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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감 환자가 급증하고 있지만 백신 무료접종 대상인 12세 이하 어린이 4명 중 1명은 예방접종을 받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초등학교 고학년 어린이 10명 중 4명이 미접종 상태였다. 9일 질병관리본부 인플루엔자(독감) 국내접종현황 집계에 따르면 11월 마지막주(23∼30일) 12세 이하 어린이 전체 접종률은 73.5%로 여전히 26.5%가 접종을 받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6∼35개월 영아 접종률이 86.1%로 가장 높았고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접종률이 떨어져 36∼59개월은 80.1%, 60∼83개월은 76.3%, 7∼9세는 71.8%를 기록했다. 초등학교 4∼6학년에 해당하는 10∼12세는 접종률이 61.0%였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국내 조현병 환자의 범죄율은 일반인의 5분의 1 수준이지만 살인을 저지르는 비율은 일반인의 5배가 넘는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김민주 교수 연구팀은 2012∼2016년 경찰청 범죄통계 자료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를 바탕으로 조현병 환자의 범죄율을 비교 분석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5일 밝혔다. 이 연구는 국제학술지 ‘BMC 정신의학’ 최신호에 실렸다. 조현병은 환각 환청 망상에 시달리거나 사고 감정 지각 등 인지 기능에 광범위한 이상을 보이는 정신질환이다. 김 교수 팀 연구에 따르면 국내 조현병 환자가 범죄를 저지르는 비율은 2012년 0.72%에서 2016년 0.90%로 소폭 늘었지만 국내 전체 범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1%로 큰 변화가 없었다. 일반인 범죄율과 비교하면 5분의 1 수준이었다. 하지만 살인을 저지르는 비율은 2016년 기준 0.5%로 일반인(0.1%)의 5배에 달했다. 방화와 약물 관련 범죄율도 각각 1.7%, 5.3%로 일반인(0.2%, 1.6%)보다 8.5배, 3.3배 높았다.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최근 프로축구 K리그 인천 유나이티드의 유상철 감독이 췌장암 투병 중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췌장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자라고도 불리는 췌장은 길이 15cm가량의 가늘고 긴 장기로 위(胃)의 뒤에 있다. 크기는 작지만 소화효소를 만들어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같은 영양분의 소화를 돕고 인슐린 글루카곤을 포함한 여러 호르몬을 분비해 혈당을 조절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췌장 안에는 이런 소화액과 분비물이 지나가는 췌관이 있는데 주로 이곳에 종양이 발생해 췌장암으로 진행한다. 췌장암은 다른 암에 비해 환자 수가 적고 발생률도 낮은 편이다. 하지만 발병 5년 내 생존율이 5% 전후에 불과할 정도로 사망률이 높다. 췌장암은 증상이 미미한 ‘침묵의 암’이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거의 증상이 없다. 있다 해도 복부나 등 쪽의 통증, 체중 감소, 소화 장애 등 다른 가벼운 질환과 증상이 유사해 지나치기 쉽다. 종종 변비를 겪거나 구역질, 쇠약감, 식욕부진, 우울증, 심하게는 위장관 출혈, 정맥염 증상까지 보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암 검사로 잘 알려진 종양표지자(腫瘍標識子) 혈액검사(CA19-9·CEA)도 췌장암의 경우에는 진단 정확도가 높지 않다. 그나마 특기할 만한 증상은 황달이다. 췌장의 종양이 담즙의 흐름을 막아 혈액 내 빌리루빈 수치가 높아지면서 발생한다. 피부와 눈의 흰자위가 노란색으로 변하고 피부 가려움증이 생기거나 회색 대변, 진한 갈색이나 붉은색 소변을 볼 수 있다. 췌장암 환자의 약 80%가 이런 황달 증상을 보인다. 유 감독도 황달로 병원을 찾았다가 췌장암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선 증상들이 나타난다면 즉시 췌장암 여부를 확인해 보는 게 좋다. 진단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복부초음파와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MRI)으로도 종양을 찾아낼 수 있지만 종종 위장관 가스에 가리거나 다른 염증과 감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가장 정확한 진단법은 내시경을 십이지장까지 삽입해 직접 조영제를 주입하고 췌관을 관찰하는 내시경적 역행성 담췌관 조영술(ERCP)이다. 필요에 따라서는 췌관(이자관) 안에 기구를 넣어 조직검사를 할 수도 있다. 췌장암은 발생 원인이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아 별다른 예방수칙이 없다. 다만 흡연과 음주, 고칼로리 식사, 화학물질 노출과 관련성이 높다는 보고가 있어 이런 위험요인은 피하는 것이 좋다. 평소 당뇨가 있거나 가족 중에 췌장염, 췌장암 환자가 있는 사람도 발병률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경우에는 별 증상이 없더라도 6개월∼1년에 한 번 정기검진을 받아야 한다.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최근 프로축구 K리그 인천 유나이티드의 유상철 감독이 췌장암 투병 중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췌장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자라고도 불리는 췌장은 길이 15㎝가량의 가늘고 긴 장기로 위(胃)의 뒤에 있다. 크기는 작지만 소화효소를 만들어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같은 영양분의 소화를 돕고 인슐린 글루카곤을 포함한 여러 호르몬을 분비해 혈당을 조절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췌장 안에는 이런 소화액과 분비물이 지나가는 췌관이 있는데 주로 이곳에 종양이 발생해 췌장암으로 진행한다. 췌장암은 다른 암에 비해 환자 수도 적고 발생률도 낮은 편이다. 하지만 발병 5년 내 생존율이 5% 전후에 불과할 정도로 사망률이 높다. 췌장암은 증상이 미미한 ‘침묵의 암’이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거의 증상이 없다. 있다 해도 복부나 등 쪽의 통증, 체중 감소, 소화 장애 등 다른 가벼운 질환과 증상이 유사해 지나치기 쉽다. 종종 변비를 겪거나 구역질, 쇠약감, 식욕부진, 우울증, 심하게는 위장관 출혈, 정맥염 증상까지 보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암 검사로 잘 알려진 종양표지자(腫瘍標識子) 혈액검사(CA19-9·CEA)도 췌장암의 경우에는 진단 정확도가 높지 않다. 그나마 특기할 만한 증상은 황달이다. 췌장의 종양이 담즙의 흐름을 막아 혈액 내 빌리루빈 수치가 높아지면서 발생한다. 피부와 눈의 흰자위가 노란색으로 변하고 피부 가려움증이 생기거나 회색 대변, 진한 갈색이나 붉은색 소변을 볼 수 있다. 췌장암 환자의 약 80%가 이런 황달 증상을 보인다. 유 감독도 황달로 병원을 찾았다가 췌장암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선 증상들이 나타난다면 즉시 췌장암 여부를 확인해 보는 게 좋다. 진단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복부초음파와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MRI)으로도 종양을 찾아낼 수 있지만 종종 위장관 가스에 가리거나 다른 염증과 감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가장 정확한 진단법은 내시경을 십이지장까지 삽입해 직접 조영제를 주입하고 췌관을 관찰하는 내시경적 역행성 담췌관 조영술(ERCP)이다. 필요에 따라서는 췌관(이자관) 안에 기구를 넣어 조직검사를 할 수도 있다. 췌장암은 발생 원인이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아 별다른 예방수칙이 없다. 다만 흡연과 음주, 고칼로리 식사, 화학물질 노출과 관련성이 높다는 보고가 있어 이런 위험요인은 피하는 것이 좋다. 평소 당뇨가 있거나 가족 중에 췌장염, 췌장암 환자가 있는 사람도 발병률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경우에는 별 증상이 없더라도 6개월~1년에 한 번 정기검진을 받아야 한다.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그 집 넷째도 이제 많이 컸죠?” 어버이날 아침, 우리 집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특별한 만남이 이뤄졌다. 네 아이를 둔 워킹맘 두 명의 만남이었다. 한 명은 나, 다른 한 명은 어린이집 학부모로 만난 한 어머니였다. 마침 연배도 비슷해서 진작부터 “한 번 꼭 보자”고 말을 주고받아 왔는데 해를 넘겨 이날에야 자리가 마련됐다. 다자녀 가정이야 찾아보면 어디나 있지만, 솔직히 네 자녀 이상은 잘 없다. 하물며 맞벌이까지 하는 집은 더 적다. 그래서 처음 이 어머니를 만났을 때 서로가 무척 신기했다. 더구나 나이까지 비슷하다니, 나도 주변에서 꽤나 젊은 엄마 축에 드는데 이래저래 희소가치가 큰 만남이었다. 사실 우리 아이들 어린이집(하난 졸업하고 둘은 다니고 있다)엔 다자녀 가정과 맞벌이 가정 자녀가 많은 편이다. 아마도 만3~5세(한국 나이 5~7세) 보육 기관으로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어린이집이기 때문일 것이다. 추첨을 통해 입소하는 유치원과 달리 어린이집은 지원순서와 우선순위 조건에 따라 입소가 결정된다. ‘맞벌이’ ‘다자녀’는 모두 가산점이 붙는 입소 조건이다. 그래서인지 지난해 우리 첫째가 다녔던 반만 해도 다자녀 가족 자녀가 서너 명은 됐다. 웬만해선 어디서 자녀수로 밀리지 않는 나조차 이곳에서는 ‘차석’이었다. 첫째와 같은 반이었던 친구 중에 형제자매가 다섯인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워킹맘 중에 최다 자녀를 가진 건 아마도 나와 그 어머니였을 것이다. 사정을 알고부터 그 집 첫째 아이를 유심히 지켜보니 참 의젓하고 씩씩했다. 역시 다자녀 맞벌이 가정 맏이답달까. 이 아이도 우리 첫째와 함께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종종 픽업을 하러 갔다가 마주치면 돌봄교실로, 도서관으로,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 의연히 잘 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한 번은 교문을 혼자 나서는 그 집 아이와 마주친 일이 있다. 우리 집 첫째 방과후학교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는데, 내게 꾸벅 인사하고 지나가기에 “○○야, 어디 가니? 아줌마랑 같은 방향인 거 같은데 △△ 나오면 함께 걸어갈까?” 하고 물었다. 아이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 언제 나와요?” 했다. 한 10분 뒤일 거라고 답하자 “음, 아니에요, 저 먼저 갈게요” 하고 답했다. ‘학원 차가 20분 뒤 인근 아파트 단지 앞 정문으로 오는데 엄마가 전후로 10분 정도 오차가 있을 수 있으니 늘 미리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아이는 돌아서면서도 내게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 모습이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한지 곧장 아이어머니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었다. 8일 어머니와 두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눠보니 아이의 그런 의젓한 모습이 이해됐다. 어머니도 참 생각이 바르고 단단한 분이었다. 아이들 각자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것들은 엄격히 가르치되 일단 아이 손에 넘어간 것은 믿고 맡기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아이 하나하나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배려하는 세심함이 느껴졌다. 엄마가 항상 곁에 없어도 아이가 든든하게 느끼고 씩씩하게 행동할 만했다. 재미있었던 것은 나와 그 어머니, 두 네 자녀 엄마 사이에 의외의 공통점들이 있었던 점이다. 나는 첫째부터 지금까지 천 기저귀를 쓰고 있는데, 그 집도 천 기저귀를 썼다고 한다. 요새 다자녀 집은 물론이고 아이 하나인 집도 천 기저귀를 쓰는 집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일회용 기저귀보다 아무래도 번거롭기 때문이다. ‘출산 전 잔뜩 사놓았는데 막상 낳고 보니 도저히 쓸 엄두가 안 나서 다 처분했다’는 엄마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천 기저귀를 쓴다고 하면 다들 마치 전근대시대 어머니라도 본양 식겁한다. 한데 막상 써보면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 아이가 변을 본 기저귀를 모아 물에 담가두었다가(대변 기저귀는 대변을 털고 물로 씻어낸 뒤 담가놓는다) 세탁에 앞서 한 번만 물에 헹군 뒤 세탁기에 넣고 돌리면 끝이다. 그렇게 하루 한 번씩만 빨래하면 매일 쓰레기통을 가득 채우는 일회용 기저귀 쓰레기를 확 줄일 수 있다. 그 어머니도 세탁기를 이용해 비교적 손쉽게 천 기저귀를 썼다고 한다. 아이들 모두에게 모유 수유를 한 것도 똑같았다. 사실 아이를 여럿 키우며 수유를 병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래도 일정한 수유 시간을 맞추기 쉽지 않고 피로 때문에 모유량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 모유 수유를 그만두게 된다. 하지만 난 남들이 말하는 시간 간격에 구애받지 않고 틈나는 대로 수유했다. 수유하는 동안에도 좀 쉴 수 있도록 누워서 젖을 물리기도 하고, 들쭉날쭉한 모유량에도 너무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그 덕에 아이들 모두 6개월 이상 모유 수유를 지속할 수 있었다. 그 어머니도 모유 수유에 대한 ‘강박’이 없었기에 되레 더 편하게 모유 수유를 할 수 있었던 듯했다.물론 어떻게든 모유 수유를 하는 게 옳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하고 싶은데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그만’둔다고 하는 산모들이 많기에 나와 같은 그 어머니의 마음가짐이 반가웠다. 그 어머니는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막상 해보면 생각했던 것보단 어렵지 않은데 다들 너무 힘들게 생각하시는 거 같아요” 했다.어찌 보면 그 말은 모든 육아에 적용되는 게 아닐까. 