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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1번 환자가 증상이 나타나 병원을 찾았지만 8일이나 보건당국의 방역 체계가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슈퍼 전파자’ 14번 환자를 진료한 삼성서울병원은 접촉자 명단의 연락처를 누락하거나 뒤늦게 제출했다. 조기 수습 기회를 놓친 데다 병원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 등 보건당국과 의료기관의 태만으로 사태를 키운 인재(人災)였던 셈이다. 그런데도 메르스 대책을 지휘했던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징계에서 제외돼 ‘봐주기 감사’라는 비판이 나온다. 감사원은 지난해 9~10월 보건복지부·질병관리본부 등 18개 기관을 대상으로 실시한 ‘메르스 예방 및 대응 실태’ 감사 결과를 14일 발표했다. 지난해 5월 11일 처음 증상이 발현된 1번 환자는 19일 오후 8시에 메르스 검사를 받았다. 보건소에 신고하고도 이미 34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보건당국이 방문 국가가 메르스 발생 국가가 아니라며 신고 철회를 종용하며 검사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다른 질병관리본부의 메르스 대응 지침도 격리 대상 범위를 좁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WHO는 2m 이내에서 접촉한 사람을, 질병관리본부는 2m 이내에서 1시간 이상 접촉한 사람을 격리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의사가 격리 대상에서 빠졌고 1번 환자와 접촉한 ‘슈퍼 전파자’ 14번 환자도 제외돼 확산 범위가 넓어졌다. 초기 대응에 실패하자 보건당국은 삼성서울병원에서 14번 환자와 접촉한 사람의 명단 확보에 나섰고, 역학조사관은 5차례나 접촉자 명단을 병원에 요구했다. 하지만 병원은 14번 환자 접촉자 명단(117명)을 연락처가 없는 상태에서 보내거나, 나머지 명단(561명)을 이틀 늦게 보내는 등 방역 조치에 소극적이었다. 명단을 받은 보건당국도 5일이 지나서야 시도 보건소에 통보하고도 이미 조치가 된 것처럼 장관에게 허위 보고를 했다. 결국 14번 환자는 81명이나 감염시켰다. 또 보건당국은 삼성서울병원 의사인 35번 환자의 확진 날짜를 6월 1일이 아닌 4일로 속여 언론에 공개해 병원을 감싸는 태도를 보였다. 감사원은 3차 감염으로 환자가 급증했는데도 병원명 비공개를 고수해 감염을 확산시켰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같은 판단을 최종적으로 내린 문 전 장관은 이번 징계에서 제외됐고 최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에 임용됐다. 대신 방역 활동 ‘실전’에 나선 질병관리본부에 징계가 집중됐다. 감사원은 양병국 본부장의 해임을 권고했고, 질병관리본부 센터장 등 실무자 8명에게 정직 이상의 중징계를 통보했다. 삼성서울병원은 의료법에 따라 과징금 조치를 취하도록 권고했다. 감사원은 “부실한 초기 대응은 질병관리본부에서 담당한 데다 문 전 장관은 이미 사퇴함에 따라 징계에서 제외됐다”고 설명했다.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어렵고 힘들 때 손을 잡아 주는 것이 최상의 파트너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13일 ‘대국민 담화 및 신년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4차 핵실험에도 뚜렷한 대북 제재 동참 의사를 드러내지 않는 중국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박 대통령은 “중국은 누차에 걸쳐 북핵 불용 의지를 공언해왔다”며 “실제 필요한 조치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5번째, 6번째 추가 핵실험도 막을 수 없고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와 안정도 담보될 수 없다는 점을 중국도 잘 알고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직접적으로 ‘중국의 역할’을 언급하면서 국제사회의 포괄적인 대북 제재에 동참하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중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지난해 9월 중국 전승절 기념식 참석 이후 한중 관계가 다시 한 번 변곡점을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 역할 강조가 미칠 득실은 박 대통령의 언급에는 한국 외교가 처한 어려움이 그대로 드러났다. 박 대통령이 국내 여론의 반발을 무릅쓰고 전승절 기념식에 참석한 것은 ‘북핵·통일 외교’ 문제의 진전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가진 대북 제재 수단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실효적 제재 조치에는 중국의 동참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의 통화조차 이뤄지지 않는 등 아직까지 중국은 응답이 없다. 문제는 중국을 압박하다가 대중 정책 자체가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는 것. 박형중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책임을 중국에만 전가하면 한중 관계가 악화되고, 중국이 움직일 여지까지 없어지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역대 가장 강력한 대북 제재’를 주문했다. 중국 설득이 외교당국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된 것. 외교 소식통은 “아직 유엔 제재안 초안을 모든 회원국이 회람하지 못한 상태”라고 말했다. 한미 기초안을 받아 든 중국의 초기 반응은 미온적이다. 외교 소식통은 “네 차례나 반복된 북한의 핵실험과 동북아 정세의 급변에서 중국도 머릿속이 복잡한 것 같다”고 전했다.○ 북한은 전체주의 체제… 통일·대화 언급 없어 박 대통령은 우리 정부가 4차 핵실험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지적에 대해 “특이 동향이 없어 임박한 징후를 포착할 수 없었다”며 “미국도 몰랐다. 이건 확실한 사실”이라고 했다. 앞으로 대북 정보 수집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또 박 대통령은 이날 처음으로 북한 김정은 체제를 독재정권을 뜻하는 ‘전체주의 체제’로 규정했다. 대북 심리전에 대해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위협은 진실의 힘”이라며 “정부는 북한 주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국내와 미국 전문가 일각에서 제기된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 정보를 전파해 정권 교체(레짐 체인지)를 이루자’라는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담화문에 박 대통령이 매년 신년 담화에서 강조하던 ‘통일’이 사라지고 대북 정책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도 거론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정부의 대북 독자 제재 조치에 대해 “일일이 말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말했다. 나진∼하산 물류 프로젝트 중단 가능성도 거론된다. 개성공단 폐쇄, 철수에 대해서는 “추가 조치를 더 할지는 전적으로 북한에 달려 있다”며 북한의 추가 도발이 변수가 될 것임을 시사했다.우경임 woohaha@donga.com·윤완준·조숭호 기자 ※ 외교안보 분야 주요 발언“(북한 김정은 체제를 가리키며)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위협은 진실의 힘이다. 정부는 우리 국민의 안위를 지키면서 북한 주민에게 진실을 알리는 노력을 지속해 나갈 것이다.” “(현재) 개성공단 (출입) 인원도 제약하고 있는데 개성공단에 대한 (폐쇄나 철수 같은) 추가적 조치는 전적으로 북한에 달려 있다. 정부는 북한 상황을 지켜보면서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전술핵을 우리도 가져야 되지 않느냐 하는 주장에 대해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국제사회하고 약속한 바가 있기 때문에 이는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깨는 것이 된다.” “(위안부 피해자 협상 결과에 대해) 현실적 제약이 있기 때문에 100% 우리가 만족할 수는 없다. 최대한 성의를 갖고 제대로 합의되도록 노력한 것은 인정해 주셔야 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의 4차 핵실험에 대한 대북 제재 결의안 초안을 회람하기 시작했다. 제재 방안으로 △북한 선박 입항 금지 △이란식 금융제재 △개인·기업 교역 금지 대상 확대가 거론된다. 하지만 중국의 반발을 우려해 가장 효과가 큰 대북 석유 공급 차단은 대상에서 제외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 당국자는 11일 “유엔의 대북 제재에서 신속함과 단호함은 ‘트레이드오프(trade-off)’ 관계에 있다”고 말했다. 