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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전 오늘 중국 상하이에서 첫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렸다. 이후 임정은 오늘날 정부가 국회에 하는 것처럼 임시의정원에 예산안을 제출하고 승인받았다. 국회 예산정책처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임시정부·임시의정원 예산 문서를 분석한 결과 중일전쟁 발발 이듬해 1개 연대를 창설하고자 했던 임정의 군사비 예산 책정 규모와 해외동포 성금 등 새로운 면모가 확인됐다.》1938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예산의 60% 이상을 조국 독립을 위한 군비(軍費)로 편성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 미주 동포 등이 보내온 독립성금은 임정 운영에 실제로 큰 힘이 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9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개원(10일) 및 임시정부 수립(11일) 100주년을 앞두고 1935년 이후 임정이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예결산서 중 일부를 분석한 결과를 내놨다. 예산정책처는 “임정은 임시의정원의 예산안 심사와 확정, 정부의 집행, 회계검사·결산 등 체계적 재정 체계를 갖췄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예산정책처는 1938년 임정이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세입세출 예산서 총액은 57만8867.88위안이었다고 밝혔다. 계산 방식에 따라 다르지만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당시 환율과 하급 공무원 임금 수준 등으로 보아 이를 오늘날 60억 원 정도 가치로 추정했다. 임정은 이 가운데 63.9%에 이르는 37만 위안(약 38억 원)을 군비와 군훈비(軍訓費·군사훈련비)로 편성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임정은 1000명 규모의 1개 연대와 장교 200명을 양성해 일제와 전쟁을 벌이고자 했던 것이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임정은 당시 만주에서 독립군을 지휘했던 지청천 유동열 장군 등으로 급히 군사위원회를 꾸리고 군사사업비를 편성했다”면서 “그러나 임정이 중국 창사에서 광저우 류저우로 피란하는 비용으로 쓰였고, 바로 군을 창설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 창설했다. 예산정책처가 이번에 분석한 자료는 임시의정원 의장과 국무령을 지낸 만오 홍진 선생(1877∼1946)이 1945년 환국하며 가져온 임시의정원 문서다. 홍진 선생의 손자며느리 신창휴 씨(85)는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도 온전히 간직해 온 임시의정원 관인을 10일 국회에 기증한다. 기증식은 이날 국회에서 임시의정원 개원 100주년 기념식과 함께 열린다. 1938년 임정 예산서에는 미주, 하와이 등에 사는 동포들의 피땀 어린 독립성금이 드러나 있다. 임정은 혈성금, 애국금, 후원금 등 7만1086위안과 역시 사실상 성금인 인구세(인두세) 2600위안 등 오늘날 가치로 7억여 원(추정)의 성금 세입을 예상했다. 전체 세입 예산의 대부분은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임정을 지원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금(50만 위안)이었다. “임시정부를 후원한 미주, 하와이 동포들이라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에서 시신을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배 속에, 바다에 떨어지면 물고기 배 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백범일지’에서) 백범 김구는 만약 자신이 생전 독립한 나라에 돌아가지 못한다면 죽음의 방식은 이런 것이기를 소망한다고 1942년 썼다. 일제 탄압으로 국내 연락망인 연통제가 1921년 소멸된 뒤 해외 동포들의 후원은 임정 운영에 그만큼 긴요했다. 한편 1940년대 임시의정원 의원은 거마비 외에는 급여가 없었다고 예산정책처는 밝혔다. 의장, 부의장, 비서장, 비서 등만 급여를 받았을 뿐이다. 한시준 교수는 9일 국회도서관 주최 국제 학술 세미나에서 오늘날 ‘국회’라는 명칭이 1919년 임시의정원이 제정한 대한민국 임시헌장(헌법)에서 비롯됐다고 밝혔다. 국회는 나라마다 다양한 명칭을 사용하지만 제헌국회에도 ‘국회’라는 명칭 결정 기록이 없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국토 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이라고 규정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소속 일부 조합원이 취재 중인 기자를 폭행한 사건으로 경찰 수사를 받게 됐다.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전담 수사팀을 구성했다. 5일 경찰에 따르면 TV조선 수습기자 A 씨는 3일 오후 11시 10분경 서울 영등포경찰서 앞에서 한 지상파 방송사와 인터뷰하던 김명환 민노총 위원장에게 다가가 휴대전화로 영상을 찍었다. 하지만 곧 민노총 조합원 3명에게 가로막혔다. 조합원들은 A 씨의 휴대전화를 뺏으려다 A 씨를 밀어 넘어뜨렸다. 김 위원장이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연장을 막겠다며 경찰 저지선을 뚫고 국회 경내로 들어갔다가 체포돼 영등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풀려난 직후였다. A 씨는 집단 폭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또 3일 민노총 조합원들의 국회 경내 진입 당시 이를 취재하던 MBN 영상촬영 기자 B 씨도 민노총 조합원에게 폭행당했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한 조합원이 사다리 위에서 촬영하던 B 씨를 밀어 넘어뜨린 영상을 확인했다. B 씨는 사다리에서 떨어져 발목을 다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한국기자협회는 4일 성명을 통해 “헌법에 의해 언론 자유가 보장된 대한민국에서 단지 불편한 관계, 다른 관점의 보도라는 이유로 취재를 방해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민노총은 이번 사태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또 “집회 참가자들이 집회라는 수단을 통해 의견을 전달하는 것처럼 기자들은 집회 참가자의 목소리를 담아 현장에 없는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취재해 보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며 “폭력을 동반한 취재 방해는 국민의 알 권리를 막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방송기자연합회도 “수적 우세를 이용해 집회 취재 중인 기자를 폭행한다면 군부독재 하수인들과 다를 게 무엇이냐”며 “불만이 있다고 기자를 폭행하는 것은 언론 자유 침해”라고 비판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자유한국당 간사인 이채익 의원은 5일 영등포경찰서를 방문해 “기자들이 무차별적으로 맞았다. 경찰이 제대로 수사하는지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고도예 yea@donga.com·조종엽 기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왜 국제사회에서 정부로 승인받지 못했는지를 각종 외교문서를 통해 탐구한 책이다. 책에 따르면 임정 승인의 열쇠는 연합국들이 쥐었고, 그 가운데서도 미국이 핵심이었다. 