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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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철희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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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6~2024-04-25
칼럼100%
  • [오늘과 내일/이철희]대만해협의 격랑이 밀려온다

    중국이 비밀리에 핵무기 탑재용 극초음속 미사일 시험을 했다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최근 보도는 전방위로 격화되는 미중 갈등이 본격적인 군사 경쟁으로 치닫고 있음을 시사한다. 7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중국의 극초음속활공비행체(HGV) 시험은 ‘물리학 법칙을 거스르는 기술적 성취’였고 이는 미국 정보당국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고 한다. 로켓에 실려 지구궤도에 올라간 극초음속 미사일은 음속의 5배 이상 속도로 예측불가의 구불구불한 궤적을 그리며 표적을 타격한다. 남극을 돌아 미국 본토를 때리는 ‘궤도폭탄(FOBS)’이 될 수도 있다. 북극을 거쳐 날아오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맞춰 구축된 미사일방어체계(MD)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중국은 “우주비행기 시험일 뿐”이라고 했지만, 전문가들은 “핵무기를 싣고 랜딩기어 없이 추락하는 우주왕복선을 상상해 보라”고 말한다. 중국의 핵 증강 야심은 대규모 ICBM용 지하격납고 건설에서도 드러난다. 최근 미국 전문가들은 위성사진 분석을 통해 중국 서북부 간쑤성과 신장위구르자치구에 각각 100여 개에 달하는 ICBM 격납고가 건설 중임을 확인했다. 중국은 수십 년 동안 격납고 20개만 운영하는 ‘최소 억지력’의 핵전략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중국은 이제 최소 핵전략을 걷어차고 본격적으로 ‘공포의 핵 균형’을 준비하는 징후가 뚜렷하다. 중국의 조용한 핵전력 증강이 장래의 일이라면 목전의 화약고는 대만이다. 중국은 ‘미수복 영토’인 대만에 대해 노골적인 힘자랑을 하고 있다. 이달 초 중국은 대만 방공식별구역(ADIZ)에 사상 최대 규모의 군용기 무리를 잇달아 진입시켰다. 최근엔 러시아와 함께 군함들을 일본 열도로 보내 해상 시위도 벌였다. 이 모든 게 지역적 군사 대결에선 미국에 밀리지 않는다는, 나아가 핵 대결도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의 발로일 것이다. 이에 맞서 미국은 대만과 한층 밀착하고 있다. 그간 유지해온 ‘전략적 모호성’, 즉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지만 대만의 자력방위도 지원하는 모호한 정책에서 벗어나려는 행보로 중국을 발끈하게 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면 미국이 방어에 나설 것이냐’는 질문에 “그렇다. 우리는 그럴 책무가 있다”고 전혀 모호하지 않은 답변을 내놨다. 국무부는 대만의 유엔기구 참여를 지원하겠다고도 했다. 대만은 이제 언제 터질지 모를 뇌관이 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내년 3연임을 결정지을 20차 당대회를 앞두고 있다. 더욱 공세적으로 대만 통일의 열기를 북돋울 것이고 그럴수록 대만의 독립 움직임은 가속화할 것이다. 대만해협의 군사적 긴장이 우발적 충돌을 낳고 미국의 개입으로 이어지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저 기우가 아닐 수 있는 이유다. 대만해협의 파고는 한반도에까지 미치고 있다. 미중 대결을 틈타 북한은 군사력 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다. 철도기동미사일 극초음속활공체 등 각종 신형 무기를 발사했다. 최신 무기들을 모아 전람회까지 열었다. 곧 집권 두 번째 10년에 접어드는 김정은이다. 중국의 뒷배를 믿고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도 있다. 한국의 처지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미중 사이 전략적 모호성을 내세운 줄타기 외교는 설 자리를 잃어간다. 북핵 해결은 고사하고 북한의 준동을 걱정해야 하는 데다 유사시 주한미군의 차출, 전술핵이나 중거리미사일 배치 같은 선택의 쓰나미에 직면할 수 있다. 대만해협의 경보음에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1-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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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철희]콜린 파월, 영원한 군인

    2001년 3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김대중(DJ)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 자신을 ‘디스 맨’이라고 칭한 부시의 결례 못지않게 DJ를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회담에 배석했던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이례적인 이석(離席)이었다. 부시가 대화 도중 갑자기 파월에게 눈짓을 하자 파월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파월은 전날 언론에 “새 행정부는 전임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이어받을 것’이라고 밝혔었다. 밖으로 나간 그는 기자들에게 “내가 앞서간 것 같다”며 자신의 발언을 번복했다. 부시 행정부 초기 네오콘(신보수주의) 강경파에 둘러싸여 있던 파월의 처지를 보여준 상징적 장면이었다. ▷자메이카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파월은 학군장교(ROTC)로 임관한 이래 군인으로서 승승장구했다. 냉전 말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을 거쳐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 때 역대 최연소이자 최초의 흑인 합참의장에 올랐다. 그는 1991년 걸프전쟁을 이끌며 무력 개입은 분명한 목표 아래 압도적인 전력을 사용해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는 ‘파월 독트린’을 보여줬다. 그 명성 덕에 공화당 대선 후보로 심심찮게 거론됐다. 아들 부시 행정부에서 최초의 흑인 국무장관으로서 최고위 외교관이 된 것은 그에겐 큰 시험대였다. ▷파월은 군 출신으로 국무장관이 된 조지 마셜, 나아가 대통령까지 오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꿈꿨을지도 모르지만 부시 행정부에선 외롭게 분투해야 했다. 딕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강경한 대외정책에 맞서 온건 실용파로서 목소리를 냈지만 역부족일 때가 많았다. 때론 원치 않는 ‘총대’도 메야 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전 유엔 연설은 그의 이력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됐다. 슬라이드까지 동원해 후세인 정권이 비밀리에 대량살상무기(WMD)를 개발해 왔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정보였다. 훗날 그는 “그 일로 고통스럽다”고 털어놨다. ▷파월은 공직을 떠난 뒤 당파와 이념에 얽매이지 않았다. 특히 군을 정치에 끌어들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겐 넌더리를 냈다. 지난해 6월 마크 밀리 합참의장은 엉겁결에 군복을 입은 채로 트럼프의 정치 이벤트에 등장해 구설수에 오른 뒤 군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사임해야 할까요?” 파월은 단호했다. “제길, 안 돼. 그 자리를 절대 받지 말라고 했건만. 트럼프는 완전 미치광이야.” 밀리는 사표를 내는 대신 ‘있어선 안 될 자리에 있었던 실수’에 대해 공개 사과했다. 18일 파월의 별세에 애도와 헌사가 넘치지만 누구보다 마음이 무거울 이들은 ‘영원한 선배’를 떠나보내는 군인들일 것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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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철희]CIA 코리아센터 해체

    2017년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초대 중앙정보국(CIA) 국장에 임명된 마이크 폼페이오. 야심만만한 하원의원 출신 폼페이오는 취임하자마자 트럼프 대통령의 최우선 어젠다에 맞춰 북핵 위협에 제대로 대응하고자 했다. 그래서 찾은 인물이 막 은퇴한 한국계 CIA 요원 앤드루 김. 그의 조언은 이랬다. “CIA에 인재들이 꽤 있죠. 한데 정보 수집, 분석, 비밀작전 등 여러 부서에 흩어져 있습니다. 각 부서는 칸막이가 높아서 최고의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요. 이들을 하나의 텐트 아래로 데려와 시너지 효과를 내야 합니다. 김정은이 누구인지, 무엇이 그를 움직이는지 알아내려면 뭔가 다른 시도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CIA 분석가와 요원 수백 명이 ‘코리아미션센터’라는 텐트 아래 모였고, 앤드루 김이 초대 센터장을 맡았다. CIA 안에 중동 유럽 같은 지역이나 대테러 같은 임무가 아닌 특정 국가를 전담하는 첫 미션센터였다. 당초 코리아센터의 임무는 북한 정보의 수집과 분석보다는 비밀작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대통령의 승인이 내려지면 언제라도 북한 지도자를 전복시키는 은밀한 행동을 계획하는 것이었다. 당시 정보기관으로서 CIA의 명성은 추락할 대로 추락해 있었다. 특히 이라크전쟁 때의 비밀작전 실패는 ‘고장 난 장난감 집’이란 오명까지 안겼다. 코리아센터 창설은 그런 실패의 역사를 만회할 기회이기도 했다. ▷북한의 잇단 핵·미사일 도발과 북-미 정상 간 험악한 말폭탄이 오가던 시절, 코리아센터가 어떤 대북 비밀공작을 기획했고 뭐라도 실행했는지는 알려진 게 없다. 그러나 이후 북-미 간 정세가 급변하면서 코리아센터는 대북 협상의 막후 주역으로 부상했다. 특히 김 센터장은 국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폼페이오의 평양 방문을 매번 수행했고, 통역마저 배제된 김정은과의 회담에 배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9년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이래 북-미 관계가 장기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코리아센터는 다시 짙은 베일 속으로 들어갔다. ▷CIA가 7일 새 조직으로 ‘중국미션센터’를 구성했다고 밝혔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넘버1 과제인 중국 견제를 위한 개편인 셈이다. 이에 따라 코리아센터는 동아시아를 담당하는 부서로 흡수될 것이라고 한다. ‘은둔의 왕국’ 타이틀을 은근히 즐기는 북한으로선 자기네 정보를 캐고 지도부를 해치려는 조직의 해체를 반기겠지만, 그만큼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엔 섭섭할 수 있다. 특히 거듭된 대화 손짓에 짐짓 ‘일없다’면서도 도발이든 협상이든 한판 벌여야 하는 김정은 처지에선 자신의 속내를 읽어줄 이들을 못내 그리워할지 모른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1-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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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미국의 ‘中포위’ 동맹 활용법

