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차장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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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차장입니다.

jjj@donga.com

취재분야

2025-11-24~2025-12-24
문학/출판30%
역사21%
정치일반10%
문화 일반10%
사회일반10%
칼럼7%
검찰-법원판결3%
인사일반3%
산업3%
만화3%
  • 400년전 ‘한문 홍길동전’ 발견… “원작자 허균 아니라는 반증”

    약 400년 전 한문으로 쓴 ‘홍길동 전(傳)’이 발견됐다. 명칭은 ‘노혁전(盧革傳)’. 이 작품은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원작자가 허균(1569∼1618)이 아니라는 걸 뒷받침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윤석 연세대 명예교수(국문학)는 다음 달 발표할 예정인 논문에서 “노혁전은 짧은 한문 ‘전’ 형식이며 내용은 야담에 가깝다”며 “노혁전 저자보다 19년 앞서 태어난 허균의 홍길동전 역시 노혁전과 내용·형식이 유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발견한 노혁전은 전북 전주에 사는 조봉래 씨가 이 교수에게 제공했다고 한다. 노혁전은 의주부윤 등을 지낸 지소 황일호(1588∼1641)가 1626년 쓴 것으로 ‘지소선생문집(芝所先生文集)’에 실려 있다. 황일호가 전주 판관 시절 종사관으로부터 들은 도둑 ‘노혁’의 일대기를 담았다. 글에는 “노혁의 본래 성은 홍(洪)이고, 그 이름은 길동(吉同)”이라고 적혀 있다. 연산군 시절 실존 인물인 홍길동의 이야기가 변형돼 전해지다, 120여 년 뒤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674년 간행된 택당집(澤堂集)에는 “허균은 또 홍길동전을 지어 수호전에 비겼다(筠又作洪吉同傳以擬水滸)”고 나와 있다. 그러나 한글소설 홍길동전에는 허균의 사후 인물인 장길산이 언급되는 데다, 한글소설 양식 자체가 허균 사후 약 200년 뒤에나 등장한다. 결국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은 한글소설이 아니라 노혁전과 비슷한 한문 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혁전은 길이도 약 750자에 불과해 4만∼5만 자 분량의 한글소설 홍길동전과는 차이가 크다. 이 교수는 “한글소설 홍길동전은 1800년경 서울의 세책집에서 만들어 빌려주던 서민의 오락물이지 양반 지식인이 사회 문제를 비판하고자 지은 것이 아니다”라며 “허균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점이 노혁전의 발견으로 다시 한 번 드러났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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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범두 “동학농민혁명 - 3·1운동의 화합정신으로 공동체 통합 이뤄내야”

    올해 천도교는 수운대신사(최제우)가 동학(천도교)을 창도한 지 160년을 맞는다. 그는 양반 아이가 나이 지긋한 노비에게 하대를 하던 시대에 ‘세상 모든 사람은 누구나 근원적으로 평등하다’는 혁명적인 가르침을 내렸다. 노비문서를 불태웠고 자신의 두 여종 가운데 한 명은 딸, 한 명은 며느리로 삼았다. 민중의 큰 호응을 얻은 동학은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고, 100년 전 3·1운동을 주도했다. 5일 새로 취임한 송범두 천도교 교령(70)을 22일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에서 만났다. ―천도교가 3·1운동을 주도했던 힘은 무엇인가. “보국안민(輔國安民) 정신이다. 의암성사(손병희)는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고 땅을 치며 ‘10년 안에 나라를 되찾겠다’고 각오했다. 우이동 산골에 수련장을 지어 젊은이 483명을 훈련시키며 정신무장을 시켰다. 이들이 나중에 각지에서 3·1운동 궐기를 이끌었다. 중앙대교당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모은 건립 자금의 대부분을 일제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3·1독립선언서 역시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3만5000장을 비밀리에 인쇄해 천도교 조직을 통해 전국에 배포했다. 천도교가 이렇게 철저히 준비했기에 3·1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당시 인구 1700여만 명 가운데 교인이 300만 명에 이르렀던 천도교는 일제의 극심한 탄압과 분열 책동에 내몰렸다. 당시 장안에는 “천도교는 이제 굶어 죽는다”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 천도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수십만 명이 희생됐다. 1, 2대 교주 최제우, 최시형이 처형됐을 뿐 아니라 3·1운동을 이끈 3대 교주 손병희까지 옥고 끝에 서거했다. 송 교령은 “대를 이어 참혹한 형벌에 수장을 잃은 종단은 천도교뿐일 것”이라며 새삼 안타까워했다. ―법정 동학농민혁명 기념일(5월 11일)이 올해 처음 지정됐다. “천도교는 나라를 침탈당하는 상황에서 주인이 주인 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바랐다. 오늘날 그런 뜻이 많이 묻힌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5월 11일 기념행사에서 막상 천도교는 소외됐다. 동학농민군은 청수(淸水)를 모셔놓고 마음에 고하는 기도를 하고, 힘을 내도록 주문을 외고 난 뒤 목숨을 걸고 죽창을 들었다. 그런 정신을 식전식후 행사에라도 담을 수 있을 텐데, 행사 계획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인터뷰 자리에 동석한 교인이 “주최 측이 천도교와는 상의를 전혀 안 했다”며 “요즘 격분한 교인들의 전화가 중앙총부에 빗발친다”고 덧붙였다. 경남 남해 출신인 송 교령은 초교 4학년 때 70, 80대 어른들도 어린이에게 존대하는 천도교의 모습이 고귀해 보여 입교했다.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이 천도교다. “어른들이 어린이와도 꼭 마주 보고 큰절을 했다. 지금은 입식 생활을 하니 서서 맞절하지만. 천도교는 교인 누구나 설교를 할 수 있고, 교리와 교직에 성별을 포함해 어떤 구별도, 막힘도 없다. 해월신사(최시형)가 어느 집에 가 베 짜는 소리를 듣고 ‘누가 짭니까’라고 물었다. 집주인이 ‘며느리입니다’라고 답했다. 해월신사가 다시 ‘아닙니다. 한울님이 짜는 겁니다’라고 했다. 천도교 종지(宗旨)가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人乃天)’이고, 덕목이 사람을 한울님처럼 모시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이다.” ―앞으로 계획은…. “천도교인으로서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도인이 6만∼7만 명 된다. 입교식을 하는 이들도 꾸준히 늘고 있지만 교세가 선대의 업적에 비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재도약을 위해 뒤떨어진 일부 제도부터 다듬을 생각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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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주원 종법사 “원불교 여성교역자 독신 서약 없앨 것”

