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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러더퍼드(1871∼1937)가 금박에 쏜 알파입자가 튕겨 나오는 걸 관찰해 원자핵을 발견하고 31년이 지난 1942년 12월, 미국 시카고대의 스쿼시 코트에서 세계 최초의 원자로가 가동된다. 실험의 주역은 ‘페르미 연구소’, ‘페르미 역설’, ‘페르미 우주망원경’ 등 과학사 곳곳에 이름을 남긴 이탈리아 출신의 과학자 엔리코 페르미(1901∼1954)다. 이론과 실험 모두에서 천재로 평가받은 이 과학자의 인간적 면모가 풍부하게 담겼다. 아내가 유대인이었던 그는 무솔리니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1938년 노벨상 수상을 기화로 스웨덴으로 출국했다가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자신이 이탈리아를 떠나기 전까지 미국 컬럼비아대 물리학과 교수 자리를 얻었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컬럼비아대 학과장에게 간청하면서, 유대인 차별로 직위를 잃은 동료 유대인 물리학자 5명의 일자리를 부탁하기도 했다.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의 사막에서 인류는 처음으로 핵폭탄을 폭발시키며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현장에는 설계의 핵심 인물인 페르미도 있었다. 그는 나중에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얻은 힘을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할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우리는 그렇게 되기를 모두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했다. 원제는 페르미의 별명이었던 ‘The Pope of Physics’(물리학의 교황).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 지방 의원은 경북 영주의 ‘제민루(濟民樓)’인 것으로 나타났다. 김호 경인교대 교수는 학술지 ‘국학연구’ 최근호에 게재한 논문 ‘16∼17세기 조선의 지방 의국 운영’에서 “조선 최고(最古)의 지방 의국(醫局)은 사족(士族)들이 주도해 운영한 제민루”라고 밝혔다. 논문에 따르면 제민루는 1433년(세종15년) 영주군수가 학교와 의국을 겸하는 건물로 세웠다. 오랫동안 의국보다는 서당과 학자들이 공부하는 곳으로 사용하다가 1591년 군수 이대진이 북쪽에 큰 건물을 재건해 의국으로 삼으면서 기능을 회복했다. 김 교수는 논문에서 “제민루는 내의원에 납입할 약재를 관리하기 위해 국가 주도로 세워졌지만 지방민을 위한 의료 혜택과 환난상휼(患難相恤·재앙을 당하면 서로 도와줌)의 플랫폼으로 활용됐다”고 밝혔다. 제민루에서 만든 환약과 탕약은 영주를 비롯한 경북 사람들이 두루 복용했다. 의술에 밝았던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아들에게 제민루에서 제조한 환약을 꾸준히 복용하라고 권했다는 기록도 있다. 운영 재원도 상당한 규모였다. 1596년 기준 제민루에 속한 전답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과 비교해도 적지 않았다. 김 교수는 “재원은 국가가 마련한 제민루 둔전(屯田)에서 충당하는 한편 사족들이 일부를 기부해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제민루는 임진왜란 등 전란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16세기 말∼17세기 중엽 사족들이 책임 있게 운영하면서 새로 의서를 구비하거나 여러 물건을 보충했고, 문서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17세기 제민루는 13, 14종의 의서 100여 권을 소장했다. 당시 소수서원 소장 도서가 500여 권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양이다. 제민루는 향촌 사회가 자율적으로 운영했으므로 사족들의 참여는 필수적이었고 양반과 상민, 천민, 승려를 비롯해 100여 명이 운영에 관여했다. 17세기 말∼18세기 초에는 의국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1748년 영주의 사족들이 제민루를 중건했다. 김 교수는 “역사상 사회적 자본은 저절로 확충된 적이 한 번도 없다”며 “제민루에서 제민(濟民·백성을 구제함)을 국가의 임무로 한정하지 않은 향촌 사족들의 의지를 볼 수 있다”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조선 후기 함경북도와 백두산 일대, 두만강 너머 북간도 등 북방(北方)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지리서 3종이 번역 출간됐다. 한국고전번역원은 “조선 후기 북방 영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북새기략(北塞記略)’과 ‘북관기사(北關紀事)’, ‘북여요선(北輿要選)’을 번역해 한 권으로 묶어 펴냈다”고 8일 밝혔다. ‘북새기략’은 1777년(정조 1년) 10월부터 1년 남짓 함경도 경흥부사(慶興府使)로 재직한 홍양호(1724∼1802)의 ‘삭방풍토기(朔方風土記)’를 그 손자가 내용을 보완해 편찬했다. 경흥의 풍속, 북관(함경북도)의 역사와 유적에 관한 내용뿐 아니라 백두산과 만주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내용이 체계적으로 담겼다. ‘북관기사’는 1807년(순조 7년) 함경도 북병영(北兵營)의 북평사(北評事)로 부임한 홍의영(1750∼1815)이 북관 지역의 정보와 그에 대한 의견을 담아 순조에게 바친 책으로 북방에 대한 국가 차원의 관심을 보여준다. ‘북여요선’은 19세기 말 청나라와 영유권 분쟁이 발생한 북간도 지역이 조선 영토임을 입증하고자 자료를 수집해 정리한 책이다. 백두산 옛 사적, 강역, 백두산정계비 내용에 대한 고찰과 함께 강역 경계 조사에 대한 자료가 담겼다. 1902년 북간도 시찰사 이범윤(1856∼1940)이 편집한 원고를 바탕으로 1904년 간행됐다. 북간도 영유권을 지키려는 조정과 지역민의 강한 의지가 드러나 있다. 이번 서적은 고전번역원의 손성필 선임연구원, 오세옥 이정욱 책임연구원 등 3명이 번역했다. 손 선임연구원은 해제에서 “이들 조선 후기 북방지리서는 당시 국토의식, 역사의식, 민족의식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이는 근·현대 우리나라 정체성 인식의 토대가 됐다”고 설명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은 평일 공연 시작 시간을 오후 8시에서 오후 7시 반으로 앞당길 수 있도록 했다고 6일 밝혔다. 예술의전당은 올해부터 적용하는 콘서트홀 대관규약을 ‘평일 공연 시작은 오후 8시가 원칙이지만, 신청을 통해 오후 7시 30분으로 변경할 수 있다’고 고쳤으며, 내년엔 공연 시작 시간을 원칙적으로 오후 7시 반으로 변경한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에 발맞춘 것이다. 다만 올해 대관 공연은 규약 개정 전인 지난해 대부분 대관 계약을 마무리해 원래 예정했던 8시에 시작할 가능성이 높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파가 몰아치던 지난해 말, 중국 상하이도 수은주가 0도 아래로 깊이 떨어졌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취재차 나선 길이었다. 황푸(黃浦)강의 습기를 머금은 찬바람은 무겁게 옷깃을 파고들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창장(長江)강 이남에서는 겨울에도 난방을 하지 않는다. 100년 전 이역만리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임정 요인들 역시 고향집의 뜨끈한 구들장이 그리웠을 것이다. 상하이는 발 닿는 곳마다 독립운동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다. 흔히 ‘상하이 청사’라고 부르는 임정 마당로(馬當路) 청사(1926∼1932년 사용)는 1993년 복구해 문을 연 지 25년이 넘었다. 지금도 한국인들의 발길이 끊일 새가 없었다. 