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민

하정민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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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하정민 기자입니다.

dew@donga.com

취재분야

2025-11-05~2025-12-05
칼럼68%
미국/북미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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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하정민]美中 패권 전쟁의 새 전선, 양자 컴퓨팅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7월 도널드 트럼프 1기 미국 행정부는 “민관 합동으로 양자 인터넷 구축을 추진하겠다”는 이색적인 발표를 내놨다. 양자 인터넷은 정보량이 늘면 속도가 느려지는 일반 인터넷과 달리 양이 증가해도 속도가 유지된다. ‘0’과 ‘1’만 구분할 수 있는 기존 컴퓨터와 달리 ‘0’과 ‘1’을 동시에 공존시킬 수 있는 양자 컴퓨터의 특성 덕이다. 이를 추진한 사람은 폴 다바르 당시 미국 에너지부 차관. ‘전대미문의 보건 위기에 천문학적 세금을 들여 상용화 시점도 불분명한 사업을 추진하느냐’는 비판이 나올 법도 했다. 그는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기술 중 하나가 양자 인터넷”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또 차관 재직 당시 에너지부의 양자 연구 예산을 5배로 늘렸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출범 후 야인이 된 그는 보어퀀텀테크놀로지라는 양자 컴퓨팅 회사를 차렸다.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후 상무부 부장관으로 발탁돼 양자산업 지원을 주도하고 있다. 지난달 22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다바르 부장관이 아이온큐, 리게티컴퓨팅, 디웨이브퀀텀 등 주요 양자 컴퓨팅 업체에 각 1000만 달러(약 146억 원)를 지원하는 대신 이들 기업의 지분 일부를 매입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자금은 바이든 전 행정부가 도입한 반도체법(CHIPS act)에서 충당하고 다바르 부장관이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보어퀀텀을 제외한 거의 모든 기업이 지분 매입 대상에 올랐다고 덧붙였다. 집권 1기부터 ‘양자 이니셔티브 법’을 도입했던 트럼프 대통령의 관련 산업 육성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잘 보여 준다. 중국 또한 지난달 20∼23일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4중전회)를 통해 2026∼2030년 5년간 국가 경제를 먹여 살릴 산업으로 양자 컴퓨터, 6세대(6G) 통신, 수소 및 핵융합 에너지 등을 지목했다. 내수 부진을 타개해야 한다는 우려가 높지만 우선 첨단 산업의 경쟁력을 확보해 미국의 대(對)중국 기술 봉쇄를 타개하겠다는 수뇌부의 의지가 담겼다. 13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또한 중국 양자 연구소 ‘CHIPX’와 관련 기업 ‘튜링퀀텀’이 미국 반도체기업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보다 1000배 빠른 양자 반도체를 개발했다고 보도했다. 하루 전 미국 IBM 또한 4년 안에 상용화가 가능한 양자 컴퓨터 칩 ‘룬’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주요 2개국(G2) 정부와 민간 기업이 양자 컴퓨터에 이렇듯 사활을 걸고 있고 한국 또한 이를 육성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다만, ‘양자 강국’으로 거듭나려면 정부와 업계 전문가들 못지않게 사회 전반의 관심과 인식 전환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처음 만나는 양자의 세계’(채은미 저) 같은 양질의 교양 도서가 더 많이 출간되고 읽혀야 할 것이다. 교육 현장에서의 양자 연구 및 강의 또한 대폭 늘어나야 한다. 수준 높은 양자 역학 논의가 이뤄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 202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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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하정민]실리콘밸리의 996 근무, 한국의 주 4.5일제

    “996 근무는 ‘축복’이다. 이 제도가 없으면 중국 경제는 활력과 추진력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마윈(馬雲) 중국 알리바바 창업자는 2019년 4월 중국 정보기술(IT) 업계의 급성장을 가능케 했던 996 근무, 즉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9시에 퇴근하는 주 72시간 근무제를 칭송했다. 발언이 알려지자 “현대판 노예제” “근로자를 착취하는 경영자”란 비판이 일었다. 분배를 중시하는 ‘공동부유(共同富裕·다 같이 잘살기)’ 정책을 강조했던 중국 당국 또한 2021년 72시간 근무를 법으로 금했다. 중국에서 사라진 듯했던 이 문화가 최근 미국에서는 확산되는 분위기다. 또 필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뉴욕타임스(NYT), 워싱턴포스트(WP),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각국 언론은 실리콘밸리의 주요 스타트업은 물론이고 뉴욕 월가의 금융사, 법률회사 등에서도 주 70시간 이상 근무를 선호하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속속 보도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 등의 패권을 두고 중국과 치열하게 경쟁 중인 실리콘밸리에서는 상당수 기업이 근무 조건에 주 6일, 70시간 이상 근무를 내건다. ‘가성비’를 앞세운 중국의 생성형 AI ‘딥시크’에 일격을 얻어맞은 미국 빅테크 업계로선 “생존이 시급한데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워라밸’을 찾을 겨를이 있느냐”란 생각을 가질 법하다. 일부 스타트업은 주 7일 근무까지 자청한다.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AI 스타트업 ‘소나틱’은 채용 공고에 “일주일 내내 대면 근무를 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 대신 숙소, 음식 배달, 데이트앱 무료 구독 등을 지원한다. 또 다른 AI 스타트업 ‘릴라’ 또한 직원 80명 전원이 996 근무를 한다. 에릭 슈밋 전 구글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24일 팟캐스트 ‘올인’에 출연해 “중국의 워라밸은 996이다. 당국이 불법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아직도 다들 그렇게 일한다”며 “우리의 경쟁자는 중국”이라고 996 근무를 옹호했다. 세르게이 브린 구글 공동창업자 또한 “주 60시간이 생산성 향상을 위한 최적 지점”이라고 했다. 이 세상의 모든 근로자가 주 72시간 일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다만 열심히 일해서 남들보다 우수한 성과를 거두겠다는 일부 근로자의 의욕과 열의를 제도로 꺾는 일 또한 지양해야 한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은 대만의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8만5127달러(약 1억2258만 원)로 한국보다 2만 달러(약 2880만 원) 이상 많다고 진단했다. 올해 한국의 명목 1인당 GDP 또한 2003년 이후 22년 만에 대만에 추월당할 것이 확실시된다. 이처럼 한국이 눈에 띄는 성장 둔화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금융권을 중심으로 주 4.5일제 근무 논의가 제기된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해외 경쟁 없이 소위 ‘이자 장사’로 매년 수조 원의 이익을 보는 업계가 사회 전반의 경쟁력 약화에 앞장선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미슐랭 스리스타 셰프 안성재는 “지금의 워라밸을 지키면 미래의 워라밸은 없다”고 단언했다. 남들보다 적게 일하면서 더 많은 보상과 과실을 바라는 건 궤변이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 2025-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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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하정민]전승절 통해 역사왜곡 강화하는 중국

    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만에 정박한 미국 미주리함의 갑판.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당시 일본 외상이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을 공식화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승전국인 미국, 영국, 옛 소련, 중국 등의 주요 관계자 또한 이 문서에 속속 이름을 남겼다. 당시 중국 측 대표는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주석의 최측근 쉬융창(徐永昌) 중장. 장 주석은 하루 뒤인 같은 해 9월 3일 항복 문서를 전달받았고 이 날을 ‘전승절’로 정했다. 국민당 치하의 중국이 주도적으로 나섰기에 일본을 이겼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사실이 보여주듯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의 항일 주역은 국민당이었다. 중국공산당 또한 일부 전투에서 유격전으로 싸웠으나 국민당의 ‘보조’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이 전쟁으로 힘을 소진한 국민당은 공산당과의 내전에서는 졌고 대만으로 패퇴했다. 그간 중국의 역대 지도자는 자신들이 주역이 아닌 전승절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다르다. 그는 집권 이듬해인 2014년 전승절을 법정 기념일로 지정했다. 2015년 전승절 70주년, 올해 전승절 80주년에는 연달아 대규모 열병식을 개최했다. 또 당시 국민당의 역할을 모조리 부정하고 공산당의 치적만 부각시키고 있다. 시 주석의 역사 책사로 꼽히는 취칭산(曲靑山) 중국공산당 중앙당사·문헌연구원장의 행보를 보자. 그는 열병식 직후인 지난달 8일 공산당 기관지 런민일보에 “공산당이 ‘중류지주(中流砥柱·역경에 굴하지 않는 튼튼한 기둥)’ 역할을 한 것이 항일 전쟁의 승리 열쇠”라는 글을 실었다. 특히 취 원장은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한 1931년부터 공산당이 항일을 주도했으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보다 훨씬 이전이라고 강조했다. 서구 주요국이 파시즘에 대적하기 전부터 공산당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역사 인식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절대 다수의 역사학자는 중일 전쟁의 발발 시점을 베이징에 주둔하던 일본군 병사가 실종된 1937년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으로 본다. 반면 중국은 최근 주요 교과서 등에서 전쟁의 발발 시점을 만주사변으로 바꾸고 있다. ‘동북공정’ 등에서 보듯 주변국과 얽힌 역사를 일방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중국의 왜곡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제는 공산당에 유리하지 않은 역사까지 노골적으로 미화하며 수많은 문건과 자료로 입증된 국민당의 기여를 무시한다. 이는 결국 시 주석의 장기 집권 시도와 무관하지 않다는 평이 나온다. 시 주석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경제의 발전 기틀을 마련한 덩샤오핑(鄧小平)도 이루지 못한 대만 통일을 꿈꾸고 있다. 국민당의 업적을 폄훼해야 통일 시점이 빨라질 것이며 중국이 과거, 현재, 미래에도 유일한 초강대국이라는 서사 또한 구축하려 하는 그의 속내가 역사왜곡 시도에서 엿보인다. 최근 영국의 싱크탱크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는 러시아가 중국 공수부대의 낙하산 훈련 등을 지원하고 군수물자 이동 방법 또한 공유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최신의 실전 경험을 쌓은 러시아가 어떤 식으로든 중국의 대만 침공에 도움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한 것이다. 시 주석은 열병식 당시 자신보다 오래 집권 중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이번 세기에 인간이 150세까지 살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 이들이 있다”고 말했다. 불로장생을 꿈꾸는 두 권위주의 지도자의 협력이 대만해협을 넘어 전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고 있다.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 2025-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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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부동산학협동과정 2026년 전기 신입생 모집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이 부동산학 석·박사 과정의 2026년 전기 신입생을 모집한다. 원서 접수는 다음달 15~22일 진행된다.이번 과정의 교수진은 연구자, 도시재생 전문 변호사, 전직 고위 공무원, 현직 공공기관장 등 부동산학에 대한 학술적 역량과 실무 경험을 겸비한 전문가들이다. 또 서강대 경영, 도시경제, 컴퓨터공학, 법학 교수진과의 협업을 통해 학제 간 융합 교육도 실현하고 있다.특히 2024년부터는 미국 위스콘신-매디슨대학교와 석사과정 이중 학위제를 운영 중이다. 토플 92점 이상을 취득한 학생에게는 장학금도 지원한다. 서강대에서 3학기(18학점 이상), 위스콘신-매디슨대에서 1학기(16학점)를 이수하면 두 학교의 학위를 모두 취득할 수 있다.신입생 선발은 서류 심사 및 구술·면접 전형으로 진행된다. 자세한 사항은 서강대 일반대학원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2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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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하정민]젠슨 황도 걱정하는 전력난… ‘뉴노멀’이 된 원전 회귀

