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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에서 절세의 미인으로 꼽히던 네페르티티 왕비(사진)의 무덤이 1922년 발견된 투탕카멘 왕의 무덤 옆에 숨겨져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네페르티티 왕비는 기원전 1370년∼기원전 1330년 사이 생존했다. 투탕카멘 왕은 네페르티티의 양아들이자 사위이다. 네페르티티는 남편을 도와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혁명’을 단행한 역사적 인물이지만 아직까지 무덤이나 미라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미스터리에 싸여 있는 왕비의 무덤은 투탕카멘 왕의 무덤 북쪽에 숨겨져 있다고 미국 애리조나대의 영국인 고고학자 니컬러스 리브스 교수가 10일 발표했다. 리브스 교수는 투탕카멘 무덤 벽에서 촬영한 고해상도 디지털 영상을 분석하던 중 숨겨진 문의 흔적을 발견한 뒤 추가 연구를 통해 이것이 네페르티티 무덤으로 가는 길이라고 밝혔다. 리브스 교수는 “투탕카멘 왕이 어린 나이에 갑자기 죽자 무덤을 만들 시간이 없어 네페르티티가 묻힌 무덤에 함께 묻었다”고 주장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개인적으로 통일이 되면 평양에 돌아가 꼭 다시 가고픈 식당이 있다. 김일성대 옛 기숙사 정문 앞에 있는 ‘룡흥식당’이다. 대학 앞 지하철 ‘삼흥역’ 출구에서 불과 20m 앞에 있다. 이 식당은 냉면 전문집이다. 옥류관만큼 맛이 있지 않지만 나름대로 꽤 잘하는 냉면집이다. 참고로 내 입에는 남쪽의 어느 유명 냉면집 맛도 평양의 평범한 냉면집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걸 보면 냉면은 물맛이 매우 중요한 것 같다. 내가 다니던 당시 김일성대는 교직원만 1만5000명가량 됐는데, 대학 정문 주변에 식당은 룡흥식당 단 하나뿐이었다. 대학가 주변에 수백 개의 식당이 골목을 이루고 있는 서울의 신촌이나 홍익대 주변을 떠올린다면, 김일성대 앞에 식당이 하나밖에 없다는 건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평양의 대다수 사람들은 다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다. 오전 8시부터 90분 강의를 3과목 마친 학생 행렬이 대학 청사를 나서 우르르 정문으로 향하는 모습이 장관이다. 그 속에서 걸음이 잽싼 무리가 있다면 룡흥식당으로 갈 확률이 높아 서로 눈치를 보면서 경계한다. 열심히 뛰어가도 점심시간엔 식당 앞에 긴 줄이 늘어서 있었으니까. 요주의 무리를 발견하고 아닌 척 추격하다가 막판에 추월해 뒷줄에 세운다면 쾌감에 냉면 맛은 더 좋아진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지금 그야말로 옛말이 됐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삼흥역 앞에만 식당이 다섯 개나 새로 생겨났다고 한다. 정문 울타리를 벗어나면 약 100m 안에 식당이 10여 개나 생겨났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직접 가봐야 알지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어디 그뿐이랴. 대학 주변 아파트 가정집에서 하는 개인 식당도 많다. 말이 식당이지, 가정집에 들어가 밥상을 펴놓고 먹는 식이다. 각 집마다 메뉴가 특성화돼 있고 가격도 싸서 싼값으로 허기를 때우려는 대학 기숙사생들이 주요 단골이다. 이런 개인 식당들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이후 대학가 주변에 많이 생겨났는데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돈 떨어진 대학생들이 우산이나 장화와 같은 물건을 맡기고 외상으로 잔뜩 먹고는 방학에서 돌아와 한꺼번에 갚기도 한다. 서울도 먼 옛날에 대학생들이 그리 살았다고 하니 사람 사는 동네는 욕구나 인심이 거기서 거기라는 점을 새삼 느낀다. 요즘 평양에 식당들이 수없이 많이 생기는 것을 보면 음식 문화 역시 서울을 따라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평양 사람들이 외식에 눈을 뜬 것이다. 얼마 전 평양 주민에게 어떤 식당이 유명하냐고 물었더니 수십 개를 줄줄 내리 읊는다. 그만큼 평양 사람들이 식당에 관심이 많다는 뜻이다. 고난의 행군 이전만 해도 식당은 한 개 구역에 고작 몇 개 정도만 있었다. 그때만 해도 평양에서 식당은 출장을 다니는 사람 또는 기숙사생이나 먹는 곳 정도로 여겨졌다. 식당 가격도 ‘량표’ 1장에 1∼2원이 대다수였다. 량표란 200g짜리 식량권을 의미하는데, 출장을 많이 다니는 사람은 쌀을 메고 다닐 수 없으니 배급 대신 외지 식당에서 밥 한 그릇과 바꾸어 먹을 수 있는 량표를 받은 것이다. 이때만 해도 유일한 손님 접대는 집에 초대하는 것이었다. 회사 동료들끼리 술 한잔하려고 해도, 부서 회식을 하려 해도 집밖에 장소가 없었다. 이렇게 동료들의 집을 찾아다니다 보면 같은 직장 사람들의 술버릇까지 아내와 자식들이 다 꿰뚫는다. 서로 길을 가다가도 “오, 너 아무개 동무 아들이구나” 하고 알아본다. 서로 상대방의 숟가락 개수까지 알고 살다 보니 동료들끼리 서로 끈끈해지는 면도 분명히 있다. 그 대신 가정주부들만 허리가 휜다. 그런데 요즘 평양은 술 한잔할 때 식당을 찾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고 한다. 점점 남편 회사 동료가 누군지 말만 들었지 얼굴은 모르는 서울을 닮아가는 것이다. 돈이 좀 있으면 손님 접대도, 가족 외식도 집에서 차리기보단 식당에 나가는 것을 선호한다. 나도 평양에 가서 옛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 오면 이런 말을 들을 확률이 크다. “어느 식당에 가서 술 한잔하자.” 여기서 또 하나 알아야 할 상식이 있다. 평양의 식당들은 어쩌면 서울보다 더 ‘레벨’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어느 식당에 가자는 말만 들어도 대충 내가 어느 정도의 접대를 받을 수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평양의 식당 중 최고나 최하위 식당은 어디며, 어느 식당에 가면 ‘중앙당 5과’에서 선발된 미인이 접대를 할까. 다음 칼럼에서 자세히 한번 다루려 한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이 5년 전 수백 억 원을 들여 꾸몄던 김정은의 평양 15호 관저를 최근 허물고 공사를 새로 벌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평양시 보통강구역에 있는 15호 관저는 김정은의 평양 공식 자택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과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도 생전에 거주한 곳이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한미연구소 커티스 멜빈 연구원은 11일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과 인터뷰를 갖고 “위성사진 판독결과 최근 15호 관저 북쪽 지붕이 철거됐고 정원 조경공사도 새로 시작됐다”고 밝혔다. 이 관저는 김정은이 후계자로 공식화된 2010년 북한이 수천 만 달러를 들여 호화롭게 재건축했으며, 인근에는 전용 철도와 도로도 깔았다. 김정은은 지난해부터 주요 공사장을 찾아다니며 건축 설계에 대해 시시콜콜 지시를 내리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최근의 관저 리모델링은 김정은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뜯어고치라고 직접 지시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번 위성 사진을 통해 평양시 룡성구역의 김 씨 일가 주택단지도 새로 지어진 것으로 드러났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세계 최대 인터넷 기업인 구글이 ‘알파벳’이란 이름의 지주회사 체계로 전격 개편한다. 래리 페이지 구글 최고경영자(CEO)는 10일 공식 블로그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기존 회사로서의 구글 주식은 모두 일대일로 알파벳의 주식으로 전환되며 구글은 알파벳 지분 100%의 자회사가 된다. 나스닥에 상장된 기존 ‘구글’ 기업명도 ‘알파벳’으로 바뀐다. 이번 조직개편의 핵심은 지주회사 설립과 지배구조 개편이다. 올 연말까지 설립될 모회사 알파벳 산하에 7개 자회사가 만들어지는 형태이다. 구글이 지금까지 추진해온 7개 사업을 각각 회사로 만드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구글도 알파벳 자회사로 편입되어 검색과 광고, 모바일 운용 체제와 같은 종전의 핵심 사업에 주력한다. 기존에 추진해온 헬스케어 관련 사업은 ‘칼리코’란 자회사가, 무인자동차 개발은 ‘구글X’가, 고속 인터넷 사업은 ‘피버’가 각각 맡게 된다. 벤처캐피털 사업을 담당하는 ‘구글 벤처스’, 장기 기술 투자를 담당하는 ‘구글 캐피털’, 스마트 홈 사업 담당인 ‘네스트’도 자회사로 생긴다. 페이지 CEO는 “‘알파벳’은 언어와 인류 최고의 혁신을 상징하고, 구글의 검색 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모회사 이름으로 정했다”고 밝혔다. 세계 최고의 검색엔진을 지향하며 1998년 설립된 구글은 그동안 무인자동차, 드론, 무선 인터넷, 우주사업, 헬스케어, 벤처 투자 등 다양한 영역으로 사업을 확대해 왔다. 일부 투자자들은 핵심 사업인 검색과 인터넷, 모바일 광고와는 거리가 먼 사업에 구글이 문어발식으로 투자하면서부터 기업 경영 내용이 불투명해졌다고 불만을 터뜨려 왔다. 알파벳이 내년 1월 첫 실적을 발표하게 되면 투자와 연구 등 사업 분야별로 자세한 실적이 공개돼 투명성이 훨씬 더 높아진다. 이를 반영하듯 페이지 CEO의 성명이 발표된 직후 구글의 주가는 7% 급등했다. 10일에는 최고 경영진 인사도 포함됐다. 알파벳 최고경영자는 페이지 CEO가 맡게 되며 세르게이 브린 구글 사장은 알파벳 사장이 된다. 에릭 슈밋 현 구글 회장은 알파벳 이사회 의장을 맡는다. 페이지 CEO의 뒤를 잇는 구글 최고경영자엔 인도인 순다르 피차이 선임 부사장(43)이 선임됐다. 인도 남동부 타밀나두에서 태어나 인도 명문대인 인도공과대(IIT)에서 공부한 그는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전기공학과 재료공학을 연구했다. 2004년 구글에 합류해 독자적인 검색 브라우저 ‘크롬’ 개발을 주도했으며 2013년까지 지메일, 안드로이드 사업 부문까지 맡았다. 