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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너무 반갑다. 솔직해지자. 요즘 주위에 은근히 채식주의자가 많다. 그들과 겸상하면 식도락(樂)은 식도애(哀)가 되곤 했다. 당위성마저 밥상에 오르면 더 골치 아프다. ‘생명의 존엄’이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질 않았다. 그런데 채식에 문제가 있다니. 앗싸, 대놓고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첫 장을 넘기자마자 저자는 진짜 ‘배신’을 때린다. 물론 이 책, 채식의 문제점을 샅샅이 지적한다. 그렇다고 결코 육식을 옹호하진 않는단 소리다. 굳이 순위를 매기자면, 혀의 현혹에 사로잡힌 평범한 우리네는 맨 하바리이다. 어쩌란 거야, 젠장. 지지 철회. 갈팡질팡하게 만드는 저자는 뭐하는 사람인가. 환경운동가니 페미니스트니 거창한 이력은 관심 없다. 16세부터 20년 넘게 ‘비건(vegan)’으로 살아왔단다. 비건은 우유 같은 동물성 식품조차 거부하는 극단적 채식주의자. 농사도 직접 지어 자급자족을 실천했다. 근데 2009년쯤부터 다시 고기를 먹었다. 왜? 채식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채식의 배신’이 혁파하려는 채식주의의 함정은 무엇인가.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가장 먼저 도덕적 맹점이다. 위에서도 말했듯, 채식엔 다른 생물을 귀하게 여기는 정신이 깔려 있다. 여기에 저자는 ‘돌직구’를 날린다. 그럼 당신네가 선호하는 곡물을 키우려면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는지 아는가. 옥수수가 영글려면 동물의 뼈와 살과 분뇨가 필요하다. 질소와 무기질, 인은 경작에 필수 요소니까. 대안이 없냐고? 화학비료는 더 무수한 생명을 앗아간다. 특히 쌀과 밀 같은 주요 농작물은 대부분 일년초로 해마다 땅을 갈아엎는다. 저자가 “농업이야말로 생태계를 파괴하는 ‘인종 청소’ 수준의 범죄”라고 말하는 이유다. 정치적 근거도 희박하다. 채식주의자들은 고기를 얻으려 낭비되는 에너지와 비용을 비난한다. 세계의 기아를 해결하려면 곡식 위주로 식단을 바꿔야 하노라 목청 높인다. 그러나 저자가 볼 때 곡물은 ‘줄기에 달린 화석연료’와 다름없다. 대형화 기계화된 농업에 엄청난 석유와 천연가스가 소요된다. 마지막으로 영양학적으로 채식이 우월하단 것도 환상이다. 저자는 채식으로 퇴행성 관절 질환과 저혈당증, 우울증을 얻었다. 거짓말 같다고? 채식주의자들이 만병통치약처럼 받드는 콩을 보자. 책에 따르면 프랑스는 분유에 콩의 식물성 에스트로겐을 넣지 말라고 명령했다. 갑상샘 기능을 저해하는 탓이다. 이스라엘 보건부는 콩이 유방암 발생률을 높인다고 경고했다. 저자의 공격은 신랄하지만 설득력 높다. 20여 년 동안 자신이 그렇게 살아봤기 때문이다. 영양적 불균형을 몸으로 겪었고, 스스로 밭을 일구며 농업의 폐해를 목도했다. 저자라고 긴 세월 믿어 의심치 않던 채식의 권능을 저버리고 싶었겠는가. 하지만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을수록 절망적이었단다. 그런 이가 하는 말이니 구구절절 와 닿는다. 다만 너무 주장이 앞서가는 분위기는 아쉽다. 인구가 넘치니 아이를 갖지 말자거나 차를 더이상 몰지 말자는 결론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좀 차분하게 학술적으로 접근했으면 어땠을까. 같은 말도 강요로 느껴지면 거부감부터 생기는 게 인지상정. 살살 꼬드기는 묘미가 있었더라면. 하긴, 배신당하고 냉정하기가 어디 쉬울까.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한국편집기자협회(회장 박문홍)는 제137회 이달의 편집상 수상작으로 동아일보 김남준 기자(사진)의 ‘원칙 朴정부에 반칙 헌재소장?’(종합부문) 등 4편을 선정해 21일 발표했다. 종합부문은 김 기자와 함께 헤럴드경제 유재훈 기자(당신도 이 자리에서 당당할 수 있습니까?), 경제·사회부문은 아시아경제 권수연 차장(삼양식품, 하얀 국물 빨간 국물), 피처부문은 경인일보 김휘만 기자(첨단·스타일 타고 온 신의 한수)가 수상했다.}

20세기 초까지 구전됐던 조선시대 가사(歌辭) ‘화조가(花鳥歌)’의 지은이가 확인됐다. 화조가는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세자와 궁녀의 합작품이었다.신경숙 한성대 국문학과 교수는 21일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소가 소장한 19세기 고서 ‘ㅱ가사’ 등에서 화조가가 효명세자(孝明世子·1809∼1830)와 조맹화라는 궁녀가 함께 지은 가사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를 찾았다”고 밝혔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하던 시절에 진찬(進饌·왕실 연회)에서 지어진 것이라는 설명이다.화조가는 4음보 1행을 이루는 한글 가사. 실린 책에 따라 차이를 보이나 일반적으로 전체 44∼48행 안팎이다. 태평성대를 맞아 왕실을 찬양하고 꽃과 새를 벗 삼아 살겠다는 내용이다. 1947년 ‘조선민요집성’에는 주로 영남에서 전해진 내방가사로 소개됐다. 다만 학계는 가사에 집춘문과 춘당대 같은 궁궐 구조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궁궐 사정을 잘 아는 이가 지었을 것으로 짐작해 왔다.그러나 신 교수는 화조가가 실린 고서 17종을 검토해 지은이를 유추할 수 있는 흔적 3가지를 발견했다. 먼저 가사 모음집인 ‘ㅱ가사’에 실린 ‘화쵸가’ 서두에 “진쟝각 죠맹화는 화쵸가를 지은지라”는 대목이 나온다. 진장각(珍藏閣)은 창덕궁 연경당 터에 있던 건물로 선대 임금과 중국 황제의 어진(御眞)을 모시던 곳이다. 또 단국대가 소장한 19세기 두루마리 필사본은 제목 자체가 ‘익종대왕(효명세자) 화소가’다.1940년 조선어학회가 발행한 ‘한글’ 8권에도 단서가 있다. “우에 두 귀글(2행)은 인종대왕(익종의 와전) 지으시고 사십육귀(46행)난 주맹희라 하는 궁녀 지은 게라”라는 부가설명이 나온다. 신 교수는 “세 자료를 종합하면 궁녀가 지어올린 가사에 세자가 화답해 두 문장을 하사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민간으로 퍼지며 출처가 불분명해졌다는 설명이다.남녀가 유별한 유교사회, 그것도 궁중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조명철 고려대 사학과 교수는 “지엄한 조선 왕실에서 세자와 궁녀가 공개적으로 함께 글을 짓는 건 불가능하다”며 “신분을 뛰어넘은 ‘은밀한 로맨스’로 읽히기도 한다”고 말했다.하지만 신 교수는 시대상을 감안할 때 이 작품은 ‘정치적 산물’이라고 해석했다. 효명세자는 순조의 맏아들로 태어나 21세에 갑작스레 훙서(薨逝)했다.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던 19세기 초, 병약한 임금을 대신해 왕권을 회복하려 애썼다. 짧은 대리청정(4년)이었지만 인재를 등용하고 법 집행이 엄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진장각 같은 주요 처소의 궁녀라면 이 상황을 모를 리 없다. 따라서 화조가는 왕실을 찬양한 ‘헌정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가사 속 “요순성대 다시차자 태평화조 잔채(잔치)한다”가 이를 뒷받침한다. 대리청정을 요순시대로 묘사한 것이다.뒷자락에 나오는 ‘대명화(大明花)’와 ‘대보단(大報壇)’도 같은 맥락이다. 대명화는 안평대군이 명나라에서 하사받은 꽃, 대보단은 창덕궁의 명 황제 제단을 말한다. 둘은 조선 임금이 ‘절대불변의 군신관계’를 강조할 때 즐겨 쓰던 정치적 아이콘이다. 명과의 의리를 지키듯 왕에게 충성하란 뜻이다. 조맹화도 이를 상기시키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하다.