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운

김상운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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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학술 분야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단행본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을 냈고,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을 제작했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sukim@donga.com

취재분야

2025-11-05~2025-12-05
칼럼48%
문학/출판17%
역사10%
미술7%
국제일반3%
중동3%
미국/북미3%
국제정세3%
문화 일반3%
대통령3%
  • 조선시대에도 ‘캣맘’ 있었다…숙종 무덤까지 따라간 애묘 ‘금손이’

    조선 영조대 양반 집안에 ‘묘마마(猫媽媽)’가 있었다. 길고양이를 여럿 키우면서 이들에 비단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였다. 그가 죽었을 때 고양이 수백 마리가 고인의 집 주위에서 며칠동안 울부짖었다.조선 후기 문인 이규경(1788~1856)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고양이 항목에서 다룬 묘마마는 지금의 ‘캣맘’과 다를 바가 없다. 조선시대에도 보금자리 없는 길냥이들을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 캣맘이 있었던 것이다.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요물, 우리를 홀린 고양이’ 특별전에는 묘마마를 비롯해 고양이와 인간의 특별한 관계를 다룬 다양한 옛 문헌들이 소개돼 있다. 조선 숙종(1661~1720)도 고양이의 묘한 매력에 빠진 이들 중 하나였다. 조선 후기 문신 김시민(1681~1747)은 자신의 문집(동포집)에서 숙종의 고양이 사랑을 전하고 있다.숙종은 부친의 묘소에서 우연히 발견해 궁으로 데려와 키우던 고양이 금덕(金德)이 새끼를 낳자 금손(金孫)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숙종은 수라상 고기를 남겨두었다가 금손이에게 던져주고, 잠자리에 들 때도 자기 곁에 두었다.왕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금손이는 숙종이 세상을 떠난 직후 곡기를 끊는 등 주인에게 끝까지 충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왕을 뒤따르듯 20일 만에 죽은 금손이는 숙종의 무덤(명릉) 근처에 묻혔다.그런가 하면 딸의 지극한 고양이 사랑을 걱정하는 부정(父情)도 눈길을 끈다.‘너는 시댁에 정성을 다한다고 하거니와 어찌 고양이는 품고 있느냐. 행여 감기에 걸렸거든 약이나 지어 먹어라.’조선 효종(1619~1659)이 셋째 딸 숙명공주(1640~1699)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다. 막 혼인한 어린 딸이 눈치 없이 고양이만 끼고 돌아 시댁 눈밖에 날까, 감기로 고생할까 염려하는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이 읽힌다.이번 전시에선 고양이를 그린 조선시대 그림들도 선보인다. 조선시대 고양이는 장수를 상징해 자주 그려졌다. 고양이를 뜻하는 한자인 묘(猫)와 70세 노인을 뜻하는 모(耄)의 중국어 발음이 같았기 때문. 이 중 조선시대 고양이를 특히 잘 그린 것으로 유명했던 변상벽의 해학적인 그림이 눈길을 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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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천황의 전쟁 책임 지적한 日 황족

    ‘일본을 둘러싼 사방의 바다는 모두 동포라고 생각하는데 세상에 왜 이런 풍파가 일고 소란이 일어나는 것인가.’ 태평양전쟁 직전 히로히토 천황(1901∼1989)이 지은 이 짧은 와카(일본의 전통적인 정형시)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그가 육군의 강력한 전쟁 의지에 맞서기 위해 시를 읊은 것인지, 아니면 단지 전쟁 결의를 늦추려고 했을 뿐인지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이렇듯 천황제 국가 일본에서 천황의 전쟁 책임론은 중요한 화두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일본 황족으로 태어났지만 전후 미 군정에 의해 황적이 박탈돼 평민이 된 저자의 자서전이다. 전쟁 당시 15세로 일본 해군에 징집된 저자는 전후 도쿄 전범 재판에서 천황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강경파 육군이 주도한 내각에 의해 전쟁 발발이 사실상 결정됐지만 이를 막지 못한 데에는 황실 책임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A급 전범들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시킨 결정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해운업계에서 퇴직한 후 일본 신사의 본거지인 이세신궁에서 대궁사(大宮司·신궁을 지키는 우두머리)를 지낸 저자의 발언인 만큼 무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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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전한시대 청동거울 국내 첫 출토… “기원전 1세기 외교관계-교역망의 흔적”

    기원전 1세기 초기 신라(사로국) 수장급 무덤에서 중국 전한(前漢)시대 청동거울과 청동그릇이 출토됐다. 국내 초기 철기시대 무덤에서 두 유물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학계에선 이 시기 중국 전한과 사로국, 왜를 잇는 교역망을 보여주는 중요 자료라는 평가가 나온다. 8일 한국문화재재단에 따르면 경북 경주시 사라리 130호분 인근에서 발굴을 통해 덧널무덤(목곽묘) 2기와 널무덤(목관묘) 2기, 청동기 및 삼국시대 생활유구가 발견됐다. 이 중 덧널무덤 한 곳에서 청동거울 및 청동그릇 조각, 칠초철검(漆鞘鐵劍·옻칠을 한 칼집에 철검을 끼운 것), 칠기 등이 나왔다. 모두 초기 철기시대 당시 수장급 이상이 가질 수 있는 사치재다. 특히 피장자의 가슴 쪽에서 출토된 청동거울 조각에서는 ‘承之可(승지가)’라고 적힌 한자 명문이 확인됐다. 이 같은 명문이 적힌 청동거울은 일본 후쿠오카의 다테이와 유적 무덤에서도 출토된 적이 있다. 이로 미뤄 발굴팀은 이번에 발견된 청동거울이 중국 전한에서 제작된 청백경(淸白鏡)으로 보고 있다. 동경의 명문은 초나라 굴원이 쓴 책인 초사(楚辭)의 한 문장으로 분석된다. 무덤에서는 다른 청동거울인 성운문경(星雲文鏡) 조각도 나왔다. 발굴팀은 출토된 청동거울 조각의 형태와 곡률 등을 감안할 때 원래 지름이 약 17cm에 이르는 대형 거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정도 크기의 청동거울은 고대 중국의 왕이나 제후가 쓸 수 있는 예물이다. 이에 따라 기원전 1세기 사로국 수장이 철기 교역을 바탕으로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청동거울을 받아온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이번에 발견된 무덤과 앞서 1996년 확인된 사라리 130호분(기원후 1세기 추정) 모두 묘제가 덧널무덤으로 같은 데다 거리가 가깝고 부장품이 청동거울, 철검 등으로 유사하다는 점이다. 두 무덤의 시차는 30∼60년 정도로 이번에 발견된 덧널무덤의 조성 연대가 조금 앞선다. 이에 따라 사로국 수장의 권력 승계가 이뤄진 흔적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양수 국립청주박물관장(청동기 고고학 전공)은 “사라리 130호분에서 나온 청동거울은 한반도에서 자체 제작된 방제경(倣製鏡)”이라며 “사로국 수장이 중국 청동거울을 수입해 사용하다가 권력을 이어받은 수장대에 이르러서는 독자적으로 청동거울을 제작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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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文, 퇴임 후 첫 회고록 낸다…‘변방에서 중심으로’ 20일 발간

