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차장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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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차장입니다.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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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7~202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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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문안교회 이상학 목사 “영성과 생명의 새 성전 거듭날 것”

    1887년 9월 서울 중구 정동 한 한옥에서 언더우드 선교사(1859∼1916)의 주재 아래 한국의 첫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창립했다. 서울 도심에서 132년 동안 근현대사를 지켜보고 여러 위인을 낳은 이 교회가 1972년 건축한 기존 건물을 허물고 여섯 번째 예배당을 최근 완공했다. 2017년 가을 새문안교회에 부임한 이상학 담임목사(55)는 “새 예배당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하다고 자평한다”며 “새문안교회가 더 큰 책임성을 가지게 됐다는 걸 절감하고 있다”고 10일 말했다. 새 예배당은 대지 면적 약 4200m²(약 1270평), 연면적 약 3만1900m²(약 9650평)에 지하 6층, 지상 13층 규모로 2300석의 대예배실과 교육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기존 건물은 본당이 1000석 규모여서 출석한 교인 5000여 명이 5부로 나눠 예배를 봐야 했지만 재개발 구역이어서 증축이나 리모델링은 불가능했다. 새 교회 건물 1층 새문안홀은 주민과 사회를 향해 문을 열어놓고 공연장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널찍한 교회 마당 역시 인도와 구분 없이 개방돼 있다. ―새 건물 외관이 화려해 보인다. “밖에서 보면 어머니가 팔을 벌린 듯한 조형미가 있고, 웅장하고 화려해 보일 수 있지만 안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외벽 마감재(사비석)를 비롯해 저렴하고 실용적인 자재를 썼다. 신축을 계기로 책임을 절감하며 더욱 진정한 마음으로 사회에 다가갈 것이다.” ―새문안교회 역사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는다면…. “복음과 민족, 백성의 만남이다. 1885년 4월 5일 인천에 입국한 언더우드 선교사가 토착 기독교인들을 만나 교회를 세웠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언더우드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당을 만나 서구 문물에 눈떴고, 언더우드 선교사의 손에서 자란 우사 김규식 박사가 독립운동을 벌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 축이 됐다. 한국의 백성이 고통스러운 나락에 떨어져 돌파구를 찾을 때 선교사의 복음이 영적 상상력과 구원의 출구를 제공했을 것이다.” ―1919년 당시 인구의 2%도 안 됐던 기독교인이 3·1운동을 이끌었던 바탕은…. “평안도 중심의 민초적 기독교와 기호지방을 중심으로 한 선각자적 기독교가 있었는데, 3·1운동 당시 절묘하게 만나 상승 작용을 일으켰다고 본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경건한 기독교인을 기르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임무지만 예수, 나라, 민족 사랑이 합쳐진 한국 초기 기독교회로부터 배울 점이 오늘날도 있다. 새문안교회는 어려움에 처한 한국 백성을 구하기 위해 교육과 계몽, 문화 사업을 펼쳤다. 애국 애족하는 신앙을 아름답게 이어 가겠다. 좋은 ‘임팩트’를 주는 신앙의 선각자를 키우고 싶다.” ―교회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싶은지…. “영성과 생명이 내 화두다. 기계 문명의 극단화 속에 영성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종교의 본질은 결국은 절대자와의 만남이라고 본다. 그것을 돕고자 한다. 반생명적이고 반인격적인 현대 문명 속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캠페인도 벌이고 싶다.” ―최근 종교인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더 탐욕스러운가’ 같은 비판이 나오는 게 부끄럽지만 사실무근도 아니다. 자성해야 한다. 또 한국은 모든 고등 종교에 치병, 기복 같은 샤머니즘의 영향이 있다. 이런 요소를 극복해야 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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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폭력-테러-여성 차별 그게 정말 이슬람일까

    이슬람과 무슬림을 주제로 20년 가까이 글을 써 온 미국인 저널리스트가 세계적 이슬람 학자 아크람 나드위를 찾아가 ‘꾸란 읽기’를 제안하고, 이슬람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함께 떠난 여정을 담았다. 아크람에 따르면 이슬람 원리주의는 무함마드가 전한 신의 계시와는 많은 면에서 다르고, 자살 폭탄 테러 역시 ‘알라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초기 이슬람교는 여성을 존중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여성의 자유를 인정했다. 이슬람 여성이 몸을 감싸는 베일 역시 알라의 가르침과 무관한 중동, 근동의 문화에 불과하다고 한다. 저자는 자신이 만난 대다수의 무슬림은 서구 문화와 함께 과격한 이슬람주의자에게 맞서는 이중의 짐을 지고 있다고 했다. 폭력은 꾸란이 아니라 인간의 율법이 낳았다는 것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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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계 “태아의 생명권 부정 유감”… 여성계 “여성의 권리 존중받게 돼 환영”

    “방어능력 없는 태아의 생명권 부정 유감”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 대해 천주교와 개신교 등 종교계에서는 “태아의 기본 생명권을 부정한 것”이라며 깊은 유감을 표시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1일 의장 김희중 대주교 명의로 낸 자료를 통해 “낙태는 태중의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죄이며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교회의 가르침에는 변함이 없다”며 “이번 결정은 수정되는 시점부터 존엄한 인간이며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존재인 태아의 생명권을 부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천주교회는 지난해 3월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는 신자 100만 명의 서명을 받아 헌재에 전달하기도 했다. 주교회의는 또 “헌재 결정은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고착시키고 남성에게서 부당하게 면제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도 이날 대변인 허영엽 신부 명의의 입장문을 통해 헌재 결정에 유감을 표시했다. 서울대교구는 “관련 후속 입법이 신중하게 이뤄져 임신한 여성과 태아의 생명 모두를 지킬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개신교계를 비롯해 79개 단체가 모인 ‘낙태죄 폐지 반대 전국민연합’도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의 존중이라는 헌법 정신에 입각해 볼 때 낙태죄는 존치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낙태죄는 태아의 생명권뿐 아니라 여성의 건강권을 지켜주고,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전적인 책임으로부터 보호하는 법”이라며 “낙태가 허용되면 그로 인한 의료 보건적 부작용, 정신적 피해가 더욱 전적으로 여성들에게 전가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교회언론회도 이날 “헌재의 결정은 생명 존엄성을 경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갈 것이어서 매우 걱정스럽다”고 논평을 냈다.“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 존중받게 돼 환영”“여러분, ‘헌법불합치’가 나왔습니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소식이 전해진 11일 오후 2시 50분경 서울 종로구 헌재 앞에서는 ‘와’ 하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낙태공동행동)이 이날 오전 일찍부터 주최한 낙태죄 위헌판결 촉구 집회에 참여한 300여 명은 서로 부둥켜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감격해 눈물을 흘리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문설희 낙태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은 “오늘은 정말 역사적인 승리의 날”이라며 “그동안은 경제개발과 인구관리라는 명목으로 낙태죄를 처벌했지만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참가자들은 ‘낙태죄는 위헌이다, 우리는 승리했다’ ‘역사는 진보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오후 3시 50분까지 자리를 지켰다. 배복주 장애여성공감 대표는 “여성이 자신의 몸과 건강에 대한 권리를 존중받을 기회가 생긴 것”이라며 헌재의 결정을 반겼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이날 논평을 내고 “유엔 여성차별위원회는 ‘안전하지 않은 여성의 임신중절이 모성 사망과 질병의 주요 원인’이라며 낙태 합법화를 한국 정부에 권고한 바 있다”며 “이런 측면에서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은 타당하다”고 밝혔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도 논평을 통해 “여성들은 그들의 삶을 옥죄던 잔혹하고 굴욕적인 족쇄 하나를 벗어던졌다”며 헌재의 결정을 환영했다. 법안과 제도 마련 등 후속 조치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위헌이 아닌 헌법불합치 결정이기 때문에 임신중절의 허용범위와 시기, 사유 등이 국회의 법개정과 입법후속조치에서 치열한 쟁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김은지 기자 eunji@donga.com}