    대만계 미국인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22일 대만을 찾아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회사인 TSMC 관계자들과 만났다. 엔비디아 제품의 상당수는 TSMC에서 생산된다. 황 CEO는 취재진에게 “인공지능(AI) 산업의 발전을 위해 여러 형태의 에너지가 개발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하루 뒤 대만에서는 석 달 전 폐쇄된 남부 마안산 원전의 재가동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치러졌다. 전체 투표자의 74%인 약 434만 명이 찬성해 반대(약 151만 명)를 압도적으로 눌렀다. 찬성표가 전체 유권자의 25%(약 500만 명)를 넘어야 한다는 법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부결이었다. 그러나 원전 재가동을 바라는 민심이 상당함을 보여줬다. 대만 언론들은 황 CEO의 하루 전 발언 또한 원전 재개를 촉구하는 차원에서 이뤄졌다고 풀이했다. 대만은 한국, 싱가포르, 홍콩과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던 1980년대 총 6기의 원전을 운영했다. 당시 대부분의 전력을 원전에서 충당했다. 그러나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환태평양지진대에 위치한 대만 원전의 안전 우려가 고조됐다. 2016년부터 지난해 5월까지 집권한 민진당 소속 차이잉원(蔡英文) 전 총통 또한 탈(脫)원전 정책을 적극 시행했다. 이 여파로 6기의 원전이 모두 폐쇄됐고 현재는 천연가스, 석탄 등 화력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다. 다만 탈원전이 시작된 후 대만은 만성 전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해 6월에도 엔디비아, 폭스콘 등이 있는 타이베이의 네이후 과학단지에서 정전이 발생해 3000여 개 입주 기업이 피해를 입었다. 대만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제조업 중심의 산업 구조를 가졌고 수출 의존도가 높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다. 특히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글로벌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TSMC의 전력 소비량은 대만 전체 전력 사용량의 8%를 차지한다. TSMC가 엔비디아의 고성능 AI 반도체를 대량 생산함에 따라 2030년에는 이 비중이 24%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거의 전량을 해외에서 수입하는 화석 에너지에만 의존하기엔 국가 전체의 위험 부담이 크다. 대만 경제는 반도체 업계의 실적 호조 덕에 올 2분기(4∼6월)에 지난해 2분기보다 8.0% 성장했다. 중국이 사실상 장악해 자본 및 인재 유출이 심각한 홍콩, 전 분기 대비 기준으로 올 1분기(1∼3월)에는 마이너스 성장세를 보였고 2분기 성장률 또한 고작 0.6%에 그친 한국과 대조적이다.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뒷받침됐다면 대만 경제가 8%보다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원전은 완전무결하지 않다. 그러나 다른 에너지보다 경제성이 우수하고 탄소 배출량이 적다는 점도 자명하다. AI 시대의 도래,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기후 변화 여파 등으로 이탈리아 벨기에 리투아니아 덴마크 스웨덴 등 탈원전을 추진했던 유럽 주요국 또한 최근 속속 ‘원전 회귀’를 선언하거나 검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 확률이 지극히 낮은 원전 사고만을 이유로 원전 반대를 외치는 일각의 주장은 그야말로 공허하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 2025-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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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하정민]트럼프 사면 거부한 ‘마가 그래니’

    “저는 유죄입니다. 저의 사면은 미국, 법치주의, 의회 경찰에 대한 모독입니다.” 미국 아이다호주 보이시에 사는 73세 백인 여성 패멀라 헴필 씨는 한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열성 지지층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였다. 그는 대통령의 2020년 대선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해 내내 ‘선거 사기’를 외쳤다. 급기야 유방암 투병 와중에도 2021년 1월 6일 다른 마가들과 수도 워싱턴 의회로 돌진했다. ‘마가’와 ‘할머니(granny)’를 합한 ‘마가 그래니’로 불렸던 그에겐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시 이들의 난입으로 5명이 숨졌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부상자 대부분은 의회를 지키던 경찰관들이었다. 재판에 넘겨진 헴필 씨는 죄를 인정했다. 그는 2022년 5월 징역 60일, 벌금 500달러(약 70만 원)를 선고받았다. 얼마 후 교도소에서 형기도 채웠다. 그는 수감 과정에서 자신이 법과 민주주의를 어겼음을 깨닫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집권 당일인 올 1월 20일 헴필 씨를 포함해 의회 난입에 가담한 약 1500명을 사면했다. 헴필 씨는 거듭 거부 의사를 밝혔는데도 원치 않는 사면이 이뤄졌다고 반발했다. 각국 언론에 ‘사면의 부당함’도 호소했다. 그는 올 6월 CBS방송 인터뷰에서 “유죄임이 분명한데 어떻게 사면을 받고 어떻게 밤에 잠을 잘 수 있겠느냐. 그날 의회에 있던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했다. 영국 BBC와 만났을 때는 “사면을 받아들이면 트럼프의 ‘거짓’과 ‘가스라이팅’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라고 분노했다. 미국은 강력한 대통령제 국가다. 대통령 탄핵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연방법 위반에 대한 사면권을 현직 대통령에게 부여한다. 다른 많은 나라와 달리 재판 중인 사건에 대한 사면도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많은 대통령이 사면권을 남용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집권 1기 막바지인 2020년 12월 대규모 사면을 단행했다. 당시 풀려난 이들의 면면을 보자. 우선 러시아가 2016년 미국 대선에 개입해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는 이른바 ‘러시아 스캔들’ 사태 때 허위 증언, 증인 매수 등을 저지른 최측근 겸 전 개인 변호사 로저 스톤이 있다. 장녀 이방카의 시아버지이며 과거 사업가 시절부터 탈세, 증인 매수, 금융 사기 등을 저질렀던 사돈 찰스 쿠슈너도 포함됐다. 2007년 9월 이라크 바그다드 니수르 광장에서 차가 막힌다는 이유로 기관총 등을 난사해 민간인 17명을 학살한 미국 민간 군사기업 ‘블랙워터’ 관계자 4명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4명 중 1명은 종신형, 나머지 3명은 각각 30년형을 선고받았는데 단숨에 자유인이 됐다. 이런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했던 조 바이든 전 대통령 또한 집권 막바지인 지난해 12월 탈세, 불법 총기 소지 등으로 기소된 아들 헌터를 사면했다. 현직 대통령 자녀의 첫 사면이었다. 헌터의 유죄 확정 당시 “법을 존중한다. 사면하지 않겠다”더니 불과 반년 만에 태도를 바꿨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또한 2001년 1월 임기 종료 약 2시간을 앞두고 마약 밀매로 복역했던 이부동생 로저를 사면했다. 사면권은 전제군주 시절의 잔재다. “네 죄를 사하노라”라는 군주의 한마디로 여러 죄수가 풀려났다. 종종 군주의 포용력을 보여주는 제도로 기능했기에 ‘은사(恩赦)’라는 다소 낯간지러운 호칭이 붙었다. 다만 삼권분립과 민주주의, 법치주의가 정착된 21세기에 굳이 대통령이 광범위한 사면권을 가져야 할까. 미국에서 볼 수 있듯 권력자의 친인척 및 측근에게만 적용되고 전쟁 범죄를 저지른 이와 잡범(雜犯)까지 혜택받는 사면이라면 더 그렇다.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 2025-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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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하정민]지구촌에 부는 ‘中 부동산 쇼핑’ 경계령

