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

김현수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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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5~2025-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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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현수]고환율 뒤 소셜미디어의 숨은 효과

    최근 원-달러 환율의 이상 급등세를 보며 문득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뱅크런 사태가 떠올랐다. 2023년 3월 실리콘밸리 일대 핵심 은행이 미국 역사상 두 번째 규모로 파산한 사건이다. 세계가 경악한 것은 역대급 파산 속도였다. 자금 이상 신호가 감지된 지 불과 36시간 만에 초고속 파산했다. 전례가 없던 일이다. 과거와의 결정적 차이는 ‘기술의 진화’에 있었다. 소셜미디어는 공포를 빛의 속도로 전파했고, 고도화된 디지털 뱅킹 시스템은 순식간에 62조 원이 빠져나가는 ‘클릭 뱅크런’을 현실화했다. 기술 진화가 금융 변동성을 증폭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 극단적 사례다.韓 소셜미디어의 ‘원화 탈출’론 최근 원화 약세, 즉 환율 급등이 공포에 기반한 ‘원화 런’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환율 상승세는 3년여 지속된 한미 금리 역전 현상, 저성장 장기화 등 구조적 요인이 크다. 하지만 디지털 투자 시스템 정착과 소셜미디어 여론 쏠림 현상이 최근의 환율 변동성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SVB 사태와 닮은 구석이 있다. 올 초 현대경제연구원이 분석한 한국의 ‘균형환율’(경제 상황을 감안한 적절한 통화 가치)은 2022년 말 1179원에서 2024년 말 1351원으로 상승했는데, 실제 환율은 이보다 지속적으로 높았다. 적정 가치보다 원화가 더 싸게 거래되고 있다는 의미다. 원화가 실제보다 평가절하되는 간극에는 시장의 비관론이 있고, 비관론은 소셜미디어에서 더욱 증폭되고 있다. 소셜미디어상에는 ‘원화가 녹고 있다’는 말이 일상어가 됐고, 원화 약세 전망은 하나의 ‘믿음’처럼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이슈에서 나타나는 확증 편향 현상이 자본 시장에서도 나타나는 셈이다. 소셜미디어의 여론 쏠림이 시장에 실시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이미 실증 연구로 확인됐다. 콜로라도 볼더대 J 앤서니 쿡슨 교수팀은 ‘뱅크런 기폭제로서 소셜미디어’라는 2023년 논문에서 SVB 사태 당시 트위터(현 엑스) 데이터를 분석했다. 위험이 제기됐을 때, 트윗이 수분 단위로 주가 하락과 뱅크런으로 이어지는 ‘초고속 디지털 전염’이 나타난다고 밝혔다. 투자 결정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디지털 금융 시스템도 환율이 꾸준히 상승해 온 최근 5년 새 정착된 것이다. 2020년 이후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과 환전 없이 주문 가능한 해외주식 통합증거금 시스템이 대세가 됐다. 시간 장소 구애 없이 누구나 해외 자산을 사고팔 수 있게 되면서 700만 서학개미가 외환시장의 새로운 플레이어로 떠올랐다. 과거에는 환율이 특정 선을 넘으면 ‘균형’으로 돌아올 것이란 전망에 달러를 팔겠다는 사람이 많았지만, 지금은 ‘더 오를 테니 지금이라도 사야 한다’는 포모(FOMO)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기술이 야기하는 변동성의 뉴노멀 외환 당국은 구두 개입에 나서고 국민연금·수출기업·증권사와 대책을 협의하고 있지만 원-달러 환율은 4일에도 1470원대로 올랐다. 과거 정책이 지금의 시장에 잘 통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심지어 미국의 금리 인하 기대감조차 교과서적인 예측을 빗나간다. 금리 차 축소는 원화 강세 요인인데, 오히려 미국 증시 강세가 더 커져 글로벌 자금이 미국으로 쏠리고 있다. 이는 원화 약세로 돌아온다. 기술이 만드는 변동성 증폭 현상은 앞으로의 뉴노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인공지능(AI)이 투자 결정을 실시간으로 대신하거나, 스테이블코인이 일상화되면 자금 이동의 속도는 극단적으로 빨라질 것이다. 변동 요인이 강해질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답이 될 수 있다. 한국 경제 펀더멘털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변동성을 줄이는 첫 단추다.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 18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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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김용범 “10·15대책은 임시조치… 토허제 길게 갈수 없어”

    김용범 대통령정책실장(사진)이 연내 부동산 공급대책 발표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서울과 경기 12개 지역을 토지거래허가제 등 규제지역으로 묶은 10·15 대책에 대해선 ‘임시 조치’임을 여러 차례 강조하며 “토허제를 길게 끌고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김 실장은 지난달 2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6·27 대책이라는 강력한 수요 억제책을 했는데도 두어 달 후에 상승 압력이 현재화돼 (10·15라는) 임시 조치를 했다”며 “국민들에게 불편함이 있어 송구스럽다. 토허제는 오랫동안 가지고 갈 수는 없다”고 밝혔다. 정부가 10·15 대책을 두고 ‘임시 조치’라고 명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토허제 ‘핀셋 해제’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재차 “토허제를 길게 끌고 갈 수 없고, 임시 조치”라며 “대전제는 탄탄한 공급대책을 약속대로 마련하고, 시장이 차분해지면 리뷰해서 종합적으로 (해제를)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실장은 공급대책을 위해 국토교통부뿐 아니라 국방부, 농림축산식품부, 국가유산청 등 공공용지가 있는 모든 부처가 주택공급 관계장관 회의체를 통해 필사적으로 땅을 찾고 있다고 했다.그는 “장관들에게 (기존 시설의) 대체지도 찾아주고, 예산도 지원할 테니 ‘땅 좀 내놓으세요’ 한다”며 “국유재산, 노후 청사, 학교 등 싹 다 망라해서 주택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공용지를 활용하려 한다. 5000∼1만 호 단지도 있고, 1000호씩도 모으면 많다”고 말했다. 이어 “연내가 중요하다. 목표는 (연내로) 독려를 하고 있고, 최종 발표까지는 아니더라도 진행 경과라도 밝힐 것”이라고 덧붙였다.최근과 같은 환율 급등 상황에 미국에서 투자금 요청이 온다면 거절할 수 있을지를 묻자 김 실장은 “당연히 보내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이어 “미국이 통화스와프 해결을 못 해 줬지만 우리가 각종 그래프를 보여주며 외환위기도 얘기했고, 미국도 경청해 (외환시장 안정 관련) 대화가 됐다”고 말했다.“해외투자가 환율 영향주는 건 사실… 투기 이용되는 제도적 허점 점검중”해외투자稅 인상엔 “단기 검토 안해”“토허제 풍선효과도 보고 있어… 공급대책 전과 다르다 싶게 해야”韓美 관세 협상엔 “네버엔딩스토리… 대만 반도체 협상 끝나면 韓도 협의”“서학개미들이 해외에 돈을 보내는 규모가 최근에 굉장히 커졌다. 개인의 해외 투자는 자유이니 그것을 (점검)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증권사에서 해외로 나가는 레버리지(빚)를 과도하게 권유하거나 하는 느슨한 스트럭처(구조)가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김용범 대통령정책실장은 지난달 26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개인과 기관의 해외 투자 급증을 최근 환율 급등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보고 증권사 리스크 점검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3년여 지속된 한미 금리 격차 등 거시적 문제와 더불어 국민연금, 수출기업, 서학개미 등 3개 주체의 왕성한 해외 투자가 최근 환율 급등세에 영향을 주고 있다며 각각에 대한 대책을 쓰겠다는 것이다. 특히 서학개미 투자에 대해 증권사가 외환시장에 리스크를 키우는 방식으로 ‘빚투’를 부추기는 것은 아닌지 등 증권사 감독 강화에 나설 것을 내비쳤다. 김 실장은 “전통적으로 은행은 외환시장에 숙달된 플레이어지만 증권사는 새롭게 역할이 커지고 있기 때문에 외환 당국과 대화 채널이 열려야 한다”며 “상장지수펀드(ETF) 등도 정부가 점검해서 새로운 안전장치를 구상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 “금융 당국이 과도한 투기적 반응에 이용되는 제도적 루프홀(허점)을 점검해 대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해외 투자 양도소득세 인상 등 세제 활용에 대해선 “단기적으로 검토하고 있진 않다. 젊은 세대가 부의 투자에 있어 공정하지 않다고 하는 생각을 경청해서 세심하게 하겠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정부의 환율 대책은 국민연금, 수출기업, 서학개미에 집중되나. “국내 주식 시장이 이전과 달리 주주 가치를 높이고 있고, 국민연금도 국내외 적정한 투자 배분 원칙이 필요하다. 또 공공성을 감안해 ‘외환시장의 잠재적 부담’을 (투자) 원칙으로 감안해야 한다. 이를 논의하기 위해 외환 당국과 국민연금이 모여 ‘뉴프레임워크’를 시작했다. 기업도 원화 약세를 기대하고 국내에 가져와야 할 돈을 해외에 너무 오랫동안 두고 있는 게 아닌지 보고, 필요하면 적정 수준으로 국내 환류를 권유할 것이다.” ―정부가 환율에 뾰족한 대책이 없는 것 아닌가. “당연히 대책이 있다. 각 주체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지켜보는 것이지 대책이 없어서가 아니다. 특히 외국인투자가들이 ‘정부가 뭘 못 할 것’이라며 대규모 원화 쇼트(매도)를 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분명히 대책이 있다.” ―젊은층은 정부가 서학개미 탓을 한다고 불만이다. “탓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젊은 세대가 부동산 문제도 있고, 주식이나 암호(가상) 자산에 열의를 가지는 그 절박감도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개인과 기관의 해외 투자가 환율 시장에 영향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경청해서 세심하게 해야 한다.” ―환율 상승은 정부 부채로 인한 통화량(M2) 증가 탓이란 지적도 있다. “M2가 상승하는 게 정부 부채 문제는 아니다. 재정 수치는 건전하다. 최근 채권 금리가 35∼40bp(베이시스포인트·1bp는 0.01%포인트) 오른 것은 금리 방향에 대한 기대감 차이 때문이다. 새 정부가 재정을 확장하고, 소비쿠폰을 발행했기 때문은 아니다. 전반적으로 M2 유동성이 많고, 그래서 부동산도 상승 압력이 커져 서울과 경기 12개 지역을 규제하는 임시 조치를 한 것이다.” ―국토교통부 장관의 토지거래허가제 권한 강화 법안이 통과되면 지역별 핀셋 해제할 것인가. “법안과 관계없이 토허제를 길게 끌고 갈 수 있느냐, 그건 아니다. 풍선효과도 보고 있다. 공급대책이 ‘이전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게끔 해야 한다. 각 (공급) 지구별로 30분씩 발표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으로 준비하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 때 이해관계자의 반발로 공급 실패하지 않았나. “이번 공급대책에서 가장 피해야 할 게 그것이다. 과천청사, 조달청 터 거의 다 안 됐다. 부끄러운 것이다. 그래서 누가 정부를 믿겠나. (지금은) 다수당이고, 문재인 정부 후기 때보다도 지금이 더 절박하다. 이렇게까지 (국민들에게) 불편을 끼치진 않았으니 지금이 훨씬 심각하다. 공급 후보지는 모두 잠재적 개발 정보라 장관회의에서 전체 자료 만들지 않고, 각 담당 장관에게 봉투에 담아서 준다. 휴대전화도 영치하게 한다.” ―재건축 규제 완화는 없나. “서울시와 중앙정부가 논의 중이다. 다만 민간에 용적률 혜택을 주면 그 지역은 단기간에 또 올라서 고민스럽다.” ―보유세 인상은 고려하지 않나. “과세 형평성과 주택 시장 안정이 목표인데 세제도 중요한 수단임에는 분명하다. 시장에서 일방적으로 이 정부는 세제를 안 쓴다고 전제하면 부동산 시장 이상 과열의 근거가 될까 봐 그렇지, 당장 한다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한-대만 반도체 관세를 묶어서 협상하려는 것은 추후 직접투자를 유도하려는 것 아닌가. “미국은 그런 희망 사항이 있다. 반도체는 미국에 중요한 산업이라 늦게까지 반도체만 가지고 한참 협상하다가 결론도 안 나고 ‘못 한다’고 하다가, (미국에서) 대만 이야기가 나와 우리도 ‘오케이’했다. 딜 사이즈(투자 규모) 관련해선 반도체는 빠진 것이다. 지금 대만과 미국 협상이 마무리되면 우리도 반도체 협상 할 것이다. 끝없는 (협상) 과정이다. 이승철 노래처럼 ‘네버 엔딩 스토리’다.” ―미국이 반도체 추가 투자를 요구한 것인가. “반도체가 여러 패키지 안에 있었다. 미국이 ‘반도체(패키지)는 민간이 투자하고 정부는 보증이니까 사실상 당신들 부담은 없는 것이니 붙이자’고 했다. 우리 안에서 어마어마한 논쟁이 있었다. 보증이니까 괜찮지 않냐고도 했는데, 우리 ‘레드팀’이 연 200억 달러 이상, 총 3500억 달러 이상은 반도체가 아니라 반도체 할아버지가 와도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반도체(투자)는 (최종안에서) 날아간 것이다. 레드팀이 야속하기도 했는데, 그들이 맞았다.” ―레드팀은 누구인가. “대통령도 계시고, 대통령과 싱크로율이 높은 강훈식 비서실장도 있다. (타결 전날까지) 최고조의 긴장 상태였다. 대통령 입장에서 양보는 못 하겠고 해서 대통령이 기대 수준을 올렸었다. 미국서 ‘두고 보자, 무슨 일이 생길까 보자’라는 말도 했었다. 하지만 정상회담 당일에 ‘연 200억 달러면 괜찮겠는가’라는 문자가 우리 측에 왔고, 대통령도 협상 문구를 외우다시피 한 데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있던 상태여서 (문자 오고) 30분 사이에 해결됐다. 우리는 대기업들에도 진행 상황 다 알려줬다. 각 기업이 현지에 로비펌 있으니까 3, 4개 로비펌이 러트닉 장관에게 붙었다. 그래서 나중에 러트닉 장관이 ‘한국처럼 민간까지 다 덤벼드는 나라는 처음’이라고 한 것이다. 협상 깨지면 기업이 미국에 약속한 해외직접투자(FDI) 못 한다고 하라고 농담으로라도 얘기하니 그룹들도 잘 움직여줬다. 이제 대통령도 총수들 만나면 오래 대화하고, 대통령도 스며들게 됐다. 초기와 굉장히 많이 바뀌어서 지금은 친기업이다.” ―친기업이라기에는 더 센 상법이나 노란봉투법에 재계는 불만이 많은데…. “우리나라만의 지배구조가 있으니까 가족(총수 일가) 통제는 제도 개선을 해야 한다고 본다. 노란봉투법도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과 많이 토론했는데 김 장관이 ‘교섭 창구가 마련되면 오히려 교섭이 극단적으로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 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 들은 30분 얘기로만은 상대할 수 없다. 지금 정규직, 비정규직, 3∼4차 하청 하면서 ‘신분화’돼 있다. 젊은 세대는 그렇게 막무가내로 일하지 않는다. 직원 복지를 강화하지 않으면 국민소득 3만, 4만 달러 시대에 제조업이 허물어질 수 있다.”인터뷰=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정리=윤다빈 기자 empty@donga.com}