미국은 국제 공동 관리하의 군정을 거친 뒤 한국을 독립시킬 계획이었고, 임정 승인의 실익이 없었다. 미국과 영국은 프랑스에서도 군정을 구상하고 있을 정도였다. 파리에 입성한 드골은 힘으로 정부 승인을 받았지만 임정은 그런 힘이 없었다.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미국 영국보다 먼저 임정을 승인하겠다는 구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관철할 힘이 없었다. 결국 임정 요인들은 광복 뒤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한신대 교수인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뒤 국제법적 원칙이 된 ‘인민자결권’으로 보면 임정의 위상을 달리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인민은 외부의 간섭 없이 정치적 지위를 자유롭게 결정할 권리를 가지며, 민족 해방 단체(임정)의 주권국가 선언은 인민자결권의 정당하고 유효한 행사로 평가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저자의 말마따나 소급 적용이다. 헌법이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정이 아니라 ‘임정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규정한 것도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합법성보다 정당성의 관점으로 임정을 조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정신 승리’가 냉혹한 국제정치를 직시하는 시야를 가린다면 우리는 또 얼마나 헤맬 것인가.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70년 전인 1949년 4월 27일 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다섯 자에 불과한 간결한 명칭의 이 법률로 유사 이래 자기 농토를 가져 본 적이 없던 한반도의 대다수 농민이 땅을 갖게 됐다. 이 법률 이전 자작농이 경작하는 농지는 전체의 35%가량에 불과했으나 이후 92∼96%가 자작농의 소유가 됐다. ‘토지를 농민에게’라는 남로당의 슬로건이 대한민국에서 현실화된 것이다. 이 법률로 기회의 균등이 실현됐고, 신생 국가 대한민국의 유전자에는 ‘평등’의 가치가 강력하게 각인됐다. 우여곡절 끝에 그해 6월 21일 다시 국회에서 가결돼 공포된 이 법률은 ‘농지개혁법’이다. 농지개혁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 가장 큰 숙제였다. 이를 담당한 건 공산주의자였다가 광복 뒤 전향한 초대 농림부 장관 죽산 조봉암(1898∼1959)이다. 농지개혁법 통과 70주년을 맞아 주대환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을 3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농지개혁의 의미는…. “1950, 60년대 우리나라 토지 소유의 평등지수는 세계 1위였다. 그만큼 세계사로 봐도 가장 철저한 농지개혁이 이뤄졌다. 세계은행이 2003년 낸 정책 연구보고서가 있다. 건국 초기 토지 분배 상태가 평등할수록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높았다. 대토지 소유를 해체하지 못한 남미 국가들, 필리핀 등은 풍부한 자원에도 자본주의 경제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이 ‘한국은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해 심각한 불균형 성장을 해 왔던 것이 문제’라고 했다. 농지개혁은 대한민국의 유전자다.” ―농지개혁이 어째서 경제 발전에 긍정적인 효과를 내나. “평준화로 인해 교육을 받고 공부만 잘하면 성공할 수 있게 됐다. 수백 년 만에 자신의 땅을 가진 농민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가장 열심히 일하고 창의력을 발휘했다. 자립의 의지를 물려받은 자영농의 자식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현대적 학문과 과학기술,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 대농장주의 자식은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없다. 대농장에서 일하는 농업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하고 싶어도 할 곳이 없다. 그 자식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물론 우리 경제 발전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주 부회장은 “대한민국은 경자유전의 원칙을 헌법에 못 박고 출발했다”고 말했다. 농지개혁법 제정 이전 이미 건국헌법(제헌헌법)이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제86조)고 규정했다. 헌법 초안은 인촌 김성수 선생의 부탁을 받고 유진오 고려대 교수가 기초한 것이었다. 유진오는 농지개혁 등 4대 원칙을 포함한 초안을 인촌에게 건넸고, 설명을 들은 인촌은 전적으로 찬성했다. 유진오는 대지주인 인촌이 적극 찬성하자 사심 없는 그의 통찰력에 감명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인촌은 농지개혁법 제정 당시 “농지개혁은 삶의 설계를 새로 짜는 계기가 돼야 한다. 우리 민족의 도약의 기회이므로 이를 꼭 해내야 한다”고 말했다. 주 부회장은 “대한민국은 농림부 장관이었던 죽산 조봉암이 추진하고 인촌 김성수 선생이 도운 농지개혁이 성공하면서 유례없이 평등한 나라로 출발했다”고 말했다. ―농지개혁법이 통과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제헌헌법에 ‘경자유전’의 원칙을 확정한 곳이 인촌 사랑방이다. 유진오 교수는 인촌이 키운 사람이다. 최남선이 손병희 선생의 뜻을 받들어서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한 것처럼 젊은 유진오가 인촌의 뜻을 받들어 헌법을 기초했다. 그뿐만 아니라 헌법기초위원회 소속 국회의원과 전문위원 절반이 인촌을 따르는 이들이었다. 한민당의 실질적인 오너이자 호남의 대지주인 인촌이 농지개혁의 대세를 받아들이니, 다른 지주들도 꼼짝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당대인들이 농지개혁의 효과를 예상했을까. “남로당이나 동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되는 사태를 막으려고 ‘예방혁명’을 종용하던 미국, 대세를 받아들인 한민당, 주요 실행자였던 이승만과 조봉암 그 누구도 농지개혁이 가져올 심대한 효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한국이 70년 뒤 영국과 프랑스에 견줄 만한 경제대국으로 발전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비해 한국의 농지개혁은 효과가 작았다는 주장들이 있었다. “농지개혁법은 농민에게 지극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소출의 30%를 5년만 정부에 내면 소유권을 갖도록 했다. 한 해 10석이 나는 땅이라면 매년 3석씩 5년간 내라는 거다. 일제강점기 한 해 5석씩 소작료를 내던 농민이 3석씩 5년 동안만 내면 내 땅이 된다는데 누가 포기하겠는가. 지주들에게는 국채를 줬는데 전쟁 통에 인플레이션으로 휴지조각이 됐다. 그래서 지주들이 쫄딱 망했다. 북한은 1950년대 중반부터 집단농장을 만들면서 국유화했다. 그 결과는 모두 아는 바와 같다.” 주 부회장은 지난달 30일 전북 고창에서 ‘인촌 정신과 대한민국의 발전’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고 했다. 그는 “인촌은 근대 한국인의 모범이고 전형”이라면서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인촌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자들을 꼽아 달라. “이승만 김성수 신익희 조봉암 조만식 등 5명이다. 