에너지 기반의 그린수소 산업과 국민연금공단을 중심으로 한 금융 산업이다. 농업과 바이오 분야도 성장 잠재력이 크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선 대학의 역할이 중요하다. 지역과 산업, 대학이 연계된 생태계를 만들어 지역 혁신 성장을 견인해야 한다. 이 교수=대학이 중요하다는 말씀에 공감한다. 독일 드레스덴대, 미국 실리콘밸리 등을 봐도 결국 대학을 중심으로 지역이 살아났다. 전북에는 새만금이라는 기회의 땅이 있고, 수소 산업 등 미래 산업에 강점이 있다. 대학은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다. 신기술 개발과 생산이 함께 이뤄지는, 산업과 혼합된 캠퍼스를 조성해야 한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전북 인구는 올해 180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인구 감소를 반전시킬 수 있을까.안 의원=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이 있는 대구 달성군 사례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대학과 연구기관, 기업이 모이면서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군(郡) 단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 전북도 수소 분야에서 연구성과를 내고 있는 전북대를 중심으로 ‘전주·완주 수소시범도시’를 만들었지만 다시 인구가 유입되고 경제가 살아나려면 산업 생태계까지 갖출 수 있도록 지방자치단체의 꾸준한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 교수=지자체 지원 방식도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출산지원금 1억 원을 줘 아이를 전북에서 낳게 해도 서울로 취업하면 지역 인구는 감소하거나 그대로다. 같은 1억 원도 다른 지역 인재들을 전북으로 끌어들이는 데 쓰는 게 효과적이다.전북 혁신도시에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국책연구기관이 들어와 있다. 이를 활용하는 전략도 중요해 보인다. 이 교수=연구기관의 상당수가 농업 관련이다. 대학원장 시절 전북대 농대와 이들 연구기관을 합치자고 건의한 적이 있다. 연구기관은 학생이 필요하고, 학생들에게 더 좋은 교육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아이디어에 그쳤지만 지역이 가진 인적, 물적 자원을 활용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찾아야 한다. 안 의원=대학도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모든 대학이 같은 과를 만들어 경쟁하는 것보단 거점 대학에 특성화 된 전공을 개설하고 다른 학교 학생들도 학점을 취득할 수 있게 하면 기회를 넓힐 수 있다. 그린뉴딜이 전북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다.안 의원=전북은 수소 생산부터 저장과 운송, 활용까지 완전한 생태계를 갖췄다. ‘그린 수소 수도’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국이 선진국을 따라가는 추격 국가에서 글로벌 경제의 선도 국가가 된 것처럼 전북이 다른 지방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한국 경제를 이끄는 선도 지역으로 도약할 수 있다. 이 교수=전북대는 수소 에너지 분야에서 한국 최고일 뿐 아니라 세계적 수준의 연구 역량을 갖췄다. 현대차의 수소전기차인 넥쏘의 수소저장 용기도 전북대 실험실의 벤처기업에서 개발한 제품이다. 그린 수소는 기술력 확보가 쉽지 않고 비용 부담도 크다던데….이 교수=그린 수소는 신재생에너지로 만든 전기를 이용해 수소를 생산한다는 의미다. 100% 청량 수소다. 한국은 수소에너지 개발에 대한 국가적 관심은 높지만 아직 미국, 일본 등에 비해 투자가 부족하고 원천기술 확보 수준도 낮다. 전북대가 됐든지 한국에너지공과대와 같은 새로운 대학이든지 이 분야에 특성화된 대학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술을 선도할 수 있다.안 의원=국내에서 생산 기술과 설비를 못 만들면 해외에서 사 오는 수밖에 없다. 새만금에 그린수소 생산 클러스터를 추진할 예정인데, 근간이 되는 대학의 연구개발 과정에도 더 지원이 필요하다. 그린뉴딜의 중심지로서 새만금의 활용도 중요해 보인다. 이 교수=2030년부터 유럽은 탄소중립이 실현되지 않은 제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한국도 2050년 탄소중립을 국가 비전으로 채택했다. 기후 위기를 극복하려면 탄소중립은 더 미룰 수 없는 과제고 국제적으로 낙오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단순한 에너지 문제가 아니라 교통, 주거 등 삶의 모든 영역과 관련돼 있다. 새만금은 전북을 탄소중립도시로 이끄는 핵심이다. 안 의원=새만금에 수소 생산단지가 완성되면 전북이 2040년 탄소중립을 선언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정부의 탄소중립 시간표보다도 10년 빠른 셈이다. 기업들도 새만금에 오면 탄소중립을 바탕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관세 부담을 덜고 수출할 수 있다. 강력한 기업 유인책인 셈이다. 쇠락한 자동차와 조선 산업을 대신할 지역의 일자리, 먹거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지역 대학은 비상이다. 올해 입시에서 전북대를 제외한 모든 대학이 미달 사태를 겪었다. 안 의원=지역의 성장 동력 역할뿐 아니라 국가 균형발전을 위해서라도 지방 대학이 살아야 한다. 모호한 법 규정부터 고쳐야 한다. 현행 지방대학 육성법에는 ‘지자체가 지방대학을 지원할 수 있다’고 돼 있는데 이를 광역지자체로만 해석하고 있다. 이 때문에 기초지자체는 대학과의 협력이나 지원에 소극적인 경향이 있다. 아울러 교육을 다지고 대학을 육성해 콘텐츠 성장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이 교수=현재의 지방정부와 지방대학의 관계로는 전북의 쇠퇴를 막을 수 없다. 지방정부가 초중고 교육을 챙기듯이 대학교육에 대해서도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반대로 교육부는 대학 운영에 덜 관여하는게 맞다. 교육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학을 줄 세우기 하면서 대학을 더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다. 최근 정부 사업 유치 등에서 전북대는 부진했다. 거점 국립대로서 전북대의 역할이 특히 중요한데….이 교수=대학의 준비 부족만이 원인은 아니다. 정부 지원 사업 유치는 지자체와의 유기적인 협력도 중요하다. 대부분 정부와 지방정부가 예산을 같이 부담하는 매칭 펀드 형태인데 지자체가 대학을 지원할 의지가 없으면 사업 유치가 어렵다. 지자체와 대학이 하나가 돼 산업과 문화를 선도하는 대학으로 위상을 재정립해야 한다, 안 의원=지역을 살리기 위해서는 지역 대학을 살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전북도 차원에서 지역의 산업 인프라와 대학을 어떻게 연계시킬지 고민해야 한다. 전북을 금융 중심지로 만드는 데 전북대 연기금 학과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새만금을 중심으로 한 수소 산업 분야의 성장에 전북대가 핵심 역할을 하도록 지원이 필요하다. 진행=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정리=박성민 기자 min@donga.com사진 제공=전북대학교}

    • 2021-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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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달새 40만 캔… 日 입맛 사로잡은 ‘리챔’

