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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걸그룹들이 일본을 비롯한 해외에서 엄청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트와이스는 일본에서 6일 발매한 새 앨범 ‘#TWICE2’가 발매 이후 오리콘 데일리 앨범차트 정상을 계속 지키고 있다. 트와이스는 2017년 6월 일본 데뷔 앨범 ‘#TWICE’가 25만 장 이상 팔려 일본레코드협회로부터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 지난해 9월 낸 정규앨범 ‘BDZ’는 오리콘 월간 앨범차트 정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20일부터 시작하는 일본 오사카 도쿄 나고야 투어 공연은 티켓 오픈 1분 만에 매진됐다. 신인 걸그룹 아이즈원(IZ*ONE)도 열기가 뜨겁다. 지난달 6일 일본에서 발표한 데뷔 싱글 ‘좋아한다고 말하게 하고 싶어’는 최근까지 31만 장이 팔리며 9일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 이 싱글 앨범은 라인뮤직, 오리콘을 비롯한 현지 음원 사이트 정상을 휩쓸었다. 블랙핑크는 ‘뚜두뚜두’ 뮤직비디오가 9일 케이팝 그룹 최초로 유튜브에서 7억 뷰를 넘어서기도 했다. 지난해 6월 15일 뮤직비디오가 공개된 지 267일 만이다. 블랙핑크는 ‘뚜두뚜두’뿐 아니라 ‘마지막처럼’과 ‘붐바야’ 등 뮤직비디오 3편이 유튜브에서 5억 뷰를 넘겼다. 블랙핑크는 4월 미국 유명 음악 페스티벌인 ‘코첼라’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드르르륵, 드르르륵.” “위이이잉! 탕! 탕!” 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카페에 들어서자 잔잔한 음악 대신 금속과 나무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귀에 박혔다. 한쪽에선 손님들이 치과에서나 사용할 법한 드릴을 잡고 ‘위이잉’ 소리를 내며 무언가에 열중해 있다. 이들 손에는 머그잔 대신 망치, 쇠막대기가 들렸다. 카페라기보다는 수공예 작업실로 보이는 이곳은 ‘반지 공방 카페’다. 직원 설명에 따라 기자도 반지를 만들어봤다. 손가락 둘레를 재고 얇고 긴 은막대를 고른 뒤 망치로 두드리며 동그란 모양으로 굽혔다. 평소 별로 써본 일이 없는 여러 공구를 들고 ‘나만의 것’을 만들다 보니 40여 분이 훌쩍 지났다. 모양이 잡히면 취향에 따라 세세한 장식이나 문구를 새기면 된다. 접착제와 은가루를 바른 양 끝을 가스 토치로 붙이면 끝. 욕심을 내 광까지 내면 1시간 만에 나만의 반지가 탄생한다. 취재차 해봤지만 생각보다 훨씬 뿌듯했다. 완성된 반지를 손에 끼웠다 빼 보며 자꾸 셔터도 누르게 됐다. 최근 ‘소만행(소소하게 만들며 느끼는 행복)’을 찾아 공방 카페를 찾는 이가 늘고 있다. 공방 카페는 대략 4, 5년 전부터 조금씩 들어서기 시작했지만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흐름을 타고 주목받고 있다. 1만∼3만 원 정도 비용으로 친구, 연인과 함께 또는 홀로 카페에서 뭔가를 만들며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매력. 카페 손님 임재훈 씨는 “본업과 무관하게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오히려 휴식이 된다”고 말했다. 카페를 운영하는 임익분 씨는 “과거엔 20, 30대가 주로 카페를 찾았다면 요즘은 40, 50대부터 부모님과 공방 카페를 찾는 아동 및 1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하다”고 말했다. 공방 카페에서 만들 수 있는 물건도 다양하게 진화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간단한 팔찌 등 30분이면 만들 수 있는 장신구 위주였지만, 근래에는 도자기나 미니어처처럼 짧게는 2시간부터 길게는 며칠씩 손님이 시간을 투자해 만들도록 하는 카페도 생겨났다. 대부분 고도의 기술은 필요 없어 어렵지 않게 따라 만들 수 있다. “재봉틀 소리를 들으며 옷감 작업에 집중하다 보면 일상의 스트레스도 사라져요.” 서울 마포구 연남동 ‘재봉틀 카페’는 2시간에 1만 원가량 요금을 내면 마치 PC방처럼 친구들과 재봉틀 앞에 앉아 대화하며 각종 소품을 만들 수 있다. 천에 문양을 달아 에코백을 만들거나 아예 옷을 만들기도 한다. 매주 사흘은 재봉틀 카페를 찾는다는 최정선 씨는 “재봉틀에 앉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했다. ‘재봉틀 카페’를 운영하는 김윤주 씨는 “재봉틀을 구매하기엔 부담스러워하는 직장인들이 잠시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이곳을 찾아 1∼2시간씩 작업을 하고 간다”고 말했다. 일반인들이 재봉틀로 직접 옷이나 소품을 만들어 사용하는 문화의 확산은 출판시장에서도 확인된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해 생활 공예·DIY 분야 도서 가운데 ‘옷 만들기’ 도서 매출의 비중이 2014년(7.2%)보다 두 배 이상(16.5%)으로 늘었다. 일본의 옷 만들기 강의를 정리한 번역서 ‘패턴 학교’(이아소) 시리즈 등이 꾸준히 인기를 모으고 있다. 최근에는 물건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이 먹는 샌드위치에 넣을 상추 등 채소를 직접 재배해 먹을 수 있도록 한 ‘식물공방 카페’도 등장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카페가 단순히 사람들을 만나 함께 커피를 마시는 곳에서 머물면서 무언가 창작하고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곳으로 변모하고 있다”며 “숍인숍(Shop In Shop·매장 안에 매장을 여는 것)이나 상이한 공간이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형태로 카페는 계속 진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김기윤 pep@donga.com·조종엽 기자}

“드르르륵, 드르르륵” “위이이잉! 탕! 탕!” 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카페에 들어서자 잔잔한 음악 대신 금속과 나무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귀에 박혔다. 한 쪽에선 손님들이 치과에서나 사용할 법한 드릴을 잡고 ‘위이잉’ 소리를 내며 무언가에 열중해있다. 이들 손에는 머그잔 대신 망치, 쇠막대기가 들렸다. 카페라기보다는 수공예 작업실로 보이는 이곳은 ‘반지 공방 카페’다. 직원 설명에 따라 기자도 반지를 만들어봤다. 손가락 둘레를 재고 얇고 긴 은 막대를 고른 뒤 망치로 두드리며 동그란 모양으로 굽혔다. 평소 별로 써본 일이 없는 여러 공구를 들고 ‘나만의 것’을 만들다 보니 40여 분이 훌쩍 지났다. 모양이 잡히면 취향에 따라 세세한 장식이나 문구를 새기면 된다. 접착제와 은가루를 바른 양 끝을 가스 토치로 붙이면 끝. 욕심을 내 광까지 내면 1시간 만에 나만의 반지가 탄생한다. 취재 차 해봤지만 생각보다 훨씬 뿌듯했다. 완성된 반지를 손에 끼웠다 빼 보며 자꾸 셔터도 누르게 됐다. 최근 ‘소만행’(소소하게 만들며 느끼는 행복)을 찾아 공방 카페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공방 카페는 대략 4, 5년 전부터 조금씩 들어서기 시작했지만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흐름을 타고 주목받고 있다. 1만~3만 원 정도 비용으로 친구, 연인과 함께 또는 홀로 카페에서 뭔가를 만들며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매력. 카페 손님 임재훈 씨는 “본업과 무관하게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오히려 휴식이 된다”고 말했다. 