현장에서 역사를 배우고자 하는 수요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적 건물과 장소는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없기도 했다. 1921년 임정 신년축하식 기념촬영 장소(영안백화점 옥상)는 벽돌 하나 달라진 게 없었지만, 1920년 신년축하회가 열렸던 ‘일품향여사(一品香旅社)’는 진즉에 헐리고 ‘래플스 시티’라는 복합쇼핑몰이 들어서 있었다.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이 지난해 위치를 밝힌 임정 하비로(霞飛路) 321호 청사도 마찬가지다. 한성, 노령 등 국내외 조직된 임시정부가 이 청사에서 통합했다. 현재 주소로 화이하이중루(淮海中路) 651호인 이곳에는 의류 매장이 들어서 있었다. 서쪽으로 100m 정도 가면 독립임시사무소 자리가 있지만 역시 지금은 대형 스포츠의류 매장이 서 있다. 번화한 화이하이중루에는 프랑스 조계 가로 조경의 특징인 플라타너스 나무가 여전히 줄지어 서 있었지만, 거리를 지나가는 누구도 이곳에 임정의 두 번째 청사가 있었다는 걸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막상 현장에 가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면 당대 독립운동가들의 결기를 떠올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독립운동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고자 하는 사람조차 어디가 어딘지 찾기 어렵다는 것은 문제다. 일부 장소의 위치가 최근에 드러나기도 했지만, 임정 수립 100년이 지나도록 역사적 장소에 표석 하나 없다고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다. 한중 관계는 수교 뒤에도 여러 정세에 따라 좋다 나쁘다 했다. 남의 나라 땅에 기념물이나 표석을 세우는 게 쉬울 리 없다. 대신 우리 정부가 당장 할 수 있는 비교적 간단한 일이 있다. 해외 독립운동 역사 유적의 당대 모습을 역사 지도와 함께 증강현실(AR)로 제작해 교육에 활용하는 것이다. 상하이 여행자가 스마트폰의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켜고 이 증강현실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면 표석이 없어도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얼마나 역사적인 장소인지 쉽게 알 수 있을 테니 얼마나 근사할까. 가상현실(VR) 콘텐츠도 좋다. 고려 말 문인 길재(吉再·1353∼1419)는 “산천은 의구(依舊·옛날 그대로 변함없음)하되 인걸(人傑)은 간데없고”라고 읊었다. 하지만 근대 도시는 순식간에 변하기에 10년만 지나도 모습이 의구하지 않다. 대신 오늘날은 옛 모습을 재현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 3·1운동 및 임정 100주년 디지털 기념사업에 정부가 나서는 건 어떤가. 조종엽 문화부 기자 jjj@donga.com}

“기미 3·1운동은 우리 민족정기를 민중의 토대 위에 꽃피게 한 장엄한 역사의 한 페이지였습니다.” 1965년 동아일보 4월 1일자 1면에는 ‘3·1유적보존운동’을 알리는 사고(社告)가 실렸다. 동아일보는 그해부터 3·1운동의 주요 현장에 기념비를 세우는 사업에 착수했다. “남녀노소, 전국의 모든 애국동포의 협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취지에 따라 3·1운동 기념탑 건립 모금에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기념비건립위원회가 구성됐다. 국사편찬위와 합동으로 유적지 조사를 거쳐 1971년 8월 15일 전북 이리(현 익산시) 역전광장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열었다. 이후 1987년 10월 충남 서천까지 모두 12개의 비가 세워졌다. 기념비가 세워진 곳은 △충북 영동 △강원 횡성 △서울 중앙고 △전북 남원 △강원 양양 △전남 강진 △전북 임실 △강원 홍천 △전남 영암 △경북 안동 등이다. 해마다 그 앞에서 참배행사가 열리는 등 기념비는 3·1정신을 기리는 공간이 됐다. 충남 서천군은 마산면 신장리 마산초등학교 옆 ‘3·1운동 기념비’ 주변에 무궁화를 심고 누각을 지어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 왔다. 2008년부터는 해마다 만세운동 재연 행사를 열고 있다. 3·1정신을 잇고자 하는 시민들이 기념비를 정성으로 관리했다. 충북 영동군 영동읍 중심가에 위치한 ‘영동 3·1운동 기념비’는 그 앞에서 2대째 자전거 수리·판매점을 운영한 신달식 씨(62)와 그의 부친 신동우 씨(1992년 72세로 작고)가 대를 이어 헌신적으로 관리했다. 2017년 본보 인터뷰에서 신 씨는 “조국의 독립을 외치던 3·1운동 당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이 일을 멈추지 않겠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2013년부터 관리 소홀로 녹슬고 얼룩이 생긴 기념비들을 점검하고 개·보수해 새로 단장하는 사업도 펼쳐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3·1운동은 당대 세계 사조의 변화를 가장 첨단에서 반영해 일어났던 운동입니다. 독립선언서의 지향은 오늘날 세계질서가 지향할 바와도 같지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66·사진)을 지난해 12월 26일 서울 서대문구 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김 이사장은 “3·1운동과 독립선언서, 이후의 민족운동을 단순히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반일(反日)운동으로만 보는 건 운동의 성격을 굉장히 낮춰 파악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러시아혁명의 발발을 비롯한 20세기 초의 정세 변화는 새로운 세계질서와 평화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념을 필요로 했다. 19세기 말부터 유행했던 사회진화론은 우월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강대국이 약소국가를 지배하는 것을 자연법칙에 비유함으로써 제국주의를 정당화했던 사상이었다. 그러나 ‘3·1독립선언서’에 이러한 사회진화론을 일거에 깨부수는 핵심 정신이 담겨 있다고 김 이사장이 지적했다. 그는 “1차 대전 종전 뒤 강자와 약자가 균등하게 존재하는 질서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의와 인도주의, 민족자결의 원칙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3·1독립선언서 속에 모두 담겨 있다”고 밝혔다. 중국 5·4운동도 3·1운동과 마찬가지로 당시 세계 사조의 변화를 반영해 일어난 것이라고 덧붙였다. 3·1독립선언서에서 33인의 민족대표들은 “일본의 배신을 죄(罪)하려는 것이 아니다.…일본의 의리 없음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다.…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한때는 ‘일본을 탓하지 않는다’는 3·1독립선언서의 이 같은 표현을 두고 ‘무기력하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저도 젊은 시절 공부하며 그렇게 오해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민족대표들은 조심스러웠던 게 아니라 사회진화론을 극복하고 정의와 인도주의를 추구하는 세계 사조를 그대로 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3·1운동은 단순한 반일운동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고 김 이사장은 설명했다. “3·1운동은 제국주의 질서가 아니라 강대국과 약소국이 공존하는 국제질서를, 그것도 비폭력으로 구축하려 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평화적 국제질서를 향한 노력은 사실상 3·1운동으로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죠.” 3·1독립선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향한 민주공화제도 세계 사조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1차 대전 뒤 민족자결의 원칙 아래 새로 태어난 약소국들이 거의 공화주의를 택했다. 