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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태화강 유채꽃 단지에서 주택가로 걸어서 5분. 빨간 벽돌 2층 건물이 하나 보인다. 30년 넘게 아이들을 길러낸 공립 어린이집이지만 지난해 2월 저출생의 흐름을 못 이기고 문을 닫았다. 땅과 건물을 팔아버려 급한 재정을 메우면 쉬웠을 것이다. 실제로 대다수 지방자치단체가 그렇게 한다. 하지만 울산시는 다른 길을 택했다. “주말·야간 돌봄 공백이 크다”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 지난해 7월 ‘365일 24시간 긴급 돌봄센터’로 탈바꿈시켰다. 지난달까지 연인원 7000명 넘게 이용했다. 문 닫았던 공간에 다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넘친다. 지자체 재산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지역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안타깝게도 이런 선택은 드물다. 동아일보 ‘땅 팔아 곳간 메우는 지자체들’ 시리즈(18, 19일 자) 보도처럼, 많은 지자체가 재산을 일회성 지출과 맞바꾼다. 전남 목포시는 2021년 유달경기장 부지를 936억 원에 팔았는데, 그중 약 300억 원을 현금을 뿌리거나 빚을 갚는 데 썼다. “새로운 재산 조성에 쓰라”는 조례를 스스로 어겼다. 더 큰 문제는 제값도 못 받는 사례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최근 5년간 지자체 재산 매각 1532건 중 96.6%가 공개경쟁 입찰이 아닌 수의계약이었다. 감정가보다 30억 원 이상 싸게 팔리거나 담당 공무원이 20억 원 가까이 뒷돈을 챙긴 사건까지 있었다. 감시의 사각에서 지자체 재산은 특혜와 비리의 온상이 돼버렸다. 행정안전부가 이제라도 손을 보겠다고 나선 건 다행이다. 지자체가 재산을 제값에 팔 수 있도록 전문기관을 세우고, 5년마다 바닥까지 조사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자체 홈페이지에 흩어진 정보도 하나의 플랫폼으로 통합한다. 검증 체계를 갖추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핵심이 빠졌다. 매각 대금을 어디에 쓸지, 그 원칙이 없다. 지자체 재산을 팔아 부족한 세입을 메우는 건 국민연금 개혁을 미루거나 국채를 무턱대고 찍어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미래 자산을 지금 세대가 먼저 써버려 ‘세대 간 계약’을 어긴다는 점에서다. 다른 점은 지방 재산 매각은 모두의 눈 밖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용히, 서서히. 지금 필요한 건 ‘재투자’ 원칙이다. 땅을 팔았다면 그 대금은 반드시 또 다른 자산이나 성장 기반에 다시 투자하도록 법으로 의무화하는 것이다. 특히 도시의 전략적 기반이 될 자산이라면 더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600조 원이 넘는 지자체 재산이 노인 돌봄·복지 지출을 메우는 현금인출기로 전락할 것이다. 강원 영월군의 방식을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부터 자투리땅이나 폐광 시설을 팔아 확보한 돈은 일반회계에 섞지 않고 따로 기금에 적립하고 있다. 그리고 기금으로 노른자 땅을 사들여 공업단지 임대주택 설치 같은 장기 프로젝트의 기반으로 삼는다. 빚을 메우는 대신 지역의 미래를 설계한 것이다. 지자체 재산을 지키고 키우는 건 미래 세대와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다. 오늘 거위의 배를 가르면 내일은 황금알을 얻을 수 없고, 숲을 베어 겨울을 나면 여름엔 산사태를 걱정해야 한다. 땅을 팔아 곳간을 메우는 우리의 선택은 얼마나 다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조건희 사회부 차장 becom@donga.com}

시각장애인과 고령 어르신들의 생애를 기록한 두 권의 구술자서전이 최근 잇따라 출간돼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다. 18일 서울 성북점자도서관은 4일 ‘여전히 삶은 아름답다’ 출판기념회를 열고, 시각장애인 10명의 생애사를 세상과 나눴다고 밝혔다. 사단법인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소속 구술작가들이 반년 넘게 시각장애인과 1대 1로 인터뷰하고 집필한 결과이다. 이날 행사에서는 시각장애인의 딸이 쓴 편지 낭독과 대금 연주가 이어지며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책에는 차별과 제약 속에서도 꿋꿋이 삶을 이어온 이들의 빛나는 생이 담겼다. 성북점자도서관은 “2026년 점자의 날 100돌을 앞두고 더 많은 이웃이 시각장애인의 삶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경기 의왕시 오전동 성당도 12일 ‘살아내니 빛난 내 인생’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2025 경기도 종교계 예술문화지원 사업으로 추진된 이번 프로젝트에는 70, 80대 어르신 10명과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이 참여했다. 작가와 대상자가 여름 내내 여러 차례 만나 인터뷰를 이어갔고, 사진과 삶의 조각들이 한 권의 기록으로 엮였다.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을 책 속에서 다시 만난 어르신들은 “이젠 하늘나라에 가도 아이들에게 미처 못 한 말을 남긴 것 같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관계자는 “평범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낸 이들의 기록이 지역 사회의 기억 자산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모든 사건엔 이유가 있고 그 배경엔 정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선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요. 복잡한 보건복지 정책을 알기 쉽게 풀어드립니다.#장면1. 최근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 전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대검찰청에 두 차례 “신중”을 언급한 걸 시인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수사 외압’이라고 반발한 검사들을 향해서는 “항명”이라며 꾸짖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항명 검사를 파면하는 법안까지 발의했습니다. 불과 한 달 전, 이재명 대통령은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을 폭로한 뒤 항명 혐의로 재판을 받다 무죄가 확정된 박정훈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에게 훈장을 수여했습니다.#장면2. 윤석열 전 대통령은 검사 시절 “어떤 권력도 법 위에 있어선 안 된다”며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 일가 수사 등을 지휘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취임 후엔 부인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각종 의혹에도 번번이 특검법을 거부했습니다. 비상계엄 이후에는 법원이 발부한 체포영장 집행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구치소에서는 속옷 차림으로 버티며 구인 명령에도 불응했습니다. 이런 장면을 보며 인지적 불편감을 경험하는 건 기자만이 아닐 겁니다. ‘같은 권력자가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지’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지요. 흥미로운 건, 이런 권력자의 이중적인 태도가 국민의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는 점입니다. ‘정치인의 위선이 사회적 불신을 키운다’는 말은 단지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인지부조화와 스트레스 반응을 유발하는 사회심리적 현상이라는 거죠.● 인지부조화 — 마음이 불일치를 견디는 방식사람은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내가 믿는 것과 눈앞의 현실이 정면으로 충돌하면 마음속에 불쾌한 긴장이 생깁니다. 1957년 미국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가 이름 붙인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이론입니다. 심리학개론 시간에 들어보셨죠?그가 쓴 현장 관찰 연구서 내용을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연구자는 1950년대 미국 중서부에서 활동하던 종말론 단체에 잠입했습니다. 교주는 곧 대홍수가 일어나 인류가 멸망하고 소수의 신도만 구출될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일부 신도는 이를 믿고 직장을 그만두고 재산을 팔아치웠을 뿐 아니라 가족과도 연을 끊었죠. 그리고 약속했던 ‘그날’이 왔지만, 세상은 멀쩡했습니다.신도들은 신념을 포기했을까요. ‘어찌 된 일이냐’며 교주에게 따졌을까요. 실제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신념을 포기하기는커녕 더 강력하게 예언에 매달리게 된 겁니다. 이들은 ‘우리의 기도 덕에 재앙이 연기됐다’는 교주의 말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포교에 나섰습니다. 페스팅거는 예언 실패가 신도들에게 거대한 인지부조화 상황을 만들었다고 진단했습니다. 특히 집까지 처분하는 등 되돌릴 수 없는 행동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부조화가 극심해지고, 그 긴장을 줄이기 위해 오히려 신념을 더 강화하게 됐다는 겁니다. 인간은 ‘거짓이 드러난 뒤 진실을 받아들이는’ 합리적 이성체가 아니라, 기존 신념을 지키려는 경향이 더 강한 나약한 존재라는 씁쓸한 결론이었습니다.페스팅거가 관찰한 광신도 집단의 행태가 오늘날 한국의 극우·극좌 집단과 겹쳐 보이지는 않으시나요. 두 사례는 모두 인지부조화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특정 정치인에게 강하게 동일시한 사람일수록, 그 인물이 과거와 다른 말을 하거나 위선을 드러냈을 때 지지를 철회하기보다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 “상황이 달라졌다”는 식의 새로운 설명을 만들어냅니다. 강성 지지층일수록 ‘자기 방어 강화 → 해당 지도자에 대한 믿음 강화 → 반대 진영에 대한 적대감 증폭’의 고리를 반복합니다. 그 과정에서 현실을 직시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되기 때문에, 결국 믿을만한 뉴스는 끊어버리거나 상대 진영을 ‘악’으로 단순화해 버리는 ‘도덕적 피로(moral fatigue)’ 상태로 빠져들게 됩니다.● 우리는 왜 위선을 유독 싫어하나그런데 이른바 ‘아스팔트 지지층’이야 합리화를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고 해도, 대다수의 국민은 어떨까요. 이를 예측한 또 다른 논문이 2017년 미국 예일대와 하버드대 연구진의 입니다.연구진은 피험자 619명에게 인터넷에서 음악을 불법 다운로드 받는 세 사람을 보여줬습니다. 그중 한 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다른 한 명(거짓말쟁이)은 ‘나는 불법 다운로드 같은 거 안 해’라고 했고, 나머지 한 명(위선자)은 ‘불법 다운로드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야’라고 했습니다.그 결과 사람들은 단순한 위반자나 거짓말쟁이보다 ‘도덕적인 척하며 남을 훈계하는 위선자’를 훨씬 더 싫어했습니다. 사람들은 위선을 ‘도덕적 신호를 가장해 타인을 기만하는 행위(false signaling)’로 인식했기 때문이라는 게 연구진의 분석입니다. 연구진이 ‘프린트할 때 양면 인쇄 대신 일부러 한 면 인쇄로 종이를 낭비하기’ ‘엄마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기’ 등 상황을 바꿔가며 실험해도 결과는 같았습니다. 재밌는 점은 위선자 중에서도 스스로 위선을 인정한 ‘정직한 위선자’는 어느 정도 용서받았지만, 위선을 부인하는 사람은 가장 낮은 신뢰 점수를 받았습니다. 즉, 사람들은 잘못 그 자체보다 ‘거짓된 도덕’을 경멸한다는 겁니다. 정치인이 자기모순을 합리화하거나 상황 논리로 덮을 때, 국민은 본능적으로 ‘속았다’는 감정을 느끼고 심리적 피로·분노로 이어집니다.권력자의 ‘내로남불’이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 자체를 손상한다는 걸 보여준 연구는 또 있습니다. 덴마크 로스킬레대 연구진은 올해 초 논문 에서 성인 1038명을 상대로 실험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한 집단에는 단순한 비리만 보도된 기사를 보여줬고, 다른 집단에는 “평소 청렴을 강조하던 정치인이 같은 비리에 연루됐다”는 위선 프레임의 기사가 주어졌습니다.그 결과 평소 도덕적인 척했던 정치인의 잘못이 드러났을 때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한다’는 신뢰는 유의미하게 더 떨어졌습니다. 비리 액수나 구체적 내용보다 “평소 한 말과 실제 행동이 다르다”는 정보가 민주주의 신뢰를 갉아먹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즉, 부패 그 자체보다 “말과 다르게 행동하는 권력자”가 민주적 제도에 대한 신뢰를 더 강하게 붕괴시키는 촉매 역할을 한 셈입니다.● 신뢰가 무너질 때 생기는 일권력자의 위선은 단순히 불쾌함을 넘어 ‘실제로’ 국민의 정신건강을 갉아먹는 위험 요인입니다. 2023년 성균관대와 이화여대, 미국 시카고대 연구진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정치적 신뢰가 낮은 사회는 우울 증상이 최대 2배로 높았습니다. 특히 건강이 취약한 집단에서 그 효과가 더 강했습니다. 66개국의 노인 1만3000명을 다층모형으로 분석한 결과입니다. 