    동원F&B의 캔햄 리챔(사진)이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태국,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시장에서도 판매 호조를 보이며 올해 수출액 100억 원 달성을 앞두고 있다. 리챔은 5월부터 일본 전역 대형마트에서 판매를 시작해 지난달까지 3개월 동안 40만 캔 이상 팔렸다. 회사 측은 연말까지 판매량이 100만 캔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내년에는 250만 캔 판매량 달성이 목표다. 2003년 선보인 리챔은 캔햄의 나트륨 함량을 낮춰 눈길을 끌었다. 짠맛은 줄이면서도 돼지고기 함량은 90% 이상으로 유지해 햄 본연의 맛을 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동원F&B는 캔햄의 나트륨 함량을 꾸준히 줄여 왔다. 최근 나온 제품은 초창기 제품보다 나트륨 함량이 36% 낮아졌다. 나트륨을 줄인 ‘착한 캔햄’ 전략은 일본에서도 통했다. 소비자 반응 평가를 위한 사전 판매 행사에서 4일 만에 8만4000캔이 팔렸다. 회사 측은 “짠맛이 강한 요리가 많은 일본에서 나트륨 함량을 낮춘 것이 건강한 식단을 추구하는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밝혔다. 한류 열풍에 힘입어 한국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한국 캔햄 소비로 이어졌다. 이 회사는 리챔 김치찌개 등 한국 음식과 접목한 다양한 메뉴를 현지에 소개하고 있다. 리챔 판매와 사회 공헌을 연계하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에도 적극적이다. 6월부터는 리챔 묶음 제품 포장지에 실종아동 정보를 넣었다. 리챔 공식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인스타그램에도 실종아동 정보를 싣고 있다. 이달 11일에는 EDM 아티스트 배드보스와 함께 2000만 원 상당의 현금과 리챔을 국제구호개발단체 등에 기부했다.박성민 기자 min@donga.com}

    • 2021-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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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작품 후원금으로 아이들의 미래 지켜주고 싶어요”

    “제 작품을 통해 마련한 후원금이 아이들의 미래를 바꾸는 데 쓰이길 바랍니다.” 세계적인 디지털 미디어 아트 거장인 후랭키 배 화백(63)은 17일 국제구호개발 NGO(비정부기구) 월드비전 홍보대사로 위촉된 소감을 이같이 말했다. 그는 “아이들이 꿈꿀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며 후원 동기를 설명했다. 월드비전은 ‘후랭키 펀드’를 만들어 전 세계 취약 아동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 “미술로 아이들의 미래를 지켜주고 싶다” 후랭키 화백은 국내외에서 인정받는 디지털 예술 분야 대표 작가다. 지난달에는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경매에서 NFT(Non-Fungible Token·대체 불가능한 토큰) 시리즈 작품이 505만 달러(약 59억 원)에 낙찰돼 주목을 받았다. 한국 작가의 NFT 작품 중 최고가다. 2019년에는 한 백화점에서 작품 5점이 총 5000만 달러(약 587억 원)에 판매될 정도로 미술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후랭키 화백이 아이들 후원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뭘까. 그는 아이들에게 받는 감동이 세상을 바꾸는 희망이 된다고 강조했다. 후랭키 화백은 “아이들은 모든 어른에게 동기부여를 해 주는 존재”라며 “아이들의 미래를 지켜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후랭키 화백은 향후 작품 판매 수익금을 기부해 후원을 이어갈 계획이다. 24일에는 자신의 작품 중 하나를 월드비전에 기증하는 전달식을 열 예정이다. 후원이 어떤 형태로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한 소신도 확고하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아동 한 명, 한 명을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이 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데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랭키 화백은 “월드비전과 함께하기로 한 것도 이런 철학을 공유했기 때문”이라며 “아이들의 미래를 바꾸는 문제도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태일 헌정화, NFT 경매… 끊임없는 도전 후랭키 화백은 대한민국 수채화의 선구자인 서양화가 고 배동신 화백의 아들이다. 후랭키 화백은 주로 추상 표현주의 작품을 만들어 왔다. 순수 회화에 천착해 온 그는 지난해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전태일 열사를 주제로 한 디지털 아트 작품을 공개해 눈길을 끌었다. 후랭키 화백이 작품에서 사회적 인물을 다룬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그는 “예술도 근본적으로 ‘선함’을 지향해야 한다”며 “휴머니티를 담지 않으면 예술 역시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작가로서 새로운 시도도 멈추지 않는다. 최근에는 작품 하나를 1500개 NFT로 분할해 거래하는 NFT 작품 특별전을 열었다. 미술품의 디지털 복제가 무한대로 가능한 시대에 작품 거래를 투명하게 만들어 작가의 저작권을 보호할 수 있다. 미술품 마니아들도 원본과 동일한 작품을 손쉽게 소유할 수 있도록 예술의 문호를 넓힌 셈이다. 고유 토큰(번호)은 다르지만 원본의 고유성은 인정받는다. 후랭키 화백은 전태일 50주기 기념화도 NFT로 등록해 경매에 내놓을 예정이다. 후랭키 화백은 “예술의 근본 가치는 변하지 않지만 빠르게 변하는 현대 사회에 맞게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아티스트의 기본 자세”라고 말했다. “누구나 혼자 살아갈 수는 없어요. 우리가 서로 돕고 의지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선한 영향력’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박성민 기자 min@donga.com}

    • 2021-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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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른 살 임상심리학자가 줌 켜고 청소하는 이유는[박성민의 더블케어]