    • 2019-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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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계 “낙태죄 헌법불합치 유감…태아의 기본 생명권 부정한 것”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 대해 천주교와 개신교 등 종교계에서는 “태아의 기본 생명권을 부정한 것”이라며 깊은 유감을 표시하고 나섰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1일 의장 김희중 대주교 명의로 낸 자료를 통해 “낙태는 태중의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죄이며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교회의 가르침에는 변함이 없다”며 “이번 결정은 수정되는 시점부터 존엄한 인간이며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존재인 태아의 생명권을 부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천주교회는 지난해 3월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는 신자 100만 명의 서명을 받아 헌재에 전달하기도 했다. 주교회의는 또 “헌재 결정은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고착시키고 남성에게서 부당하게 면제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주교회의는 “잉태된 생명을 보호하는 일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맡겨진 책임”이라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생명을 잉태한 여성과 남성이 태아의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선택하도록 도와줄 법과 제도의 도입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말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도 이날 대변인 허영엽 신부 명의의 입장문을 통해 헌재 결정에 유감을 표시했다. 서울대교구는 “관련 후속 입법이 신중하게 이뤄져 임신한 여성과 태아의 생명 모두를 지킬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개신교계를 비롯해 79개 단체가 모인 ‘낙태죄폐지반대전국민연합’도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의 존중이라는 헌법 정신에 입각해 볼 때 낙태죄는 존치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낙태죄는 태아의 생명권 뿐 아니라 여성의 건강권과 자기결정권을 지켜주고,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전적인 책임으로부터 보호하는 법”이라며 “낙태가 허용되면 그로 인한 의료 보건적 부작용, 정신적 피해, 사회적 비용이 더욱 전적으로 여성들에게 전가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또 “낙태죄는 낙태를 하게 만드는 남성들의 비양심과 비도덕적 행동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묻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며 “만일 낙태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남성들은 더욱 책임질 수 없는 임신에 대해 면죄부를 갖고 안일하게 행동할 것이며, 여성들은 무책임한 남성들과 사회의 무관심에 빠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 2019-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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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시정부는 암울한 일제강점기 민족의 ‘희망자본’이었다”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다. ‘뿌리 깊은 나무’의 100번째 생일을 축하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고민이 필요할까. 백범 김구와 현대사 연구에 정통한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61),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과 한국사회학회장을 지낸 박명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64)가 5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머리를 맞댔다.》 ―우리 역사에서 임정의 의미는…. ▽박명규=암울한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희망 자본’, ‘상징 자본’이었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뜻을 둔 인사들에게 임정은 늘 정신적 구심점이었다. 학도병으로 끌려간 김준엽과 장준하가 일본군을 탈출한 뒤 한국광복군을 찾아간 것도 임정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민중이 공화국의 주권자라는 개념이 명료하게 헌정 원리로 자리 잡은 것도 임정이 시작이고, 제헌헌법으로 이어졌다. ▽도진순=임정 수립의 바탕이 된 3·1운동은 독립운동사에서 거대한 수원(水源)과 같다. 농민, 여성, 노동자, 학생의 대각성이 생겨났고, 이들이 독립운동의 물결로 일어났다. ―100주년 맞아 관련 행사도 많았다. ▽박=3·1운동과 임정의 가치를 알리는 건 뜻깊은 일이다. 양적으로 많은 행사가 있었던 것은 좋으나 질적 풍성함에서는 아쉬움이 있다. 세계적 평화질서 구축과 3·1운동을 연결하는 시야의 확장이 필요하다. 100주년을 맞아 토론의 쟁점들이 새로 생겨야 앞으로도 주요 화두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도=대통령직속 100주년 기념위의 최근 학술포럼 제목이 ‘3·1운동에서 촛불혁명으로, 임정 수립에서 통일 한반도로’다. 일부에서 3·1운동을 ‘혁명’으로 호명하면서 ‘촛불혁명’과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강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임정을 통일과 연결짓기 위해서는 임정이 지난날 광복 직후 국내에 들어와 좌우·남북이 대립하는 국면에서 어떤 한계가 있었는지 성찰해 보는 것이 도리라 생각한다. ▽박=‘3·1혁명’이냐 ‘3·1운동’이냐는 표현 문제는 최근 불거진 게 아니다. 제헌헌법 초안도 ‘기미삼일혁명’으로 출발했다. 최근 3·1운동을 민족적 저항뿐 아니라 민중의 각성, 민주주의와 공화정의 기원으로 조명하면서 혁명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일리가 있다. 다만 논의가 자연스럽게 쌓여가면서 시대적인 규정으로 용어가 자리 잡는 것인 만큼 학계의 토론을 더 할 필요가 있다. 주체들의 다양한 면모와 성격을 드러내는 작업도 함께 이어졌으면 한다. ▽도=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 3·1운동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해 일면적 파악이 심했다. 2·8독립선언서나 기미독립선언서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과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낭만적인 인식이 보인다. 폴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제국들이 1차대전으로 무너지니, 폴란드는 1918년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곧바로 독립했다. 이처럼 임시정부는 정당과 달리 투표 등으로 국민의 주권을 확인해야 해 5년 정도의 길지 않은 기한을 예상하고 수립된다. 그러나 두루 지적하다시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전승국 식민지에는 해당되지 않았고, 동아시아에서 일제의 힘은 더 강해졌다. 임정은 수립 5년도 채 안 돼 해체론 등 대대적인 위기에 봉착했다. ▽박=기미독립선언서는 다소 원론적으로 느껴져도 문명론적 지향이 뚜렷해서 그만큼 긴 울림을 갖는다.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형태로 독립운동을 추구한 것도 1930년대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협력, 카이로 회담 등 전후 처리 의사 결정에 한국의 의지를 관철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됐다. 그런 점에서 임정이라는 조직 형태를 지킨 것은 타당했다고 본다. 임정이라서 명분이나 국제적으로 잠정적 대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그나마 가졌던 것 아니었을까. ▽도=우리가 국제 정세를 낙관적으로 오판한 것이 1919년만은 아니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에 기운 시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백범일지’나 ‘안응칠 역사’, 2·8독립선언에도 그런 구절이 나온다. 2차대 전 종전으로 광복되자 마찬가지 실수를 했다. 물러가는 일본만 보고 ‘해방’이라 낙관했지만, 곧바로 신탁통치가 거론되고 분할 점령된 국제 정세를 당면하게 된다. 이러한 엄중한 정세를 직시했더라면 좌우대립이나 정권 투쟁이 실제보다 덜했을 것이다. ▽박=임정은 30년 가까운 실천의 물줄기다. 다양한 흐름이 합류했고 시대에 따라 형태도 변했다. 이를 마치 결집된 단일한 정부 캐비닛 조직으로 이해하는 건 잘못이다. 정통론적 시각으로 접근해 임정 이외의 운동이나 세력, 주체 조직을 평가절하하거나 비정통을 가르고 배제하는 시각은 넘어서야 한다. ▽도=전적으로 동의한다. 협애한 정통론으로는 항일독립운동의 폭과 깊이, 해방 정국의 역동성을 포괄할 수 없다. 광복 직후 중국 충칭에선 임정 내부에서도 해산론이 거론됐다. 백범은 1945년 당시 개천절인 11월 7일 중국 상하이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서 연합국에 부끄럽고 감사하다”는 연설을 했다. 귀국 이후 임정법통론의 강화를 추진했지만 남한 내 인민공화국 세력과 좌파, 미군정, 북한의 김일성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등 3면으로 대립했다. 우파 내의 이견도 있었다. 결국 미군정의 자문기관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으로 흡수돼 버린다. 김창숙 선생은 이를 ‘임정에 의한 임정의 해소’라고 했다. 정당과 달리 정부 형태는 합작과 연대가 만만치 않다. ―오늘날 정세 인식을 어떻게 해야 하나. ▽도=한반도를 분단체제로 바라보면 ‘통일’이 목표가 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더 위력적인 것은 북-미 대립을 축으로 하는 정전체제다. 동서독과 달리 우리는 전쟁을 치렀다. 정전체제에서는 정치, 군사, 안보가 가장 중요하다. 개성공단 같은 경제협력도 앞으로는 정치군사적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박=남북한은 유엔 회원국이다. 만약 북-미 간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고 평화협정이 맺어진다면 북한이 가진 국가로서의 지위, 성격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분단국체제’라는 인식 틀을 제안한다. 성격이 매우 다른 두 분단국가가 어떻게 공존하고 평화를 만들어 갈 것인가에 관한 규율과 틀을 마련할 준비를 해야 한다. ▽도=“진정한 선구자들은 미래뿐만 아니라 잊혀진 과거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는 사람이다”는 보르헤스의 구절을 좋아한다. 3·1운동과 임정 100주년이 과거에 대한 일방적인 찬양이 아니라, 현실을 더욱 직시하게 하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화두를 끄집어낼 수 있게 반성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박=100주년을 마무리한다는 느낌보다 새 100년을 준비한다는 마음이 필요하다. 미래를 향한 열린 감수성으로 이어져야 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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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시정부는 암울한 시대 우리 민족의 ‘희망자본’이었다”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다. ‘뿌리 깊은 나무’의 100번째 생일을 축하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고민이 필요할까. 백범 김구와 현대사 연구에 정통한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61),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과 한국사회학회장을 지낸 박명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64)가 5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머리를 맞댔다.―우리 역사에서 임정의 의미는?▽박명규=암울한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희망 자본’, ‘상징 자본’이었다. 민중이 공화국의 주권자라는 개념이 명료하게 헌정 원리로 자리 잡은 것도 임정이 시작이고, 제헌헌법으로 이어졌다.▽도진순=임정 수립의 바탕이 된 3·1운동은 독립운동사에서 거대한 수원(水源)과 같다. 농민, 여성, 노동자, 학생의 대 각성이 일어났고, 이들이 독립운동의 물결로 일어났다.―100주년 맞아 관련 행사도 많았다.▽박=3·1운동과 임정의 가치를 알리는 건 뜻 깊은 일이다. 양적으로 많은 건 좋지만 질적 풍성함에서는 아쉬움이 있다. 세계적 평화질서 구축과 3·1운동을 연결하는 시야 확장이 필요하다. 100주년을 맞아 토론의 쟁점들이 새로 생겨야 앞으로도 주요 화두로 자리 잡을 텐데, 마치 말끔하게 결론을 맺으려 했던 건 아쉽다.▽도=대통령 직속 100주년 기념위의 최근 학술포럼 제목이 ‘3·1운동에서 촛불혁명으로, 임정수립에서 통일 한반도로’다. 일부에서 3·1운동을 ‘혁명’으로 호명하면서 ‘촛불혁명’과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강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임정을 통일과 연결짓기 위해서는 임정이 지난날 해방 직후 국내에 들어와 좌우·남북이 대립하는 국면에서 어떤 한계가 있었는지 성찰해보는 것이 도리라 생각한다.▽박=‘3·1혁명’이냐 ‘3·1운동’이냐는 표현 문제는 최근 불거진 게 아니다. 제헌헌법 초안도 ‘기미삼일혁명’으로 출발했다. 최근 3·1운동을 저항 뿐 아니라 민중의 각성, 민주주의와 공화정의 기원으로 조명하면서 혁명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만 논의가 자연스럽게 쌓여 가면서 시대적인 규정으로 용어가 자리 잡는 것인데, 너무 100주년에 맞추려하는 조급함이 느껴진다. 오히려 주체들의 다양한 면모와 성격을 드러내는 작업으로 이어졌으면 한다.▽도=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 3·1운동 당시 국제정세에 대해 일면적 파악이 심했다. 2·8독립선언서나 기미독립선언서에는 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과정과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낭만적인 인식이 보인다. 폴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제국들이 1차 대전으로 무너지니, 폴란드는 1918년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곧바로 독립했다. 이처럼 임시 정부는 정당과 달리 투표 등으로 국민의 주권을 확인해야 해 5년 정도의 길지 않은 기한을 예상하고 수립된다. 그러나 두루 지적하다시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전승국 식민지에는 해당되지 않았고, 동아시아에서 일제의 힘은 더 강해졌다. 임정은 수립 5년도 채 안 돼 해체론 등 대대적인 위기에 봉착했다.▽박=지도부가 최적의 정치적 효과를 얻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내지 못한 한계는 있다. 그러나 3·1운동에서 지도부의 역할은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다소 추상적이고 원론적으로 느껴져도 그만큼 긴 울림을 갖는다. 결과론이지만 1930년대 중국 국민당정부와의 협력, 카이로 회담 등 전후 처리 의사결정에 한국의 의지를 관철하고자 하는 노력 측면에서는 임정이라는 조직형태를 지킨 것이 타당했다고 보인다. 임정이라서 명분이나 국제적으로 잠정적 대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그나마 가졌던 것 아니었을까.▽도=우리가 국제 정세를 낙관적으로 오판한 것이 1919년만이 아니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에 기운 시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백범일지’나 ‘안응칠 역사’, 2·8독립선언에도 그런 구절이 나온다. 2차대전 종전으로 광복되자 마찬가지 실수를 했다. 물러가는 일본만 보고 ‘해방’이라 낙관했지만, 곧바로 신탁통치가 거론되고 분할 점령된 국제정세를 당면하게 된다. 이러한 엄중한 정세를 직시했더라면 좌우대립이나 정권 투쟁이 실제보다 덜했을 것이다.▽박=임정은 30년 가까운 실천의 물줄기다. 다양한 형태로 변했고, 여러 세력들이 들어오고 나가기도 했다. 이를 마치 결집된 단일한 정부 캐비닛 조직으로 이해하는 건 잘못이다. 정통론적 시각으로 접근해 임정 이외의 운동이나 세력, 주체 조직을 평가절하하거나 비정통을 가르고 배제하는 건 좋지 않다.▽도=전적으로 동의한다. 협애한 정통론으로는 항일독립운동의 폭과 깊이, 해방 정국의 역동성을 포괄할 수 없다. 해방 직후 중국 충칭에서 임정 내부에서도 해산론이 거론됐다. 귀국 이후 임정법통론의 강화를 추진했지만 남한 내 인민공화국 세력과 좌파, 미군정, 북한의 김일성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등 3면으로 대립했다. 우파 내의 이견도 있었다. 결국 미군정의 자문기관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으로 흡수돼 버린다. 김창숙 선생은 이를 ‘임정에 의한 임정의 해소’라고 했다. 정당과 달리 정부 형태는 합작과 연대가 만만치 않다.―오늘날 정세 인식을 어떻게 해야 하나?▽도=한반도를 분단체제로 바라보면 ‘통일’이 목표가 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더 위력적인 것은 북미대립을 축으로 하는 정전체제다. 분단체제론에서는 흔히 문화 경제 스포츠 등이 풀리면 정치·군사·안보 문제도 풀릴 수 있다고 본다. 경제협력을 강화하면 평화통일이 된다는 평화경제론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정전체제에서는 정치, 군사, 안보가 가장 중요하다. 동서독과 달리 우리는 전쟁을 치렀다. 개성공단 같은 경제협력도 앞으로는 정치군사적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박=남북한은 유엔 회원국이다. 북한은 북핵문제를 둘러싼 국제 협상에도 주권체로 참여하고 있다. 만약 미국 북한 간 평화협정이 맺어진다면 북한이 가진 국가로서의 지위, 성격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남북한을 성격이 다른 두개의 분단국가가 국가라는 실체로서 대립하고 있다고 냉정히 보는 것이 필요하다. ‘분단국체제’라는 인식 틀을 제안한다. 성격이 매우 다른 두 분단국가가 별개의 국가라는 걸 인정하고 어떻게 공존하고 평화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관한 합의된 규율과 틀을 마련할 준비를 해야 한다. ▽도=“진정한 선구자들은 미래뿐만 아니라 잊혀진 과거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는 사람이다”는 보르헤스의 구절을 좋아한다. 3·1운동과 임정 100주년이 과거에 대한 일방적인 찬양이 아니라, 현실을 더욱 직시하게 하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화두를 끄집어낼 수 있게 반성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박=옳다. 100주년을 이벤트와 잔치로 끝내서는 안 된다. 미래를 여는 감수성으로 확장해야 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 약력△1993년 서울대 국사학 박사 △1993년 창원대 사학과 교수 △1995년 국회 법제사법위 산하 백범김구선생시해진상규명위 전문자문위원 △1998년 참여연대 운영위원 △2001년 미국 하버드대 객원교수 △2002년 창원대 박물관장 △2006년 한국사연구회 이사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 △2007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 박명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약력△1991년 서울대 사회학 박사 △1983년 전북대 사회과학대 교수 △1994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2002~2004년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소장 △2011년 국립대학법인 서울대 이사 △2014년 대통령직속 통일준비위원회 사회문화분야 민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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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은 민주-공화주의를 향한 세계사적 흐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우리 민족만의 외로운 투쟁이 아니었으며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라는 새로운 세계적 사조와 걸음을 같이하며 일어난 것이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도형)이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하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민주·공화주의의 세계사적 의미와 동아시아 독립운동의 전개’가 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김 이사장은 이날 환영사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민주·공화주의가 한국이나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멀리 아일랜드와 핀란드, 터키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확산됐다”고 강조했다. 김 이사장은 또 “이런 국제적인 정세와 변화는 1920년 창간한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국내에 알려졌고, 이를 통해 민주·공화주의 논의가 심화되고 한국 민족주의 운동도 더 성장할 수 있었다”면서 “오늘 학술회의가 동아일보의 후원으로 이뤄지는 건 이런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덧붙였다. 퍼걸 맥게리 영국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퀸스대 교수는 이날 발표에서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들의 독립선언문은 3·1독립선언서와 마찬가지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수사가 물씬 녹아있다”며 “아일랜드와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세계사 속에서 동일한 사상적 순간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허우중쥔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연구원은 “중국 역시 1919년 5·4운동으로 불평등조약 폐지 주장이 정치 엘리트에서 대중까지 널리 퍼져 나갔고,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독립과 건국 사상이 선명해졌다”고 말했다. 장인성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독립선언서의 평화사상과 세계주의에 착목하면서 동아일보의 1925년 5, 6월의 사설을 소개했다. 그는 “사설은 ‘동양의 단결과 평화는 각 민족의 권리와 희망을 존중하고 평등한 지위에서 자유로운 정신으로 연합하는 데 있다’고 했다”고 말했다. 본보 사설은 또 지리적, 역사적 ‘자연 상태’에 따라 “조선인은 조선에서 조선인으로 살 것이고, 일본인은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살아야 한다”면서 그러지 않으면 서로의 번영을 해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광 국사편찬위원장은 이날 축사에서 “3·1운동의 역사적 의미가 언제나 ‘현재적 사건’으로 이 땅에 자리 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학술회의는 이 밖에도 미즈노 나오키 일본 교토대 명예교수,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윤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신효승 서종진 장세윤 동북아재단 연구위원이 발표했고 안영배 동아일보 논설위원 등이 토론자로 나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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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년 임정 예산 57만 위안… 64%가 독립투쟁 위한 軍費