요새 미혼남녀들을 만나면 모두 결혼이 무섭고 육아는 더 무섭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나 미디어에서 나오는 정보에 육아에 대한 비관적인 소식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힘들다’ ‘어렵다’ ‘지친다’ ‘내 삶이 없다’ ‘또 낳는 건 엄두가 안 난다’ 등. 그걸 긍정적으로 헤쳐 나가고 가급적 쉽게 풀어가는 노하우,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는 찾기 어렵다. 힘든 걸 공감해주는 것도 어느 정도가 있지, 모두 ‘힘들지?’ ‘힘들겠다’만 하니까 더 기운이 빠진다. 비판만 하긴 쉽다고, 왜 ‘이렇게 해보니 괜찮았어요’ ‘할 만해요’ ‘할 수 있어요, 힘내세요’와 같은 말은 들리지 않을까. 우리에게 더 필요한 이야긴 사실 그런 건데. 사회적 기반과 시스템도 그것대로 개선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육아에 임하는 부모의 ‘유리멘탈’을 조금은 단단히 만들어줄 수 있는 조언, 격려도 많아지면 좋겠다. 휴직 전 나와 같이 네 아이를 키우는 보건복지부 여자 과장님을 만난 적이 있다. 40대 중후반일 그 과장님이 그때까지 일을 놓지 않고 병행하시는 모습, 매일 아이들과 어떻게 지내고 휴일엔 어딜 놀러 간다는 소소한 일상 이야기만으로도 큰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아이 친구 어머니와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친정과 시댁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네 아이를 키워야 하는 빠듯한 현실에서 탄력근무제와 부부간 육아 분담을 통해 공백을 메우고, “여자는 역시…”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아이와의 시간을 조율해가며 일도 놓지 않는 당찬 모습이 내게 큰 여운을 남겼다. 부모란 말이 ‘뿌듯함’보다는 ‘버거움’으로 다가오는 요즘이다. 마침 어버이날 있었던 특별한 만남 덕에 부모의 책임감과 역할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올해 어버이날에도 난 세 송이의 카네이션을 달았다(내년엔 막내까지 어린이집에 가니까 네 송이가 달리겠다). 카네이션 세 송이의 무게는 묵직했지만 덕분에 옷은 예쁜 ‘꽃밭’이 됐다. 부모란 존재도 육아도 모두 그런 양면성이 있을 테다.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육아가 힘들지만 가급적 ‘할만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려 한다. “그냥 부딪혀보면 돼.” “다 힘들어도 했어.” 이런 ‘꼰대의 훈수’ 같은 게 아니다. 그저 힘들다고 지레 겁먹지 않게끔, 자꾸만 더 위축되지 않게끔 북돋워 주려는 것이다. 힘들다는 이야기는 너무 많으니까. 나도 다른 엄마들을 보면서 그랬듯 누군가 나를 보면서 용기를 얻기도 했으면 좋겠다. 나는 누가 말하듯 ‘슈퍼 맘’도 ‘슈퍼 우먼’도 아니고 그저 평범하고 눈물도 많은 워킹맘이다. 때론 실수도 하고 엎어지지만 즐겁게 네 아이를 키우려는 내 모습이 또 누군가에겐 힘이 되기를 바라본다.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생지옥이 이런 거구나(싶었다).” 몇 달 전 친한 지인이 임신 수개월 차에 불법 낙태 수술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싱글’이었던 것도, 아이를 키울 여력이 안 된 것도 아니었다. 뱃속 아기의 건강에 큰 문제가 있었다. 어렵게 가진 아기였지만 출산 후 생존확률이 희박했기에 떠나보내야만 했다. 지인은 직접 발품을 팔며 자신의 아이를 ‘죽여줄’ 병원을 찾아다녔다. 그야말로 생지옥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취재하며 만난 한 여성 중에도 비슷한 이유로 낙태 수술을 받은 이가 있었다. 그녀의 아기는 초음파 결과 심장과 방광에 구조적 문제가 있어서 태어난 뒤 곧장 대수술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생존확률은 절반이었고, 만약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다 해도 아이가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다. 위 두 경우 모두 현행법상 합법적 낙태는 불가하다. 결국 두 여성 다 불법을 묵과해준다는 병원을 직접 수소문해 값비싼 비용을 내고 수술을 받았다. 당연히 국가로부터 아무런 보장도, 보호도 기대할 수 없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1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결정이 났을 때 제일 먼저 그들이 떠올랐다. 지난 수십 년간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이렇게 스스로를 위험으로 내몰아야 했을까.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란 말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낙태란 여성이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것, 자유롭게 결정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내 지인들처럼 절박하거나 피치 못할 상황에서 ‘선택 아닌 선택’을 한다. 그저 육아가 싫어서, 한때의 ‘불장난’을 처리하러 가볍게 낙태수술을 하는 사람은 외려 극소수일 것이다. 수술 자체도 만만한 것이 아니다. 후유증을 동반할 수 있고, 불법수술일 경우 가이드라인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그 피해가 더 클 수 있다. 미국 등 낙태를 널리 허용한 국가에선 이미 낙태 후유증을 다룬 연구가 많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실제 (불법)낙태를 경험한 지인에 따르면 “낙태나 출산이나 몸이 느끼는 부담은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여성 입장에서 낙태가 결코 손쉬운 선택이나 해결책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많은 여성들이 낙태를 합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그만큼 출산과 육아가 그들에게 힘든 상황이란 방증일 것이다. 하지만 낙태가 태아에 대한 일종의 ‘살인’이란 사실도 부인할 순 없다. 생명권이란 가장 근본적이고 소중한 가치다. 난 아직도 고등학교 성교육 시간에 본 낙태 영상의 끔찍함을 (무려 20년간!) 잊을 수 없다. 작은 생명이 자궁 안에 들어온 기계를 피해 발버둥치다가 결국 최후를 맞이하는 충격적인 영상이었다. 이런 것까지 보지 않더라도 산전검사에서 작지만 힘차게 박동하는 아기 심장을 보면 ‘태아는 생명체가 아니다’라는 말이 쉬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런 측면에서 그동안 낙태죄가 일부 부모에겐 아이를 지키는 방패막이 되어주었단 주장도 있다. 아이를 낳고 싶지만 주변의 반대가 심한 경우다. 실제 나도 자주 가는 맘(mom) 카페에서 ‘남편과 친정엄마가 모두 출산을 말렸지만 다행히 (법적으로) 중절이 가능한 몇 주째를 지나서 아이를 계속 품을 수 있었다’는 내용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이렇게 필요와 가치가 첨예하게 대립하기 때문에 낙태 허용범위는 어려운 쟁점이다. 개정 과정에서 면밀한 고찰과 의견 수렴이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의 신체 및 장기를 정밀검사하려면 시기적으로 임신 5개월 정도는 돼야 한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태아가 스스로 느끼고 움직이는 단계에 도달하기 때문에 단일생명, 인격체에 가까워진다. 해외연구에 따르면 21주 된 태아는 곧바로 출산해도 열에 한둘 생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밖에 여러 논란거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난 이번 헌재의 결정을 환영한다. 개정논의를 통해 음지에서 행해지던 수많은 낙태를 일부나마 양지로 끌어올릴 수 있을 거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실상 낙태는 국가로부터 방조·방기돼왔다. 불가피한 수요가 분명 존재하는데도 처벌조항만 있을 뿐 적극적인 단속은 없었다. 그 덕에 국가의 관리망을 벗어난 낙태 수술이 만연하면서 여성과 태아의 건강권만 더 위협받게 됐다. 어차피 수술을 해야 한다면 합법의 범주 안에 두고 안전하게라도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외려 그를 통해 무분별한 낙태가 줄어들지도 모르고. 위헌 선고가 내려진 날 학교를 다녀온 첫째가 뜬금없이 “엄마, 나는 나중에 절대로 낙태하지 않을 거야”라고 했다. 학교에서 선생님께서 낙태죄와 판결에 대해 설명해주신 모양이었다. 내가 “응, 하지만 낙태를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 하니 “왜? 아기를 낳아서 우리처럼 다 키우면 되잖아”라고 했다. 사실 딸의 말처럼 낙태를 하지 않고 잘 키울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제일 좋을 것이다. 내 지인의 사례와 같이 답이 없는 경우도 있지만 사회·경제적인 어려움은 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부모나 미혼부모들에 대한 육아지원, 장애아들의 복지향상, 사전 성교육 강화 같은 것들이다. 사실 이런 것들이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무조건 낙태하지 말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책임지지도 못할 아이를 낳는 건 엄마에게나 아이에게나, 그리고 그 사회에나 모두 큰 불행이다. 내년 12월 31일 어떤 결론이 나있을진 모르지만 앞서 헌법소원을 통해 폐지된 호주제, 간음죄처럼 모두가 진보라 평가할 수 있는 결과이길 바란다. 모체와 태아가 대립해야 하는 불행한 상황도 해소되어 있기를….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엄마! 저거 봐. 선생님이 아가가 밥을 잘 안 먹는다고 머리를 때렸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던 아이들이 내가 틀어놓은 뉴스를 보곤 소리쳤다. 아이돌보미가 아이를 학대해 논란이라는 내용이었다. 공개된 CCTV 영상은 충격 그 자체였다. 50대 아이돌보미 여성이 밥을 잘 먹지 않는다며 14개월 아기의 뺨을 때리고 소리를 지르거나 꼬집고 머리채를 잡는가 하면 발로 차기까지 했다. 영상을 보는 남도 이렇게 가슴이 철렁한데 부모는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을까. 우리 아이들도 무서운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엄마, 우리 집 돌보미 선생님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치?” 나는 아이돌보미 서비스의 오랜 이용자다. 둘째를 낳고 복직하기 전인 2015년부터 꾸준히 이용했으니 햇수로 벌써 4년차다. 내가 기자라는 ‘반(反)워라밸’ 직업과 다자녀 엄마라는 만만찮은 역할을 병행할 수 있었던 건 사실 이 서비스의 역할이 컸다. 어린이집과 친정의 도움이 미치지 못하는 대부분의 시간, 그 보육공백을 아이돌보미가 메워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져 여기저기서 몰매를 맞는 걸 보자니 그저 안타까운 마음이다. 솔직히 여러 보육 서비스 중 이만한 양질의 서비스가 없단 생각에 틈만 나면 아이돌보미를 홍보해왔다. 정부가 선발하지, 틈틈이 관리하지, 사설 육아도우미(베이비시터)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지…. 나처럼 여러 아이를 동시에 맡기는 경우엔 혜택도 더 크다. 두 아이를 함께 신청하면 이용금액의 25%, 세 아이면 33.3%를 감면해주기 때문이다. 자녀수, 소득수준 등에 따라 정부로부터 추가지원도 받을 수 있다. 가장 지원폭이 큰 ‘가’ 형의 경우 본인부담액이 시간당 1447원(시간제 일반형·2012년 이후 출생아동)에 불과하다. 사설 도우미였다면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이다. 금액도 금액이지만 아이돌보미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정부가 보증한 육아도우미’라는 점일 것이다. 아이돌보미 선생님은 신원확인 등 정식 취업절차를 거쳐 교육을 받고 가정에 배치된 후에도 정기적으로 재교육을 받는다. 이용가정 모니터링도 한다. 나도 최근 아이돌보미 모니터 요원의 불시 방문을 받았다.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꼼꼼히 질문하며 확인하시는 모습을 보고 ‘역시 좋은 제도’라며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런데 이런 관리체계에도 불구하고 사건이 생기고 말았다. 학대 피의자는 아이돌보미 활동경력만 6년에 이른다고 한다. 그동안 수많은 교육과 점검을 거쳤을 텐데 모두 무사통과했다니 기존 관리시스템의 부실을 묵과할 순 없다. 비판하는 여론이 들끓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정부라고 마냥 손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이런 위험에 대비해 아이돌보미를 자격제로 전환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었다. 지금처럼 주어진 수업만 수료하면 돌보미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공식적인 절차와 시험을 거쳐 자격증을 획득하도록 하고 보다 엄정히 관리하겠다는 내용이다. 한데 이렇게 교육과 관리를 강화하면 자연히 들어가는 비용도 늘어난다. 안 그래도 최저임금 인상 등에 발맞춰 6000~7000원 수준이던 아이돌보미 시간당 이용금액이 올해 9650원으로 훌쩍 뛴 참이다. 내 경우 휴직으로 소득이 줄면서 정부금액을 일부 지원받게 됐음에도 오히려 내는 돈이 지난해보다 더 늘었을 정도다. 지금보다 비용이 더 오른다면 시간당 급여가 만 원꼴인 사설 도우미와 별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 결국 방법은 국가가 늘어나는 비용을 대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도 아이돌보미에 대한 지원은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다. 올해부터 정부지원대상이 확대되고 지원시간이 600시간에서 720시간으로 늘긴 했지만 실사용자 입장에서는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정부지원 대상인 ‘다’ 형조차 본인부담금이 시간당 8202원(시간제 일반형)으로 지원을 못 받는 ‘라’ 형(9650원)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일부 감면을 받고 있는 나도 여전히 매달 200만 원가량을 아이돌보미 비용으로 지출하고 있다. 사설 도우미를 이용할 때보다는 저렴하지만 월급쟁이 입장에서 적지 않은 금액이다. 이 비용이 더 오른다면 아마도 나를 비롯해 많은 이용가정이 사설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 가끔 정부가 내놓은 여러 현금지원정책들을 보면 ‘차라리 저 돈으로 아이돌보미나 어린이집을 더 지원해주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임신 시 병원비 지원, 출산 시 지원금 지급, 아이에게 매달 양육비 지원, 병원 진료 시 의료비 경감 등등 모두 좋지만 그 어느 것도 어린이집이나 아이돌보미처럼 내게 ‘시간’을 벌어다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부모들은 그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일을 하거나 자기계발을 하고 삶의 재충전 기회를 갖기 위해. 