    버스를 타면 제대로 내릴 때보다 잘못 내릴 때가 더 많다. 책을 읽으면 앞 문장이 기억나지 않아 몇 번이고 되돌아가야 한다. 학창 시절, 친구들이 2주 전부터 시작하는 시험공부를 한 달 전부터 시작했다. 남들만큼 성과를 내려면 그들보다 몇 배의 시간을 쏟아 부어야 했기 때문이다. 항상 덜렁대고, 산만하고, 불안하고…. 일상이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큰 문제라는 생각은 안 했다. 서른이 다 돼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를 쓴 임상심리학자 신지수 씨(31) 얘기다. ● “내가 ADHD라고? 머릿속 안개가 걷혔다” 신 씨가 진단을 받게 된 과정은 독특하다. 어느 순간 환자들에게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상담 받으러 온 초등학생보다 주의력이 떨어진다는 걸 느꼈다. 신 씨는 “환자들을 기만한다는 생각, 죄책감이 들었다”고 했다. 몇 달 간 진단을 망설이다 2019년 겨울 충동적으로 검사실로 들어가 자가진단을 했다. ‘저하’, ‘억제지속 주의력, 간섭선택 주의력에 문제가 있음을 시사함.’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컴퓨터 화면에 뜬 결과를 보자 숨이 턱 막혔다. 환자들의 첫 반응이 대개 그렇듯이 ‘정상’이나 ‘평균’에서 비껴나 있다는 걸 인정하기 어려웠다. 11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신 씨는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결함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쉽지 않았다”며 “스스로도 장애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병원에서 진단까지 받고나자 안도감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신 씨는 “내 행동의 이유를 알게 되면서 머릿속의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아쉬움 혹은 분노는 성인이 돼서야 뒤늦게 ADHD 진단을 받은 환자 대다수가 겪는 감정이라고 한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인생이 더 행복하고 효율적이었겠죠. 학창 시절엔 숙제를 잊었거나 딴 짓 한다고 늘 혼났던 기억밖에 없어요. 남들이 4~5시간이면 할 일도 저는 20시간이 걸렸어요. 그렇게 에너지를 다 쏟고 나면 다른 걸 못하죠. 그래서 별다른 취미도 없어요.” 신 씨가 전공을 선택한 과정도 흥미롭다. 학창시절 내내 임상심리학자가 되고 싶었는데 대입 지원 기간에 이를 깜빡하고 즉흥적으로 미디어 관련 학과에 원서를 냈다. 의도하지 않게 관심사가 ‘주의 전환’ 된 탓이다. 신 씨는 “ADHD 환자들의 주요 증상이 주의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건데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서 그렇게 나타날지 몰랐다”며 웃었다. ● 진료실 밖, ‘조용한 ADHD’ 환자들 진단을 받은 뒤 신 씨는 ADHD가 더 궁금해졌다. 알아갈수록 이상했다. ADHD 연구에서 여성의 존재는 희미했다. ‘ADHD=천방지축 남자아이의 질병’이라는 젠더적 편견 때문이다. 신 씨는 “ADHD는 과잉행동·충동형, 부주의형, 복합형 등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남성에게 주로 나타나는 과잉행동·충동형만 부각되면서 부주의형이 많은 여성 ADHD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일을 시작하기 어려워하고, 업무의 순서나 경중을 파악하는 데 서툰 ‘조용한 ADHD’ 환자들이다. 이들은 진단 기회조차 얻지 못하거나 기분장애, 불안장애 등 다른 질환으로 오진되기 일쑤였다. 그는 책에서 이런 젠더적 편견을 지적한 다양한 연구를 소개한다. 미국에선 정신과를 찾은 ADHD 아동의 남녀 성비가 10대 1이었는데, 지역사회 조사에선 3대 1로 격차가 줄었다는 연구(2002년)도 있었다. 남성 ADHD 환자 중 46%가 약물 치료를, 38%가 심리 치료를 받는 반면 여성은 각각 6%, 8%에 그친다는 연구(2007년)는 여성 ADHD 환자들이 진단과 치료에서 얼마나 배제돼 왔는지 보여준다. 신 씨는 “진단받기 전까진 ADHD를 반쪽만 알았던 셈”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해외에선 이처럼 젠더적 편견을 극복하려는 연구가 지속되고 있지만 한국은 아직 변화가 더디다. 국민건강보험공단 통계를 보면 2017년 ADHD 진료 인원은 5만2994명. 남성 환자(4만2398명)가 여성의 4배에 이른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홈페이지엔 ‘성별 주의질병 정보’를 안내하며 ADHD를 ‘남성이 조심해야 할 질병’으로 분류하고 있다. 정신과 진단을 두려워하던 예전과 달리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싶어 하는 여성이 늘고 있지만 현장에선 이를 다 수용하지 못하는 한계도 있다. 여성의 ADHD 유형을 파악할 진단 도구나 기준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신 씨는 “검사와 진단 기준이 학업이나 직장생활에서의 어려움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며 “가사나 대인 관계, 정서 조절의 어려움 등 여성 ADHD 환자들이 주로 겪는 어려움을 놓치기 쉽다”고 지적했다. ● 병원 문 두드리는 여성 ADHD 청소년들 앞으로도 환자들을 마주해야 하는데 질환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데 부담은 없었을까. “특별히 용기를 내거나 불이익을 감수할 일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 ADHD는 다른 정신질환보다 일상 복귀가 쉽고, 치료를 받으면 호전될 수 있는 질환이니까요. 또 여성 ADHD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데 학자이자 직업인으로서 화두를 던져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죠.” 그가 ADHD 경험을 털어놓은 유튜브 영상에는 공감한다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주를 이룬다. 어딘가 부족한 스스로를 다그치기만 했던 지난날을 반성하는 독자들도 있다. 신 씨는 여성 ADHD 환자에 대한 관심이 단순히 여성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질병을 더 입체적으로 들여다봐야 배제되는 환자들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 남성 ADHD 환자의 댓글을 소개했다. “저 역시 조용한 ADHD라 진단이 늦었습니다. 처음엔 작가님이 왜 이를 여성만의 문제로 여기는지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배제되는 여성 ADHD를 논의하는 것이 같은 유형의 남성 ADHD 환자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긍정적인 변화도 감지된다. 여성 ADHD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콘텐츠가 많아지면서 부모를 설득해 병원을 찾는 여성 청소년이 늘고 있는 것. 신 씨는 “초등학교나 학원 선생님들 중에도 여자 아이들을 더 세심하게 관찰하게 됐다는 얘기를 해 줄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 스마트폰 멀리하고, 줌 열고 청소책에는 1년 동안의 투약일기도 담겨 있다. 약 복용을 깜빡해 우울증을 겪기도 했고, 복용량을 의사와 상의 없이 무리하게 늘렸다가 후회한 적도 있다. 좌충우돌 투약일기를 가감 없이 공개한 건 다른 환자들은 그런 시행착오를 줄였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신 씨는 “처방받은 양만큼 먹고 컨디션이 좋아지면 복용량을 늘리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나중에는 더 먹어야 하는 이유까지 억지로 만들 정도로 약에 더 의존하게 된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주의력이 분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신 씨는 스마트폰을 멀리한다. 일부러 충전을 안 하거나 이불 속에 넣어두기도 한다. 검색이나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주의를 빼앗겨 7~8시간씩 스마트폰을 붙들고 있던 경험이 있어서다. 대신 적절한 자극을 위해 음악을 자주 틀어 놓는다. 일에 시동을 거는 방법도 터득했다. 책상 옆에 낮고 폭신한 소파를 둬 일단 침대 밖으로 몸을 끄집어내는 것, 논문을 써야 하는데 시작이 힘들다면 파일이라도 띄워 놓는 것, 주의가 쉽게 분산되는 것을 고려해 거실과 방에 컴퓨터를 따로 두고 작업 환경을 바꾸는 것 등이다. 하기 싫은 일의 동기부여를 위해 줌(Zoom)도 활용한다. 설거지나 청소를 너무 하기 싫을 때 친구들과 줌을 켜놓고 집 정리를 하는 식이다. 신 씨는 “누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 때문에 각성도 되고, 웃고 떠들며 집안일을 하면 하기 싫다는 감정도 덜 느껴진다”고 말했다. “상담하러 온 여성 중에는 스스로 감정을 억누르다 증세가 악화된 분들이 많아요. 여성의 정신건강을 무너뜨리는 요소 중에는 본인의 기질도 있지만 사회적 억압, 고용 불평등 등 외부적 요인도 큽니다. ‘내 탓’만 하며 스스로 고립되기 전에 전문가를 찾아야 하고, 의사와 상담가들도 젠더적 편견에 갇힌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 2021-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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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힙합에 빠졌던 카이스트 동문들이 ‘암 정복’에 나선 이유[박성민의 THE 이노베이터]