조선 독립운동 역시 1917년 ‘대동단결 선언’ 등에서 국민 주권을 주장했다. 김 이사장은 그동안 3·1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의 의미를 지나치게 조선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시각 측면에서만 평가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 민족운동은 1930년대 후반으로 가면 반전·반파시즘 운동의 성격을 지닙니다. 조선의 독립을 매개로 새로운 세계 평화질서와 민권 이념, 사회를 지향했던 것입니다.” 김 이사장은 동북아시아 평화 구축을 위한 실마리도 3·1운동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해 11월 학술대회에 이어 올해 4월 개최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도 사회진화론의 극복과 민주공화제의 확산을 집중 조명할 예정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3·1운동은 모든 민족은 국가를 가질 권리가 있다고 천명하며, 유엔 규약보다 약 50년 앞서 인간 기본권의 지평을 넓힌 사건입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조광 국사편찬위원장(74)을 지난해 12월 21일 경기 과천시 국사편찬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3·1운동 100주년의 의미에 대해 “대한민국의 민주공화제 성립뿐 아니라 사회 전 분야에 걸쳐서 광범하게 영향을 준 혁명적 사건”이라고 말했다. 조 위원장은 3·1운동이 서울에서 시작해 지방으로 확산됐고, 지식인·학생이 중심이 됐다가 민중으로 전파됐다는 인식은 오해라고 강조했다. “거의 모든 지역이 3·1운동의 중심지였고, 주역은 민족 전체였다”는 것이다. 조 위원장은 “독립은 이뤘으니 분단의 극복과 민주, 복지국가 건설이 앞으로의 과업”이라며 “그 전범이 100년 전 3·1운동”이라고 강조했다. 동아일보와 국사편찬위원회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2월 하순에 공동주최한다. 조 위원장은 “동아일보사는 1950∼70년대에도 3·1운동 기념비를 세우고, 대규모 3·1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을 간행하고, 강연·토론회를 여는 등 3·1운동을 기억하는 사업을 꾸준히 펼쳐왔다”며 “이는 민족지로서 동아일보가 우리 민족운동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3·1운동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것이다. 동아일보의 그런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3·1운동이 우리 역사에서 갖는 의미는…. “우리의 독립의지를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일본은 조선이 자발적으로 합병을 바랐다고 거짓 선전을 일삼았다. 그런 ‘페이크 뉴스’에 일격을 먹인 것이다. 독립 의지 표시 없이 독립국가가 생길 수 없다. 이렇게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직접적 계기를 마련했다. 또 일제 식민통치 정책의 변경을 강박했다.” ―정치 측면 이외 다른 의미는…. “3·1운동은 우리가 스스로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 사건이다. 3·1운동은 1920년대 이후 사회운동의 근원이 됐다. 민족적 각성이 이뤄지면서 사회문화적 변화가 일어났다. 일례로 학교 진학률이 급격히 증가했고, 형평(衡平) 운동 같은 신분타파운동도 본격 전개됐다. 민족주의 사학의 발전과 민족 종교도 발전했다. 3·1운동은 근대적 사회 변화의 내재적 기점이다. 임정 탄생 등 정치적 결과만 강조하면 3·1운동의 의의를 오히려 축소하게 된다.” ―오늘날 새로 주목할 만한 의의가 있다면…. “인간 기본권의 인식지평을 넓혀준 사건이라는 것이다. 1966년 유엔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대한 국제규약’보다 47년 앞서 민족이 독립된 국가를 가질 권리가 기본적 권리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세계 인권사의 발전에서도 3·1운동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3·1운동의 규모는…. “당시 조선 인구가 1679만 명이었는데 총독부 기록에 참여자가 106만 명이었다. 전체 인구의 6.3%가 참여했다. 물론 근거가 미흡한 구석이 있다. 야마베 겐타로나 신복룡 등의 연구자는 50만 명 내외로 본다. 그래도 인구의 3.0%다. 이 정도면 거의 전 국민이 참여했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인류사에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을 정도의 규모다. 독립선언서만 봐도 최남선이 기초한 것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약 200건의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이 있다.” ―대한민국의 오늘과 미래에 던지는 메시지는…. “3·1운동은 전근대 왕조체제에서 탈피해 민주공화제의 성립을 전망하고 추진한 사건이다. 오늘의 한국은 민주주의의 신념을 키워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공화정을 발전시킬 책임을 확인해야 한다. 또 독립된 국가를 모든 국민을 위한 복지국가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책임을 확인시켜 준다. 100년 전 3·1운동을 벌인 선조들은 불가능에 도전해 마침내 독립을 이뤘다. 우리도 불가능에 대한 도전을 현실화해야 한다.” ―국제적인 측면은…. “3·1운동은 국제적 불의·부당한 일에 대한 저항이고 경고였다. 한국은 인류의 인권에 대한 기본적 감수성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탄압받는 민족과 인류에 대한 보편적 인류애를 강화해야 한다. 민족과 인류의 기아와 빈곤, 난민 문제를 비롯해 문화적 제반 권리를 제약하는 악조건을 개선하고 국제평화를 위하는 활동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3·1운동은 죽은 화석이 될 것이다.” ―독립은 이뤘지만 분단은 계속되고 있다. “3·1운동은 사회적 계급을 초월한 전 민족이 일치해서 일으킨 운동이다. 분단 극복을 위한 노력이 제2의 민족운동이고, 두 번째 3·1운동이다.” ―일부에서는 3·1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용어를 바꾸자는 주장도 나온다. “일리가 있다. 3·1운동은 사회의 질적 전환을 추진하는 혁명적 성격이 있다. 사회 전반에 걸쳐서 광범하게 영향을 준 3·1운동은 프랑스 대혁명 못지않은 혁명적 사건이다. 혁명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이라는 ‘뉴 아이디어’와 그 생각을 실천하는 힘, 즉 무력·폭력을 갖춰야 한다. 3·1운동은 기존 사회질서를 바꾸자는 것이었고, 비록 비폭력을 표방했지만 엄청난 희생자가 나오고 참여자도 넓었다. ‘파워’도 결합됐던 것이다. 물론 독립선언서가 비폭력을 지향했기에 ‘운동’으로 보는 게 적합하다는 견해도 성립된다. ‘운동’으로 지칭하는 이들도 3·1운동의 혁명적 측면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3·1운동의 혁명적 의미를 충분히 인정하지만 광복 전부터 계속 사용했던 용어와 관행을 존중해 3·1운동으로 불러도 된다고 본다.” ―3·1운동에 대한 오해는…. “3·1운동은 순식간에 확 번졌다. 소식만 듣고 너나 할 것 없이 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거의 모든 지역이 3·1운동의 중심지였다. 운동의 확산 과정을 데이터베이스로 보면 드러날 것이다. 