명민한 효명세자는 이를 적극 활용했다. 겨우 두 문장을 달았으나 메시지는 심오하다. ‘어와 가소롭다 남아평생 가소롭다/청츈사업 바랏드니 백두옹이 대단말가’는 얼핏 보면 노년의 한탄으로 들린다. 10대 세자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다. 신 교수는 “세월이 금세 흐르니 청춘사업(국정 쇄신의 대업)을 서두르겠다는 반어적 표현”이라고 말했다. 구전요로 묻힐 뻔한 가사에 왕권강화의 기치를 내걸었다 안타깝게 사그라진 왕세자의 복심(腹心)이 담겨있었던 것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조선시대 궁궐 회화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국보 제249호 ‘동궐도(東闕圖)’ 진본 2점이 사상 처음으로 함께 전시된다. 어쩌면 마지막 전시가 될지도 모른다.고려대박물관은 18일 “고려대가 소장한 화첩으로 된 동궐도와 부산 동아대박물관의 병풍 형태 동궐도를 전시하는 특별전 ‘동궐’을 26일부터 개최한다”라고 밝혔다. 고려대의 16권 화첩 전체와 동아대 소장본이 같이 전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해 동아대에서 열린 전시에서는 고려대 소장본 가운데 4권만 공개됐다.동궐도는 모두 펼칠 경우 가로세로 578.2×274cm에 이르는 대형 회화. 정궁(正宮)인 경복궁 동쪽에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 전체를 동남쪽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려졌다. 순조 때인 1826∼1830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학계에서는 고려대 소장본에 ‘인(人)’이란 표제가 붙어 있어 천·지·인 3점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는 화첩을 병풍으로 만들면서 표제가 빠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아대 소장본까지 2점만 전해진다. 두 동궐도는 건물 배치나 모양새는 거의 똑같지만 일부 채색과 궁궐 안팎 나무나 언덕 묘사에서 약간 차이가 난다.동궐도는 당시 최고의 실력을 지닌 도화서 화원들이 총동원된 역작이란 게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배경이 되는 산과 언덕은 남종화(南宗畵·문인화) 풍으로 그렸고, 궁궐 건물은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듯 원근과 비례까지 고려해 정밀하게 표현했다. 특히 교량이나 담장은 물론이고 정원에 배치한 나무와 돌까지 세밀하게 묘사해 당시 궁궐 배치나 조경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동궐도는 이번 전시를 끝으로 무기한 수장고에 보관돼 다음 관람을 기약할 수 없다. 비단에 그려진, 200년 가까이 된 그림이라 훼손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조명철 고려대박물관장은 “안타깝지만 이번 전시가 우리 세대에선 일반인이 관람하는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이번 특별전에는 경희궁을 그린 ‘서궐도안’(보물 제1534호)과 김정호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서울 전도인 ‘수선전도 목판’(보물 제853호), 17세기 조선 천문시계 ‘혼천시계’(국보 제230호)도 함께 전시된다. 5월 12일까지. 월요일·공휴일 휴관. 무료. 문의 02-3290-1514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이럴 때 난감하다. 아는 이의 책 서평 쓰기 참 거시기하다. 그것도 선밴데. 불과 며칠 전 술도 한잔 말았다(분명 섞었다). 책날개에 씩 웃는 사진이 어깨를 짓누른다. 그래도 어쩌랴. 이 양반 책, 건너뛸 수 없다. 좋으니까. 소개 그대로 “1993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우리 문화재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널리 알리는 글을” 수없이 썼다. 문화재 담당 기자가 됐을 때, 모든 선임이 권하는 첫 번째가 ‘그의 기사와 책들을 읽어보라’다. 이 책도 그런 문화재 사랑이 켜켜이 이어진 산물이다. 솔직히 처음 책을 폈을 땐 ‘또 백자철화끈무늬병이야’ 하며 입도 삐죽거렸다. 술병에 끈을 그린 보물 1060호는 저자가 무척 아껴 책마다 소개해왔다. 전작들의 개정판 수준일까 봐 우려도 됐다. 그러나 역시 공력이 어디 갈까. 페이지를 넘길수록 슬렁슬렁 빠져든다. 이 책은 ‘교차로 신호등’ 성격이 짙다. 요즘 문화답사가 많이 친숙해졌다. 안내서는 물론이고 온라인 자료도 풍부하다. 하지만 여러 갈래를 맞닥뜨린 듯 갈팡질팡할 때가 많다. 저자는 딱 그런 대목에서 어느 골목으로 꺾을지 넌지시 일러준다. 국보와 보물,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우리의 아름다움’이 서식하는 지점을 되짚는다. 그런 뜻에서 책은 고구마줄기 같은 매력이 넘친다. 일단 읽다 보면 호기심이 불끈한다. 충실한 화보가 갖춰졌지만 글로만 소개된 문화재도 꽤나 있다. 잠시 덮고 수차례 인터넷으로 실물을 찾아보게 만든다. 황집중의 ‘묵포도도’를 마주했을 땐 5만 원권 지폐를 한참 들여다봤다(이유는 책에). 서울 행당동 ‘살곶이다리’는 숱하게 지나다녔건만 무심했는데…. 뭐든 관심을 둬야 보인다는 걸 배운다. 그뿐 아니다. ‘한국미…’는 다른 책도 찾게 하는 고구마줄기다. 기억도 아련했던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꺼내들었다. 저자의 전작 ‘손안의 박물관’ ‘국보이야기’도 다시 펴봤다. 평자에 따라, 관점에 따라 문화재는 다양한 해석과 표현을 낳는다. 그걸 담백하게 일깨우니 텍스트로 이만한 입문서가 없다. 아쉬운 건 제목이다. 저자는 만나는 법을 설파하지 않는다. 강요도 단정도 않는다. 오히려 만나러 가다 들른 그늘막에 가깝다. 냉주 한잔 놓고 나누는 유쾌한 담소. 차라리 ‘한국미를 맛보는 길’이 어떨까. 갑자기 이번 주말, 충북 진천 ‘농다리’를 건너고 싶다. 5만 원 들고 쇠고기 사먹게.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국보 제1호’ 숭례문이 드디어 돌아왔다. 10일로 화재를 겪은 지 5년이 된 서울 중구 남대문로의 숭례문이 14일 언론에 공개됐다. 현재 숭례문 자체는 완공된 상태. 다만 방재 시설을 관리할 관리동과 잔디 공사가 남아 일반 공개는 4월쯤 이뤄진다. 화재 수습 뒤 2010년 1월부터 본격적인 복구가 시작된 숭례문은 서울시 지방비를 포함해 255억 원이 넘는 예산이 투입됐다. 2008년 화재로 무너지기 전과 무엇이 달라졌을까.○ 전통 기법에 충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변화는 숭례문에 ‘날개’가 생긴 것이다. 성곽을 동편 53m, 서편 16m가량 복원했다. 숭례문이 덩그러니 홀로 선 건축물이 아니라 서울을 드나들던 대문이라는 원 취지를 반영했다. 숭례문에 오르는 동쪽 계단의 폭도 2.9m에서 5m로 늘렸다.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옛 흔적을 따랐다. 하지만 양쪽 성곽의 길이가 달라 한쪽으로 기운 듯한 어색함이 있다. 서쪽 성곽도 비슷한 길이로 늘리자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도로는 차가 다닐 수 있게 다리나 터널 형태로 만들자는 의견도 있다. 1층 마루도 ‘조선고적도보’ 등 고증에 따라 바꿨다. 1960년대 해체 공사 당시 정사각형에 가까운 우물마루 형태로 설치했으나 긴 판재를 까는 장마루로 변경했다. 