    중국 인민해방군 농구 선수 출신으로 홍콩에서 무역회사로 성공했다는 ‘붉은 자본가’ 쉬쩡핑. 1997년 초호화 빌라를 사들이고 거창한 곡예 이벤트를 벌이는 별난 거부(巨富)로 뉴스의 인물이 됐다. 우크라이나에 처박혀 있던 옛 소련의 미완성 항공모함 ‘바랴크’를 사서 해상 카지노로 쓰겠다는 그의 계획은 기발해 보였다. 거액의 뇌물과 중국산 독주를 동원한 향응 끝에 성사시킨 거래가는 2000만 달러. 하지만 그 뒤엔 몇 배 비싼 은밀한 거래가 있었다. 45t 분량의 설계도 서류와 기름칠 잘된 새 엔진을 제공받는 것이었다. 축구장 3배 크기의 항모를 중국으로 옮기는 데만 4년이 걸렸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해 터키를 지나기 위해선 중국 지도부가 나서 내밀한 외교적 거래를 해야 했다. 그렇게 항모는 2002년 다롄 조선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중국은 7년을 더 기다렸다. 미국과 주변국의 경계심을 우려한 시간 벌기였을까. 녹슨 선체를 닦아내고 페인트칠한 뒤 눈요깃거리로 방치해 뒀다. 마침내 2009년, 중국은 그때까지 남겨뒀던 바랴크함의 옛 깃발과 이름을 제거하고 개조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2012년 중국 최초의 항모 랴오닝함을 취역시켰다. 15년에 걸친 비밀 공작과 외교전, 오랜 기다림의 산물이었다. 그 이전까지 중국은 근해 방어에 주력하며 눈에 띄지 않는 비대칭 전력, 이른바 ‘암살자의 철퇴(殺手7)’ 개발에 주력했다. 세계 최대의 기뢰(機雷) 전력과 잠수함 함대, 세계 최초의 ‘항모킬러’ 탄도미사일 보유국이 됐다. 그러던 중국이 원거리 대양작전용 항모를 갖기로 한 것은 국가 전략의 근본적 수정을 의미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미국식 자본주의의 쇠퇴로 본 중국은 힘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던 전략에서 벗어나 이제 할 일을 적극 하겠다며 자기 억제의 고삐를 풀고 일대 전환에 나선 것이다. 이후 중국은 맹렬한 속도로 새 항모 제작에 나섰고 핵추진 항모까지 개발하고 있다. 대잠전과 대공전, 상륙전 능력도 키우며 해외 기지까지 건설하고 있다. 그동안 미국은 중국의 거침없는 군사굴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이래 본격적인 견제에 나섰지만 그것은 중국의 경제적 팽창 억제에 초점을 둔 것이었다. 군사적 견제는 우발적 충돌 같은 위험 부담 탓에 장기 전략 차원의 조심스럽고 제한적인 대응에 그쳤다. 하지만 조 바이든 행정부의 전략적 접근법은 이전과 사뭇 다르다. 지난달 미국이 영국과 함께 호주에 핵추진 잠수함 건조 기술을 제공하겠다며 ‘오커스(AUKUS) 동맹’을 출범시킨 것은 그 변화를 상징한다. 늑대외교라 불리는 중국의 강압적 행태에 분개한 호주의 요청에 따른 것이고 핵무기가 아닌 핵추진 기술에 한정됐다지만, 그간 미국이 고수해 온 핵확산 방지 원칙에 역행하는 이례적 조치다. 따지고 보면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군의 탄도미사일 사거리 제한을 전면 해제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외신들은 핵무기 보유국도 아닌 호주의 핵잠수함 보유, 핵잠수함도 없는 한국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개발에 주목한다. 역내 국가가 먼저 주도적으로 나서 잠재적 패권국을 견제하게 하는 강대국의 ‘역외균형(offshore balancing)’ 전략이 가동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국제정치 학자들이 꼽는 역외균형의 가장 효율적 수단은 핵무장 허용이다. 한국의 핵무장도 원하든 원치 않든 언제라도 감당해야 할 미래일 수 있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1-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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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철희]기시다의 ‘3A’ 내각

    일본 집권 자민당의 간사장은 당 자금을 관리하고 공천권과 인사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넘버 2’다. 이 자리를 5년 넘게 지내며 스가 요시히데 총리의 킹메이커 역할도 했던 역대 최장수 간사장 니카이 도시히로(82)가 1일 기시다 후미오 새 총재 체제를 맞아 물러났다. 니카이는 대표적인 친한파, 친중파로 꼽힌다. 주변국과의 관계가 험악해진 정냉(政冷)의 시기에 경제 교류를 통한 경열(經熱)을 주도하는 등 내각의 우경화 노선에 완충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중국과는 장쩌민 주석 시절부터 최고위층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고, 한국에는 박지원 국가정보원장과 ‘의형제’의 연을 맺은 사이라고 한다. ▷니카이의 후임 간사장으로는 아마리 아키라 세제조사회장이 기용됐다. 아마리는 아베 신조 전 총리, 아소 다로 부총리와 함께 자민당의 핵심 ‘3A’로 불리는 아베의 최측근이다. 아마리는 아소가 이끄는 아소파 소속이지만 이번 총재 선거에서 같은 파벌의 고노 다로 행정규제개혁상 대신 기시다를 지원했다. 특히 아베와 아소 간 소통 채널을 맡아 결선투표에서 기시다를 민다는 막판 합의를 이끌어냈다. 당의 정책을 담당하는 정무조사회장에는 총재 선거에서 아베의 공개 지원을 받았던 여성 극우파 다카이치 사나에 전 총무상이 발탁됐다. 아소는 부총재에 임명됐다. ‘3A 체제’의 재가동을 알리는 당직 인사가 아닐 수 없다. ▷기시다의 4일 총리 취임과 함께 발표될 내각 인선에서도 3A의 색채가 두드러질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우선 내각의 핵심인 관방장관에는 2차 아베 내각에서 문부과학상을 지낸 마쓰노 히로카즈 중의원이 내정됐다고 한다. 당초엔 아베의 심복이자 우익 강경파 하기우다 고이치 문부과학상이 떠올랐지만 ‘아베 일색이냐’는 비판 여론을 의식해 그나마 덜한 인물로 바뀌었다는 후문이다. 이처럼 3A, 특히 상왕(上王) 아베의 영향력이 부각되면서 정작 기시다가 이끄는 기시다파에선 내각에 얼마나 기용될지가 관전 포인트가 될 정도다. ▷자민당은 1993년과 2009년 두 차례 정권을 잠시 내준 것을 제외하곤 60년 초장기 집권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에는 정당정치란 없고 파벌정치만 있을 뿐이라는 얘기도 있다. 기시다는 내 편도 없지만 적도 없다는 무색무취의 정치인. 그가 국민적 인기가 높은 고노를 제칠 수 있었던 것은 파벌정치의 결과였다. 총재 당선 직후 일성도 “내 특기는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이었다. 한일관계를 고려하면 온건 성향의 기시다 선출은 환영할 일이지만, 그에게 드리운 3A의 그림자는 너무 짙어 보인다. 얼마 남지 않은 친한파마저 사라지고 있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1-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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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국가 盛衰를 정치적 입방아 삼을 일인가