정치제도에 대한 신뢰가 실제로 정신건강의 완충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정치 뉴스 댓글창만 봐도 이런 과정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다 똑같다” “정치는 더러워서 관심 끊었다”는 냉소는 사실상 ‘집단적 인지부조화의 탈출구’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지키려면 정치 자체를 삶의 바깥으로 밀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치와 삶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세금, 연금, 의료·돌봄, 노동 조건을 결정하는 것이 정치이기 때문입니다.신뢰는 사회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자본입니다. ‘법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확신이 사라지면, 아무리 재정이 튼튼해도 사람은 불안을 느낍니다. 신뢰는 권력자의 일관된 언어와 책임 있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반면 “그때는 틀렸지만 지금은 괜찮다”는 합리화가 반복될수록 국민의 인지부조화는 심해지고, 사회는 무기력에 빠집니다.시민이 바라는 건 완벽한 정치인이 아닙니다. 누구나 실수하고 잘못 판단할 수 있습니다. 연구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건 실수보다 위선이 더 큰 피해를 낳는다는 점입니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는 지도자에게 시민은 훨씬 관대합니다. 이런 권력자를 기대하는 건 지나친 바람일까요.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중국 정부가 최근 새로운 인플루언서 규제를 시행했다. 의료나 법률, 금융처럼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주제의 콘텐츠를 올리려면 관련 학위나 면허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근거로 삼은 논문이나 자료도 함께 밝히도록 했다. 웨이보(중국판 X) 등 플랫폼은 이를 확인할 책임을 진다. 어기면 최대 10만 위안(약 2000만 원)의 벌금을 물린다. 한마디로 ‘발언의 자격’을 법으로 정한 셈이다. 중국 안에서도 찬반이 갈린다. “무책임한 거짓 정보를 걸러낼 수 있다”는 환영과 “정부가 또 검열을 강화한다”는 반발이 맞선다. 흥미로운 건 한국 여론이다. “국내 도입이 시급하다” “보기 드문 옳은 정책” 같은 댓글이 쏟아졌다. 검열 논란보다 ‘가짜 정보 피로감’이 더 크다는 뜻일 테다. 비슷한 움직임은 스페인에서도 나타났다. 지난해 5월, 연 수입 30만 유로(약 5억 원) 이상이거나 팔로어 100만 명 이상인 인플루언서의 담배·도박·고위험 금융상품 광고를 금지했다. 미성년자의 정서를 해칠 영상도 제재했다. 위반하면 최대 150만 유로(약 25억 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이런 규제가 잇따르는 건 유사과학과 허위 정보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어서다. 코로나19 시절을 떠올려 보자. 수백만 팔로어를 거느린 가짜 전문가들이 검증 안 된 치료법과 백신 음모론을 퍼뜨렸다. 영국 비영리단체 ‘디지털 증오 대응센터(CCDH)’에 따르면 온라인상 백신 관련 허위 정보 81만 건의 65%가 단 12명에게서 나왔다. 검증된 정보는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이제는 인플루언서에게도 발언의 자격과 책임을 묻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국민의 삶과 미래를 맡은 공직자는 그 무게가 얼마나 더 무거워야 할까. 그런데 지금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을 총괄 감독하는 국회 상임위원장은 비과학적 주장으로 논란을 빚은 인물이다. 최민희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이다. 그는 2001년 펴낸 책 ‘황금빛 똥을 누는 아기’에서 “출산 직후 3일간 굶기라”거나 “열이 나면 해열제를 쓰지 말고 충분히 열이 나도록 도와주라”고 권했다. “딸을 낳으려면 여성이 영양 섭취를 줄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다른 기고문에선 “인도인은 히말라야의 정기를 받아 생산 능력이 강하므로 여성이 몸을 감싸야 했다”고 적었다. 전부 과학적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주장이지만, 그 뒤로 정정하거나 해명했다는 얘길 들어본 적 없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최근 국정감사 기간에는 딸 결혼식 축의금 논란이 커지자 “허위·조작 정보는 암세포, 깨어 있는 시민은 면역세포”라며 자신에 대한 비판을 ‘암세포’에 빗댔다. 과학을 다루는 상임위 수장이 어설픈 과학 용어로 공론을 압박하는 모습, 이게 ‘과학 강국’을 추구하는 한국의 현실이다. 중국식 해법이 정답일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 말이나 할 자유’가 공적 책임을 짓누르는 광경도 건강하다고 보긴 힘들다. 최 위원장 말이 옳다. 우리 사회엔 면역세포가 필요하다. 그건 바로 공인의 비과학적 발언에 책임을 묻는 비판 의식이다.조건희 사회부 차장 becom@donga.com}

모든 사건엔 이유가 있고 그 배경엔 정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선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요. 복잡한 보건복지 정책을 알기 쉽게 풀어드립니다.요즘 시대에 누가 장기를 이식받으러 해외로 떠나느냐 싶죠. 하지만 ‘원정 이식’은 있습니다. 국내에서 이식 수술을 받은 적이 없는데도 ‘이식 후 면역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이 그 증거입니다. 정부 공식 집계는 없지만 의료 현장에선 이런 환자가 여전히 병원을 드나든다고 합니다.국내에서 장기 이식을 기다리다 지쳐 국경을 넘는 사람들. 그들이 향하던 곳은 한때 중국이었습니다. 2000~2016년 해외에서 장기이식을 받은 한국 환자는 최소 2206명, 그중 97.3%가 중국에서 수술받았습니다. (참고기사 )그러나 2015년 이후 중국 정부가 사형수 장기 거래를 단속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중국으로 향하는 문이 좁아지자 새롭게 열린 문, 그곳은 바로 캄보디아였습니다.● “일반 환자 안 받는 수상한 병원… 그곳에서 5000만 원에 콩팥 이식받아”최근 캄보디아의 한 교민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2023년에 70대 한국인이 프놈펜의 한 중국계 병원에서 콩팥을 이식받았어요. 한국에서 이식 순서가 언제 돌아올 지 모르니까 현지로 간 거예요. ‘(꼭 맞는 장기를) 찾았다’는 연락이 와서 바로 비행기를 타고, 2, 3일만에 수술을 받았습니다. 창문엔 병원 표시(╋)가 붙어있지만 일반 환자는 받지 않는 수상한 병원이었어요.”믿기 힘든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교민의 이야기는 구체적이었습니다.“대가는 5000만 원 정도였어요. 프놈펜에만 국내 폭력조직이 10개 넘게 들어와 있는데, 그중 장기 브로커 일을 겸하는 대구 쪽 조폭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어요.” 환자는 이식 받은 장기가 자연사한 시신에서 적출된 것으로 믿었다고 합니다.“그분(이식 환자)은 죄 의식은 없어요. 병원에서는 자연사한 사람에게서 기증받은 거라고 설명하거든요. 그런데 알 사람은 다 알죠. 출처가 불분명한 장기라는 걸요.”● 캄보디아, 10년 새 ‘장기 이식의 음지’로물론, 그의 전언만으로 불법 거래의 실체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캄보디아 내 장기 밀매를 입증하는 외신 보도는 이미 여럿입니다.2023년 7월 인도네시아 경찰은 국민 122명을 캄보디아로 유인해 콩팥을 적출하려 한 조직을 적발했습니다. 피해자 상당수는 팬데믹 기간에 직장을 잃은 상태에서 소셜미디어에서 제안을 받고 캄보디아로 향했죠. 12명이 체포됐고, 그중 3명은 캄보디아 현지에서 검거됐습니다. (참고기사 ) 2022년 10월 대만 당국은 캄보디아에서 장기 적출을 위해 피해자를 속여 데려온 조직원 3명을 체포했습니다. 조직은 “고수입 일자리”를 미끼로 사람들을 유인해 건강검진을 가장한 X-레이 촬영을 실시했고, 이후 ‘전염병 예방조치’라며 콩팥 등을 적출해 암시장에 판매했습니다. 국제 학술계도 캄보디아를 새로운 ‘장기 밀매 허브’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미국 조지메이슨대 연구진이 전 세계 장기이식 보도 5만여 건을 분석해보니 캄보디아가 2012~2022년 국제 불법 장기이식 네트워크의 ‘브로커 허브국가’로 신규 진입한 겁니다. 연구진은 “단속·법제 변화, 빈곤 같은 외생 요인이 거점 이동을 촉발한다”고 분석했습니다. 이 연구 결과는 올 4월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E)급 국제학술지(https://doi.org/10.1186/s12942-025-00397-8)에 게재됐습니다.● “수술은 누가 하나?”… 중국 병원의 그림자문제는 캄보디아가 독자적으로 고난도 이식수술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 수술들은 어디서, 누구에 의해 이뤄지고 있을까.김황호 한국장기이식윤리협회(KAEOT) 이사는 이렇게 말합니다.“캄보디아는 지금 중국의 한 성(省)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중국의 장기 적출 시스템이 그대로 수출된 겁니다.”중국이 경제 영토 확장 사업인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일환으로 캄보디아에 병원 여러 곳을 지어줬고, 그곳에서 장기 적출과 이식이 진행된다는 얘깁니다. 2022년 3월 중국이 프놈펜에 약 8500만 달러를 지원받아 병원을 세웠을 땐 개원식에서 훈센 총리가 “이런 수술이 일부 사기꾼에게 불법 비즈니스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이 우려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중국의 군 병원들이 과거 장기 적출을 주도해 왔고, 그 의사들이 지금 캄보디아 병원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 내 병원을 사실상 중국 자본과 인력이 운영는 거죠.”캄보디아가 2016년 장기 매매를 금지하는 법을 시행했지만 제대로 지켜지는지 감시할 역량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도 한몫합니다. 장기 출처 관리체계의 투명성도 약합니다. 이런 제도적 공백이 불법 이식의 ‘안전지대’를 만든 셈입니다.● 절망의 양 끝, 두 개의 ‘탈출’한국의 ‘수요’와 동남아의 ‘공급’이 교차하는 지점이 바로 이 시장입니다. 부유한 국가의 환자가 생존을 위해 돈을 내고, 가난한 국가의 주민은 생계를 위해 장기를 팔거나 중개합니다. 국제 사회가 ‘장기 관광(transplant tourism)’을 규제하려는 이유입니다.상황이 이렇다보니 현지 교민들은 이식 수술에 쓰인 장기의 출처를 두고 의구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실종된 후 생사를 알 수 없는 한국인은 162명입니다. 이중 일부가 장기 매매에 연루된 것 아니냐는 우려입니다.결국 이 의혹의 양 끝에는 두 부류의 한국인이 존재합니다. 한쪽은 한국에서 마땅히 먹고살 길을 찾지 못하고 캄보디아로 향했다가 인신매매 단지에서 감금·착취에 시달리다 사라진 청년들, 다른 한쪽은 국내에서 장기 이식을 기다리다 합법의 문턱 바깥으로 밀려난 환자들입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지난해 장기이식을 기다리다 사망한 환자 수가 처음으로 3000명을 넘겼습니다. 콩팥 이식 대기자의 평균 대기 기간은 2020년 2222일에서 올해 6월 2888일까지 늘어났습니다. 간 이식의 경우 132일에서 204일로 늘어났습니다.기다림은 점점 가망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장기이식 대기 환자 수는 2020년 3만5852명에서 지난해 4만5567명까지 늘었는데, 뇌사 장기기증자 수는 2016년 573명에서 지난해 397명까지 줄었습니다. (참고기사 )● 왜 ‘기증 자동 동의제(Opt-out)’인가불법 장기 거래의 근본 원인은 언제나 ‘기증자의 부족’입니다. 합법 이식이 어려울수록 절박한 환자들은 국경 밖 음지로 몰립니다.한국이 특별히 생명나눔 의식이 부족해서 기증 장기가 부족한 걸까요. 제 견해는 다릅니다. 제도가 이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장기 기증은 현재 ‘명시 동의제(Opt-in)’입니다. 본인이 생전에 명시적으로 장기 기증 의사를 등록해야만 가능합니다.그러나 장기기증 등록자는 줄고 있습니다. 2014년 176만 명이던 장기기증 희망자는 지난해 10월 기준 120만 명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반면 대기자는 10년 새 두 배로 늘었습니다.해외는 어떨까요. 영국의 개정 장기기증법, 이른바 ‘맥스와 키이라 법(Max and Keira’s Law)’을 살펴봅시다. 2017년 9월 키이라 볼(당시 9세)이 교통사고로 뇌사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의 심장은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던 동갑내기 맥스 존슨에게 이식됐습니다. 맥스는 그 덕분에 생명을 구했습니다.이 사건이 영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메시지가 널리 퍼졌고, 맥스와 키이라의 가족은 이후 장기기증 제도 개혁 캠페인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맥스는 이식 후 건강을 되찾아 BBC 등에서 “키이라 덕분에 살았다”고 말했습니다.결국 2019년, 영국 의회는 이들의 이름을 딴 법을 통과시켜 ‘자동 동의제(Opt-out)’를 공식 도입했습니다. 즉, 생전에 ‘기증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사망 시 자동으로 장기 기증 의사가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 덕에 장기 기증 동의율이 2020년 58%에서 지난해 67%로 상승했고, 가족 반대율은 같은 기간 37%에서 32%로 하락했습니다. 