    전미부동산협회(NAR)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4월부터 올해 3월까지 1년간 외국인은 총 560억 달러(약 78조4000억 원)어치의 미국 주택을 구입했다. 이 중 24.5%인 137억 달러(약 19조1800억 원)를 중국인이 샀다. 외국인이 매수한 미국 집 네 채 중 한 채가 중국인 소유란 뜻이다. 특히 미 50개 주 중 인구와 국내총생산(GDP)이 가장 많은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외국인 주택 구매의 36%가 중국인에 의해 이뤄졌다. 브룩 롤린스 농림장관,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팸 본디 법무장관은 지난달 8일 수도 워싱턴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었다. 세 장관은 중국 등 외국 적대 세력(foreign adversaries)의 농지 매입을 금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농림부에 따르면 중국인이 보유한 미국 농지 또한 약 1214km²로 2대 도시 로스앤젤레스 면적과 맞먹는다. 중국 자본은 도쿄, 오사카, 교토 등 일본 주요 도시에서도 알짜 부동산을 사들인다. 올 5월 미쓰비시UFJ의 자료에 따르면 도쿄 중심부 신규 아파트 구매자의 20∼40%가 외국인이었다. 대부분 중국인으로 추정된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2023년 7월∼2024년 6월 호주의 거주용 부동산을 가장 많이 매입한 외국인이 중국인이라고 보도했다. ‘차이나 머니’가 주요국의 주택 빌딩 토지 등을 대거 매입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현지인의 반감이 커지고 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각국이 속속 외국인의 부동산 구매를 제한하는 정책을 도입한 이유다. 2023년 1월부터 2년간 비(非)거주 외국인의 주택 구매를 전면 금지했던 캐나다는 이를 2027년 1월까지 2년 연장하기로 했다. 호주 또한 비거주 외국인에게는 구축이 아닌 신축 매입만 허용한다. 호주 싱가포르 등은 외국인의 부동산 매매 시 내국인보다 더 많은 세금을 매긴다. 플로리다주 등 미국 일부 주는 연방정부와는 별도로 외국인의 부동산 구매 제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장기 불황을 극복하자는 취지로 사실상 외국인과 자국민이 동등한 조건에서 부동산을 구매할 수 있는 일본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이 총선 결과를 결정지었다. 올 6월 20일 치러진 참의원(상원) 선거의 최대 승자로 꼽히는 신생 정당 참정당은 ‘외국인의 부동산 매입 억제’ 등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워 3년 전 2석에 불과했던 의석을 15석으로 늘렸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지켜지는 나라에서 외국인에 대한 과도한 차별은 곤란하다. 다만 상호주의 원칙에서 볼 때 해외 부동산을 매입하는 중국인은 중국 부동산을 사는 외국인보다 훨씬 큰 혜택과 이점을 누린다. 중국에서는 국가만 토지를 소유할 수 있고 개개인은 건물 소유권만 한시적으로 갖는 탓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우리나라의 주택 시가총액은 7158조 원. 지난해 명목 GDP(2557조 원)의 약 2.8배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외국인의 부동산 ‘구입’이 아니라 ‘탈세’에만 일부 메스를 적용하고 있는 한국의 부동산 정책은 아직 갈 길이 먼 듯하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 2025-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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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하정민]고령의 장기집권 지도자가 악화시키는 중동 갈등

    원래부터 ‘세계의 화약고’이며 최근 각종 분쟁으로 더 주목받고 있는 중동의 상당수 지도자는 공통점이 있다. 국제 통계사이트 월드오미터가 집계한 올해 인류의 기대 수명(73.5세)보다 오래 살았고, 집권 기간 또한 종신에 가까울 만큼 길다는 것이다. 이들은 권위주의 통치 방식으로 국내외의 거센 비판을 받고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이용해 집권 기간을 연장하고 있다.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86),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76),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수반(90)이 대표적이다. 세 사람은 각각 36년, 17년 8개월, 20년 이상 집권 중이다. 하메네이를 포함한 이란의 이슬람 혁명 세력이 쫓아낸 레자 팔레비 전 국왕의 재위 기간은 38년. 2500여 년간 존속했던 페르시아 군주제의 폐해를 없애겠다고 혁명을 일으켰는데, 정작 하메네이의 집권 기간이 전 국왕에 버금간다. 팔레비 정권은 비밀 경찰 ‘사바크’로 반대파를 숙청했다. 젊은 시절 사바크의 감시에 시달렸던 하메네이 또한 종교 경찰 ‘가시테 에르셔드’를 통해 반대파, 히잡을 쓰지 않는 여성 등을 마구 잡아들였다. 하메네이의 차남 모즈타바가 부친의 뒤를 이을 차기 최고지도자 중 하나로 꼽히는 상황 또한 “신정일치 체제가 세습 군주제와 뭐가 다르냐”는 비판에 직면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1996년 6월∼1999년 7월, 2009년 3월∼2021년 6월, 2022년 12월부터 현재까지 세 차례 동안 장기 집권하고 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 단 한 명이 약 23%의 기간을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두 번째 집권 시절의 부패 혐의로 현직 총리 최초로 형사재판도 받고 있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이란과의 전쟁에 골몰하는 이유 또한 ‘실각하면 곧바로 감옥행’인 자신의 처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평이다. 2005년부터 PA를 이끌고 있는 아바스 수반은 20년째 무능과 부패의 아이콘으로 통하고 있다. 그는 집권 2년 만에 PA가 통치하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하마스에 내줬다. 수 차례 부패 의혹에 휩싸였고 이스라엘의 탄압을 이유로 총선 실시도 거부한다. 현재 하마스는 가자지구를 넘어 PA가 다스리는 요르단강 서안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네타냐후 총리는 아예 가자와 요르단강 서안을 모두 직접 통치하겠다는 입장이다. 풍전등화 상황인데도 아바스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빈약하다. 세 사람은 절묘한 ‘적대적 공생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하메네이와 아바스는 반(反)이스라엘과 반미를 내세워 장기 집권을 정당화한다. 네타냐후 역시 본인 같은 강한 지도자만이 이슬람 국가에 포위된 이스라엘을 지켜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권위주의 통치자가 ‘외부의 적’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중도파가 설 자리는 사라진다. 적대적 공생은 미국과 옛 소련의 냉전에서 탄생한 개념이다. 당시 두 나라의 강경파들은 서로를 ‘악(惡)의 제국’이라고 비난하면서도 이를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마찬가지로 세 지도자의 집권 동력 또한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다. 집권 연장에는 ‘적’이 꼭 필요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말살하려 들수록 상대방을 도와주는 모순에 빠진다. 세 지도자가 언제까지 집권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들의 통치 방식이 바뀌지 않고 이들을 견제할 합리적인 세력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중동의 갈등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 2025-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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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하정민]영국과 러시아의 21세기 ‘그레이트 게임’

    “러시아가 영국의 물, 가스, 전기 공급을 마비시키려 한다.”(토비아스 엘우드 전 영국 국방장관)“스타머가 (우크라이나 전쟁의) 긴장을 고조시켰다.”(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 최근 영국과 러시아의 전현직 고위 관계자가 서로를 향해 내놓은 발언이다. 두 나라가 교전 중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날이 서 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올 1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찾았다. 러시아 견제를 위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향후 100년간 두 나라의 군사 협력을 강화하는 ‘100년 동반자 협정’도 맺었다. 데이비드 래미 영국 외교장관 또한 지난달 초 세르비아, 코소보 등 동유럽 발칸반도 일대를 방문해 역내 국가의 유럽연합(EU) 가입을 돕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러시아가 발칸반도 내 인종 및 종교 갈등을 부추기고 이로 인한 사회 불안정을 해소해 주겠다는 명목으로 곳곳에서 개입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비슷한 시기 영국 더타임스는 핵미사일을 탑재한 영국의 ‘뱅가드’ 잠수함 4척을 감시하기 위해 러시아가 설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비가 영국 해역에서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이런 러시아와 맞서려면 군사 역량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는 게 엘우드 전 장관의 주장이다. 반면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100년 동반자 협정’ 체결 당시 “우크라이나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려 한다”고 비판했다. 스타머 총리와 젤렌스키 대통령의 권력이 유한한데 그들이 물러나면 누가 이 협정을 기억조차 하겠느냐고 조롱했다. 최근 러시아 고위 관계자 3명 또한 로이터통신에 “이제 영국이 모스크바의 주요 적대 세력이 됐다”고 진단했다. 영국이 주요국 최초로 우크라이나에 장거리 순항미사일과 전차를 지원했고, 우크라이나에 평화유지군을 주둔시키려 하며, 전 세계의 반(反)러시아 여론을 결집시키는 데 앞장선다는 점 등에 강한 불만을 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 전쟁, 중국과의 패권 경쟁 등으로 바쁜 사이 영국과 러시아가 일종의 21세기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을 벌이고 있다. 그레이트 게임은 19세기 내내 대영제국과 러시아가 인도, 중앙아시아, 극동, 흑해 등 유라시아 전체에서 벌인 각축전이다. 이 갈등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21세기에도 재연되는 모양새다. 두 나라가 당시 가장 격렬하게 대립했던 크림전쟁(1853∼1856년)의 무대가 현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영토 분쟁지인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한국은 그레이트 게임의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희생양이 됐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1885년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했다. 이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숙적 러시아와 싸우는 일본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합방했다.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 한반도가 21세기 그레이트 게임의 후폭풍에 휘말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최근 북한과 러시아는 모두 북한이 러시아를 돕기 위해 러시아 남서부 쿠르스크주에 군대를 파병했음을 시인했다. 2023년 12월 워싱턴포스트(WP) 또한 그해 한국이 미국을 통해 우크라이나에 간접 지원한 155mm 포탄의 수가 전 유럽 국가의 공급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를 놓고 한국과 북한이 일종의 ‘대리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개화파’와 ‘척사파’의 극한 대립에 시달렸으며 국제 정세에도 무지했던 구한말 조선은 오판과 실책을 거듭하며 망국(亡國)의 길로 들어섰다. 강대국 간 패권 다툼에서 희생됐던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국제 정세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국가 차원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 202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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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하정민]대서양 동맹의 종말, 격화하는 印太 군비 경쟁