서울·중앙의 지식인·학생과 연계되지 않은 사람도 다 만세의 주역이었다. 각자가 그 지역에 맞는 조건과 인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해서 전반적으로 일으킨 것이다. 운동 양상도 횃불투쟁, 만세시위, 주재소습격, 격문배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했다.”:: 조광 국사편찬위원장(74) ::1983∼2010년 고려대 사학과·한국사학과 교수2001년 한국사상사학회 회장, 조선시대사학회 회장 2002∼2005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총간사2003∼2006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2005년 고려대 문과대학 학장 2005년 안중근전집편찬위원회 위원장 2005∼2009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장2006년 전국사립대인문대학장협의회 초대 회장2008년 한국사연구회 회장2008∼2010년 고려대 박물관 관장 2010년∼ 고려대 명예교수2017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취임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내년 이날은 우리 서울에서 신년축하회를 열고야 만다. 금년 1년 안에는 우리의 신성 국토를 회복하고야 만다. 독립은 하고야 만다!” 1920년 1월 1일 중국 상하이(上海) 남경로(南京路). 당시 고급 호텔 ‘일품향여사(一品香旅社)’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요인 및 직원 60여 명이 임정 수립(1919년 4월 11일) 뒤 처음 맞는 신년축하회를 열었다. 행사장 전면에는 대형 태극기가 내걸렸고, 낮 12시 정각 애국가를 제창했다. 호텔 양악대가 당시 애국가 곡조로 쓰였던 스코틀랜드 민요를 계속 연주했으며, 벅찬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지난해 12월 27일 동아일보 취재팀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국내 언론 중 처음으로 이곳을 찾았다. 동행한 중국 내 독립운동·한인사(史) 전문가인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에 따르면 일품향이 있던 자리(당시 주소 서장로·西藏路 270호)는 현재 영화관까지 들어선 7층짜리 복합쇼핑몰 ‘래플스 시티’(현주소 시짱중루·西藏中路 268호)로 바뀌었다. 건물 모습은 바뀌었지만 당시 참석자들의 우렁찬 만세 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들리는 듯했다. 당시 임정 인사 58명은 행사를 마치고 오후 4시경 호텔 옥상에서 대형 태극기 2개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임정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진 중 하나다. 이곳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논문에 밝힌 김 연구관은 “임정은 이 기념사진을 통해 임정의 정통성을 과시하고 독립운동을 고무하고자 했다”며 “행사 장소도 정부 행사의 품격에 맞는 곳을 골랐다”고 말했다.상하이=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대한민국 만세! 대통령 이하 총리와 각 총장 만세, 삼십삼인 만세! 광복의 대사에 진췌(盡瘁·쓰러질 정도로 힘을 다함)하는 동포형제자매 만세! 왜놈의 악형에 영어(囹圄)에 신음하는 동포만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신문이었던 독립신문에 따르면 1920년 1월 1일 신년축하회에서 임정 인사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목 놓아 외쳤다. 행사장인 일품향여사는 당시 중국 상하이에서 손꼽히는 고급 호텔이자 일류 요리점이었다. 1919년 8월 22일 한인들이 친한파 미국인의 송별회를 여는 등 여러 단체의 모임이 열리던 장소였다.》 기념촬영을 위해 일품향 옥상에 오른 임정 요인들의 눈앞으로는 당시 경마장이 펼쳐져 있었다.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임정 인사들은 광활한 경마장이 표상하는 서구 열강의 힘을 절감하면서 부강한 독립 국가를 꿈꿨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마장 자리는 오늘날 상하이의 대표적 명소인 런민(人民)광장이다. 임정은 1920년 당시 사진 속 위치에 맞춰 별지에 명단을 인쇄해 함께 배부했다. 임정의 정통성을 과시하고 “이런 사람들이 여기 모여 독립투쟁을 다짐했으니 여러분도 힘을 다하라”는 메시지를 타 지역 독립운동단체에 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현장을 취재한 해일생(海日生)이란 필명의 독립신문 기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썼다. “삼삼오오로 헤어져 가는 우리 형제의 얼굴에는 새 용기, 새 결심, 새 희망의 빛이 빛나다. 내일부터는 더욱 조국을 위해 성충(誠忠)을 다하리라.” 임정은 이듬해 1921년 1월 1일에는 상하이의 대표적 번화가인 난징둥루(南京東路)에 있는 영안(永安)백화점에서 신년축하회를 열었다. 프랑스조계 대한교민단 사무소에서 간단한 축하식을 치른 뒤 대동여사 대채루(大菜樓)에서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임정 인사 59인은 이날도 백화점 옥상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을 엽서로 만들어 홍보에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지난해 12월 28일 방문한 영안백화점은 지금도 당시의 웅장한 서양식 석조건물 그대로 서 있었다. 임정 인사들의 눈앞에는 번화한 남경로의 고층 건물, 멀리 황포강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1921년 1월 1일 신년축하식 기념촬영 사진은 등장한 59명 가운데 10명이 아직도 성명 미상으로 남아있다. 1920년과 1921년에 3·1절 기념식이 열렸던 올림픽극장(현재 난징시루·南京西路 742호)도 역사적인 장소다. 현재는 은행과 커피숍, 치과 등이 빼곡한 오피스 건물로 바뀌었다. 올림픽 극장은 당시 공공조계의 최신식 극장이었다. “여러 대 자동차에 나눠 타고 국기를 높이 내건 뒤 벽력같은 만세소리로 하비로를 질주하고…러시아인은 ‘우라’(만세)를 부르고, 영미인은 모자를 두르며, 중국인은 박수로 환영하는데 일본인은 비슬비슬 보기만 하였다고.” 1920년 기념식 행사 뒤 한인 청년들이 벌인 자동차 시위를 묘사한 독립신문 기사다. 시위대는 프랑스조계 하비로와 공공조계 서장로를 지나 남경로에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더 나아가 일본인이 밀집해 살던 홍구 지역의 일본총영사관 앞에서도 시위를 했다. 당시 일본 관헌들은 경악하면서도 어쩔 줄 몰라 했다고 한다. 시위는 이듬해인 1921년과 1923년 3·1절 기념식 때도 재연됐다.○ 광복 50주년, 동아일보가 보도한 임정 58인 실명 1920년 1월 1일 신년축하회 사진은 아래쪽에 ‘대한민국 2년 원월(元月) 원일(元旦) 대한민국임시정부 신년축하회 기념촬영’이라고 기록돼 있다. 사진에 등장하는 58명이 누구인지 모두 드러난 것은 촬영 75년 만인 1995년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서였다. 이전까지는 등장인물 가운데 20여 명만 신원이 파악돼 있었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동아일보는 사진에 등장하는 58인의 명단을 발견한 사실을 1월 1일 신년호에서 보도했다. 본보는 이 별지 명단을 일본 외무성 사료관의 자료 속에서 한일 근대사 연구가 최서면 씨가 발견했다고 소개했다. 사진과 별지 명단은 1920년 2월 14일 일본의 간도총영사관이 외무대신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 포함돼 있었다. 당시 간도일본경찰은 임정 국무원 비서장 김립의 동생인 김철용의 가택을 수색하던 중 압수했던 것이다. 당시 상하이 일본영사관은 사진 속 인물들에 대해 지도급 인사 말고는 거의 파악하지 못했다. 