조선시대 군사시설은 원래 모두 장마루를 깔았다는 게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한때 인터넷에서 일본만화 ‘드래곤볼’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화제가 됐던 성문 천장의 ‘쌍룡도’도 해체 공사 전 사진을 기준으로 했다. 실제로 보니 엄숙함보다는 해학성이 짙었다. 문화재청 숭례문복구단의 박왕희 부단장은 “단청(丹靑)도 당시 기준에 맞춰 복원했기에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라며 “용에는 임금의 어진 정치를 상징하는 뜻도 깃들었다”고 말했다. 쌍룡도와 맞췄다는 단청은 이번 복원에서 가장 의미 있는 성과 가운데 하나다. 이전 단청은 화학 안료(페인트)를 사용하고 무늬도 변형된 것이었다. 이번엔 조선 전기의 무늬를 넣고 돌가루로 만드는 전통 안료를 썼다. 국내에선 전통 안료 기법이 사라져 안료와 접착제로 쓰이는 아교를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했다. 기와 역시 기계로 찍어 낸 공장제 기와에서 기와 틀로 직접 구운 전통 기와로 교체했다.○ 용마루와 잡상도 변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 채기 힘든 변화도 있다. 일단 숭례문 지반 자체가 화재 전보다 30∼50cm 낮아졌다. 발굴조사에 따라 조선 후기 지반 높이에 맞춘 것이다. 지붕의 용마루도 바뀌었다. 이전 15.7m 길이를 16.6m로 늘렸다. 용마루와 이어지는 우진각지붕의 추녀마루도 다소 각이 서고 짧아졌다. 1층 추녀마루의 잡상(雜像)은 8개에서 7개로 줄었다. 모두 옛 사진자료와 도면을 참조했다. 2층 잡상은 9개 그대로 뒀다. 이날은 천으로 덮어 뒀지만, 현판에도 변화가 있다. 복원 과정에서 기존 숭례문 현판이 6·25전쟁 때 부서진 뒤 이후 수리 과정에서 잘못 보수된 사실이 밝혀졌다. ‘崇(숭)’자 ‘禮(례)’ 자의 획이 다소 변형된 것을 바로잡았다. 이번 복원에선 양녕대군이 쓴 원형을 살리기 위해 양녕대군 사당인 서울 상도동 지덕사에 소장된 탁본 자료를 바탕으로 했다. 화재로 불탔기에 방재 시설은 문화재청이 신경을 가장 많이 쓴 부분이다. 스프링클러와 폐쇄회로(CC)TV, 화재감지기를 설치하고 이를 조정하는 관리동에만 17억 원 이상을 투입했다. 화재로 인해 모든 것을 교체한 것은 아니다. 기존 석축 가운데 쓸 만한 것은 대부분 다시 썼다. 새로 쓴 석재와 명암 차가 많지만 전쟁 때 생긴 탄환자국 역시 역사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2층 누각도 화재로 탔던 목재 가운데 90% 이상을 그대로 썼다. 불에 그슬린 흔적이 뚜렷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야 할 우리 역사다. 김찬 문화재청장은 “화재로 잃어버렸던 국보 1호를 최대한 전통 기법을 사용해 조선 말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하려 노력했다”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강수지 인턴기자 서울대 의류학과 4년}

“미래유산으로 선정된들 뭐합니까. 수십 년째 손 못 쓰고 훼손은 계속되는데….” 지난해 서울시가 발표한 미래유산 프로젝트는 문화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시민 추천을 받은 근·현대 문화재들을 발굴, 보존하겠다는 의도에 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냈다. 서울시는 접수한 1000여 건을 미래유산보존위원회에서 심사해 올 하반기 보존 대상을 확정지을 계획이다. 현재 유력 후보 가운데는 서울 종로구 창신동 ‘박수근 고택’과 행촌동에 있는 ‘딜쿠샤’도 들어있다. 고택은 화가 박수근(1914∼1965)이 거주하며 대표작 ‘농악’ ‘나무와 여인’ 등을 그린 현장. 힌두어로 ‘행복한 마음, 이상향’이란 뜻인 딜쿠샤는 일제강점기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미국 언론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가 살던 집이다. 하지만 한 전문가의 넋두리처럼 두 곳 모두 훼손 상태가 심각하다. 2007년 등록문화재로 지정 예고까지 됐지만 상황이 나아지질 않는 것도 비슷하다.○ 훼손 심한 박수근 고택 6일 오후 창신동 지하철 동묘앞 역 인근. 박수근 고택을 마주한 첫 느낌은 어지간히 당황스러웠다. 스마트폰 지도를 검색해 겨우 찾았건만 대로변에 자리한 고택은 형태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국밥 차림표를 내붙인 선술집은 굵은 자물쇠가 달린 채 잠겨 있었다. 문을 두드려 봐도 기척이 없고, 소유주로 알려진 유모 씨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인근 빌딩에서 내려다보니 일부 남은 기와지붕만이 이곳이 고택임을 가늠케 했다. 박수근 고택의 보존 여론이 인 것은 어제오늘이 아니다. 화가가 1953∼1963년 살았던 자택이면서 소설가 박완서(1931∼2011)의 등단 작품인 ‘나목’의 배경무대라 문화사적 의미가 크다. 하지만 소유주가 지정을 거부해 고택은 사면초가에 빠졌다. 문화재청은 “현행법상 건물주가 응하지 않으면 강제로 지정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소유주는 고택이 재정비촉진지구(뉴타운)에 들어가 있는데 문화재로 지정되면 금전적 손해를 볼까봐 우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와 문화유산국민신탁은 고택을 사들이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비용 문제로 무산된 것으로 전해졌다. 김수정 서울시 역사문화재과 조사연구팀장은 “뉴타운 담당 부서에 사업을 추진해도 고택은 존치해주길 요청한 상태”라며 “미래유산으로 선정된다면 다각도로 지원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처참한 몰골의 ‘딜쿠샤’ 딜쿠샤는 3·1운동을 해외로 알리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UPI통신 서울특파원이던 테일러는 독립선언서를 확보해 몰래 이곳에 숨겼다가 해외로 타전했다. 일본 군경이 쳐들어왔으나 출산한 아내의 침대 밑에 감춰 빼앗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결국 테일러는 이 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고, 1942년 추방돼 미국으로 돌아갔다. 8일 점심 무렵에 찾은 딜쿠샤는 이런 역사적 의미가 무색하리만치 처참한 몰골이었다. 붉은 벽돌로 지은 2층집의 외형은 분명 한 세기 전 근대건축양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름에 담긴 행복한 마음은 손톱만큼도 묻어나질 않았다. 대낮인데도 공포영화에 나오는 폐가 기운이 풍겼다. 건물 옆에 무허가가 분명한 목조 판잣집까지 덧붙어 전경을 망쳤다. 딜쿠샤는 한국자산관리공사가 관리하는 국유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빈곤층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퇴거 요청에도 꿈쩍도 않는다. 현재 약 17가구가 살고 있으나 정확한 신원은 파악되지 않았다. 김수정 팀장은 “1년에 몇 번씩 현장을 방문해 대화를 시도하지만 문도 안 열어준다”며 안타까워했다.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활용홍보실 팀장은 “소유자와 거주자에게 공적 문화재의 가치를 인식시키고 정부와 지자체가 힘을 모아 적절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강수지 인턴기자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