    지난주 여당 원내대표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정부는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든 정부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 역사는 문재인 정부를 해방 이후 75년 만에 일본을 넘어선 정부로 기록할 것입니다.” 그 근거란 게 K방역 성공, 카불의 기적, 대일 무역전쟁 승리, 선진국 진입 등이다. 따지고 들면 하나같이 아이들의 유치한 자랑으로 들릴 얘기인데, 그걸 엮어놓으면 이런 ‘역사’가 만들어진다. 정치의 얄팍함이야 어쩔 수 없다고 넘어가면 될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인식이 우리 정부의 대외전략에도 배어 있는 것은 아닌지는 짚어야 할 문제다. 그 자랑거리 하나하나는 정부에서 나온 것들이다. 높아진 국가 위상을 알려 국민적 자부심을 심어주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게 실상과 달리 부풀려진 것이고, 나아가 고약한 비교의 기준으로 이용된다면? 그중 하나,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7월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바꿨다는 대목을 보자. 사실 한국은 오래전부터 모든 국제기구에서 선진국으로 활동해왔다. 그럼에도 UNCTAD에서 개도국 지위를 유지한 것은 무역협상에서 일부 예외를 인정받기 위한 의도적 방치 또는 게으름의 소산이었다. 그래서 뒤늦게 제자리 찾은 것을 멋쩍어해야 할 판인데, 대통령의 광복절 연설에까지 등장하는 홍보 소재가 됐다. 한국이 일본을 넘어섰다는 주장은 어떤가.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민소득과 국가경쟁력 순위, 국가신용평가 등급에서 앞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한국의 3배인 세계 3위이고, 한국이 손님으로 초대됐다고 자랑하던 주요 7개국(G7)의 멤버인 주인 국가다. 군사비도 여전히 한국보다 많이 쓴다. 그런 일본이 만만한 상대인가. 눈을 들어 미중 경쟁으로 격동하는 동북아 정세를 보면 한일 간 성쇠(盛衰)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입방아질인지 분명해진다. 중국의 급부상에 대한 미국의 경계심은 사실 과장이 아니다. 중국 GDP는 이미 미국의 70%를 넘었고, 추월하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인다. 1차 대전 때의 독일이나 2차 대전 때의 독일-일본 합산, 냉전 절정기의 소련까지 지난 100년간 그 어떤 미국의 적(敵)도 GDP가 미국의 60%를 넘은 적이 없다. 중국은 이제 미국의 패권을 끝낼 ‘100년 만의 대변혁기(百年未有之大變局)’를 맞았다며 국내 애국주의 열풍과 대외 팽창정책, 늑대외교로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다. 과거 수십 년간 중국은 힘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며 와신상담했다. 그러던 중국의 노골적 변신은 내년 20차 당 대회를 앞둔 시진핑의 장기집권 구상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미중 패권의 향배는 당장 가늠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패권경쟁이야말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시험대라는 점이다. 중국의 거대한 경제 규모와 세계시장 확장, 나아가 인공지능(AI) 양자컴퓨터 같은 첨단기술 투자는 가히 위협적이다. 반면 미국의 군사력과 소프트파워는 중국을 압도하고, 특히 동맹 네트워크는 중국을 누르는 최대 무기가 될 것이다. 갈등의 한일관계지만 미중 패권다툼 속에선 동병상련의 처지이다. 정작 걱정해야 할 일은 갈수록 더 벌어지는 중국과의 격차다. 잘나가던 이웃의 부진을 고소해하는 것은 내려다보던 이웃의 성장에 눈을 치켜뜨는 것만큼이나 유치하다. 더욱이 정치라는 이름의 ‘정신승리’는 국가의 눈도 멀게 한다. 올해는 루쉰의 ‘아Q정전’ 주간지 연재 100년이 된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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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철희]SLBM

    미국의 3대 핵전력(nuclear triad)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전략폭격기,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로 구성돼 있다. 땅과 하늘, 바다에서 쏘는 다양한 핵무기 투발 수단을 갖춤으로써 언제 어디서든 가능한 기습공격 능력과 함께 적의 선제공격에도 살아남아 보복하는 제2격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특히 SLBM은 바닷속 잠행의 은밀성 때문에 가장 안전하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핵전력으로 평가받는다.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ICBM을 개발한 북한이 기를 쓰고 SLBM을 개발하는 것도 그 은밀한 파괴력 때문이다. ▷우리 군이 최근 SLBM 개발의 마지막 단계인 잠수함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SLBM 개발은 지상 시험발사에 이어 바지선을 이용한 수중 시험발사, 잠수함 장착 시험발사까지 3단계를 거치는데, 지난달 취역한 3000t급 잠수함에서 실시한 두 차례 시험발사를 성공시켰다. 특히 잠수함 발사관에서 공기압력으로 미사일을 물 밖으로 밀어낸 뒤 엔진을 점화시키는 핵심 기술인 콜드 론치(cold launch)가 성공적으로 작동했다고 한다. 한 차례 더 시험발사를 마치고 양산에 들어가면 한국은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인도 중국 북한에 이은 8번째 SLBM 보유국이 된다. ▷북한은 2015년 ‘북극성-1형’, 2019년 ‘북극성-3형’ SLBM의 수중 시험발사에 성공했고 지난해 10월과 올해 1월 열병식에서 ‘북극성-4ㅅ’과 ‘북극성-5ㅅ’을 공개했다. 북한이 “강력한 선제타격 능력을 더욱 강화하겠다”고 큰소리치는 배경이다. SLBM 개발에서 북한이 한발 앞선 듯하지만 정작 SLBM을 탑재할 3000t급 신형 잠수함은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잠수함을 진수해 시험발사에 성공해야 완전한 전력화가 이뤄진다. 물론 북한 SLBM은 핵탄두 탑재 목적인 만큼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한국도 그 기술력은 충분히 입증한 셈이다. ▷한국의 미사일 개발은 1970년대 미국의 나이키허큘리스 미사일을 모방 개량하는 ‘백곰’ 사업으로 시작됐다. 백곰의 시험발사 성공에 놀란 미국이 ‘핵·미사일 확산 방지’를 내세워 개발 중단을 요구하면서 생겨난 것이 ‘미사일지침’이다. 그간 미사일 개발의 족쇄였던 이 지침이 5월 종료되면서 한국군은 탄두 3t짜리 전술핵급 탄도미사일도 개발한다. 인공지능(AI) 극초음속 무인자율 같은 미래 ‘게임 체인저’ 개발에도 나선다. 핵무기는 핵으로만 대항할 수 있는 절대무기지만, 자폭할 생각이 아니라면 사용하기 어려운 최종무기다. 핵무장은 아니더라도 북한의 섣부른 도발을 억제할 대항 수단 개발을 게을리할 수는 없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1-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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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철희]닌자 미사일

    9·11테러 이후 미국의 대테러 전쟁은 무인항공기(드론)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특히 전투용 드론의 등장, 즉 무인기와 정밀유도폭탄의 결합은 수백∼수천 km 밖에서 아군의 희생 없이 표적을 타격하는 군사적 혁신이자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게임 체인저’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표적을 오인해 엉뚱한 희생자가 생기고 민간인까지 폭발에 휘말려 사망하는 부수적 피해로 인해 현지의 반미(反美) 감정을 확산시켰다. 미국은 그 해법도 밀리테크(군사·military와 기술·technology의 결합)를 통한 보다 정교하고 깔끔한 무기 개발에서 찾고 있다. ▷미군이 28일 아프가니스탄 동부 낭가르하르주에서 이슬람국가(IS)의 한 분파인 IS-K의 고위급 표적 2명을 드론 공격으로 제거했다. 이틀 전 카불 공항에서 미군 13명을 포함해 200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낸 자폭 테러의 기획자와 조력자를 보복 살해한 것이다. 미 국방부는 민간인 사망자는 없었다고 강조했다. 외신들에 따르면 이번 보복 조치에 사용된 드론은 ‘하늘의 암살자’로 불리는 무인공격기 MQ-9 리퍼, 타격 무기는 ‘닌자 미사일’로 불리는 헬파이어 미사일 특수개량형(AGM-114 R9X)이었다고 한다. 적국 수뇌부나 테러조직 지휘부를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하는 ‘참수작전’의 핵심 전력이 동원된 것이다. ▷닌자 미사일은 기갑차량 파괴용인 헬파이어 미사일을 인간 표적용으로 개량한 비폭발성 운동에너지 미사일이다. 폭약이 든 탄두가 없고 그 대신 강철 칼날 6개가 표적에 충돌하기 직전 펼쳐져 내리꽂히면서 반경 50cm 영역을 파괴한다. 주변 피해를 최소화하고 목표만 확실히 해치우는 것이다. 그 칼날이 일본 자객 닌자(忍者)의 암살용 검처럼 생겼는데, 1970년대 미국에서 많이 팔린 주방용 식칼 브랜드 긴수(Ginsu)를 따서 ‘나는 긴수’라고도 불린다. 2017년 실전 배치된 이래 알카에다 등 테러 지휘부 제거에 사용됐다. 그 피격 현장 사진을 보면 주변에 폭발 흔적이 없고 차량만 갈가리 찢긴 모습을 볼 수 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이번 보복작전 지침은 “그냥 진행하라(Just do it)”였다고 한다. 바이든은 “이게 마지막이 아니다. 끝까지 뒤쫓아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다”며 미군을 희생시킨 테러엔 철저한 응징으로 본때를 보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미국은 일단 조기 철군을 통해 아프간의 수렁에서 벗어나더라도 테러와의 장기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 그것은 밀리테크를 더욱 앞세운 특수작전일 것이다. 하지만 깨끗한 전쟁은 없고, 뛰어난 기술적 우위도 잘못된 전략 아래선 승리할 수 없다. 실패로 끝난 20년 전쟁의 초라한 뒷모습이 보여주듯.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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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사이공의 굴욕’ 이후 美 전략가들이 한 일