기념사진만 입수했고, 별지 명단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김광재 편사연구관은 “이로 볼 때 일본영사관이 밀정을 활용해 프랑스조계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 진영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는 종래의 설명이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국내의 교통부와 연통국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면서 임시정부는 재정난을 겪었고, 1922년 이후 임정이 신년축하회를 성대하게 열었다는 기록이나 사진은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 랜드마크 영안백화점은 도산선생 즐겨 이용… 현재 메트로폴로 호텔선 백범-윤봉길 마지막 점심 ▼상하이 곳곳 독립운동 흔적 상하이에서는 가는 곳마다 우리의 독립운동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저서 ‘근현대 상해 한인사 연구’(경인문화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산파 역할을 했던 독립임시사무소의 현 위치도 밝혔다. 1919년 민족 대표의 위임을 받고 3월 1일 상하이에 도착한 독립운동가 현순 목사(1880∼1968) 등이 여기서 3·1운동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한편으로 임정 수립을 준비한 역사적 장소다. 김 연구관이 1920년 당시 프랑스 조계 지적도와 대조한 결과 독립임시사무소가 있던 하비로(霞飛路) 329호는 오늘날 화이하이중루(淮海中路) 717호의 일부가 됐다. 지난해 김 연구관이 밝힌 임정 두 번째 청사(하비로 청사) 자리(본보 2018년 4월 10일자 1·21면 참조)에서 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위치다. 당시에는 주택이었지만 지금은 대형 스포츠의류 매장이 들어섰다. 또한 비교적 최근에 알려진 곳 중 하나가 대표적 번화가인 난징둥루(南京東路)에 있는 영안(永安) 백화점이다. 당시 주소로 공공조계 남경로(南京路)에 있던 이 백화점은 상하이의 랜드마크였다. 1918년 문을 연 이 백화점 부속 대동여사(大東旅社)는 도산 안창호가 회의나 손님 접견을 위해 즐겨 찾았던 건물이다. 1920년 미국의원단의 환영회도 여기에서 열었다. 김 연구관은 “남경로의 고층 백화점으로 대표되는 중국 민족자본의 흥기는 식산흥업과 실력 양성을 통한 근대를 추구하던 도산에게 자극제가 아닐 수 없었다”며 “남경로 중국 백화점의 번영에서 조국의 근대화를 위한 희망을 보았던 것은 아닐까”라고 설명했다. 현재의 메트로폴로 호텔(시짱난루·西藏南路 123호)은 윤봉길 의사가 1932년 의거 전날 백범과 점심을 먹으며 거사를 협의한 곳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상하이 YMCA 사무소가 있다. 윤 의사의 의거 뒤 백범 김구를 숨겨준 피치 목사가 YMCA 간사를 지냈다. 윤 의사가 의거 당일 폭탄을 건네받고 백범과 함께 아침을 먹은 독립운동가 김해산(金海山)의 집(안탕로·雁蕩路 원창리·元昌里 13호)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임정의 초기 주요 행사가 열린 기념식장은 대체로 공공조계에 있다. 당시 공공조계는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 한인 독립운동가에게 극도로 위험한 지역이었다는 일반적 인식과는 괴리가 있다. 김 연구관은 “열강을 의식한 일제도 독립운동가 체포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고, 공공조계가 초기부터 위험했던 것은 아니다”라며 “한인들은 일상생활, 기념행사, 생업 등을 위해 공공조계에 일상적으로 드나들었다”고 말했다.상하이=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박호선 사장(58)은 대평원의 나라 몽골에서 승강기를 판다. 수도 울란바토르를 비롯해 몽골의 주요 도시에서 사용하는 승강기 3000여 대 중 절반 이상이 박 사장의 회사에서 설치한 제품이다. 그는 지독한 가난으로 초등학생 때부터 공장에서 일해야 했고, 이후에도 수십 가지 직업을 거쳤다. 1999년 몽골로 건너가 인테리어 사업을 벌였지만 2003년 완전히 망했다. 돈이 없어 영양실조로 쓰러졌다가 한인식당을 하는 교민이 보내준 설렁탕을 먹고 한 달 만에 기운을 차리기도 했다. 그러다 러시아인이 갖고 있던 한국 승강기의 몽골 판매권을 확보하며 기적적으로 재기했다.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사업으로 성공한 한국인 12명을 인터뷰한 책이다. 주인공들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늘 안주하기보다는 모험과 도전을 택했다. 윤용섭 사장(56)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 다니던 직장인이었다. 1995년 브라질 발령을 받고 거대한 시장에 매력을 느꼈다. 1997년 회사를 나와 오퍼상을 시작했지만 브라질은 이듬해 11월 혹독한 불황에 빠져들었다. 윤 사장은 브라질에는 생소했던, 향기를 자동으로 뿜어주는 분사기를 파는 데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사업은 곤궁함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브라질 주요 언론에 소개된 것을 계기로 역전했다. 이제는 세계 최대 향수 시장인 브라질에서 향수를 직접 생산하는 데 이르렀다. 읽다보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싶다. 카리브해의 전력 사업가, 인도네시아의 의료기기 사업가, 베트남의 건설 사업가 등 해외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한 이들의 사연이 차례로 소개된다. 세계를 돌며 이들을 만난 저자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이산·離散)’는 인구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지구촌 어느 구석을 가든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채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성공한 이들 뒤에는 실패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고, 개발도상국에서 사업을 벌이는 이들이 양지만 걷지는 않았을 것이다. 숱한 역경을 이겨내고 해피 엔딩을 맞은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이야기가 유쾌하고 통쾌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모든 폐허는 저마다 찬란한 번성과 비참한 쇠락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축소된 제국이다.” 신간 ‘세상이 버린 위대한 폐허 60’(리처드 하퍼 지음·예담아카이브)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기원전 3세기에 건설된 요르단의 도시 페트라에서 시작해, 신도시로 계획됐지만 부동산 거품이 빠지면서 유령 도시가 된 중국 내몽골의 캉바스까지 폐허 60곳의 사진과 설명이 담긴 책입니다. 고대 문명의 흔적은 한숨이 나오도록 아름답지만 근대 들어 전쟁으로 버려진 마을에는 차마 그런 생각이 안 드는군요. 폐허가 된 데에는 경제 몰락, 자연재해, 질병, 외침, 제국의 멸망, 종교적 이유나 전쟁, 핵발전소 사고 등 정말 다양한 요인이 있네요.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타투인 행성 촬영 세트장도 제작진이 그대로 남겨두고 떠나면서 튀니지의 사막에 폐허로 남았습니다. 폐허를 보면 인간사의 무상함이 떠오르는 한편 여러 상상의 날개가 펼쳐지지요. 오래된 것을 부수고 새것을 짓기 좋은 연말연시입니다. 폐허를 바라보며 또 다른 새해를 구상해보면 어떨까요.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박호선 사장(58)은 대평원의 나라 몽골에서 승강기를 판다. 수도 울란바토르를 비롯해 몽골의 주요 도시에서 사용하는 승강기 3000여 대 중 절반 이상이 박 사장의 회사에서 설치한 제품이다. 