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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6~2025-12-06
칼럼100%
  • [이철희 칼럼]비상계엄 1년, 실용외교 6개월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주 중동·아프리카 순방을 다녀와서도 “국력을 키우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에게 지난 6개월은 대한민국 최고위 외교관으로서 각국의 이익이 맞부딪치는 최전선에서 국가 간 힘의 차이, 그것이 결정하는 역학관계, 나아가 국제질서의 냉혹한 현실을 온몸으로 절감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거듭된 다짐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아 보인다. 이 대통령의 소회는 이렇게 이어졌다. “이 모든 힘의 원천은 국민의 단합된 힘이다. 많은 것을 두고 다투더라도 가급적 선의의 경쟁을 하고 불필요한 역량 낭비가 최소화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국민적 통합을 강조하는 메시지일 테지만 한편으론 묘한 가시 같은 게 느껴졌다. 2주 전 한미 관세·안보 협상을 문서화한 공동 설명자료(팩트시트) 발표 당시의 발언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정말 어려웠던 것은 ‘빨리 합의해라’ ‘빨리 못하는 게 무능한 거다’ ‘상대 요구를 빨리빨리 들어줘라’ 이런 취지의 압박을 내부에서 가하는 상황이 참으로 힘들었다. 국익에 반하는 합의를 강제하거나 실패하기를 기다려서 공격을 하겠다는 심사처럼 느껴지는 내부적인 부당한 압력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면에서 힘센 강자와 협상을 하는데 자꾸 발목을 잡거나 왜 요구를 빨리 안 들어주느냐고 하는 것은 참 견디기 어려웠다.” 이 대통령이 직접 마이크를 잡고 발표에 나선 것도 정작 이 말을 하고 싶어서가 아닌가 여겨질 만큼 야당 측을 작심하고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여야 간 갈등과 대결이 여의도를 벗어나 정부와 대통령실까지 넘나드는 게 일상화되긴 했지만 대통령이 중요한 대외 협상 결과를 공개하는 자리에서 꼭 그런 발언을 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사실 새 정부 6개월의 외교 성적을 놓고선 대체로 평균 이상, 특히 악조건에서도 선방했다는 평가가 많다. 임기 초 기대심리가 반영된 허니문 효과에다 바닥을 친 전임 정부의 기저효과 덕도 있다지만 후한 점수의 상당 부분은 도널드 트럼프 2기 미국 행정부를 상대로 한 새 정부의 대응, 특히 이 대통령의 인상적인 개인기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8월 워싱턴 회담 직전 “한국에서의 숙청 또는 혁명” 의구심을 제기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귀에 쏙 박힐 칭찬을 쏟아냄으로써 팽팽하던 첫 대면의 긴장감을 일거에 누그러뜨렸다. 나아가 10월 경주 회담에선 황홀한 금관 선물을 받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핵추진 잠수함 연료 공급’을 요청하는 승부수를 던져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필요에 따라 굽히고 펼 줄 아는 능굴능신(能屈能伸)의 처세를 강렬하게 보여준 두 장면이었다. 그러니 “영혼까지 갈아 넣었다”는 자평도 허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시작일 뿐이다.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력을 기본 축으로 삼되 한중 관계도 안정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새 정부의 실용외교는 이제야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다. 당장 두 이웃 중일 간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첨예해지는가 하면 세계의 빅2 미중 간엔 경쟁 속 빅딜이 모색되는 미묘한 시기에 접어들었다. 실용외교는 그 용어 자체로 꽤 실용적이다. 그게 정작 뭔지 실체는 불분명하지만 넣기에 따라선 뭐든 채울 수 있는 그릇이다. 실용외교의 요체는 냉철한 현실 인식과 유연한 대응, 특히 섬세한 균형감각일 것이다. 그러나 유연성은 기회주의로, 균형감각은 줄타기로, 나아가 경박함과 비겁함으로 비난받기 쉽다. 성공을 위해 국민적 공감과 이해가 우선돼야 하는 이유다. 실용외교의 대척점엔 윤석열 정부의 ‘가치외교’가 있다. 이념에 갇힌 ‘동맹 몰빵’으로 흐르긴 했지만 그때 이룬 워싱턴 선언, 캠프 데이비드 합의의 한미 확장 억제 강화와 한미일 협력 기조는 이어지고 있다. 따지고 보면 가치외교도 실용외교도 세계 정세의 흐름, 특히 미국의 정책 방향성에 따른 적응이었다. 세계를 ‘민주 대 독재’로 바라본 조 바이든 행정부에, 동맹에 더 가혹한 거래를 요구하는 트럼프 시대에 맞춘 불가피한 선택인 것이다. 내일이면 12·3 비상계엄 1년이다. 계엄 선포문은 민의의 전당 국회마저 ‘괴물’이 됐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국민이 목도한 것은 독선에 사로잡혀 모든 반대자를 악마화하고 스스로 ‘진짜 괴물’이 된 권력자였다. 그 씨앗은 임기 초에 이미 심어졌다. 국정 운영, 특히 대외 정책에 대한 과도한 자부심과 일방통행식 밀어붙이기 끝엔 야당에 대한 책임 전가와 적개심만 남았고, 자제력을 잃은 권력이 향한 곳은 거대한 망상과 자기 파괴의 막다른 길이었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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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희 칼럼]김정은은 만만하지 않았다

    “저는 분명히 기분이 상했고, 이를 각하에게 숨기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것보다 그 이상을 했습니다. 하지만 각하가 해준 게 무엇입니까. 어떤 조치가 완화됐다든가 군사훈련이 중단됐습니까. 각하가 우리 관계를 오직 당신에게 득이 되는 디딤돌로 여기는 게 아니라면 저를 주기만 하고 아무런 대가도 못 받는 바보처럼 보이게 만들지는 않을 겁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2019년 8월 5일자)에서 깊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발신 시점은 6·30 ‘판문점 번개’ 회동 한 달쯤 뒤였다. 2·28 ‘하노이 노딜’의 충격에 빠져 있던 김정은은 트럼프의 트위터 깜짝 제안을 받고 한걸음에 달려 나왔다. 트럼프에게 ‘북한 땅을 밟은 최초의 현직 미국 대통령’이란 새로운 기록도 추가해 줬다. 하지만 북-미 간 상황은 달라진 게 없었다. 김정은은 편지에서 북-미가 실무회담을 하기로 했음에도 한미 연합훈련이 그대로 실시되는 데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트럼프의 쇼에 들러리만 서고 말았다는 배신감을 토로한 이 장문의 편지를 마지막으로 둘 사이의 ‘러브레터’는 끊겼다. 이후 스톡홀름에서 실무회담이 열렸지만 아무런 진전 없이 결렬됐고, 그해 말 김정은은 자력갱생과 군사력 강화를 내건 ‘정면 돌파’를 선언했다. 지난주 트럼프의 거듭된 러브콜에도 김정은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북-미 정상 간 번개 만남 2탄은 무산됐다. 트럼프는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것보다는 지난 6년의 시간차를 너무 가볍게 본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김정은으로선 당장 6년 전 한때의 반짝 기대감과 깊어진 실망, 그리고 오래 이어진 쓰라림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더욱이 지금의 김정은은 트럼프에게 매달리던 6년 전의 그가 아니다. 그간 차곡차곡 핵·미사일 무기고를 늘려온 데다 러시아 파병이란 승부수를 통해 반(反)서방 진영의 일원으로 중·러 정상과 나란히 설 만큼 위상을 끌어올린 터다. 사실 트럼프가 이번에도 번개 제안을 해올 것임은 북한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그래서 미리부터 불응 방침을 세우고 대비한 듯하다. 트럼프의 순방 기간에 북-미 관계를 책임진 최선희 외무상을 러시아로 출장 보낸 것도, 전략순항미사일 시험 발사라는 저강도 도발을 한 것도 미리 준비한 대응 수순으로 보인다. 다만 세계 최강 권력자가 그렇게 매달리다시피 하는데도 김정은이라고 마냥 무시하기만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막후에선 비공식 채널을 통해 완곡한 거절의 뜻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김정은은 이번 무반응으로 대미 대화 조건, 즉 ‘비핵화 집념을 버리고,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한 상태에서 적대시 정책 철회를 논의해야 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렇게 번개는 불발로 끝났지만 트럼프는 김정은을 만나러 “다시 오겠다”고 거듭 밝혔다. 한미 정상회담에선 사뭇 진지하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남북이) 공식적으로 전쟁 중이라는 것을 알지만,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걸 위해 김정은과 또 모두와 함께 매우 열심히 노력할 겁니다. 시간이 조금 걸릴 수 있고, 조금 인내심을 가져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해결될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합니다.” 사실 트럼프에게도 6년 전 기억의 한편엔 불편함이 남아 있다. 하노이 결렬 직후부터 트럼프는 자신이 너무 거칠게 몰아붙인 게 아닌지 걱정했다고 한다. 존 볼턴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에는 재무부의 대북 제재를 취소했다가 번복하는가 하면 연합훈련 중단을 놓고 참모들과 충돌하기도 했던 트럼프의 갈팡질팡 행적이 적나라하게 소개돼 있다. 물론 지금의 트럼프도 그때와는 다르다. 주변에 그를 막아서는 참모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이번에 번개가 성사됐다면 6년 전처럼 소득 없는 깜짝쇼로만 끝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손쉽게 옛날의 플레이북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그저 손짓하면 김정은이 냉큼 달려올 것으로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이번 ‘밀당’에선 김정은이 한 수 위였다. 번개 2탄 불발이 거듭 확인시켜 준 것은 김정은에 대한 트럼프의 유별난 집착이다. 김정은이 적당한 거리를 두려 할수록 트럼프의 열망은 더 커진다는 워싱턴포스트의 관찰은 적확해 보인다. 지금 한반도엔 트럼프의 파격이야말로 80년 냉전 구도를 깰 유일한 기회라는 기대와 함께 그 변덕에 좌우되는 불확실성의 위험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걱정이 크게 엇갈린다. 그 간극을 좁히는 일이 페이스메이커를 자처한 우리에게 맡겨진 시급한 책무일 것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5-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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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희 칼럼]주한미군 앞에 놓인 ‘3대 테스트’

    미국 국방부가 최근 80쪽가량의 새 국가방위전략(NDS) 작성을 마무리해 고위 관계자들에게 회람시켰다고 한다. 국방의 우선순위와 목표, 방위계획과 전력구조 등을 담은 NDS는 기밀로 분류된다. 대신 10∼20쪽의 요약본이 한 달쯤 뒤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는 이 NDS를 기반으로 미군 전력을 전 세계 어디에 얼마나 배치할지 결정하는 글로벌태세보고서(GPR)도 늦여름 또는 초가을 완료할 예정이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이 올해 초 NDS 잠정지침을 통해 엘브리지 콜비 정책차관에게 제시한 우선순위는 △미국 본토 방위 △중국에 대한 억제 △동맹·파트너의 책임 분담 등 세 가지다. 국경수비와 영공방어를 넘어 불법이민 같은 국내 문제에도 군의 역할을 주문하는가 하면, 중국의 대만 침공을 최우선 단독 시나리오로 삼아 대비 방안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면서 유럽과 중동, 동아시아 방위는 그 지역 동맹들에 맡기도록 했다. 새 NDS와 GPR 완료를 앞두고 세계 각국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동맹들 사이에선 미국의 지나친 비밀주의와 일방주의에 대한 볼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당장 주한미군을 두고도 현재 2만8500명의 약 16%인 1개 전투여단을 빼낼 것이라는 외신 보도부터 65%의 대규모 감축을 권고하는 싱크탱크 보고서까지 나왔다. 주한미군의 변화는 불가피해 보인다. 앞으로 그 역할과 규모는 세 가지 중요한 검증 절차를 거쳐 조정될 것이다. 그 첫 번째가 이른바 ‘콜비 관문’이다. NDS와 GPR 작성 책임자로서 펜타곤 서열 3위인 콜비 차관은 중국의 패권 도전 저지에 집중하자는 우선순위론(prioritizers)의 대표 주자다. 그는 주한미군도 중국 견제로 역할을 조정하고 한국군이 북한 방어를 전담토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콜비도 이른바 ‘동시 전쟁의 문제’와 북한 핵무장이라는 주요 변수를 무시하진 않는다. 대만해협과 한반도 어디서든 전쟁이 나면 두 개의 동시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큰데, 그 경우 미국이 중국을 저지할 때까지 한국은 홀로 버텨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편 북한 핵무기는 콜비에게도 난감한 문제다. 