    “공산당의 ‘공(共)’자만 인용해도 잡혀가던 시절에도 원불교 스승들은 통일에 대해 긍정적이었지요. 제가 원기 52년(1967년)에 출가했으니 벌써 반백 년 전 이야기입니다.” 원불교 최고 지도자인 전산 김주원 종법사(71·사진)는 28일 ‘원기 104년 대각개교절(원불교 개교기념일)’을 앞두고 23일 전북 익산시 중앙총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교단에 통일부원장을 임명하고, 전문가 그룹을 양성하는 한편 통일 기금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산 종법사는 이날 원불교가 여성 교역자의 출가 시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아 왔던 데 대해 “규정을 개정해 내년부터 이 제도를 폐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과 수행은 하나라고 강조했다. 종법사는 “대종사(소태산)는 생활 속에서 선(禪)을 하라고 했다”며 “따로 처소를 구해 선을 한다고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진리가 작용하는 것이 은(恩)이다. 진리적으로 볼 때는 해로운 것도 이로운 것도 없고, 크게 보면 은혜가 아닌 것이 없다”고 했다. 일상의 화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느냐는 물음이 나오자 “감정이 앞서면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기에, 평소에도 마음을 붙잡아 멈추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올해 원불교 대각개교절 봉축행사는 ‘모두가 은혜입니다’가 주제다. 원불교 익산성지에서는 26일부터 다음 달 5일까지 제12회 ‘깨달음의 빛 축제’를 연다. 익산성지의 근대문화유산을 개방하는 한편으로 원불교 경전(대종경) 판화 제작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상영과 깨달음에 대한 영화 소개, 각종 체험 프로그램 등을 마련한다. 기념식은 28일 오전 10시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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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글에서 아랍어까지… 한 획 한 획, 쓰는 맛 보는 멋

    “한 획, 한 획 글자의 의미를 생각하며 만든 캘리그래피(Calligraphy)를 보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취감을 느낍니다. 펜과 종이만 있으면 되니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요.” 대학원생 황의현 씨(30)는 요즘 캘리그래피에 푹 빠져 있다. 그의 캘리그래피 작업이 특별한 이유는 한글이나 영어가 아닌 아랍어로 쓴다는 것이다. 황 씨는 “아랍어 글씨는 수많은 점들을 균형감 있게 배치해야 하고 고정된 형태를 벗어나 예술적으로 크게 변형할 수 있는 게 매력이다”며 “1∼2시간 동안 몰입해 완성한 캘리그래피는 내게 소중한 예술작품”이라고 말했다. 황 씨는 캘리그래피 동호회 활동을 하며 페르시아어의 글씨체인 ‘파르시’체도 연습하고 있다. 김종훈 씨(28)도 아랍어 캘리그래피 작품을 만든다. 어학 연수로 튀니지에 머무는 동안 일종의 서예학원에 다니며 취미로 아랍어 캘리그래피를 배웠다. 지난해까지는 관심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무료 강습도 했다. 김 씨는 “취직이나 경력 개발과 관련된 활동은 아니지만 삶이 힘들 때마다 펜을 집어 들고 정성스레 글자를 쓰면 자존감도 높아진다”고 했다. 그는 노래 가사, 좌우명 등을 아랍어로 번역해 작품을 만든다. 컴퓨터, 스마트폰에 익숙해져 좀처럼 펜을 쓸 일이 없어진 시대에 펜을 잡고 손으로 자신이 원하는 문구를 쓰는 캘리그래피가 각광받고 있다. ‘쓰기의 귀환’인 셈이다. 캘리그래피는 약 20년 전 유명 소설가들의 책 표지 제목 디자인으로 사용되면서 대중적으로도 인지도를 얻은 뒤 꾸준히 발전해 오늘날 제품 브랜드, TV 드라마·다큐멘터리 제목, 생활용품 디자인에 활용되고 있다. 한때 한글이나 알파벳을 예쁘게 쓰는 정도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독립된 예술 장르로 인정받으며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아랍어 캘리그래피를 비롯해 스케치, 드로잉과 결합한 캘리그래피가 인기를 모으고 있으며 작업 도구도 만년필, 색연필, 붓펜, 초크펜, 마커펜 등으로 다양하다. 과거에는 광고, 디자인 분야 종사자들이 캘리그래피를 주로 배웠지만 요즘에는 취미로 캘리그래피를 배우려고 전문학원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서울과 제주에서 필묵아카데미를 운영하는 김종건 대표는 “취미로 캘리그래피를 배우는 사람들이 수강생의 20%에서 최근 절반까지 늘었다”고 했다. 취미활동을 공유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립’에만 캘리그래피 관련 활동이 100여 개에 이른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소규모로 캘리그래피 작품을 공유하는 모임이 많다. 연령대도 다양하다. 이산글씨학교를 운영하는 이산 작가는 “중고교생부터 70대까지 매주 수강생 60여 명이 강의를 듣는다”고 말했다. 취미로 시작해 전문 자격증까지 취득하려는 수강생도 적지 않다고 한다.영문 캘리그래피가 한때 큰 인기를 끌었는데, 최근에는 한글 캘리그래피가 더 각광을 받고 있다. 이산 작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한글은 개인 취향에 따라 자기만의 글씨체를 만들기도 더 쉽고, 무한한 변형도 가능한 게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김종건 대표는 “한글 캘리그래피를 배우기 위해 스위스, 독일, 영국에서 오는 외국인 수강생도 적지 않다”고 했다. 손글씨의 인기는 도서 시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출판계에 따르면 시를 필사할 수 있도록 만든 ‘필사 시집’이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TV 드라마에 등장했던 필사 시집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김용택 지음·예담)는 2015년 첫 출간 이래 81쇄를 찍었고, 현재 3권까지 출간됐다. 윤동주 시인의 시를 필사할 수 있는 책도 시인의 탄생 100주년(2017년)을 즈음해 여러 권이 출간됐다. 자신의 생각을 손으로 쓸 수 있도록 디자인한 각종 다이어리북도 사랑받고 있다.김기윤 pep@donga.com·조종엽 기자}

    • 2019-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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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캘리그래피도 ‘法書’부터 잘 익혀야”

    “캘리그래피도 법서(法書)를 제대로 익히고 나서 써야 좋은 글씨가 나오지 않을까요.” 서울 종로에서 66년째 한국서예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서예가 평강 정주환 원장(86)은 16일 이렇게 말했다. 캘리그래피는 좁은 의미로는 서예와 같은 말이다. 동양의 전통 캘리그래피인 서예는 수천 년 동안 발전해왔고, 현대 들어서도 전문 서예가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취미로 서예를 배운다. 정 원장은 “서예는 글씨의 아름다움을 통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며 “정서를 순화하고 심성을 아름답게 해 준다”고 말했다. 전북 고창 출신인 정 원장은 어릴 적부터 명필로 소문이 나 학교 상장이나 명정(銘旌·장례에 쓰는 기), 비문을 도맡아 썼다고 한다. 상경해서도 정부 인쇄홍보물에 들어가는 글씨를 쓰다 학원을 운영하게 됐다. 초기 학원 이름은 한국서예디자인학원이었고 서예 강습뿐 아니라 그래픽 디자인, 일러스트, 공업·상업 디자인을 모두 다뤘다. 정 원장은 1세대 캘리그래퍼인 셈이다. 그는 최근 제자의 소개로 한반도의 화합과 평화를 염원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수제맥주 ‘소원’의 상표 캘리그래피를 써 주기도 했다. ‘소’자는 평창 올림픽의 스키 종목에서, ‘원’ 자는 무릎 꿇고 아이를 안은 부모의 모습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한다. 남북코리아미술교류협의회 이사장이기도 한 그는 1991년부터 남북 작가들의 공동 전시를 꾸준히 열고 있다. 지난날 서예학원생이 많을 때는 300명에 이르렀고 대학과 회사로부터 출강 요청이 이어졌다. 학원은 예전 같지는 않지만 수십 년째 다니는 이들이 있고, 젊은이들도 꾸준히 문을 두드린다. 정 원장은 “지금도 붓을 잡으면 잡념이 사라진다”며 “인격 도야와 아름다움의 창조를 겸하는 서도(書道)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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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장애인 차별과 학대, 일제강점기 때 시작”