    문재인 전 대통령의 퇴임 후 첫 회고록인 ‘변방에서 중심으로’(김영사)가 20일 발간된다.8일 김영사 출판사에 따르면 문 전 대통령의 회고록의 예약판매가 온라인에서 이날부터 시작됐다. 김영사 측은 “문 전 대통령이 퇴임 이후 직접 쓴 책이 나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신간은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안보실 평화군비통제비서관, 평화기획비서관, 외교부 제1차관을 역임한 최종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와의 대담 형식으로 구성됐다. 최 교수가 질문을 던지면 문 전 대통령이 답변하는 형식인 것으로 알려졌다.신간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도보다리 회동,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남북미 정상 판문점회동 등 문 전 대통령 재임기에 있었던 주요 외교 사안을 다룬다.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일본 수출규제 대응, 코로나 방역 과정에서 정책 결정 과정도 담겼다. 김 위원장, 트럼프 전 대통령,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등과의 물밑 협상 과정과 이들에 대한 문 전 대통령의 평가도 소개된다.회고록은 1장 ‘미국의 손을 잡고’, 2장 ‘균형외교’ , 3장 ‘평화 올림픽의 꿈을 이루다’ 등 총 13개장으로 구성됐다. 김영사는 “외교안보 성과뿐 아니라 아쉬움과 한계, 성공과 실패 요인, 정책에 대한 공과 판단을 솔직하게 기록해 외교안보의 교과서이자 사료로서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높였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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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중 반도체 전쟁 영원한 승자는 없다[김상운의 빽투더퓨처]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對中) 수출통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한 결과 중국의 반도체 기술수준은 미국에 비해 수 년 뒤쳐졌다.”최근 지나 러몬드 미국 상무장관이 CBS와의 인터뷰에서 대중 수출제재 강화를 시사하면서 덧붙인 말입니다. 미국 반도체 제재의 핵심 타켓인 화웨이가 작년 8월 7나노 칩이 들어간 최신 스마트폰(메이트 60 프로)을 출시해 미국을 놀라게 한 ‘화웨이 쇼크’를 의식한 발언으로 풀이됩니다. 미국은 화웨이가 자국 안보를 위협한다며 미국산 기술이 포함된 부품, 장비의 중국 유입을 틀어막았지만, 화웨이는 보란듯이 미국의 예상보다 앞선 기술이 적용된 칩을 생산했죠.갈수록 첨예해지고 있는 미중 ‘반도체 전쟁’은 대만 이슈와도 얽혀 한층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세계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만 TSMC가 양안전쟁으로 가동을 멈추면 글로벌 경제에 치명타를 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반도체 분야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중국 고립은 실현 가능하며, 중국의 기술발전 속도를 정말 늦출 수 있을까요.中 ‘글로벌 공급망’ 분리 어려운 이유요즘 미국의 대중 고립화 전략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냉전시대 블록경제가 연상됩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각자 자신의 진영 내에서 무역을 벌이는 폐쇄적 경제구조를 운영했습니다. 예컨대 미국이 마셜플랜으로 서유럽의 경제부흥을 이끌자, 소련은 코메콘(COMECON)을 중심으로 공산권 국가간 원조경제 체제를 구축합니다(북한은 자립경제 노선을 추구하면서 코메콘 가입을 거부)2차대전 직후 경제복구가 막 이뤄지는 시점부터 블록경제가 형성됐기에 미소 양 진영의 경제 분리는 역사적 뿌리가 깊었습니다. 이에 비해 중국은 1970년대 경제개방부터 시작해 2001년 WTO 가입에 이르기까지 미국 주도의 글로벌 경제 시스템에 오랫동안 참여했기에 ‘디커플링(공급망 등의 분리)’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실제로 세계 경제가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고도성장으로 나아간 배경에는 거대 생산지이자 시장 역할을 해 온 중국의 역할이 컸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그만큼 글로벌 경제 시스템에서 미중은 서로 깊이 연결돼 있다는 얘기죠.美-동맹국 주도 반도체 공급망그런데도 미국이 중국에 대해 ‘반도체 전쟁’을 선포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얼까요. 그것은 극소수의 기업들이 부품이나 소재를 독과점으로 공급하는 반도체 산업의 특성에서 비롯됩니다. 이걸 이해하려면 반도체 제조 공정의 역사를 잠깐 훑어볼 필요가 있습니다.1947년 월터 브래튼과 존 바딘의 실험을 계기로 지구상에 모습을 드러낸 반도체는 실리콘 웨이퍼 위에 최대한 많은 수의 트랜지스터를 올리기 위한 분투의 과정을 밟게 됩니다. 이른바 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 개념인데요, 일종의 스위치 역할을 하는 트랜지스터가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면서 정보(0 혹은 1의 2진수)를 전달하기에 얼마나 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적하느냐에 따라 비용 대비 성능이 결정됩니다.이에 따라 최근에는 트랜지스터의 크기를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절반 정도까지 줄이면서 웨이퍼 위에서 이들을 잇는 미세 회로를 그리는 첨단기술(리소그래피·노광)이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문제는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이 미세 회로를 그리려면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10~100나노미터의 파장을 지닌 극자외선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럴려면 태양의 표면 온도보다 뜨거운 섭씨 50만 도의 플라스마 상태를 만드는 초고난도 공정을 거쳐야하기에 그 진입장벽이 매우 높습니다. 이 때문에 현재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는 네덜란드의 ASML이 독점 생산하고 있습니다.이외에도 반도체 제조 소프트웨어는 미국과 독일에 소재한 3개사가 시장을 분점하고 있고,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는 삼성과 TSMC가 양분하는 구조입니다. 이처럼 반도체 장비, 생산, 소재 등에서 극소수의 기업들이 독과점 지위를 갖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이들 모두가 미국이나 그 동맹국(한국, 대만, 일본, 서유럽 등) 소속이라는 겁니다. 이는 미국이 동맹국에 영향력을 행사해 중국을 겨냥한 반도체 기술통제를 가할 수 있는 배경이 됩니다.실제로 최근 SK하이닉스가 중국 우시 생산공장에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를 배치하려고 하자, 미국 정부가 이를 막기 위해 압력을 넣었죠. 이는 생산성과 직결되는 문제였지만, 미국의 전방위 압박에 굴복해 SK하이닉스는 결국 장비 반입을 포기했습니다.이것은 경제적 상호의존이 무기화 된 사례입니다. 일반적으로 각국이 경제교류를 통해 상호의존이 심화되면 전쟁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당사국 간에 갈등이 생기면 경제, 기술적 상호의존을 오히려 상대를 압박하는 카드로 이용할 수 있죠. 현재 미중 간에 벌어지고 있는 반도체 전쟁이 이런 경우에 해당됩니다.공급망 상호의존 美에 부메랑될 수도그런데 문제는 이 무기화된 상호의존이 미국에도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이 갖고 있는 최대의 무기는 뭘까요. 그것은 바로 세계 최대 소비시장과 대만 침공 카드입니다. 트럼프 집권기부터 본격화 된 미국 정부의 반도체 수출통제에 대해 미국 기업들이 우려를 표하며 규제 완화를 요구한 건 중국에서 당장 거둘 수 있는 이익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미국 최대 반도체 장비회사인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는 정부 규제를 어기고 중국 기업(SMIC)에 제품을 판매한 혐의로 미 법무부의 조사를 받기도 했죠.사실 정부가 시장을 이길 수 있느냐는 고전적인 질문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꽤 있습니다. 아무리 미국 정부가 반도체 규제를 전방위로 가해도 중국을 포함해 전 세계가 얽혀있는 글로벌 공급망을 100% 통제하기는 힘들다는 겁니다. 이와 관련해 2020년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 화웨이를 안보의 적으로 규정하고 각국 통신망 사업에서 화웨이 배제를 요구할 당시 영국 정부가 이를 거부한 게 대표적입니다. 당시 로버트 해니건 정부통신본부(GCHQ·영국 정보기관) 국장은 “서구가 중국의 기술발전을 억누를 수 있다며 스스로를 속이는 대신에, 우리는 미래에 중국이 기술강국이 되는 걸 받아들이며 그 위험을 지금부터 관리해야 한다”는 현실론을 피력했죠.마치 미국이 2차대전 말기에 핵보유국이 되고서 혈맹인 영국에도 핵기술 통제를 실시했지만, 결국 소련은 물론 최근 북한까지 핵개발에 성공한 것처럼 기술개발을 영원히 틀어막을 순 없다는 입장을 밝힌 겁니다.반도체 강국 연 ‘美 기술이전’하지만 미국과 동맹국들 간에 균열이 발생하지 않는 한 근미래에 중국의 반도체 기술이 미국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입니다. 이는 미국에 이어 반도체 강국으로 부상한 일본, 한국, 대만의 역사적 사례를 훑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국가들 모두 정부와 기업의 부단한 노력이 빛을 발했지만, 미국의 기술이전 없이 퀀텀 점프의 토대를 마련할 수 없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죠.예컨대 삼성전자가 D램 시장의 강자가 될 수 있었던 건 미국 반도체업계가 일본의 덤핑 판매로 위기에 처하자, 그 대항마로 한국으로 기술이전을 수용한 영향이 컸습니다. 실제로 이병철 삼성 창업자가 1983년 2월 8일 반도체 산업 진출을 선언할 당시 미국 마이크론과 64K D램 설계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죠.미국 반도체업계 대부인 고든 무어 인텔 CEO가 “가치 있는 반도체 기술을 외국에 쉽게 넘겨준다”고 우려했지만, 일본의 공세로 자금난에 시달리던 마이크론의 기술이전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미국 정부의 반(反)덤핑 압박에 1986년 일본 정부가 D램 대미 수출량을 제한한 것도 삼성이 반도체 신화를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습니다.여기에서 흥미로운 건 미국의 대대적인 수출통제로 화웨이의 스마트폰 출하량이 2020년 2분기 세계 1위(5580만 대)에서 이듬해 2분기 8위(980만 대)로 급락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중국 정부가 제대로 된 보복에 나서지 않았다는 겁니다.중국 정부는 자국 안보를 해치는 외국기업에 대해 ‘신뢰할 수 없는 기업 명단(unreliable entity list)’에 올리겠다고 공언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을 벗어나 중국 기업들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방도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겁니다.결국 정리하면 ①냉전시기 소련과 달리 중국은 1970년대부터 미국 주도의 글로벌 경제에 편입된데다 ②중국이 세계 최대 소비시장을 갖고 있는 점 ③이로 인해 미국 반도체 업계 내에서 혹은 미국과 동맹국 간에 대중 제재를 둘러싼 균열이 일어날 경우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하지만 ①극소수 기업들이 독과점을 유지하고 있는 반도체 공정의 특성 ②이들 독과점 기업들이 모두 미국과 동맹국들의 수중에 있다는 점 ③일본, 한국, 대만 등의 사례에서 보듯 반도체 기술발전을 위해선 미국으로부터 기술 이전이 필수라는 점을 감안할 때 가까운 미래에 중국이 미국의 수출통제를 뚫고 획기적인 돌파구를 마련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됩니다.단, 이는 미국과 동맹국들 사이에 균열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동맹의 가치를 경시하는 트럼프가 재집권할 경우 예상 외의 변수가 생길 지도 모를 일입니다.[참고 문헌]-크리스 밀러, 노정태 역 〈칩워, 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 (2023년, 부키)“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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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고대 이집트인의 평범한 일상 엿보기