    열흘 전 카불의 함락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줬다.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슈퍼파워의 초라한 모습에 경악했다. 미국의 냉정한 변심에 동맹국들은 몸서리쳤다. 하지만 조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과 다른 동맹은 다르다며 철군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프간 이후’를 주목해 달라고 주문한다. “우리가 아프간을 떠나는 것에 누가 가장 실망하는가? 중국과 러시아다. 그들은 우리가 계속 아프간에 매달려 있기를 바란다.” 많은 이들이 카불에서 1975년의 사이공을 떠올렸다. 사실 베트남 패전이 던진 충격파는 훨씬 컸다. 미국의 시대는 끝났다는 탄식이 이어졌다. 미국 사회 전반에 도덕적 냉소주의가 만연했고 지도층 역시 비관론에 빠졌다. 세계는 그 다음 무너질 도미노가 어디냐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베트남의 굴욕 이후 15년, 미국은 동서 냉전에서 승리하며 세계 유일 슈퍼파워로 우뚝 섰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동구권 전체가 흔들리면서 소련 제국이 해체됐다. 이라크를 상대로 한 전광석화 같은 걸프전쟁 승리는 미국의 부활을 알리는 불꽃쇼였다. 미국은 어떻게 베트남의 치욕을 전례 없는 승리로 만들었을까. 베트남 종전 이후에도 미국이 그 늪에서 빠져나오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레이건 행정부 들어서야 온전히 소련과의 전방위 전략경쟁에 집중할 수 있었다. 허수아비 군대라고 조롱받던 미군을 재정비하고 ‘더러운 전쟁’이란 딱지가 붙은 비밀작전도 벌였다. 특히 전략가들은 소련 군사력의 실체를 면밀히 분석해 미소 간 숨겨진 국력의 차이까지 알아냈다. 이를 통해 미국의 상대적 우위를 찾았고 그것으로 소련의 열세나 약점을 공략했다. 무엇보다 미국은 가뜩이나 과도한 군비 지출로 허덕이던 소련에 전략 핵 증강과 전략방위구상(SDI) 같은 장기 경쟁전략을 들이밀면서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강요했다. 그 결과 소련을 경제적으로 탈진시켰다. 소련의 자업자득도 한몫했다. 베트남 이후 소련은 아프리카와 중미 지역에서 대리세력들의 전쟁을 지원하며 과도한 확장에 나섰다. 그 정점이 아프간 침공, 10년의 수렁에 발을 들인 것이었다. 바이든이 제시한 ‘아프간 이후’가 카불의 치욕으로부터 시선을 돌리기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미국은 더 큰 싸움에 집중하려 한다. 그 상대는 소련 같은 노쇠한 제국이 아니라 새롭게 떠오른 도전자 중국이다. 중국이라고 베트남 이후 소련의 교만이 낳은 역사를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분명 달라졌다. 중국은 더 이상 힘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100년 만의 세력균형 대변동기’라며 자신감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관영매체는 “아프간은 대만의 운명에 대한 전조”라며 ‘대만 흔들기’에 나섰다. 정작 놀라운 것은 대만의 차분한 반응이다. 이미 미국의 버림을 받았던 아픈 역사 때문일까. 정부는 물론 정치권 모두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한다”며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아프간 이후 격화될 패권경쟁 속에 한국은 더욱 괴로울 것이다. ‘한미동맹과 한중협력의 조화’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미국이냐 중국이냐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정교하고 민첩한 생존전략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도 동맹이냐 자주냐는 부박한 주장만 횡행한다. 미국의 전략가들도 소련의 급작스러운 붕괴를 예측하진 못했다. 단지 그들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그 뒤엔 혜안을 채택한 지도자와 그를 뽑은 국민이 있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1-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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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철희]국민 버린 아프간 대통령

    “아프가니스탄에서 하늘은 두려움의 근원입니다. 폭격으로 존재가 소멸되는. 제가 재무장관이 됐을 때 3년 이상 살 가능성은 5% 이하라고 생각했죠. 아프간인 대다수가 하루 세 곳 이상의 라디오방송을 듣습니다. 세계(정세)가 중요하니까요. 그들의 가장 큰 걱정이 뭘까요. 버려지는 것입니다.” 세계적 명사를 초청하는 지식콘퍼런스 TED 강연에서 2005년 아슈라프 가니 당시 카불대 총장은 소련군 점령 이래 아프간이 겪은 공포의 삶을 이렇게 전했다. ▷가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났지만 10대 때부터 미국에서 공부한, 사실상 절반은 미국인으로 산 인물이다. 소련 침공으로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그는 문화인류학자가 되어 세계은행과 미국 대학에서 근무했다. 미군의 탈레반 축출 이후에야 24년 만에 귀국해 재무장관으로서 정부개혁을 주도했다. 45년간 보유하던 미국 시민권은 2009년 첫 대선 도전을 위해 포기했다. 2014년, 2019년 대선에서 승리했지만 그때마다 부정선거 논란이 일었고 선거에 불복하는 경쟁자와 권력을 나눠야 했다. ▷카불 함락 며칠 전까지 대통령으로서 가니는 미군의 갑작스러운 철수를 비난하며 군벌과 국민에게 반(反)탈레반 저항과 봉기를 촉구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마지막 처신은 촌부보다 못 했다. 누구보다 먼저 줄행랑을 쳤다. 행선지조차 밝히지 않은 외국으로 도주했다. 카불 주재 러시아대사관 관계자가 전한 그의 탈출 행적, 차량 4대에 가득 찬 돈을 헬기에 실으려다 모두 싣지 못해 일부는 활주로에 버리고 떠났다는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행방이 묘연했던 가니는 사흘 뒤에야 아랍에미리트에 체류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페이스북 동영상을 통해 “더 많은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했다. “거기 남았다면 25년 전 일이 되풀이됐을 것”이라며 1996년 탈레반이 카불 장악 직후 당시 대통령을 공개 처형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그가 도망치며 먼저 떠올린 것은 좁은 하수구에서 피범벅이 돼 최후를 맞거나 수염이 덥수룩한 채 토굴에서 끌려나온 독재자들이었을지 모른다. 공포에는 지도자의 위신도 품격도 없다. ▷가니는 “아프간에 돌아가기 위해 상의하고 있다”며 귀국 의지도 밝혔다. “떠나올 때 내겐 옷 한 벌과 조끼, 샌들뿐이었다”며 자금 횡령 의혹도 부인했다. 하지만 국민을 버린 배신자, 실격(失格)한 지도자의 말은 이미 신뢰를 잃었다. 아프간에 남은 암룰라 살레 제1부통령은 가니의 부재에 따른 합법적인 임시 대통령을 자임했다. 가니의 귀국 가능성도 희박해 보이지만 설령 돌아간다 해도 아프간에 그의 자리는 없을 것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1-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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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北 장단에 南 장구치면 美 춤출까