지난해 내가 인터뷰 했던 보육 전문가도 이런 말을 했다. “이 시대의 부모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다.” 우리 집 아이돌보미 선생님은 2015년 첫 이용부터 지금까지 4년 넘게 오고 계신 분이다. 서울 금천구 같은 극한사례가 아니더라도 이런 저런 이유로 돌보미 부침을 겪는 집들이 많은데 나는 천운으로 처음부터 좋은 선생님을 만났다. 종종 우리 집에 놀러오는 사람들도 ‘그때 그 선생님이 아직도 계신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내가 정말 전생에 우주라도 구해서 오복(五福) 중 가장 귀하다는 ‘이모복’을 타고난 것인지도 모르지만, 난 내 경우가 그저 아이돌보미가 잘 운영됐을 때의 모범사례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잘 굴러가기만 한다면 다른 아이돌보미 이용자들도 나처럼 다자녀를 낳고 기자도 하는 ‘언감생심(!)’ 꿈을 꿔볼 수 있다. 이번 금천구 사건이 이렇게 좋은 아이돌보미 시스템을 개선하는 긍정적인 계기가 되길 바라본다. 그러자면 그저 한 사건의 피의자를 처벌하고 제도의 허점을 비판만 할 게 아니라 실제 예산과 인력을 늘려 실사용자들 입장에서 체감도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우리 땐 안 이랬는데, 요샌 정말 숨을 쉴 수가 없어요.” 지난 한 주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첫째 하교를 위해 교문 앞에서 기다릴 때면 삼삼오오 모인 학부모들이 모두 마스크 속에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옛날엔 하늘 진짜 파랬는데…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우리 아이들이 불쌍해요.” 온 나라가 미세먼지로 들썩인 한 주였다. 네 영·유아의 엄마인 나도 예민한 일주일을 보냈다. 며칠 켁켁 기침하던 막내가 결국 기관지염에 걸렸기 때문이다. 의사는 “(증상이 심해진 건) 미세먼지 때문일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몇 년 간 봄철 감기로 수없이 병원을 찾았지만 이런 진단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 과거부터 함께 해온 미세먼지 “근데 그거 아세요? 미세먼지요, 사실 우리 어릴 때는 더 안 좋았어요.” 이렇게 말하자 웬만해선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어주시는 친정엄마조차 곧장 반문하셨다. “무슨 소리야? 내 기억에 예전엔 하늘이 이렇게까지 뿌옇지 않았어. 네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엄마도 이럴진대,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십중팔구 비슷한 반응이 돌아온다. “말도 안 된다.” “그럴 리 없다.” “그저 네 생각 아니냐.” 하지만 내 말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정부 공식자료에 근거한 사실이다. 환경부가 매년 발간하는 대기환경연보에는 연도별 평균 미세먼지 측정치가 실린다. 도시별로 약간씩 들쭉날쭉하긴 해도 서울부터 부산까지, 전국 7대도시 미세먼지 수치가 거시적으로 꾸준히 떨어져온 걸 볼 수 있다. 서울의 미세먼지 농도만 해도 20년간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즉 ‘우리 아이들만 불쌍해 할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연표에 따르면 불과 20년 전, 즉 당신이 어리거나 젊었을 때 우리나라 미세먼지 연평균 농도는 중국 베이징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이제와 사람들이 느끼는 심각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착각인 걸까? 꼭 그런 건 아니다. 일단 과거보단 나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나라 대기질은 선진국과 비교해 썩 좋지 않다. 과거가 ‘매우 나쁨’이었다면 현재는 ‘덜 나쁨’ 정도랄까. 그리고 연평균 수치가 떨어져왔다 해도 겨울에서 봄 사이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고농도 미세먼지가 사라진 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특정한 이유로 농도가 치솟는 날은 있다는 뜻이다. 지난 일주일도 그런 날이었다(그리고 그런 날들이 요 근래 반짝 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과거엔 그런 날이 있어도 몰라서 지나쳤고, 현재는 알기에 지나칠 수 없게 된 게 아닌가 싶다. 어찌됐든 현재도 고농도 미세먼지가 발생하고 있는 건 사실이므로 그러려니 하면 그만이지만, 굳이 ‘과거에 미세먼지 농도가 더 높았다’는 사실을 짚고 가고픈 이유는 그래야 우리가 바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세먼지가 ‘갑자기 나타난 것’으로 아는 것과 ‘원래부터 있던 것’으로 아는 것의 차이는 크다. ● 중국 탓은 이제 그만 형제자매끼리 놀다 보면 폭력이 발생할 때가 있다. 다자녀 집은 말 그대로 ‘가지가 많아’ 바람 잘 날이 없다. 때린 아이는 꼭 하소연한다. 언니가 내 물건을 뺏어서…, 동생이 자꾸 나를 놀려서…(때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말한다. “너도 (때리는) 잘못을 했으면서 남 탓 하지 마.” 내가 잘 들어가는 한 온라인 카페에 요즘 틈만 나면 ‘중국을 규탄하는 청원에 동참해주세요’ 라는 글이 올라온다. 미세먼지가 ‘갑자기’ 심해진 이유는 중국 탓이기에 정부가 중국을 강력 규탄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중국을 포함한 국외발 미세먼지는 현재 국내 고농도 미세먼지 발생 시 50~80%의 기여율을 차지할 정도로 큰 문제다. 베이징에서 고농도 미세먼지가 발생하면 이틀 뒤엔 거의 틀림없이 우리나라 서울에도 비슷한 농도의 미세먼지가 나타날 정도로 기여도는 명확하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미세먼지는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간단히 생각해봐도 한반도는 편서풍 지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평상시 중국, 몽골 등 국외발 미세먼지가 꾸준히 유입될 수밖에 없다. 지금 들어온다면 수십 년 전에도 들어왔을 것이다. 여기서 과거 우리나라 연평균 미세먼지 수치가 훨씬 높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왜 그리 수치가 높았을까? 중국 등 국외로부터 지금보다 더 많은 미세먼지가 들어왔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마도 당시에는 국내 미세먼지 발생량 역시 지금보다 많았을 것이다. 일례로 자동차만 해도 불과 10여 년 전 국내서 판매된 경유차는 현재 생산차의 5배 넘는 미세먼지를 뿜었다. 당시엔 배출가스 규제가 낮아 그게 허용됐기 때문이다. 지금은 규제가 강화돼 그런 차는 판매도, 운행도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난 수십 년간 공장 굴뚝에도 각종 배출기준이 더해졌고, 사업장 단속이 강화됐으며, 노천소각도 거의 사라졌다. 즉 국내 발생원이 크게 줄었다. 국내 발생량이 준 대신 중국의 배출량은 늘면서 상대적으로 외국 미세먼지가 차지하는 비율이 상당히 높아졌다. 높은 미세먼지 기여율을 온전히 중국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이유다. 국내에서 만들어지는 미세먼지 양은 여전히 상당하다. 더 줄일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지난해 발표한 국립환경과학원 연구에 따르면 2015년 서울 미세먼지의 6%, 대전 미세먼지의 18%가 발전소가 밀집한 충남에서 왔다고 한다(이른바 ‘충남발 미세먼지’랄까). 당진에 있는 제철공장 한 곳에서 단 하루 동안 배출하는 대기오염물질만 55t이다. 1년이면 2만t. 어마어마한 양이다. 이런 배출량을 줄이고, 화력발전을 친환경발전으로 대체하고, 각종 불법배출을 잡고, 미세먼지 배출저감시설을 개선하는 등 우리가 할 일이 많다. 다른 나라 탓 먼저 할 게 아니라 일단 ‘우리 잘못’부터 고쳐야 하지 않을까. 시민 개개인도 마찬가지다. 차를 적게 몰고, 전기를 아껴 쓰고, 일회용품 사용도 줄이고(우리나라 쓰레기 대부분은 소각된다). 이 모든 것들이 미세먼지 저감으로 이어진다. 한편 중국도 미세먼지 저감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때문이 아니라 당장 본인들이 나쁜 공기에 질식해 죽겠기 때문이다. 한·중 양국의 저감 노력도 꾸준히 진행 중이다. 정부가 중국 눈치를 보느라 소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비춰지는데, 무턱대고 남의 나라에 “공장 돌리지 마!” 할 수는 없으니 환경원조와 조사지원을 하며 저감을 유도하는 게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 ● 실내 미세먼지에도 관심을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실내 미세먼지에 관한 것이다. 얼마 전 아이 어린이집 운영위원회 회의가 있었다. 원장선생님께서는 “겨울~봄철에는 미세먼지 때문에 많은 실외활동을 실내활동으로 대체하고 있다”고 하셨다. 잘못했다간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치기 때문에 아예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한다. ‘미세먼지 나쁜 날 아이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기에 체육관이나 교실로 들어가게끔 전화를 넣었어요.’ ‘미세먼지 농도 높다고 해서 바깥에 나가는 대신 아이들 데리고 키즈카페에 다녀왔어요.’ 미세먼지 농도가 높은 날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실내로 피신’했다는 내용의 글이 자주 올라온다. 아이들이 실외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해당 기관에 항의를 했다는 내용도 많다. 물론 미세먼지가 나쁜 날 나가지 않는 건 옳다. 근데 과연 실내에 들어가면 안전할까? 사실 일반적으로 실내 미세먼지 농도는 바깥보다 높다. 밀폐된 공간이라 같은 미세먼지 양에도 밀도가 더 높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람까지 많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체육관이나 교실, 키즈카페 같은 곳들이다. 더구나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외부 미세먼지까지 유입된다. 체육관, 역사처럼 넓은 공간은 정화시키는 것도 쉽지 않다. 환경부 실시간 자동측정소 자료에 따르면 황사가 왔던 2015년 2월 23일 인천지하철 1호선 작전역 안의 미세먼지 농도는 황사주의보 수치보다도 더 높았다. 그런데 미세먼지 높은 날 어린이집 안에서 뛰고 던지는 체육활동을 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농도는 바깥 미세먼지에 준하는 수치가 될 것이다. 물론 실내외 미세먼지 구성에 차이가 있고 실내는 어떻게든 공기청정기를 돌려 정화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긴 하지만, 기계를 충분히 가동하지 않는다면(가장 센 강도로!) 먼지 양은 실내라고 별달리 나을 게 없다. ‘그럼 어쩌란 말이야??’ 그저 실내로 피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니 실내 정화 노력도 충분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미세먼지가 나쁜 날이라도 가정에서 요리나 청소를 할 때는 반드시 환기를 하라고 권한다. 청소도 마찬가지다. 바닥이나 가구에 먼지가 많다면 자연히 공기 중 먼지 농도도 높아진다. 진공청소기가 만들어낼 2차 먼지가 불안하다면 밀대청소를 하면 된다. ● 과도한 공포는 자제하고 해결에 집중을 “올해는 왜 이렇게 틈만 나면 ‘나쁨’이지?” 실제 올 1~2월 미세먼지 나쁨일수가 예년 대비 2배 늘었다고 한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난해 미세먼지 나쁨 기준이 크게 낮아졌기 때문이다. 예전이면 ‘보통’이 떴을 날도 이젠 ‘나쁨’이 되었다는 뜻이다. 덕분(?)에 하루걸러 나오는 나쁨 예보로 온 국민이 미세먼지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 되었지만, 대기오염의 심각성과 개선 필요성을 환기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것 같다. 우린 그동안 대기질에 대해 너무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단 모두 너무 공포에 떨면서 지나치게 스트레스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없던 것이 새로 생긴 것도 아니고 당장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고농도가 발생하면 마스크를 쓰고 외출을 자제하되 평소 우리가 해야 할 것들(저감노력)을 차분히, 그리고 꾸준히 해나가야 할 것이다. 환경부를 출입했던 기자이기에 앞서 네 아이의 엄마인 나도 누구보다 미세먼지 문제의 해결이 절실하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출산을 한 달가량 앞둔 지난해 7월 한 대학 동기가 연락을 해왔다. 오랜만의 연락에 반가움도 잠시,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 시간 돼?” 하는 친구의 인사말 뒤에 이어진 건 예상치 못한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아이가 많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비교적 일찍 결혼한 친구는 벌써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있었다. 첫째는 아들, 둘째는 딸, 번듯한 직장에 사랑하는 부인까지, 누가 봐도 부러워 할 다복한 가정이었다. 메신저 속 프로필 사진에서 활짝 웃고 있는 막내딸은 이제 막 돌을 넘겼다고 했다. 한데 그 갓난아기에게 상상치도 못한 불행이 닥쳤다. 어느 날 아이의 심장이 돌연 멈춘 것이다. 헐레벌떡 달려간 응급실에서 심폐소생 후 받은 진단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특발성 확장성 심근증.’ 확장과 수축을 반복해야 할 심장근육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수축하지 않으면서 심장박동이 멈춰버리는 질환이었다. 10만 명 중 한두 명만 걸리는 병인데 특히 소아에게는 흔치 않은 희귀난치병이라고 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여느 애들과 다름없던 아이가 졸지에 희귀난치병 환아가 된 현실에 기가 막혔을 테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당장 심장에 인공장치(심실보조장치)를 달아야 했다. 