하나를 강조하면 다른 한쪽이 약해지는 양자택일 성격의 관계라는 것이다. 그동안 대북 결의는 국제사회의 단합된 목소리를 보여주기 위해 한 번도 표결까지 가지 않고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하지만 협의 때마다 중국은 북한을 버린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러시아는 대미(對美) 견제 카드로 안보리를 활용하려고 대북 제재에 어깃장을 놓는 행태를 반복했다. 북한 인권 규탄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져온 앙골라, 중남미의 대표 좌파 정부인 베네수엘라가 안보리 이사국인 점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베네수엘라는 2월부터 안보리 의장국을 맡는다. 이 때문에 정부는 1월 중에 안보리 논의를 마친다는 목표를 잡고 미국, 일본과 제재안 협의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한국은 안보리 이사국이 아니어서 미일의 협력이 필요하다. 중국을 상대로는 북핵이 실질적 위협이 되고 있고 지진, 방사능 오염 등 접경지역 중국 주민들의 우려가 크다는 점을 활용해 설득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외교 소식통은 전했다.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를 맡고 있는 황준국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13일 서울에서 성 김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이시카네 기미히로(石兼公博)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과 협의한 뒤 그 결과를 갖고 14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우다웨이(武大偉) 외교부 한반도사무특별대표를 만난다. 정부 당국자는 “중국이 표면적으로 한미일의 대북 제재에 선을 긋고 있지만 자체적으로 제재에 착수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한편 데니스 맥도너 미 백악관 비서실장은 10일(현지 시간) CNN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핵 포기 약속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국제사회에서 왕따(outcast)로 계속 남을 것”이라며 “우리가 앞으로 계속할 것은 한일뿐 아니라 중-러와 함께 북한을 깊이 고립시키는 일”이라고 말했다. 맥도너 실장은 “북핵 문제는 하룻밤 새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북한이 핵 포기를 약속했던 2005년(9·19 공동성명 지칭)으로 돌아갈 때까지 북한을 계속 압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조숭호 shcho@donga.com·우경임 기자 /워싱턴=이승헌 특파원}
미국의 B-52 전략폭격기 한반도 전개에 대해 북한이 “정세를 전쟁 접경에로 몰아간다”고 비난했다. 중국 역시 “근육질 쇼”라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북한 노동신문은 11일 ‘핵에는 핵으로, 이것이 우리의 대응 방식이다’라는 해설에서 “지금 미국은 남조선에 핵전략 폭격기 편대를 들이민다 어쩐다 하며 정세를 전쟁 접경에로 몰아가고 있다”며 “미국이 군사적 힘으로 우리를 어째(어찌해) 보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고 실현될 수 없는 개꿈”이라고 했다. 또 4차 핵실험에 대해 “세계 최대의 핵보유국인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펼치면서 핵위협을 가중시켜 왔기 때문”이라며 핵실험의 당위성을 다시 강조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이날 “B-52 장거리 전략폭격기가 한국 상공을 비행한 의도는 명확하다”며 “근육질 쇼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B-52의 제원과 성능 등을 소개한 뒤 과거 베트남전쟁, 이라크전쟁, 코소보와 아프가니스탄전쟁 등에도 동원된 기종이라고 전했다. 훙레이(洪磊)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미국이 전날 B-52 전략폭격기를 한반도 상공에 진입시킨 데 대해 “절제하고 긴장 상황을 피해야 한다”며 “동북아의 평화 안정을 수호하는 것은 각국의 공동 이익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미국 책임론도 다시 제기했다. 산둥(山東)대 중한관계연구중심의 비잉다(畢潁達) 연구원은 홍콩 다궁(大公)보 기고에서 “북한이 안전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자 핵무기 개발을 추구했다”고 주장했다. 북핵 개발에 맞서 한미일 군사 공조가 강화되자 중국이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를 오가며 다져 왔던 ‘북핵 외교 공조’가 정작 북한 핵실험 이후 흐트러지는 모양새다. 한국과 미국은 강력하고 포괄적인 제재를 추진하기로 했고 일본도 가세하는 양상이지만 대북 제재의 열쇠를 쥐고 있는 중국은 여전히 대화를 통한 해결에 무게를 두고 있다. 외교 당국자는 10일 “북한이 상응한 대가를 치른 다음에야 대화가 가능할 것”이라며 사실상 대화와 압박이라는 투트랙 전략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이날 KBS 일요진단에 출연해 “이번 북한 핵실험에 대해 중국이 대외적으로 약속했던 ‘북핵 불용’과 ‘결연한 반대’ 입장을 어떻게 행동으로 보여 주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며 중국을 압박했다. 미중은 서로 ‘북핵 책임론’을 떠넘기고 있다. 앞서 9일 런민(人民)일보 자매지인 환추(環球)시보는 중국 랴오닝(遼寧) 성 사회과학원 뤼차오(呂超) 연구원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대북정책에서 실패했다는 주장은 아주 억지스럽고 무지한 것”이라며 “북한 핵개발은 내부적 원인도 있지만, 외부 안전에 대한 우려가 원인이 됐다”고 미국 책임론을 부각했다. 7일 “중국의 방식은 작동하지 않았다”고 중국을 겨냥했던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의 발언에 대한 반박이었다. 이번 주엔 한미일 6자회담 수석대표 회동과 한미일 차관협의회가 열릴 것으로 알려졌다.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고향 땅에서 핵실험이라니요. 오직 김정은 정권 유지를 위해 수천억 원이 소요되는 핵실험을 하다니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안철호 이북도민회중앙연합회장(90·사진·㈜범아엔지니어링 회장·서울대 명예교수)은 실향민이면서 납북피해자 가족이다. 북한의 4차 핵실험 장소인 함경북도 길주 바로 아랫동네인 함경북도 성진이 그의 고향이다. 1946년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했다. 목사였던 안 회장의 아버지는 목회 활동을 그만두라는 북한 당국의 압박 때문에 1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니다 결국 고향을 등졌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서울에서 교회를 지키던 부친은 납북됐다. “자꾸 가자고 해도 말씀을 안 들으시더니…”라며 말끝을 흐린 안 회장은 스스로를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지도, 돌아가셨는지도 모르는 불효자”라고 했다. 아버지가 계신 곳에서 들려오는 핵실험 소식에 가슴이 미어질 뿐이다. 함경북도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함경남도와 미수복 경기도, 강원도 등을 망라하는 이북5도민회는 안 회장의 제안에 따라 4차 핵실험 직후 북한 핵실험을 규탄하는 광고를 냈다. 이번만큼은 우리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북핵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는 의지가 담겼다.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북한의 4차 핵실험에 상응하는 조치로 미국이 전략 핵폭격기를 한반도에 출동시키며 양측간 팽팽한 ‘핵 게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수소탄(수소폭탄) 실험’ 이후 체제의 생존을 걸고 핵개발을 독려하고 나서면서 북-미 간 ‘핵 줄다리기’는 일촉즉발의 대결 국면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있다.○ 김정은의 종착점은 미국의 핵보복 능력 무력화 김정은이 핵실험 나흘 만인 10일 인민무력부(한국의 국방부에 해당)를 방문해 ‘수소탄 실험’을 자위적 조치라고 강조하면서 핵개발을 독려한 것은 북핵의 최종 목표가 미국의 핵보복 능력 무력화에 있음을 강력히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4차 핵실험 이후 김정은의 첫 언급이다. 북한이 ‘핵탄두 개발→핵탄두 소형 경량화→핵무기 다종다수화→전략무기화’라는 4단계 핵 시나리오 가운데 3단계에 주력하면서 4단계로 이행 중이라는 얘기다. 