카페를 운영하는 임익분 씨는 “과거엔 20~30대가 주로 카페를 찾았다면, 요즘은 40, 50대부터 부모님과 공방 카페를 찾는 아동 및 1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하다”고 말했다. 공방 카페에서 만들 수 있는 물건도 다양하게 진화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간단한 팔찌 등 30분이면 만들 수 있는 장신구 위주였지만, 근래에는 도자기나 미니어처처럼 짧게는 2시간부터 길게는 며칠씩 손님이 시간을 투자해 만들도록 하는 카페도 생겨났다. 대부분 고도의 기술은 필요 없이 어렵지 않게 따라 만들 수 있다. “재봉틀 소리를 들으며 옷감 작업에 집중하다 보면 일상의 스트레스도 사라져요” 서울 마포구 연남동 ‘재봉틀 카페’는 2시간에 1만 원 가량 요금을 내면 마치 PC방처럼 친구들과 재봉틀 앞에 앉아 대화하며 각종 소품을 만들 수 있다. 천에 문양을 달아 에코백을 만들거나 아예 옷을 만들기도 한다. 매주 사흘은 재봉틀 카페를 찾는다는 최정선 씨는 “재봉틀에 앉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했다. ‘재봉틀 카페’를 운영하는 김윤주 씨는 “재봉틀을 구매하기엔 부담스러워하는 직장인들이 잠시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이곳을 찾아 1~2시간씩 작업을 하고 간다”고 말했다. 일반인들이 재봉틀로 직접 옷이나 소품을 만들어 사용하는 문화의 확산은 출판시장에서도 확인된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해 생활 공예·DIY 분야 도서 가운데 ‘옷 만들기’ 도서 매출의 비중이 2014년(7.2%)보다 두 배 이상(16.5%)으로 늘었다. 일본의 옷 만들기 강의를 정리한 번역서 ‘패턴 학교’(이아소) 시리즈 등이 꾸준히 인기를 모으고 있다. 최근에는 물건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이 먹는 샌드위치에 넣을 상추 등 채소를 직접 재배해 먹을 수 있도록 한 ‘식물공방 카페’도 등장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카페가 단순히 사람을 만나 함께 커피를 마시는 곳에서 머물면서 무언가 창작하고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곳으로 변모하고 있다”며 “숍인숍(Shop In Shop·매장 안에 매장을 여는 것)이나 상이한 공간이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형태로 카페는 계속 진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008년 미국에서 대량 리콜 사태가 일어나 존폐 위기까지 내몰렸던 세계적 자동차 회사 도요타는 지난해 사상 최대의 실적을 내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미래형 자동차 개발에도 뒤처지지 않는다. 지난해에는 자율주행하며 피자를 배달하는 수소전기차 ‘툰드라 파이 트럭’을 피자헛과 손잡고 개발해 처음 선을 보이기도 했다. 도요타의 탄생부터, 현대적 기업의 생산 방식에 적지 않은 족적을 남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를 일본의 논픽션 작가가 다뤘다. 불량품 최소화를 강조하는 도요타의 생산방식은 기업의 뿌리에서도 드러난다. 창업자 도요다 기이치로(1894∼1952)의 아버지 도요다 사키치(1867∼1930)는 자동 직조기(織造機)를 개량해 성공했다. 그의 직조기는 작업 도중 실이 끊어지면 자동으로 정지해 불량품 발생을 막는 장점이 있었다. 저자는 도요타의 저력은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협업하며 끊임없이 진화하는 현장’에서 나온다고 했다. 도요타의 생산관리 방식이나 경영정신이 신선한 주제는 아니다. 관련 도서도 이미 적지 않다. 하지만 저자는 7년 동안 일본과 미국의 도요타 공장을 70여 회 답사하면서 공장에서 일하는 간부와 근로자들을 만났다고 한다. 미국 공장에 도요타의 생산 방식을 도입하면서 벌어진 에피소드를 비롯해 여러 현장의 목소리가 잘 담겨 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조선 후기 서울 집값은 ‘장기적으로 우상향’ 했을까? 18세기 후반∼19세기 중반 서울의 집값 상승을 보여주는 희귀 문서가 최근 발견돼 주목된다. 김문경 일본 교토대 명예교수(67·쓰루미대 일본문학과 교수·사진)는 최근 교토대에서 열린 ‘가와이 문고’ 목록 간행 기념 심포지엄 ‘한국 고문헌의 세계’에서 가와이 문고에 포함된 조선시대 가옥 매매문서를 소개했다.》 이 매매문서들은 1777∼1846년 한성부(서울) 정선방 대묘동(현 종로3가 북쪽 종로구 봉익동)의 한 민가가 11차례 사고팔린 기록을 담고 있다. 이 민가는 기와집 14간(間)반과 초가집 3간, 빈터(空垈·공대) 30간으로 이뤄졌다. 서민들이 ‘초가삼간’에 살았던 것을 고려하면 중상층 양반이 살았던 꽤 으리으리한 집이다. 이 집은 1777년 275냥에 거래됐고, 1783년에도 같은 값이었다. 하지만 1798년에는 500냥에 팔렸다. 김 교수는 “문서상 건물 구성에 변동이 없어 서울 중심 땅값이 오른 결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초가집을 헐고 기와집을 늘리는 ‘부분 재건축’이나 증축이 이뤄지기도 했다. 1816년 매매문서에는 초가집 3간이 사라지는 대신에 기와집이 18간으로 늘었다. 집값도 600냥(1816년), 700냥(1821년) 등 단계적으로 올랐다. 문서상 마지막 거래도 흥미롭다. 우치홍(禹治洪)이라는 인물은 1845년 750냥에 이 집을 샀다가 기와집 3간을 증축한 뒤 이듬해인 1846년 무려 1000냥에 팔았다. 김 교수는 “1년 만에 큰 이문을 남기고 집을 되판 건 부동산 투기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적어도 이 집을 기준으로 보면 근로자의 임금 상승이 집값 상승을 따라잡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전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에 따르면 학계의 기존 연구는 1780년대 날품팔이(日雇·일고)의 품삯은 은으로 약 1.06g이었고, 1840년대에는 약 1.34g으로 올랐다고 본다. 같은 기간 은 1냥(37.5g)과 상평통보 1냥의 교환 비율은 1 대 4에서 1 대 4.75로 변했다. 은 대비 동전 화폐의 가치가 하락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추정하면 1780년대 날품팔이가 이 집(275냥)을 사려면 2433일(약 6년 8개월)치 임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한다. 1840년대에 이 집값(1000냥)을 모으려면 5882일(약 16년 1개월)치 임금이 필요했다. 임금이 다소 오르긴 했지만 화폐 가치의 하락과 지가 상승, 재건축 등으로 인해 집값 상승이 더 컸던 셈이다. 물론 사례 하나로 당시 주택 가격 변화를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고문헌 전문가인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연구실장은 “서울은 지방 출신 관료들이 세를 사는 경우가 많아 오늘날처럼 상업적 가옥 매매가 이뤄졌다”며 “서울의 주택 거래를, 그것도 수십 년간 누적해 보여주는 문서는 아마도 이 자료가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심포지엄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센터장 정우봉 교수)와 일본 교토대가 공동 개최했다. 해외한국학자료센터는 2014년부터 일본 교토대 소장 한국 고문헌을 교토대와 공동 조사했고, 교토대 부속도서관에 있는 ‘가와이 문고’의 전모를 밝혔다. 이 문고는 일본의 조선 경제사 학자인 가와이 히로타미(河合弘民·1872∼1918) 박사가 수집한 자료다. 