    리처드 말스 호주 부총리 겸 국방장관은 지난달 7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을 만났다. 호주는 2021년 9월 미국, 영국과 안보 동맹 ‘오커스(AUKUS)’를 맺고 미국산 핵 동력 잠수함을 최대 5척 구매하기로 했다. 말스 장관은 이에 따라 미국에 주기로 한 30억 달러(약 4조5000억 원) 중 5억 달러(약 7500억 원)를 이번 방문에서 지급했다. 오커스가 체결될 때 미국과 호주의 정상은 조 바이든 전 대통령, 스콧 모리슨 전 총리였다. 이제 미국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호주 총리는 앤서니 앨버니지로 바뀌었지만 정권 교체에도 두 나라의 군사 협력은 흔들림 없이 추진되고 있다.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공통의 목표가 확고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후 80년간 유지됐던 미국과 서유럽의 ‘대서양 동맹’이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일종의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협상 과정에서 서유럽의 오랜 적국인 러시아와 밀착했고, 집권 1기 때보다 강하게 방위비 증액을 유럽에 요구하고 있다. 유럽 또한 ‘안보 자강’을 외치며 미국과 거리를 두고 있다. 양측은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 종전 후 옛 소련의 공산주의를 함께 물리쳤다는 자부심으로 강하게 뭉쳤다. 그러나 ‘돈’과 ‘힘’의 논리 앞에서 굳건했던 동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다. 이 여파는 인도태평양에도 미치고 있다. 미국이 유럽에서 발을 빼는 이유는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중국 또한 이런 미국에 맞서겠다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역내 주요국 또한 군사력 강화에 열심이다. 우선 미국, 호주 못지않게 중국 견제에 주력하는 일본은 오커스 참여를 노린다. 일본은 지난해 10월 호주에서 실시된 오커스 3국의 해상 훈련 때 옵서버로 참가했다. 아소 다로(麻生太郎) 전 총리는 아예 “오커스에 ‘일본(JAPAN)’을 추가해 ‘조커스(JAUKUS)’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대만 또한 국내총생산(GDP) 대비 2.5% 수준인 국방 예산을 3%로 늘리겠다고 18일 밝혔다. 올여름 연례 군사훈련 ‘한광훈련’ 때는 아예 중국의 2027년 침공을 가정하고 대비하기로 했다. 중국시보 등 대만 언론에 따르면 대만이 ‘2027년’이라는 구체적 시점을 명기하고 중국의 군사 위협에 대비하는 건 처음이다.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갈등 중인 필리핀도 미국, 일본과의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세 나라 정상은 지난해 4월 미국 워싱턴에서 사상 최초로 대면 회담을 가졌고 올 1월에도 온라인으로 회동했다. 이에 맞서 중국 역시 올 국방 예산을 한 해 전보다 7.2% 증가한 1조7800억 위안(약 356조5000억 원)으로 5일 책정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집권 첫해인 2013년 7200억 위안(약 144조2000억 원)에서 2배 이상으로 늘었다. 인도태평양 주요국의 이 같은 행보를 보노라면 리더십 공백에 처한 한국의 상황에 대한 걱정이 커진다. 각자도생과 군비 증강이 ‘뉴 노멀(new normal·새 기준)’이 된 시대. 한국의 안보는 정처 없이 표류하고 있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 2025-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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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하정민]트럼프에 드리운 체임벌린의 그림자

    “독일에서 평화를 갖고 돌아왔습니다.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peace for our time)’입니다.” 1938년 9월 네빌 체임벌린 당시 영국 총리는 독일 뮌헨에서 독일계가 많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나치 독일에 양도하는 ‘뮌헨 협정’을 맺었다. 여섯 달 전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나치 독일이 더 이상 영토를 확장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귀국한 체임벌린은 런던 다우닝가 10번지의 총리 관저 앞에서 자신이 전쟁을 막았다며 그 유명한 ‘우리 시대의 평화’를 외쳤다. 1919년 탄생한 신생 독립국 체코슬로바키아는 이 협정에서 완전히 소외됐다. 강대국 독일이 영토 일부를 삼키고 또 다른 강대국 영국이 이를 지지하는 과정을 지켜봐야만 했다. 체임벌린에게도 명분은 있었다. 무엇보다 제1차 세계대전, 대공황 여파 등으로 경제가 좋지 않았다. 약소국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시켜서라도 전쟁을 피하겠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다만 평화는 고작 6개월짜리였다. 나치 독일은 1939년 3월 체코 전체를 합병했다. 같은 해 9월 폴란드도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체임벌린은 1940년 5월 실각했고 반년 후 숨졌다. 영국 또한 세계 최강대국 지위를 미국에 넘겨줬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협상 과정에서 일방적인 친(親)러시아 노선으로 일관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보노라면 체임벌린이 떠오른다. 중국 견제를 위해 러시아가 필요하고 우크라이나와 광물 협정을 맺어 그간의 군사 지원 대가를 받아내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은 미국의 이해관계로만 보자면 수긍할 수 있다. 문제는 2000년 집권 후 권위주의 통치로 일관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가 신뢰할 만한 파트너냐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2008년 조지아 침공,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강제합병,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침공 때 모두 “이곳에 거주하는 러시아계 주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달리 말하면 러시아계 주민이 많은 곳은 어디든 침공할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여지가 있다. 오스트리아와 주데텐란트를 손에 넣고 폴란드로 진격할 때 나치 독일도 같은 이유를 댔다. 러시아군, ‘푸틴의 사병(私兵)’으로 불리는 러시아 민간 군사회사 바그너그룹은 살인 혐의로 복역 중인 죄수들까지 전쟁에 동원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부차, 이르핀, 모티진, 보로댠카, 호스토멜 등 곳곳에서 민간인을 집단으로 학살했다. 손발이 묶여 저항할 수도 없는 시민을 러시아가 대거 살해한 광경을 전 세계가 목격한 게 불과 3년 전이다. 이런 푸틴 정권이 우크라이나를 넘어 발트 3국, 몰도바, 폴란드 등과도 갈등을 빚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의 현 상황이 중국, 북한 등에 ‘잘못된 판단’을 할 신호를 주지 않을 것으로 자신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지난해 6월 영국 시사매체 이코노미스트 기고에서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승리하면 세계의 제국주의가 부활할 것”이라는 섬뜩한 경고를 날렸다. 라도스와프 시코르스키 폴란드 외교장관은 지난달 CNN의 유명 앵커 파리드 자카리아와의 인터뷰에서 체임벌린과 뮌헨 협정을 거론했다. 그는 “유럽에 있는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크라이나를 지원할 것”이라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외쳤다. 1999년 12월 BBC는 역사가, 정치인, 평론가 등을 상대로 20세기 영국 총리 20명의 순위를 매겼다. 1위는 체임벌린의 후임자이며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 체임벌린은 19위였다. 1956년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패해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뺏긴 앤서니 이든 전 총리가 없었다면 체임벌린이 ‘꼴찌’를 차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 이 조사를 실시해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 202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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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하정민]언론인 개인을 공격하는 트럼프에 대한 우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집권 1기 당시 뉴욕타임스(NYT), CNN 같은 주류 언론을 ‘국민의 적’ ‘허위 정보’라고 비판했다. 특히 쿠바계인 짐 아코스타 전 CNN 기자(54)와의 대립은 적잖은 화제가 됐다. 그의 부친은 쿠바 미사일 위기,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의 압제 등을 피해 1962년 미국으로 건너온 난민이다. 아코스타는 2016년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피델의 동생으로 당시 쿠바 최고 지도자였던 라울을 마주했다. 그는 라울에게 카스트로 정권의 독재와 인권 탄압에 관한 송곳 같은 질문을 퍼부었다. 훗날 “이때가 기자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라며 “폭군에게 고개를 숙여도 좋은 때는 없다”는 소감을 밝혔다. 2세대 이민자인 그는 트럼프 1기의 반(反)이민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2018년 1월 트럼프 대통령은 카리브해 아이티, 아프리카 국가 등을 ‘거지 소굴(shithole)’로 폄훼했다. 아코스타는 당시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왜 이런 표현을 썼냐”고 질문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나가”라고 외쳤고 참모진이 그를 밖으로 끌어냈다. 같은 해 11월 그가 중남미 불법 이민자 행렬 ‘캐러밴’에 관한 질문을 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또 화를 내며 “무례하고 끔찍한 인간”이라고 쏘아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대선에서 승리하자 CNN 측은 오전 10시대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아코스타에게 시청률이 낮은 심야 시간대로 옮기라고 요구했다. 좌천성 인사에 반발한 그는 “권력에 책임을 묻는 것은 언론의 사명”이란 말을 남기고 지난달 28일 퇴사했다. 다만 이 실직은 트럼프 측의 압박이 아닌 CNN 측의 ‘알아서 눈치 보기’ 성격이 강했다. 문제는 집권 2기의 트럼프 대통령과 측근이 계속해서 비판적인 언론인에게 노골적인 해고 압박을 가한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7일 트루스소셜에 워싱턴포스트(WP)의 흑인 남성 칼럼니스트 유진 로빈슨을 거론하며 “무능하다. 즉시 해고돼야 한다”고 썼다. 하루 전 로빈슨이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국제개발처(USAID) 폐지 시도,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같은 논란이 많은 인사의 기용을 비판한 칼럼을 썼다는 이유에서다. 로빈슨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첫 대선 캠페인을 논평한 칼럼으로 2009년 퓰리처상(논평 부문)을 수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그의 성향도 문제 삼으며 “한심한 급진 좌파”라고 했다. 같은 날 일론 머스크 정부효율부(DOGE) 수장 또한 DOGE 일부 직원의 인종차별적 행태를 지적한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백인 여성 기자 캐서린 롱에 대해 “역겹고 잔인하다. 해고돼야 한다”고 썼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NYT, 폴리티코 등 일부 매체의 구독 계약을 해지했고 공영방송 PBS에 대한 지원 중단도 검토하고 있다. 이 행태에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권력자가 언론과 불화하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러나 언론인 개개인을 직접 거론하며 ‘밥줄’까지 끊으려 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임기가 유한한 정치 권력이 언론인에게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가 통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스스로 졸렬해질 뿐이라는 점을 진정 모를까. “‘신문 없는 정부’와 ‘정부 없는 신문’ 중 하나를 택하라면 후자를 택하겠다”는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말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들려주고 싶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 2025-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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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범석 쿠팡 의장, 밴스 美부통령 주최 만찬 참석…저커버그·올트먼 동석