이승만 김성수는 당연하고, 해공 신익희는 임정계에서 떨어져 나와 대한민국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임정계 시각으로 보면 배신자겠지. 죽산도 조선공산당 입장에서는 배신자다. 둘 모두 미군정 정보당국에서 일주일 이상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아마 미군정 당국이 세계 정세나 미국이 가진 정보를 제공하면서 깊은 대화를 했던 거 같다. 죽산과 해공의 참여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든든해졌다. 역사는 그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북한에서 월남한 이들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 선생은 포함돼야 한다.” ―인촌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죽산을 공부하다가 인촌을 만나게 됐다. 인촌이 돌아가시기 직전 ‘죽산을 배제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정치적 유언 비슷한 말이다. 그런데 인촌 사후 죽산이 민주당 창당에서 배제되면서 진보당을 창당하고 고립돼, 끝내는 사법살인을 당했다. 인촌은 100년 전 조선 사람 가운데 실로 드물게도 근대인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 위정척사파류의 선비형 지식인이 아닌 코즈모폴리턴 세계시민이었고, 허세와는 거리가 먼 실용주의자였다. 모두가 비분강개하기만 할 때 인촌은 조용히 인재를 기르고 실질적인 일을 했다. 청년들에게는 유학비를 대서 일본이나 미국 영국에서 과학과 기술을 배워 오라고 했다. 도산 선생이 절규했다. ‘힘을 기르소서, 힘을 기르소서.’ 실력 없이 무슨 독립을 하나? 독립을 말로 하나? 도산의 절규에 가장 충실하게 답한 사람이 인촌이다.” 주 부회장은 민족의 역량을 기르기 위해서 애썼던 이들의 노력을 온당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죽산은 건국유공자 서훈을 못 받았는데…. “유족이 낸 서훈 신청을 국가보훈처가 3번이나 보류했다.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그런데 광복 뒤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약산 김원봉은 서훈 움직임이 일고 있다. 아주 잘못된 얘기다. ‘건국’훈장이다. 독립운동뿐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했느냐도 평가해야 한다. 약산의 서훈은 통일이 되면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서훈 거부 이유는 무엇인가. “1941년 매일신보에 아주 작은 기사가 있다. 인천의 조봉암이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는 거다. 실제로 냈는지는 알 수 없다. 매일신보는 지금 북한 노동신문이나 마찬가지인 총독부 기관지다. 그런 신문의 기사를 법률적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가? 죽산은 1925년 조선공산당의 창당 멤버다.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을 했고,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이나 감옥살이를 하고 1939년 나온다. 고문으로 손가락 7개를 잃었다. 출소한 뒤 인천의 후배들이 먹고살라고 죽산에게 왕겨를 취급하는 비강조합장 자리를 마련해 줬다. 죽산은 감옥살이하고 일제에 노출된 사람이다. 만약에 죽산이 강요에 못 이겨 헌금을 실제 냈다고 치더라도, 죽산이 이를 거부했어야 한다는 것은 조선에서 살지 말라는 얘기다. 광복 뒤에 반민특위에서도 죽산은 거론된 적이 없다. 일제강점 말기 광란의 시대를 함께 살았던 이들이 구성한 반민특위에서도 조사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분들을 그런 문제로 모욕하는 건 어이가 없는 일이다.” ―농지개혁에 비견될 만한 오늘날 시급한 개혁과제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타파와 연금개혁이다. 똑같은 일을 해도 굉장히 고용이 안정되고 대우가 좋으며 노조의 보호도 받는 운 좋은 소수와 전혀 그렇지 못한 이들의 차이가 하늘과 땅 사이만큼 크다. 일부 노동자층은 마치 소지주처럼 지대를 수취하는 듯한 입장이다. 반대로 비정규직, 영세 자영업자 등은 과거 소작농과 같은 처지에 내몰려 있다. 이를 혁파해야 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3·1독립운동으로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 제3조는 남녀, 귀천, 빈부의 구별이 없고 인민은 평등하다는 ‘평등원칙’을 제시했다. 이는 아시아에서 선구적 의미를 지닌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도형)이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하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가 9일 오전 9시 20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다. 주제는 ‘민주·공화주의의 세계사적 의미와 동아시아 독립운동의 전개-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배경, 전개과정 및 영향의 재조명’이다. 미즈노 나오키 일본 교토대 명예교수는 학술회의에서 발표 예정인 ‘평등과 연대-3·1독립운동과 조일(朝日) 피차별민의 연대운동’에서 “임시헌장의 이 같은 평등 원칙은 아시아 최초로 보인다”고 밝혔다. 미즈노 교수는 발표문에서 1920년대 조선의 형평(衡平)운동과 일본의 수평(水平)운동의 교류를 조명했다. 형평운동은 1923년부터 조선에서 일어난 백정의 신분 해방운동이고, 수평운동은 일본의 최하층이었던 부라쿠민(部落民)의 해방운동이다. 백정과 부라쿠민은 근대 들어 형식적으로 신분이 철폐됐지만 여전히 실질적인 차별을 받았다. 미즈노 교수는 3·1운동 전후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원칙이 조선에서 널리 수용됐다고 봤다. 백정은 19세기 말부터 민족 또는 국민의식에 눈뜨기 시작했다. 만민공동회에서 연설해 박수를 받았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는 한편 민족의 일원으로 차별 철폐를 끊임없이 요구했다. 마침내 1923년 4월 경남 진주에서 형평사가 조직한 걸 시작으로 형평운동이 조선 각지로 퍼져나갔다. 3·1운동이 낳은 또 하나의 유산인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1923년 3월 창립된 일본 수평사와도 교류했다. “형평사 동인(同人) 제군, 우리들 수평사 동인과 제군 사이에 있는 것은 단 하나의 해협뿐입니다. 우리들은 고작 122마일에 불과한 이 해협이 우리의 굳건하고도 따뜻한 악수를 막는 데에 얼마나 무력한가를 몰지각한 인간 모독자의 눈앞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른바 정신적 노예제의 영역을 돌파하려는 인류의 기수(旗手)로 선택된 민중이라는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진군합시다.” 일본 수평사가 1924년 4월 조선 형평사대회에 보낸 축사다. 형평사도 즉시 감사의 뜻을 수평사에 전했다. 두 단체의 교류를 매개한 건 일본 오사카의 조선인 아나키스트 그룹과 도쿄의 ‘북성회’ 등 일본에서 사회운동을 펼치던 조선인들이었다. 형평사와 수평사의 제휴는 구성원이 서로 방문하고 대회에서 축사를 하는 등 1920년대 후반까지 더욱 활발해졌다. 미즈노 교수는 “물론 수평운동 측이 조선의 식민지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한계 등은 있었다”면서도 “평등과 기본적 인권이라는 공통 이념을 내걸고 식민지 지배국 일본과 피지배국 조선의 민중이 어떻게 연대의 가능성을 열었는지 고찰해야 한다. 이는 오늘날의 과제와도 맞닿아 있다”고 강조했다. 9일 학술대회 1부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각국의 민족독립운동과 민주·공화주의를 조명한다. 