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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천광암 논설주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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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6~2025-12-06
칼럼100%
  • [천광암 칼럼]‘나쁜 고환율’… 황당한 서학개미 탓

    “젊은 분들이 하도 해외 투자를 많이 해서 ‘왜 이렇게 많이 하냐’고 물어봤더니… 답이 ‘쿨하잖아요’ 이렇게 딱 나오더라고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 27일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환율이 1500원 가까이 고공행진을 하는 원인은 “한미 금리 차도, 외국인투자가도 아닌 해외 주식 투자”라면서 덧붙인 말이다. 이 총재의 이날 ‘쿨 투자’ 발언은 지난달 26일 구윤철 경제부총리가 환율 브리핑에서 한 ‘세금 발언’으로 불이 붙은 서학개미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가 됐다. 서학개미들은, 이 총재가 과거 자녀들의 해외 유학비로 20억 원을 썼고 장용성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이 41억 원이 넘는 미국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지난 뉴스’까지 소환하며 이 총재의 발언을 성토했다. 구 부총리는 브리핑에서 서학개미에 대한 과세 강화 여부를 묻는 질문에 “현재로선 검토하고 있지 않지만, 상황이 된다면 검토할 수 있다”고 답했다. 현재 국내 주식의 경우는 양도소득세가 전혀 없지만, 해외 주식은 연간 양도차익 250만 원을 초과하는 수익에 대해서는 22%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일종의 ‘징벌세’인 셈인데, 이를 더 강화할 가능성을 거론한 것이다. 고환율, 즉 ‘원저(低)’는 통상 수출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호재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런데 이 총재와 구 부총리의 발언을 보면, 지금의 ‘원저’는 수출 경쟁력 제고라는 긍정 효과보다 물가 상승 등 부정 효과가 큰 ‘나쁜 원저’라는 것이 정부와 외환 당국의 인식인 것 같다. 아직 단정하기에는 이르지만, 어느 정도 공감이 간다. 서학개미들의 해외주식 투자가 환율에 대한 압박 요인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학개미들을 외환시장 교란 ‘주범’처럼 몰고 가고, ‘징벌세 강화’까지 거론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NH투자증권이 지난해 7월 해외주식 투자자 63만9685명의 계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인당 평균 투자 원금은 793만 원이었다. 한국의 외환시장은 하루에만 100조 원이 넘게 거래되는 거대한 시장이다. 800만 원도 안 되는 원금을 투자한 서학개미들에게 외환시장 불안의 책임을 덮어씌우려는 것은, 정부와 외환 당국의 무능을 스스로 자인하는 꼴밖에 안 된다. 책임 전가를 위한 희생양이 ‘굳이’ 필요하다면, 장 금통위원처럼 수억, 수십억 원을 투자한 ‘서학고래들’이어야지 “젊은 분들”이 돼선 안 된다. 장기적으로 보면 해외 투자 증가가 국가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만 끼치는 것도 아니다. 한국보다 먼저 고도성장을 경험한 일본을 보자. 지난해 일본이 상품을 수출해 남긴 무역수지는 4조480억 엔(약 38조 원) 적자였지만, 전체적인 경상수지는 30조3771억 엔(약 286조 원)의 기록적 흑자였다. 기업이 해외 자회사로부터 받은 배당을 포함해 배당과 이자로만 41조7114억 엔(약 393조 원) 흑자를 낸 덕분이었다. 해외 투자가 늘어나는 것은 ‘수출대국’을 넘어 ‘투자대국’으로 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이다. 물론 지나친 해외 투자가 국내 자본시장 위축과 환율 불안을 부르는 것은 맞다. 이 총재의 지적처럼 해외 주식에 2배, 3배 ‘레버리지 투자’를 하다가는 ‘쪽박’을 차기 십상이다. 이에 대한 대책은 필요하다. 또한 환율 불안이 국가 경제를 골병들게 하는 ‘나쁜 원저’로 진행할 가능성도 서둘러 차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수록 애먼 서학개미 때리기 같은 ‘쇼잉’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정책 대응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적극 재정’이 아닌 물가 관리에 거시경제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둬야 한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 결과로 떠안게 된 대미 투자 부담, 적립금 규모가 1322조 원에 이르는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 확대 필요성을 감안하면 당분간 ‘환율 고공비행’은 불가피하다. 물가를 자극할 가능성이 큰 소비쿠폰 배포 등 선심성 재정 풀기는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여행수지 등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 요인에 대한 개선도 발 벗고 나서야 한다. K팝, K드라마, K의료, K푸드 등 K컬처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가운데 ‘원저’로 인해 외국인들의 구매력이 커지는 현 상황은 관광산업을 ‘달러박스’로 키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서학개미들이 미국 빅테크 주식 투자에 열을 올리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들 기업이 혁신과 성장, 호(好)실적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국내 주식시장을 키우려면 한국에서도 테슬라나 엔비디아 같은 기업이 싹을 내릴 수 있는 토양을 조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밸류 업”을 수백만 번 외친들, 법인세 인상과 노동 규제 강화 같은 반기업 정책을 쏟아내는 한 서학개미의 ‘국장 탈출’ 행렬은 꼬리에 다시 꼬리를 물 뿐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 202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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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내 돈 내놓으라”는 남욱… 이래도 “성공한 재판”인가

    대장동 개발 비리에 대한 1심 판결문은 740쪽에 이른다. 복잡한 법률적 쟁점도 많다. 피고인 5명에 대해 적용된 죄목이 10가지가 넘고 일부는 유죄, 일부는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 그러다 보니 ‘항소 포기가 옳다느니, 잘못됐다느니’ 상반된 주장이 중구난방으로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지엽적인 법리 논란’은 일단 접어두고 재판부가 인정한 사실 관계에 주목을 하면, 대장동 사건의 본질은 아주 단순하고 명확하다. 김만배 남욱 정영학 등이 유동규 등 성남시 수뇌부를 구워삶아 사전 짬짜미로 사업자 지위를 확보한 뒤, 수익배분 구조를 일방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구조로 설계해 천문학적인 개발이익을 독식하다시피 한 전대미문의 부패 범죄라는 사실이다. 먼저 수익률부터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검찰이 특정한 대장동 일당의 범죄 수익은 김만배 6111억 원, 남욱 1010억 원, 정영학 646억 원 등 모두 7800억 원에 이른다. 이에 비해 이들이 투자한 자기자본은 고작 3억5000만 원. 무려 2000배가 넘는 수익을 올린 셈이다. 만약 이들이 개발사업에 기여한 것이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대장동 일당의 실질적인 사업 기여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 누구보다 대장동 일당이 이 사실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김만배가 남욱을 앉혀 놓고 “야, 이게 4000억짜리 도둑질이야. 형(김만배 본인) 아니면 니네 이 사업 못 했어”라고 큰소리를 쳤겠는가.(2014년 11월 무렵의 대화) 아니 ‘도둑질’이라는 표현 정도로는, 이들이 한 범죄 행각을 설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판결문에 드러난 사업자 공모 및 선정 과정을 보면 이른바 ‘바리케이드 치기’와 ‘스펙 박기’ 등 그 바닥의 불법과 편법이 총동원됐다. ‘바리케이드 치기’는 다른 사업자가 아예 들어올 수 없게 노골적으로 벽을 치는 것을 의미하는데, 대장동 일당은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될 수 있는 건설사는 사업 신청도 할 수 없도록 규정에 못을 박아버렸다. 그리고 다시 ‘스펙 박기’를 통해 대장동 일당의 ‘스펙’에 맞춰 구체적인 사업자 선정 조건과 심사 기준을 ‘맞춤형’으로 적어 넣었다. 대장동 일당이 수험생인 동시에 출제와 채점까지 ‘1인 3역’을 한 것이다. 수익배분 방식도 자신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방식으로 만들어 넣었다. 이처럼 대장동 일당들이 번 돈은 악질적인 범죄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이 명백한데도, 수천억이 고스란히 이들의 주머니로 들어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당장 대장동 일당 중 한 명인 남욱이 검찰의 항소 포기 결정이 내려지기 무섭게 검찰에 재산 동결 해제를 요청하고 나섰다. 검찰이 범죄 수익 일부로 보고 묶어 놓은 부동산 등 약 514억 원 재산 중 일부를 돌려 달라는 것인데,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 각각 1250억 원과 250억 원의 재산을 동결 당한 김만배와 정영학도 언제 “내 돈 내 놓으라”고 덤벼들지 모른다. ‘도둑’만 탓할 일도 아니다. 항소 포기로 이들에게 ‘몽둥이’를 쥐여준 검찰 수뇌부는 더 문제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과 여권은 “검찰이 항소를 포기했더라도 민사소송을 통해 부당이득을 돌려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통상 오랜 시일이 걸리기 마련인 민사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대장동 일당들이 마음대로 재산을 처분해 버리면 어디서 범죄 수익을 환수한다는 말인가. 더구나 “형사 재판 무죄가 나왔는데, 민사 재판을 통해 부당이득을 환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란 것은 많은 법조인들이 지적하는 바다. 1심 재판부도 판결문에서 “공사가 대장동 관련 형사 소송 결과가 모두 나온 뒤 민사소송 절차를 통해 피해를 회복하는 것은 심히 곤란하다”며 “뒤늦게나마 피해 회복 과정에 국가가 개입하여 범죄 피해 재산을 추징한 다음 이를 다시 피해자에게 환부하는 조치를 취하여 신속한 피해 회복을 도모할 필요성이 크다”고까지 밝히고 있다. 정 장관은 앞서 10일 출근길 브리핑에서 ‘외압설’을 부인하면서도 “성공한 수사, 성공한 재판”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항소를 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고도 했다. 이제 검찰이 묶어 놓은 돈마저 대장동 일당이 찾아가겠다고 나선 이상, 정 장관은 다시 한번 국민 앞에 설명할 필요가 있다. 남욱의 재산 동결 해제 요청은 항소 포기 단계에서 예상했던 것인지, 아니면 이럴 줄 모르고 항소 포기에 문제가 없다고 했던 것인지, 특히 민사소송의 최종 결과가 나오기에 앞서 대장동 일당이 범죄 수익을 처분하는 것을 막을 방법은 무엇인지….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 202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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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우리 회사 한 달 뒤 파산’… 젠슨 황 모토에 ‘韓 AI’ 살길 있다