    김범석 쿠팡 의장이 18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에서 J D 밴스 미국 부통령 당선인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핵심 인사인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 후보자,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후보자, 존 랫클리프 중앙정보국(CIA) 국장 후보자, 케빈 헤셋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 후보자 등이 모두 자리했다. 또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 샘 올트먼 오픈AI CEO, 앤디 재시 아마존 CEO 등 주요 빅테크 수장도 동석했다.김 의장은 앞서 17일에도 트럼프 당선인의 장남 트럼프 주니어가 워싱턴 콘래드호텔에서 개최한 행사에 참석했다. 당시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후보자,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후보자 등이 참석했다. 김 의장이 이틀 연속 트럼프 2기 행정부 주요 인사 및 주요 빅테크 수장과 회동하면서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쿠팡의 위상이 미국 현지에서도 높아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 의장, 베센트 재무와 이틀 연속 대면…“美 투자 요청”워싱턴 외교가와 재계 관계자 등에 따르면 김 의장은 이날 밴스 부통령 당선인의 주최로 개최된 만찬에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밴스 부통령 당선인 측이 직접 고른 것으로 알려졌다. 밴스 당선인 측이 쿠팡을 메타, 아마존, 오픈AI 등 자국 유명 정보기술(IT) 기업에 맞먹는 중요 기업으로 보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온다.이 자리에서 김 의장은 특히 이틀 연속 만난 베센트 후보자와 장시간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월가의 유명 헤지펀드 ‘키스퀘어캐피털’ CEO 출신인 베센트 후보자는 쿠팡에 투자한 많은 미국 유명 투자자를 잘 알고 있다며 장관 취임 후에도 종종 만나자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쿠팡이 한국을 넘어 미국 영국 대만 중국 인도 등 세계 각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트럼프 2기 행정부는 비용 절감을 이유로 미국 밖으로 생산 시설을 옮긴 유명 기업을 다시 미국으로 불러들이는 ‘리쇼어링(reshoring)’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쿠팡 같은 글로벌 기업의 미국 투자를 적극 환영하고 있다. 이날 김 의장과 주요 장관직 후보자의 면담에서도 이 같은 내용이 집중적으로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김 의장이 미국 2인자인 밴스 부통령 당선인,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실세인 트럼프 주니어가 주최한 행사에 연속으로 초청된 것을 두고 쿠팡의 위상 강화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분석이 나온다.실제 쿠팡은 최근 전 세계로 보폭을 넓히고 있다. 2022년에 대만에서 로켓배송 사업을 시작했고 현재까지 누적 투자금액이 5000억 원에 달한다. 지난해 초에는 미국 등 190개국에 진출한 영국의 명품 플랫폼 ‘파페치’를 5억달러(약 6500억 원)에 인수했다.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캘리포니아주 마운틴뷰,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 인도 벵갈루루 등 전 세계 주요 도시에 사무소를 열고 현지 인재 채용 등에 나서고 있다. 워싱턴 소식통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쿠팡이 한국 및 아시아태평양을 넘어 글로벌 시장에 적극 투자하는 기업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평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25-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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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하정민]‘서사’ 있는 극우가 온다

    사임 의사를 밝힌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의 후임자 물망에 오르내리는 피에르 폴리에브 캐나다 보수당 대표(46)는 입양아 출신이다. 16세 때 그를 출산한 생모는 아들을 교사 부부에게 보냈다. 잠시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라는 듯했으나 10대 시절 양부모가 이혼했다. 양부는 이혼 후 동성애자임을 밝혔다. 폴리에브 대표는 양성평등 내각, 친(親)이민 정책을 편 트뤼도 총리를 ‘마르크스주의자’로 부르는 등 강경 우파 성향이다. 탄소세 폐지, 반(反)이민, 감세, 친이스라엘 등 그의 정책 또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유사해 ‘캐나다의 트럼프’로도 불린다. 그는 동성결혼에 호의적이다. “결혼 제도는 성적 취향에 관계없이 모든 이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고 밝혀 왔다. 양부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과거 낙태, 마리화나 사용 등을 찬성한 적도 있다. 반이민, 유로화 폐기 등을 외치는 독일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알리스 바이델 공동 대표(46)는 성 소수자다. 스리랑카 출신의 스위스 국적자 자라 보사르트와 살면서 두 아이를 입양했다. 바이델 대표는 혼인 관계가 아닌 커플 또한 법적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시민 결합’을 지지한다.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연합의 조르당 바르델라 대표(30)는 이민자 후손이다. 그의 모친은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친할머니의 부친은 모로코 출신이다. 하지만 그는 “이민이 프랑스의 정체성과 영혼을 소멸시킨다”고 외친다. 불법 이민자의 추방을 쉽게 만들고 프랑스 땅에서 태어난 외국인이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국적을 부여하는 ‘제한적 속지주의’ 제도 역시 폐지하겠다고 했다. 세 사람이 보여주듯 최근 각국의 극우, 강경 우파 정치인은 기존의 극우 정치인과 상당히 다르다. 부동산 재벌인 트럼프 당선인, 장교 출신으로 국민연합의 전신 극우전선을 만든 프랑스 극우 정치인 장마리 르펜 등은 제1세계의 기득권 백인 남성이다. 이들은 살면서 약자인 적이 없었다. 다만 정계 아웃사이더였기에 견고한 기성 정치의 벽을 깨기 위해 극우 이념을 이용한 측면이 컸다. 반면 ‘소수자 서사’ ‘흙수저 서사’를 보유한 최근의 극우 정치인은 도식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삶에서 약자일 때가 많았고 유력 정치인이 되자 진보 혹은 중도 성향의 정책도 받아들였다. ‘모든 극우 정치인은 성 소수자, 낙태, 복지 등을 반대한다’ 같은 천편일률적인 고정관념이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젊고 언변도 뛰어난 이들의 등장은 극우에 대한 일반 유권자의 반감을 누그러뜨린다. 나아가, 긍정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바르델라의 반이민 정책은 자주 ‘인종차별 정당’이란 비판을 받았던 국민연합의 이미지를 희석시켰다. 오히려 ‘불법 이민의 폐해가 오죽하면 이민자 후손조차 이민을 반대하겠느냐’는 주장이 먹혀드는 것이다. 저소득 저학력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 2인자에 오른 ‘자수성가 서사의 끝판왕’ J D 밴스 미국 부통령 당선인(41)은 인도계 부인 우샤를 통해 논란을 비켜 간다. 지난해 대선 당시 그는 생물학적 자녀가 없는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 후보 겸 부통령을 고양이를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우는 ‘캣 레이디(cat lady)’라고 폄훼했다. “성폭행,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일지라도 낙태를 반대한다”는 그의 과거 발언도 문제가 됐다. 비판이 쏟아지자 우샤는 “남편은 채식주의자인 나의 엄마를 위해 직접 채식 요리를 해준다”고 했다.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는 논점일탈이지만 남편을 가족을 중시하고 인도계 전통도 존중하는 자상한 남자로 부각시켰다. 서사가 있는 정치인은 물건으로 치면 화려한 포장을 두른 상품이다. 다만 포장지가 내용물의 질까지 보장하진 않는다. 이념의 좌우를 떠나 정치인은 정책, 도덕성, 성실성 등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정치인의 능력보다 개인사가 더 주목받는 현상이 달갑지는 않다.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 2025-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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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하정민]미룰 수 없는 美 보험체계 개편

