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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북한으로 건너간 월북자 중 최고위급 인사인 최덕신 전 외무부 장관의 차남 최인국 씨(73·사진)가 북한에 영구 거주하기 위해 6일 평양에 도착했다고 북한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가 보도했다. 정부는 북한 매체에서 월북 사실을 보도하기 전까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7일 우리민족끼리는 최 씨가 평양 순안국제공항에 도착해 “가문이 대대로 안겨 사는 품, 고마운 조국을 따르는 길이 돌아가신 부모님 유언을 지켜드리는 길이고, 자식으로서의 마땅한 도리이기에 늦게나마 공화국에 영주할 결심을 내리게 되었다”는 소감을 밝혔다고 전했다. 이 매체는 양복 차림의 최 씨가 북측 인사들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도착 소감을 읽는 장면 등이 담긴 1분 35초 분량의 영상도 공개했다. 최 씨 부모는 최덕신·류미영 부부다. 최덕신은 박정희 정부에서 외무장관과 서독 주재 대사를 지냈으나 박 전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류미영과 함께 미국을 거쳐 1986년 월북했다. 광복 이후 월북한 한국 인사 중 최고위급으로 ‘남한판 황장엽’ 사건으로 불리기도 했다. 최덕신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등에 임명되는 등 북한에서도 고위직으로 활동했다. 류미영은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참모총장을 지낸 천도교 독립운동가 류동열 선생의 외동딸로 1989년 남편 사망 후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을 이어받았으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 등을 지냈다. 북한은 류미영을 체제 선전에 적극 이용해 왔다. 2016년 류미영 사망 당시 김정은이 화환을 보내기도 했다. 최 씨는 류미영 사망 후 공석인 북한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직책을 이어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최 씨는 2001년 이후 가족 상봉 등을 목적으로 지난해 11월까지 총 12차례 방북했다. 특히 2017년에는 문재인 정부 들어 처음으로 방북이 허가된 민간인으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통일부에 방북 신청을 하지 않았다. 최 씨는 종종 주변에 월북 의사를 드러내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최 씨가 기획 월북을 했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정부 관계자는 “통일부에 사전 방북 신청을 하지 않으면 정부가 개개인의 소재를 파악하기 어렵다”며 “방북 경위를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당국은 최 씨에 대해 국가보안법과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혐의 등으로 수사 중이다.박효목 tree624@donga.com·조종엽 기자}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서원(書院)’. 문화재청에 따르면 한국의 서원은 “오늘날까지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고 있는 한국의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자 성리학 개념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등재 요건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조선시대 서원은 요즘으로 치면 사립 고등교육기구다. 지성의 요람이자 성리학 발전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각 지역의 교육과 문화, 여론의 구심점이었다. 이번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서원은 경북 영주 소수서원을 비롯해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대구 달성 도동서원, 경남 함양 남계서원, 전북 정읍 무성서원, 전남 장성 필암서원, 충남 논산 돈암서원 등 9곳이다.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살아남은 47곳 가운데 일부이며 모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현재 한국에는 670여 곳의 서원이 있다. 서원에서는 강학(講學)과 제향(祭享)이 이뤄졌다. 강학은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일. 옥산서원 필암서원 등에서는 지금도 정기적으로 지역 유림의 강학이 열린다. 제향은 사당에 지역이나 학파를 빛낸 선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일이다. 서원별로 여러 명의 선현을 모시는 곳도 많다. 이에 따라 보통 앞쪽에는 강학을 위한 강당과 기숙사, 뒤쪽에는 선현을 기리는 사우(祠宇)가 배치돼 있다. 우리나라 서원의 역사는 소수서원으로 시작된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1543년 안향을 배향하는 사당을 세우고 사당 동쪽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운 데서 비롯됐다. 이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이 조정에 사액(賜額)을 요청하고 명종이 1550년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명칭은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라는 뜻을 담았다. 조정이 서원의 사회적 기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서원이 세계유산에 등재된 건 자랑스러운 일이나 지자체별로 흩어져 있는 서원의 체계적인 보존 계획을 세우는 것이 향후 과제다. 서원을 관광상품 정도로 인식하고 이용하려 하면 자칫 주변 경관과의 조화를 해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서원은 원래 자연과 조화를 이룬 건축으로서 가치가 높다. 중국 서원이 보통 마을 중심지에 있는 데 비해 한국의 서원은 심신을 수양하도록 산수가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유네스코도 등재와 동시에 9개 서원에 대한 통합 보존 관리 방안을 수립하라고 권고했다. 또 서원의 세계유산 등재가 단순히 ‘자랑할 만한 유산이 하나 더 늘었다’는 수준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서원의 철학을 제대로 계승하도록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일도 과제라는 의견이 나온다. 국가브랜드위원장 시절인 2011년부터 서원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앞장서 온 이배용 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 이사장(72)은 “서원에는 제일 중요한 건 사람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이 이사장은 한국서원세계문화유산등재추진준비위원장, 문화재위 세계유산분과위원장 등으로 일했다. “잘 가르쳐서, 심성의 인재를 키워, 사회에 선한 실천을 하도록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거지요. 