‘권력’이란 말은 어쩐지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하지만 저자는 권력을 인간의 본질로 보고 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순수 역시 무기력과 절망으로 뒤덮인 ‘거짓순수’로 변질될 경우 오히려 사회에 해를 끼칠 수 있다. 단순히 선악을 분리하기보다는 균형감을 갖고 적절하게 발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게 요지. 저자는 미국에서 실존주의를 심리학에 결합해 인간 탐구의 폭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 1972년 작이라 시의성은 다소 떨어진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싫다는데 왜 왔소? 설이라고 특별한가. 인사는 무슨….” 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반포동 자택에서 만난 이석희 여사는 짐짓 역정부터 내셨다. 며칠째 간청해도 “신문 날 일 (한 게) 없다”며 한사코 거절하던 품 그대로였다. 근데 마침, 동아일보를 읽고 계신 게 아닌가. 따님인 이인호 전 서울대 교수가 “거기 기자예요”라고 거들기에, 냉큼 덕담을 청했더니 그제야 자리를 고쳐 앉으셨다. 구한말 규장각 부제학을 지냈고 이상설 이시영 선생 등과 친교를 쌓았던 애국지사 이범세(李範世·1874∼1940) 선생의 외동딸인 이 여사는 올해로 우리 나이 100세를 맞으셨다. 1914년 경기 양평에서 태어나 이 땅의 100년 역사를 지켜봤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올해 상반기 내놓을 이 여사의 ‘생애사(史)’에는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면서 그가 체험하고 목격한 내용이 담겼다. 그의 할아버지는 간도를 뺏으려는 청나라의 강압에 맞서 백두산정계비에 규정된 영토를 지키려 애썼던 조선 말의 문신 규당 이중하(圭堂 李重夏·1846∼1917)이다. 명문가니 어린 시절 설은 꽤나 풍성했을 터. 허나 이 여사는 고개부터 저었다. “물론 차례야 정성을 다했지. 하지만 조부나 아버지나 ‘나라 뺏기고 무슨 호사냐’며 최대한 간소하게 치르자고 하셨어요. 선조에게 부끄럽다며 1911년 양평에 낙향한 뒤엔 평소 소반에 김치만 올리게 하셨으니…. 설날 친지들이 인사 와도 사랑방에서는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어요.” 그래도 어린 이 여사에게 설은 다복함 그 자체였다.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 넉넉했다. 없는 살림에도 마을 모두 서로 돕고 나눴다. 썰매 자치기 연날리기…. 아이들은 손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놀았다. 아버지의 세뱃돈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 여사가 받아서가 아니다. 가세 기운 집안 아이에겐 꼭 쌈짓돈을 푸셨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설 풍경. 그 많던 차례와 제사를 묵묵히 건사하던 어머니. “요즘 설 쇠는 건 말도 못 꺼내요. 동짓날 팥죽차례부터 설날 떡국차례, 대보름 약식차례까지 챙겼소. 강정은 한 달 전부터 준비해야 때를 맞춰. 객들은 웬만해? 이상설 이시영 선생도 수시로 드나드셨지. 손님상 마련하다 하루가 가요. 그래도 어머님은 싫은 내색이 없으셨어. 그게 본분이라 여기고 진심을 다하신 거요.” 그렇다고 설 기억이 마냥 유쾌하진 않다. 일제강점기 말에 설은 오히려 쓰라린 상처였다. 서울로 시집을 갔던 그에게 고기, 생선은커녕 설탕 한 봉지 구하기가 어려웠다. 멀건 죽으로 연명하느라 젖이 안 나와 갓난쟁이도 배를 곯기 일쑤였다. 차례상에 마음만 올리고 눈물 훔치기도 수차례. 큰아들은 광복 뒤 마을에서 잡은 쇠고기를 먹고 탈이 나기도 했다. 한의사가 진맥을 짚더니 “안 먹던 걸 먹어 몸이 놀랐다”며 혀를 찼다. “그래도 나라 찾았으니 기쁨이야 더할 나위 없죠. 이젠 살 만하려나 했는데, 덜컥 6·25사변이 터진 거라. 남편 따라 아이들 들쳐 업고 부산으로 피란 갔죠. 근데 몸져누운 시할머니 모시느라 시부모님은 서울에 남으셨어요. 어찌나 죄송스럽던지…. 3년 만에 돌아와 여쭤보니 하루같이 물 한 그릇 떠놓고 빌었답디다. 자식들 무탈하게 해 달라고.” 양가 부모님의 마음이 이어진 걸까. 이후 곡절이 없었을까만 이 여사는 3남 3녀를 번듯하게 키워냈다. 교수였던 큰딸은 주핀란드, 주러시아 대사로서 ‘한국 최초의 여성 대사’란 명예도 얻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이 여사는 돌을 맞은 증손주의 굴레를 재봉틀로 직접 지었다. 그런 여사에게 요즘 설 풍경은 어찌 보일까. 한사코 “시대 따라 가는 거지, 괜한 훈수는 옳지 않다”며 입을 다물었다. 슬쩍 ‘요즘은 명절에 고향 가도 마을이 썰렁하다’고 운을 떼니 한참 창밖을 내다보다 말문을 열었다. “몇 해 전인가…. 이웃에 독일인 부부가 살았어요. 근데 이 양반들이 더 한국적이야. 만나면 반갑게 안부 묻고, 어른이라고 꾸벅 인사하고. 명절엔 음식 했다며 들고 옵디다. 떠날 때도 고마웠다며 찾아왔어요. 요새 우리네는 그런가. 동네에서 눈이 마주쳐도 멀뚱멀뚱. 나누고 아껴주는 설 인심은 욕심이 되어버렸어요.” 인터뷰가 끝날 무렵, 뜬금없는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근데 선생님. 한참 아래 손자뻘인데, 왜 그리 존댓말을 쓰세요?” “보고 배운 게 그래요. 아버진 그 시절에 행랑아범도 이름을 부르며 존대했어요. 아래채 일꾼 밥도 똑같이 지어 나눠 먹었으니. 항상 말씀하셨어요. ‘뭐든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굳이 설 덕담 하자면, 어릴 때부터 그런 마음가짐을 익히는 게 중요해요. 세 살 버릇 백 살 가니까.”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최근 국내 문화재계에선 두 가지 ‘사건’이 꽤나 시끄러웠다. 먼저 지난달 중순 중국 국가문물국은 지린 성에서 고구려 비석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열흘쯤 뒤엔, 일본에서 도난당한 국보급 불상 2점이 국내로 밀반입됐다 들통 나 이목을 집중시켰다. 두 가지 모두 학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파장이 컸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남은 것으로 확인된 고구려 비석은 광개토대왕비와 충주고구려비뿐이었다. 그런데 세 번째 비석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고고학적 대(大)발견’이란 수사도 그리 과하진 않다. 게다가 국내 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 비석은 광개토대왕이 세운 수묘비(守墓碑)로 셋 중에 가장 이른 시기에 세운 비석일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불상은 범인이 잡힌 뒤 오히려 후폭풍이 더 거셌다. 두 불상은 일본 나가사키 현 쓰시마 시 가이진 신사와 관음사에 각각 모셔져 있던 것들이다. 문제는 금동여래입상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금동관음보살좌상은 1330년 고려시대에 조성된 우리 보물이란 점이다. 다시 말해, 일본에 ‘빼앗겼던’ 문화재인데 돌려주지 말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불교계는 물론 몇몇 국회의원까지 나서 반환을 반대하고 있다. 두 사안은 서로 결이 다르다. 하지만 묘하게도 들여다보고 곱씹을수록 입맛이 씁쓸해지는 공통점이 있다. 분명 우리 문화재인데 딱 잘라 우리 것이라 말하기 애매하다. 감정적으로 얘기하기도, 논리나 법만 갖고 따지기도 난감하다. 홍길동의 ‘호부호형’도 아니고…. 난제도 이런 난제가 없다. 일단 고구려 비석부터 되짚어보자. 아무리 역사에 단언은 없다지만, 너무 가정과 추측이 넘친다. 처음부터 끝까지 “만약 …하다면” “…으로 보인다”로 가득하다. 