    엔비디아의 주가는 1999년 1월 상장 이후 지금까지 5800배가량 올랐다. 엔비디아 설립자인 젠슨 황 CEO가 거부(巨富)가 됐음은 당연지사. 블룸버그 세계 억만장자 순위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252조 원이다. 하지만 세계 최고 부자는 아니다. 1위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671조 원), 2위는 래리 엘리슨 오러클 회장(462조 원)이다. 둘 다 AI 업계의 ‘큰손’이다. 2023년 말 미국 팰로앨토의 한 초밥집에서 이들 억만장자 3명이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후일 엘리슨은 이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일론과 나는 애걸하고 있었다. 한 시간 동안 초밥을 먹으며 애걸했다.” 엔비디아의 GPU(AI 칩)를 더 팔아달라는 ‘애걸’이었다. ‘사는 쪽이 갑(甲), 파는 쪽이 을(乙)’이라는 비즈니스 세계의 영원한 불문율조차 적용되지 않는 존재. 이것이 현재 엔비디아와 젠슨 황의 위상이다. 경주 APEC이 1일 폐막했다. 21개국 정상급과 1700명의 글로벌 기업인들이 모였지만, 최고의 ‘신 스틸러’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젠슨 황일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과 같은 거물들과 함께 시끌벅적한 치킨집에서 치맥 회동을 하는 모습은 ‘역대 최고의 몸값을 가진 배우’ 3명이 펼쳐내는 ‘거리의 서민 먹방’이었다. 닭 뼈를 능숙하게 발라낸 뒤 기름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빠는 젠슨 황의 모습은 ‘저래서 부자 되는구나’, ‘어쩌면 치킨 먹는 국룰을 저렇게 완벽하게…’ 하는 탄성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고선 다음 날 고성능 GPU를 26만 장씩이나 공급하겠다는 엄청난 선물 보따리까지 풀어놨다. 영원한 ‘5000만의 깐부’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현재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고성능 GPU는 민관을 통틀어 4만 장 수준이다. 26만 장이 다 들어오면 한국은 GPU 보유 일약 세계 3위가 된다. 동시에 젠슨 황은 “한국이 AI 분야 리더가 될 가능성은 무한대”라며 우리의 잠재력을 극대치로 인정하고, 자신감까지 한껏 고취시켰다. 그가 한국을 떠난 지 몇 시간 뒤에는 엔비디아의 공식 유튜브 계정에 ‘대한민국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나라’로 시작해서 ‘기적이 계속되는 바로 이곳 한국에서’로 마무리되는 헌정 영상이 올라왔다. 감동적인 ‘엔딩’이다. 젠슨 황의 헌사에 취하다 보면, 우리나라가 ‘AI 3대 강국’ 초입에 금방이라도 들어설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만은 않다. 고성능 GPU만 하더라도 미국이 현재 갖고 있는 것은 2000만 장이 넘는다. 26만 장 확보는, 황무지를 개간할 삽과 곡괭이를 장만한 정도다. 또한 GPU는 건축에 비유하면 단순한 ‘벽돌’일 뿐이다. AI를 개발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건물’에 해당하는 데이터센터가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이 생명인 데이터센터 건립은 이중삼중의 까다로운 규제에 사사건건 발목이 잡힌다. 그리고 데이터센터를 가동하려면 엄청난 양의 전기가 필요하다. 전기가 없는 초고층 빌딩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재앙’이다. 미국의 빅테크들이 이미 가동을 중단한 원전까지 사들여 독점 공급 계약을 맺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국회 심의까지 거쳐 확정한 원전 건설 계획을 놓고, 주무장관이 ‘백지화 검토’를 운운하는 실정이다. 안정성이 떨어지는 신재생 에너지로 AI 산업의 전력 수요를 메운다는 것은 허황된 꿈과 같은 이야기다. AI 혁명에 하드웨어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하지만 한국은 AI 인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라다. 현재 AI 기업의 82%가 인력 부족을 호소하고 있고, 2027년까지 1만2800명의 신규 인력이 부족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나마 있는 인력도 줄줄이 해외로 새어 나가는 중이다. 한국은 세계 5위 ‘AI 인재 유출국’이다. 그런데도 이를 해결해 보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국회가 특별법을 통해 추진한다는 AI 관련 산업 규제 완화 및 지원 방안도 차일피일이다. 젠슨 황이 게임용 그래픽 카드 제조회사였던 엔비디아를 시가 총액 5조 달러(약 7154조 원)의 초우량 기업으로 키워낸 가장 큰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우리 회사는 앞으로 30일 후 파산합니다.” 젠슨 황이 직원들에게 입버릇처럼 강조했던 엔비디아의 모토에 답이 있다. ‘절박함’이다. 젠슨 황의 전기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승리의 어머니는 영감(靈感)이 아니라 절박함이었다.’ 한국이 ‘AI 3대 강국’이 되려면 AI 분야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 엔비디아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 30일 후 한국 AI 산업은 망합니다.” 대통령도, 정부도, 여당도, 야당도, 기업도 이런 절박함이 없으면 젠슨 황이 고성능 GPU를 100만 장, 200만 장 가져다 안긴들 ‘AI 3대 강국’은 공허한 메아리로 떠돌게 될 뿐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 202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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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일본의 양심이 떠난 빈자리… ‘무라야마 저격수’의 총리 등극

    ‘서민재상.’ 17일 별세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일본 총리에게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다. ‘국회에서 돌을 던지면 세습 의원이 맞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금수저’ 의원들의 천국인 일본 정계에서, 무라야마 전 총리는 완전한 이방인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보기 드문 ‘흙수저’ 출신이었다. 소년 시절에는 종업원이 3명뿐인 작은 ‘동네 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하며 야간 상업학교를 다녔다. 70세의 나이로 총리가 됐을 때도 변변한 재산이라곤 지은 지 80년이 넘어 곧 무너질 것 같은 낡은 집 한 채가 전부였다. 총리 재임 시절에는 민박집으로 휴가를 가겠다고 해 보좌관들이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하나같이 “총리가 민박을? 장난하지 마세요”라며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설날의 푸른 하늘을 보고 결심했다.” 한마디를 남기고 취임 1년 반 만에 표표히 총리직을 던지고 떠나버린 ‘선인(仙人)’의 풍모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그간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에게 그의 이름이 익숙한 것은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서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의 많은 분들에게 큰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 다시 한 번 통절(痛切)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밝힙니다.” 일본의 현직 총리가 처음으로 공식 담화를 통해 내놓은 반성과 사죄였다. 후임 총리 중 어느 누구에게서도 이렇게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사과는 없었다. 일본사회당 소속이었던 그는 ‘여당=자민당, 제1야당=일본사회당’이 공식처럼 통용되던 ‘55년 체제’가 깨지고 자민당과 사회당 간의 연립정권이 성립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등 떠밀리듯 총리 자리에 올랐다. 의석수에서 자민당에 밀리고 사회당 안에서도 비주류였으며, 흔한 각료 경험 한번 없었던 그는 ‘실세 총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총리로 재임하던 시기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자학(自虐)이라고 주장하며 과거사를 미화하고 덧칠하려는 ‘역사수정주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시절이다.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이 아시아의 일원이 되려면 철저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가 필요하다’는 그의 확고한 신념과 ‘꼭 관철시키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없었다면, 결코 나올 수 없었던 일종의 ‘정치적 기적’이었다. 취임 직후부터 시작된 무라야마 전 총리의 ‘반성과 사죄 행보’에 대한 자민당 강경파와 다른 우파 정당 의원들의 비판과 반발은 거세고도 끈질겼다. 1994년 10월 중의원 본회의 대정부 질의도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다. 당시 2년 차 초선인 33세의 한 여성 의원이 무라야마 총리를 향해 일문일답식으로 집요하게 질문을 퍼붓는다. “지금 총리가 50년 전 정권의 결정을 잘못이라고 결정할 권리가 있습니까.” “잘못이라는 근거가 뭡니까.” “충분한 국민적인 협의도 없이 총리가 멋대로 일본을 대표해서 사과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여성 의원은 이후로도 무라야마 담화에 대한 공격을 자신의 ‘정치적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로 삼았다. 3선 의원이던 2002년에는 “구체성이 결여돼 있다. 정밀히 조사해서 수정해야 한다”고 날을 세웠고, 자민당 정무조사회장(한국의 정책위의장에 해당)이던 2013년에는 “침략이라는 문구를 넣은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이 여성 의원이 바로 이달 초 자민당 신임 총재로 선출된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우익 성향의 제2야당인 일본유신회와 자민당 간의 연립정부 구성 협상이 거의 성사 단계라고 한다. 무라야마 전 총리의 별세 시점을 전후해 다카이치의 ‘총리 등극’이 급물살을 타는 것은 역사의 단순한 우연인가, 아니면 불길한 복선(伏線)인가. 다카이치는 2019년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 당시 ‘자녀 세대와 손자 세대까지 사죄를 시켜서는 안 된다’는 아베 담화의 한 구절을 콕 집어 거론하며 “나는 계승한다”고 했다. 무라야마 전 총리가 떠난 빈자리가 앞으로 점점 더 크게 느껴질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은 괜한 걱정일까. 무라야마 담화는 공자의 ‘장막여신(杖莫如信)’을 인용해 이렇게 끝맺는다. ‘기대고 의지할 지팡이로 삼기에 신의(信義)만 한 것은 없다.’ 퇴임 후에도 “담화의 정신을 잃지 말라”며 우경화하는 일본 정치를 향해 죽비를 날리던 무라야마 전 총리는, 우리에게 ‘신의를 보여주고 실천한 일본의 지도자’로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무라야마 전 총리의 명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 202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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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국힘 당원 통일교인 11만’… 정상 통계인가, 정교유착인가