미 언론은 부드러운 목소리에 조용한 성격을 지닌 그가 업계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오랜 기간 페이지 CEO의 심복이자 오른손 역할을 해왔다고 전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최근 몇 달 동안 이라크를 강타하고 있는 사상 최악의 폭염이 이라크 정부의 과감한 개혁조치를 이끌어냈다. 하이다르 압바디 이라크 총리는 9일 정부와 의회의 부패와 예산 낭비를 줄이기 위한 강도 높은 개혁조치를 발표했다. 핵심 내용은 명망 높은 학계 인사와 법관으로 구성된 부패청산위원회를 만들고 과거와 현재의 모든 부패 혐의를 조사한다는 것이다. 눈길을 끄는 점은 현재 3명씩인 부통령과 부총리직을 모두 없애고 불필요한 장관과 정부기구를 감축한다는 것. 이번 개혁이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총리를 지냈고 현재 부통령직을 수행하는 누리 알 말리키 전 총리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압바디 총리가 평소라면 정치적 운명을 걸어야 했을 승부를 과감히 건 데는 폭염으로 ‘열 받은’ 민심이 개혁을 적극 추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는 5월 말 이래 기온이 37.8도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다. ‘히트돔’이라고 불리는 거대 고기압이 이라크와 이란 중상층부 대기에 머무르며 뜨거운 공기를 지면으로 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7월 말부터 기온이 50도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정부가 하루에 몇 시간씩 제한송전을 실시하자 에어컨을 켜지 못하고 수돗물을 공급받지 못한 주민들이 전국 각 도시에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위는 삽시간에 반정부 시위로 발전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지난달 4일 동해에서 표류하다 해경에 구조된 북한 어민 5명 중 남한에 귀순한 3명의 신분이 모두 노동당원인 것으로 밝혀져 북한 주민들이 충격을 받고 있다고 자유아시아방송(RFA)이 북한 소식통을 인용해 지난달 30일 보도했다. 반면 본인의 의사에 따라 북한으로 돌아간 어민 2명은 당원이 아니었다고 방송은 덧붙였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기관 고장으로 표류하던 어선은 오징어잡이를 위해 7월 초 함경북도 청진시 신암구역 새나루 포구에서 출항했던 군부대 소속 어선이었다. 주민들은 출항한 지 이틀이 지나도록 배가 돌아오지 않자 바다에서 사고를 당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10일경 북한 당국이 어민 가족들을 평양으로 불러들이자 심상치 않은 일이 터졌음을 짐작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한국 정부는 14일 북송을 원하는 어민 2명을 판문점을 통해 돌려보냈다. 당시 북한은 귀환 일주일 전부터 어민 5명 전원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귀순 의사를 밝힌 어민 3명에 대해선 남한 당국이 강제 억류하고 있다고 억지 주장을 폈다. 북한 당국은 어민 2명이 북한 땅을 다시 밟은 14일에는 판문점에서 귀순 어민 가족들을 내세워 억류 해제를 요구하는 기자회견도 열었다. 이 때문에 이 사건은 북한 주민들이 다 아는 사건이 돼 버렸다. 하지만 막상 돌아온 어민들의 면면이 알려지자 청진 주민들은 크게 술렁거렸다고 한다. 배에 당원 3명과 비(非)당원 2명이 타고 있었는데, 당연히 돌아올 줄 알았던 당원 3명이 모두 자발적으로 남쪽에 남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선 어선 표류 중 남한에 구조되더라도 이를 문제 삼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주민들은 돌아온 비당원 어민들에 대해 “비당원이 당원들보다 당성이 더 투철하다” “남들은 목숨 걸고 찾아가는 곳에 공짜로 굴러 갔다가 돌아오는 1등 바보들이니 당원이 되지 못한 것”이라며 비웃고 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반면 귀순한 어민에 대해선 “역시 당원들은 똑똑하다”고 비아냥거리는 분위기라고 소식통은 전했다. 이 소식통은 “귀순한 3명 가족은 아직 처벌을 받지 않고 살고 있는 반면에 돌아온 어민은 어떤 칭찬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보위부의 혹독한 조사를 거쳐 일자리에 복귀했다”며 “이 때문에 주민들의 조롱이 더욱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세계 항공 사상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인 지난해 3월 말레이시아항공 여객기 실종 사건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실마리가 29일 발견됐다. 인도양 동남부 프랑스령 레위니옹 섬 해안에서 실종된 MH370편의 잔해로 보이는 부품이 수거된 것이다. MH370편은 지난해 3월 8일 승객과 승무원 239명을 태우고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을 이륙해 중국 베이징으로 가던 중 40여 분 만에 통신 두절과 함께 사라졌다. 이후 5000만 달러(약 585억 원) 이상의 비용을 투입해 수색을 벌여왔지만 일말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509일 만에 드디어 마지막 교신 지점에서 5700km 넘게 떨어진 곳에서 잔해로 유력한 부품이 발견된 것이다. 이 부품은 이날 오전 해안을 청소하던 청소부가 우연히 발견했다. 그는 길이 2m, 너비 1m 정도의 흰색 물체가 여객기 잔해인 것 같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한 목격자는 “물체가 조개껍데기로 가득 뒤덮여 있었고 물속에 오래 있었던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전 세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프랑스 항공당국은 이 부품이 MH370편의 잔해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프랑스 본토에 있는 연구소로 옮겨 정밀조사에 착수키로 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지금까지 실종 여객기 수색 작업을 계속 이어오던 말레이시아 당국도 즉각 분석기술팀을 급파했다. 정확한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며칠 더 걸릴 예정이지만 미국의 보잉사 기술자들을 비롯해 여러 전문가는 이날 “사진에 찍힌 물체가 실종된 MH370편 보잉777기 날개 뒤편의 부품인 플래퍼론과 일치한다”고 밝혔다. 바다에서 보잉777기의 부품이 나온다면 이는 MH370편의 잔해일 수밖에 없다. 1995년부터 생산이 시작된 보잉777기는 지금까지 모두 5대가 추락했다. 2013년 7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과 지난해 7월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미사일에 격추된 말레이시아항공 여객기 등 앞선 4건의 사고는 모두 육지에 떨어져 잔해가 수거됐다. 바다에 추락한 보잉777기는 MH370편이 유일하다. 이 때문에 워런 트러스 호주 부총리 겸 교통장관도 29일 “발견된 잔해가 실종 여객기의 부품이 맞는 것 같다”고 발표했다. 부품이 발견됐지만 여객기 본체까지 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레위니옹 섬은 지금까지 가장 유력한 추락 지점으로 지목돼 1년 넘게 수색이 진행돼 온 호주 남서쪽 해상에서 4800km 넘게 떨어져 있다. 수색팀은 퍼스 남서쪽 6만 km² 범위의 우선수색구역에 실종기가 있을 것으로 확신해 왔는데 훨씬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여객기 잔해 추정 물체가 나타난 것이다. 조 하틀리 호주교통안전국(ATSB) 대변인은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사고로부터) 16개월이 지났기 때문에 호주 서쪽 바다로 들어간 물체가 인도양 서부까지 떠내려간 것은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말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앞으로 광범위한 지역을 수색해야 한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여객기가 실종됐던 초기엔 26개국이 참여하는 역대 최대의 국제 공동 수색작업이 펼쳐졌지만, 1년 뒤 모두 손을 뗀 상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최룡해까지 처형될 뻔했다.” 최근 탈북한 북한 고위 인사가 김정은의 공포 통치에 대해 증언하면서 한 말이다. 사실이라면 충격적인 일이다. 최룡해는 장성택과 더불어 북한 주민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고위급 인물이다. 장이 김일성의 사위 신분이었다면 최는 김일성의 가장 가까운 혁명전우이자 북한에선 충신의 대명사로 통하는 최현의 아들이란 배경을 업고 젊어서부터 승승장구했다. 이 정도의 신분은 북한에선 김 씨 혈통 다음으로 인정받는 절대적인 위상을 갖고 있다. 장성택을 제거하고 최룡해까지 처형한다면 북한 내부에 미치는 충격은 엄청났을 것이다. 탈북 인사가 설명한 구체적 내용은 이렇다. “지난해 4월 15일 태양절을 맞아 김정은이 군인 축구경기를 관람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행사 시간이 2시인데 김정은은 5시에 나타났다. 행사에 동원된 군인들은 12시까지 경기장에 입장해 꼼짝없이 5시까지 기다렸다. 김정은은 이를 트집 잡아 크게 화를 냈다. 행사 조직을 잘못해 많은 군인이 대기하느라 큰 고생을 하게 만들었다는 이유였다. 총정치국 행사과장(대좌)이 불똥을 뒤집어쓰고 다음 날 고사기관총으로 처형됐다. 그러나 이는 사실 김정은이 군 총정치국장 최룡해를 제거하기 위해 그의 부하에게 생트집을 잡은 것이다. 행사과장이 처형된 날 비공개 군부 사상투쟁회의가 열렸다. 