퍼걸 맥게리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퀸스대 역사·인류·철학·정치학대학 교수가 ‘혁명의 시대와 아일랜드의 독립 투쟁’을, 허우중쥔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연구원이 ‘제1차 세계대전과 중국 민족주의 운동의 전환’을, 신효승 동북아재단 연구위원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세 인식의 변화와 한국의 독립운동의 전개’를 발표한다. 2부에서는 ‘3·1독립선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외활동’을 주제로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세계주의와 평화사상’(장인성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3·1혁명론과 민주공화제―임시정부 법통론과 관련하여’(윤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3·1운동 이후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의 식민지 분할통치’(서종진 동북아재단 연구위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중국 활동과 상하이 프랑스 조계’(장세윤 동북아재단 연구위원) 등이 발표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3·1운동 민족대표 48인 등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은 옥중에서 자유가 억압된 상태였지만 3·1운동은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9일 동북아역사재단 주최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3·1운동 이후 민간지에 나타난 새로운 사상들’에서 이렇게 밝혔다. 정 교수는 발표문에서 3·1운동의 결과물로 1920년 탄생한 동아일보 창간사의 3대 주지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함 △민주주의를 지지함 △문화주의를 제창함을 분석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항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 헌법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이클 로빈슨 미국 워싱턴대 교수는 1920년대 전반기 한국의 여러 신문 잡지가 지닌 성격을 ‘문화적 민족주의’로 설명했다. 정 교수는 이 관점을 소개하면서 “교육과 경제 발전을 강조한 문화적 민족주의자들은 점진적 독립운동론을 폈는데, 그 수단은 보수적이었지만 목표는 혁명적이었다”고 말했다. 발표문은 사회주의의 유입도 분석했다. 사회주의 사상은 조선 민간신문에 앞서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에 먼저 소개되기 시작했다. 독립신문은 1920년 3월 10일부터 ‘사회주의’라는 논문을 10회에 걸쳐 연재했다. 사회주의 사상을 지닌 언론인들이 마르크스주의 단체를 조직하는 등 운동을 이끌었다. 정 교수는 “신문은 민주주의, 민족주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같은 새로운 사상을 소개하고 공론화했다”고 말했다. 조선총독부는 민족지를 탄압했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 성향의 잡지 ‘신생활’을 폐간하기도 했다. 신생활과 또 다른 잡지 ‘신천지’ 관련자 구속사태에 대해 동아일보와 천도교 계통 월간지 ‘개벽’, 최남선이 냈던 잡지 ‘동명’ 등은 총독부의 탄압을 규탄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총독부는 해외에서 유입되는 서적도 단속했다. 사상서적의 유입을 차단하고자 러시아 방면에서 들어오는 간행물을 차단했고, 만주 방면 국경지대의 검열을 강화했다. “치안유지법 등을 활용해 통제를 갈수록 강화했고,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새로운 사상의 소개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됐다”고 정 교수는 설명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하루 세 번 콩밥덩이, 먹고나니 한동 만동/젓가락 놓자마자, 다음끼니 기달린다./겨울밤 칩고(춥고) 또 길어, 아침 되기 정 멀다.”(‘기한·飢寒’에서) “아랫목은 식당되고, 웃목은 뒷간이라./물통을 책상하여, 책으로 벗삼으니,/봄바람 가을비 소리 창 밖으로 지나다.”(‘나날의 살이’에서) 국어학자이자 애국지사인 외솔 최현배 선생(1894∼1970)이 일제강점기 옥중에서 쓴 시조다. 그는 1941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붙잡혀 광복 때까지 4년간 옥고를 치렀다. 선생의 정신을 잇고자 1970년 설립한 외솔회(회장 성낙수)가 최근 ‘외솔 최현배의 문학·논술·논문 전집’(1∼4권)을 발간했다. 이번 전집에는 2012년 발간한 선생의 학술 저서 28권 전집에 담겨 있지 않은 글을 묶었다. 외솔이 1920∼1960년대 발표한 글들이다. 1권은 시·시조·수필, 2·3권은 논술과 설명문, 4권은 작은 논문을 모았다. 외솔회장인 성낙수 전 한국교원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신문과 잡지에 산재해 독자가 찾아 읽기 쉽지 않은 글을 담았다”며 “외솔의 인간성 및 학문과 철학, 사상 등 진면목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3·1운동이 일어난 이듬해부터 한두 해 동안, 나는 시골서 처음으로 중학교 교원 노릇을 하였다. …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서 끊임없이 진행되는 경제의 착취, 문화의 말살, 생기(生氣)의 타격들을 몸소 당하면서 겨레의 장래를 생각하매, 암담하기만 함을 느낄 뿐이었다.” 외솔이 1958년 ‘연세춘추’에 실은 글이다. 그는 일본 유학에서 페스탈로치의 교육사상을 공부하고 조선에 돌아온 뒤 1926년 장편 논문 ‘조선 민족 갱생의 도’를 60여 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발표했다. 외솔은 “예상 이상으로 전국의 식자들의 공명을 얻었으며, 청년 독서자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이는 당시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선생이 누차 나에게 그런 소식을 말함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1956년 한글날을 맞이한 신문 기고에서는 일제강점기 한글운동의 의미를 돌이켰다. “삼천만 동포가 한 사람의 글소경도 없이 되도록 하자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켜 동아일보가 중심이 되어 크게 세상을 깨우친 일이 있다”고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11일을 앞두고 관련 학술대회가 잇따라 열린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회장 김자동) 등은 5일 서울 종로구 교보빌딩에서 ‘3·1대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헌법: 민주공화국 100년의 평가와 과제’를 연다. 이날 △3·1대혁명정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헌법의 탄생(김선택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한민국 임시정부헌법과 제헌헌법의 연속성(김광재 숭실대 법과대 초빙교수) 등이 발표될 예정이다.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1885∼1943)을 추모하는 학술회의도 열린다. 안민석 국회의원 등은 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백산 안희제와 국외독립운동기지 발해농장’을 연다. 1933년 안희제 선생이 조선의 독립과 지역공동체 실현의 이상을 담아 중국 헤이룽장성에 세운 발해농장의 설치 배경과 과정, 오늘날의 활용 방안을 검토한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1860∼1920)의 순국 99주기를 맞아 추모위원회 출범식과 강연회도 4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다.