이는 북한이 정치 외교적 수단뿐만 아니라 핵무기 실전 사용까지도 불사한다는 의미를 내포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속전속결로 전쟁 종결 △미 증원전력의 조기 차단 및 미국 내 반전여론 확산 △한미연합군 반격에 따른 전세 역전 상쇄 △정권 존립위기 돌파를 위해 북한이 한국에 선제 핵공격을 감행하는 시나리오를 내놓고 있다. 이 경우 북한으로선 미국의 ‘핵펀치’를 묶어놓는 게 최대 관건이다. 미국의 핵보복에도 살아남아 미 본토와 해외 주둔기지에 ‘제2격(second strike)’을 할 수 있다면 미국이 핵우산을 작동할 수 없을 것으로 김정은이 보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복안에 따라 북한은 최대한 많은 수의 핵미사일을 실전배치(다수화)하는 한편 증폭핵분열탄과 수소폭탄(다종화) 개발에 다걸기(올인)한 것으로 보인다. 군 관계자는 “북한은 핵이 실린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까지 배치하면 어떤 경우에도 체제 유지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北에게 핵은 생존 협상 최고 카드 김정은은 핵무기만이 자신과 체제의 생존을 보장해줄 수 있고, 미국과 동등한 지위에서 평화협정 협상을 벌일 ‘최고의 카드’라고 생각한다. 북한 노동신문이 10일 김정은이 인민무력부를 축하 방문해 “수소탄 시험은 미제와 제국주의자들의 핵전쟁 위험으로부터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생존권을 수호하며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자위적 조치”라고 주장했다고 보도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천영우 전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김정은은 실전 배치할 핵무기가 생존을 위한 최고의 보험이라고 생각한다”며 “미국과 협상하더라도 실전에 사용할 핵무기를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 협상해야 더 많은 대가를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천 전 수석은 “김정은이 이미 가진 핵무기를 포기하겠다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개발한 핵을 정당화시켜 핵보유국으로 인정해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핵강국, 핵보유국을 인정해주면 앞으로 핵개발을 유예(모라토리엄)할 수도 있다는 전략인 것. 김정은이 이를 위해 주장하는 것이 북-미 간 평화협정 체결이다. 노동신문은 10일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전에 비핵화를 해야 한다는 미국의 주장은 강도적 주장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노동신문은 미국의 전략적 인내를 실패한 전략으로 몰아붙이면서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긴장 격화의 발생 근원인 미국 적대시 정책의 종식이 확인되면 미국의 우려 사항을 포함한 그 밖의 모든 문제는 순간에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 지속될까 미국은 10일 B-52 전략폭격기를 한국으로 보내 대북 무력시위에 나서는 등 북한 핵실험에 대한 군사적 상응 조치에 돌입했다. 핵우산과 확장억제 능력 등 미국이 가진 모든 군사적 수단을 동원해 한국을 북핵 위협에서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표출한 것. 동시에 미국은 중국을 압박해서라도 일단 강력한 대북 제재에 집중할 계획이다. 외교 당국자는 “북한 핵실험 이후 미국 정부의 기류가 크게 바뀌었다. 북핵 문제를 더는 방치할 수 없게 됐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전략자산의 발 빠른 한반도 배치 등은 이런 기류를 반영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하지만 북핵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강경 대응은 대결 국면을 고조시켜 사태를 더 악화시킬 개연성도 있다. 버락 오바마 정부로서는 ‘전략적 인내’를 근간으로 한 북핵 정책의 총체적 실패라는 비판도 부담이어서 미국의 향후 대응전략이 주목된다.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윤완준·우경임 기자}

한국군의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에 맞서 북한군도 전방지역의 전투 준비 태세를 강화하는 등 4차 북한 핵실험 이후 남북 간 강대강(强對强) 대치가 본격화되고 있다. 북한이 대북 확성기 조준 격파 등 도발을 감행하면 한국군도 강력한 보복에 나설 방침이어서 최전방 접경지역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접경지 주민들 긴장 속 일상생활 지속 대북 확성기 방송이 재개된 8일 접경지 주민들은 차분한 분위기에서 사태를 지켜봤다. 경기 연천군 중면 횡산리의 은금홍 이장(66)은 “대부분의 주민이 집과 경로당 등에서 평소처럼 지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정부의 대북 방송 결정을 지지하면서 북의 도발에 적절히 대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일부 주민은 만일의 사태를 우려하며 불안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지난해 8월 북 도발 위협 때 5일간 대피소에서 지냈던 중면 삼곶리 주민 강모 씨(52)는 “대북 방송이 시작된 정오부터 불안한 마음에 집 안팎을 들락거렸다”고 말했다. 민간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를 우려하는 주민들도 있었다. 동해안 최북단 강원 고성군 통일전망대와 DMZ박물관, 양구군 을지전망대, 화천군 칠성전망대, 철원군 철원평화전망대 등 강원 접경지역 안보관광지 운영도 8일부터 전면 중단됐다. 군은 북한이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를 비판하는 방송 내용을 트집 잡아 군사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대비 태세를 강화했다. 북한이 고사총이나 장사정포로 확성기 시설을 공격하면 군은 K-3 고속유탄발사기와 자주포, 차기 다연장로켓 천무 등을 동원해 즉각 응징할 계획이다. 한편 북한은 이날 오후부터 전방지역 서너 곳에서 김정은 체제와 핵실험 성공을 찬양하는 내용의 확성기 방송을 시작했다. 합참 관계자는 “남측의 확성기 방송을 방해하고, 장병 충성심 제고 등 내부 결속을 다지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북한 조선중앙TV는 이날 지난해 5월보다 비행거리가 월등히 늘어난 12월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사출 시험 영상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 영상에선 수면과 거의 직각으로 솟아오른 SLBM은 30∼40m 높이에서 점화됐다. 한국군 관계자는 “제대로 된 사출시험이라면 바다 위로 오르자마자 점화돼야 하지만 너무 높이 올랐다”며 “다른 미사일 점화와 합성한 의혹도 있다”고 말해 성공 가능성을 낮게 봤다.○ 개성공단 폐쇄나 철수 카드 부각 남북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남북 민간교류가 전면 보류된 데 이어 개성공단 폐쇄 가능성도 거론된다. 정준희 통일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지금 (개성공단) 폐쇄나 철수를 말할 단계는 아니다”라면서도 “정부는 북한의 상황 등을 면밀히 주시하면서 우리 국민의 신변 안전을 최우선으로 필요한 조치를 검토해 나간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개성공단 체류 국민의 신변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철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도발 수위를 높여 간다면 개성공단 철수 여론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개성공단 폐쇄가 국제사회 대북 제재 공동전선에 동참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중국이 북-중 무역 규모 대폭 축소, 금융거래 중단 등을 수용한다면 대북 제재 대상이 군수물자와 사치품에서 일반 교역 물자로까지 확대된다. 개성공단도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른 정부 당국자는 “유엔의 대북 제재 조치가 구체화되면 한국의 독자적 대북 제재도 그에 맞춰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8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2016년 교육계 신년 교례회’에 참석해 북한의 4차 핵실험과 관련해 “정부는 국제사회와 긴밀히 공조하면서 강력하고 필요한 대응 조치를 취해 나가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국민의 단합”이라고 강조했다.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우경임 / 연천=정동연 기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7일 북한의 4차 핵실험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한일 정상과 통화를 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는 오전 7시 37분부터, 박근혜 대통령과는 오전 9시 55분부터 20분씩 각각 통화했다. 