보위사령관이 맨 앞에 나서서 최룡해를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부하가 상관을 이처럼 성토하는 것은 이미 제거 각본이 써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날 최룡해는 울면서 자아비판을 했고, 나중에 장성택처럼 군인들에게 끌려 나갔다. 하지만 처형은 면했고, 구금돼 조사를 받은 뒤 총정치국장에서 해임되는 것으로 끝났다.” 이 증언을 검증하기 위해 지난해 4월 북한 보도를 찾아보았다. 우선 김정은의 행적을 보면 4월 6일과 7일 이틀 연속으로 군 소속 축구팀의 경기를 관람한 것이 눈에 띈다. 4월 초 김정은의 관심 주제가 축구였던 것은 분명해 보였다. 다음으로 최룡해의 행적을 보면 4월 13일 태양절 기념 군장병 예식에서 김정은에게 충성 맹세 연설을 했고, 15일 새벽엔 김정은과 함께 금수산태양궁전도 방문했다. 그러곤 갑자기 언론에서 사라져버렸다. 19일 열린 비행사대회, 21, 23일 잇따른 김정은의 군부대 시찰, 24일 개최된 인민군 창건 82주년 경축 중앙보고대회와 같이 총정치국장이 반드시 참가해야 하는 중요한 행사와 대회에 모두 빠졌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룡해는 26일 열린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이 회의에선 그를 총정치국장에서 해임시키고 황병서에게 차수 계급을 수여함과 동시에 후임으로 임명한다는 안건이 가결됐다. 황병서는 15일에 상장에서 대장으로 진급했는데, 11일 만에 다시 차수로 사상 초유의 벼락 승진을 해 총정치국장이 됐다. 이를 미루어 보면 최룡해가 4월 15일부터 26일까지 12일 동안 어떤 고초를 겪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5일까지 멀쩡히 활동하고, 해임이 발표된 뒤 5월 초부터 사복을 입고 김정은을 다시 열심히 따라다닌 것을 보면 건강상 문제는 아닌 듯하다. 아마 이 기간이 탈북 간부가 이야기한 최룡해의 위기 시점이 아닐까 싶다. 최룡해는 왜 제거 대상이 됐을까. 그 힌트를 “최룡해는 장성택과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절대로 장성택 숙청에 찬성하거나 동조할 리가 없다”고 한 탈북 인사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최와 장은 오랫동안 함께 일을 했다. 최룡해는 1986년부터 1998년까지 회원이 500만 명이나 되는 북한 최대 조직인 청년동맹의 수장을 지냈다. 청년동맹을 직접적으로 지도하는 노동당 부서가 청년사업부다. 장성택은 1980년 중반부터 1995년까지 노동당 청년사업부 수장으로 있었다. 둘은 지도기관장(장성택)과 산하기관장(최룡해)으로 10년 넘게 손발을 맞춘 것이다. 2013년 12월 장성택이 처형된 후 이듬해 4월까지 수많은 장의 측근이 처형되거나 정치적 숙청을 당했다. 장성택 못지않게 오랜 기간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최룡해가 숙청된 간부들과 친분이 없었을 리 없다. 매일같이 가까웠던 간부들이 김정은이 휘두른 숙청의 칼날에 우수수 목이 잘리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을 최룡해의 심정은 어땠을까. 반대로 김정은의 입장에선 그런 최룡해가 군부 수장이란 사실이 너무 불안했을 듯싶다. 하지만 최룡해까지 죽이기엔 떠안아야 할 부담이 너무나 크다. 또 최룡해는 상징성은 크나 장성택에 비해 김정은 권력에 미치는 실질적 위협은 작은 인물이다. 애초에 김정은은 최룡해를 죽일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냥 실권이 없는 한직으로 밀어내 견제해야겠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리고 군부는 함께 손에 피를 묻힌 황병서에게 맡기는 것이 당분간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남쪽엔 최룡해가 김정은의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김정은이 가장 경계하는 인물일지 모른다. 고사기관총으로 즉결 처형당했다는 행사과장은 최룡해를 권력의 외곽으로 밀어내기 위한 억울한 희생양이었을 것이다. 권력 유지의 도박판에 판돈으로 걸려 있는 목숨들이 가련하기 짝이 없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이 평안북도 영변 핵시설에서 핵무기용 고성능 폭발물을 조립하거나 보관하기 위한 건물을 짓고 있다고 미국의 북한전문 웹사이트 ‘38노스’가 26일 밝혔다. 이는 북한이 핵무기 소형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고성능 기폭장치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는 관측이어서 파장이 예상된다. 38노스의 윌리엄 머그퍼드 연구원은 이달 21일 촬영한 상업용 위성사진을 분석한 끝에 영변 우라늄 농축단지에 짓는 건물 중 하나에 다른 곳과는 구별되는 모양과 색의 벽들이 세워지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머그퍼드 연구원은 “(건물의 외벽을 보면) 건물 안에서 폭발이 일어났을 때 정해진 방향으로만 압력을 내보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이 건물을 핵무기 기폭에 사용되는 고성능 폭발물을 조립하거나 보관하기 위한 건물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머그퍼드 연구원은 플루토늄을 사용하는 실험용 경수로(ELWR) 주변에서 건설작업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원자로 건물 맞은편에 변전소로 보이는 시설이 건설되고 있다”며 “아직 모든 시설이 다 갖춰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완성된다면 북한은 경수로 운영을 위한 또 다른 단계를 완성하게 될 것”이라고 풀이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이 나선경제특구에 진출한 중국 기업들을 상대로 최근 일방적으로 토지 사용료를 10배나 올리고 50년이었던 토지 임대 기간도 20년으로 대폭 축소했다고 대북 소식통들이 16일 밝혔다. 이런 조치는 올 들어 중국의 적극적인 투자를 구애하던 분위기와 완전히 상반되는 것으로 향후 북-중 관계뿐만 아니라 북한의 대외 신용도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의 조치가 사실로 밝혀질 경우 나선 지역에 제2의 개성공단을 설립하려는 한국 정부의 구상 역시 재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새 법을 따르지 않으면 압류하겠다” 나선에서 무역업을 하는 중국인 소식통 A 씨에 따르면 북한 당국은 7월 들어 중국 기업들에 “기존의 계약서는 효력을 상실했으니 새로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통지했다. A 씨는 “새 계약서엔 토지 임대 기간이 기존의 50년에서 20년으로 변경돼 있었고, 평당 수십 달러 수준이던 토지 사용료도 10배나 높이 책정돼 있었다”며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라 짐을 싸는 (중국) 기업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A 씨는 또 중국 기업인들이 항의하자 북한 당국은 “우리 땅에서 우리 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공장을 압류하고 내쫓겠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소식통 B 씨도 “중국이 설비와 자재를 공급하고, 북한이 인력을 제공하는 합작기업에도 최근 북한이 인사와 직원 관리 권한을 전적으로 행사하겠다고 통지했다”고 밝혔다. 소식통들은 이번 조치가 사실상 중국 기업을 내쫓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북한 당국이 나선 이외 지역에 진출한 중국 기업들에도 같은 내용의 통보를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중국 기업에 대한 일방적인 조치와 더불어 북한 내 중국인들에 대한 압박과 처벌도 최근 대폭 강화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선에서 사업하던 중국인 사업가 C 씨는 올 초 간첩으로 몰려 북한 보위부에 수개월 동안 감금됐다. 북한 당국은 영사 접근권조차 허용하지 않고 조사했다. C 씨가 평소 앓던 당뇨와 신장병이 악화되자 북한 당국은 합의금 명목으로 수십만 위안을 받고 석방했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나선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중국인 D 씨는 지난해 말 북한 종업원이 음란물을 봤다는 이유로 보위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영업정지와 함께 벌금 폭탄을 맞았다. 큰 손해를 본 D 씨는 식당 문을 닫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이 외에도 차명 전화 사용 등을 평소 묵인해 오다 갑자기 불법이라며 체포하는가 하면 북한 당국이 발급한 ‘차량통행표’를 부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국인 관광객 차량을 압수한 사례도 있다. 북한은 체포된 중국인들에게서 숙박비와 조사 비용까지 받아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중 관계 악화에 따른 보복성 조치 나선에서 벌어지는 조치들은 올 5월 중국 조선족 기업인들을 북한으로 초청해 “북한은 안정적인 투자처”라고 선전하며 원산-금강산 국제관광지대에 적극 투자하라고 권유하던 움직임과 완전히 상반된 기류다. A 씨는 “북한이 (대표적인 친중 인사인) 장성택을 처형한 이후 북-중 관계가 악화되고, 중국이 대북 제재에 동참하는 움직임이 나타나자 김정은이 즉흥적인 보복성 조치를 내놓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이번에 중국 기업들이 큰 피해를 보고 쫓겨나면 앞으로 북한에 투자하겠다는 중국 기업인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A 씨는 “예전엔 지인에게 ‘나선이 북한에서 가장 개방된 곳이니 투자하라’고 권유하던 일부 기업인들이 요즘엔 ‘중국 기업은 완전히 봉이니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기업의 피해가 확산되면 중국 정부의 개입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북-중 관계가 악화될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의 반북 정서 역시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2012년에도 중국 시양(西洋)그룹이 2억4000만 위안(약 444억 원)을 북한 옹진광산에 투자했다가 북한의 일방적인 계약 파기로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쫓겨나자 중국 국민이 분노한 사례가 있다. 