그런데 그 비용이 또 어마어마했다. 1회 수술에만 1억 원, 이후 유지비는 분기별로 3000만 원이 들었다. 매달 1000만 원이 드는 장비라니, ‘돈 먹는 하마’가 따로 없었다. 맞벌이라지만 평범한 회사원인 친구네 부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친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게 연락했을 터다.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되는 장치라고 하는데, 혹시 보험 등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할지 알기에 일단 “알아보겠다”고 했다. 마침 보건복지부와 병원을 출입하고 있던 터라 물어볼 창구를 알고 있었다. 먼저 치료 전반에 대해 정확히 알기 위해 아이 담당의사에게 연락했다. 전문가가 전하는 상황은 친구에게 들은 것보다 한층 심각했다. 아이가 달아야 할 인공장치는 ‘베를린하트’라는 이름의 소아용 심실보조장치로 전 세계에서 유일한 것이라 했다. 한 마디로 ‘독점’ 장비란 뜻이다. 소아심장환자 자체가 극소수일 테니 관련 치료기기가 희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더구나 독점이라면 비용은 부르는 게 값일 수밖에 없다. 이미 보험등재신청은 된 상태였다. 하지만 심사가 빠르게 진행되긴 어려워보였다. 당장 등재심사대에 오른대도 다음 달인데, 아직 심사대에 오르지 않았다면 최소 그 다음 달까지 두 달간 엄청난 치료비를 감당해야 했다. 사실 가장 좋은 치료법은 건강한 심장을 이식받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소아에게는 그마저 쉽지 않다. 어린아이에게는 어린아이의 심장이 필요한데, 사고사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심장을 기증하는 아이가 1년에 몇이나 되겠나. 그래도 혹시 몰라 정부 장기기증 통계를 확인해봤지만 역시나 친구 딸이 기증받을 수 있는 만 5세 미만 영·유아 심장은 연중 10개도 되지 않았다. 앞서 줄 서있을 환아들을 생각하면 사실상 이식 가능성이 없는 셈이었다. 자연 치유될 때까지 심장에 인공장치를 달고 근근이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마저 희망적이지 않다는 점이었다. 담당의사는 “작은 몸으로 버티기에는 아주 큰 수술이고 치료예요. 아이가 얼마나 견뎌줄지 모르죠”하고 걱정을 털어놨다. 그러고 보니 고작 돌 지난 아기였다. 폐렴 하나에도 숨이 오락가락하는 게 아기들이다. 우리 둘째가 생후 6개월 무렵 가와사키병(영·유아에게 발병하는 급성 열성 혈관염)에 걸려 입원했을 때 담당의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현재 이 다인실에 있는 아동 중 가장 위중한 환자가 바로 어머님 아기입니다.” 폐렴이나 가와사키병에만 걸려도 그럴진대 하물며 심장 이상이야…. 이곳저곳 연락을 돌린 나는 전보다 한층 더 비관적인 마음이 들었다. 친구에게 “관련 기획기사라도 고민해보겠다”고 했지만 사실 막막했다. 이미 보험등재 신청까지 올라갔다니 그저 빨리 등재되길 기도하는 것만이 내가 할 일인 듯싶었다. 친구 부부라고 이런 상황을 몰랐을까. 그래도 둘은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다. 생업과 간병을 병행하면서 언론사 이곳저곳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제보하고 SNS와 온라인 카페 등 각종 창구를 통해 아이의 사연을 알렸다. 청와대 게시판에 청원도 올렸다. 소아 심장질환자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이고 유일한 장치가 급여대상에 들어가지 않는 건 부당하다는 내용이었다(나는 해당 청원 링크를 몇몇 온라인 카페와 메신저 단체 채팅방에 퍼 날랐다). 부부의 노력 덕인지 제법 많은 언론에서 이 내용을 기사화했다. 비록 큰 도움은 줄 수 없었지만 나는 틈나는 대로 아이 안부를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매번 연락할 때마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감안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다행히 친구의 답은 ‘수술 잘 끝났어’ ‘중환자실에서 회복 중이야’ ‘(보조장치) 보험 등재가 잘 진행 중이래’ 같은 것들이었다. 지난해 9월에는 ‘아이 상태가 좋아져 일반병실로 옮기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엄마, 아빠의 사랑 덕에 아이가 잘 버티고 있구나. 축하하고 너도 힘내!” 나는 진심으로 기뻤고 또 놀랐다. 이후 한동안 친구와의 연락이 끊겼다. 당장 큰 고비를 넘긴 아이 소식에 안도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내가 바빠졌기 때문이다. 넷째를 낳은 뒤 하루하루는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다섯 달이 흐른 올 2월 어느 날, 아기 수유를 하면서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친구 SNS에 올라온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아이가 건강히 퇴원하게 돼 의료진들이 축하파티를 열어주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었다. 앞선 게시물을 찾아보니 지난해 9월 말 소아용 심실보조장치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건강보험 급여대상이 됐고, 불과 세 달 뒤인 12월에는 아이 상태가 기적적으로 호전돼 장치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고 나와 있었다. “갓난아기의 몸으로 잘 버틸 수 있을까. 기적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 친구의 부탁을 받고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던 지난해 어떤 이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기적이 정말 일어난 것이다. 부모의 정성과 간절함이 불가능에 가깝던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늦었지만 친구에게 축하 문자를 보냈다. ‘축하해줘 고마워! 심장 기능이 많이 좋아져서 집에서 약물치료만 하면 된다고 해 퇴원했어.’ 도착한 답 문자에는 그동안 오간 수많은 문자에서 느낄 수 없었던 희망과 활기가 묻어났다. ‘갑자기 집에서 두 명을 보게 되니 힘든데 (넷을 보는) 너는 참 대단하구나. 리스펙트 유.’ 전에 없이 너스레까지 떠는 모습에 내 기분까지 말할 수 없이 흐뭇해졌다. 새삼 부모의 힘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잠시나마 비관적인 생각을 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내 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은 정말 그 작은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진짜 ‘리스펙트’를 받아야 할 건 그들 부부였다.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주부의 시간은 다른 가족들의 시간과 다르게 간다. 평일엔 숨통이 트이는 반면 주말은 전쟁터다. 쉬는 가족들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이들 방학은 주부에게 연중 가장 바쁜 시간이다. 다자녀 엄마에겐 더 말할 것도 없다. ‘공포의 겨울방학’이 돌아왔다. 한때 ‘낭만’이었던 연말은 아이들 방학이란 것이 생긴 뒤로 그저 ‘난관’이 됐다. 식사부터 목욕까지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영·유아들은 온종일 엄마를 필요로 했다. 더구나 지난해까지 그런 아이들이 셋에 불과(?)했지만 이젠 넷이다. 큰 애들 셋만 있었을 때는 그래도 어디든 데리고 나가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공원, 쇼핑몰, 키즈카페 등등. 하지만 갓난아기가 생긴 올해는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여름이라면 하다못해 실내복 차림 그대로 집 앞 놀이터라도 갈 텐데…. 한겨울이라 문 밖 몇 발짝 나서는 것도 쉽지 않았다. 네 아이를 서너 겹씩 무장시켜야 함은 아기 짐만 해도 산더미였다. 게다가 자칫 독감이라도 걸리면 재앙이 따로 없었다. 네 아이에게 순식간에 전염돼 끝이 보이지 않는 ‘간병의 윤회’가 시작될 터다. 막내만이라도 누군가에게 맡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설상가상으로 이번 방학엔 친정 부모님마저 안 계셨다. 연말을 끼고 여행을 가셨기 때문이다. “아이들 방학을 생각 못하고 날짜를 잡았구나. 너 힘들어서 어떡하니….” 엄마는 출국하시는 당일까지도 죄인처럼 미안해하셨다. 솔직히 낭패감이 든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 자식들 맡기자고 부모님의 여행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애들 일로 사나흘에 한 번 부모님께 SOS를 치고 있는 형편이었다. ‘뭘 하지?’ 전날까지 머리를 싸맸지만 결국 별다른 계획 없이 방학 첫날을 맞았다. 엄마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아침 눈 뜨자마자 쪼르르 달려와 “오늘 어디가요?” 하고 물었다. 제법 머리가 큰 첫째가 “엄마, ○○이는 미국 간대. 우리는 프랑스 가면 안돼?” 했다. 프랑스라…. 두 동생은 한술 더 떠 “홍콩 디즈니랜드 가고 싶어!” 하고 덧붙였다. 하아, 집 앞 놀이터도 못 가는 판에 프랑스, 홍콩이라니…. 아이들에게 “아가 때문에 어디 나갈 수가 없어” 하고 사정을 설명한 뒤 거실 TV를 틀었다. 그렇게 첫날은 어린이채널을 돌려가며 하루를 때웠다. 평소 TV를 잘 보여주지 않는 엄마가 종일 만화채널을 틀어주자 아이들은 그저 ‘웬 떡이냐’며 신나게 시청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산해진미라도 계속 먹으면 질리는 법. 저녁쯤 되자 아이들은 또 다시 몸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엄마, 심심해.” “놀 거 없어?” 다음날은 오래 전 사놓은 놀이용 점토에 생각이 닿았다. 색색의 점토를 꺼내주었더니 아이들은 각자 작품을 만들고 소꿉놀이도 하면서 제법 신나게 놀았다. 전날보다 훨씬 ‘능동적인’ 놀이풍경에 일단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너무 능동적으로 논 탓(!)에 아이들이 돌아다닌 거실, 서재, 침실 곳곳에 점토가루가 날아다녔다. 결국 반나절 점토놀이 끝에 남은 것은 대청소였다. 그날 저녁 내내 7kg이 넘는 아기를 업고 청소기와 테이프크리너를 돌려야 했다. 점토놀이 두 번만 했다가는 몸살이 날 것 같았다. 결국 다음날엔 갓난아기를 들쳐 업고 아이들과 함께 가까운 쇼핑몰로 향했다. 아이들을 혼자 데리고 나간다는 게 엄두가 나진 않았지만, 전날 ‘점토놀이 참사’를 통해 집에 있는 것도 능사는 아니란 교훈을 얻었다. 잘 생각해보니 큰 애들을 미술놀이 카페 같은 데에 넣어놓으면 갓난아기 하나만 데리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큰 애들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막내가 배가 고프다며 칭얼댔다. 겨우 수유실을 찾아 젖을 좀 물리자 어느덧 큰애들 데리러 갈 시각이었다. 부랴부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에 들어갔더니 이번엔 ‘익숙한 지옥’이 시작됐다. 번갈아 가며 “화장실 가고 싶다”거나 일일이 “음식 좀 씹어” 하지 않으면 도통 밥을 먹지 않는 큰 애들, 시종일관 버둥거리는 막내까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 역시 나오는 게 아니었어.’ 식당을 나올 때쯤엔 말 그대로 멘탈이 ‘바닥까지 탈탈’ 털린 느낌이었다. 더 고민할 겨를도 없이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내게도 마냥 쉬고 즐기면 되는 방학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방학이란 막판에 몰아서 하는 탐구과제를 빼면 그저 놀고먹는 시간이었다. 특히 우리 가족은 여행을 많이 다녔다. 친정 부모님께서 워낙 문화유산답사 같은 것을 좋아하시기도 했지만, 두 분 모두 교직에 종사하셔서 방학기간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전국 유적지와 박물관 탐방은 물론이고 한 번은 차를 빌려서 한 달 간 해외여행을 한 적도 있다. 그랬기에 나도 세월이 흘러 부모가 되면 막연히 아이들과 그런 방학을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반 회사원에겐 분기마다 돌아오는 일주일여의 짧은 휴가가 있을지언정 방학은 없었다. 일껏 잡은 휴가가 아이들 방학과 엇갈리기도 했다. 그러면 몇 주 전부터 아이들 맡길 곳을 찾느라 전전긍긍해야 했다. 사실 내가 육아휴직 중인 올 겨울 방학은 여러모로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허덕이다 보니 허위허위 열흘 정도의 방학의 끝이 다가왔다. 내일부터 어린이집에 가야 한다고 하자 셋째가 “싫은데” 했다. 제대로 된 나들이 한 번 못 간 방학이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싫지 않았나 보다. 하긴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엄마와 종일 붙어 있어볼까. 그저 힘들다고 ‘빨리 지나가라’고 기도했던 게 새삼 미안해졌다. 다가오는 여름 방학엔 가까운 교외라도 며칠 나들이 가야겠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일을 쉬는 평일, 잠시 병원에 다녀오기로 한 남편이 한 시간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했더니 “아, 나 오늘부터 친구랑 매주 만나 공부하기로 해서 옆 동네 왔는데” 한다. 그러고 보니 신랑 일정표에 ‘○○○ 오전 10시’라고 써있었다. “공부를 한다고? 매주?” “응.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럼 점심도 먹고 와?” “그건 봐서.” 그렇게 답했지만, 친구와 오전 10시에 만나 공부를 한 남편이 식사도 하지 않고 돌아올 리 만무했다. 한숨이 나왔다. 일주일에 이틀 쉬는데 그 중 하루 3시간여, 반나절을 매번 나가서 친구와 보내겠다니. 왜 이제야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리고 왜 그런 걸 나와 한 마디 상의 없이 결정하는 건지. 요즘 송년회다, 지인 상(喪)이다, 뭐다 해서 안 그래도 툭하면 밤늦게 귀가하고 있는 남편이었다. 그 주만 해도 사흘 내리 늦거나 일이 있어 나 혼자 아이들을 돌봤다. 전날은 학교 동창 모임, 그 전날은 오후 10시까지 근무, 또 그 전날은 몸이 아프다며 집에 오자마자 아이들만 씻겨놓고 잠이 들었다. 오늘 하루쯤은 아기를 같이 돌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새벽에도 칭얼대는 막내를 혼자 달래느라 잠을 설친 탓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물론 남편이 항상 이런 것은 아니다. 남편은 평소 육아도 많이 하고 아이들도 굉장히 잘 돌보는 좋은 아빠다. 거의 매일 아이 넷 목욕도 도맡아 하고 휴일 아침에는 늦게까지 늦잠 자는 나를 위해 아이들 밥을 챙겨 먹이기도 한다. 