백악관이 이날 공개한 한일 정상과의 통화 내용은 주어만 다를 뿐 동일했다. 하지만 북핵 문제 당사국인 한국을 제치고 일본과 먼저 통화한 것은 미묘한 여운을 남긴다. 미국이 동아시아 정책의 최우선 파트너로 일본을 낙점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이날 아베 총리는 일본 참의원 본회의에 참석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응을 포함해 일본과 미국이 국제사회를 주도해 나가는 데 일치했다”며 양국 간 통화 내용을 설명했다. 대북 제재를 미일이 주도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3년 2월 북한의 3차 핵실험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먼저 통화했다. 그리고 이틀 뒤에야 아베 총리와 통화를 했다. 이에 대해 외교 당국자는 “정상 간 통화는 가능한 시간을 사전 조율한다”며 “기술적인 문제”라고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후 4시 40분부터 15분간 아베 총리와도 통화했다. 청와대는 양국 정상이 “유엔 안보리에서 강력하고 실효적인 조치가 포함된 결의안이 신속하게 채택될 수 있도록 긴밀히 협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합의 이행도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양국 관계의 선순환적 발전을 위해 합의 사항의 성실한 이행이 중요하다”며 “합의정신에 맞지 않은 언행이 보도되어 피해자들이 상처를 받지 않도록 유념하면서 잘 관리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일본 언론을 통해 보도된 양국 정상 간 통화 내용은 청와대의 발표와는 차이가 컸다.지지통신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를 다시 한 번 환영한다”며 “(위안부)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직접 대화협력 체제를 취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성실한 합의 이행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북한의 핵실험에 대응하기 위한 한미일 정상 간 ‘핫라인’은 정상적으로 가동됐다. 반면 중국과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의 통화는 물론이고 외교·국방장관 간 핫라인 통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대북 제재가 사실상 중국 참여에 달렸다는 점에서 대중 외교 역시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우경임 woohaha@donga.com·송찬욱 기자}

북한은 6일 4차 핵실험 사실을 공개하면서 “수소탄(수소폭탄)까지 보유한 핵보유국의 전열에 당당히 올라섰다”고 선포했다. 그러면서 “미국에 맞선 자위적 권리”라며 핵개발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김정은은 핵무기를 ‘체제 유지를 위한 유일한 생존 전략’으로 보고 있다. 리비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핵을 포기한 뒤에 무너진 것처럼 “핵을 포기하면 북한이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미국보다 중국 겨냥? 북한의 ‘깜짝 핵실험’은 다목적 카드로 보인다. 북한은 이날 발표한 특별중대보도에서 “침략의 원흉” 운운하며 시종 미국을 겨냥했다. 올해 임기가 끝나는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가 적극적인 대북 제재를 주도하기 힘든 상황임을 염두에 뒀을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김정은의 전략적 타깃은 오히려 중국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핵실험을 하면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논의 등 한미일 군사동맹이 강화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중국이 고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밀월 관계를 보이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게 “이래도 북한을 버릴 것이냐”는 메시지를 주려는 의도도 깔려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번 핵실험은 체제 결속을 강화하고 김정은에 대한 주민들의 충성을 유도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5월 7차 당 대회까지 경제강국 건설이나 인민생활 향상에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주민들의 눈을 외부로 돌렸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유성옥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은 “8일 김정은 생일을 앞두고 김정은 우상화에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날 북한 매체는 “첫 수소탄 핵실험을 실시했다”는 발표를 반복 방송하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북한 핵개발 인력 4000∼5000명 추정” 북한은 1953년 강원 원산에 핵물리연구소를 세운 뒤 3대에 걸쳐 60년 이상 핵개발을 체계적으로 진행해 왔다. 김정은도 2013년 3월 31일 ‘경제 건설과 핵무력 건설의 병진 노선’을 제시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가 주도하고 있다. 김정은이 직접 핵개발을 진두지휘한다는 뜻이다. 당 중앙군사위원회는 당 군사 정책의 수행 방법을 결정하고, 군사력 강화와 군수산업 발전 사업을 지도한다. 노동당 기계공업부와 산하 원자력총국이 핵기술 개발을 총괄하고 영변원자력과학연구센터와 평성과학연구센터가 핵개발을 주도하고 있다. 현재 당 중앙군사위원이자 기계공업부장은 김춘수다. 1990년대 초반 소련이 붕괴한 뒤 핵과학자들을 데려왔고 이란과 파키스탄에서 기술 지원을 받아 우수한 과학 인력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성욱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의 핵개발 인력은 이론 소재 물자 개발 등 4000∼5000명으로 추산된다”며 “이들은 평양 은하과학자거리, 은정과학자거리에서 집단 거주하고 있다”고 말했다.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윤완준 기자}

“북한도 8·25 합의 이행 의지를 밝히고 있는 만큼 민간 통로 확대와 이산가족 문제 해결 등 남북관계 정상화에 힘써 주길 바란다.” 박근혜 대통령이 5일 국무회의에서 남북관계에 대해 한 발언이다.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주문하기는 했지만 북핵 실험이 임박했다는 위기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외교안보 부처에서도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경보음은 없었다. ‘소형화된 수소폭탄’의 성공 여부를 떠나 정부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 북한 ‘대화 제스처’에 뒤통수 통일부는 5일까지만 해도 신년 대통령 업무보고의 기조를 큰 틀에서 ‘남북관계 정상화를 통해 비핵화를 견인하는 선순환, 남북교류협력의 진전과 심화’ 등으로 잡았다. 하지만 6일 북한의 핵실험 소식을 접한 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업무보고 기조를 바꿔야 할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정부가 북한의 핵실험에 낙관적 태도를 가진 데에는 핵 개발에 대한 언급 없이 “남북 대화와 관계 개선을 위해 앞으로도 적극 노력하겠다”고 밝힌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의 신년사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정보당국은 북한의 수소폭탄 개발 언급을 무시했다. 지난해 12월 10일 노동신문은 김정은이 “우리 조국은 수소탄(수소폭탄)의 거대한 폭음을 울릴 수 있는 강대한 핵보유국”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정보당국은 “북한이 수소폭탄을 개발했다는 정보는 갖고 있지 않다”며 무게를 두지 않았다. 국방부와 국가정보원은 북한의 핵실험이 임박했다는 징후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최소 한 달 전 핵실험을 예측할수 있다고 장담하던 군도 완전히 농락당한 셈이 됐다. 외교부는 북한이 핵실험을 단행한 뒤 특별 중대보도를 예고할 때까지 1시간이 지나도록 핵실험 여부도 단정하지 못했다.○ 대응 수단도 마땅치 않아…대북 확성기는? 북한은 철저하게 핵실험 징후가 사전에 포착되지 않도록 감췄다. 