서원은 민간에서, 지역에서 미래를 향해 교육을 힘을 펼쳤다는 점에서 전통 유산인 동시에 인재 양성의 나침반이라고 생각합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월북자의 자식.’ 6일 북한의 대남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의 보도로 밝혀진 최인국 씨의 불법 월북에는 1986년 부모가 월북한 뒤 최 씨에게 찍힌 낙인과 한국에서의 신산스러운 삶 역시 한 가지 원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 씨의 아버지인 최덕신(1914~1989)은 6·25전쟁 때 사단장으로 참전했고 박정희 정권에서 외무장관, 서독 주재 대사를 지냈다. 1967년부터 제7대 천도교 교령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갈등 끝에 아내 류미영(1921~2016)과 1976년 미국에 이주한 뒤 여러 차례 평양을 드나들며 김일성을 만났고, 1986년 북한으로 망명했다. 최덕신과 류미영은 북한에서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역시 천도교인인 최인국 씨는 월북 전 송범두 현 천도교 교령을 만나 “내가 여기(한국)서 살기도 힘들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본보는 송 교령을 최근 만나 최 씨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송 교령은 “최인국 씨가 현행법을 어기고 북한에 넘어간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면서도 “최 씨가 남북간 종교 교류가 활성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송 교령은 최 씨가 어머니 류미영 씨가 2016년 세상을 뜬 뒤 비워놓았던 북한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자리를 이어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다.―부모가 북한으로 간 뒤 최 씨의 생활은 어땠나. “최 씨가 대학 졸업하고 직장을 가졌는데, 그것도 얼마 안돼서 그리됐으니까(부모가 입북했으니까). 자기가 벌어놓은 돈도 없고, 움직이면 정보망(대공 수사팀)이 따라붙고…. 누가 최 씨를 도와주고 싶어도 못 도와줬을 거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한동안 자기 어머니(류미영)가 용돈이라도 좀 보내주고 했던 거 같은데, 돌아가신 뒤에는 그것도 없어졌고. 한국에서 뭐를 해서 자기가 밥을 먹고 살아. 그러니까 고뇌를 많이 했겠지.” 최 씨는 부모의 월북 이후 직장을 10번 넘게 옮겨야 했고, 사실상 제대로 직장 생활을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 교령은 올 3월 경 최 씨가 자신을 찾아와 마지막으로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만나면 최 씨가 어떤 얘기를 하든가. “이런 얘기지. ‘지금 자기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도저히 살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대한민국이, 민주주의가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실질적으로 할 게 없고 삶이 핍박하다’고 하더라. 언젠가 한번은 ‘내가 저쪽(북)에 가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한번씩 (북한에) 갔다 올 때마다 자꾸 마음이 흔들리는 거 같았어. 봐서는 (북한 측에서 미리) 언질이 있지 않았겠느냐 싶고.” 최 씨는 2016년 11월 어머니인 류 씨가 사망했을 때 방북했고, 이후에도 1, 2주기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방북한 일이 있다.―교령은 뭐라고 했나? “지금 거기 가서, 그 쪽 활동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느냐고 했지. 그런데 ‘그건 순전히 청우당 일이고, 천도교 일이기 때문에…크게 내가 이 나이에 그쪽을 뭐 찬양하거나 그럴 수는 없지만…내가 가서 남쪽하고 통일의 통로가 되는, 그런 단초는 안 만들겠느냐’고 하더라고.” 천도교 신자는 1945년 해방 당시에도 북한 지역에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천도교청우당으로 이어지고 있다. 남북 천도교는 뿌리는 같지만 교류는 별 진척이 없다. 최 씨의 월북에는 자신이 남북 천도교 교류의 고리가 되겠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최 씨가 북한에서 어떤 일을 할 것으로 예상하나? “류미영 위원장 사후에 지금까지 천도교청우당 위원장직을 비워놨지. 들리는 얘기로는 그쪽(북한)에서는 가문을 중요시하잖아. 혈통을. 그 자리는 아무나 앉힐 수가 없다는 그런 얘기가 북한에서 있었어.”―최 씨와 가까웠나? “어쩌다 소식 왕래하는 정도지. 최 씨는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으면 자기가 알아서 찾아왔고, 우리가 먼저 연락하거나 그러질 않았어. 노출을 싫어하는 사람이었어. 자기 부모 넘어간 뒤부터 체질화 된 거지. (개인 신상에 대해) 뭐 물으면 딴전 피운다고. 먼 산보고. 다른 얘기하고. 가족에 대해서도 안 밝혀.”―최 씨가 동학민족통일회에서 일하기도 했다. 천도교로서는 최 씨의 월북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거 같다. “얽히고설킨 선대부터의 인연 아니요. 할아버지 대부터 얽힌 것이지. 최 씨에게 우리가 이래라 저래라 얘기할 수도 없고.” 최 씨의 할아버지이자 최덕신의 아버지인 독립운동가 최동오 장군(1892~1963)은 김일성이 잠시 다녔던 화성의숙의 교장 선생님이었다. 최동오 장군은 6·25전쟁 때 납북됐고,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최 씨의 외할아버지(류미영의 수양 아버지)이자 임시정부의 참모총장 등을 지낸 유동열 장군(1879~1950) 역시 6·25전쟁 중 납북돼 마찬가지로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6일 최종 등재됐다. 이번 등재로 우리나라는 모두 14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문화재청은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이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됐다”고 이날 밝혔다.문화재청에 따르면 한국의 서원은 “오늘날까지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고 있는 한국의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자, 성리학 개념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등재 요건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이번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서원은 경북 영주 소수서원을 비롯해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대구 달성 도동서원, 경남 함양 남계서원, 전북 정읍 무성서원, 전남 장성 필암서원, 충남 논산 돈암서원 등 9곳이다.서원은 조선시대 사립 고등교육 기구로, 지성의 요람이자 성리학 발전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교육과 문화, 여론의 구심점이었다. 현재 한국에는 이번에 등재된 서원 9곳을 비롯해 670여 개의 서원이 있다. 중국에도 서원이 있지만 제향(祭享) 기능이 없고, 과거에도 정부 중심으로 운영되는 관료 배출 학원에 가까웠다고 평가된다.