왜? 국내에선 실물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연구자료로 삼는 탁본도 직접 뜬 게 아니라 중국 측이 공개한 사진이다. 진품을 감정하는데 인터넷 전송 파일만으로 판단하는 격이다. 열악한 상황에도 실마리를 구하려 분투하는 국내 학자들을 비하할 의도는 전혀 없다. 하지만 중국이 비석을 보여주길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우리 신세가 왠지 딱하다. 불상도 답답하긴 엇비슷하다. 분명 우리 선조가 만든 문화재니 속내야 국내에 남겨두고 싶다. 하지만 일본에서 도난당한 게 확실하면 마냥 우기기도 께름칙하다. 물론 부당하게 강탈당한 보물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그걸 어찌 증명해야 하나. 신라인들이 호의로 선물했거나 고려가 일본의 요청에 감읍해 보냈다면? 게다가 신중치 못하게 대처하다간, 앞으로 국외소재 문화재 연구나 교류전시에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게 틀림없다. 물론 이런 우려가 기우에 그칠 수도 있다. 중국 정부가 흔쾌히 공개할지도, 불상 역시 곧 원만하게 마무리될지 모른다. 다만 이럴 때마다 자기 입장만 내세우는 이들의 목소리는 불편하다. 그런다고 뭐가 잘 해결된 적이 있었던가. 가끔은 열정이 참 부담스럽다.정양환 문화부 기자 ray@donga.com}

요즘은 거의 잊혀졌지만 선조들은 ‘세화(歲畵) 나누기’를 중요한 설맞이 행사로 치렀다. 세화란 설날 당일 새해를 송축하고 재앙을 막는다는 뜻에서 왕과 신하들이 주고받았던 그림을 일컫는다. 주로 판화로 찍어서 돌렸지만 드물게는 회화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도화서에서 수성(壽星·동양 별자리 28수 중 남극노인성)에 사는 선녀와 직일신장(直日神將·그날의 액운을 물리치는 수호신)을 그린 세화를 임금에게 바치곤 했다. 도교에서 수성은 목숨을 관장하는 별이라 장수를 기원하며, 직일신장은 운세가 길하길 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후에는 민간으로도 이 풍습이 퍼져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담은 세화가 인기를 끌었다. 강원 원주시 치악산에 있는 명주사 고판화박물관은 설을 앞둔 6일부터 이러한 세화를 소개하는 특별전 ‘아시아 세화 판화의 세계’를 선보인다.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의 18∼20세기 세화와 인쇄목판 100여 점을 전시한다. 한국 전시품 가운데는 조선 중후기로 추정되는 작품 ‘부귀다남(富貴多男) 수복강녕(壽福康寧)’이 눈에 띈다. 모자이크처럼 24개의 작은 그림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꽃과 동물 그림 사이에 장수와 행운을 비는 8자를 절묘하게 배치했다. 한선학 관장은 “비싼 돌배나무나 산벚나무를 주로 쓰는 상류층 목판화와 달리 이 작품은 소나무 목판으로 만든 것”이라며 “가난하고 소박하지만 해학이 살아있는 민초들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1923년 비단에 찍은 천도교 판화는 한국에선 보기 드문 ‘가채판화’란 점에서 가치가 크다. 가채판화란 목판으로 밑그림 선을 찍고 붓으로 색을 칠하는 방식을 이른다. 정교한 맛은 떨어지지만 목판화 전통기법이 변화하던 과도기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중국 청(淸)대의 유명화가인 고동헌(高桐軒)과 왕소전(王紹田)의 세화도 만날 수 있다. 중국은 세화를 ‘연화(年畵)’라 부르는데 지금도 새해가 되면 선물용으로 많이 주고받는다. 일본 작품 가운데는 도쿠가와 막부시대에 만든 화투 원판을 담은 목판이 흥미롭다. 6월 30일까지. 2000∼3000원. 033-761-7885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오가와 히토시 일본 도쿠야마(德山) 공업고등전문학교 교수는 참 독특한 인물이다. 종합상사 직원, 시청 공무원으로 살다 어느 날 문득 철학에 빠져들었다. 미국 유학까지 다녀와 의젓한 교수가 됐는데, 뜬금없이 시내 상점가에 카페를 차렸단다. 이름하여 ‘철학 카페’. 점집은 아니다. ‘시민과 함께 철학을 갖고 놀며 소통하는’ 장소란다. 최근 펴낸 ‘인생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더난출판)도 통통 튀는 개성이 빼곡하다. 부부 사이가 나쁠 땐 소크라테스 철학, 이직을 고민한다면 자크 데리다의 철학이 도움이 된단다. 오호, 내용은 몰라도 왠지 구미가 당겼다. e메일로 오가와 교수에게 인생 상담을 받아봤다. ―이력이 신선하다. 종합상사 직원에서 철학교수로의 변신이라…. “그뿐만이 아니다. 20대엔 5년 정도 ‘프리터’로 지냈다.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이삿짐센터, 이벤트업체… 아, 설거지 도우미도 했다. 이런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철학이란 인간의 삶을 연구하는 학문이니까. 직접적인 계기는 시청 공무원 시절 찾아왔다. 당시 여러 일을 겪으며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욕구가 꿈틀거렸다. 그렇다면 먼저 사물의 본질을 되짚는 법을 익혀야 하는 게 아닐까. 그 해답이 철학이었다.” ―그래서인가. 책이 무슨 인생상담서 같더라. 철학 카페도 운영하고…. “그것도 시청 공무원 시절 영향이 컸다. 지역사회활동을 했던 경험을 살려보고 싶었다. 말이 카페지, 일종의 주민쉼터라고나 할까. 거기서 수많은 사람과 얘기를 나눴다. 대화야말로 철학의 요체니까. 뭣보다 힘든 일을 함께 고민하는 게 좋았다. 철학자도 더불어 사는 존재 아닌가.” ―그런 뜻에서 한국 독자에게도 상담을 부탁한다. 요즘 ‘3무(無) 세대’란 말이 유행이다. 젊은이들이 일자리와 결혼, 집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위로가 될 만한 철학이 있을까. “에른스트 블로흐라는 독일 철학자가 있다. 그는 ‘희망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뒤집어보면, 존재하지 않기에 꿈꿀 수 있다는 얘기다. 일본도 경기침체로 젊은이들이 힘들어한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삶이란 없다. 가진 게 없어도 희망은 품을 수 있는 것, 그게 인생이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안타깝다. 삶이 막다른 곳에 몰렸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자살을 떠올린다. 장 폴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고 강조했다. 실존이 현실적 존재라면, 본질이란 운명을 뜻한다. 운명보다 존재 자체가 우선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가끔 인생이 자기 것이라는 걸 잊는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정해진 인생은 없다. 삶에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다.” ―성범죄가 증가해 많은 여성과 부모가 불안해한다.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여자로 키워질 뿐이다. 이것이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 사상의 핵심이다. 여성이란 위치를 만드는 건 바로 사회다. 여성이 불안을 안고 산다면 그건 전적으로 사회의 책임이다. 간단하게 말하겠다. 잘못됐다면 바꿔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한국은 지난해 격렬한 대선을 치렀다. 갈수록 보수-진보의 골도 깊어지는 양상이다.