아이들은 엄마보다 살가운 아빠를 더 따른다. 친정 엄마도 “○서방 같은 아빠 없다”며 엄지를 추켜세우실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육아에 대한 인식 차이는 느껴진다. 책임의식의 차이랄까. 예를 들어 앞선 상황에서 나라면 일단 약속을 잡기에 앞서 당연히 신랑에게 의사를 물었을 것이다. ‘친구와 매주 만나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하루 반나절만 아이를 혼자 볼 수 있겠느냐’고. 아니, 애초에 공부 같은 것은 시작할 생각도 안했겠지. 회사에 다닐 때도 분기별로 돌아오는 팀 회식이나 아주 중요한 취재원 약속 같이 매우 불가피한 일을 제외하고 개인적인 일정을 잡아본 일이 없다. 연말연시 모임도 그렇다. 나라면 아마 대부분 참석하지 못했을 터다. 12월 들어 휴직 중인 나에게도 대학 동문, 회사 동기, 팀으로부터 송년회 참석 여부를 묻는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모두 갈 수 없다고 고사했다. 따져볼 것도 없이 아이들 때문이다. 남편에게 ‘나 대학 동아리 모임에 다녀올 테니 아이들 넷 좀 봐줄 수 있어?’ 같은 질문은 언감생심 해볼 생각조차 못했다. 반면 남편은 대학 동아리, 동창 모임, 직원 회식 거의 모두 참석했다. 그런 모임들은 ‘웬만해서는 가지 못한다’고 전제하는 나와 달리 ‘웬만하면 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일단 일정표에 적어놓고 “이날 모임 있어. 장모님 계시지?” 하고 물었다. 한 동창 모임에 다녀와서는 “한 친구가 자신에게 ‘아이 넷인데도 동창회에 나오다니 용감한 남편’이라고 했다”며 멋쩍어 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그때뿐, 모임은 모임대로 이어졌다. 지난 주말엔 편도만 4시간 걸리는 지방의 친구 결혼식까지 가겠다고 나섰다. 나는 고작 40분 거리의 회사동기 결혼식도 참석하지 못하는데…. 갓난쟁이 시절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의 결혼식도 지방이란 이유로 축하문자만 날려야 했다. 그 친구는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내 문자에 대수롭지 않은 듯 답했다. ‘아기 엄마니까 못 오는 게 당연하지, 괜찮아!’ 그래, 아기 엄마에겐 당연한 이 통상적인 일들이 왜 아기 아빠에겐 당연하지 않은 걸까. 어느 날인가 아이들 프로그램을 찾아 채널을 돌리다 근로시간 단축과 관련한 정부의 공익광고를 보게 됐다. 퇴근이 빨라진 덕에 여자는 아이를 유치원에서 직접 데려올 수 있고, 남자는 취미생활을 즐기게 됐다는 식의 장면이 이어졌다. 심사가 뒤틀렸다. 아니, 왜 이른 퇴근으로 생긴 여유시간에 남자는 취미생활을 즐기는 반면 여자는 그저 아이를 찾으며 행복해 해야 한다는 말인가. 엄마도 드럼 치고 동아리 모임 좀 나가고 친구 결혼식에도 다녀오면 안 되나? 결국 지난 주말 남편에게 한 마디를 날렸다. “이대로는 너무 힘들다. 늦을 거면 아가씨(시누이)라도 불러 달라.” 멀지 않은 거리에 살지만 평일 늦게까지 일하는 시누이였다. 그 사정을 나라고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다음 주 남편 일정표에는 또 저녁 모임이 2건이나 적혀있었다. 또 아이들을 혼자 봐야 한다니 버거운 것도 버거운 것이지만 나 혼자 모든 것을 떠맡아야 하는 현실이, 그게 당연한 듯 온갖 약속이 적혀있는 남편의 일정표가 밉고 화가 나 시위를 하고 싶었다. 남편은 두 일정 중 하나는 가지 않아도 된다며 다른 하나만 참석하겠다고 했다. 일과 관련한 남편 일정까지 막을 순 없어서 그 정도로 타협을 봤다. 친정엄마께서는 “남자가 당연히 그런 모임도 나가고 사람도 만나야지” 하며 오히려 나를 나무라셨다. 맞는 말씀이었다. 특히 남편 일은 그 성격상 동기·동창 모임에서 듣는 정보가 적잖았다. 다만 남편의 ‘당연히’와 나의 ‘당연히’ 사이가 한없이 멀다는 게 씁쓸했다. 또 한 주가 시작되고 출근한 남편에게서 문자가 왔다. ‘올해 크리스마스, 쉬려고 했는데 일해야 할 것 같아.’ 어찌됐거나 현실은 아빠든 엄마든 여유시간을 즐기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각해보면 남편에게 (육아에 대한) 책임의식 같은 것을 함양할 시간이 있었는가 싶다. 육아휴직이라도 해본 나와 달리 자영업자인 남편은 그럴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내년, 내후년 연말엔 상황이 좀 달라져 있을까?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아기가 언제쯤 스스로 뒤집더라?” 퇴근한 남편이 누워서 버둥대는 막내를 보며 물었다. 아이 넷 아빠가 그것도 몰라? 아니 가만… 4개월 때였나? 5개월인가? 아니다, 이유식 먹을 때 지나면 뒤집던가? “글쎄, 나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흔히들 아이 넷 부모라고 하면 ‘걸어 다니는 임신·육아 백과사전’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지 않은가. 불과 몇 년 지났다고 기본적인 발달과정조차 가물가물하다. 평범하게 키웠다면 어련히 겪었을 것들―배밀이, 기어가기를 시작하는 시기나 월령별 수면시간, 수유량 같은 것들―이 벌써부터 까마득하다. 일반적인 것도 이럴진대 돌발적인 상황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얼마 전 친한 동생이 “아기가 갑자기 밥을 거부한다”며 상담을 청했다. 나 역시 잘 안 먹는 아이를 셋이나 키워본지라 어지간해선 안 써본 방법이 없다. 하지만 선뜻 조언하기 어려웠다. 이미 몇 년이 지나 기억도 잘 안 나고 아이들마다 상황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 집 넷째만 해도 내겐 새로운 세계다. 다들 “넷째는 ‘발’로 키우겠네?” 라고들 하는데 발로 키우기는커녕 손발을 다 써도 답답한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일례로 이제 갓 백일을 넘긴 넷째는 요즘 모유수유에 앞서 자주 칭얼거린다. 한 번에 젖을 물지 않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울다가 배고픔이 극에 달할 때쯤 젖을 문다. 첫째부터 셋째까지, 칭얼거리기는커녕 가슴을 갖다대면 자동인형처럼 척척 무는 아기들만 키워본 탓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 어르기도 하고, 강제로 물려도 보고, 한참 배를 곯려 보기도 했다. 6년여의 육아노하우를 모두 적용해봤지만 먹히질 않았다. 결국 최후의 방법으로 맘(mom)카페에 질문을 올렸다. ‘모유를 잘 먹던 아가가 갑자기 젖만 보면 우는데 왜 그럴까요?’ 글을 쓰며 스스로도 황당함에 웃음이 나왔다. 아이 넷을 키웠다는 엄마가 다른 부모들의 조언을 구하고 있다니…. 하긴, 아무리 내 새끼라도 가끔 정말 같은 배에서 나온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다르니 나라고 별 수 있나. 첫째에게 통한 방법이 동생들에게 통하지 않고, 그 반대일 때도 부지기수다. ‘이것만은 진리!’라고 믿었던 방법이 통하지 않을 때도 많다. 셋째의 배변훈련도 그랬다. 첫 번째, 두 번째도 아닌 세 번째 기저귀 떼기 아닌가. 둘째는 첫째에게 했던 방법대로 해서 쉽게 기저귀를 뗐다. 셋째 때도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다. 이런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듯 처음엔 셋째도 첫째, 둘째와 마찬가지로 수월하게 기저귀를 뗐다. ‘역시 그동안의 방법대로 하면 되는 구나’ 하고 생각했다. 한데 넷째를 낳고나서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셋째가 다시 밤에 오줌을 지리기 시작한 것이다. 몇 달간 스스로 잘 일어나 화장실에서 소변을 잘 보던 아이가 언제부턴가 도로 이불에 쉬를 했다. “나 다시 기저귀 찰래!” 하며 떼를 쓰기로 했다. 말로만 듣던 ‘퇴행행동’이었다. 시기도 그렇고, 기저귀를 차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을 볼 때 보나마나 동생이 생긴 데 따른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 앞서 두 아이도 있었지만 정작 퇴행은 처음 경험해보는 터라 당황스러웠다. 첫째 둘째가 잘 지나갔기에 그저 ‘우리 애들은 동생앓이가 없나보다’라고만 생각했다. 나는 육아서적에 나오듯 셋째에게 더 관심을 보이고 사랑을 주려 애썼다. 좋은 말로 타일렀고 쉬를 하지 않은 날 아침에는 사탕이라는 ‘인센티브’를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실수가 계속되자 지친 마음에 아이를 무섭게 혼내봤다. 그 옛날 키를 쓰고 동네를 돌 듯 “복도를 돌게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래도 오줌 지리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첫째, 둘째 때도 찾아보지 않았던 ‘밤 기저귀 떼는 법’을 셋째에 이르러 수소문하게 될 줄이야. 육아의 세계는 정말 끝이 없다. 내 아이는 내가 제일 잘 안다는 생각도 얼마나 큰 착각인지. 올 초 어린이집 상담을 갔다가 둘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 기억이 난다. 겨울에도 여름옷을 입겠다고 고집해 걸핏하면 나와 실랑이를 벌이고, 양말 한 짝도 성에 안 차면 신었다 벗기를 6번씩 반복하는 예민한 아이, 그게 내가 아는 둘째였다. 필시 어린이집에서도 까다롭게 굴거나 다른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 걸,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둘째가 “모범적이고 사교적인 아이라 반에서 ‘반장’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었다. 부모에게 웬만해선 아이 칭찬을 하겠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사교적인 아이’라니 무척 의외였다. 이후 둘째를 가만히 지켜보니 고집은 셀지언정 정말 친구들 사이에서 밝고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내가 알던 모습은 아이의 반쪽에 불과했다. 키우면 키울수록 아이들은 각기 다른 우주 같다는 느낌이다. 얼핏 나선형, 타원형으로 비슷해 보이는 은하도 실은 그 안에 수천만 개의 다른 별들을 품고 있듯이 말이다. 비슷해 보이는 아이들도 그 안에 전혀 다른 별과 성운과 블랙홀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아직 그 중 반의 반도 탐험하지 못했다. 넷째에 대해선 여전히 초보 엄마다. 엄마는 영원한 여정인가보다.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거지 같이 산다는 소리를 길게도 써놨네.’ 한 포탈사이트 게시판 다자녀 가족의 글에 달린 댓글이다. 넉넉지 않은 벌이에도 세 자녀를 포함한 다섯 식구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훈훈한 글이었지만 댓글은 훈훈하지 않았다. ‘애들은 돈으로 키우는 게 아니고 사랑으로 키우는 거라고들 말하는데, 사랑은 기본이고 거기에 돈이 얹어지는 거다.’ ‘비행기는 타봤나, 제주도는 가봤나.’ ‘애들이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등의 댓글이 많았다. 비단 이 글만 유별난 것이 아니다. 다자녀 관련한 글이나 기사를 보면 이런 류의 댓글을 쉽게, 또 많이 찾을 수 있다. 올 여름 7남매를 키우는 한 다자녀 가족은 자신들의 기사에 달린 악성 댓글을 참다못해 일부 누리꾼을 고소하기까지 했다. 댓글 내용은 대부분 기사와 관계없는 원색적인 비난이었다. ‘짐승이다’ ‘햄스터냐’ ‘애들이 불쌍하다’ 등. “난 하나 키우기도 버거운데 넌 어떻게 넷이나 키워?” 어쩌면 내가 자주 듣는 이런 말에도 ‘하나도 잘 키우기 힘든데 넷이나 낳아 잘 키울 수 있겠느냐’는 뜻이 담겨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조차 우리 가족을 보면 “부모가 힘들겠다”며 혀를 끌끌 차시니 말이다. 본인 역시 다자녀 부모셨을 텐데…. 다자녀인 게 그렇게 힘들고 옹색해 보이는 걸까? 하긴 육아는 물론이고 결혼도 힘들다고 기피하는 상황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인터넷, 서점에는 독박육아니, 워킹맘 제2의 출근이니, 육아우울증 같은 ‘힘든 육아’ 이야기가 넘쳐난다. 비관적인 기사는 셀 수 없을 정도다. 얼마 전 통계청이 발표한 ‘2018년 사회조사’에서 ‘결혼을 해야 한다’는 응답이 조사 이래 처음으로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특히 결혼적령기인 20~30대의 경우 응답자 중 ‘결혼을 해야 한다’고 답한 이는 3명 중 1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나 역시 이런 기사들을 여러번 써왔던지라 그리 놀라운 결과는 아니지만, 새삼 나와 내 가족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확실히 육아는 힘들다. 다자녀 육아는 더 힘들다. ‘거지 같이’ 사는 수준은 아니지만 아이들 하나하나 넉넉하게 해주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뭘 하든 남들 보다 2~4배의 돈이 들기 때문에 먹을 거 하나 살 때도 가격표부터 보게 된다. 하지만 다자녀 부모가 된 것을 후회해본 적은 없다. 후회는커녕 평소 서로 돕고 의지하는 애들을 보면 오히려 언감생심 형제를 힘닿는 데까지 더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첫째가 동생들 외투를 찾아오고 둘째가 셋째 양말을 신겨주는 모습은 이제 우리 집에서는 낯선 풍경이 아니다. 언젠가 키즈카페에서 셋째가 울면서 엄마를 찾아서 직원이 “아이 보호자를 찾습니다”고 방송을 했는데, 언니들이 가서 “저희가 보호자예요”하며 동생을 찾아온 일도 있다(내가 잠시 나간 새 벌어진 일인데 나중에 직원이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 셋째도 이제는 동생이 생겼다고 제법 큰 척을 한다. 아기가 울면 “토했나봐. 내가 가서 볼게”하고 가제수건을 챙겨오고 울지 말라고 ‘까꿍’하며 어르기도 한다. 저희들끼리 잘 어울려 노는 모습은 또 얼마나 예쁜지. 사춘기 아이들은 말똥만 굴러가도 웃는다고 했던가. 영·유아들은 수고스럽게 말똥 굴릴 필요도 없이 “똥” 한마디만 해도 배를 잡고 뒤집어진다. 뭐가 그리들 좋은지 한참 깔깔대다 지치면 “내 엉덩이 봐라”하며 서로 엉덩이를 까보이곤 웃고, “발 냄새도 맡아봐” 하더니 또 한참을 웃는다. 지저분한 유머는 딱 질색인 나조차 이런 아이들을 보면 미소 짓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덕에 힘들지언정 구질구질하고 ‘거지 같이’ 산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아마 대부분의 다자녀 부모들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한데 요새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육아가 힘들고 아이는 버겁다는 이야기밖에 없어 안타깝다. 하나 키우기도 어렵다는 이야기들 천지인데 다자녀 가구는 오죽 답답하고 부담스러워 보였을까. 하지만 막상 키워 보면 자녀가 여럿이라 상쇄되는 일도 있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주는 기쁨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물론 육아를 어렵게끔 하는 여러 불합리한 현실들이 존재한다. 본인의 신념에 따라 아이를 낳지 않는 딩크(DINK·결혼 후 의도적으로 자녀 없이 생활하는 맞벌이 부부)족도 있다. 