주호영 국회 정보위원장은 이날 국정원 보고를 받은 뒤 “북한이 외부에 노출 안 되도록 하기 위해 버튼만 누르면 될 정도로 미리 준비한 것 같다”며 “미국과 중국에 통보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군 고위 관계자는 “한미 정보당국이 며칠 전부터 첩보위성 등으로 풍계리 일대 핵실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추적하고 있었다”면서 “하지만 핵실험이 지하에서 이뤄지는 거라 예측할 수 없는 측면이 크다”고 해명했다. 2번 갱도에서 지하로 연결된 북동쪽 2km 부근에서 실험을 했기 때문에 전혀 파악이 안 됐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이날 “반드시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다”고 강조했지만 국제사회의 제재에 동참하는 것 외에 북한에 대응할 방법은 마땅치 않다. 일각에서는 지난해 8·25 합의 당시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이라는 조건으로 확성기 방송을 중단한 만큼 핵실험으로 방송 재개의 여건이 마련됐다는 의견이 나온다. 다만 북한이 합의를 깼는지에 대한 이견이 있을 수 있고, 확성기 방송 재개로 대응할 사안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우리가 직접 피해를 본 게 아니니까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며 “확성기 방송 재개도 검토할 수 있지만 섣불리 이야기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 중국을 통한 북한 컨트롤 한계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근간으로 한다. 그러나 이날 북한이 다시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남은 2년의 임기 동안 남북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중국 경사론(傾斜論)’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중국과의 외교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북핵 해결을 위한 중국의 역할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에 사전 통보조차 없이 핵실험을 강행함으로써 중국의 통제에서 벗어났음을 선언했다. 천영우 전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그래도 중국의 (북한에 대한) 태도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 “중국이 지금까지 하던 ‘립 서비스’ 이상의 것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 대중 외교의 파탄”이라고 지적했다. 당분간 대북 강경론이 힘을 얻을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나온다. 대북정책의 목표를 북핵 포기에서 북한 정권 교체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윤덕민 국립외교원장은 “북한이 ‘핵실험을 하는 게 패착’이라고 생각하도록 강력한 핵 해결의 모멘텀을 만들어야 한다”며 “국제사회와 함께 금융 제재 등 알맹이가 있는 제재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장택동 will71@donga.com·윤완준·우경임 기자}
황해북도 사리원시 임농복합단지인 대성농장. 3만 m² 규모의 비닐하우스 50동 안에 곡물 종자 한 줄, 나무 종자 한 줄씩 번갈아 빼곡히 심어져 있다. 비닐하우스 안에선 식량도 얻고, 나무도 키운다. 2009년 3월부터 재단법인 에이스경암이 비닐하우스 자재와 농기구를 지원해 조성된 농장이다. 에이스경암은 씨앗, 비료 등을 꾸준히 지원했고 농업기술도 전수했다. 단순한 인도적 지원이 아닌 직접 생산을 하는 방식이어서 남북 개발협력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북한은 정부의 대북 지원에는 소극적이지만 에이스경암의 지원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1996년부터 대북 지원을 하면서 에이스경암과 북측 간에 오랜 기간 쌓인 ‘신뢰’가 바탕이 됐다. 안유수 에이스경암 이사장은 사리원 출신 실향민이다. 6·25전쟁 기간에 벌어진 1·4후퇴 당시 월남한 안 이사장은 ㈜에이스침대를 키워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부터 에이스경암을 통해 대북사업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에이스경암만의 북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면서 남북관계가 경색되더라도 꾸준한 지원이 가능했다. 남북 경협 관계자는 “오랜 신뢰가 쌓이면서 북한에서도 다른 평가를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한 수요에 맞춘 맞춤형 지원도 특징이다. 에이스경암은 △페인트 지원 등 주거 환경 개선 △가로등 설치 △인민예술극장 시설 지원 △대성농장 육가공 기계 지원 등 인도적 지원이 아닌 인프라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대북사업을 해 왔다. 2015년에는 4월, 10월 두 차례에 걸쳐 소규모 비료(15t)와 비닐하우스 건설 자재, 채소 종자 등을 북한에 지원했다. 이런 에이스경암의 사례는 남북 신(新)협력이 나아갈 길을 보여준다. 북한이 관심을 갖지 않거나 북한에 당장 필요하지 않은 지원을 일방적으로 한다거나, 일회적인 대북 인도적 지원 같은 교류협력사업을 지양하고 장기적인 신뢰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군사적인 긴장이 높아지고 남북관계가 악화되더라도 교류협력은 이어질 수 있다. 그래야 긴장도 풀어진다.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 대한 일본의 과도한 언론 플레이에 정부가 경고 메시지를 밝혔다. 요미우리신문은 30일 “일본 정부는 한국이 설립할 재단에 예산 10억 엔을 내기 전에 위안부 소녀상을 철거해 달라고 요청했고 한국이 이해했다”고 30일 보도했다. “일본이 한국의 내락(內諾)을 얻었다(아사히신문)”는 보도도 나왔다. 한국 외교부는 “사실이 아닌 날조”라고 밝혔다. 산케이신문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위안부 문제는 완전 종결됐다. 더 사죄도 하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과 통화에서도 말해뒀다’”고 보도하자 청와대 고위 당국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의 측근도 동아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총리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정정했다. 일본 정부 고위 관계자도 소녀상 철거 전제조건 보도 등에 대해 동아일보 특파원과의 통화에서 “사실무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동안 일본 언론의 합의 왜곡 보도를 방치하는 ‘이중 플레이’를 했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 정부 당국자가 일본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공식’ 부인하고 합의 사항을 재확인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오해를 유발할 수 있는 일본 측의 언행이 없기 바란다”고 했다.조숭호 shcho@donga.com·우경임 기자 /도쿄=배극인 특파원}
박근혜 대통령은 왜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조기 타결을 강력하게 추진했을까. 박 대통령은 2012년 대선 후보 시절부터 위안부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피해자들이 생존해 있을 때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해 11월 외신 기자회견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두 80대 중반을 넘으셨기 때문에 생전에 한(恨)을 풀어 드려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라며 “역사와의 화해는 한없이 기다릴 수 없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번 한일 협상 과정에서도 “피해자들이 살아 계실 때 타결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독려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2013년 취임한 뒤 위안부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위로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고령의 피해자들을 한곳에 모이게 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접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대신 당시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이 위안부 피해자 50명 전원을 만나 위로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축제를 통해 위안부 문제가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진 것에 대해서도 “국민의 마음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로하는 행사였다”고 높이 평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전직 청와대 관계자는 30일 “박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는 전시(戰時) 여성 인권 피해 문제’라는 확고한 인식을 갖고 있다”며 “여성 대통령이기에 위안부 문제를 더욱 절실하게 느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청와대는 박 대통령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 협상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지만 아직 결정은 내리지 못하고 있다. 