    《 100년 전 오늘 중국 상하이에서 첫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렸다. 이후 임정은 오늘날 정부가 국회에 하는 것처럼 임시의정원에 예산안을 제출하고 승인받았다. 국회 예산정책처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임시정부·임시의정원 예산 문서를 분석한 결과 중일전쟁 발발 이듬해 1개 연대를 창설하고자 했던 임정의 군사비 예산 책정 규모와 해외동포 성금 등 새로운 면모가 확인됐다.》1938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예산의 60% 이상을 조국 독립을 위한 군비(軍費)로 편성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 미주 동포 등이 보내온 독립성금은 임정 운영에 실제로 큰 힘이 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9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개원(10일) 및 임시정부 수립(11일) 100주년을 앞두고 1935년 이후 임정이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예결산서 중 일부를 분석한 결과를 내놨다. 예산정책처는 “임정은 임시의정원의 예산안 심사와 확정, 정부의 집행, 회계검사·결산 등 체계적 재정 체계를 갖췄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예산정책처는 1938년 임정이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세입세출 예산서 총액은 57만8867.88위안이었다고 밝혔다. 계산 방식에 따라 다르지만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당시 환율과 하급 공무원 임금 수준 등으로 보아 이를 오늘날 60억 원 정도 가치로 추정했다. 임정은 이 가운데 63.9%에 이르는 37만 위안(약 38억 원)을 군비와 군훈비(軍訓費·군사훈련비)로 편성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임정은 1000명 규모의 1개 연대와 장교 200명을 양성해 일제와 전쟁을 벌이고자 했던 것이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임정은 당시 만주에서 독립군을 지휘했던 지청천 유동열 장군 등으로 급히 군사위원회를 꾸리고 군사사업비를 편성했다”면서 “그러나 임정이 중국 창사에서 광저우 류저우로 피란하는 비용으로 쓰였고, 바로 군을 창설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 창설했다. 예산정책처가 이번에 분석한 자료는 임시의정원 의장과 국무령을 지낸 만오 홍진 선생(1877∼1946)이 1945년 환국하며 가져온 임시의정원 문서다. 홍진 선생의 손자며느리 신창휴 씨(85)는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도 온전히 간직해 온 임시의정원 관인을 10일 국회에 기증한다. 기증식은 이날 국회에서 임시의정원 개원 100주년 기념식과 함께 열린다. 1938년 임정 예산서에는 미주, 하와이 등에 사는 동포들의 피땀 어린 독립성금이 드러나 있다. 임정은 혈성금, 애국금, 후원금 등 7만1086위안과 역시 사실상 성금인 인구세(인두세) 2600위안 등 오늘날 가치로 7억여 원(추정)의 성금 세입을 예상했다. 전체 세입 예산의 대부분은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임정을 지원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금(50만 위안)이었다. “임시정부를 후원한 미주, 하와이 동포들이라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에서 시신을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배 속에, 바다에 떨어지면 물고기 배 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백범일지’에서) 백범 김구는 만약 자신이 생전 독립한 나라에 돌아가지 못한다면 죽음의 방식은 이런 것이기를 소망한다고 1942년 썼다. 일제 탄압으로 국내 연락망인 연통제가 1921년 소멸된 뒤 해외 동포들의 후원은 임정 운영에 그만큼 긴요했다. 한편 1940년대 임시의정원 의원은 거마비 외에는 급여가 없었다고 예산정책처는 밝혔다. 의장, 부의장, 비서장, 비서 등만 급여를 받았을 뿐이다. 한시준 교수는 9일 국회도서관 주최 국제 학술 세미나에서 오늘날 ‘국회’라는 명칭이 1919년 임시의정원이 제정한 대한민국 임시헌장(헌법)에서 비롯됐다고 밝혔다. 국회는 나라마다 다양한 명칭을 사용하지만 제헌국회에도 ‘국회’라는 명칭 결정 기록이 없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국토 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이라고 규정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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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총 기자폭행, 언론자유 침해 행위”… 기자협회-방송기자연합회 성명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소속 일부 조합원이 취재 중인 기자를 폭행한 사건으로 경찰 수사를 받게 됐다.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전담 수사팀을 구성했다. 5일 경찰에 따르면 TV조선 수습기자 A 씨는 3일 오후 11시 10분경 서울 영등포경찰서 앞에서 한 지상파 방송사와 인터뷰하던 김명환 민노총 위원장에게 다가가 휴대전화로 영상을 찍었다. 하지만 곧 민노총 조합원 3명에게 가로막혔다. 조합원들은 A 씨의 휴대전화를 뺏으려다 A 씨를 밀어 넘어뜨렸다. 김 위원장이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연장을 막겠다며 경찰 저지선을 뚫고 국회 경내로 들어갔다가 체포돼 영등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풀려난 직후였다. A 씨는 집단 폭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또 3일 민노총 조합원들의 국회 경내 진입 당시 이를 취재하던 MBN 영상촬영 기자 B 씨도 민노총 조합원에게 폭행당했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한 조합원이 사다리 위에서 촬영하던 B 씨를 밀어 넘어뜨린 영상을 확인했다. B 씨는 사다리에서 떨어져 발목을 다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한국기자협회는 4일 성명을 통해 “헌법에 의해 언론 자유가 보장된 대한민국에서 단지 불편한 관계, 다른 관점의 보도라는 이유로 취재를 방해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민노총은 이번 사태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또 “집회 참가자들이 집회라는 수단을 통해 의견을 전달하는 것처럼 기자들은 집회 참가자의 목소리를 담아 현장에 없는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취재해 보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며 “폭력을 동반한 취재 방해는 국민의 알 권리를 막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방송기자연합회도 “수적 우세를 이용해 집회 취재 중인 기자를 폭행한다면 군부독재 하수인들과 다를 게 무엇이냐”며 “불만이 있다고 기자를 폭행하는 것은 언론 자유 침해”라고 비판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자유한국당 간사인 이채익 의원은 5일 영등포경찰서를 방문해 “기자들이 무차별적으로 맞았다. 경찰이 제대로 수사하는지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고도예 yea@donga.com·조종엽 기자}