    기원전 15세기 나일강 범람기의 테베 한 마을. 어느 농부가 집에 들어가려다가 순간 멈칫한다. 피라미드 공사에 농부들을 징발하려고 가가호호 방문하던 관리를 멀리서 발견한 것. 그는 본능적으로 길을 우회해 집에 몰래 들어간 뒤 자신의 아내에게 속삭인다. “남편이 요양차 먼 친척 집에 갔다고 말하시오.” 고대 이집트에서 1년은 나일강의 범람을 기준으로 세 시기로 구분됐다. 그중 나일강이 넘쳐 밭이 물에 잠기는 7월 중순에서 11월 중순까지는 힘든 농사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기간이었다. 하지만 파라오의 나라는 백성들을 마냥 놀리지 않았다. 농사 대신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나 신전을 건설하는 노역에 이들을 동원한 것. 백성들은 파라오와 귀족들의 착취에 불만을 품었겠지만,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뒤에도 신으로 군림하는 파라오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고 결국 순종했다. 이 책은 미국 고고학자인 저자가 고대 이집트의 신왕국 시대(기원전 1550년∼기원전 1069년)를 배경으로 평범한 민초들의 삶을 1년 단위로 재구성한 팩션 역사서다. 독자들에게 생생한 삶의 현장을 보여주기 위해 농부, 어부, 옹기장이, 미라 제조 장인 등 다양한 직업의 가상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지배층의 정치와 문화, 인식 등 주류 질서에 천착해온 기존 역사·고고학계의 연구가 평범한 사람들의 가치관과 문화 등에 주목하는 방향으로 최근 바뀌고 있는 것과 맞물려 주목할 만한 책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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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마오쩌둥의 이상주의가 낳은 집단광기

    중국의 경제개방 정책으로 고도성장을 이끈 덩샤오핑부터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지금의 시진핑에 이르기까지 중국 지도자들의 정체성을 형성한 공통 요소를 하나만 꼽는다면 문화대혁명일 것이다. 이들은 문혁의 틈바구니에서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였으며, 그 결과 살아남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1989년 천안문 사건 당시 덩샤오핑의 무력진압 결정에는 문혁 당시 홍위병으로 대표되는 학생운동의 트라우마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를 계기로 문혁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 정치학자로 중국 정치와 문화의 상관관계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저자는 이 책에서 문혁이 중국 역사와 문화에 끼친 심대한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다. 문혁은 부유한 자본주의보다 가난한 공산주의를 선호한 마오쩌둥의 이상주의가 낳은 집단광기였다. 주석이었던 마오쩌둥은 행정을 이끌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온건한 시장주의 개혁이 진정한 공산주의 혁명과 유리돼 있다고 봤다. 이때 대중 동원의 천재였던 마오의 눈에 10대 청소년들이 들어 왔다. 이들은 짊어져야 할 사회적 책임이 별로 없었기에 행동주의에 쉽게 경도될 수 있는 세대였다. 결국 마오의 조반유리(造反有理·모든 반항에는 나름의 정당한 도리와 이유가 있다는 뜻) 선동에 고무된 어린 홍위병들이 들고일어나 덩샤오핑 등 온건파 지도부를 축출한다. 저자는 당시 서구에서 들불처럼 번진 68세대의 반항적 대중문화가 마오쩌둥주의 광풍과 유사했다는 흥미로운 견해도 덧붙였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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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김상운]독서율 역대 최저 해법… 수요자 중심으로 풀어야

    나폴레옹은 해외 원정을 떠날 때도 전담 사서가 딸린 ‘이동식 서고’를 끌고 다녔다. 교전국의 군사뿐 아니라 역사, 지리, 종교, 법제 등을 다룬 수백 권의 책을 전장에서 틈틈이 읽기 위해서였다. 영국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앤드루는 “나폴레옹의 천재적 상상력은 책에서 나왔으며, 이것이 그가 비밀 정보보다 책에 더 집중한 이유”라고 말한다.(‘스파이 세계사’·2021년·한울) 나폴레옹 전쟁으로부터 약 200년이 흐른 요즘 유튜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의 시청이 늘면서 책을 외면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텍스트가 주는 상상력은 여전히 심오하다. 지난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는 23일 국내 독자들과의 만남에서 “모든 위대한 문학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삶을 조금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 되고,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독서율이 떨어지는 건 세계적 추세지만 유독 한국의 하락 속도는 가파르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만 19세 이상 성인 독서율(1년간 종이책, 전자책, 오디오북을 1권 이상 읽은 사람의 비율)은 2015년 67.4%에서 2019년 55.7%로 4년 새 11.7%포인트 급락했다. 이에 비해 미국은 같은 기간 72.0%로 변동이 없었다. 급기야 지난해 한국의 성인 독서율은 역대 최저인 43.0%로 떨어졌다. 주요국 중 한국의 독서율이 유독 낮은 데에는 워라밸, 스마트폰 보급 속도 등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정부와 출판계의 분발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예컨대 정부의 ‘독서문화 진흥 기본계획’이 도서 보급 등 출판사, 작가 지원에 치우쳐 독서문화 조성과 같은 수요자 중심의 정책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 이와 관련해 지자체들의 ‘한 도시 한 책’ 운동을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서울 성북구는 지역 도서관들을 중심으로 독서 동호회를 활발히 운영하는 한편, 온라인 독서 플랫폼을 통해 작가와의 만남이나 전시회 등 다양한 도서 추천 행사를 벌이고 있다. 책장 펼치기를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을 위해 실질적인 도움을 줄 방안을 마련한 것이다. 정부 못지않게 출판계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잠재력 있는 작가들을 발굴해 독자층을 넓히려는 노력을 더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 요즘 한국 소설 시장이 2030 여성 독자층 위주로 흘러가고 있는 세태와 무관치 않다. “새로운 필자를 발굴하고 새로운 책을 만들어 내면서 이 사회의 지성과 문화를 선도하는 희열을 느꼈다”고 자서전에 쓴 고(故) 박맹호 민음사 창립자의 고백을 곱씹어 봐야 하지 않을까. 작가들의 창작 의욕을 떨어뜨리는 ‘인세(판매량 정보) 투명성’ 문제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2021년 출판계의 불투명한 인세 정산을 놓고 논란이 불거졌지만, 여전히 작가들은 자신이 쓴 책의 판매량을 실시간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출판유통통합전산망 추진을 놓고 문체부와 출판계가 갈등을 벌이면서 온전한 집계가 이뤄지지 못해서다. 최근에는 출판 예산 삭감을 놓고도 양측의 갈등이 확산되는 양상이다. 독서율 역대 최저라는 국가적 위기 앞에서 정부와 출판계가 소모적 논란을 멈추고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 20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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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이란 ‘1차대전 확전 모델’ 따를까[김상운의 빽투더퓨처]