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란 자기 의견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 서로 합의점을 찾는 과정이다. 중요한 건 타인의 얘기를 듣는 자세다. 뭔가 이루고 싶다면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행위’를 실천해야 한다. 위르겐 하버마스가 이를 잘 설명했다. 우리 역시 이런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알아가고 있지 않나.”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공포영화나 호러소설을 좋아하는가. 사람마다 기호가 다르지만, 진짜 섬뜩한 건 가해자가 ‘사람’일 때다. 귀신이나 괴물도 무섭긴 하다. 하지만 악을 저지르는 인간은 실제로 존재한다. 한국도 연쇄살인마나 사이코패스가 이미 여러 차례 등장하지 않았나.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 주는 공포는 가상세계와는 격이 다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현실적 공포에 대한 담론을 다뤘다. 저자는 21세기 인류가 지금 당장이라도 ‘예상치를 벗어나 문명을 붕괴시킬’, X이벤트에 맞닥뜨릴 위험에 처했다고 경고한다. 미국 프린스턴대 등에서 응용수학분야 교수를 지냈던 경력을 바탕으로, 지구를 ‘복잡성 이론’으로 진단했을 때 언제 대참사가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다는 주장이다. 수학 공식만 봐도 머리가 아프니 이론적 근거는 내버려두자. 여하튼 책의 요지는 세상이 한계에 이를 정도로 복잡해졌다는 거다. 이 때문에 여기저기 틈새가 벌어져 무너져 내릴 확률이 엄청 높다는 얘기다. 자칫 대비가 허술했다간 인류가 종말을 맞을 수도 있다고 저자는 으름장을 놓는다. 도대체 왜 문명이 복잡해질수록 위험은 커지는 걸까. 요즘 가장 민감한 이슈인 ‘난방’을 예로 들어보자. 조선시대엔 문제가 생기면 비교적 손쉽게 ‘자체 해결’이 가능했다. 땔감이 떨어지면 나무를 해오면 된다. 아궁이가 시원찮아도 집안 장정이 대충 손볼 수 있다. 요즘은 어떤가. 세상이 좋아져 벽에 달린 버튼 하나만 누르면 방안이 따스해진다. 하지만 보일러가 고장 났을 때 전문가의 도움 없이 해결할 이가 몇이나 될까. 기술의 발달이 삶을 편리하게 만든 건 맞다. 그러나 그만큼 의외의 난관이 벌어졌을 때 대응하기가 훨씬 까다로워졌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재난에 점점 취약해지는 모순이 발생하는 셈이다. X이벤트는 여러 갈래에서 터질 수 있다. 인터넷 중단과 식량 위기, 석유 단절이나 전염병, 금융의 몰락까지…. 문제는 파괴력이다. 원인이 자연재해인지 인간의 실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인간이 쌓아올린 현대문명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일이 터지면 해결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와 2013년 현재 가운데 핵폭발로 인한 피해, 어느 쪽이 크겠나. 상상도 하기 싫은 가정이다. 책이 주는 메시지는 명쾌하다. 얼른 정신 차리고 대처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현재의 과학을 총동원해 피해를 최소화할 시스템을 마련하라고 저자는 주문한다. 그런데 영 뒷맛이 씁쓸하다. 책에 따르면 X이벤트란 인류의 예상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 사건이다. 예측 불가능한 일에 대한 예방책이란 게 말이 되는 소릴까. 말꼬리 잡지 말라고? 그래도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질문이지 않나. “인간은 훨씬 더 심한 역경을 견뎠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따위의 장님 문고리 잡기 식 결론은 이제 좀 그만 듣고 싶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국가사적 제11호인 백제의 왕성(王城) 풍납토성 발굴 터에 수천 t의 쓰레기가 불법으로 파묻혀 있는 것으로 밝혀져 경찰이 수사를 벌이고 있다.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자리한 풍납토성은 한성백제(기원전 18년∼서기 475년)의 왕성으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대형 판축(板築)토성. 수도 서울의 역사를 500년에서 2000년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중요 유적이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돼 국가의 보호를 받아 왔다. 그동안 풍납토성에서 생활쓰레기 더미가 발견된 적은 있지만 대규모 폐기물 불법 매립이 드러난 것은 처음이다. 풍납토성에서 매립 쓰레기가 발견된 것은 지난해 4월.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토성의 남쪽 지역을 발굴하던 중 약 8400m²(약 2540평) 넓이로 지하 3m 아래에까지 다량의 폐기물이 파묻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전문가들은 지역이 워낙 광범위해 매립된 쓰레기양이 수천 t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화재청 등은 장기간에 걸쳐 저질러진 중대 사안임을 감안해 지난해 10월경 관할 경찰서인 송파경찰서에 수사를 의뢰했다. 문화재청과 송파구청 등에 따르면 이 쓰레기는 2006년에 매립됐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당시 송파구가 한 폐기물 처리 업체에 인근 주택·산업폐기물 처리를 맡긴 적이 있는데, 이 폐기물을 풍납토성 터에 묻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유적의 훼손이다. 쓰레기가 매립된 장소는 토성의 남쪽 해자(垓子·성 주위에 둘러 판 못)에 해당하는 곳으로 유물은 물론이고 당시의 자연환경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 자료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1일 오전 서울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 길 건너 현대아산병원이 보이는 남쪽 토성 터는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며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드문드문 지저분한 쓰레기더미가 보이긴 했지만 땅은 평지처럼 다져져 있을 뿐 별 다른 특색이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현장에 동행한 서울 송파구 직원은 한숨을 푹 쉬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끝까지 평평하게 깔려 있는 게 다 쓰레기라는 거 아닙니까. 사람 키 두 배가 넘게 폐기물이 잔뜩 깔려 있어서 손을 대려야 댈 수가 없는 지경이에요.” 관계자들에 따르면 풍납토성의 쓰레기더미가 드러난 것은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지난해 4월 해자(垓子·성 주위에 둘러 판 못) 지역 발굴에 착수하면서였다. 송파구의 위탁 의뢰를 받은 연구소가 현장을 파면 팔수록 쓰레기가 나왔다. 고철자재는 물론이고 썩어 문드러진 폐기물까지 나와 초기에는 악취로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문화재청과 송파구는 발굴을 중단하고 대책회의 끝에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문제는 폐기물이 정확히 얼마나 묻혀 있는지 현재까지도 가늠이 어렵다는 점이다. 