국가브랜드위원장 시절인 2011년부터 서원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앞장서 온 이배용 한국의서원통합보존관리단 이사장은 바쿠에서 본보와 전화 통화를 하고 “이번 세계유산 등재로 바른 인성을 키워내고, 따듯한 공동체 사회를 지향하는 서원의 교육 이념과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철학이 현대에도 울림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서원 실사를 나온 전문가들을 비롯해 세계 각국 인사들이 서원을 보고 실제 감동을 많이 했다”면서 “우리나라가 선진문화국가의 전통과 품격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도 뜻 깊다”고 말했다.이번 서원의 문화유산 등재는 재도전 끝에 이룬 것이다. 문화재청은 3년 전인 2016년 4월 유네스코 자문·심사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반려(Defer)’ 의견에 따라 세계유산 신청을 자진 철회했다.지금까지 유네스코에 등재된 우리나라의 세계유산은 ‘한국의 서원’을 비롯해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창덕궁, 화성,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조선왕릉,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 남한산성, 백제역사 유적지구,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등 문화유산 13건과 자연유산 1건(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전 지구적 참사의 가장 미더운 단골 관리자는 기후와 해양에 가해지는 극적인 변화이며, 그 변화의 동력은 지질활동 자체인 것으로 드러난다. …대륙을 통째로 뒤집을 힘이 있는 화산은 기후와 해양에도 종말이라고 할 만한 혼돈을 일으킬 수 있다. 이 드문 분출성 격변이 일어나는 동안에 대기에는 화산성 이산화탄소가 꾸역꾸역 채워진다. 그럼으로써 역대 최악의 대멸종이 벌어지는 사이 행성은 지옥처럼 썩어가는 무덤이 되고, 뜨거운 해양은 산성화되며 산소에 굶주린다.” 대멸종이라고 하면 보통 소행성의 충돌로 인한 공룡의 멸종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공룡은 친숙하고, 충돌은 강렬하니까. 맞다. 그러나 나머지 4번의 대멸종의 원인은 그렇게 극적이지는 않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주범은 우리가 매일 숨을 쉴 때도 내뿜는 이산화탄소다. 이산화탄소는 지구의 온도조절 장치다. 이산화탄소는 지구 복사열을 흡수해 지구를 덥게 만든다. 그러나 농도가 지나치게 높아지면 비에도 많이 녹아 빗물의 산성도가 높아지고, 암석을 더 많이 녹여 바다로 흘러든다. 이를 해면 산호 플랑크톤 생물체들이 흡수해 바다 밑에 탄산칼슘 석회암의 형태로 매장한다. 그 결과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낮아지면 지구는 다시 식는다. 한데 이 온도조절 장치는 가끔 고장이 난다. 첫 대멸종으로 꼽히는 4억4500만 년 전 고생대 오르도비스기 대멸종 때도 그렇다. 이산화탄소의 급격한 감소가 빙하시대를 불러왔고, 대멸종으로 이어졌다. ‘대 생물 다양화 사건’이라고 불릴 정도로 약 4000만 년에 걸쳐 다양한 생물이 번성했던 시대가 순식간에 끝난 것. 그리고 지구가 대멸종에서 완전히 회복되는 데 500만 년이 걸렸다. 저자는 행성과학이 전문인 미국의 과학 저널리스트다. 전문가를 만나고 지질학적 사건을 보여주는 현장을 누비며, 위트 있는 문장으로 대멸종의 범인을 쫓는다. 엄청난 규모의 화산 폭발이 대멸종의 주범으로 꼽힌다는 점은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인류세’의 인류는 그와 맞먹을 정도로 온실가스를 분출해대고 있으니 말이다. 낯선 고생물의 화석 사진이나 그림이 없는 점은 아쉽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경북 유림의 실천 정신을 보여주는 전시 2건이 잇달아 열린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8월 17일까지 경기 성남시에 있는 연구원 장서각에서 기획전시 ‘임청각, 그리고 석주 이상룡’을 연다고 3일 밝혔다. 경북 안동의 임청각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살림집이며, 고성 이씨 집안 종택이다. 조선 말기 애국계몽운동을 펼쳤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사진)의 집이기도 했다. 석주는 1911년 전 재산을 처분한 뒤 가솔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학교와 서로군정서 등을 설립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 선생이 서간도에 독립운동 기지인 경학사를 세우면서 지은 ‘경학사취지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임청각과 선산을 판 매매문서 등을 볼 수 있다. 500년 역사를 지닌 임청각이 소장해 온 여러 문헌과 그림도 전시에 나온다. 1456년 조선 공신들이 회맹하면서 작성한 ‘오공신회맹축’, 1684년 이후영이 문과에 급제하고 받은 홍패, 1763년 낙동강 연안의 명승을 그린 ‘허주부군산수유첩’ 등이다. 전시 운영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6시. 일요일 휴무. 한편 유림이 1919년 프랑스 파리평화회의에 보낸 독립청원서(장서) 초안을 수록한 ‘흑산일록’을 비롯해 인동 장씨 남산파 문중의 유물을 볼 수 있는 전시도 열린다. 한국국학진흥원은 내년 2월 28일까지 안동에 있는 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에서 문중 기탁 유물 특별전 ‘실천을 꿈꾼 도덕군자’를 연다. ‘흑산일록’은 파리 장서 초안을 작성한 회당 장석영(1851∼1926)이 징역 2년형을 받고 대구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르며 남긴 일기다. 오전 9시∼오후 6시 관람할 수 있다. 월요일 휴무.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많으면 한 달에 13번, 5년 동안 200번.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러 도미한 청년 이승만(1875∼1965)이 1905∼1910년 유학 중 강연에 나선 횟수다.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이 시기 이승만의 강연은 미국에서 일본의 ‘아시아 연대론’에 맞서 싸우는 공공외교였다는 연구가 나왔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연세대 박사과정 한서영 씨는 ‘국제정치논총’(59집-2호)에 게재 예정인 논문 ‘미국 유학 시기 이승만 강연활동의 양상과 함의’에서 이승만의 강연활동을 처음으로 분석했다. “아시아 전체를 삼키겠다는 일본의 구상은 러시아가 한 생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일본의 총은 소리 없이 심장을 저격합니다.” 미국 오하이오주 뉴어크의 신문 ‘모닝 스타’가 1907년 7월 25일 보도한 이승만 인터뷰다. 일본이 ‘열등한’ 아시아를 개화시킬 수 있는 나라라고 자처하며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퍼뜨리고 있던 데 맞선 것이다. 이승만은 세계적 기독교 행사에도 한국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1906년 7월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 각국 청년 대표 3000여 명이 모인 ‘만국학도공회’에 유일한 한국인으로 참석했다. 1908년 3월 피츠버그에서 열린 국제선교사대회, 1910년 세계주일학교대회 등에서도 한국의 상황을 알렸다. YMCA(기독교청년회)를 비롯한 기독교 네트워크는 힘없는 나라에서 온 동양인에게 강연 기회를 제공했다. 분석 결과, 이승만은 그야말로 미국 전역을 누볐던 것으로 나타났다. 