    • 202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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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현수]두 개의 경제가 따로 도는 나라

    국제통화기금(IMF)은 해마다 네 차례 ‘세계경제전망(WEO)’을 발표한다.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가 바뀔 때마다 IMF에 그 배경을 물으면 늘 비슷한 단골 멘트가 돌아온다. “반도체 경기가 풀리면 하반기 회복 여력이 있고….” 전망치가 오르든 내리든 한국 경제를 설명할 때 반도체가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도체 보릿고개가 오자 지난해 세수는 펑크가 났다. 지난달 수출에서 반도체 비중은 26%에 달했다. 최근 반도체 호황, 즉 ‘슈퍼사이클’이 찾아오니 증시도 수출도 경기 전망도 밝아지고 있다.‘팀 빅테크’ vs 내수 산업 직전 슈퍼사이클이었던 2017, 2018년 한국은 각각 3.4%, 3.2%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10년 만에 다시 온 반도체 호황은 0%대 성장 우려에서 벗어날 희망을 주고 있다. 하지만 두 번의 슈퍼사이클이 도는 동안 내수는 얼어붙어 왔다. 일시적 경기부양 효과가 나오더라도 수출의 온기가 내수로 번지지 못한 탓이다. 그 결과 한국에는 전혀 다른 두 개의 경제가 굴러가고 있다. 글로벌 정보기술(IT) 공급망 속에서 빅테크와 한 팀이 된 수출 경제, ‘팀 빅테크’. 그리고 내수 중소 제조업·자영업의 경제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한쪽은 호황인데 다른 쪽은 침체다. 성과급이 쏟아질 때 다른 쪽은 생활고에 시달린다. 임금은 물가 상승을 따라가지 못하고 고용 불안까지 겹친다. 코스피가 4,000을 훌쩍 넘겼지만 여전히 오른 종목보다 내린 종목이 훨씬 많다. 반도체 취업유발계수는 전체 제조업 평균의 3분의 1 수준이다. 다른 산업보다 고용이 덜 필요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발 관세 타격에 따른 공급망 재편으로 ‘팀 빅테크’는 해외 투자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청년들은 ‘팀 빅테크’에 편입되고자 하지만 취업 문은 좁아지는 셈이다. 실제로 제조업 취업자 수는 16개월째 줄어들었다. 반면 구직조차 포기한 2030은 매달 늘고 있다. 지난달 20대뿐 아니라 한창 일할 30대마저 ‘쉬었음’ 인구가 33만 명으로 급증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분노에서 나오는 극단의 정치 10년간 자산 인플레이션도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최근 글로벌 금리 인하가 시작되자 다시 자산 인플레 조짐도 보인다. 팀 빅테크 취업도, 자산 인플레도 잡지 못하는 2030세대의 좌절은 점점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세대 갈등으로도 번진다. 한 나라에 두 경제가 따로 돌면 소외된 이들의 절망이 커지고, 분노를 연료로 삼는 극단 정치가 등장한다. 미국도 그렇다. 월가와 실리콘밸리가 이끄는 미국 경제에서 소외된 분노가 극단적 정치 지형을 만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등장엔 쇠락한 제조업 지역의 분노가, 조란 맘다니 뉴욕 시장의 등장엔 ‘미친 월세’에 대한 2030의 분노가 있었다. ‘페이팔 마피아’의 좌장이자 팔란티어의 창업자이며 동시에 트럼프 행정부의 출연에 깊숙이 개입해 온 피터 틸은 오래전부터 젊은 세대의 분노를 지나치지 말라고 조언해 왔다. 최근 맘다니 시장의 당선에 그의 발언들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다. 틸은 최근 미 언론 인터뷰에서도 맘다니의 문제의식만은 동의한다고 밝혔다. 해법에 대한 생각은 보수인 그와 완전히 다르지만 말이다. 틸은 ‘빚(학자금 대출)’과 ‘부동산’이 젊은 세대를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로 만들고 있고, 기존 정치인들은 이를 외면했다고도 했다. 이어 “미국 문화전쟁의 80%쯤은 결국 경제 문제로, 경제 문제의 80%는 부동산 문제로 귀결된다”고 말했다. 한국에도 들어맞는 말이다. 안정된 일자리, 주거지 확대가 결국 많은 문제의 답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분노를 먹고 크는 정치가 아닌, 따로 도는 두 개의 경제를 이어주는 정책이 절실한 이유다.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 2025-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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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현수]보유세 높은 美는 세금으로 집값 잡았나

    10·15 부동산 대책 이후 보유세 인상 논란이 거세다. 김용범 대통령정책실장과 구윤철 경제부총리가 보유세를 강화하고 거래세는 낮추는 방향의 세제 개편을 시사했기 때문이다. 구 부총리는 “미국처럼 재산세를 (평균적으로) 1% 매긴다고 치면 (집값이) 50억 원이면 1년에 5000만 원씩 내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기획재정부는 보유세 인상이 구 부총리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며, 결정된 게 없다고 진화에 나섰다. 그간 기재부가 보유세 카드에 상당한 우려를 표한 것으로 알려진 점을 감안하면 구 부총리의 발언은 한국 보유세가 미국보다 낮다는 점을 강조하려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0여 년간 일관성 없는 부동산 대책에 시달려온 국민들은 ‘보유세 1%’ 언급에 술렁이고 있다. 美 보유세 1위 뉴저지 부동산 골머리 그간 정책 실패에도 보유세 인상이 여전히 유효한 부동산 대책으로 거론되는 것은 ‘똘똘한 한 채’ 문제를 해소할 매력적인 카드로 보이기 때문이다. 세 부담을 견디지 못한 다주택자나 ‘똘똘한’ 고가 주택 보유자가 매물을 내놓으면 공급이 늘고 가격이 안정된다는 논리다. 물론 실제 보유세가 부동산 가격 변동성 완화, 세대 간 주택 전이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실증된 사례는 보기 힘들다. 보유세가 높은 미국만 봐도 그렇다. 미국 주택 보유세는 종합부동산세는 없고 지방세인 재산세가 전부다. 대체로 한국의 0.1∼0.4%보다 높다. 시·카운티별로 실효세율이 다른데, 뉴저지주가 평균 2.3%로 가장 높고 뉴욕은 1.26%, 캘리포니아도 0.7% 수준이다. 하지만 뉴욕, 캘리포니아, 뉴저지주는 ‘주거난(housing crisis)’으로 골머리를 앓는 대표 지역이다. 집값과 월세가 모두 치솟아 2030세대는 높은 주거비에 시달리고, 노숙인 증가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커지고 있다. 일자리·학군·교통이 집중된 대도시일수록 수요가 몰리지만, 공급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높은 공사비, 까다로운 인허가, 단독주택 선호도 등이 공급 제한 요인으로 꼽힌다. 게다가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연은)에 따르면 미 보유세 1위 뉴저지주 주택가격지수는 최근 5년 동안 68% 급등했다. 같은 기간 캘리포니아주(44%)보다 상승률이 높았다. 수요와 공급의 미스매치 앞에 보유세 효과는 미미한 셈이다.부동산 세제 넘어 상속세 등 큰 그림 봐야 정책효과가 미미한 증세는 사회적 불만으로 이어진다. 미국 보유세는 지역 학교와 편의시설 등을 개선하는 데 쓰이는 지역 세수 확충 명목이다. 그런데 팬데믹 이후 집값이 급등해 지역 개선 효과보다 보유세 부담이 훨씬 커지자 곳곳에서 갈등이 커지고 있다. 이에 텍사스주는 11월 중간선거에서 재산세 감세 관련 주민 투표를 진행한다. 캘리포니아주는 이미 1970년대에 보유세 상승에 분노한 주민들이 발의해 재산세율은 1%, 상승률은 2%로 제한하는 내용을 주 헌법에 담았다. 세목 하나만 떼어 비교하는 것도 위험하다. 한국은 보유세는 낮지만 거래세가 높다. 상속세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미국은 1인당 약 1399만 달러(약 201억 원)까지 연방상속세가 면제되지만, 한국은 서울 아파트 한 채로도 과세 대상이 된다. 집 한 채를 두고 보유세는 미국식으로, 증여 및 상속세는 한국식으로 내라고 하면 조세 저항은 불가피하다. 모든 방안을 강구해 주거 안정에 나서야 하는 것은 맞다. 누더기가 된 부동산 세제 전면 개편도 필요하다. 하지만 증세는 납세자가 효용을 체감하고 공감할 때에만 정당성을 얻는다. 특히 보유세가 특정 계층을 겨냥한 정치적·징벌적 세금이 된다면 국민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세제 개편은 큰 그림을 보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 2025-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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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현수]원화 값도 출산율 닮아가는 세상