자칫 피해자들이 대통령 앞에서 비판을 쏟아낼 경우 대내외에 ‘실패한 협상’이라는 점이 부각될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관계자는 “일단 피해자들이 감정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당장은 아니지만 박 대통령이 위안부 피해자를 만날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야당은 비판 수위를 높였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번 합의는 국민의 권리를 포기하는 조약이나 협약에 해당한다”며 “국회의 동의가 없었으므로 무효”라고 선언했다. 이종걸 원내대표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제출하고 박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겠다”고 말했다.우경임 woohaha@donga.com·장택동 기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한국과의 28일 합의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완전히 종결됐으며 더는 사죄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져 비판 목소리가 거세다. 30일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앞으로 (한국과의 관계에서) 이 문제에 관해 일절 말하지 않겠다. 다음 일한 정상회담에서도 언급하지 않는다”고 29일 주변에 말했다. 그는 또 “그것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전화 회담에서도 말해 뒀다. 어제로써 모두 끝이다. 더 이상 사죄도 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또 아베 총리는 “이번에는 한국 외교장관이 TV 카메라 앞에서 불가역적이라고 말했고, 그것을 미국이 평가하는 절차를 밟았다. 지금까지 한국이 움직여 온 골대를 고정화해 간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렇게까지 한 이상 약속을 어기면 한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끝난다”고도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일 외교장관회담에서 합의한 10억 엔(약 97억 원)을 일본이 내는 데 위안부 소녀상 철거가 전제 조건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아사히신문은 30일 복수의 일본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옮기는 것이 일본 정부가 재단에 10억 엔을 내는 전제 조건이라는 것을 한국이 내밀하게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일본은 돈을 내는 조건으로 소녀상 이전을 주장했고, 한국으로부터 소녀상에 관한 내락(비공식 약속)을 얻었다고 판단한 것이 이번 합의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일본 언론의 이 같은 보도로 이번 합의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자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이날 출입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 “오해를 유발할 수 있는 일본 측의 언행이 없기를 바란다”고 경고성 발언을 했다. 일본 정부의 언론 플레이로 추측되는 보도 행태가 위험 수위를 넘었다는 판단에서다. 윤 장관은 또 이날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과 15분간 통화한 사실을 공개했다. 윤 장관은 “양국 지도자의 용단”이라는 케리 장관의 평가를 전하며 “한일 간 합의의 충실한 이행이 중요하다는 데 공감했다”고 말했다. 이례적으로 통화 내용을 공개한 것은 일본을 향해 성실한 합의 이행을 하라는 압박으로 풀이된다. 한국 정부 당국자도 이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소녀상 철거가 10억 엔 출연의 조건이라는 보도에 대해 “초등학생이 협상한다고 하더라도 그걸 오케이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완전 날조된 것”이라고 부인했다. 이 당국자는 “한국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위로, 재단 설립 등 한일 양국의 합의가 성실히 이행됐을 때 이번 협상이 최종적으로 타결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일본 외무성은 이날 저녁 “이번 합의는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상과 윤병세 장관이 공동 기자회견 때 발표한 내용이 전부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는 공식 코멘트를 내놓았다. 일본 정부 고위 당국자는 이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소녀상 철거가 10억 엔 출연의 전제 조건이라는 보도는 “사실 무근”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만약 일본 정부가 그런 조건을 붙이고 싶었다면 외교장관 공동 기자회견 때 발표했어야 했다. 물론 한국이 소녀상을 이전해 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조건이라는 식의 보도는 매우 유감이다. 정부 인사가 그런 것을 멋대로 말할 리도 없다. 기시다 외상에 대한 실례다”라며 ‘이면 합의설’을 일축했다. 아베 총리가 다시는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도에 대해서도 아베 총리의 한 측근은 “총리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는 “한국 정부도 위안부 할머니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일본 정부도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일본 정부가 ‘진화’에 나섰지만 일본 정부가 한일 언론을 상대로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은 여전하다. 소녀상 철거라는 자신들의 희망 사항을 관철하고 국내 우익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언론을 활용해 ‘치고 빠지는’ 전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일본 정부는 관련 보도 내용에 대해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일본은 지난달 한일 정상회담 때도 아베 총리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대화 내용을 비공개로 하자고 제안했지만 회담 후 일본 언론은 정상이 논의했다는 내용을 잇달아 보도했다. 이 때문에 한국 정부는 보도 내용을 부인하고 해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진창수 세종연구소장은 “일본 정부가 국내 반발만을 의식해 언론 플레이에 나서고 있다면 이는 신의 성실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한일 관계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우경임 기자}