강연은 초창기 워싱턴을 중심으로 시작해 점차 미국 중·동부 지역으로 확대됐고, 적어도 10개 주 36개 지역에서 열렸다. 야외 공터, 가정집, 거실 모임 등 장소나 형식도 가리지 않았다. 물론 이승만은 일제의 한국 침략에 앞장선 스티븐스를 1908년 3월 저격한 전명운 장인환 의사의 재판 통역을 요청받았으나,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변호할 수 없다고 거절해 한인 사회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독립운동 노선 차이가 영향을 줬다는 게 오늘날의 해석이다. 논문은 “이승만의 강연활동은 공식적 외교 통로가 단절된 상황에서 미국 공중에게 직접 한국의 독립이 위협받는 상황을 알리는 공공외교였고, 한국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인식시키는 문화외교였다”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많으면 한달에 13번, 5년 동안 200번.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러 도미한 청년 이승만(1875~1965)이 1905~1910년 유학 중 강연에 나선 횟수다.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이 시기 이승만의 강연은 미국에서 일본의 ‘아시아 연대론’에 맞서 싸우는 공공외교였다는 연구가 나왔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연세대 박사과정 한서영 씨는 ‘국제정치논총’(59집-2호)에 게재 예정인 논문 ‘미국 유학 시기 이승만 강연활동의 양상과 함의’에서 이승만의 강연활동을 처음으로 분석했다. “아시아 전체를 삼키겠다는 일본의 구상은 러시아가 한 생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일본의 총은 소리 없이 심장을 저격합니다.” 미국 오하이오 주 뉴어크의 신문 ‘모닝 스타’가 1907년 7월 25일 보도한 이승만 인터뷰다. 일본이 ‘열등한’ 아시아를 개화시킬 수 있는 나라라고 자처하며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퍼뜨리고 있던 데 맞선 것이다. 이승만은 세계적 기독교 행사에도 한국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1906년 7월 매사추세츠 주 노스필드에 각국 청년 대표 3000여 명이 모인 ‘만국학도공회’에 유일한 한국인으로 참석했다. 1908년 3월 피츠버그에서 열린 국제선교사대회, 1910년 세계주일학교대회 등에서도 한국의 상황을 알렸다. YMCA(기독교청년회)를 비롯한 기독교 네트워크는 힘없는 나라에서 온 동양인에게 강연 기회를 제공했다. 분석 결과, 이승만은 그야말로 미국 전역을 누볐던 것으로 나타났다. 강연은 초창기 워싱턴을 중심으로 시작해 점차 미국 중·동부 지역으로 확대됐고, 적어도 10개 주 36개 지역에서 열렸다. 야외 공터, 가정집, 거실 모임 등 장소나 형식도 가리지 않았다. 물론 이승만은 일제의 한국 침략에 앞장선 스티븐스를 1908년 3월 저격한 전명운 장인환 의사의 재판 통역을 요청받았으나,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변호할 수 없다고 거절해 한인 사회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독립운동 노선 차이가 영향을 줬다는 게 오늘날의 해석이다. 논문은 “이승만의 강연활동은 공식적 외교 통로가 단절된 상황에서 미국 공중에게 직접 한국의 독립이 위협받는 상황을 알리는 공공외교였고, 한국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인식시키는 문화외교였다”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This will officially confirm your appointment as minister plenipotentiary to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will approve establishment of legation. Syngman Rhee.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이것은 당신을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함과, 그리고 공사관 설립에 동의함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대한제국 주미공사관이 폐쇄된 지 16년 만인 1921년. 그해 4월 4일 이승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 미국에 주미공사관을 설립하라고 당시 구미위원장 대리였던 현순 목사(1880∼1968)에게 보낸 공문 전보가 처음으로 발견됐다. 김도형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은 “미국 남가주대(USC) 동아시아도서관이 소장한 이 전보를 최근 확인했다”며 “현순이 이승만이나 임정의 승인을 받지 않고 독단으로 주미공사관을 설립했다고 본 기존 관점을 뒤집는 자료”라고 1일 밝혔다. 이 전보는 이승만의 전보 문서를 모은 기존 자료집이나 미국 교포에게 임정 소식을 전하던 신한민보 등에도 실리지 않았다. 대한민국 수립 전 주미공사관이라고 하면 보통 지난해 복원한 대한제국공사관을 떠올린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아주 잠깐이지만 주미공사관을 운영했다. 현순은 이승만의 설립 승인 전보를 근거로 그해 4월 14일 워싱턴 매사추세츠 애비뉴 1325번지에 주미공사관을 설치했다. 이튿날인 15일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신한민보사에 설치 사실을 알렸으나 보도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는 이승만이 현순의 공사관 설립 계획을 승인하는 듯한 전보와 이후 이를 취소하는 전보만 확인됐다. 이 때문에 기존 연구에선 공사관 설립은 현 목사의 구미위원장 해임으로 이어진 해프닝 정도로만 이해했다. 이승만은 설립을 승인한 지 사흘 만인 4월 7일 “(임정) 국무원이 불찬(不贊)이요”라며 공사관을 설립하지 말라는 전보를 현순에게 보냈다. 그러나 현순이 공사관 설립을 강행하자 다시 “허락 없이 왜 했소”(4월 17일), “당신의 (구미위원부) 위원 해임. 공사 위임 취소”(4월 19일)라고 보냈다. 이승만은 현순 대신 서재필(1864∼1951)을 임시 구미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김 연구위원은 “이승만도 주미공사관을 운영하고 싶었기에 일단 설립을 승인했지만, 일본 정부가 이를 문제 삼아 미국 정부에 항의하면 구미위원부까지 없어질 수 있다는 서재필 등의 반대 의견을 따랐다”고 설명했다. 서재필이 운영하던 필라델피아 통신부와 영국 런던사무소를 폐지해 공사관 운영비를 충당한다는 현순의 계획도 부담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현순은 이승만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고, 1921년 5월 6일 미 국무부를 방문해 한미 국교 회복을 요청했다. 11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대표’라는 직함으로 미 정부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외교·통상 관계를 즉시 재개해 달라는 요청을 서면으로 제출하기도 했다. 현순은 워런 하딩 미 대통령(재임 1921∼1923년) 취임 뒤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공사관 설립을 서둘렀다. 김 연구위원은 4∼6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에서 열리는 국제정치학회 학술대회에서 ‘현순의 주미공사관 설치 관련 자료 검토’라는 제목으로 이 연구를 발표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기독교 동방정교회의 수장인 바르톨로메오스 1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겸 세계총대주교(사진)가 전 세계 신자에게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를 당부했다. 