    김건희 특검이 국민의힘 데이터베이스 관리 업체를 압수수색해 통일교 신도로 추정되는 당원 11만 명의 명단을 확보했다. 통일교 압수수색 과정에서 확보한 교인 120만 명 명단과 국민의힘 당원 500만 명의 명부를 대조해 11만 명을 뽑아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힘이 통일교와 연루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국민의힘은 열 번, 백 번 정당 해산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며 공세에 나섰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도 “통일교 11만, 신천지 10만, 전광훈 세력까지 합치면 그 당은 유사종교 집단 교주들에게 지배당한 정당이나 다름없다”고 가세했다. 국민의힘과 통일교 간의 유착 의혹과 관련해서 특검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2023년 전당대회와 2024년 총선이다. 특히 ‘당원 투표 100% 룰’로 치러진 2023년 전당대회 경선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다. 당시 경선에서는 책임당원만 투표권이 있었기 때문에 전체 통일교인 당원 중 몇 명이 책임당원이었는지, 그들 중 몇 명이 실제 투표를 했는지 등이 의혹을 둘러싼 핵심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은 당원 명부 압수수색에 대해 “특검이 특정 종교와 국민의힘을 연결해 악의적인 프레임으로 몰고 가고 있다”며 “비열한 정치 의도”라고 반발한다. 당원 중 통일교인이 11만 명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통계학까지 거론해 가며 “정상적인 숫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 10명 중 1명꼴로 국민의힘 당원이기 때문에, 전체 통일교인 120만 명의 10%가량이 국민의힘 당원 명부에 들어 있을 개연성은 “통계학적으로 아주 높다”는 것이다. 만약 통일교인들이 100% 자발적인 의사로 당원 가입을 했고 가입 시점도 자연스럽게 분산돼 있다면, 통계학을 앞세운 국민의힘의 주장에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원 가입 과정에 ‘조직적인 힘’과 ‘거래’가 개입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실제로 많은 부분이 특검 수사로 드러난 바다. 특검은 국민의힘 전당대회 넉 달 전 김건희 여사가 건진법사 전성배 씨를 통해 당시 윤영호 통일교 세계본부장에게 ‘통일교인을 당원에 가입시켜 권성동 의원의 당선을 돕도록 요청’해, 윤 전 본부장이 움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윤 전 본부장과 전 씨 간에 “전당대회에 어느 정도 필요한가” “3개월 이상 당비 납부한 권리당원 1만 명 이상을 동원해 달라”와 같은 구체적 문자메시지가 오간 사실도 확인했다. 이 무렵 통일교가 전국 5개 지구를 통해 각 교회 예배시간 이후 신도들에게 국민의힘 당원 가입서를 나눠주고, 가입 현황을 할당량으로 정리해 윗선에 보고했다는 진술도 확보된 상태다. 다만 통일교가 처음에는 권 의원을 밀었지만, 권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함에 따라 지원 대상을 김기현 의원으로 바꿨다고 특검은 본다. ‘거래’ 흔적도 짙다. 지난달 18일 구속 기소된 윤 전 본부장의 공소장에는, 그가 2022년 3월 윤석열 전 대통령 당선 직후 당시 당선인 사무실로 찾아가 아프리카 및 캄보디아 공적개발원조(ODA) 관련 프로젝트 등 교단의 다양한 현안을 윤 전 대통령에게 청탁한 일이 구체적으로 기재돼 있다. 청탁을 받은 윤 전 대통령이 ‘그와 같은 사항을 논의해 재임 기간에 이룰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답했다는 내용도 공소장에 담겨 있다. 이 만남이 있은 지 1주일 뒤 외교부에서 아프리카 ODA를 2배 늘리는 목표가 담긴 국정과제 이행 계획서가 작성됐고, 이후 캄보디아 사업 관련 ODA 예산도 지속적으로 증액됐다. 이처럼 ‘조직적인 힘’과 ‘거래’의 개입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와 정황들이 줄줄이 나온 이상, 국민의힘이 말하는 ‘통계적 개연성’은 정교유착 의혹을 떨쳐 내는 데 충분한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조직적 결속력을 가진 특정 집단이 마음만 먹으면 당 대표 선출과 같은 중대사안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당내 민주주의의 구조적 취약성’의 존재를 부인하기 어려워졌다. “만일 책임당원 40만 명이 투표했는데 그중 25%인 10만 명 정도가 특정 후보를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면 결과는 보나 마나”라는 지적이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나오는 실정이다. 이례적으로 투표율이 높았다는 2023년 전당대회에서도 투표에 참여한 책임당원은 46만 명 정도였다. 특검의 수사 결과를 기다릴 것도 없다. 특정 집단이 머릿수를 앞세워 당을 자신들의 편협한 사고나 이해에 가둬놓을 수 있는 ‘사이비 당원 민주주의’ 시스템을 당장 뜯어고쳐야 한다. 대선 패배 후 100일이 넘도록 갈피조차 못 잡고 있는 쇄신 논의도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 2025-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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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美 제 발등 찍는 트럼프의 이민정책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 4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법안의 별칭이다. 하지만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와는 달리 ‘미등록 이민자’들에게는 대재앙을 예고하는 법안이었다. 이 법안의 핵심 내용 중 하나는 미등록 이민자 단속·추방 및 국경 장벽 보강을 위해 1500억 달러(약 208조 원)의 예산을 투입한다는 것이었다. 1500억 달러는 세계 3대 군사 강국인 영국의 연간 국방예산보다 2배나 많은 금액이다. 이를 무기로 이민세관단속국(ICE)은 인력을 대폭 충원한 뒤 이민자 사회를 공포와 불안으로 몰아넣는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는 중이다. 단속 방식도 거칠어서 인권 침해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학교 앞에서 잠복을 하고 있다가 자녀들을 등교시키기 위해 오는 부모를 덮치거나, 영주권 심리를 위해 법원에 출석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가 체포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미등록 이민자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명분은 ‘안전’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장서서 “우리나라에 테러리스트, 살인자, 강간범, 폭력 범죄자, 갱단 조직원들이 있다”, “이란 암살 조직보다 1400만 명의 불법 이민자가 더 두렵고 걱정스럽다” 등 미등록 이민자와 중범죄자를 동일시하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이민자들에 대한 증오와 적대감을 키워 자신의 지지층을 결속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전혀 사실이 아니다. 20년 넘게 이민과 범죄의 관련성을 연구한 범죄학자 그레이엄 오지와 카리스 쿠브린에 따르면, 이민자 비율이 높은 지역일수록 범죄 발생률이 낮으며, 살인과 같은 폭력 강력범죄는 그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등록 이민자 추방과 함께 합법 이민을 억제하는 정책도 병행하고 있는데, 이 같은 정책은 미국 경제에 장기적으로 큰 상처를 남길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순수 미국인 노동자의 고령화와 은퇴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민 노동자의 고용 시장 유입이 감소하면 연 2% 수준인 미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1.5%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구체적인 분석도 나온다. 이민이 미국 경제의 혁신을 이끄는 엔진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는, 굳이 복잡한 통계를 인용할 필요도 없다. 미국에서 혁신의 상징으로 통하는 7대 빅테크(일명 ‘M7’) 최고경영자(CEO) 중 4명은 이민자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은 대만, 알파벳(구글)의 순다르 피차이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는 인도,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이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트럼프 행정부의 난폭하고 패쇄적인 이민정책이 두고두고 미국 경제에 큰 후유증을 남길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특히 이번 미국 이민 당국의 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법인의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에 대한 급습은 ‘제 발등 찍기’의 결정판이 될 수밖에 없다. 현대차그룹이 조지아주 한 곳에서만 창출하는 직간접 일자리는 연간 4만 개가 넘는다. 또한 한국 기업들은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1500억 달러의 대미 추가 투자를 약속한 터다. 그런데도 이민 당국은 헬기와 장갑차까지 동원해 중범죄자를 단속하듯이 했고, 공장 가동을 앞두고 막바지 작업을 위해 한국에서 파견된 근로자 300명을 무더기로 체포해서 구금시설에 강제 수용하기까지 했다. 이들은 ‘테러리스트, 살인자, 강간범, 폭력 범죄자, 갱단 조직원’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미국 이민 당국은 비자 자격을 문제 삼지만, 공장 건설에 필수적인 인력을 본국에서 보낼 수 있는 길은 사실상 막아놓고 투자를 하라는 것은 우리 기업들을 ‘불법 리스크’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고 뭔가. 더구나 특정 사업장을 덮쳐서 토끼몰이 식 단속을 하는 것은 전임 조 바이든 정부 때는 전혀 볼 수 없던 방식이다. 제조업 환경에 적합하지 않은 조지아주가 우리 기업들의 투자처로 주목을 받은 큰 이유 중의 하나가 관대하고 유연한 이민자 정책이었는데, 우리 기업들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여유를 주지 않고 단일 사업장 기준으로 사상 최대 규모의 단속 작전을 벌인 점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어떤 기업이 미국에 흔쾌히 투자를 하려고 하겠는가. 트럼프 행정부가 지금의 이민정책을 바꾸지 않는 한 ‘제조업 부활’은 고사하고, 이미 미국에 진출한 기업들마저 발길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번 사태가 미국 제조업의 쇠락을 가속화시키는 결과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 202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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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너무 이른 사면” 온몸으로 웅변 나선 조국

    “고기 먹은 것 숨기고 된장찌개 영상 올렸다”고 비방하는 해괴한 분들이 있다. 부처님 말씀 중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가 있다. 조국혁신당 조국 전 대표가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고급 한우구이 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메인인 고기는 빼고 후식인 된장찌개만 올린 것을 놓고 “서민 코스프레”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부처님 말씀을 빌려 “돼지”라고 일갈한 셈인데, 결과적으로는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논리를 적용하면 다른 사람에게 돼지라고 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돼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부처님이 아니라 무학대사 말씀이다. 누구 말씀인지를 떠나 절반에 가까운 국민이 자신의 사면에 반대한 것을 아는, 상식이 있는 정치인이라면 “갓 사면을 받은 몸으로 아무리 근신을 해도 부족한 때 신중하지 못한 행동으로 괜한 구설을 불러 죄송하다”고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된장찌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8·15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지 두 주일도 안 돼 온갖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조 전 대표의 행보와 언행에 관한 이야기다. 오죽했으면 그의 사면을 앞장서 주장했던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입에서 “이런 모습들이 국민들에게 개선장군처럼 보이는 것은 아닐지 걱정스럽다”는 말이 나온다. 조 전 대표는 양심수도 정치범도 아니다. 지난해 12월 자녀 입시 비리와 직권남용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의 실형 확정판결을 받고 수감됐던 비리 사범이다. 그런데 조 전 대표는 형기의 3분의 1에 불과한 8개월만을 채우고 풀려났다. 가석방을 받는 데도 형기의 70∼80%를 채워야 하는 관행에 비춰 보면 이만저만한 ‘특혜’가 아닐 수 없다. 사면은 대통령의 헌법상 권한에 속하는 것이고, 보수정권이든 진보정권이든 공수(攻守) 위치만 맞바꿔가면서 행해 온 정치적 관행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법부의 결정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인 만큼 사면의 수혜를 보는 당사자는 최대한 자숙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기본적인 도리다. 하지만 조 전 대표의 언행은 자숙이나 반성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그룹을 교묘하고 부당하게 매도하려는 모습까지 보인다. 조 전 대표는 23일 한 라디오 방송에 나와 “20대, 30대 남성이 70대와 비슷한 성향을 보인다. 단순한 보수성향이라면 문제가 다를 수 있는데, 이른바 극우성향을 보인다. … 2030의 길을 극우정당인 국민의힘이 포획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사면에 대해 가장 큰 거부감을 보여 온 2030 남성을 극우집단으로 몰아간 것인데, 의도도 불순해 보이거니와 사실과도 맞지 않는 주장이다. 6·3 대선 지상파 3사 출구조사 지지율을 보면 20대 남성은 이준석(37.2%)-김문수(36.9%)-이재명(24.0%) 순서였고, 30대 남성은 이재명(37.9%)-김문수(34.5%)-이준석(25.8%)의 순이었다. 또한 2030 남성들은 계엄 전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 전체 평균보다 훨씬 낮은 점수를 줬고, 윤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해서도 다수가 찬성 쪽에 손을 들었다. 더구나 국민의힘 지지자 중에는 ‘극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 전 대표를 위시한 진보 진영의 ‘내로남불’에 신물이 나서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청년들도 부지기수다. 2030 남성들이 조 전 대표의 사면에 유독 비판적인 이유는 다른 어느 세대보다 공정성에 민감한 세대이고, 조 전 대표 가족의 입시 비리로 인한 상처를 가장 가까이에서 입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는 못 할망정, 극히 일부에 불과한 ‘극우’ 이미지를 씌우는 게 옳은 일인가. 본인은 공식적으로 13번 사과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인가. ‘붕어, 개구리, 가재’의 자리를 이제 ‘돼지’나 ‘극우’가 대신했을 뿐 다른 사람들을 아래로 보는 듯한 조 전 대표의 오만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조 전 대표는 교도소 문을 나선 다음 날인 16일 페이스북에 ‘8개월간의 폐문(閉門)독서물’이라는 제목과 함께 여러 권의 책이 수북이 쌓여 있는 사진을 올렸다. 유죄 판결에 따른 자신의 수감을, 스님들이 문을 걸어 잠근 채 최소한의 공양만 받으며 수행에 전념하는 ‘폐문 정진’과 같은 반열에 놓은 셈이다. 하지만 최근 출소 후 그가 보여준 언동으로 미루어 보면, 교도소에서의 8개월은 교정(矯正)의 효과가 미치기에도, 독서를 통한 수양을 쌓기에도 많이 부족한 시간이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 202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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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윤기친람, 이기친람, 만기친람