결국 최후의 선택지로서 ‘우호적 핵확산’도 고려할 수 있다는 선에서 얼버무리고 만다. 두 번째 시험대는 이른바 자제론 그룹(restrainers)의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테스트’다. 펜타곤 등 안보기관을 장악한 자제론은 미 본토 방위, 나아가 서반구 안보의 공고화에 주력하자는 고립주의 노선이다. 이들은 미군 전력이 너무 중국 가까이 공세적으로 배치돼 있어 중국을 억제하기보다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다며 후방으로 이동 배치할 것을 권고한다. 심지어 대만 방어를 위한 미군의 직접 개입도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중국의 공격에 취약한 제1도련선(일본 규슈∼오키나와∼대만∼필리핀)의 전력을 빼내 제2도련선(일본 혼슈∼괌∼사이판∼인도네시아) 너머로 옮길 것을 제안한다. 한반도는 물론이고 오키나와의 주일 해병대까지 빼내고 대만의 소수 군사훈련단도 철수하자는 것이다. 다만 새로 미군을 배치할 기지가 마땅찮고 인프라 건설엔 비용이 많이 든다는 문제가 있다. 세 번째 관문은 ‘최고 딜 메이커’ 트럼프 대통령이란 불가측 불확실성 변수다. 트럼프는 동맹 간 거래에 터무니없는 손익계산의 잣대를 내밀거나 예상 밖의 조건을 내걸기 일쑤다. 다만 디테일엔 전혀 관심이 없는 트럼프인 만큼 정상 차원에서 우호적 타협을 이룬 뒤 실무적으로 세부 쟁점을 풀어가는 협상 전략이 통할 여지도 있다. 트럼프는 최근 카롤 나브로츠키 폴란드 대통령과 만나 이례적으로 “폴란드가 원하면 더 많은 군인을 두겠다”고 밝혔다. 자신과 죽이 잘 맞는 정치인, 나아가 유럽에서 가장 높은 비율로 국방비를 늘린 폴란드에 대한 배려였다. 그런데 트럼프는 지난달 이재명 대통령과 만나선 주한미군 감축에 대해 “우리는 친구이기 때문에 지금 말하고 싶지는 않다”고만 했다. 주한미군의 미래 앞엔 중국 견제론과 2선 배치론, 트럼프 변덕까지 산 넘어 산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 정부는 선제적 국방비 증액과 한미 조선 협력(마스가 프로젝트)을 통해 일단 트럼프의 충동적 철수론을 눌러놓은 모양새지만 ‘동맹 현대화’라는 이름의 양국 간 줄다리기는 이제부터 시작일 것이다. 그간 주한미군은 동맹의 유일한 지표처럼 여겨졌다. 작은 변화나 조정도 국내 여론이나 정치 풍향에 민감하게 작용했다. 앞으로 한미 간 논의 과정에서도 논란과 파장은 적지 않을 것이다. 진짜 시험대에 오른 것은 동맹의 내구력일지 모른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5-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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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희 칼럼]달러와 메달, 트럼프를 춤추게 할까

    냉전 종식 이후 일극(一極)의 국제질서를 이끌던 미국이 전 세계에 ‘강대국 간 경쟁’의 시대가 왔음을 알린 것은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의 2017년 국가안보전략(NSS) 문서였다. 문서는 “이전 세기의 현상이라 묵살됐던 강대국 간 경쟁이 돌아왔다”며 미국 대외정책의 근본적 전환을 예고했다. 다만 그게 대통령의 생각은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다. 트럼프가 자신의 서명이 선명한 문서를 한 번쯤이라도 제대로 읽어봤는지조차 의문이었다. 그는 오로지 ‘아메리카 퍼스트’ ‘힘을 통한 평화’ 같은 자신의 정치적 구호에만 주목했다. 중국, 러시아를 현상 타파를 노리는 수정주의(revisionist) 국가로 규정한 문서 내용과는 딴판으로 트럼프는 기자들에게 “중, 러와의 위대한 파트너십 구축”을 장황하게 얘기했다. 그처럼 트럼프 1기는 ‘대통령 따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따로, 국무부와 국방부 따로’ 제각각 굴러가면서 끊임없이 삐걱거렸다. 행정부 내 이른바 ‘어른들(grown-ups)’은 반기와 사보타지로 저항하다 해고 통보에 하나둘씩 떠나야 했다. 국제질서의 거대한 변화를 예고한 2017년 NSS의 집필 책임자 H R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도 그 혼돈의 희생자였다. 오히려 트럼프 1기 NSS의 대외 인식과 정책 변화를 선명하게 계승한 것은 조 바이든 행정부였다. 바이든의 생각은 모든 면에서 트럼프와 달랐지만 중, 러를 포용해 국제사회로 편입하려 한 ‘관여(engagement) 정책’이 실패로 끝났다는 트럼프 1기의 진단에 동의했다. 그래서 2022년 NSS는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로서 중, 러와의 경쟁, 특히 미국 패권에 도전하는 ‘의도와 능력을 가진 유일한 경쟁자’ 중국을 향해 본격 경쟁을 선언했다. 그렇게 공화·민주 양당 정부로 이어진 대외정책 컨센서스는 트럼프 2기 들어 실종됐다. 트럼프의 변덕만큼이나 미국의 정책은 혼미하다. 군사 충돌과 경제 전쟁으로 강대국 간 경쟁은 여전하지만 트럼프는 오히려 중, 러 독재자와의 ‘강대국 간 결탁(collusion)’을 꿈꾸는 듯하다. 며칠 뒤엔 러시아 대통령과, 그리고 몇 달 뒤엔 중국 주석과 만나 큰 거래 판을 벌인다. 특히 중국과는 경제 전쟁에 몰두하면서도 군사적 긴장은 원치 않는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지켜줄 것이냐는 질문에도 트럼프는 “내 카드를 공개하지 않겠다”며 답을 피할 뿐이다. 그런데도 관료와 군은 관성대로 중국과의 긴장을 높일 포위망 구축과 동맹·우방에 대한 안보비용 부담을 몰아붙인다. 그런 트럼프와 참모, 군 사이의 미묘한 틈새는 쉽게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달 말 이재명 대통령과 예측불허 트럼프의 만남은 아슬아슬하다. 황제의 궁정이나 다름없는 백악관에서의 첫 대면은 일단 이 대통령의 언변과 친화력, 임기응변에 달렸다. “필요하다면 가랑이 밑도 길 수 있다”고 했던 만큼 실용외교에서 개인기는 필수다. 거기에 우리 정부는 트럼프의 귀를 사로잡을 두 가지 카드를 준비하는 듯하다. 트럼프에게 모든 것은 달러 기호($)로 환산돼야 한다. 또 주변엔 늘 황금빛 트로피나 메달, 소품들이 따라붙어야 한다. 그런 트럼프의 허영과 자기애를 채워줄 스토리가 바로 돈과 노벨평화상이다. 정부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수준의 국방비 대폭 증액 계획을 선제적으로 준비한다고 한다. 우리의 군사력 자강을 통한 대북 방어 주도 의지를 확고히 보여주면서 미국산 무기 구매, 군함 건조 협력 등 미국에 가져다 줄 동맹 이익을 구체적 숫자로 보여줄 계획인 듯하다. 두 번째 공략 포인트는 트럼프의 노벨상 집착이다. 이미 많은 해외 정상들이 추천서까지 들이밀며 환심을 샀지만 트럼프에게 한반도는 노벨상 꿈의 원조격 무대였다. 트럼프의 관심도 한국보다는 김정은에게 쏠려 있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 이래 온갖 대북 유화조치를 내놓은 것도 ‘트럼프 코드’ 맞추기의 일환일 터. 여기에 8·15 때 대북 메시지를 던져 의미 있는 소식이라도 온다면 트럼프의 귀를 쫑긋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눈치다. 그렇게라도 트럼프의 귀를 활짝 열게 한다면 우리 얘기를 할 공간이 생긴다. 첫 만남인데 굳이 공동성명 같은 합의문이 나와야 할지는 의문이다. 정상 간 솔직한 대화가 중요하다. 무엇보다 중국 견제를 위한 주한미군 역할 조정처럼 동북아 긴장을 부를 사안은 충분한 비공개 조율이 필요함을 역설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의 국방비 증액에 미국의 핵우산 강화는 필수이며, 향후 북-미 대화도 비핵화 목표를 분명히 하고 한국이 배제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5-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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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희 칼럼]전작권 제때 제대로 가져올 기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월 각국에 상호관세율을 일방적으로 매겨 발표한 이래 석 달 넘도록 합의를 이뤘다고 발표한 나라는 영국과 베트남 두 나라뿐이다. 그런데 트럼프가 이달 초 ‘위대한 합의’라며 공개한 베트남과의 합의를 두고선 의문이 커지고 있다. 두 나라 모두 합의 문서를 공개하지 않고 있어 언제 시행될지, 시행은 되는 건지조차 불확실하다. 베트남 협상단은 미국과 11% 관세에 합의했다고 여겼지만 트럼프가 막판에 끼어들어 또럼 공산당 서기장과 통화한 뒤 두 배 가까운 20% 관세를 발표했다고 한다. 막판 뒤통수를 맞은 베트남 측은 실망과 분노에 빠졌고, 백악관 측은 “협상팀이 조율했어도 마지막 승인은 ‘정상 대 정상’의 일”이라고 말한다. 트럼프만이 유일한 최종 결정자라는 얘기다. 트럼프는 지난주 또다시 각국에 ‘관세서한’을 보내 관세율을 일방 통보했다. 어떤 협상 결과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멋대로 뒤집기가 예사고, 개인적 친소관계마저 주요 기준이 된다. ‘남미의 트럼프’로 불리던 브라질 전직 대통령이 쿠데타 음모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자 “마녀사냥”이라며 브라질 정부에 50%의 관세를 통보한 것처럼 트럼프 관세는 이제 타국의 국내 정치와 형사재판에까지 개입하는 만능 무기가 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 정부로서도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하는 형국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최근 워싱턴을 다녀온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동맹의 엔드 스테이트(end state·최종 상태)까지 시야에 넣은 협상”, 즉 통상·투자·구매·안보를 망라한 패키지 협의를 언급하면서 한미 정상회담 조기 추진 목소리는 한층 커졌다. 이 대통령과 트럼프의 첫 만남은 단순 외교 이벤트를 넘어 실질적인 담판의 장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트럼프와의 회담은 각국 정상에겐 흥망이 걸린 도박판이 됐다. 우방 정상을 불러놓고 모욕과 좌절을 안긴 트럼프는 이제 백악관 집무실을 각국 정상들이 늘어놓는 칭찬과 간청의 경연장으로 만들었다. 그런 위험한 무대에 이 대통령이 올라야 한다. 더욱이 무역-안보 패키지 협상은 이미 트럼프가 “정말 아름답고 효율적 방식”이라던 ‘원 스톱 쇼핑’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정부가 그간 무역-안보 분리 기조에서 ‘패키지 딜’을 통한 연계 전략으로 전환한 것은 불가피한 고육지책으로 읽힌다. 통상과 투자에서 미국의 요구를 맞춰주기 어려운 터에 트럼프의 또 다른 관심사인 방위비 등 안보 사안에선 우리도 나름의 카드가 있다는 판단에서일 것이다. 특히 트럼프 2기 국가방위전략(NDS) 보고서가 늦여름에 나올 것으로 예고된 만큼 우리에게 닥칠 각종 안보 과제에 대한 선제적 대응도 시급한 시점이다. 이런 와중에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문제가 지난 20년간 이어진 논란과 갈등의 연장선에서 다시 정치권 논쟁의 대상이 됐다. 전작권 전환은 노무현 정부가 2005년 추진을 공식화한 이래 그 시기·조건을 둘러싸고 한미 간에도 합의와 번복이 거듭된 민감한 사안이다. 그래선지 이 대통령도 대선 공약집에 ‘한미동맹 기반 위에 전작권 환수 추진’이라고만 밝혔다. ‘전환’이 아닌 ‘환수’라는 용어를 쓰면서도 그 시기나 완급, 조건도 언급하지 않았다. 대통령실 설명대로 전작권 전환은 한미 간 장기 현안으로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트럼프 1기 때도 양국 합의에 따라 추진했던 사안이다. 더욱이 미국이 안 내주려 한다면 모르지만 트럼프 행정부도 마다하지 않는 터에 우리의 협상 카드가 되기 어렵다. 우리가 말을 꺼내는 순간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 주한미군 역할 조정 같은 요구를 쏟아낼 수도 있다. 다만 전작권 전환은 트럼프의 방위비 증액 압박에 호응하면서 우리의 자강력을 키우기 위한 설득 카드로 삼을 수 있다. 전작권 전환을 위한 핵심 조건은 연합작전 주도 능력과 북핵 위협 대응 능력을 갖추는 것이고, 그를 위한 지휘통제와 감시정찰, 미사일방어 능력을 구비하는 데는 막대한 국방 예산이 소요된다. 숫자와 실적을 중시하는 트럼프에게 우리의 국방력 확충, 나아가 미국산 무기 구매 계획은 무시할 수 없는 가산점이 될 것이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내세운 트럼프의 난폭함은 전 세계에 걸친 과잉 팽창이 미국의 쇠퇴를 불렀다는 비관주의에 기인한다. 트럼프 이후에도 이런 미국 군사력의 글로벌 수축 흐름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던 시대는 저물고 있다. 이미 세계 5위의 재래식 군사력을 자랑한다지만 세계적인 군비 증강 흐름에 한국도 예외일 수는 없다. 긴 호흡 속에서 동맹과 자강 사이의 균형점을 찾으며 한미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5-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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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희 칼럼]동맹은 ‘외계인 침공’ 때까지 안녕할까

