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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의 미래를 놓고 벌어지는 월가의 논쟁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AI 기술의 혁신성과 파급력을 생각하면 지금의 주가 수준은 합리적이라는 주장과, AI 기업들의 가치가 과대 평가됐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갈리고 있다. 거미줄처럼 얽힌 AI 빅테크들의 순환 거래와 지분 투자를 놓고도 한쪽에서는 “AI가 붐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퍼포먼스 사기극”이라고 꼬집고, 다른 쪽에서는 “호황의 선순환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일축한다. 물론 AI의 미래가 이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울지는 아직 누구도 확신하기 힘들다.거품론은 혁신산업 안착해 가는 과정 이 논쟁에는 주목할 만한 포인트가 몇 가지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거품론이 형성됐다는 자체가 이전에 보지 못한 강력한 신산업이 출현했다는 반증이라는 점이다. 뒤집어 말하면 기술 혁신이 이뤄지지 않는 나라에선 애초에 이런 식의 버블 논쟁이 일어날 수가 없다. AI는 가상의 신기루나 막연한 기대감이 아닌 산업 현장에 실재하는 기술이다. 그 기술의 가치가 앞으로 어느 정도 확대될지를 놓고 의견이 갈려 있을 뿐이다. 미국은 1990년대 정보기술(IT), 2000년대 모바일, 지금의 AI까지 글로벌 산업 혁신을 연이어 주도하고 있다. 그 결과 경제 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큰데도 성장률은 한국보다 몇 년째 더 높다. 가상화폐나 테마주 같은 투기성 자산이 아니라, 기술 혁신의 결과로 산업계에서 버블론이 나오는 것은 우리로서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두 번째는 논쟁의 순기능이다. 위기론이 팽배할 때는 실제 위기가 오지 않듯이, 버블 우려가 생기면 버블 붕괴가 오지 않거나 오더라도 그 충격이 줄어든다. 이 논쟁은 빅테크들에 자기 포트폴리오를 재정비하고 사업과 투자에 내실을 다질 기회를 주고 있다. 신산업의 흥분감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안착하는 과정에 들어선 것이다. 과열됐던 투자 열기가 식으면 실력 없는 기업은 퇴출되고 더 경쟁력 있는 쪽에 자원이 흘러가는 금융 본연의 기능이 작동한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도 “먼지가 가라앉고 승자가 드러나면 사회가 그 발명품의 혜택을 누릴 것”이라며 “산업 버블은 긍정적인 버블”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눈여겨볼 것은 논쟁에 임하는 당사자들이다. 미국에선 경제 현안을 놓고 정관계, 학계 거물들이 가세하는 논쟁이 일상화돼 있다. 정부나 시장의 눈치를 보지 않는 이들의 생생한 난타전은 투자자들에게 경제 현상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통찰력 있는 시각, 투자 판단의 근거를 제공한다. 기업들은 본연의 실력과 실적으로 버블론에 대응한다. 최근 오픈AI와 구글, 앤스로픽 등이 치열한 AI 모델 경쟁에 나서면서 기술 수준이 계속 높아지고 AI 산업이 계속 만개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투자자들에게 주고 있다.‘경쟁력 저하’ 韓은 위험한 버블 조짐 비교적 건전한 버블을 겪는 미국과 달리 한국에선 우려스러운 버블 조짐이 생기고 있다. 주력산업의 경쟁력은 계속 떨어지고 내수가 침체되는 와중에 역대 정부는 이 문제의 해결을 저금리와 확대 재정 같은 대증 요법에 의존해 왔다. 이는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에 걸맞지 않게 시장 유동성을 키워 금융 부문의 버블을 야기했고, 그 결과는 가계부채와 한계기업의 폭증, 그리고 1500원에 육박하는 고환율 쇼크로 이어졌다. 정부는 대기업의 달러 매도를 유도하고, 서학개미의 해외 투자를 억제하는 방안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이런 시장 개입이 과도해지면 우리 경제의 위험한 버블을 더 키우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평소 혁신을 등한시하고 기업 활동을 옥죄어 왔던 것이 지금 두 나라의 사뭇 다른 풍경을 만든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국내에서도 AI나 과학기술 연구를 지속적으로 하고 성과를 냈을 때 충분히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에 정부는 미래에 가능성 있는 젊은 과학자들을 매년 200명 정도씩 선발해 국가적으로 지원할 계획입니다.”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14일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정부가 차세대 과학기술인에게 ‘성장 로드맵’을 잘 제시해 줘야 한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젊은 과학자’ 선발은 매년 20명씩 선정하는 석학급 ‘국가 과학자’와는 별개로 진행되며, 정부는 박사 3, 4년 차만 돼도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할 계획이다.배 부총리는 “앞으로 AI를 활용해 연구개발(R&D) 효용성을 극대화하면 우리 과학기술계에도 상당한 기회가 있을 것”이라며 “제조업에 강점이 있는 한국은 향후 피지컬 AI 시대에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또 ‘국가대표 AI’로 불리는 AI 파운데이션 모델 선정 기준에 대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모델을 지향하면서도 안전하고 신뢰성 있는 AI 모델을 공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우리나라 과학 인재 위기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과학자를 꿈꾸는 친구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워낙 의사 쏠림 현상이 심해졌고 젊은 사람들이 과학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또 과학기술을 전공하고 졸업했을 때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을 못 하는 것 같다. 과학기술인으로서 ‘성장 로드맵’을 잘 제시해 주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다.” ―보상 측면에서도 부족함이 많지 않나. “미국은 워낙 물가가 비싸다 보니 그만큼 연봉이 높다. 또 글로벌 기업들이 인재에 막대한 투자를 하다 보니 거기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미국이나 중국으로 나가는 이유가 연봉 때문만은 아니다. 안정적으로 예측 가능하게 연구할 수 있는 환경도 중요하다. AI를 연구하던 사람들은 기업으로 가면 딜레마에 빠진다. 대부분 기업에서 AI 연구를 심도 있게 하지 않는다. 이들은 AI를 활용한 애플리케이션이나 서비스 개발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본인의 AI 연구를 발전시켜 나갈 시간이 없다. ―이번에 발표한 인재 대책에 그런 고민이 많이 담겼나. “이번에 국가 과학자 제도를 준비하면서 우리 젊은 인재들에게 과학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불러일으키게 할 것인가를 고민 많이 했다. 그리고 왜 학생들이 과학자가 아닌 의사나 교수가 되고 싶어 하는지를 분석했다. 그게 다 이유가 있었다. 교수는 테뉴어(정년)가 보장돼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고, 의사들도 면허 취득하면 의사 활동을 계속 해 나갈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과학기술자에게도 일회성 연구비 지원이 아닌 제도적 환경을 마련해 줘야 한다고 느꼈다. 예를 들어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연구 활동비 지원, 정부 행사나 정책에 참여할 기회, 공공시설을 이용할 때 특별한 대우 등을 통해 자긍심과 소명감을 갖고 연구할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그래서 매년 석학급 과학자를 20년 선발해 지원하기로 했다.” ―젊은 과학자들에 대한 지원책도 검토 중인가. “젊은 과학자들에게도 “우리도 조금만 더 노력하면 국가 과학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심어주고 자극도 주는 게 필요하다. 그래서 앞으로 석학급 20명과 별도로 ‘젊은 국가 과학자’도 매년 200명씩 선발해 지원할 계획을 갖고 있다. 박사 3, 4년 차만 돼도 선발될 수 있게 할 것이다. 국가과학자 선발은 공정하게 할 것이다. 정부가 추천을 받아 심사를 할 수도 있고, 민간 평가단을 운영할 수도 있다. 연구 성과뿐 아니라 사회적 평판도 종합적으로 보겠다. 젊은 과학자들의 선발 기준은 좀 다를 것이다. 이들은 연구 성과가 부족할 수 있으니 미래 가능성에 가점을 둬서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선정 기준은 정리되면 발표할 예정이다.” ―AI와 관련해 인재 다음으로 많은 걱정거리가 전력이다. “GPU(그래픽처리장치)가 26만 장 들어온다고 했을 때 소요되는 전력량이 500∼800MW(메가와트) 수준이다. 우리 정부의 전력 공급 계획상 2030년 정도까지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나중에 AI 서비스가 더 늘어나고 외국 기업들이 한국에 투자하면서 더 많은 GPU가 가동된다면 여기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지금 SMR 같은 새 원전 가동 시기가 2035년 이후라서 2030∼2035년 사이 우리가 전력 확보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 ―AI 학습에 따르는 저작권 문제에 대해선 어떻게 대응할 계획인가. “저작권자들의 저항이 좀 큰 편이다. 그래서 정부 차원에서 제도 개선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AI를 학습시키고자 하는 쪽과 저작권자 간에 공정한 거래 체계가 필요하다. 저작권자들은 AI 시대에는 양질의 데이터가 돈이 된다고 생각하고, AI 학습에는 어마어마한 저작권 데이터가 필요하다. 개선 방안을 문화체육관광부와 논의 중이다. 가령 샌드박스 규정을 통해 특정 영역의 데이터는 특수 목적에 한해서 오픈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국가대표 AI 파운데이션 모델 선정에 5개팀이 경합 중이다. 결국 어떤 팀이 선발될까. “AI 파운데이션 모델의 전제 조건은 소스를 오픈하는 것이다. 오픈 소스가 되려면 학습하는 데이터에 신뢰성이 있어야 한다. 만약에 불법적인 데이터를 사용해서 학습했다면 그 오픈된 모델은 나중에 문제가 된다. 그래서 국가대표 AI는 최대한 안전하고 신뢰성 있는 데이터로 학습한 모델이어야 된다. 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모델을 지향하면서도 안전하고 신뢰성 있는 AI 모델을 공급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 부분들을 기업들이 주의해서 개발했으면 좋겠다.” ―과학기술 발전에 AI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과학 문제들은 가설에 기반해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그 가설을 세우기 위해 수많은 과학 이론에 대한 실험을 하고 그걸 하나하나 증명해 나가야 한다. 사람이 평생을 들여서 1만 개 정도 가설을 세워 실험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AI를 활용하면 불과 하루 만에 10만, 100만 개의 실험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그게 가능한 나라와 아닌 나라의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질 것이다. 과학기술뿐만이 아니라 바이오나 화장품 소재 물질 개발에도 AI가 쓰이면 효율성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날 수 있다. 이미 미국은 이런 분야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 우리도 빨리 따라가야 한다. 정부에 와서 보니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과학자가 많이 있고, 우리도 다양한 과학기술에 대한 연구를 체계적으로 잘 준비해 왔다. 과학기술에 AI를 잘 적용한다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다고 본다.” ―AI 예산이 3배가 늘어서 10조 원이 됐는데 충분하다고 느끼나. “우리 재정 지출 규모를 감안했을 때 적지는 않은 숫자다. 정부 예산만 갖고 모든 걸 해결하겠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만 어느 정도의 AI 인프라는 정부가 준비해야 한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이런 수준의 예산 투자가 내년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AI의 성과가 나오려면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AI로 실제 현장에서 성과가 나는 데 최소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최소 5년간은 정부가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면 기업이 바뀔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AI 경쟁력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 “확실히 우리가 싱가포르 영국 프랑스 등과 함께 3위권 그룹에 있는 건 맞다. 그런데 AI 시장에서 90%를 1, 2위인 미국과 중국이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3위권이라는 의미는 크지 않다. 우리가 ‘AI 3대 강국’을 얘기할 때는 1, 2위에 준하는 수준의 AI 기술력과 서비스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언제쯤 우리나라가 과학 분야 노벨상을 탈 수 있을까. “일본은 그동안 물리학과 화학에 투자를 많이 했다. 