    안질(眼疾)을 앓았던 세종대왕은 오늘날로 치면 시각장애 2급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조선시대 정1품 벼슬에 오른 장애인도 있었다. 평민 장애인도 자신에게 맞는 갖가지 직업을 갖고 자립적인 삶을 살아갔다. 중증 장애인은 나라가 구제에 나섰다. 편견은 엄연히 존재했지만 오늘날 정도의 차별을 받은 건 아니고, 사회의 양지에서 비교적 떳떳하게 살았다고 한다. 역사 속 소외계층의 모습을 연구해 온 고려대 초빙교수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장애인의 삶을 조명한 책이다. 근대, 특히 일제강점기로 들어오며 상황은 급격히 달라졌다. 산업화 등으로 장애인의 수가 급증한 반면 복지정책은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장애의 인식도 매우 부정적으로 바뀌어 동정과 비유의 대상을 넘어 놀림과 학대, 배제의 대상이 됐다. 조선시대 장애인은 몸에 병이 있는 사람, 불편한 사람으로 여겨졌지만 근대에는 ‘불구자’ 즉, 뭔가를 갖추지 못한 사람으로 불렸다. 20세기 초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우생학이 확산되며 부정적 인식은 더욱 강해졌다. 어느 시대보다 큰 고통을 겪으면서도 뛰어난 업적을 이룬 이들도 있었다. 책은 의병과 독립운동가, 교육자, 예술가 등으로 활약한 장애인들을 평전 형식으로 소개한다. 저자는 “장애인사(史)를 연구하다 보니 역사는 때로 후퇴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며 “현대 장애 문제의 뿌리는 외부에서 이입된 것”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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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 70여개 교단 여의도에 모여 ‘부활의 생명’을 온세계에…

    2019년 부활절을 맞아 개신교에서는 예배와 각종 행사를 통해 예수 부활의 의미를 되새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과 합동,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한국침례회, 대한성공회 등 국내 70여 개 교단은 21일 오후 3시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를 올린다. ‘부활의 생명을 온 세계에’가 주제이고 ‘예수와 함께, 민족과 함께’가 표어다. 이승희 예장 합동 총회장의 대회사로 시작하고 윤성원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이 성만찬을 진행한다. 설교는 전명구 감리회 감독회장이 맡는다.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위임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두 차례나 ‘너희에게 평강(평화)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며 “오늘날 한국사회가 이 평화의 메시지를 통해 계층, 지역, 세대, 이념 갈등을 녹이고 하나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3.1운동 100년 함께 만드는 평화’를 주제로 21일 서울 종로구 연동교회에서 부활절 새벽예배를 올린다. 이에 앞서 신도들과 역사 속 고통의 현장을 탐방하는 ‘고난의 현장순례’도 하고 있다. 전쟁과여성 인권박물관,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지 등을 거쳐 19일 광주 5·18민주광장을 찾는다. 지역별 행사도 다양하다. 과천시기독교연합회(회장 원준희 목사)는 21일 오후 3시 경기 과천시 과천소망교회에서 ‘과천시 부활절 연합예배 및 축하음악회’를 연다.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학생들과 교회 찬양대가 참여한다. 전북 익산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미크로스합창단은 21일 오후 7시 반 익산영생교회에서 ‘메시아-예수의 부활을 기리다’ 연주회를 연다. 클나무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헨델의 메시아 전곡을 2시간 반 동안 공연한다. 부산기독교총연합회는 15일 부산진역광장에서 짜장나눔축제를 열었다. 부산 부활절연합예배는 21일 부산 경성대에서 올린다. 경북 포항의 포항장성교회는 20일 오전 10시 영일대해수욕장 일원에서 ‘2019 개안수술을 위한 걷기대회’를 연다. 저소득층의 개안 수술비 마련을 위한 행사다. 대구기독교미술선교협회는 21일까지 대구 중구 대백프라자갤러리에서 회원 초대전을 연다. 지역별 연합 예배도 예정돼 있다. 울산에서는 21일 오후 3시 울산우정교회에서 2019 울산부활절연합예배를 올린다. 울산시기독교총연합회 회장 김영동 목사가 강사로 나선다. 대구부활절연합예배는 21일 오후 3시 대구스타디움에서 열린다. 강원 원주시기독교연합회는 이날 오후 2시 원주종합운동장에서 원주시 부활절 연합예배를 연다. 춘천중앙교회는 20일까지 오전 5시 반마다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를 열고, 21일 오전 11시 교회 본당에서 부활절 예배를 올린다. 경기 부천시기독교총연합회는 21일 오후 3시 부천시 소사동 소재 서울 신학대에서 연합예배를 드린다. 광명시부활절연합예배도 같은 시간 광명시기독교연합회 주최로 주품교회에서 열린다. 청주시기독교연합회는 21일 오전 5시 청주 올림픽 국민생활관에서, 충주시기독교연합회는 이날 오전 5시 반 충주체육관에서 부활절연합예배를 각각 드린다. 나눔 실천도 이어지고 있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는 부활절을 한 주 앞둔 시점까지 전국 42개 교회에서 2746명의 성도가 장기기증 희망등록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구세군 긴급구호팀은 강원 산불 이재민들과 피해 복구 작업에 나선 소방대원 및 자원봉사자들에게 생필품과 간식을 전달했다.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은 강원 양양군으로 구호팀을 급파하고, 고성과 속초에 구호캠프를 설치해 이재민들에게 구호키트를 전했다. 전남노회 광주제일교회는 부활주일 헌금을 화재 피해를 입은 전남노회의 다른 교회 및 피해 복구 작업에 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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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군, 1904년 군율 선포… 불법지배 사실상 시작”