기증 거부 등록자는 전체 성인 중 3.1%에 그쳤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네요. (참고자료 )40년 넘게 자동 동의제를 운영하는 스페인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장기기증률(2023년 기준 인구 100만 명당 48.9명)을 기록 중입니다. 한국(9.3명)의 5배가 넘습니다.한국의 장기이식법은 1999년 2월 제정됐을 때부터 줄곧 명시 동의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간혹 관련한 국회 토론회가 열리긴 했지만 법안 논의에 이른 적은 없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떤가요. 국내에서 기다림에 지친 이들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현실을 낳았습니다.● 합법의 경로를 넓혀야 불법이 줄어든다캄보디아를 비롯한 동남아의 장기 밀매 시장을 추적하는 일은 국제 공조가 필요한 복잡한 과제입니다. 한국 정부는 캄보디아와 협력해 한국 청년이 감금돼있을 ‘웬치(범죄단지)’를 단속하겠다고 했는데, 장기 밀매가 이뤄진다고 지목된 병원도 조사해야 합니다.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수요’에 있습니다. 기증자가 부족한 사회에서, 장기를 사고파는 시장은 음지에서 스스로 생겨납니다. 장기 기증의 문턱을 낮추고, 합법적 경로를 넓혀야 불법 시장이 설 자리를 잃는 것이죠. 그 절박함이 법의 바깥으로 흘러가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복지국가가 감당해야 할 책무입니다. 이제는 자동 동의제를 진지하게 검토할 때입니다. 생명을 지키는 제도적 복지는 언제나 가장 절박한 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최근 눈길을 끄는 판결이 나왔다. 발단은 배우 변우석 씨의 지난해 7월 출국길이었다. 당시 변 씨의 경호원은 사진을 찍으려던 시민들 얼굴에 강한 플래시를 비추고, 탑승권까지 들여다봤다. 법원은 이를 위법한 물리력 행사로 보고 경호원과 경비업체에 각각 벌금 100만 원을 선고했다. 판사는 “촬영을 막으려면 일정을 비밀로 하고 조용히 이동하면 될 일인데, 오히려 팬미팅하듯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통과했다”고 꾸짖었다. 멀쩡히 공항을 이용하던 시민이 연예인 ‘행차’의 배경으로 전락하고, 경호 인력이 그 시민을 ‘방해물’처럼 다루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23년 2월 아이돌 그룹 NCT DREAM 입국 현장에서는 한 시민이 경호원과 부딪혀 늑골이 부러졌다. 지난해 6월엔 또 다른 아이돌 팬이 경호원과 충돌해 뇌진탕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이를 단순 해프닝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공항 패션쇼’는 연예기획사와 브랜드가 합작한 정교한 비즈니스 각본이다. 출입국 일정을 일부러 흘린다. 협찬받은 옷과 가방을 들어 보인다. 착용한 아이템은 금세 ‘완판’된다. 업계에선 이런 이벤트가 막대한 광고 효과로 환산된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차리는 런웨이다. 이게 얼마나 괴이한 광경인지부터 직시하자. 할리우드 스타들을 생각해 보라. 모델료가 한국의 수십 배인 그들이 비행기를 탈 때마다 공항이 마비된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 없다. 출퇴근 인파로 붐비는 지하철 신도림역 승강장에 연예인이 사전 예고를 하고 나타난다면 어떨까. 더구나 패션 브랜드로부터 ‘뒷광고’를 받은 상태라면. 공항 패션쇼는 ‘팬과의 소통’이라는 미명 아래 공공 공간을 뺏는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국은 변죽만 울린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지난해 연예인 전용 출입문을 내밀었다가 특혜 논란에 시행 하루 전 백지화했다. 지난달 유관 기관 회의에선 ‘공항이용계획서 사전 제출’ 등이 제안됐지만 미봉책일 뿐이다. 통행 방해와 무단 촬영 자체를 막아야 하는데, 관련 법안은 1년 넘게 국회에 잠들어 있다. 해외는 다르다. 영국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촬영하려면 사전에 허가받아야 한다. 혹시 모를 피해에 대비해 1000만 파운드(약 190억 원) 규모의 보험까지 들어야 한다. 이를 어기면 조례 위반으로 퇴거 조치될 수 있다. 미국 일부 공항은 유료 VIP 터미널을 운영한다. 스타들이 알아서 돈을 내고 여길 이용한다. 무엇보다 해외 스타들은 동선을 공개하지도 않는다. 공항을 홍보 무대로 여기지 않는, 당연한 처사다. 연예계가 자중하기만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미 기형적인 수익 모델이 깊숙이 뿌리내려서다. 그렇다면 공항과 경찰이 명확한 기준을 세우고, 이를 어기면 과감히 제재할 필요가 있다. 경호업체의 ‘원청’인 연예기획사를 직접 제재하는 것도 방법이다. 상습적으로 불편을 초래한 기획사의 공항 이용을 제한하면 어떨까. 지금처럼 공항 패션쇼를 쉽게 생각하지는 못할 테다. “선 넘으면 손해 본다”는 신호가 쌓여야만 ‘팬과의 만남은 공항이 아닌 장소에서’라는 상식이 되살아난다. 공항은 모두의 길이지, 누구 한 사람의 런웨이가 아니다.조건희 사회부 차장 becom@donga.com}

2년 전 캐나다 의사들을 만나 응급환자 표류 문제를 취재했다.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캐나다 2.8명, 한국 2.6명으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캐나다에선 중증 응급환자가 병원을 전전하는 일이 드물다. 의사들이 피부미용 분야에 쏠려 수술실이 텅 비는 일이 없다는 얘기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했다. “캐나다에선 피부미용이 돈이 안 되나 보죠?” “아뇨, 많이 법니다. 그런데 왜요?” 서로 어리둥절한 채 잠시 정적이 흘렀다. 스콧 뱅크스 캘거리대 응급의학과 교수가 정리했다. “만약 의사 대부분이 돈 되는 과만 고른다면, 그건 의대생을 잘못 선별한 탓입니다.” 그리고 이어진 질문. “한국은 성적만 보나요? 의사가 되려는 이유는 묻지 않나요?” 낯선 물음이었다. 분명히 짚고 가는데, 이 글은 의대생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이미 힘든 길을 택한 이들이다. 다만 바른 나침반을 건네는 건 사회의 몫이다. 입시는 직업윤리의 예고편이다. 시험이 기억력과 속도만 물으면 그 능력만 자란다. 한편 “왜 이 길을 택했으며, 누구를 위해 일할지”를 물으면, 다른 근육도 함께 자란다. 현대 의학의 아버지 윌리엄 오슬러의 말처럼 “병 넘어 환자까지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감각 말이다. 캐나다와 미국, 영국의 의대는 성적이 아무리 우수해도 봉사활동과 지역사회 경험이 부족하면 합격할 수 없게 설계됐다. 특히 캐나다의 많은 의대가 인성검사(CASPer)를 비중 있게 본다. 집중면접(MEM)에선 단순 암기로는 대비할 수 없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일손이 부족하면 누구를 먼저 치료할지” “치료를 거부하는 환자를 어떻게 설득할지”와 같은 윤리적 딜레마를 제시하며 학생이 갖춘 철학을 보는 식이다. 몬트리올대 의대는 1차 선발에서 인성검사를 40% 반영한다. 최종 단계는 100% 집중면접이다. 한국 의대는 성적 중심이다. 면접도 있지만, 대체로 답을 외워서 대비할 수 있는 수준이다. 사회적 책임 의식을 제대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반영 비율도 5∼20%로 형식에 가깝다. 서울대 의대가 최근 내놓은 커리큘럼 개편안은 이런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2027년 1학기부터 ‘팀 스포츠’ ‘지역의료 실습’ 등 과목을 신설해 포용과 공감, 희생 의식을 키운다는 계획이다. 김정은 학장은 본보 인터뷰에서 “의정 갈등을 겪으며 지식 전달을 넘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꼈다. 살면서 받은 혜택과 의사에게 부여된 특권을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자각을 교육에 녹여내겠다”고 말했다. 서울대의 변화는 출발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의대생 선발 기준부터 돌아볼 때다. 의정 갈등을 거치며 정책 혼선뿐 아니라 환자를 두고 떠나는 의사의 뒷모습에도 크게 실망한 사람들이 많다. 이제는 선발 때부터 “환자와 사회를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됐는지”를 물으면 어떨까. 여기에 스스로 답해 본 사람은 같은 지식을 배워도 다른 길로 걸어간다. 그 답을 흰 가운에 새긴 이들이 많아질 때, 의정 갈등의 상처도 비로소 아물 것이다. 조건희 사회부 차장 becom@donga.com}

올 4월 미국연방수사국(FBI) 55개 지부의 요원은 일제히 ‘악마’의 집 문을 두드렸다. 압수한 노트북에선 많게는 2900개의 아동 성 착취물이 나왔다. 작전명 ‘정의 구현(Restore Justice)’. 그렇게 5일 만에 205명이 체포되고 피해 아동 115명이 가해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중 일리노이주에서 잡힌 41세 남성은 채팅에서 꾀어낸 10세 소녀를 만나러 가려던 참이었다. 방식은 이랬다.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정보통신 기업은 법적 의무에 따라 성 착취물 자료를 아동실종·착취센터(NCMEC)에 신고했다. FBI는 거기서 구매자의 인터넷주소(IP주소)와 결제 기록을 추적했다. 영상 만든 쪽뿐 아니라 내려받아 본 사람까지 정면으로 겨눴다. 영국과 캐나다, 호주도 NCMEC 같은 실시간 단서 수집망을 갖추고 있다. 각 나라 기관이 정보를 서로 나눈다. 이렇게 해마다 수천만 건의 자료를 추적하고, 이를 수요자 단속으로 연결한다. 우리의 현실은 ‘맨눈으로 바늘 찾기’다. 아동 성 착취물이나 불법 촬영물, 딥페이크 음란물 등 성 착취물 판매자가 잡히면 그에게서 영상을 산 몇몇이 덩달아 걸리는 방식이다. 그래서 ‘어쩌다 걸려든’ 이들이 주로 처벌된다. 미국처럼 광범위한 수요자를 정조준한 수사는 드물다. NCMEC 같은 체계를 갖추지 못해서다. 그렇게 방치된 영상은 또 퍼져나가 피해자를 끝없는 두려움 속에 가둔다. 불법 촬영물의 경우 잡힌 이들마저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 3374건을 내려받은 피고인도 고작 벌금 700만 원만 냈다. 법에는 단 1개만 사거나 갖고 있어도 징역 3년을 선고할 수 있다고 돼 있지만, 법정에서는 딴 세상 얘기다. 신상 공개까지 이어진 사례도 찾기 힘들다. 수요는 내버려둔 채 공급만 막으려다 보니 유통망은 이름만 바꿔 되살아난다. 텔레그램을 틀어막자 금세 작은 해외 플랫폼으로 옮겨간 ‘n번방 망명’이 대표적이다. 서버는 외국에 있고 운영자 신원도 알 수 없어 접속 차단이나 압수수색은 번번이 벽에 부딪힌다. 이 고리를 끊으려면 NCMEC 같은 ‘K-사이버팁라인’ 구축을 서둘러야 한다. 네이버·카카오·KT 같은 업체에서 의심 자료를 실시간으로 넘겨받아 모으는 것이다. 이런 체계를 갖춰야 NCMEC 같은 국제공조망에도 자연스레 합류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구매자를 한꺼번에 잡는 대규모 위장 수사도 고려할 때가 됐다. FBI는 성 착취물을 퍼뜨리던 서버를 압수하면 잠시 운영자로 위장해 접속자를 역추적해 구매자를 잡아들이고 있다. 2012년부터 이렇게 잡아들인 구매자만 1000명이 넘는다. ‘보기만 해도 범죄’라는 경고를 뇌리에 박아 넣는 방식이다. 지금처럼 공급만 잡는 건 잡초의 뿌리는 두고 잎만 잘라내는 꼴이다. 새로운 망명지가 끊임없이 생길 뿐, 피해자는 여전히 불안 속에 산다. 이제는 화살을 사는 사람에게 겨냥해야 한다. 성 착취물은 피해자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범죄다. ‘나도 한 번 내려받아 볼까’라는 유혹 앞에서 누구나 “걸리면 끝장이다”라는 공포를 느끼게 해야 한다.조건희 사회부 차장 becom@donga.com}

1981년 3월, 가정폭력 신고로 출동한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경찰의 손에는 세 장의 카드가 들려 있었다. 가해자 즉시 체포, 8시간 동안 집 밖으로 내보내기, 경고만 하고 돌려보내기 중 하나를 무작위로 택했다. 그렇게 330건을 대상으로 6개월간 추적한 결과, 체포된 집단의 재범률은 19%로 가장 낮았고 단순 경고 집단은 그 2배에 육박했다. 그 유명한 ‘미니애폴리스 실험’이다. 가정폭력이 사적 다툼이 아니라 공권력이 개입해야 할 범죄라는 사실을 확인시킨 결과였다. 이후 미국 다수의 주(州)가 가정폭력 대응에서 기존의 ‘불간섭(hands-off)’ 원칙을 버리고 의무 체포제를 도입했다. 물론 논란도 있었다. 무조건 체포가 장기적으로는 피해자 안전에 불리할 수 있고, 무고의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반론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체포만으로 끝내지 않고 피해자 안전계획, 주거·현금 지원, 심리상담, 가해자 교정 프로그램까지 결합한 맞춤형 개입 패키지를 만들었다. 핵심은 명료하다. 사회가 얼마나 일찍, 그리고 끊김 없이 개입하느냐다. 한국의 현실은 다르다. 전체 살인(미수 포함) 피해자 중 친족의 비율은 2020년 29.6%에서 지난해 47.5%로 뛰었다. 살인 사건의 절반 가까이가 가족에 의해 벌어졌다는 뜻이다. 범행 장소 역시 집이 절반이 넘었다. 올 6월 인천 부평구에선 60대 남편이 접근금지 명령이 풀린 지 며칠 만에 아내를 살해했다. 범행 사흘 전에도 아내가 경찰에 신변 보호를 요청했지만 곧장 조치되지 않았다. 늦어진 개입은 결국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을 가장 치명적인 공간으로 바꿔 놓는다는 걸 보여준 사례다. 현장에서도 가해자의 조기 격리를 호소한다. 제주에서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쉼터를 운영하는 허순임 소장은 “궁극적으로 이런 쉼터는 없어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가정폭력 관련 법·제도가 가해자에게 너무 관대하다 보니, 오히려 피해자가 일상을 박탈 당한 채 격리되고 있다는 뜻이다. 영국도 일찍이 초기 대응을 강화했다. ‘클레어법’이 대표적이다. 2009년 36세 여성 클레어 우드가 연인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계기였다. 남성은 동거 여성 폭행 전과가 있었지만, 클레어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이를 계기로 2014년부터 영국 전역에서 ‘가정폭력 공개제도’가 시행됐다. 피해자가 직접 상대의 전과를 조회할 수 있는 ‘알 권리’와, 경찰이 위험을 감지하면 피해자에게 먼저 알리는 ‘알릴 의무’가 핵심이다. 우리에겐 없는 제도다. 한국은 “가족 문제는 가족끼리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현행범이 아니면 체포가 어렵고 주거와 상담, 생계지원 제도는 여러 기관에 흩어져 있다. 미니애폴리스 실험과 클레어법이 남긴 교훈은 분명하다. 가족 내 갈등이 폭력으로 번지기 전에 사회가 개입하고, 개입이 시작됐다면 중간에서 멈추지 않는 것.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흉기가 되는 걸 막으려면 사회가 일찍 나서야 한다.조건희 사회부 차장 becom@donga.com}