최근에는 목록집을 우리말과 일본어로 각각 간행했고, 심포지엄과 함께 귀중한 한국 고문헌 공개 전시도 3일까지 교토대에서 열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프리미엄 ‘냉삼’(냉동삼겹살), 차이니즈 바, 오마카세(손님이 고르지 않고 주인이 알아서 음식을 내주는 것)…. 오늘날 한국의 최신 외식 문화를 알차게 담았다. 외식 경기의 침체에도 디저트는 편의점 디저트부터 고급 디저트까지 골고루 인기다. 밥도 먹고 술도 즐기는 프랑스식 선술집 ‘비스트로’는 외식 장르 전반에서 통용되는 상용어가 됐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외식이 어떻게 변화 중인지 ‘파인 다이닝’, ‘캐주얼 다이닝’, 디저트와 베이커리, 술 문화, 건강한 먹거리 열풍, 골목 상권 등 카테고리를 나누어 분석했다. 두 저자는 2000년부터 발간된 외식정보지의 발행인과 기자다. 책을 갖고 다니며 맛집 골목을 돌아다녀도 좋고, 집에서 진득하게 읽어봐도 좋겠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서울에서 제주까지 전국 곳곳이 뜨거운 만세 소리와 태극기 물결로 가득 찼다. 이날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는 문재인 대통령과 시민 1만5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문 대통령은 유관순 열사에게 최고등급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는 등 독립유공자 334명에게 포상했다. 참석자 일부는 오전 9시 20분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과 중구 덕수궁 대한문에서부터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해 기념식장에 합류했다. 광화문광장 주변 건물들에는 독립운동을 할 때 쓰인 ‘남상락 자수 태극기’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태극기’ ‘진관사 소장 태극기’ 등을 크게 만든 태극기가 내걸렸다. 시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한복 차림의 고등학생 예효민 양(17)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분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함께 행사장을 찾았다”고 말했다. 유관순 열사의 모교인 이화여고 학생과 졸업생 등 400여 명은 오전 10시경 서울 중구 교내의 유 열사 동상 앞에서 헌화 예배를 올린 뒤 서울광장까지 “100년 전 오늘을 기억하자” 등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종교계는 당시 희생된 선열을 추모하고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타종 행사를 열었다. 이날 낮 12시 전국의 교회와 성당, 사찰, 교당 등에서는 동시에 종소리가 울렸다. 오후 2시 반에는 서울광장에서 약 3100명의 시민이 함께한 ‘100년 대합창’이 펼쳐졌다. 서울시가 주최한 대합창에서는 ‘3·1운동 노래’ ‘애국가’ ‘압록강 행진곡’ ‘독립군가’ ‘아리랑’ 등이 울려 퍼졌다. 보수 단체들은 태극기 집회를 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운동본부’ 회원 등 1만 명(경찰 추산)은 오후 1시 반 서울역에서 집회를 열고 광화문광장까지 걸어갔다. 이들 시위대와 기념식 참석자들 간에 마찰은 없었다.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는 독립유공자를 비롯해 3000여 명이 참석해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을 열고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벌어졌던 독립만세운동을 재현했다. 경북 안동시에서는 시민 1000여 명이 거리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군가를 따라 불렀다. 가로막는 일본 순사들을 물리치는 퍼포먼스도 펼쳐졌다. 부산 동구에서는 오후 3시 ‘강제징용 노동자상과 함께하는 3·1운동 100주년 부산시민대회’가 열렸다. 지난해 5월 1일 일본영사관 인근에 설치하려다 무산된 노동자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왼손에는 횃불을, 오른쪽 어깨와 오른손에는 비둘기와 곡괭이를 든 청동 입상이다. 시민들은 노동자상 목에 노란 목도리를 둘렀고 ‘일본은 사죄하라’는 푯말을 붙였다. 제주에서도 시민 3000여 명이 선열들을 추모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시설인 경기 광주 나눔의 집에서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추모제’가 거행됐다. 구특교 kootg@donga.com·조종엽 기자·전국종합}

“3·1운동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드론’이 떴다.” “3·1운동 100주년 무게에 값하는 데이터베이스가 마련됐다.” “1969년 동아일보가 간행한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이후 50년 만의 기념비적 성과다.” 국사편찬위원회와 동아일보가 27일 공동 주최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백년 만의 귀환: 3·1운동 시위의 기록’에 참가한 역사학자들은 학술대회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일민미술관 2층에서 열린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국사편찬위가 현존하는 3·1운동 사료 대부분을 망라해 만든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국편DB)를 바탕으로 한 연구 논문 등 10편이 발표됐다. 조광 국사편찬위원장은 개회사에서 “100년 전 3·1운동은 민족적 각성과 일치감을 불러일으키며 한민족을 근대 민족으로 새로 출발하도록 한 전환점”이라며 “국편은 물론이고 외부 학자들이 힘을 합쳐 만든 이번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앞으로 3·1운동 연구가 더욱 심화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사편찬위는 이 DB를 2015년부터 기획했으며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착수해 최근 구축했다. 국편DB는 앞으로 3·1운동 연구에 초석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날 종합토론 사회를 맡은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3·1운동은 그동안 방대한 사료가 산재해 연구에 난관이 많았고 그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연구가 충분치 못했다”며 “국편DB 구축으로 이제 3·1운동 연구가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강조했다.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도 “개별 사례 연구에서는 불가능했던 거시적 분석이 국편DB를 통해 가능해졌다”고 평가했다.조종엽 jjj@donga.com·유원모 기자}