    “군사사(史)적 관점에서 일본의 실질적인 한국 지배는 러일전쟁 당시인 1904년 2월 9일 일본군의 서울 점령으로 이미 시작됐다.” 한국역사연구원(원장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은 일본 메이조(名城)대 이나바 지하루(稻葉千晴·62) 교수를 초청해 16일 근대사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군사사로 본 한국 병합’을 주제로 발표한 이나바 교수는 “일본군은 러일전쟁이 끝난 뒤에도 철수하지 않고 1945년 8월 패전까지 군사력을 통해 한국 지배를 떠받쳤다”고 말했다.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8일 일본 함대가 뤼순(旅順) 군항을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됐고, 일본군은 인천으로 상륙해 서울을 점령한 뒤 10만 명가량의 병력을 한반도를 통해 만주로 이동시켰다. 일본군은 군대를 진주시킨 만주에서는 바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정서를 설치했지만 한국에서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그러지 않았다. 이나바 교수는 “그러나 일본군이 1904년 7월 3일 발포한 ‘군율’은 이름만 다를 뿐 사실상 계엄령이었다”고 말했다. 일본군이 발포한 ‘군율’에 따르면 한국주차군 사령관이 일본의 군사행동과 행정을 방해하거나 방해할 우려가 있는 한국인은 한국 법을 무시하고 극형에 처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2970만 m²(약 900만 평)에 이르는 토지를 강제로 수용하기도 했다. 이나바 교수는 “일본 외무성 사료관에 한일의정서(1904년 2월 23일 일제의 강박 아래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전제로 체결된 조약) 교섭 파일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며 “이는 외무성이 원래부터 한국 외교당국과 교섭할 생각이 없었고, 한일의정서 체결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일본의 독단 행위였다는 걸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세미나에 참석한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불법적 침략을 강조하려는 이나바 교수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이 관점에 따르면 1904년부터 1910년 강제병합 전까지 대한제국의 주권을 무시하는 결론에 이를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이태진 교수는 “그럼에도 이번 발표는 일본이 전쟁과 동시에 한국을 군사적으로 강점했고, 한일의정서는 저지른 일을 감당하려고 그 뒤에 강요한 것에 불과하다는 걸 드러낸다. 한국주차군이 발포한 ‘군율’은 주차군 군령과 통감부 법령으로 바뀌며 한일강제병합까지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이날 토론자로 나선 최덕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대한제국은 개전을 앞두고 중립 선언을 열강에 타전했고, 일본의 한국 점령은 20세기 전쟁사에서 교전국이 중립국을 침략한 최초의 사례였다”고 설명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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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달 3~5일 서울 종로 연등의 물결…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 잇따라

    불기 2563년 부처님오신날(5월 12일) 봉축행사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17일 열린 ‘미륵사지 탑등(燈)’ 점등식을 시작으로 막이 올랐다. 올해 부처님오신날 표어는 ‘마음愛(애) 자비를! 세상愛 평화를!’이다. 미륵사지 탑등은 국보 제11호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한지로 재현한 것으로 좌대를 포함해 높이가 20m에 이른다. 봉축 행사의 절정은 5월 3∼5일 서울 조계사와 종로 일대에서 열리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22호 연등회 행사다. 4일 동국대에서 어울림마당이 열린 뒤 연등행렬이 오후 7시부터 동대문을 거쳐 종로, 조계사로 이어진다. 올해 행렬에는 중생의 제도를 상징하는 불교의 네 가지 물건(법고, 범종, 운판·雲版, 목어) 모양의 등이 선두에 선다. 이어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며 대금과 장구를 든 모습의 주악비천등(奏樂飛天燈)이 뒤따른다. 행렬이 끝나는 오후 9시 반부터 종각 사거리에서는 참가자와 시민이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함께 강강술래 등을 즐기는 회향한마당이 열린다. 전통 등 전시회도 3∼12일 서울 조계사 옆 우정공원, 봉은사와 청계천 등에서 열린다. 5일 어린이날을 맞아 조계사 앞 우정국로에서 열리는 전통문화마당에서는 어린이 전통놀이 체험을 비롯해 여러 프로그램이 진행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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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장서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뜻 굽히지 않는 유림 정신 이어받자”

    유림의 독립운동인 파리장서운동 100주년 기념행사가 17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 명륜당과 전국 향교에서 열렸다. 파리장서운동은 1919년 3·1운동에 호응해 면우 곽종석 선생(1864¤1917)을 비롯한 유림대표 137명이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사건이다. 이를 주도한 유림 500여명이 옥고를 치르는 등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김영근 성균관장은 이날 기념사에서 “나라가 풍전등화에 처했을 때 유림은 선비정신에 입각해 의병운동을 주도하고 파리장서를 작성해 독립운동을 벌였다”며 “국권을 빼앗긴 시국에서도 목숨을 걸고 서명한 선배 유림의 정신을 이어받아 유림이 거듭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햇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축사에서 “3·1운동이 확산되는 데는 서울에서 진행된 고종의 국장에 참석한 뒤 귀향한 유림의 역할이 컸다”며 “모진 박해와 탄압을 받았지만 뜻을 굽히지 않은 지사들의 정신이 계승돼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도 축사에서 “‘붓의 투쟁’으로 불리는 파리장서운동을 계기로 유림이 대거 독립항쟁 대열에 참여했고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유림독립항쟁 파리장서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는 이달 말까지 성균관 명륜당 일원에서 파리장서 관련 자료를 전시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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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쓰촨성에서 선불교 꽃피운 ‘무상선사’ 사리탑 발견

    신라 출신 당나라 고승 무상선사(684∼762)의 사리탑(사진)이 발견됐다. 최석환 한국국제선차문화연구회장(월간 ‘차의 세계’ 발행인)은 중국 쓰촨(四川)성 펑저우(彭州) 단징(丹景)산 금화(金華)사에서 무상선사의 사리탑을 최근 확인했다고 16일 밝혔다. 무상선사는 정중종(淨衆宗)을 일으킨 인물로 쓰촨성을 무대로 선불교를 꽃피웠으며 티베트에도 선법을 알렸다. 최 회장은 “금화사 김두타원(金頭陀園)에 무상선사의 사리탑을 포함해 20여 기의 탑전이 1200년간 보존됐는데 10년 전 펑저우시 정부가 자연경관을 훼손한다며 김두타원을 허물었다. 그러나 사리함은 별도로 보관됐고, 사리탑도 복구하겠다고 시 정부가 이번에 밝혔다”고 전했다. 최 회장에 따르면 안사의 난을 맞아 쓰촨성으로 피한 당 현종의 여동생 금화공주가 무상선사의 법력에 감화돼 자신이 머물렀던 행궁을 금화사로 바꿨다고 한다. 무상선사는 김두타, 김화상, 김선사 등으로도 불렸고, 송고승전은 그가 신라 성덕왕의 아들이라고 전한다. 무상선사가 중국 오백나한 중 455번째 조사에 올랐다는 사실을 2001년 밝히기도 했던 최 회장은 “무상선사는 차와 선이 하나가 되는 동아시아 차 문화의 비조”라고 설명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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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태죄 폐지, 생명 경시로 이어질까 우려” 염수정 추기경 부활절 메시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염수정 추기경은 부활절(21일)을 앞두고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만연한 물질주의 등 다양한 형태로 생명이 억압받고 있다”며 “각자의 자리에서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15일 발표했다. 염 추기경은 이어 “최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형사처벌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것이 생명 경시로 이어질까 우려스럽다”며 “후속 입법 절차가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인 전광훈 목사는 이날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신 주님과 같이 낮아지기를 자처하며 이웃의 허물과 아픔을 감싸 안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자”고 말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2019년 부활절이 진정한 자유와 해방, 민주와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새 역사의 마중물이 되기 바란다”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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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남채 작가 “나라 앞날 걱정하던 인촌은 강물처럼 시대 품은 민족주의자”