    이재명 대통령이 성남시장, 경기도지사, 야당 대표와 대권 후보를 거치면서 보여준 만기친람(萬機親覽) 리더십은 잘 알려져 있다. 만기친람 성향은 ‘마이너리티’ 한계를 딛고 자수성가한 사람에게서 잘 나타나는 특징이고, 그것이 성공의 ‘밑천’이었기 때문에 한 번 굳어지면 잘 바뀌지 않는다. 이 대통령이 취임한 지 겨우 두 달이 지났지만 그런 징후들이 여러 군데서 엿보인다. 이 대통령은 광주 대전 부산에서 3차례나 타운홀 미팅을 가지면서, 공항 이전 문제 등 민감한 지역 현안 해결에까지 직접 뛰어들었다. 인터넷 댓글과 전화 문자를 일일이 챙겨보고, SNS에 직접 글을 올리는 일도 잦다. 그중에서도 ‘단독 드리블’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산업재해 문제다. 이 대통령은 산재사고가 반복적으로 발생한 SPC 공장에는 직접 찾아가서 경영진에게 질책성 질문을 줄줄이 쏟아냈다. “교대 시간은 몇 시냐” “쉬는 시간에는 누가 업무를 대신하는가” “나흘간 12시간씩 연속 노동이 가능하냐” 등 내용도 근로감독관을 연상시킬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건설 현장 사망사고가 잇따르고 있는 포스코이앤씨에 대해서는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구체적인 방식까지 직접 거론하며 관련 부처에 ‘최대한의 제재’를 주문했다. SPC와 포스코이앤씨에 법적-행정적으로 엄정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인명과 관련된 산재 문제에 대해 이 대통령이 각별한 관심을 표시하는 것도 시비할 일은 아니다. 다만 이 대통령의 ‘만기친람’ 행보가 내포한 위험성에 대해서는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사이다 같다”는 긍정적 반응이 많기에 더욱 그렇다. 실패의 씨는 잘나갈 때 뿌려지기 때문이다. 만기친람의 가장 큰 폐해는 공직사회가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대신 대통령의 입만 쳐다보게 된다는 것이다. 좋은 해법보다는 대통령의 뜻에 충실한 해법을 우선하는 것이 오랜 경험칙으로 확인된 공직사회의 생리다. 더구나 대통령이 먼저 ‘디테일’을 말하면 공직사회의 사고(思考) 폭은 극단적으로 좁아진다. 포스코이앤씨의 경우, 이 대통령이 언급한 면허 취소가 과연 최선의 해법일까. 포스코이앤씨는 임직원 수만 5700명에 이른다. 이들의 가족과 2100여 곳에 이르는 협력사 직원 및 가족까지 감안하면 수만 명의 생계가 걸린 문제다. 이들 모두에게 산재의 책임을 묻는 것은 적절한가. 이미 대통령의 ‘가이드라인’이 제시된 상황에서, 공직사회가 이런 점들을 충분히 고려해서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해법을 찾아낼지 의문이다. 만기친람의 의도는 선하다. 하지만 국정에서는 의도보다 과정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단적인 예 중 하나가 윤석열 정부에서 있었던 수능 킬러 문항 소동일 것이다. 사교육 부담을 줄이자고 하는 데 누가 반대를 할 것인가. 하지만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서 ‘공정 수능’과 ‘사교육 카르텔 혁파’를 외친 결과는 참담했다. 경찰 교육청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등이 총동원돼서 사교육을 잡겠다고 덤볐지만, 지난해까지 사교육비는 4년 연속 최고치를 갈아 치웠다. 당시 정부와 여당에서는 어떤 반응이 나왔던가. 여당 정책위 의장은 “(윤 대통령은) 조국 일가의 대입 부정 사건을 수사 지휘하는 등 대입 제도에 누구보다 해박한 전문가”라고 했고,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라는 인물은 “제가 진짜 많이 배우는 상황”이라고 한술 더 떴다. 어느 정도 개인의 아부 성향 탓도 있겠지만,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서 대통령이 만기친람할 때 여당과 공직사회에서 흔히 나타날 수 있는 반응이 이런 것이다. 만기친람이 좋지 않다는 것은 그 말의 유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만기친람은 원래 사서삼경 중의 하나인 서경(書經)의 ‘일일이일만기(一日二日萬幾)’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랏일에는 하루이틀 사이에도 만 가지 조짐(기미)이 있으니 미리미리 잘 살피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뒤이어 이어지는 구절, ‘적임자를 등용해, 한 가지 직무라도 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대목이다. 즉 독주(獨走)가 아닌, 적재적소 인재 배치와 권한 위임을 통해 국정을 빈틈없이 살피라는 취지인 것이다. 굳이 시대 배경이 4000년 전인 서경을 거론하지 않고, 시야를 3년 전으로만 넓혀도 이 대통령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답은 나와 있다. 수능 킬러 문항 소동 외에도, 채상병 수사 외압 의혹, 연구개발(R&D) 예산 삭감과 번복, 월 단위 근로시간 도입 혼선, 대왕고래 광구 해프닝 등등…. 산처럼 쌓인 ‘윤기친람’의 잔해물들이다. ‘이기친람’의 싹을 미연에 과감히 잘라내지 않으면 이 대통령도 이런 전철을 밟지 말란 법이 없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 2025-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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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한국 자동차, 죽느냐 사느냐의 나흘

    “일본이 마치 못된 시누이처럼 행세하면서 방해를 하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미국 시장 진출 ‘D데이’를 1년쯤 앞두고 준비 작업이 한창이던 1985년 1월, 당시 정세영 사장이 했던 말이다.현대차의 미국 진출은 한국 자동차 산업 70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세 장면을 꼽으라고 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한 장면이다. 당시 미국은 전 세계 자동차 판매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초거대 시장이었던 데다, 전 세계 모든 메이저들이 자존심을 내걸고 총력전을 벌인 격전장이었다. 현대차에는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하지만 미국 시장의 벽은 높았다. 무엇보다 소형차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 업체들의 ‘텃세’가 보통 아니었다. 일본 업체들은 이미 현지 생산 기지까지 구축하고 미국 시장에 연간 300만∼350만 대를 판매하던 시절이다. 일본은 브랜드-품질-마케팅 모든 면에서 현대차를 압도하는 상황이었지만, ‘잠재적 경쟁자의 싹을 미리 밟아 버리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집요한 방해 공작을 펼쳤다.그럼에도 현대차는 특유의 뚝심으로 미국 시장을 끈질기게 파고들어,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왔다. 지난해에는 현대차와 기아를 합해 171만 대를 팔아 연간으로 사상 최대 판매실적을 올렸고, 미국 진출 39년째를 맞은 올해는 ‘누적 3000만 대 판매 달성’을 예약해 둔 상태다.이처럼 ‘기념비적 순간’을 앞두고 있지만, 동시에 현대차는 미국 시장에서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기도 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 관세’ 때문이다. 트럼프 관세는 존재 자체가 본질적으로 미국이나 일본 업체들에 비해 한국 업체들에 불리한 구조다.지난해 미국 시장 판매량 순위는 GM, 도요타, 포드, 현대차·기아, 혼다의 순이다. 그런데 5개사의 현지 생산 비율을 보면 현대차·기아만 45%로 절반에 못 미치고, 나머지는 최소 55%에서 최고 99%에 이른다. 미국 업체는 논외로 치고, 설령 한국과 일본에 동일한 관세율이 적용되더라도 관세율의 절대 수준 자체가 높으면 미국 밖 생산비율이 높은 현대차·기아가 불리한 구조인 것이다.설상가상으로 한국은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도 일본의 뒤를 쫓아가는 처지다. 현재 25%인 관세율을 일본 수준인 15%까지 낮추지 못하면 한국의 자동차는 일본 자동차에 비해 결정적인 열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 가격에서 밀리면 브랜드와 품질로 압도해야 하는데,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미일 간의 관세 협상 합의 내용만 보더라도 일본이 미국 자동차 시장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진심’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쌀 시장을 내준 데서 그치지 않고, 5500억 달러(약 750조 원)에 이르는 대미 투자 보따리까지 풀었다. 아니, 풀었다기보다는 갖다 바쳤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일본은 ‘내 지시에 따라’ 미국에 5500억 달러를 투자할 것이며, 미국은 수익의 90%를 가져갈 것이다”는 것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SNS에 올린 내용이다.(미일 간에 구체적인 합의 내용을 둘러싼 설왕설래가 있지만, 막무가내 떼쓰기로 일본이 트럼프 대통령을 당해낼 리 만무하다.)일본이 이런 굴욕적인 조건까지 감수하면서 합의를 한 것은 일본의 국익에 있어서 미국 자동차 시장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본에 있어서 미국은 최대 수출시장, 자동차는 최대 수출 품목이다.이런 사정은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은 전체 수출의 19.9%를 미국에 의존하고, 한국이 18.7%를 미국에 의존한다. 전체 수출 품목으로는 반도체가 1위지만, 미국 시장만 보면 자동차가 압도적인 1위 수출 품목이다. 더구나 한국은 무역의존도가 높아 수출에 변고가 생기면 전체 경제가 심하게 흔들리는 구조다. 지난해 기준으로 일본의 무역의존도는 35.6%였는데 한국은 그 두 배가 훨씬 넘는 90.9%에 이른다.트럼프 대통령이 내건 관세 협상 ‘데드라인’까지는 4일이 남았다. 우리 경제구조를 고려하면, 미국 시장을 잃은 한국 자동차 산업은 생각할 수 없고, 자동차 없는 수출은 존립할 수 없으며, 수출이 무너진 한국 경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미국 자동차 시장을 잃은 한국 경제는 바퀴 하나가 빠진 자동차와 크게 다를 바 없다.대미 협상팀은 ‘일본보다 1%포인트라도 불리한 관세를 받아 들고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갖고 협상에 임해야 한다. 39년간 일본 업체들과의 피 터지는 경쟁 끝에 어렵게 개척한 미국 자동차 시장이 이번 협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오점을 남겨서는 절대 안 된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 2025-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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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더 독한 상법’… 삼성, 현대차, SK 없는 한국