    북한 김여정은 2일 담화에서 통신선 복원에 대해 “단절됐던 것을 물리적으로 다시 연결시켜 놓은 것뿐”이라며 그 이상의 의미를 달지 말라고 했다. 통신선 복원 소식에 “가뭄 깊은 대지에 소나기 소리”라던 여당 대표나 “천금과도 같은 남북 소통의 통로”라던 통일부 장관이 듣기 무색할 야멸친 언사지만, 사실 그것은 김정은이 올해 1월 노동당 8차 대회에서 밝힌 ‘대남 셈법’ 그대로다. 당시 김정은은 ‘3년 전 봄날’을 거론하며 그때로의 복귀 여부는 “전적으로 남조선 당국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대가는 지불한 것만큼, 노력한 것만큼 받게 된다. 우리 요구에 화답하는 만큼, 합의 이행을 위해 움직이는 것만큼 상대해주면 된다.” 그 말대로라면 통신선 재연결은 남측이 그간 보여준 성의와 노력이 가상해서 내준, 딱 그만큼의 보상이다. 작년 6월 북한이 통신선을 끊으면서 이유로 들었던 대북전단 살포를 막기 위해 남측 정부는 국내외의 온갖 비판을 무릅쓰고 대북전단금지법을 만들었고 최근 그 법에 따라 경찰 수사와 검찰 송치까지 진행했다. 북한은 그에 상응한 셈을 치렀다는 얘기다. 사실 많은 이들이 통신선 복원 자체보다 더 주목한 대목은 7·27 정전협정 체결일에 맞춘 이벤트가 성사되기까지 남북 정상이 ‘여러 차례’ 친서를 교환했다는 점이었다. 당장 여권 내부에서 4차 남북 정상회담의 기대감에 들뜬 목소리가 나온 것도 그래서였다. 청와대는 ‘4월부터 여러 차례’라고 발표했고, 북한 조선중앙통신도 ‘최근 여러 차례’라고 보도했다. 그런데 그제 국가정보원은 국회에 ‘두 차례 교환’이라고 보고했다고 한다. 일부 언론에선 ‘10여 차례’라고도 전했지만, 친서는 4·27 판문점선언 3주년 전후와 5·21 한미 정상회담 이후 두 번에 걸쳐 4통이 오간 것이다. 한 차례가 아닌 ‘두 차례’여서 ‘여러 차례’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어감 차이는 엉뚱한 추측 또는 오해를 낳기 십상이다. 두 차례 친서 교환은 ‘충분한 소통’보다는 ‘기대의 확인’ 정도로 보는 게 적당할 것이다. 지금 김정은의 관심은 남한이 아닌 미국에 있다. 대북제재에 자연재해에 코로나19까지 3중고에 시달리는 처지에서 김정은은 자기 입으로 식량난을 시인했다. 어떻게든 고립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감이 턱밑까지 차올라 와 있다. 코로나 유입 공포감 속에서도 대외 행보를 서서히 준비하던 차다. 다만 남한이 아무리 남북관계에서 ‘자율적 공간’을 확보했다 한들 모든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음을 김정은도 모르지 않는다. 남측에 한미 연합훈련 중단이라는 또 다른 숙제를 던진 것도 그 때문이다. 3년 전 그랬던 것처럼 미국과 대화할 만한 분위기 조성에 나서 달라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끊었던 통신선만 달랑 이어 놓고 그걸로 1차 계산은 끝났으니 다음 숙제도 해내면 다시 주판알을 튕겨 보겠다는 고약한 태도지만, 북한에 목매 온 문재인 정부로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통일부와 국가정보원이 나섰고, 결국 청와대는 미국에 매달리는 형국이다. 미국으로선 동맹국의 뜻을 야박하게 무시할 수도 없지만, 불량국가의 못된 버릇을 그대로 받아줄 수도 없다. 물론 북한이 비핵화 대화에 나선다면 훈련 일정을 미루는 정도는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자면 북한의 태도부터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김정은이 한미 간 이간질 이후 입을 싹 씻는다면? 동맹 불신과 내부 갈등으로 만신창이가 되는 것은 누구겠는가.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1-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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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몸통 흔든 김일성, 꼬리 치는 김정은

    1961년 6월 말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기 사흘 전에야 중국 측에 방소 일정을 통보하며 그 목적은 ‘(북-소) 군사동맹조약 체결이 핵심’이라고 알렸다. 중국은 급박하게 움직였다. 우리와도 조약을 맺자며 서둘러 방중 초청장을 보냈고, 북-소 조약을 토대로 만든 조약문을 지도부에 회람하랴, 대대적인 환영행사도 준비하랴 분주했다. 김일성이 북-소 조약 체결 닷새 만에 북-중 우호조약까지 얻어낸 데는 이런 교묘한 ‘등거리 외교’가 있었다. 두 조약은 모두 ‘일방이 무력침공을 당하면 상대방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즉시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군사적 맹약을 담았다. 차이가 있다면 북-소 조약이 10년 유효기간에 이후 5년마다 연장하도록 한 반면, 북-중 조약은 ‘쌍방 간 수정 또는 폐지 합의가 없는 한 계속 효력을 가진다’고 규정한 점이다. 중국이 소련보다 강한 보장을 해준 것은 소련과의 격한 갈등 속에 북한을 끌어안으려는 구애의 산물이었다. 김일성은 1960년대 초 공산권 내부의 균열을 십분 활용했다. 특히 사회주의 맹주 소련에 비해 고립된 처지였던 중국으로부터는 막대한 경제원조는 물론 유리한 국경조약까지 얻어냈다. 약소국이지만 강대국 사이에 경쟁을 부추기며 주도권을 쥐는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尾巴搖狗·미파요구) 외교’의 결과였다. 이후 중국의 문화혁명과 개혁개방, 탈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그런 북한의 외교적 기교는 쉽게 통하지 않게 됐다. 7월 11일로 체결 60년이 된 북-중 우호조약도 중국 내에선 오래전부터 사문화된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미중이 패권 대결로 치닫는 요즘, 죽었던 ‘북-중 혈맹’이 새삼 되살아나는 분위기다. 북-중 밀착이 가시화된 것은 5월 말 한미 워싱턴 정상회담 직후였다. 한미가 ‘동맹 업그레이드’를 과시한 지 닷새 만에 중국 외교부장은 북한 대사를 만나 ‘우호조약 60주년 기념활동’ 개시 의사를 밝혔다. 이후 양국의 기고문 교차 게재, 평양 기념연회 개최, 김정은 시진핑의 친서 교환이 이어졌다. 한미 동맹 강화에 맞선 북-중 동맹의 부활이었다. 한 달 가까이 모습을 감췄던 김정은이 기다렸다는 듯 공개석상에 나타난 것도 이때부터다. 6월 4일 당 정치국 회의를 시작으로 중앙군사위 확대회의, 중앙위 전원회의, 정치국 확대회의를 잇달아 주재했다. 부쩍 살이 빠져 때꾼해진 눈으로 간부들을 노려보며 대대적인 문책인사도 단행했다. 북-중 화물운송 재개를 위한 방역장 건설이 지연되자 책임을 물은 것이라고 한다. 비빌 언덕이라곤 중국밖에 없는 김정은의 조바심을 드러낸 대목이다. 그러면서도 김정은은 “전략적 지위와 능동적 역할을 높여 유리한 외부환경을 주동적으로 만들겠다”며 미중 대결구도에서 몸값을 높이겠다는 욕심을 내비쳤다. 미국을 향해 “대화도 대결도 준비하겠다”며 넌지시 유화 제스처도 보였다. ‘대화 메시지’라는 해석에 여동생을 내세워 부인했지만 그건 중국의 지원부터 받고 나서 보자는 얘기로 들린다. 그렇게 북한은 비핵화를 외면하면서 당분간 중국에 기대 연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중국이 마냥 북한을 챙길 수는 없다. 중국은 북한의 붕괴를 방관하지 않겠지만 핵장난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김정은은 할아버지의 외교를 흉내 내고 싶어 하는 듯하다. 하지만 김일성이 외친 ‘자주외교’ ‘자력갱생’도 기실 줄타기용 허울에 불과했다. 그래서 아들 손자에게 물려준 것도 핵을 껴안고 굶주리는 나라일 뿐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1-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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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철희]북미 덮친 살인폭염

    태평양 연안의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는 여름철에도 선선해 에어컨 없이 지내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 섭씨 50도에 육박하는 폭염이 이어지면서 수백 명이 목숨을 잃고 곳곳에서 산불이 나고 있다. 최근 일주일간 719명이 돌연사했는데, 예년의 3배 수준이라고 한다. 미국 서북부 워싱턴주와 오리건주도 온열질환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 폭염은 북미 지역만이 아니다. 중부 유럽과 러시아 시베리아까지 지구촌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CNN은 “기후변화가 북반구를 태우고 있다”고 보도했다. ▷살인적 폭염의 원인은 ‘열돔(heat dome)’의 발생에 있다. 열돔은 대기권에 발달한 고기압이 반구형 지붕을 만들어 뜨거운 공기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지표면에 가두는 현상인데, 하강기류가 지상 공기를 누르면서 기온이 오른다. 이런 열돔은 찬 공기와 따뜻한 공기를 섞어주는 제트기류가 기후변화로 인해 약해지면서 더 빈번하고 더 극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번에 북미를 덮친 폭염은 기후변화가 없다면 수만 년에 한 번 일어날 만한 일이라지만 지금처럼 온실가스 배출이 계속된다면 매년 나타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이제 폭염은 예고된 위협이 됐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면 폭염으로 대규모 사망 사태가 닥칠 수 있다는 묵시록 같은 경고가 예사롭지 않다. 최근 AFP통신이 입수한 유엔 정부 간 기후변화위원회(IPCC)의 보고서 초안은 지구의 평균기온이 지금보다 0.4도 오를 경우 지구 인구의 14%가 5년마다 최소 한 차례 극심한 폭염에 노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특히 개발도상국의 대도시가 가장 큰 희생양이 될 것이라고 했다. ▷시사주간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폭염을 폭풍이나 홍수와 달리 극적인 재앙 현장도, 막대한 재산 피해도 없지만 훨씬 많은 희생자를 낳는 ‘조용한 살인자’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장기적 노력도 중요하지만 당장 폭염 예보에 따른 휴업이나 휴교, 실내 대피를 권고하는 경보 시스템 구축, 그늘막이나 무더위쉼터 같은 대피시설의 마련, 나아가 건물 외부를 흰색으로 칠하고 식물을 심는 조치들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난데없는 소나기가 한바탕 내리다 언제 그랬냐는 듯 햇볕이 쨍쨍 쏟아지는 날씨가 이어지더니 이제 한반도는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된 듯하다. 하지만 이 장마가 끝나고 더운 공기가 한반도 상공에 갇히기라도 하면 우리나라도 언제든 최악의 폭염에 시달릴 수 있다. 111년 기상관측 이래 가장 뜨거웠다는 2018년 여름의 폭염을 압도하는 수준이 될 것이다. 다만 폭염은 코로나19와 달리 충분히 예고된 만큼 철저한 대비로 재앙을 막아야 한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1-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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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트럼프와 다른 듯 같은 길 가는 바이든