    “목표는 인공지능(AI)을 통한 암 정복입니다.” 회사 설립한 지 8년, 임직원 수 214명, 지난해 매출액 14억 원인 스타트업 대표의 자신감 치고는 포부가 너무 큰 듯했다. 게다가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도, 신약을 만드는 제약사도 아니다. 대표는 암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가정의학과 전문의, 공동창업자 6명은 메스를 한번도 잡아본 적 없는 KAIST 동문들이다. 그런데 기업에 대한 기대치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높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이 선정한 ‘테크놀로지 파이오니어(기술선도 기업) 100곳’에 선정됐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CB인사이트의 ‘세계 100대 인공지능 기업’(2017년), ‘디지털 헬스 기업 150’(2019, 2020년)에도 빠지지 않는다. 한국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뽑혔다. AI를 통한 암 진단과 치료 분야에서 게임 체인저로 기대를 모으는 스타트업 ‘루닛’ 얘기다. AI는 암 정복 과정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보다 궁금한 건 그 목표에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다. 16일 서범석 대표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 면역항암제 효과 예측하는 AI최근 서 대표는 300억 원짜리 미국 출장을 다녀왔다. 암 액체생검(혈액의 DNA에서 암세포 조각을 찾아 암 특성을 분석하는 검사) 분야 세계 1위인 가던트헬스와 파트너 계약을 맺고 300억 원 투자를 유치한 것이다. 미국의 혈액종양내과 전문의 중 80%가 가던트 제품을 쓴다. 기업가치 13조 원인 가던트는 2011년 설립 이래 첫 투자처로 루닛을 선택했다. 가던트가 주목한 건 AI로 암 조직의 면역세포를 분석하는 ‘루닛 스코프’다. 암 조직 슬라이드에서 면역세포의 밀도와 위치를 분석해 특성에 따라 면역항암제의 치료 효과를 예측하는 AI 플랫폼이다. 암 세포 38만 개의 PD-L1(암세포 표면이나 조혈세포에 있는 단백질) 발현 결과를 학습했다. 면역항암제는 직접 암 세포를 죽이지 않는다. 면역 세포를 활성화시켜 암 세포를 공격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아무리 비싸고 좋은 면역항암제라도 환자 몸에 면역세포가 부족하면 힘을 못 쓴다. 루닛 스코프는 환자의 면역학적 형질을 활성 제외 결핍이라는 3가지로 분류해 해당 암 환자에게 면역항암제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예측한다. 일반 검사와 함께 하면 정확도(양성예측도)가 88%까지 올라간다. 이 기술은 미국의 두 기업(Path AI, Paige)과 루닛이 주도하고 있다. 기술력 측면에선 루닛이 앞선다. 루닛 스코프는 올 하반기 연구용으로 선보이고 2, 3년 뒤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서 대표는 “암 조직을 아무리 크게 확대해도 육안으로 분석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면역세포가 어느 정도 있어야 면역항암제에 반응하는지 알아내기도 힘들다”며 “루닛 스코프를 통해 전문의가 판단했을 때보다 면역항암제 투여 가능 환자를 50% 더 찾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 의사보다 암 진단 정확한 루닛 인사이트 세계 시장에 루닛의 이름을 알린 건 AI 영상진단 분야다. 폐암, 폐렴 등 폐질환을 진단하는 ‘루닛 인사이트 CXR’, 유방암을 진단하는 ‘루닛 인사이트 MMG’다. 병변(病變)이나 종양이 의심되는 곳을 화면에 표시하고 양성 확률까지 분석해낸다. 기술력으로는 굴지의 테크기업에도 밀리지 않는다. 2016년 의료영상처리학회 주최 이미지 인식 경연대회(TPAC)에서 구글과 IBM을 꺾고 1위에 올랐다. 지난해 스웨덴 왕립 카롤린스카연구소가 발표한 논문에서 루닛의 유방암 진단 정확도는 81.9%로 의사(77.4%)보다 높았다. 루닛 AI와 의사가 협업하면 정확도는 88.6%까지 올랐다. 암 검진자 8805명, 11만 여 개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다. 진단이 정확하다는 건 죽을 뻔한 사람을 살린다는 의미다. 암 검진을 꾸준히 받아도 미세한 조직은 못 찾는 경우도 있다. AI가 사람이 못 찾은 암을 1년만 일찍 발견해도 생존율은 크게 올라간다. 루닛 AI는 폐암 환자가 암 진단을 받기 3년 전 찍은 엑스레이를 판독해 암을 발견하기도 했다. 연구진은 루닛 AI에 대해 “독자적인 판독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진단 수행 능력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이런 기술력이 뒷받침되자 글로벌 의료기기 회사들이 루닛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세계 최대 헬스케어 기업인 GE헬스케어, 일본 최대 의료영상기기 기업 후지필름 등과 파트너십을 맺었다. 세계 30개 국, 300개 이상 의료기관에서 루닛 인사이트를 쓰고 있다. ● 전문의 11명이 ‘매의 눈’으로 데이터 관리 “루닛 AI는 마치 내비게이션을 달고 운전하는 것과 같다.” 루닛의 AI 기술을 의료 현장에선 이렇게 비유한다. 의사 혼자 암 조직을 분석하는 것이 지도와 표지판을 보고 길을 찾는 것이라면 루닛 AI의 도움을 받으면 암 진단과 치료라는 목적지까지 더 빠르고 정확하게 갈 수 있다는 의미다. 혁신의 비결을 알려면 조직 구성을 보면 된다. 200여 명 직원 중 영상의학과, 병리과, 내과 등 전문의가 11명이다. 루닛은 전체 직원이 10명이 안 됐을 때부터 전문의를 데려왔다. 의료기반 스타트업이 병원과 협력하는 경우는 많아도 이처럼 많은 전문의를 연구개발 인력으로 채용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급여나 조건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서 대표는 “의료 AI 스타트업들은 대개 딥러닝 기술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우리는 의료데이터를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야 기술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구성원의 철학이 다르니 수집하는 데이터의 질도 달랐다. AI의 학습능력을 높이기 위해 고차원의 데이터를 끌어 모았다. 엑스레이에선 안 보이지만 컴퓨터단층촬영(CT)에서 암이 확인된 케이스 등 어려운 문제 풀이만 시킨 셈이다. 서 대표는 이렇게 설명했다. “수학문제 풀이와 비슷해요. 쉬운 문제를 아무리 많이 풀어도 실력이 늘지 않잖아요. 응용 문제도 도전해야 AI도 성능이 향상됩니다. 그냥 대형병원 교수님들만 맡기면 연구를 목적으로 접근하겠죠. 루닛은 사내 전문의들이 제품을 위해 데이터를 요구하고 정제하면서 AI를 단련시켰습니다.” ● 힙합 청년, 암 정복에 도전 루닛이 처음부터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창업’ ‘딥러닝’ 등 테크 산업에 관심이 많던 카이스트 공대생들이 2010년 의기투합해 창업을 준비했다. 자본금은 1000만 원. 리더 격인 백승욱 전 대표(현 이사회 의장)는 힙합동아리에서 만난 선후배 5명을 끌어 모았다. 이들은 ‘AI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한 배를 타기로 했다. 전기전자 공학, 산업시스템공학, 웹사이언스 등 대학원 전공 선택도 창업을 고려했다. 이들은 현재 알고리즘 개발, 영상의학 등 5개 분야를 총괄한다. 첫 도전은 의료 분야가 아니었다. 고객에게 가장 어울리는 옷을 찾아주는 AI를 내놓았지만 금세 접을 수밖에 없었다. 개인의 취향이 중요한 패션 분야를 AI의 정확도를 내세워 접근한 게 패착이었다. 정답이 없는 분야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백 의장과 동료들은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AI가 가장 기여할 수 있는 분야를 찾자”고 뜻을 모았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와 정착한 분야가 폐암과 유방암 진단 AI다. 발병률이 높고, 영상 데이터가 충분해 AI 학습이 용이하다고 판단했다. 백 의장이 서 대표에게 합류를 요청한 것도 그 무렵이다. AI 알고리즘만큼이나 의학 지식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KAIST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다. 생명과학과를 졸업한 서 대표는 서울대 의대로 편입해 전문의로 일하는 중이었다. 어려서부터 암에 관심이 많고 사업가가 되는 게 꿈이었던 서 대표도 제안을 받아들였다. 서 대표는 “환자를 직접 치료하는 것도 좋지만 새로운 기술로 암 정복에 기여하는 것도 의사로서 의미 있는 역할”이라고 말했다. ● 기업가치 매년 두 배씩 커져 스타트업을 하기에 한국은 장점만큼 단점도 뚜렷하다. 디지털 환경이 좋고 변화에 민감한 역동적인 사회 분위기는 좋은 토대다. 높은 교육열은 뛰어난 인재를 배출해낸다. 하지만 막상 시작해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 하면 발목을 잡는 게 한둘이 아니다. 루닛도 그런 과정을 겪었다. AI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의료데이터를 활용할 때다. “미국만 가도 아직 병원에서 엑스레이 필름을 쓰는 곳이 많죠. 반면 한국은 디지털화가 잘 돼 있고, 주요 병원에 방대한 암환자 데이터가 모여 있어 데이터를 빨리 수집하기에는 좋은 환경입니다. 그런데 그 데이터를 병원 밖으로 가져올 순 없어요. 미국은 법에 따라 개인정보를 익명화해 데이터 활용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법으로 보장합니다. 한국은 데이터 활용의 명확한 기준이 없어 병원들이 데이터에 보수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어요.” 루닛에게 2021년은 특별하다. 가던트의 투자를 받으면서 누적 투자금액 1000억원 돌파를 앞두고 있다. 올해 매출은 지난해의 7배가 넘는 100억 원을 예상한다. 연내 코스닥 상장도 준비 중이다. 기술특례상장을 위한 기술성 평가에서 두 기관에서 ‘AA’를 받았다. 헬스케어 기업 중 최초다. 지난해 초 2000억 원 수준으로 평가 받았던 기업가치는 두 배로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아직 갈 길도 멀다. 지금까지 폐암과 유방암 진단에 집중했지만 다른 부위의 암 역시 도전할만한 영역이다. 서 대표는 “암 검진 분야에서 글로벌 기업들과 협업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루닛의 꿈이 현실이 된다면 의료현장에는 또 하나의 훌륭한 내비게이션이, 한국 경제에는 또 하나의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 원 이상 비상장 스타트업)이 탄생할지도 모른다.박성민 기자 min@donga.com}