단순 교통사고일까, 권력 다툼의 결과일까. 북한 김양건 노동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의 사망 소식이 급작스럽게 전해지자 그의 사망 배경을 두고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양건이 29일 오전 6시 15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보도하면서 사고 경위를 밝히지 않았다. 그 이후 대북 라디오 매체인 자유북한방송은 “김양건이 29일 오전 신의주에 있는 측정기구 공장 시찰을 마치고 평양으로 복귀하던 중 신의주∼평양 간 도로에서 추돌사고로 사망했다”고 30일 보도했다. 김정은 최고사령관 추대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던 길이었고 군 번호를 단 화물차량과 추돌했다는 정황도 전했다. 정보 당국은 “이런 첩보를 파악하고 있다”고 확인했다. 다만 자유북한방송은 “평양에서는 이 사고에 대해 의도적인 암살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는 “장의위원장을 김정은이 맡고 국장(國葬)으로 치르는 추모 분위기를 볼 때 교통사고가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과거에도 북한 파워엘리트의 교통사고는 여러 차례 있었다. 김양건 비서 전임인 김용순 노동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도 2003년 6월 16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6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다가 그해 10월 26일 당시 69세로 사망했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황해북도 봉산군 은정리 염소종축장 시찰을 수행하고 돌아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뇌수술을 받았지만 회복하지 못했다. 2010년 6월 2일에는 이제강 제1부부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김정은의 후견인으로 알려진 이 부부장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권력 암투설이 강하게 제기됐다. 김정은 후계 작업을 맡았던 그가 교통사고를 가장한 암살에 희생됐다는 관측이 나온 것. 하지만 늦은 밤 사고를 당한 것으로 미뤄 볼 때 김정일의 비밀 파티에 참석했다가 음주운전 사고를 낸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나왔다. 김정은의 어머니 고영희도 2003년 9월 교통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친 뒤 프랑스 파리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사망했다. 북한 파워엘리트의 교통사고가 잦은 것은 심야 음주파티 문화도 한몫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수 인원과 차량만 드나드는 비밀 파티장에 직접 운전해서 갔다가 음주운전을 한다는 것. 차량이 많지 않은 북한이지만 교통신호 체계가 미흡하고 가로등이 부족한 도로 사정 때문에 치명적인 피해로 이어진다는 분석도 나온다.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위안부 피해자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이 한일 관계에서 또 다른 뇌관이 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지지통신은 29일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한국이 한일 외교장관회담에서 (중국과의) 공동 신청을 보류할 것임을 확인했다”며 “다만 한국 측의 의향(요청)으로 공동발표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한국 외교부 당국자는 “사실 무근”이라고 즉각 부인한 뒤 “세계기록유산 등재 문제를 일본이 지속적으로 협상 테이블에 올리고 싶어 했으나 우리는 민간 주도로 추진하는 사안임을 줄곧 밝혀 왔다”고 설명했다. 민간이라고 하지만 한국이 참여한다면 일본은 합의 위반이라고 주장할 태세이고, 한국 정부는 이에 물러서면 한일 합의를 잘못했다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게다가 올해 난징대학살 문건 등재 후 일본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던 유네스코는 각국 유네스코 위원회의 추천을 거쳐야 사실상 등재가 가능하도록 제도를 바꿀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민관 합동 광복 7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5월 위안부 피해자 증언을 정부 백서로 만들고, 이를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겠다는 계획을 광복 70년 기념사업으로 선정했다. 사업 소관 부처는 여성가족부이고, 국무총리실에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여가부는 올해 등재 추진 사업 예산으로 4억4000만 원을 배정했다. 여가부는 “민간사업을 정부가 외곽에서 지원한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민간사업으로만 보기 어려운 요소가 없지 않아 논란이 예상된다.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 도쿄=장원재 특파원}

“나라가 약해서, 민족의 수난이 계속돼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일본의 만행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였다. 29일 외교부 제1, 2차관을 만난 할머니들은 사전에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협상을 진행한 우리 정부에 대한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임성남 외교부 제1차관을 보자마자 “어디(어느 나라) 외교부예요?”라고 물어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이용수 할머니(87)는 “(우리는) 엄연한 조선의 딸이다.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면서, 왜 알려주지도 않으면서…”라며 화를 내고야 말았다. 김복동 할머니(89)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공식으로 사과하고,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는 것이 바람”이라며 “돈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 “피해자는 우리인데 왜 정부가…” 경기 광주시 나눔의 집을 방문해 정복수(100) 김군자(90) 박옥선(92) 이옥선(89) 유희남(88) 강일출 할머니(88) 등 6명과 마주 앉은 조태열 외교부 2차관도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냉담한 할머니들 앞에서 조 차관은 “할머님의 용기 있는 고백이 헛되지 않도록 전력을 다해 노력했다”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어 “일본이 할머니들뿐 아니라 우리 정부와 국제사회 앞에서 공식 사과를 했기 때문에 이 이상 명예 회복은 힘들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은 이에 대한 심경을 토로했다. “피해자는 우리인데 정부가 어떻게 함부로 합의합니까. 우리는 인정 못 해요. 개인적으로 배상 받고, 공식 사과 받게 해 주세요.”(김군자 할머니) “할머니들 몰래 합의를 한 것은 우리를 울리고 정부가 우리 위안부를 팔아먹은 것과 같아요.”(이옥선 할머니) 50여 분간 이어진 면담은 오후 3시 20분경 끝났다. 조 차관은 “송구스럽다. 합의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란 마음으로 명예와 존엄이 회복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며 일어섰다. 돌아서서 나오는 조 차관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할머니들 역시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 박 대통령, 할머니들 직접 위로할까 ‘일본 정부가 책임을 통감한다’는 수사로는 고통스러운 세월을 견뎌 온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로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위안부 할머니를 만나 상처를 위로해야 한다는 여론도 높다. 단지 한일간 외교적인 해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희생된 개인의 삶을 보듬을 수 있어야만 마침표를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일본이 진정성을 갖고 합의를 이행한다면 후속 조치를 검토할 예정이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한일 관계는 이제 시작”이라며 “일본의 성실한 이행을 전제로 합의가 이뤄졌다. 일본도 감성적인 이벤트를 검토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아직 구체적인 일정은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일본의 합의 이행 여부에 따라 박 대통령의 나눔의 집 방문이나 메시지 전달이 결정될 수 있다는 뜻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강조한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위안부 할머니와의 만남을 검토했다고 한다. 전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외교관계를 고려해 협상 타결이 된 다음 만나는 것이 좋겠다는 참모들의 건의에 따라 만남을 미뤘다”고 전했다.우경임 woohaha@donga.com·유원모·김호경 기자}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상은 28일 공동 기자회견 형식으로 합의 결과를 발표했다. 외교부는 이날 타결된 내용에 ‘합의’라는 표현을 썼지만 정작 공동선언이나 합의문, 공동보도문은 나오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이 각각 발표하는 형식이었다. 