그런 것들을 다 무시하고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육아를 너무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육아 포비아’는 없었으면 한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잃는 것도 있지만 얻는 것도 있다. 엄마가 애를 평생 낳을 것처럼 보였는지 아이들은 종종 “엄마, 다음 동생은 언제 나와?” 하고 묻는다. “이제 없어”하면 금세 실망스러운 얼굴로 “왜?”라고 말한다. 엄마의 사랑이 분산되는 것이 영 미안했는데 그래도 아이들은 형제가 많은 게 싫지 않은가 보다. 더 만들어주긴 어렵겠지만 지금까지 만들어준 형제들만으로도 난 아이들에게 큰 선물을 했다고 믿는다. 내 인생에도 가장 큰 선물임은 물론이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엄마, 그거 말고 저 뒤에 있는 요구르트 주세요.” 아차, 재빠르게 반찬 뒤로 숨긴다는 게 그만 첫째 눈에 딱 걸리고 말았다. “그건 엄마 건데…” 하는 말은 당연히 소용없었다. 첫째를 보고 둘째, 셋째도 “나도 그거” “나도”하며 모두 같은 요구르트를 가리켰다. “너희들 먹을 걸로는 다른 요구르트를 사두었는데 그거 먹으면 안 될까?” 아이들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결국 엄마의 간식은 순식간에 세 아이들 입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평소 식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아주 가끔 먹고 싶은 게 생기면 사다놓고 아이들이 잘 때까지 기다린다. 아이들과 함께 먹어도 좋겠지만 그러려면 배로 많이 사야 하는 데다, 같이 먹다보면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만의 간식거리를 숨겨놓은 날이면 그게 뭐라고 ‘아이들 얼른 재우고 먹어야지’하는 생각에 저녁 내내 행복하다. 나름의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랄까. 한데 이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사라졌을 때 그 낭패감이란. ‘제 새끼가 먹는 건데 엄마가 뭐 그리 아쉬우냐’고 의아할지 모르겠다. 대한민국의 어머니란 자고로 그 맛난 자장면도 싫다고 마다하며 자식에게 다 양보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하지만 최근 한 패스트푸드점 광고에서 나오는 어머니처럼 자장면보다 햄버거를 더 좋아해서 ‘어머니는 자장면을 쳐다도 안 봤어(광고 카피)’면 모를까, 엄마라고 마냥 양보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엄마도 맛있는 게 있고 혼자만 먹고픈 것도 있다. 나 역시 사람인지라 종종 좋아하는 음식 앞에서는 헌신적 모성애를 잠시 접어 두고 싶다. 한데 아이들이 크면서 아이들과 나의 공동‘식이’구역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예전에는 엄마와 아이들 먹을거리는 전혀 별개의 구역이었는데, 갈수록 그 교집합이 커진다. 내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큰 애의 경우 어른 음식 중 못 먹는 것이라곤 커피, 술, 그리고 아주 매운 반찬에 불과할 정도다. 여기에 아이들 식욕까지 나날이 왕성해지니 ‘내 식사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넷째를 출산하기 전 애들 셋을 데리고 복합쇼핑몰에 놀러간 적이 있다. 구경을 마치고 지하 푸드코트에 내려가 아이들과 내 점심용으로 오니기리(일본식 주먹밥) 3개와 캘리포니아롤 1줄을 샀다. 오니기리는 아이들을 주고, 캘리포니아롤은 내가 먹을 생각이었다. 롤 포장을 뜯고 있는데 첫째가 “엄마, 그 롤 내가 먹으면 안돼요?”하고 물었다. 서너 쪽이나 먹겠지 싶어 흔쾌히 “그래” 했건만 웬 걸. 첫째는 내가 잠시 한눈을 판 새 롤 한 줄을 뚝딱 먹어치우고 말았다. 오히려 그것으로는 배가 덜 찼는지 남은 오니기리까지 넘봤다. 하긴, 벌써 몸무게가 28kg를 육박하는 어린이인데 서너 쪽만 먹을 거라 기대한 내가 바보지. 결국 첫째에게 오니기리 반쪽마저 내주고 만삭인 나는 과일 스무디 한 컵으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첫째에겐 못 미치지만 둘째와 셋째도 과거와 비교하면 먹는 양이 크게 늘었다. 특히 연년생인 이 녀석들은 뭐든 서로 경쟁을 하듯 먹는다. 둘째에게 요구르트를 주면 셋째도 “나도 요구르트 줘!”하고, 셋째가 치즈를 달라 하면 둘째도 “나도 치즈 먹을래!” 한다. 엄마가 무언가 먹으려고 꺼내 놓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나도” “나도” 하며 달려온다. 이러니 가공식품 같은 것은 4개들이를 사놔도 단숨에 사라지기 일쑤다. 오죽하면 내가 간식거리를 반찬통 뒤에 숨기는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물론 아이들이 잘 먹는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특히 입 짧은 아이를 키우며 맘고생 해본 부모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나만해도 불과 얼마 전까지 식사 때면 아이들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이려고 애걸복걸 하며 쫓아다녀야 했다. 어릴 적 첫째는 얼마나 작고 말랐던지 “마치 마이크 같다”고들 했다. 막대기 같이 마른 몸에 동그랗고 커다란 머리가 붙은 모습이 꼭 음향기기인 마이크 모양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아이들이 잘 먹기만 한다면야 내 간식은 물론 간(肝)까지 내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내 입에 넣는 것 없이, 옥수수를 쪄도 고구마를 구워도 애들 입에 넣기 바빴다. 나도 찐 옥수수와 군고구마를 무척 좋아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옥수수 한 쪽, 고구마 반 개 덜 먹는다고 크게 모자라는 것도 아닌데 왜 내 입에 들어가는 건 그리 아깝고 사치처럼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괜찮아” “너희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이런 말들로 엄마는 마냥 이렇게 포기하고 희생하는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오히려 내 아이들에게 더 나쁜 양분을 주는 것은 아니었을까. 엄마가 잘 먹고 건강해야 육아도 행복하고 즐거울 테다. 요즘은 옥수수 두 개를 찌면 네 쪽으로 나눈 뒤 “이 한 쪽은 엄마 거야” 하고 빼놓는다.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가사에도 일침을 날리고 싶다. “어머니, 한 젓가락 먹는다고 큰 차이 없어요. 어머니도 드세요.”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요 며칠 몸이 많이 아팠다. ‘젖몸살’이었다. 수유기간 가슴에 문제가 생기거나 아기가 잘 먹지 않으면 유선이 막히면서 젖몸살에 걸린다. 가슴이 딱딱해지고 열이 나고 온몸이 마치 몸살에 걸린 듯 욱신거려서 젖몸살이라 부른다. 심하면 막힌 부위가 유선(乳腺)염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내게도 유선염이 생기고 말았다. 가슴에 통증이 느껴진다 싶었는데 얼마 안돼 피부가 붓고 후끈후끈 열이 나기 시작했다. 찌릿하게 아프고 쓰린 느낌이 딱 봐도 염증이 생긴 것 같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가슴 전체가 얼얼했고 곧 등까지 찌릿찌릿 아파졌다. 온몸에 열도 올랐다. 다자녀 엄마라면 각종 육아 관련 질환에 통달했을 것 같지만, 정작 나는 건강체질이라 육아를 하며 병을 앓아본 일이 거의 없다. 세 아이 수유를 했건만 유선염에 걸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더구나 보통 젖몸살이나 유선염은 모유량이 많거나 아기에게 직접 수유하지 않고 유축기를 이용해 모유를 빼는 초산모가 걸릴 확률이 높다. 나는 모유량도 많지 않고 늘 아기에게 직수(直授)했다. 초산모이긴커녕 무려 넷째 산모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유선염이라니…. 우물쭈물하는 새 저녁이 되어 병원은 다음날 가보기로 했다. 어차피 당장 네 아이를 두고 응급실을 가기도 어려웠다. 하룻밤만 버티면 아이 셋을 어린이집에 보낸 뒤 한층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병원에 갈 수 있었다. 다행히 남편이 있는 날이라 갓난아기는 남편에게 맡겼다. 하지만 큰 애들까지 맡길 손은 부족했다. 저녁식사까지는 아이돌보미 선생님이 해결해주셨지만, 문제는 돌보미 선생님이 퇴근한 이후였다. 아이들에게 간식을 먹어야 하고 목욕도 해야 하고 잠도 자야 했다. 이들 중 영유아들이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필 다음날 첫째와 둘째의 소풍날이라 이런저런 준비물까지 필요했다. 엄마가 아픈 걸 아는지 모르는지 두 딸은 천연덕스럽게 다가와 “엄마, 내일 우리 소풍인 거 알죠? 맛있는 간식 싸주셔야 해요”라고 했다. 아차, 간식을 못 샀다. 큰 애 두 명이 다니는 어린이집은 부모에게 ‘소풍 도시락의 짐’을 지우지 않는 대신 식사 후 아이들끼리 나눠먹을 간식을 사오게끔 했다. 처음에 멋모르고 과일을 싸 보냈다가 물정 모르는 엄마가 되고 말았다. “친구들은 모두 아기곰젤리나 새우과자 같은 걸 사와서 나눠먹는데 내 간식만 인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엄마표 도시락 대신 간식이 새로운 자랑거리가 되는 모양이었다. 이후 소풍 전날이면 꼭 아이들의 의사를 물어 간식을 샀다. 이날도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하원하면 의견을 물어 간식을 사올 참이었는데 예기치 않게 몸이 아파 준비를 하지 못했다. 아이들 체육복과 수저통도 챙겨야 하는데…. 안 그래도 아픈 머리가 더욱 지끈거렸다. 해야 할 집안일도 산더미 같았다. 아이들 셋이 먹은 저녁 그릇 설거지, 여기저기 던져진 장난감 정리, 청소, 빨래도 해야 했다. 매일 저녁 반복되는 ‘엄마의 일’이었다. “하루쯤 안 하면 되지” 할 수 있지만 그건 다자녀 집 사정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아이가 넷인 집에선 설거지나 빨래가 하루라도 밀리면 다음날 처리해야 할 일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다. 그렇다고 남편에게 부탁할 수도 없었다. 당장 막내를 돌보고 있거니와 아이스크림가게놀이 장난감은 어디 넣어야 하는지, 갓난아기 빨래와 큰애들 빨래는 어떻게 달리 해야 하는지 남편은 몰랐다. 그걸 일일이 설명하는 품이 더 들 것 같았다. 이렇게 속은 답답한데 몸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건강체질에 웬만한 통증은 잘 견디는 편이라고 자부했지만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다. 특히 부은 가슴으로 수유를 할 때면 고통을 참느라 진이 빠졌다. 결국 늘 쓰는 ‘찬스’를 쓸 수밖에 없었다. “엄마, 오늘 밤 큰 애들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친정엄마에게 연락했다. 아픈 엄마가 결국 도움을 청할 곳이 또 (친정)엄마 뿐이라니 서글픈 일이었지만 어쩌랴. 한데 엄마도 다음날 새벽 일정 때문에 일찍 돌아가셔야 한다고 했다. 남편이 큰 애들 3명을 재우러 들어가면 밤새 갓난아기 수유와 뒤치다꺼리는 온전히 내 몫이 된단 뜻이다. 온몸에 오한이 나서 손가락 마디마디가 시릴 정도인데 아기를 돌보는 게 가능할까. 그렇다고 남편에게 갓난아기를 어르면서 아이 셋을 재워 달라 할 수도 없고…. ‘엄마는 앓아누울 여유조차 허용되지 않는구나.’ 그러고 보면 친정엄마도 앓아누워 계신 걸 본 기억이 없는 듯하다. 엄마도 사람인데 아프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아파도 움직여야 했던 거다. 딱 한 번 수술 때문에 입원해 하루 누워계신 걸 본적이 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도 수술을 미루고 미루다가 나와 내 동생이 대학에 들어가자 하신 것이라고 했다. 엄마가 되고 보니 이제야 알겠다. 엄마는 마음대로 앓아누울 수도 없다는 걸. 엄마의 자리는 비우기엔 너무 크다. 나는 그동안 내가 비교적 아이들을 풀어주고 손을 많이 대지 않아 ‘방임형 엄마’라 생각했는데 막상 아프고 보니 내가 방임해두고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큰일부터 표 나지 않는 작은 일까지 육아 구석구석에 내 손이 닿아 있었다. 그날 밤 나는 결국 아픈 몸으로 아기를 어르고 수유하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찍 병원을 찾아 며칠분의 약을 받아왔다. ‘최대한 빨리 낫겠다’는 필사적 각오를 한 덕인지 다행히 염증이 사흘 만에 가라앉았다. 언젠가 회사 선배가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건강해야 해. 부모가 되고 보니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더라고.” 정말 그랬다. 내 건강 증진의 목적이 육아라니 조금 씁쓸하지만 그래도 어쩌랴. 아이들 덕에 건강에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쓰게 된다면 나쁠 건 없지 않겠나.이미지기자 image@donga.com}