    환율 전망은 저명한 경제학자조차 손사래를 칠 정도다. 변동성이 크고 요인이 복잡해 해석이 분분하다. 그럼에도 요즘 시장에선 ‘원화 가치의 구조적 하락세’를 언급하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게 들린다. 수출이 줄고, 국내 투자가 위축되며, 인구절벽이 현실화하면 원화 수요는 감소할 수밖에 없기에 원화 값 하락은 구조적 추세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압박이 원화 약세를 부추기며 원-달러 환율을 끌어올린 데서 더 나아가 원화의 미래 자체를 비관하는 전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원-달러 환율 1400원이 뉴노멀? 원-달러 환율이 오른다는 것은 달러에 비해 원화 선호도가 떨어졌다는 뜻이다. 반대로 외국인들이 한국 주식을 매수하고,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 반도체를 앞다퉈 사들이면 원화 몸값이 올라가 환율은 내려간다. 그런데 9월은 좀 이상했다. 외국인 순매수로 코스피가 8번 신기록을 경신했고, 인공지능(AI)발 반도체 ‘슈퍼사이클’로 수출도 나쁘지 않았는데 원-달러 환율은 1400원대까지 올랐다. 트럼프 대통령이 “3500억 달러 대미 투자를 선불로 내라”고 한 직후엔 1410원대로 치솟았다. 달러를 벌어들여도 다시 해외로 갈 것이란 불안감이 반영된 것이다. 게다가 원화는 다른 주요 통화보다도 더 저평가되고 있다. 9월 달러인덱스는 0.4% 오르는 데 그쳤지만, 원화는 달러 대비 1.6%나 절하됐다. 기간을 더 두고 보면 원화의 하향 추세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1일 기준 원-달러 환율은 5년 전보다 20.3% 상승했다. 미국 싱크탱크 한미경제연구소(KEI)는 5월 ‘원화의 걱정스러운 트렌드’라는 보고서에서 “코로나 직후 잠깐의 반짝 회복을 제외하면 원화는 지난 10년간 장기 하락세”라고 진단했다. 2015년 초만 해도 원-달러 환율은 1100원을 넘느냐 마느냐였다.한국 경제에 대한 비관론 우려 수출 강국 한국의 원화 가치는 왜 10년 동안 하락했을까. KEI는 들어온 달러가 한국에 머무르지 못하고 곧바로 해외로 투자되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올 2월 현대경제연구원이 ‘균형환율’(경제 상황을 감안한 적절한 통화 가치)을 추정해 봤더니 2022년 말 1179원에서 2024년 말 1351원으로 상승했다. 실제 환율은 이보다 더 높았다. 구조적 저성장과 미국보다 낮아진 경제성장률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반영된 것이라는 게 보고서의 결론이었다. 올해 성장률 0%대, 잠재성장률 1%대 암울한 전망이 원화의 미래 전망에 반영되고 있는 셈이다. 원화를 쓸 인구가 줄어드는 저출산 고령화도 원화 가치 하락 전망에 힘을 더한다. 물론 경제는 반등할 수 있고, 예측이 어려운 환율 역시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른다. 코스피가 3,500 선을 뚫었듯, 원화도 힘을 받을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원화 비관론이 확산된다는 점이다. 트럼프발 관세 압박에 수출이 줄고, 국내 투자는 쪼그라들 것이며, 저성장이 지속될 것이란 미래에 대한 비관론이 원화 하락에 베팅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실제로 9월 코스피의 고공행진에도 국내 개미들은 9월 한 달 동안 약 10조 원을 순매도했다. 금이 통화가치 하락을 헤지할 최고의 안전자산이라며 국내 금시장에 유독 수요가 몰려 최근 10%가량 프리미엄도 붙은 상태다. 그런 점에서 원화 가치와 출산율은 닮았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무너진 청년 세대가 아이를 낳지 않는 것처럼 원화 비관론에도 한국 경제에 대한 구조적 불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저성장이 가져온 비관론이 경제의 모든 지표와 개인의 일상, 가치 전반에 스며들고 있다는 방증이다. 저성장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조개혁이 모든 경제정책에 있어 우선돼야 하는 이유다.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 2025-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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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현수]제조업 부활이라는 ‘미션 임파서블’

    미국 조지아주 한국인 근로자 구금 사태는 미국의 제조업 생태계가 얼마나 무너졌는지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현지 고용만으로는 도저히 공장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투자 기업들의 고민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우선 인건비가 한국보다 5∼6배, 개발도상국과 비교하면 10배 이상 높다는 게 기업들의 설명이다. 그나마 조 바이든 전 행정부가 막대한 보조금을, 주정부는 편리한 원스톱 행정서비스를 제공해 투자라는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면 인력 확보부터 밸류체인 확보까지 골치 아픈 일이 한두개가 아니었다고 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미국인들이 게으르다는 게 아니다. 제조업에 손 뗀 지 너무 오래돼 ‘제조업 마인드’ 자체가 없다”며 “동종 업계 경력이 있는 엔지니어를 찾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이라고 했다.투자해도 줄어드는 美 제조업 일자리 미국 젊은 층은 스마트폰 소지가 불가능한 반도체 공장 ‘클린룸’에서 일한다는 개념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일한 만큼 많이 팁을 버는 외식 서비스업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한 한국 기업은 일부러 제조업에 익숙한 베트남계 이민자 밀집 지역에 공장을 지었다고 했다. 또 다른 기업은 공장 부지를 선정할 때, ‘차로 6시간 이내에 공과대학이 몇 개 있는지’를 기준에 넣었다. 한국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 언론 액시오스에 따르면 대만 TSMC의 미 애리조나주 공장 근로자 3000여 명 중 절반이 대만인이다. 미국에 투자한 글로벌 기업들의 고충은 제조업 부활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아무리 보조금을 줘도, 아무리 관세로 위협해도 인력자원 확대나 밸류체인 조성이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수년 동안 미국에 천문학적 투자가 쏟아져도 미 제조업 일자리는 꾸준히 줄고 있다. 지난달에만 1만2000개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졌다. 1979년 2000만 명으로 정점을 찍었던 미 제조업 일자리는 현재 1280만 명 선으로 쪼그라든 상태다. 미 금융기관 웰스파고는 최근 보고서에서 1979년 제조업 전성시대로 돌아가려면 약 3조 달러의 신규 투자와 새 공장을 채울 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소터 애널리틱스라는 산업안전 기업의 1020세대 설문조사에 따르면 오직 14%만 공장에서 일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웰스파고의 결론은 “트럼프 관세 정책의 목적인 미국 제조업 고용을 1970년대 수준으로 되돌리는 것은 ‘험난한 싸움(Uphill Battle)’”이라는 것이었다. 단기간은 당연히 불가능하고 장기전도 될까 말까란 얘기다.獨 제조업도 한순간에 내리막 제조업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미국은 1980년대 자동차 경쟁력 약화가 단초가 됐다. 자동차가 무너지면 후방의 철강, 석유화학, 기계 산업까지 여파가 미친다. 제조업 모범국이던 독일도 최근 자동차를 시작으로 전후방 산업이 흔들리고 있다. 위기 조짐이 나타난 2019년 이후 지난달까지 독일 제조업 일자리 25만 개가 날아갔다. 6년 동안 경제 규모는 고작 0.1% 성장했고 최근 2년은 내리 마이너스다. 워싱턴포스트는 독일을 ‘유럽의 게으른 나라’로 칭하며 “한때 근면함으로 유명했던 독일은 국민들이 점점 더 적게 일하게 되면서 경제적·존재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고 했다. 국내 재계 고위 관계자도 “높은 에너지 비용, 악명 높은 노동 생산성에 ‘독일 생산 시대는 끝났다’며 아시아로의 공장 이전을 묻는 독일 기업이 적지 않다”고 했다. 최강국 미국이나 독일도 제조업 붕괴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이다. 남의 나라 얘기만은 아니다. 한국도 지난달까지 14개월째 제조업 고용이 줄며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이 재계 인사는 “독일은 제조업을 포기하고 있는데, 한국이 이제 와 독일 복지나 노동 제도를 따라 하려는 게 맞는 길인지 모르겠다”고도 덧붙였다. 생각해 볼 말이다.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 2025-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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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현수]中 제조업 독점 시대 첫 산업 재편 시험대

    한진해운이냐, 현대상선이냐. 2016년의 이 선택은 한국 해운업의 운명을 갈랐다. 극심한 해운업 불황에 직면한 정부와 채권단은 공적자금을 두 회사에 동시에 투입할 수는 없다고 봤다. 정부는 현대상선을 살리기로 했다. 지금의 HMM이다. 당시 판단에는 그 나름의 논리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국 해운업은 당시의 시장 점유율을 회복하지 못했고, 글로벌 네트워크와 인력을 잃었다. 그래서 여전히 ‘한진을 살렸어야 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산업 구조조정은 늘 고통스러운 선택이고, 그 선택이 옳았는지는 시간이 오래 지나야 드러난다. 산업 재편이 어려운 이유다. 1999년 ‘반도체 빅딜’도 그랬다. 메모리 공급 과잉발 불황에 정부와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주도로 현대전자가 LG반도체를 인수하기로 했다. SK하이닉스의 전신 이야기다. 삼성과 더불어 2강 체제를 만들어 세계적 경쟁력을 키우자는 취지였는데, 빅딜 후 20여 년이 지나서야 그 취지가 빛을 발하게 됐다. 정부 석유화학 재편 칼 뽑았지만 이제 구조조정의 칼끝은 석유화학 산업으로 향하고 있다. 정부는 20일 석유화학 산업 재편 시동을 걸었다. 울산, 여수, 대산 단지를 중심으로 국내 석유화학 기업 10곳의 나프타분해시설(NCC) 생산 규모를 25% 줄이겠다고 밝혔다. ‘선(先) 자구 노력, 후(後) 정부 지원’ 방침도 밝혔다. 사실 석유화학 구조조정 논의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90년대에도, 2000년대에도, 2010년대에도 나왔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왜일까. 2, 3강 체제인 반도체나 해운업과 달리 석유화학은 밸류체인이 복잡하고 지역별 단지별로 상황이 다르다. 쉽게 손댈 수 없는 구조라는 얘기다. 정부도 복잡한 석유화학 산업의 특성을 알기에 기업 자구책이 우선이라고 본 것 같다. 정부가 과거처럼 민간 기업에 통폐합을 요구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기업 자체 재편안만 기다리기엔 상황이 너무 급박하다. 모든 구조조정 사례가 보여주는 공통점은 타이밍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이다. 한진해운도 파산 직후에야 개입이 이뤄졌기에 회생 불능의 상황에 몰렸다. 기업들은 과거 정부 주도 구조조정에서 ‘버티면 산다’는 교훈도 봤다. 업황이 반등하면 버틴 자가 독점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끝없는 치킨게임이 이어져 왔고, 결국 이대로라면 ‘3년 안에 석화기업 50%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올 지경이 됐다. 스스로 재편할 수 있었다면, 중국이 공격적으로 설비 증설을 시작한 2021년 무렵에 시작됐을 것이다. 단순한 업황 사이클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이번 석화 위기는 과거와 다르다. 과거 반도체, 해운, 조선업의 위기가 모두 업황 사이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면, 이번에는 중국발 구조적 공급 과잉이라는 전례 없는 위기가 문제다. 중국의 에틸렌 자급률은 100%에 도달해 가고 있고, 3년쯤 뒤엔 자국 수요를 모두 감당하고도 1500만 t 이상이 남게 생겼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이를 ‘플랫폼 독점’ 같은 중국 제조업의 특성이라고 표현했다. 미국이나 일본이 제조업 주도권을 쥐던 시절에는 세계 생산량을 모두 감당할 수 없어 한국 등 2, 3위 업체의 역할이 남았지만 중국 제조업은 전체 시장을 독점하려 한다는 것이다. 마치 구글이나 메타가 시장을 싹쓸이하듯, 이미 전 세계 철강과 석유화학을 휩쓸고 있다. 이제는 조선업까지 넘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석유화학 구조조정은 앞으로 이어질 중국발 공급 위기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모범 사례가 돼야 한다. 정부가 주도권을 쥐고 산단별 감축안과 그에 따른 구체적 유인책을 내놔야 한다. 고통스러운 인력 감축과 사회적 갈등이 필연적이라는 점도 인정하고, 이에 맞는 대안도 준비해야 한다. 이번 산업 재편에 한국 제조업의 명운이 걸려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 2025-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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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부, 소낙비 피했지만 임전태세… 반도체 관세 EU 수준일 것”[데스크가 만난 사람]