    “이란의 이스라엘 직접 공격은 중동지역의 판도를 뒤흔들 ‘게임 체인저’다.”수전 멀로니 브루킹스연구소 부소장이 최근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입니다. 지금껏 하마스, 헤즈볼라 등 이스라엘 주변 무장세력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때린 이란의 ‘그림자 전쟁’이 직접 공격으로 바뀌면서 중동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을 우려한 겁니다.보복, 재보복에 나선 이스라엘과 이란이 일단 숨고르기에 들어갔지만 공격 양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면서 언제라도 확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핵심 원유 공급지인 중동지역 전쟁은 세계 경제위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에 한국도 강건너 불구경할 순 없는 상황이죠.세계 전사(戰史)에서 대표적인 확전 모델로 꼽히는 제1차 세계대전을 이스라엘-이란 무력충돌과 비교 분석함으로서 향후 전개를 예상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보겠습니다.‘세력균형’의 지각 변동1차대전은 당사국 누구도 원치 않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 인명피해를 낳은 전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특히 오스트리아-세르비아 간 전쟁으로 시작됐지만 불과 1주일도 안 돼 세계대전으로 확전된 전무후무한 사례입니다.1차대전의 원인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오스트리아-독일-이탈리아(3국동맹) vs 영국-러시아-프랑스(3국협상)의 세력균형이 발칸 반도에서 깨지면서 발발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입니다. 그 발단은 1871년 통일 이후 독일제국의 부상이었죠. 독일의 부상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의 안보위협을 키우면서 아슬아슬하게 유지됐던 세력균형이 무너진 겁니다.물론 여기에는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구슬려 프랑스를 고립시켰던 비스마르크의 절묘한 외교술이 빌헬름 2세 집권과 더불어 무력화된 영향도 있었습니다. 독일 국민들의 제국주의 열망에 영합한 빌헬름 2세의 팽창주의 외교 노선이 영국, 러시아, 프랑스에 공세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죠.최근 이스라엘-이란 무력충돌도 사우디, 이집트, 튀르키예, UAE 등 수니파 vs 이란,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예멘 등 시아파 국가들의 세력균형이 깨졌다는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적극적인 중재로 사우디-이스라엘 수교가 추진되면서 중동에서 두 적대적 블록의 힘의 균형이 무너지게 된 겁니다. 이란으로서는 철천지 원수이자 군사강국으로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이 사우디에 가세하면 코너에 몰릴 수밖에 없다고 본 거죠.실제로 미국과 사우디는 이란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수니파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의 국교 수립을 지원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2020년 9월 UAE, 바레인과 ‘아브라함 협정’을 맺고 국교를 수립한 데 이어 수단, 모로코와도 수교했죠. 1차대전을 촉발시킨 세력균형 붕괴가 중동에서도 이미 진행 중이며, 이스라엘-이란 무력충돌을 계기로 수니파 vs 시아파 국가들 간의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아진 겁니다.소수민족 변수의 개입1차대전의 서막을 연 오스트리아-세르비아 전쟁은 그보다 앞서 벌어진 두 차례의 발칸전쟁으로 부각된 민족주의가 핵심 변수였습니다. 오스만터키 제국의 약화로 발칸에서 힘의 공백이 발생하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이 슬라브계 민족이 살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한 게 화근이었죠. 슬라브계 국가였던 세르비아, 러시아가 독일을 등에 업은 오스트리아를 축출하고자 한 겁니다.이번 이스라엘-이란 무력충돌도 이란의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지원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1차대전의 경로와 유사합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 영토, 민족의 문제는 21세기에도 강한 휘발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분쟁을 격화시키는 요인이 됩니다.더구나 이스라엘-이란 무력충돌은 이슬람의 반유대주의나 수니파-시아파 갈등과 같은 종교갈등의 구조까지 안고 있다는 점에서 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패권국의 애매한 태도로이드 조지(1863~1945) 영국 총리는 1차대전 후 펴낸 전쟁 회고록에서 외무상이던 에드워드 그레이의 애매모호한 태도가 전쟁을 일으킨 요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전쟁 관련국들 간에 갈등이 점차 높아지던 1914년 7월 위기 국면에서 영국이 프랑스, 벨기에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밝히지 않은 게 독일의 오판을 불러왔다는 겁니다. 만약 1차대전 당시 패권국 위치에 있던 영국이 단호한 개입 의지를 밝혔다면 독일이 공세적으로 나오지 못했을 거라는 얘깁니다.지금 중동에서의 확전 여부도 사실 패권국 미국의 움직임이 중요한 변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란이 지금껏 눈엣 가시 같은 이스라엘을 직접 공격하지 못하고, ‘그림자 전쟁’을 수행한 건 미국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기 때문이죠.그런데 문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미중전쟁에도 대비해야하는 미국이 중동에 어느 정도까지 개입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비 지원을 위해 미 의회를 가까스로 설득할 수 있었죠. 얼마 전 바이든 대통령은 네타냐후 총리에게 “이란 공격을 도울 수 없다”고 선을 긋기도 했죠. 향후 미국의 수세적 입장이 이란의 군사 모험주의를 자극할 수도 있을 겁니다.신호에 대한 오인1차대전이 1주일도 안돼 세계대전으로 확산된 데에는 1914년 7월 위기 막바지에 러시아가 실시한 군 동원령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1914년 7월 25일 러시아 황제와 군수뇌부는 독일에 대한 무력시위 의도로 ‘예비 동원령’을 발동했는데 이것이 3국동맹의 위협인식을 크게 높인 겁니다.실제로 바로 다음 날 오스트리아가 동원령을 내리고 이틀 뒤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를 포격합니다. 이에 러시아가 다음 날인 7월 29일 부분 동원령을 내리자, 8월 1일 독일과 프랑스가 총동원령을 내리면서 걷잡을 수 없는 양상으로 번지게 되죠.사실 빌헬름 황제 등 독일 수뇌부는 러시아의 군사력이 더 커지기 전에 전쟁을 벌이자는 군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러시아의 동원령 소식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이처럼 국가간 갈등에서 신호에 대한 오인이 확전에 결정적인 변수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란의 거듭된 상호 보복 공격도 어느 순간 오판을 불러와 자칫 확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힘들 겁니다.국내 정치적 압력1차대전 당시 독일과 러시아 모두 국내에서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팽창주의 여론의 압박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1890년 독일이 영국과 ‘헬고란드-잔지바르’ 조약을 맺고 전략 요충지인 헬고란드(함부르크 북서쪽의 섬)를 얻기 위해 아프리카 식민지(잔지바르)를 양보하자,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반발 여론이 빗발쳤습니다.현재 중동도 국내정치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반미 이슬람혁명이 국시인 이란은 이스라엘의 보복을 외면할 경우 체제 정당성이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퇴진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도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강경론에 치우칠 가능성이 높죠.결국 정리하면 ①사우디-이스라엘 수교 추진으로 중동지역 패권을 둘러싼 세력균형이 깨진 상황과 ②소수 민족(팔레스타인)을 둘러싼 개입 ③우크라이나 전쟁, 미중갈등 등 여러 전선을 앞둔 패권국 미국의 한계 ④보복-재보복의 악순환이 낳을 수 있는 신호에 대한 오인 ⑤이스라엘과 이란의 국내정치 압력 등이 1차대전이 발발해 확전된 과정과 유사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다행히 이스라엘, 이란 양측의 무력대응이 현재 소강 상태로 들어갔지만 이런 변수들이 한꺼번에 맞물리면 확전 국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상황을 예의주시해야할 듯 합니다.[참고 문헌]-박건영 〈국제관계사〉 (2020년, 사회평론아카데미)-이내주 〈제1차 세계대전 원인 논쟁: 피셔 논쟁 이후 어디까지 왔는가?〉 (2014년, 영국연구 32호)-이장훈 〈하마스, 이스라엘 전쟁의 이면에 담긴 국제정치 함수〉 (월간중앙 2023년 11월 17일)“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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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강대국 입장서 서술한 전쟁 논리

    지금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면 미국은 어떻게 대응할까. 미국은 타이베이를 지키기 위해 워싱턴에 대한 핵공격 위험을 감수할 수 있을까. 역으로 대만 정치권에서 반중세력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을 중국은 계속 묵인할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이스라엘-이란 공습이 이어지면서 ‘전쟁의 시대’가 다시 도래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극심한 미중 갈등과 맞물려 양안전쟁 발발 시 한반도에 미칠 영향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현재 세종연구소 부소장으로 재직 중인 저자는 신간에서 태평양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양안전쟁이라는 세 가지 전쟁을 들여다보며 강대국의 현실주의 논리를 분석하고 있다. 수많은 전쟁 중 이 세 가지를 꼽은 건 강대국 간 세력권(sphere of influence)이 전쟁 발발의 원인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서다. 예컨대 우크라이나 전쟁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진에 따른 러시아의 위협 인식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양안전쟁의 성패는 미중의 결의에 달려 있다고 지적한다. 어느 쪽이 더 많은 고통과 비용을 감수할 수 있느냐가 전쟁 수행의 의지를 결정한다는 것. 결국 대만을 영토 문제로 접근하는 중국이 물러설 가능성이 낮다고 볼 때, 미국이 대만을 위해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각오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는 얘기다. 이에 따라 미국이 대만의 전략적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란 현실주의 논리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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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日 반전운동가의 태평양전쟁 회고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인 1942년 2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일본 등 적성국 출신 거주자들을 강제 수용할 수 있는 행정명령에 서명한다. 이에 따라 약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 혹은 일본인 체류자들이 캘리포니아와 콜로라도, 애리조나 등에 건설된 수용소로 이주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유학 중이던 저자도 그중 한 명이었다. 미국을 속속들이 잘 알던 그는 자신의 조국이 패전할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전쟁의 명분도 옳지 않다고 봤다. 하지만 “일본으로 귀환선 탑승과 종전까지 안전한 미국 수용소에서의 거주”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오자 그는 주저없이 귀국을 결정했다. 일본의 가족과 친구가 자신의 ‘나라’이기에 그 나라가 패배한다면 자신도 그쪽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 이 책은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반전 운동가였던 저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본 회고록이다. 그는 종전 후 마루야마 마사오 등과 함께 1946년 ‘사상의 과학’을 창간하고 반전 운동을 벌였다. 평화헌법 9조를 지키기 위한 ‘9조 모임’에 이어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도 나섰다. 그랬던 그도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으로 귀국하자마자 징집돼 해군 군속으로 신문을 제작해야 했다. 그는 “62년이 지난 지금 돌아봐도 (귀국을) 후회하지 않는다. 희미하지만 그 자체로 흔들림 없는 사상이란 것도 존재한다고 나는 믿는다”고 썼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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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일미군 강화가 한반도 안보에 미치는 영향은[김상운의 빽투더퓨처]