북한 최초의 경제특구인 나선엔 현재 대북 진출 중국 기업의 절반 이상이 몰려 있다. 파악된 중국 기업만 수십 개에 이른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이란 핵협상 타결에는 국제사회의 강력한 경제 및 금융 제재가 큰 압박으로 작용했다. 국가 경제가 석유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이란으로서는 석유 수출 금지가 곧 국가 경제의 붕괴를 의미한다. 똑같은 경제 제재가 북핵 협상에도 유효하게 먹힐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부정적이다. 이미 북한은 오래전부터 각종 제재를 받고 있는 상태다. 2006년 10월 북한이 첫 핵실험을 한 뒤 지금까지 유엔 안보리는 대북제재 결의안을 5차례나 내놓았고 제재 지침도 32건이나 공지했다. 하지만 이런 제재 때문에 북한이 핵을 폐기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이란과 북한은 정치 체제와 경제 상황 등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안보에 대한 불안감이 다르다. 이란은 핵무기가 없어도 국가 존립이 위태롭진 않다. 하지만 북한은 세계 최강 미군과 한국군과 직접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라 핵무기가 없다면 군사적 열세를 극복할 대안이 없다. 이란과 북한은 정권의 형태도 아주 다르다. 이란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뽑는 국가이지만 북한은 사실상 세습 종신 집권 국가이다. 대선을 치르는 이란은 민심을 매우 중시할 수밖에 없지만 북한은 공포 독재를 통해 민심을 통제할 수 있다. 대외무역에 대한 의존도도 양국은 크게 다르다. 이란은 원유 매장량 세계 4위, 천연가스 매장량 세계 2위의 자원 강국이다. 하지만 북한엔 이렇다 할 자원이 없고 수출입 규모도 크지 않다. 제재를 받아도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현재 북한은 수출의 절반가량인 15억 달러를 무연탄과 철광석을 팔아 벌고 있지만 이 정도 규모의 대외거래는 중국에만 의존해도 충분하다. 대북제재 자체의 한계도 분명하다. 미 회계감사원(GAO)이 5월 상원 외교위원회에 제출한 ‘대북제재 보고서’에 따르면 유엔 193개 회원국 중 82%에 해당하는 158개국이 제재 이행보고서를 제출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각 회원국이 대북제재 결의안을 위반 또는 무시한다 해도 처벌하거나 이행을 강제할 방법이 전무한 상태다. 그러니 북한엔 유엔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히 열려 있는 셈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엊그제 국정원은 국회 정보보고에서 김정은과 이설주가 스위스 브랜드인 모바도 시계를 차고 다니고, 영국 명품 원단인 스카발 정장을 입고 다닌다고 보고했다. 이설주가 프랑스 명품 백인 디오르 클러치를 제일 좋아하고, 100만 원대 모바도가 김정은 부부의 커플 시계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으니 새삼 정보랄 것도 없다. 아마 김정은은 남쪽엔 20일 전에 출시된 애플워치를 이미 차보고 “역시 미제가 최고야”를 외치고 난 뒤일 것 같다. 김정은은 널리 알려진 ‘애플빠’다. 애플 아이맥 컴퓨터로 업무를 보고, 최신 아이패드가 발매될 때마다 시리즈별로 꼬박꼬박 구매해 간다. 그러니 북한 외교관이 애플워치를 예약 주문해 기다리다 맨 먼저 사들여 갔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유엔에서 북한 사치품 수입 통제라는 제재를 내렸어도 김정은의 호화생활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시계나 가방은 물론 수십만 달러짜리 요트에 이르기까지 김정은이 대북 제재 때문에 갖고 싶은 것을 못 가졌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 지금도 프랑스에선 북한 무역대표부 일꾼들이 김정은이 좋아하는 ‘메종 미셸 피카르’ 의 부르고뉴 와인을 구매 흥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대북 제재가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북한 제재에 미온적이던 중국이 팔을 적극 걷어붙이면서 이곳저곳에서 북한이 괴로워하는 징후가 속속 포착되고 있다. 1일 북한이 준공식을 가진 평양 순안국제공항이 북한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11월 순안공항을 시찰한 김정은은 주체성과 민족성이 부족하다며 다시 지을 것을 지시했다. 급히 해외에서 이것저것 자재를 사와 다시 지으려 하니 외국 업체들이 선금을 먼저 보내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대북 제재로 대다수 송금망이 차단된 상황이라 돈을 결제하는 데 상당한 애로가 발생했다. 요즘 중국은 예전 같지 않다. 겨우 북한이 우회 송금루트를 뚫으면 어떻게 알고 또 찾아내 차단하고 있다. 하지만 마원춘 국방위 설계국장이 숙청되는 것을 본 북한 간부들도 필사적이었다. 북한의 모든 능력과 대외 연고가 총동원돼 겨우 기한을 맞췄다고 한다. 이런 공사가 몇 개만 더 진행됐다면 얼마나 많은 간부의 목이 날아갔을지 모르겠다. 대북 제재로 러시아 등을 통해 들여오던 전략물자의 흐름도 적잖게 끊겼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이 그만큼 늦어진다는 의미다. 외화를 적잖게 벌어다 주던 무기 밀매도 시원치 않다. 사정이 이런데도 김정은은 아래 간부들의 어려움 따윈 관심이 없다. 이것도 하라, 저것도 하라 지시를 내리고 집행이 되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숙청한다. 이러니 대외 활동에 종사하는 간부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른다. 여건은 점점 어려워지는데 처벌은 잔인해지니 견디다 못해 일부는 돈을 싸들고 한국 등으로 탈출한다. 이란 핵 협상이 타결됨에 따라 앞으로 국제사회의 관심사는 북핵 문제로 옮겨지고 제재도 강화돼 북한의 괴로움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이렇게 대북 제재로 북한이 가난해지면 김정은 체제는 위태로워질까. 충성심이 사라지고 돈맛을 안 젊은 장마당 세대가 불만 끝에 폭동이라도 일으킬까. 개인적으로 그건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본다. 원래 의도적 빈곤은 반란을 막고 장기 독재를 유지하는 독재자의 아주 유효한 수단이다. 나도 북한에서 배고픈 고생을 워낙 많이 해봐서 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내일은 뭘 먹지 하는 생각만 떠오르지, 정치니 사회문제니 하는 주제로 고민할 여유가 없다. 무기력해진 대중에게 공포까지 더해지면 반항할 생각보다는 순종할 생각을 먼저 한다. 북한이 가난해지고 피폐해지는 것이 역설적으로 김정은 독재 유지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미국이나 한국이 계속 요란스레 대북 압박을 가하면 김정은에겐 명분까지 생긴다. “북한이 가난한 것은 내가 통치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미제(美帝)와 남조선 괴뢰도당의 고립 압살책동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런 메시지를 북한 인민에게 끊임없이 주입할 수 있다. 그러면 가난해진 북한 인민은 미제를 타도하라며 분노로 부글거릴 것이다. 그 뒤에서 김정은은 미제(美製) 애플 시리즈를 탐닉하며 오래오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쯤 되면 대북 제재로 얻으려는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 재점검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제재를 통해 북한이 핵을 폐기할 수 있다고 보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나부터도 북한이 끝까지 핵을 놓지 않겠다는 진짜 속내는 어쩌면 대북 제재를 계속 받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럼에도 이란 핵 협상 타결 이후 “이제 남은 것은 북한, 압박을 강화해야”라는 기사가 쏟아진다. 김정은이라면 “그러시든지”라고 대꾸할지도 모른다. 김정은의 최대 관심사는 독재 체제 유지이지, 경제가 거덜 나고 인민이 굶어죽는 것 따위가 아니기 때문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그리스가 채권단의 가혹한 긴축안을 받아들이며 사실상 ‘백기 투항’한 것은 ‘벼랑 끝 전술’의 한계를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이탈)’도 용인할 수 있다는 독일 등 채권국의 최후통첩에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결국 손을 들었다. 이를 두고 일부 외신은 독일인들보다 그리스인들 스스로가 그렉시트를 더 우려했다(월스트리트저널)고 평가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치프라스 총리가 채권단이 제시한 구제금융 긴축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전격 발표했을 때만 해도 협상의 기선을 잡는 모양새였다. 급기야 5일 국민투표에서 그리스 국민의 61.3%가 채권단의 긴축안을 거부하자 국제사회는 그렉시트 현실화 가능성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치프라스 총리의 초강수는 더이상 먹혀들지 않았다. 채권단은 12일까지 만족할 만한 개혁안을 내지 않으면 그렉시트를 피할 수 없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특히 최대 채권국인 독일은 5년간의 ‘한시적 그렉시트’까지 거론하며 그리스를 강하게 압박했다. 