    • 2021-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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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 무공훈장 주인공 찾기 사업 2년…구국영웅들은 어디에

    “‘대한민국이 아직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쟁이 멈춘 지 약 70년 만에 참전용사인 두 작은아버지의 무공훈장을 받게 된 안봉순 씨(70)는 멈추지 않는 눈물에 말을 잇지 못했다. 4형제 중 셋째인 고 안석길 하사(상병), 넷째 고 안석렬 이등중사(병장)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3월 입대해 육군 3사단 22연대에 배치됐다. 함께 결혼식을 올린 지 사흘 만이었다. 용맹하게 전장(戰場)을 누비던 형제는 살아서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형은 입대 6개월 만에, 동생은 이듬해 정전협정 체결(7월 27일) 20일을 앞두고 전사했다. 그마나 동생은 유해를 전달받아 장례를 치를 수 있었지만 형은 아직 북한 땅인 강원도 김화군 원덕면에 잠들어 있다. 급하게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미처 유해를 수습할 겨를이 없었다. 무공훈장 전달도 쉽지 않았다. 본적지 면사무소가 전쟁 통에 소실된 뒤 두 형제의 호적이 제대로 복원되지 않아 후손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육군본부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 조사단’이 병적(兵籍) 기록을 바탕으로 수소문한 끝에 14일 안 씨와 연락이 닿았다. 안 씨는 “국가가 참전용사들을 기억해 주는 것에 감사하다”며 “돌아가신 날짜를 몰라 그동안 제사도 못 지냈는데 늦게나마 조카의 도리를 할 수 있게 됐다”며 감격스러워했다. ○ 70년 전 희미한 기록과의 싸움 6·25전쟁 참전용사는 약 100만 명. 이 중 17만9331명이 무공훈장 수훈자다. 하지만 아직 4만5938명(25.6%)이 훈장을 받지 못했다. 전쟁 중에 작성된 병적 기록은 부정확한 경우가 많다. 아명(兒名)을 썼거나 생년월일이 실제와 다르면 당사자를 확인하기 어렵다. 전역 후 본적을 옮기거나 행정구역이 바뀌면 찾는 범위가 넓어진다. 기록이 소실된 경우 당사자나 후손을 찾기가 더 힘들어진다. 수훈자 찾기에 속도가 붙은 건 2019년 7월 24일 ‘6·25전쟁 무공훈장 수여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다. 단장을 포함해 17명으로 구성된 조사단이 꾸려져 지난달까지 2년 동안 1만1675명에게 무공훈장을 전달했다. 조사는 70년 전 기록에서 쓸 만한 정보를 최대한 발굴하는 데서 시작된다. 현재는 쓰지 않는 약자나 휘갈겨 쓴 한자는 한자판독병조차 읽기가 쉽지 않다. 음은 같지만 다른 한자를 오기해 이름이나 지명이 헷갈리는 경우도 많다. 어렵게 수훈자의 본적지를 확인하면 각 지방자치단체를 찾아가 과거 호적부나 현재 주민등록 기록과 대조한다. 권역을 나눠 3개 팀이 탐문을 하는데 아직 방문하지 못한 지자체도 많다. 양순일 중령은 “그래도 명단을 들고 가면 60% 정도 수훈자를 찾는다”고 말했다. ○‘고바우 영감’이 기록한 10인의 영웅 의외의 곳에서 수훈자를 찾는 경우도 있다.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했던 고 김성환 화백은 국방부 정훈국 소속 종군 화가로 전쟁의 참상을 기록했다. 그는 1951년 10월 6사단 19연대를 찾아 금성지구(강원 철원군 일대) 전투에서 공적이 뛰어났던 장병 10명의 인물화를 그렸다. 김 화백을 만나 이 사연을 들은 육군군사연구소 김상규 박사는 참전용사 본인이나 후손에게 그림 사본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런데 조사단에 확인해 보니 10명 중 9명이 무공훈장 수훈자인데 2명은 아직 무공훈장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조사단과 국방홍보원은 그림 속 주인공을 찾는 ‘고바우 프로젝트’ 캠페인을 진행했고, 두 달여 만에 9명을 찾았다. 10인의 영웅 중 유일한 생존자인 정만득 하사(90)는 직접 그림을 전달받았다. 김 화백의 그림이 더 값졌던 건 그림을 통해 무공훈장 서훈이 누락됐던 참전용사까지 찾았다는 점이다. 조사단은 6·25 전투상보를 다시 확인해 고 서주선 하사의 공적을 심의하고 훈장을 수여했다. 서 하사의 딸 서옥자 씨(60)는 “전쟁에서 손가락 2개를 잃은 아버지는 몸에 박힌 총알도 제거하지 못한 채 매일 전쟁의 참혹한 기억에 시달리다 돌아가셨다”며 “훈장과 그림을 보며 아버지를 떠올리곤 한다”고 말했다. ‘고바우 프로젝트’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10인의 영웅 중 양만식 하사를 찾지 못했다. 당시 김 화백이 발행한 신문 ‘웃음과 병사’에는 양 하사의 공적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양만식 하사는 BAR(브라우닝 자동소총) 사수로 1만 발 이상을 발사하여 놈들을 근처에 발도 못 붙이게 했으며, (중략) 이 소수의 병력으로 대적을 물리친 것은 실로 놀라운 만한 공적이다.” 양 중령은 “양만식 하사는 현재는 북한 땅인 황해도 연백군 지역 출신이라 소재 파악이 어렵다”며 “이북5도위원회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훈장을 전달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해외 거주 손자가 할아버지 무공훈장 찾기도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헤매다 조사단을 통해 무공훈장을 받고 묘지까지 찾은 경우도 있다. 김종태 씨(71)는 30년 넘게 국방부, 국가보훈처, 국립현충원, 유해발굴감식단 등을 찾아다녔지만 아버지 김윤식 일등중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마지막 희망으로 지난해 조사단에 문의한 결과 아버지와 같은 군번인 참전용사가 1954년 무공훈장 수여자로 결정되고도 훈장을 받지 못한 사실을 확인했다. 조사단은 여러 기록을 확인한 끝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김 일등중사의 묘지를 찾아냈다. 묘비에 적힌 이름(김준식)이 달라 자녀들이 아버지의 묘지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조사단이 전국을 누비는 것만으로는 수훈자를 찾는 데 한계가 있다. 관련 부처의 협조가 필요하다. 고 나은철 이등중사는 외교부가 해외 동포들에게 사업을 적극적으로 홍보한 덕에 후손들이 훈장을 받게 된 경우다. 캐나다에 살던 나 이등중사의 손자 나항렬 씨(50)는 올 3월 토론토 영사관 홈페이지에서 무공훈장 찾아주기 사업을 알게 됐다. 나 씨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검색하다 비슷한 이름(라온철)을 발견하고 조사단에 할아버지 군번 등 관련 기록을 이메일로 보냈다. 조사단은 나 이등중사의 호적등본 등 서류를 검토해 그가 무공훈장 수훈자인 것을 확인했다.○“지자체 협조, 활동 기간 연장 필요” 10대 후반∼20대 초반 전쟁터로 뛰어든 참전용사들은 생존해 있다면 어느덧 90세 안팎이 됐다. 수훈자 찾기를 더 서둘러야 하는 이유다. 실제로 조사단이 무공훈장을 찾아준 수훈자 중 생존자는 3%(351명)에 불과하다. 2019년 9.8%였던 생존자 비율은 올해 2.3%까지 떨어졌다. 생존자들을 사망자보다 일찍 찾은 경우가 많고, 해가 갈수록 수훈자들이 사망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수훈자를 더 찾기 위해선 조사단 활동 연장을 위한 법률 근거를 마련하는 게 시급하다. 조사단 활동 기간(3년)이 끝나면 내년 8월부터는 조사단을 운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무공훈장 찾아주기는 단절된 역사를 잇는 과정이자, 잠들어 있던 국가관을 깨우는 중요한 작업”이라며 “특히 생존자에게 훈장을 전달하는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사업을 널리 알린다면 수훈자 찾기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조사단은 거주자 기록과 열람 권한을 갖고 있는 각 지자체의 협조도 당부했다. 업무 부담이 크고 민원이 많은 수도권이나 큰 도시로 갈수록 담당 공무원이 비협조적인 경우가 많다. 조사단을 이끌고 있는 육군인사사령부 전계청 인사행정처장(준장)은 “조국을 위해 헌신한 선배 전우의 공훈을 찾아주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책무”라며 “특히 생존한 참전용사분들을 한시라도 빨리 찾으려면 법 개정을 통해 조사단 활동 기간이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계룡=박성민 기자 min@donga.com}