사단법인 ‘사전의료의향서실천모임(사실모)’은 서울 금천구의 의뢰를 받아 오는 9월 22일부터 26일까지 5일간 금천청년꿈터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전문상담사 양성과정’을 운영한다. 이번 교육은 총 20명을 대상으로 10강 과정으로 진행되며, 호스피스·완화의료 전문가인 박상철 전남대 석좌교수(100세인 연구가)와 정현채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 조정숙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본부장, 상담 전문가 윤서희 씨 등 다양한 분야 강사진이 참여한다. 강의 주제는 △노년의 존엄과 독립 △웰다잉 이해와 실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 기법 △등록 절차 및 상담 시연 등이다. 사실모는 매년 전문 상담사 양성교육을 통해 임종 자기결정권 보장과 존엄한 죽음 문화 확산에 힘쓰고 있다. 이번 강의는 금천구와 직업훈련 전문기업 맥시머스, 사실모가 협력해 만들었다.금천구 관계자는 “이번 교육을 통해 지역 내 전문 상담사를 확보해 시민들이 보다 체계적인 상담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올림픽체조경기장에 고성능 폭탄을 여러 개 설치했다.” 팩스로 날아온 이 한 문장이 1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일대를 마비시켰다. 경찰특공대와 소방대원 등 130여 명이 출동하고 이용객 2000여 명이 대피했다. 이날 오후 4시로 예정됐던 아이돌 그룹의 공연은 연기됐다. 폭발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5일엔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협박 글에 경찰과 소방대원 240여 명이 출동하고 이용객 4000여 명이 긴급 대피했다. 백화점은 3시간 폐쇄돼 약 6억 원의 손실을 봤다. 협박 글을 쓴 이는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그는 경찰에 “사람들 반응이 궁금했다”고 진술했다. 이 사건들을 접하니 일선 경찰서를 출입하던 13년 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2012년 3월 미국 뉴저지주의 한 911신고센터에 “AK-47 소총으로 학생들을 쏘겠다”는 협박 전화가 걸려 왔다. 경찰은 발칵 뒤집혔다. 즉각 대테러팀 44명과 헬기, 장갑차가 출동했다. 인근 초중고교 및 대학 8곳이 봉쇄됐다. ABC뉴스를 비롯한 주요 방송사가 이 사건을 생중계했다. 그런데 수사 결과 이 협박 전화의 발신지는 한국이었다.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과 서울경찰청의 공조로 이듬해 육군 일병인 20세 이모 씨가 검거됐다. 그는 입대 전 국제전화 앱으로 허위 신고를 반복해 온 상습범이었다. 미국 측이 추산한 경찰·소방 대응 손실액만 8만1507달러(약 1억1000만 원)에 달했다. 이 사건의 결말이 궁금해 자료를 찾아봤다. 나라 망신을 산 범죄였지만, 이 씨가 받은 건 벌금 1000만 원이 전부였다. 만약 미국에서 체포됐다면 실형은 물론이고, 수십만 달러의 민사소송을 피할 수 없었을 사건이었지만 한국에선 솜방망이 처벌로 끝난 것.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한국 사회는 달라졌을까. 올 3월 불특정 다수를 협박한 행위를 처벌하는 ‘공중협박죄’가 형법에 신설됐다. 하지만 벌금형 상한이 2000만 원으로 일반 업무방해죄(1500만 원)와 큰 차이가 없다. 입증 요건도 까다로워 법 시행 후 석 달 동안 적용 사례가 18건뿐이다. 게다가 대부분 미성년자여서 형사처벌 자체가 쉽지 않다. 또 다른 문제는 허위 협박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가해자에게 물리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점이다. 기관이 개별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야 하는데, 소송에 드는 시간과 비용 부담, 승소의 불확실성 때문에 실제로 나서는 경우가 거의 없다. 300차례 넘게 112에 허위 신고를 한 50대에게 약 500만 원 배상이 명령된 사례 정도가 있을 뿐이다. 반면 해외에선 ‘허위 신고=배상 폭탄’이란 등식이 자리 잡았다. 미국은 2022년 미네소타에서 경찰 특수기동대(SWAT)를 출동하게 만든 10대의 부모에게 4만 달러(약 5500만 원)의 비용을 청구했고, 독일 역시 2018년 철도 폭탄 협박 문자를 보낸 20대에게 7000유로(약 1100만 원)의 손해배상을 물린 바 있다. 테러 위협은 공공 시스템을 마비시킬 뿐 아니라 시민 안전을 위협하는 중대한 범죄다. 진짜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쓸 자원을 낭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제는 형사처벌은 물론이고 민사적 책임까지 물을 장치를 검토할 때가 됐다.조건희 사회부 차장 becom@donga.com}

중앙대언론동문회(회장 이종훈)는 ‘2025 제13회 의혈언론인상’ 수상자로 성유미 연합뉴스TV 아나운서(경영06), 안상현 조선일보 기자(신문방송07), 이보람 중앙일보 기자(신문방송08)를 선정했다고 17일 밝혔다.중언회는 16일 서울 동작구 중앙대 약학대학 R&D센터 유니버시티클럽에서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시상식을 진행했다. 의혈언론인상은 중앙대 교육 이념인 ‘의’와 ‘참’을 실천하고 한국 언론 발전에 기여해 온 젊은 기자들을 발굴·격려하기 위해 지난 2014년 처음 제정됐다.아울러 중언회는 ‘2025 중앙언론동문상 특별상’ 수상자로 더불어민주당 이연희 의원(철학 86)을 선정했다. 이 의원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지역구에서 제22대 국회에 입성해 전반기 국토교통위원회 및 여성가족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그 아이들 36명 중 25명은 성적이 평균 이상이었다. 18명은 학교생활에 만족했다. 16명은 학교 클럽에도 가입한 상태였다. 아이들의 짧은 삶을 들여다본 연구진은 이렇게 적었다. “많은 경우 겉으로는 문제없어 보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그 아이들은 자살 청소년이다. 지난해 홍현주 한림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교수팀은 2015년부터 2021년 사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초중고교생 중 36명을 심리부검 형식으로 조사해 그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했다. 심리부검은 유족의 진술과 고인의 기록을 바탕으로 자살 원인을 추정하는 방식이다.그런데 교육부의 한시적 예산으로 진행한 이 연구는 청소년 사망자를 대상으로 한 국내 처음이자 마지막 심리부검이었다. 보건복지부가 2015년부터 공식적으로 시행하는 심리부검은 만 19세 이상 성인에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연구 결과에는 그간 통계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청소년 자살의 단면이 담겼다. 숨진 36명 중 29명은 생전 말이나 행동으로 ‘위험 신호’를 보냈다고 한다. 갑자기 말이 줄고 방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거나, “나 없어졌으면 좋겠어” 같은 말을 농담처럼 내뱉었던 경우다. 지난달 21일 부산 해운대구에서 함께 숨진 채 발견된 여고생 3명도 마찬가지였다. 현장에는 학업 스트레스와 진로 부담을 호소하는 유서가 있었다고 한다.36명 중 35명이 정신질환으로 진단된 바 있지만 정기적으로 약물 치료를 받은 사례는 단 3명뿐이었다. 이는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을 줄이고 전문가의 도움을 당연히 여길 수 있는 문화가 절실하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2022년 국립정신건강센터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청소년의 18%가 우울 불안 같은 정신질환을 경험하지만, 정신건강 서비스를 한 번이라도 이용한 비율은 5.6%에 불과하다.청소년 자살을 성인과 다르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연구로 확인된다. ‘첫 시도’가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성인 자살 사망자의 41.1%는 과거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심리부검에 따르면 청소년은 그 비율이 13.9%에 불과했다. ‘응급실 기반 자살 시도자 사후관리’ 같은 기존 자살 예방 정책만으로는 청소년 자살을 막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다.청소년 자살의 심각성은 몇 가지 수치만 봐도 분명하다. 2023년 한 해 동안 370명의 10대 청소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 사망률로는 통계 작성(1983년) 이래 가장 높았다. 2011년 이후 10대 사망 원인 부동의 1위가 자살이다.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5일 취임 첫 국무회의에서 “우리나라 자살률이 왜 이렇게 높은가”라며 관련 대책 마련을 주문했다. 청소년 자살에 대해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놓으려면 원인을 정확히 짚는 게 출발점이 돼야 한다. 그 시작은 심리부검을 정례화하고 확대하는 것이다.조건희 사회부 차장 becom@donga.com}

한 육군 훈련병이 지난달 23일 군기 훈련(얼차려)을 받다가 쓰러져 이틀 후 사망했다. 간호사를 꿈꿨던 이 훈련병은 훈련 당시 입소한 지 9일밖에 안 된 상태였다. 그런데 20kg이 넘는 군장을 메고 1시간 넘게 팔굽혀펴기와 선착순 달리기를 한 것으로 조사됐다. 훈련이 어찌나 가혹했던지 병원에 이송됐을 땐 근육이 괴사해 있었고 소변이 시커멨다고 한다. 규정 위반이 명백하다. 육군 규정에는 군기 교육이 가혹행위로 변질하지 않도록 “인권침해의 소지가 없도록 특별히 주의하라”고 명기돼 있다. 특히 훈련병의 신체 상태를 고려해야 하고, 훈련이 1시간이 넘으면 10분 이상 쉬게 해줘야 한다. 법원은 4년 전 부하 장교에게 1시간 넘게 차렷 자세를 시킨 한 대대장의 해임이 정당했다며 이 지시를 ‘가혹행위’라고 선고했다. 이번 사건에서 훈련을 지시한 중대장(대위)과 부중대장(중위)이 민간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군은 이들에게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가 있다고 봤다. 해당 부대를 거친 병사 사이에선 이전에도 가혹한 군기 훈련이 자행됐다는 주장이 나온다. 경찰은 이번 사건뿐 아니라 예전에도 규정을 어긴 군기 훈련이 상습적으로 벌어졌는지, 이를 예방하고 감시할 부대의 지휘체계가 제대로 작동했는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 군은 조사 결과를 토대로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러려면 정확한 원인 분석과 해법 모색이 필요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온라인에서 가장 강력하게 떠오른 것은 ‘이성 혐오’라는 오물이었다. 훈련을 지시한 중대장이 여성이라는 이유였다. 남성 위주 사이트에서는 해당 중대장의 실명과 출신 대학을 조리돌리듯 공유하는 글이 수천 건 올라왔다. “체력의 한계에 무지한 여성이 지휘관을 맡아서 벌어진 일”이라거나 “여군이라서 남성 훈련병의 기를 꺾기 위해 무리한 훈련을 시켰다”는 억측이 빗발쳤다. 중대장의 사진을 올리고 “쇼트커트를 한 거 보니 남성을 혐오하는 페미니스트 같다”고 적은 글에 ‘좋아요’가 수백 개 달렸다. 피의자들을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국가 권력을 업은 고문치사’라는 지적을 수사기관이 귀담아듣고 철저히 수사해 일벌백계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피의자의 혐의가 아닌 그의 성별에 매몰되는 건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행위다. 가해자의 성별이 문제였다면, 최근 10년간(2013∼2022년) 군기 사고로 숨진 655명의 관련자 대다수가 남성인 것은 어떻게 설명할 건가. 체력의 한계를 몰라서, 혹은 악의(惡意)로 이런 일을 벌였다면 그런 이에게 훈련 권한을 부여하고 방치한 군의 지휘체계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사건을 계기로 일어나는 국민적인 관심과 공분은 매우 한정적인 ‘사회적 자원’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른 이슈에 밀려 무관심의 그늘로 사라지기 일쑤다. 개혁신당 이기인 최고위원은 페이스북에 ‘국민의 알권리’라며 해당 중대장의 실명을 공개했다. 피의자를 악마로 몰아서 ‘정의가 구현됐다’는 후련한 착각에 머무르는 순간 진짜 대책은 더 멀어진다. 시스템에서 망가진 부위가 어디였는지 정확히 짚을 때다. 그게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청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조건희 사회부 차장 becom@donga.com}