그리스를 무릎 꿇린 결정적 이유는 급박한 경제 사정 때문이었다. 지난달 30일 기술적 디폴트(채무불이행) 사태를 맞은 그리스는 만약 이번 협상마저 결렬된다면 은행들이 줄줄이 파산하는 등 최악의 사태를 맞을 뻔했다. 그리스가 처한 현실에 눈을 뜬 치프라스 총리는 채권단의 긴축안보다 강도가 센 개혁안을 스스로 마련해 협상 테이블에 앉았고 결국 긴축 요구를 거의 대부분 받아들였다. 보름간의 벼랑 끝 전술로 치프라스 총리가 얻은 것이 전혀 없지는 않다. 유럽재정안정화기구(ESM)를 통해 3년간 최대 860억 유로(약 108조 원) 규모의 어마어마한 돈을 지원받게 됐다. 이는 그리스 정부가 애초에 요구한 535억 유로보다 325억 유로가 늘어난 액수다. 또 채무 원금 탕감 요구는 관철하지 못했지만 대출금리 인하, 채무이자 상환 기간 유예와 만기 연장 등 채무 경감을 받아냈다. 일단은 파국을 피할 수 있는 ‘생명 연장의 시간’을 얻어낸 것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미래의 전쟁 양상이 서서히 바뀌고 있다. 레이저무기 시대로 바뀌는 것이다. 가장 앞서 나가는 나라는 역시 세계 최강 대국 미국이다. 미국은 ‘꿈의 신무기’로 불리는 레이저포를 세계 최초로 실전 배치했다. 지난해 말 미 해군 수륙양용수송함 ‘폰스’에 3개월의 시험 운용을 거쳐 설치된 30kW급 레이저포는 날아오는 드론을 격추시킬 수 있는 위력을 갖고 있다. 지금 단계에선 사거리가 1.6㎞에 그치고 고성능 폭탄보다 파괴력이 떨어지지만 앞으로는 출력을 150kW까지 높일 계획이다. 이럴 경우 사거리와 파괴력은 훨씬 커진다. 최근 미국 항공기 제작사인 보잉은 원거리 목표물을 격파할 수 있는 휴대용 레이저포를 개발하고 있다. 이 레이저포는 35㎞ 이상 거리의 표적을 포착, 식별해 격파할 수 있다. 레이저포의 무게는 295㎏으로 8~12명 규모인 해병대 보병 분대 병력이 쉽게 운반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또 15분 만에 이를 조립해 조작할 수 있다고 보잉 측은 설명했다. 레이저 무기는 발사 비용이 저렴하고 동력이 있으면 무한정 발사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또 레이저의 속도는 포탄보다 빨라 움직이는 포탄도 쏘아 맞출 수 있다. 실제로 올 초 미군은 뉴멕시코 주의 화이트샌드 미사일 실험장에서 날아오는 포탄을 고출력 레이저로 격추하는데 성공했다. 10kW의 레이저를 발사해 날아오는 90발의 포탄을 요격했고, 드론도 여러 대 격추시켰다. 레이저포의 출력을 100kW로 높이는 경우 조준한 순간 타격 목표가 파괴되는 시대가 올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레이저포는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고, 멀리 날아갈 경우 빛이 분산돼 위력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어 현재 연구는 이를 극복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2013년 레이저포 시장은 연구개발비까지 포함해 31억 달러(3조 5000억 원) 규모였으나 2018년에는 81억 달러(9조1570억 원)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된다. 특히 미국에선 그동안 항공 분야에서 저조한 실적을 거두어온 보잉이 레이저포 개발에 적극 뛰어들어 관련 연구를 선도하고 있다. 독일 MBDA사 역시 최근 유럽국방원 및 독일연방기술도입국과 공동으로 미사일, 박격포, 급조폭발물, 초소형 무인기를 레이저로 저격하는 첨단 레이저무기를 개발했다. 이 무기는 10kW 레이저 4대를 결합해 총 40kW의 출력으로 3㎞ 이내 비행물체를 몇 초 만에 격추시킬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군의 오버예덴베르크와 슈로벤하우스 시험장에서 진행된 성능실험에서 이 레이저는 3㎞ 떨어진 소형 무인기를 3.39초 안에 격추시켰다. MBDA사 관계자는 “5년 안에 레이저의 출력과 사거리를 각각 100kW, 5㎞로 늘려 차세대 방공체계를 독일군에 공급할 것”이라고 전했다. 중국도 국방 연구진이 레이저포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중국의 개발 정보는 거의 공개되지 않았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정은의 처형 정치에 북한 민심이 등을 돌리고 있다. 노동당 핵심 부서인 조직지도부 간부들조차 김정은의 통치 방식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 현재 북한 지도부가 느끼는 공포심은 바깥에서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이런 상태에서 외부 충격이 있을 경우 김정은 체제는 3년 이상 버티기 힘들 것이다.” 북한 김정은의 공포정치가 점점 심해지는 가운데 최근 제3국을 거쳐 탈북한 북한 노동당 고위급 인사 A 씨가 전한 김정은 체제 이후 북한 지도부의 분위기이다. A 씨는 채널A가 단독 보도(본보 4일자 A1면)한 망명설의 주인공 박승원 상장보다 북한 권력 내부 사정을 더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의 요구에 따라 인적사항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기자는 그를 만나 최근 북한 간부들의 움직임을 들을 수 있었다. 정황 자체가 매우 구체적이어서 새겨들을 대목이 많았다. 다음은 그가 전해준 최근의 북한 내부 사정을 일문일답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북한 간부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는가. “재작년 12월 장성택 처형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 남쪽에선 노동당 조직지도부가 처형을 주도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조직지도부조차 처형을 반대했다. 고모 김경희도 조연준 조직지도부 1부부장에게 조카(김정은)를 좀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을 정도였다. 조연준은 김정은을 독대해 김경희의 뜻을 전했지만 처형을 막지 못했다. 북한에서 장성택 처형을 찬성한 간부는 없었다. 장성택은 북한에서 가장 간부들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장성택은 김일성의 핏줄이 아니기 때문에, 이른바 백두혈통이 아니라 처형된 것 아닌가. “모르는 소리다. 김일성의 사위로 40년 넘게 살았는데 어떻게 김일성 가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쩌면 그는 북한 주민들에겐 김정은보다 더 확실하게 각인된 백두혈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또 40년 넘게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북한 고위 간부들 중에 장성택과 연고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金, 바늘 소리도 보고하라고 지시” ▼―그런 사람이 왜 처형됐나. “김정은이 자기보다 더 신망을 받는 실세를 옆에 두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 사망으로 권력을 잡기 전 북한군 총정치국에 1년 정도 있었던 것이 경력의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당과 내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조차 잘 알지 못했고, 정치 경제 외교 등에도 무지했다. 집권 첫 1년 반 동안엔 장성택이 먼저 서명을 한 서류만 승인하며 수렴청정에 의존했다. 하지만 점점 사람들이 자신에게 환호하는 모습을 자주 보면서 ‘장성택 없이도 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가진 것 같다. 보다 직접적인 이유로는 처형 직전 경제발전 노선을 두고 알력이 심했다.” ―그게 무엇인가. “내세울 경력이 없는 김정은으로서는 집권 이후 자기 치적이라 선전할 것들이 중요하다. 그래서 평양 창전거리, 문수 물놀이장, 마식령 스키장 건설에 열심이었다. 처음엔 장성택도 김정은이 하자는 대로 돈을 투자해 주었다. 그러다가 너무 지나치다고 판단했는지 이제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 투자를 해야 할 때라고 주장한 것이다. 아파트나 놀이장 같은 비생산적인 곳에 투자하지 말고 경제특구 같은 데 집중해 확대재생산이 가능한 투자를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김정은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다.” ―장성택은 미래에 대해 어떤 구상이 있었나. “그는 북한이 갑자기 개혁개방을 하면 흔들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경을 중심으로 경제특구를 많이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중국과도 많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런데 김정은이 스키장이니 물놀이장이니 하는 곳에 자꾸 돈을 쓰니 이건 아니다 생각했을 것이다. 장성택 처형 이후 중국 지도부는 김정은에게 개혁개방의 의지가 없다고 판단해 격앙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장성택 처형 이후 잇따라 많은 사람들이 처형된 것 같다. “심지어 최룡해도 처형될 뻔했다가 살아났다. 지난해 4월 말 당시 북한군 총정치국장이던 최룡해가 체포돼 한 달 넘게 감금돼 있었던 적이 있다. 한국에선 최룡해가 장성택 처형에 가담했다고 알려졌지만 두 사람은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김정은은 최룡해 숙청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 대좌(대령)인 총정치국 소속 행사과장을 사소한 트집을 잡아 체포하고 바로 다음 날 숱한 사람들을 참관시켜 고사기관총으로 처형했다. 그리고 바로 최룡해를 숙청하려 했는데,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살려두고 대신 총정치국장 직위에서만 해임시키고 근로단체비서로 강등시켰다.” ―장성택 숙청이 북한 체제에 미친 영향은 어떤 것인가. “장성택이 국가 장기 발전 계획을 구상하고 우수한 인재들을 자기 주변에 모았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다 숙청됐다. 