    최근 미일 양국이 중국의 안보위협에 맞서 주일미군 사령부를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주일미군 사령관을 4성 장군으로 격상하고, 주일미군의 작전지휘 기능을 강화해 일본 자위대와의 일체화를 가속화하겠다는 겁니다. 얼핏 보면 한미 연합사령부를 지휘하면서 전시 작전통제권을 쥔 주한미군사령부를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주한·주일미군이 동아시아에 주둔한 미국 군사력의 양대 축임을 감안할 때 주일미군 지휘체계의 변동은 주한미군에도 직접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주한·주일미군의 변화는 한반도 안보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죠. 한국전쟁 이후 약 70년에 걸친 주한·주일미군의 역사를 통해 미일 안보조약 업그레이드의 파장을 짚어보겠습니다.주한미군 철수 둘러싼 한미갈등의 역사한국전쟁을 계기로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제4조(‘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에서 주한미군 주둔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원치 않는 전쟁에 연루될 걸 우려한 미국은 당초 동맹조약 체결에 극히 부정적이었지만, 미소 냉전 국면에서 첫 열전으로 발화한 한국전쟁이 이런 분위기를 일거에 뒤집었죠.이승만 대통령이 집요하게 요구한 북한 침략시 미국의 자동개입 조항이 조약에 명시되진 않았지만, 전방에 배치된 주한미군의 존재 자체가 인계철선(引繫鐵線·수류탄 등을 폭발시키는 철선) 기능을 발휘했습니다(이는 노무현 정부에서 동두천 등 전방의 주한미군 기지를 후방으로 이전하면서 약화되기는 했습니다)주한미군은 1950년대에 32만5000명에 달했지만, 미중 데탕트와 탈냉전 등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규모가 줄었습니다(2020년 기준 약 2만8500명) 중국과의 데탕트로 한반도에서 현상유지가 가능해졌다는 판단과 더불어 막대한 재정적자 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죠. 문제는 1960~70년대 북한의 안보위협을 둘러싼 한미 간 인식이 서로 달라 주한미군 감축을 놓고 양측이 적지 않은 갈등을 벌였다는 겁니다.예컨대 1960년대 초 존슨 행정부는 주한미군을 9000명가량 감축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한국 정부와 협의에 들어갔습니다. 안보불안에 휩싸인 박정희 정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다했는데, 1965년 예기치 않은 베트남전 확전이 숨통을 틔워주게 됩니다. 존슨 행정부가 지상군 증원을 위해 한국군 파병을 요청하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막을 수 있는 지렛대가 한국에 생긴 거죠.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5월 열흘간 미국을 방문해 베트남 파병을 조건으로 주한미군 병력 유지와 1억5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낳은 중요한 경제적 토대가 마련된 겁니다.미국의 주한미군 감축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특히 중국과 데탕트를 추진한 닉슨 행정부는 한국의 강한 반발에도 1970년 5월 “주한미군 일부 철수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철수는 점진적으로 추진될 것이고, 1개 사단 이하 병력부터 철수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결국 이듬해 6월 말까지 주한미군 1만8000명이 감축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절치부심 끝에 핵개발을 포함한 자주국방의 길을 걷게 됩니다.소련 붕괴에 따른 탈냉전도 주한미군 감축의 요인이 됩니다. 1990년 4월 미 국방부는 10년에 걸쳐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미군을 점진적으로 감축하는 내용의 ‘동아시아 전략구상(EASI)’을 의회에 제출합니다. 13만5000명의 아시아 주둔 미군 중 1단계로 3년간 최대 1만5000명을 줄이기로 했는데, 이에 따라 1992년까지 주한미군 6987명, 주일미군 4773명이 각각 본토로 철수했습니다.‘주일미군-자위대 일체화’ 추구한 일본노무현 정부 들어 ‘자주파’의 득세와 미국의 아시아 군사전략 변화가 맞물리면서 한반도 방위에 주력하던 주한미군의 성격은 크게 바뀌게 됩니다. 한미동맹에서 한국의 자율성을 높이겠다는 자주파의 주도로 주한미군의 전시 작전통제권 전환을 추진하는 동시에 의정부, 동두천 등에 있던 전방 미군부대를 평택, 대구 등 후방으로 이전하면서 미군의 인계철선 기능이 약화된 겁니다이는 주한미군을 한반도 붙박이에서 벗어나게 해 동아시아 전역에서 ‘작전 기동군’으로 활용하고자 한 미국의 국방전략에 부합했죠. 미국의 가려운 등을 한국이 알아서 긁어준 셈입니다.이 과정에서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사건’(미군 훈련 과정에서 여중생 2명이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팽배하진 반미감정이 전작권 전환 논의에 영향을 미칩니다. 실제로 미국은 2004년 주한미군 전력의 3분의 1과 주독미군 2개 사단을 철수한 결정에 한국과 독일 내 반미정서가 한 요인이었음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주한미군의 성격이 동아시아 역내의 작전 기동군으로 바뀌면서 2011년부터 해외 연합훈련에 참가하기 시작했고, 그해 3월엔 동일본 대지진 지원을 위해 U2 정찰기를 일본에 파견했습니다. 이어 2015년부터는 다연장 로켓(MLRS) 대대와 미 2사단 여단전투단, AH-64 공격헬기 대대 등 주한미군 주요 전력이 순환배치 형태로 한반도와 미국 본토를 드나들기 시작하죠.반면 일본의 대응은 한국과는 반대였습니다.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일동맹을 강화하고, 자위대와 주일미군의 일체성(통합성)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인 겁니다. 한국과 달리 자율성보다는 안보를 택한 것이죠. 이는 ‘글로벌 전략 기동군’으로서 주일미군의 역할을 확대하려는 미국의 군사전략과 맞물리게 됩니다.사실 전후 평화헌법에 따라 오로지 방어에만 치중하도록 규정한 자위대의 전수방위 원칙이 오랫동안 주일미군과의 일체화에 걸림돌이 됐습니다. 실제로 1978년 제정된 ‘미일 방위협력지침’에선 소련의 군사위협에 맞서 자위대와 주일미군 간 역할 분담에 중점을 뒀죠.그러다 소련이 무너지고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면서 하나의 전환점이 마련됩니다. 1997년 미일이 ‘신(新)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발표하고 양국의 작전 영역을 한반도, 대만 등 주변지역으로 확대한 겁니다.2000년대 들어 중국의 부상이 가시화되자, 미일은 2006년 ‘주일미군 재편을 위한 로드맵’에 합의합니다. 이에 따라 미 워싱턴주에 있던 육군 1군단사령부를 일본 자마기지로 옮겨 유사시 아태지역에서 미일 육군의 공동 작전사령부로 임무를 수행토록 합니다. 이어 미일 공군의 통합작전 능력을 높이기 위해 일본 항공자위대를 주일미군 5공군사령부가 있는 요코다 기지로 이동시키죠. 중국과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응해 미일 통합 미사일방어사령부 격인 ‘공동통합운용조정소’도 새로 만듭니다. 이는 주일미군을 중앙아시아부터 동해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관할하는 광역사령부로 격상시키고자 한 미국 국방전략의 일환이었죠.미국과의 안보동맹에서 자율성을 추구하며 전시작전권 반환을 추구한 한국과는 반대로 일본이 주일미군과의 일체화를 추진한 차이는 왜 발생했을까. 여기에는 노무현 정부에서 자주파 득세 등 한국 특유의 민족주의 정서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이와 함께 한국전쟁 발발로 미군 주둔이 이뤄진 한국과,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해 전수방위에 국한된 일본의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이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김정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한일은 역사적으로 국방정책의 논리적 근거가 서로 달랐다”며 “애초부터 한미연합사 체계를 갖춘 한국은 자주파가 등장해 주한미군과의 분리를 고민한 반면, 일본은 보수파가 집권할 때 주일미군과의 통합을 고민했다”고 분석했습니다.미일 안보조약 업그레이드 향후 파장은주일미군사령부 강화 방침은 주한·주일미군의 ‘상호 보완성’이란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육군 병력 위주로 구성된 주한미군(2만8500명)과 해·공군 위주의 주일미군(5만5600명)을 결합하면 육해공군과 해병대를 모두 갖춘 완전체가 되기 때문입니다.이는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전략에서 중복에 따른 비효율을 최소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된 편제라고 봐야합니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 역내에서 군사위협이 발생할 때 주한·주일미군이 함께 운용될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실제로 미국은 탈냉전 이후 주한·주일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확대하기 위해 작전지역을 확장하며 연합훈련의 강도를 높여왔습니다. 육해공 합동훈련부터 인도주의 지원, 재난재해 및 테러 대응, 국제평화유지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훈련을 망라하고 있죠. 미국의 전통 우방인 호주, 캐나다까지 끌어들여 중국을 포위하는 형국입니다.이와 관련해 미국의 관점에서 주일미군의 역할 내지 전략적 위상이 주한미군보다 사실상 상위에 있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해외 미군기지는 ‘전력 투사력’ 기준으로 ▲대규모 전력을 원거리로 보낼 수 있는 1급 전력투사 근거지(PPH·Power Projection Hub) ▲장기 주둔 사령부가 있는 2급 주작전기지(MOB) ▲소규모 부대나 순환부대를 위한 시설이 있는 3급 전진작전기지(FOS·Forward Operating Sites) ▲상주시설은 없고 유사시 병력 배치의 법적 근거만 있는 4급 협력적 안보지역(CSL·Cooperative Security Locations)으로 나뉘는데 주일미군은 1급 PPH로 주한미군은 2급 MOB로 각각 분류됩니다.이에 따라 중국의 대만 침공과 같은 역내 안보 위기가 발생할 때 주일미군이 전투부대로, 주한미군은 지원 혹은 증원 부대나 병참기지로 활용될 거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이런 관점에서 주일미군 사령부 강화는 한반도나 대만에서 전쟁이 벌어질 경우 미군과 자위대의 일체성을 강화해 신속히 전력을 이동 배치하는 등 대응력을 높이려는 포석으로 보입니다. 일각에선 동맹에 비용 전가를 앞세운 트럼프가 재집권할 경우 주일미군 강화를 주한미군 감축의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도 거론됩니다. 대만 위기 등과 맞물려 미일의 주일미군 강화 움직임을 우리가 면밀히 살펴봐야하는 이유입니다.[참고 문헌]-임기훈 〈탈냉전기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의 역할 변화〉 (2021년, 한국과 국제정치 37권 4호)-마상윤 〈미완의 계획: 1960년대 전반기 미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 논의〉 (2003년, 한국과 국제정치 19권 2호)-FT 〈US and Japan plan biggest upgrade to security pact in over 60 years〉 (2024. 3. 24)“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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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지구 두 바퀴… 어느 의사의 자전거 여행

    수련의를 갓 마친 영국 청년이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멀리 떠난다. 그는 유럽대륙과 중동을 거쳐 남아프리카로 향하더니 이내 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한다. 그러곤 호주와 동남아시아, 인도를 찍고 중국으로 향한다. 장장 6년에 걸쳐 75개국, 8만6000여 km를 자전거로 내달린 저자의 장구한 여정이다. 그 사이 자전거는 타이어 26개, 체인 14개, 페달 12세트를 갈아치워야 했다. 이 책은 런던 세인트토머스병원 응급의인 저자가 쓴 여행 에세이이자 의학 에세이다. 단순히 여행지에 대한 감상이나 고생기만 나열한 게 아니라, 의사로서 바라본 세상의 풍경이 그득 담겼다. 세계 각처에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만난 병자들의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치안이 불안하다며 초라한 행색의 그에게 다가와 에스코트를 자청한 경찰관, 아무 조건 없이 음식과 방을 내준 주민 등 풍경만큼 아름다운 사람 이야기가 펼쳐진다. 저자는 영국인으로서 서구의 제3세계 착취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1990년대 후반 탈레반이 하자라족을 고문하고 강간한 데 대해 서방 평론가들이 ‘부족 간 갈등’으로 간단히 정리하는 건 비겁하다는 것. 저자는 “그런 해석은 강대국들이 아프가니스탄 내 일부 세력만을 군사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증오를 부추기고 분쟁을 격화한 문제를 슬쩍 피해 간다”고 썼다. 여행을 끝내고 병원에 돌아온 그가 의사의 역할은 단지 질병을 진단하는 게 아니라, 환자들의 삶에 귀를 기울이는 데 있다고 언급하는 대목은 최근 의대 정원 갈등과 맞물려 곱씹게 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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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중국 혐오의 시작은 골드러시”