모든 사건엔 이유가 있고 그 배경엔 정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선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요. 복잡한 보건복지 정책을 알기 쉽게 풀어드립니다.더불어민주당이 4·10총선 때 공약했던 ‘민생회복지원금’을 22대 국회가 열리자마자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지역화폐 형태로 1인당 25만 원씩 주고 기초생활 수급자와 취약계층엔 10만 원을 더 지급하는 방식입니다. 약 13조 원이 든다고 합니다.‘13조 원’. 얼마나 큰 돈인지 잘 와닿지 않습니다. 등 각 부처 자료를 참고해서 13조 원으로 할 수 있는 게 뭔지 따져봤습니다.출생아 23만 명에게 5000만 원씩 줄 수 있습니다. 저소득층 긴급복지 지원금을 36배로 늘릴 수 있습니다.코로나19 때 ‘게임 체인저’였던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 기술을 국산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도 11조4000억 원이 남습니다. ‘간병 살인’ 부르는 간병비를 전액 국가가 책임지고도 거스름돈이 3조 원 남습니다.즉, 전 국민에 25만 원을 주는 게 정당화되려면 위에 나열한 용처보다 더 시급하고 효과도 크다는 걸 입증해야 합니다. 과연 그런 효과를 확신할 수 있는지, 국회가 더 서둘러야 할 일이 있는 게 아닌지 살펴봤습니다.● 전 국민 현금 지원, 코로나19 땐 효과 어땠나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19일 당원 콘퍼런스에서 “민생회복지원금을 지급하면 소비 확대로 자영업자들의 숨통이 트이고 결과적으로 골목 경제와 지방경제가 살아나는 효과를 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단순히 ‘돈을 주자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보들”이라고 했습니다.저는 바보가 아니므로 민생회복지원금이 단순히 돈을 주는 것 말고도 어떤 효과를 낼지 근거를 찾아봤습니다. 먼저, 이 대표의 주장처럼 소비 진작과 소상공인 지원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할지입니다. 우리나라에선 비슷한 ‘실험’이 이미 이뤄진 적이 있습니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4·15총선을 약 보름 앞두고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긴급재난지원금입니다. 원래 소득 하위 70%에 준다고 했다가 국회 심의를 거치며 대상이 전 국민으로 늘어났습니다. 모든 가구에 40만~100만 원을 지급하는 데 총 14조3000억 원이 들었습니다.당시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긴급재난지원금의 효과를 분석해서 같은 해 12월 를 발표했습니다. 지원금에 따른 소비 증대 효과가 0.26~0.36배였다는 결론이었습니다. 100만 원 받아서 그중 26만~36만 원만 추가로 소비했다는 뜻입니다. 연구진은 “코로나19로 피해가 큰 대면 서비스업에서는 긴급재난지원금의 효과가 미미했다”며 “직접적인 피해 정도에 맞춰 지원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또 2021년 8월 대한경영학회지에 게재된 에 따르면 긴급재난지원금을 받은 사람은 소비를 미리 앞당겨서 하고 그 이후엔 오히려 지출을 줄였다고 합니다. 특히 유통업계에선 지원금 종료 이후 오히려 대형 온라인 매장 소비와 소상공인 매장의 카드 사용액 격차가 더 벌어졌습니다. 연구진은 “소상공인 간접 지원의 정책 효과가 크지 않았다”고 해석했습니다.‘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 아니냐’라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19 땐 방역 조치가 삼엄해서 소비 심리가 살아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고물가에 시름겨워하는 국민에게 현금 지원이 단비 같은 혜택이 될 거라고 할 수도 있죠.● KDI “물가 안정 해칠 우려”하지만 KDI는 ‘바로 지금’이라서 현금 지원은 불필요하다고 경계합니다. 이달 13일 발표한 를 보면 연구진은 “올해 실질 구매력이 상당폭 개선돼 소비가 증가할 전망”이라며 현금 살포와 같은 부양책이 시급하다고는 보기 어렵다고 진단했습니다. 오히려 “점진적인 인플레이션 안정 추세를 교란할 가능성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 연구를 종합하면, 전 국민 대상 현금 지원이 ‘소비 진작과 소상공인 지원을 통한 경제 활성화’라는 효과가 낼 거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학자들은 ‘물가 안정을 도리어 늦출 수 있다’고 우려하거나 ‘차라리 선별 지원이 낫지 않냐’고 하고 있습니다.그럼 남는 건 ‘부의 재분배’ 효과입니다. 전 국민에게 현금성 소비 쿠폰을 배포할 땐 돈이 흐를 방향을 크게 세 갈래로 기대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고소득층→저소득층’입니다. 다르게 걷어서 똑같이 나눠주기 때문입니다. 둘째, ‘회사원→자영업자’입니다. 지역화폐의 용처가 그렇게 정해져 있습니다. 셋째, ‘법인→개인’입니다. 세금은 법인(기업)도 내지만 쿠폰을 받는 건 개인이니까요.이중 둘째(회사원→자영업자)는 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금 때 효과가 작다고 결론 났습니다. 셋째(법인→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현금 살포의 반사이익을 누리지 못한 기업이 직원 월급을 줄이거나 물건값을 올리는 방식으로 손익을 맞추면 결국 소비자 이익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는 건 첫째 효과, 고소득층의 부를 저소득층에 나누는 겁니다. 복지 국가를 표방하는 한국에서 이런 정책 목표 자체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문제는 그 목표를 위한 최선의 수단이 정말 ‘전 국민 현금 지원’이냐는 겁니다. 경제 활성화 효과도 미미하고, 소상공인 지원 효과도 크지 않고, 남은 건 넉넉한 이들의 재산을 어려운 이들에게 분배하는 효과뿐이라면, 왜 지원 대상이 꼭 ‘전 국민’이어야 하는 걸까요? 그리고 그걸 왜 꼭 총선 직전에 발표하는 걸까요?● 출생아 1명당 5000만 원 주고도 1.5조 원 남아13조 원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면 먼저 떠오르는 건 저출생 대응입니다. 최근 국민권익위원회가 부영그룹의 직원 복지처럼 정부가 등 파격적인 현금 지원을 신설하면 출산에 동기 부여가 되겠는지 온라인 설문을 했죠. 그 결과 ‘된다’는 응답이 62.6%였습니다. 13조 원이면 지난해 출생아 23만 명(잠정 집계)에게 5000만 원씩 줄 수 있습니다. 총 11조5000억 원이 들어가니 1조5000억 원이나 남네요. 일회성 현금 지원이 부담되면 다달이 나눠줄 수도 있습니다. 만 8세 미만 아동에게 매달 10만 원씩 주는 ‘아동수당’을 확대하는 겁니다. 지난해 소요 예산이 2조2564억 원이었는데 올해는 2조1115억 원으로 줄었습니다. 대상 아동 인구가 16만1000명 줄었기 때문이죠. 13조 원이면 매달 10만 원이 아니라 60만 원씩 줄 수 있습니다. 그러고도 3310억 원이 남습니다. 거스름돈에 해당하는 3310억 원만으로도 ‘첫만남이용권’의 지급액을 2배 가까이로 늘릴 수 있습니다. 생애 초기 아동 양육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도입한 정책이죠. 현재 출생 아동에게 200만 원을 주는 데 총 3804억 원이 듭니다.13조 원이면 0, 1세 아동을 둔 부모에게 주는 ‘부모급여’ 지급 예산도 몇 배로 키울 수 있습니다. 출산과 양육으로 손실되는 소득을 보전하고 밀착 돌봄이 중요한 영아기를 이겨낼 수 있도록 매달 0세 아동 가정에 100만 원, 1세 아동 가정에 50만 원을 각각 주는 정책입니다. 여기 드는 예산이 2조8887억 원입니다. 13조 원이면 0세 가정에 매달 450만 원을 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기초생계급여 3배로, 장애연금·수당 13배로앞서 전 국민 대상 현금 지급은 소득 재분배 기능 말고는 별다른 효과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가장 직접적인 소득 재분배 수단은 기초생활 수급자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겁니다. 당장 생활비가 부족한 저소득층에 지원을 늘리면 소비 증대 효과도 클 것으로 기대됩니다.정부는 기초생활 생계급여 예산을 지난해 6조141억 원에서 올해 7조5411억 원으로 늘렸습니다. 한 해 만에 관련 예산을 25% 넘게 늘린 건 처음입니다. 그런데 만약 민생회복지원금 소요 예산 13조 원을 전부 기초생활 생계급여에 투입하면 어떻게 될까요? 저소득층이 받는 혜택이 무려 3배 가까이로 늘어납니다. 한 마디로 빈곤 문제가 상당 부분 해소되는 겁니다. 소득 재분배를 통한 빈곤의 해소. 이게 바로 민주당 강령에 적시된 “단절 없는 맞춤형 기본생활 보장 정책”이 아닌가요. 아니면 정말 갑작스러운 위기 때문에 생계가 곤란해진 저소득 가구에 지원하는 ‘긴급복지’에 예산을 집중시킬 수도 있습니다. 기존에 형편이 썩 나쁘지 않았던 가정이 갑자기 빈곤 계층이 되는 걸 막는 일종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제도입니다. 경제 활동에 빠르게 복귀할 수 있으니 사회적으로도 비용 대비 효과가 큰 정책이죠. 올해 관련 예산이 3585억 원입니다. 13조 원이면 이 예산을 무려 36배로 늘릴 수 있습니다.아니면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건 어떨까요. 저소득 중증 장애인에게 매달 32만~42만 원을 주는 장애인연금과 저소득 경증 장애인에게 월 3만~6만 원을 주는 장애수당의 올해 예산을 다 합해도 1조 원입니다. 이걸 13배로 늘리면 우리나라는 단숨에 장애인에겐 북유럽 못잖은 복지 국가가 될 수 있습니다.● ‘간병 지옥’ 없애고 최첨단 백신 플랫폼 갖출 수 있어지난달 서울 강동구의 한 아파트에서 90대 치매 환자와 60대 두 딸이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경찰은 치매를 앓던 A 씨가 사망하자 그를 돌보던 자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관련기사: 〉간병비는 ‘초고령 한국’의 큰 고민 중 하나입니다. 간병비는 2015년 이후 일부 간호·간병 통합서비스 도입 병동에서 건강보험이 적용됐지만 대체로 건보 제도 바깥에 있습니다. 정부가 올해 요양병원 간병지원 시범사업을 처음으로 벌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요양병원 20곳의 환자 1200여 명의 간병비를 일부 지원하는 데 85억 원을 쓰기로 했습니다. 시범사업부터 하는 건 ‘간병이 공짜’라고 하면 불필요한 간병 수요까지 생길 것을 우려해서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큰 재정이 들기 때문입니다. 치매 등을 앓는 고령 환자가 많아져서죠.그런데 13조 원이 있으면 시범사업을 건너뛰고 곧장 사적 간병비를 바로 국가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국내 한 연구에 따르면 연간 사적 간병비는 2008년 3조6000억 원에서 2018년 8조 원, 2022년 10조 원으로 늘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간병 지옥’ 문제를 해결하고 남은 3조 원으로는 mRNA 백신 플랫폼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코로나19 유행이 한창일 때 우리나라는 스스로 개발할 역량이 없고 선구매 경쟁에서 밀리는 바람에 대통령이 제약사에 전화해 ‘백신을 달라’고 읍소해야 했습니다. 복지부 차관이 직접 제약사를 찾아가기 위해 출국하는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봐야 했습니다. 정부는 1년 전 코로나19 위기 종식을 선언하며 “신종 감염병 발생 이후 100일 이내에 mRNA 백신을 개발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2년간 327억 원을 들여 활동한 국가 mRNA 백신개발사업단은 다음 달이면 활동을 종료합니다. 추가 사업 예산이 전부 삭감됐기 때문입니다. 반면 일본은 약 1700억 엔(1조5000억 원)을 투자해서 지난해 자체 mRNA 백신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mRNA 백신은 일단 플랫폼을 갖춰두면 코로나19와 다른 감염병이 유행해도 그것에 맞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 여론조사서 51%가 “‘전 국민 25만 원’ 안 된다”21~23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이 전국 만 18세 이상 1001명에게 민생회복지원금에 대한 찬반을 조사한 결과 “지급해선 안 된다”는 의견이 51%로 “지급해야 한다”의 43%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조사는 이동통신 3사 제공 무선전화 가상번호를 무작위 추출해 전화조사원 인터뷰 방식으로 이뤄졌고, 총통화 8444명 중 1001명이 응답을 완료해 응답률은 11.9%,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포인트였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됩니다.그렇다면 민생회복지원금은 포퓰리즘 정책조차도 아닙니다. 국민 대다수가 ‘그걸 왜 하냐’는 의문을 갖는 포퓰리즘 정책이 어딨겠습니까. 오히려 이 대표의 대통령 선거 공약이었던 ‘기본소득’의 예고편이라는 일각의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아무 조건도, 이유도 없이 돈을 푸는 게 이상해 보이지 않도록 전례를 만드는 작업이라는 해석입니다.다시 강조하지만 저는 소득 재분배를 위한 현금 지원 자체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초생활 보장이나 긴급복지처럼 이미 빈곤 완화를 위한 제도가 있고 그 전달체계가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는데 굳이 돈도 더 많이 들고 효과도 간접적인 방식을 택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국가가 기존에 없던 제도를 신설해 파격적인 예산을 투입하는 게 정당화되려면 저출생 문제 해결이나 첨단 백신 플랫폼 구축과 같은, 투자금이 나중에 2, 3배로 돌아올 정책이어야 하지 않을까요.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중국이 돈 주면서 연구를 시킨다는 건 그 교수님이 매우 유능하다는 뜻이에요. 