반면 한국은 그보다는 ICT(정보통신기술) 강국을 위한 인터넷망 투자, 그리고 지금의 AI 같은 응용 연구에 더 투자해 왔다. (기초 과학보다는) 경제 성장을 위한 기술에 더 방점을 찍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굳이 노벨상에 대한 자격지심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피지컬 AI 시대에 한국은 앞서 나갈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거대언어모델(LLM)은 AI의 기본적인 언어 이해 모델이다. AI는 여태껏 인류가 쌓아왔던 지식들을 죄다 모아서 학습했는데 이제 2027, 2028년쯤 되면 학습할 수 있는 데이터가 고갈될 수 있다. 그다음 단계인 피지컬 AI로 넘어가 실제 환경에서 AI가 원하는 수준으로 작동하려면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될 요소가 몇십만 배 이상일 것이다. 단순히 움직이는 것을 넘어서 전략을 짜고 의사결정까지 AI가 하기 위해서는 시나리오별로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모아줘야 한다. 우리나라는 제조업의 강점이 있고 공장 자동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기 때문에 이런 데이터 확보 체계를 잘 갖춰 나가면 피지컬 AI 시대에 우리의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임기 중에 꼭 이루고 싶은 것은? “우리 공직사회가 좀 더 AI를 활용하고 AI에 더 친숙한 조직으로 발전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우리 정부가 AI 비전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더 설득력 있는 얘기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지금 산업계에서 얘기하고 있는 AX만으로는 안 된다고 본다. 기본적인 과학기술이 기반이 돼야 한다. 우리가 엄청난 생산성 혁신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AI 모델, 그리고 기본이 되는 과학기술이 모두 필요하다.”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49)국내 대표적인 인공지능(AI) 전문가로 현재 정부부처의 과학기술 및 AI 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광운대에서 전자물리·전자공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정보통신·제조기업에서 AI와 미래기술 전략을 담당했고, 2020년부터 LG AI연구원장으로 재직하며 한국형 거대언어모델(LLM) ‘엑사원’ 개발을 주도했다. 2023년 은탑산업훈장을 받았고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으로 활동 중이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Korea’s Next Industrial Revolution.’ 젠슨 황의 엔비디아가 최근 제작해 공개한 한국 헌정 영상의 제목이다. 제조업 붕괴 위기에 일자리는 줄어들고, 인재까지 떠나가며 현상 유지도 어려운 판국에 느닷없이 산업혁명이라니. 이런 국뽕급 희망 회로를 자극한 게 다른 누구도 아닌 외국 기업이란 점은 더더욱 놀라웠다. 외부의 시선은 가끔은 잊고 지내던 우리의 숨은 저력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치킨과 소맥, PC방, K팝…. 1박 2일 동안 젠슨 황이 쏟아낸 감탄사들은 우리가 마치 공기처럼 일상에서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을 향해 있었다.AI가 선물한 ‘제조업 르네상스’의 기회 젠슨 황은 우리 산업의 르네상스를 예견하며 나름의 근거를 제시했다. 그는 “미국은 소프트웨어에 강점이 있지만 제조업이 약하고 유럽은 반대로 제조업이 강하지만 소프트웨어가 약한데, 한국은 두 역량을 두루 갖췄다”고 했다. 폭넓은 제조업 포트폴리오, 꽤 경쟁력 있는 정보기술(IT) 인프라, 거기에 K드라마, K뷰티 등 소프트파워 역량이 받쳐주는 한국은 AI 기술이 산업 곳곳에 스며들어 경제 발전의 기폭제 역할을 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젠슨 황이 말한 한국의 강점은 단순히 반도체 공정 기술이나 BTS의 글로벌 팬덤 같은 이미 드러난 성취에 머물지 않는다. 그가 본 것은 우리 산업의 ‘현재’가 아니라 ‘잠재력’이었다. “한국이 AI 리더가 될 가능성이 무한대”라는 평가도 한국이 그간 써 내려간 경제 기적의 역사를 봐왔기 때문에 나왔을 것이다.‘한국의 산업혁명’이라는 그의 비전이 듣기만 해도 가슴 벅차오르는 것은 AI가 이 지긋지긋한 저성장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현실적 기대 때문이다. 한국 경제는 벌써 30년 넘게 잠재성장률과 출산율이 급강하하는 중이다. 특히 태어난 이후 한 번도 고도성장의 경험을 하지 못한 MZ 이후 세대들에겐 경기침체와 취업난은 인생에서 변치 않는 상수(常數)가 돼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젠슨 황이 한국의 제조 현장을 혁신하고 생산성을 극대화하자고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우리로선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다. 전 세계 AI 확산이라는 야심을 가진 엔비디아는 한국과의 ‘AI 동맹’으로 자사 제품의 판로를 열고 효용성을 입증하길 원한다. 우리에게도 AI 혁명은 단순한 기술 트렌드가 아니라, 성장의 물줄기를 틀어 수압을 높이고, 세대의 서사를 바꿀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나는 젠슨 황의 비전이 허황되다고 보지 않는 만큼, 혁명에 준하는 산업 대전환이 그래픽처리장치(GPU)만 들여온다고 저절로 이뤄질 거라고도 보지 않는다. 제아무리 성능이 우수한 AI 칩이 있어도 그것을 연결하고 활용할 사람과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으면 우리 제조업의 낡은 체질은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실패를 용인하는 조직 문화와 기업가 정신의 부활, 혁신을 지원·장려하는 거버넌스, 대·중소기업 및 스타트업이 모두 참여하는 개방형 생태계가 어우러져야 한다. 특히 정치권은 AI 투자와 육성만큼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우선적으로 챙기길 바란다. 결국 우리가 본래 갖고 있는 장점 빼고는 모두 다 바꿔야 한다. 기술이나 자원의 도입보다 더 어려운 일은 그것이 작동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아무런 준비 없이 거저 오지는 않을 것 물론 혁신의 씨앗이 오랫동안 말라버린 우리 사회에서 그 모든 변화와 준비 과정이 단번에 이뤄지리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번 기회를 계기로 실험적인 아이디어가 살아 숨 쉬고 혁신 기업이 태동해 신산업을 이끄는 생동감 넘치는 경제 환경이 우리 청년들에게 다시 찾아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비록 아직은 기적과 같은 일이겠지만 그런 상상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잠시나마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올해 4월 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스스로 ‘해방의 날’로 명명하고 전 세계에 관세 폭탄을 퍼부은 지 반년이 흘렀다. 당시 미국의 선전포고는 온 나라를 향해 무차별 난사하듯 했지만 어느새 지금은 슈퍼파워 미국과 중국 간의 혈투로 전선이 응축되는 모양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한국 등 많은 나라는 전쟁의 유탄을 대신 맞거나 어느 한쪽 편의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다. 전 세계가 피아(彼我)를 가리기 힘들고 끝을 예단하기도 어려운 ‘경제 대전’에 휘말리고 있다. 주요국들이 이번 전쟁에 동원하는 카드는 전방위적이다. 고율의 관세 부과, 상대국 기업에 대한 제재 및 조사, 전략물자의 수출 통제 등을 거침없이 꺼내 든다. 특히 미국과 중국은 최근 하루가 멀다 하고 상대를 겨냥한 공격을 쏟아냈다. 미국의 반도체 수출 규제에 대응해 중국은 자국의 희토류 수출을 틀어막았고 양측은 나란히 서로의 선박에 입항료를 부과했다. 이들의 전선은 대기업이나 첨단산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중국이 미국의 관세 부과에 맞서 수확기에 접어든 미국산 대두 수입을 중단하자, 농가의 반발로 수세에 몰린 트럼프는 중국과의 식용유 교역을 단절하겠다며 엄포를 놨다. 양국이 상대를 향한 압박 수위를 계속 높여가면서 결국 미중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美中 싸움에 모두가 휘말려 피해 입어 이 전쟁의 주연은 미중 양국이지만 그로 인한 고통과 피해는 모든 나라가 받고 있다. 중국이 한미 조선 협력 사업 ‘마스가 프로젝트’에 참여한 한화오션의 미국 자회사들에 제재를 발표한 것이 그 사례다. 유럽연합(EU)의 50% 철강 관세는 애초 중국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그로 인해 한국 등 각국의 철강업계가 동시에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며 부과한 입항 수수료는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 선박도 함께 부담해야 한다. 각국은 미중 어느 편에 설 것인지에 대한 선택도 강요당하고 있다. 중국산 자동차를 많이 수입하는 멕시코는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중국 차량에 5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가 하면 인도는 미국의 관세 부과에 대항해 최근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7년 만에 중국을 방문하는 등 줄타기 외교에 나섰다.살아남기 위한 우리의 무기는 무엇인가 주요국들은 상대가 무시할 수 없는 각자의 무기를 내세워 이 혼돈의 시기를 헤쳐 나가고 있다. 중국이 미국의 관세 폭격에 의연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은 미국과의 무역에 의존하지 않고도 버틸 수 있을 정도의 광활한 내수시장을 둔 덕분이다. 그리고 선진국 수준에 범접하는 제조 기술력, 희토류 같은 전략 자원들도 중국을 든든하게 한다. 일본은 소·부·장에 대한 강점과 세계 금융시장에서 기축통화국으로서의 지위, 막대한 해외 자산 및 외환보유액이 무기다. 4억5000만 명의 단일 소비 시장을 갖고 있는 유럽은 고부가가치 제조업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서 ‘슈퍼 을(乙)’로 통하는 ASML이 대표적 사례다. 문제는 이런 각자도생 정글에 내던져진 한국이다. 지금은 냉전 때처럼 한쪽 편에 줄 선다고 안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미국은 플라자합의나 미일 반도체 협정처럼 과거에도 동맹국을 탈탈 털어 자기 이득을 취한 적이 많았다. 3500억 달러라는 투자 청구서가 매우 가혹하긴 하지만 이런 역사적 맥락을 볼 때 그렇게 난데없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미국과의 관세 협상을 겪고 나서 “국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지금처럼 모두가 뒤엉켜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상황에선 상대가 두려워할 만한 무기와 맷집을 키우는 게 급선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그 숙제를 잘하고 있나 싶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억대 성과급으로 일약 원톱 ‘신의 직장’ 반열에 오른 SK하이닉스가 이번 주부터 신입 채용 서류를 접수하고 있다. 취준생은 물론이고 대기업 저연차 직장인들도 관심이 뜨겁다. 얼마 전부터 소셜미디어에는 하이닉스의 직급별 연봉에 성과급을 합산한 자료가 돌아다니고 있다. 블라인드와 취업 사이트에는 “성과급만 웬만한 대기업의 부장 연봉 수준인 꿈의 직장”,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그 회사 신입으로 들어가도 더 많이 벌겠다”는 글들이 쏟아진다. ‘대학생 입사 선호 1위’ 이천 쌀집(경기 이천에 본사를 둔 하이닉스의 별칭)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소수 양질의 일자리만 구직자 몰리는 현실 연봉과 처우가 우수한 회사에 구직자가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풍경에는 뭔가 찝찝한 구석이 있다. 하이닉스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선점하며 역대급 영업이익을 내고 있다. 실적이 좋으면 사람을 더 뽑을 법도 하지만 하이닉스는 오히려 최근 들어 청년들에 대한 채용을 줄여 왔다. 전체 신규 채용 중 20대 채용 비중은 2022년 75%에 달했지만 2024년에 40%(942명 중 379명)로 뚝 떨어졌다. 비단 하이닉스뿐만이 아니다. 주요 대기업들이 청년들에게 제공하는 질 좋은 일자리는 계속 쪼그라드는 추세다. 마음에 드는 직장이 없어 구직을 단념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청년 고용률은 16개월 연속 하락세를 이어오고 있다. 대기업들이 정규직 고용에 인색한 이유는 인재가 필요하지 않아서도, 청년들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뽑아 유지하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선 한 번 정규직 직원을 뽑으면 아무리 근무 성적이 저조해도 정년 60세까지 해고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제임스 김 암참 회장은 최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사업이 잘될 때는 직원을 많이 뽑고, 잘되지 않을 때는 줄여야 하는데 한국에선 그게 안 된다”며 “싱가포르 같은 작은 나라에 글로벌 기업의 지역 본부가 5000곳 있는데 한국에 100곳도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고 반문했다. 호봉제 같은 시대착오적인 임금 체계도 문제다. 