바르톨로메오스 1세는 지난달 29일(현지 시간) 터키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을 방문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대표단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정교회 전체에 기도를 요청할 것”이라며 “남북한이 평화를 이루고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다 함께 기도하자고 오늘 이 자리에서 전 세계 3억 신자들에게 간곡히 요청한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대통령제 권력구조 개편, 국가보안법 폐지, 탈원전을 비롯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주제 12개에 관한 전문가의 찬성과 반대 논리를 한 권으로 정리한 책이 나왔다. 명인문화사는 최근 ‘한국사회 논쟁’(2만2000원·김계동, 박선영 엮음·사진)을 발간했다. 책에는 한국의 핵무장, 국가정보원 수사권 조정, 모병제 도입, 사형제 폐지, 특목고·자사고 폐지, 대안미디어 확대, 난민 수용, 평화통일 이후 한미동맹 등에 관한 전문가의 찬반 의견이 담겼다. 제성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황근 선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등 주제마다 비중 있는 전문가들이 필자로 참여한 것이 눈길을 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주제별로 각 찬반 논설문에 앞서 해당 이슈를 친절하게 설명하는 글도 별도로 삽입했다. 보편적 복지, 소득주도성장, 배심원 제도 등에 관한 찬반을 다루는 후속 도서도 준비하고 있다고 출판사는 밝혔다. 편저자인 김계동 건국대 초빙교수는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며 자신과 다른 시각을 존중하고 사고의 지평을 넓혀 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인공지능(AI)이 내년부터 각종 천문 현상과 지식을 기록한 우리 고문헌을 한글로 번역한다. 한국고전번역원은 “승정원일기 번역을 위해 개발하고 있는 인공지능을 천문 분야 고문헌에도 적용해 올해 말까지 특화된 번역 모델을 개발하겠다”고 30일 밝혔다. 한국의 천문 분야 고문헌은 삼국시대에서 조선까지 장기간 풍부한 기록을 담고 있어 천문 데이터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다. 근래 ‘네이처’에 실린 신성(新星) 폭발 관련 논문이 세종실록의 기록을 인용했고, 국제천문연맹(IAU) 학술회의 등에서도 해외 학자들이 한국 고문헌에 주목한다. 특히 수백 년 이상의 관측 기록은 혜성처럼 주기적인 천문 현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그러나 천문학과 한문 지식 모두를 갖춘 번역자가 부족해 번역이 더뎠고, 연구 활용도도 떨어졌다. 고전번역원과 공동으로 자동번역 모델을 개발하는 한국천문연구원의 김상혁 고천문연구센터장은 “인공지능이 천문 고문헌을 초벌 번역하면 연구자들의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질 것으로 본다”며 “천문학사, 과학사, 역사학 등 융합 연구에도 효과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자동번역 모델을 완성하면 천문 고문헌 번역 예산도 약 40% 절감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천문 고문헌 자동번역은 약 2억5000만 자에 이르는 승정원일기 번역을 앞당기기 위해 2017년부터 개발하고 있는 인공신경망 기계학습 자동번역 모델을 바탕으로 개발한다. 이미 사람이 번역해 놓은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주서관견(籌書管見)’ ‘천동상위고(天東象緯考)’ 등 고문헌 원문과 번역 결과물을 코퍼스(corpus·연구를 위한 말뭉치)로 정리하고 기존 번역 모델에 학습시키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천문처럼 특정 분야를 다루는 고전적(특수고전)은 7000종 이상으로 추정하지만 번역된 책이 많지 않다. 그나마도 역사, 지리, 정치·사회 분야에 편중돼 과학·기술, 문화·예술 등의 번역은 더욱 저조하다. 백한기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정보센터장은 “승정원일기 번역 알고리즘이 바탕이 되기에 비교적 적은 양의 데이터를 학습해도 기대 이상의 번역 결과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천문뿐 아니라 의학, 외교, 의궤, 농업 등 여러 분야의 고문헌에 특화된 자동번역 모델로 확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전번역원은 승정원일기 자동번역 모델도 올해 말까지 실제 업무에 활용할 정도로 완성도를 높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2018년 인공지능이 승정원일기를 번역한 결과물은 전문번역가 채점 결과 5점 만점에 평균 3.7점 정도를 받았다. 그러나 2017년에는 오역했던 문장을 틀리지 않게 번역했고, 긴 문장도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수준으로 유연하게 번역하는 등 성능이 향상됐다는 자체 평가다. 고전번역원은 이르면 올해 말 이 번역 모델을 국민에게 공개해 연구자나 콘텐츠 생산자 등이 초벌 번역에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백 센터장은 “당장은 승정원일기에 최적화돼 있어 개인 문집 등에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나중에는 한시도 번역할 수 있을 정도로 각종 문체에 맞게 특화한 모델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나의 허벅지 힘으로 내는 속도, 풍경과 함께 지나가는 바람…. 세그웨이나 전동킥보드의 등장에도 200년 전 발명된 자전거의 매력은 여전하다. 자전거가 사회, 문화에 미친 영향을 조명한 책이다. 자전거의 탄생은 화산과 관련이 있다.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이 폭발하며 뿜어 낸 화산재로 지구의 기후가 급변했다. 유럽 역시 흉작과 기근으로 사람은 물론이고 말들도 죽어 나갔다. 이를 계기로 독일 서남부 바덴 공국의 산림관이던 귀족 드라이스가 수년 전 발명한 ‘드라이지네’(달리는 기계)가 말을 대신할 이동수단으로 각광받았다. 드라이지네는 페달과 체인만 없을 뿐 오늘날 자전거의 특징을 거의 그대로 갖고 있었다. 두 개의 바퀴를 가로지른 막대 안장에 몸을 싣고 다리로 땅을 박차며 나아갔고, 핸들과 브레이크도 있었다. 자전거는 이후 200여 년 동안 세상을 바꿨다. 19세기 후반 유럽 여성은 자전거를 타며 동반 남성 없이 외출을 시작했고,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여성을 얽어매고 있던 제약을 거부하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자전거는 세계적 스포츠가 됐고, 한동안은 사치품 소비를 대체했으며, 술과 담배 소비에 타격을 입혔다. 1973년 오일 쇼크 뒤에도 자전거 붐이 일었다. 