    • 2021-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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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환자 이송전문 ‘하늘위 응급실’… 에어앰뷸런스 아시나요

    지난해 8월 멕시코 교민 A 씨(56·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후유증으로 폐 기능이 90% 이상 손상돼 폐를 이식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폐포(肺胞)가 딱딱하게 굳는 폐 섬유화가 빨리 진행돼 현지에선 손 쓸 방법이 없었다. 에크모(ECMO·인공심폐기)로 하루하루 버티던 A 씨의 마지막 희망은 에어앰뷸런스(환자 이송 전용 비행기)였다. 그는 한국까지 1만2000km를 날아와 폐 이식 수술을 받고 완치됐다.○‘하늘 위 응급실’ 코로나 환자 96명 이송 전파력 강한 변이 바이러스가 유행하면서 전 세계 코로나19 확진자가 다시 늘고 있다. 백신 보급이 더디거나 의료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국가의 교민 피해도 크다. 단기 출장이나 현지 파견 중 감염 사례도 적지 않다. 국내에서 치료받기 위해 에어앰뷸런스를 이용하려는 개인과 기업의 문의도 끊이지 않는다. 16일 에어앰뷸런스를 운영하는 ‘플라잉닥터스 코리아’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국내 이송된 코로나19 환자는 96명이다. 최근 하루 4만 명 이상 신규 확진자가 발생하는 인도네시아에서만 교민 53명이 에어앰뷸런스를 타고 귀국했다. 최영호 플라잉닥터스 코리아 전무는 “입원도 못한 채 집에서 산소통에 의지하거나 탑승을 앞두고 증상이 악화돼 숨진 교민도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송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응급상황 대처와 산소 확보다. 길게는 24시간 넘게 지상 의료진과 단절되기 때문이다. 탑승한 의료진의 감염을 막기 위해 환자는 이동식 격리장치(PIU·portable isolation unit)에 누워 옮겨진다. 에어앰뷸런스의 산소 공급 능력에 따라 여럿이 탑승하기도 한다. 최 전무는 “최근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코로나19에 걸린 가족 3명이 귀국했는데 이 중 2명이 별도 산소 공급이 필요 없는 경증이어서 에어앰뷸런스 한 대로 가능했다”고 말했다. 이용료는 이송 거리와 기종에 따라 1억∼3억 원에 책정된다. 같은 거리라도 큰 항공기는 급유를 위해 경유할 필요가 적어 이송시간은 짧지만 이용료는 비싸다. 에크모를 장착하거나 의료진이 추가 탑승하면 비용이 더 올라간다.○이송까지 평균 3일, 한국서 협진 가능 에어앰뷸런스를 이용하려면 환자 상태도 중요하다. 비행기가 도착했지만 환자 상태가 악화돼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에어앰뷸런스가 환자와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이송도 빠르다. 플라잉닥터스 코리아가 세계 200여 개국에서 외국 업체에 수수료를 지불하며 운영하는 비행기는 약 160대. 최 전무는 “예약부터 이송까지 3일 정도 걸리지만 비행기가 마침 현지에 있거나 환자 상태가 양호하면 하루 만에도 옮길 수 있다”고 말했다. 환자 상태가 위중하면 한국 의료진이 현지로 급파되거나 원격 협진도 이뤄진다. 최 전무는 “의료 시스템이 열악한 국가의 의료진에게 의견을 전달하거나, 가정에서 이송을 기다리는 환자 영상을 전달받아 산소 공급량 조절 등을 조언하기도 한다”며 “응급의학과를 비롯해 13개 과 전문의 20여 명이 도움을 준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해외에서 실어온 환자를 병원으로 옮기기까지 개선할 점도 많다. 응급의학과 의사를 태운 특수구급차가 활주로까지 들어와서 코로나19 환자를 실어 가야 하지만 인천국제공항에는 특수구급차가 없다. 현재는 서울 환자를 담당하는 서울대병원 특수구급차를 이송 때마다 섭외하고 있다. 최 전무는 “정부가 지역 의료계와 협의해 응급환자 이송 시스템을 서둘러 보완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비싼 이송 비용 전액을 보험으로 보상받기 힘든 것도 문제다. 귀국 비용을 지원하는 여행자보험이 있지만 보상 범위가 2000만∼5000만 원 수준이어서 실제 이용료에 크게 못 미친다. 국내 여행자보험 가입률도 2019년 기준 약 12%에 불과하다. 게다가 현지 병원에 14일 이상 입원해야 보험금을 지급하도록 돼 있어 혜택을 못 받는 보험 가입자도 많다. 정부는 지난달 발표한 해외 이송 환자 이송 개선안에서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겠다고 밝혔지만 이행 시점은 정하지 않았다. 플라잉닥터스 코리아는 조만간 국내에도 에어앰뷸런스를 도입할 예정이다. 최 전무는 “국내 의료진 탑승이 더 쉬워지고 외국 운영사에 내는 수수료도 아낄 수 있어 고객 비용 부담을 낮출 수 있다”고 말했다.박성민 기자 min@donga.com}

    • 2021-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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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무살 여가부의 혹독한 성인식 [박성민의 더블케어]