    2003년은 SK그룹 역사상 최대 위기의 한 해였다. 영국계 헤지펀드 소버린이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SK㈜의 지분을 대량으로 사들여 1대 주주가 된 뒤 최태원 회장 등 경영진 교체를 선언하고 나선 것. 소버린이 우호 지분을 포함해 확보한 의결권은 30%대 중반으로 SK 측의 25.13%를 월등히 웃돌았다.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SK가 꺼내 든 방패는 ‘자사주 매각’이었다. 원래 자사주에는 의결권이 없지만 다른 곳에 팔면 의결권이 살아난다는 점을 활용한 것. 국내 은행 등이 백기사로 나서 SK㈜ 자사주 10.41%를 사주면서 소버린의 ‘경영권 탈취극’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그렇다고 해서 소버린의 전적인 패배는 아니었다. 소버린은 2년여 만에 시세차익 등으로 9000억 원가량을 챙긴 뒤 ‘먹튀’ 했다. 미국 일본 등 대부분의 선진국은 차등의결권이나 포이즌 필 같은 경영권 방어수단을 다양하게 인정한다. 하지만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 만약 자사주 매각조차 불가능했다면 SK그룹이 지금 소버린 지배 아래 있지 말란 법이 없다. 헤지펀드의 속성상 하이닉스 인수처럼 위험한 결정은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고, SK그룹은 지금 우리가 보는 SK와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자사주는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놓고 벌어진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과 삼성그룹 간의 공방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두 진영 간 의결권 확보전이 치열한 가운데 삼성물산이 KCC에 자사주 5.76%를 매각한 ‘한 수’가 기세를 갈랐다. 엘리엇은 이를 법정으로 들고 갔지만 법원은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3일 상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로 기업들의 충격이 크다. 투자고 뭐고 소송 걱정에 밤을 새워야 할 참이다. 그러나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내친김에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에 쓸 수 없게 ‘소각’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민주당의 코스피5000특별위원회 소속 김남근 의원은 자사주를 취득 1년 이내에 소각하도록 하는 법안까지 다른 의원 24명과 함께 발의한 상태다. 자사주 매각을 빼고는 경영권 방어 수단이 전무한 상황에서 투기자본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자사주 비중을 높여온 기업들로서는 벌거벗겨진 채 맹수 앞에 내던져지는 느낌일 것이다. 더구나 ‘더 독한 상법’을 향한 여당의 질주는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전부가 아니다.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는 더 속도를 내고 있다. 개정 상법에 더 독한 상법 개정안이 더해질 때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2006년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의 KT&G 공격과 2018년 엘리엇의 현대자동차 공격을 돌이켜 보면 된다. 칼 아이칸은 당시 KT&G 정관상 집중투표제가 가능(대다수 국내 기업은 정관을 통해 집중투표제를 배제함)하다는 점을 활용해 이사회에 자기 몫의 이사를 진출시켰다. 이를 발판으로 KT&G에 알짜 자산 매각 등을 요구했고, 매입 시점으로부터 1년 2개월 뒤 주가가 원하는 만큼 오르자 약 1500억 원의 차익을 챙겨 ‘먹튀’ 했다. 엘리엇의 현대차 공격은 실패로 끝났지만, 단기 수익에 눈먼 헤지펀드가 ‘먹잇감’ 기업을 상대로 얼마나 무리하고 황당한 요구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엘리엇은 현대차 연간 순이익의 3.5배에 이르는 5조8000억 원을 배당으로 요구하는가 하면, 경쟁사 최고경영자(CEO)를 이사 및 감사위원 후보로 추천하기까지 했다. 지금 여당이 하려는 입법이 완성되면, 외국 투기자본은 이사회나 감사위원회에 자기 세력을 마음대로 심어 아무 때나 경영 기밀과 장부를 들여다보고 무리한 배당 요구를 ‘주주 환원’이라는 이름으로 시도 때도 없이 들이밀 것이다. 그러다 수틀리면 이 핑계 저 핑계로 소송을 걸어올 것이다. 기우가 아니다. 이미 소버린이, 엘리엇이, 칼 아이칸이 행동으로 보여줬던 일들이다. 그나마 이런 ‘맹수’들을 옭아맸던 족쇄를 치워버리겠다는 것이 지금 여당이다. 우리 기업들이 투기자본에 시달려 긴 안목의 투자와 경영을 못 하게 되면 한국 경제의 추락은 시간문제다. 무섭게 성장하는 중국 기업들에 밀려 한국 기업들이 설 자리는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소액주주 보호를 위해 제도 개선은 필요하다. 하지만 입법 우선순위를 가리고, 경영권 불안을 막을 보완입법도 해야 한다. 눈앞의 주가 상승에만 취해 ‘더 독한 상법 개정’을 강행하는 것은 한 끼 고기반찬을 위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 202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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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이재명 실용주의’와 ‘反기업’은 양립할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이 국회 상임위원장 단독 선출을 강행하고, 40개 중점 추진 법안 처리에 본격적으로 나설 태세다. 40개 법안 중에는 기업들이 지속적으로 우려를 표명해 온 ‘상법 개정안’과 ‘노란봉투법’이 포함돼 있다. 먼저, 상법 개정안은 현행법에 있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뿐 아니라 주주로까지 확대하는 내용이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해외 투기자본의 소송 공세와 배임죄 확대 적용 가능성 때문에 인수합병(M&A) 등 장기적 전략 경영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기업들은 걱정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민주당의 이번 개정안과 같은 형태의 명문 조항을 상법(회사법)에 둔 나라는 세계적으로 전무하다. 개정론자들이 드는 거의 유일한 전거(典據)가 미국 ‘델라웨어주 회사법’인데, 사정을 알고 보면 이런 블랙코미디가 없다. 델라웨어는 ‘기업 파라다이스’로 유명한 곳이다. 오죽했으면 사람보다 기업이 많다. 잘나가는 대기업들과 유망한 벤처회사들이 앞다퉈 ‘기업하기 좋은’ 델라웨어를 찾아오다 보니 2023년 기준으로 기업 수가, 인구(103만 명)의 곱절인 207만 개에 이른다. 그 배경 중 하나가 ‘친기업의 끝판왕’이라고 해도 좋을 회사법이다. 델라웨어 회사법이 경영 활동을 얼마나 자유롭게 보장하는지는 한국의 상법과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첫째, 한국 상법은 감사나 감사위원을 선출할 때 대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하지만, 델라웨어 회사법에는 대주주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조항이 없다. 둘째, ‘포이즌 필’과 ‘황금주’ 등 한국에서는 금지된 경영권 방어 수단도 델라웨어 회사법은 자유롭게 보장한다. 셋째, 이사회 구성과 관련해서 한국은 미주알고주알 다양한 규제를 두고 있다. 이사 수는 3명 이상이어야 하고, 특히 자산 규모가 2조 원 이상이면 이사의 3분의 2는 사외이사로 두어야 한다. 사외이사가 될 수 없는 결격 사유는 21가지나 된다. 델라웨어에서는 대부분 기업 자율에 맡겨져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사가 경영 판단과 관련한 책임을 면제받으려면 주주 전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델라웨어에서는 정관에 규정을 둬서 포괄적으로 면제를 받을 수 있다. 다만 델라웨어 회사법 102조 (b)항 (7)호에 다음과 같은 예외조항이 있다. 이사나 임원이 ‘회사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위반한 경우의 면책을 정관에 규정하더라도 이사나 임원의 손해배상 책임을 제한하거나 배제할 수는 없다는 조항이 그것이다. 한국의 상법 개정론자들이 전거로 삼는 것이 바로 이 조항이다. 델라웨어 회사법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가 상징적 선언인지 실효적 조항인지, 이 조항을 대륙법 체계에 속하는 한국에 이식하는 게 맞는지 안 맞는지 등에 대한 숱은 논란은 일단 ‘패스’하자. 델라웨어 회사법이 천명하고 있는 본질인 ‘자유로운 경영 활동’에는 철저히 눈을 감고, 한 귀퉁이에 있는 애매한 조항을 빌려다 우리 상법에 큼지막하게 못질한 뒤, 알토란 같은 우리 기업을 해외 투기자본의 ‘소송 제물’로 던져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 소액주주에 대한 지배주주의 횡포는 굳이 무리해서 ‘기본법’인 상법을 흔들지 않고서도, 자본시장법 등을 개정해 방지하면 될 일이다. ‘노란봉투법’도 기업들의 투자 의지에 찬물을 끼얹는 반기업적 법안이라는 점에서 상법 개정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가뜩이나 과격한 노조 활동 때문에 기업들이 앞다퉈 한국을 떠나는 판인데 노란봉투법으로 ‘파업 천국’을 만들면 한국에 남아날 기업이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노란봉투법에는 ‘직접 계약 관계가 없더라도 실질적 지배력이 있으면 사용자로 본다’는 조항도 있는데, 노사협상 현장에 일대 혼란을 몰고 올 가능성이 크다. 일례로 현대차의 경우 1차 협력업체만 700여 개, 2∼3차 협력업체까지 합하면 5000여 개에 달하는데, 하청노조들이 너도나도 “현대차 사장 나와!”라고 덤비면 1년 내내 협상 테이블에 끌려다녀야 할 판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시정연설에서 “경제성장률이 4분기 연속 0%에 머물고 있다”며 시급한 추경 처리를 호소했다. 하지만 이번 추경이 높일 수 있는 성장률은 기껏해야 0.2%포인트다. ‘재정주도 성장’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게 이런 정도다. 여차하면 ‘잠자는 물가’를 건드릴 위험도 있다. 이 대통령이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경제의 핵심은 기업”이고 “기업 성장이 곧 경제 성장”이다. 상법 개정과 노란봉투법 시행으로 기업의 손발을 묶어놓고 경제 회복을 바라는 것은 모순이고 몽상이다. 반(反)기업 포퓰리즘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재명 실용주의’가 성공하기 위해 통과해야 할 첫 관문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 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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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국민의힘, 쇄신 없인 ‘21% 지지율’도 사치

    국민의힘에 대한 정당 지지율이 급전직하로 추락하고 있다. 한국갤럽이 10∼12일 실시한 정기 조사에서 나타난 국민의힘 지지율은 21%였다. 12·3 계엄 직후의 24%보다도 낮다. 더불어민주당과의 격차는 5년 내 최대치로 벌어졌다. 전통적인 국민의힘 지지층인 60대 이상 연령층에서마저 민주당에 크게 밀렸다. 부산·울산·경남에서도 열세로 돌아섰다. 이렇게 가다가는 ‘영남 자민련’조차 ‘자조(自嘲)적 표현’이 아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될 판이다. 국민의힘 지지율 폭망은 대선 패배 이후 국민의힘이 보여주고 있는 행태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실망감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이번 6·3 대선이 윤석열 정부의 실정과 계엄에 대한 심판이었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이의를 달기 어려울 것이다. 일례로 동아시아연구원이 이번 대선 직후 실시한 인식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힘이 잘못을 반성하고 윤 전 대통령의 탄핵을 적극 받아들였어야 했다’는 의견이 68.2%나 됐다. 그런데 국민의힘의 지금 모습은 어떤가. 김용태 비상대책위원장이 8일 발표한 ‘5대 개혁 과제’를 둘러싼 국민의힘의 행태를 보면, 개혁을 해나갈 능력은 둘째치고 그럴 의사가 있는지조차 의문이 들게 한다. 김 위원장의 5대 개혁안은 대통령 탄핵 반대 당론 무효화, 대선 후보 교체 진상 규명, 당심·민심 반영 절차 구축, 지방선거 100% 상향식 공천, 9월 초까지 전당대회 개최 등 5가지다. 이 중 뒤의 2가지는 계파 간의 이해가 엇갈리는 당 내부 문제로 볼 소지가 있는 만큼 논외로 치자. 하지만 앞의 3가지는 국민의힘이 계엄 이후 대선 직전까지 보여준 구태를 청산하겠다는 각오를, 국민에게 내보인다는 차원에서도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할 최소한의 개혁 조치다. 이제 와서 대통령 탄핵 반대 당론을 무효화한다고 해서 감동을 받을 국민도 없겠지만, 그조차 하지 않겠다는 것은 ‘계엄과 단절하라’는 국민적 요구와 척(隻)을 지고 가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국민의힘은 김 위원장이 내놓은 개혁안은 1주일이 지나도록 논의 테이블에조차 올리지 않고 있다. 지난 11일 김 위원장이 당 쇄신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한 의원총회를 권성동 원내대표(12일 퇴임)가 개최 40분 전 문자로 취소해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있었다. 이런 식으로 당 쇄신의 발목을 잡는 친윤 그룹에도 일견 그럴싸한 논리는 있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권 원내대표가 퇴임 기자회견에서 언급한 ‘가업(家業)승계론’이다. 이런 내용이다. “가업을 이어받을 때 자산과 부채는 함께 승계됩니다. 정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제1야당이라는 자산(資産)이 있으면서 동시에 윤석열 정부의 실패와 탄핵이라는 부채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산과 부채 중 하나만 취사선택할 수 없습니다.” 공당(公黨)의 개혁 문제에 ‘가업승계’를 끌어다 붙인 발상은 “원래 선거라는 건 패밀리 비즈니스(가업)”라는 윤 전 대통령의 정신세계를 빼다 박았다. 알다시피 윤 전 대통령의 ‘패밀리비즈니스론’은 ‘명태균 게이트’와 ‘건진 게이트’를 싹 틔운 기름진 토양이 됐다. ‘가업승계론’이 국민의힘에 얼마나 큰 해독을 끼칠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권 전 원내대표의 말마따나 ‘윤석열 정부의 실패와 탄핵’이 부정적 유산이라는 점에서 ‘부채’인 것은 맞다. 하지만 자산과 함께 반드시 승계해야 할 부채가 아니다. 그냥 장부에서 지워버려도 뭐라 할 채권자가 없는 ‘가공(架空) 부채’, 아니 반드시 청산해야 할 ‘악성 부채’일 뿐이다. 상속을 거부해도 박수를 받으면 받았지, 빚 독촉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권 전 원내대표가 자산(資産) 목록에 ‘제1야당’을 올린 것도 황당하다. ‘당이야 여당이 되건 야당이 되건, 나는 당권만 쥐면 된다. 텃밭에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만 되면 된다’는 사고가 지배하는 국민의힘의 분위기가 무의식을 파고든 것이 아닐까 싶다. 거대양당제가 뿌리내린 대통령제 국가에서 최대 보수정당의 승계 자산은 ‘준비된 수권정당’이어야지 단 한 순간도 ‘제1야당’이어선 안 된다. 정치든 비즈니스든 단절 없는 쇄신이나 파괴 없는 혁신은 있을 수 없다. 국민의힘이 계엄과의 단절, 윤석열 정권이 남긴 부정적 유산의 청산을 미적대선 정권 재창출이 가능한 수권정당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번 대선 결과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보여준다. 국민의힘이 쇄신에 따르는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107석 제1야당’에 만족해선, ‘지지율 21%’도 과분한 사치일 뿐이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 2025-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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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막말과 비방전에 묻힌 대선, 문제는 경제