해마다 따박따박 연봉이 오르는 구조 때문에 신입을 뽑아놓으면 시간이 갈수록 기업들의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기업들이 공채 대신 수시 채용으로 선회하고, 대졸 신입보다 중고 경력직 채용을 선호하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하이닉스 열풍은 소수 양질의 일자리에만 구직자가 몰리고 이 바늘구멍 전쟁에서 탈락한 패배자들은 취업 재수 삼수를 반복하는 암담한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대-중소기업의 임금 격차가 급격하게 벌어지고, 커리어 전환을 통한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무너진 상황에서 처음부터 어떻게든 높은 자리에서 경력을 시작하는 것이 본인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정부와 정치권은 가뜩이나 높은 대기업 정규직의 울타리를 더 높이는 작업에 열을 올린다. 임금 삭감 없는 주4.5일제와 정년 연장, 노란봉투법은 모두 기업들의 채용 의지를 크게 떨어뜨리게 하는 요인들이다. 얼마 전 대통령의 요청에 주요 기업들이 신규 채용을 늘리겠다고 화답한 것은 모양새는 훈훈해 보였을지 몰라도 그 본질은 기업에 대한 무리한 팔 비틀기라는 것을 누구나 안다. 노동개혁이 청년 취업난의 근본 해법 일자리는 기업의 성장과 기술 혁신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돼 있다. 정부가 할 일은 기업들에 채용을 읍소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의 기득권 과보호를 해소하고 낡은 임금체계를 확 뜯어고치는 노동개혁에 나서는 것이다. 정부가 앞장서서 그런 고용 친화적 환경을 조성하기는커녕 스스로 일자리의 파괴자가 돼서는 안 되지 않겠나. 기업들 사이에서 “직원 적게 뽑는 건 지능순”이라는 말이 왜 나오는 것인지 진지하게 성찰해 보길 권한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애덤 스미스나 밀턴 프리드먼이 지금쯤 무덤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을 것이다.”(경제전문지 포천) 영미권 주류 경제학의 선구자들이 당장에라도 관 뚜껑을 열고 뛰쳐나올 태세다. 시장경제의 본산이라는 미국에서 러시아나 중국에서 있을 법할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어서다. 주범은 물론 트럼프다. 시장과 기업, 동맹국에 대한 그의 무분별한 갑질과 개입으로 인해 자유무역과 시장 존중, 작은 정부 등 미국 보수 공화당이 전통적으로 추구해 온 가치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마가(MAGA)의 자본주의 공습이 본격화됐다.자유시장의 원칙 훼손하는 트럼프 트럼프의 최근 행보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라 절대권력과 폭군 성향을 지닌 기업 오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우선 공공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숙청한다. 트럼프는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중국 공산당에 연루돼 있다고 공격하며 그를 쫓아내려 했고 골드만삭스에는 관세 정책이 미국 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 분석한 이코노미스트의 교체를 요구했다. 사기업의 이윤을 갈취하고 경영활동에 개입하는 것은 기본이다. 엔비디아 등 반도체 기업에 중국 수출을 허가하는 대가로 수익의 15%를 정부에 납부하라고 했고, 정부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에는 지분을 내놓으라고 강요하고 있다. 심지어 코카콜라 CEO에게 제품에 넣는 옥수수 시럽을 사탕수수 설탕으로 바꾸라는 것 같은 시시콜콜한 요구까지 수시로 한다. 트럼프가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며 자기 이익을 취하는 냉혹한 기업인 마인드를 갖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관세를 무기로 동맹국을 쥐어짜는 것을 넘어, 심지어 자국 기업을 상대로도 이런 행위를 한다는 것은 예상하기 어려웠던 바다. 문제는 미국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앞으로도 지금의 자국 우선주의와 국가 자본주의 노선을 포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변화를 이제 현실로 인정하고 이에 대응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트럼프 대처법’을 면밀하게 연구한 덕분에 한미 정상회담을 비교적 무난하게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힘센 자의 비위를 맞춰가며 눈앞의 위기만 모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최강대국 미국처럼 해외 기업들을 윽박지르면서 투자를 압박하거나 미국에 보복 관세를 때리며 이 어리석은 전쟁에 뛰어들 수는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어서도 안 된다. 미국에서도 계속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벌이되, 다른 수출시장도 부지런히 찾아 나서야 한다. 시장경제와 자유무역을 여전히 신봉하는 다른 나라들과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해 가는 과정도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가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검토하며 대안을 모색하기로 한 것은 여러모로 잘한 결정이다. 소규모 개방경제인 우리는 항상 시야를 외부에 두고 있어야 한다. 미국이 관세 폭탄을 내세워 기업들의 투자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것에 대비해 국내 산업 공동화를 막기 위한 대책도 세워야 한다.안팎의 도전에 맞서 생존전략 찾아야“누구도 우리 경제를 쉽게 넘보지 못하게 본연의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원론적이고 뻔한 얘기까진 하지 않겠다. 다만 우리는 트럼프뿐 아니라 내부의 적들과도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시장경제의 파괴자들은 우리 안에도 있다는 뜻이다. 이익단체에 포획돼 규제개혁을 등한시하는 정부, 잇단 반시장 정책으로 혁신기업의 싹을 잘라버리는 정치권, 특혜와 이권을 놓지 않으려는 고인물 기득권 세력 모두가 자본주의를 망치는 공범이다. 나라 안팎으로 적들이 늘어나고 성장률이 곤두박질치는 상황일수록 시장경제 질서를 더욱 확고히 지키며 버텨 나가는 수밖에 없다. 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너도나도 ‘진짜’를 외치는 시대다. 요즘 대통령실과 여권, 특히 관가에서는 ‘진짜’ 열풍이 뜨겁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취임사에서 “진짜 성장을 위한 진짜 산업 정책을 추진하자”고 다짐했다. “기업이 대한민국 진짜 성장의 중심”(구윤철 경제부총리), “과학기술 주도로 진짜 성장을 이루겠다”(배경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는 말도 나왔다. 국정기획위원회가 13일 발표한 국정 5개년 계획에는 현 정부가 추구하는 ‘진짜 성장’에 대한 부분이 상세히 실렸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가짜 성장은 반짝 성장, 소수의 성장, 모방 성장이고 진짜 성장은 지속 가능한 성장, 체감할 수 있는 성장, 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성장”이라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경제 역효과 우려되는 선의의 정책 ‘진짜’ 열풍에는 고용노동부도 숟가락을 얹었다. 김영훈 고용부 장관은 최근 기업들의 반발이 거센 노란봉투법에 대해 “노사 대화 촉진법이자 상생의 법, 진짜 성장법”이라고 추켜세웠다. 하청업체의 교섭력에 힘을 실어줘 원·하청 격차를 해소하면 우리 경제의 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물론 협력업체의 근로조건이 개선되면 우리 산업 생태계에 좋은 일이겠지만, 문제는 이 법이 실제 그렇게 작동할지 여부다. 노란봉투법은 하청기업 노조가 ‘실질적 지배력’이 있는 원청업체에 교섭을 요구할 수 있도록 허용한 법이다. 만일 거부하면 형사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면 원청기업은 그런 상시적인 노사 교섭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노조가 강성인 하청업체와는 계약을 끊을 가능성이 크다. 해당 업체는 직원 연봉이 오르기는커녕 도산 위험에 빠지게 된다. 요즘 산업계에서 논란이 되는 규제 입법들은 대개 이런 식의 함정을 갖고 있다. 원래의 선의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진짜 성장과 ‘코스피 5000’의 핵심 수단으로 내세우는 상법 개정도 마찬가지다. 개정 상법의 근본 취지는 소액주주의 영향력을 키워 기업 가치와 주가를 높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들이 소송 위험이나 경영권 위협 때문에 주주 눈치만 보고 미래를 위한 선제적 투자를 포기한다면 본연의 기업 가치는 떨어지고 결국 중장기적으로 주가에도 악영향을 준다. 기업들은 감당할 수 없는 규제가 생기면 그 상황을 최대한 회피하려는 본능을 갖고 있다. 공장의 해외 이전, 투자 계획 철회가 대표적인 방식이다. 그 피해는 중소·협력업체 근로자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수밖에 없다. 이런 메커니즘은 문재인 정부 때 추진했다가 실패로 돌아갔던 소득주도성장과 묘하게 닮아있다. 저소득 근로자를 돕겠다며 최저임금을 과속 인상한 결과는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경영난을 가중시켜 오히려 서민들의 일자리를 뺏는 결과로 이어졌다. 지금은 보호 대상이 하청기업 근로자, 개미 투자자로 바뀌었을 뿐이다. 현 정부에서 추진하는 임금 삭감 없는 주4.5일제, 초단기 근로자에 대한 주휴수당 지급 역시 소주성의 폐해를 연상시키는 사례다. 폐업 자영업자가 연간 100만 명을 넘는 불황기에 이런 식의 정책은 영세 기업들이 고용을 줄여야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이념보다 실용’ 원칙 되새겨야 이 정부가 말하는 ‘진짜 성장’, ‘가짜 성장’이 정치적 프레임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결국 문제는 이 대통령이 평소에 강조하는 ‘실용 우선’의 원칙이 정책에 녹아들어 있느냐다.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 정책은 아무리 그 포장이 그럴듯해도 시장에서 외면당하고, 기업과 근로자 모두에게 피해를 준다. 과거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비슷한 시도를 반복한다면, 이 정부가 말하는 ‘진짜’는 그저 이미지 정치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유행어로 소비되고 말 것이다. ‘진짜’는 단지 구호가 아니라 성과로 입증되는 것이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요즘 실리콘밸리에서는 한 인공지능(AI) 스타트업을 둘러싼 드라마 같은 인재 쟁탈전이 화제가 되고 있다. AI를 활용해 개발자들의 코딩을 지원하는 윈드서프는 직원은 300명 수준으로 적지만 오픈AI가 역대 최대 규모인 30억 달러를 들여 인수를 추진할 정도로 기술력이 탄탄한 회사다. 지난달 11일 회사가 직원들을 회의실로 소집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모두 오픈AI의 공식 인수 발표가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하지만 결과는 너무나 예상 밖이었다. 믿었던 오픈AI 인수는 무산되고 도리어 회사 최고경영자(CEO)와 공동창업자, 주요 연구진이 직원들만 남기고 통째로 구글에 이직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축제의 장이 됐어야 할 회의장 분위기는 이내 차갑게 식었다. 일부 직원은 충격과 배신감에 눈물도 흘렸다.핵심인력만 쏙 빼가는 인재 사냥 구글은 이번 전격적인 인재 영입 과정에서 최근 실리콘밸리에서 유행하는 ‘애크하이어’라는 독특한 방식을 활용했다. ‘인수’(acquisition)와 ‘고용’(hire)의 합성어로 회사 자산이나 지분, 제품은 남겨두고 필요한 인재만 쏙 빼 오는 수법이다. 회사 전부를 인수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규제 당국의 반독점 심사나 불필요한 조직 통합 과정을 건너뛸 수 있고, 핵심 인력을 한 번에 데려와 빠르게 원천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반면 인재가 빠져나가는 스타트업 입장에선 회사가 사실상 빈껍데기만 남는 신세가 된다. 이번에 구글로 자리를 옮긴 윈드서프 CEO도 “난파선에 직원을 버려놓고 탈출한 선장”이라는 비판을 들었다. 글로벌 테크업계의 인재 전쟁은 말 그대로 군사작전이나 정글의 혈투를 방불케 한다. 인재 영입이 한 번에 대규모로 이뤄지고 천문학적인 돈이 오가는 데다, 상대의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고 기습적으로 진행된다. 오죽하면 인재를 ‘밀렵’(poach)한다는 표현까지 쓰일까. 기업들은 경쟁력 있는 직원을 뽑기 위해 거액의 보너스를 제안하고, 상대 기업은 거꾸로 인재를 뺏기지 않으려고 기존 직원에 대한 보상을 높인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요즘 실리콘밸리 개발자들의 몸값은 상상을 초월하게 불어났다. 최근 인재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는 메타는 애플 구글 등 경쟁사의 연구원들에게 1억∼2억 달러의 보상 패키지를 제안하고 있다.기술 인재 보상 없으면 패자 전락할 것 빅테크들이 슈퍼 인재에게 수억 달러의 돈을 아낌없이 쓰는 것은 AI 시대일수록 극소수의 천재가 모두를 먹여 살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 실리콘밸리 유망 스타트업의 직원 1인당 매출이나 기업 가치는 기존 대기업의 수십, 수백 배에 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술 인재에게 확실한 보상을 한다는 원칙이 뿌리 깊게 정착돼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현기증 나는 기술 발전 속도다. 인재 확보에 실패할 경우 순식간에 경쟁에서 밀려나 도태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기업들은 과감한 투자를 할 수밖에 없다. AI가 일반 대다수 근로자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가운데 일부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부조리가 벌어지고 있다. 