    미국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의 2007년 작 ‘식코’에는 전기톱 사고로 왼쪽 손가락 2개가 잘린 남성이 나온다. 보험이 없는 그는 병원에서 “중지와 약지의 접합 비용이 각각 6만 달러(약 8400만 원), 1만2000달러(약 1680만 원)”라는 말을 듣는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나마 비용이 덜 드는 약지만 붙이기로 한다. 그의 중지는 새 모이로 버려진다. 민간 건강보험에 의존하는 미국 의료체계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낸 이 영화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4일 뉴욕 한복판에서 대형 보험사인 유나이티드헬스케어의 브라이언 톰프슨 최고경영자(CEO)가 루이지 맨지오니(26)의 총격으로 숨졌다. 만성 척추 통증에 시달렸지만 차도를 보지 못한 맨지오니는 범행 이유를 보험금 지급을 꺼리며 환자의 치료를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보험업계의 관행에서 찾았다. 맨지오니가(家)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일대에서 골프장 등을 운영한다. 부유층 자제가 ‘돈’ 때문에 살인까지 저질렀다는 점은 보험업계 전반에 대한 미국 사회의 불만과 불신이 얼마나 큰지 보여준다. 미국은 선진국 중 거의 유일하게 국가 주도의 공공보험이 없다. 지난해 기준 전 인구의 65.4%(약 2억1582만 명)가 민간보험에 가입했다. 50개 주의 연방 체제, 개인 자유와 선택권을 중시하는 풍조, 인종·계층·이민 역사 등에 따라 확연히 갈리는 공공보험에 대한 인식 등이 공공보험 정착을 어렵게 했다는 분석이 많다. 민간보험은 대부분 기업(고용주)을 통한 직장보험이다.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나 대부분 해당 보험사와 계약한 의사에게 진료를 받아야 혜택을 얻는 구조다. 보험사의 권력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오바마케어, 즉 ‘환자 보호 및 보험료 적정 부담법(PPACA)’의 2010년 등장 후 보험사가 치료비 지급을 거부하는 사례가 늘었다고 본다. 지급 시기를 늦추거나 지급 절차를 까다롭게 하는 경향 역시 짙어졌다. 오바마케어의 목표는 전 미국인의 보험 가입이다. 민간 혹은 공공보험 중 반드시 하나는 가입해야 한다. 또 직장인인데도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해당 근로자와 고용주 모두에게 벌금을 매긴다. 이 제도로 식코 개봉 당시 5000만 명에 달했던 보험 미가입자는 지난해 기준 2600만 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보험금 지급액 증가로 과거보다 이윤이 줄어든 보험사들은 “특정 치료 전 반드시 사전 승인을 얻으라”는 식으로 대응했다. 이는 환자의 치료 포기, 보험금 지급을 둘러싼 각종 소송, 보험료 인상 등으로 이어졌다. 그 누적된 불만이 공개 살인이라는 극단적 형태로 표출됐다. 17일 1급 살인 혐의로 기소된 맨지오니의 사적 제재는 지탄받아야 마땅한데도 일각에서 그를 영웅 취급하는 이유다. 다만 보험업계를 비판하는 미국인 역시 공공보험 강화로 자신의 보험료가 오르는 것은 싫어한다. 특히 중산층은 보험 미가입자의 보험료를 자신이 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크다. ‘의료체계 개선은 필요하나 그 부담을 내가 지는 건 싫다’는 현실과 ‘제도 개편이 시급하다’는 이상의 괴리가 상당하다. ‘작은 정부’를 외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집권 1기 당시 재정 부담이 큰 오바마케어 폐지를 추진했다. 당시 하원 다수당이던 민주당의 반대로 뜻을 이루진 못했다. 올 10월 대선 유세 때는 “오바마케어는 형편없으나 없앨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 덕에 생애 최초로 보험 혜택을 누린 국민이 많음을 인정한 것이다. 중국과의 패권 갈등, 불법 이민 근절, 우크라이나 전쟁 및 중동 전쟁 종전 등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현안 앞에서 보험 개혁은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 있다. 다만 지금 손보지 않으면 미국 사회가 감당해야 할 고통과 비용 또한 커질 것이다. 제2, 제3의 맨지오니가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 202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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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가 만난 사람]“韓, 문화경제적 성취에 자신감 갖고 현 혼란 신속 극복해야”