    장편 ‘하의도’(2017년) 등을 쓴 김남채 소설가(75)가 인촌 김성수 선생(1891∼1955)의 삶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을 최근 출간했다. 제목은 인촌 선생의 유언을 딴 ‘나라 앞날이 걱정이다’(동서문화사·1만5000원)이다. 김 작가는 4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인촌 선생은 거대한 강물과 같은 포용력으로 시대를 감싸며 헤쳐 나갔고,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며 “민족만 바라보고 살다 간 민족주의자 인촌의 면모를 조명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소설은 1906년 인촌이 신학문을 공부하고자 창평(전남 담양군) 영학숙에 입학해 평생의 지기 고하 송진우 선생을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해 눈을 감기까지의 일대기를 담았다. 김 작가는 “일제강점기 러시아로 피신하려는 사회주의자들에게 말없이 금고를 열어주는 모습, 경자유전 원칙(농사짓는 사람만이 농지를 소유할 수 있음)을 담은 헌법 초안에 적극 찬성하는 모습, 제헌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5·10총선거에서 선거구가 없는 월남 이북 동포들을 위해 자신의 선거구를 양보하고 불출마하는 모습에서 나타난 인촌의 인품이 특히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소설은 ‘평전 인촌 김성수’ 등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썼다. 김 작가는 “흥미를 살리기 위해 픽션을 가미하긴 했지만 사료에서 발견한 사실들을 편집한 것만으로도 소설이 완성돼 어쭙잖은 허구는 끼워 넣을 틈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허구보다 더 경이로운 실제 사건들의 점철”이 됐다고 한다. 그는 “각종 서적과 자료를 숙독하며 인촌을 공부했지만 흠결을 찾기 어려웠다”며 “아무리 정권이 바뀌고 이념 대립이 치열하다고 해도 진실이 잘못 알려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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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문안교회 이상학 목사 “영성과 생명의 새 성전 거듭날 것”

    1887년 9월 서울 중구 정동 한 한옥에서 언더우드 선교사(1859∼1916)의 주재 아래 한국의 첫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창립했다. 서울 도심에서 132년 동안 근현대사를 지켜보고 여러 위인을 낳은 이 교회가 1972년 건축한 기존 건물을 허물고 여섯 번째 예배당을 최근 완공했다. 2017년 가을 새문안교회에 부임한 이상학 담임목사(55)는 “새 예배당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하다고 자평한다”며 “새문안교회가 더 큰 책임성을 가지게 됐다는 걸 절감하고 있다”고 10일 말했다. 새 예배당은 대지 면적 약 4200m²(약 1270평), 연면적 약 3만1900m²(약 9650평)에 지하 6층, 지상 13층 규모로 2300석의 대예배실과 교육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기존 건물은 본당이 1000석 규모여서 출석한 교인 5000여 명이 5부로 나눠 예배를 봐야 했지만 재개발 구역이어서 증축이나 리모델링은 불가능했다. 새 교회 건물 1층 새문안홀은 주민과 사회를 향해 문을 열어놓고 공연장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널찍한 교회 마당 역시 인도와 구분 없이 개방돼 있다. ―새 건물 외관이 화려해 보인다. “밖에서 보면 어머니가 팔을 벌린 듯한 조형미가 있고, 웅장하고 화려해 보일 수 있지만 안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외벽 마감재(사비석)를 비롯해 저렴하고 실용적인 자재를 썼다. 신축을 계기로 책임을 절감하며 더욱 진정한 마음으로 사회에 다가갈 것이다.” ―새문안교회 역사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는다면…. “복음과 민족, 백성의 만남이다. 1885년 4월 5일 인천에 입국한 언더우드 선교사가 토착 기독교인들을 만나 교회를 세웠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언더우드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당을 만나 서구 문물에 눈떴고, 언더우드 선교사의 손에서 자란 우사 김규식 박사가 독립운동을 벌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 축이 됐다. 한국의 백성이 고통스러운 나락에 떨어져 돌파구를 찾을 때 선교사의 복음이 영적 상상력과 구원의 출구를 제공했을 것이다.” ―1919년 당시 인구의 2%도 안 됐던 기독교인이 3·1운동을 이끌었던 바탕은…. “평안도 중심의 민초적 기독교와 기호지방을 중심으로 한 선각자적 기독교가 있었는데, 3·1운동 당시 절묘하게 만나 상승 작용을 일으켰다고 본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경건한 기독교인을 기르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임무지만 예수, 나라, 민족 사랑이 합쳐진 한국 초기 기독교회로부터 배울 점이 오늘날도 있다. 새문안교회는 어려움에 처한 한국 백성을 구하기 위해 교육과 계몽, 문화 사업을 펼쳤다. 애국 애족하는 신앙을 아름답게 이어 가겠다. 좋은 ‘임팩트’를 주는 신앙의 선각자를 키우고 싶다.” ―교회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싶은지…. “영성과 생명이 내 화두다. 기계 문명의 극단화 속에 영성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종교의 본질은 결국은 절대자와의 만남이라고 본다. 그것을 돕고자 한다. 반생명적이고 반인격적인 현대 문명 속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캠페인도 벌이고 싶다.” ―최근 종교인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더 탐욕스러운가’ 같은 비판이 나오는 게 부끄럽지만 사실무근도 아니다. 자성해야 한다. 또 한국은 모든 고등 종교에 치병, 기복 같은 샤머니즘의 영향이 있다. 이런 요소를 극복해야 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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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폭력-테러-여성 차별 그게 정말 이슬람일까

    이슬람과 무슬림을 주제로 20년 가까이 글을 써 온 미국인 저널리스트가 세계적 이슬람 학자 아크람 나드위를 찾아가 ‘꾸란 읽기’를 제안하고, 이슬람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함께 떠난 여정을 담았다. 아크람에 따르면 이슬람 원리주의는 무함마드가 전한 신의 계시와는 많은 면에서 다르고, 자살 폭탄 테러 역시 ‘알라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초기 이슬람교는 여성을 존중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여성의 자유를 인정했다. 이슬람 여성이 몸을 감싸는 베일 역시 알라의 가르침과 무관한 중동, 근동의 문화에 불과하다고 한다. 저자는 자신이 만난 대다수의 무슬림은 서구 문화와 함께 과격한 이슬람주의자에게 맞서는 이중의 짐을 지고 있다고 했다. 폭력은 꾸란이 아니라 인간의 율법이 낳았다는 것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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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계 “태아의 생명권 부정 유감”… 여성계 “여성의 권리 존중받게 돼 환영”