    《“이제 소낙비 피한 겁니다. 정부는 다시 ‘임전태세’ 중입니다.” 한미 관세 협상 타결 일주일이 지난 6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만난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안심하고 있을 수 없다”고 여러 차례 강조하며 정부는 다시 전투에 임하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고 했다. 당장 한미 간 이견이 노출된 3500억 달러 대미 투자에 대한 구체적인 운영 방안에 대해 미국과 세부 협의를 해 나가야 한다. 여 본부장은 “(투자펀드 운용과 관련해)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금융위원회 등 관계 부처가 모여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려 하고 있다”고 했다. 농산물 검역 절차와 관련해서도 “미국이 (한국 검역 절차에) 불신이 있는 게 사실이라 투명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 본부장은 무엇보다 “국내 산업 경쟁력, 수출과 투자 모델을 근본적으로 다시 보면서 완전히 변화된 글로벌 통상 환경에 새롭게 적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새 정부 들어 6월 말부터 가장 먼저 미국 측과 접촉했는데, 미국 측 분위기는 어땠나.“정치적 상황 때문에 늦어서 압박감이 컸다. 처음부터 미국 측 요구가 많았고, 우리는 우리가 대응할 부분, 방어할 부분 등을 설득했다. 협상은 뒤로 갈수록 가속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도 (지난달 22일) 일본 협상이 타결되면서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타결 전까지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트럼프 1기 당시만 해도 미국무역대표부(USTR)와 통상교섭본부가 서로 협상하면 딜이 만들어졌다.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USTR 당시 대표만 넘으면 됐다. 이번에는 미국의 (협상) 전선이 USTR 대표, 상무장관, 재무장관으로 넓혀져 있었다. 협상 시스템이 굉장히 불확실하고 전방위로 분절화돼 있는 점이 어려웠다.” ―그 불확실성은 어떻게 타개했나.“대통령실이 컨트롤타워가 돼 경제부총리, 산업부 장관, 저까지 총력전을 벌였다. 거기에 민간의 정재계 네트워크도 활용됐다. 일본 협상이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주도로 이뤄졌고, 러트닉 장관이 ‘딜 메이커’로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상황이었다. 그때부터는 러트닉 장관과 뉴욕 사저에서 영국 스코틀랜드 출장지에서까지 만났다. 물론 제이미슨 그리어 USTR 대표도 발언권이 상당했기 때문에 계속 접촉했다. 한 사람만 한다고 되는 구조는 아니었다.” ―재계 총수들은 어떤 역할을 했나.“한국 기업이 투자한 지역이 주로 공화당 우세 지역이다. 공화당 의원, 주지사, 트럼프 대통령과 연이 있는 월스트리트 투자가 등 재계 인맥을 활용해 도움을 많이 받았다.” ―협상이 타결될 것 같다는 느낌은 언제 받았나.“트럼프 대통령과 만나서 ‘딜이 됐다’고 악수하는 순간까지 50 대 50이라고 생각했다. 스코틀랜드에서 돌아오면서부터는 약간 가시권에 들어갔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변수가 많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협상도 결국 사람이 만나서 하는 거라 만남을 지속하면서 보이지 않는 신뢰가 쌓이는 측면이 있다.”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펀드에 한국과 미국의 이견이 크다. 미국은 이익의 90%를 가져간다고 하고 있다.“1500억 달러는 조선 특화(마스가) 펀드이고, 2000억 달러는 경제안보 측면에서 전략적인 부분에 투자하는 것이다. 조선 특화 펀드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 (차별화되는) 성과였다. 2000억 달러 투자는 미국도 처음 시도하는 아이디어라 구체적인 운영 방식이 아직 불명확한 부분이 있다. 앞으로 협의하며 실제로 운영하는 과정에서 구체화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정부는 미국의 주장이 ‘투자로부터 이익의 90%를 리테인(Retain·보유)한다’는 의미로 ‘재투자’ 개념이라고 하는데, 실제 협상에서 리테인이란 말이 나왔나.“리테인이란 단어는 미일 협상 팩트시트(Factsheet·보도참고자료)에서 나온 용어다. 그런 부분도 앞으로 협의를 통해 구체화해야 한다. 이익 배분과 관련한 얘기도 (우리 협상에서) 나왔었는데 이것은 계속 합의를 하자는 그런 차원에서 나온 말이었다. (구체적 협의를 위해) 범부처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는 단계다. 기재부, 금융위, 산업부 등 관계 부처가 참여할 것이다.” ―범부처 TF는 펀드 운영에 중점을 둘 것인가.“펀드라고 하니까 ‘펀드 1호’ 이런 식으로 돈을 모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개념이 아니다. 우리가 (2000억 달러라는) 한도를 정한 ‘금융 패키지’라고 표현하는 게 사실 더 정확하다. 프로젝트 수요가 있을 때 캐피털 콜(Capital Call·출자 요청)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관련된 부처들이 모여서 정교하게 만들어 가야 한다. 미국 경제가 세계에서 가장 호황인데, 앞으로 제조업을 재건하면서 우리 기업들에는 위기가 아닌 기회가 될 수 있다.” ―왜 아직 한미 협의 팩트시트는 안 나오나. 일본과 유럽연합(EU)은 타결 다음 날 나왔다.“과거에는 양국 간에 협의해서 팩트시트를 냈는데, 요즘은 백악관이 일방적으로 낸다. 그래서 많은 국가가 협상 끝나고 나서도 서로 이해가 다른 부분이 있는 것이다. 혹시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지금도 우리는 실무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사실 이런 무역 협상을 정치적 측면에서 홍보하고 있고, 미국 내 유권자 대상 메시지 측면도 크다고 본다.” ―미국의 비관세 장벽 압박 불씨는 살아 있다는 지적이 많다.“그렇다. 협상 끝나고 공항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이번에 소낙비를 피했지만 트럼프 행정부 남은 기간 동안에 어떤 형태로든 관세라는 툴을 계속 사용할 것이다. 비관세에서도 계속 이슈가 제기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우리는 바로 임전 태세를 다시 하고 있다.” ―우리 정부에 미국 농산물 검역 전담 직원이 지정됐다. 미국산 농산물 수입이 빨라지는 것 아닌가.“검역은 하루이틀 나온 이슈가 아니다. 미국이 (한국 검역 절차에) 어느 정도 불신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불신과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소통을 강화하고 투명성을 제고하겠다는 의미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하면서 관세로는 (일부 농산물) 개방한다고 했는데, 농산물은 개방해도 검역 (수입위험분석) 8단계를 통과해야 우리 소비자에게 수입된다. 우리는 이 8단계에서 계속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그럼 연내 미국산 과일이 한국에 들어올 가능성이 있나.“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국민의 건강과 안전이 관련된 여러 과학적인 분석을 거쳐야 한다. 그런 절차를 투명하고 과학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동차 품목관세에서 한미 FTA 효과가 사라졌는데, 다시 낮춰질 가능성은 없나.“미국이 (품목)관세를 물리겠다고 한 자동차, 반도체, 바이오 등은 안보적으로 정치적으로 민감한 품목이다. 다만 장난감, 의류 이런 품목은 모두 관세 부과 시 인플레이션 우려가 있어 나중에 미국이 선택적으로 관세를 부과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한미 FTA가 죽었다고 하는데 아직 살아 있고 그나마 상대적으로 이익이 되는 측면이 있다. 철강, 자동차, 반도체 등 무역확장법 232조 근거로 부과되는 관세는 예외지만 한류 상품 등 일반 소비재는 해당이 된다. 우리는 0%에서 시작해서 관세가 15%가 되지만 다른 국가는 기존 관세에서 상호관세가 추가되는 것이다.” ―쌀과 소고기는 미국 압박이 심한 분야 아니었나.“그렇다. 일본 사례에서 볼 수 있고, 또 소고기는 우리나라와 러시아, 벨라루스 등 3개국만 규제하다 보니까. 결과적으로 이번 협상에서 이 두 가지 품목은 우리가 정말 굉장히 민감한 부분이라고 적극적으로 설득해 트럼프 대통령도 이해를 했다. 광화문에 100만 인파가 모인 광우병 시위 사진이 효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 언론에서 이번에 소고기가 거론된 후 농축산계 반응 등을 보고 미국에서도 민감도를 파악했을 것이다.” ―민간 품목 지키느라 반대 급부로 투자액이 늘어났다는 지적도 있다.“그렇게 보진 않는다. 시장 개방 이슈는 계속 논의돼 왔던 부분이고, 투자는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따라 우리 기업이 미국에 진출해서 기회로 만들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전체적으로 하다 보니까 패키지가 되면서 균형점이 맞춰진 것이다.” ―대미 투자가 커지면 국내 투자 여력이 줄어들 수 있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이제는 정말 국내 산업 경쟁력, 수출과 투자 모델을 근본적으로 다시 보면서 완전히 변화된 대미 통상, 글로벌 통상 환경에 새롭게 적응해야 할 것 같다. 미국과 중국이 우리 양대 수출국이고 3위가 아세안이다. 아세안과 인도를 합하면 거의 1, 2위와 맞먹는 수준이라 이 같은 신남방 지역이 우리의 주요한 성장 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인터뷰를 마친 후 한국 시간으로 7일 새벽, 트럼프 대통령은 “반도체에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 반도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추가로 묻자 여 본부장은 “한국은 반도체 관세 부과 시 여타국 대비 불리하지 않은 대우를 받기로 미국 측과 이미 합의했고, 이는 미 상무장관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인한 바 있다”며 “반도체 관세가 부과된다면 한국은 미국과 EU가 합의한 15% 수준일 것”이라고 답해 왔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에,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 공장을 짓고 있고, 미국과의 최혜국 대우 합의로 100% 관세 부과를 피할 것이란 의미다.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1966년 서울 출생△1992년 서울대 경영학과△1992년 행정고시 36회△2004년 미국 하버드대 경영학 석사△2010년 세계은행(IFC) 선임투자정책관△2016년 산업통상자원부 자유무역협정정책관△2019년 산업부 통상교섭실장△2020년 대통령비서실 신남방·신북방비서관△2021년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2023년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선임위원△2025년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세종=정순구 기자 soon9@donga.com}