“3·1운동 기록물 데이터베이스(DB)는 연구자들에게는 숙원이었습니다. 3·1운동을 완전히 새롭게 정리할 수 있게 됐습니다. 3·1운동사는 앞으로 새로 쓰여야 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와 동아일보가 27일 공동으로 주최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백년 만의 귀환: 3·1운동 시위의 기록’에서 ‘3·1운동 데이터베이스와 3·1운동의 주체’를 발표한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은 “이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3·1운동의 전체상을 구성할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이날 1∼3부에 걸친 개별 발표에 이어 4부에서는 열띤 토론이 진행됐다. “학생 15명은 깃발을 흔들며 조선 건국 만세라고 크게 외쳤고 의관을 갖춰 입은 어른들은 또한 대한독립 만세라고 크게 외쳤으며 떠꺼머리(蓬頭亂髮者·봉두난발자)들은 단지 만세를 외치며 크게 웃었다.” 이기훈 연세대 사학과 교수가 이날 발표문 ‘3·1운동의 미디어와 상징체계’에서 소개한 일제 판결문 내용이다. 이 증언을 한 노용주는 1000여 명의 군중이 참가한 1919년 3월 17일 함경남도 정평군 고산면 시위 현장에서 체포됐다. 학생, 어른, 교육받지 못한 젊은이 등 3·1운동에 참여한 다양한 세대와 계층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 교수는 “학생들이 건국해야 하는 조선은 아마도 공화국일 것이고, 어른들이 독립해야 한다고 한 ‘대한’은 제국일 수도, 민국일 수도 있다”며 “만세를 외치며 웃었던 많은 민중에게도 만세를 불러야 한다는 사실은 명확했고, 만세를 부르면서 그들은 같은 민족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날 토론에서는 시위 건수나 참여자 수의 지역별 차이가 쟁점이 됐다. 이번에 구축된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상에서는 호남 지역의 3·1운동 참여자가 비교적 적은 것처럼 보인다. 이는 3·1운동 시위를 집계했던 기존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원인에 대해 학계의 기존 통설은 호남의 항일 의병항쟁이 특히 치열했기에 일제 탄압도 극심해 피해가 컸고, 천도교·기독교 등 종교 조직이 다른 지방보다 취약했던 것이 영향을 줬다는 것. 그러나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호남의 3·1운동 참여율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토론자로 나선 조건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교수는 “최근 종합되고 있는 일제 관헌 자료 ‘범죄인명부’에는 3·1운동 시위로 체포되거나 재판에 회부되거나 실형을 받은 이들의 명단이 등장하는데 전남 지역 피해자의 비중이 결코 작지 않다”고 말했다. ‘조선총독부의 3·1운동 탄압책과 피해 현황’을 발표한 이양희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 역시 “호남 지역의 체포자 수는 다른 지역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면서 “시위 양상에서 차이가 있었거나 일제 군경 보고에서 시위가 누락됐을 소지가 있다고 보고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군별로도 당시 220개 군 가운데 211개 군에서 일어나 9개 군에서는 시위가 집계되지 않은 것도 정밀 분석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류준범 국사편찬위 연구편찬정보화실장은 “자료의 정밀도를 높이는 것이 이번 DB의 목적”이라며 “향후에도 지속 보완할 것”이라고 말했다. 3·1운동 시위의 비폭력성도 쟁점이 됐다. 한국 학계는 대체로 구체적 실증 분석이 없는 상황에서 비폭력 시위가 중심이었다고 해석한 반면, 북한이나 그 영향을 받은 재일조선인 학계는 그와 달랐다. 근래에는 격렬한 저항이 벌어진 개별 시위의 폭력성 연구도 상당히 축적됐다. 이날 학술회의에서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는 시위대의 폭력은 발포라는 진압 방식과 연관돼 있다고 봤다. 윤 교수는 “대부분 시위는 평화적으로 시작했으나 일제의 탄압 탓에 폭력적으로 바뀌었다”며 “일제 군경이 비폭력 시위에 총을 발포한 경우도 굉장히 많이 나타난다”고 강조했다. 3·1운동 시위를 공세적 폭력을 중점에 두고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해석이다. 토론자로 나선 허수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윤 교수의 발표를 “방대하고 구체적인 데이터베이스 자료를 분석해 3·1운동의 전체상에 다가감으로써 기존 연구를 일신하는 한 전범(典範)을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진압 양상과 폭력 시위의 연동 정도를 해석하는 데는 입장을 달리했다. 향후 연구과제도 제기됐다. 허 교수는 “데이터를 분석해 지역별 추세 등 요점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신문 자료 등을 추가해 데이터베이스를 계속 확대·보완하는 게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3·1운동연구소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정은 원장은 “의주 시위는 30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였고, 민족 대표가 직접 주도했는데도 관련 논문이 지난해에서야 처음 나왔다”며 “연구 과제가 많다”고 강조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3·1운동의 숨결을 지도와 함께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인터넷 홈페이지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디지털 정보관’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3월 1일 공개된다. 동아일보는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구축)의 자료를 활용해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디지털 정보관’을 마련하고, 동아닷컴을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이 디지털 정보관에서는 3·1운동 당시 벌어진 약 1700건의 시위 정보를 관련 기사 및 현장 사진과 함께 볼 수 있다. 시위는 날짜와 지속된 기간에 따라 오늘날 지도상에 표시된다. 시위 규모와 피해자 수, 시위대의 행동 양상 등 관련 정보도 함께 제공된다. 특히 지난해 3월부터 본보 기자들이 국내와 해외를 넘나들며 취재해 연재하는 ‘1919∼2019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시리즈 역시 해당 시위에 연동해 볼 수 있다. 당대 및 오늘날 사진을 함께 볼 수 있다. 디지털 정보관에서는 시위 발생 지역명으로 시위를 검색할 수 있고, 날짜별로도 전체 시위 발생 추이를 볼 수 있다. 스마트폰에서는 그에 맞게 디자인된 화면을 볼 수 있다. 동아일보가 지난해부터 연재해 온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시리즈의 기사 아카이브도 연계될 예정이다. 3·1운동 당시 활동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삶, 역사의 현장을 통해 3·1운동의 정신을 생생하게 되새길 수 있다. 디지털 정보관은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가 널리 활용되도록 국사편찬위가 공개한 시위 정보와 좌표 등을 활용해 구축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대한민국의 영문 명칭인 ‘Republic of Korea’를 표기한 1919년 외교문서가 발견됐다. 주미 특파원 출신 언론인 모임인 한미클럽은 “파리강화회의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밝히기 위해 파견된 김규식 선생(사진)이 1919년 5월 24일 로이드 조지 당시 영국 총리에게 보낸 독립청원 서한에 ‘Republic of Korea’라고 국호를 표기했다”고 26일 밝혔다. 