지금 북한 지도부에는 인재가 없다. 숙청 이후 분위기가 경직돼 누구도 책임질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창의적 계획을 내놓았다가 김정은의 눈 밖에 나면 처형될지 모르기 때문에 몸을 사린다. 아마 논란의 여지가 있는 계획은 위에 올라가지 못할 것이다. 박봉주 총리도 책임이 두려워 아래에서 올라오는 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니 김정은에게 직언을 할 사람은 북에 아무도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북한이 어디로 갈지 뻔하지 않겠는가.” 그는 “지금 북한 간부들은 하루하루 숨쉬기조차 조심스러워한다. 눈 밖에 나면 바로 처형되기 때문”이라며 내부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처형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장성택 숙청 직후 김정은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보고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이후 사람들에 대한 감시가 정말 엄격해졌다. 지방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평양에선 작년 초부터 유치원 아이들에게까지 매일 집에서 보고 들은 어른들의 동태를 적어내게 한다. 집에서 부모가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 어떤 영화를 보았는지, 뭘 보았는지 시시콜콜한 사항들을 모두 적어내야 한다. 아이들에게 이럴 정도인데 어른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지금 보위부(비밀경찰)에도 지원자들이 없다. 지방 같은 경우 정원의 절반이 빈 곳이 많다. 사람 죽이는 일에 편승하다가 김정은 체제가 붕괴되면 어떤 처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걱정 때문에 과거 선망받던 권력기관인 보위부에도 지원자가 없는 것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663년 백강전투에서 치명적 피해를 입은 왜(倭)는 이후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한 전국적인 방어망을 구축한다. 여기에는 왜로 대거 건너온 백제의 귀족과 백성들도 동참한다. 사실 천신만고 끝에 바다를 건너온 백제 유민들에겐 또다시 건너갈 바다가 없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방어 준비를 한다. 첫 번째 방어가 바로 ‘수성(水城·미즈키)’ 건설이었다. 수성은 규슈 후쿠오카(福岡)에서 내륙으로 15km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 다자이후(大宰府)시에 있었다. 시내로 들어서 덴만구(天滿宮)에서 후쿠오카 쪽으로 가다 보면 상록수와 대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진 높은 흙 제방 사이로 도로가 지나가는데 모르는 사람은 그냥 무심코 지나치기 십상이다. 조금 관심을 갖는다 하더라도 “허허벌판에 왜 이런 제방을 쌓았지” 하며 머리를 한번 갸웃하고 지나갈 따름으로 보인다. 길가에 ‘역사유적 수성’이라는 표지판이 없다면 말이다. 표지판 옆으로는 주차장이 있는데 길 건너편으로 잘려 나간 수성 한쪽 자락 위까지 올라가면 반대편에 있는 수성의 자취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수성은 백강 전투에서 대패하고 왜로 대거 건너온 백제 유민들이 눈물을 삼키며 왜인들과 함께 쌓은 성이란 점에서 백제인들의 한이 서린 흔적이라 할 수 있다. ○ 물로 방어한다는 의미의 수성 수성이 있는 다자이후는 바다로 향하는 서쪽만 벌판으로 열려 있고 동남북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수성은 이 서쪽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다. 길이 1.2km, 높이 10m, 하단 폭 77m에 이르는 이 거대한 성을 불과 1년 만에 쌓았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나당연합군의 추격에 공포를 느꼈을지 짐작이 간다. 이런 역사를 알고 보면 바람에 설레는 대나무 숲 사이에서 “적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빨리 성을 쌓으라”고 독려하는 백제 장수의 목 쉰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수성 아래 누런 황토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밤낮으로 흙을 메고 날랐을 백제 유민들의 땀방울이 배어 있으리라. 수성은 얼핏 3∼4세기 건설된 서울의 몽촌토성과 흡사하다는 평을 듣는다. 하지만 몽촌토성보다 진일보한 기술이 숨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수성의 특이점은 바로 성벽을 꿰뚫고 있는 목통(木桶)이다. 이 목통은 세 군데에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평소에 안쪽 해자에 물을 채워두고 바깥 해자는 비워 두고 있다가 외부의 침공이 있을 때 목통을 통해 바깥쪽 해자로 물을 내보내 침공을 막도록 설계된 것이다. 백제 유민들과 왜인들은 숨 가쁘게 성을 쌓았지만, 다행히 나당연합군은 공격의 칼끝을 고구려로 돌렸고 일본으로 건너오진 않았다. 성은 점차 허물어지고, 숲 속에 묻혔다. 수성 외에도 다자이후엔 백제 유민들이 만든 백제식 산성 흔적이 많다. 다자이후 뒷산이기도 한 해발 410m의 대야(大野·오노) 산에 665년 산허리를 따라 8km 정도 성벽이 축성됐다. 같은 시기에 다자이후 남쪽에도 기이성(基肄城)이 만들어졌다. 수성이 무너질 경우에 대비한 2차 방어선인 셈이다. 일본서기는 이 성들이 망명한 백제 귀족 출신인 달솔 억례복유(億禮福留)와 달솔 사비복부(四比福夫)의 지휘하에 건설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달솔은 백제의 16관등 중 2품에 해당하는 고위직이다. 수성 역시 이들의 지휘로 건설됐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왜는 피란 온 백제 고위직 70여 명에게 관직을 주었다고 한다. 백제 유민을 피란민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시 자리가 많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70여 명이란 수는 상당한 비중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백제의 멸망과 함께 많은 유민들이 왔다는 것, 양국 언어가 소통에 큰 불편함이 없었다는 것 등을 유추할 수 있다. 오늘날 대야성은 불과 수백 m 구간만 보존돼 있다. 이 수백 m의 성벽이 백제에는 마지막 성이요, 일본엔 최초의 성이기도 하다. 그때까지 일본은 방어를 위해 해자를 파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대야성 축성 이후 일본 성 건축 기술은 비약적으로 늘어 훗날 성벽과 해자가 결합돼 방어력이 뛰어난 일본 성으로 발전했다. 대야성이 있는 오노 산에 오르면 무연한 벌판 너머 멀리 후쿠오카 시내와 바다가 바라보인다. 1500년 전 고향 땅을 떠난 백제의 어느 병사가 눈을 비비며 매일 바라봤을 그 바다다. 뒤로 돌아서면 905년에 건립된 유명 사찰 ‘덴만구’가 발밑에 보인다. ‘학문의 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모시는 덴만구는 매년 약 600만 명이 찾아오는 유명 관광지인데, 특히 소원을 빌면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간다는 설이 전해져 내려와 입시철이면 일본 학부모나 학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 최대 관청이 있던 다자이후 지금의 다자이후 시는 규슈에서 가장 큰 도시인 후쿠오카 그늘에 가려진 인구 6만 명 정도의 작은 변두리 도시이지만 율령제하 나라와 헤이안 시대(710∼1185) 내내 일본 서부의 군사 행정 외교 무역 등을 관할하는 특수지방관청이 있었던 중심도시였다. 일본 서부의 9국 3도, 즉 규슈에 있던 9개의 소국(오늘날의 9주)과 쓰시마 이키노시마 다네가시마 등 3도를 다스리는 총독부로서 당시 일본에서 헤이안(교토의 옛날 이름) 다음으로 중요한 행정기관이었다. 현재 시 이름도 그대로 옛날 관청 이름을 따 붙인 것이다. 사실 수성 대야성도 백강전투 이후 다자이후를 앞뒤에서 지키는 방위시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자이후는 또 당나라 신라 등 외교 사절을 맞을 때 의전을 베푸는 곳이기도 했다. 8세기에 들어서 청사 앞에 광장이 만들어졌고 주변에 20여 개 관아가 배치되었으며 학교지구도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고 한다. 7세기 말경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다자이후 청사의 위상과 권위는 시대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 번영기에는 관청 부지만 25만4000m²에 달했다고 하니 현재 한국 여의도 국회의 총부지 면적(33만579m²)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다. 941년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의 해적 반란 때에는 불에 타고 약탈당해 제 모습을 잃었다가 1019년 여진족이 규슈에 쳐들어온 것을 계기로 다시 방어 거점으로 부상했다. 그러다 1192년 일본에 막부 정권 시대가 시작되면서 점차 쇠락해 아예 관청이 헐리고 터는 논밭으로 변했다. 일본 정부는 1968년부터 이곳에서 발굴조사를 시작했고, 이후 유적공원으로 지정했다. 기자가 다자이후 관청 터를 방문했던 올해 5월에 넓은 풀밭에서는 종이비행기 동호회 회원들로 보이는 노인 몇 명이 열심히 하늘에 비행기를 날리고 있었다. 풀밭 가운데 과거 관청 건물 주춧돌들만 드문드문 보였다. 눈길을 끄는 점은 주춧돌들에 바람개비 형상을 한 파형동기(巴形銅器)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파형동기 문양은 천황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욱일승천기가 이 문양을 본떠 만들어졌다. 