    • 2025-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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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현수]관세전쟁 본질은 기업 일자리 쟁탈전

    관세전쟁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 미국이라는 세계 최대 소비시장 ‘접근권’의 값어치에 수백조 원이 매겨지는 것을 보며 든 생각이다. 유럽연합(EU)이 6000억 달러, 일본은 5500억 달러, 우리는 3500억 달러 투자를 약속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각국에 상호관세를 부과한 법적 근거는 1977년 제정된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이다. 안보나 경제 위기 시 대통령이 자의적인 관세 부과 권리를 갖는다. 백악관이 지목한 국가 비상사태는 ‘크고 지속적인 무역적자’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월스트리저널(WSJ) 등 외신은 “한국이나 일본, EU가 내놓은 천문학적 투자는 미국 자본수지 흑자를 증가시켜 장부상 무역적자를 포괄하는 경상수지 적자를 키울 수 있다”고 지적한다. 관세 협상 타결의 핵심 열쇠인 대미 투자가 관세 협상의 원인이던 미국의 적자를 더 키우는 셈이 된 격이다.美 소비시장 무기로 제조업 유치에 혈안 그렇다면 미국발 관세전쟁의 궁극적 목적은 글로벌 제조업의 미국 유치에 좀 더 무게가 실려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세계 최대 기업들이 실리콘밸리와 월가에 몰려 있지만 정작 중산층 일자리를 만드는 제조업을 미국 땅으로 이끌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고자 하는 것도 물론 포함된다.‘트럼프 무역정책의 설계자’로 불리는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전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의 저서 ‘자유무역이라는 환상’ 첫 장은 자신의 고향 오하이오주 애슈터뷸라의 쇠락으로 시작한다. 1970년 이전만 해도 그의 고향에선 고등학교 학력 이하 주민들도 자동차 부품이나 철강 공장에서 성실히 일하면 가족과 중산층의 삶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국제 무역 철학의 부재로” 철강 수입은 늘고, 일본 자동차가 기승을 부려 고향 도시가 쇠퇴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테크나 금융 산업은 특성상 자본과 인재가 몰려 있는 대도시 중심에 위치해야 하고, 고학력 전문가 중심의 일자리라 제조업과 다르다. 라이트하이저 전 대표는 올해 5월 본보가 주최한 동아국제금융포럼에서도 미국의 양극화가 커지고 있고 이는 불공정 무역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중산층 일자리 되찾기’와 ‘지역 균형발전’이 트럼프 행정부 관세정책의 주요 목적으로 풀이될 수 있는 대목이다.포스트 관세전쟁, 치열해질 각국 기업 유치전 그런데 중산층 일자리나 지역 균형발전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국가들의 시급한 국정 과제이기도 하다. 일본이나 EU도 제조업 일자리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 도요타는 이미 자국 생산기지를 떠나 미국 판매 차량의 절반가량을 미국에서 생산한다. 중국이 자동차, 전자, 화학, 정유, 철강산업을 전방위적으로 휩쓸면서 EU의 제조업 기반도 흔들리고 있다. 일본이나 EU가 미국에 고개를 숙이고, 수백조 원을 지불하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 역시 미국이 가져오고 싶어하는 제조업과 중산층 일자리였다. 한국도 민관 총력전 끝에 관세 인하를 얻어냈다. 민관이 나선 이유 역시 우리 산업을 보호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함일 것이다. 한국 제조업도 관세 전쟁 이전부터 흔들려 왔다. 전국의 산업단지들은 이미 생존의 기로에 서 있고, 대기업들은 조 바이든 전 행정부의 보조금 당근,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채찍에 해외 투자로 내몰리고 있다. 이제 관세 협상 이후가 더 중요한 이유다. 대미 투자가 늘어나면 그만큼 국내 투자 여력이 줄어든다. 다른 경쟁국도 마찬가지라 글로벌 기업 유치전, 일자리 쟁탈전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여기에 인공지능(AI) 중심으로 산업이 전환되고 중국의 공습이 거세질수록 각국은 더욱 보조금이나 규제 완화 등 온갖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다. 미국처럼 자국 소비 시장을 무기로 생산시설 이전을 요구하는 곳도 나올 수 있다. 우리는 준비가 됐나. 더 세진 상법개정안, 노란봉투법, 증세 정책을 보면 아직 우리가 치러야 하는 전쟁의 본질을 정부와 여당은 모르는 듯하다.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 2025-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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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현수]AI 고속도로, 멈칫할 시간이 없다

    미국 시애틀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쯤 거리에 있는 소형모듈원자로(SMR) 연구소에 가본 적이 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2008년 세운 테라파워의 ‘에버렛 연구소’다. 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된 이곳에는 핵 원료를 뺀 연구용 ‘미니 원전’이 건물 안에 그대로 올라와 있었다. 미니 원전을 대형 선박에도 실을 수 있고 모듈화해 공장에서 뚝딱 만들어 ‘배송’할 수 있다는 점도 신기했다. 무엇보다 아직 개발 단계인데도 와이오밍주에 부지를 선정해 실증단지 사업을 시작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실험적인 원자로 건설에 있어 부지 선정이 가장 큰 뇌관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게 우리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에 공사를 시작했고, 올해 5월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 덕에 신규 원자로 허가 심사 기간이 대폭 줄어 순조롭게 2030년 원자로 가동이 가능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변전소 증설도 어려운 韓 우리 정부도 첫 SMR의 2035년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SMR의 최대 장점은 전력이 필요한 반도체 공장이나 데이터센터 단지와 같은 수요지에 세울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기술 개발에 성공해 상업 가동 능력을 갖추더라도 주민들의 반대, 이를 의식한 지방자치단체의 우려를 극복하고 설득해 나가는 과정이 속도전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실험적 원자로보다 훨씬 단순한 변전소 건설조차 쉽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경기 하남시 동서울변전소 증설 사업이 대표적이다. 한국전력이 사업을 추진한 지 5년이 됐지만 삽도 뜨지 못하고 있다. 동해안의 값싼 전기를 수도권 반도체 산업단지 등에 공급하기 위한 관문이지만 인허가 갈등에 지지부진한 상태다. 변전소 증설 하나에 소송전, 1인 릴레이 시위, 전 국민 호소문까지 등장해야 하는 현실 속에 AI 전력망 확충은 요원한 얘기처럼 들린다. 원전, SMR, 태양광 등 발전원이 전력을 만드는 공장이라면 송전망은 전력을 실어 나르는 고속도로, 변전소는 분기점이나 톨게이트 역할을 한다. 공장 생산능력이 부족해도, 고속도로가 너무 좁아도, 분기점이 제 역할을 못 해도 전력난이 발생한다. 동해안에 민간 발전사들이 수조 원을 들여 발전소를 지어도 하남시 변전소 문제로 10%밖에 가동하지 못하고 있다. 발전소도 변전소도 모두 땅이 필요하니 곳곳에서 벌어질 이해관계자들의 갈등은 불 보듯 뻔하다. AI 전력 기근, 美도 “정전 100배 늘 것” 문제는 전력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는 점이다. 구글 검색 한 건보다 챗GPT 답변 하나가 전력을 10배 잡아먹는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글로벌 데이터센터용 전력 수요만 향후 5년 동안 두 배 이상 늘어날 전망이다. 너무 덥고 추운 이상기후도 전력 부담을 가중시켜 대규모 정전 공포는 커지고 있다. 미 에너지부는 8일(현지 시간) “추가 발전 용량을 확보하지 못하면 2030년 정전 발생이 지금보다 100배 증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빅테크들이 천문학적 전력 투자에 나선 미국조차 여전히 발전원과 전력망이 턱없이 부족해 데이터센터 건설에 차질이 빚어지는 곳도 나오고 있다. AI 전력 기근 속에 우리도 인허가 절차 등을 간소화하는 ‘전력망 특별법’이 9월에 시행된다. 하지만 내년 지방선거 전까지 지역 곳곳의 이해관계를 풀기란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AI 고속도로 건설’을 내건 새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정부의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 산업 인프라 확충은 그 어느 나라보다 한국이 가장 잘해 온 분야였다. 산업화 시기에는 고속도로를, 정보화 시대에는 초고속 인터넷망을 깔아 새로운 산업의 탄생을 뒷받침해 왔다. 새 정부도 하루빨리 구체적인 에너지 발전원 확보 전략과 더불어 전력망 확대의 청사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 2025-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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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현수]벼락거지는 이제 그만

    “지금 미국의 20대는 역사상 가장 많이 화가 난 20대일걸요.” 지난해 5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선후보 지지 집회를 취재차 찾은 적이 있다. 민주당 지지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뉴욕에서 트럼프 후보를 지지하는 20대 젊은 청년이 보이기에 신기한 마음에 말을 걸었다. 지지 이유를 묻자, 갑자기 그는 현실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자신은 그나마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있지만 친구들은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월세와 생활비가 너무 올라서 살기가 힘들다고 했다. ‘미국 경제 성장률이 높은 편인데 무슨 소리냐’고 되묻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주식이나 집을 보유한 일부만 부자가 되고 있다. 우리 세대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자산 인플레이션의 상흔 그와의 대화는 정치 지형을 떠나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자산 인플레이션이 남기는 상흔이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뉴욕은 기본적으로 집값과 월세가 수십 년 동안 가파르게 올라온 도시지만 팬데믹 전후 상승률은 연일 기록 경신 수준이었다. 이런 자산 인플레이션은 단순히 경제적 부담을 떠나 세상을 대하는 태도, 직업을 고르는 기준, 결혼에 대한 관점 등 사람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트라우마 수준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뉴욕만큼 부동산 폭등기를 지켜본 서울도 그 후유증이 대단하다. 성실하게 공부해서 비교적 탄탄한 직장을 가져도 안정적인 거주 환경을 가질 수 없다는 허탈감과 무력감이 대다수를 짓누르고 있다. 오죽하면 하루아침에 부동산 유무에 따라 확대된 빈부격차에 ‘벼락거지’라는 신조어가 생겼을까. 특히 서울 부동산 문제는 정부의 규제가 오히려 집값을 부채질하고 공포 심리를 자극해 왔다는 점에서 여타 다른 나라들의 자산 인플레이션 양상과 다른 지점이 있다. 금융 당국이 가계 부채를 관리할 필요성은 있지만 그렇다고 실수요자가 자신의 담보로, 시장 금리에 따라 대출을 받으려는 것까지 규제한다면 반드시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규제 시그널이 패닉 바잉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규제보다 공급에 방점 찍혀야 2019년 12월 서울 전역을 투기과열지구로 묶어 15억 원 이상 주택에 대한 주택담보대출을 금지했던 규제가 대표적이다. 15억 원에 대한 명확한 근거도 없었고, 애꿎은 실수요자들마저 자기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없게 된 정책이었다. 결국 현금 부자들만 서울 고가 주택에 접근할 수 있었다. ‘대출을 받을 수 있을 때 받아야 한다’는 잘못된 경험치만 쌓였다. 새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서울 부동산이 들썩이는 것도 추가 규제에 대한 우려가 반영됐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주담대가 나오지 않을 가능성, 토지거래허가제 등 규제가 확대될 가능성에 연일 서울 곳곳의 부동산에 매수가 빗발치고 시장이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 부동산 ‘불장’ 우려에 새 정부는 은행 규제를 통해 주담대 총량을 조절하려는 규제를 검토한 상태다. 금융 당국은 은행들을 불러 주담대 대출 금리를 낮추지 못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이에 신용이 탄탄한 주담대 금리가 자영업자 대상 대출 금리보다도 높은 역전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실수요자들이 불필요한 이자 비용을 더 내는 피해로 이어지는 셈이다. 안정적인 거주 환경에서 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를 어렵게 만드는 부동산값 폭등의 상흔은 오래가고 여파가 크기에 새 정부가 중점적으로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수요를 억누르는 데 방점이 찍히면 규제 신설이나 폐지 시그널 때마다 시장의 변동성을 높인다. 결국은 시장 수요자들이 원하는 공급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정부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지속 가능한 공급에 방점을 둔 정책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 202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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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현수]한국판 ‘트럼프 트레이드’ 올까