한미클럽은 제임스 퍼슨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의 도움을 받아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문서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한미클럽이 이날 공개한 독립청원 서한에서 영문 국호 ‘Republic of Korea’는 “President of the Cabine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대한민국 임시정부 내각 대통령)” “I am authorized by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권한으로…)” 등의 구절에 반복 사용됐다. 김규식 선생은 독립청원 서한에서 조지 총리가 영향력을 발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각 대통령인 이승만의 요구사항(note)을 평화회의에 환기시켜줄 것을 당부했다. 이승만 임정 대통령은 평화회의가 새로운 대한민국과 임시정부를 한국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정통성 있는 체제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또 임시정부는 일본의 지배에 항거하는 3·1운동 등 독립운동의 결과로 창설됐으며, 독립선언에 따라 국제적 합의나 약속, 계약은 임시정부를 통하지 않을 경우 한국 국민들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미클럽에 따르면 이 문서는 1919년 5월 30일 영국 정부가 접수해 조지 총리에게 전달했고, 접수된 문서 제목에도 ‘대한민국 인정을 위한 청원(Appeal for Recognition of Republic of Korea)’이라고 표시됐다. 이번에 한미클럽이 공개한 문서에는 1919년 4월 초순 당시 미국 소재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인 안창호 선생이 조지 총리에게 보낸 전문도 있다. 전문은 김규식 선생을 우리 측 대표로 인정해줄 것과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한민족의 독립이 인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요청을 수용하지 말 것’을 건의하는 영국 정부 내부 의견서도 전문에 첨부된 채 발견됐다. 한미클럽은 “냉혹한 국제질서 앞에 독립투사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무산되는 상황을 목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1919년 5월 3일 영국 정부가 대한인국민회로부터 전달받아 조지 총리에게 보고한 3·1독립선언서 영역본, 김규식 선생이 1919년 5월 13일 작성해 조지 총리 앞으로 전달한 독립청원 서한, 영국 정부를 통해 당시 파리평화회의 의장인 조르주 클레망소에게 보낸 6월 11일자 서한도 공개됐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연구 방법을 통해 3·1운동의 진면모를 총체적으로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27일 열린다. 국사편찬위원회와 동아일보사는 27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일민미술관 2층 전시실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백년 만의 귀환: 3·1운동 시위의 기록’을 공동 개최한다. 일민미술관의 후원으로 열리는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국사편찬위가 구축한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3·1운동의 전개와 일제 탄압의 전체상을 복원해낸 연구가 발표된다. ‘3·1운동의 규모’(류준범 국사편찬위 연구편찬정보화실장), ‘도시에서의 전개와 특징’(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농촌에서 확산과 공간적 특성’(이송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교수), ‘폭력과 비폭력’(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 등 논문 10편이 발표되며,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가 종합토론 사회를 맡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정녕 때는 2월이건만(正當二月時)/봄기운 아직도 어이 더딘가(春色尙何遲)/3다다미 크기의 감방 창 아래에서(三疊幽窓下)/역시 나 홀로 모름이련가(也吾獨不知).” 2·8독립선언의 주역이었던 근촌 백관수(1889∼1961·사진)가 일본 도쿄의 감옥에서 대한 독립의 봄을 기다리며 지은 옥중 한시 ‘정녕 때는(正當)’이다. 백관수는 1919년 도쿄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학생 대표 11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을 했다. 백관수는 이 사건으로 체포돼 1920년 3월 25일 출옥할 때까지 1년여 옥살이를 했다. 백관수가 당시 감옥에서 쓴 한시집 ‘동유록(東幽錄)’이 100년 만에 번역 출간됐다. 차남인 백순 박사(80·미국 버지니아 워싱턴대 교수)는 동유록에 실린 한시 71편을 우리말과 영어로 번역한 ‘동유록’(시산맥·1만 원)을 최근 발간했다. 백 박사는 시집 4권과 평론집 여러 권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백 박사의 해설에 따르면 백관수는 대한 독립의 열망을 한시에서 ‘봄을 기다리는 마음’ ‘부끄럽지 않은 마음’으로 표현했다. “대륙 동방의 땅(大陸東之部)/무궁화 반만년의 봄이 오겠고(槿花半萬春).”(‘대륙’에서) “이 충성스러운 마음과 저 의로운 가슴 어찌 다르리오(此忠彼義何由別)/천년 세월에도 나라 사랑하는 인물 함께 깨치리(千載共醒愛國人).”(‘일백 번 죽음의 각오’에서) 백관수가 시에 표현한 봄은 반만년의 찬란한 역사를 간직한 한국이 독립하는 봄이고, 백관수는 그런 봄이 반드시 도래한다고 확신하는 한편 충의로운 나라 사랑으로 봄을 열망하고 있다고 백 박사는 설명했다. 백 박사는 “이런 마음이 3·1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45년 광복의 한 디딤돌이 됐으리라 본다”고 설명했다. 옥중의 백관수는 “청산의 두 친구 감방 찾아 와서(靑山二友訪幽居)/은근히 알려 주네 우리의 옳은 뜻 사라지지 않고(袖示慇懃意不疎)”(‘청산의 두 친구·靑山二友’에서)라며 2·8독립선언이 불씨가 돼 한국 전역에 독립운동이 번지기를 열망했다. 감옥 안에서 연말을 보내면서도 독립을 향한 일편단심은 그대로였다. “문 위에 달은 소나무 오랑캐 풍속이라고(飾松門戶看夷俗)/고향 산 폭죽은 내 나라 풍속이라 여겨지네(爆竹鄕山思國風)/많은 근심으로 잠 못 이루는 외로운 거처(耿耿不眠獨居處)/외로운 등불만 일편단심 마음 붉게 비추이네(孤燈惟照片心紅).”(‘섣달 그믐날 밤·除夜’에서) 조선 독립 문제를 다루지 않은 파리강화회의 소식을 전해 들은 심경도 한시에 표현됐다. “소식 들었네 강화조약이(聞道講和約)/근래 이루어지고 어떠한 것이 이루어졌는지(近成何所成)/남들에게는 이로운데 우리에게는 이롭기 어려워(利人難利我)/패권 싸움과 영토 싸움이네(爭覇又爭城).”(‘강화조약3’에서) 그러나 2·8독립선언의 대의를 굳게 믿으며 마음을 다졌다. “만약 스스로 후회한 바를 말한다면(若言所自悔)/오로지 과업을 이루지 못함이요(惟業不擧)/또 잘못함을 말한다면(又言所誤)/형세가 따르지 못함이라(勢不與).”(‘자위가·自慰歌’) 2·8독립선언이 자유와 정의에 근거를 둔 운동이라는 확신도 “자유 원래 가치가 있고(自由元有價)/정의 본래 치우치니 않네(正義是無偏)”라고 읊었다. 