    • 2019-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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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왜 국제사회 승인 못받았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왜 국제사회에서 정부로 승인받지 못했는지를 각종 외교문서를 통해 탐구한 책이다. 책에 따르면 임정 승인의 열쇠는 연합국들이 쥐었고, 그 가운데서도 미국이 핵심이었다. 미국은 국제 공동 관리하의 군정을 거친 뒤 한국을 독립시킬 계획이었고, 임정 승인의 실익이 없었다. 미국과 영국은 프랑스에서도 군정을 구상하고 있을 정도였다. 파리에 입성한 드골은 힘으로 정부 승인을 받았지만 임정은 그런 힘이 없었다.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미국 영국보다 먼저 임정을 승인하겠다는 구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관철할 힘이 없었다. 결국 임정 요인들은 광복 뒤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한신대 교수인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뒤 국제법적 원칙이 된 ‘인민자결권’으로 보면 임정의 위상을 달리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인민은 외부의 간섭 없이 정치적 지위를 자유롭게 결정할 권리를 가지며, 민족 해방 단체(임정)의 주권국가 선언은 인민자결권의 정당하고 유효한 행사로 평가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저자의 말마따나 소급 적용이다. 헌법이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정이 아니라 ‘임정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규정한 것도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합법성보다 정당성의 관점으로 임정을 조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정신 승리’가 냉혹한 국제정치를 직시하는 시야를 가린다면 우리는 또 얼마나 헤맬 것인가.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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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인터뷰]주대환 부회장 “죽산이 추진하고 인촌이 도운 농지개혁, 평등과 번영 이끌어”