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이사장 소강석) 등이 주최하는 이날 행사에서는 최 선생의 손자인 러시아독립유공자후손협회 최발렌틴 회장의 인사와 박환 수원대 교수의 기념강연이 진행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015년 6월 어느 아침 저자(바버라 립스카)는 머리에 염색약을 바르고 비닐봉지를 뒤집어 쓴 채 조깅을 했다. 그리고 20년 동안 살았던 동네에서 길을 잃었다. 어찌어찌 집에 돌아온 뒤에는 염색약에 물든 자신의 셔츠와 덩이진 머리카락을 거울로 보고도 이상하다는 걸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했다. 이런 이상한 행동을 보인 건 흑색종이 저자의 뇌에 전이됐고, 치료 과정에서 염증까지 생겨 전두엽이 손상된 탓이었다. 아이러니한 건 저자가 30년 동안 신경과학자이자 분자생물학자로 정신질환을 연구한 인물이라는 사실. 미국 국립정신보건원 산하 인간두뇌수집원장인 그가 극적으로 흑색종을 이겨내기까지 두 달 동안 정신질환에 시달린 이야기가 담겼다. 저자는 자제력을 잃었고, 전날 먹은 피자가 플라스틱 덩어리라고 생각했고, 누군가 자신을 독살하려 한다는 망상에 시달렸다. 음식에 엄청난 집착을 보였고, 언제나 날이 선 채로 지나치게 남편을 비난했다. 자신의 정신이 망가져가고 있다는 걸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부서졌고, 빛은 그 틈으로 들어온다.” 저자는 정신을 차린 뒤 미국 조지타운대 병원 현관에 장식된 이 표어가 마음에 강렬하게 와 닿았다고 했다. 오랜 세월 뇌 장애를 연구했지만 정신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불안을 야기하는지 처음으로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민족의 사상과 문화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대전(大全) 200권의 편찬을 시작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은 2030년까지 ‘한국사상사대전’과 ‘한국문화사대전’을 100권씩 발간할 계획이라고 27일 밝혔다. 안병욱 한중연 원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외래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독자 사상으로 승화한 ‘회통(會通)’과 융합의 가치를 담아내고 미래 한국의 사상적 동력을 제시하는 한편 민족을 넘어 세계적 차원에서 문화사를 조명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웃한 중국과 일본은 이미 이 같은 대규모 편찬사업을 오래전에 마쳤다. 중국의 ‘유장(儒藏) 사업’과 ‘중국사상가평전총서’, 일본의 ‘일본사상대계’와 ‘일본문화사대계’ 편찬사업이 대표적이다. 이번 대전 편찬은 한중연의 전신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1980∼91년 한국문화를 27권에 담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상의 대규모 편찬 사업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중연은 당장 착수할 연구 주제로 원효의 사상, 일연과 삼국유사 등을 검토하고 있다. 한중연은 박사학위를 받은 우수 한국학 연구자가 안정적인 여건에서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태학사’ 과정도 올해부터 신설한다. ‘현대판 집현전’에 비유할 수 있는 태학사 과정에 뽑히면 생계를 위한 연구 프로젝트에 얽매이지 않고 자율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올해는 5억 원의 예산으로 어문학(2인), 역사학(3인), 철학(2인) 분야에서 만 40세 미만인 7명을 뽑고 향후 5년간 매월 장학금 500만 원을 지원한다. 선발 분야와 인원은 점차 확대할 계획이다. 한편 한중연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올해 6월 27, 28일 ‘혁명의 세계사’를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도 개최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우리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기사는 묵살해 버리고, 그리고 매우 곤란한 기사를 싣는다.” 1940년 3월 9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오노 로쿠이치로는 일본 귀족원 예산위원회 제2분과회에서 한글로 발행되던 동아일보 폐간 문제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이렇게 답했다. 미즈노 나오키 일본 교토대 명예교수(전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는 책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선인)에 실은 논문 ‘식민지기 조선에서의 이토 히로부미의 기억’에서 “박문사(博文寺)의 ‘화해극’을 전혀 보도하지 않은 동아일보의 자세를 총독부가 강제 폐간의 한 이유로 든 것이어서 주목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문사의 화해극’은 1939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차남 안준생(1907∼1952)이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에게 사죄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에 함께 가서 ‘화해’하는 장면을 연출한 조선총독부의 기획 이벤트를 말한다. 안중근 의사가 가지는 항일의 상징성을 어떻게든 무너뜨리려던 일제의 발악이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글과 일본어 발행 신문 가릴 것 없이 이 연출극을 보도했다.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 등은 ‘실로 조선통치의 위대한 변전사(變轉史)’ ‘참된 내선일체’라고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유일하게 동아일보만은 이 ‘박문사의 화해극’을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미즈노 교수는 “총독부가 조선인에게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박문사의 ‘화해극’을 조선인이 경영하는 동아일보가 무시하자 강제 폐간의 한 구실로 삼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아일보는 1929년 하얼빈 의거 20주년을 맞아 ‘신문의 신문―과거의 금일’ 코너에서 의거 당시인 20년 전 관련 기사를 여러 차례 다시 실으며 추모했다. “안중근 나이 31세요 얼굴이 길고 코가 오똑한데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고…경찰관을 대하여 강경히 말하되 우리들이 국가를 위하여 생명을 버림은 지사의 본분이거늘….”(1929년 11월 10일자) 김대호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은 “일제의 검열을 피하면서 의거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정한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舍生取義(목숨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하고)/殺身成仁(자신을 죽여 인을 이루었네)/安君一擧(안중근의 의거에)/天地皆振(온 천지가 들썩이네).” 일본의 대표적 사회주의자이자 평화운동가인 고토쿠 슈스이(1871∼1911)가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며 쓴 한시다. 1910년 샌프란시스코평민사가 제작한 안 의사 사진엽서에 그의 친필로 실렸다. 26일 안 의사 서거 109주기를 앞두고 관련 연구가 잇따라 나왔다. 