그는 지독한 가난으로 초등학생 때부터 공장에서 일해야 했고, 이후에도 수십 가지 직업을 거쳤다. 1999년 몽골로 건너가 인테리어 사업을 벌였지만 2003년 완전히 망했다. 돈이 없어 영양실조로 쓰러졌다가 한인식당을 하는 교민이 보내준 설렁탕을 먹고 한 달 만에 기운을 차리기도 했다. 그러다 러시아인이 갖고 있던 한국 승강기의 몽골 판매권을 확보하며 기적적으로 재기했다.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사업으로 성공한 한국인 12명을 인터뷰한 책이다. 주인공들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늘 안주하기보다는 모험과 도전을 택했다. 윤용섭 사장(56)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 다니던 직장인이었다. 1995년 브라질 발령을 받고 거대한 시장에 매력을 느꼈다. 1997년 회사를 나와 오퍼상을 시작했지만 브라질은 이듬해 11월 혹독한 불황에 빠져들었다. 윤 사장은 브라질에는 생소했던, 향기를 자동으로 뿜어주는 분사기를 파는데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사업은 곤궁함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브라질 주요 언론에 소개된 것을 계기로 역전했다. 이제는 세계 최대 향수 시장인 브라질에서 향수를 직접 생산하는 데 이르렀다. 읽다보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싶다. 카리브해의 전력 사업가, 인도네시아의 의료기기 사업가, 베트남의 건설 사업가 등 해외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한 이들의 사연이 차례로 소개된다. 세계를 돌며 이들을 만난 저자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이산·離散)’는 인구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지구촌 어느 구석을 가든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채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성공한 이들 뒤에는 실패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고, 개발도상국에서 사업을 벌이는 이들이 양지만 걷지는 않았을 것이다. 숱한 역경을 이겨내고 해피 엔딩을 맞은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는 유쾌하고 통쾌하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친절하면서도 깊이 있는 서양미술사 소개로 꾸준한 사랑을 받은 시리즈 ‘난생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난처한 미술 이야기)의 5권(사회평론·2만 원·사진)이 26일 출간됐다. 저자는 서양 미술의 발전을 상업주의와 연결지은 연구로 주목을 받은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51)다. 앞서 ‘난처한…’에서 원시·고대 미술과 중세 미술을 소개했던 저자는 이번 책에서 자신의 주 전공인 르네상스 미술을 다뤘다. 르네상스 시기에 지은 이탈리아 피렌체 대성당을 1970년 서울에 지은 삼일빌딩과 비교하는 등 우리 시각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방식은 그대로다. 사회평론은 “미술뿐 아니라 도시의 발전과 시민의 생각, 통치자의 이상, 천재들의 삶을 비롯해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의 모습도 공들여 조명했다”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저희들도 사람입니다. … 병이 무섭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희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기에 병원을 지키고 있습니다. … 차가운 시선과 꺼리는 몸짓 대신 힘주고 서 있는 두 발이 두려움에 뒷걸음치는 일이 없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세요.” 에세이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김현아 지음·쌤앤파커스)에 나오는 구절로 메르스 사태 당시 환자를 간호하며 쓴 편지의 일부다. 저자는 메르스에 의한 첫 사망자가 나온 한림대 동탄성심병원의 외과중환자실 책임간호사로 일했다. 법관이나 의사 등 엘리트 직업 위주로 출간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던 직업 에세이 도서 시장에 잔잔한 새바람이 불고 있다. 간호사를 비롯해 아파트 관리소장이나 버스 운전사, 편의점 주인처럼 상대적으로 평범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 쓴 책들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 쌤앤파커스에 따르면 올해 4월 발간된 ‘나는 간호사…’는 최근 28쇄를 찍었다. 외과중환자실 간호사로 21년간 환자를 돌본 간호사가 열악한 처우와 환경 속에서도 환자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가 핍진하게 묘사돼 독자의 공감을 샀다는 분석이 나온다. 올해 5월 출간된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허혁 지음·수오서재)는 1만 권이 팔렸고 아파트 관리소장이 쓴 ‘따로, 또 같이 살고 있습니다’(김미중 지음·메디치미디어), 6년 차 편의점 점주의 ‘매일 갑니다, 편의점’(봉달호 지음·시공사)도 올 9월 발간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정상태 쌤앤파커스 편집자는 “과거에는 특정 직업을 갖기 위해 갖춰야 할 소양 등 취업이나 자기계발 측면에서 쓴 책이 많았다면 최근에는 직업 현장의 애로와 기쁨 등 살아 있는 이야기를 다루면서 직업적 사명감과 보람을 잘 버무린 에세이에 독자들이 공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직업 에세이가 특정 직업에 대한 오해를 줄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황은희 수오서재 편집장은 “직업이 달라도 삶의 애환과 성찰은 모두 맞닿아 있다”며 “평범한 이들의 직업 에세이가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있다”고 말했다. 책을 내본 적이 없는 사람도 쉽게 독자와 만날 수 있는 ‘브런치’ 같은 온라인 플랫폼의 성장도 이런 현상을 가속화했다. 화재 진압 현장의 치열함과 소방관 처우 문제 등을 다룬 ‘어느 소방관의 기도’(오영환 지음·쌤앤파커스) 역시 ‘브런치북 프로젝트’ 수상작으로 2015년 12월 출간돼 지금까지 11쇄를 찍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앞으로도 잘나가는 특정 직업군의 글보다는 자신의 장점을 살리면서 자신만의 오솔길이나 샛길을 성실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더욱 유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나와 가족에게만 집중했던 삶이었는데, 토론을 하면서 타인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앞으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며 사회에 공헌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겠습니다.” 충북 청주시 흥덕구의 은세계 작은 도서관에서 영화인문아카데미 강좌를 들은 60대 후반 여성의 후기다. 이 아카데미는 노년에 타인을 만나고 우정을 나누는 내용 등이 담긴 여러 다양성 영화를 올해 16회에 걸쳐 함께 보고 토론했다. 호응이 높아 수강생이 정원을 초과하기도 했다. 은세계 작은 도서관은 청주가경노인복지관에 마련돼 있는 노인 친화 도서관이다. ‘배우고 있는 한 당신은 늙지 않는다’는 모토처럼 삶의 활기를 북돋우고 제2의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 나가는 데 도움을 주는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미 고령사회에 진입한 우리나라에서 작은 도서관이 나아갈 여러 방향 가운데 하나를 보여준다. “봄볕처럼 화사한/라일락 향이 나는 사람…끌어안아 안기고픈 넉넉한 사람” 도서관 이용자 구명숙 씨(64)가 펴낸 시집 ‘머리맡에 둔 편지’에 담긴 ‘이런 사람이 좋더라’의 한 구절이다. 