“띠링~” 메신저 메시지가 도착했다. 열어보니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듯 쏟아지는 정오의 찬란한 햇살 사진이었다. 큰 애들과 함께 한강둔치 나들이를 간 남편이 보낸 것이었다. 아침 일찍 텐트와 야영의자까지 잔뜩 챙겨 나가더니 다행히 나무 그늘 아래 상석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부럽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기나긴 폭염이 언제였냐는 듯 공기도 선선했다. ‘세상에 이 좋은 날 나는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니.’ 기운이 쭉 빠졌다. 물론 남편이 나간 건 나와 갓난아기를 위해서였다. 큰 애들이 집에 있으면 아무래도 막내를 온전히 돌보기 어렵고 아기도 깊게 잠을 잘 수 없다. 남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지만 그래도 한편으로 속상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도 이 화창한 날 아이들과 함께 바깥나들이 나가고 싶었다. 신생아 엄마의 매일은 반강제 감금생활과 다름없다. 물론 아이를 남에게 맡긴다면 잠깐씩 나갔다 오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그래봐야 시한부 외출이다. 생후 한두 달까지 아기는 수시로 엄마 젖을 찾기 때문이다. 특히나 ‘완모(분유는 주지 않고 모유만 주는 것)’를 할 경우에는 1~2시간에 한 번 아기에게 젖을 물려야 한다. 잠깐 아기를 맡기고 바깥일을 보고 오려 해도 시간 잡기가 쉽지 않다. 지난주 평일에 하루 쉬는 남편과 바람이라도 쐴 겸 집 앞 식당에 외식을 하러 나갔다. 아기는 잠시 산후조리사님께 맡겼다. 가급적 정오까지 수유를 하고 아기가 자는 1~2시간 내 식사를 할 작정이었지만, 수유시간을 제대로 조율하지 못해 다소 애매한 오전 11시에 집을 나서야 했다. 그나마도 먹는 내내 조리사님으로부터 “아기가 깼다”는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에 식사를 즐길 기분이 나지 않았다. 남편은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자 한 판을 다 먹은 뒤 “어니언링(양파튀김)도 하나 시켜 먹을까?”고 했다. “그러든가”하고 답은 했지만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 불편한 기색을 느꼈는지 결국 신랑은 추가 메뉴를 시키지 않고 일어섰다. 이런 생활의 반복에 많은 여성들은 산후우울증에 걸린다. 나 역시 첫 아이 때는 종일 아이에 묶인 삶이 무척 당황스럽고 견디기 어려웠다. 낯선 동네에서 딱히 나갈 데도 없고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방콕(방에 콕 박힌)’ 생활이 한가한 것도 아니었다. 2시간에 한 번씩 수유하고 아기 기저귀를 갈고 토한 옷을 갈아입히고 칭얼대는 아기를 안아주다 보면 금세 저녁이 됐다. 아기 목욕을 시키고 다시 젖을 물리면 어느덧 밤이었다. 별로 하는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하루가 어찌나 훌렁 가는지. 특히 첫째가 태어났을 때는 남편도 바빴던 시기였다. 육아를 분담하는 건 기대하기 어려웠다. 신혼집도 친정에서 멀어 친정엄마나 친구가 찾아오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때만 해도 운전 초보라 친정집(약 1시간 거리)까지 아기를 데려가는 것도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말 그대로 ‘독박육아’였다. 자칫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상황에서 나는 나 나름의 해법을 찾았다. 비록 집에만 있을지언정 뭔가 몸과 마음이 바쁠 일들을 만드는 것이다. 가장 좋은 건 집안일이었다. 나이 들었을 때 산후풍이 올 수 있기 때문에 꼼짝 말아야 한다는 어르신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난 ‘정신적 산후풍’을 극복하기 위해 청소와 정리, 요리를 시작했다. 매일 같이 방을 쓸고 닦고, 집안 인테리어도 이렇게 저렇게 바꿔봤다. 인터넷에서 각종 요리법을 찾아 생전 해본 적 없는 제과제빵에도 도전했다. 그러다 보면 은근히 시간이 잘 갔다. 두 번째 방법은 독서였다. 가까운 도서관에서 매주 책 서너 권을 빌렸다. 주로 수유 중간 중간 졸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소설류였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더불어 뭔가 정신이 충만해지고 있다는 만족감도 들었다. 2~3일에 한 권을 독파했다. 아이가 잘 자줄 때는 하루 한 권씩 읽을 때도 있었다. 단언컨대 첫째 육아휴직 기간은 살면서 내가 가장 많은 책을 읽은 시간이었다.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이란 것도 처음 시작했다. 이전에는 아기 엄마들이 이른바 ‘맘 카페’라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 수시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며 ‘왜 저런 쓸 데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할까’ 싶었다. 한데 같은 아기 엄마가 되고 보니 이해가 갔다. 그곳은 집에 갇힌 엄마들에게 소통의 장, ‘아고라(agora)’ 같은 곳이었다. 당시 나는 주변 친구들이나 회사 선후배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일찍 출산을 한 편이라 육아이야기를 터놓고 할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 맘 카페에 들어가 남들의 고민을 보고 댓글을 달다 보면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남들 고충 글을 읽으면 ‘나만 힘든 건 아니구나’하고 위안도 받았다. 이런 나만의 ‘산후조리’ 덕에 우울증 없이 세 번의 육아를 잘 치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도 든다. 왜 이런 외로움과 스트레스를 엄마 스스로 극복할 수밖에 없었을까? 산전 임신부나 산후 영·유아를 지원하는 정책들은 많다. 그런데 정작 임신과 출산의 주인공인 산모들의 산후 건강에 대한 지원책은 무엇이 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여성은 아이를 낳는 소임을 다한 순간부터 국가의 관심 밖이 되는 것일까. 아이들과 나들이를 나갔던 남편은 저녁이 되어서야 파김치가 되어 돌아왔다. “힘들다”며 털썩 주저앉는 남편을 보니 그도 자기 나름의 산후풍을 겪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남편도 자기만의 해소법을 찾았을지 궁금해졌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드디어 본격적인 ‘포(four)에버 육아’가 시작됐다. 2주간의 산후조리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잠시 ‘한 자녀(막내) 엄마’로서 누렸던 호사(?!)는 이제 안녕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은 설렘 반, 우려 반이었다. 특히 어린이집에서 귀가한 아이들 반응이 어떨지 걱정됐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새 식구를 ‘격하게’ 환영했다. 오래간만에 본 엄마보다도 새로 온 아가가 더 반가운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3명 모두 첫날부터 아기 곁을 떠날 줄 몰랐다. 아가를 둘러싸고 앉아 “귀여워”를 연발했고, “엄마 수유하게 잠깐들 나가 있어”하면 우르르 나갔다가 아가가 “엥”하는 소리라도 내면 언제 들었는지 또 우르르 달려왔다. 혹시 엄마가 아가에게만 관심을 가진다고 질투하지 않을까, 새로운 동생에게 무심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건 기우였다. 문제는 큰 애들이 아니라 나였다. 셋째 출산 때까지는 조리원 퇴소 후 곧바로 남의 도움 없이 육아는 물론 가사까지 도맡아 해도 아무 문제없이 거뜬했다. 6년 전 SNS를 보면 갓난아기인 첫째를 슬링(갓난아기를 안을 때 쓰는 침낭형 아기띠)에 넣어 두르고 요리며 설거지를 했다는 일기가 남아있을 정도다. 그땐 그렇게 해도 크게 힘든 줄 몰랐는데, 웬 걸. 이번엔 돌아온 날 몇 시간 아기용품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좀 했다고 당장 저녁부터 삭신이 쑤시기 시작했다. 다음 날부터 부른 산후도우미가 아니었다면 아기 뒤치다꺼리는 물론 내 밥 한 그릇 챙겨먹기조차 어려울 뻔했다. 허리가 아파 거동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자녀 가정의 경우 시·구(광역·기초지방자치단체) 중복지원이 가능하다고 해서 처음으로 산후도우미를 신청했는데, 이후 며칠간 도우미 분께 아기를 맡기고 한의원을 다녀야 했다. 자연히 큰 애들 돌볼 손이 모자라 본의 아니게 큰 소리가 늘었다. 안방에서 막내에게 수유를 하고 있는데 거실에서 무언가 떨어지거나 부서지는 소리가 나면 당장 달려갈 수 없으니 목소리만 커졌다. “뭐한 거야! 누구야! 너희들 엄마한테 혼난다!!” 아이들이 재깍 말을 듣지 않을 때도 피곤하고 급한 마음에 자꾸 호통을 치게 됐다. 남편도 산후도우미도 없는 토요일, 배고프다는 막내를 안고 세 아이에게 밥을 떠먹이면서 또 얼마나 잔소리를 했는지. 첫 주말이 지나기도 전에 결국 목이 쉬고 말았다. 이런 ‘고난의 행군’은 생후 한 달도 안 된 막내가 감기에 걸리면서 정점을 찍었다. 산후조리원을 나온 지 일주일여가 지난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아가 몸이 전에 없이 따끈했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체온계를 대어 보니 체온이 37도를 넘었다. 열이 나는 것이다. 신생아는, 특히 모유를 먹는 신생아는 웬만해서는 잘 안 아프다. 엄마에게서 태생적으로 물려받는 면역력이 있는 데다 모유도 그런 역할을 하는 성분을 일부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신생아는 어딜 나가거나 외부 사람을 만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감염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래서 앞선 세 아이도 신생아 때는 모두 건강했는데 이게 웬 일인가. 아무래도 막내의 경우 태어나자마자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난 게 화근인 듯싶었다. 다름 아니라 어린이집에서 온갖 병균을 안고 귀가하는 제 누나들이다. 신생아 옆에서 잠깐씩 들여다보는 게 전부인데 설마 뭔가 옮으랴, 방심했던 게 탈이었다. 신생아는 열이 올라도 함부로 해열제를 쓸 수 없다. 그렇다고 고열도 아닌데 괜히 병원을 간다고 나섰다가 상태가 더 악화될 수도 있다. 결국 나와 한의사인 남편은 일단 하루 이틀 상황을 더 지켜보기로 했다. 아기의 체온은 37도 1~9부를 오가는 미열 상태였다. 미온수 마사지를 하면 37도 1, 2부로 떨어졌다가 젖을 먹으면 그 열로 7~9부까지 올라가는 상황이 반복됐다. 수시로 미온수로 마사지를 하고, 칭얼대면 안아주고, 열이 오르는지 지속적으로 확인했다. 이렇게 지내기를 며칠, 내 몸도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기가 잘 먹지 않아 모유가 꽉 차면서 가슴 통증이 시작됐고,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 얼굴은 전에 없이 퀭해졌다. 하루는 귀가한 남편이 내 머리 냄새를 맡더니 “오늘 머리 안 감았어?”하고 물었다. 오늘은 무슨, 사흘째 머리를 감지 못한 상황. “내가 머리 감을 정신이 어디 있어? 머리 감기는커녕 세수하는 것도 까먹었구만.” 그렇게 말하곤 새삼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불과 한 달 전까지 회사 다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구질구질했다. ‘그래도 첫 한 달 치고 잘 버텼잖아.’ 거울에 비친 나를 애써 위로했다. 그래, 그러고 보면 정말 한 달이 훌쩍 가지 않았나. 갓 출산했을 때는 아이들과 함께 할 15개월이란 기간이 마냥 긴 시간인 것 같았는데, 벌써 그 중 한 달이 훌렁 사라져버렸다. 아프고, 소리 지르면서 어영부영하다가. 그렇게 생각하니 남은 14개월도 긴 시간이 아니었다. 출산 전에는 기왕에 주어진 15개월의 육아 시간을 정말 알차게 쓰고 복귀하자고 다짐했었는데. 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너무 헛되이 보내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부랴부랴 휴대전화를 켜고 미술놀이 주문 사이트에 들어갔다. 갓난아기를 데리고 어디 나갈 수는 없으니, 큰 애들이 집에서 갖고 놀 수 있도록 점토나 만들기 도구라도 주문할까 해서다. 요 몇 주간 애들은 막내 아가 때문에 본의 아니게 주말마다 방콕(방에서 콕 박혀 지내다) 생활을 해야 했다. 이번 주말에는 큰 애들에게 “뛰지 말아라” 하는 잔소리 대신 새로운 점토 장난감이라도 선물해야겠다. 아이들 작품마다 ‘특급칭찬’도 날려줘야지. 지금은 하루하루가 고생스러워도 나중에 복직해서 돌아보면 그 모든 나날이 얼마나 돌아가고픈 추억이겠나.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 적성 등 고려해 어렵게 선택한 직업… 색안경 대신 응원을 “아이고, 남자가 간호사셔? 어쩌다 간호사가 되셨어? 난 당연히 의사일 줄 알았지.” 오늘도 제게 증상을 설명하시던 한 환자분께서 실망한 듯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네, 이제 익숙해요. 저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이런 말을 듣는 ‘남자 간호사’입니다. 처음 간호대 입시를 준비한다고 했을 때부터 부모님께서 그러셨죠. “간호대를 간다고? 남자가 의사를 해야지 어떻게 간호사를 하냐?” 친구들 중에는 “여자 만나려고 간호대 가는 거 아니냐”며 놀리는 친구도 있었고요. 심지어 제가 지원한 한 간호대 면접에서조차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남자가 일반적인 회사를 두고 왜 간호사가 되려고 하죠?” 전 제 적성과 직업의 전문성을 고려해 간호사란 직업을 택했을 뿐이에요. 남을 도울 수 있는 일인 게 좋았고, 고령화 시대에 맞는 전도유망한 직업이라고 생각했죠. 외국에는 남자 간호사도 많잖아요. 무거운 환자를 부축하거나 의료장비를 옮기고 발버둥치는 환자를 제압할 때는 확실히 남자의 힘이 필요하죠. 그런데 아직도 ‘남자가 오죽 못났으면’ 하고 색안경을 끼는 분이 많아 씁쓸해요. 저를 ‘남자’ 간호사가 아닌 그냥 간호사로 봐주실 순 없는 걸까요. ■ 男요리사, 女전투기 조종사… 男女직업 따로없죠각 소방서에서 체력과 구조능력이 뛰어난 소방관들만 출전하는 ‘최강 소방관 뽑기 대회’. 6월 열린 올해 대회에는 특별한 참가자가 출전했다. 경기 송탄소방서 김현아 소방교(30·여)다. 무게가 70kg인 마네킹을 옮기고 11층을 뛰어 올라가야 하는 등 험난한 경기 방식 때문에 최강 소방관 대회는 그간 남자 소방관들만 출전해 왔다. 첫 여성 참가자인 김 소방교는 “키가 177cm로 어릴 때부터 체격과 체력이라면 남자에게 뒤지지 않았다. 11층에서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남자들과 똑같이 열심히 뛰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출전 뒤 생각지 못한 주변 반응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대부분 응원을 보냈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자가 억세다”, “별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성적이 하위권이었다는 기사에는 ‘역시 그렇지’, ‘우리 집 불나면 여자 소방관은 오지 마라’란 댓글도 달렸다. 김 소방교는 “급박한 현장에서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고 현장에 따라 여자 소방관이 더 필요한 순간도 있는데 ‘여자가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한다’는 식의 부정적 반응에 속상했다”고 말했다. 남자 요리사, 여자 전투기 조종사 등 성 고정 관념을 깬 직업인들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특정 직업들에 편향된 시선을 가지고 있다. 이는 청소년들의 꿈에도 영향을 준다. 최근 교육부가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진로 희망을 조사한 결과 남학생이 원하는 직업 1∼3위는 교사, 기계공학자 및 연구원, 군인 순으로 나타났다. 반면 여학생은 교사, 간호사, 승무원 순이었다. 여러 세대에 거쳐 이런 인식이 만연하다 보니 ‘독특한’ 직업을 선택한 이들은 성차별적인 언행을 접하기 일쑤다. 서울의 한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남자 교사 이현직 씨(26)는 언젠가부터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자신의 직업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씨는 “대학에서 유아교육과를 들어갔다고 하자 친척들조차 ‘남자답지 못하다’며 웃음거리로 삼았다. 교사가 된 뒤에도 불편한 시선은 떠나지 않았다. 최근에는 한 여자아이의 부모로부터 “선생님이 아이 엉덩이를 닦는 게 불쾌하다”는 취지의 항의 전화를 받았다. 