    《70년 전인 1949년 4월 27일 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다섯 자에 불과한 간결한 명칭의 이 법률로 유사 이래 자기 농토를 가져 본 적이 없던 한반도의 대다수 농민이 땅을 갖게 됐다. 이 법률 이전 자작농이 경작하는 농지는 전체의 35%가량에 불과했으나 이후 92∼96%가 자작농의 소유가 됐다. ‘토지를 농민에게’라는 남로당의 슬로건이 대한민국에서 현실화된 것이다. 이 법률로 기회의 균등이 실현됐고, 신생 국가 대한민국의 유전자에는 ‘평등’의 가치가 강력하게 각인됐다. 우여곡절 끝에 그해 6월 21일 다시 국회에서 가결돼 공포된 이 법률은 ‘농지개혁법’이다. 농지개혁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 가장 큰 숙제였다. 이를 담당한 건 공산주의자였다가 광복 뒤 전향한 초대 농림부 장관 죽산 조봉암(1898∼1959)이다. 농지개혁법 통과 70주년을 맞아 주대환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을 3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농지개혁의 의미는…. “1950, 60년대 우리나라 토지 소유의 평등지수는 세계 1위였다. 그만큼 세계사로 봐도 가장 철저한 농지개혁이 이뤄졌다. 세계은행이 2003년 낸 정책 연구보고서가 있다. 건국 초기 토지 분배 상태가 평등할수록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높았다. 대토지 소유를 해체하지 못한 남미 국가들, 필리핀 등은 풍부한 자원에도 자본주의 경제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이 ‘한국은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해 심각한 불균형 성장을 해 왔던 것이 문제’라고 했다. 농지개혁은 대한민국의 유전자다.” ―농지개혁이 어째서 경제 발전에 긍정적인 효과를 내나. “평준화로 인해 교육을 받고 공부만 잘하면 성공할 수 있게 됐다. 수백 년 만에 자신의 땅을 가진 농민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가장 열심히 일하고 창의력을 발휘했다. 자립의 의지를 물려받은 자영농의 자식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현대적 학문과 과학기술,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 대농장주의 자식은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없다. 대농장에서 일하는 농업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하고 싶어도 할 곳이 없다. 그 자식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물론 우리 경제 발전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주 부회장은 “대한민국은 경자유전의 원칙을 헌법에 못 박고 출발했다”고 말했다. 농지개혁법 제정 이전 이미 건국헌법(제헌헌법)이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제86조)고 규정했다. 헌법 초안은 인촌 김성수 선생의 부탁을 받고 유진오 고려대 교수가 기초한 것이었다. 유진오는 농지개혁 등 4대 원칙을 포함한 초안을 인촌에게 건넸고, 설명을 들은 인촌은 전적으로 찬성했다. 유진오는 대지주인 인촌이 적극 찬성하자 사심 없는 그의 통찰력에 감명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인촌은 농지개혁법 제정 당시 “농지개혁은 삶의 설계를 새로 짜는 계기가 돼야 한다. 우리 민족의 도약의 기회이므로 이를 꼭 해내야 한다”고 말했다. 주 부회장은 “대한민국은 농림부 장관이었던 죽산 조봉암이 추진하고 인촌 김성수 선생이 도운 농지개혁이 성공하면서 유례없이 평등한 나라로 출발했다”고 말했다. ―농지개혁법이 통과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제헌헌법에 ‘경자유전’의 원칙을 확정한 곳이 인촌 사랑방이다. 유진오 교수는 인촌이 키운 사람이다. 최남선이 손병희 선생의 뜻을 받들어서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한 것처럼 젊은 유진오가 인촌의 뜻을 받들어 헌법을 기초했다. 그뿐만 아니라 헌법기초위원회 소속 국회의원과 전문위원 절반이 인촌을 따르는 이들이었다. 한민당의 실질적인 오너이자 호남의 대지주인 인촌이 농지개혁의 대세를 받아들이니, 다른 지주들도 꼼짝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당대인들이 농지개혁의 효과를 예상했을까. “남로당이나 동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되는 사태를 막으려고 ‘예방혁명’을 종용하던 미국, 대세를 받아들인 한민당, 주요 실행자였던 이승만과 조봉암 그 누구도 농지개혁이 가져올 심대한 효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한국이 70년 뒤 영국과 프랑스에 견줄 만한 경제대국으로 발전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비해 한국의 농지개혁은 효과가 작았다는 주장들이 있었다. “농지개혁법은 농민에게 지극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소출의 30%를 5년만 정부에 내면 소유권을 갖도록 했다. 한 해 10석이 나는 땅이라면 매년 3석씩 5년간 내라는 거다. 일제강점기 한 해 5석씩 소작료를 내던 농민이 3석씩 5년 동안만 내면 내 땅이 된다는데 누가 포기하겠는가. 지주들에게는 국채를 줬는데 전쟁 통에 인플레이션으로 휴지조각이 됐다. 그래서 지주들이 쫄딱 망했다. 북한은 1950년대 중반부터 집단농장을 만들면서 국유화했다. 그 결과는 모두 아는 바와 같다.” 주 부회장은 지난달 30일 전북 고창에서 ‘인촌 정신과 대한민국의 발전’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고 했다. 그는 “인촌은 근대 한국인의 모범이고 전형”이라면서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인촌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자들을 꼽아 달라. “이승만 김성수 신익희 조봉암 조만식 등 5명이다. 이승만 김성수는 당연하고, 해공 신익희는 임정계에서 떨어져 나와 대한민국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임정계 시각으로 보면 배신자겠지. 죽산도 조선공산당 입장에서는 배신자다. 둘 모두 미군정 정보당국에서 일주일 이상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아마 미군정 당국이 세계 정세나 미국이 가진 정보를 제공하면서 깊은 대화를 했던 거 같다. 죽산과 해공의 참여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든든해졌다. 역사는 그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북한에서 월남한 이들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 선생은 포함돼야 한다.” ―인촌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죽산을 공부하다가 인촌을 만나게 됐다. 인촌이 돌아가시기 직전 ‘죽산을 배제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정치적 유언 비슷한 말이다. 그런데 인촌 사후 죽산이 민주당 창당에서 배제되면서 진보당을 창당하고 고립돼, 끝내는 사법살인을 당했다. 인촌은 100년 전 조선 사람 가운데 실로 드물게도 근대인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 위정척사파류의 선비형 지식인이 아닌 코즈모폴리턴 세계시민이었고, 허세와는 거리가 먼 실용주의자였다. 모두가 비분강개하기만 할 때 인촌은 조용히 인재를 기르고 실질적인 일을 했다. 청년들에게는 유학비를 대서 일본이나 미국 영국에서 과학과 기술을 배워 오라고 했다. 도산 선생이 절규했다. ‘힘을 기르소서, 힘을 기르소서.’ 실력 없이 무슨 독립을 하나? 독립을 말로 하나? 도산의 절규에 가장 충실하게 답한 사람이 인촌이다.” 주 부회장은 민족의 역량을 기르기 위해서 애썼던 이들의 노력을 온당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죽산은 건국유공자 서훈을 못 받았는데…. “유족이 낸 서훈 신청을 국가보훈처가 3번이나 보류했다.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그런데 광복 뒤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약산 김원봉은 서훈 움직임이 일고 있다. 아주 잘못된 얘기다. ‘건국’훈장이다. 독립운동뿐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했느냐도 평가해야 한다. 약산의 서훈은 통일이 되면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서훈 거부 이유는 무엇인가. “1941년 매일신보에 아주 작은 기사가 있다. 인천의 조봉암이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는 거다. 실제로 냈는지는 알 수 없다. 매일신보는 지금 북한 노동신문이나 마찬가지인 총독부 기관지다. 그런 신문의 기사를 법률적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가? 죽산은 1925년 조선공산당의 창당 멤버다.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을 했고,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이나 감옥살이를 하고 1939년 나온다. 고문으로 손가락 7개를 잃었다. 출소한 뒤 인천의 후배들이 먹고살라고 죽산에게 왕겨를 취급하는 비강조합장 자리를 마련해 줬다. 죽산은 감옥살이하고 일제에 노출된 사람이다. 만약에 죽산이 강요에 못 이겨 헌금을 실제 냈다고 치더라도, 죽산이 이를 거부했어야 한다는 것은 조선에서 살지 말라는 얘기다. 광복 뒤에 반민특위에서도 죽산은 거론된 적이 없다. 일제강점 말기 광란의 시대를 함께 살았던 이들이 구성한 반민특위에서도 조사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분들을 그런 문제로 모욕하는 건 어이가 없는 일이다.” ―농지개혁에 비견될 만한 오늘날 시급한 개혁과제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타파와 연금개혁이다. 똑같은 일을 해도 굉장히 고용이 안정되고 대우가 좋으며 노조의 보호도 받는 운 좋은 소수와 전혀 그렇지 못한 이들의 차이가 하늘과 땅 사이만큼 크다. 일부 노동자층은 마치 소지주처럼 지대를 수취하는 듯한 입장이다. 반대로 비정규직, 영세 자영업자 등은 과거 소작농과 같은 처지에 내몰려 있다. 이를 혁파해야 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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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으로 확산된 평등사상, 韓-日 민중연대로 발전”