    미국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이 지난달 공개한 ‘가디언타이거 도상연습(TTX)’ 보고서는 충격적이다. 미 국방부와 군 관계자 등 전문가 60여 명이 참여한 두 차례의 TTX는 각각 북한의 서해 도발(가디언타이거Ⅰ)과 중국의 대만 침공(가디언타이거Ⅱ) 시나리오로 시작되는데, 종국엔 북한의 전술핵 사용이란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진다. 두 워게임은 모두 미국이 끝내 핵 반격을 주저하고 북 정권 종말 작전도 성공을 낙관하지 못한 상태로 종결된다. 가디언타이거Ⅰ에서 북한은 화학무기 공격에 이어 동해에서 저위력 전술핵 시위를 벌이는데, 그 대응을 놓고 미국 내 의견이 크게 갈린다. 국가안보회의(NSC)는 핵과 비핵 두 가지 옵션 가운데 비핵 쪽에 무게를 둔 권고안을 내놓는다. 군 수뇌부는 핵 반격이 아닌 최신 정밀타격 작전을, 주한미군은 핵·재래식 복합 총공세 또는 평양 인근 핵 공격을 각각 주장한다. 결국 이 워게임은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끝난다. 가디언타이거Ⅱ에서도 북한은 중국의 대만 침공에 맞춰 도발 수위를 높여가다 한국 공군기지에 전술핵 공격을 감행하고 괌 주변에 중거리미사일(IRBM) 4발을 발사하는 무력시위를 벌인다. 한미는 북 정권 종말 작전 개시에 합의하고 개성 인근에 대한 저위력 핵 공격도 고려한다. 그러나 이 역시 비관적 전망과 숱한 의문점만 남긴 채 끝난다. 한미가 대규모 지상·공중 반격 작전을 벌여 평양 근처에 접근하지만 북한의 추가 핵 공격 가능성에 주춤하고, 그러는 사이 중국이 대만 공세를 강화할 기회를 잡으면서 대만 함락 우려는 커진다. 이 워게임에서 확인된 것은 동맹의 동상이몽이다. 북한의 핵무기 사용에 미국은 북 정권 종말을 경고하지만 북한은 한낱 엄포로 여기고 미국도 갈팡질팡한다. 한국 역시 중국의 위협에 굴복해 주한미군의 대만 투입은 물론 탄약 반출마저 반대한다. 원치 않는 분쟁에 말려들지 않으려는 동맹 간 ‘연루의 위험’ 회피 경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번 워게임 보고서는 공교롭게도 미 국방부가 여름에 내놓을 새 국가방위전략(NDS) 작성이 한창인 가운데 공개됐다. 새로운 NDS는 중국의 지역 패권 저지를 최우선에 두고 동맹·우방의 ‘반(反)패권연합’ 구축부터 전 세계 미군의 재배치와 지휘체계 개편까지 포괄하는데, 두 개의 전쟁 시나리오는 그 ‘선택과 집중’을 위한 중요한 검증 기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 NDS 작성을 책임진 엘브리지 콜비 국방차관은 최근 영국 등 유럽 국가가 대만해협에 전함을 보내는 데 대해 힐난조의 우려를 표시하며 유럽 안보에나 집중하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괜히 오지랖 부리지 말고 미국의 발목이나 잡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같은 논리로 미국은 한국이 북한 방어를 책임지고 주한미군은 중국 억제로 돌리겠다고 할 게 분명하다. 워게임 보고서가 주한미군과 주일미군 통합 등 지휘체계의 업데이트를 권고한 대목도 눈에 띈다. 가디언타이거Ⅰ에선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전제로 한국군이 지휘하는 연합사령부(CFC)와 별도로 주한·주일 미군을 통합한 4성 장군급 동북아사령부(NEACOM)를 창설하는 옵션을 가동해 보기도 했다. NEACOM이 생기면 본부를 어디에 두는지, 주한미군사령관은 대장에서 중장으로 격하되는 게 아닌지 등 민감한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그래선지 일본의 최근 움직임도 심상찮다. 일본 정부는 최근 한반도와 대만해협, 남중국해를 하나의 전역(전시작전구역)으로 묶는 ‘원 시어터(One Theater)’ 구상을 미국에 제시한 뒤 ‘오션(OCEAN)’이란 용어로 대체해 전파하고 있다. ‘아시아판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체제의 구축에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야심인 것이다. 6개월의 리더십 공백 끝에 출범한 한국의 이재명 정부 앞엔 주한미군의 규모 감축이나 역할 조정 같은 워싱턴발(發) 청구서가 여섯 달 치 이자까지 붙어 줄줄이 날아들 기세다. 한미 동맹을 근간으로 삼되 중국에도 척지지 않겠다는 새 정부의 실용외교가 곧장 시험대에 선 셈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선거 기간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대만을 돕겠느냐’는 질문에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려 하면 그때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도 같은 질문에 “내 카드를 공개하고 싶지 않다”며 답을 피하는데, 이 대통령만 답을 강요당할 이유는 없다. 다만 주한미군을 한국에 묶어두지 않겠다는 미국에 맞서 북핵 도발을 막을 억제력을 약속받으려면 동맹의 마음을 잡아둘 우리의 가치를 보여야 한다. 적어도 미국 NDS가 나오기 전에.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5-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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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희 칼럼]트럼프 넉 달, 요란한 ‘문워크 외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6일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불쑥 예멘 후티 반군에 대한 공습 중단 사실을 기자들에게 알렸다. 그는 “후티 반군이 ‘제발 더는 우리를 폭격하지 말아 달라. 그러면 당신네 선박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요청했고, 우리는 그 말을 받아들여 즉각 폭격을 중단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항복했다”고 했다. 한데 좀 이상했다. 그런 ‘승리’를 트럼프가 그저 몇 마디로 슬쩍 넘길 일이 아닌데, 왠지 군색했다. 트럼프는 생뚱맞게 “2, 3일 뒤 엄청나게 큰 발표를 할 것”이라고도 했는데,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꼼수 아니었나 싶다. 이어진 뉴스들에서 그 이유는 드러났다. 미국과 후티 간 휴전을 중재한 오만 측은 양측이 서로를 공격하지 않기로 했다는 합의 내용을 전했다. 다만 후티 측 약속은 오직 미국만 공격 대상에서 제외하겠다는 것이었다. 후티는 “미국을 물리쳤다”며 대대적 선전에 나섰고, ‘이스라엘과 그 연관 선박’에 대한 공격은 계속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실제로 이후 후티의 이스라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후티 공습은 군사력 사용에 신중하던 트럼프가 모처럼 “완전 몰살”을 외치며 승인한 군사작전이었다. 항공모함 2척과 B-2 폭격기, 각종 전투기, 첨단 방공 시스템까지 중동에 추가 배치했고, 1000개 넘는 목표물을 집중 폭격한 2조 원 넘게 들어간 고비용 작전이었다. 하지만 작전 한 달이 지나도록 미군은 제공권 장악도 하지 못한 채 더 큰 전쟁으로 끌려들 수 있다는 우려만 커졌다. 결국 트럼프의 인내심이 바닥나면서 서둘러 출구를 찾은 것이다. 후티 공습 중단은 트럼프 2기 행정부 내 사실상 유일한 안보 매파였던 마이크 왈츠 국가안보보좌관이 전격 교체된 직후 이뤄졌다. 왈츠 경질은 J D 밴스 부통령을 필두로 한 마가(MAGA) 진영, 즉 신(新)고립주의 노선의 승리였다. 밴스는 작전 개시 전부터 “우리가 유럽을 돕는 실수를 하고 있다”며 반대했었다. 왈츠가 빠진 국가안보회의(NSC)는 일찌감치 마가 진영으로 전향한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지휘 아래 대대적 조직 축소에 들어갔다. 트럼프의 요즘 대외 행보를 보면 군사적 불개입, 외교적 해법 선호가 두드러진다. 트럼프는 지난주 중동 3개국을 순방하면서 오랜 적국이던 시리아에 대한 제재 해제를 선언하고 현상금 1000만 달러가 내걸렸던 지하디스트 출신 시리아 대통령과도 만났다. 트럼프는 그를 “젊고 매력적인 터프가이”라고 했다. 이란에 대해서도 “나는 영원한 적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며 새로운 핵 협상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과거 오바마 행정부가 이룬 이란 핵합의(JCPOA)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던 트럼프다. 핵심 쟁점인 우라늄 농축 문제를 두고 이란은 여전히 ‘고농축 우라늄은 폐기할 수 있지만 민간용 저농도 농축은 양보할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합의가 이뤄진다면 그 내용은 파기된 합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취임 100일을 넘긴 트럼프의 거래 본능은 여전하다. 하지만 그 성적이 신통치 않다. 위기를 고조시켜 협상으로 끌어내는 데는 능하지만 대부분 봉합 수준일 뿐 제대로 매듭짓는 것은 거의 없다. 중재인을 자처하지만 보증인, 실행인 역할은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평가한다. 막강한 군사력과 달러 패권을 가진 슈퍼파워로서 오지랖 넓게 나서지만 책임지는 일은 회피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동맹·우방에 대한 무신경이다. 후티와의 휴전은 물론이고 하마스와의 인질 협상에서도 이스라엘은 철저히 배제됐다. 트럼프는 인도-파키스탄의 전면전 위기에서 휴전 합의를 끌어냈다고 자랑했는데, 그간 ‘제3국 중재 반대’를 고수해온 인도로선 미국의 공치사에 불만을 삭여야 했다. 미중 관세 휴전을 두고도 “통일과 평화에 도움이 될 것”이란 실언(失言)으로 중국의 무력통일(복속)을 두려워하는 대만을 기함하게 만들었다. 트럼프의 외교 사전에 민주주의, 인권 같은 단어는 없다. 오직 편의적 실리주의만 있다. 때론 공직과 사익 간 구분조차 없다. ‘미국 우선주의’ 기치 아래 몰가치·불가측·무원칙의 요란한 뒷걸음질을 하고 있다. 앞으로 나가는 듯하지만 실제론 백스텝을 밟는 ‘문워크(moonwalk) 외교’인 셈이다. 이런 트럼프에 현상 타파 세력은 일제히 환호한다. 특히 ‘핵 국가’ 북한 김정은은 군사적 불개입과 스몰딜 타결, 게다가 뒷수습은 동맹에 떠넘기는 트럼프식 거래 셈법을 누구보다 예의 주시하고 있다. 당장 2주 뒤 선출될 새 한국 대통령이 마주할 현실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5-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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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희 칼럼]중국 견제, 트럼프는 얼마나 진심일까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기자인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 맨해튼의 젊은 부동산재벌 도널드 트럼프를 처음 만난 것은 1989년 뉴욕의 한 사교 파티에서였다. 당시 42세의 트럼프는 자신 못지않게 유명한 두 기자를 보자마자 “두 사람이 날 인터뷰하면 굉장하지 않겠느냐”고 즉석 제안했다. 그렇게 이뤄진 인터뷰 녹음테이프는 자료 더미 속에 30여 년간 처박혀 있었고, 뒤늦게 우드워드가 작년 말 펴낸 책 ‘전쟁(War)’에 그 내용이 소개됐다.트럼프는 자신의 모든 성공 비결을 ‘본능’이라고 설명했다. “내 최악의 거래는 내 본능을 따르지 않은 것이었다. 내 최상의 거래는 모든 이들이 절대 안 될 거라고 해도 순전히 내 본능에 따라 만든 거래였다.” 사람 다루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본능이 가리키는 대로 “어떤 사람에겐 킬러, 어떤 사람에겐 캔디, 또 어떤 사람에겐 둘 다”가 되는 식이다.그의 기본 철학은 어떤 경우에도 굽히지 말라는 것. “검사관들이 와선 완벽한 건물에 위반 딱지를 끊곤 한다. 나는 첫날부터 ‘꺼져라’고 한다. 그러면 그들은 더 많은 딱지를 붙인다. 계속 더 많이. 하지만 한 달이면 그들은 ‘이런 더러운 자식’이라 욕하고선 다른 누군가에게 가고 만다. 한 번 굽히면 큰 골칫거리가 된다. 깡패도, 노조도 마찬가지다.”트럼프는 오직 싸우고 이겨서 살아남는 본능으로 길러진 사람이다. 굽히지 않으면 그 어떤 손해도 승리로 만들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대선에 패배하고도 4년간 “승리를 도둑맞았다”고 외친 끝에 백악관에 재입성한 그에겐 영원한 승리의 생존 본능만 있을 뿐이다.트럼프 2기 출범 3개월, 그는 충동적 관세 폭탄으로 전 세계를 예측불허의 혼돈으로 몰아넣었다. 막무가내로 질러놓고 아차 싶으면 ‘유연성’을 내세워 뒤집고 미룬다. 그렇다고 굽히거나 물러선 것은 아니고 모두 ‘미치광이 전략’일 뿐이란다. 트럼프야말로 임금은 어떤 부끄러움도 없다는 군왕무치(君王無恥), 여우처럼 교활하고 사자처럼 난폭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즘을 21세기에 구현하고 있는 ‘혼돈의 제왕’일 것이다.이런 트럼프의 일관된 비일관성에는 그를 변호해야 하는 참모들도 뭐라 둘러대기 난감할 따름이다. 다만 좌충우돌 관세 폭주 끝에 마주한 중국과의 ‘치킨 게임’ 상황은 미국 내 초당적 반중 정서와 서방 진영의 중국 경계론에 기댈 수 있는, 즉 모든 혼란은 결국 중국을 꺾기 위해 불가피했다는 최상의 변명이 됐다.하지만 과연 트럼프는 이런 중국 견제론에 얼마나 진심일까. 사실 그에게 정책의 큰 그림은 없다. 그저 파편적인 생각뿐이다. 트럼프 1기 때도 참모들은 이런 ‘흩어진 점들의 군도(archipelago of dots·존 볼턴의 비유)’를 갖고 자기 해석대로 정책화해야 했다. 그러니 ‘트럼프 말 따로, 행정부 정책 따로’가 비일비재하면서 잦은 참모 경질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트럼프는 중국에 대해서도 무역적자에 대한 불만, 시진핑 주석과의 ‘좋았던 관계’ 이상의 정책 방향을 얘기한 적이 없다. ‘중국의 침공으로부터 대만을 방어할 것이냐’는 질문에조차 “내 카드를 공개하고 싶지 않다”며 언급을 피해 왔다. 이번에도 트럼프는 중국에 다각적 공세를 펴면서 협상에 나서라는 신호를 줄기차게 보내고 있다.혹자는 러시아와의 밀착도 중-러 간 분열을 유도하기 위한 ‘역(逆)키신저 전략’의 가동이라고 해석하지만 그건 트럼프와 푸틴 간 브로맨스를 위한 알리바이로 전락한 지 오래다. 중-러 ‘무제한 협력’에는 균열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서방 동맹에만 쩍쩍 금이 가고 있다. 결국 트럼프의 본능은 차르 푸틴, 황제 시진핑과의 ‘빅딜 쇼’로만 향하고 있다.외교안보팀도 그런 트럼프 입맛에 맞추기 바쁘다. 