    최근 만난 금융권 고위 임원의 표정이 밝았다. 주가가 6개월 전 수준 이상으로 회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6개월 전인 지난해 12월 3일 고점을 찍었던 주가는 그날 밤 계엄 사태 이후로 곤두박질쳤었다고 한다. 4월에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폭탄이 주가를 뒤흔들었다. 이제서야 계엄 이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차갑게 식어가는 한국 경제에서 금융권은 실적이 좋은 거의 유일한 업종이라는 점이 주가 상승에 영향을 줬겠지만 한국 증시에 외국인투자가가 돌아오고 있다는 분석도 내놨다. 원-달러 환율이 계엄 이전 수준으로 내려가고, 대통령 선거에서 주요 후보들이 모두 증시 부양책을 내놓겠다고 호언장담한 점이 영향을 주고 있다는 의미다.희망 반, 기대 반에 소비심리 반등 실제로 골드만삭스는 최근 ‘한국-지금이 상승세의 시간(Korea―Time for upside is now)’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고 대선을 계기로 한국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사라지고 ‘밸류업’ 프로그램이 활성화돼 증시 반등이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트럼프 대통령이 상호 관세를 발표했던 4월 한 달 동안 외국인투자가들은 무려 13조6000억 원을 순매도했지만 5월 들어선 현재까지 1조4000억 원 이상을 순매수하고 있다. 투자, 고용, 수출 등이 모두 절망적인 경제지표 틈새에서 실낱같은 긍정적인 소식도 들렸다. 5월 소비자심리지수(CCSI)가 101.8로 4월(93.8)보다 8.0포인트(p) 오른 것이다. 소비자심리지수는 말 그대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뜻한다. 100보다 높으면 경제를 낙관적으로, 100을 밑돌면 비관적이라는 본다는 것이다. 7개월 만에 처음으로 100을 넘어선 데다 상승 폭으로 따지면 2020년 코로나 공포가 다소 누그러졌던 그해 10월(+12.3p) 이후 4년 7개월 만에 전월 대비 최대 상승 폭이다. 계엄 사태에 억눌렸던 소비자들의 마음에 대선판 장밋빛 약속에 대한 기대감이 스며들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경제는 경제주체들의 판단과 선택의 결과인 만큼, 소비자들의 마음에 희망 한 방울이라도 생긴 것은 0%대의 암울한 성장률 전망 속에서 고무적인 소식이다. 미국에서도 지난해 대선 이후 트럼프 행정부의 친시장 정책 기대감에 소비심리가 개선되고 증시에 돈이 몰리는 ‘트럼프 트레이드’가 등장한 바 있다.‘혹시나’가 ‘역시나’가 되지 않길 하지만 신고가를 써 내려간 트럼프 트레이드는 취임 후 뒤이은 관세폭탄과 일관성 없는 정책 탓에 단기성 테마 이벤트로 전락했다. 증시도 채권 시장도 모두 출렁이며 실물경제까지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키웠다. 확실한 정책이 뒷받침되지 않는 막연한 기대가 얼마나 힘이 없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게다가 양극화된 정치 상황에서 소비심리가 당파적으로 나뉜다는 조사도 있다.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미시간대 소비자심리지수 조사에 따르면 공화당 지지자들의 소비자심리지수는 급격히 상승한 반면, 민주당 지지자들의 심리는 떨어졌다. 반대하던 후보의 당선은 소비심리를 악화시킨다는 의미다. 갈등이 극에 달한 한국 정치 지형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0%대 성장률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그나마 싹이 튼 낙관적인 기대가 실물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려면 실질적인 경제 정책뿐 아니라 갈등을 봉합하는 통합의 리더십도 필요하다는 의미다. 게다가 단기적으로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통해 경기 부양을 하되 장기적으로 제조업 쇠퇴, 혁신 동력 악화, 생산성 저하와 같은 구조적인 문제까지 대수술에 나서야 하는 매우 어려운 시점이다. 리더십 공백 속에서 겨우겨우 버텨 온 한국 경제에서 ‘정치적 불확실성’ 같은 단어들도 완벽히 지워져야 한다. 짧은 선거 기간에 정책 검증 없이 치러지는 선거지만 국민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또다시 희망을 찾아 나서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국민들의 희망에 ‘역시나’로 되갚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 2025-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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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현수]‘말하면 찍힐까’ 숨죽인 韓 경제인들

    지난해 이맘때 워런 버핏이 이끄는 버크셔해서웨이 주주총회를 취재차 찾았다. 94세의 버핏이 5시간 동안 쏟아지는 질문에 차분히 답하는 모습도 인상 깊었지만, 더 눈길이 간 건 새벽부터 줄을 서며 입장을 기다리던 3만여 명의 주주들이었다. 관광명소 하나 없는 미국 중서부의 작은 도시,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 왜 이토록 많은 이들이 모였을까. 그들에게 물으니 “지혜를 얻고 싶어서”, “아이들에게 검소한 삶의 태도를 보여주고 싶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투자 비법보다도 ‘성실하게 돈을 벌고 생활은 검소한’ 버핏의 미국적 가치에 목마른 모습이었다. 버핏만의 신념에 기반한 이야기를 들으러 해마다 주총이 열리는 5월 첫째 주 토요일, 오마하에 수만 명이 몰리는 것이다.트럼프에게도 직언하는 美 CEO들 정치적 발언을 자제하는 편인 버핏은 필요할 땐 목소리를 내 왔다. 올해에도 많은 이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혼란스러운 관세 정책에 대해 버핏이 목소리를 내주길 기대했다. 그는 “무역은 무기가 아니다”, 동맹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엄청난 실수”라며 직언했고, 이는 전 세계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소셜미디어로 여론을 몰아가는 시대에 버핏 같은 인물의 한마디가 여론의 균형추 역할을 한 셈이다. 정권 초 서슬 퍼런 트럼프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날린 이들은 또 있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회장은 “이대로 가다간 미국에 대한 신뢰가 추락할 것”이라고 했고, 공화당의 큰손 후원자인 켄 그리핀 시타델 최고경영자(CEO)는 “트럼프가 미 국채 가치를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제조업 CEO들은 주주들에게 상세한 ‘관세 청구서’를 공개했다. 팀 쿡 애플 CEO가 대표적이다. 그는 1분기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트럼프 관세로 이번 분기에만 9억 달러(약 1조2600억 원) 비용이 들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때로는 단순한 팩트가 정치적 논란을 낳기도 하지만 주주들에게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원칙은 지켜지는 것이다. 흔들리는 미국 민주주의 속에서도 그나마 경제계 리더들의 직언은 여론을 지탱하는 공공의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각계의 직언에 목마른 한국 하지만 한국 경제계는 더욱더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경제단체장을 제외하고는 이름을 걸고 직언하는 기업이나 금융권 인사들을 보기 어렵다. “말하면 찍힌다”는 인식이 지난 10년 사이 공고해진 탓이다. 그나마 사석에서 ‘관계자’ 코멘트를 전제로만 솔직한 의견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실명이 아닌 익명의 발언은 힘이 덜하다. 매번 같은 경제단체의 같은 주장도 신뢰를 유지하기 어렵다. 재계에서 실명으로 정부 정책을 정면 비판한 마지막 사례는 아마도 2011년 이명박 정부가 초과이익공유제를 추진했을 때였을 것이다. 당시 이건희 삼성 회장이 “사회주의 용어인지, 들어본 적도 없고 이해도 안 된다”고 발언해 파장이 일었다. 사회 각계의 솔직한 의견이 부딪치며 일어나는 이런 파장은 민주주의에서 꼭 필요한 존재다. 하지만 요즘의 ‘파장’은 주로 정치권이나 유튜버들의 요란한 주장에서 나온다. 경제계뿐 아니라 각계의 상식적인 목소리는 그 소음에 묻히고 있다. 정치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때, 이를 견제하고 바로잡을 목소리가 점점 사라지는 것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나섰다가 찍혔다’는 경험, 흠결을 용납하지 않는 대중, 그 모든 리스크를 지기 두려운 경제인들. 상식적인 직언이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한국판 버핏들의 지혜를 들을 수 없게 됐다. ‘관계자’ 코멘트에 숨을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이미 극단적 갈등을 그 대가로 치르고 있다.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 202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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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현수]환율전 베테랑 나섰다… 판 달라진 관세협상

    다음 주 한미 재무장관이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만난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미국에 ‘면담’을 요청했더니 미국이 콕 집어 ‘통상 의제’를 제안했다고 한다. 재무장관 회담 핵심 의제가 관세가 된 것은 이례적이다.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기관총처럼 쏘아대던 관세전쟁이 산업 정책에서 환율 및 금융 정책으로 확장됐다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관세전 핵심 참모 역할도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에게 넘어갔다. 그의 행보를 보면 향후 관세 협상 전개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파운드화 무너뜨린 젊은 베선트 베선트 장관이 최근 한국과 일본에 “빨리 협상하라”는 메시지를 던진 외신 인터뷰 장소도 상징적이었다. 장소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타이밍은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이 15년 만에 환율 통제 정책을 폐기하고, 국제통화기금(IMF)이 아르헨티나에 대규모 구제금융으로 화답한 직후였다. 고정환율을 방어하느라 나라 곳간이 텅텅 빈 아르헨티나가 중국 돈에 매달리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다. 베선트 장관은 IMF 구제금융 뒤에 미국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중국 지원을 받느니 미국 달러 시스템에 합류하는 게 낫다는 것을 보여주러 현지에 간 것으로 보인다. 국제 정세와 돈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은 헤지펀드 출신 베선트 장관의 오랜 장기였다. 1992년 영국 파운드화가 무너진 유명한 ‘블랙 웬즈데이’ 뒤에도 그가 있었다. 영국이 유럽과 환율을 연동하자 전설적 투자자 조지 소로스와 젊은 베선트는 파운드화 급락에 베팅했다. 영국 금융시스템의 약점을 꿰뚫어본 예측은 정확했고, 영국은 금융위기 직전까지 갔다. 베선트는 2010년대에도 일본 엔화 하락에 베팅해 큰돈을 벌기도 했다. 상대국 금융 시스템의 약점을 파고드는 베선트가 전면에 나서자 시장은 ‘제2의 플라자 합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1985년 미국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달러 약세와 엔화 강세를 유도한 환율 협정이다. 40여 년 후 트럼프 대통령의 경제 책사 스티븐 미런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이 내놓은 이른바 ‘마러라고 합의’ 보고서도 달러 약세로 무역적자를 줄이자는 것이 골자다. 고율 관세를 앞세워 각국을 협상장으로 부르고, 협상에서 달러 약세를 유도하는 대신 군사 동맹국에 초장기 국채를 강매해 기축통화 지위는 유지하겠다는 제2의 플라자 합의와 같은 내용이다.제2의 플라자 합의 나오나 보고서대로 실제 ‘막가파식 관세쇼’ 이후 각국이 미국 협상 테이블로 달려가고 있다는 점이 섬뜩하다. 협상장에는 환율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베선트가 있다. 그는 미국과 공동 환율 목표를 가지고 있는 국가에 안보 우산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그도 안다. 일본과 중국은 다르다는 것을. 최근 인터뷰에서 “플라자 합의는 (일본이) 미국의 경제 경쟁국이면서 군사적 동맹 관계라 가능했다. 중국은 군사적으로도 경쟁국이라 새로운 포뮬러가 필요하다”고 했다. 중국은 오랫동안 플라자 합의와 일본 버블 경제 붕괴를 철저하게 공부해 왔다고 한다. 위안화 절상 합의는 결단코 피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중국이 버티는 가운데 한국에 안보 우산을 지렛대로 한 원화 절상 압박이 커진다면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격 경쟁력은 상대적인 것이다. 중국 위안화 가치는 내려가는데, 원화 가치만 크게 오르면 수출 시장에서 ‘초초저가’ 중국산과 경쟁해야 한다. 다른 수출 경쟁국의 협상 결과에 따라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관세, 환율, 안보가 총망라된 복잡한 전쟁 속 협상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다. 레이 달리오 같은 월가 거물들이 “세계 경제-정치 질서의 중대한 변화”라고 한 경고를 곱씹으며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야 하는 이유다. 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 202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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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현수]‘4월 2일’ 오는데 추경도 못 한 잃어버린 1분기