    출범 20년을 맞은 여성가족부가 혹독한 성인식을 치르고 있다. 툭하면 ‘무용론’ ‘폐지론’에 휩싸이더니 최근엔 야권 대선 주자들까지 이를 공론화하고 있다. 국민의힘 대선주자인 유승민 전 의원과 하태경 의원은 여가부 폐지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들은 “여가부 장관은 정치인이나 대선캠프 인사에게 전리품으로 주는 자리”(유 전 의원), “여가부가 젠더갈등을 부추겨왔다”(하 의원) 등의 날 선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여가부 폐지에 힘을 싣는 듯했던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논란이 커지자 8일 “(당론 채택은) 숙의를 거쳐야 한다”고 한 발 물러섰지만 “정부 효율화 측면에서 특임부처를 없애자는 취지로 가면 광범위한 국민 지지가 있을 것”이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여가부는 어쩌다 이렇게 동네북 신세가 됐을까. 여가부의 어제와 오늘을 들여다보며 존폐론을 둘러싼 궁금증을 짚어보았다.20년 가까이 정부 여성 관련 업무를 경험한 이복실 전 차관(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회장)에게 여가부에 대한 비판에서 무엇이 맞고 틀린지 물었다. 이 전 차관은 1998년 대통령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출범 당시 과장으로 부임한 뒤 차별개선국장, 대변인, 청소년가족정책실장 등을 거쳐 2014년까지 여가부에 몸담았다. 그는 친정을 향해 “현 정부 들어 여가부가 정치 논리에 휘둘리는 모습으로 위기를 자초했다”며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 ‘스무 살’ 여가부, 졸업할 때 됐다? ‘여가부 무용론’의 근거 중 하나는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양성평등이 많이 이뤄져 여성 이슈 전담 부처가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젊은 남성들 사이에선 “부모 시대에는 남녀 불평등이 만연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오히려 남자들이 역차별 받고 있다”는 인식도 팽배하다. ‘정부 각 부처에서 양성평등 업무를 하는데 왜 굳이 여가부가 필요하느냐’는 정치권 일부 주장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하태경 의원은 “이제 졸업할 때가 됐다”고도 했다. 이 전 차관은 “아직도 여성들의 유리천장이 공고하고, 사회 곳곳에 성별 격차가 여전하다”고 반박했다. 이준석 대표가 줄곧 비판해 온 ‘여성 할당제’에 대해서도 “국회 비례대표 50% 여성 할당 의무화 등 그동안 여성 진입이 어려웠던 분야에 제한적으로 시행됐을 뿐 민간 영역에선 아직 여성들이 취업이나 경력을 이어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은 여가부가 여성의 공간을 늘리는 데 버팀목이 돼야 한다는 의미다. 여성이 느끼는 불평등은 통계로도 나타난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올 3월 발표한 ‘세계 성 격차 지수(GGI·Gender gap index)’에 따르면 한국은 156개국 중 102위에 그쳤다. 고위 임원 및 관리직 여성 비율은 134위, 추정 소득 119위, 유사 업무 임금 격차 116위 등으로 ‘경제 참여와 기회’ 부문의 불평등이 특히 심했다. ● 업무 중복, 비효율… 폐지냐 개편이냐 여가부의 업무 영역이 타 부처와 중복돼 비효율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여가부를 폐지해야 한다는 측에선 “현재의 여가부 업무를 유관 부처로 넘기고, 대통령직속 위원회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 전 의원은 “여성의 취업, 경력 단절 등은 고용노동부, 아동 양육과 돌봄은 보건복지부와 교육부, 성범죄 등의 문제는 법무부와 검찰, 경찰이 담당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전 차관도 “각 부처별 업무 배분은 보다 효율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가령 현재 청소년 업무는 여가부, 아동은 복지부가 담당하는 데 굳이 나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아동 부문에서도 어린이집 등 시설 보육은 복지부, 아이돌보미 같은 방문 보육은 여가부가 맡고 있다. 또 아동의 학대 사건은 복지부, 성폭력은 여가부가 담당하는 데 주관 부처를 하나로 통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업무의 효율적인 조정과 부처 폐지는 다른 문제라는 게 여가부 존치론자들의 주장이다. 이 전 차관은 “장차관이 추진하던 업무를 각 부처의 실, 국, 과에서 맡으면 정책 동력이 떨어지고 부처 내 업무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2014년 한부모 가정의 양육비 이행 지원법을 통과시킨 것도, 10년 넘게 법안을 준비하고 장차관이 기획재정부를 설득해 기구 설립을 이끌어 낸 결과”라고 덧붙였다. 이 전 차관은 김대중 정부 시절 정무장관(제2)실부터 여성특별위원회, 여성부로 이어지는 업무 소관 변경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그는 “독립된 부처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는 장관이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이라며 “정부 내 각종 위원회가 넘치지만 국무회의 의결권도, 정책 실행 권한도 없어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 왜 여성들마저 “여가부 잘못 운영” 지적할까 여가부는 호주제 폐지, 성폭력 피해자 지원 조직인 해바라기 센터 설립, 성매매 피해자 보호, 직장 내 성희롱 근절, 아이돌보미 사업 등 다른 부처가 챙기지 못하는 이슈와 정책을 성평등 관점에서 꾸준히 제기해 왔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가부에 대한 여론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남성들에게는 “여성만을 위한 조직”이라는 거부감이 크다면, 여성들은 “존재 의미가 뭔지 모르겠다”고 비판한다. 지난해 12월 김정재 국민의힘 의원실이 의뢰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2.3%가 ‘여가부가 잘못 운영되고 있다’고 답했는데, 남성(71.4%)보다 여성(74.3%)의 비판 목소리가 높았다. 부정적인 여론은 여가부가 자초한 측면도 적지 않다. 여가부는 윤미향 의원이 이사장을 맡았던 정의기억연대의 회계부정 의혹을 진상 조사하겠다며 국회가 자료 제출을 요구했을 때 끝내 응하지 않았다. 여당 소속 광역자치단체장들의 권력형 성범죄가 잇따랐을 때 피해 여성을 보호하기는커녕 정권의 눈치를 살피는데 급급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정옥 전 장관은 서울과 부산시장 보궐선거가 치러지게 된 것에 대해 “국민 전체가 성인지 집단학습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발언해 사실상 경질되기도 했다. 이 전 차관은 “현 정부에서 젠더 이슈가 터졌을 때 여가부가 제 목소리를 낸 건 정현백 전 장관이 과거 여성 비하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의 경질을 주장했던 순간밖에 없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권력형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여당이 ‘피해 호소인’ 운운했을 때 가만히 있는 여가부를 보며 여성들은 ‘여가부는 피해 여성의 권익은 뒷전이고 정치권의 눈치만 본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가부는 정부 내 야당…정파 관계없이 싫은 소리 내야” 여가부 폐지론이 야권의 공식 대선 공약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여당은 폐지 주장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고, 야권 대선 후보군에서도 윤석열 전 검찰총장,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 등은 ‘신중론’을 유지하고 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은 “여가부를 폐지한다고 문제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며 “양성평등가족부로 개편해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희룡 제주도지사 역시 “무슨 일이 생기면 ‘해경을 없앤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없앤다’고 접근하는 것은 대안세력으로서의 신뢰를 떨어뜨린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여가부가 스스로 존재 이유를 증명하지 않는 이상 ‘무용론’ ‘폐지론’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정치에 휘둘리는 구태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이 전 차관은 “여가부가 정부 내 야당 역할이라는 기본 위치를 잊어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 그는 “청와대나 공룡 부처들이 기존 관습에 얽매여 있을 때 양성평등에 기반한 새로운 의제를 개발하고 정부와 여당이 듣기 싫은 소리도 꾸준히 낼 수 있어야 한다”며 “젊은 세대에게 필요한 정책과 비전으로 조직의 신뢰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박성민 기자 min@donga.com}

    • 2021-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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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설현장 추락사 5년새 1348명… 정부, 위험현장 집중점검