최근 발간된 ‘3·1독립만세운동과 식민지배체제’(지식산업사)에 실린 김봉진 일본 기타큐슈시립대 국제관계학과 교수의 논문 ‘안중근과 일본, 일본인’은 이토 히로부미가 죽기 전 ‘어리석은 녀석이다(馬鹿ナ奴ダ)’라고 말했다는 건 “조작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이 논문에서 이토의 수행원들 증언을 추적했다. 이토가 ‘범인은 한인’이라는 말을 듣고 ‘어리석은 녀석’ 운운했다는 일화는 수행원이었던 귀족원 의원 무로다 요시부미의 이야기에만 나온다. 1909년 11월 1일자 오사카마이니치 신문의 무로다 인터뷰 기사와 무로다가 12월 16일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한 증언이다. 그러나 다른 수행원의 증언이나 기사, 전문, 보고서에는 이런 얘기가 전혀 없다. 무로다가 1909년 11월 20일 시모노세키시 재판소에서 한 첫 번째 증언에도 없다. 그럼에도 이 말은 ‘이토 공 전집(伊藤公全集·1928년)’에 “‘한인 안중근’이라는 말을 듣고 한마디 했을 뿐”이라고 실리며 마치 사실인 것처럼 후대에 전해졌다. 김 교수는 “의거 당일 보고서에 들어있는 이토의 직속 비서관 후루야 히사쓰나의 증언이 신빙성이 높다”면서 “후루야는 이토가 죽은 지 약 1시간 15분 뒤에야 ‘범인은 한국인’임을 알게 됐다고 증언했다”고 설명했다. 현장을 목격한 러시아 대신 코코프체프의 증언 등으로 미뤄보면 이토는 치명상을 입고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로 의식을 잃은 채 객차로 옮겨졌다. 의거 다음 날 일본 신문도 이토의 즉사(卽死)를 전하는 전문을 보도했다. 한상일 국민대 명예교수는 저서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까치)에서 “이토의 죽음을 극화하고 병탄을 왜곡하기 위해 뒷날 만들어진 기록”이라며 “이토를 암살하는 ‘어리석은 짓’이 결국 한일병탄을 자초했다고 왜곡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제가 이처럼 안 의사를 폄하하고자 했던 이유는 안 의사가 ‘항일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들은 안 의사를 숭모하며 뜻을 이어갔다. 김대호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최근 논문 ‘일제강점기 안중근에 대한 기억의 전승, 유통’에서 안 의사의 사진과 노래 등에 주목했다. 안 의사의 사진은 1909년 11월 초 처음 공개됐고, 사후 사진을 넣고 ‘충신 안중근’이라고 쓴 엽서 등이 불티나게 팔렸다. 일제의 강력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사진엽서는 서시베리아와 북만주부터 미국 샌프란시스코까지 퍼져나갔다. 창가 ‘영웅모범가’나 ‘독립군가’ 역시 안 의사를 기렸다.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안 의사 사진에 관련된 일부 잘못된 해석을 바로잡았다. “몰골이 초췌하다”며 일제의 ‘안중근 비하물’이라는 주장이 나온 사진이 사실은 뤼순 감옥 초기 안중근의 모습을 증언하는 귀중한 사진이라는 것이다. 도 교수는 “일제는 오히려 안 의사를 인도적으로 대우하고 있다고 선전하고자 했다”며 “민족을 넘어 동양 평화를 모색한 안 의사의 이 사진은 고토쿠 슈스이가 간직했던 안중근 사진엽서의 모본”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다양한 과학 이야기를 그림으로 쉽게 풀어낸 책이다. 일례로 빙하의 작용을 설명하면서 그 구조를 초콜릿 바에 빗대 그렸다. 지표의 눈은 초콜릿 코팅, 빙하는 캐러멜, 빙하가 녹으면서 떨어진 돌은 땅콩, 흙은 쿠키로 표현했다. “남극의 빙하는 무척 무거워서 지구의 표면을 짓눌러 으깬다”는 설명과 함께 모루 위에 지구의 모습을 그리는 식이다. “인간은 유전적으로 포도와도 24% 비슷할 뿐 아니라 빵을 만드는 효모와도 18%는 비슷하다” 같은 정보가 깔끔한 그림으로 표현돼 눈길을 끈다. 숲속 어둡고 조용한 곳에서 잘 자라는 고사리는 ‘내성적인 사람’에 비유했다. ‘팔에 난 털은 왜 1m까지 자라지 않는지’ 같은 주제에서 알 수 있듯 생명과학, 지구과학, 물리 등 분야별로 흥미를 당길 만한 소재를 다뤘다. 통념과 다른 포인트도 잡아냈다. 나무를 이루는 물질은 뿌리를 박고 있는 땅 밑의 흙과 물의 도움이 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대부분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와 수분에서 왔다고 한다. 저자는 미국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상어 이빨만 3000여 개를 수집한 괴짜다. “과학에 대한 학문적인 지식 없이 이 책을 썼다”고 겸손해하지만 내용이 꽤 알차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이제 82년이 지났으니 확실히 죽었을 것이다” 같은 유머도 나쁘지 않다. 다만 ‘즐길 수 있는 과학’을 추구한 탓인지 허술한 구석이 없진 않다. ‘꿈을 꾸는 이유’는 여러 설이 있는 데도 한 가지 주장만 소개됐다. 벌거숭이두더지쥐 그림 아래 물곰 등 완보동물의 설명을 달아놓은 건 좀 뜬금없다. 장수나 생명력이 두 동물의 공통점이어서라고 추정되지만 별다른 설명이 없기에 평범한 독자라면 벌거숭이두더지쥐가 완보동물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 심지어 그림으로는 모양도 얼핏 비슷해 보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우리나라 고전적(古典籍)의 총규모가 2만9252종으로 잠정 집계됐다. 김재훈 한국고전번역원 원전정리실장은 22일 고전번역원 주최 학술대회 발표 논문에서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KORCIS)에 포함된 기관 116곳의 자료(46만여 건)와 주요 소장기관 8곳의 자료(21만여 건), 문화재청 지정 문화재 목록 및 한국고전번역원 자체 조사 자료 등 52만여 건을 종합 검토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한국 고전적 총규모를 국가적 차원에서 산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김 실장은 한국 고전적을 “한국인이 1909년 이전 한자 또는 한글 등으로 일정한 체재를 갖춰 저작해 간사(刊寫·인쇄나 필사)한 동장본(東裝本·전통 방식으로 장정한 책)”으로 정의했다. 또 서명과 저작자가 같으면 동일한 서종으로 간주했다. 일례로 이중환의 ‘택리지’는 이본이 200종이 넘고, 명칭도 여러 개지만 1종으로 계산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조선독립만세의 소요가 조선 각지에 발발함을 따라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오륙천 명의 군중이 모여 태극기를 높이 들고…(중략)…강서군 반석면 사천리 헌병주재소를 향하고가는 길에 그 헌병주재소로부터 총소리가 일어나며 선두에 섰던 청년대가 붉은 피 속에 삼대 쓰러지듯 넘어지는 광경을 본 노인대는 주재소에 불을 놓고….”(동아일보 1921년 12월 18일 기사 ‘증언은 피고에게 유리’) 3·1운동 초기임에도 매우 격렬한 항쟁을 벌였던 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강서군 ‘사천 3·1운동’을 조명한 연구가 나왔다. 기독교 세력이 주도한 사천 3·1운동은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과 더불어 일제의 탄압도 극심했던 3·1운동으로 꼽힌다. 박경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강사는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98집)에 게재할 예정인 논문 ‘평안남도 강서군 사천 3·1운동’에서 “만세시위 참여자들은 시위가 평화적으로 진행됨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일본 헌병들이 시위 시작부터 시위대에 총을 무차별 난사하면서 완강히 저항하게 됐다”고 말했다. 