슈퍼 인재를 길러내지도, 천문학적 몸값을 지불하고 이들을 데려오지도 못하는 한국에 이런 ‘쩐의 전쟁’은 너무나 먼 얘기처럼 느껴진다. 경직된 노동시장과 낡은 호봉제, 결과적 평등주의에 매몰된 우리는 경쟁국과의 인재 전쟁에서 판판이 깨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남아 있던 인재도 해외 유출이 심각한 와중에 최근엔 등록금 인상 한도를 더 낮추는 법안까지 국회를 통과했다. 대학들이 저마다 재정난에 허덕이는데 우수한 학생을 어떻게 배출하고 실력 있는 교수를 어디서 데려오나. 기술 인재를 파격적으로 대우하고 혁신을 장려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지 못하면 ‘100조 AI 펀드’, ‘AI 3대 강국’ 같은 목표는 또다시 헛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은 이재명 대통령의 증시 공약 달성을 위한 중요한 퍼즐 중 하나다.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상법을 개정하면 코스피가 5,000까지 높아질 수 있다”는 자체 전망을 계속 쏟아내고 있다. 이번에 상법 개정을 주도한 당내 조직의 이름도 ‘코스피5000특별위원회’다. 상법 개정으로 기업들이 주주 이익을 더욱 챙기게 되면 자연스레 투자 자금이 국내 금융시장으로 유입되고 이것이 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계산이다. 그 계산이 아직까진 틀리지 않아 보인다. 이 대통령도 이날 기자회견에서 “(지난 한 달간) 좀 괜찮다 싶은 점은 눈에 띄는 주식시장”이라며 기대와 자신감을 내비쳤다.산업 경쟁력 강화가 가장 근본 과제 이 대통령과 여권은 주가 상승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소액주주의 이익 보호, 그리고 부동산 투자 자금의 증시 유입이라 보고 있다. 기업이 주주 환원을 늘리고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하면 개미와 외국인 투자가가 이른바 ‘국장’으로 돌아오고 증시 저평가가 해소될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실제로 최근 코스피가 거침없는 상승세를 보이며 3,000을 돌파한 것은 새 정부의 이런 정책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된 측면이 크다. 부동산에 과하게 쏠려 있는 투자의 물줄기를 국가 경제와 기업 성장의 기반이 되는 주식시장으로 돌리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부동산 과잉 투자가 온갖 사회 병폐를 일으키는 것과 달리 증시 활성화는 내수 진작과 기업의 자금 조달이라는 경제 선순환으로 이어진다. 주주 배당을 높여 투자 수익률을 높이고 주식시장에 새로운 자금을 유입하면 주가가 오를 가능성이 크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런 식의 정책은 역대 정권에서도 추진한 전례가 많았다. 윤석열 정부의 증시 밸류업 대책, 박근혜 정부의 배당소득증대세제가 비슷한 정책이었고, 논란이 있지만 우리나라가 주식 투자 수익에 세금(금융투자소득세)을 걷지 않는 것도 증시 활성화를 위한 방안 중 하나다. 그러나 지난 모든 증시 부양책이 그랬듯이 이런 종류의 법·제도 변경은 실행이 손쉬운 만큼 효과는 제한적이고 단기적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대책이 잘못 남용될 경우 투자 여력을 줄여 자칫 기업가치를 훼손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주가의 향방을 가르는 가장 근본 요인은 무엇보다 해당 기업이 얼마나 수익 창출력이 있느냐다. 새 정부 들어 갑자기 증시가 오르니까 어디선가 큰 희망의 불빛이라도 생긴 것 같지만, 주력산업이 위기에 빠지고 내수 침체와 중국의 급부상에 산업 기반이 흔들리는 우리 경제의 본질은 한 달 사이에 전혀 변한 게 없다. 지금까지는 새 정부 출범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그동안 주가가 너무 떨어져서 생긴 기저효과 덕에 3,000을 넘었지만 앞으로도 구조 개혁이나 실질적인 경쟁력 개선 없이 지금 같은 상승세가 이어질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지금까지 속성과외나 잔기술을 동원해 실적을 올렸다면 앞으로는 진짜 실력을 쌓아야 할 때다. 무리한 주주이익 강요는 부메랑 될 것 시장 투명성을 높이고 주주 이익을 보호하는 큰 방향은 옳지만 과도한 규제로 기업들의 손발을 묶으면 이는 우리 경제에 자해 행위가 될 수 있다. 당장 주가를 높이기 위해 자사주 소각과 배당을 지나치게 강요하다 보면 기업의 투자 여력이 줄어 향후 기업가치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번 상법 개정도 증시를 잠시 상승시키는 요인은 될 수 있지만, 경제계의 우려대로 기업 경영과 투자를 제약하는 쪽으로 작용할 경우 오히려 시장의 악재로 돌변할 가능성이 크다. 주가 5,000에 집착해 무리수를 두며 시장 거품을 키우기보다는, 과감한 구조 개혁과 산업 경쟁력 강화라는 정공법을 펼쳐야 할 때다. 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철의 도시’가 요즘 차갑게 식었다. 경북 포항의 ‘포스코 1선재공장’에선 반년이 넘도록 기계음이 들리지 않는다. 45년간 철강 제품을 생산하던 이 공장은 작년 11월 깊은 불황의 여파로 문을 닫았다. 공장 폐쇄를 아쉬워하며 직원들이 찍은 단체사진엔 그 표정에 착잡함이 짙게 묻어났다. 회사는 해체된 설비들이 널브러져 있는 이곳을 앞으로 어떻게 정리 또는 활용할지 못 정한 상태다. 그만큼 업(業)의 미래가 캄캄하다는 얘기다. 한때 ‘민족의 불꽃’, ‘산업의 쌀’이라는 대접을 받아 온 철강산업이 호된 된서리를 맞고 있다.中에 휘청이는 한국의 뿌리 산업 철강은 경기침체와 중국의 무차별 저가 공세로 시장이 잠식당한 대표적 업종이다. 석유화학, 배터리 등 다른 뿌리산업들도 비슷한 처지다. 그뿐이 아니다. 전기차, 가전, 반도체 등 중국과 경쟁 관계에 있는 모든 산업이 존재론적 위기에 봉착했다. 얼마 전 만난 대기업 CEO는 “우린 벌써 주4.5일제 얘기가 나오는데 중국은 일머리 있고 주72시간씩 일할 각오가 돼 있는 대졸자가 한 해 1200만 명이나 쏟아진다”, “중국 연간 연구개발(R&D) 투자액(800조 원)이 우리 정부 전체 예산보다도 많다”며 한숨을 쉬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공장 시찰에서 “우린 과거에 성냥, 비누, 양철을 수입에 의존했지만 지금은 세계 제조업 1위 대국이 됐다”고 뻐기듯이 말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폭탄에 맞서 글로벌 ‘제조업 전쟁’의 포문을 연 것이다. 요즘 국내 산업계에는 “중국이 손대는 산업은 그냥 접어야 한다”는 자조가 팽배하다. 비용이나 물량으로는 상대가 안 되고, 기술력도 별 차이가 없으니 겨뤄봐야 승산이 없다는 것이다. 누울 자리 보고 발을 뻗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합리적인 경영 판단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공급망이 안정되고 국가 간 분업이 원활하던 20, 30년 전과 상황이 다르다. 뭐든 손 놓고 멍하게 있다가는 순식간에 자기 안방을 내주고 글로벌 무대에서 무참히 짓밟히기 십상이다. 공장 문을 닫는 것은 단지 제품 생산을 중단하는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간 어렵게 이뤄온 기술 개발과 인력 양성의 맥이 끊기고, 전후방 산업 생태계도 연쇄 타격을 입는다는 뜻이다. 제조업을 포기한 대가가 얼마나 쓰라린지는 미국이 보여주고 있다. 근현대 글로벌 산업의 헤게모니는 영국에서 미국을 거쳐 1980년대 일본, 2000년대 중국으로 이동했다. 40년 전에 제조업 주권을 넘겨준 미국은 이제야 뒤늦게 조선, 섬유, 철강 등 전통산업 재건을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받쳐줄 생산 인프라가 사라진 지 오래고, 수십 년 전 공장에서 일했던 근로자들은 너무 나이가 들어 일터를 떠났다. 특히 지나치게 올라버린 인건비가 발목을 단단히 잡는다. 미국 본토에서 아이폰을 생산하겠다는 트럼프의 야심 찬 구상을 월가는 “허구적인 얘기”라고 일축한다. 한 대에 500만 원이 넘는 스마트폰을 누가 사겠냐는 것이다.AI 시대일수록 제조업 기반 지켜내야 많은 국가가 제조업을 지키려고 분투하는 것은 반드시 양질의 일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동안 쌓아올린 제조업 기반이 더 발전된 산업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될 수 있어서다. 한국이 1960년대 가발, 섬유로 시작해 중공업, 자동차, 반도체 등 고부가 첨단 업종으로 주력 산업을 계속 진화시킬 수 있었던 것도 기존 분야에서 신산업의 싹을 지속 발굴한 덕분이다. 요즘 테크업계에선 소버린 인공지능(AI)이 화두다. AI 기술이 우리 산업에 만개하기 위해서는 그 토대가 되는 뿌리산업부터가 흔들림 없이 중심을 잡아줘야 한다. 새 정부도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각오로 선대가 피땀 흘려 이룬 산업 포트폴리오를 지켜내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 이재명 정부는 성장 잠재력 저하, 혁신 기업의 부재 등 한국 경제의 고질병을 치유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를 위한 방편으로 인공지능(AI)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약속한 바 있다. 이정동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AI 기술 자체를 발전시키는 것보다 AI를 각 산업 분야에서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우선”이라며 “한국의 풍부한 산업 기반에 AI를 접목하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다”고 말했다. 》“인공지능(AI) 기술 고도화보다 중요한 것은 AI를 각 산업에 잘 스며들게 하는 것입니다.”이정동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교수는“정책의 방점을 ‘AI의 발전’이 아니라 ‘AI의 활용’에 찍어야 한다”며 “한국의 넓은 산업 포트폴리오에 AI를 접목하고 기초과학에 투자하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고 강조했다.이 교수는 서울대 공과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에서 기술경영경제정책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축적의 시간’과 ‘최초의 질문’ 등 저서를 통해 한국 산업 혁신의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경제과학특별보좌관을 지내기도 했다.―새 정부가 펴야 하는 산업 및 과학기술 정책의 방향성은 무엇인가“‘창조적 파괴’가 정책의 근간이 돼야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시도, 새로운 기업이 생겨나고 낡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산업이 ‘새살’로 바뀌는 역동적인 환경을 산업 생태계에 조성해야 한다. 새로운 산업이 성장하는 과정은 인내의 시간이다. 내가 지금 씨를 뿌려서 후임자, 또 그 후임자 대에서 성과를 낸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장기 정책과 단기 정책을 정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당장 우리 경제를 어떻게 안정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건 단기 정책이고, 성장 잠재력을 어떻게 키울 것이냐를 고민하는 것이 장기 정책이다. 예를 들면 통상 이슈에서 ‘당장 협상을 잘해서 관세를 얼마나 깎느냐’의 문제는 단기 이슈다. ‘어떻게 하면 근본적으로 산업 경쟁력을 강화해 협상 테이블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겠느냐’는 장기 이슈다. 단기 이슈와 장기 이슈가 한 테이블에 올라가면 국정 최고책임자는 단기 이슈에 먼저 손이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소나기부터 피하고 보자’는 생각이 산업을 망친다. 꼬리가 머리를 흔들면 안 된다.”―단임제 정부라면 눈앞의 일부터 챙기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리더의 마인드’가 필요하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돌 하나 더 놓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정책을 펴야 한다. 일본은 ‘잃어버린 30년’ 동안 크고 작은 부양책을 20번 넘게 썼다. 그동안 일본의 산업 근간이 망가졌다. 비록 (대통령 임기가) 5년밖에 안 되더라도 50년 앞을 내다보고 돌을 놓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윤석열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의 여파는 어떠한가.“비유하자면 누군가 ‘한국의 성장 잠재력을 잘라라. 아킬레스건을 몇 가지 알려 줄테니 정확하게 수술해라’라고 지령을 내린 것처럼 정밀타격을 줬다. 예산삭감 이후 재계약이 안 된 ‘포닥(박사 후 연구원)’ 숫자가 집계조차 되지 않는다. 정부 출연 연구소에서도 이들을 받아주지 못하는 상황이다. 지금 와서 예산을 복구해도 무용지물이다. 공장은 반년 정도 스위치를 껐다가 켜도 다시 바로 가동할 수 있지만 연구는 다르다. 완전 ‘생짜’로 다시 해야 된다.”―중국의 산업,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파르다.“중국은 장기 성장 정책을 세우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왔다. 전략 산업을 확실하게 지정하고 충분한 인센티브를 부여해 자원이 몰리도록 해준 것이다. 그 결과 중국은 이제 블랙홀처럼 주변국의 산업 생태계를 빨아들이고 있다.”―오랜 기간 동안 한국에서 이렇다할 혁신기업이 배출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한국 기업들 중엔 ‘스케일업(Scale up)’하는 기업이 전혀 없다. 작은 성과에서 시작해 비용을 투자하고 성공과 실패의 과정을 거쳐 성과를 점점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 스케일업이다. 9999번 실패하더라도 1번 성공하면 결실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선 실패를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 실패는 곧 책임소재와 비용의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기업일수록 더 심하다. 같은 이유로 정부의 연구개발 사업의 성공률은 비정상적으로 높다. 