구 씨는 도서관이 진행한 ‘1인 1책 펴내기’ 프로그램을 통해 시집을 냈다. 3, 4년에 걸쳐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책 한 권을 정성 들여 만드는 이도 있다. 도서관이 해마다 네 번 여는 시낭송회는 작은 음악회와 함께 열리는데 참여자가 70명가량 될 정도로 인기가 많다. 도서관에는 시력이 좋지 않은 시니어층이 읽기 쉽도록 큰 글씨로 출판한 책도 적지 않다. 박영순 씨(73)는 “큰 글씨로 나온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막 다 읽었다”며 “애들 키울 때는 바빠서 책을 가까이 하지 못했다. 요즘은 매주 두 번 도서관에 오는데, 큰 글씨 책이 많아서 너무 좋다”고 했다. 이 도서관은 KB국민은행과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대표 김수연 목사)의 도움으로 올 10월 리모델링을 했다. 서가 공간이 배로 넓어졌고, 아이들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 별도로 마련했다.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도 1000권 정도 새로 들였다. 최근에는 어르신들이 어린이에게 동화를 구연하는 동아리도 만들고 있다. 오미정 청주가경노인복지관 작은 도서관 담당 팀장은 “인근 어린이집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더니 어르신 봉사자와 어린이 모두 만족하며 즐거워했다”면서 “노인 친화 도서관에서 지역 사회 도서관으로 역할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1일 서울 성북구의 한 롤러장. 1990년대 인기그룹 ‘듀스’의 ‘나를 돌아봐’가 흘러나오자 30여 명이 환호했다. 이 노래가 나온 1993년에 태어난 김민영 씨(25·여)는 익숙한 듯 팔과 다리를 휘저었다. 김 씨는 “유튜브로 당시 공연을 찾아보면서 춤을 익혔다”며 “옛날 감성을 느낄 공간을 찾다 보니 일주일에 한 번씩 이곳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추억팔이’로 소비되던 복고문화가 최근 10대와 20대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중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했던 복고 열풍과는 다르다. 경험하지 못한 옛것에 열광하는 청년들이라는 점에서 ‘뉴트로(New-Tro·새로움과 레트로를 합친 신조어)’ ‘영트로(Young-Tro)’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1970, 80년대를 주름잡던 롤러장은 1990년대 사라졌다 지난해부터 젊은이들에게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청남방에 청바지 등 ‘청청패션’이나 교련복을 입고 오는 손님들도 적지 않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복고 콘셉트로 롤러장 인증사진을 올리는 문화도 자리 잡았다. 이날 롤러장을 찾은 김민지 씨(22·여)는 “복고 의상의 ‘성지’인 광장시장에서는 영화 ‘써니’ 사진을 붙여놓고 청바지 등을 팔고 있다”고 했다. 음악영화로 국내 최다인 830만 명을 동원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흥행도 청년층의 영향이 컸다. CGV리서치센터에 따르면 관람객 가운데 20, 30대 비중은 60%에 육박한다. ‘싱얼롱’(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 문화에 대한 반응도 폭발적이다.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2002년 월드컵처럼 세대를 초월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한 사회적 이벤트가 없었다”며 “무한 경쟁에 익숙한 젊은층이 극장에서 ‘싱얼롱’을 하고 함께 어울리는 경험이 새로웠던 것”이라고 말했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일렉트로닉댄스뮤직(EDM)을 비롯해 비트 중심의 음악을 향유했던 젊은이들에게 멜로디가 강하고 중독성 있는 퀸의 노래가 신선하게 다가갔을 것”이라고 했다. 옛것에 대한 젊은이들의 관심은 개화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구한말 콘셉트 사진으로 지난해 문을 연 대구의 산격동사진관은 1년 만에 서울과 부산에 진출했다. 노웅희 대표는 “복고 의상을 대여해 주다 보니 호기심 많은 청년들이 주로 사진관을 찾는다”며 “개화기 의상은 전통 한복과 다르게 남성 고객들도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남성은 깔끔한 스리피스 슈트에 붉은 계열의 넥타이를 매고, 여성은 프릴 장식이 달린 붉은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는다. 서울 종로구 익선동은 그야말로 옛것의 향연이다. 22일 ‘최신 게임 없음’ ‘16비트 컬러’ 등이 써 붙여진 ‘콤콤오락실’에서 10여 명의 젊은이가 테트리스, 뿌요뿌요 등 고전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김종민 씨(20)는 “그래픽 좋은 요즘 게임들보다 흥미롭다”며 “‘슈퍼컴보이’를 집에 놓고 친구들과 게임을 하는 것도 취미가 됐다”고 했다. 익선동 ‘만홧가게’에서는 추억의 만화 월간지 ‘챔프’, ‘윙크’가 인기다. ‘엉클비디오타운’에서는 개봉된 지 5년 이상 된 영화를 빔프로젝터로 상영한다. 라면땅과 핫도그 같은 추억의 간식을 먹으러 이곳을 찾는 청년들도 적지 않다. 낡은 옛 건축물도 ‘힙’한 공간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종로구 서대문여관과 보안여관은 30년이 넘은 여관 건물의 외관은 그대로 유지한 채 내부를 전시회장, 게스트하우스로 꾸몄다. 부티크 호텔로 변신한 종로구 여관 ‘낙원장’에 묵은 이정미 씨(24·여)는 “요즘 호텔에 비해 낡고 허름하지만 객실에 LP 플레이어가 있어 옛날 느낌이 물씬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트렌드 분석가인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은 “기성세대는 복고에서 추억을 떠올리지만 젊은 세대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움’에 열광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신규진 newjin@donga.com·조종엽 기자}

21일 서울 성북구의 한 롤러장. 1990년대 인기그룹 ‘듀스’의 ‘나를 돌아봐’가 흘러나오자 30여 명이 환호했다. 이 노래가 나온 1993년에 태어난 김민영 씨(25·여)는 익숙한 듯 팔과 다리를 휘저었다. 김 씨는 “유튜브로 당시 공연을 찾아보면서 춤을 익혔다”며 “옛날 감성을 느낄 공간을 찾다보니 일주일에 한 번씩 이곳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추억팔이’로 소비되던 복고문화가 최근 10대와 20대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중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했던 복고 열풍과는 다르다. 경험하지 못한 옛 것에 열광하는 청년들이라는 점에서 ‘뉴트로(New-Tro·새로움과 레트로를 합친 신조어)’ ‘영트로(Young-Tro)’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1970, 80년대를 주름잡던 롤러장은 1990년대 사라졌다 지난해부터 젊은이들에게 ‘핫’한 공간이 됐다. 청남방에 청바지 등 ‘청청패션’이나 교련복을 입고 오는 손님들도 적지 않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복고 컨셉으로 롤러장 인증사진을 올리는 문화도 자리 잡았다. 이날 롤러장을 찾은 김민지 씨(22·여)는 “복고 의상의 ‘성지’인 광장시장에는 영화 ‘써니’ 사진들을 붙여놓고 청바지 등을 팔고 있다”고 했다. 