사천 지역에 3·1운동 소식을 처음 전한 건 평양에서 만세를 부른 뒤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온 반석교회의 조진탁 장로(1867∼1922)였다. 원장교회의 임이걸 장로(1898∼1961) 역시 평양에서 독립선언서 수백 장을 원장리로 챙겨 왔다. 사천 3·1운동은 대동군과 강서군의 원장, 반석, 사천, 산수리 교회 등 4개 교회가 연합해 기획했다. 거사일은 사천시장 장날인 3월 4일. 계획이 발각돼 10여 명이 체포됐지만 원장리 합성학교로 장소를 변경해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거사 당일 임이걸은 “우리의 힘으로 자주독립 해야 할 것이며 독립을 해야 살 수 있다. 조금이라도 난동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연설했다. 10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앞서 체포된 이들을 구하려 사천 헌병주재소로 향했지만 일본 헌병들과 보조원들이 총을 난사했다. 여기서 무려 시위대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논문은 “일제는 3월 1일 평양 시위가 대규모로 진행되자 만세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걸 확실하게 막고자 운동 초기부터 무차별 폭력으로 대응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가족과 이웃이 총탄에 쓰러지는 걸 보고 격분한 군중들은 맨주먹으로, 또는 돌을 들고 헌병들에게 대항했고, 헌병분재소에 불을 질렀다. 그 결과 헌병분재소장 사토 지쓰고로와 조선인 헌병 보조원 3명이 사망했다. 3월 6일 원장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이 끝난 뒤 유가족을 비롯한 200여 명이 다시 만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일제의 보복은 거세고 집요했다. 기독교 신자 중심으로 400여 명을 붙잡아 20여 일간 고문했고, 교회 지도자 등 49명을 평양 검사국에 송치했다. 주동 인물들은 사형, 무기징역, 징역 15년 등을 받았고, 검거를 피해 도피한 이들도 궐석 재판을 통해 극형이 언도됐다. 조진탁 장로는 뚜렷한 증거가 없었음에도 헌병과 보조원을 살해한 혐의로 1922년 10월 사형당했다. 이들의 형 집행이 보복적 성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합성학교를 설립한 지석용 장로는 다행히 만주로 몸을 피했지만 15년 뒤인 1934년 중국 대련에서 체포됐다. 논문은 “사천 지역민은 3·1운동 이후에도 사천대한독립청년회, 반석대한애국부인청년단 등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고 설명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신문협회(회장 이병규)와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회장 김종구), 한국기자협회(회장 정규성)는 제63회 신문의 날 표어 대상에 ‘신문 보며 배우네 나무도 숲도 읽어 내는 안목’(채승혜·64)을 선정했다. 우수상에는 ‘착 펴면 척 보이는 세상, 다시 신문이다’(김현진·43)와 ‘급류를 타는 세상, 방향키 잡는 신문’(이주상·18)이 뽑혔다. 심사위원들은 “신문의 정수인 정확한 팩트, 팩트들이 엮여 일궈 내는 가치의 중요성을 울림과 여운 가득하게 담아 낸 작품”이라고 대상작 선정 이유를 밝혔다. 대상 상금은 100만 원, 우수상 상금은 50만 원이다. 시상식은 4월 4일 오후 4시 반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리는 신문의 날 기념대회에서 진행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19년 2·8독립운동을 보도한 일본 신문기사를 비롯해 일제강점기 독일과 일본 언론에서 한국 관계 기사를 모은 자료집 4권이 새로 나왔다. 독립기념관은 ‘독일 신문 한국관계기사집’과 일본 신문을 발췌한 ‘시사신보 한국관계기사집Ⅰ·Ⅱ’, ‘대판조일신문 한국관계기사집 Ⅲ’ 등을 최근 발간했다고 19일 밝혔다. 이 책들은 독립기념관이 해마다 내는 한국독립운동 자료총서 시리즈다. 1919∼32년 기사를 발췌한 ‘시사신보 한국관계기사집Ⅱ’에는 2·8독립선언을 한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기사가 실렸다.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시사신보 1919년 2월 9일자는 조선인 600명이 간다(神田)조선기독청년회관에서 눈이 오는 가운데 경관과 격투를 벌여 29명이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한 조선 학생이 “우리는 어떠한 압박을 받더라도 최후의 1인이 될 때까지 목적을 위해 노력할 생각이며 구인된 자는 주의(主義)를 위해 그렇게 된 것이므로 오히려 명예로운 일”이라고 소회를 밝혔다고 전했다. 3·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일본 유학생들이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벌인 만세시위 보도도 있다. 시사신보 1920년 3월 2일자에는 유학생 2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여 53명이 검거됐다고 보도했다. 기사와 함께 히비야 경찰서에 구금된 황신덕 등 여학생 7명의 사진도 실렸다. 독립기념관은 “3·1운동 전후 일본에서 벌어진 학생독립운동의 양상을 알 수 있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독일 신문 ‘포시셰 차이퉁’은 일본 간토(關東) 대지진(1923년 9월)을 다룬 1923년 10월 9일자 기사 ‘일본에서 지진을 목격한 베를린 사람의 증언’에서 한국인 학살을 명기했다. 기사는 “군이 한국인들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은 모두 총살당했다”고 적었다. 독립기념관은 당시 일본이 한국인 학살을 해외에 은폐하고자 했음에도 진실이 외국 언론에 폭로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독일 주요 일간지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1907년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위종(1887∼?)의 활동상을 상세히 다뤘고, 중국 톈진에서 발행된 독일어신문 ‘도이치 히네지셰 나흐리흐텐’은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보도했다. 이번 자료총서는 대학과 공공도서관 등에 배포할 예정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통조림에 담긴 순하고 담백한 맛의 저렴한 죽. 빠르지는 않지만 목을 꺾지 않아도 높이 매달린 신호등이 잘 보이고, 운전대가 쉽게 돌아가고, 연료가 적게 드는 자동차. 버튼을 누르면 응급구조대를 호출하는 펜던트. 모두 과거 미국에서 고령층을 타깃으로 선보였다가 크게 쓴맛을 봤거나 별 재미를 보지 못한 상품들이다. 이유는 뭘까. 하인즈가 개발했던 죽은 맛은 간과한 채 노인을 치아가 성치 못하고, 소득이 거의 없는 존재로 취급했다. 크라이슬러의 연료 절약형 자동차는 ‘노인들이나 타는 차’로 인식됐고, 결국 노인들도 사지 않았다. 펜던트는 구매자에게 자신이 쇠약하고 고립된 존재라는 느낌을 줬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에이지랩’을 설립하고 50세 이상 연령층을 위한 기술과 디자인을 연구하는 저자는 이 같은 상품들은 고령층을 미적인 욕구도, 다양한 인간적 욕구도 없는 존재로 바라보고 있다고 꼬집는다. “노인을 디자인이나 다른 요소를 따질 겨를이 없는 중환자와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침대 매트리스 아래 설치돼 야간에 심박수나 호흡, 행동 데이터를 의사에게 보내는 감지기를 성생활을 즐기는 고령자가 과연 환영할까.