도전성이 있는 연구가 아니라 성공이 보장된 연구만 하기 때문이다.”―한국의 기업가 정신이 퇴보하고 있다고 보나.“주가는 미래 성장 잠재력의 합계다. 지금 돈을 못 벌더라도 도전적으로 시도를 하고 있을 때 주가가 올라간다. 근데 우리 기업들을 보면 장부 가격과 주가 차이가 크지 않다. 시장이 잠재력을 크게 보지 않는다는 의미다. IMF의 영향일지도 모르겠지만 점점 기업의 의사결정이 단기화되고 수익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기업가의 시대에서 최고재무책임자(CFO)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한국 산업이 전반적으로 보수화됐다.”―벤처캐피털(VC)과 금융회사들도 제 역할을 못하고 있나.“최근 통계를 살펴보면 VC 투자는 초기 벤처가 아니라 거의 성공한, 또는 성장이 보장된 벤처에만 투자하고 있다. 그건 벤처가 아니다. 벤처 투자는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기업이라도 가능성을 보고 투자해 결실을 얻는 것이다. 금융권도 마찬가지다. 사업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갖고 있는 아이디어의 가능성을 가지고 돈을 빌리는 게 아니라 자기 아파트를 맡기고 돈을 빌려야 하는 현실이다. 은행의 존재 이유가 없다.”―혁신기업을 만들어내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대체 불가능한 것을 찾아나서야 한다. 우리가 1번부터 20번까지 하고 있는데, 글로벌 기업들은 1번부터 100번까지 하고 있다 가정해 보자. 이 상황에서 글로벌 주도권을 잡으려면 101번, 102번이 뭔지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다들 21∼100번 중에서 찾고 있다.101, 102번이 무엇일지는 우리도 모르고 글로벌 기업도 모른다. 이럴 때일수록 기초과학에 투자해 예상치 못한 발전의 씨앗들을 키워야 한다. 우리가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없다 해도 그렇게 허접한 나라가 아니다. 특허 개수로는 세계 4, 5위권, 논문은 10위 권이다. 결정적으로 한국은 앞선 세대의 피와 땀으로 만든 넓은 산업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다. 포트폴리오가 넓다는 건 우리가 각기 다른 종류의 기술을 가지고 있고 또 앞으로 새 기술이 생길 가능성도 많다는 의미다. 이럴 때일수록 기초과학이라는 씨앗들을 심을 필요가 있다.”―산업 혁신을 위해 정부나 정치권은 무엇을 해야 하나“혁신과 관련해서는 정부보다 국회가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 절차에서 합의를 이루라고 만든 공간이 국회인데 막상 국회에서는 그런 논의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 혁신이 생기려면 창조적 파괴가 계속 일어나야 한다. 규제완화 등을 통해 창조의 길을 터주는 것은 물론, 파괴되어 밀려나는 분야의 사람들이 새로운 길을 찾도록 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단기적으로는 밀려나는 사람들의 생활에 문제가 없도록 보살피는 한편 장기적으로는 재교육을 통해 일선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돕는 게 필요하다. 이 매커니즘 역시 국회가 앞장서서 만들어야 한다.” ―한국은 해외 인재를 데려오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턱을 더 낮춰야 한다. 지금 서울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말레이시아, 인도 등 국가 출신 학생들만 해도 정말 똑똑하다. 근데 한국에서 취직을 못 한다.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글로벌 인재 허브를 자임할 정도로 생각을 바꿔서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이공계 학생들의 의대 집중 현상은 어떻게 해소해야 하나.“이공계의 성공 사례를 더 많이 보여주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러려면 새 대통령부터 더욱 과학자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AI 기술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정부 정책은 무엇인가.“AI의 속성은 과거 철도, 전기 등과 같다. 기술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 기술이 각 산업에 침투해 산업의 구조 자체를 바꾼다는 게 핵심이다. AI 시대에 선진국이 되려면 AI 기술 자체를 고도화하는 것보다 AI가 각 산업 분야에 빨리 스며들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정책의 방점을 ‘AI의 발전’이 아니라 ‘AI의 활용’에 찍어야 한다. ‘AI 기술을 최고로 만들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정책은 잘못됐다는 의미다. AI 기술이 극도로 고도화돼도 일선 산업 생태계가 AI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AI 전문가에게 바이오를 가르치는 게 빠르겠나, 아니면 바이오 전문가가 AI를 배우는 게 빠르겠나. AI 자체의 발전을 주장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구축해 놓은 넓은 산업의 포트폴리오 안에서 AI를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를 고민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면 그 어떤 나라보다 새로운 걸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력이 높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생각한다.”―새 정부에게 바라는 모습은.“매번 정부가 기업들을 불러다 회의를 한다. 만약 워싱턴에서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을 불러 모으면 오나? 정부는 정부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기초 과학 발전과 같이 나중에 기업이 가져다 쓸 씨앗을 심는 것, 차마 기업이 신경쓰지 못하는 영역을 먼저 나서 열심히 해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박종민 기자 blick@donga.com}

“인공지능(AI) 기술 고도화보다 중요한 것은 AI를 각 산업에 잘 스며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정동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교수는 “정책의 방점을 ‘AI의 발전’이 아니라 ‘AI의 활용’에 찍어야 한다”며 “한국의 넓은 산업 포트폴리오에 AI를 접목하고 기초과학에 투자하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서울대 공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에서 기술경영경제정책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축적의 시간’과 ‘최초의 질문’ 등 저서를 통해 한국 산업 혁신의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문재인 정부에서 대통령 경제과학특별보좌관을 지내기도 했다. ―새 정부가 펴야 하는 산업 및 과학기술 정책의 방향성은 무엇인가. “‘창조적 파괴’가 정책의 근간이 돼야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 기업이 생겨나고 낡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산업이 ‘새살’로 바뀌는 역동적인 환경을 산업 생태계에 조성해야 한다. 새 산업이 성장하는 과정은 인내의 시간이다. 내가 지금 씨를 뿌려서 후임자, 또 그 후임자 대에서 성과를 낸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하지만 ‘소나기부터 피하고 보자’는 생각을 하면 산업을 망친다.” ―단임제 정부라면 눈앞의 일부터 챙기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리더의 마인드’가 필요하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돌 하나 더 놓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정책을 펴야 한다. 일본은 ‘잃어버린 30년’ 동안 크고 작은 부양책을 20번 넘게 썼다. 그동안 일본의 산업 근간이 망가졌다. 비록 (대통령 임기가) 5년밖에 안 되더라도 50년 앞을 내다보고 돌을 놓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윤석열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의 여파는 어떠한가. “비유하자면 누군가 ‘한국의 성장 잠재력을 잘라라. 아킬레스건을 알려줄 테니 정확하게 수술해라’라고 지령을 내린 것처럼 정밀 타격을 줬다. 예산 삭감 이후 재계약이 안 된 ‘포닥(박사 후 연구원)’ 수가 집계조차 되지 않는다. 지금 와서 예산을 복구해도 무용지물이다. 공장은 반년 정도 스위치를 껐다가 켜도 다시 바로 가동할 수 있지만 연구는 다르다. 완전 ‘생짜’로 다시 해야 된다.” ―중국의 산업 기술 발전이 가파르다. “중국은 장기 성장 정책을 세우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왔다. 전략 산업을 확실하게 지정하고 충분한 인센티브를 부여했다. 그 결과 중국은 이제 블랙홀처럼 주변국의 산업 생태계를 빨아들이고 있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혁신기업이 배출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 기업들 중엔 ‘스케일업(Scale up)’하는 기업이 없다. 작은 성과에서 시작해 비용을 투자하고 성공과 실패의 과정을 거쳐 성과를 점점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 스케일업이다. 9999번 실패하더라도 1번 성공하면 결실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실패를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 실패는 곧 책임 소재와 비용의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기업일수록 더 심하다.” ―한국의 기업가 정신이 퇴보하고 있다고 보나. “외환위기 영향일지 모르겠지만 점점 기업의 의사결정이 단기화되고 수익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기업가의 시대에서 최고재무책임자(CFO)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한국 산업이 전반적으로 보수화됐다.” ―벤처캐피털(VC)과 금융회사들도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나. “최근 통계를 살펴보면 VC 투자는 초기 벤처가 아니라 거의 성공한, 또는 성장이 보장된 벤처에만 투자하고 있다. 그건 벤처가 아니다.” ―혁신기업을 만들어 내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대체 불가능한 것을 찾아 나서야 한다. 우리가 1번부터 20번까지 하고 있는데, 글로벌 기업들은 1번부터 100번까지 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상황에서 글로벌 주도권을 잡으려면 101번, 102번이 뭔지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다들 21∼100번 중에서 찾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기초과학에 투자해 예상치 못한 발전의 씨앗들을 키워야 한다. 한국은 앞선 세대의 피와 땀으로 만든 넓은 산업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다. 포트폴리오가 넓다는 건 앞으로 새 기술이 생길 가능성도 많다는 의미다.” ―산업 혁신을 위해 정부나 정치권은 무엇을 해야 하나. “혁신과 관련해서는 정부보다 국회가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 절차에서 합의를 이루라고 만든 공간이 국회인데 막상 그런 논의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 혁신이 생기려면 창조적 파괴가 계속 일어나야 한다. 규제 완화 등을 통해 창조의 길을 터주는 것은 물론이고 그로 인해 밀려나는 사람들이 새 길을 찾도록 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AI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정책은 무엇인가. “AI의 속성은 과거 철도, 전기 등과 같다. 기술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 기술이 각 산업에 침투해 산업의 구도 전체를 바꾼다는 게 핵심이다. AI 시대에 선진국이 되려면 AI 기술 자체를 고도화하는 것보다 AI가 각 산업 분야에 빨리 스며들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구축해 놓은 넓은 산업의 포트폴리오 안에서 AI를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를 고민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면 그 어떤 나라보다 새로운 걸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력이 높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생각한다.” ―새 정부에 바라는 모습은…. “매번 정부가 기업들을 불러다 회의를 한다. 만약 워싱턴에서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을 불러 모으면 그들이 오나? 정부는 정부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기초과학 발전과 같이 나중에 기업이 가져다 쓸 씨앗을 심는 것, 차마 기업이 신경 쓰지 못하는 영역을 먼저 나서서 열심히 해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박종민 기자 blick@donga.com}