지난해 연구소가 2개월가량 제거작업에 매달렸지만 끝이 보이지 않아 중도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처음에 쓰레기를 파서 쌓았더니 남산만큼 높게 올라갔다”(김영원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지하 3m까지 모두 쓰레기로 가득 차 있었다”(이성준 문화재연구소 연구사)는 증언으로 미뤄볼 때 매립된 폐기물은 수천 t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국가사적에 쓰레기를 묻을 수 있었는지도 미스터리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된 풍납토성은 1997년 백제토기를 발굴한 이래 지속적으로 중요 유적과 유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문화재청 등은 2006년 폐기물처리업체가 저지른 범행일 것으로 내다보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토성은 여러 관계자와 전문가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곳이었다.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일 가능성을 처음 발표한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연구조사를 위해 매일같이 찾아갔는데 낌새도 못 챘다”며 “이미 일반인에게도 중요 유적으로 널리 알려졌던 시기인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더욱 충격적이다”라고 말했다. 수사를 담당하는 송파경찰서는 말을 아꼈다. 지능범죄수사팀 관계자는 “사안이 엄중한 만큼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접근하겠다”고 말했다. 범인 검거도 중요하지만 이후 대처는 더욱 민감한 사안이다. 쓰레기가 매립된 해자 지역은 물속에 잠긴 유물도 상당하고, 인골이나 곡식 흔적 등 다양한 연구자료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신라시대 연못 터였던 경주 안압지 유적 발굴 땐 유물이 대거 쏟아져 신라사 연구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형구 교수는 “풍납토성 해자도 백제 한성시대 초기 역사를 살펴보는 데 핵심적인 장소”라며 “만약 파낸 흙을 어디로 갖다버렸다면 거기도 다시 뒤져야 할 정도로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강수지 인턴기자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

제주특별자치도와 동아일보가 공동 주최하는 제주 국제사진공모전에서 현홍영 씨의 ‘동이 트는 한라산’이 대상을 차지했다. 올해로 4회째를 맞는 이 행사는 제주세계자연유산센터 개관과 세계7대자연경관 인증을 기념해 해마다 국내외 사진작가 및 애호가들이 찍은 작품들을 선정해 시상하고 있다. 이번 공모전은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경관뿐 아니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인 ‘칠머리당 영등굿’과 해녀들의 일상을 공모 소재로 삼았다. 지난해 11월 21일부터 12월 31일까지 19개국에서 787명의 작품 2916점이 접수돼 열띤 경쟁을 벌였다. 대상을 받은 ‘동이 트는 한라산’은 한라산 윗세오름 전망대에서 촬영한 전경으로 눈 덮인 정상 위로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이 인상적이다. 심사위원인 우메즈 데이조 전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일본사진협회 명예회원)는 “겨울밤 한라산을 수놓은 별의 잔상이 제주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들려주는 듯했다”고 평했다. 올해는 외국 참가자들의 선전이 눈에 띈다. 전체 입상자 37명 중에서 동상을 받은 ‘Stars over tea fields(차밭 위의 별들)’의 존 스튜어트 씨(캐나다)를 필두로 영국 스페인 싱가포르까지 해외 4개국 7명의 사진작가가 포함돼 명실상부한 세계적 사진공모전으로서 위상을 갖추게 됐다.○ 입상고승찬 공정욱 김대성 김미경 김봉규 김영태 남인근 박보람 박해섭 오도연 우태하 이금연 이상헌 이창훈 이치용 장택호 정희준 조동철 조한희 최동혁 최민수 최종석 하용단 현지윤 더글러스 맥도널드(캐나다) 후안 케인(스페인) 멜러니 머리(캐나다) 패트릭 펜턴(캐나다) 사이먼 해서웨이(영국) 입 와이 킷 찰스(싱가포르)○ 심사위원우메즈 데이조(전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이경률(중앙대 사진학과 교수)권기갑(사진작가)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국내에서 가장 관람객이 많은 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 궁궐은 ‘경복궁’, 사찰은 설악산에 있는 ‘신흥사’인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경복궁은 한 해 동안 약 452만 명이 찾아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역사문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박물관 순위에서는 역시 국립중앙박물관이 가장 인기가 좋았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전국 박물관 현황’에 따르면 2011년 기준으로 약 324만 명이 방문했다. 2위에 오른 국립민속박물관보다 88만 명가량 많았다. 지난해 4월 영국의 박물관 전문 월간지인 ‘아트 뉴스페이퍼’의 발표에 따르면 세계에서도 9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1위인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약 880만 명에는 한참 못 미쳤지만,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으로 유명한 파리 오르세 미술관(약 315만 명·10위)보다 높은 순위였다.8위에 오른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등 하위권의 분전이 눈에 띈다. 전북 김제의 국내 최대 농경문화유적지인 벽골제(碧骨堤·사적 제111호)가 중심이 된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은 ‘김제지평선축제’가 열릴 정도로 탁 트인 전경이 좋고 문화행사가 다양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 민속자료관은 민속마을과 자연휴양림이 모여 있고, 경북 포항에 있는 국립등대박물관은 일출 명소인 호미곶 등대와 연계돼 관람객들의 발길이 잦았다.궁궐 가운데는 경복궁이 압도적인 1위였다. 2위 창덕궁과는 300만 명이 넘는 격차를 보였다. 그나마 창덕궁은 100만 명이 넘었지만. 덕수궁(약 98만 명)과 창경궁(약 60만 명)은 상대적으로 약세를 보였다. 왕릉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성종과 정현왕후의 묘가 있는 선릉이 1위를 올랐으며, 경기 고양시 서오릉이 그 뒤를 따랐다.사찰은 의외로 강원 속초시에 있는 설악산 신흥사가 불국사를 제치고 가장 많은 방문객이 다녀갔다. 사찰을 감싼 절경이 워낙 빼어난 데다 최근 등산 인구가 크게 증가한 점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경주 불국사는 약 5만 명 차이로 1위를 내줬고, 양양 낙산사가 3위를 차지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강수지 인턴기자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