    《“신속한 계엄 저지로 한국 민주주의의 우수성이 증명됐지만 현재의 혼란이 계속되는 것은 위험합니다. 특히 한국과 프랑스의 지도자 모두 상대편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자신과 비슷한 의견에만 매몰되는 확증편향에 빠져 있습니다. 이는 ‘정치적 자폐’의 신호일 수 있습니다.”2009년부터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피가로의 아시아 특파원으로 재직하며 15년간 한국 사회를 속속들이 관찰해 온 세바스티앵 팔레티 기자(50)가 10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의 영어 대면 인터뷰, 윤석열 대통령의 조기 퇴진 거부 기자회견이 있은 12일 추가 전화 인터뷰를 갖고 현재의 한국과 프랑스 상황을 우려했다.그는 프랑스 주요 매체 기자 중 가장 오래, 가장 많이 한국 및 북한 관련 기사를 써 온 인물로 꼽힌다. 그 또한 “조국 프랑스, 제2의 조국처럼 느끼는 한국 모두 심각한 정치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어 안타깝다”며 계엄 이후의 극한 갈등과 분열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 1962년 이후 62년 만의 행정부 붕괴로 공공 행정이 마비되는 ‘셧다운(shutdown·정부 폐쇄)’ 위기에 처한 프랑스의 모습이 비슷하다고 했다.》두 나라를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극단주의자의 득세, 반대 정파와의 대화 거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만 교류하며 타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반향실 효과(echo chamber)’ 및 확증편향 등이 나타나고 있다고 우려했다. 다만 15년간 지켜본 한국의 문화경제적 성취는 놀라운 수준이라며 자신감을 갖고 현 위기를 극복하라고 권유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된 3일, 미셸 바르니에 전 프랑스 총리가 이끌었던 행정부가 붕괴된 4일, 윤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한 12일 거듭 놀랐을 것 같다. “한국과 프랑스의 지인들이 모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라고 한다. 두 나라의 공통점이 많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집권세력이 돌파구를 무리하게 찾으려다 현 상황을 자초했다는 점, 기존에 누적됐던 갈등이 ‘예산’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점, 두 나라 모두 지도자에 대한 퇴진 요구가 심상치 않다는 점 등이다.” ―왜 이런 상황이 나타났다고 보나. “내가 한국에 대한 직접적인 논평을 하는 것이 적절한지 모르겠다. 다만 프랑스 상황을 들려주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의사결정권자들이 바로잡을 기회가 많았는데도 잘못된 결정을 거듭했다. 프랑스에서는 6월 말∼7월 초 조기총선이 치러졌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총선 전부터 그가 속한 집권 연합 ‘앙상블’이 1위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란 전망이 많았는데도 개의치 않고 선거를 강행했다. 총선에서 범여권이 2위에 그쳤는데도 1위를 차지한 좌파 연합 ‘신민중전선(NFP)’, 3위를 차지한 극우 국민연합(RN) 및 연대 세력과 협력하지 않았다. 1, 3당이 모두 반대하는데도 우파 성향의 바르니에 전 총리를 발탁했다. 민심을 무시한 것이다. 바르니에 전 총리 역시 좌파와 극우가 모두 반대하는데도 공공지출 감축을 골자로 한 2025년 예산안을 밀어붙였다. 이에 반발한 좌파와 극우가 합심해 총리 불신임안을 하원에서 통과시켰고 총리 사퇴를 포함한 행정부 붕괴가 있었다. 현재로선 새 총리가 언제 취임할지 알 수 없다. 위기를 타개할 적절한 지도자를 찾아볼 수 없는 한국과 비슷한 상황이다.” 두 나라의 공통점은 또 있다. 윤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마크롱 대통령 또한 “2027년 5월까지의 임기를 지키겠다”며 퇴진 요구를 거부했다. 새 총리 또한 좌파나 극우 진영에서 찾지 않고 바르니에 전 총리와 비슷한 우파 성향 인물을 발탁하겠다며 굽히지 않는다. 재판을 받고 있는 야권 지도자가 ‘대통령 사임, 조기 대선 실시’를 요구한다는 점도 같다. 마린 르펜 전 RN 대표는 2004∼2016년 유럽의회 활동을 위해 배정된 당 자금을 보좌진 급여 등으로 유용한 혐의로 기소됐다. 지난달 검찰은 ‘징역 5년,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구형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역시 경기도 법인카드 사적 유용, 공직선거법 위반, 위증교사 등 5개 사건으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정치인을 포함한 의사결정권자들은 왜 잘못된 결정을 거듭할까. “‘나만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또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는 전혀 교류하지 않는다. 믿고 싶지 않은 정보는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이다. 소셜미디어의 등장은 이 같은 반향실 효과와 확증편향의 단점을 극대화했다. 곳곳에서 음모론을 외치는 선동가 또한 난무한다. 의사결정권자가 정치적 자폐 상태에 빠지기 쉬운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런 정치인들이 일부 극단주의 세력의 강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도 우려스럽다.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각국 중산층이 큰 불안에 떨고 있다. 현재의 삶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순간 빈곤층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크다. 극단주의자들은 이런 중산층의 불안감을 이용한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갖는 사람에 대한 적대감을 고조시키며 ‘이게 다 저들 때문’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식이다.” ―한국 일각에서는 내각제로의 개헌 등 이참에 정치 체제를 바꾸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제도 변경은 ‘마법’이 아니다. 특정 제도가 현실을 모두 바꿀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분열이 심한 상황에서 다른 제도로 바꾸는 과정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스템을 탓하지만 자신 또한 그 시스템의 일부라는 점을 종종 잊어버린다.” ―세계 민주주의가 동반 위기를 맞았다는 지적이 많다. “가장 큰 도전에 직면한 것은 분명하다. 곳곳에서 극단적인 분열과 대립으로 ‘지구는 둥글다’ 같은 ‘단순한 사실(basic fact)’에 대해서조차 여러 세력의 동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진실을 전달하는 언론의 역할이 중요한데 기성 언론에 대한 불신 또한 고조되고 있다. 역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언론인은 현재를 기록하는 역사학자라고 생각한다. 진실과 사실을 전달해야 하는 언론인의 책임 또한 막중하다. 현 상황을 방치하면 인권, 자유 같은 인류의 기본 가치가 위협받을 수 있다. 이런 가치는 가졌을 때보다 잃어버렸을 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15년간 겪은 한국은 어떤 곳인가. “한국에서 근무한다고 했을 때 많은 지인이 ‘왜 가느냐’고 했다. 지금은 누구나 ‘멋지다. 나도 가고 싶다’고 한다. 한국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은 긍정적이나 정작 한국 사회가 스스로를 평가하는 시선은 부정적이 된 것 같아 안타깝다.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졌고 젊은 층은 ‘헬조선’ 같은 말을 쓰며 한국을 떠나겠다고 한다. 한국인은 튀는 행동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반드시 자신이 남보다 한 등급은 위에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유례 없는 동료 집단의 압박과 눈치 보기, 스트레스 등이 이에 기인한다고 본다. 하지만 한국이 이뤄낸 문화경제적 성취는 어마어마하다. 전 세계 ‘Z세대(Gen-Z)’에 한국의 소프트파워(soft power)는 매우 강력하다. 서구 젊은 층은 한국을 혁신, 새로운 트렌드의 요람으로 여긴다. 이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그 자신감을 현 위기를 극복하는 데 썼으면 좋겠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을 모두 인터뷰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광우병 시위 등으로 이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듯 했다. 2012년 접한 이 전 대통령은 솔직담백한 사람이었다. 15년 전보다 정치 혼란이 훨씬 심해진 지금 많은 한국인 또한 그가 세계 금융위기 등을 성공적으로 극복했고 당시의 경제 상황이 지금보다 좋았다며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것 같다. 한 해 뒤 프랑스 방문을 앞둔 박 전 대통령을 만났다. 처음에는 인터뷰 답변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등 다소 딱딱한 분위기였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그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감안할 때 그가 걸어온 삶의 경로가 일반인의 삶과 괴리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북한이 러시아의 군사 협력이 고조되면서 한반도 전체의 긴장도 격화하고 있다. “북한은 제한적 지원만 해주는 중국에 불만이 많았고 미덥지 못하다고 여겼다. 이에 ‘새 스폰서’로 러시아를 택한 것이다. 일종의 ‘위험 감수자(risk-taker)’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자신이 상당히 전략적인 선택을 했다고 여길 것이다. 북한과 러시아가 더 밀착할 것으로 본다.”세바스티앵 팔레티 佛 르피가로 아시아 특파원1974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했다. 소르본대에서 역사학을, 영국 런던정경대(LSE)에서 유럽연합(EU) 정책결정학을 전공했다. 2009년부터 유력 일간지 르피가로의 아시아 특파원으로 재직하며 서울, 중국 베이징 및 상하이 등에서 근무했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임 당시 두 사람을 모두 인터뷰했다.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 2024-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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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 2기 숨은 실세…극우방송 출신 ‘인간 프린터’ 나탈리 하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2기 행정부에서 ‘문고리 권력’을 가질 인물로 극우 케이블방송 ‘원아메리카뉴스네트워크’에서 진행자로 일했던 나탈리 하프(33)가 떠오르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 등이 25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그는 휴대용 프린터, 보조 배터리, 종이 등을 들고 항상 트럼프 당선인을 따라다니면서 당선인에 관한 각종 언론 및 소셜미디어 관련 콘텐츠를 즉각 인쇄해 건네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인간 프린터(Human Printer)’란 별명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하프는 1991년 캘리포니아주의 보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주내 기독교 대학인 로마나사렛대 학사, 버지니아주의 복음주의 대학 리버티대 석사를 취득하고 ‘원아메리카뉴스네트워크’의 앵커로 활동했다. 그가 트럼프 당선인과 인연을 맺은 건 2019년이다. 폭스뉴스에 패널로 출연한 그는 자신이 한때 골수암에 걸렸으나 트럼프 당선인이 집권 1기 때인 2018년 서명한 임상시험을 폭넓게 허용한 법안 덕분에 치료를 받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며 트럼프 당선인을 칭송했다. 이 이야기에 반한 트럼프 당선인이 2020년 대선 당시 공화당 전당대회에 하프를 연설자로 초청했다. 하프 역시 2022년 3월 원아메리카뉴스네트워크를 떠나 트럼프의 커뮤니케이션 팀에 합류했다. 그는 이번 대선 과정에서 트럼프 당선인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특히 골프 애호가인 트럼프 당선인이 골프를 치고 있을 때 골프 카트 뒤로 달려가 당선인에 관한 각종 언론 보도와 소셜미디어 게시물 등을 전달했다고 NYT는 전했다. 다만 그가 자주 찾는 뉴스 출처에는 극우 성향의 웹사이트 ‘게이트웨이펀딧’이 포함됐다고 덧붙였다.트럼프 당선인에 대한 하프의 충성은 숭배, 추앙 수준에 가깝다고 보인다고 NYT는 평가했다. NYT가 입수한 하프의 편지에 따르면 그는 트럼프 당선인을 “당신은 내게 중요한 모든 것(You are all that matters to me)” “내 삶의 수호자 겸 보호자”라고 썼다. 트럼프 당선인 또한 하프를 ‘스위티(Sweetie)’ 등으로 부르면서 딸처럼 대한다고 전해진다. 그동안 하프의 존재는 트럼프 당선인의 최측근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백악관에서 잠재적으로 영향력 있는 역할에 나설 준비를 갖췄다고 NYT는 진단했다. 특히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 일대에서 트럼프 당선인에게 전해지는 정보 흐름의 통로 역할, 당선인의 소셜미디어 콘텐츠 생성을 도울 것이란 전망이 유력하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24-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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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하정민]美 대선에서 드러난 ‘캘리포니아 리버럴’의 몰락