요즘 테크업계에서는 ‘에이전틱 인공지능(AI)’이 최대 화두다. 에이전트(Agent·대리인)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사람을 대신해 일을 수행하는 자’다. 지금까지 생성형 AI는 세밀하고 구체적인 작업 지시를 내려야 텍스트나 이미지 같은 결과물을 생산했지만, 에이전틱 AI는 실제 사람을 대신해 스스로 상황을 분석하고 출장 일정 수립이나 결제·예약 같은 여러 단계의 업무를 한 번에 수행한다. 기존 AI가 시키는 것만 하는 소극적 두뇌라면 이제 여기에 눈·귀·손·발이 붙어 자율성과 실행력이 가미된 셈이다. 요즘 AI 기술은 인지→생성→추론형 등으로 숨 가쁘게 진화하면서 해당 업계에 몸담은 사람들조차 그 변화상을 따라가기 벅찰 지경이다. 며칠 전 만난 한 AI 전문가는 “챗GPT 등장 이후 지금까지 3년보다 최근 3개월 사이에 더 눈부신 발전이 있었다”고 했다.전 세계 생산성 혁명 일으키는 AI 기술 AI를 어떻게 실무에 활용할 수 있느냐는 이제 모든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문제가 됐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인간과 AI 에이전트가 함께 일하는 ‘하이브리드팀’이 기업 조직문화의 대세로 자리 잡게 될 것이라면서, 궁극에는 AI가 모든 실무를 담당하고 인간은 방향 제시와 최종 검수 정도만 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 먼 얘기도 아니다. 앞으로 2∼5년 안에 대부분의 조직이 이런 쪽으로 방향 전환을 시작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한다. 이미 많은 국내외 기업들은 AI를 현업에 충분히 활용하며 비용 절감과 생산성 향상 효과를 보고 있다. 반복적 일상 업무를 넘어 시장 분석, 리스크 관리, 경영 전략 수립 같은 핵심 업무도 맡기는 수준이다. 물론 일각에선 마약·무기 제조 등 범죄에 악용하는 행위를 막기 위해 AI 산업을 강력히 규제해야 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또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고 디지털 빈부 격차를 확대할 수 있으며, 환각 등 오작동이 사회 혼란을 낳을 것이라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이런 이유를 내세워 AI 활용과 투자에 강한 족쇄를 채우기에는 우리가 잃는 기회비용이 너무나 많다. AI가 고도화될수록 기업은 적은 비용을 투입하고도 많은 수확을 하는 ‘생산성 혁명’을 경험할 수 있다. AI는 월급을 올려 달라 하지도 않고, 갑자기 파업이나 퇴사도 하지 않는다. 주 52시간제를 지킬 필요도 없다.저성장 韓경제 반등 위한 마지막 해법 지금 한국경제는 거의 수직으로 가라앉는 중이다. 인구 감소와 산업 경쟁력 상실, 높아진 무역 장벽과 중국의 저가 공세, 정부·정치권의 혁신기업 씨말리기 등 어느 하나 고질적이거나 구조적이지 않은 문제가 없다. 구조적 문제라는 것은 단지 경기가 반짝 좋아진다고 해서, 또는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금세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요즘 만나는 산업계 리더들은 앞으로 10∼20년 후 한국의 모습이 두렵다는 말을 많이 한다. 미래가 두려운 나라엔 출산 기피와 소비 침체, 극한 갈등 같은 사회 불안 요인이 쌓여갈 수밖에 없다. 해법이 쉽게 보이지 않는 상황이지만 어디선가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세계 경제의 전환점은 흔히 ‘O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파괴적 혁신에서 비롯됐다. 많은 전문가들은 외환위기 때 IT 혁명에 올라타며 위기를 극복했듯이 이번에도 AI의 물결을 주도하며 저성장의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 한국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은 우리 경제가 AI를 충분히 활용해 시너지를 낸다면 생산성을 최대 3%, 국내총생산(GDP)은 13% 높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우리에게 강점이 있는 제조업 곳곳에 AI를 스며들게 해서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신규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할 수 있느냐에 앞으로 대한민국호(號)의 생사가 달려 있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폭스바겐이 소시지를 만들어 판다는 것은 자동차 마니아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한 얘기다. 1970년대 공장 근로자들의 급식용으로 생산한 물량을 시중에도 판매하기 시작한 게 벌써 50년이 넘었다. 소시지에 대한 회사의 애정과 자부심은 본업인 자동차에 필적한다. 소시지는 포장지에 ‘폭스바겐의 오리지널 부품’이라고 적혀 있고 실제 자동차 부품처럼 고유 시리얼 번호도 부여받았다. 폭스바겐은 이와 곁들일 케첩도 함께 만들어 파는데, 무슨 자동차 첨단기술이라도 되는 양 이들 식품의 레시피를 극비에 부치고 있다. 소시지는 인기가 좋아 작년 한 해만 855만 개가 팔렸다. 폭스바겐그룹의 전체 자동차 판매량(약 900만 대)을 곧 추월할 기세다. 물론 단가 차이가 엄청나기 때문에 두 제품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긴 무리가 있다. 하지만 독일 언론들은 이를 자국 자동차 산업의 위기 신호라고 여긴다. 지난해 폭스바겐의 영업이익과 차량 판매량은 각각 15%, 3.5% 줄었다. 주업인 자동차 사업이 부진하자, 부업인 식품업과 방산업 등에서 돌파구를 모색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폭스바겐의 실적 악화는 지역 경제로 전염되고 있다. 계열사 아우디 공장이 있는 남부 잉골슈타트는 시(市)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모회사의 사세가 기울면서 빚더미에 빠졌다. 주민들은 한때 부유했던 도시를 이제 자조적으로 ‘독일의 디트로이트’라고 부른다.장기침체의 수렁에 빠진 독일 경제 폭스바겐의 문제는 수렁에 빠진 독일 경제의 상징적인 단면이다. 독일은 최근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충격적인 성적을 냈다. ‘유럽 경제의 기관차’로 불리던 나라가 이렇게 큰 어려움에 빠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리스크 분산’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제조업이 강한 독일의 최대 교역국은 오랫동안 중국이었다. 중국이 고성장하고 독일 제품을 많이 사들였을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이젠 고객에서 경쟁자로 변모하면서 중국 의존도가 높은 독일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에너지 공급은 러시아에 지나치게 기댄 게 화근이 됐다. 독일은 천연가스의 절반 이상을 러시아에서 수입해 왔는데 전쟁 등으로 공급이 끊기면서 에너지 가격이 폭등하고 생산 비용이 치솟는 위기를 겪고 있다.산업구조나 시장환경 한국도 판박이 시대 변화에는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 독일은 기존에 강점이 있던 전통 제조업에만 안주하다가 배터리와 반도체 같은 첨단산업 분야에서 최근 10여 년간 미국과 중국에 철저히 밀렸다. 기술혁신과 산업구조 재편에 소극적인 경향은 최대 경쟁력이었던 자동차 분야에서 가장 큰 생채기를 냈다. 독일은 그동안 세계를 호령했던 내연기관 차량에만 치중한 나머지 글로벌 시장의 새로운 흐름이 된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개발에서 뒤처졌다. 최근 막강한 기술력으로 무장한 신생 빅테크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휘젓고 있지만, 독일에서는 이에 대항할 만한 기업을 딱히 떠올리기 힘들다. 뿌리 깊은 관료주의와 숨 막히는 규제 환경, 복잡한 행정 절차 역시 독일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다. 지금까지 열거한 독일의 문제는 주어만 한국으로 바꿔도 무방할 만큼 두 나라가 처한 상황이 너무나 유사하다. 높은 수출 의존도와 낮은 에너지 자립도, 제조업 편중, 혁신의 부족, 규제 장벽, 제로에 수렴하는 성장률까지 한국은 독일보다 사정이 나은 구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독일이 탄탄한 펀더멘털을 앞세워 글로벌 금융위기 때 유럽 경제를 떠받치는 구세주로 칭송받던 게 불과 10여 년 전이다. 우리도 세상 흐름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게 있다가는 순식간에 ‘경제 열등생’의 처지로 전락할지 모르는 일이다. 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현기증 나게 쏟아지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무차별 관세 폭탄은 이제 각국이 미국과의 협상에 돌입하는 쪽으로 국면이 전환되고 있다. 하지만 협상의 향방을 예견할 수 없고 향후 불확실성만 증폭되며 시장 충격이 장기화될 우려가 여전하다. 처음에는 그저 엄포인 줄 알았던 고관세 협박도 많은 분야에서 기어코 현실이 됐다. 모두를 파국으로 몰고 갈 ‘경제 핵전쟁’이 눈앞에서 발발하고 있다.모두를 파국으로 몰고 갈 경제 핵전쟁트럼프의 전략은 얼핏 보면 진짜 미치광이처럼 단순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꼼꼼한 계획이 있다. 그는 우선 상대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강력한 ‘선빵’을 날린다. 그리고 반응을 봐가면서 다음 작전을 구사한다. 만일 상대가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일부를 희생양 삼아 2차, 3차 공격을 감행하고, 이 과정을 마치 리얼리티쇼를 하듯 자랑스럽게 기자회견이나 SNS를 통해 공개한다. 아무리 황당한 정책도 진짜 실행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줘 상대의 공포감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의 또 다른 중요한 전략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최종 목표, 즉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이런 모호성과 예측불가능성 때문에 사람들은 이 대환장 관세쇼의 결말을 쉽게 예단하기 힘들다. 트럼프는 고율의 관세 부과와 부과 연기, 추가 관세 같은 중요한 결정을 매일 손바닥 뒤집듯 한다. 관세율 산정 방식도 주먹구구다. 논리적 근거는 빈약하고 인용하는 통계도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 상대가 상식에 입각해 행동하지 않으니 무슨 패를 갖고 있는지, 나중에 어떻게 입장을 바꿀지 도통 예측할 수가 없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은 흔히 바보 같은 상대를 비꼴 때 하는 말인데, 세상에서 가장 힘센 자가 그렇게 나오면 이는 비웃음의 대상이 아닌 공포 그 자체일 뿐이다.앞으로 가능성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미국의 선공에 중국 등 각국의 강력 보복으로 글로벌 무역전쟁이 확대되면 모두가 공멸하는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 100년 전 세계 경제를 쑥대밭으로 만든 대공황식 파국이다. 두 번째로는 관세 전쟁의 부메랑이 미국 경제를 덮치며 트럼프가 민심에 밀려 먼저 백기를 드는 시나리오가 있다. 그러나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은 그 중간 어디쯤일 것이다. 트럼프의 위협과 각국의 협상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동안 미국이 화력을 대중(對中) 전선에 집중하면서 트럼프 1기 때와 비슷한 양상이 전개될 수 있다. 중국의 부상을 꺾으려는 미국과 그 자리를 넘보려는 중국. 두 나라가 적당히 타협하느냐, 정면충돌하느냐는 트럼프 두 번째 임기 4년 내내 글로벌 경제의 가장 큰 리스크로 작용할 것이다.트럼프의 과녁이 중국을 향한다 해도 우리는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 트럼프가 또 마음을 바꾸면서 화살을 우리 쪽으로 겨냥할 가능성이 언제든 열려 있다. 그러나 이처럼 상대 전략을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 조급한 마음에 우리 패를 먼저 내보이며 조아리면 자칫 덤터기를 쓸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트럼프가 지금은 세 보일지 몰라도, 관세 부작용으로 여론 압박이 커지면 아무리 그라고 해도 버틸 방도가 없다. 시간은 오히려 우리 편일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결국 버틸 수 있는 경쟁력 있어야 승리우리는 협상도 협상이지만 스스로를 더 강하게 만드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미중의 강 대 강 대치는 글로벌 공급망과 기술 생태계의 단절을 심화시켜 중국 경제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는 한국 경제에 치명상을 입히게 된다. 어느 한쪽의 선택을 강요받지 않으려면 산업 경쟁력을 부단히 쌓아 올려 핵심 분야의 초격차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 이 전쟁은 어차피 장기전이고, 그 승리는 결국 버티는 자의 차지가 될 것이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우리가 맞는 관세도 문제지만, 중국과 베트남에 대한 고관세가 큰일입니다. 우리 기업이 여러 경로에서 충격을 받을 전망입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시절 금융당국을 이끌었던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초대 금융위원장·76)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가 예상보다 상당히 강하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다만 이번 관세는 조정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 전략 산업을 활용해 협상을 잘해야 한다”면서 “미국과 관세 협상을 잘하기 위해선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신뢰를 받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 이사장은 최근 국내 상황에 대해서는 “정치 안정성이 흔들리면 아무리 밸류업 정책을 한다 해도 소용이 없다”며 “외국 투자자들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최대 요인으로 정치 불안을 꼽는다”고 지적했다. 전 이사장은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미시간주립대 교수,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등을 지낸 ‘글로벌 경제통’이다. 