    지난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예정보다 짧은 3시간여 만에 끝났다. 결과도 단출했다. 핵전쟁 위험을 줄이기 위한 ‘전략적 안정 대화’를 조만간 시작한다는 세 문단짜리 공동성명과 본국으로 소환했던 양측 대사를 임지로 복귀시키기로 했다는 합의가 전부였다. 사이버 해킹과 인권 문제를 놓고선 바이든의 비판과 경고에 푸틴은 정면으로 부인하고 반격했다. 기자회견도 따로 했다. 그간 바이든 외교에 후한 평가를 해오던 미국의 조야는 ‘빈손 외교’라며 박한 점수를 주고 있다. 바이든은 “시간이 얘기해줄 것”이라고 했지만, 독재자에게 정당성과 승리를 안겨줬다는 비판까지 나왔다. 그래서 이번 회담은 바이든의 몸짓과 말투를 둘러싼 해프닝으로만 기억될지도 모른다. 회담 오프닝 사진촬영 때 바이든은 ‘푸틴을 신뢰할 수 있느냐’는 기자 질문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제스처를 놓고 백악관은 부랴부랴 푸틴을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부인했다. 회담 후 기자회견 말미엔 ‘푸틴이 행동을 바꾸리라고 왜 그렇게 자신하느냐’고 묻는 기자를 향해 “대체, 내가 언제 자신한다고 했어”라고 언성을 높였다가 나중에 사과했다. 푸틴은 야릇한 냉소를 띤 채 협박과 회유의 현란한 언사로 상대를 위압하기로 악명 높다. 그와의 만남은 회피하고 싶지만 도전하고도 싶은 위험한 유혹이다. 바이든은 푸틴이 만난 다섯 번째 미국 대통령이다. 이전 대통령들은 푸틴을 만난 뒤 한결같이 낭패감을 토로했다. 예측불가 협상의 달인이라는 전임 도널드 트럼프도 단단히 곤욕을 치렀다. 3년 전 푸틴과 만난 트럼프는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에 대해 “푸틴은 러시아가 한 게 아니라고 했다. 러시아가 그럴 이유가 없다”고 말해 미국인들을 경악시켰다. 미국 정보기관의 판단을 무시하고 오히려 푸틴을 두둔했으니 ‘반역행위’라고 낙인찍힐 만했다. 평생 사과라곤 모르던 트럼프도 ‘부정어(n‘t)를 빠뜨린 실수’였다고 해명했다. 그러니 바이든에겐 푸틴에 대한 어떤 공감이나 호의 표시도 금기였다. 오히려 푸틴은 과거 자신을 ‘살인자’라고 부른 바이든을 향해 “경험 많고 균형 잡힌 상대”라고 평가했지만, 그것조차 바이든으로선 손사래를 쳐야 할 처지였다. 트럼프와는 무조건 달라야 하는 바이든 외교의 치명적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지금은 힘이 빠졌다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최다 핵무기를 보유한 핵강국이자 세계질서를 교란하는 도전세력이다. 그럼에도 바이든의 최대 목표인 중국 견제를 위해선 적절히 관리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푸틴을 만난 것도 중-러 연대를 흔들어 보려는 차원이었다. 하지만 인권과 민주주의를 내세운 ‘가치외교’는 야당 인사를 독살하는 야만정권과의 거래를 용인하지 않는다. 백악관은 회담 나흘 만에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를 예고했다. 인권과 안보를 분리한다면 트럼프와 다를 게 뭐냐는 비판에 서둘러 내놓은 조치다. 지금까지 바이든 외교는 순조로웠다. 트럼프가 무시했던 동맹의 강화, 다자주의 협력, 보편적 가치를 강조했고 국제사회의 환영을 받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미국 외교는 늘 가치와 이익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왔다. 그래서 ‘자유주의의 외투를 걸친 현실주의’라는 비아냥거림도 받았다. 바이든은 트럼프가 좌충우돌 달려간 국익 우선의 길을 우아하게 걸으려 한다. 세계는, 특히 중국과 북한은, 바이든 외교가 어떤 진면모를 보여줄지 주시하고 있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1-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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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줄타기 외교’ 바뀐 것은 없다

    5·21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문재인 정부의 대(對)중국 외교 기조가 바뀌었다는 평가가 있다. 공동성명에서 대만 문제에다 남중국해, 쿼드(Quad·미국 일본 인도 호주 4개국 협의체)까지 거론한 것을 두고 친중(親中)에서 반중(反中)으로 노선을 변경했다고도 한다. 과연 그럴까. 그 텍스트를 짚어보고 4월의 미일 정상회담 결과와도 비교해봤다. 한미, 미일 회담 결과는 각각 공동성명(joint statement)과 부속 설명서(fact sheet)로 나왔다. 한미 성명은 영문 기준으로 2641단어, A4 용지로 8장가량이다. 4년 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첫 회담 때 나온 성명(1578단어)보다 훨씬 길다. 거기에 비슷한 분량(2428단어)의 설명서까지 추가됐다. 미일 공동성명(2117단어)과 설명서(1271단어)보다도 길기는 하지만, 그 전개 방식이나 흐름에선 별 차이가 없다. 설명서 형식은 거의 판박이다. 미일 성명에는 ‘중국’이 다섯 차례 적시됐다. ‘국제적 규범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 중국의 행동’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불법적 영유권 주장과 활동’이라고 중국을 직접 겨냥했다. 나아가 대만 문제는 물론 ‘홍콩과 신장위구르의 인권 상황에 대한 심각한 우려’도 표명했다. 반면 한미 성명에는 ‘중국’이라는 단어가 없다. 대만 문제가 포함된 것은 분명한 메시지겠지만 ‘대만해협에서 평화와 안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게 전부다. ‘홍콩과 신장위구르’ 문제는 빠졌다. 남중국해 부분도 미일 성명보다 한결 완화된 원칙적 표현이 담겼다. 중국을 간접 겨냥한 대목에서도 한미 성명은 미국의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전략을 언급했지만 그것은 ‘한국의 신(新)남방정책과 연계하기 위해 협력한다’는 내용으로 담았다. 쿼드 역시 한국이 그간 표방해온 개방성 투명성 포용성의 다자주의 원칙과 함께 엮어놓았다. 코로나19 기원 논란과 관련해선 ‘투명하고 독립적인 평가와 분석’을 명시했지만, 미일 성명에 있는 ‘(중국의) 간섭과 부당한 영향력 배제’라는 표현은 빠졌다. 또 한 가지, 한미 성명에는 구체적 액수까지 명시된 국제적 기여 또는 투자 약정이 곳곳에 담겨 있다. 한국은 코로나19 백신 지원 프로젝트인 코백스AMC에 ‘상당한 증액’을 약속했다. 글로벌보건안보구상(GHSA)에 ‘5년간 2억 달러’를 기여하고, 미국이 난민 문제로 골치를 앓는 중미 3개국에 ‘4년간 2.2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미일 사이엔 차세대 이동통신망(5G, 6G) 연구개발에 미국이 25억 달러, 일본이 2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한 게 유일한 금액 약정이다. 한국도 여기에 10억 달러를 약속했다. 물론 외교에서 문서는 일부일 뿐이다. 나아가 눈에 띈 몇 가지 단서로 전반을 평가해서도 안 된다. 다만 “중국 입장에선 한국을 높이 평가할 것”이라는 외교부 차관의 말도, “조 바이든 대통령이 원래 상대방을 띄워놓고 뒤로 빼간다”는 야당 원내대표의 말도 공동성명을 뜯어보면 과히 틀리지 않다. 그런 발언이 적절했는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말이다. 아울러 미국의 은근한 압력에 문재인 정부의 외교노선이 미국 쪽으로 얼마간 옮겨간 것은 맞아 보인다. 그것은 전임자와 달리 동맹과 함께 가는 바이든 대통령을 상대로 한 주고받기 외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런 변침(變針)이 이제야 제정신을 차린 인식의 돌변이라거나 그 반대로 역풍을 걱정할 노선 변경이라는 해석은 무리가 아닐까 싶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1-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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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김정은의 여동생 사용법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지난달 말 워싱턴포스트의 단독 보도를 통해 처음으로 그 윤곽을 드러냈다. 백악관 대변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내용을 확인해 줬고,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이 잇달아 북핵의 외교적 해결을 강조하고 나섰다. 당국자들이 한결같이 “계속 조율 중”이라며 함구했던 내용인데, 공식 발표가 아닌 언론 누설로 일부가 공개됐다. 이것도 바이든식 간접접근 전략 아닐까 싶다. 새 정책이 나오면 뭐든 핑계 삼아 도발을 벼르던 북한도 미국의 거듭된 접촉 제안에 일단 “잘 접수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미국의 설명 먼저 들어보는 게 순서일 텐데 만날지 말지부터 따져보겠다는 태도가 고약하지만, 그간의 무반응에 비하면 그나마 긍정적 신호로 읽힌다. 미국 당국자들은 ‘눈금 매기듯 정밀하게(calibrated) 자로 재듯 신중하게(measured) 음정 맞추듯 조절된(modulated)’ 실용적 접근법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트럼프 시절의 ‘빅딜 아니면 노딜’식 일괄 타결과도, 오바마 시절의 ‘불량배와는 상종 못해’식 전략적 인내와도 다르다고 한다. 언론을 통해선 싱가포르 합의도, 단계적 해법도 수용할 수 있다는 얘기까지 흘려보낸다. 아무리 정교한 접근법이라도 그 성패는 북한이 얼마나 호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만큼 상대의 주먹 쥔 손가락부터 하나씩 펴겠다는 신중한 태도지만, 교착상태를 타개할 뚜렷한 유인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니 오바마식 전략적 인내와 다를 바 없는 ‘전략적 관리’ 아니겠느냐는 얘기도 벌써 나온다. 북한은 지금 도발을 통한 위기 조성과 극적인 협상 전환이라는 상투적 전술의 재가동 시기만 저울질하는 듯 공격적 자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외교적 접근 이면에는 억지와 제재 방안이 정교하게 준비돼 있음을 북한도 알고 있다. 특히 전방위 대북 압박엔 결국 중국도 손들 수밖에 없을 것임을 4년 전의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배운 바 있다. 북한이 살 길은 결국 대화에 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과는 다른 협상을 해야 한다. 바이든식 접근법이 트럼프와 다른 가장 분명한 차이는 톱다운 담판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바이든은 북-미 정상회담을 “불량배에게 정당성만 부여한 TV용 쇼”라고 비판했다. 실무협상부터 차근차근 밟아가며 성과가 나오기 전까지 정상회담은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대화가 시작돼도 북한 협상팀은 으레 그랬듯 모든 걸 정상 간 담판으로 넘기자고 고집할 공산이 크다. 신하 된 자는 외교를 할 수 없다는 전근대적 인신무외교(人臣無外交) 규범이 여전히 작동하는 북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간 북한 협상대표에게 재량권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었다. “비핵화 얘기를 꺼내면 그들은 ‘위원장 동지가 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만 했다. 김정은 외엔 비핵화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앤드루 김) “그들은 무수한 기회를 잡는 대신 장애물 찾기에 몰두하며 2년을 낭비했다.”(스티븐 비건) 김정은 앞에선 오금도 못 펴는 협상대표로는 어떤 대화도 시간 끌기에 그칠 것이다. 김정은이 진정 의지가 있다면 여동생 김여정을 협상대표로 보내는 것이 그나마 남은 유일한 방법이다. 김여정에게 대미·대남 업무를 맡겼다지만 지금 그의 역할이라곤 온갖 험한 막말을 쏟아내는 것뿐이다. 적어도 김정은과 대화가 가능한 김여정이 나온다면 미국도 걸맞은 카운터파트를 곧바로 물색할 것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1-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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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철희]3년 前 판문점의 봄날