    미국 50개 주 중 인구가 가장 많고 경제 규모도 큰 캘리포니아주의 지난해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3조9000억 달러(약 5460조 원)다. 미국, 중국, 독일, 일본에 이은 세계 5위로 인도, 영국, 프랑스 GDP보다 많다. 천혜의 자연환경, 실리콘밸리, 할리우드, 스탠퍼드와 캘리포니아공대(칼텍) 같은 명문대를 두루 갖춘 덕이다. 이런 캘리포니아주가 인재 유출로 몸살을 앓고 있다. 비즈니스인사이더에 따르면 2022, 2023년에만 69만1000명이 떠났다. 테슬라 오라클 HP 팰런티어 등 쟁쟁한 기업도 본사를 다른 주로 옮겼다. 치안 불안, 과도한 규제와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 강요, 높은 세금과 비싼 생활비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많은 이가 그 시발점으로 2014년 주민투표로 통과된 ‘47호 법안’을 거론한다. 이 법안은 초범일 경우 950달러 이하의 절도, 단순 마약 소지 등을 경범죄로 다룬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수감시설 부족, 주 재정 악화 등이 이유였지만 통과됐을 때부터 “범죄만 조장할 것”이란 우려가 많았다. 이후 10년간 주 곳곳에서 약탈과 마약이 판을 쳤다. 사상자만 발생하지 않으면 생계형 경범죄로 처리되니 범죄자 입장에선 거리낄 게 없다. 설사 붙잡혀도 보석금 없이 곧 풀려나는 사람이 태반이다. 시민 불만이 치솟았고 못 견딘 사람은 주를 떠났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47호 법안이 경범죄로 규정한 범죄를 다시 중범죄로 분류하자는 ‘36호 법안’을 발의했다. 5일 대선과 같은 날 실시된 이 법안의 주민투표는 69%의 지지로 통과됐다. 법이 죄를 벌하긴커녕 조장하는 현실에 넌더리를 낸 유권자의 준엄한 심판이었다. 이 결과에서 보듯 미 진보 진영의 본산 겸 민주당 텃밭이던 캘리포니아주의 민심이 변하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선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고향인 이곳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보다 20.5%포인트 높은 지지를 얻었다. 2016년과 2020년 대선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조 바이든 대통령의 캘리포니아주 지지율은 트럼프 당선인보다 30.1%포인트, 29.2%포인트 높았다.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며 정치 활동도 해온 해리스 부통령이 캘리포니아주에 연고가 없는 두 사람보다 훨씬 적은 표를 얻은 것이다. 해리스 부통령은 샌프란시스코 지방 검사,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 등을 지낼 때 경찰 예산 삭감 등을 거론했다. 2020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도 대부분의 불법 이민자를 기소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번 대선에서 중도파 유권자를 의식해 화석에너지 등 일부 정책에서 ‘우클릭’을 시도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뼛속까지 진보 성향 정치인, 즉 ‘캘리포니아 리버럴’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대선에서 트럼프 당선인에게 전국 득표율, 대통령 선거인단 확보 숫자에서 모두 패했다. 민주당 역시 상하원,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에 완패했다. 해리스 부통령의 대선 패배 요인은 여러 개이고 모조리 그의 책임만은 아니겠으나 한 가지 시사점은 얻을 수 있다. ‘캘리포니아 리버럴’이 진보 성향의 일부 지역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미 전국 단위 선거에서는 더 이상 통하기 힘들다는 것이다.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 202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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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중앙亞 협력 강화해야…상설협력체 창설-전문연구자 육성 시급”

    “‘기술 강국’ 한국과 ‘자원 부국’ 겸 지정학적 요충지인 중앙아시아는 서로에게 최고의 협력 파트너입니다. 양측의 민관 교류를 강화할 상설 협의체 신설이 시급합니다.”7일 열린 ‘2024 한반도-북방 문화 전략 포럼: 강대국 경쟁 귀환 하 초국적 연대의 모색’에 참석한 한국과 중앙아시아 주요국 인사들이 입을 모아 한 말이다.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 오키드룸에서 열린 이날 포럼에는 왕윤종 국가안보실 3차장, 타메르 살리흐 무랏 주한 튀르키예 대사, 수흐벌드 수헤 주한 몽골 대사, 압두살로모프 알리쉐르 주한 우즈베키스탄 대사, 아르스타노프 누그갈리 주한 카자흐스탄 대사, 키롬 살로힛딘 주한 타지키스탄 대사, 이스마일로바 아이다 주한 키르기즈공화국 대사, 하사노프 라민 주한 아제르바이잔 대사, 파파스쿠아 타라쉬 주한 조지아 대사, 강영신 외교부 동북중앙아시아 국장, 한석희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김지성 유네스코 아태무형유산센터 사무총장, 정태인 전 투르크메니스탄 대사 겸 외교부 외교사료편찬위원, 강준영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연구센터장 겸 HK+국가전략사업단장 등이 참석했다.기조 연설자로 나선 왕 차장은 “한국의 혁신 역량과 중앙아시아의 잠재력을 연계해 유라시아의 새로운 협력 모델을 만들겠다”며 중앙아시아 등 북방 국가와의 연대를 강화하자고 촉구했다. 원유, 천연가스, 석탄, 우라늄 등을 보유한 중앙아시아 주요국과 한국의 발달한 정보기술(IT) 산업이 결합하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강 교수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전쟁, 미국과 중국의 패권 갈등 등으로 다자주의 협의체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며 “한반도 안정과 평화 구축을 위해서도 중앙아와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중앙아시아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국내 연구자 육성이 시급하다고 촉구했다.엘도르 아리포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산하 전략지역연구소 소장 겸 전 외교차관은 양측이 협력할 구체적인 분야로 기후위기 및 인구위기 대처를 꼽았다. 심각한 기후 변화로 중앙아시아 곳곳이 사막화와 수자원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데 수자원을 성공적으로 개발한 한국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급속한 노령화와 경제인구 부족에 시달리는 한국 또한 중앙아시아의 젊은 숙련 노동자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옛 소련 시절 중앙아시아 곳곳으로 흩어진 고려인의 존재 또한 양측 협력을 가속화하는 데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고 기대했다.알루아 졸드발리나 카자흐스탄 대통령 산하 전략연구소 부소장 역시 △도시계획 △e스포츠 △금융증권 거래 △문화창조 산업 등을 양국의 주요 협력 분야로 제시했다. 중앙아시아 주요국은 인구의 절반 이상이 몇몇 대도시에 살 정도로 인구 과밀화에 따른 각종 문제가 심각한데 세종, 송도 등에 스마트시티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한국이 도시계획에 많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한국 또한 실크로드 시절부터 전세계 주요 물류 수송로였던 중앙아시아와의 협력을 통해 많은 이점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한반도-북방 문화 전략 포럼’은 북방 정책 계승을 위해 2021년 출범했으며 매년 포럼을 열고 있다. 올해 포럼 주제는 ‘새로운 시대에의 직면: 강대국 경쟁 귀환 하 초국적 연대의 모색’이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24-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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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하정민]오바마-바이든-해리스의 ‘셰일가스 방정식’

    11월 5일 미국 대선의 승패는 주요 경합주 중 가장 많은 선거인단(19명)이 걸린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판가름 날 가능성이 높다. 이곳은 미 50개 주 중 천연가스(셰일가스 포함) 생산 2위, 석탄 생산 3위인 화석에너지의 메카다. FTI 컨설팅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주(州) 경제가 가스 산업에서 얻는 이익만 400억 달러(약 54조 원)다. 민주당은 펜실베이니아주에서 1992년부터 2012년 대선까지 내리 6번을 모두 이겼다. 그러나 2016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 겸 전 대통령에게 0.7%포인트 차로 졌다. 4년 후엔 이곳에서 태어난 조 바이든 대통령이 ‘고향 프리미엄’을 앞세워 1.2%포인트 차로 신승했다. 현재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 후보와 트럼프 공화당 후보 또한 혈투를 벌이고 있다. 한때 민주당 텃밭이던 펜실베이니아주가 경합주로 바뀐 것은 물, 모래, 화학약품 등을 섞은 액체를 고압으로 분사해 셰일가스를 추출하는 수압파쇄법, 즉 프래킹(fracking)을 둘러싼 민주당 행정부의 정책이 오락가락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직후 출범한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는 내수를 부양하고 중동산 원유 및 천연가스에 대한 의존을 낮추기 위해 셰일가스 업계를 전폭 지원했다. ‘셰일 혁명’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곳곳에서 프래킹 붐이 일었다. 그러나 프래킹 과정에서 뒤따르는 지하수 및 대기 오염, 지진 유발 가능성 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편두통, 비강염, 피로, 천식, 유산 등에 시달린다는 보고서도 속속 발표됐다. 친(親)환경을 표방한 바이든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연방정부가 보유한 토지에서는 프래킹 등 모든 신규 시추를 금한다”고 했다. 미국의 에너지 시추는 대부분 민간 소유 땅에서 이뤄진다. 에너지업계와 환경단체의 반발을 동시에 무마하려는 나름의 선택이었지만 ‘눈 가리고 아웅’이란 비판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해리스 후보는 2020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프래킹을 금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올 8월 29일 CNN 인터뷰에선 “프래킹을 금하지 않고도 청정에너지를 달성할 방법이 있다. 내 가치는 달라지지 않았다”며 말을 바꿨다. 프래킹을 규제하지 않고 어떻게 청정에너지를 실천할 건지, 달라지지 않은 본인의 가치가 뭔지 모호하다. 상당수 유권자가 “발언의 진정성을 못 믿겠다. 전형적인 말 바꾸기”라고 비판한다. FTI 컨설팅에 따르면 2022년 기준 프래킹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 펜실베이니아 주민은 12만1000명. 이들의 연봉은 다른 직군보다 훨씬 높은 평균 9만7000달러(약 1억3100만 원)다. 프래킹을 허가한 토지 소유주가 받은 돈은 60억 달러, 세수(稅收) 또한 32억 달러에 이른다. 싫든 좋든 프래킹을 금하면 펜실베이니아주의 경제는 큰 타격을 받는다. 두 후보 중 누가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이길지 모른다. 다만 ‘재집권 시 에너지 규제 철폐’를 외치는 트럼프 후보에게 당당히 맞서려면 해리스 후보가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고 본다. “부통령으로서 국정을 운영해 보니 많은 유권자의 생계가 걸린 프래킹을 무작정 도외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입장을 바꾼 건 ‘말 바꾸기’가 아니라 ‘민생 챙기기’다.”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 2024-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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