    “3·1독립운동으로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 제3조는 남녀, 귀천, 빈부의 구별이 없고 인민은 평등하다는 ‘평등원칙’을 제시했다. 이는 아시아에서 선구적 의미를 지닌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도형)이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하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가 9일 오전 9시 20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다. 주제는 ‘민주·공화주의의 세계사적 의미와 동아시아 독립운동의 전개-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배경, 전개과정 및 영향의 재조명’이다. 미즈노 나오키 일본 교토대 명예교수는 학술회의에서 발표 예정인 ‘평등과 연대-3·1독립운동과 조일(朝日) 피차별민의 연대운동’에서 “임시헌장의 이 같은 평등 원칙은 아시아 최초로 보인다”고 밝혔다. 미즈노 교수는 발표문에서 1920년대 조선의 형평(衡平)운동과 일본의 수평(水平)운동의 교류를 조명했다. 형평운동은 1923년부터 조선에서 일어난 백정의 신분 해방운동이고, 수평운동은 일본의 최하층이었던 부라쿠민(部落民)의 해방운동이다. 백정과 부라쿠민은 근대 들어 형식적으로 신분이 철폐됐지만 여전히 실질적인 차별을 받았다. 미즈노 교수는 3·1운동 전후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원칙이 조선에서 널리 수용됐다고 봤다. 백정은 19세기 말부터 민족 또는 국민의식에 눈뜨기 시작했다. 만민공동회에서 연설해 박수를 받았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는 한편 민족의 일원으로 차별 철폐를 끊임없이 요구했다. 마침내 1923년 4월 경남 진주에서 형평사가 조직한 걸 시작으로 형평운동이 조선 각지로 퍼져나갔다. 3·1운동이 낳은 또 하나의 유산인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1923년 3월 창립된 일본 수평사와도 교류했다. “형평사 동인(同人) 제군, 우리들 수평사 동인과 제군 사이에 있는 것은 단 하나의 해협뿐입니다. 우리들은 고작 122마일에 불과한 이 해협이 우리의 굳건하고도 따뜻한 악수를 막는 데에 얼마나 무력한가를 몰지각한 인간 모독자의 눈앞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른바 정신적 노예제의 영역을 돌파하려는 인류의 기수(旗手)로 선택된 민중이라는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진군합시다.” 일본 수평사가 1924년 4월 조선 형평사대회에 보낸 축사다. 형평사도 즉시 감사의 뜻을 수평사에 전했다. 두 단체의 교류를 매개한 건 일본 오사카의 조선인 아나키스트 그룹과 도쿄의 ‘북성회’ 등 일본에서 사회운동을 펼치던 조선인들이었다. 형평사와 수평사의 제휴는 구성원이 서로 방문하고 대회에서 축사를 하는 등 1920년대 후반까지 더욱 활발해졌다. 미즈노 교수는 “물론 수평운동 측이 조선의 식민지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한계 등은 있었다”면서도 “평등과 기본적 인권이라는 공통 이념을 내걸고 식민지 지배국 일본과 피지배국 조선의 민중이 어떻게 연대의 가능성을 열었는지 고찰해야 한다. 이는 오늘날의 과제와도 맞닿아 있다”고 강조했다. 9일 학술대회 1부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각국의 민족독립운동과 민주·공화주의를 조명한다. 퍼걸 맥게리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퀸스대 역사·인류·철학·정치학대학 교수가 ‘혁명의 시대와 아일랜드의 독립 투쟁’을, 허우중쥔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연구원이 ‘제1차 세계대전과 중국 민족주의 운동의 전환’을, 신효승 동북아재단 연구위원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세 인식의 변화와 한국의 독립운동의 전개’를 발표한다. 2부에서는 ‘3·1독립선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외활동’을 주제로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세계주의와 평화사상’(장인성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3·1혁명론과 민주공화제―임시정부 법통론과 관련하여’(윤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3·1운동 이후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의 식민지 분할통치’(서종진 동북아재단 연구위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중국 활동과 상하이 프랑스 조계’(장세윤 동북아재단 연구위원) 등이 발표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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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점진적 변화 추구하는 ‘문화적 민족주의’… 수단은 보수적이었지만 목표는 혁명적”

    “3·1운동 민족대표 48인 등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은 옥중에서 자유가 억압된 상태였지만 3·1운동은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9일 동북아역사재단 주최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3·1운동 이후 민간지에 나타난 새로운 사상들’에서 이렇게 밝혔다. 정 교수는 발표문에서 3·1운동의 결과물로 1920년 탄생한 동아일보 창간사의 3대 주지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함 △민주주의를 지지함 △문화주의를 제창함을 분석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항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 헌법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이클 로빈슨 미국 워싱턴대 교수는 1920년대 전반기 한국의 여러 신문 잡지가 지닌 성격을 ‘문화적 민족주의’로 설명했다. 정 교수는 이 관점을 소개하면서 “교육과 경제 발전을 강조한 문화적 민족주의자들은 점진적 독립운동론을 폈는데, 그 수단은 보수적이었지만 목표는 혁명적이었다”고 말했다. 발표문은 사회주의의 유입도 분석했다. 사회주의 사상은 조선 민간신문에 앞서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에 먼저 소개되기 시작했다. 독립신문은 1920년 3월 10일부터 ‘사회주의’라는 논문을 10회에 걸쳐 연재했다. 사회주의 사상을 지닌 언론인들이 마르크스주의 단체를 조직하는 등 운동을 이끌었다. 정 교수는 “신문은 민주주의, 민족주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같은 새로운 사상을 소개하고 공론화했다”고 말했다. 조선총독부는 민족지를 탄압했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 성향의 잡지 ‘신생활’을 폐간하기도 했다. 신생활과 또 다른 잡지 ‘신천지’ 관련자 구속사태에 대해 동아일보와 천도교 계통 월간지 ‘개벽’, 최남선이 냈던 잡지 ‘동명’ 등은 총독부의 탄압을 규탄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총독부는 해외에서 유입되는 서적도 단속했다. 사상서적의 유입을 차단하고자 러시아 방면에서 들어오는 간행물을 차단했고, 만주 방면 국경지대의 검열을 강화했다. “치안유지법 등을 활용해 통제를 갈수록 강화했고,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새로운 사상의 소개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됐다”고 정 교수는 설명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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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지사 외솔의 진면목 담은 전집 발간