반중(反中) 강경파로 꼽히던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세계에 하나의 강대국만 있는 단극(單極) 질서는 비정상적”이라며 중-러가 주창하는 다극(多極) 체제론에 사실상 동조하고 나섰고, 중국 견제론자들은 목소리를 낮추고 있다. 최근엔 국가안보회의(NSC) 관료들이 ‘불필요하게 중국을 도발하는 네오콘’으로 지목돼 해고되면서 중국 매파(China hawks)는 아예 설자리를 잃은 분위기다.트럼프 취임 불과 석 달, 앞으로 45개월이나 남았다. 전 세계는 벌써 묻고 있다. 트럼프에게 과연 중국을 꺾겠다는 의지는 있는가. 미국은 정작 100년의 ‘롱 게임’을 벌이는 중국을 주저앉힐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 세계 질서를 파괴한 채 그 잔해 위에서 자기만의 승리를 외치는 트럼프를 바라보는 동맹의 처지는 어떨지 그 미래가 걱정되는 요즘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5-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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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희 칼럼]‘펜타곤 넘버3’가 한국을 추켜세우는 이유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국방부 정책차관에 지명된 엘브리지 콜비(45)는 똑 부러지는 악센트에 역사적 사례와 명언, 경구를 적절히 동원해 명쾌한 논리를 펴는 달변가다. 이달 초 상원 인준청문회에서도 콜비는 능란한 말솜씨를 보여줬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파괴적 리더십이 세계에 던진 소용돌이 속에선 그 역시 입조심을 해야 했다. 매사 거침없던 평소의 언사와 달리 민감한 이슈에선 매우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콜비는 태생적으로 트럼프 진영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할아버지가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지낸 데다 하버드대와 예일대 로스쿨을 나온 안보 전문가로서, 트럼프가 그토록 혐오한다는 워싱턴 엘리트그룹의 일원이다. 한때 국방장관 또는 국가안보보좌관 유력 후보로도 거론됐지만 국방부 ‘넘버3’ 자리에 그친 것도 트럼프 2기의 ‘기득권 적폐 청산’이란 기준에 그리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그럼에도 콜비는 TV 앵커와 억만장자가 각각 장관·부장관을 꿰찬 국방부에서 미국 안보전략 전반을 책임질 브레인으로 주목의 대상이 됐다. 특히 트럼프 주니어, 일론 머스크, J D 밴스 등 트럼프 2기 최측근들이 그의 인준을 밀고 있는데, 트럼프의 예측불허 변덕과 좌충우돌 행보에도 나름 일관된 정책 기조가 있음을 보여줄 이론가 역할을 기대하는 듯하다.사실 콜비는 트럼프 측근 그룹의 고립주의적 개입자제론(restrainers)과는 사뭇 결이 다른 우선순위론(prioritizers)의 대표 논객이다. 미국의 힘을 유럽·중동에서 아시아로 옮겨 중국 견제에 집중하자는 주장인데, 상원 다수를 차지하는 전통적 패권론자(primacists)의 불만을 살 수밖에 없다. 청문회에서도 콜비는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민주당 측과 ‘핵 가진 이란’을 감내하자는 과거 발언을 문제 삼는 공화당 측의 협공을 받았다.콜비는 현실주의자를 자처한다. 동맹관계 정립도, 방어범위 설정도 철저한 비용·편익 분석에 따라 우선순위를 매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2021년 발간한 책 ‘거부 전략(The Strategy of Denial)’에선 중국의 1순위 표적은 대만이 될 것이라며, 대만이 몰락하면 필리핀·베트남 방어도 어려워지면서 중국에 지역 패권을 내줄 것이라고 경고한다.그래서 콜비는 일찍이 ‘대만에 대한 전략적 모호성 정책에서 벗어나 명시적 안전보장을 약속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대만은 미국에 필수적(vital)이지만 실존적(existential)이진 않다’며 말을 살짝 바꿨다. 그는 청문회에서 대만해협의 군사적 균형이 크게 악화됐다며 “우리 군을 파괴할 수도 있는 헛된 노력에 가담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대만에는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의 10%로 대폭 늘릴 것을 주문했다.나아가 콜비는 “대만은 한국과 비슷해져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 한국은 이스라엘 폴란드와 함께 강력한 군대를 가진 모범적 동맹이다. 한국의 손꼽히는 경제력과 일본 방어를 위한 지정학적 위치, 군사적 역량을 높이 산다. 한데 그런 공치사엔 늘 다른 주문이 따르기 마련이다. 콜비는 한국의 역량이면 북한의 공격에 충분히 독자적으로 맞설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중국의 대만 침공에 맞춰 북한이 남침할 경우 한국 홀로 버텨야 한다고 강조한다.그는 한국의 핵무장에도 열린 태도를 보인다. 북한의 핵 고도화를 방해하면서 미사일방어(MD)를 개선하고 미국의 핵 억제력 가동, 중국에 대한 압박까지 모든 노력을 벌이고도 한계에 부딪힌다면 한국·일본의 ‘우호적 핵확산(friendly proliferation)’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핵 확산의 위험성과 전 세계에 미칠 엄청난 파장을 고려하면 결코 좋은 대안이 될 수 없는 ‘최후의 선택지’라는 지적도 빠뜨리지 않는다.결국 미국은 중국과의 큰싸움에 집중해야 하는 만큼 주한미군의 역할부터 재조정하면서 미국이 약속하지 못할 북핵 억제의 빈틈을 메울 방안으로 핵무장도 논의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으로선 어쩔 수 없이 핵무장을 용인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 올 수 있다는, 그렇다고 그 부정적 여파를 함께 감당해 주긴 어렵다는 정도의 얘기로 읽힌다.트럼프 2기 출범 두 달, 국제사회에 친절한 리더 국가는 사라지고 난폭한 패권 국가가 등장했다. 유럽은 자강(自强)을 외치며 ‘미국 뺀 서방’을 꾸리겠다고 한다. 하지만 막강한 군사력과 달러 패권을 쥔 미국이 없는 세계는 상상하기 어렵다. 동맹이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없는 한국엔 더더욱 그렇다. 국내적 혼란 속에서도 미국을 제대로 읽고 면밀히 대비해야 하는 이유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5-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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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희 칼럼]윤석열의 ‘잡종전쟁’

    “나라 안팎의 주권침탈세력과 반국가세력의 준동으로 대한민국이 위험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주권침탈세력’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새해 첫날 한남동 관저 앞에 몰려든 지지자들에게 보낸 한 장짜리 편지에서였다. 2년여 전 ‘반국가세력’이란 말을 불쑥 꺼냈을 때만큼이나 뜬금없던 그 말은 2주 뒤 체포 직후 공개된 육필 원고에서 정체를 분명히 드러냈다.윤 대통령은 그 글에서 “외부 주권침탈세력의 적대적 영향력 공작을 늘 경계해야 한다”며 ‘적대적인 영향력 공세를 하는 국가’로 사실상 중국을 지목했다. 그러면서 투개표 부정과 여론조사 조작은 국내 반국가세력과 국외 주권침탈세력의 합작품이라고 주장했다. 이른바 ‘회색지대 전술’ ‘하이브리드 전쟁’ 개념을 동원해 “군사도발과 전쟁을 하지 않고 공격 주체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 회색지대 하이브리드전을 주권침탈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며 부정선거 의혹에다 반(反)중국 정서를 얹어 거대 야당과 중국공산당 간 커넥션을 들고 나온 것이다.하이브리드 전쟁은 흔히 정규군의 재래전뿐 아니라 심리전 정보전 사이버전 같은 비군사적 수단을 동원한 21세기 복합 전쟁 양상을 설명하는 단어다. 하지만 잡종·혼종이란 뜻에서 보듯 전쟁의 온갖 양상을 포괄하는 개념일 뿐 실상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편의적 유행어라는 평가가 많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전쟁과 평화 간 경계를 흐트려 국가 간 일상적 경쟁과 갈등을 군사적 충돌이라는 진짜 전쟁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용어라고 지적한다.그럼에도 윤 대통령의 ‘국제적 검은 결탁’ 주장은 당장 지지층을 자극했다. 극성 지지 매체와 유튜브에선 ‘주권침탈세력’이란 말이 나오기 무섭게 중국의 선거 개입과 여론 조작을 주장하는 허위정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출처와 유포 과정조차 황당한 ‘선거연수원 중국 간첩 99명 체포설’을 시작으로 한 가짜뉴스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이런 허위정보는 고스란히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서 윤 대통령 측의 변론으로 이어지면서 확대 재생산됐다.그건 단지 여론전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윤 대통령에게 다급한 것은 외부의 적과 싸워야 할 군대를 국내 정적을 향해 이용한 데 대한 방어 논리였다. ‘야당의 패악질’이 과연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였느냐는, 나아가 닭 잡는 데 왜 소 잡는 칼을 썼느냐는, 보수적 동정론자마저 받아들이기 힘든 명분과 수단의 심각한 불균형을 해소해야 했다.그렇게 군색한 처지에서 ‘전쟁 아닌 전쟁’이란 모호하고 불순한 개념은 어디든 끼워 넣을 수 있는 맞춤형 열쇠였다. 전시·사변이 국토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하드웨어의 위기라면, 야당의 폭주에 외부의 적대 공작까지 더해진 최근 상황은 국가 운영시스템, 즉 소프트웨어의 위기라고 윤 대통령은 주장했다. 전시·사변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소프트 비상사태’인 만큼 두 시간짜리 무력시위로 ‘소프트 비상계엄’을 했다는 논리를 구성한 셈이다.윤 대통령은 선거조작설에 중국의 개입까지 엮은 ‘거대한 위협’이란 허구를 만들어 계엄의 명분을 삼았고, 그 과정의 불법 행위에 대해선 자신의 개입을 부인하며 아랫사람의 과잉충성 또는 오해 탓으로 돌렸다. 그러다 보니 의도했던 ‘비장한 반공투사’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망상과 궤변을 늘어놓는 ‘초라한 안티 히어로’로 귀착될 수밖에 없었다.비상계엄을 통한 ‘반국가세력과의 전쟁’, 이어진 관저 농성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무참한 패배에 대한 반동으로 야당 지지율을 함께 끌어내리는 ‘물귀신 작전’ 효과를 내긴 했다. 이후 윤 대통령은 법정 변론을 현장 지휘하면서 본격적인 이념·사상전에 뛰어들었고 미국 내 우호 인사를 동원한 국제 여론전, 사법부를 흔드는 장외 심리전까지 벌이고 있다.사실 그 무모한 전쟁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됐다. 여소야대의 소수파 정권인데도 야당과의 타협을 거부하다 도저히 벗어나기 어려운 궁지에 몰리자 마지막 수단인 비상조치의 유혹에 빠진 것이다. 결국 그 유혹에 굴복한 대가를 치러야 할 지금에 와서 다시 정치와 안보 사이, 전쟁과 평화 사이, 나아가 진실과 거짓 사이의 경계마저 흐리는 위험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이제 그 전쟁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대국민 여론전은 탄핵 여론을 뒤집기엔 역부족이고 극단 세력의 사법부 겁박은 중도층의 이반을 불렀다. 직접 나선 법률전 역시 음모론적 망상과 구차한 회피라는 모순의 늪에 빠진 형국이다. 윤 대통령은 허상의 전쟁부터 끝내야 한다. 그 스스로 호수 위 달 그림자를 쫓을 게 아니라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달을 직시할 때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5-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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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희 칼럼]트럼프 막은 레드라인, 그 선 넘은 윤석열