    “방어능력 없는 태아의 생명권 부정 유감”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 대해 천주교와 개신교 등 종교계에서는 “태아의 기본 생명권을 부정한 것”이라며 깊은 유감을 표시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1일 의장 김희중 대주교 명의로 낸 자료를 통해 “낙태는 태중의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죄이며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교회의 가르침에는 변함이 없다”며 “이번 결정은 수정되는 시점부터 존엄한 인간이며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존재인 태아의 생명권을 부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천주교회는 지난해 3월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는 신자 100만 명의 서명을 받아 헌재에 전달하기도 했다. 주교회의는 또 “헌재 결정은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고착시키고 남성에게서 부당하게 면제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도 이날 대변인 허영엽 신부 명의의 입장문을 통해 헌재 결정에 유감을 표시했다. 서울대교구는 “관련 후속 입법이 신중하게 이뤄져 임신한 여성과 태아의 생명 모두를 지킬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개신교계를 비롯해 79개 단체가 모인 ‘낙태죄 폐지 반대 전국민연합’도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의 존중이라는 헌법 정신에 입각해 볼 때 낙태죄는 존치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낙태죄는 태아의 생명권뿐 아니라 여성의 건강권을 지켜주고,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전적인 책임으로부터 보호하는 법”이라며 “낙태가 허용되면 그로 인한 의료 보건적 부작용, 정신적 피해가 더욱 전적으로 여성들에게 전가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교회언론회도 이날 “헌재의 결정은 생명 존엄성을 경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갈 것이어서 매우 걱정스럽다”고 논평을 냈다.“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 존중받게 돼 환영”“여러분, ‘헌법불합치’가 나왔습니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소식이 전해진 11일 오후 2시 50분경 서울 종로구 헌재 앞에서는 ‘와’ 하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낙태공동행동)이 이날 오전 일찍부터 주최한 낙태죄 위헌판결 촉구 집회에 참여한 300여 명은 서로 부둥켜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감격해 눈물을 흘리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문설희 낙태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은 “오늘은 정말 역사적인 승리의 날”이라며 “그동안은 경제개발과 인구관리라는 명목으로 낙태죄를 처벌했지만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참가자들은 ‘낙태죄는 위헌이다, 우리는 승리했다’ ‘역사는 진보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오후 3시 50분까지 자리를 지켰다. 배복주 장애여성공감 대표는 “여성이 자신의 몸과 건강에 대한 권리를 존중받을 기회가 생긴 것”이라며 헌재의 결정을 반겼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이날 논평을 내고 “유엔 여성차별위원회는 ‘안전하지 않은 여성의 임신중절이 모성 사망과 질병의 주요 원인’이라며 낙태 합법화를 한국 정부에 권고한 바 있다”며 “이런 측면에서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은 타당하다”고 밝혔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도 논평을 통해 “여성들은 그들의 삶을 옥죄던 잔혹하고 굴욕적인 족쇄 하나를 벗어던졌다”며 헌재의 결정을 환영했다. 법안과 제도 마련 등 후속 조치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위헌이 아닌 헌법불합치 결정이기 때문에 임신중절의 허용범위와 시기, 사유 등이 국회의 법개정과 입법후속조치에서 치열한 쟁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김은지 기자 eunji@donga.com}