    남북 두 정상이 나란히 산책을 하다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눈 판문점 도보다리 대화. 새소리 바람소리만 깔린 35분의 롱테이크 영상에 전 세계의 시선이 쏠렸다. 입 모양을 읽는 구화판독 전문가의 분석 결과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핵무기’ ‘미국’ ‘트럼프’ 같은 단어들이 포착됐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열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주로 미국을 어떻게 상대할지 묻고 문재인 대통령이 의견을 내놓은 것으로 추정됐다. ▷3년 전 북한 최고 지도자로선 처음으로 남쪽 땅을 밟은 김정은에게 판문점 회담은 북-미 정상회담으로 가는 징검다리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 회담을 목전에 두고 전격 취소를 통보해 무산 직전에 갔을 때 김정은이 부랴부랴 문 대통령을 찾은 곳도 판문점이었다. 이듬해 하노이 북-미 담판이 결렬된 뒤 남북미 3자 정상의 깜짝 회동도 벌어졌지만, 판문점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분단과 대결을 상징하는 예전 모습 그대로다. 한반도 평화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 우여곡절의 이벤트만 몇 개 더해졌을 뿐이다. ▷‘양 정상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8000만 우리 겨레와 전 세계에 엄숙히 천명했다.’ 두 정상이 낭독한 판문점선언의 흥분과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5개월 뒤 평양 정상회담에선 남북 간 실질적 종전(終戰)을 이뤘다는 평가까지 나왔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미 대화의 장기 교착은 남북관계의 진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남북 간 ‘전면적 획기적 진전’은 금세 ‘단계적 돌발적 후퇴’로 바뀌었다. ▷특히 북한은 판문점선언을 남북관계를 대결로 전환하는 핑곗거리로 이용했다. 지난해 6월 ‘확성기 방송과 전단 살포를 비롯한 모든 적대행위의 중지’를 담은 내용을 들이밀며 판문점선언의 성과물인 개성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시켜 버렸다. 3개월 뒤엔 서해상에서 우리 국민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판문점선언도 7·4, 6·15, 10·4 같은 과거의 숱한 남북 합의문처럼 어느덧 휴지조각이나 다름없게 됐다. ▷한반도의 주인은 남북이라지만 미국의 의지 없이는 어느 것도 풀리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새 대북정책 공개를 앞두고 남북 모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요즘이다. 그간 북한의 온갖 욕설을 들은 문 대통령이다. 트럼프 시절 대북접근을 두고 “변죽만 울렸다”고 했다가 발끈한 트럼프로부터 험담까지 들었다. 중매자로선 술 석 잔과 뺨 석 대 사이에서 아쉬움의 표현도 쉽지 않은 예민한 시기인 건 분명하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1-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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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스가 햄버거’

    지난주 워싱턴 미일 정상회담에서 단연 눈에 띄는 장면은 조 바이든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 총리의 20분짜리 햄버거 오찬 회동이었다. 미국 측이 ‘코로나 예방 차원에서 곤란하다’고 했는데도 일본 측이 일대일 면담을 고집해 성사된 일정이라고 한다. 백악관이 공개한 사진에는 마스크를 쓴 두 정상이 기다란 테이블 위에 햄버거를 앞에 두고 멀찍이 앉아 있다. 바이든은 의료용 마스크 위에 검은 마스크까지 썼다. 준비한 햄버거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스가는 “그 정도로 대화에 열중했다. 단번에 마음을 터놓았다”고 강조했다. 이 회동을 두고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는 트위터를 통해 “만찬을 거부당한 햄버거 회담”이라며 ‘조공외교’라고 비판했다. 쩔쩔매는 스가의 모습이 “가련했다”고도 했다. 민주당 출신 하토야마는 미군기지 이전 문제로 갈등을 빚다 9개월 만에 물러난 단명 총리. 과거사에 대한 소신 발언으로 한국에선 박수를 받지만 일본 정계에선 ‘외계인’ ‘ET’라는 별명으로 통한다. 일본 언론도 그다지 주목하지 않은 뉴스인데도 유독 눈길이 가는 이유는 뭘까. 미국 새 행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한발 먼저 정상회담을 열고 친밀함을 과시하는 일본, 나아가 늘 일본을 먼저 배려하는 미국을 바라보면서 불편한 심사를 갖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깟 게 뭐라고!’ 하면서도 ‘또 일본에 밀렸네. 정부는 뭐 했지?’ 하는 생각이 스치는 것이다. 단순히 선망과 질시라고 말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다. 그런 심정적 요동은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해양 방류를 일방적으로 결정한 직후라서 더욱 그랬을 수 있다. 미국에선 오염수 방류 결정이 나오자마자 국무장관까지 나서 “투명한 노력을 해준 일본 정부에 고마움을 표시한다”는 트윗을 날렸고, 방한한 기후변화특사는 한국 측의 중재 요청에도 “미국이 끼어드는 게 적절치 않다”고 선을 그었으니 말이다. 미일 밀월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작금의 밀착은 중국의 부상을 억제하려는 양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미국은 슈퍼파워 지위를 위협하는 중국을 철저히 견제하겠다는, 그리고 일본은 그런 미국에 편승해 묶여 있던 안보 족쇄를 벗어버리겠다는 것이다. 일본은 올림픽 개최와 코로나 백신 확보 등 미국의 지원이 절실한 터라 중국의 격한 반발과 국내의 우려 목소리에도 대만 문제까지 건드렸다. 내달 하순에 열릴 한미 정상회담도 여러모로 미일 회담과 비교될 것이다. 각종 의제에서, 특히 중국에 대한 톤의 차이는 두드러질 것이다. 물론 한국과 일본의 처지가 같을 수는 없다. 반도와 섬이라는 지정학적, 그리고 역사적 경험의 차이가 분명해서 한미일 3각 동맹이란 이름으로 한데 묶기 곤란한 지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간 중국의 횡포에 맞서 저항력을 키운 일본과 달리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한국은 더욱 조심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국제정치는 냉혹한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과 힘의 차이, 특히 군사력 격차가 큰 비대칭 동맹을 맺고 있다. 그렇다고 일방적 시혜의 관계는 아니다. 동맹은 상호 공유하는 이익을 바탕으로 유지된다. 주판알을 튕기는 계산이 없을 수 없다. 우리가 목도하는 외교는 흔히 국가적 위신의 문제로 나타나지만, 그 이면에는 힘의 질서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이냐는 생존의 문제가 있다. 다소 모양 빠지는 자리라도 만들어 자신의 처지를 이해시키고 공감대를 넓히려는 노력을 쉽게 폄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스가의 햄버거 외교를 우리가 그저 웃고 넘길 수만은 없는 이유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1-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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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바이든표 대북정책, 한국의 자리는 있나