백관수는 출옥 뒤 1924년 메이지대를 졸업했고, 1927년 하와이에서 열린 세계기독교청년연합회 주최 제2차 태평양회의에 한민족 대표로 참석했다. 1937년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했으나 일제의 강압에도 끝내 폐간계에 도장을 찍지 않다가 종로경찰서에 수감되기도 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돼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으로 일했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됐으며, 1961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간난이는 조선말로 ‘만세!’하고, 류지는 일본말로 ‘반자이!’해, 좋아, 함께 부르자!” 일본 작가 유아사 가쓰에(1910∼1982)가 1935년 발표한 소설 ‘간난이’에 나오는 구절이다. 3·1운동 당시 조선인 소녀와 일본인 소년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며 나눈 대화다. 작가는 아버지를 따라 1916년 이주한 경기 수원에서 3·1운동을 경험했고, 1927년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조선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수원을 고향으로 생각했다는 작가는 “독립을 바라는 조선인들의 마음에 감동해 울면서 썼다”고 했다.》 3·1운동은 당대 양심적인 일본 지성인들의 마음도 움직였다. 한일 근대문학 연구자인 세리카와 데쓰요 일본 니쇼가쿠샤대 명예교수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논문 ‘3·1독립운동과 일본 문학의 관련 양상’을 냈다. 당시 언론 통제로 대다수 일본인은 3·1운동을 ‘소요 사건’ 정도로만 인식했고 민본주의 논객과 사회주의자들도 조선 문제에는 침묵했다. 그러나 논문에 따르면 3·1운동을 옹호한 일본 지식인과 문인도 적지 않았다. 도쿄대 법학부 학생들로 구성된 ‘신진카이(新人會)’의 기관지 ‘데모크라시’는 1919년 “(조선 병합은) 단연코 불가” “(3·1운동 탄압은) 변호의 여지가 없는 비인도적인 행위의 극치”라는 사설을 실었다. 사설은 “(조선인이) 자유 천지에서 진실로 인류의 바른 생활을 획득할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란다”며 조선 독립을 지지했다. ‘신진카이’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비판한 민주주의 단체 ‘레이메이카이(黎明會)’의 중심 요시노 사쿠조(1878∼1933)의 영향 아래 있던 그룹이다. 중국의 혁명을 지원한 미야자키 도텐도 상하이일일신문에 3·1운동을 조명하며 “힘에 기대는 자는 힘에 쓰러지고, 칼에 기대는 자는 칼에 패한다”고 총독정치를 비판했다. 가시와기 기엔 목사는 일본 언론의 왜곡된 제암리 학살사건 보도를 바로잡고 학살의 진상을 소개했다. 당시 조선에 있던 스즈키 다카시 목사도 일제를 비판하며 반성을 촉구했다. 1923년 도쿄제국대 교수가 된 야나이하라 다다오는 1924년 조선 출장에서 3·1운동을 알게 됐고 이후 산미증식계획과 동양척식회사 등을 비판한 논문을 냈다. 1926년 6·10만세운동을 접한 뒤에는 ‘조선 통치의 방침’을 통해 3·1운동을 “조선 민중의 승리”이자 “총독정치의 패배”로 규정했다. 3·1운동을 다룬 일본 문학 작품도 적지 않았다. 모리야마 게이의 소설 ‘불’(1928년), 마키무라 히로시의 서사시 ‘간도 빨치산의 노래’(1932년), 영문학자 사이토 다케시의 시 ‘어떤 살육사건’(1919년) 등이다. 세리카와 교수 등 일본 학자가 쓴 3·1운동 관련 논문 6편은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와 사사가와 노리카쓰 국제기독교대 명예교수가 편집해 최근 발간한 한일 공동 연구 논문집 ‘3·1독립만세운동과 식민지배체제’(지식산업사·3만3000원)에 실렸다. 책에는 2014년부터 석오문화재단(이사장 윤동한)의 후원으로 이뤄진 관련 연구 논문 15편이 실렸다. 22일 열린 간담회에서 세리카와 교수는 “모두 조선의 완전 독립을 지지하는 데 이른 건 아니었지만 정의와 인권 실현 차원에서 3·1운동을 옹호한 일본 지식인들이 분명히 존재했다”고 말했다. 이태진 교수는 “동아일보가 논문 76편을 담아 1969년 발간한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이후에는 눈에 띄는 3·1운동 기념논집이 별로 없었다”며 “이번 논집은 한일 공동 연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사단법인 3·1정신 조선광문회 복원위원회(이사장 송상현)는 22일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기미독립선언서와 조선광문회’를 개최했다. 조선광문회 터인 서울 중구 미래에셋센터원빌딩에서 열린 이날 학술대회에서 송상현 이사장은 “조선광문회는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신문화운동의 요람이며, 애국지사가 우국충정과 독립방략을 논의하던 사랑방이었다”고 말했다. 송 이사장은 “조선광문회를 복원하면 기미독립선언서 원본과 각종 조선광문회 간행물의 전시장뿐 아니라 3·1운동 정신의 계승 발전을 위한 교육, 연구, 출판의 장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병자호란은 인조가 청 태종(홍타이지)에게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치욕으로 기억된다. 참패한 까닭으로는 위정자들의 무능이 첫째로 꼽힌다. 그러나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책임을 묻기에 앞서 전쟁 자체의 실상에 주목한다. 저자는 당시 청군의 규모부터 기존 학설과는 다르다고 했다. 통설인 12만8000명은 조선 문헌 기록을 비판 없이 채택한 결과 생긴 오류라는 것. 청 측 기록을 바탕으로 보면 정규군 기준 약 3만4000명이라고 한다. 저자는 특히 만주어로 기록된 청나라 사료를 많이 활용했다. 청나라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조선에 적극 협상을 시도하고 서둘러 전쟁을 끝내려 한 건 천연두 탓이라고 봤다. 청군 진영에서도 천연두가 발병하자 청 태종이 이를 피해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는 것이다. 천연두가 조선을 구한 셈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사단법인 3·1정신 조선광문회 복원위원회(이사장 송상현)는 22일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기미독립선언서와 조선광문회’를 개최했다. 조선광문회 터인 서울 중구 미래에셋센터원빌딩에서 열린 이날 학술대회에서 송상현 이사장은 “조선광문회는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신문화운동의 요람이며, 애국지사가 우국충정과 독립방략을 논의하던 사랑방이었다”고 말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3·1독립선언서의 국외 전파’(김도형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등 주제발표 4편이 진행됐다. 송 이사장은 “조선광문회를 복원하면 기미독립선언서 원본과 각종 조선광문회 간행물의 전시장 뿐 아니라 3·1운동 정신의 계승발전을 위한 교육, 연구, 출판의 장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현존하는 3·1운동 관련 국내외 사료의 데이터를 종합하고 이를 지리정보시스템(GIS)과 연동해 제공하는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국편DB)가 20일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됐다. 