    #1. 2020년 6월 1일, 긴급 호출을 받고 백악관 집무실에 들어선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과 마크 밀리 합참의장.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다짜고짜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마구 팔을 흔들면서. 인종차별 항의 시위가 격렬해져 백악관 인근 저지선까지 뚫리자 트럼프는 즉각 ‘반란법’을 발동해 군대 1만 명을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급기야 트럼프는 외쳤다. “그냥 쏘면 안 되나? 다리나 뭐라도 쏘라고.” 에스퍼가 여러 이유를 들어 할 수 없다고 하자 트럼프는 밀리를 향해 “그럼 장군이 맡아 처리해”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밀리 역시 거부했다. “저는 보좌관일 뿐 지휘관이 아닙니다.” 미 합참의장은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조언자 역할만 수행한다. 결국 트럼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약해 보이고 국가가 약해 보인다고. … 너희들은 모두 실패자야, 빌어먹을 실패자들!” 그 자리에 있던 마이크 펜스 부통령마저 꼼짝없이 모욕당해야 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끝내 원하던 답변을 얻지 못했다. 에스퍼는 회고록 ‘신성한 맹세’에 “당시 우리는 어두운 레드라인(금지선)을 넘기 직전에 있었다”고 썼다. #2. 2021년 1월 8일, 밀리 의장은 극비 막후채널을 가동해 리줘청 중국군 연합참모장과 통화했다. 이틀 전 트럼프 지지 세력의 의사당 난입 폭동에 놀란 중국 측은 트럼프가 대외 위기를 조성해 반전을 노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밀리는 말했다. “상황이 불안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100% 안정적이다. 민주주의도 때론 엉성할 수 있다.” 트럼프는 11·3 대선 패배 이후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끝없는 부정선거 음모론과 자기만의 가상현실에 빠져 있던 트럼프가 벌일 수 있는 충동적 군사행동, 특히 그에게 맡겨진 ‘핵 버튼’이야말로 가장 큰 위험이었다. 에스퍼가 이미 대선 직후 경질된 상황에서 그 위험을 막을 사람은 밀리밖에 없었다. 밀리는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극도의 정신불안에 빠졌던 시절을 떠올렸다. 당시 제임스 슐레진저 국방장관은 대통령의 어떤 명령에도 자신과 합참의장의 확인 없이는 따르지 말 것을 군 지휘부에 지시했다. 밀리는 즉시 국가군사지휘센터(NMCC) 장교들을 불러 모아 모든 명령 이행은 자신을 거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장교 한 명 한 명 눈을 바라보며 일일이 묻고 확인했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밥 우드워드의 ‘위험’) #3. 2024년 봄 어느 행사장. “너는 우리 타깃 목록 1번이야.” 한 남자가 밀리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조롱했다. 2023년 9월 퇴역한 밀리에게 이런 위협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직 합참의장으로서 그는 전역 후 2년간 24시간 경호를 제공받는다. 거기에 상당한 개인 비용을 들여 자기 집에 방탄유리와 방폭커튼까지 설치했다. 트럼프는 밀리가 중국 측과 통화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끔찍한 반역이다.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측근들은 이제 트럼프에게 등 돌린 이들에 대한 보복을 공공연히 외친다. 이른바 깨어 있는(woke) 장군들에 대한 대대적 숙청을 다짐한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후보를 두고 온갖 논란이 이어져도 트럼프가 지명을 철회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트럼프는 이미 1기 행정부 시절 예비역 대장 두 명이 자신을 공개 비판하자 전역한 장교라도 현역으로 소환해 군사재판에 넘기는 군 통수권자의 특별권한을 사용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당시엔 밀리와 에스퍼가 역풍을 낳을 뿐이라며 트럼프를 막아섰지만 이제 자신들에게 내려질 소환령을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4. 2024년 12·3 비상계엄 선포 직후 한국 국회에서 벌어진 광경은 2021년 1·6 미국 의회의 혼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사건 모두 집권자가 권력의 연장 또는 확대를 위해 헌법기관을 유린한 친위 쿠데타(self-coup)였다. 다만 차이는 분명했다. 국민의 대의기구를 습격한 주체가 한국에선 대통령 명령에 따른 군대였고, 미국에선 대통령 선동에 따른 군중이었다. 트럼프 역시 군대라도 동원하고 싶었겠지만 헌법 등 제도적 가치가 몸에 밴 군인들의 저항에 가로막혔다. 윤석열 앞에도 장벽이 있었지만 그는 일부 충성파로 비선을 만드는 우회로를 통해 밀어붙였다. 실패했다고 해서 ‘아니면 말고’ 없던 일이 될 수는 없다. 미국은 1·6을 제대로 청산하지 않은 탓에 트럼프 2기라는 불길한 시험대에 다시 섰다. 한국이 12·3을 철저히 심판하고 권력의 사용(私用)을 막을 통제 장치를 더욱 강화해야 하는 이유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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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희 칼럼]우크라이나 딜레마, 앞으로가 더 문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첫 임기 4년 동안 시리아 폭격 같은 제한적 군사조치 외엔 전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트럼프 측은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지 않은 현대사 첫 대통령’이라고 홍보해 왔고, 본인도 올해 초 “지난 72년간 어떤 전쟁도 하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이라고 자랑했다가 과장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다만 그가 지미 카터 이래 40여 년간 분쟁을 키우거나 군사 개입을 하지 않은 첫 대통령인 것은 맞다. 그에 반해 조 바이든 대통령은 유럽과 중동 두 곳의 전쟁에 휘말린, 어쩌면 트럼프의 비난처럼 ‘최악의 대통령’일지 모른다. 하지만 바이든은 ‘미군을 전쟁터에 보내지 않은 21세기 첫 대통령’이라고 측근들은 내세운다. 비록 두 개의 전쟁이 벌어졌지만, 그 전쟁에 파병하거나 말려들어 싸우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바이든은 우크라이나에서 전운이 감돌기 시작할 때부터 미군 파병은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고, 전쟁 발발 전 우크라이나에 다국적훈련단 소속으로 가 있던 병력마저 주변국으로 이동시켰다. 2022년 2월 러시아 침공 직후에도 바이든은 “우리 군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와의 충돌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거듭 천명했다. 이후 바이든은 ‘지원하되 참전은 없다’는 원칙 아래 우크라이나에 각종 무기와 훈련, 정보를 지원했다. 이 때문에 공식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미군 장병은 한 명도 없다. 소수의 군사고문도 미국대사관 소속으로 보냈다. 미국이 지원한 핵심 장비의 정비 요원조차 우크라이나 인근 국가에 보내다가 최근에야 군 계약업체 인력의 우크라이나 파견을 허용했다. 무기 지원도 우크라이나 방어를 위한 필요조건을 충족시키되 자칫 러시아를 자극해 나토 국가 공격이나 핵전쟁으로 번지지 않도록 매우 세심한 균형을 잡아왔다. 대전차미사일부터 전차와 전투기, 집속탄, 장거리 타격무기까지 차츰 위력과 사거리를 높여가는 이른바 ‘개구리 삶기 전략’이었다. 바이든은 최근 사거리 300km 에이태큼스(ATACMS) 미사일의 러시아 본토 공격을 허용했다. 이를 두고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핵무기 사용을 위협하고, 트럼프 측마저 확전을 우려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 역시 트럼프의 복귀를 기다려온 푸틴인 만큼 핵 협박을 실행하진 않을 것이라는 면밀한 계산에서 내놓은 조치일 것이다. 트럼프의 평화협상 특사로 지명된 키스 켈로그 예비역 중장도 일찍이 양측에 협상을 압박하기 위해 위기를 고조시키는 ‘매드맨 전략’을 주장해 왔다. 특히 러시아 측엔 과거 트럼프가 북한을 향해 “화염과 분노” 운운하며 긴장을 높였던 방식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종전까지 아슬아슬한 위기와 극적인 국면 전환의 사이클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이런 위험한 게임에 한국도 부득불 끌려들어간 형국이다. 특히 북한군 파병에 맞선 우리 정부의 대응을 두고 트럼프의 차기 국가안보보좌관 지명자가 ‘한국의 전쟁 개입’을 우려하는 상황이 됐다. 북한 탓만 할 순 없다. 돌이켜보면 정부가 첫 대응부터 너무 깊숙이 발을 내디딘 탓이다. 북-러 밀착과 관련해 번번이 정보 실패 논란을 샀던 정부가 이번엔 ‘한 건 했다’고 흥분한 탓일까, 아니면 뭔가 다급한 다른 사정이 있었기 때문일까. 국가정보원은 10월 18일 ‘북한 특수부대 러-우크라 전쟁 참전 확인’이란 제목 아래 세세한 파병 정보와 함께 관련 위성사진까지 공개했다. 인공지능(AI) 활용 역량을 자랑하는 별도 참고자료도 냈다. 이후 미국이 그 정보를 공식 확인하는 데는 닷새나 걸렸는데, 그사이 우리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무기 지원과 군사참관단 파견을 기정사실화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얼마 뒤면 나올 미국 대선 결과도 계산에 넣지 않은 채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는 관성적 메시지의 되풀이였다. 하지만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한국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정부는 새삼 ‘침착과 절제’를 강조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당국자들은 무기 지원에 대해 함구했고, 최근 방한한 우크라이나 특사단의 동선도 대부분 비공개에 부쳤다. 군 참관단 구성도 ‘소수의 민간 전문가’라고 슬쩍 말을 바꿨다. 지금의 곤혹스러운 딜레마를 일시적 모면이 아닌 정책 전환의 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트럼프 2기가 예고하는 불확실성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트럼프는 러시아에 대한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우크라이나 지원을 강화하며 그 부담을 한국에 떠맡길 수 있다. 나아가 김정은과의 직거래를 통해 북한이 이 전쟁에서 손을 떼도록 할 수도 있다. 정세가 바뀌면 정책도 바뀌어야 하는 법, 냉혹한 국제정치에서 국가의 변심은 무죄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4-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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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희 칼럼]‘트럼프 도박’에 홀려 ‘푸틴 수렁’에 빠진 김정은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기자 밥 우드워드는 신간 ‘전쟁’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퇴임 후에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계속 연락해 왔다고 썼다. 트럼프가 2021년 백악관을 떠난 이래 푸틴과 아마도 7차례 통화했을 것이라는 보좌관의 말을 인용하며 그들이 우크라이나 전쟁 종결 문제를 논의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미국 시민이 정부 승인 없이 분쟁 중인 외국과 교섭하는 무자격 외교는 ‘로건 법’ 위반이다. 물론 트럼프 대선캠프도, 러시아 크렘린궁도 즉각 부인했다. 그런데 정작 트럼프는 언론 대담에서 즉답을 회피하며 묘한 답변으로 일관했다. 퇴임 후 푸틴과 통화했는지 ‘예 또는 아니요’로 답해 달라는 질문에 트럼프는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내가 그렇게 했다면 영리한 일(smart thing)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건 좋은 것이지 나쁜 일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트럼프와 푸틴의 기묘한 브로맨스, 특히 늘 푸틴에게 다가가며 절대 험담하지 않는 트럼프의 푸틴 사랑은 미 정보당국에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누군가는 상대를 홀리고 겁주는 스파이 출신 푸틴의 포섭 능력에서, 누군가는 난폭한 킬러에 대한 존경심부터 키워 온 트럼프의 성장 배경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트럼프는 2022년 2월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결정을 두고도 “천재적이다” “노련하다”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대통령이었다면 결코 전쟁은 없었을 것이라며 모든 게 조 바이든 대통령의 무능 탓이라고 했다. 나아가 대통령이 되면 ‘24시간 안에’ ‘전화 한 통으로’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장담해 왔다. 구체적 계획에 대해선 “알려지면 실패한다”고 함구하면서. 이에 조 바이든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 제이크 설리번은 강하게 힐난한다. “트럼프가 대통령이었다면 아마도 우크라이나 전쟁은 없었을 것이다. 왜냐고? 푸틴은 (이미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있을 것이기에. 트럼프는 푸틴을 바로 환영해 맞이했을 것이다. 독재자들에 관한 한 트럼프의 기본 생각은 원하는 대로 뭐든 하도록 놔두는 것이니 말이다.” 실제로 트럼프의 러닝메이트 J D 밴스 부통령 후보가 얼마 전 밝힌 구상을 살펴보면 트럼프의 백악관 복귀는 우크라이나엔 재앙이 될 것이다. 현재의 교전선을 기준으로 비무장지대를 조성하고 우크라이나의 중립국화를 통해 전쟁을 동결(凍結)한다는 것인데, 빼앗긴 영토의 수복도 포기하고 서방 동맹 가입도 배제되는 그런 방안은 우크라이나에는 항복 문서에 사인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르면 내일 윤곽이 드러날 미국 대선 결과는 향후 세계질서,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배를 가를 중대 분기점이다. 설령 트럼프가 당선된다 해도 하루는커녕, 아니 몇 주, 몇 달 안에도 종전이 이뤄지긴 어려울 것이다. 