    ‘6·3 대선’ 공식 선거운동이 오늘 종료된다. 임기를 2년여 남긴 대통령의 파면으로, 준비 없이 갑작스레 치러지는 선거라는 점에서, 차분한 공약 경쟁보다는 자극적인 네거티브 공방으로 흐를 것이라는 점은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치러진 2017년 ‘5·9 대선’에 비교해도, 이번 대선은 네거티브전 양상이 유독 두드러졌다. 정책과 공약의 제시는 처음부터 뒷전이었고 시종 거친 비방전이 이어졌다.특히 지난주 선거판을 달군 개혁신당 이준석 대선 후보와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발언은 원색적인 ‘언어 폭력’ 그 자체였다. 반성인지 변명인지 알 수 없는 사과는 더 어이없었다. 이 후보는 “심심한 사과를 하겠다”면서도 “그대로 옮겨서 전한 것이기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카메라 앵글 밖에서 했어도 문제 됐을 막말을 어린아이들까지 지켜보는 황금시간대에 지상파를 통해서 했다는 것은 어떤 이유를 갖다 대도 정당화하기 힘든 일이다.유 전 이사장의 경우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의 배우자인 설난영 여사에 대한 자신의 말이 “거칠었던 것은 인정한다”면서도 “여성·노동 비하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진보 진영에서조차 “여성을 일반화해 비하하고 노동자를 멸시한 엘리트주의 발언”(권영국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노무현 대통령을 고졸 출신 대통령이라고 조롱했던 그들과 다를 게 무엇이냐”(한국노총) 등의 지적이 나오는 마당이다.막말과 비하, 비방으로 얼룩진 선거전이 부를 부작용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대선 후 가장 시급한 정치·사회적 과제인 ‘국민 통합’을 저해하는 결정적인 장애물이 될 것이다. 또한 한국 민주주의의 복원 과정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상황에서, 저급한 선거전이 한국의 이미지에 끼치게 될 악영향도 그냥 간과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선거전 막판까지 가뜩이나 부실한 ‘정책 경쟁’과 ‘공약 검증’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돼버렸다는 점이다.지금 한국 경제는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와 양상은 다르지만, 그 심각성 면에서 결코 못하지 않은 중증(重症) 위기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다. 외환위기가 ‘빚으로 쌓아 올린 거품’이 꺼지면서 일시적으로 발생한 ‘유동성 위기’였다면, 지금은 성장엔진 자체가 꺼져가는 구조적이고 만성적인 위기라고 할 수 있다.최근 한국은행은 우리 경제의 올해 성장률 전망을 1.5%에서 0.8%로 대폭 낮췄는데, 이는 국제통화기금(IMF)이 4월 발표한 올해 세계 경제 성장률 전망치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앞서 1분기 우리 경제의 성장률(―0.2%)은 주요 19개국 가운데 꼴찌였다. 과거 ‘경제 모범생’ 한국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들이 2∼7년 만에 뛰어넘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의 벽’에 11년째 갇혀 있는 가운데, 성장률은 무섭게 추락하고 있다.더 암울한 것은 잠재성장률의 하락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기본 시나리오)은 2025∼2030년 1.5%에서 2031∼2040년 0.7%, 2041∼2050년 0.1%로 곤두박질칠 전망이다. 비관적 시나리오로는 2040년대 후반부터 ‘마이너스 성장 시대’로 진입한다. 즉, 앞으로는 고물가를 각오하고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지 않는 한 1%대 성장 또는 0%대 성장 또는 마이너스 성장 중 하나를 오락가락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이런 현실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 김 후보가 공통적으로 내건 ‘잠재성장률 3% 달성’ 공약은 사실상 ‘기적을 행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물론 도전적인 목표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다. 문제는 도전적인 목표를 얼마나 구체적인 정책으로 뒷받침하느냐 하는 것이다.정상적인 선거전이라면 그 내용이 공약집 등을 통해 유권자들에게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갖고 전달됐어야 한다. 또한 그 내용은 후보들 간의 토론을 통해 철저하게 검증이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김 후보는 2차 TV토론이 끝난 뒤, 이 후보는 3차례 TV토론이 모두 끝난 뒤에야 공약집을 내놨다. 그러니 제대로 된 정책 토론이 이뤄지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이제 본투표까지는 하루가 남았다. ‘내란 심판’도 중요하고, ‘후보나 가족의 리스크’에 대한 검증도 중요하다. 그건 그것대로 투표장까지 안고 가자. 다만 2일 하루만이라도 한국 경제의 추락에 제동을 걸 후보가 누구인지를 차분히 따져 보는, ‘온전히 미래를 위한 시간’이 됐으면 싶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 202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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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尹 반성 없는 탈당, 김문수에게 얼마나 도움 될까

    “대통령의 심기를 살피며 두 명의 당 대표를 강제로 끌어내렸고 (중략) 그런 움직임을 추종했거나 말리지 못한 정치, 즉 권력에 줄 서는 정치가 결국 계엄과 같은 처참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국민의힘 윤희숙 여의도연구원장이 지난달 24일 정강·정책 방송 연설에서 윤석열 대통령 집권 중 보여준 자당의 행태를 반성하면서 했던 말이다. 윤 원장은 “얼마 전 파면당하고 사저로 돌아간 대통령은 ‘이기고 돌아왔다’고 말했다. 무엇을 이겼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에 남겨진 것은 깊은 좌절과 국민의 외면뿐”이라고 했다. 지도부 ‘묵인’하에 당 공식 싱크탱크 책임자가 방송에 대고 한 말이니 많은 당원들이 공감하는 바일 것이다. 국민의힘에 ‘깊은 좌절과 국민의 외면’만 안긴 윤 전 대통령이 17일 탈당했다. 김용태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등의 압박에도 수일간 버티기로 일관하던 윤 전 대통령이 탈당을 결정한 데는 최근 여론조사 결과들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주 15일 나온 엠브레인퍼블릭 등 4개 사의 전국지표조사(NBS)와 16일 발표된 한국갤럽의 조사에서 김문수 후보에 대한 지지율은 각각 27%와 29%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모두 20%포인트 넘게 뒤진 것으로 나타났다. 윤 전 대통령은 최근까지도, 탄핵 국면 당시 자신의 지지율이 40∼50%에 달했기 때문에 자신이 당적을 유지하는 것이 김 후보의 대선 승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주변에 내비쳤다고 한다. 이중삼중 ‘확증편향’의 벽으로 둘러싸인 윤 전 대통령의 이런 ‘자아도취적 착각’도, 거듭 확인되는 충격적인 수치 앞에서는 결국 ‘현타(현실자각 타임)’가 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배경이 무엇이건 이제 중요한 것은 윤 전 대통령의 탈당이 김 후보의 불리한 판세 극복, 특히 중도 확장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리저리 둘러봐도 큰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대선까지 겨우 17일이 남은, 너무 늦은 시점에 탈당이 이뤄졌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일 수 있겠으나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윤 전 대통령은 17일 오전 페이스북에 탈당 선언문을 올리면서 그간의 비민주적 당 운영이나 불법 계엄 등에 대한 반성이나 사과는 일절 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민의 힘을 떠나는 것은 대선 승리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 “이번 선거가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기회” 운운하며 자신의 탈당이 구국(救國)과 구당(救黨)의 ‘용단’이라도 되는 것처럼 포장했다. 이래서야 12·3 비상계엄에 대해 비판적 여론이 강한 중도층에 무슨 ‘감흥’을 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위헌·위법한 계엄으로 헌법재판소에서 파면을 당한 윤 전 대통령에게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수호를 말할 자격이나 염치가 있는가. 헌재가 윤 전 대통령의 파면 사유로 든 ‘자유민주주의-법치주의 파괴 사례’만 한번 간단히 꼽아보자. 헌법과 계엄법에 명시된 비상계엄의 실체적 요건 및 절차적 요건 위반, 국군의 정치적 중립성 침해, 헌법에 따른 국군 통수 의무 위반, 국민의 정치적 기본권-단체행동권-직업의 자유 침해, 영장주의 위반, 선관위 독립성 침해, 사법권의 독립 침해…. 어느 것 하나 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더구나 윤 전 대통령은 지금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에는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의 부관이었던 20대 대위까지 법정에 나와 전화로 윤 전 대통령이 이 전 사령관에게 ‘총 쏴서라도 들어가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밝히는 등, 윤 전 대통령의 주장을 뒤엎는 현장 군인들의 증언이 이어지는 중이다. “법치” 운운하기는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윤 전 대통령은 이번 탈당 선언문에 앞서 11일에도 김 후보 지지를 호소하는 메시지를 낸 적이 있는데, 지난주 NBS 조사에는 그 메시지가 김 후보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물은 항목이 있다. 결과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응답(53%)이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응답(13%)을 압도했다. 중도층에서는 60% 대 7%로 격차가 더 컸다. 윤 전 대통령은 이번에 탈당 선언을 하면서 “백의종군(白衣從軍)”도 언급했다. 행여라도 탈당한 상태에서 김 후보의 당선을 돕기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뜻이라면, NBS 조사 결과에 나타난 민의를 곱씹어 보기 바란다.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훼손한 과오를 반성하고 사과하기 전까지는 어떤 말과 행동도 ‘역효과’만 날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아야 한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 202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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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사법 리스크, 신뢰 리스크, 폭주 리스크

    “진짜 개싸움이 시작됐다. 개싸움을 할 때는 룰 따지는 거 아니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의원이 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이재명 대선 후보에 대한 대법원의 ‘유죄 취지’ 파기환송 판결 이후 민주당의 반발이 도를 넘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헌정 사상 단 한 번의 시도조차 없었던 대법원장 탄핵 카드까지 꺼내 들었다. 3일 민주당 초선 의원 모임인 ‘더민초’가 먼저 “조희대 대법원장 탄핵소추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운을 뗐고, 4일에는 당차원에서 의원총회를 열어 탄핵 여부에 대해 논의했다. 민주당이 실제로 실행에 들어가면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32번째 탄핵소추안 발의’가 된다. 민주당이 최종 결정은 일단 유보했지만, 이 후보 재판과 아무 관계도 없는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에 대한 탄핵소추안 표결을 강행했던 민주당이고 보면 단순히 ‘엄포용’으로만 보기도 어렵다. 한국 경제가 벼랑 끝에 내몰릴 수도 있는 한미 관세 협상이 한참 진행되는 긴박한 상황에 ‘통상 사령탑’을 내쫓는 게 상식적인 사고방식으로 예측이나 할 수 있던 일인가. 탄핵뿐만이 아니다. 김민석 최고위원이 4일 언급한 특검과 국정조사 등도 현실화하지 말란 법이 없다. 과반 의석을 무기로 한 ‘입법 공세’는 더 광범위하고 파상적이다. 대법원 판결이 나온 다음 날부터 이 후보의 ‘사법 리스크’를 차단하려는 ‘방탄성 법안’ 발의가 줄을 잇고 있다.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형사 재판을 받지 않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시작으로, 아예 대법원 구성을 놓고 ‘새판 짜기’를 하겠다는 취지의 법안도 복수(複數)로 등장했다. 현재 14명(대법원장 포함)인 대법관을 30명으로 증원하는 내용의 법원조직법 개정안도 그중 하나인데, 대선에서 이기면 현 대법관들의 임기가 끝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대법원 구성을 일거에 유리하게 바꿔 놓겠다는 의도가 비친다. 판사·검사에 대해 ‘법 왜곡죄’를 신설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도 발의됐다. 대법원 판결을 헌법소원으로 다퉈볼 수 있도록 하는 헌법재판소법 개정안 발의 예고도 나왔다. 현재 3심제인 재판제도를 사실상 4심제로 바꿔 놓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금도 고질적인 지연이 문제로 꼽히는 재판이 더 길어지고 그에 따라 소송 비용도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 대표 한 사람의 사법 리스크를 해소하기 위해 전 국민에게 부담이 될 법안을 불쑥 꺼내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인가. 해당 법안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거센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지만, 더 본질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의 부원장을 지낸 한 인사는 2일 유튜브에 출연해 “삼권분립이라는 것이 이제 막을 내려야 될 시대가 아닌가”라고 말을 했는데, 민주당이 들고나온 압박 및 입법 조치의 절반만 실행돼도 ‘삼권분립’은 저절로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나타난 89.77%의 기록적 득표율이 보여주듯 민주당 내부는 ‘이재명 일극(一極) 체제’가 빈틈없이 완성된 상태다. 이런 민주당은 국회에서 170석에 이르는 압도적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이 대표가 이긴다면 입법권력과 행정권력이 ‘물리적’ 수준을 넘어 ‘화학적’ 결합을 하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과도한 권력 집중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인데, 민주당이 사법부까지 손안에 틀어쥐게 되면 ‘무소불위 절대권력의 탄생’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물론 대법원의 판결이라고 해서 성역은 아니다. 합리적인 범위 안에서라면 얼마든지 비판이 가능하다. 하지만 자신에 불리한 판결을 했다고 해서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작동 원리인 ‘삼권분립’의 틀마저 흔들려 해선 안 된다. 그런 행태는 누구보다 주권자인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도둑으로부터 집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번견(番犬)이 아닌 맹수를, 그것도 우리를 부수고 목줄마저 끊어버리고 뛰쳐나오려는 맹수를 집안에 들여놓는 집주인은 없을 것이다. 지금 이 후보의 대선 가도에 ‘가장’ 큰 변수가 있다면 그것은 대법원의 판결로 인한 ‘사법 리스크’나, 이 후보의 잦은 말 바꾸기로 인한 ‘신뢰 리스크’가 아니다. 절제할 줄 모르는 권력의 ‘폭주 리스크’를 국민, 특히 중도층의 뇌리에 각인시키는 일일 것이다. 이 후보와 민주당에 지금 필요한 것은 스스로 멈추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 2025-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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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청와대로 돌아가면 될까