국사편찬위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2016년부터 구축한 이 DB를 바탕으로 1919년 3·1운동 시위 참여자가 모두 80만∼103만 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3·1운동 참여자 수는 그동안 학계 연구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에서 50만∼200만 명으로 추산돼 왔다. 이번 추계는 사료를 총망라하는 한편, 중복과 누락을 정리해 확실한 근거를 갖는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국편DB는 일제 측 사료와 임정이 간행한 ‘한일관계사료집’, 외국인 선교사 보고 등 문서 8915건을 검토하고 관련 정보 2만1407건을 추출해 정리한 결과다. 국사편찬위는 DB를 바탕으로 3·1운동 당시 사망자가 발생한 시위는 174건이고, 사망자는 모두 725∼934명이라고 분석했다. 지역별로는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평안북도에서, 날짜별로는 1919년 3월 31일에 사망자가 가장 많았다. 국사편찬위는 “참여자·사망자 수는 동맹휴학이나 철시 등을 제외한 시위 사건만 추린 것이며, 연구가 심화되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국편DB는 3·1운동 사건을 △시위 1692건 △철시 25건 △파업 3건 △휴학·휴교 61건 △(시위)계획 333건 등 모두 2464건으로 종합했다(20일 기준). 국편DB의 각종 수치는 향후에도 자료 발굴과 연구 진전에 따라 보완될 예정이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사편찬위와 동아일보가 27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일민미술관에서 공동 주최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백년 만의 귀환: 3·1운동 시위의 기록’에서 발표된다. 이번에 구축된 국편DB는 시위 등 각종 3·1운동 사건을 사건명, 시위 장소, 사건 개요 등 키워드로 간편히 검색할 수 있다. DB에는 3·1운동의 개별 사건이 시기와 지역뿐 아니라 활동 유형과 시간대에 따라 분류돼 있다. 아울러 △만세, 집단항의 등 시위대의 행동 양상 △깃발, 문서, 노래, 구호, 횃불 등 운동에 활용한 매체 △일반인, 종교인, 학생, 상인, 노동자 등 운동 주체 △발포, 도검, 기타 무기, 파괴, 방화 등 일제의 탄압 양상까지도 구분했다. 게다가 사건의 세부 장소와 함께 연구자가 사료를 종합해 요약 설명한 글도 볼 수 있다. 서술의 근거가 되는 사료 역시 원문 이미지와 함께 제공된다. 관련된 인물과 연관된 사건, 일제의 탄압 정보까지 확인 가능하다. 특히 이번 국편DB는 전국적인 3·1운동 사건 정보를 GIS와 연동해 일제강점기와 오늘날 지도 위에 구현했다. 시위의 전체 양상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날짜와 지역을 바탕으로 검색하거나 사용자가 지도를 확대해 개별 시위를 선택해도 역시 상세한 설명으로 연결된다. 지도 위에는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도로, 철도, 경찰 및 헌병 관서의 위치도 함께 제공된다. 국사편찬위는 3·1운동의 양상을 각종 인포그래픽으로 만들어 DB 홈페이지에서 함께 제공한다. 조광 국사편찬위원장은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는 국사편찬위가 축적한 역사자료 정보화 경험과 기술이 집약된 동시에, 많은 역사연구자가 사명감을 갖고 협력해 만든 고도의 연구 결과물”이라며 “앞으로 연구가 딛고 나아갈 수 있는 탄탄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국사편찬위는 이 DB를 널리 활용할 수 있도록 시위 정보와 좌표 등을 데이터 모음으로 만들어 DB 홈페이지에 함께 공개했다. 동아일보는 이 자료를 활용해 ‘3·1운동 역사의 현장 디지털 정보관’(가제)을 구축하고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다음 달 1일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이 정보관에선 국편DB가 제공한 시위의 위치, 규모 등 정보와 본보가 1년 가까이 연재하고 있는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시리즈 등 관련 기사와 사진을 함께 볼 수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현존하는 3·1운동 관련 국내외 사료의 데이터를 종합하고 이를 지리정보시스템(GIS)과 연동해 제공하는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국편DB)가 20일 인터넷 홈페이지(db.history.go.kr/samil/)를 통해 공개됐다. 국사편찬위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2016년부터 구축한 이 DB를 바탕으로 1919년 3·1운동 시위 참여자가 모두 80만~103만 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3·1운동 참여자 수는 그동안 학계 연구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에서 50만~200만 명으로 추산돼 왔다. 이번 추계는 사료를 총 망라하는 한편, 중복과 누락을 정리해 확실한 근거를 갖는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국편DB는 일제 측 사료와 임정이 간행한 ‘한일관계사료집’, 외국인 선교사 보고 등 문서 8915건를 검토해 관련 정보 2만1407건을 추출, 정리한 결과다. 국사편찬위는 DB를 바탕으로 3·1운동 당시 사망자가 발생한 시위는 174건이고, 사망자 수는 모두 725~934명이라고 분석했다. 지역별로는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평안북도에서, 날짜별로는 1919년 3월 31일에 사망자가 가장 많았다. 국사편찬위는 “참여자·사망자 수는 동맹휴학이나 철시 등을 제외한 시위 사건만 추린 것이며, 연구가 심화되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국편DB는 3·1운동 사건을 △시위 1692건 △철시 25건 △파업 3건 △휴학·휴교 61건 △(시위)계획 333건 등 모두 2464건으로 종합했다(20일 기준). 국편DB의 각종 수치는 향후에도 자료 발굴과 연구 진전에 따라 보완될 예정이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사편찬위와 동아일보가 27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일민미술관에서 공동 주최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백년만의 귀환: 3·1운동 시위의 기록’에서 발표된다. 이번에 구축된 국편DB는 시위 등 각종 3·1운동 사건을 사건명, 시위장소, 사건개요 등 키워드로 간편히 검색할 수 있다. DB에는 3·1운동의 개별 사건들을 시기와 지역 뿐 아니라 활동 유형과 시간대에 따라 분류돼 있다. 아울러 △만세·집단항의 등 시위대의 행동양상 △깃발·문서·노래·구호·횃불 등 운동에 활용한 매체 △일반인·종교인·학생·상인·노동자 등 운동주체 △발포·도검·기타무기·파괴·방화 등 일제의 탄압 양상까지도 구분했다. 게다가 사건의 세부 장소와 함께 연구자가 사료를 종합해 요약 설명한 글도 볼 수 있다. 서술의 근거가 되는 사료 역시 원문 이미지와 함께 제공된다. 관련된 인물과 연관된 사건, 일제의 탄압 정보까지 확인 가능하다. 특히 이번 국편DB는 전국적인 삼일운동 사건정보를 GIS(지리정보시스템)와 연동해 일제강점기와 오늘날 지도 위에 구현했다. 시위의 전체 양상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날짜·지역을 바탕으로 검색하거나 사용자가 지도를 확대해 개별 시위를 선택해도 역시 상세한 설명으로 연결된다. 