우리 정부가 제대로 케어(관리)도 안 해주면서 (중국의 지원을) 가로막는 건 좀 아닌 거죠.” 10일 KAIST의 한 교수는 동아일보와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중국 정부의 ‘천인계획(千人計劃)’에 참여해 자율주행차 기술 등을 유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KAIST 이모 교수를 위해 법원에 무죄 취지의 탄원서를 제출한 동료 120여 명 중 한 명이었다. 이 교수 사건 이후 대학 내에서 어떤 자정 작업을 벌이고 있는지, 탄원서를 철회할 의사가 있는지 묻기 위해 그에게 전화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이 교수는 본보기로 부당하게 당했을 뿐”이라며 “자정 작업 같은 건 잘 모르겠다”고 했다. 천인계획은 중국 정부가 전 세계 이공계 인재 1000여 명을 영입한다며 2008년부터 추진한 프로젝트다. 선진국은 일찌감치 천인계획의 실상이 다른 나라의 연구 성과를 빼돌리는 것이라고 의심했다. 미국은 2019년 정부 지원을 받는 학자가 천인계획에 참가하는 걸 금지했고, 일본도 2021년 해외 연구 지원 신고를 의무화했다. 국내 학자도 천인계획에서 예외가 아니었음이 2020년 이 교수에 대한 검찰 수사로 드러났다. 동아일보가 입수해 보도(4월 30일자 A6면)한 이 교수의 2심 판결문에 따르면 이 교수는 자율주행차의 눈에 해당하는 라이다(LiDAR) 센서를 포함한 핵심 기술 3개 분야에서 최소 9개의 특허와 3개의 논문을 작성해 이를 중국 측에 넘기는 대가로 총 2380만 위안(약 40억4600만 원)을 약속받았다. 이 교수는 KAIST 석·박사 과정 연구진이 작성한 연구 자료를 클라우드 서버에 올리게 해 중국 측이 실시간으로 가져갈 수 있게 했는데, 이 중엔 차량 간 라이다 간섭을 해결할 수 있는 미공개 신기술도 있었다. KAIST가 2018년 12월경 기술 유출 제보를 받아 이 교수를 감사했을 때 그는 중국 측과 짜고 ‘연구 성과는 KAIST와 중국이 절반씩 나눈다’는 허위 서류를 꾸미기도 했다. 이 교수는 재판 과정에서 자기 행동이 학문의 자유와 연구의 자율성으로 정당화된다고 주장했다. 놀라운 건 동료 교수 120여 명이 이 교수의 주장에 동조하며 그의 무죄 방면을 위해 탄원서를 써줬다는 점이다. 한 교수는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 이 교수를 옹호하기까지 했다. 정작 이들 대다수는 이 교수가 유출한 자료를 실제로 본 적도 없었다고 한다. 2심 재판부는 “산업기술 유출까지 학문의 자유로 보호할 순 없다”면서 “이 교수가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기는커녕 인맥을 동원해 정당화하기에 급급하다”며 실형을 선고했다. 기술 발전, 자국 중심주의, 저출생 고령화. 세계를 움직이는 3개의 큰 물줄기를 유심히 보면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기술 우위라도 미래세대에 물려주지 않으면 국가의 존립마저 흔들릴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폭발적으로 발전하지만, 그 열매를 직접 수확하지 못하는 나라는 철저히 뒤처진다. 세계 최악의 저출생을 겪는 한국은 기술 경쟁에서 밀려나면 회복의 희망을 찾기 어려워진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산업기술 유출이 안보의 문제라는 말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중국 정부는 천인계획이 각국의 견제를 받자 더 은밀한 방식으로 해외 연구진을 포섭하는 것으로 의심된다. 이를 막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학계의 자정 능력이다. 조건희 사회부 차장 becom@donga.com}

모든 사건엔 이유가 있고 그 배경엔 정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선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요. 복잡한 보건복지 정책을 알기 쉽게 풀어드립니다.국민연금 개혁이 또 무산될 위기입니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연금특위) 주호영 위원장이 7일 “사실상 21대 활동을 종료하게 되는 상황이 왔다”라며 여야 합의가 결렬됐다고 밝혔습니다. 이미 17년 넘게 멈춘 연금 개혁을 제22대 국회로 넘기겠다는 건데, 말 그대로 기약이 없는 상황입니다. 국민연금 개혁의 의무를 놓아버린 국회와 정부, ‘내는 돈’(보험료율) 올리는 걸 반대하고 ‘받는 돈’(소득대체율)을 올리자는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30년 후 월급의 3분의 1을 노인 세대 부양에 빼앗길 아이들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으신가요.“네 월급, 우리가 나중에 다 연금으로 가져갈 거야”라고요.과장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월급의 3분의 1’이라는 미래조차 얼마나 희망적인 예측 위에 위태로이 서 있는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읽기 불편하시면 조용히 ‘뒤로 가기’를 눌러주십시오. 그 대신 앞으로 “요즘 젊은이들은 아이를 왜 이렇게 안 낳는 거냐”고 한탄하시면 안 됩니다. 미래세대가 자기 삶을 살기 어려운 나라를 만들기로 결정해놓고 아이를 낳으라니요. 그러시면 안 되죠. 내가 하기 싫은 건 남도 하기 싫은 겁니다.그렇다고 국민연금 개편 논의를 다음 국회로 미루자는 건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개악’이라고 비판받는 ‘더 내고 더 받는’ 방안이라도 당장 실행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모순되게 들리실 겁니다.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차근차근 풀어보겠습니다.● 국회 논의 2개안 모두 언 발에 오줌 누기이 단락은 평소 국민연금 제도에 관심이 있어서 최근 관련 논의도 잘 아는 분이라면 넘기셔도 됩니다.국민연금은 젊을 때 돈을 내고 나이 들어서 돌려받는 제도입니다. 현재 돈을 버는 어른들(회사원, 자영업자)은 월급의 9%를 연금보험료로 내고 있습니다. 이게 보험료율입니다. 노인이 되면 월급의 40%를 연금으로 돌려받습니다. 이건 소득대체율이라고 합니다.쉽게 말해 월급이 100만 원이면 연금보험료로 9만 원을 내고, 노인이 되어서 40만 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소득 수준과 가입 기간에 따라 실제로 받는 돈을 달라집니다. 제도에 소득재분배 기능이 내재돼있기 때문에 저소득층이 더 받고 고소득층이 덜 받죠. 분명한 건 ‘적게 내고 많이 받는’ 구조라는 겁니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해도, 낸 돈보다 평균 2.2배를 더 받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2055년이면 모아둔 돈이 모두 고갈됩니다. 그때부턴 ‘그해 걷어서 그해에 주는’ 부과방식으로 바꿔야 합니다.그래서 2055년 이후에는 모든 회사원이 월급의 약 30~35%를 연금보험료로 내서 노인 세대를 부양해야 합니다. 월급이 100만 원이면 30만~35만 원을 보험료로 떼인다는 뜻입니다. 일각의 과장된 추계가 아니라, 국내 최고의 전문가가 모여 인구와 경제 등 모든 변수를 고려해서 내놓은 가장 합리적인 예측입니다.그래서 국회 연금특위는 미래세대의 부담을 덜고 국민연금 제도의 존속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개편안을 논의해왔습니다. 연금특위가 시민대표단 500명에게 제시한 방안은 ‘소득보장안’과 ‘재정안정안’ 2가지입니다.소득보장안은 ‘더 내고 더 받는’ 안입니다. 현재 9%, 40%인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각각 13%와 50%로 올립니다. 재정안정안은 ‘더 내고 지금처럼 받는’ 안입니다. 보험료율을 12%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40%로 현행 유지합니다. 둘 다 기금 고갈 시점을 늦추는 효과는 언 발에 오줌 누는 수준입니다. 2055년으로 예정된 걸 6, 7년 늦추는 정도라서요.문제는 고갈 이후입니다. 소득보장안을 따라가면 그 후에 내야 하는 부과방식 보험료율이 개편 전보다 오히려 올라갑니다. 올해 성인이 된 2005년생의 평생 평균 월급의 14.8%를 보험료로 내게 됩니다. 초등학교 3학년인 2015년생은 22.2%, 내년에 태어날 2025년생은 29.6%입니다. 재정안정안을 택해도 기금 고갈을 막을 순 없지만 미래 세대의 보험료 부담은 상대적으로 줄어듭니다. 2005년생 13.1%, 2015년생 18.8%, 2025년생 24.5%입니다. ● 국민연금 ‘더 받자’가 56%… 역사에 어떤 세대로 기록될 건가이 중에서 시민대표단이 고른 방안은 소득보장안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누구든 국민연금의 실상을 알게 된다면 미래세대에 그렇게 큰 짐을 맡길 수는 없다는 데 동의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연령별 투표 결과를 보면 특히 40대와 50대에서 소득보장안에 찬성한 비율이 높았다고 합니다. 평균 기대수명까지는 기금이 고갈될 우려가 상대적으로 적은 분들이네요.더불어민주당은 ‘민의(民意)가 확인됐으니 이대로 추진하자’고 합니다. 이건 놀랍지 않았습니다.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 때부터 소득대체율 인상을 주장해왔으니까요. 문재인 정부가 내놓은 개혁안 4개 중 하나는 ‘현행 유지안’이었습니다.더 황당한 건 정부입니다. 내내 ‘18지선다’ ‘24지선다’ 식으로 시나리오만 늘어놓으며 사실상 아무 의견도 내지 않더니 인제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라며 반대 전선에 섰습니다.결국 연금특위 소속 여야 의원이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서 7일 ‘협상 결렬’을 선언했습니다. 연금 개혁을 1년 미룰 때마다 미래세대의 부담이 수조 원 증가할 것으로 추계(한국개발연구원)되는데 마냥 느긋합니다.최근 연금 개혁을 두고 국회와 정부가 하는 일을 보면 합심해서 30년 후 미래세대에 겨울 햇볕처럼 짧은 즐거움이라도 안기려고 작정한 것 같습니다. 미래세대는 비록 생활은 비참할지언정 그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책임자들이 청문회와 특별검사에 줄줄이 불려 가는 모습을 생중계로 보면서 잠시 속을 풀 수 있을 거 아닙니까. ● “수익률 높이면 된다”… 기금 줄면 수익도 급감해국민연금에서 기금운용 수익은 중요합니다. 지난해 보험료 수입이 59조 원이었는데, 기금운용 수익은 126조 원이었습니다. 걷은 돈보다, 이미 걷은 돈을 굴려서 벌어들인 돈이 2배 이상으로 많았습니다.이런 겁니다. 만화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이 악당을 무찌르기 위해 전 세계인의 기를 모아 원기옥을 만들죠. 여기에 힘을 보태고 나면 기력이 소진돼서 한동안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피로하다는 설정입니다. 이게 기금 고갈 이후 ‘그해 걷어서 그해에 주는’ 부과방식으로 바꾼 국민연금의 모습입니다. 저출생 고령화로 인해 몇 안 되는 젊은 세대가 온 힘을 다해 무(無)에서 기를 모아 원기옥을 만든 후 노인에게 전달합니다. 다음 달엔 모든 게 리셋(reset)돼서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합니다. 이걸 매달 반복하면 제대로 살 수 없겠죠.원기옥을 일정 규모 이상으로 유지하면서 복리(複利)로 굴리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악당이 나타날 때마다 전 세계인이 기진맥진할 필요가 없습니다. 국민연금 기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일하게 하라’는 투자 격언이 있죠. 기금을 어느 정도 쌓아놓고 거기서 나오는 이자를 활용하면, 보험료로만 노인을 부양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해집니다.여기서 핵심은 종잣돈을 남기는 겁니다. 기금운용 수익률을 암만 높여도 기금이 고갈된 후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국민연금재정추계전문위원회가 지난해 9월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현행 구조(보험료율 9%)에서 운용 수익률을 1%포인트 높이면 기금 고갈 시점은 2055년에서 2060년으로 5년 늘어납니다.그런데 보험료율을 15%로 올리는 개혁을 병행하면 그것만으로도 기금 고갈을 2071년으로 늦출 수 있고, 여기에 운용 수익률을 1%포인트 높일 경우 기금 고갈 시점을 2084년으로 연장할 수 있습니다. 2000년에 태어나 올해 막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 84세가 될 때까지 기금이 유지된다는 뜻입니다. 똑같은 1%포인트인데, 종잣돈이 있냐 없냐에 따라 이렇게 큰 차이가 납니다.이건 단순히 산술적인 계산일 뿐입니다. 실제 기금 고갈이 시작되면 경제에 미치는 충격은 더 클 겁니다. 국민연금이 보유하고 있던 국내 기업의 지분을 헐값에 팔아야 할 테니까요. 게다가 기금이 줄어들기 시작한 후로는 공격적인 투자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평균 수익률도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50년간 ‘존버’(계속 버티기)할 수 있는 투자자와 당장 5년 안에 모든 자산을 현금화해야 하는 투자자의 수익률이 같을 수 없습니다. 위탁운용사는 과연 성장을 멈춘 자본에 전과 같은 ‘운용 수수료 프리미엄’을 줄까요. 그래서 기금 고갈을 늦추는 게 중요합니다.● “세금으로 메우면 된다”… 그 세금은 누가 내나‘더 내고 더 받자’는 주장에 항상 따라오는 근거는 한국의 노인 빈곤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최악인데,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금 지출 비중은 2.8%로 OECD 평균(7.7%)보다 낮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지금 국가가 돈을 너무 안 쓰고 있으니 연금 적자를 세금으로 메꿔도 큰 탈 없다는 겁니다.일견 합당해 보이는 주장이지만, 그 세금을 낼 당사자가 미래세대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미래세대가 노인 부양을 위해서 내야 하는 돈은 국민연금만이 아닙니다. 급격한 고령화로 인해 미래세대는 건강보험료로만 월급의 24%가량을 내야 합니다(국민건강보험공단, ‘2020~2060년 건강보험 장기 재정전망’).