음악영화로 국내 최대인 830만 명을 동원한 영화 ‘보헤미안 렙소디’의 흥행도 청년층의 영향이 컸다. CGV리서치센터에 따르면 관람객 가운데 20·30대 비중은 60%에 육박한다. ‘싱어롱(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 문화에 대한 반응도 폭발적이다.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2002년 월드컵처럼 세대를 초월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한 사회적 이벤트가 없었다”며 “무한 경쟁에 익숙한 젊은층이 극장에서 ‘싱어롱’을 하고 함께 어울리는 경험이 새로웠던 것”이라고 말했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일렉트로닉댄스뮤직(EDM)을 비롯해 비트 중심의 음악을 향유했던 젊은이들에게 멜로디가 강하고 중독성 있는 퀸의 노래가 신선하게 다가갔을 것”이라고 했다. 옛 것에 대한 젊은이들의 관심은 개화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구한말 컨셉트 사진으로 지난해 문을 연 대구의 산격동사진관은 1년 만에 서울과 부산에 진출했다. 노웅희 대표는 “복고 의상을 대여해주다보니 호기심 많은 청년들이 주로 사진관을 찾는다”며 “개화기 의상은 전통한복과 다르게 남성 고객들도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남성은 깔끔한 쓰리피스 슈트에 붉은 계열의 넥타이를 매고, 여성은 프릴 장식이 달린 붉은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는다. 종로구 익선동은 그야말로 옛 것의 향연이다. 22일 ‘최신게임없음’ ‘16비트칼라’ 등이 써 붙여진 ‘콤콤오락실’에서 10여 명의 젊은이들이 테트리스, 뿌요뿌요 등 고전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김종민 씨(20)는 “그래픽 좋은 요즘 게임들보다 흥미롭다”며 “‘슈퍼컴보이’를 집에 놓고 친구들과 게임을 하는 것도 취미가 됐다”고 했다. ‘만홧가게’에서는 추억의 만화 월간지 ‘챔프’, ‘윙크’가 인기다. ‘엉클비디오타운’에서는 개봉된 지 5년 이상 된 영화를 빔프로젝터로 상영한다. 라면땅과 핫도그 같은 추억의 간식을 먹으러 이곳을 찾는 청년들도 적지 않다. 낡은 옛 건축물도 ‘힙’한 공간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종로구 서대문여관과 보안여관은 30년이 넘은 여관 건물의 외관은 그대로 유지한 채 내부를 전시회장, 게스트하우스로 꾸몄다. 부티크 호텔로 변신한 종로구 여관 ‘낙원장’에 묵은 이정미 씨(24·여)는 “요즘 호텔에 비해 낡고 허름하지만 객실에 LP 플레이어가 있어 옛날 느낌이 물씬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트렌드 분석가인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은 “기성세대는 복고에서 추억을 떠올리지만 젊은 세대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움’에 열광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신규진기자 newjin@donga.com조종엽기자 jjj@donga.com}
크리스마스트리의 기원이 유라시아의 신목(神木) 신앙이라는 설명을 읽었습니다. 유목민족인 훈족이 5세기에 게르만족을 밀어낼 때 그들의 신목 신앙을 전파했다는 겁니다. 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트리의 연원을 북게르만이라고 여깁니다. 실제 게르만 신화의 영웅 지크프리트의 아내 크림힐트는 남편이 살해당한 뒤 훈족의 왕 아틸라와 재혼하지요. 트리 맨 위에 다는 큰 별은 유목민의 길잡이 별 북극성이라는군요. 신간 ‘유라시아 신화여행’(최혜영 등 지음·아모르문디)에서 김윤아 이야기공작소 ‘파수’ 대표가 소개한 내용입니다. 산타할아버지가 순록들이 끄는 썰매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도 같은 맥락이랍니다. 하늘로 비상하는 사슴은 신화의 모티브로 하늘과 땅을 관통하고 연결하는 ‘세계 축’에 해당한답니다. 사슴뿔은 나무와 모양이 비슷하지요. 전통시대 마을 어귀마다 있던 서낭당의 금줄 두른 나무와 크리스마스트리의 연원이 같다니…. 신화로 보면 우리 명절이니 해외 명절이니 따지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서울’이다. 서울에 사회 각 분야의 자원이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행정수도 이전이 정국을 가르고, 새 신도시가 서울에서 얼마나 가까운지가 주요 이슈가 되고, 대학의 ‘인(in) 서울’ 여부를 따지기도 한다. 한마디로 ‘서울 공화국’이다. 그런 서울의 1960, 70년대 사회사를 문학 작품을 통해 들여다본 책이다. “서울은 넓다. … 그러나 이렇게 넓은 서울도 삼백 칠십만이 정작 살아 보면 여간 좁은 곳이 아니다. 가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꽉꽉 차 있다.”(이호철, 1966년 동아일보 연재소설 ‘서울은 만원이다’에서) 오늘날과도 별로 다르지 않은 서울의 이미지다. 당시 사람들이 ‘진짜 서울’로 생각한 지리적 반경은 ‘사대문 안’이었다. “서울에서도 문밖이란다. 서울이랄 것도 없지.”(박완서, ‘엄마의 말뚝’에서) 저자는 “1960년대 중반까지도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서울의 반경은 식민지 시기의 일제가 계획한 ‘대경성’ 지역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 좁은 서울로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이촌향도’의 1차적 요인은 먹고살기 위해서였지만, 문화적 정서적 욕구를 충족하려는 욕망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서울을 향한 향수병, 전도된 노스탤지어”가 생겨난 것. “서울 생활에서의 탈락은 곧 삶의 한 모서리가 무너지는 것이며 자기를 지탱하고 있는 끈이 끊어져 내리는 것과 같다는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었다.”(최일남, ‘서울의 초상’에서) 소설가 이청준(1939∼2008)도 직접 쓴 자신의 연보에서 “언제까지나 이 도시의 자랑스러운 시민으로서 영구불변한 나의 소지(巢地·둥지가 있는 곳)를 마련할 결심이었다”고 했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의 인물들 역시 ‘서울에 대한 동경과 갈망’을 앓는다. 그러나 ‘세련된 서울내기’는 밖에서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했다. 진짜 서울 사람이란 “이리저리 부대끼고 씻기다 보면 간덩이도 붓고 몽글몽글하게 모가 없어져서 적당히 닳아빠진”(서울의 초상) 이들을 뜻했다. 6·25전쟁 이후 경제적 궁핍이 낳은 아귀다툼 탓이다. 저자는 “단언컨대 1960년대나 지금이나 서울 사람은 서울 토박이가 아니다. 토박이의 목소리는 거의 힘을 내지 못했다”면서 “상경민(上京民)과 월남민, 비서울 출신이 서울 인구의 대다수였다”고 말했다. 서울 사람의 정체성은 이주민, 곧 떠돌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어 개발의 시대를 맞이한 1960년대 후반의 서울, 1970년대 강남 개발과 중산층의 등장을 조명하면서 서울의 초상을 그려나간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이나 1971년 주민들이 정부의 무계획적인 도시 정책과 졸속 행정에 반발해 지역을 점거한 ‘광주대단지 사건’ 등도 당대의 문학 텍스트를 통해 책에 담았다. 성공회대 학술연구교수인 저자는 기존 문화연구가 서양의 근대화와 유사한 부분이나 그보다 열등한 부분들을 취사선택해 보고 싶은 부분만 바라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역사적 체험과 생활의 실감’ 속에서 서울의 도시문화사와 사회사를 그려볼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작가 16인의 소설 110여 편을 사료처럼 활용하면서도, 실제 현실과 문학이 재현한 현실 사이에서 긴장을 잃지 않는다. 그 결과 역사책도 아니고 문학책도 아니면서, 둘 다인 흥미로운 책이 태어났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