    • 2019-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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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계 “낙태죄 헌법불합치 유감…태아의 기본 생명권 부정한 것”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 대해 천주교와 개신교 등 종교계에서는 “태아의 기본 생명권을 부정한 것”이라며 깊은 유감을 표시하고 나섰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1일 의장 김희중 대주교 명의로 낸 자료를 통해 “낙태는 태중의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죄이며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교회의 가르침에는 변함이 없다”며 “이번 결정은 수정되는 시점부터 존엄한 인간이며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존재인 태아의 생명권을 부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천주교회는 지난해 3월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는 신자 100만 명의 서명을 받아 헌재에 전달하기도 했다. 주교회의는 또 “헌재 결정은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고착시키고 남성에게서 부당하게 면제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주교회의는 “잉태된 생명을 보호하는 일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맡겨진 책임”이라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생명을 잉태한 여성과 남성이 태아의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선택하도록 도와줄 법과 제도의 도입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말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도 이날 대변인 허영엽 신부 명의의 입장문을 통해 헌재 결정에 유감을 표시했다. 서울대교구는 “관련 후속 입법이 신중하게 이뤄져 임신한 여성과 태아의 생명 모두를 지킬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개신교계를 비롯해 79개 단체가 모인 ‘낙태죄폐지반대전국민연합’도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의 존중이라는 헌법 정신에 입각해 볼 때 낙태죄는 존치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낙태죄는 태아의 생명권 뿐 아니라 여성의 건강권과 자기결정권을 지켜주고,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전적인 책임으로부터 보호하는 법”이라며 “낙태가 허용되면 그로 인한 의료 보건적 부작용, 정신적 피해, 사회적 비용이 더욱 전적으로 여성들에게 전가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또 “낙태죄는 낙태를 하게 만드는 남성들의 비양심과 비도덕적 행동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묻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며 “만일 낙태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남성들은 더욱 책임질 수 없는 임신에 대해 면죄부를 갖고 안일하게 행동할 것이며, 여성들은 무책임한 남성들과 사회의 무관심에 빠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 2019-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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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시정부는 암울한 일제강점기 민족의 ‘희망자본’이었다”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다. ‘뿌리 깊은 나무’의 100번째 생일을 축하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고민이 필요할까. 백범 김구와 현대사 연구에 정통한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61),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과 한국사회학회장을 지낸 박명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64)가 5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머리를 맞댔다.》 ―우리 역사에서 임정의 의미는…. ▽박명규=암울한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희망 자본’, ‘상징 자본’이었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뜻을 둔 인사들에게 임정은 늘 정신적 구심점이었다. 학도병으로 끌려간 김준엽과 장준하가 일본군을 탈출한 뒤 한국광복군을 찾아간 것도 임정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민중이 공화국의 주권자라는 개념이 명료하게 헌정 원리로 자리 잡은 것도 임정이 시작이고, 제헌헌법으로 이어졌다. ▽도진순=임정 수립의 바탕이 된 3·1운동은 독립운동사에서 거대한 수원(水源)과 같다. 농민, 여성, 노동자, 학생의 대각성이 생겨났고, 이들이 독립운동의 물결로 일어났다. ―100주년 맞아 관련 행사도 많았다. ▽박=3·1운동과 임정의 가치를 알리는 건 뜻깊은 일이다. 양적으로 많은 행사가 있었던 것은 좋으나 질적 풍성함에서는 아쉬움이 있다. 세계적 평화질서 구축과 3·1운동을 연결하는 시야의 확장이 필요하다. 100주년을 맞아 토론의 쟁점들이 새로 생겨야 앞으로도 주요 화두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도=대통령직속 100주년 기념위의 최근 학술포럼 제목이 ‘3·1운동에서 촛불혁명으로, 임정 수립에서 통일 한반도로’다. 일부에서 3·1운동을 ‘혁명’으로 호명하면서 ‘촛불혁명’과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강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임정을 통일과 연결짓기 위해서는 임정이 지난날 광복 직후 국내에 들어와 좌우·남북이 대립하는 국면에서 어떤 한계가 있었는지 성찰해 보는 것이 도리라 생각한다. ▽박=‘3·1혁명’이냐 ‘3·1운동’이냐는 표현 문제는 최근 불거진 게 아니다. 제헌헌법 초안도 ‘기미삼일혁명’으로 출발했다. 최근 3·1운동을 민족적 저항뿐 아니라 민중의 각성, 민주주의와 공화정의 기원으로 조명하면서 혁명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일리가 있다. 다만 논의가 자연스럽게 쌓여가면서 시대적인 규정으로 용어가 자리 잡는 것인 만큼 학계의 토론을 더 할 필요가 있다. 주체들의 다양한 면모와 성격을 드러내는 작업도 함께 이어졌으면 한다. ▽도=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 3·1운동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해 일면적 파악이 심했다. 2·8독립선언서나 기미독립선언서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과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낭만적인 인식이 보인다. 폴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제국들이 1차대전으로 무너지니, 폴란드는 1918년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곧바로 독립했다. 이처럼 임시정부는 정당과 달리 투표 등으로 국민의 주권을 확인해야 해 5년 정도의 길지 않은 기한을 예상하고 수립된다. 그러나 두루 지적하다시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전승국 식민지에는 해당되지 않았고, 동아시아에서 일제의 힘은 더 강해졌다. 임정은 수립 5년도 채 안 돼 해체론 등 대대적인 위기에 봉착했다. ▽박=기미독립선언서는 다소 원론적으로 느껴져도 문명론적 지향이 뚜렷해서 그만큼 긴 울림을 갖는다.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형태로 독립운동을 추구한 것도 1930년대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협력, 카이로 회담 등 전후 처리 의사 결정에 한국의 의지를 관철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됐다. 그런 점에서 임정이라는 조직 형태를 지킨 것은 타당했다고 본다. 임정이라서 명분이나 국제적으로 잠정적 대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그나마 가졌던 것 아니었을까. ▽도=우리가 국제 정세를 낙관적으로 오판한 것이 1919년만은 아니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에 기운 시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백범일지’나 ‘안응칠 역사’, 2·8독립선언에도 그런 구절이 나온다. 2차대 전 종전으로 광복되자 마찬가지 실수를 했다. 물러가는 일본만 보고 ‘해방’이라 낙관했지만, 곧바로 신탁통치가 거론되고 분할 점령된 국제 정세를 당면하게 된다. 이러한 엄중한 정세를 직시했더라면 좌우대립이나 정권 투쟁이 실제보다 덜했을 것이다. ▽박=임정은 30년 가까운 실천의 물줄기다. 다양한 흐름이 합류했고 시대에 따라 형태도 변했다. 이를 마치 결집된 단일한 정부 캐비닛 조직으로 이해하는 건 잘못이다. 정통론적 시각으로 접근해 임정 이외의 운동이나 세력, 주체 조직을 평가절하하거나 비정통을 가르고 배제하는 시각은 넘어서야 한다. ▽도=전적으로 동의한다. 협애한 정통론으로는 항일독립운동의 폭과 깊이, 해방 정국의 역동성을 포괄할 수 없다. 광복 직후 중국 충칭에선 임정 내부에서도 해산론이 거론됐다. 백범은 1945년 당시 개천절인 11월 7일 중국 상하이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서 연합국에 부끄럽고 감사하다”는 연설을 했다. 귀국 이후 임정법통론의 강화를 추진했지만 남한 내 인민공화국 세력과 좌파, 미군정, 북한의 김일성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등 3면으로 대립했다. 우파 내의 이견도 있었다. 결국 미군정의 자문기관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으로 흡수돼 버린다. 김창숙 선생은 이를 ‘임정에 의한 임정의 해소’라고 했다. 정당과 달리 정부 형태는 합작과 연대가 만만치 않다. ―오늘날 정세 인식을 어떻게 해야 하나. ▽도=한반도를 분단체제로 바라보면 ‘통일’이 목표가 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더 위력적인 것은 북-미 대립을 축으로 하는 정전체제다. 동서독과 달리 우리는 전쟁을 치렀다. 정전체제에서는 정치, 군사, 안보가 가장 중요하다. 개성공단 같은 경제협력도 앞으로는 정치군사적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박=남북한은 유엔 회원국이다. 만약 북-미 간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고 평화협정이 맺어진다면 북한이 가진 국가로서의 지위, 성격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분단국체제’라는 인식 틀을 제안한다. 성격이 매우 다른 두 분단국가가 어떻게 공존하고 평화를 만들어 갈 것인가에 관한 규율과 틀을 마련할 준비를 해야 한다. ▽도=“진정한 선구자들은 미래뿐만 아니라 잊혀진 과거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는 사람이다”는 보르헤스의 구절을 좋아한다. 3·1운동과 임정 100주년이 과거에 대한 일방적인 찬양이 아니라, 현실을 더욱 직시하게 하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화두를 끄집어낼 수 있게 반성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박=100주년을 마무리한다는 느낌보다 새 100년을 준비한다는 마음이 필요하다. 미래를 향한 열린 감수성으로 이어져야 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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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시정부는 암울한 시대 우리 민족의 ‘희망자본’이었다”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다. ‘뿌리 깊은 나무’의 100번째 생일을 축하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고민이 필요할까. 백범 김구와 현대사 연구에 정통한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61),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과 한국사회학회장을 지낸 박명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64)가 5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머리를 맞댔다.―우리 역사에서 임정의 의미는?▽박명규=암울한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희망 자본’, ‘상징 자본’이었다. 민중이 공화국의 주권자라는 개념이 명료하게 헌정 원리로 자리 잡은 것도 임정이 시작이고, 제헌헌법으로 이어졌다.▽도진순=임정 수립의 바탕이 된 3·1운동은 독립운동사에서 거대한 수원(水源)과 같다. 농민, 여성, 노동자, 학생의 대 각성이 일어났고, 이들이 독립운동의 물결로 일어났다.―100주년 맞아 관련 행사도 많았다.▽박=3·1운동과 임정의 가치를 알리는 건 뜻 깊은 일이다. 양적으로 많은 건 좋지만 질적 풍성함에서는 아쉬움이 있다. 세계적 평화질서 구축과 3·1운동을 연결하는 시야 확장이 필요하다. 100주년을 맞아 토론의 쟁점들이 새로 생겨야 앞으로도 주요 화두로 자리 잡을 텐데, 마치 말끔하게 결론을 맺으려 했던 건 아쉽다.▽도=대통령 직속 100주년 기념위의 최근 학술포럼 제목이 ‘3·1운동에서 촛불혁명으로, 임정수립에서 통일 한반도로’다. 일부에서 3·1운동을 ‘혁명’으로 호명하면서 ‘촛불혁명’과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강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임정을 통일과 연결짓기 위해서는 임정이 지난날 해방 직후 국내에 들어와 좌우·남북이 대립하는 국면에서 어떤 한계가 있었는지 성찰해보는 것이 도리라 생각한다.▽박=‘3·1혁명’이냐 ‘3·1운동’이냐는 표현 문제는 최근 불거진 게 아니다. 제헌헌법 초안도 ‘기미삼일혁명’으로 출발했다. 최근 3·1운동을 저항 뿐 아니라 민중의 각성, 민주주의와 공화정의 기원으로 조명하면서 혁명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만 논의가 자연스럽게 쌓여 가면서 시대적인 규정으로 용어가 자리 잡는 것인데, 너무 100주년에 맞추려하는 조급함이 느껴진다. 오히려 주체들의 다양한 면모와 성격을 드러내는 작업으로 이어졌으면 한다.▽도=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 3·1운동 당시 국제정세에 대해 일면적 파악이 심했다. 2·8독립선언서나 기미독립선언서에는 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과정과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낭만적인 인식이 보인다. 폴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제국들이 1차 대전으로 무너지니, 폴란드는 1918년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곧바로 독립했다. 이처럼 임시 정부는 정당과 달리 투표 등으로 국민의 주권을 확인해야 해 5년 정도의 길지 않은 기한을 예상하고 수립된다. 그러나 두루 지적하다시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전승국 식민지에는 해당되지 않았고, 동아시아에서 일제의 힘은 더 강해졌다. 임정은 수립 5년도 채 안 돼 해체론 등 대대적인 위기에 봉착했다.▽박=지도부가 최적의 정치적 효과를 얻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내지 못한 한계는 있다. 그러나 3·1운동에서 지도부의 역할은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다소 추상적이고 원론적으로 느껴져도 그만큼 긴 울림을 갖는다. 결과론이지만 1930년대 중국 국민당정부와의 협력, 카이로 회담 등 전후 처리 의사결정에 한국의 의지를 관철하고자 하는 노력 측면에서는 임정이라는 조직형태를 지킨 것이 타당했다고 보인다. 임정이라서 명분이나 국제적으로 잠정적 대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그나마 가졌던 것 아니었을까.▽도=우리가 국제 정세를 낙관적으로 오판한 것이 1919년만이 아니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에 기운 시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백범일지’나 ‘안응칠 역사’, 2·8독립선언에도 그런 구절이 나온다. 2차대전 종전으로 광복되자 마찬가지 실수를 했다. 물러가는 일본만 보고 ‘해방’이라 낙관했지만, 곧바로 신탁통치가 거론되고 분할 점령된 국제정세를 당면하게 된다. 이러한 엄중한 정세를 직시했더라면 좌우대립이나 정권 투쟁이 실제보다 덜했을 것이다.▽박=임정은 30년 가까운 실천의 물줄기다. 다양한 형태로 변했고, 여러 세력들이 들어오고 나가기도 했다. 이를 마치 결집된 단일한 정부 캐비닛 조직으로 이해하는 건 잘못이다. 정통론적 시각으로 접근해 임정 이외의 운동이나 세력, 주체 조직을 평가절하하거나 비정통을 가르고 배제하는 건 좋지 않다.▽도=전적으로 동의한다. 협애한 정통론으로는 항일독립운동의 폭과 깊이, 해방 정국의 역동성을 포괄할 수 없다. 해방 직후 중국 충칭에서 임정 내부에서도 해산론이 거론됐다. 귀국 이후 임정법통론의 강화를 추진했지만 남한 내 인민공화국 세력과 좌파, 미군정, 북한의 김일성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등 3면으로 대립했다. 우파 내의 이견도 있었다. 결국 미군정의 자문기관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으로 흡수돼 버린다. 김창숙 선생은 이를 ‘임정에 의한 임정의 해소’라고 했다. 정당과 달리 정부 형태는 합작과 연대가 만만치 않다.―오늘날 정세 인식을 어떻게 해야 하나?▽도=한반도를 분단체제로 바라보면 ‘통일’이 목표가 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더 위력적인 것은 북미대립을 축으로 하는 정전체제다. 분단체제론에서는 흔히 문화 경제 스포츠 등이 풀리면 정치·군사·안보 문제도 풀릴 수 있다고 본다. 경제협력을 강화하면 평화통일이 된다는 평화경제론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정전체제에서는 정치, 군사, 안보가 가장 중요하다. 동서독과 달리 우리는 전쟁을 치렀다. 개성공단 같은 경제협력도 앞으로는 정치군사적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박=남북한은 유엔 회원국이다. 북한은 북핵문제를 둘러싼 국제 협상에도 주권체로 참여하고 있다. 만약 미국 북한 간 평화협정이 맺어진다면 북한이 가진 국가로서의 지위, 성격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남북한을 성격이 다른 두개의 분단국가가 국가라는 실체로서 대립하고 있다고 냉정히 보는 것이 필요하다. ‘분단국체제’라는 인식 틀을 제안한다. 성격이 매우 다른 두 분단국가가 별개의 국가라는 걸 인정하고 어떻게 공존하고 평화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관한 합의된 규율과 틀을 마련할 준비를 해야 한다. ▽도=“진정한 선구자들은 미래뿐만 아니라 잊혀진 과거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는 사람이다”는 보르헤스의 구절을 좋아한다. 3·1운동과 임정 100주년이 과거에 대한 일방적인 찬양이 아니라, 현실을 더욱 직시하게 하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화두를 끄집어낼 수 있게 반성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박=옳다. 100주년을 이벤트와 잔치로 끝내서는 안 된다. 미래를 여는 감수성으로 확장해야 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 약력△1993년 서울대 국사학 박사 △1993년 창원대 사학과 교수 △1995년 국회 법제사법위 산하 백범김구선생시해진상규명위 전문자문위원 △1998년 참여연대 운영위원 △2001년 미국 하버드대 객원교수 △2002년 창원대 박물관장 △2006년 한국사연구회 이사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 △2007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 박명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약력△1991년 서울대 사회학 박사 △1983년 전북대 사회과학대 교수 △1994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2002~2004년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소장 △2011년 국립대학법인 서울대 이사 △2014년 대통령직속 통일준비위원회 사회문화분야 민간위원}