저자는 “자전거는 돈이 많든 적든,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이용할 수 있어서 사회적 평등의 중요한 기초가 됐다”며 “사람들이 페달을 밟을 때마다 세상도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다”고 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3·1운동은 일제의 지배를 거부한 비타협·불복종 운동으로, 19세기 후반 가까스로 제국의 반열에 오른 ‘마지막 근대 제국’ 일제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해외 학자 7명 등 국내외 연구자 30여 명이 모여 세계 각국에서 일어난 혁명의 현재적 의미를 살피는 국제 학술회의가 열린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27, 28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학술회의 ‘프랑스혁명에서 촛불혁명까지: 혁명의 세계사를 향하여’를 개최한다. 윤해동 한양대 교수는 발표 ‘평화적 혁명으로서의 3·1운동―비폭력·불복종 운동과 제국의 동요’에서 “3·1운동 시위의 약 4할은 폭력이 동반됐는데, 이는 일제 군경의 발포 등 무력 진압에 대응한 것이었다”며 “3·1운동은 문화를 위한 투쟁, 평화적인 혁명으로 일제의 동요를 불러왔다”고 밝혔다. 이번 학술회의는 미국이나 프랑스, 러시아 혁명에 비해 덜 주목받아 온 중국과 베트남, 라틴아메리카, 이란 등에서 일어난 혁명을 조명할 예정이다. 얼리사 세핀월 미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는 아메리카대륙에서 흑인 노예가 주도해 성공한 최초의 혁명임에도 등한시됐던 아이티 혁명(1791∼1804년)을 조명한다. 그는 “혁명의 원인이 되는 부와 힘의 불균형은 독립 뒤에도 바로 사라지지 않고 후유증을 남긴다”면서 “아이티 사례는 성공적인 혁명이 빈곤 등 상당한 고통으로 이어지는 치명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고 말했다. 배경한 부산대 교수는 중국 신해혁명이 동아시아에 공화주의의 확산을 가져왔다면서 한국과 베트남의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을 검토할 예정이다. 시아바시 사파리 서울대 교수는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경제적 취약계층과 국가의 관계 변화를 조명한다. 여러 혁명의 관련성도 검토된다. 폴 체니 미 시카고대 교수는 프랑스 등 대서양 연안 국가들에서 혁명이 잇따른 ‘대서양 혁명 시대(1763∼1830년)’를 지구적 자본주의 성립 과정의 틀에서 이해한다. 그는 “대서양 혁명 시대는 패권을 쥔 영국 제국의 비호 아래 열강들의 암묵적 협약으로 막을 내렸다”고 밝혔다. 클레망 티보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교수도 ‘라틴아메리카에서 본 대서양 공화주의의 다중심적 역사’에 관해 발표한다. 학술회의 기조발표는 피에르 세르나 프랑스 파리제1대학 교수가 맡았다. 그는 ‘21세기 생태학적 파국의 시대에서 본 혁명 연구 분야의 새로운 전망’에서 “인간적 멸시는 동물의 정당한 권리를 부정하는 것과 함께 작동한다고 확신한다”며 ‘생명체의 권리혁명’이라는 전망을 제시한다. 이 밖에 데이비드 개리오크 호주 모내시대 교수, 레이프 블로파브 미 플로리다주립대 교수 등이 프랑스 혁명 연구의 새로운 경향에 관해 발표한다. 이번 학술회의는 서울대 역사연구소와 한국프랑스사학회가 공동 주최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동서양을 막론하고 건강한 공동체는 덕치와 법치가 균형을 이룬다.” 정치사상 연구에서 서구 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 온 강정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65)가 논문을 묶은 책 ‘교차와 횡단의 정치사상’(까치·3만 원)을 최근 출간했다. 정년퇴임(내년 2월)하기 전 마지막으로 출간한 책이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고귀한 인물의 출현이 공화국의 건강을 유지한다고 했다. 정치적, 도덕적으로 빼어난 인물이 나타나면 선한 사람은 그를 본받고자 하고 악한 사람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법치를 강조한 현실주의자이지만 정치적, 도덕적으로 뛰어난 인물의 모범적 행동을 통한 교화, 곧 덕치 역시 중요하게 봤다.” 전통 정치사상의 현대화, 서양 정치사상의 한국화, 비교정치사상 연구를 해 온 강 교수를 11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 연구실에서 만나 ‘건강한 공화국’에 관해 들어 봤다. ―한국 정치 문화에 성리학의 유산이 적지 않은데…. “서양 정치사상은 마이클 왈저(미국의 정치철학자)가 말한 ‘더러운 손의 정치’를 비롯해 정치가 마주하는 도덕적 딜레마를 진지하게 다뤄왔다. 하지만 주자학은 너무 도덕적 순수주의, 엄숙주의를 주장해 이 측면에 대한 고찰이 별로 없다. 조선왕조실록을 봐도 정책 평가보다 공직자의 도덕성 논쟁이 많다. 정치가 어느 정도 악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게 오히려 위선과 트집 잡기 식 다툼을 막을 수 있다.” ―‘법치와 덕치’ 시각에서 현 정권을 평가해 달라. “도덕성 만능주의로 모든 걸 묻어버리고 있다. 인사만 해도 독재 정권은 인망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을 등용해 정당성의 결손을 메우려고 노력했다. 한데 현 정권은 스스로 민주적 정당성이 있다고 자부하고 ‘출범을 위해 도운 게 뭐냐’를 가지고 나눠 먹기 인사를 한다. 그러다 보니 인재 등용의 폭이 좁아진다.” ―이전 정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법치의 과잉으로 법망만 피하면 잘못이 없다는 식의 생각을 키우는 역효과를 냈다. 전 정권의 청와대 핵심들이 그 예다. 죄를 지으면 반성을 해야지, 어떻게 빠져나갈지만 고민한다. 도덕불감증이 만연해 있다. 준법정신은 법치에서 생겨나는 게 아니다. 결국 덕치와 법치의 조화가 필요하다.” ―양극적 정치 구도가 굳어졌다. “보수, 진보가 수면 위에서는 토끼처럼 귀가 서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래서는 서로 껴안고 있다. 국회의원들이 ‘갑질’하는 것이나 접대 받는 문화도 마찬가지다. 그런 블랙홀에 몸담다 보면 보수나 진보나 개혁을 제대로 못 한다.” ―어떻게 달라져야 하나. “보수, 진보가 서로 현대사에서 기여한 부분을 인정해야 한다. 진보 진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산업화에 대한 공을 인정해야 한다. 박정희의 인권 탄압을 누가 모르나. 그러나 경제발전이 지속가능한 민주주의의 토대를 깔았다는 생각도 필요하다. 보수 진영은 진보가 민주화에 기여한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막말이나 한다. 양자 모두 박정희 정권 때부터 이어지는 극렬한 대립의식이 지속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과거 NL(민족해방) 계열 출신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그런지 자꾸 친북 쪽으로 가는 인상을 주는데, 국민 정서를 생각해야 한다.” ―정치 구도의 변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비례대표제 강화다. 지금은 중도표가 사표(死票)가 되니까. 또 하나 경계할 것은 ‘정치의 연예화’, 예를 들어 대통령이 팬덤의 영향을 받는 거다. 대통령이 ‘피와 땀과 눈물’을 강조하면서 인상을 팍 써야 할 때도 있는데 팬 눈치 보며 연예인처럼 행동하면 되겠나.” 강 교수는 1993년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했다는 건 잘못된 해석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독재 정권이 이를 빌미로 법을 악용해 왔음을 비판했다. 북한 체제에 대한 진보학계의 ‘내재적 접근법’ 역시 비판했다. ―학문적으로 보수, 진보 양쪽을 다 비판한 셈이다. “보수 법학계나 정치권에서는 ‘악법도 법이다’가 마치 상식처럼 돼 있었지만, 사실 거짓이라는 걸 밝혔다. 글을 썼을 때 동아일보가 제일 먼저 기사로 다뤘다. 