    “설마 그날과 그날이 겹치진 않겠죠?”최근 한 금융계 고위 인사가 걱정스레 말했다. 그가 말한 첫 번째 ‘그날’은 4월 2일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해방의 날(Liberation Day)’이라고 이름 붙인 상호 관세 부과 시작일이다. 불공정한 무역으로부터 미국 경제를 ‘해방’시킨다고 해서 해방의 날이다. 발표 전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관세라 시장의 불안감은 크다.두 번째 ‘그날’은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심판 선고기일이다. 어떻게 결론 날지에 따라 정국과 시장에 미칠 영향이 작지 않다. 이 인사는 ‘내우외환’ 사건이 동시에 벌어져 지난해 12월처럼 원-달러 환율이 폭주하는 상황을 걱정한 것이다.12월 트라우마 시달리는 경제계물론 헌법재판소가 선고 기일로 ‘4월 2일’은 피할 것이란 전망이 많다. 관세 폭탄이 시장에 미칠 즉각적 영향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날이 서울 구로구청장 등 재보궐선거일이어서다. 관세 폭탄과 헌재 일정이 어떻게 비켜갈지 알 수 없으나, 경제인들이 최악의 시나리오 목록을 작성하고 있다는 것은 이들의 불확실성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지 보여준다.경제계는 여전히 12월 트라우마에 몸서리친다. 2024년 마지막 외환시장 거래일인 12월 30일 환율은 주간 거래 기준 1472.5원에 장을 마쳤다. 연말 환율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27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12월 3일 1402.9원이던 환율은 윤 대통령의 계엄 선언 직후 급등을 시작해 수사 및 체포로 갈등이 고조된 30일에 기어이 1470원대로 마감했다.뜻밖의 연말 환율에 은행도, 기업도 난리가 났다. 분기 말 환율은 주요 지표의 기준 환율이 된다. 은행 건전성을 나타내는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대표적이다. 환율이 오르면 달러로 빌려준 돈 가치가 올라 BIS 비율이 떨어진다. 숫자의 변화는 실물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은행은 비율을 맞추려 신용이 낮은 기업부터 대출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은행 돈까지 끊긴 한계기업은 살아남기 어렵다.‘12월 트라우마’는 또다시 1분기(1∼3월) 말일과 관세 폭탄을 앞둔 요즘 재연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덕수 총리 탄핵심판 선고일인 24일에도 뛴 원-달러 환율은 25일엔 50일 만에 1470원을 터치했다. 윤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일이 지정되지 않자 불확실성이 장기화될 것으로 보고 환율이 널뛴 것이다.4월 관세전쟁 대비도 손 놨나불확실성의 장기화 속에 우리 경제계의 1분기는 처참하게 지나가고 있다. 1분기는 글로벌 투자사들이 각국에 투자 예산을 결정하는 시기다. 적극적 투자 유치는커녕 ‘국가 신용등급을 지킨 게 어디냐’며 만족하는 데 그쳐야 했다. 3월 소비심리는 다시 떨어졌고, 4월 기업경기 전망도 하향세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24일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대화의 물꼬를 텄지만 후속 협상과 ‘팀 코리아’를 이끌 리더십은 공백 상태다.정 회장은 미 현지 공장 준공식에서 “4월 2일 이후가 중요하다”며 민관 원팀의 관세 대응 필요성도 강조했다. 정 회장에게 ‘4월 2일’은 당연히 관세전쟁 ‘디데이’이기에 굳이 설명 없이 날짜로만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의미다.경제계가 긴장하는 4월 전쟁에 국회는 관심이나 있을까. 여야는 일찍이 추가경정예산(추경)이라도 편성해 경기 대응 체제에 나서야 했다. 수출 내수 동반 부진 속 4월 관세전쟁을 우려해 왔다면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잃어버린 1분기’ 끝에 우리는 여전히 12월 속에 갇혀 있다. 어떻게든 경제를 국정 운영의 중심에 되돌려 놓고 4월을 맞아야 한다. 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 202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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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현수]트럼프 관세에 美 테슬라 울고, 中 BYD는 웃는 이유

    요즘 서학개미들은 속이 끓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올린다” 한마디면 오르던 주가도 와르르 무너진다. 특히 한국인이 가장 많이 보유한 주식 1위 테슬라, 2위 엔비디아가 유독 폭락의 주인공이 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 곳곳에서 부쩍 확산되는 테슬라 불매운동도 주가를 끌어내리고 있다. 美와 우방국 분업 체계 흔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이 특히 테슬라, 엔비디아 등 M7(매그니피센트 7)’ 주가를 뒤흔드는 것은 관세가 미국 경제를 결코 ‘위대하게’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치명적 피해로 돌아올 것이라는 시장의 전망을 반영한다. 미 빅테크 7개 기업을 일컫는 M7은 미국 ‘나 홀로 성장’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올 들어 테슬라는 28.3%, 엔비디아는 16.1% 주가가 떨어졌고, 미 소비심리도 약화되는 분위기다. 미국 빅테크가 흔들리면 한국과 대만, 일본 증시도 덜컹거린다. 서로 긴밀한 분업 체계 속에 있어 서로에 대한 관세나 시장 침체가 직접적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생태계 ‘팀 엔비디아’에 탑승한 SK하이닉스나 TSMC 주가가 지난주 관세 전쟁이 본격화되자 급락한 것이 대표적이다. 2000년대 이후 특히 테크 산업은 미국이 기술 혁신을 이끌면 한국과 대만이 반도체를 만들고, 중국에서 완성품을 조립한 뒤 세계 시장에 파는 분업 체계로 눈부신 성장을 해왔다. 하지만 2018년 트럼프 1기 미중 무역전쟁이 시작되자 중국을 배제하는 ‘친구끼리’의 분업 체계로 방향이 바뀌었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각국을 압박하며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 일본, 대만, 한국 등 ‘칩 4’ 동맹을 강화했다. 대만 TSMC도, 한국 삼성전자도 모두 중국 시장 타격을 일부 감내해야 했지만 안보 협력 속 분업 체계에 힘을 보탠 것이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사 ASML도 마찬가지로 중국 수출을 희생하고 미국과 한배를 탔다. 단순히 무역 적자로 따지기 어려운 안보-경제 공동운명체를 다진 셈이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분업 체계’를 미국 땅에 들여와야 한다며 한배를 탔던 친구에게도 관세전쟁을 걸어 오고 있다. 북미 자동차 공동 생산망을 구축했던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가 관세전쟁을 시작한 것이 매우 상징적인 장면인 이유다. ‘관세 협박’만으로도 공급망에 불확실성의 상흔을 남긴다. 게다가 미중 관세전쟁이 커지면 기업들은 중국 시장을 추가로 잃을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테슬라 매출에서 중국 시장 비중은 약 20%, 엔비디아는 13% 수준에 달한다. 美가 때릴수록 中 반도체 자립 딜레마 중국은 어떨까.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지난달 10%, 3월에 추가 10% 관세를 맞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테크 시장을 중심으로 중국 기업 몸값은 올라가는 중이다. 그간 자국 중심의 테크 분업 체계 구축에 절박하게 매달려 왔기에 비교적 관세전에서 선방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반영됐다. 전기차 BYD만 봐도 내수 시장에 주로 의존하고 미국 수출 물량이 미미하다. 자율주행 기술 기대까지 얹어 올 들어 30% 가까이 주가가 올랐다. AI 딥시크가 중국 테크 기업들의 인프라 투자를 촉발한 덕도 봤다. 미국이 규제로 때릴수록 중국의 반도체 개발에 불이 붙는 딜레마도 이어지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화웨이 칩이 중국의 엔비디아로 부상하고 있다며 “미국 규제가 역설적으로 중국 기업들의 혁신 동력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고 평했다. 미중 패권전이라는 흐름 속에 우방국 중심의 분업 체계에 올인해 왔던 한국으로서는 트럼프 2기발 새로운 세계질서의 변화가 낯설다. 단순한 통상전쟁을 넘어 중국의 반도체 공세, 세계 경제 구조의 변화 등 복잡한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위기가 절박한 체질 개선의 기회가 될 수 있도록 하루빨리 내부 역량을 결집해야 하는 이유다.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 2025-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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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김현수]계엄 사태의 또 다른 교훈… 리더는 ‘경청’해야 한다

    요즘 누구를 만나든 대화의 종착역은 12·3 비상계엄이다. 계엄이 초래한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타격 우려는 물론이고, 이 충격적 소식을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들었는지 개인적 경험을 나누게 된다. 더 나아가 ‘왜 똑똑하다는 이들이 이같이 터무니없는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한 심리적 분석에까지 이른다. 기업인들은 주로 ‘불통(不通)’과 ‘집단사고(groupthink)’의 폐해를 꼽았다. 집단사고는 집단 능력에 대한 과대평가로 객관성을 잃고, 집단 화합과 동조에 대한 열망으로 개인의 비판적 사고를 차단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말한다. 어빙 재니스 미 예일대 교수가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그의 똑똑한 참모들이 내린 재앙적 결정, 1961년 ‘피그만 침공’ 사건에 영감을 받아 1972년에 정립한 개념이다. 사석에서조차 듣기보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진 윤석열 대통령의 개인적 스타일과 ‘인의 장막’ 속 집단사고가 만나 파국이 빚어졌다는 분석이다. 결국 누구나 자유롭게 비판적 의견을 내놓고, 이를 잘 듣는 리더가 중요하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말이 쉽지 실천은 매우 어렵다. 제왕적 리더십과 충실한 실행자로 이뤄진 한국적 조직문화는 더더욱 집단사고에 빠지기 쉽다. 최악의 의사결정 표본이 된 계엄 사태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 주요 기업에서도 나오는 이유다. 그래서 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는 ‘경청(傾聽)’이라고 쓴 액자를 늘 사무실에 걸어놓는다고 했다. 남의 말을 듣기 싫더라도 액자를 보며 되새기기 위해서다. 그는 “결국 내 판단으로 밀어붙일 때도 많지만 그럼에도 일단 들어 놓으면 마음 한편에 그 반대 의견을 항상 염두에 두게 된다. 다음 의사 결정에 반영하거나 조심해야 할 리스크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싫은 소리 하는 이를 옆에 두고, 싫어도 들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성공하는 리더십은 경청을 개인의 의지에 맡기지 않는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은 피그만 침공 실패 이후 ‘특정 안건에 대한 찬반보다 여러 대안을 내놓는 회의를 한다’, ‘대통령이 없는 자리에서 소그룹별로 토론한다’ 등 집단사고를 피하는 의사결정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한다. 덕분에 쿠바 미사일 위기에는 현명하게 대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 엔비디아 젠슨 황 CEO도 소통의 달인으로 꼽힌다. 올해 3월 엔비디아 본사에 가보니 엘리베이터는 건물 구석에 숨겨져 있다시피 했다. 그 대신 중앙에 각 층 카페와 이어진 계단으로 직원들이 이동하게끔 설계돼 있었다. 엔비디아 관계자는 반도체 개발 특성상 전문 분야에만 매몰되지 않도록 “억지로라도 계단에서 만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젠슨 황 CEO가 여기저기 불쑥불쑥 나타나서 ‘뭘 연구하느냐’고 묻고, 한참 듣고 가서 곤혹스럽다”는 개발자도 있었다. 알 수 없는 미래 기술에 투자하는 테크기업 특성상 경청 없인 치러야 할 대가가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최악의 의사결정으로 어마어마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비용을 치르고 있다. 누구든 경청의 파워를 뼈저리게 느낀 아주 비싼 수업료다.김현수 산업1부 차장 kimhs@donga.com}