이 씨는 “여교사가 남자아이의 대소변을 닦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나는 교사에 앞서 남자로 보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지방에서 아이돌보미로 활동하는 공영철 씨(56)도 여성가족부 건강가정지원센터가 제공하는 이수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남자가 왜 여기 있느냐”며 숙덕대는 중년 여성들 틈바구니에서 껄끄러운 열흘을 보내야 했다. 이현혜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는 “성에 관한 고정관념은 한번 형성되면 고치기 어렵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올바르게 교육하는 게 중요하다”며 “아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대중매체와 보호자”라고 강조했다. 실제 대중매체에서는 여전히 직업에 대한 성차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지난해 9월 진흥원이 일주일간 6개 방송사의 시청률 상위 드라마 22편을 분석한 결과 회사 임원이나 중간관리자 역할은 대부분 남자(73%)였고, 변호사 의사 등 전문 직업군 또한 여성보다 남성이 많았다. 반대로 요리연구가 백종원 씨가 진행하는 ‘집밥 백선생’ 같은 프로그램은 ‘셰프(전문 요리사)’뿐 아니라 집밥을 만드는 사람도 남자일 수 있다는 인식을 퍼뜨리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교수는 “대중매체에서 성평등 인식을 계속 개선해 나가면서 동시에 부모들에 대한 교육도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동안 성평등 교육은 아이들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는데, 아이들 스스로 인식을 바꾸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접하는 환경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부모 교육에 더 가중치를 두고 있다”며 “우리도 학교나 직장, 지방자치단체에서 성인들이 성평등 교육과 시민 교육을 접할 기회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 당신이 제안하는 이 시대의 ‘신예기’는 무엇인가요. ‘newmanner@donga.com’이나 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이 느낀 불합리한 예법을 제보해 주세요. 카카오톡에서는 상단의 돋보기 표시를 클릭한 뒤 ‘동아일보’를 검색, 친구 추가하면 일대일 채팅창을 통해 제보할 수 있습니다.}

“아이고, 남자가 간호사셔? 어쩌다 간호사가 되셨어? 난 당연히 의사일 줄 알았지.” 오늘도 제게 증상을 설명하시던 한 환자분께서 실망한 듯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네, 이제 익숙해요. 저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이런 말을 듣는 ‘남자 간호사’입니다. 처음 간호대 입시를 준비한다고 했을 때부터 부모님께서 그러셨죠. “간호대를 간다고? 남자가 의사를 해야지 어떻게 간호사를 하냐?” 친구들 중에는 “여자 만나려고 간호대 가는 거 아니냐”며 놀리는 친구도 있었고요. 심지어 제가 지원한 한 간호대 면접에서조차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남자가 일반적인 회사를 두고 왜 간호사가 되려고 하죠?” 전 제 적성과 직업의 전문성을 고려해 간호사란 직업을 택했을 뿐이에요. 남을 도울 수 있는 일인 게 좋았고, 고령화 시대에 맞는 전도유망한 직업이라고 생각했죠. 외국에는 남자 간호사도 많잖아요. 무거운 환자를 부축하거나 의료장비를 옮기고 발버둥치는 환자를 제압할 때는 확실히 남자의 힘이 필요하죠. 그런데 아직도 ‘남자가 오죽 못났으면’하고 색안경을 끼는 분들이 많아 씁쓸해요. 저를 ‘남자’ 간호사가 아닌 그냥 간호사로 봐주실 순 없는 걸까요. 각 소방서에서 체력과 구조능력이 뛰어난 소방관들만 출전하는 ‘최강 소방관 뽑기 대회’. 6월 열린 올해 대회에는 특별한 참가자가 출전했다. 경기 송탄소방서 김현아 소방교(30·여)다. 무게가 70kg인 마네킹을 옮기고 11층을 뛰어 올라가야 하는 등 험난한 경기 방식 때문에 최강 소방관 대회는 그간 남자 소방관들만 출전해 왔다. 첫 여성 참가자인 김 소방교는 “키가 177cm로 어릴 때부터 체격과 체력이라면 남자에게 뒤지지 않았다. 11층에서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남자들과 똑같이 열심히 뛰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출전 뒤 생각하지 못한 주변 반응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대부분 응원을 보냈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자가 억세다”, “별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성적이 하위권이었다는 기사에는 ‘역시 그렇지’, ‘우리 집 불나면 여자 소방관은 오지 마라’란 댓글도 달렸다. 김 소방교는 “급박한 현장에서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고 현장에 따라 여자 소방관이 더 필요한 순간도 있는데 ‘여자가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한다’는 식의 부정적 반응에 속상했다”고 말했다. 남자 요리사, 여자 전투기 조종사 등 성 고정 관념을 깬 직업인들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특정 직업들에 편향된 시선을 가지고 있다. 이는 청소년들의 꿈에도 영향을 준다. 최근 교육부가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진로 희망을 조사한 결과 남학생이 원하는 직업 1~3위는 교사, 기계공학자 및 연구원, 군인 순으로 나타났다. 반면 여학생은 교사, 간호사, 승무원 순이었다. 여러 세대를 거쳐 이런 인식이 만연하다 보니 ‘독특한’ 직업을 선택한 이들은 성차별적인 언행을 접하기 일쑤다. 서울의 한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남자 교사 이현직 씨(26)는 언젠가부터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자신의 직업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씨는 “대학에서 유아교육과를 들어갔다고 하자 친척들조차 ‘남자답지 못하다’며 웃음거리로 삼았다. 군대에서도 ‘남자가 그렇게 할 게 없느냐’며 비웃음을 샀다”고 털어놨다. 교사가 된 뒤에도 불편한 시선은 떠나지 않았다. 최근에는 한 여자아이의 부모로부터 “선생님이 아이 엉덩이를 닦는 게 불쾌하다”는 취지의 항의 전화를 받았다. 이 씨는 “여교사가 남자아이의 대소변을 닦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나는 교사에 앞서 남자로 보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지방에서 아이돌보미로 활동하는 공영철 씨(56)도 여성가족부 건강가정지원센터가 제공하는 이수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남자가 왜 여기 있느냐”며 숙덕대는 중년 여성들 틈바구니에서 껄끄러운 열흘을 보내야 했다. 공 씨는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남녀가 따로 없다”며 “그저 아이들이 좋아 지원했을 뿐”이라고 말했다.이현혜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는 “성에 관한 고정관념은 한번 형성되면 고치기 어렵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올바르게 교육하는 게 중요하다”며 “아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대중매체와 보호자”라고 강조했다.실제 대중매체에서는 여전히 직업에 대한 성차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지난해 9월 진흥원이 일주일간 6개 방송사의 시청률 상위 드라마 22편을 분석한 결과 회사 임원이나 중간관리자 역할은 대부분 남자(73%)였고 변호사 의사 등 전문 직업군 또한 여성보다 남성이 많았다. 반대로 요리연구가 백종원 씨가 진행하는 ‘집밥 백선생’ 같은 프로그램은 ‘셰프(전문 요리사)’뿐 아니라 집밥을 만드는 사람도 남자일 수 있다는 인식을 퍼뜨리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교수는 “대중매체에서 성평등 인식을 계속 개선해 나가면서 동시에 부모들에 대한 교육도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동안 성평등 교육은 아이들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는데, 아이들 스스로 인식을 바꾸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접하는 환경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부모 교육에 더 가중치를 두고 있다”며 “우리도 학교나 직장, 지방자치단체에서 성인들이 성평등 교육과 시민교육을 접할 기회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지금 신생아실에 산모님 아기랑 다른 아기 둘뿐이에요.” 신생아실 간호사가 말했다. 출산한 날 밤부터 2시간에 한 번 신생아실 옆 수유실에서 수유를 시작했는데, 통 다른 산모를 볼 수 없어 의아했다. 알고 보니 산모가 나랑 다른 산모 달랑 둘 뿐이라는 거다. 다음날, 병원을 찾은 가족들과 신생아 면회실에 들어가 보니 정말 그 넓은 신생아실에 대부분이 빈 침대였다. 생각해보면 출산했던 날 분만실도 텅 비어 있었다. 검사를 받고 아기를 낳은 뒤 후처리를 끝내고 나갈 때까지 다른 산모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모두 합쳐 4시간 정도밖에 안 걸린 걸 감안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내 출산 병원이 2차병원급의 작은 동네병원이긴 했다. 그래도 그동안 둘째, 셋째를 모두 이 병원에서 낳으면서 그처럼 사람이 없는 걸 본 적이 없다. 한때 다른 산모들로 가득했던 4인실, 6인실 등 다인병실도 이제 다른 부인과 환자들의 차지가 돼있었다. 한 번은 다인실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신생아는 병원 원칙상 다인실에 머물 수 없다) “신생아는 아니고 그보다 큰 아기 환자 울음소리”라고 했다. 부인과 환자로도 병실이 다 차지 않아 소아청소년과 환자까지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산후조리원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조리원 역시 내가 둘째, 셋째 때 모두 산후조리를 한 곳이다. 당시 내가 머무는 동안에만 10~20명의 산모들이 들고 나며 북적댔던 기억이 있다. 한데 이번에 와서 보니 산모 수가 나를 포함해 4명에 불과했다. 일주일 뒤 2명이 추가로 들어오긴 했지만 그래봐야 6명. 산모방은 총 4개층에 걸쳐있는데 층마다 사람이 한둘뿐이라 밤이 되면 빈 건물처럼 괴괴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신생아 40만 명 선 붕괴’ ‘합계출산율 1.0 미만 눈앞.’ 이런 기사들을 써왔던 나에게도 막상 맞닥뜨린 이런 저출산의 현실은 놀라운 것이었다. 내가 셋째를 출산한 것이 불과 3년 전인데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정말 이렇게 출생아가 줄었단 말인가. 전문가들이 ‘이르면 내년 출생아 수가 20만명대로 주저앉을 수도 있다’고 할 때마다 머리로는 ‘그럴 수 있겠다’ 싶어도 솔직히 ‘설마…’했는데. 혹시 한여름이라 출산율이 다소 떨어진 건 아닐까? 조리원 직원들은 세상물정을 모른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달뿐만이 아니에요. 요새 정말 아기를 안 낳는다니까요.” 생각해보면 얼마전 산부인과의 대명사로 알려진 서울 제일병원도 ‘저출산으로 인한 경영난’을 호소하다 임금을 체불해 파업사태에 이르지 않았던가. 한때 자리가 없어 못 들어갔다던 제일병원 연계 산후조리원도 폐쇄한지 벌써 1년이 됐단다. 대형병원도 그럴진대 내가 다닌 곳을 비롯해 중소규모 산부인과와 산후조리원은 오죽했을까 싶긴 하다. 출산 전 기획기사용으로 산부인과에 대해 취재한 적이 있는데, 도서지역 산부인과와 분만병원들도 상황이 갈수록 더 녹록찮다고 했다. 보건복지부는 산부인과 시설이 부족한 지역에 산부인과·분만병원을 지원하는 ‘분만취약지 사업’을 몇 년 전부터 시행하고 있다. 한데 정부의 자금, 인력 지원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은 못하겠다”는 병원들이 나오는 상황이란다. 도서지역 산모들조차 출산횟수가 줄고 노산(老産)이 많아지다 보니 기왕 한 번 출산할 거 가까운 작은 병원보다 멀지만 큰 병원에서 진료받기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어쩌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온 것일까. 사실 조리원 산모들 이야기만 들어봐도 답이 나왔다. “아이를 키울 돈이 부족해서” “맞벌이 부부라 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어서” “시부모님은 일하시고 친정엄마는 몸이 안 좋으시다보니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등. 그러고 보면 나를 둘러싼 여러 보육의 제반상황은 무척 좋은 편이다. 가계소득도 중산층 수준이고, 친정이 바로 코앞이라 언제든 급할 때면 아이를 맡길 수 있다. 더구나 ‘맞벌이+다자녀’라는 조건 덕에 정부의 각종 보육 서비스(어린이집, 아이돌보미 등)는 최우선으로 이용하고 있다. 양가 부모님들도 모두 건강하시고, 우리 부부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으셔야 하는 분도 없다. 실상 나는 최근 저출산을 일으키는 각종 보육의 장애요소들을 대부분 겪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자녀 엄마라는 이유로 본의 아니게 보육 전문가란 소리를 듣고 있지만, 나는 보육을 잘 한 게 아니라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인 셈이다. 만약 내가 가진 조건들 중 하나라도 삐걱댔다면, 예를 들어 친정엄마가 몸이 불편하셔서 아이를 봐주실 수 없는 처지였다면, 시댁이 경제적으로 어려워 매달 돈을 보태드려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어린이집이나 아이돌보미를 이용할 수 없었다면, 과연 내가 지금처럼 아이를 4명이나 낳을 수 있었을까? 지난 한 주 병원과 산후조리원에서 새삼 나의 ‘좋은 운’을 깨닫고 겸허해졌다. 남들이 ‘애국자’니 ‘천연기념물’이니 추켜 세워주니 나도 모르게 잠깐 대단한 투사라도 된 양 우쭐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청년들은 나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나도 당신 같은 처지면 아이를 낳았을 거예요’라고. 어찌 보면 이번 육아휴직은 잠시 현실과 동떨어져 숫자로만 저출산을 바라봤던 내게 다시 현실을 면밀히 들여다보라고 하늘이 준 기회일지 모르겠다. 또 일을 쉬게 됐다며 한탄했었는데, 기왕에 하는 일 더 잘 하라고 ‘복덩이(태명)’가 온 것일지도.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