진보 학자들이 북한 연구 방법에 내재적 접근법을 지지하는데, 내 결론은 ‘북한 체제 옹호로 귀결되기에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였다.” ―내재적 접근론을 주장한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받을 때는 그를 옹호했는데…. “학문적으로는 공감이 안 가지만, 그래도 학문과 정치적 자유의 발전을 위해서는 옹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적 민주주의’가 필요한가. “민주주의도 역사에 따라 영미식도 있고 북유럽식도 있다. 우리도 우리식의 명품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 일본과 비교하면 정권 교체가 확실히 존재한다는 점도 장점이다. 일본은 파벌이 고착화돼 집권세력이 잘못을 해도 교체가 안 되고 철저히 징계하지 못한 채 그냥 넘어간다. 이명박,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누군가 어느 날 갑자기 대통령이 되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다. 한국은 강한 응집력과 공동체 의식이 역동성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촛불집회가 이를 분명히 보여줬다. 그렇지만 당장은 현 정권도, 이전 정권도 죽을 쒀 놓아서 한국식 민주주의의 장점이 잘 안 보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먼 훗날, 인류세(人類世·인류가 지구 환경을 급격히 변화시킨 지질 시대)의 지표 화석은 닭 뼈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약 5000년 전 가금화된 닭은 현대의 식탁에 빠질 수 없는 존재다. 한 해 인류가 먹어치우는 닭은 약 700억 마리. ‘치느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닭을 사랑하는 한국인이지만 1인당 소비량(한 달에 약 한 마리)이 세계 랭킹 상위 20위 안에도 들지 못하는 수준이다. 식문화 다큐멘터리 전문 연출자가 쓴 세계 닭 요리 이야기다. 코코넛 기름으로 튀긴 ‘아얌고랭’부터 세계 식문화의 격전지인 미국 뉴욕의 고급 레스토랑 치킨까지 닭 요리만 찾아다녔다. 저자는 요리사 겸 프로듀서답게 세계 각지에서 즉석 닭 요리 대결을 펼치기도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해외 닭 요리로는 미국의 프라이드치킨, 일본의 야키도리와 함께 피멘토 나무(검은 후추와 비슷하게 생긴 ‘피멘토’가 열리는 나무)의 연기로 천천히 익히는 자메이카의 ‘저크치킨’을 꼽았다. “요리사에게 닭고기는 화가의 캔버스와 같다.” 책이 인용한 프랑스의 미식 평론가 브리야 사바랭의 말이다. 저자는 세계 각지를 거쳐 미국 뉴욕에서 에티오피아식 프라이드치킨과 한국적 요소가 가미된 미국 남부식 치킨을 맛보고 나자 이 말이 가슴속 깊이 와 닿았다고 했다. 요리의 맛을 상상하는 즐거움만큼이나 닭 요리 위에 그려지는 세계 각국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이 아직 통일이 되지 못해 아쉽다. 내가 6·25전쟁에 참전했을 때 통일이 이뤄졌으면 좋았을 텐데….” 무려 69년 전. 6·25전쟁에 해병 중위로 참전했던 미 해병대 예비역 중장 필립 셔틀러 씨(93)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개가 넘쳤다. 셔틀러 씨는 한민족평화나눔재단과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소강석)의 초청으로 15일 방한한 뒤 17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한 참이었다. 그는 참전 이유를 묻자 “단순하다. 한국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셔틀러 씨는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 12월 함경남도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려던 미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 대병력에 포위된 뒤 이를 뚫고 철수하며 벌인 전투다. 중공군에 입힌 타격도 컸지만 1만7000여 명의 유엔군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특히 처절했던 전투다. 셔틀러 씨는 “전투의 마지막에는 탈출과 동시에 피란민들을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다”며 “(지금도) 전투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참전 이후 한국을 5번 정도 방문했다는 셔틀러 씨는 “전쟁 당시 한강에는 박살난 다리 하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30개가 넘는다”며 “올 때마다 한국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고 느낀다. 국민들의 문화적·정치적 저력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새에덴교회는 민간외교 차원에서 2007년부터 해마다 참전용사와 가족 등을 한국으로 초청해 왔다. 올해 52명을 포함해 지금까지 380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22일까지 머무르며 전쟁기념관 등을 방문할 예정이다. 올해는 특히 김창준미래한미재단과 공동으로 미국 전직 연방 하원의원 6명도 함께 초청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새에덴교회가 미국 정부의 신성한 의무를 대신해서 전쟁 영웅들의 사기를 높여준 데 감사를 표한다”고 축하·감사 서한을 보내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말갈(靺鞨)’은 특정 종족의 이름이 아니라 고구려가 성격이 다른 여러 주변 집단을 통칭한 것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말갈’은 한민족의 주류와는 다르지만 고구려, 발해를 비롯한 한국 고대사에 적지 않은 흔적을 남긴 존재다. 그러나 자신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아 여전히 그 정체가 논쟁거리다. 권은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최근 발표한 논문 ‘고구려 멸망과 요동지역 말갈인의 향배’에서 “‘수서(隋書)’ 등에 기록된 수·당나라 시기 ‘말갈 7부(部)’는 고구려가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지방의 여러 복속민을 지역 단위로 나누고 ‘말갈’로 통칭한 결과라고 본다”고 했다. 중국 사서에는 말갈이 6∼7세기 한반도 북부와 만주 동북부의 종족으로 등장한다. 숙신-읍루-물길-말갈로 이어지며 일원적 계통을 가진 것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근래에는 학계에서 말갈이 비슷한 성격을 지닌 여러 세력을 통칭한다고 이해하는 경향이 많다. 권 연구위원은 “고구려가 성장하고 돌궐이 등장하는 시기에 만주라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말갈이 하나의 계통과 문화를 지닌 단일 종족으로 성장하는 게 가능했을지는 의문”이라고 밝혔다. 권 연구위원은 ‘말갈’이라는 호칭의 유래에 관해서도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한반도에서 유래해 고구려를 거쳐 중국으로 전파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북방계 말갈보다 500년 이상 앞선 기원전 1세기 말부터 6세기 초까지 한반도에서 활동한 말갈의 기록이 등장한다. 다산 정약용은 이 시기 백제와 신라를 침략한 말갈이 사실 동예·옥저 지역의 예(濊) 계통 종족이라며 가짜 말갈, 즉 ‘위(僞)말갈’이라고 했다. 