    지난달 22일 전북 전주시의 한 오피스텔 건설 현장에서 60대 근로자가 10m 아래로 추락해 숨졌다. 타워크레인과 건물을 연결하는 지지대를 철거하던 중 몸을 지탱하는 줄이 끊어진 것이다. 같은 달 21일에는 전북 익산시에서 공장 지붕을 고치던 50대 남성이 갑자기 지붕이 무너지면서 6m 아래로 떨어져 숨졌다.○ 건설 현장 사망자 10명 중 6명은 ‘추락사’ 6일 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 동안 건설 현장에서 추락 사고로 숨진 근로자는 1348명이나 된다. 전체 건설 현장 사고 사망자 2376명 중 56.7%에 해당한다. 같은 기간 전체 산업재해 사고 사망자(4641명)의 29%가 건설 현장에서 추락해 숨진 셈이다. 추락 사망사고는 대표적인 후진국형 재해다. 안전설비를 제대로 갖췄거나 안전수칙만 지켰더라도 막을 수 있는 사고다. 현장의 사고 위험이 얼마나 큰지는 근로자들이 가장 잘 체감한다. 경기 부천시의 한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장모 씨(48)는 “고층 건물 바깥에 매달려 일할 때 작업 발판이 단단히 고정되지 않아 여러 번 떨어질 뻔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추락사고로 숨진 236명 중 건물 바깥의 임시 가설물인 비계에서 떨어져 사망한 경우와 지붕 및 대들보에서 추락한 경우가 각각 47명으로 가장 많았다. 사망사고가 난 현장은 기본적인 안전설비마저 갖추지 않은 경우가 많다. 비계에 제대로 된 작업발판 대신 나무판자를 쓰다가 발판이 부서지거나 기울어져 추락한 경우도 있다. 안전 난간을 위아래로 이중 설치하지 않고 하나만 설치해 추락을 막지 못하는 일도 발생한다. 이런 사망사고는 대규모 건설 현장보다 중소 규모 현장에서 더 많이 발생한다. 지난해 건설 현장 추락사고 사망자의 87.3%(206명)는 공사 규모 120억 원 미만 사업장에서 숨졌다. 소규모 건설 현장일수록 안전시설을 위한 투자가 미흡해 사고 발생 가능성이 높았다. ○노후 크레인 교체, 1억 원까지 지원 선진국들은 이런 추락사고 사망을 줄이기 위해 현장관리자의 책임을 강화하고 있다. 영국은 2015년 ‘고소(高所) 작업에 관한 규정(Work at Height Regulations)’을 도입한 후 추락사고가 줄어들고 있다. 발주자를 포함한 모든 공사 관계자에게 근로자의 안전보건과 관련된 책임을 부여한 것이다. 이는 책임자들이 현장 특성에 맞는 안전관리 프로그램을 개발하도록 유도했고, 사고 위험을 낮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싱가포르는 벌점 18점 이상이면 입찰 참여나 외국인근로자 채용을 제한하는 등 강력한 벌점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정부도 건설 현장의 사고 위험 요소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넘어지거나 꺾이는 사고가 잦은 이동식 크레인과 추락사고 발생 위험이 큰 차량탑재형 고소작업대의 교체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50인 미만 중소 사업장에서 기기를 교체할 경우 비용의 50%를 1억 원 한도 내에서 지원한다. 올해 이동식 크레인 2352대, 차량탑재형 고소작업대 694대를 교체할 예정이다. 또 공사 비용 50억 원 미만 건설 현장에는 일체형 작업 발판과 추락방지망 설치 비용을 3000만 원까지 지원한다. 최근에는 지붕 추락사고 방지를 위한 채광창 안전덮개와 안전블록 세트도 지원 대상에 추가했다. 정부는 현장점검을 강화하고 사고 위험 요인을 개선해 사망사고를 줄여 나갈 계획이다. 현장 점검(패트롤) 차량을 기존 108대에서 올해 404대로 늘렸다. 고용노동부는 이달부터 사망 확률이 높은 추락과 끼임 사고 위험 현장을 일제 점검한다. 고용부는 “특히 사망사고가 잦은 중소 규모 사업장을 집중 점검할 계획”이라며 “현장의 안전조치 이행을 독려해 산재 사망사고를 줄여 나가겠다”고 밝혔다.박성민 기자 min@donga.com}

    • 2021-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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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직연금 운용, 안전자산에 쏠려… 디폴트 옵션 도입 나서야”

    “디폴트 옵션(사전 지정 운용)을 도입해 퇴직연금 운용의 차별화를 유도해야 한다.”(박종원 서울시립대 경영대학 교수) “현재 퇴직연금 운용 포트폴리오는 99%가 안전자산에 쏠려 있다. 디폴트 옵션을 통해 이를 완화할 수 있다.”(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 30일 ‘100세 시대 퇴직연금, 왜 디폴트 옵션인가’를 주제로 동아일보와 채널A가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개최한 ‘제23회 동아모닝포럼’에서 디폴트 옵션 도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디폴트 옵션은 퇴직연금 확정기여(DC)형 가입자가 별도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미리 설정된 상품에 투자하는 제도다. ‘쥐꼬리 수익률’로 노후안전망 역할을 못 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퇴직연금을 적극적으로 운용해 수익률을 높이려는 취지다. 국내 퇴직연금의 최근 5년 연 환산수익률은 1.8%대에 그쳤다. 적립금(255조 원)의 89.3%가 원리금 보장 상품에 투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 참석자들은 적극적으로 퇴직연금 운용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로 지나치게 복잡한 상품 구조를 지목했다. 김경록 미래에셋 투자와연금센터 대표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메뉴판이 어려워 쉬운 메뉴만 시키듯 투자 상품이 너무 어렵고 복잡하니 간단한 원리금보장형 상품만 선택하게 된다”고 말했다. 주제 발표에 나선 박종원 교수도 “디폴트 옵션을 도입하더라도 상품 구성을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디폴트 옵션 등으로 높은 수익률을 내고 있는 연금 선진국의 사례도 소개됐다. 미국은 DC형 가입자의 80%, 스웨덴은 92%가 디폴트 옵션을 활용한다. 남재우 연구위원은 “퇴직연금 도입 역사가 나라마다 달라 단순 비교는 주의해야 한다”면서도 “펀드 간 경쟁을 유도해 수수료를 낮추고 표준화된 항목 공시로 가입자의 선택을 돕는 호주의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고 말했다. 디폴트 옵션이 도입되면 금융 지식이 부족하거나 이직이 잦은 근로자는 상대적으로 손실 위험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퇴직금 인출 시기에 수익률이 나쁘면 원금마저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은행과 보험업계 등에서 시장 변동성에 대비해 디폴트 옵션에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국회에서는 디폴트 옵션 도입을 뼈대로 하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 3개가 논의 중이다. 여당에선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운용 대상을 실적배당형 상품으로 제한한 반면 야당 안은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포함하고 있다. 정승혜 모닝스타코리아 상무는 “시장 변동성 때문에 10년간 투자하면 3년은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투자 단절이 없어야 손실도 만회하고 장기투자에 따른 높은 수익률도 기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동현 고용노동부 퇴직연금복지과장은 “퇴직연금을 해지하지 않고 오래 운용할 수 있도록 세제 혜택 등 다양한 지원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가입자 권리를 보호할 장치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유정엽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정책본부장은 “퇴직연금 사업자의 사전 교육과 설명 의무를 강화하고 과도한 수수료를 어떻게 통제할지 더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토론회 좌장을 맡은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한국연금학회장)은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에는 운용사가 수수료 산정 기준을 제출하지 않아도 소액의 과태료만 내게 돼 있어 현실적이지 않다”며 제도 보완을 촉구했다.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금융회사들이 가입자의 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 디폴트 옵션 상품을 적극 개발해야 한다”며 “가입자의 투자가이드를 위한 ‘연금 플래너’를 제도화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박성민 기자 min@donga.com}

    • 2021-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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