그러나 1990년 한국 김해시 대성동의 고분에서 일본보다 150년이 앞선 파형동기 9개가 발굴됐다. 천황의 상징 역시 한반도에서 건너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청 터 옆에 있는 박물관에는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이곳에서 나온 기와 막새와 도깨비 문양 기와는 한반도 백제 유적에서 출토된 기와와 모양이 똑같았다. 다자이후 관청 역시 백제 유민들이 건설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귀신을 쫓고 화재를 막기 위해 붙이는 귀와(鬼瓦)엔 “디자인은 신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 율령국가 ::율령(律令)을 기본으로 통치한 국가. 율은 형법(刑法)이며 영(令)은 행정조직과 백성의 조세, 노역, 관리의 복무를 규정한 것. 모든 토지가 국가 소유였다는 점에서 토지의 사적소유가 허용된 봉건국가와 구별된다. 다자이후=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13회 ‘백제 신도시’로 이어집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나치 치하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유대인 어린이 669명을 구한 ‘영국의 쉰들러’ 니컬러스 윈턴 경(사진)이 1일 별세했다. 향년 106세. 가족 측은 윈턴 경이 딸 바버라와 손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고 밝혔다. 영국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윈턴 경은 런던에서 주식중개인으로 일하던 1938년 말 친구의 도움 요청을 받고 체코의 유대인 난민 수용소를 방문한다. 이곳에서 그는 전쟁 위기를 직감하고 나치의 눈을 피해 몰래 기차로 유대인 어린이들을 먼저 네덜란드로 보냈고 그곳에서 배 편으로 다시 영국으로 보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영국 신문에 광고를 내서 아이들을 돌봐줄 영국 위탁 가정을 찾았다. 필요한 서류가 충분치 못한 아이들을 보내기 위해 영국 세관당국도 설득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가 1939년 3월부터 8월까지 8차례 열차 편으로 영국으로 빼돌린 아이는 모두 669명. 그해 9월 1일 250명의 아이를 태운 9번째 열차는 프라하를 떠나지 못했다. 2차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그 열차에 탔던 아이들의 생사는 더이상 확인되지 않았다. 유대인 수용소에 끌려가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윈턴 경은 영국 공군에서 복무했다. 아이들을 죽게 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윈턴 경은 전쟁이 끝난 뒤 자신의 선행을 어디에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8년 아내 그레타가 다락방의 낡은 서류가방에서 윈턴의 일기, 아이들의 이름을 적은 명부, 아이들의 편지 등을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때까지 그는 아내에게도 과거를 털어놓지 않았다. 윈턴 경은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적절할 때 적절한 장소에 있었을 뿐”이라며 1100명의 유대인을 수용소에서 구출한 독일인 오스카어 쉰들러와 자신을 비교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쉰들러처럼 목숨까지 걸고 모험을 한 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영국 BBC는 “윈턴 경이 숨을 거둔 7월 1일은 그가 가장 많은 241명의 아이를 런던으로 구출한 날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트위터에 “수많은 아이를 홀로코스트(나치 대학살)에서 구한 윈턴 경의 인도주의를 잊어선 안 된다”며 조의를 표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 때 나는 북한 인민이었다. 전투가 끝난 뒤 북한 사회를 사로잡았던 복수의 정서를 직접 경험했다. 뒤늦은 이야기지만 “남쪽 애들에게 당한 것을 무조건 되갚아줘야 한다”는 당시 북한의 격앙된 분위기를 한국 군부가 알았다면 미리 교전수칙을 바꾸어 이후 희생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도 있다.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이 일어났을 땐 나는 한국 국민이 돼 있었다. 이번엔 남쪽의 분노를 목격했다. 남과 북은 서로가 아프게 당한 상처만 뼈에 새기고 있었다. 1해전은 알려진 대로 북한의 일방적인 패배였다. 북한은 37t급 어뢰정 1척이 침몰했고 80t급 경비정과 420t급 경비함을 포함해 5척 이상이 크게 파괴됐다. 한국 해군은 7명이 부상한 데 비해 북한은 수십 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최대 13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관측도 있다. 남쪽은 2해전이 북한의 선제 포격으로 시작됐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1해전에서 교전이 시작된 상황에 대해서는 엇갈린 주장들이 있다. 국방부는 북한 중형 경비정이 먼저 기관포를 쏘았다고 발표했지만 북한군이 수류탄을 던져 교전이 시작됐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숫자상 열세인 북한 함정들이 무모한 공격을 시작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북한 함정들의 배수량을 합쳐도 현장에 출동한 한국 초계함 한 척의 배수량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충돌 과정에 힘에서 밀려 화가 난 북한 병사들이 흩어진 반찬용 염장 무를 닥치는 대로 집어 한국 함정에 던졌는데 이를 수류탄으로 오인한 한국군이 사격하면서 교전이 시작됐다”고 한 황해남도 간부의 증언(자유아시아방송 2013년 9월 5일자 보도)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1해전의 가장 큰 책임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온 북한에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누가 먼저 쐈는지도 명확해야 한다. 만약 북한이 자기들이 먼저 맞았다고 인식했다면 우리는 보복 공격을 대비해야 했다. 전투복 차림이 아닌 러닝셔츠를 입고 충돌에 열중하다가 예상치 못한 교전으로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수많은 동료를 잃은 북한 해군의 복수심은 2해전으로 이어졌다. 1해전 때 북한 주민들은 어땠을까. 북한 해군 기지로 원호물자를 갖고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당시는 군인들의 도둑질이 기승을 부려 부모들이 아이에게 “군대만 나타나면 무조건 문을 잠그라”고 주문하던 때였다. 그렇게 북한군을 ‘공산비적’ ‘토벌대’라고 멀리하던 주민들이 정작 전투가 벌어지자 “배부르게 먹고 꼭 이기라”고 달려가 응원한 것이다. 황해남도 옹진에서 분위기를 목격했던 한 지인은 “앞바다에서 전투가 벌어지니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지더라”며 “아무리 군을 욕해도 전쟁이 나면 똘똘 뭉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북 간 교전이 벌어지면 사이좋게 어울려 지내던 개성공단의 북한 근로자들도 군을 찾아가 한국에 본때를 보여주라고 응원할 것이라 생각한다. 24일 2해전을 소재로 한 영화 ‘연평해전’이 개봉됐다. 생명을 바치면서도 자기 위치를 지킨 병사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영웅들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연평해전 전사자들을 ‘공무상 순직자’로 처리했다니 할 말을 잃는다. 영웅에 대한 태도는 남과 북이 많이 다른 것 같다. 북한은 주요 훈장은 누구나 알아보고 영웅에겐 본인과 가족에게까지 배려와 존경을 표한다. 하지만 나는 남쪽에서 13년째 살면서도 훈장 종류와 등급을 잘 모른다. 훈장 달기 쑥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무공훈장을 알아볼 사람은 얼마나 될까. 전투가 벌어져도, 단순 사고가 나도 천편일률적으로 보상금 액수부터 세는 사회가 나는 안타깝다.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희생에 우리가 맨 먼저 바쳐야 할 것은 돈이 아니라 잊지 않는 존경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나는 이 땅에 전투 영웅이 늘어나는 걸 원치 않는다. 남북엔 명령에 따라 목숨 바칠 각오를 가진 청년들이 살고 있다. 남쪽엔 2해전에서 숨이 멎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타기를 틀어쥔 한상국 중사가 있다. 북한은 1해전 때 물에 잠겨 죽을 때까지 기관총 방아쇠를 당겼다는 병사를 영웅으로 내세운다. 이런 희생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서로 적개심과 복수심을 불태우며 이기고 지고를 거듭할 때마다 누군가의 귀한 자식과 남편, 형제가 가슴 허비는 아픔을 남기고 죽어간다. 언제면 한반도는 동족상잔의 이 지긋지긋한 증오와 복수의 악순환을 벗어버릴 수 있을까. ‘연평해전’을 보고 나오며 든 먹먹한 생각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수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김용운 전 한양대 교수는 최근 펴낸 ‘풍수화(風水火)-원형사관(原型史觀)으로 본 한중일 갈등의 돌파구’라는 책에서 663년 백강(白江·지금의 금강 하구)에서 신라-당(唐) 연합군과 백제-왜(倭) 연합군이 맞붙은 ‘백강 전투’가 오늘날 한중일 관계의 틀을 만든 핵심적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소한 데다 우리 역사교과서에서조차 거의 언급되지 않는 전투를 그는 왜 이렇게까지 주목한 것일까. 