특히 주요국 경제 석학 및 금융계 인사들과 교분이 깊어 해외에서 한국경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진단해 왔다. 다음은 일문일답.》―트럼프 관세 폭탄 강도가 상당하다. “그렇다. 예상보다 강력하다. 일단 직접적인 충격으로는 우리 최대 수출 시장인 대미 수출이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간접적인 충격도 크다. 중국에 대한 관세가 기존 20%를 합해 54%다. 트럼프가 대선 후보 시절 중국에 60%까지 관세를 매기겠다는 말을 했는데 벌써 그 수준에 근접했다. 안 그래도 내수가 둔화된 중국 경제가 더 위축되면 한국의 대중 수출 여력이 더 떨어질 수 있다. 또 중국이 자국에서 안 팔리는 상품을 한국 등에 저가로 밀어내는 행위가 더 거세질 수 있다. 게다가 베트남에 대한 관세율도 매우 높은데 이로 인해 국내 대기업들의 생산 기지가 상당히 큰 피해를 볼 수 있다.” ―정부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지금까지는 국정 공백기였기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와 직접 소통할 기회가 없었지만 이젠 민관정이 한 팀으로 나서야 한다. 트럼프는 딜(협상)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번 관세도 조정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그만큼 우리의 전략 산업을 활용해 협상을 잘해야 한다. 조선업이 좋은 사례다. 미국은 전체적으로 산업 구조가 첨단 기술 쪽으로 옮겨가면서 조선업 같은 전통 제조업이 밀리고 있다. 미국-중국 중심의 수출 시장을 다변화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지금은 정부보다 기업이 먼저 움직이는 상황이다. “미국과 이런 협상을 잘하기 위해선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신뢰받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아무리 우리가 산업 경쟁력이 있다고 해도 안정된 정치 리더십 없이는 어렵다고 본다. 일본을 봐라. 일본은 미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신뢰하는 나라다 보니 우방국들의 군함 건조 분야에서도 앞서가고 있다. 우리 산업이 해외에서 국제 경쟁력을 갖고 장점을 살려 나가려면 정부가 뒤에서 잘 받쳐주고 믿음을 줘야 한다. 또 현대차가 얼마, 삼성이 얼마, 이런 식으로 기업들이 개별적으로 미국에 투자 발표를 하기보다는 정부가 이들을 모아 패키지로 투자 보따리를 꾸려 트럼프 행정부와 협상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트럼프발 관세 폭풍이 1930년대 대공황 때와 비슷하다는 평가도 있다.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우선 미국 우선주의 기조, 관세를 무기로 삼았다는 것이 비슷하다. 다른 점이 더 중요하다. 대공황 때는 미국 경제가 불황에 빠졌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관세라는 충격적 수단을 동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 홀로 호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국 경제가 좋은 상황이라는 게 다르다.” ―그러면 미국은 왜 관세 카드를 들고나온 걸까. “트럼프는 관세로 글로벌 지정학적 구도를 재편하려는 본심을 갖고 있다. 이번 관세는 궁극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1970년대 닉슨 대통령―키신저 국무장관 시절 미국이 중국과 대화를 시작한 진짜 속내는 중국을 자유시장 진영으로 끌어들여 당시 최대 적성국인 소련을 견제하려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1등은 항상 2등만 신경을 쓴다. 이번에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자꾸 러시아 편을 드는 것도 러시아를 통해 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이다. 미국 입장에서 중국이 러시아, 북한, 이란 등과 밀착하는 것은 자신이 의도하는 세계 구도와는 맞지 않는다. 이처럼 미국이 중국을 옥죄면 옥죌수록 중국 경제가 위축되면서 한국이 이중으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이젠 글로벌 경제가 자유무역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건가. “1930년대 대공황은 보호무역주의가 촉발했지만 이후에는 자유무역 기조가 역사의 큰 흐름을 차지했다. 자유무역이 각국의 공동 번영에 기여하고, 보호무역이 결국 모두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동의하는 바다. 지금 트럼프의 보호주의도 오래 못 갈 가능성이 있다. 미국에서 중간선거를 승리한 대통령은 흔치 않다. 트럼프가 의회의 전폭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간이 2년밖에 안 남았을 수도 있다. 한 번의 선거 결과가 역사의 흐름을 바꾸지 못한다. 다만 우리 기업은 자유무역이든 보호무역이든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본연의 힘을 길러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선고 이후 경제 상황을 어떻게 보나. “그동안 헌재 결정이 미뤄져서 리더십 공백이 길어지며 정치 사회적 불안이 커진 게 우리 경제에 안 좋았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제 헌재 결정으로 ‘한 스텝’은 밟은 것이다. 아직 새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계엄 사태로 빚어졌던 전례 없는 혼란 상황이 이제 해결 국면으로 진입하는 것 아닌가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든다.” ―그래도 위기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전례 없이 도전적인 상황인 이유는 국내 여건이 이렇게 어려운 와중에 트럼프발 관세 폭풍이 몰아쳐서 내우외환이 생겼다는 것이다. JP모건 등 일부 투자은행은 이제 우리 성장률을 0%대로 보고 있다. 심지어 역성장 가능성까지도 나오고 있다. 국민과 정치권이 단합해서 극복해야 한다. 과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조기 극복을 할 수 있었던 건, 적어도 극복 과정에서 국민들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번 정치 혼란이 경제에 미친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 “정치적 혼란, 리더십 공백이라는 것이 외부 환경이 급변할 때는 더더욱 심각한 문제가 된다. 트럼프 2기가 들어섰지만 우리는 계엄 사태로 인해 즉각적이고 선제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또 노동-교육 개혁 등 전반적인 개혁 과제의 성과가 미진했다. 증시도 바닥권을 헤맸다. 배당이나 지배구조도 중요하지만 기업 가치나 주가 결정에 가장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정치 환경이다. 정치 체제 안정성이 흔들리면 아무리 밸류업을 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외국 투자자들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최대 요인으로 정치 불안을 꼽는다.” ―경제가 다시 안정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정치권과 국민 모두가 헌재 판단을 우선 겸허하게 수용해야 된다. 그리고 우리가 좀 더 성숙한 민주주의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해외에서는 정치 불안이 나타나고 핵심 산업의 경쟁력도 흔들리는 지금 한국이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고 보고 있다. 내가 평소 교류하는 해외 인사들은 한국의 상황을 매우 진지하게 걱정한다. 국민들의 갈라진 마음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리더십도 필요하다.” ―앞으로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무엇인가. “만일 대통령 파면 이후에도 국론 분열이 심화된다면 국가 신용등급 하락 같은 상황도 올 수 있다. 국가신인도 평가에는 국가부채나 단기외채, 외환보유액 같은 지표도 중요하지만, 큰 틀에서 그 나라의 리더십이 바로 서 있는지, 책임감 있는 정치인이 많이 포진해 있는지 같은 주관적 요인 역시 매우 중요하다. 해외 투자기관과 오랜 접촉을 통해 느껴온 바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 3년을 어떻게 평가하나. “정책 목표는 나름 잘 설정했지만 제대로 실천한 게 없어서 문제였다. 노동 의료 교육 등 구조 개혁으로 잠재성장률을 높이겠다는 건 맞는 방향이지만, 실제로는 반도체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같은 것도 관철시키지 못했다. 경제의 기초체력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데 이런 과도기적 대행 체제 상황에선 추세가 반전되긴 어려울 것이다. 다만 외교적으로 보면 일본과 관계 개선에 나선 것은 대단히 용기 있고 평가받을 만한 일이었다. 다음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지 간에 과거를 딛고 미래를 내다본다는 생각에서 동북아 안보의 버팀목인 일본과의 선린우호 관계를 잘 유지해야 된다.” ―그래도 막판에 연금 개혁에선 진전이 있었다. “이번 모수 개혁은 비록 일부 계층에서 반대하긴 하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성과다. 이번 합의로 국민연금의 운용 규모가 커지게 되면 그만큼 각종 부문에 투자할 수 있는 여력도 커질 수 있다. 이는 금융시장에도 상당히 긍정적인 요소다.” ―우리 경제가 이번 탄핵 사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과거에도 어려운 시기를 많이 겪었지만 우리 경제는 항상 회복력이 강했다. 그 회복력을 이번에 다시 보여주고 선진국으로 거듭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번 탄핵 사태가 이제 국가 경제를 턴어라운드시키고 국민이 단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76)△서울대 경제학과△미국 인디애나대 경영학 박사△미국 미시간주립대 경영학과 교수△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우리금융지주 부회장△초대 금융위원장△국민연금공단 이사장△연세대 경제대학원 석좌교수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그동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관한 칼럼을 여러 건 썼다. 가장 유력한 대권 주자의 기업관(觀)은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문제라서, 마치 직업병처럼 그의 발언에 일일이 귀 기울인 결과다. 그동안 관찰해 온 이 대표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이리저리 애를 쓰는 배트맨이나 카멜레온 같았다. 평소엔 “그럼 그렇지” 하다가도 어느 날은 “진짜 달라졌나” 하는 호기심을 주면서 사람들을 계속 헷갈리게 한다. 이 대표의 그런 변화무쌍한 모습 자체에 그의 본질이 담겨 있다고 본다.통제와 개입으로 혁신기업 만든다는 발상 계엄과 탄핵 때문에 요즘 갑자기 헌법 공부하는 사람이 많아지듯, 필자는 이 대표 덕분에 시장경제의 기본 원리를 새삼 다시 곱씹어 보고 있다. 그가 던진 말에는 전통 주류 경제·경영학으로는 설명하기 어렵고 생소한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상법 개정이나 반도체법에 대한 고집은 강성 지지층에 등 돌리지 못하는 그의 처지를 반영한 것이라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얼마 전 ‘K엔비디아 발언’은 이 대표가 기업을 평소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지 너무 날것 그대로를 보여준 느낌이라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위장과 표변의 대명사인 그가 자신도 모르게 허연 맨살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 대표는 엔비디아 같은 기업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답은 제시하지 않았다. 단지 그런 기업이 생기면 그 과실을 국민과 나누겠다고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한마디만으로도 이 대표가 구상하는 ‘혁신기업의 레시피’를 대략 가늠해 볼 수 있다. 국민이 공동으로 투자해 대표기업을 육성하고 그로 인해 발생할 이익을 나눈다는 발상에는 기업가 정신의 모태인 자율 경영과 성과 보상의 원칙이 살아 숨 쉴 공간이 없다. 그보다는 통제와 개입, 이익 환수처럼 혁신의 씨앗을 말려 죽이는 독소만이 담겨 있을 뿐이다. 엔비디아 같은 기업은 기업가의 창의와 야수 같은 열정, 우수한 인재, 활발한 벤처 생태계 등 모든 조건이 한데 어우러져야 겨우 하나 생길까 말까 한다. 이 대표가 들고 있는 재료로 혁신기업을 빚어내겠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기적의 요리법’에 가깝다. 이 대표는 요즘 대기업 총수나 금융계, 경제 단체, 글로벌 석학 등으로 만남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 또 기회 될 때마다 “기업이 잘돼야 나라가 잘된다” “민주당은 원래 경제 중심 정당” 같은 말을 쏟아내고, 이는 ‘친기업 행보’ ‘중도층 잡기’라는 제목이 달려 언론에 소개된다. 그러나 이 대표 본인이 바라는 ‘우클릭’은 딱 거기까지다. 실제로는 반도체 연구개발직만이라도 ‘주 52시간 근무 예외’를 적용해 글로벌 경쟁의 족쇄를 풀어주는 데 반대하고, 모든 기업들이 우려하는 상법 개정을 강행해 기업가의 선제적 투자를 가로막고 있다. 애초에 기득권과 이익단체 눈치를 보며 미래 산업을 짓밟는 규제를 잔뜩 양산한 것도 전 정부의 여당인 민주당이었다.코리아 디스카운트 되레 악화시킬 우려 이 대표는 좌우를 오가는 오락가락 발언 와중에 종종 호언장담도 서슴지 않는다. 그는 최근 “민주당이 집권하면 아무것도 안 해도 코스피가 3,000은 넘을 것”이라고 했다. 