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 월 30만 원씩 주는 기초연금은 어떻습니까. 전액 세금으로 대고 있는데, 지난해 관련 지출이 22조 원이 넘었습니다. 미래엔 기초연금을 받을 노인이 2배로 늘어나지만 이를 지탱할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절반으로 줄어드는 걸 고려하면, 지금 ‘기초연금세’를 따로 만들어서 미래를 위해 적립해도 모자랄 판입니다. GDP 대비 공적연금 지출 비중이 적어서 문제라면, 왜 생산가능인구가 가장 많은 지금 당장 세금을 투입하지 않고 청장년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30여 년 후에야 세금을 투입합니까? 세금으로 공적연금 강화하자는 분들은 내일부터 소득세율 부가세율 올려도 불만 없으신 거 맞죠?노인 빈곤 문제를 국민연금으로 해결하자는 것도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현재 가장 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이들은 국민연금 보험료를 꼬박꼬박 낼 수 없었던 계층입니다. 기초연금을 소득 수준에 따라 차등 지급하는 개혁이 더 즉각적, 효과적으로 노인 빈곤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미래엔 주거비와 사교육비 부담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높은 보험료율을 감당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하지만 경제 활력이 떨어지고 지방 기업이 망하면 수도권 집중(集中)이 더 심해져서 ‘살 만한 집’에 살기 위한 비용은 오히려 커질 수도 있습니다. 사교육비 지출은 지난 20년간 학령인구가 급감해도 점점 더 커지기만 했는데, 미래에 갑자기 사교육 경쟁이 해소될 거라고 기대하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요. 오히려 ‘헬반도’ 탈출이 생존의 필수조건이 돼서 영어 과외비가 지금보다 비싸질 수도 있습니다.인공지능(AI) 혁명으로 고령화에 따른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주장은 절망적이기까지 합니다. 미래세대의 운명을 판돈으로 걸고 도박하자는 얘기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회마저 놓칠 순 없다연금 개혁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럽습니다. 특히 당장 버는 돈에서 떼어가는 보험료를 올리는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만약 제21대 국회가 폐원하는 5월 29일 이전까지 국민연금 개편을 매듭짓지 않으면 ‘다음 기회’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2026년 6월엔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치릅니다. 2027년 3월엔 대통령선거, 2028년 4월엔 제23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습니다.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정부와 국회는 투표권이 없는 미래세대보다 현재의 유권자를 달랠 정책에 집중할 가능성이 커집니다.그래서 저는 ‘개악’이라고 불리는 ‘더 내고 더 받는’ 안이라도 일단 밀어붙이길 제안합니다. 그 대신 4년 후인 2028년 제6차 국민연금 재정계산 때, 소득대체율을 40%로 원상복구하는 조건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내는 돈을 올리는 건 ‘나중에’ 받을 돈을 내리는 것보다 훨씬 저항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현행 보험료율 9%는 1988년 국민연금법 제정 때 정한 뒤 36년간 한 번도 올리지 못했습니다. 반면 소득대체율은 꾸준히 낮춰왔습니다. 보험료율은 단 1%포인트라도 올릴 수 있을 때 서둘러 올려야 합니다. 베이비부머 2세대(1965~1974년생)가 노동시장을 조금이라도 더 남아있을 때 보험료를 올려야 그나마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기자 생활을 하면서 ‘골든타임’이라는 말을 자주 썼습니다. 남용한 걸 사과드립니다. 그런데 국민연금은 정말로, 지금부터 20일이 골든타임입니다. 연금특위가 협상이 결렬됐다고 했지만,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고 믿습니다. 가장 심한 개악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겁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1억 원 드리면 아이를 낳으시겠습니까?’2007년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 비슷한 공약이 나왔을 땐 재밌는 상상 정도로 취급됐죠. 이제는 이 질문이 정부의 공식 설문에 등장했습니다. 국민권익위원회가 벌이는 온라인 설문입니다. 부영그룹이 직원들에 출산 장려금 1억 원씩 지급하기로 한 것처럼, 정부도 파격적인 현금을 직접 지원하면 아이를 낳겠냐고 물은 겁니다. 설문을 이달 17일부터 26일까지 진행하는데 24일 오후 4시 현재까지 1만 명이 넘게 참여해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권익위는 1자녀엔 1억 원, 2자녀엔 2억 원, 3자녀 이상엔 3억 원을 각각 지급하는 방안을 예시로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해 출생아 23만 명(잠정 집계)에게 1억 원씩 주면 연간 23조 원의 예산이 필요한데 이런 재정 투입에 동의하는지도 물었습니다.● ‘출생아에 1억 원씩’ 가능한가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안이냐고 물으신다면, ‘재정만 따지면 불가능하진 않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보다 출산율이 높은 나라가 이미 국가 재정에서 그만한 비중을 가족복지에 쓰고 있거든요.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0년 국내 가족복지 공공사회 지출은 30조253억 원이었습니다. 아동수당과 출산휴가 지원금, 어린이집 보육료 등이 여기 포함됩니다.이 돈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6%였습니다. 직감하셨겠지만 이 비율이 다른 OECD 회원국보다 상당히 낮습니다. 38개국 중 뒤에서 8번째입니다. 잘못 읽으신 게 아닙니다. ‘앞에서’가 아니라 ‘뒤에서’입니다. OECD 평균은 2.1%였습니다. 어리둥절하실 수 있습니다. 정부가 저출생 극복을 위해 300조 원을 넘게 투입했다는데 OECD 평균만도 못한다니요. 그 돈은 다 어디 갔을까요. 적잖은 돈이 ‘흉내 내기’였습니다.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저고위)가 2022년 저출산 대응 예산 총 51조216억 원을 분석했더니 실제 국민이 받는 돈보다 부풀려져 있거나 저출산과 관련이 없는 정책의 예산이 상당수 섞여 있었습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주거 지원 예산(23조4012억 원) 가운데 40%(9조5300억 원)가 ‘빌려줬다가 돌려받는’ 융자 지원이었던 겁니다. 저출생 문제를 두고 ‘백약이 소용없다’고들 하지만 “정말 백약을 다 써본 거 맞냐”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동아일보 5월 24일자 「학교 현대화-성범죄 피해지원도 ‘저출산정책’이라니…」 참고 )주목할 점은 한국보다 합계출산율이 높은 나라들이 더 많은 재정 비중을 가족복지에 쓰고 있다는 겁니다. 이 비중이 OECD 1위인 스웨덴은 합계출산율이 1.7명(2020년 기준)입니다. 같은 해 한국(0.8명)의 2배 수준입니다. 스웨덴은 그해 GDP의 3.4%를 가족복지에 썼습니다. 우리나라 경제 규모에 대입하면 스웨덴은 64조2876억 원을 가족복지에 쓴 셈입니다. 그해 한국의 관련 지출보다 34조2623억 원이 더 많았던 거죠. 우리나라가 그해 출생아 27만2337명에게 전부 1억 원씩 줬어도, 출산율이 한국의 2배 수준인 스웨덴의 관련 예산에도 못 미쳤을 거란 뜻입니다.물론 이건 재정 측면에서만 분석한 겁니다. 출생아 1명당 1억 원을 주면 아이를 제대로 키울 생각이 없는 남녀가 돈만 노리고 출산하는 등 부작용이 쏟아지겠죠. 이를 보완하려면 단번에 큰돈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다달이 나눠주는 기존 아동수당 등의 액수를 올리면서 수급 조건에 아동학대 예방 교육 수료 등을 붙여야 할 겁니다. 이는 지난해 12월 인천시가 발표한 ‘1억 플러스 아이드림(i dream)’ 정책과 비슷한 형태입니다. 인천시는 관내에서 태어나는 모든 아동에게 18세까지 총 1억 원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미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주고 있는 임신·출산 의료비(100만 원)와 부모급여(1800만 원), 아동수당(960만 원) 등 7250만 원에 인천시가 2870만 원을 더 줘서 총 1억 원 이상을 맞춘다는 겁니다.출생아 1명당 2870만 원을 주는 데 드는 총액은 지난해 출생아 23만 명 기준으로 7조 원 안팎입니다. 적은 돈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예 논의조차 못 할 규모인지는 의문입니다. 지금은 국가 소멸까지 거론되는 상황 아닌가요.● 22년째 ‘저출생 무력감’ 차곡차곡 쌓아온 한국24일 통계청이 올해 2월치 출생아 수를 발표했습니다. 지난해 2월(2만20명)보다 더 줄어서 1만9362명이 태어났습니다. 2019년 11월 이후 52개월 연속 감소입니다. 충격받으셨나요? 충격받지 않은 분들이 더 많을 거라는 데 제가 나중에 받을 한 달 치 국민연금을 걸겠습니다.우리 사회가 저출생에 너무나 익숙해졌습니다. 한국은 2002년 이후 줄곧 합계출산율이 1.3명 이하였습니다. 출산율 1.3명 이하인 나라는 ‘초저출산국’으로 분류됩니다. 독일 막스 플랑크 인구연구소의 한스-피터 쾰러 박사가 2002년 ‘가장 낮은 출산율(lowest-low fertility)’이라며 내놓은 개념입니다. 출산율이 1.3명보다 낮은 나라가 극히 드물고, 그 정도 출산율이 45년간 지속되면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취지였습니다. 쉽게 말해 한국은 전 세계 어디서도 ‘가본 적 없는 길’을 22년째 뚜벅뚜벅 걷고 있다는 뜻입니다.한국은 이 기준에 따르면 22년째 초저출산국입니다. 위기를 느끼는 감각이 마비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난해 12월 미국 뉴욕타임스의 한 칼럼은 “14세기 흑사병 때보다 심각하다”고 했습니다. 올 2월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단순한 대책으로는 대응이 어렵다”고 경고했습니다. 만국이 ‘우리는 한국처럼 되지 말자’며 각오를 다지는데 정작 당사자인 한국만 태평합니다. 며칠 전 ‘이럴 바엔 차라리 출산율 0명을 한 번 찍어보는 게 어떻겠냐’는 칼럼을 썼습니다. 욕먹을 각오를 했는데 의외로 주변에서 ‘건희야, 네가 맞는 말을 할 때도 있구나’라며 호평을 받았습니다. 어차피 0.65명(지난해 10∼12월 기준)이나 0명이나 장래가 어둡기는 매한가지인데 차라리 바닥을 찍어보자는 반응이 많았습니다.(동아일보 4월 22일자 「이왕 이렇게 된 거, ‘출산율 0명’에 도전해보자」 참고 )인구학자들은 실제로 출산율 0.65명이 1.0명보다는 0명에 더 가까운 수치라고 얘기합니다. 인구의 ‘복리’ 효과 때문입니다. 가임기 여성이 평생 2.1명을 낳으면 인구가 유지되죠. 평생 0.65명이면 신생아가 3분의 1로 줄어들 것 같지만 실제론 두 세대 후에는 10분의 1 수준으로 감소하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아이 중 절반 정도는 아들이고 절반만 나중에 ‘가임기 여성’이 될 거라서 그렇습니다.● 이민과 AI가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간혹 저출생을 이민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인공지능(AI)이 발전해 사람의 일자리를 대체하기 때문에 지금처럼 생산가능인구가 많지 않아도 된다는 예측도 있습니다. 한국은 인구 밀도가 너무 높으니 사람이 좀 줄어도 괜찮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저는 이런 주장과 예측이 모두 들어맞아서 미래 한국이 아무 문제 없이 굴러가길 간절히 기원합니다.하지만 이 점을 고려해봅시다. 이민에 가장 열려있던 나라들이 최근 이민으로 인해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를요. 한국의 사회문화는 이민에 열려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 나라가 앞으로 수십 년간 전 세계 어디서도 겪은 적 없는 속도로,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규모의 이민 인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AI는 어떻습니까. 이민과 달리 AI가 어떤 사회적 문제를 초래할지 다른 나라의 선례를 참고할 수도 없습니다. 한국이 그 모든 부작용과 혼란을 가장 먼저 몸으로 부딪쳐야 하는 나라가 됩니다. 보통 ‘한국의 장래가 어둡다’고 할 때 노년 부양비를 대표적인 지표로 듭니다. 지금은 생산가능인구(15~64세) 4명당 노인 1명을 부양하지만, 약 40년 이후엔 일대일로 부양해야 한다는 겁니다.그런데 쉽게 간과하는 게, 이런 암울한 예측마저 출산율이 1.09로 회복될 거란 희망적인 시나리오에 기대고 있다는 점입니다.통계청은 장래인구추계(중위)에서 합계출산율이 2025년 0.65명으로 저점을 찍은 뒤 서서히 회복해 2049년부터 쭉 1.09명을 유지한다고 내다봤습니다. 최악을 가정한 저위 추계도 ‘2026년 0.59명으로 최저점 후 2044년부터 0.81명 유지’로, 지금보다 높은 출산율을 가정하고 있습니다.지금 국민연금, 건강보험, 국방, 교육 등 모든 사회 체계의 장래 예측이 이 ‘1.09명’ 시나리오를 토대로 세워진 겁니다. 지금 우리가 그토록 우려하는 암울한 미래가, 기를 쓰고 출산율을 1.09명으로 회복해야 만날 수 있는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전 세계가 걱정하는데 본인만 태평하다. 유례없는 한국의 저출생 얘기다. 지난해 12월 미국 뉴욕타임스의 한 칼럼은 “14세기 흑사병 때보다 심각하다”고 했다. 올 2월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단순한 대책으로는 대응이 어렵다”고 경고했다. 