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와 시니어그룹의 소비 비중이 높은 ‘장수 경제’의 도래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헌법학자로서 일본 헌법을 연구하다가 한국의 현행 헌법은 1919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을 잇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의 헌법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맥아더 군정이 만들어 준 것인 반면 한국의 헌법은 일본제국주의의 압제에 항거하여 쟁취한 헌법이란 차이를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 사사가와 노리카쓰 일본 국제기독교대 명예교수는 3·1운동 때 체포된 한국인들의 법원 판결에 관한 연구를 하는 동기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지식산업사 간행 ‘3·1독립만세운동과 식민지배체제’). 바로 이 ‘대한민국 임시헌장’(헌법)을 기초한 이가 독립운동가 조용은 선생(1887∼1958·사진)이다. 필명이자 호(소앙·素昻)로 많이 알려져 조소앙 선생으로 불린다. 조소앙 선생의 대표적 문집으로 대한민국 건국강령(1941년)의 바탕이 된 삼균주의(三均主義·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추구) 사상이 깔려 있는 ‘소앙집’이 최초로 완역된다. 한국고전번역원은 “조소앙 선생의 글은 순한문이나 국한문 혼용체로 쓰여 평범한 시민이 깊게 이해할 기회가 적었다”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선생의 ‘소앙집’과 ‘유방집’, ‘여협남자현전’을 번역해 출간할 예정”이라고 13일 밝혔다. 소앙집은 다음 달 간행되며, 항일 의열사 81명의 공적을 담은 유방집과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의사(1872∼1933)를 조명한 여협남자현전은 한 권으로 묶어 올 8월 출간할 계획이다. 선생은 1930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삼균주의를 창시했으며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기초했다. 1932년 중국 상하이에서 간행된 소앙집은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상황을 정치·경제·교육으로 나눠 분석하고 일제를 비판한 논문과 역대 사회제도와 3·1운동까지의 혁명운동을 정리한 글, 임시정부 등 명의로 발표한 각종 선언서가 담겼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한 장을 할애해 마치 파노라마처럼 서술하기도 했다. 조소앙은 “한국 민족은 일본에 무장 해제를 당했으나 스스로 깨달은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을 갑옷과 무기로 삼았다”고 썼다. 소앙집은 객관적 자료와 명료한 논리가 특징이다. 일제의 탄압과 유린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동아일보 보도를 되풀이해 인용하기도 했다. “1929년 8월 6일, 한글 신문인 동아일보에 사설이 실렸는데 제목이 ‘극단으로 제한된 언론 집회’였다.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노총(勞總·노동동맹), 농총(農總·농민동맹), 청총(靑總·청년동맹) 세 총맹(總盟)의 집회를 금지한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각 지방의 청년회 강습소, 학생 연구회 등 현존하는 모든 단체가 다 봉쇄되고 해산되었으며, 그 밖의 강연회와 연설회도 금지의 대상이 되었다. 갑산(甲山) 화전민 충돌 사건에 대해 또 조사반의 출범과 기사 게재를 제한하고 이어서 이 사건을 알리는 연설회를 금지하는데, 혹 압박하는 일을 반대하는 연설회도 금지한다. …”(‘소앙집’에서) 선생은 “국내 한글 신문은 이미 착취당하고 탄압을 받아 비록 양껏 드러내지 못하였지만 (자유를) 제한받은 정도가 여기에서 반증된다”고 덧붙였다. 또 전국의 항일운동을 나열하고 ‘정치범’에 대한 중형을 비판한 동아일보 1930년 3월 8일자 ‘법정에 나타난 조선상’ 기사를 인용하며 “이 기사를 통해 살펴보면 학생계가 해방 운동을 도모하는 것이 전국에 가득 퍼져서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들며 산을 감싸고 언덕을 넘을 기세이니, 참으로 혁명사에서 색다른 사례”라고 쓰기도 했다. 광주학생항일운동 이전 ‘의열단 사건, 보천교 사건, 임시정부 사건, ML당 사건, 간도 격문 사건’ 등 항일운동의 활성화를 묘사하면서 “한글 신문인 동아일보 등의 신문에서 적극적으로 선전해 민족의식을 충분히 부추길 수 있었고, 아울러 혁명의식을 환기시킬 수 있었다”고 썼다. 김보성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소앙집 번역본 해제에서 “소앙집에는 고국의 참혹한 현실을 국내외에 알리고 항일투쟁 궐기를 촉구한 독립운동가의 투혼이 여실히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영화를 보면 이야기를 집중해 따라가다가도, 감동을 주는 지점에서 의식이 영화에서 살짝 빠져나와 과거의 추억이나 자기가 탐구하던 물음 같은 세계로 가게 되지요?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던 것이 정화되고 풀리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걸 동아시아 미학에서는 ‘의경(意境·작품의 예술적 경지, 정취)’이라고 표현합니다.” 철학 중심으로 연구돼온 동아시아 사상을 미학에 초점을 둬 조명한 ‘동아시아예술미학총서’(전 6권·성균관대출판부)가 최근 마지막 권인 ‘중국 미학사: 상고 시대부터 명·청 시대까지’(장파 지음·사진)를 번역 출간하며 완간됐다. 시리즈를 책임 번역한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54·유학대 학장)는 8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에서 “동아시아 미학은 의경 탐구의 역사”라며 “현대 미술을 감상할 때도 작품이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가고, 찾던 길을 열어주는 체험을 한다면 ‘저 작품은 의경이 있구나’라고 표현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시리즈는 ‘중국 현대 미학사’, ‘소요유, 장자의 미학’, ‘대역지미, 주역의 미학’,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이상 2013년 출간), ‘동아시아 미의 문화사’(2017년) 등으로 구성됐다. 신 교수가 성균관대에 부임한 2000년 ‘예술철학’ 전공 수업에 쓸 교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시리즈를 구상해 번역 도서 선정과 강독에 착수했으니 19년 만에 작업의 마침표를 찍은 셈이다. 각 권마다 2∼4명씩 모두 연구자 13명이 번역에 참여했다. 실은 원본보다도 번역된 책들이 두 배가량 두껍다. 각 권마다 600쪽 이상이고 두꺼운 건 1000쪽을 넘는다. 인용한 원전의 한자 원문과 독음, 인명 지명 등의 풀이, 국역본과 관련 국내 연구 소개 등을 더했기 때문이다. 신 교수는 “동아시아 미학과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별다른 도움 없이 혼자 읽을 수 있는 번역을 추구했다”고 했다. 국내 학계에서 번역은 들어가는 공력에 비해 가치가 폄하되기 일쑤다. 신 교수는 “동아시아 근대는 ‘번역의 시대’이고, 번역은 해외 우수 연구 성과를 소개하는 전령의 역할을 맡아왔다”면서 “한국이 세계적으로 학술 연구를 선도하고 근원적 지식을 창출하고 있다면 또 모르지만, 여전히 번역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맹자 여행기’ 등을 냈던 신 교수는 이제 중용을 소재로 한 책을 구상하고 있다. 자신이 설립한 인문예술연구소에서 정기 강연과 공연을 열기도 한다. 신 교수는 “인문학이 작금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생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예술성을 가미하는 게 실마리가 된다”고 말했다. 문자와 언어로만 사람을 집중시키고 재미를 주는 건 한계가 있기에 인문학은 미술, 음악, 무용, 영화 등 예술과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