    • 2019-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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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은 민주-공화주의를 향한 세계사적 흐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우리 민족만의 외로운 투쟁이 아니었으며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라는 새로운 세계적 사조와 걸음을 같이하며 일어난 것이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도형)이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하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민주·공화주의의 세계사적 의미와 동아시아 독립운동의 전개’가 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김 이사장은 이날 환영사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민주·공화주의가 한국이나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멀리 아일랜드와 핀란드, 터키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확산됐다”고 강조했다. 김 이사장은 또 “이런 국제적인 정세와 변화는 1920년 창간한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국내에 알려졌고, 이를 통해 민주·공화주의 논의가 심화되고 한국 민족주의 운동도 더 성장할 수 있었다”면서 “오늘 학술회의가 동아일보의 후원으로 이뤄지는 건 이런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덧붙였다. 퍼걸 맥게리 영국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퀸스대 교수는 이날 발표에서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들의 독립선언문은 3·1독립선언서와 마찬가지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수사가 물씬 녹아있다”며 “아일랜드와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세계사 속에서 동일한 사상적 순간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허우중쥔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연구원은 “중국 역시 1919년 5·4운동으로 불평등조약 폐지 주장이 정치 엘리트에서 대중까지 널리 퍼져 나갔고,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독립과 건국 사상이 선명해졌다”고 말했다. 장인성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독립선언서의 평화사상과 세계주의에 착목하면서 동아일보의 1925년 5, 6월의 사설을 소개했다. 그는 “사설은 ‘동양의 단결과 평화는 각 민족의 권리와 희망을 존중하고 평등한 지위에서 자유로운 정신으로 연합하는 데 있다’고 했다”고 말했다. 본보 사설은 또 지리적, 역사적 ‘자연 상태’에 따라 “조선인은 조선에서 조선인으로 살 것이고, 일본인은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살아야 한다”면서 그러지 않으면 서로의 번영을 해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광 국사편찬위원장은 이날 축사에서 “3·1운동의 역사적 의미가 언제나 ‘현재적 사건’으로 이 땅에 자리 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학술회의는 이 밖에도 미즈노 나오키 일본 교토대 명예교수,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윤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신효승 서종진 장세윤 동북아재단 연구위원이 발표했고 안영배 동아일보 논설위원 등이 토론자로 나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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