    19세기 중후반 미국 캘리포니아와 호주 멜버른, 남아공 트란스발에서는 골드러시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규모 금광 개발의 이면에는 앵글로색슨 백인들의 중국인 노동자 착취가 있었다. 중화를 자처한 청나라가 갑자기 반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서구 열강이 주도하는 세계 자본주의 시장 질서에 중국인들이 급속도로 편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인 이민자 집안 출신으로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인 저자는 신간에서 19세기 골드러시에 동원된 중국인 이주자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당시 앵글로색슨 백인들은 중국인 이주자들을 ‘쿨리’라고 부르며 낮은 임금으로 혹독하게 부렸다. 그러면서 호주 정부가 이른바 ‘중국인 보호지’를 지정한 것처럼 다분히 인종차별적인 분리주의 정책을 폈다. 문화적으로 열등한 유색인종을 분리해야 불필요한 갈등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에서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초대 주지사를 지낸 존 비글러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중국인들이 백인 광부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며 선동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 같은 시노포비아(sinophobia·중국 혐오)가 최근 미중 갈등과 맞물려 새로운 형태로 부활했다고 말한다. 단, 19세기 중국이 반식민지 상태였다면 21세기 중국은 주요 2개국(G2)로 부상하며 서구의 우려를 자아냈다는 차이점이 있다. 서구와 다른 문명의 부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에는 19세기 ‘중국인 문제’를 다룬 서구인들의 차별적 인식이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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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역사 인식’ 우려된다[광화문에서/김상운]

    “일본이 과거를 사과하지 않는다는 기성세대의 인식을 젊은 세대에게 강요해선 안 된다.” 12일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서울대 서양사학과 명예교수)이 기자간담회에서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강조하면서 한 말이다. 박 이사장은 “50대 이상 기성세대는 살아온 길이 굉장히 험악했기 때문에 자기 연민, 한(恨)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역사적으로 앙숙 관계인 영국과 아일랜드를 거론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아일랜드 사람들이 모든 걸 영국 탓을 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는 것. 그는 “그런데 아일랜드가 경제 발전을 하더니 2000년대 초반 여론조사에서 ‘세상에서 가장 잘 통하는 나라가 영국’이라고 답할 정도로 인식이 바뀌었다”고 덧붙였다. 아일랜드의 경제가 발전하고 민도(民度)가 성숙하면서 영국과 화해했듯, 10대 경제대국이 된 한국도 일본에 사과를 강요하지 말고 화해를 모색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역사학계는 박 이사장의 발언에 대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응해 이를 반박할 수 있는 학술자료를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기관의 수장이 “일본에 사과를 그만 강요하자”는 식의 역사 인식을 공개적으로 밝힌 건 재단 설립 취지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재단 설치의 근거법인 ‘동북아역사재단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1조는 ‘이 법은 동북아역사재단을 설립하여 동북아시아의 역사 문제 및 독도 관련 사항에 대한 장기적·종합적인 연구 분석과 체계적·전략적 정책 개발을 수행함으로써 바른 역사를 정립하고 동북아시아 지역의 평화 및 번영의 기반을 마련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박 이사장은 간담회에서 자기주장의 근거로 이 조문 뒷부분의 ‘평화 및 번영’만 내세웠을 뿐, 앞부분의 ‘동북아 역사 문제 및 독도 사항에 대한 정책 개발’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22일 일본 문부과학성은 ‘종군위안부’ 표현을 없애고 ‘강제징용’ 피해를 희석시키는 내용의 중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를 발표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최근 국내에 번역된 회고록에서 “일본은 과거 몇 번이나 사과해왔다. ‘여러 차례 사과를 시켰으면 이제 됐지’라는 생각이 있었다”고 썼다. 일본 주류의 과거사 인식은 여전히 사과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학자로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은 학문의 자유로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교육부 산하 공공기관장으로 장관급 예우를 받는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의 공적인 발언은 다르다. 사실 이번 논란은 석 달 전 뉴라이트 성향이 강한 박 이사장이 임명됐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다. 앞서 박근혜 정부 때도 뉴라이트 학자가, 문재인 정부에선 국정교과서 집필 거부 선언을 한 진보계열 학자가 각각 재단 이사장으로 임명돼 ‘코드 인사’ 논란이 일었다. 미중 갈등, 북핵 위기와 맞물려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에서 한미일 3각축이 중요하다는 현 정부의 방침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역사 인식은 국제 정세와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역사나 인권 등의 이슈에서는 좌와 우, 진보와 보수가 갈릴 수 없다.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 2024-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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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 ‘민족통일 포기’의 역사적 의미[김상운의 빽투더퓨처]