    “하루 세 번 콩밥덩이, 먹고나니 한동 만동/젓가락 놓자마자, 다음끼니 기달린다./겨울밤 칩고(춥고) 또 길어, 아침 되기 정 멀다.”(‘기한·飢寒’에서) “아랫목은 식당되고, 웃목은 뒷간이라./물통을 책상하여, 책으로 벗삼으니,/봄바람 가을비 소리 창 밖으로 지나다.”(‘나날의 살이’에서) 국어학자이자 애국지사인 외솔 최현배 선생(1894∼1970)이 일제강점기 옥중에서 쓴 시조다. 그는 1941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붙잡혀 광복 때까지 4년간 옥고를 치렀다. 선생의 정신을 잇고자 1970년 설립한 외솔회(회장 성낙수)가 최근 ‘외솔 최현배의 문학·논술·논문 전집’(1∼4권)을 발간했다. 이번 전집에는 2012년 발간한 선생의 학술 저서 28권 전집에 담겨 있지 않은 글을 묶었다. 외솔이 1920∼1960년대 발표한 글들이다. 1권은 시·시조·수필, 2·3권은 논술과 설명문, 4권은 작은 논문을 모았다. 외솔회장인 성낙수 전 한국교원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신문과 잡지에 산재해 독자가 찾아 읽기 쉽지 않은 글을 담았다”며 “외솔의 인간성 및 학문과 철학, 사상 등 진면목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3·1운동이 일어난 이듬해부터 한두 해 동안, 나는 시골서 처음으로 중학교 교원 노릇을 하였다. …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서 끊임없이 진행되는 경제의 착취, 문화의 말살, 생기(生氣)의 타격들을 몸소 당하면서 겨레의 장래를 생각하매, 암담하기만 함을 느낄 뿐이었다.” 외솔이 1958년 ‘연세춘추’에 실은 글이다. 그는 일본 유학에서 페스탈로치의 교육사상을 공부하고 조선에 돌아온 뒤 1926년 장편 논문 ‘조선 민족 갱생의 도’를 60여 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발표했다. 외솔은 “예상 이상으로 전국의 식자들의 공명을 얻었으며, 청년 독서자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이는 당시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선생이 누차 나에게 그런 소식을 말함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1956년 한글날을 맞이한 신문 기고에서는 일제강점기 한글운동의 의미를 돌이켰다. “삼천만 동포가 한 사람의 글소경도 없이 되도록 하자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켜 동아일보가 중심이 되어 크게 세상을 깨우친 일이 있다”고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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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맞아 학술대회-강연회 잇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11일을 앞두고 관련 학술대회가 잇따라 열린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회장 김자동) 등은 5일 서울 종로구 교보빌딩에서 ‘3·1대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헌법: 민주공화국 100년의 평가와 과제’를 연다. 이날 △3·1대혁명정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헌법의 탄생(김선택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한민국 임시정부헌법과 제헌헌법의 연속성(김광재 숭실대 법과대 초빙교수) 등이 발표될 예정이다.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1885∼1943)을 추모하는 학술회의도 열린다. 안민석 국회의원 등은 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백산 안희제와 국외독립운동기지 발해농장’을 연다. 1933년 안희제 선생이 조선의 독립과 지역공동체 실현의 이상을 담아 중국 헤이룽장성에 세운 발해농장의 설치 배경과 과정, 오늘날의 활용 방안을 검토한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1860∼1920)의 순국 99주기를 맞아 추모위원회 출범식과 강연회도 4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다.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이사장 소강석) 등이 주최하는 이날 행사에서는 최 선생의 손자인 러시아독립유공자후손협회 최발렌틴 회장의 인사와 박환 수원대 교수의 기념강연이 진행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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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베테랑 신경과학자가 정신질환을 만났을 때

    2015년 6월 어느 아침 저자(바버라 립스카)는 머리에 염색약을 바르고 비닐봉지를 뒤집어 쓴 채 조깅을 했다. 그리고 20년 동안 살았던 동네에서 길을 잃었다. 어찌어찌 집에 돌아온 뒤에는 염색약에 물든 자신의 셔츠와 덩이진 머리카락을 거울로 보고도 이상하다는 걸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했다. 이런 이상한 행동을 보인 건 흑색종이 저자의 뇌에 전이됐고, 치료 과정에서 염증까지 생겨 전두엽이 손상된 탓이었다. 아이러니한 건 저자가 30년 동안 신경과학자이자 분자생물학자로 정신질환을 연구한 인물이라는 사실. 미국 국립정신보건원 산하 인간두뇌수집원장인 그가 극적으로 흑색종을 이겨내기까지 두 달 동안 정신질환에 시달린 이야기가 담겼다. 저자는 자제력을 잃었고, 전날 먹은 피자가 플라스틱 덩어리라고 생각했고, 누군가 자신을 독살하려 한다는 망상에 시달렸다. 음식에 엄청난 집착을 보였고, 언제나 날이 선 채로 지나치게 남편을 비난했다. 자신의 정신이 망가져가고 있다는 걸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부서졌고, 빛은 그 틈으로 들어온다.” 저자는 정신을 차린 뒤 미국 조지타운대 병원 현관에 장식된 이 표어가 마음에 강렬하게 와 닿았다고 했다. 오랜 세월 뇌 장애를 연구했지만 정신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불안을 야기하는지 처음으로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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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상사대전’ ‘한국문화사대전’ 2030년까지 각 100권씩 발간

    한민족의 사상과 문화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대전(大全) 200권의 편찬을 시작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은 2030년까지 ‘한국사상사대전’과 ‘한국문화사대전’을 100권씩 발간할 계획이라고 27일 밝혔다. 안병욱 한중연 원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외래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독자 사상으로 승화한 ‘회통(會通)’과 융합의 가치를 담아내고 미래 한국의 사상적 동력을 제시하는 한편 민족을 넘어 세계적 차원에서 문화사를 조명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웃한 중국과 일본은 이미 이 같은 대규모 편찬사업을 오래전에 마쳤다. 중국의 ‘유장(儒藏) 사업’과 ‘중국사상가평전총서’, 일본의 ‘일본사상대계’와 ‘일본문화사대계’ 편찬사업이 대표적이다. 이번 대전 편찬은 한중연의 전신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1980∼91년 한국문화를 27권에 담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상의 대규모 편찬 사업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중연은 당장 착수할 연구 주제로 원효의 사상, 일연과 삼국유사 등을 검토하고 있다. 한중연은 박사학위를 받은 우수 한국학 연구자가 안정적인 여건에서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태학사’ 과정도 올해부터 신설한다. ‘현대판 집현전’에 비유할 수 있는 태학사 과정에 뽑히면 생계를 위한 연구 프로젝트에 얽매이지 않고 자율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올해는 5억 원의 예산으로 어문학(2인), 역사학(3인), 철학(2인) 분야에서 만 40세 미만인 7명을 뽑고 향후 5년간 매월 장학금 500만 원을 지원한다. 선발 분야와 인원은 점차 확대할 계획이다. 한편 한중연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올해 6월 27, 28일 ‘혁명의 세계사’를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도 개최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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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독부, 安-이토 아들끼리 화해극 연출… 동아일보 보도않자 강제폐간 구실 삼아”