다만 2년 반 넘게 계속된 전쟁이 끝 모를 연장전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종전의 ‘선 긋기’에 앞선 쟁탈전으로 치달을지 이번 미국 대선 결과로 대략 큰 방향이 정해질 것이다. 김정은의 북한군 파병은 이 결정적 시기를 목전에 두고 벌인 한 판의 도박이다. 막판에 한몫 챙기겠다는 심산에서였을 텐데, 작금의 우크라이나 전황을 보면 그런 계산이 통할 수도 있는 형국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군의 기습 공격으로 한때 자국 영토 쿠르스크 지역에서 서울 면적의 두 배가량을 빼앗겼지만 이제 그 절반을 되찾았다. 우크라이나 동부 전선에서도 우위 속 교착 전세를 이어 가고 있다. 그러니 숟가락 하나 얹으면 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북한군이 보내질 전장은 한반도의 산악 지형과는 전혀 다른 대평원의 낯선 환경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정밀폭격과 드론전, 핵위협과 참호전, 용병전까지 첨단과 구식 전쟁 양태가 온통 뒤엉키면서 점차 총력전 양상으로 변모하고 있다. 더욱이 병사를 소모품처럼 여기는 러시아식 공세 작전에 북한군은 총알받이가 되기 십상이다. 실려 온 병사의 주검을 본 주민들의 동요가 불러일으킬 체제 불안의 태풍까지 김정은이 염두에 뒀을지는 의문이다. 북한군은 이미 쿠르스크 지역에 배치돼 며칠 내로 전선에 투입될 것이라고 한다. 미 대선 결과에 따라 실전 참여 시기나 강도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이제 와서 발을 빼기는 어려울 것이다. 전쟁은 끝없는 불확실성의 영역이다. 김정은은 그 전장의 안갯속에 병사들을 던져 놓았다. 김정은이 결행한 비정한 도박의 미래를 가늠할 첫 결과가 곧 나온다. 그걸로 대박이 날지 쪽박을 찰지 당장 판가름 나진 않을 것이다. 특히 ‘조종의 대가’ 푸틴이 트럼프 도박판을 미끼 삼아 파 놓은 함정에 김정은이 빠진 것 아닌지는 두고 볼 문제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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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희 칼럼]통일을 ‘신 포도’ ‘못 먹는 감’ 취급할 일인가

    강도 같은 위기에 처했을 때 “불이야!” 소리 지르라는 전문가들이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안전이 걸린 일에 더 귀 기울인다는 건데,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통일, 하지 맙시다” 주장도 스스로 혼란에 빠진 자신의 문제를 엉뚱한 ‘도발적 발제’로 돌려 일단 세간의 시선을 끌려는 심산이 아니었을까 싶다. 평생 통일운동가를 자처하던 그로서는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와 남한의 ‘자유의 북진’ 주장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일종의 존재론적 위기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는 지나온 삶과는 180도 다른 주장으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런 자기부정에 앞서 반성과 성찰은 없었다. 대신 현실론자의 기민한 변신만 두드러졌다. 늘 적정선을 넘는, 그래서 스스로 신뢰를 깎아 먹는 진보좌파의 과잉 부채질 경향을 새삼 확인시켜 줬을 뿐이다. 한데 그 구설홍보(노이즈 마케팅) 효과는 용산의 자동반사적 대응 탓에 의외로 커졌다. 불순하다고 여겨지는 소리라면 참질 못하는 보수우파는 맹렬하게 반응했다. 특히 대통령실 관계자가 멀리 대통령 해외 순방 중에,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까지 직접 국무회의에서 반박하고 나섰다. 정부 일각에선 “백수(白手) 정치인의 넋두리에 대꾸할 필요 있느냐”는 얘기가 나왔다지만, 일찍이 윤석열표 통일 구상을 내놓으면서 ‘사이비 지식인과 선동가’ ‘반자유 반통일 세력’과의 투쟁을 역설했던 대통령이니 맞대응의 유혹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통일 논쟁은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갈수록 국민 관심이 시들어 가던 문제지만 일단 정치의 풀무질이 더해지자 그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사실 남북 관계에서 통일은 먼 미래의 기약으로 넘겨둔, 그러면서도 늘 악용을 경계하는 동시에 언제 닥칠지 모를 사태에 대비해야 하는 변수였다. 이런 당위와 현실 간 괴리 때문에 남북 어느 쪽이든 통일을 얘기하면 할수록 상대에 대한 적화통일 또는 흡수통일의 의심은 커진다. 남남(南南) 관계에서 통일은 더욱 난감하고 예민한 문제였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통일론은 진퇴를 되풀이했다. 남북 관계가 괜찮던 시기에는 혹여 북측의 심기를 거스를까 통일 대신 평화를 앞세우며 뒷전으로 밀어놓았지만, 남북 관계에 찬바람이 돌면 대북 공세 차원에서 통일을 전면에 내세우곤 했다. 사실 ‘통일은 도둑같이 온다’거나 ‘통일 대박’을 외친 것도 꽉 막힌 남북 관계의 현실에서 나온 궁여지책인 측면이 컸다. 현 정부의 통일 독트린도 마찬가지다. 국내 사상전과 대북 심리전, 국제 여론전이란 3대 전략 아래 내놓은 공세적 통일론은 전임 정부의 ‘가짜 평화’를 공격하기 위한 대내용이기도 하다. 당초 정부는 올해로 30년 된 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의 수정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여야 합의로 마련돼 진보·보수 정권을 막론하고 이어진 통일 방안을 대체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강화된 여소야대의 정치 현실 속에선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북한의 선수 치기도 정부의 통일 방안 수정 의지를 꺾는 요인이었다. 김정은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은 국제사회의 비핵화 요구를 거부하고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대외 전략의 부산물이다. 북한은 2년 전 핵무력 정책을 법제화하고 지난해 핵 보유를 헌법에 명문화한 데 이어 올해 통일 관련 표현을 헌법에서 삭제했다. 동족이 아닌 한국에는 언제든 핵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위협의 신뢰성’을 한층 높이는 북한식 억제전략인 셈이다. 작금의 국제 정세에서 요원해지는 통일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주목할 것은 점점 멀어지는 북한 비핵화의 현실이다. “비핵화는 이미 끝난 문제”라는 러시아나 비핵화에 대한 언급 자체를 꺼리는 중국은 둘째치더라도 ‘사실상 핵무기 소유 국가’ 북한과의 외교를 강조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의 문제 제기, 그리고 미국 민주·공화 양당의 정강정책에서 사라진 비핵화 문구가 향후 어떻게 드러날지를 더 걱정해야 한다. 통일은 외면할 수도 없지만 집착하면 멀어질 뿐이다. 그간 화해협력의 초입에만 머무르다 번번이 북한에 뒤통수를 맞아온 좌파도, 아예 그 단계도 진입하지 못한 채 요행수로서 통일만 외치는 우파도 마찬가지다. 얄팍한 태세 전환이나 고리타분한 자기최면으론 안 된다. ‘어차피 신 포도일 거야’라고 지레 외면하거나 먹을 수 없는 감을 앞에 두고 심술부리듯 찔러나 보자는 식이어선 번번이 북한에 휘둘리며 우리의 내상(內傷)만 깊게 할 것이다. 때아닌 통일 논쟁에 매달릴 게 아니라 꺼져가는 비핵화를 되살릴 방안을 깊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4-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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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희 칼럼]‘리베로 특보’가 필요해 안보실장을 뺐다는데

    H R 맥매스터 전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최근 펴낸 회고록 ‘우리 자신과의 전쟁’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초기 13개월간 외교안보 사령탑으로 일하면서 겪은 성취와 실망, 분투의 기록이다. 책에는 성과와 보람, 자부심보다는 좌절과 모욕, 회한이 진하게 배어 있다. 우직한 군인 맥매스터가 일하게 된 백악관은 상상을 뛰어넘는 요지경 전쟁터였다. 매사에 변덕이 죽 끓듯 하고 뭐든 반대로 하기 일쑤인 청개구리 성향의(contrarian) 트럼프를 보스로 모시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 터. 게다가 아첨으로 트럼프의 환심을 사고 밀고로 참모진을 이간시키는 모사꾼들, 트럼프의 기벽에 질려 회피와 태업을 일삼는 이른바 ‘어른’ 장관들까지 맥매스터는 책 제목 그대로 내부의 적(敵)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에 맞서 ‘최대의 압박’ 정책을 펴던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의 유화 제스처에 마치 빨려 들어가듯 대화 국면으로 전환한 것도 그런 내부 분열과 혼란이 한몫한 결과였다. ‘북한 완전 파괴’를 외치던 트럼프는 시진핑 중국 주석을 만나 “한미 군사훈련은 도발적”이라는 데 선뜻 동의하며 “돈 낭비”라고 맞장구치고, 국방장관은 대북 군사옵션을 포함한 비상계획에 “우린 전쟁할 준비가 안 돼 있다”며 손사래 치고, 국무장관은 중국을 통한 대화를 모색하며 제3국 제재마저 반대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맥매스터로서는 ‘대통령의 결정에 앞서 최고의 분석과 다양한 옵션을 제공하기 위해, 대통령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가 아니라 대통령에게 필요한 얘기를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보스의 신뢰를 얻지 못해 불과 1년여 만에 쫓겨난 맥매스터는 실패한 안보보좌관 중 한 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사실 가장 성공적인 안보보좌관의 롤 모델인 헨리 키신저와 비교하면 맥매스터의 실패는 더욱 두드러진다. 키신저 역시 알코올의존증과 우울증세를 가진 불안정한 성격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 아래서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 그 직을 수행했다. 닉슨의 구상을 구체적 성과로 구현하기 위해 때론 아부하고 때론 도전한 결과 키신저는 ‘전설’로 남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맥매스터가 실패만 한 것은 아니다. 그의 지휘 아래 작성된 국가안보전략(NSS) 등 각종 전략문서는 발간 당시엔 트럼프의 좌충우돌 탓에 주목받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탈냉전 이래 미국 대외전략의 근본적 전환을 예고한 문서로 재평가받았다. 중국과 러시아를 미국에 도전하는 ‘수정주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특히 대(對)중국 정책을 ‘관여’에서 ‘경쟁’으로 변경한 대목은 조 바이든 행정부 들어 새롭게 포장된 정책들로 구체화됐다. 이렇듯 그 성공도 실패도 가볍게 다뤄지지 않는 것은 안보보좌관 자리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그에 상응하는 우리의 국가안보실장은 어떤가. 지난달 갑작스러운 외교안보 라인 개편 속에 안보실장도 교체됐다. 윤석열 정부 임기가 절반도 안 지났는데 벌써 네 번째 안보실장이다. 한데 그 사유를 놓고 당초 대통령실은 ‘외교보다 안보를 보강하기 위해서’라더니, 얼마 뒤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리베로 특보가 필요해서’라고 설명했다. 사실 대통령 측근을 국방부 장관에 앉히면서 생겨난 연쇄 인사로 안보실장이 특보로 튕겨나간 것일 터인데, 그 뻔한 이유를 이리저리 돌려 말하다 보니 신설한 ‘리베로 특보’가 매우 중요한 자리이고 ‘붙박이 안보실장’은 누구든 할 수 있는 자리인 것처럼 돼 버렸다. 여기에 어차피 대통령의 귀를 잡고 있는 안보실의 진짜 실세는 따로 있는데 실장이 누가 되든 달라질 게 있겠냐는 얘기까지 나오는 지경이다. 대통령실에선 이제 특보가 ‘상시 특사’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조직의 생리나 관행상 급조된 자리가 과연 주변과의 마찰이나 잡음 없이 원활하게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적임자를 적소에 배치하고 필요하다면 새 자리를 만드는 것은 온전히 대통령의 권한이다. 하지만 임시변통의 실험적 용인(用人)이 성공적이었던 예는 드물다. 일찍이 키신저도 “우편함 없는 정부 자리는 받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당장 우편물 받을 변변한 사무실도 없는 고문이나 특보 같은 자리, 결국 끼어들고 참견하는 자리는 맡지 말라는 얘기일 것이다. 맥매스터의 후임이자 또 한 명의 실패한 참모인 존 볼턴이 트럼프가 자신에게 안보보좌관이 아닌 ‘다른 타이틀의 자리는 어떠냐’고 제안하자 거절했다면서 새삼 상기했다는 현실론적 지침이기도 하다.(볼턴의 책 ‘그 일이 일어난 방’)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4-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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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희 칼럼]트럼프 장기판 위의 대만, 그리고 한국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자못 흥미로워졌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총기 피격 사건 이후 승기를 굳힌 듯하더니 조 바이든 대통령이 전격 사퇴하자 그 바통을 넘겨받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예상밖의 선전을 보여주면서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듯하다. 