    김정은이 남·북한을 ‘동족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관계’로 규정한 데 이어 최근 대남기구 폐지 등 후속 조치를 연이어 내놓고 있습니다. 심지어 각종 기록영화 배경에 찍힌 한반도 이미지를 북한 영토로 수정하는 디테일까지 발휘하고 있죠. 이제 정말 북한이 민족통일을 포기한 것일까.그런데 이보다 더 주의를 끄는 건 김정일 집권 당시 3년의 유훈통치 기간을 둘 정도로 선대 수령의 교시를 절대시하는 북한에서 수령이 앞장서 민족통일을 포기했다는 겁니다. 김일성-김정일은 생전에 마르고 닳도록 ‘자주적 민족통일’을 강조했죠. 1980년대 군사독재 시절 이른바 NL(민족해방) 계열의 학생운동권이 북한에 밀착된 것도 북한 통일관의 영향이 컸습니다. 한반도 통일에서 ‘민족 담론’의 포기가 남북한 역사에서 갖는 의미는 무얼까요.김일성 민족통일론 폐기한 김정은“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개의 제도, 두개의 정부에 기초한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현 실정에 맞는 조국통일 방도의 대원칙입니다.”김일성은 1991년 신년사를 통해 ‘느슨한 연방제’를 제안하면서 민족을 앞세웠습니다. 북한은 1993년 김일성이 직접 제기한 ‘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을 발표하면서 “북에 있건 남에 있건 해외에 있건 공산주의자건 민족주의자건 무산자이건 유산자이건 무신론자이건 유신론자이건 모든 차이를 초월해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 단결해야 하며 조국통일의 길을 함께 열어 나가야한다”고 역설했죠. 김정은의 적대적 2국가론이 할아버지이자 초대 수령인 김일성의 교시를 정면으로 어긴 거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사실 김일성이 제기한 북한의 민족 통일론은 단순한 정치 전술에 국한된 게 아닙니다. 북한에서 민족주의는 1960년대 후반 유일 지배체제를 구축하면서 제기된 주체사상과 직결되죠. 1960년대 첨예한 중소 갈등 와중에 김일성이 친중파(연안파)와 친소련파를 제거한 핵심 명분이 ‘민족 자주’였기 때문입니다.외세의 간섭을 물리치겠다는 김일성의 명분론이 북한에서 먹힌 건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 덕분입니다. 엄혹한 일본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이른바 ‘저항적 민족주의’가 남북한을 가리지 않고 민중들의 심장에 꽂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외세=악의 세력’이라는 흑백논리가 김일성이 친중, 친소파를 제거하는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었죠.1인 지배체제 구축을 계기로 주체사상이 북한의 정치, 경제, 문화 등을 규율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등극하면서 주체사상과 결합된 ‘북한판 민족주의’가 사회 전반에 스며들게 됩니다. 예컨대 김일성은 1983년 연설에서 “오늘 신흥세력 나라들이 건설하여야 할 참다운 민족문화는 주체가 선 문화, 주체적인 문화입니다. 주체적인 문화란 자기 민족의 특성과 자기 나라 혁명의 이익에 맞는 문화이며 인민대중이 그 창조자로 되고 향유자로 되는 문화입니다”라며 문화영역에서도 ‘주체적 민족 문화’를 강조합니다.그런데 흥미로운 건 주체사상이 확립되기 전에는 북한에서 민족주의는 일종의 금기어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국제 공산주의’를 신조로 여기는 정통 마르크스 레닌주의에서 민족주의는 일종의 ‘독소’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레닌은 전 세계 노동자들이 자본가에 맞서는 계급투쟁에서 승리하려면 민족을 뛰어 넘어 서로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죠.실제로 민족주의에 대해 1985년판 북한 철학사전에선 “전 민족적 이익을 내세우면서 자기 민족 내의 부르죠아지의 이해관계를 합리화하는 사상”이라는 의미만 담았습니다. 하지만 1992년판 ‘조선말 대사전’에서는 민족주의를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진보적 사상.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부르죠아 민족운동시기에는 인민대중의 이익과 함께 신흥 부르조아지의 이익까지 포괄하는 민족공동의 이익을 반영한다. 단일 민족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진정한 민족주의는 곧 애국주의로 된다”며 긍정적 의미를 살리고 있습니다. 북한이 정통 마르크스 레닌주의에서 이탈해 주체사상으로 이행하는 모습을 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남북한 통일담론의 적대적 의존성‘1972년 공포된 남북한의 헌법은 시기뿐 아니라 1인지배 강화 등 내용상에도 공통점이 많다.’1972년 말 작성된 미국 국무부 정보조사국(Bureau of Intelligence and Research) 내부 보고서는 그해 발표된 남한 유신헌법과 북한 사회주의 헌법의 유사성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면서 남북한 당국 간 정보 공유 가능성을 내비쳤습니다. 두 헌법 모두 그해 남북한 정부가 분단 이후 처음으로 합의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 직후 발표됐죠.박정희가 1972년 10월 발표한 ‘10월 유신’은 미중데탕트로 초래된 미군 철수 등 안보 위기에 대응한다는 명분 하에 장기집권의 길을 연 초헌법적 조치입니다. 그런데 같은 해 김일성도 주체사상을 헌법조문에 규정함으로서 1인 지배체제에 쐐기를 박습니다. 민족통일을 남북한의 국내정치에 활용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입니다. 이를 두고 학계 일각에선 당시 남북한이 ‘적대적 의존관계’였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습니다.7.4 남북공동성명에 이어 유신체제가 등장했을 때 남북한의 대응이 이런 맥락에서 특히 눈길을 끕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유신 발표에 앞서 북한 고위층 접촉을 통해 이해를 구하는 등 남북대화 유지에 공을 들입니다. 유신 선포의 명분 중 하나가 평화통일 추구였기 때문입니다.그런데 북한 역시 남북대화 중단을 우려해 유신체제 출범 직후 남한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는 행태를 보입니다. 김일성은 1974년 우쓰노미야 도쿠마 자민당 의원과의 대담에서 “남북대화가 이제 막 시작되었기 때문에 남한에 대한 비판이 남북대화 중단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큰 인내심을 발휘해 남북대화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죠.하지만 북한의 진의는 평화공존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1972년 11월 8일 북한 외교부 부부장 이만석은 평양 주재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대사에게 “북한이 남한의 유신 조치를 비판하면 야당이 더 탄압받는 결과를 초래해 ‘남조선 혁명’을 전개할 수 있는 입지와 공간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반정부 세력을 통해 남한 정부를 흔들려는 목적으로 남북 대화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 유신에 대한 비난을 삼갔다는 얘기입니다.이처럼 7.4 남북공동성명에서 남북한의 민족통일 담론은 국내정치적 목적과 체제 경쟁 구도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물론 남한 민주화 이후의 통일 논의는 군사독재 시절과는 달라졌지만, 남북한 모두 국내정치의 수단으로 이용한 측면을 부인하긴 힘듭니다. 반민족, 반통일로 돌아선 북한을 대신해 민족통일의 비전을 세워야하는 우리가 경계해야할 역사적 교훈이 아닐까요. [참고 문헌]-전미영 〈통일 담론에 나타난 남북한 민족주의 비교연구〉(국제정치논총 43집 1호, 2003년)-신종대 〈유신체제 수립을 보는 북한과 미국의시각과 대응〉 (아세아연구, 2012년)“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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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1960년대 울린 ‘동백아가씨’ 작곡가의 삶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1960년대 베트남 정글의 전장(戰場)에서, 뜨거운 지하의 독일 탄광에서 반복적으로 울려 퍼졌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1964년)는 가사처럼 서글펐던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1965년 왜색(倭色)이 짙다는 이유로 정부에 의해 방송금지 결정이 내려졌음에도 이 시대 한국인들의 대표 애창곡이었고, 박정희 전 대통령도 사석에서 이 곡을 즐겨 부르곤 했다. 올해로 ‘동백 아가씨’가 예순을 맞은 가운데 국내 최초로 음반 100만 장 판매기록을 세운 이 곡의 작곡가 백영호(1920∼2003)의 삶을 다룬 평전이 나왔다. 내과의사인 그의 장남이 부친이 남긴 육성 녹음테이프와 유품을 바탕으로 주변 인물들을 두루 인터뷰해 책을 썼다. 이미자, 배호, 나훈아, 남진 등 스타 가수들을 비롯해 박춘석, 박시춘 등 전설적인 작곡가들과 얽힌 인연도 다뤄 1960, 70년대 한국 대중음악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백영호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을 탈영해 만주 등지에서 연주자로 활동했다. 광복 이후 고향 부산으로 돌아온 그는 당시 신인이던 이미자를 발굴해 어려운 여건 속에서 ‘동백 아가씨’를 녹음했다. 1963년 동아방송의 라디오 드라마 ‘동백 아가씨’를 이듬해 리메이크한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동명 영화 주제가로 작곡된 것이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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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우키요에로 본 동서양 문화교류사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탕기 영감의 초상’(1887년)은 주인공인 탕기 영감보다 그의 뒷배경에 더 눈길이 간다. 마치 모자이크처럼 벽면을 가득 채운 우키요에(浮世繪·목판화)들은 원색의 화려함을 한껏 뽐낸다. 고흐는 우키요에광(狂)이었다. 없는 살림에도 틈틈이 우키요에를 수집해 감상하고 따라 그렸다. 원근법 따위는 과감히 무시하는 평면적 구도와 원색의 색채는 고흐 등 인상파 화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중국 미술사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우키요에의 연원과 발전 과정, 중국 및 서양미술에 미친 영향 등을 다각도로 짚고 있다. 일본 에도시대(1603∼1868년)에 유행한 우키요에는 한자어의 의미(들뜨고 허허로운 세상의 회화)가 담고 있는 것처럼 목욕하는 여인부터 무사, 배우, 풍경에 이르기까지 세속의 삶을 관조하듯 그려낸 작품이다. 우리로 치면 일종의 ‘민화’에 가까운 개념이다. 우키요에에는 일본의 변화하는 사회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예컨대 경제적 풍요가 찾아온 에도시대 후기 평민들 사이에서 여행 열풍이 불자, 지역 명소들을 담아낸 우키요에 풍경화가 인기를 끌었다. 이때 음영법 등 서양 풍경화의 각종 기법이 우키요에 제작에 반영됐다. 역으로 우키요에는 유럽 회화에 일본 열풍(자포니즘)을 불러일으켜 인상파를 넘어 입체파 태동에도 영향을 미쳤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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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일본인 목사의 43년에 걸친 회개 [광화문에서/김상운]

    며칠 전 동네 교회에서 주일예배 때 겪은 일이다. 팔순을 넘긴 한 노인이 강대상 아래로 내려오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순간 잠잠해진 청중 사이로 무거운 침묵의 공기가 내려앉았다. 노인은 세월의 무게로 힘에 겨운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강대상 뒤에 서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고 온몸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고 여러분께 고통을 드린 점 사죄드립니다. 일본인 목사가 거룩한 한국 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는 한국에 파송된 지 43년 된 서울일본인교회의 요시다 고조 목사였다. 그가 한국에 처음 부임한 1981년은 이미 한국의 기독교인 수가 일본보다 월등히 많을 때였다. 요시다 목사는 이날 설교에서 자신의 파송 이유를 “한국인들께 사죄드리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마태복음 말씀을 강론하며 가장 가까운 이웃을 침략한 일본의 죄를 회개했다. 이달 1일로 3·1운동 105주년을 맞았지만 일본 정부와 유력 정치인들의 과거사 반성은 아직 요원하다. 일본 역대 총리 중 최장기 집권에 성공한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최근 한글로 번역 출간된 ‘아베 신조 회고록’에서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실수로 치부했다. 일본 총리 중 처음으로 한국 식민지배를 사과한 정부의 공식 입장을 사실상 부인한 것이다. 한일 양국 간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미래지향적 관계로 나아가기로 한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무라야마 담화를 토대로 나올 수 있었다. 이러고도 일본이 한국의 ‘위안부 배상 판결’을 놓고 정부 간 신의를 운운할 수 있나. 아베는 회고록에서 “일본은 과거 몇 번이나 사과해왔다. ‘여러 차례 사과를 시켰으면 이제 됐지’라는 생각이 있었다”고 썼다. 사실 일본 극우 정치인들뿐 아니라 최근 국내 일각에서도 “그만 사과해도 되지 않냐”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역사 반성에는 시효가 없다. 침략의 역사를 한시라도 잊으면 1차 대전 발발 25년 만에 2차 대전이 터진 것처럼 역사의 비극이 재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베가 회고록에서 “(무라야마 담화는) 마치 일본만 식민지배를 한 것처럼 쓰였다.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한 관점이 빠졌다”며 “전쟁 전에는 유럽과 미국도 식민지배를 하지 않았느냐”고 항변한 것은 특히 우려스럽다. ‘서구 열강들도 다 했는데 왜 우리한테만 이러느냐’는 그의 태도는 1차 대전에 이어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인들의 인식 체계와 흡사하다. 1919년 6월 독일의 전쟁 배상 책임을 규정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자 당시 독일인들은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열강에도 전쟁의 책임이 있다며 억울해했다. 그러면서 알자스로렌 반환 등에 대해 과도한 징벌이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독일은 그 1년 전 내란으로 취약해진 소련을 압박해(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발트 3국과 조지아 등의 영토를 강제로 뺏은 바 있었다. 일본은 독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화해는 과정이며, 한 번에 그치지 않고 피해자가 아픔을 잊을 때까지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요시다 목사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 202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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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쿠바 수교는 박정희 외교의 유산?[김상운의 빽투더퓨처]