이는 위안부 문제 타결 해법을 합의문으로 적시했을 때 한일 양국이 국내적으로 져야 할 정치적 부담을 피해가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당장 여론의 비판에 직면한 한국의 소녀상 해결 약속이 합의문 형태였다면 더 큰 파장이 빚어질 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 합의를 앞두고 윤 장관이 ‘창의적’이라고 평가한 것의 하나는 이런 세 가지 핵심을 발표하는 ‘형식’이었다고 정부 당국자는 밝혔다. 일본 정부는 지난달 2일 한일 정상회담 직후부터 위안부 문제 ‘연내 해결’ 시나리오를 치밀하게 다듬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24일 오후 아베 신조 총리가 기시다 외상의 방한을 전격 지시하고 이를 NHK가 보도하는 ‘깜짝 쇼’ 형태로 위안부 문제 협상의 고삐를 잡았다. 일본은 가토 다쓰야(加藤達也)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의 박근혜 대통령 명예훼손 소송에 대한 판결이 전향적으로 나오면 12월 위안부 문제 해결에 집중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한일 국장급 협의에서 집요하게 이를 거론했다. 17일 한국 법원이 가토 전 지국장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리자 일본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이튿날인 18일 유흥수 주일 한국대사는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 및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국가안보국장과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그리고 “이제는 일본이 답할 차례”라고 압박했다. 일본의 기시다 외상 방한 사실도 한국의 동의 없이 갑작스럽게 발표되는 우여곡절 끝에 양국 외교장관은 공동기자회견장에 나란히 섰다. 양측은 국장급 협의와 별개로 이미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과 야치 국장 간 ‘핫라인’을 통해 해법에 대한 아웃라인을 잡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이번 협상은)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다. 결과를 본 뒤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하지만 한일 국교 정상화 50년에 맞춰 이런 최적화된 합의를 이뤄낸 것은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도쿄=배극인 특파원}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취임 후 3년 동안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치열한 기싸움을 벌여왔다. 박 대통령의 ‘결단’은 연내 타결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됐던 위안부 문제 합의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합의를 서두른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얻은 것 못지않게 잃은 것도 적지 않아 ‘무승부’로 끝났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 3년 동안 엇나갔던 박 대통령-아베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한국과 일본의 대표적 보수 정치인으로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완강한 태도를 보여 왔다. 박 대통령은 2013년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이 가해자라는 입장은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아베 총리는 한 달 뒤 “침략이라는 정의는 어느 측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맞불을 놓았다. 지난해 4월 위안부 문제를 논의하는 한일 국장급 협의가 시작됐지만 원활하지 않았다. 12차례 협상이 이어지는 동안 박 대통령은 고비 때마다 결단을 내리고 지침을 주면서 협상 진전을 독려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 재임 당시 체결된 한일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던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인 올해 ‘결자해지(結者解之)’하겠다는 박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있었다고 한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는 됐지만 과거사 해결은 되지 않았다”며 “한일 국교 50주년을 맞아 위안부 피해자 협상이 타결됐다는 데 상징성이 적지 않다”고 평가했다. 또 내년으로 넘어가면 4월 한국 총선, 7월 일본 참의원 선거가 예정돼 있어 위안부 문제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고민도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 ‘보이지 않는 손’ 역할? 이번 협상을 앞두고 미국의 보이지 않는 압력이 한일 정상에게 적잖은 부담이 됐을 거라는 분석도 있다. 중국의 부상에 맞서 ‘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에 한미일 협력 강화는 필수적이다. 지난해 4월 오바마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가 “끔찍하고 매우 지독한 인권 침해”라며 아베 총리에게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일본은 ‘미국 개입론’을 흘리면서 한국 정부를 압박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일본 언론은 27일 “협상 후 미국 정부가 환영성명을 발표한다”는 등 미국이 위안부 협상에서 일본과 보조를 맞추는 듯한 보도를 잇달아 내보냈다. 미국 주요 언론들은 물론이고 미 정부도 이에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일본이 민관 합동으로 오랫동안 미 정치권과 학계를 대상으로 펼친 전방위 로비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게 워싱턴 외교가의 시각이다.○ 한미일 ‘안보협력’으로? 위안부 협상이 타결됨에 따라 박 대통령은 남은 임기 2년 동안 과거사 문제를 넘어 안보와 경제를 중심으로 대일 관계 개선을 추진할 계기를 마련했다. 앞으로 북핵 문제에 대한 한미일 공조 체제 복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한국 가입 등이 논의될 것으로 전망된다. 박 대통령이 이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상을 만나 “이번 협상 결과가 성실하게 이행됨으로써 한일 관계가 새로운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시다 외상은 “한미일과 안보협력이 전진할 소지가 생겼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앞으로 박 대통령이 져야 할 정치적 부담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일부 위안부 피해자와 야권에서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 및 배상금 지급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 등을 비판하고 있다. 정부가 위안부 소녀상 이전 문제를 관련 단체와 협의하기 시작하면 여론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도 있다. 아베 총리 역시 한국, 미국과의 공조를 강화할 계기는 마련했지만 협상 결과를 놓고 일본 내 극우 세력의 공세를 받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한편 한일 양국의 위안부 문제 합의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반응은 미묘한 차이를 드러냈다. 뉴욕타임스는 협상 타결 직후 서울발 기사로 ‘기념비적 합의’라고 평가한 뒤 “이번 합의로 미국에 가장 중요한 두 동맹인 한일 양국 간 가장 큰 걸림돌을 제거할 수 있게 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중국 외교부 루캉(陸慷)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양국의 관계 개선이 본 지역의 안정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면서도 “관련 국가(일본)가 평화 발전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며 일본에 대한 당부에 방점을 찍었다. 이어 “일본이 아시아 인민들에게 저지른 반(反)인도적 죄행에 대해서 책임지는 태도를 보이고, 침략 역사를 직시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장택동 will71@donga.com·우경임 기자 /워싱턴=이승헌 베이징=구자룡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