    지난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취임 첫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탄도미사일 도발에 ‘상응하는 대응’ 방침을 밝혔다. 언론 카메라에는 바이든이 미리 적어온 메모가 포착됐다. 최고령 대통령으로서 잦았던 말실수를 염려한 ‘커닝페이퍼’라는 얘기도 나왔지만, 그보다는 참모진과 논의한 대응의 선을 정확하게 지키겠다는 의사 표시일 것이다. 바이든 외교안보팀은 대북정책 재검토와 관련해 “마지막 단계”라는 답변 외엔 말을 아끼고 있다. 행정부 곳곳에서 언론 플레이가 난무하고 대통령마저 불쑥불쑥 트윗을 날리던 전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는 전혀 다른, 조금은 답답할 만큼 모범생 같은 외교를 보여주고 있다. 바이든이 약속한 ‘모범의 힘’은 우선 단단한 내부 입단속과 한목소리로 나타나는 듯하다. 사실 바이든 외교팀은 모범생 일색이다. 대부분 아이비리그 출신 엘리트이자 쟁쟁한 이력을 지닌 베테랑들이다. ‘말은 부드럽게, 대신 큰 몽둥이를 들고(Speak softly, but carry a big stick)’라는 외교의 기본을 충실히 따른다. 바이든의 외교 중시는 30년 넘게 직업외교관으로 일한 윌리엄 번스 전 국무부 부장관을 중앙정보국(CIA) 국장에 발탁한 것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외교관 출신 CIA 국장은 처음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최대 외교 성과로 꼽히는 이란핵합의(JCPOA)의 산파 역할을 했던 번스는 자신의 책 ‘막후교섭(The Back Channel)’에서 진정한 외교는 ‘조용한 힘(quiet power)’이라고 정의한다. “동맹을 돌보고, 상대를 압박하고, 분란을 잠재우고, 장기적 투자를 하는 눈에 띄지 않는(invisible)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는 트럼프의 대북 외교에 대해서도 냉정한 평가를 내린다. “트럼프 대통령이 오래된 교범을 던져버리고 김정은과 직접 관여한 것은 옳았다. 한데 유감스럽게도 그의 충동과 무능, 독재자 관용, 쇼 집착은 진짜 외교를 밀어내버렸다. 그 사이 북한은 핵을 키우고 미사일을 정교화하고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면서 우리 동맹들을 갈라놨다.” 조만간 윤곽을 드러낼 바이든표 대북정책은 이전과 분명히 다를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일찍이 대북정책으로 ‘최대의 압박과 관여(Maximum Pressure & Engagement)’를 내걸었다. 하지만 “햄버거 협상부터 전투용 망치까지”라던 얘기대로 북한의 태도에 따른 즉흥적 대응이 전부였다. ‘분노와 화염’ 같은 거친 말폭탄으로 시작했지만 최대 압박은 실종됐고 ‘세기의 쇼’라던 정상 간 직거래의 환상은 여지없이 깨졌다.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최대 압박과 관여’라는 기조는 유지될 수 있다.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가 관건이기에. 다만 트럼프 방식과는 달리 진짜 압박과 관여가 치밀한 매뉴얼 아래 진행될 것이다. 북한은 늘 그랬듯 협박과 도발로 미국을 자극하고 있다. 그런 습관적 도발 행적을 돌아보면, 종국엔 스스로 걸어 나오게 될 협상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정작 괴로운 처지는 한국이다. 운전자를 자부해온 터에 동맹과 동족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해보려 하지만 북한은 원색적 비난을 퍼붓고 있다. 김정은에게 한국은 미국으로 가는 징검다리였을 뿐, 그마저 용도 폐기한 것처럼 보인다. 한미는 ‘완전히 조율된 대북전략’에 기초한 공조를 약속했다. 한국의 자율적 외교 공간은 필요하다. 그러자면 동맹의 신뢰부터 얻어야 한다. 서두르고 보채기만 하다간 조수석에조차 앉을 수 없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1-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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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바이든의 ‘국내 외교’

    “조 바이든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두고 동맹을 강탈한다고 비판했는데, 본인이 대통령 돼선 트럼프 때 해놓은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익을 편취하는 그런 모습 아닌가.”(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 한미 간 방위비분담금 협상 결과를 두고 ‘편취(속여 빼앗음)’라고 폄훼하는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의 말본새와 인식수준이 저열하기 짝이 없지만 미국 정권교체 이후 새 행정부의 대외정책 행보에 대한 관전평으론 과히 틀리지 않아 보인다. 이제 갓 출범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정책 재검토에 정신이 없기도 하겠지만, 요즘 바이든 외교안보팀은 트럼프 시절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가 남기고 간 유산을 고스란히 챙기거나 트럼프가 없었다면 못 거뒀을 과실들을 하나씩 따먹고 있는 형국이다. 물론 바이든 행정부는 그런 유의 지적이 나올 때마다 펄쩍 뛴다지만. 백악관이 최근 공개한 국가안보정책(NSS) 중간지침서는 세계 안보환경을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문을 연다. “우리는 세계가 75년 전, 30년 전, 나아가 4년 전 그때로 쉽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겨선 안 된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후 슈퍼파워로 부상하고, 냉전 종식과 함께 일극(一極)으로 우뚝 섰던 영광의 시기에 대한 짙은 향수와 함께 적어도 트럼프 이전으로라도 돌아가야 한다는 희망을 담았다. 바이든 외교는 트럼프 시절과의 단절, ‘새로운 길(new course)’을 강조한다. 바이든은 취임 직후 트럼프가 탈퇴했던 파리기후협약과 세계보건기구(WHO)에 재가입하면서 미국의 국제사회 복귀, 동맹과 외교의 복원을 선언했다. 바이든이 표방하는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는 민주주의와 인권 같은 보편 가치를 내세우며 동맹과 다자협력을 중시하는 미국의 전통적 노선이다. ‘힘의 과시’뿐 아니라 ‘모범의 힘’으로 세계를 이끄는 리더가 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정책비전 곳곳에선 트럼프식 힘의 논리가 짙게 묻어난다. NSS 지침은 “전 세계 ‘힘의 분포’가 바뀌고 있다”며 현실주의 학파의 세력균형론을 동원해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의 위협을 설파한다. 선거 때 내건 ‘중산층을 위한 외교정책’을 정교화하고, 외교정책과 국내정책 간 전통적 구분마저 허물며 두 영역의 결합을 공식화했다. 바이든은 이미 백악관 국내정책위원회 책임자로 노련한 외교안보통을 기용하기도 했다. 앞으로 무역협상에서 미국 중산층의 이익을 우선시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동맹의 비용분담 원칙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은 지금 제 코가 석 자인 형편이다. 지난 대선이 남긴 후유증, 특히 미국 사회를 반 토막으로 가른 분열의 정치를 어떻게든 치유하지 않고선 어떤 대외정책도 힘을 발휘하기 힘들다. ‘미국이 호구냐’며 백인 중산층 유권자를 파고든 트럼프식 포퓰리즘 논리를 바이든도 마냥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이든 행정부는 지금 국민을 향한 ‘국내용 외교’에 분투하고 있다. ‘국내정치는 국경에서 멈춰야 한다(Politics stops at water‘s edge)’는 초당적 외교 금언은 무색해진 지 오래다. 그에게 급한 것은 국민을 상대로 한 직접 설득이다. 국익이 우선이고 중산층을 중시한다는. 그러면서도 대외적으론 ‘겸손과 자신감’을 앞세우고 미국의 소프트파워(문화·가치)를 무기로 매력 공세를 펴고 있다. 하드파워(군사·경제)를 바탕으로 원색적인 힘자랑을 하던 트럼프와는 분명 다른 모습이지만 국익 극대화라는 외교의 기본이 달라질 리는 없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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