    최근 한국과 쿠바의 수교가 전격 발표되자 북한이 일본과 정상회담 가능성을 타진하는 등 남북관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지난 달 1일 김정은이 쿠바 혁명 65주년 축하전문을 보내고 2주일도 되지 않아 한-쿠바 수교가 발표된 데 대해 북한이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쿠바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도하던 북한 언론이 수교 이후 쿠바 관련 동정을 일체 다루지 않고 있는데서 북한이 받은 충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뉴욕의 주유엔대표부를 통한 한-쿠바 양국간 접촉은 비밀리에 급속도로 이뤄졌는데 수교 기념사진조차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양국이 각각 최대 동맹국인 미국과 북한의 심기를 살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번 수교는 70여년에 걸친 남북한 외교전쟁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남북한 체제경쟁이 치열한 외교전으로 비화했던 1960, 70년대로 시계를 돌려보겠습니다.북방외교의 효시, 박정희 ‘6.23 선언’“남한과 북한의 외교전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1973년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이 모든 재외공관에 보낸 친서 중 일부입니다. 박 대통령은 “지금까지는 북한과 절차적 문제를 놓고 외교전을 벌였으나, 앞으로는 본질적인 문제로 외교전을 벌여야 하기에 몇 갑절 더 치열한 외교전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도 했죠. 비장한 어조의 대통령 친서에 당시 외교관들이 적지 않은 부담을 느꼈으리라 생각됩니다.아이러니하게도 이날은 박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을 통해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을 발표한 날이었습니다. 발표 제목만 봐서는 남북화해를 언급한 것 같은데, 재외공관에는 ‘치열한 대북(對北) 외교전’이라니? 이게 무슨 조화일까요. 이 기묘한 상황을 이해하려면 미중 데탕트로 대표되는 이 시기 국제정세가 한반도에 미친 파급효과를 짚어야 합니다. 일단 그 전에 6.23 선언의 내용부터 훑어보죠.‘6.23 선언’의 골자는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 남북통일은 평화적 방법으로 달성돼야 한다. 둘째, 남북한 긴장완화에 도움이 된다면 북한이 유엔 등 국제기구에 참여하는 걸 반대하지 않는다. 셋째, 남한은 통일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북한과 함께 유엔에 가입하는 걸 반대하지 않는다. 넷째, 한국은 호혜평등의 원칙 아래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공산권 국가들에 문호 개방을 촉구한다.내용만 봐서는 남북한 체제경쟁이 극심했던 당시로선 매우 이례적인 조치로, 1980년대 후반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북방정책의 효시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6.23 선언의 진의는 북한과의 진정한 화해협력 추구가 아니었습니다. 이보다는 새로운 차원의 대북 외교전에 가까웠죠.실제로 당시 외무부는 박 대통령의 6.23 선언 직후 내부 보고서에서 ‘외교면에서 남북전쟁의 상황이 전개될 것임에 대비해 우리가 항시 북한에 비해 외교적 우위를 견지할 수 있는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적시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중소 간 적대관계를 활용, 공산권 내에서 북한의 지위를 약화시키고 국익에 유익한 방향으로 대공산권 정책을 추진한다’는 계획도 포함됐죠.북한도 6.23 선언의 이면에 있는 진의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선언 바로 다음 달인 그해 7월 남한은 공산권 국가 중 소련의 영향권에서 상대적으로 벗어나 있던 유고슬라비아에 통상사절단을 보냅니다. 북방정책의 닻을 올린 겁니다. 앞서 한국은 1971년 9월 KOTRA 사장을 단장으로 하는 경제사절단을 보내는 등 유고와의 경제교류에 공을 들였죠.하지만 유고에 무역대표부를 개설해 교역을 시작하려고 한 시도는 결국 실패합니다. 북한의 부탁을 받은 중국의 방해 공작으로 유고 정부가 사소한 사항을 갖고 트집을 잡아 협상을 좌초시켰기 때문입니다. 남북한이 상대방의 외교적 입지가 넓어지는 걸 막기 위해 끊임없이 견제하는 일이 계속 벌어진 겁니다.사실 6.23 선언이 발표된 1973년은 한국 외교사에서 ‘좌절의 해’로 기록돼 있습니다. 정부의 온갖 외교전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그해 4월 28일 비정부간 국제기구인 국제의회연맹(IPU)에 이어 5월 18일 세계보건기구(WHO) 가입에 연이어 성공했기 때문입니다.특히 북한의 WHO 가입은 북한이 건국 이후 처음으로 유엔체계에 편입됐다는 점에서 남한에 뼈아픈 것이었죠. 한국전쟁 발발 이래 미국의 입김으로 남한만이 특권적으로 누려온 유엔 옵서버(observer) 지위를 상실하게 된 겁니다. 이에 따라 북한은 1973년 이후부터는 유엔에서 남한과 거의 대등한 위치에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이 같은 당시 정황으로 볼 때 6.23 선언이 북한의 국제사회 진출을 봉쇄할 수 없었던 현실을 감안한 수세적 정책 전환이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정부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전격적으로 제안해 북한에 역공을 가하는 동시에, 북방외교로 외교공간을 넓히려고 했다는 겁니다.미중 데탕트와 한국의 안보위기이제 처음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 한국에 안보위기를 가져온 미중 화해를 들여다 보겠습니다.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6.23 선언과 동시에 북한에 대한 외교전에 나선 건 미중 데탕트라는 국제정세 변화가 시발점이었습니다. ‘미국과 중국이 화해하면 한반도에 안정이 찾아오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중국과의 화해 무드로 나아간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 가능성이 낮아졌다고 보고,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했기 때문입니다.하지만 1960, 70년대 북한의 각종 무력도발은 끊이지 않았죠. 1968년 1월 북한군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휴전선을 넘어 남한에 침투한 1.21 사태가 대표적입니다. 남북한 체제경쟁이 극심하던 당시 최고 권력을 제거하려는 이른바 ‘참수 작전’에 나설 정도로 남북관계가 험악했던 겁니다.게다가 박정희 정부는 소련제 탱크와 순항미사일, 미그21 전투기 등을 보유한 북한의 당시 군사력이 남한을 압도하고 있다고 봤습니다. 북한에 대한 위협인식에 있어 미국과 한국이 서로 큰 차이를 보였던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한미군 일부를 철수하겠다는 미국의 정책방향을 한국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고, 이는 결국 대북한 외교전과 더불어 자주국방 강화로 이어지게 됩니다.한미동맹의 균열은 1.21 사태 이틀 뒤 터진 북한의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1.21 사태에 대한 한국 정부의 보복 공격 주장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미국이 자국 해군 병사들이 납치되자 영해 침입을 사과하는 등 신속한 대응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당시 박정희는 푸에블로호 사건을 1.21 사태와 연계해 대응하고자 했지만, 미국은 남한을 배제한 채 북한과 단독협상을 벌였죠. 미국의 이런 일방적인 행동은 박정희의 자주국방 의지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습니다.무엇보다 한국 정부에 큰 충격을 안긴 건 닉슨 행정부의 주한미군 감축이었습니다. 한국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1970년 5월 29일 멜빈 레어드 미 국방장관은 “주한미군 일부 철수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철수는 점진적으로 추진될 것이고, 1개 사단 이하 병력부터 철수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결국 이듬해 6월 말까지 주한미군 1만8000명이 감축되면서 극도의 안보불안을 느낀 박정희는 절치부심 끝에 핵개발을 비롯한 자주국방의 길을 걷게 됩니다.닉슨 행정부는 주한미군 감축에 그치지 않고 북한이 극도의 무력도발을 일삼는 상황에서도 한국 정부에 북한과의 대화를 압박합니다. 중국과의 화해를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현상유지(status quo)를 실현하고자 한 겁니다. 이에 박정희는 1970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을 발표하며 의미 심장한 메시지를 발신합니다.“민주주의와 공산독재 중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게 할 수 있으며, 그럴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회인가를 입증하는 개발과 건설과 창조의 경쟁에 나설 용의는 없는가를 (북측에) 묻고 싶은 것입니다.”매우 단도직입적인 어조의 이 발언 속에는 북한과 대화를 추구하되, 남북 체제경쟁에서 남한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강한 확신이 담겨있습니다. 닉슨의 대화 압박에도 박정희는 무력통일을 포기하지 않은 북한을 진정한 화해협력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남북한 체제경쟁에서 이겨야 할 대상으로 봤죠. 이것이 3년 뒤 6.23 선언을 발표하면서 박 대통령이 대북 외교전에서 승리를 재외공관에 주문한 배경입니다.사실 박 대통령이 북한과의 대화에 나선 건 닉슨 행정부의 압력과는 별도로 전략적인 이유도 있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1970년대 고도 경제성장이 본격화됐지만, 자주국방 강화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시간을 벌고 북한의 침략을 지연시킬 목적으로 박 대통령이 남북대화를 추진했다는 겁니다. 박 대통령은 1971년 남북대화에 나서면서 참모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아무리 적의를 가진 사람이라도 그의 한쪽 손을 붙들고 있으면 그가 나를 칠지, 안 칠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박정희 시대 안보위기를 가져온 미중 화해 구도는 최근 미중갈등으로 돌아섰습니다. 미중갈등이 북한의 핵위협과 맞물려 한국의 안보불안을 키우고 있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북중에 대한 위협인식을 매개로 한미동맹이 굳건해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입니다.다만, 올 11월 미국 대선에서 동맹체제를 경시하는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셈법이 복잡해질 수 있는 것이 우려됩니다. 이 경우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해 자주국방 강화를 결단한 박 대통령 사례에서 보듯, 특단의 안보대책을 준비해야하지 않을까요.[참고 문헌]-장덕준 <박정희 시기 대륙지향 외교의 배경과 특징> (2019년·중소연구 43권 2호)-신종대 <남북한 외교경쟁과 ‘6.23 선언’> (2019년·현대북한연구)-마상윤 <미중관계와 한반도- 1970년대 이후의 역사적 흐름> (2014년·역사비평)-마상윤·박원곤 <데탕트기의 한미 갈등: 닉슨, 카터와 박정희> (2009년·역사비평)-마상윤 <미완의 계획: 1960년대 전반기 미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 논의> (2003년·한국과 국제정치)“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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