이 대표의 바람대로 엔비디아 같은 기업이 도깨비 방망이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져 국민들이 투자 수익도 챙기고 세금에서 해방되는 만화 같은 세상이 오면 코스피는 3,000이 아니라 그 이상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여준 그의 본모습이 집권 후 현실이 된다면 우리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 심각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경험해야 할지 모른다. 야당 대표가 이런저런 정책 이슈를 선제적으로 제시하고 공론화시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그 방향을 손질하고 또 일관성도 조금 갖췄으면 한다. 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최고 권력자가 등장하는 행사는 그 나라의 지향점을 말해 준다. 그 집단이 중국 같은 권위주의 체제 국가라면 더욱 그렇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며칠 전 소집한 좌담회에는 딥시크 창업자 량원펑과 알리바바의 마윈, 화웨이의 런정페이, 비야디 회장 왕촨푸 등이 모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죄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 첨단 정보기술(IT) 기업 총수라는 점. 값싸고도 품질 좋은 상품과 서비스로 서방의 공포심을 자극하면서, 미국과 기술패권 경쟁의 선봉에 선 인물들이었다. 갈수록 독해지는 미국의 대중 압박과 고립 작전을 견뎌내고 14억 인구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읽혔다.최강대국도 미래 생존 위해 분투하는데 국가 차원의 ‘생존 본능’이 감지되는 모멘트는 최근 미국서도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전쟁 참화에 시달리는 우크라이나를 쥐어짜서 안보 보장을 대가로 희토류의 50%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중국이 전 세계 희토류 공급망을 독차지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방국의 약점을 들춰내 자원 확보를 노리는 약탈적인 행보에 나선 것이다. 트럼프는 환경 보존이라는 인류 공통의 희망을 배신하고 자국 에너지 공급 안정화를 위해 화석연료 개발도 맹추진 중이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흠결 많은 권력자란 건 누구나 안다. 자국이나 정권의 이익을 위해 국제사회 규범을 수시로 무시하고, 지도자의 품격을 지키기는커녕 이웃 나라를 상대로 조폭 같은 협박이나 인권유린을 일삼는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이들이 현존하는 위협에 맞서 국가 미래를 먼저 생각하는 마인드를 갖췄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지난달 취임식 때 일론 머스크와 제프 베이조스, 마크 저커버그 같은 첨단 산업의 거물들을 연단 제일 앞자리에 세웠다. 건국 100주년인 2049년 미국을 능가하는 경제대국이 돼보겠다는 중국에 “감히 꿈도 꾸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시진핑은 이에 맞서 수만 명의 디지털 전사를 집중 양성해 중국 중심의 AI 생태계를 완성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자국 이익을 최우선으로 수호하겠다는 두 권력자의 다짐은 이제 글로벌 사회가 과거처럼 상호 공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홀로 각자도생해야 살아남는 시대라는 점을 간파한 결과다.우리는 무기력증 언제 벗어던질 건가 이처럼 세계 최강대국들조차 자기 먹고사는 문제를 챙기기 바쁜 와중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돌아볼 수밖에 없다. 성장률은 경제 규모가 몇 배는 더 큰 미국에 추월당한 지 오래고, 정치권이 혁신기업의 싹을 말려 죽이는 동안 투자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한국을 탈출하고 있다. 복지부동에 빠져 맹탕 정책만 양산하는 탄핵 정부 공무원들, 기업가정신을 잃고 현상 유지에 급급한 창업 3∼4세대 대기업들….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트럼프의 관세폭탄이나 딥시크의 공습이 아니라 이런 무기력함을 어느샌가 정상으로 여기고 위기 극복의 의욕마저 꺾여버린 모습이 아닌가 싶다. 트럼프와 시진핑의 지독한 생존 의지는 안타깝게도 요즘 많은 한국인들이 부러워하는 지도자의 면모이기도 하다. 미국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은 전기 충격에도 속수무책인 경험을 반복한 개들은 나중에 피할 방법이 생겨도 탈출 의지를 상실한다는 실험 결과를 통해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동안 ‘넛크래커에 끼인 호두’,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한국 경제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표현이 많았는데, 여기에 ‘셀리그먼의 강아지’가 추가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이다. 모두가 살기 위해 앞만 보고 내달리는 전쟁터에서 우리는 언제까지 계속 이렇게 엉거주춤 헤매고만 있을 건가. 답은 이미 나와 있는데 절박함이 아직도 모자란 건지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얼마 전 만난 한 장관급 인사가 “요즘 젊은이들은 편한 것만 하려고 든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처음부터 좋은 직장만 찾으려 하니 나라 미래가 걱정”이라고 말했을 때, 이는 공직자로서 매우 위험한 인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적인 자리의 푸념이라 넘기기엔, 관료들의 이런 사고가 정부의 국정 철학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혹여나 이번 명절 때 취업준비생 조카에게 비슷한 훈수를 뒀다면 괜한 꼰대 짓을 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봐야 한다. 우리 사회가 청년들로 하여금 성에 안 차는 직장이라도 빨리 잡느니 차라리 장기 취준생으로 남도록 부추기고 있어서다.경직된 고용 시장이 경제 생산성 저해 평균 연봉이 9000만 원에 이르는 현대제철 노조가 최근 총파업을 예고했다. 이 회사는 중국의 저가 공세로 영업익이 60% 급감하며 실적 한파를 겪고 있지만 노조는 아랑곳하지 않고 역대 최대 성과급을 요구하고 있다. 연봉 1억2000만 원 선인 KB국민은행은 노조가 성과급을 300% 올려 달라며 파업 목전까지 갔다가 250% 인상으로 겨우 봉합했다. 대기업과 금융사 노조의 이런 모습은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된다. 강력한 투쟁력과 파업권을 무기로 실적 악화나 이자 장사 논란에도 매년 엄청난 임금 인상을 관철시켜 왔다. 그 결과 국내 대기업의 대졸 초임은 우리보다 경제 규모가 몇 배가 큰 일본보다도 60%나 높은 수준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노동 계급은 철옹성과 같다. 전체 근로자의 10%에 불과한 이들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구직자들이 온 힘을 다하지만 쉽게 넘볼 수 없다. 작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직장을 옮긴 전체 중소기업 근로자의 12%만이 대기업에 입성했다. 평균 연봉이 1억 원에 육박하는 현대차 생산직은 재작년 10년 만에 공채에 나섰는데 수만 명의 지원자가 폭주해 서버가 다운됐다. 대기업 취업 문이 바늘구멍인 이유는 일단 한 번 뽑고 나면 해고가 어렵고 갈수록 연봉이 자동적으로 올라가는 고비용 구조라 기업들이 채용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대-중소기업 격차와 노동 시장의 이중구조가 이처럼 견고한 상황에서 청년들이 별 볼 일 없는 직장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느니, 장기 백수로 남더라도 대기업의 문을 계속 두드려 보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다. 정규직 과보호와 낡은 호봉제를 깨는 노동 개혁은 우리 경제의 여러 고질적인 문제를 동시에 개선시키는 ‘만능 키’다. 우선 인건비 부담이 줄어들며 기업들이 청년 채용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갈수록 잠재성장률이 떨어지는 한국은 그간 질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쉬고 있던 인력을 활용해 경제 역동성을 높일 수 있다. 비정규직→정규직, 중소기업→대기업의 ‘일자리 사다리’를 복원하면 중소기업 구인난을 완화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소수에게만 허락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과도한 입시 경쟁이나 저출산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된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과보호를 풀면 우리 경제 생산성이 5% 증가할 것이라고 추정했다.진정성 있다면 국가 위한 결단 내려야 요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실용과 성장, 안보 같은 키워드를 내세워 중도층 표심 잡기에 나서고 있다. 희대의 정권 자멸에도 자기 지지율이 박스권에 갇히자 어떻게든 외연을 확장해 조만간 벌어질 수 있는 조기 대선에서 대세론을 굳히려는 포석이다. 하지만 이 대표 특유의 캐릭터 탓에 아직은 그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쯤에서 자신의 주된 지지 세력인 귀족 노조와 결별하고 국민 전체를 위한 개혁에 나서자는 파격을 보여주면 어떨까. 보여주기식 말보다는 구체적인 행동, 사사로운 이득보다 국가 전체를 위한 결단을 보여주는 정치에 우리는 목말라 있다. 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요즘 미국 소매업체 월마트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티셔츠가 있다. 작년 독립기념일(7월 4일)에 출시된 이 옷은 가슴팍에 ‘AMERICAN MADE’(미국산)라는 글자가 박혀 있고 아랫단엔 작은 성조기 문양이 들어가 있다. 얼핏 보면 애국심에 호소하는 여느 ‘국뽕’ 상품과 다를 게 없는데 특이한 점이 두 가지 있다. 우선 가격이 12.98달러(약 1만9000원)로 매우 착하다. 또 방적 염색 봉제 등 모든 생산 과정이 실제 본토에서 이뤄졌다. 면화의 원산지도 물론 미국이다.자국 공급망 재건으로 제조업 부흥 시도 티셔츠는 ‘아메리칸 자이언트’라는 업체의 제품이다. 베이어드 윈스럽 대표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떠올리며 이 회사를 창업(2011년)했다고 한다. 그가 유년기를 보낸 1970년대만 해도 미국의 의류 산업은 제법 경쟁력이 높았고 거리엔 품질 좋은 국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흔했다. 하지만 이후 세계화가 진행되고 인건비가 싼 중국 등 해외로 생산기지가 옮겨가며 순식간에 수입 의류가 미국 시장을 점령했다. 윈스럽은 타임머신을 되돌려 아직도 미국이 질 좋고 저렴한 옷을 생산할 수 있다는 걸 입증하고자 했다. 이 회사는 미국 남부 농장들과 파트너십을 맺어 원재료를 저렴한 가격에 조달하고 공장 자동화로 생산 비용도 줄였다. 결정적으로 월마트와 대규모 공급 계약으로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한 게 13달러 티셔츠가 가능할 수 있었던 비결이 됐다. 물론 이런 제품의 성공 사례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여전히 미국에서 팔리는 옷의 95% 이상은 해외에서 생산된 수입품이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아메리칸 자이언트의 ‘작은 실험’에 미국은 적지 않게 고무돼 있다.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순전히 자국 내 공급망으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줬고, 그로 인해 산업 기반을 지키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표본까지 제시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공약대로 수입품 관세를 대거 인상할 경우 ‘메이드 인 아메리카’의 경쟁력은 더욱 배가될 수 있다. 기업들은 굳이 애국심에 호소하지 않고도 외국산 못지않은 가성비의 제품을 소비자에게 내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국 내에서 모든 생산 과정을 진행하려는 기업들의 행보는 차기 행정부의 정책 기조와도 100% 부합한다. 관세뿐 아니라 앞으로 또 어떤 인센티브가 제2의 아메리칸 자이언트를 탄생시킬지 모를 일이다.미중發 통상 악재, 한국엔 산업 전체 위기 제조업 부흥에 대한 미국의 기대감은 역으로 한국에는 상당한 도전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미국이 드높은 관세 장벽에 더해 이전보다 더 촘촘한 공급망으로 철벽을 치면 우리 기업이 거대한 북미 시장을 비집고 들어갈 틈은 갈수록 좁아지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은 최대 시장인 중국 수출의 둔화로 고전하고 있지만, 지난해 미국을 상대로는 사상 최대 흑자를 내며 무역 전선에서 선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급변하고 있다. 트럼프는 보호무역과 리쇼어링(해외 진출 기업의 본국 회귀) 정책만으로도 모자라서, 자국 내 생산이 어려운 핵심 산업은 한국 같은 동맹국을 쥐어짜서 미국 땅에 공장을 지으라고 압박할 태세다.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는 우리로서는 이런 요구를 대놓고 무시할 수 없는 처지다. 그는 취임도 하기 전에 이웃나라에 영토를 내놓으라는 협박마저 불사하는 인물이다. 우리 기업은 이런 미국발 악재에 더해 중국의 저가 상품 밀어내기로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고 있다. 중국산의 쓰나미에 내수 시장이 잠식되고 미국 등 해외 시장의 판로마저 막힌다면 단순한 통상 위기를 넘어 자칫 산업 기반의 붕괴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까지 올 수도 있다. 이처럼 대외 환경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데 이를 버텨내야 하는 나라 꼴은 여전히 엉망진창이다. 기업들로서는 그 어느 해보다 불안한 한 해의 시작이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