여기에는 그럴 만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전투에 참여한 백제군(5000명) 왜군(4만2000명) 신라군(5만 명) 당군(13만 명)의 수만 해도 총 22만7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였다. 김현구 선생은 ‘백강 전투는 당시 가장 많은 국가와 군사가 참전해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동북아 최초의 대전이었다’고 평한다. 백제는 이 전투를 계기로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신라는 당과 더욱 가까워지고 왜와는 멀어진다. 한반도와 왜는 각자 통일국가를 형성하면서 독자적인 정치체제와 문화를 갖게 된다. 중국은 백강구(白江口), 일본은 백촌강(白村江) 전투로 기록하고 있는 백강 전투가 일어났던 1300여 년 전 한반도로 가 보자.○ 백제의 항전(抗戰) 우리는 흔히 의자왕 하면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삼천궁녀에 둘러싸여 나라를 망친 망국의 대표 인물로 생각한다. 하지만 백제는 멸망 직전까지 융성했고 막강한 국력도 갖췄었다. 의자왕은 즉위 이듬해인 642년부터 659년까지 총 8차례 신라를 공격했고 대부분 승리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는 “백제를 치자”고 건의하는 김유신에게 진덕여왕이 “큰 나라를 침범했다가 위험하게 되면 어찌 하려는가”라고 말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만 해도 백제가 큰 나라, 신라는 작은 나라였던 것이다. 655년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하자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신라 북부를 침공해 30여 개 성(城)을 무너뜨린다. 659년 4월 백제가 다시 신라를 침입해 2개 성을 함락하자 신라는 당에 구원을 요청한다. 당 소정방은 이듬해인 660년 6월 13만 대군을 이끌고 내려온다. 당군(唐軍)은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병사 5만 명과 함께 백제 도성인 사비성을 공격한다. 계백 장군이 5000여 병사와 황산벌에서 결사항전했지만 결국 사비성은 함락된다. 의자왕은 왕자와 장군 88명, 백성 1만2807명과 함께 당의 수도 장안으로 끌려간다. 이 사비성의 함락 시점을 백제의 멸망 연도로 보지만 사실 백제의 저항은 이후 3년이나 이어질 정도로 끈질겼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 ‘백제부흥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백제 유민들은 사비성 함락 4개월 만인 660년 10월 주류성(周留城·용어 설명)을 임시 왕성으로 삼는 한편 왜에 긴급지원군을 요청한다. 20년 넘게 왜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왕자 풍(豊)을 급거 귀국시켜 달라는 청도 함께였다. 이후 왜가 보여준 대응은 마치 혈육을 대하는 듯 헌신적인 것이었다. 당시 왜왕은 사이메이 여왕(齊明天皇·재위 655∼661년)이었는데 여왕은 백제와 가까운 후쿠오카로 직접 가서 구원군을 준비시키고 오사카로 가서는 무기를 준비시킨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 동분서주하니 몸에 무리가 올 수밖에 없었다. 여왕은 661년 1월 6일 오사카 항을 출발해 여러 곳을 돌며 군사를 모으다 7월 24일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 혈맹이었던 백제와 왜 출병은 아들 덴지 왕 대(代)에서 이뤄진다. 덴지(天智) 왕은 어머니의 시신을 당시의 수도였던 아스카로 옮긴 다음 11월에 상을 치르자마자 출병 준비를 한다. 그리고 2년 뒤인 663년 총 4만2000명이나 되는 왜군을 주류성으로 파견한다. 육로는 신라군이 지키고 있어 부득이 바다로 갈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 수군은 663년 8월 27일 주류성과 가까운 금강 하구(백강)에서 백제와 왜군 연합군을 맞닥뜨린다. 일본서기는 당시 왜군의 전투 과정을 이렇게 전한다. “당나라 장군이 전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백강)에 진을 쳤다. 일본의 수군 중 먼저 온 군사들과 당 수군이 대전했다. 일본이 패해 물러났다. 당은 진을 굳게 해 지켰다.…다시 일본이 대오가 난잡한 병졸을 이끌고 진을 굳건히 한 당의 군사를 나아가 쳤다. 당은 좌우에서 군사를 내어 협격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관군(왜군)이 적에게 패했다. 물에 떨어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 없었다.”(김용운 책에서 재인용) 당시 동원된 왜 수군의 배는 무려 1000여 척에 이르렀다고 한다. 중국의 ‘구당서(舊唐書·당나라 왕조의 정사를 기록한 책)’는 ‘왜국 수군의 배 400척을 불태웠는데 그 연기가 하늘을 덮었고 바닷물이 왜군의 시체들로 핏빛이었다’고 적고 있다. 막대한 희생을 치른 덴지 왕은 정권 자체가 흔들린다. 그가 죽자 아들 고분(弘文) 왕이 이어받지만 곧 작은아버지 덴무(天武)에게 살해당한다. 덴무는 백강 전투를 치른 지 9년 만인 672년 왕위에 올랐다.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한국판 세조가 된 것이다. 일본 역사학계는 이를 ‘진신(壬申)의 난’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인들의 집단 이주 나라를 잃은 백제인들은 너도 나도 배를 타고 일본 열도로 건너간다. 3년 전 사비성이 함락되었을 때에도 왜로 건너간 백제인이 많았지만 대거 집단 이주가 시작된 것은 백강 전투가 결정적 계기였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주장이다. 일본 고고학회 회장을 지낸 니시타니 다다시(西谷正) 규슈대 명예교수는 “백제 멸망과 유민의 대규모 이주는 일본 역사를 새롭게 쓰는 계기가 됐다”며 “백강 전투를 치른 7년 뒤인 670년에 왜는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바꾸고 새롭게 태어난다”고 전했다. 김용운 선생도 왜로 망명한 백제인 중에는 왕족은 물론이고 귀족들과 지식인이 많았는데 이들의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왜가 통일국가 수립에 박차를 가한다고 전한다. 그는 앞서 언급한 책에서 “전투 이후 한반도(통일신라)와 일본 열도가 각각 통일정권을 이룬 것까지는 공통적이었지만 신라는 당 눈치를 살피느라 군사력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은 개척과 확대의 노선을 택하게 돼 한일 민족 간의 원형은 크게 갈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반도와 열도라는 지형적 차이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국과 일본은 백강 전투 후 각각 율령제와 봉건제, 문(文)과 무(武), 중국으로의 질서 편입과 이탈이라는 정반대의 국가 체제로 갈라진다는 것이다. 다시 그의 말이다. “백강 전투 후 한국인들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을 거의 잊었으나 일본인들의 집단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멸망한 백제에 대한 한과 복수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663년 일본서기는 ‘오늘로서 백제의 이름은 끝났다. 고향땅 곰나루(웅진)에 있는 조상의 묘를 언제 다시 찾을까’라는 비통한 글로 ‘백제의 한’을 기록하고 그 좌절감을 일본신국론으로 조작해 억지스러운 우월의식으로 전환한다. 이는 조선과 중국(신라와 당) 땅을 뺏어야 한다는 정한론으로 이어진다.” 백강은 오늘날 금강이 서해와 만나는 군산 앞바다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 주변은 가을이 되면 은빛 갈대밭이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국과 일본 고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던 주변에 표지판이라도 하나 세워 한일 관계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는 장소로 만든다면 이것이야말로 미래의 신(新)한일관계를 만드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주류성 ::백제의 마지막 거점. 위치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지금의 충남 서천군 한산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지만 충남 청양군 정산이라는 주장, 전북 부안군 위금산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허문명 angelhuh@donga.com / 다자이후=주성하 기자※12회 ‘수성과 다자이후’로 이어집니다.}

경제위기로 대혼란에 빠진 그리스에서 국민투표 용지가 논란의 대상으로 새롭게 떠올랐다. 그리스 정부가 5일 실시할 국민투표의 투표용지를 6월 29일 공개했는데 찬성과 반대를 찍는 칸이 상식과는 반대로 배열돼 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이 요구한 추가긴축안에 대한 의견을 묻는 투표용지에는 ‘오히(OXI·아니다의 그리스어)’를 선택하는 칸이 위에 있고 ‘네(NAI·그렇다)’는 아래쪽에 있다. 양식으로만 보면 ‘찬반’ 투표가 아닌 ‘반찬’ 투표인 셈이다. 그리스에선 정부가 EU의 추가긴축안에 대한 유권자의 반대를 유도하기 위해 투표용지를 조작했다는 논란이 커지고 있다. 투표용지에 인쇄된 문구도 난해하다. 용지에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이 2015년 6월 25일 (추가긴축) 협상안을 제안했으며, 이 제안은 두 개 부분으로 구성돼 있고, 첫 번째 문서는 ‘현재 프로그램과 그 이후의 완결을 위한 개혁’이며 두 번째 문서는 ‘예비부채지속성 분석’인데, 이를 받아들여야 할까”라고 나와 있다. BBC방송은 “일반인들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차라리 ‘유로존에 남을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이번 사태의 본질을 더 잘 나타낸다”고 밝혔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