이제 선거전은 ‘이상한 트럼프’ 대 ‘미친 해리스’의 박빙 대결로 바뀌었고, 석 달도 남지 않은 투표까지 또 어떤 충격과 반전의 드라마가 펼쳐질지 예측불허의 상황이 됐다. 모든 선거는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법이고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선거 결과 예측이 아니라 그 이후의 대비임을 새삼 확인케 한다. 외교정책 경험이 부족한 해리스로의 후보 교체는 향후 미국 대외정책의 불확실성을 높이는 요인이지만 해리스가 당선될 경우 그 노선은 ‘바이든 2.0’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만큼 향후 대외정책의 근본적 전환을 부를 ‘트럼프 2.0’의 파괴력에 여전히 주목해야 한다. 최근 대만이 겪은 충격파는 트럼프 2기가 국제사회에 몰고 올 혼란의 예고편이 아닐 수 없다. 트럼프는 피격 며칠 뒤 인터뷰에서 ‘중국에 대항해 대만을 방어하겠느냐’는 질문에 “대만은 우리 반도체 사업을 전부 가져갔다. 대만은 방어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우린 보험회사와 다를 게 없는데, 대만은 전혀 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특히 “대만은 미국과 9500마일 떨어져 있는데, 중국에선 68마일이다”라며 방어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도 했다. 예전에도 트럼프는 같은 질문에 “내 카드를 공개하고 싶지 않다”고 즉답을 피하면서도 비슷한 얘기를 늘어놓곤 했지만 그의 백악관 복귀가 굳어져가던 시기여서 발언의 무게는 남달랐다. 대만의 세계 최대 반도체 수탁기업 TSMC의 주가는 곤두박질쳤고, 대만 행정원장이 나서 “우리는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더 많은 책임을 부담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후 대만에선 TSMC에 대한 ‘애국 투자’ 열기가 일었고, 라이칭더 정부는 내년도 방위예산을 역대 최대로 편성하는 등 트럼프 리스크 대비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미국은 오랜 기간 중국의 대만 침공 시 군사적 개입 여부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견지해 왔고, 트럼프는 그런 노선에 충실한 답변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정작 신냉전 대결 속에 이런 ‘전략적 모호성’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바이든이었다. 그는 재임 중 네 차례나 대만을 방어하겠느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그렇다”고 즉답했다. 물론 그 뒤엔 늘 백악관 측이 부랴부랴 “우리 정책에 변화는 없다”며 사실상의 실언이라는 식으로 진화하곤 했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트럼프의 시각은 유별나다. 전통적 외교 문법에선 지극히 이단적이다. 유럽 학계는 미국 공화당의 정책 분파를 △세계 패권을 유지하자는 미국우월론(primacists) △세계의 경찰이 아닌 국내 문제에 집중하자는 개입자제론(restrainers) △유럽·중동이 아닌 중국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우선순위론(prioritisers)으로 구분한다. 그런데 트럼프는 세 그룹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모두에 다리를 걸친 채 필요에 따라 집어들 뿐이다. 사실 역대 미국 대통령은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자유주의의 망토를 걸친 현실주의자’였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 어떤 레토릭으로도 포장하지 않는 ‘찐 현실주의자’다. 1기 때부터 미국의 패권적 위상을 내세우면서도 군사적 개입엔 몸을 사렸다. 동맹과 우방을 깔보며 독재자들과 어울렸다. 그에겐 어떤 이념도 가치도 없다. 매사를 거래 관계로 보고 경제적 손익계산 아래 그때그때 본능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트럼프 2기의 위험성도 바로 거기에 있다. 트럼프가 몰고 올 혼란은 대만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미국 반도체 사업을 가져간 부자 나라, 왜 그런 나라를 방어해줘야 하느냐는 주장은 당장 한국에도 그대로 겹쳐진다. 주한미군 철수 압박과 방위비분담금 증액 요구는 불 보듯 뻔하고, 북한과의 직거래 신호는 한반도 정세의 불가측성을 한껏 끌어올릴 것이다. 이제 김정은마저 “대화도 대결도 우리의 선택으로 될 수 있다”며 3년여 만에 직접 ‘대화’를 언급하고 나섰다. 그런데 우리 정부에선 어떤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지레 호들갑 떨 일도 아니라지만 이렇게 느긋할 일인지 걱정될 정도다. 트럼프 복귀는 예측 가능한 외교의 시대에 종언을 예고하고 있다. 정부는 그간 가치와 이념을 앞세운 ‘우리 편’ 외교에만 주력해 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모레 광복절 기념사에서도 자유·인권을 강조하는 새 통일담론을 제시한다는데, 과연 그 선명한 이념적 언어 안에 냉철한 현실인식과 실천전략은 얼마나 담겨 있을지 궁금하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4-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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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희 칼럼]총 맞은 트럼프에 세계가 요동치는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워싱턴 정상회의에서 이런저런 선물들을 챙겼다. 60조 원 규모의 나토 군사지원 약속, 패트리엇 등 방공무기와 F-16 전투기 추가 인도, 20여 개국과의 양자 안보협정까지. 하지만 가장 절박한 문제에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푸틴 대통령’이라 소개받고 머쓱해야 했던 수모는 젤렌스키가 느낀 좌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올해도 나토 가입을 위한 구체적 일정표를 받아내지 못했다. ‘우크라이나의 미래는 나토에 있다’는 작년의 공동성명에 ‘회원국으로 가는 다리(bridge)’ ‘되돌릴 수 없는(irreversible) 경로’라는 문구가 추가됐지만 여전히 공허한 수사일 뿐이다. 동맹으로서 집단방위의 보호를 받는 나토 회원국 지위는 요원하고 오히려 러시아 침략의 구실이 된 ‘잠재적 회원국’이란 불안정한 처지만 재확인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당장 절실한 군사 현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젤렌스키는 서방이 각종 무기를 지원하면서 내건 제한 사항들, 즉 그 무기들로 러시아 영토 깊숙이 타격해선 안 된다는 조건의 해제를 강하게 요구했다. 러시아는 자국 영토로부터 전방위로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데,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내 공격 원점을 때리지 못하는 불합리한 현실을 바꿔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서방 국가들은 난색을 표했다. 누구보다 바이든이 완강했다. 그는 “만약 그(젤렌스키)가 모스크바를, 크렘린을 타격할 능력을 갖는다면 그게 말이 되겠는가? 아닐 것이다”고 거부했다. 이런 엄격한 무기 사용 제한은 우크라이나 지원과 확전 방지 사이의 딜레마, 즉 우크라이나를 최대한 지원하되 러시아와의 직접 대결은 피해야 한다는 미국의 우려에서 비롯됐다. 바이든은 핵 가진 강대국 간 정면 대결이 부를 거대한 재앙을 걱정하며 매우 신중한 지원책으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아왔다. 그는 주변에 “젤렌스키가 우리를 제3차 세계대전으로 끌어가려 한다”고 토로하기도 했다.(데이비드 싱어 ‘새로운 냉전들’) 미국은 무기 지원의 수준도 천천히 조금씩 끌어올리는 이른바 ‘개구리 삶기’ 방식을 고수했다. 대전차미사일부터 대공미사일, 고속기동포병로켓(HIMARS), F-16 전투기, 전술지대지미사일(ATACMS)에 이르기까지 조심스럽게 고성능 장거리로 높여가며 러시아가 선을 넘지 않도록 관리했다. 거기에 ‘국경 넘어 사용 금지’ 조건을 붙였으니, 패배는 피하겠지만 승리는 불가능한, 즉 생존만 보장하는 수준 아니냐고 우크라이나가 반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분통을 터뜨리기엔 정작 나토의 처지가 말이 아니다. 이번 정상회의를 지배한 것은 ‘트럼프의 유령’, 즉 11월 도널드 트럼프의 복귀가 불러올 공포감이었다. 노쇠한 바이든의 인지능력에 대한 언론의 질문 공세에 시달린 유럽 정상들은 그 누구보다 불길한 예감 속에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사실 유럽의 문턱에서 벌어진 전쟁에 맞서 대오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바이든 덕분인데, 그가 없는 나토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 미래일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트럼프의 피격 소식. 피를 흘리면서도 주먹을 치켜세워 “싸우자!”고 외치는 트럼프를 보며 유럽 지도자들은 더욱 오싹했을 수 있다. 나토가 나름대로 트럼프 복귀에도 끄떡없는(Trump-proof) 대비 장치를 마련했다지만, 앞으로 트럼프가 얼마나 세계를 흔들어 놓을지 그 충격과 혼란의 장면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젤렌스키로선 원치 않는 휴전협상에 끌려 나갈 미래를 상상하며 경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 나토 회의에는 윤석열 대통령도 아태 파트너 4개국(IP4)의 일원으로 3년 연속 초청을 받아 참석했다. 서방 자유진영과의 연대, 북핵에 맞선 한미동맹의 확장억제 의지를 과시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트럼프가 복귀하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 특히 트럼프가 ‘연애편지’를 주고받던 김정은과 벌일 위험한 직거래는 우리에겐 동맹의 위기로 다가올 것이다. 윤 대통령은 그런 서늘한 공기를 조금이라도 느끼고 돌아왔을까. 북-러의 동맹 부활에 한미 동맹 결속으로 맞서면서 한때 관리 모드에 들어갔던 한-러 간엔 다시 가시 돋친 언사가 오간다. 우리 외교에 동맹, 나아가 서방과의 동행은 필수다. 하지만 한쪽에 묶인 채 협력과 적대를 가르는 이분법적 외교로는, 몇 달 뒤를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외교로는 닥쳐올 혼돈을 헤쳐 나갈 수 없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대비하는 유연하고 정교한 전략이 절실하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4-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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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희 칼럼]‘난폭자’ 김정은-푸틴의 위험한 合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16∼17일 중국을 방문했을 때 외신의 관심은 온통 푸틴의 잠재적 다음 행선지, 즉 북한을 깜짝 방문할지에 쏠렸다. 하지만 푸틴은 귀국길에 하얼빈을 들르면서도 가까운 북한 땅을 밟진 않았다. 북-러와 함께 ‘독재의 3각 축’으로 엮이는 것을 꺼리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 크렘린궁은 서둘러 “북한 방문 준비도 잘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렇게 미뤄뒀던 푸틴의 방북이 오늘 이뤄진다. 작년 9월 러시아 극동에서 김정은과 만난 지 9개월 만의 답방 약속 이행이다. 그 사이 북-러 간에는 컨테이너 1만 개가 오가는 ‘위험한 거래’가 진행됐고 ‘전략·전술적 협동’은 긴밀해졌다. 이번에도 위험한 합작은 거창한 이벤트와 화려한 수사에 가려져 있다가 서서히 드러날 것이다. 푸틴 방북에도 중국의 견제 그림자는 짙다. 김정은과 시진핑 간 우호의 상징이었던 다롄의 ‘발자국 동판’이 최근 아스팔트로 덮인 것은 북-중 간 이상 냉기류를 보여준다. 최근 북한은 노골적 반발도 서슴지 않았다. 지난달 말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의를 겨냥한 북한의 도발은 중국에 대한 섭섭함을 넘어 분노까지 담겨 있는 듯하다. 북한은 3국 정상회의 날 새벽에 정찰위성 발사를 예고한 뒤 회의가 끝나자마자 야간에 발사 단추를 눌렀다. 2분 만의 공중 폭발로 끝난 위성 발사 실패에선 김정은의 조바심이 드러난다. 북한은 3국 성명에 담긴 ‘역내 평화와 안정, 한반도 비핵화, 납치자 문제에 대한 입장을 각각 재강조했다’는 대목을 들어 “엄중한 정치적 도발”이라고 비난했다. 중국이 동의하진 않았다지만 ‘비핵화’가 거론된 것 자체가 중국의 방조 아니냐는 노여움이었다. 곧 이어진 ‘오물 풍선’ 도발에도 김정은의 초조감이 묻어 있다. 북한이 날린 풍선은 그 시작부터 고약한 두엄 냄새로 세계적 비웃음을 샀다. 상대를 화나게도 겁먹게도 하지 못한 정치심리전의 패배였다. 대북 확성기 재가동이란 강수를 꺼낸 남측이 2시간 방송 뒤 일단 맞대응을 멈추면서 ‘먼저 꼬리를 내린’ 셈이 됐지만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 저급한 도발을 두고 북한이 이겼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도저히 정상 국가의 행태로 보기 어려운 북한을 품고 가야 하는 중국으로선 큰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웃 나라의 주권을 난폭하게 짓밟은 러시아까지 함께 엮인 북-중-러 연대에 한사코 손을 내젓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궁극적으로 북-러와 함께 반미(反美) 노선을 추구하면서도 미국과 대화를 지속하며 경쟁적 공존을 모색하고 있다. 