왕실 연희나 의례를 위해 비단과 모시로 가화(假花)를 만드는 궁중채화(宮中綵華)가 새로운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29일 황수로(본명 황을순) 한국궁중채화연구소장을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하고 인증서를 전달했다. 황 소장이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됨에 따라 궁중채화도 새로운 무형문화재 분야(제124호)로 추가됐다. 궁중채화는 2005년 부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2010년 서울에서 개최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선보여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제16호 거문고산조’ 부문에서는 김영재 이보현 보유자가 함께 뽑혔다. 부산 수영동에서 전해지는 민속탈놀이 ‘제43호 수영야류’ 태덕수 명예보유자,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에서 지내는 제사의식인 ‘제85호 석전대제’에서는 권오흥 명예보유자도 추가 지정됐다.}

《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1713∼1791).올해 문화계에선 강세황 탄신 300주년을 맞아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은 6월경 ‘예술로 꽃피운 조선 지식인의 삶’이란 부제 아래 작품 100여 점을 선보이는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다. 표암의 묘(충북 문화재자료 83호)가 있는 충북 진천군도 상반기 그의 문화적 업적을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열 계획이다. 대중에게 표암은 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능해 ‘삼절(三絶)’로 불렸다거나 단원 김홍도의 정신적 스승이었다는 정도로만 알려졌다. 하지만 표암은 당대 문단과 화단에서 ‘예원(藝苑·예술계)의 총수’라 불렸을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수많은 지식인과 폭넓은 네트워크를 형성했던 열린 사고의 소유자”(민길홍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였던 표암의 삶을 들여다봤다. 》○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조선의 ‘르네상스인’ 표암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예조참판을 지낸 명문가 자제였지만, 소탈하고 겸손하며 세습에 얽매이지 않았다. 중인 출신인 단원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를 이끌어준 것도 이런 성정이 작용한 결과였다. ‘진경산수’로 당대를 호령하던 겸재 정선보다 당시엔 겸재의 문하생이던 현재 심사정을 더 극찬했던 일화에서도 세간의 평가에 초연한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정파에 이끌려 재능 있는 인사들과의 교류를 놓치는 법도 없었다. 소북파에 속하면서도 남인 가문인 성호 이익과 친분이 두터웠다. 소론 계열의 월암 이광려와도 수시로 시사를 나눴다. 학문에 뜻을 두고 장서가로 유명했던 처남 유경종과 함께 안산에 머물던 시절에도, 남인 계열이 대다수인 문인들과 ‘안산 15학사’를 이뤄 다양한 문예활동을 벌였다. 사대부 관습에 연연하지 않고 아내와 가족에 대한 사랑 역시 솔직하고 지극했다. 부인 유씨와 유난히 각별해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쓸쓸한 산사에 벌써 두 달이 갔는데 어찌하여 한 자 소식도 없는가”라며 애달파 했다. 아들이 출사해 임지로 떠나게 되자 “이별을 말하려 하니 눈물 먼저 떨어지고…몇 년 떨어져 있어도 두 곳이 다들 평안하기만 바란다”는 시를 지었다. 평소 문인이나 화가와 만날 때도 언제나 아들들을 대동해 함께 교류하기를 즐겼다. 뭣보다 칠순에 그린 자화상(보물 제590호)은 그의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61세에 임금의 뜻을 받들어 관직에 진출한 표암은 스스로를 야인으로 여기며 언제나 초야로 돌아가길 꿈꿨다. 예법에도 맞지 않는 흰 도포에 관모 차림은 바로 이런 표암의 심경을 대변한다. 당시 일반적이던 평면초상화와 달리 얼굴과 옷자락에 입체감을 살린 화풍도 서양화법을 과감하게 받아들인 그의 열린 자세에서 비롯됐다.○ 여덟 살에 시를 지은 천재…글씨는 청 건륭제도 탄복 18세기 예술계의 ‘크로스로드’(교차로)라 할 만한 표암의 인적 스펙트럼은 예원의 총수란 별칭이 아깝지 않다.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그의 예술적 향취가 다소 가려진 부분도 적지 않다. 시문집 ‘표암유고’에 따르면 표암은 여덟 살에 이미 시를 지을 만큼 재기가 출중했다. 숙종이 승하했던 1720년, 아버지가 흰 비둘기 상이 조각된 지팡이를 들고 나서자 즉석에서 시를 읊었다. “지팡이에 앉은 한 마리 새가 날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네. 흰 눈 닮은 옷을 입었으니 해동의 국상을 아는 건가.” 그림 쪽에선 한 화풍에 집착하지 않았다. 진경산수화를 비롯해 풍속 인물 사군자 등 다방면에서 기량을 뽐냈다. 특히 45세 때 개성을 유랑하고 그린 ‘송도기행첩’은 독특한 음영과 채색 기법을 뽐내 화제를 모았다. 소담하되 진취적인 글씨는 당대 중국에서도 탐을 냈다. 72세에 청나라를 방문했을 때 많은 중국 지식인들이 앞다투어 표암에게 글자를 청했다고 전해진다. 건륭제조차 글씨를 본 뒤 ‘천골개장(天骨開場·뛰어난 재주가 글씨에 드러나다)’이라며 탄복했다. 본인은 탐탁지 않아 했으나 관재 또한 탁월했다. 왕릉 관리인쯤 되는 말단직 능참봉으로 벼슬길에 나서 10년도 안 돼 한성 판윤(서울시장)에 올랐다. 영조의 총애가 지극하기도 했으나, 인망이 두터웠던 표암의 처신이 올곧았기 때문이었다.정양환·송금한 기자 ray@donga.com}

조침문(弔針文)에서 어린이를 위한 상상의 꽃이 피어난다. 서울 종로구 동숭아트센터 꼭두박물관에서 조선 수필 조침문에서 모티브를 얻은 어린이 전시회 ‘조침문 이야기: 꼭두가 왜 비행접시를 탔을까’를 개최한다. 조침문은 조선 순조 때 유씨 부인이 지은 수필. 지아비를 여의고 바느질을 낙으로 삼던 부인이 부러진 바늘을 의인화해 애통함을 제문(祭文) 형식으로 전하는 글이다. 전시회 ‘조침문…’은 김옥랑 꼭두박물관장이 이 수필을 현대적으로 각색해 만든 희곡을 바탕으로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우화 형식으로 꾸민 내용을 담고 있다. 김 관장의 희곡 ‘조침문 이야기’는 5월 어린이 청소년 도서로도 만날 수 있다. 바늘과 꼭두를 주인공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전시회는 천장에 매달려 있는 2m짜리 모형 바늘과 다양한 삽화를 전시해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배가시켰다. 어린이 체험관답게 퍼즐이나 게임을 곳곳에 배치해 지루함을 방지했다. 조선시대 수필을 비행접시와 연계시켜 현대적으로 해석한 대목도 이채롭다. 전시회 관객들은 박물관이 소장한 꼭두 2만 점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6월 9일까지. 1500∼3000원. 02-766-3315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강수지 인턴기자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