    “우리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기사는 묵살해 버리고, 그리고 매우 곤란한 기사를 싣는다.” 1940년 3월 9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오노 로쿠이치로는 일본 귀족원 예산위원회 제2분과회에서 한글로 발행되던 동아일보 폐간 문제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이렇게 답했다. 미즈노 나오키 일본 교토대 명예교수(전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는 책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선인)에 실은 논문 ‘식민지기 조선에서의 이토 히로부미의 기억’에서 “박문사(博文寺)의 ‘화해극’을 전혀 보도하지 않은 동아일보의 자세를 총독부가 강제 폐간의 한 이유로 든 것이어서 주목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문사의 화해극’은 1939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차남 안준생(1907∼1952)이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에게 사죄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에 함께 가서 ‘화해’하는 장면을 연출한 조선총독부의 기획 이벤트를 말한다. 안중근 의사가 가지는 항일의 상징성을 어떻게든 무너뜨리려던 일제의 발악이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글과 일본어 발행 신문 가릴 것 없이 이 연출극을 보도했다.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 등은 ‘실로 조선통치의 위대한 변전사(變轉史)’ ‘참된 내선일체’라고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유일하게 동아일보만은 이 ‘박문사의 화해극’을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미즈노 교수는 “총독부가 조선인에게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박문사의 ‘화해극’을 조선인이 경영하는 동아일보가 무시하자 강제 폐간의 한 구실로 삼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아일보는 1929년 하얼빈 의거 20주년을 맞아 ‘신문의 신문―과거의 금일’ 코너에서 의거 당시인 20년 전 관련 기사를 여러 차례 다시 실으며 추모했다. “안중근 나이 31세요 얼굴이 길고 코가 오똑한데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고…경찰관을 대하여 강경히 말하되 우리들이 국가를 위하여 생명을 버림은 지사의 본분이거늘….”(1929년 11월 10일자) 김대호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은 “일제의 검열을 피하면서 의거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정한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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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중근 폄하한 日帝… 이토 죽기 전 “어리석은 녀석” 발언은 조작

    “舍生取義(목숨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하고)/殺身成仁(자신을 죽여 인을 이루었네)/安君一擧(안중근의 의거에)/天地皆振(온 천지가 들썩이네).” 일본의 대표적 사회주의자이자 평화운동가인 고토쿠 슈스이(1871∼1911)가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며 쓴 한시다. 1910년 샌프란시스코평민사가 제작한 안 의사 사진엽서에 그의 친필로 실렸다. 26일 안 의사 서거 109주기를 앞두고 관련 연구가 잇따라 나왔다. 최근 발간된 ‘3·1독립만세운동과 식민지배체제’(지식산업사)에 실린 김봉진 일본 기타큐슈시립대 국제관계학과 교수의 논문 ‘안중근과 일본, 일본인’은 이토 히로부미가 죽기 전 ‘어리석은 녀석이다(馬鹿ナ奴ダ)’라고 말했다는 건 “조작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이 논문에서 이토의 수행원들 증언을 추적했다. 이토가 ‘범인은 한인’이라는 말을 듣고 ‘어리석은 녀석’ 운운했다는 일화는 수행원이었던 귀족원 의원 무로다 요시부미의 이야기에만 나온다. 1909년 11월 1일자 오사카마이니치 신문의 무로다 인터뷰 기사와 무로다가 12월 16일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한 증언이다. 그러나 다른 수행원의 증언이나 기사, 전문, 보고서에는 이런 얘기가 전혀 없다. 무로다가 1909년 11월 20일 시모노세키시 재판소에서 한 첫 번째 증언에도 없다. 그럼에도 이 말은 ‘이토 공 전집(伊藤公全集·1928년)’에 “‘한인 안중근’이라는 말을 듣고 한마디 했을 뿐”이라고 실리며 마치 사실인 것처럼 후대에 전해졌다. 김 교수는 “의거 당일 보고서에 들어있는 이토의 직속 비서관 후루야 히사쓰나의 증언이 신빙성이 높다”면서 “후루야는 이토가 죽은 지 약 1시간 15분 뒤에야 ‘범인은 한국인’임을 알게 됐다고 증언했다”고 설명했다. 현장을 목격한 러시아 대신 코코프체프의 증언 등으로 미뤄보면 이토는 치명상을 입고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로 의식을 잃은 채 객차로 옮겨졌다. 의거 다음 날 일본 신문도 이토의 즉사(卽死)를 전하는 전문을 보도했다. 한상일 국민대 명예교수는 저서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까치)에서 “이토의 죽음을 극화하고 병탄을 왜곡하기 위해 뒷날 만들어진 기록”이라며 “이토를 암살하는 ‘어리석은 짓’이 결국 한일병탄을 자초했다고 왜곡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제가 이처럼 안 의사를 폄하하고자 했던 이유는 안 의사가 ‘항일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들은 안 의사를 숭모하며 뜻을 이어갔다. 김대호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최근 논문 ‘일제강점기 안중근에 대한 기억의 전승, 유통’에서 안 의사의 사진과 노래 등에 주목했다. 안 의사의 사진은 1909년 11월 초 처음 공개됐고, 사후 사진을 넣고 ‘충신 안중근’이라고 쓴 엽서 등이 불티나게 팔렸다. 일제의 강력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사진엽서는 서시베리아와 북만주부터 미국 샌프란시스코까지 퍼져나갔다. 창가 ‘영웅모범가’나 ‘독립군가’ 역시 안 의사를 기렸다.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안 의사 사진에 관련된 일부 잘못된 해석을 바로잡았다. “몰골이 초췌하다”며 일제의 ‘안중근 비하물’이라는 주장이 나온 사진이 사실은 뤼순 감옥 초기 안중근의 모습을 증언하는 귀중한 사진이라는 것이다. 도 교수는 “일제는 오히려 안 의사를 인도적으로 대우하고 있다고 선전하고자 했다”며 “민족을 넘어 동양 평화를 모색한 안 의사의 이 사진은 고토쿠 슈스이가 간직했던 안중근 사진엽서의 모본”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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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그림으로 이해하는 유쾌한 과학 이야기

    다양한 과학 이야기를 그림으로 쉽게 풀어낸 책이다. 일례로 빙하의 작용을 설명하면서 그 구조를 초콜릿 바에 빗대 그렸다. 지표의 눈은 초콜릿 코팅, 빙하는 캐러멜, 빙하가 녹으면서 떨어진 돌은 땅콩, 흙은 쿠키로 표현했다. “남극의 빙하는 무척 무거워서 지구의 표면을 짓눌러 으깬다”는 설명과 함께 모루 위에 지구의 모습을 그리는 식이다. “인간은 유전적으로 포도와도 24% 비슷할 뿐 아니라 빵을 만드는 효모와도 18%는 비슷하다” 같은 정보가 깔끔한 그림으로 표현돼 눈길을 끈다. 숲속 어둡고 조용한 곳에서 잘 자라는 고사리는 ‘내성적인 사람’에 비유했다. ‘팔에 난 털은 왜 1m까지 자라지 않는지’ 같은 주제에서 알 수 있듯 생명과학, 지구과학, 물리 등 분야별로 흥미를 당길 만한 소재를 다뤘다. 통념과 다른 포인트도 잡아냈다. 나무를 이루는 물질은 뿌리를 박고 있는 땅 밑의 흙과 물의 도움이 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대부분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와 수분에서 왔다고 한다. 저자는 미국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상어 이빨만 3000여 개를 수집한 괴짜다. “과학에 대한 학문적인 지식 없이 이 책을 썼다”고 겸손해하지만 내용이 꽤 알차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이제 82년이 지났으니 확실히 죽었을 것이다” 같은 유머도 나쁘지 않다. 다만 ‘즐길 수 있는 과학’을 추구한 탓인지 허술한 구석이 없진 않다. ‘꿈을 꾸는 이유’는 여러 설이 있는 데도 한 가지 주장만 소개됐다. 벌거숭이두더지쥐 그림 아래 물곰 등 완보동물의 설명을 달아놓은 건 좀 뜬금없다. 장수나 생명력이 두 동물의 공통점이어서라고 추정되지만 별다른 설명이 없기에 평범한 독자라면 벌거숭이두더지쥐가 완보동물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 심지어 그림으로는 모양도 얼핏 비슷해 보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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