그런 대미 안정화 기조 속에서 중국은 가급적 러시아와 북한을 따로따로 관리하고자 한다.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중재자를 자처하지만 그 전쟁을 서둘러 끝낼 생각은 없는 듯하다. 냉전 초 6·25전쟁을 미국의 군사력을 극동에 묶어두는 수단으로 활용한 소련의 스탈린처럼 시진핑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인도태평양에서 미국의 중국 포위망 집중을 막고 있다고 여긴다.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막는 완충지대로 북한이 필요하지만 북핵 도발로 인해 미국과의 갈등 전선이 확대되는 것을 원치는 않는다. 시진핑은 푸틴에게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를 바꾸기 위해 ‘세기의 변화(百年變局)’을 주도하자고 부추긴다. 김정은에게도 ‘북한의 정당하고 합리적인 안보상 우려’라고 두둔하며 다독인다. 하지만 정작 불량국가 대열에 끼어 그 맹주로 주목받고 싶지 않다며 뒷전으로 물러선다. 이런 중국의 이중적 태도가 북-러의 두 난폭자에겐 마뜩잖을 수밖에 없다. 불안정과 혼란, 무질서를 통해 현상 타파를 꾀하는 김정은과 푸틴의 만남은 위험하다. 거기에 자신들과 죽이 잘 맞았던 도널드 트럼프의 복귀는 이들이 노리는 더 없는 기회일 것이다. 그러니 미국 행정부가 11월 대선을 앞두고 푸틴이 부추기고 김정은이 총대를 멘 고강도 대미 도발, 이른바 ‘옥토버 서프라이즈(October Surprise)’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두 난폭자가 평양에서 만날 때 서울에선 한중 간 2+2 외교안보대화가 9년 만에 열린다. 한중 양국은 그 처지부터 가치, 전략까지 모든 점에서 차이가 분명하다. 그래서 이번 대화에도 큰 기대를 걸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다만 신냉전 진영 대결의 격화는 두 나라 모두 바라는 바가 아닌 만큼 적어도 북-러의 모험주의 도발을 막기 위한 협력의 균형점은 찾아야 한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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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희 칼럼]반갑다, 윤석열의 외교 ‘동문서답’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2주년 기자회견은 즉답 없는 에두르기나 엉뚱한 동문서답으로 채워진 맥 빠진 회견이었다. 그 이유는 기자들의 후속 추가 질문이 사실상 막혔기 때문이다. 기자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진행요원은 마이크를 가져가 버린다. 마이크도 없이 “그걸 물은 게 아니고…”라고 했다간 도어스테핑 중단 같은 사태를 부를 ‘제2의 슬리퍼 기자’가 될 수도 있으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하긴 1년 9개월 만의 회견이니 물을 건 많았고 시간은 짧았다. 그런 한계 속에서도 대통령실의 배려로 외교안보 분야에서 독점적 질문권을 누린 외신 기자들은 최대 현안인 북한-러시아 간 무기 거래를 두고 이어달리기 식 추가 질문을 할 수 있었다. 먼저 AFP 기자는 최근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북한 무기 사용 증거가 속속 드러나는 데 대한 한국의 대응, 나아가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제공할 조건이 뭔지를 물었다. 그간 북-러 무기 거래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밝혀 온 윤 대통령이다. 그런 만큼 미군의 빈 탄약고를 채워주는 식의 우회 지원을 넘어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직접 지원하는 방안 같은 단호한 대응 의지를 밝힐 가능성에 외신은 주목했다. 한데 뜻밖에도 윤 대통령 답변의 핵심은 “공격용 살상무기는 지원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방침”이었다. 더욱이 작년 키이우 방문 때 약속한 안보·인도·재건 3대 지원에서 ‘안보’는 뺀 채 “인도, 재건 지원”만 언급했다. BBC 기자의 추가 질문은 더 뾰족했다. 최근 주한 러시아대사의 “비우호국 중 한국이 가장 우호적”이란 발언까지 인용하며 한국이 용인할 수 없는 레드라인(금지선)이 뭔지 물었다. 그에 대한 답변도 의외였다. 윤 대통령은 “러시아와는 사안별로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반대할 것은 하면서 관계를 원만하게 잘 관리하겠다”고 했다. 이를 두고 BBC 기자는 회견 뒤 후기 영상에서 “그 답변이 놀라웠고 시사하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윤 대통령의 말이 최근 신중해졌다. 간간이 거친 말이 튀어나오긴 하지만 ‘반국가세력’ ‘공산전체주의’ 같은 이념적 대결적 언사는 거의 사라졌다. 특히나 외교 분야에서 똑 부러진 직설어법이 줄어든 것은 꽤나 낯설게 느껴진다. 4·10총선 참패의 영향이 크겠지만, 그 계기로 늦게나마 지난 2년의 대외정책을 돌아보며 얻은 깨침의 결과라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이래 한미동맹 강화와 한일관계 복원을 넘어 주요 7개국(G7),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까지 서방 진영을 향한 외교에 집중했다. 북핵의 고도화, 미중 간 대결 격화, 러시아의 침략전쟁 같은 신냉전 기류 속에서 불가피한 선택이라지만 그런 서방 밀착 행보는 우리 외교의 좌표를 급격하게 이동시켰다. 적지 않은 마찰음도 들려왔지만 그럴수록 정부는 강하게 중-러의 반발을 받아치곤 했다. 그 결과는 중국·러시아와의 거리 두기를 넘어선 긴장과 갈등으로 나타났다. 특히 북-러 간 ‘위험한 거래’는 유엔 대북제재 전문가패널의 임기 연장에 대한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이어졌다. 북한이 제재를 비웃으며 핵능력을 고도화하는데 최소한의 감시 수단마저 잃게 된 것이다. 러시아는 우리 교민을 간첩죄로 구금하는 ‘더러운 게임’까지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윤 대통령의 동문서답은 적어도 정부가 대러 관계에서 관리 외교에 들어갔다는 뜻으로 읽힌다.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은 지난달 “한-러가 ‘우려의 균형’을 통해 서로 레버리지를 가진 형국”이라고 밝혔다. 러시아는 북한에 군사기술 이전을, 한국은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 지원을 자제하면서 레드라인을 지키자는 공감대를 만들어 가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중국과의 관계다. 지난해 윤 대통령의 대만 관련 직설(直說)과 주한 중국대사의 무례한 언동(言動) 이래 고위급 대화가 끊긴 한중 관계는 여전히 균형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지난주 베이징을 다녀왔지만 “전반적으로 서로 다름이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 협력하기로 한 것이 가장 중요한 합의사항이자 성과다”라고 하니 별 소득은 없는 듯하다. 내주 윤 대통령이 주재하는 한중일 정상회의를 주목하는 이유다. ‘한미일 대 북-중-러’ 대결은 우리로선 가장 경계해야 할 구도다. 북한이 먼저 그 대결에 재빨리 편승했다곤 하나 우리까지 그 최전선에 나설 일은 아니다. 갈수록 커지는 북핵 위협에다 연말 미국 대선의 예측불가 변수까지 어느 때보다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다. 대통령의 절제된 언어 못지않게 우리의 대외전략도 더욱 섬세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져야 한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4-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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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희 칼럼]윤석열 외교, 변주가 필요하다

    지난 주말 미국 하원에서 우크라이나·이스라엘·대만에 대한 안보지원 예산안이 통과됐다. 공화당 강경파의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 반대로 6개월이나 표류했던 이 예산안은 “연말이면 우크라이나가 패전할 수 있다”는 중앙정보국(CIA) 국장의 경고 끝에 하원 문턱을 넘었다. 그나마 이란의 이스라엘 본토 공격이 없었다면 기약 없이 미뤄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의 지원으로 우크라이나는 일단 한숨 돌리게 됐지만 상황은 여전히 암울하다.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가 5발 쏠 때 고작 1발로 응수하며 힘겨운 전쟁을 하고 있다. 그만큼 미국의 군사지원은 우크라이나 생존에 절대적이다. 다른 국가들의 지원액을 다 합해도 미국에 미치지 못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2년은 유럽에는 ‘안보 각성의 시간’이었다. 각국은 방위비를 대폭 늘리고 의무복무제 도입도 추진하고 있지만 ‘유럽안보의 유럽화’는 요원하다. 당장 미군이 빠진 200만 유럽 병력은 허울뿐인 ‘포템킨 군대’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군사령관은 미군 4성 장군이 맡아왔고, 유럽 군대는 그 지휘 아래 항공 지원과 정보까지 전적으로 의존했다. 유럽이 자체 방위력을 키우는 데는 최소 10년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 일본은 이런 유럽을 바라보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최근 미일 간 동맹 결속의 기세는 예사롭지 않다. 미국을 방문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미국은 혼자가 아니다. 우리가 함께한다”고 외쳤다. 지금껏 미국의 일방적 보호(protection)를 받던 일본이 이제 한 축을 맡아 함께 힘을 투사(projection)하게 된다고 미국 측도 의미를 부여했다. 일본으로선 ‘아시아 파트너 1강(强)’의 위상을 확보했다고 자부할 만하다. 일본의 미국 밀착은 거침없는 군사대국화와 맞물려 있다. 지난 2년간 방위비를 50% 늘린 일본은 2027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의 2%를 달성해 미국 중국에 이은 세계 3위의 군사비 지출 강국으로 발돋움한다. 토마호크 미사일 400기도 도입해 반격 능력까지 확보할 예정이다. 아베 신조 때부터 걸어온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의 길을 쾌속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본의 행보는 우리에겐 질시와 불안을 부르는 불편한 현실이다. 윤석열 정부도 북핵 위협에 맞서 확장억제 같은 한미동맹 강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국내적 반대를 무릅쓰고 대일관계 개선을 밀어붙인 끝에 한미일 3각 안보 협력도 확고히 했다. 북한이 연일 미사일을 쏴대고, 세계적 신냉전 구도가 고착화하는 터에 불가피하고 필수적인 노선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쉽고 뻔한 길이었다. 특히 윤 대통령의 행보는 과감했지만 거칠었다. 미국 일변도 외교는 중국의 거센 반발을, 대일관계 급진전은 국내적 반감을 불렀다. 이번 4·10총선에선 야당 대표가 “왜 중국에 집적거리나. 그냥 ‘셰셰’ 하면 되지”라는 경박한 언사를 쏟아놓는데도, 민심은 오히려 정부여당에 박절할 만큼 인색했다. 정부가 자랑하는 외교적 성과가 묻힐 만큼 다른 정부 실책들이 너무 컸기 때문일까. 총선 참패에도 명시적인 공개 사과를 하지 않은 윤 대통령이다. 마음에 없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 하고 싶은 말은 기어이 하고야 마는 윤 대통령으로선 무엇보다 뚝심 있는 외교로 이룬 성과를 몰라주는 민심에 섭섭할지 모른다. 그래서 앞으로도 외교정책만큼은 고집스럽게 밀고 나갈 것이라는 우려 섞인 전망도 많다. 하지만 주변을 살피지 않는 직진 외교로는 다가오는 초불확실성의 시대를 헤쳐 나가기 어렵다. 특히 연말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집권하면 한국 외교는 험난한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트럼프에겐 동맹도 돈 계산이 먼저다. 김정은과의 협상도 언제든 꺼내 쓸 와일드카드로 여긴다. 윤석열 정부의 대외정책은 유연하고 정교해져야 한다. 단조로운 음악의 볼륨만 높이는 외교는 피로감을 낳을 뿐이다. 이념 편향적 가치외교가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처하는 해법이 될 수는 없다. 꽉 막힌 중국과의 외교적 소통부터 나서야 한다. 북한발 충돌 위기를 관리할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일본의 여전한, 오히려 퇴행하는 역사인식에는 할 말을 해야 한다. 일본은 미국과 손잡고 중국 포위망을 강화하면서도 ‘건설적이고 안정적인 중일관계’에 대한 언급을 빠뜨리지 않는다. 북한의 도발을 맹비난하면서도 정상회담 가능성을 끊임없이 타진한다. 당장 성과가 있을 리 없지만 그럼에도 소통 창구를 열어 두고 관리 차원의 접근을 중단하지 않는 일본 외교를 우리 정부는 찬찬히 들여다봐야 한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4-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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