    용산 대통령실 시대가 머지않아 막을 내릴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대선 유력 후보들 다수가 용산행을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18일 열린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경선 첫 TV 토론에서는 대통령실 재(再)이전 문제가 핵심 이슈 중 하나였다. 이재명 후보는 “용산 대통령실을 잠시 사용하다가 청와대를 보수해 집무실로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김경수 김동연 후보는 용산에 아예 가지 않겠다고 했다. 국민의힘에서는 홍준표 안철수 후보가 청와대 복귀, 유정복 이철우 후보가 각각 세종과 충남 이전을 주장하고 있다. 다른 후보들은 유보적 태도다. 최소한 “용산을 고수하겠다”는 후보는 아직 없다. 세종 이전 시 먼저 정리해야 할 개헌 논란과 후보 지지율 판세 등을 감안하면 청와대 복귀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셈이다. 이렇게 되면 용산 집무실과 관저를 개축하고 이전하느라고 쓴 혈세는 아무 의미 없이 허비돼 버린 매몰비용이 되는 셈이다. 비단 돈만의 문제가 아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대통령실 이전을 인수위원회의 1호 사업으로 선정해 밀어붙였다. 집권 5년 청사진을 설계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무리한 계획을 강행하느라 소중한 시간과 국정 동력을 허비했다. 국가적으로 보면 ‘수백억 원이네, 1조 원이네’ 하는 이전 비용보다 이쪽이 더 큰 손실일 수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이 ‘저지른 일’이니, 차기 대통령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용산을 떠나면 되는 것일까. 한국에서 ‘불행한 대통령’의 역사가 끝없이 반복되는 것은 후임자들이 전임자들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윤 전 대통령만 하더라도, 앞서 탄핵을 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불통’과 ‘비선정치’를 반면교사로 삼았더라면 김용현과 같은 소수 측근과 모의해 ‘자폭성 계엄’을 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의 실패를 자기 일처럼 곱씹어 보지 않으면, 차기 대통령도 비슷한 전철을 밟지 말란 법이 없다. 윤 전 대통령의 ‘탈(脫)청와대’가 실패한 원인은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데 있다. 윤 전 대통령이 대통령실 이전을 추진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국민과의 소통, 언론과의 소통이었다. 하지만 ‘공간’에만 사로잡혀 ‘소통’이라는 대통령실 이전의 목적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용산 이전의 전(全) 과정이 ‘불통’ 그 자체였다. 대통령실 이전의 상징 중 하나였던 출근길 문답은 6개월여 만에 없는 일이 됐고, 그 자리에는 기자들의 눈을 가리기 위한 가림막이 설치됐다. 정식 기자회견은 건너뛰고 그 공백을 자신의 입맛에 맞는 특정 언론사만 불러서 하는 녹화 대담이나 인터뷰로 채웠다. “이른바 파우치, 외국 회사 그 뭐 쪼만한 백”과 같은 아부성 발언이 질문을 대신한 결과 ‘여사 리스크’는 걷잡을 수 없게 커졌고 그것은 다시 총선 참패→야당과의 대치 심화→무모한 비상계엄을 거쳐 대통령직 파면에 이르는 일파만파의 후폭풍을 낳았다. 해외의 사례지만,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전 멕시코 대통령의 경우는 윤 전 대통령과 좋은 대비를 보인다. 오브라도르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거의 매일 오전 7시에 생중계 기자회견을 했다. 임기 중 1400번이 넘는 회견을 할 정도로 소통을 열심히 한 그의 지지율은 퇴임 무렵에도 70%에 가까웠다. 정권 재창출에도 성공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매일 아침 정례 기자회견을 하는 전통은 후임자인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현 대통령도 이어받았다. 윤 전 대통령의 출근길 문답처럼 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 몇 마디 던지고 끝내는 방식이 아니다. 대통령이 관련 각료나 전문가들과 함께 사전에 준비한 자료를 충실히 설명한 뒤, 기자들이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매일 하는 회견이 2시간 가까이 걸릴 때도 있다. 뛰어난 업무 능력에 이 같은 ‘소통의 힘’이 더해진 결과 셰인바움 대통령의 지지율은 85%를 찍을 정도로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다시 우리 대선 이야기로 돌아오면, 민주당이든 국민의힘이든 ‘용산이냐 청와대냐 세종이냐’의 갑론을박은 있지만, 용산 이전과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 안전장치인 ‘소통’을 강화하려는 강한 의지나 실효성 있는 공약은 보이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탈청와대’ 공약을 내걸었던 대선 후보는 윤 전 대통령뿐이 아니다. 김대중, 이회창, 문재인 후보도 같은 공약을 내걸었다. 그만큼 우리 헌정사에서 청와대는 뿌리 깊은 불통과 권위주의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고민과 해답 없이 그냥 청와대로 들어가는 것은 이쪽저쪽 방향만 다를 뿐 ‘용산 흑역사’를 되풀이하는 일이 될 것이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 2025-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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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결국 ‘법기술자 윤석열’이 ‘대통령 윤석열’ 잡았다

    탄핵심판 변론에 출석하지 않았던 노무현·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과 달리 윤석열 전 대통령은 총 11차례 중 8차례의 변론에 나왔다. 단순히 출석만 한 것이 아니라 변호사에게 귓속말이나 메모를 건네며 변론을 진두지휘하다시피 했고, 중요한 대목에서는 본인이 직접 나서서 많은 말을 쏟아냈다. 여기에는 자신이 ‘검찰총장을 지낸 우리나라 최고의 법 전문가’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이 그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법 전문가’라기보다는 ‘법 기술자’에 가까웠다. 뻔해 보이는 거짓을 사실로 포장하거나, 궤변이나 억지를 막무가내로 늘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윤 전 대통령은 이렇게 함으로써 헌재재판관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으로 봤겠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번 헌재 결정문을 자세히 보면 윤 전 대통령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쏟아낸 말들이 윤 대통령의 다른 핵심적인 주장과 논리를 무너뜨리는 주된 근거로 인용됐다는 사실을 여기저기서 확인할 수 있다. ‘법 기술자 윤석열’이 ‘대통령 윤석열’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예컨대 헌재는 ‘비상계엄 선포의 목적은 군사상 필요에 따르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계엄법 2조 2항에 12·3 비상계엄이 위배되는지 여부를 판단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피청구인(윤 전 대통령)은 줄곧 이번 계엄이 야당의 전횡과 국정 위기 상황을 국민에게 알리고 호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선포된 ‘경고성 계엄’ 또는 ‘호소형 계엄’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만으로도 피청구인이 이번 계엄을 중대한 위기 상황에서 비롯된 군사상 필요에 따르거나 위기 상황으로 인하여 훼손된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선포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어 헌재는 ‘대국민 호소’라는 목적 자체도 진실성이 없다고 판단했는데, 그 주된 논거 중 하나가 “계엄 해제에 적어도 며칠 걸릴 것으로 예상했는데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고 한 윤 전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이뿐 아니다.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는 문서로써 하며, 이 문서에는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副署)한다. 군사에 관한 것도 또한 같다’고 돼 있는 헌법 82조와 관련해서, 윤 전 대통령은 ‘보안상의 이유 때문에 이를 이행할 수 없었다’는 취지로 변명했다. 그러나 헌재는 “대통령실 대접견실에 국무회의 구성원 11명이 모여 있을 때 부속실장 강OO가 계엄선포문 10부를 복사하여 김용현에게 전달했다”고 한 윤 전 대통령의 발언을 들어 앞부분 윤 전 대통령의 ‘변명’은 수긍하기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국회의원의 국회 출입 통제 논란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윤 전 대통령은 8차 변론에서 “종이를 놓고 (김용현) 장관이 경찰청장하고 서울청장에게 국회 외곽의 어느 쪽에 경찰 병력을 배치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제가 봤습니다”라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은 다른 의도로 이 말을 했지만, 헌재는 이를 “경찰로 하여금 국회의원의 출입을 통제하도록 한 사실이 없다”는 윤 전 대통령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판단하는 증거로 삼았다. 이번 탄핵정국을 돌이켜보면 심판 절차가 진행된 4개월간 탄핵 찬성 의견이 줄곧 반대를 압도했다. 한국갤럽 조사를 기준으로 두 답변의 격차가 가장 좁혀졌을 때가 57% 대 38%, 19%포인트 차이였다. 우리 국민들이 복잡한 법적 쟁점을 조목조목 가려가며 이런 판단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 이상 국가긴급권이 정치적 목적으로 남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국민에게 큰 충격을 던지고도, 반성은커녕 변명과 거짓으로 일관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이런 숫자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번 결정문에는 헌재가 ‘이런 국민 불신과 불안을 이심전심으로 읽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구절이 있다. “만약 피청구인이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다시금 행사하게 된다면, 국민으로서는 피청구인이 헌법상 권한을 행사할 때마다 헌법이 규정한 것과는 다른 숨은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지, (중략) 끊임없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피청구인의 권한 행사에 대한 불신은 점차 쌓일 수밖에 없고, 이는 국정운영은 물론 사회 전체에 극심한 혼란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이 대목이 헌재가 대통령 파면을 결정하게 된 가장 중대한 사유라고 본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의 신임을 잃은 대통령’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민의 신임을 잃은 민주국가의 대통령이란 ‘호수 위에 뜬 달그림자’일 뿐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 2025-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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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나는 돼지’에 추월당한 한국… 삼성만 ‘사즉생’하면 될까