지도 위에는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도로, 철도, 경찰 및 헌병 관서의 위치도 함께 제공된다. 국사편찬위는 3·1운동의 양상을 각종 인포그래픽으로 만들어 DB 홈페이지에서 함께 제공한다. 조광 국사편찬위원장은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는 국사편찬위가 축적한 역사자료 정보화 경험과 기술이 집약된 동시에, 많은 역사연구자들이 사명감을 갖고 협력해 만든 고도의 연구 결과물”이라며 “앞으로 연구가 딛고 나아갈 수 있는 탄탄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국사편찬위는 이 DB를 널리 활용할 수 있도록 시위 정보와 좌표 등을 데이터 모음으로 만들어 DB홈페이지에 함께 공개했다. 동아일보는 이 자료를 활용해 ‘3·1운동 역사의 현장 디지털 정보관’(가제)을 구축하고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다음달 1일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이 정보관에선 국편DB가 제공한 시위의 위치·규모 등 정보와 본보가 1년 가까이 연재하고 있는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시리즈 등 관련 기사와 사진을 함께 볼 수 있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We herewith proclaim….”(영어) “吾等今玆宣言….”(중국어) “Nous, les representants….”(프랑스어) “Por la presente proclamamos….”(스페인어) 조선은 독립국이고, 조선인은 자주민이라고 세계만방에 밝힌 기미독립선언서는 여러 언어로 번역돼 각국으로 퍼져나가며 독립의 당위성과 의지를 명백하게 전했다. 김도형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은 22일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기미독립선언서와 조선광문회’(주최 ‘3·1정신 조선광문회 복원위원회’)에서 독립선언서의 국외 전파 과정을 담은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에 따르면 1919년 3월 1일 배포된 독립선언서 최종본이 중국어로 처음 번역돼 실린 건 톈진에서 창간돼 영향력이 컸던 신문 ‘익세보(益世報)’ 1919년 3월 11일자다. ‘짓밟아도 죽지 않는 기자의 혼(최殘不死之箕子魂)’이라는 제목의 기사 가운데 독립선언서 전문(全文)이 실렸다. 기사에는 번역본을 안중근 의사의 동생이 보냈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김 연구위원은 “실제 번역자는 다른 인물이고, 신문에 쉽게 게재할 목적으로 안중근 동생이라며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또 적어도 3월 20일경에는 인쇄본 선언서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중국과 러시아 지역으로 전달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독립선언서 영역본은 지금까지 5종류가 발견됐다. 전문을 처음으로 보도한 신문은 하와이의 ‘퍼시픽 커머셜 애드버타이저’ 3월 28일자 1면이다. ‘한국 독립선언서 공개되다(Korean Independence Declaration Bared)’라는 제목의 톱기사와 함께 ‘Manifesto(선언서)’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이후 미국 신문들은 거의 이 번역본을 전재하고 있다. 김 연구위원에 따르면 여기 실린 선언서는 캘리포니아 지역신문 ‘새크라멘토 비(Sacramento Bee)’의 발행인이자 ‘원동특별통신원’이었던 매클래치가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1919년 2월 25일 서울에 들어온 매클래치는 3월 4일 서울에서 출발해 일본을 거쳐 호놀룰루에 들렀다. 다시 미국 본토로 와서 독립선언서를 AP통신사에 전했다.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 ‘국민보’ 기사는 매클래치가 독립선언서를 구두 속에 숨겨서 가져왔다고 했다. 김 연구위원은 “미국인 광산업자이자 AP통신 서울통신원이었던 앨버트 테일러가 직접 또는 동생을 통해 매클래치에게 독립선언서를 전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영역은 테일러의 집사인 ‘김 주사’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덕희 하와이한인이민연구소장은 “하와이 ‘애드버타이저’는 1919년 4월 30일 무오독립선언서 영역본 역시 게재했다”고 밝혔다. 이 연구는 다음 달 15일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 주최로 3·1절 독립운동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된다. 이 밖에 3·1운동 당시 한국에 있던 외국인 선교사 등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영역해 해외로 전파했고, 영문학자이며 시인인 변영로(1897∼1961)도 번역했다고 증언했다. 김 연구위원은 “서울 경신학교 교장인 쿤스가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에 보낸 ‘영문 독립선언서’는 번역자가 한국인이라고 나온다”며 “이것이 변영로 번역본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독립선언서는 멀리 멕시코에서 스페인어로도 번역됐다. 기미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한 달여가 지난 1919년 4월 15일 멕시코 교민들은 경축식을 열고 독립선언서를 발행했다. ‘신한민보’ 5월 20일자에는 한인들이 번역한 독립선언서를 멕시코 각처의 교회에 보내고 독립 의지를 전파했다고 전했다. 교민 이순녀(Rocardo Lee)가 번역해 당대 3·1절 기념식에서 사용한 번역본이 멕시코 메리다 한인회에 남아 있다. 프랑스어 번역본은 1919년 9월 파리위원부 통신국에서 발행하는 선전책자인 ‘한국의 독립과 평화(L'indépendance de la Corée et la Paix)’ 부록에 전문이 실렸고, 월간잡지 ‘자유한국(la Corée Libre)’ 제2호(1920. 6)에도 실렸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불특파위원인 서영해가 1929년 간행한 자전적 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Autour d’une vie coreenne)’에도 게재됐다. 러시아어 번역본은 3·1운동 당시 서울의 러시아 총영사관에서 번역해 3월 31일 본국에 보낸 문서에 첨부돼 있다. 모스크바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에 소장돼 있다. (L'indépendance de la Corée et la Paix)’ 부록에 전문이 실렸고, 월간잡지 ‘자유한국(la Corée Libre)’ 제2호(1920. 6)에도 실렸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불특파위원인 서영해가 1929년 간행한 자전적 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Autour d’une vie coreenne)’에도 게재됐다. 러시아어 번역본은 3·1운동 당시 서울의 러시아 총영사관에서 번역해 3월 31일 본국에 보낸 문서에 첨부돼 있다. 모스크바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에 소장돼 있다. 김 연구위원은 “지금까지 발견된 독립선언서 번역본은 중국어와 영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등 5개 언어지만 앞으로도 더 다양한 외국어본이 발굴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