    • 202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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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김현수]철강 배터리 반도체 흔들… ‘슈퍼 디바이드’가 두렵다

    요즘 경북 포항이 심상치 않다. 지난달 포스코 포항제철소 제1선재공장과 현대제철 포항제2공장이 연달아 문을 닫았다. 포스코는 7월에도 포항 제강공장의 문을 닫은 적이 있다. 협력업체 여파까지 감안하면 지역경제 타격도 우려된다. 더 큰 문제는 탈출구가 안 보인다는 것이다. 철강 공장 폐쇄는 중국발 ‘치킨게임’이라는 구조적 원인 탓이다. 세계 철강 생산량의 55%를 차지하는 중국은 자국 건설 경기가 악화되자 세계 각지로 재고 떨이를 하고 있다. 독일 철강 기업 티센크루프스틸은 얼마 전 전체 직원의 40%에 해당하는 인력 1만1000명을 줄인다고 밝혔다. 근무 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나누더라도 웬만하면 감원을 피하는 독일도 속수무책인 것이다. 허리띠를 졸라매며 누가 더 오래 버티느냐의 전쟁이 심화되고 있다. 배터리 업계도 버티기 싸움 중이다. 초기 시장에서 주류 시장으로 넘어가기 전 일시적 수요 둔화를 뜻하는 ‘캐즘’만으로 현 위기를 설명하기 어렵다. 복잡한 지정학적 요인이 얽혀 있다. 탄소 절감에 진심이던 유럽은 배터리 자립 실패, 중국의 공세로 친환경차 정책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져 있다. 미국도 도널드 트럼프 차기 행정부의 등장으로 ‘전기차 구매 캠페인’ 같았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존치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그런데 이 같은 한국 주력 산업의 위기는 경제지표엔 잘 드러나지 않았다. 지난달까지 수출은 14개월 연속 증가했고, 1분기(1∼3월)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전년 동기 대비 3.4%, 2분기(4∼6월)엔 2.3%로 양호했다. 본보가 매출 100대 기업의 2분기 실적을 따져보니 총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5.3%, 영업이익은 무려 81.3% 늘었다. 지표는 왜 좋았을까. 우리 경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큰 탓이다. 반도체 경기가 좋으면 수출도 실적도 빛나 보인다. 100대 기업의 2분기 영업이익 증가분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90.2%였다. 반도체가 철강, 배터리, 석유화학, 항공, 유통 등 전 분야의 위기를 가린 것이다. 최근까지 국제통화기금(IMF) 고위직을 인터뷰하면 늘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결정짓는 요소로 반도체 경기를 꼽을 정도였다. 정부가 지표만 보고 낙관하는 사이 반도체와 나머지 산업의 경기는 ‘평행우주’처럼 따로 돌아갔다. 수출 호황으로 돌아가는 세계와 찬 바람만 부는 내수의 세계도 접점이 없었다. 투자와 수요가 특정 산업과 소수의 기업에 집중되고, 부의 낙수효과가 사라지는 ‘슈퍼 디바이드’ 현상이 심화한 것이다. 반도체 내부에서도 인공지능(AI)으로 갈라지는 슈퍼 디바이드 현상이 보인다. 엔비디아만 보고 전체 반도체가 호황이라 말할 수 없다. 아직 국내 소부장 업계는 일반 전자기기에 들어가는 범용 반도체 생태계에 주로 의지하고 있다. 구형 메모리 반도체는 중국의 공세에도 노출돼 소부장 업계는 “불황 수준”이라며 몸부림치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가 강해지는 내년에는 슈퍼 디바이드 현상이 더욱 도드라질 것이다. 극단적으로 갈라진 경제에서 전체 지표만 보고 낙관하다간 위기 대응에 나설 골든타임을 놓친다. 이미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산업계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다. 김현수 산업1부 차장 kimhs@donga.com}

    • 2024-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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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김현수]美 대선 ‘눈치’ 억만장자… ‘큰 정부’의 시대가 온다

    “사업적 이익을 지키려면 ‘비겁함’이 합리적 행동이죠.” 테슬라 주식 매도를 외쳐 온 미 월가의 대표적 테슬라 회의론자 GLJ리서치 고든 존슨 애널리스트. 그는 최근 미 대선판에 끼어든 억만장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와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의 행보를 두고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평했다. 머스크는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 선거 유세에 직접 뛰어들었고, 베이조스는 워싱턴포스트의 사주로서 신문의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 후보 지지 선언을 막아 대선전의 한복판에 섰다. 존슨은 이들의 행보가 “사업적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공개적으로 해리스 지지 선언을 한 CEO도 적지 않다. 스타벅스, 블랙스톤, 머크 경영진들은 “예측할 수 있는 경제 정책을 원한다”는 성명까지 내고 해리스 지지를 선언했다. 미 억만장자들의 대선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눈치 보기는 미국치고도 이례적이란 평가다. 뼛속부터 기업가인 이들은 어떤 이해관계로 미 대선을 바라보는 것일까. 머스크와 베이조스만 보면 이 둘은 묘하게 겹치는 사업이 많다. 둘 다 미국항공우주국(NASA)과의 협력과 지원이 필요한 우주 사업, 정부의 인프라 지원이 절실한 인공지능(AI) 기업을 운영한다. 이들이 대선전에 직간접으로 개입하면서 잃는 것도 많다. 한때 테슬라 차주들은 기후변화에 관심이 많은 민주당 성향 이미지가 있었지만 머스크가 트럼프를 지지하는 탓에 테슬라 브랜드 이미지도 흔들리고 있다. 베이조스는 전통의 워싱턴포스트 독자들로터 비난을 받는 데다 아마존 프라임 절독 캠페인 조짐도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정학적 리스크, 미 우선주의, 산업 전환에 따른 정부 파워가 커져 대선 눈치를 봐야 할 필요성이 커진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기업의 효율적 경영 판단이 중요했던 자유무역주의 시대가 끝나가고 보호무역주의 속에 ‘큰 정부’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신호탄인 셈이다. 예를 들어 머스크는 “관세(Tariffs)는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고 한 트럼프가 당선되면 중국 BYD의 미국 공습 작전을 피할 수 있다. 산업 전환 측면에서도 ‘큰 정부’가 부상하고 있다. AI, 자율주행, 전기차, 기후변화 등 미래 정책은 정부 보조금이나 전력망과 같은 정책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 미국이 파리 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당선 직후 재가입하며 글로벌 기업들의 탄소 배출 로드맵이 갈지자를 그렸던 사례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비단 미국 기업뿐 아니라 한국 산업계도 그 어느 때보다 미 대선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국내 배터리 업계 고위 관계자는 “한국 정치보다도 미국 대선이 더 관심사”라고 발언할 정도다. 미 우선주의와 산업 전환의 여파 속에 우리 4대그룹이 미국에 투자한 104조 원 규모의 투자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경기 위축으로 재계에선 미국 과잉투자 우려도 나오는 상황에서 누가 돼도 향후 투자 압박은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미 기업과 행정부의 결속, 자국 우선주의 속에 한국도 그 어느 때보다 민관 리더십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김현수 산업1부 차장 kimhs@donga.com}

    • 202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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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김현수]‘공공’ 엔비디아 칩 확보… 선언으로 그쳐선 안된다

    국내 대학도, 기업도 고성능 인공지능(AI) 칩이 없어 연구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한국 과학계를 대표하는 KAIST가 보유한 엔비디아의 고성능 AI칩 ‘H100’은 0개. 기업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국내 기업 1400여 곳이 가진 H100 개수를 모두 합쳐도 2000개뿐이었다.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조사와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한 내용이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MS)나 메타가 15만 개씩 가지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격차다. 미국에선 심지어 대학들도 한 개에 6000만 원씩이나 하는 H100 쇼핑을 경쟁적으로 하고 있다. 올해 하버드대가 400개, 프린스턴대가 300개를 구매한다고 발표했다. 왜 대학들도 나서서 AI칩 구매 계획을 발표할까. 인재 유치를 위해서다. 고성능 칩 보유량은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처리하는 대규모 데이터센터, 즉 컴퓨팅 자원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AI 개발에 필수적인 컴퓨팅 자원이 있어야 인재가 모이고, 이들이 시너지를 내면 더욱더 많은 투자를 받아 혁신적 성과를 낼 수 있다. 유럽 AI의 자부심이자 오픈AI 대항마로 떠오른 스타트업 ‘미스트랄 AI’도 유럽의 공공 AI 인프라 덕을 본 사례다. 지난해 창업 이후 1년 만에 최근 기업가치가 58억 달러(약 7조8000억 원)까지 뛴 이 회사는 생성형AI 모델 개발에 유럽 각국이 투자해 만든 슈퍼컴퓨터 ‘레오나르도’를 이용했다. 고성능 컴퓨팅 자원을 활용할 수 없었다면 미국 빅테크의 대항마 스타트업은 존재할 수 없었다는 의미다. 산업화 시대에 고속도로나 해운 같은 물류, 정유나 철강 같은 기간산업이 필수적이었다면 AI 시대에는 이처럼 새 인프라가 필요하다. AI 칩, 데이터, 전력, 인재 등이다. 문제는 AI 인프라 확충은 역대급 ‘쩐의 전쟁’이라는 점이다. 세계 AI 투자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인재를 싹쓸이한 미국과 중국이 AI 주요 2개국(G2)으로 떠오른 이유다. 오일머니를 앞세운 중동, 유럽 AI 맹주를 꿈꾸는 프랑스, AI 연구는 앞섰지만 상업화 동력이 떨어진 캐나다 등은 부족한 민간 여력을 국가가 채우며 G3라도 되겠다고 발벗고 나선 상태다. 우리 정부도 늦게나마 G3 도약을 선언하고 최근 국가인공지능위원회를 출범해 인프라 확대를 발표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H100 보유 수준을 15배까지 늘리고 4년 내 민간투자 65조 원을 독려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역대급 쩐의 전쟁에 필요한 총알, 즉 정부 예산이 보이지 않는다. 공공이 이용할 수 있는 AI 칩 기반 데이터센터는 누가 어디에 어떻게 지을지 아직 모르겠다. 반면 4월에 캐나다, 5월에 프랑스는 구체적 지원안과 더불어 AI 강국 도약을 선언했다. 특히 캐나다는 올해 예산에 2조 원 이상 AI 인프라 투자를 편성한 뒤 이를 발표했다. 인프라 투자 전쟁의 판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다. 기업가치 200조 원이 넘는 오픈AI마저 최근 미국 정부에 AI 인프라에 나서 줄 것을 요청할 정도다. 우리 정부도 G3 선언을 받침할 구체적 후속 법안이나 예산 지원, 세액 지원 등을 서둘러 추진해야 한다. 말뿐인 G3 도약은 아무런 힘이 없다. 김현수 산업1부 차장 kimhs@donga.com}

    • 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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