    주식 투자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치고 ‘금양’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2023년 2차 전지 테마주 열풍을 주도했던 업체 중 하나다. 당시 ‘K배터리 예찬론’을 폈던 이 회사의 홍보이사는 개미 투자자들 사이에서 “밧데리 아저씨”란 애칭으로 불리며 ‘추앙’받았다. “전기차 혁명의 주역은 테슬라가 아니고, 중국 배터리 기업도 아닌 K배터리”라는 믿음이 전파되면서 이 회사 주가는 그해 7월 15만9100원까지 치솟았다. 그로부터 1년 8개월가량 지난 이달 21일 현재 주가는 9900원. ‘16분의 1토막’이 났다. 실적 부진에 더해 회계 감사 문제까지 겹쳐 상장폐지 위기를 맞고 있다. 안타깝지만, 불과 한두 해 전까지 “반도체 다음으로 한국을 먹여 살릴 산업”으로 주목받던 K배터리가 처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대기업들은 이보다는 사정이 훨씬 낫지만 고전 중이기는 마찬가지다. 중국 기업에 밀려서다.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의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사용량 시장점유율’은 1위인 중국 CATL은 쳐다볼 수도 없고, 3사를 다 합해야 2위인 중국의 BYD와 겨우 어깨를 나란히 한다. 물론 여기에는 방대한 중국 내수시장의 존재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중국 이외 지역에서도 중국 업체에 밀리는 추세가 뚜렷하다. 일례로 유럽 시장에서 중국 기업의 시장점유율은 2021년 18.4%에서 지난해 49.7%로 급등했다. 반면, 한국 기업의 점유율은 같은 기간 70.9%에서 45.1%로 주저앉았다. 전기차 분야에서는 이미 중국이 한국을 까마득히 앞서가고 있다. 2023년 미국의 테슬라를 제치고 전 세계 전기차 판매 1위 타이틀을 거머쥔 BYD는 이달 18일 세계 자동차 업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발표를 했다. 5분 정도 충전하면 400km 이상을 주행할 수 있는 초고속 충전 시스템을 공개한 것이다. 이 기술이 안정적으로 상용화되면 내연기관 자동차의 기름 넣는 시간이나 전기차 충전 시간이 비슷해져, 전기차 보급의 최대 장벽 중 하나가 사라지게 된다. 최근 중국의 굴기가 무서운 이유는 더 이상 가격 경쟁력만이 ‘메이드 인 차이나’의 유일한 무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 ‘대륙의 실수’라고 불렸던 스마트폰 제조업체 샤오미의 변신은 인상적이다. 지난해 매출과 순이익을 각각 35%와 41% 늘리며 역대 최고 실적을 달성하더니, 최근 대당 가격이 227만 원에 이르는 ‘초고가 라인업’을 출시하며 프리미엄 시장에서 삼성전자 및 애플과 본격 승부를 예고했다. 샤오미는 스마트폰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1억 원이 넘는 고가 전기차 시장에도 뛰어든 상태다. 한국이 압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자부해 왔던 반도체나 가전(家電)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반도체는 공정이나 양산 부분에서는 앞서고 있지만, 기초연구와 설계 기술 분야에서 이미 중국이 한국을 추월했다는 것이 우리 전문가들의 평가다. 가전제품은 가성비나 품질 수준이 기대치를 월등히 뛰어넘어 ‘이제는 중국산이라는 게 유일한 단점’이라는 말이 나온다. 인공지능(AI)이나 양자컴퓨팅 같은 미래 첨단 분야에서는 한국이 중국에 명함도 못 내미는 처지다. 이런 추세라면 5∼10년 뒤 한국이 중국에 확실하게 우위를 갖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산업이 하나라도 남아 있을지 의문이다. 샤오미의 레이쥔(雷軍) 회장은 비즈니스의 성공 비결과 관련해 “태풍의 길목에 서면 돼지도 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과거 중국 기업들의 비상(飛上)에는 14억 인구에서 나온 저임(低賃) 경쟁력, 세계무역기구(WTO) 질서를 통한 자유무역의 확대 등 ‘태풍’이 크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중국 기업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기술력과 제품 경쟁력은 트럼프 1기와 바이든 정부 8년간 미국의 집중 견제를 받으면서 쌓아 올린 것이다. 더 이상 바람에 몸을 실어야 하는 돼지가 아니라, 스스로 바람을 부리며 날 수 있는 ‘용’이 된 셈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최근 삼성 전 임원들에게 “삼성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면서 ‘승부에 독한 삼성인’을 강조한 것은 이런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삼성이 아무리 사즉생(死則生)의 각오로 덤빈다고 해도, 국가의 명운이 걸린 ‘반도체특별법’ 하나 처리 못 하는 정치권과 정부를 그대로 두고서는, 민관이 총력전을 펴는 중국을 상대로 승리는커녕 생존조차 장담하기 어렵다. 더구나 국가적 에너지의 대부분을 ‘아스팔트’에 쏟아부으며 경쟁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 202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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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5100만분의 1 ‘법아귀’ 주인공 된 윤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이 8일 서울구치소에서 풀려나 관저로 돌아갔다. 법원의 구속 취소에 이은 검찰의 항고 포기로 이제부터는 불구속 상태에서 ‘내란 우두머리’ 혐의에 대한 재판을 받게 됐다. ‘무죄 추정 원칙’에 따라 피고인에게 충분한 방어권을 보장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다만 어떤 경우에든 법치의 근간에 해당하는, 공정성과 형평성을 해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것처럼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식의 뒤틀린 정의(正義)로는 ‘법치’가 유지될 수 없다. 계엄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구속 기소된 피고인은 윤 대통령을 빼고 10명이다. 건강이 좋지 않은 조지호 경찰청장만 조건부로 보석을 허가받았고, 나머지는 모두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다. 헌정 질서를 통째로 무너뜨릴 수도 있는, 내란죄의 위험성과 중대성에 비춰 볼 때 이들에 대한 ‘구속 재판’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윤 대통령이 풀려남으로써 ‘내란의 종사자’들은 구속 재판을 받고 그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피고인만 불구속 재판을 받는 불공정하고 차별적인 상황이 연출되게 됐다는 점이다. 공정성과 형평성의 문제는 비단 내란 피고인 그룹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이번에 법원이 윤 대통령에 대해 구속 취소 결정을 내리면서 처음으로 꼽은 사유는 ‘검찰의 구속기간 계산 잘못’이다.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위해 수사 서류가 법원에 있었던 기간을 ‘구속기간’에서 뺄 때 날짜 단위가 아닌 실제 시간 단위로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자체가 잘못된 법 해석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더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 대목은 이 결정이 지금까지의 관행을 180도 뒤집는 결정이라는 점이다. 즉, 기간 계산을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하필 윤 대통령 사례에 이를 처음 적용하는 것은 ‘법불아귀(法不阿貴·법은 권력자나 신분이 귀한 자에게 아부하지 않는다)’의 정신에 심각한 의문부호를 찍는 일이다. 물론 법원이 일부러 특혜를 주기 위해 이런 결정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윤 대통령과 변호인들이 끝없이 공세를 펴 온 공수처의 수사권 행사 절차 및 과정과 관련해서 재판부가 설명자료를 통해 밝힌 내용을 보면 그 나름의 깊은 고민이 배어난다. 재판부는 “윤 대통령 측의 주장과 관련해 공수처법 등 관련 법령에 명확한 규정이 없고, 대법원의 해석이나 판단도 없는 상태”라면서 “이런 논란을 그대로 두고 재판을 진행할 경우 상급심에서 파기 사유나,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재심 사유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의 이런 우려에는 공감이 가는 대목이 적지 않다. 국회는 공수처법을 만들면서 시비와 분쟁이 생길 수 있는 여지를 여기저기에 남겼다. 공수처와 검찰은 수사 초기에는 주도권 경쟁과 공 다툼을 하느라, 기소 임박 단계에서는 우왕좌왕 시간을 끄느라 ‘절차적 시비’의 단초를 제공했다. 여기에 더해 검찰은 항고를 통해 상급 법원의 판단을 받아 볼 수 있는 권리마저 스스로 내팽개쳤다. 과거 기계적, 습관적으로 항소·항고를 하던 검찰의 기세가 유독 윤 대통령 앞에서만 고분고분해졌다. 책임 소재를 떠나, 하나 분명한 사실은 윤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라는 중대한 혐의를 받으면서도 5100만 우리 국민 중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한 ‘특별한 방어권’을 적용받게 됐다는 사실이다. 과거 어느 정치지도자보다 ‘법치’와 ‘공정’을 소리 높여 강조해 온 윤 대통령이 ‘법아귀(法阿貴)’의 주인공이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윤 대통령과 변호인단은 내란죄 수사뿐 아니라 헌재 탄핵 심판 과정에서도 끊임없는 방어권 논란을 제기해 왔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총 11차례의 변론 중 8차례 참석해서 발언했고, 마지막 변론에서는 무제한 최후진술까지 했다. ‘트럼프 태풍’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인용이든 기각이든, 리더십 공백을 하루속히 메워야 하는 시급성에 비춰 볼 때 변론을 무한정 허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방어권은 충분히 보장되고도 남았다고 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더 이상 ‘절차’를 놓고 왈가왈부해선 안 된다. 이제는 ‘실체’를 말할 때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았던 계엄의 진짜 동기는 무엇인지, ‘500명 수거 및 처리’ 등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알고 지시했는지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해명할 것은 해명해야 한다. 헌재든 형사재판에서든 어떤 결정이 나와도 수용하고 승복하겠다고 스스로 약속하고, 지지층에도 당부해야 한다. 그것이 5100만분의 1, 특별한 방어권을 누리고 있는 윤 대통령이 마땅히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 2025-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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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햄버거집서 ‘내란’ 모의하는 나라, ‘5천조 기업’ 창업하는 나라

    인공지능(AI)용 반도체 제조업체인 엔비디아의 21일 현재 시가총액은 약 4736조 원이다. 올해 우리나라 총예산의 7배에 이르는 금액이다. 요즘 반도체 주식이 약세인데도 이 정도다. 엔비디아는 본사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 있는데, ‘발상지’도 멀지 않다. 자동차로 15∼20분 거리다. 치즈버거를 비롯해 토스트, 팬케이크 등을 파는 패밀리 레스토랑 데니스가 그곳이다. 10대 시절부터 데니스에서 접시닦이 알바를 한 경험이 있는 젠슨 황은 데니스 구석 자리에 죽치고 앉아 동료들과 함께 사업을 구상했고, 그 결과로 1993년 엔비디아가 탄생했다. 미국 전역에 1300여 개 점포를 가진 데니스는 한국으로 치면 롯데리아 같은 곳이다. 한국 젊은이들도 롯데리아에 앉아 ‘조 단위 시총’ 기업을 창업하는 꿈을 키울 수 있을까. 가벼운 상상만으로도 무리일 것 같다. 검찰과 경찰의 내란 혐의 수사로 백일하에 드러났듯이, 불명예 전역한 예비역 군인이 현역 정보사령관과 영관급 장교들을 불러 모아 놓고 선거관리위원회에 쳐들어가 서버를 탈취하고, 직원들을 감금·폭행할 모의를 한 장소가 롯데리아다. 한 공간에 이 두 행위가 공존하는 것을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당나라 군대’에서나 있을 법한 ‘롯데리아 모의’가 2024년 한국에서 벌어진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특별히 가슴이 쓰려 오는 대목이 하나 더 있다. ‘햄버거집에서 시총 3조 달러짜리 기업을 창업하는 나라’와 ‘햄버거집에서 내란 모의하는 나라’의 극명한 대비가 요즘 현실 세계에서 너무나 실감 나게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한 달여간 행보를 보면, 2기 트럼피즘의 실체는 더 볼 필요도 없이 명확하다. 모든 문제를 미국 국익과 관련된 돈과 비즈니스로 환원시키는 ‘경제 지상주의’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내놓은 가자지구 해법에 230만 팔레스타인인들의 생존권이나 인권은 안중에 없다. 부동산 개발업자 출신답게 그의 눈에는 해안 휴양지로서의 개발 가능성이 우선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終戰)과 관련해서도 ‘약소국을 침탈하는 강대국의 횡포’나 ‘전통적인 우방인 유럽 국가들의 안보’ 따위는 트럼프 사전에 없다. 미국의 도움 없이는 전쟁 수행이 불가능한 우크라이나의 처지를 이용해 희토류와 같은 자원을 챙길 계산부터 하는 게, 트럼프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이다. 한국을 “머니 머신”이라고 부르는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를 어떻게 대할지 예상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노선이 옳고 그른지는 둘째 문제다. 힘의 논리가 우선하는 국제 정치의 세계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국가들이 트럼프 대통령 ‘코드 맞추기’나 ‘대응 태세 구축’에 들어간 상태다. 캐나다는 “미국의 51번째 주”라는 거듭된 조롱까지 꾹꾹 참아가며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에 맞춰 대대적인 펜타닐 단속에 나서고 있다. 일본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이달 초 일찌감치 트럼프 대통령을 찾아가 ‘1조 달러짜리 대미 투자’와 ‘방위비 증액’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상호관세의 주요 표적 중 하나인 유럽 국가들의 정상도 잰걸음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각각 24일과 27일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다. 중국은 빅테크 기업들을 대미(對美) 전선의 선봉에 세우고 ‘경제 대 경제’로 대응하는 카드를 빼 들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17일 중국의 간판급 빅테크기업 CEO들을 부르면서, 그간 ‘괘씸죄’에 걸려 은둔 생활을 해온 마윈 알리바바 창업주를 함께 불렀는데 작년까지의 중국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그림이다. 더 주목해야 할 게 있다. 경제보다 이념을 앞세우고 ‘공동부유(共同富裕·분배중시론)’를 주창해 온 시 주석이 CEO들 앞에서 “선부(先富·성장우선론)”까지 공공연히 언급하고 나선 점이다.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이다. 트럼피즘과 함께 밀려오는 거대한 파고 앞에 오직 한국만이 속수무책이고 무사태평이다. 대통령 권한대행인 최상목 부총리는 여태껏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 한 통 못 하는 처지다. 여당은 ‘12·3 비상계엄’의 후폭풍에 휩싸여 국정을 주도할 의지와 능력을 상실한 상태다. 야당은 “먹사니즘”이다 “잘사니즘”이다 말만 요란했지, 입법으로 보여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런 여야정이 마주 앉은 국정협의회이니 뾰족한 결과물이 나올 리 만무하다. 자동차·반도체 등 한국의 주력 수출품을 겨냥한 관세 폭탄의 시곗바늘만 무심하게 돌아가고 있다. 중요한 시기에 나라를 이런 궁지에 몰아넣은 ‘대한민국 1호 세일즈맨’의 책임이 크고도 무겁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 2025-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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