이 견해는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하지만 근래에는 이들을 북방계 말갈과 구분되는 한반도 토착세력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 권 연구위원은 15일 신라사학회가 연 학술발표회에서 “북방계 말갈에 앞서 한반도에서 먼저 삼국민과 정치 사회 문화 경제적 기반이 다른 주변 집단의 호칭으로 ‘말갈’을 사용했고, 이것이 고구려를 통해 중국에 전파되면서 중국 역시 고구려인과 성격이 다른 동북 지역 주민을 말갈이라 부르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이 아직 통일이 되지 못해 아쉽다. 내가 6·25전쟁에 참전했을 때 통일이 이뤄졌으면 좋았을 텐데….” 무려 69년 전. 6·25전쟁에 해병 중위로 참전했던 미군 해병대 예비역 중장 필립 셔틀러 씨(93)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개가 넘쳤다. 셔틀러 씨는 한민족평화나눔재단과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소강석)의 초청으로 15일 방한한 뒤 17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한 참이었다. 그는 참전 이유를 묻자 “단순하다. 한국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셔틀러 씨는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12월 함경남도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려던 미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 대병력에 포위된 뒤 이를 뚫고 철수하며 벌인 전투다. 중공군에 입힌 피해도 컸지만 1만7000여 명의 유엔군 사상자가 생기는 등 특히 처절했던 전투다. 셔틀러 씨는 “전투의 마지막에는 탈출과 동시에 피란민들을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다”며 “(지금도) 전투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참전 이후 한국을 5번 정도 방문했다는 셔틀러 씨는 “전쟁 당시 한강에는 박살난 다리 하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30개가 넘는다”며 “올 때마다 한국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고 느낀다. 국민들의 문화적·정치적 저력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새에덴교회는 민간외교 차원에서 2007년부터 해마다 초청한 참전용사와 가족 등은 한국으로 초청해왔다. 올해 52명을 포함해 지금까지 380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22일까지 머무르며 전쟁기념관 등을 방문할 예정이다. 올해는 특히 김창준미래한미재단과 공동으로 미국 전직 연방하원의원 6명도 함께 초청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새에덴교회가 미국 정부의 신성한 의무를 대신 해서 전쟁 영웅들의 사기를 높여준데 감사를 표한다”고 축하·감사 서한을 보내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219년 이집트 카이로 북쪽 항구도시 다미에타는 점령하려는 십자군과 지키려는 이슬람 아이유브 왕조의 병사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나일강이 보호하는 요새 다미에타를 둘러싼 전투는 처절했고, 질병마저 군인과 백성을 집어삼켰다. 휴전 중이던 그해 9월 해진 수도복을 입은 한 가톨릭 수사가 술탄을 만나기 위해 이슬람 진영으로 향한다. 눈에 뜨이자마자 목이 베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 그러나 술탄은 그 수사를 환대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성지를 순례하고 설교하는 것까지 허락해줬다고 한다. 현실감 없이 들리는 이 일화의 주인공은 성 프란치스코와 살라흐 알 딘의 조카인 술탄 알 카밀이다.》 “‘평화의 사람’들끼리 서로를 알아봤던 거지요. 프란치스코 전기에는 그가 무슬림을 회개시키려 했다고 나오지만 사실은 마음속에 이슬람은 적이 아니라 한 하느님을 모시는 형제자매라는 인식이 있었을 거예요. 어떻게 함께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가 그의 진짜 고민이었던 거지요.” 가톨릭 수도회인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의 석일웅 수사(58)는 13일 서울 종로구의 성 안토니오 수도원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성 프란치스코와 술탄의 만남은 이후 가톨릭 역사에 이교도 배척과는 또 다른 유산을 남겼다. 작은형제회는 성 프란치스코와 술탄 알 카밀의 만남 800주년을 기념해 특별강좌와 함께 기념 음악회(9월 중)를 연다. 터키문화원과 공동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는 방안도 협의하고 있다. 천주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종교간대화위원인 석 수사에게 유일신 믿음을 가진 종교가 근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물었다. 석 수사는 “교리를 갖고 부딪치기 시작하면 내가 옳다는 걸 밝히기 위해서 상대가 틀리다는 걸 증명할 수밖에 없다. 그럼 서로 죽일 일만 남는다”며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고는 종교가 미래를 맞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6년 세계의 각 종교 지도자를 프란치스코회의 고향인 이탈리아 아시시로 초대해서 평화를 위해서 함께 기도한 것 역시 그런 노력의 하나다. 작은형제회는 ‘아시시 정신’을 탐구하기 위해 재속(在俗) 프란치스코회 회원들과 함께 2013년부터 평화, 생태, 영성 등을 주제로 공부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석 수사는 최근 예멘 난민 수용을 두고 일었던 사회적 논란에 대해 “논쟁만 쳇바퀴 돌듯 되풀이될 때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며 “종교가 난민 포용 비용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생태적 가치를 강조하며 발표한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성 프란치스코가 지은 ‘태양의 찬가’의 후렴구에서 제목을 따왔다. 석 수사는 생태적 영성에도 성 프란치스코가 일찍이 인식의 전환을 이뤘다고 했다. “그는 새와 소통하고, 인간과 늑대가 행복하게 공존할 가능성을 찾기도 하고, 해를 형님으로, 달과 죽음을 자매로 불렀어요. 수직적 관점이 지탱하던 중세에 이미 만인과 만물의 수평적인 관계로의 전환을 인식한 거지요. 사람은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을 ‘보시기에 좋은’ 상태로 잘 보존하고 관리할 책임이 있어요.” 석 수사는 성 프란치스코가 강조한 가난은 물질적 가난뿐 아니라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존재론적 반성을 뜻한다고 강조했다. “과거에 비해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을 누리지만 행복을 모르지요. 경쟁에서 이겨야 비로소 존재의 가치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이 받아들여지고요. 그러나 성 프란치스코의 삶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에 눈을 뜨게 해줍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