만국이 ‘우리는 한국처럼 되지 말자’며 각오를 다진다. 남녀 10쌍이 아이를 7명도 안 낳는 ‘합계출산율 0.65명’(지난해 10∼12월 기준)도 전례가 없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우리 사회가 저출생에 너무나 익숙해졌다는 점이다. 한국은 22년 전부터 줄곧 초저출생국(출산율 1.3명 이하)이었다. 위기를 느끼는 감각이 마비됐다. 잦은 공습경보에 귀가 먹먹해진 것처럼, 서서히 끓는 물에 잠긴 개구리처럼. 저출생 문제를 두고 ‘백약이 소용없다’고들 한다. 우리는 정말 백약을 다 써봤을까. 정부가 300조 원 넘게 투입했다는 저출생 예산을 뜯어보면 ‘빌려줬다가 돌려받는’ 융자 지원 등 거품이 잔뜩이다. 대다수 기업은 가족 친화 사회 환경을 만들 책임을 버려둔 채 ‘그게 돈이 되냐’는 태도다. 한 인구학자가 한탄했다. “차라리 출산율이 0명으로 떨어져 봐야 정신 차리고 뭐라도 하려나요.” ‘진짜 바닥’을 찍는 건 어렵지 않다.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 심지어 가속할 방법도 있다. 아이를 더 낳는 데 도움이 된다고 검증된 정책을 폐기하거나 정반대로 하는 거다. 혹여 일부라도 실현되지 않길 간절히 바라며 몇 가지 꼽아봤다. 한국은행이 1월 발표한 초저출산 대책 보고서를 참고했다. 첫째, 청년 고용·주거 지원을 중단하고 서울에 인프라를 ‘몰빵’한다. 청년 고용률과 도시 인구 집중도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으로 맞추면 출산율이 0.5명 넘게 증가한다고 한다. 젊은 부부가 ‘내 집’을 엄두도 못 내면 출산율은 반등할 수 없다. 먹이와 둥지를 찾지 못한 새들은 알을 품지 않는다. 지금처럼 서울(특히 강남)에 사회기반시설(SOC)을 몰아주고, ‘영끌’ 매수를 부추기는 건 덤이다. 둘째, 육아휴직을 축소한다. 육아휴직은 ‘제로(0) 출생’으로 향하는 길에 주요한 ‘걸림돌’이다. 국내 육아휴직 평균 기간(10.3주)을 OECD 평균(61.4주)으로 올리면 출산율이 0.1명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휴직할 때 눈치 보는 문화를 조성하고 복귀자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주면 출산 억제 효과는 더 커진다. 이미 여러 기업이 실천하고 있다. 셋째, 사교육 활성화로 내수를 진작한다. ‘부모 월급=자녀 학원비’라는 인식이 자리 잡으면 출산을 고민하는 부부 상당수를 ‘딩크족’(자녀 없는 맞벌이 부부)으로 만들 수 있다. 유명 입시학원에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 권한을 공식 부여하고 초중고 교육과정은 학원 입학 경쟁에 맞춰 재편하면 쐐기를 박을 수 있다. 경찰이 사교육 카르텔 수사를 흐지부지 끝내면 교육 정상화의 기대를 짓밟는 데 도움이 되겠다.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이르면 이번 주에 만난다고 한다. 저출생만큼은 꼭 해결하자고 서로 약속하고, 실천해 줬으면 좋겠다. 이대로는 대통령을 기억할 국민도 없어질 판이다.조건희 사회부 차장 becom@donga.com}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결과는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보건의료 정책이 이렇게 주목받은 적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의료계 일각에선 ‘총선이 끝날 때까지만 버티자’는 기류도 있다고 합니다. 선거 결과에 따라 정부가 ‘의대 2000명 증원’ 계획을 철회하거나 대폭 물러선 수정안을 내놓을 거란 기대겠죠. 다른 쪽에선 야당 대다수도 의대 증원에 반대하지 않는 만큼 총선 결과가 큰 영향이 없을 거란 분석도 나옵니다.어느 쪽이든, 의료계와 정부 둘 다 ‘2000명’의 대안을 먼저 제시하는 걸 극도로 꺼리는 건 명백합니다. 정부·여당은 “2000명이라는 숫자에 매몰되지 않겠다”면서도 어떤 조건에서 이를 조정할 수 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대한의사협회(의협) 등 의사 단체도 “2000명은 너무 많다”면서도 대안을 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대치가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온라인 게임에서 아이템을 사고팔 때 “당신이 먼저 원하는 가격을 제시하지 않으면 거래하지 않겠다”며 서로 버티는 것과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동아일보 취재팀은 2~4일 주요 정당의 의사·간호사 출신 비례대표 5명에게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의대 증원의 규모와 방식 △의료공백 혼란에 대한 견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필수의료 대책 3가지와 그 이유 등을 물었습니다. 이들을 인터뷰한 건 다양한 필수의료 정책이 입법으로 현실화할 22대 국회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인터뷰는 소속 정당을 대표하지 않는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진행했지만, 각 직역을 대표해 선발됐고 상당수가 당선권인 만큼 지금 이들의 의견을 종합하는 건 의미가 있다고 봤습니다. 의사·간호사 출신 비례대표를 내지 않았거나 비례대표가 일정상 인터뷰에 응하지 못한 원내정당 3곳(새로운미래, 자유통일당, 진보당)에는 각 정당의 공식 입장을 물어서 답변받았습니다.● 비례대표 5명 중 4명은 “의대 증원 필요”의사·간호사 출신 비례대표 5명 중 4명은 증원에 찬성했습니다.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더불어민주연합 비례12번)는 ‘숫자에 매몰돼서는 안 된다’는 전제하에 “최소 1000명은 한 번에 증원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김 교수는 ‘점진적 확대’ 주장에 회의적이었습니다. “만약 2025학년도에 의대 정원을 500명을 증원하면 나중엔 3000명 넘게 늘려야 할 수도 있는데, 점진적 확대를 주장하려면 ‘지금’ 말고 ‘나중에’ 얼마나 늘릴지도 제시해야 한다”는 게 김 교수의 견해입니다.한지아 을지대 의대 교수(국민의미래 비례11번)는 “증원은 반드시 필요하다”면서도 “지금 구체적인 숫자를 못 박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한 교수는 “양질의 의사를 배출하기 위한 교육 여건을 고려하고 (의대) 학생 의견도 들으며 세밀하게 조율해야 한다”는 단서도 붙였습니다. 의사 출신인 김선민 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조국혁신당 비례5번)도 “의대 증원의 필요성에 공감한다”면서 “함께 추진하는 정책과 수용 가능성에 따라 (적절한) 증원 규모는 달라진다”라며 규모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간호사 출신인 나순자 전 보건의료노조 위원장(녹색정의당 비례1번)은 “정부의 2000명 증원에 기본적으로 찬성한다”고 밝혔습니다. 나 전 위원장은 그중 500명을 지역 공공 의대에서 선발하고 학비를 전액 지원하되 지역에서 10년간 의무 복무하도록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늘어난 의사 인력이 특정 전문과목이나 수도권으로 쏠리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합니다.유일하게 의대 증원에 반대 의사를 밝힌 보건의료인 출신 비례대표는 이주영 전 순천향대 천안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개혁신당 비례1번)였습니다. 이 전 교수는 “지금 시점에서는 의대 증원에 찬성할 수 없다”라며 “다른 필수의료 대책이 선행돼야 하고, 필요한 의사 인력의 규모는 과학적으로 추계해 결정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전 교수는 국내 의료체계를 두고 “이미 망가졌다”라고 표현하며 “여기에 (의사를) 더 쏟아붓는 건 더 빨리 망가뜨리는 것밖에 안 된다”고 덧붙였습니다.다른 원내정당 3곳은 모두 의대 증원에 찬성했습니다. 새로운미래는 향후 10년간 매년 의대 정원을 전년 대비 15~20% 늘리고 주기적으로 평가해 조정하는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연평균 500~600명을 늘리자는 겁니다. 자유통일당은 5년간 2000명 증원하거나 10년간 1000명 증원해 ‘10년간 총 1만 명 증원’ 방안을 내놨습니다. 진보당은 최소 1000명 증원을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더 늘려야 한다고 봤습니다.● “의대 증원, 사회적 대화기구서 논의하고 의사들도 참여해야”의료공백 혼란의 책임이 정부와 의료계 중 어느 쪽에 더 무거운지는 응답자마다 의견이 갈렸지만, 공통으로 나온 답변은 “의료계가 정부의 대화 제의에 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선 의사·간호사 출신 비례대표 5명뿐 아니라 나머지 원내정당 3곳의 공식 입장이 일치했습니다.의대 증원에 반대한 이주영 전 교수도 “정부 대책 중엔 의료계가 주장해 온 것도 많다”라며 “의사들은 정부가 손을 내밀면 너무 강경하게 내칠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져주면서 합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한지아 교수는 “의료계는 ‘정부에 대한 신뢰가 많이 깨져 있다’고 하지만, 국민이 보고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라며 “국민을 설득하려면 그래도 대화의 장으로 나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김선민 전 원장은 “양측 모두 국민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정부가 의사뿐 아니라 간호사, 환자단체 등 각계가 참여하는 사회적 협의 기구를 마련해 이번 사태의 해결 방안을 논의하자는 의견도 많았습니다. 나순자 전 위원장은 “의정 합의가 가능하지 않다면 하루빨리 ‘국민 참여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김윤 교수도 “의대 증원 폭을 다른 정책과 연계해 조정해나가되, 이는 (의사뿐 아니라) 여러 관계자가 참여한 가운데 공개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라며 “예컨대 ‘진료지원(PA) 간호사를 합법화하면 의대 증원 폭을 15% 줄일 수 있다’는 식의 타협이 필요하다”고 제안했습니다.새로운미래와 진보당도 시민사회가 포함된 사회적 대타협(논의) 기구를 설치해 의대 증원을 포함한 종합 로드맵을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 필요한 정책 1위는 ‘필수의료 보상 강화’-‘공공병원 확충’비례대표 5명과 원내정당 3곳에는 “의대 증원 외에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필수의료 정책 3가지와 그 이유를 말해달라”는 질문도 공통으로 던졌습니다. 제가 정말로 궁금한 건 이거였습니다. 의대 증원은 법적으로 정부가 결정할 수 있지만, 의료소송 부담 완화나 PA 간호사의 업무 범위 확대 등은 다양한 법 개정과 예산 심의 등 국회 내 합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결과부터 말씀드리면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은 ‘필수의료 보상 강화’와 ‘공공병원 확충’이었습니다. 둘 다 4명(곳)이 꼽았습니다. 늘어난 의사를 필수의료 분야로 유인하려면 해당 분야의 건강보험 수가를 높이는 등 보상을 강화하고, 공공병원을 늘려 의료에 대한 정부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필수의료 보상 강화와 관련해 이주영 전 교수는 “필수의료 수가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으로 현실화하고, 이에 따른 보상을 의사뿐 아니라 간호사, 의료기사 등에 나누자”고 했습니다. 한지아 교수도 “고위험 고난도 의료행위에 대한 인센티브를 강화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이는 정부가 2월 1일 발표한 ‘필수의료 4대 개혁’에 담긴 내용이기도 합니다.공공병원 확충의 경우 나순자 전 위원장과 김선민 전 원장 등이 찬성했습니다. 나 전 위원장은 “전국 70개 중진료권마다 500병상 이상의 선진국형 공공병원(지역책임의료기관)을 지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김 전 원장은 “인구소멸 지역 등 시장실패가 일어나는 지역에 공공병원을 확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새로운미래는 현재 병상 과잉인 상황을 고려해 지역 민간병원을 국가가 인수해 공공병원으로 운영하는 방식을, 진보당은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대상에 공공병원을 추가하는 방식을 각각 제시했습니다. ● ‘노인 돌봄부터 해결’ 제안이 주목되는 이유비례대표 3명이 공통으로 꼽은 ‘간병 등 노인돌봄 체계 정비’에 주목합니다. ‘필수의료’라고 하면 흔히 심뇌혈관 수술이나 중증외상 치료, 응급 분만 등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저는 노인돌봄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앞으로 필수의료도 가망이 없다는 시각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급속한 고령화 때문입니다. 노인 환자 대다수가 생애 말기 몇 년간 간병을 받다가 요양시설에서 숨을 거두는 현 구조라면 의사를 아무리 늘린들 그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임종을 앞둔 노인 암 환자에게 1년 동안 투입되는 ‘생애 말기 1년’ 의료비가 평균 4000만 원이 넘는다는 연구(2016~2019년) 결과가 있습니다. 멀리서 사례를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주변에 지병이나 노환으로 거동이 어려운 어르신 한 분 정도는 있지 않으신가요? 아마 가족 중 한 분은 벌이를 포기하고 어르신을 돌보거나 전문 간병인을 고용하느라 한 달에 200만 원 안팎을 지출하실 겁니다. 그런데 국내 80세 이상 인구가 올해 238만 명에서 2054년 829만 명으로 3.5배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됩니다. 전 세계에 자랑하는 우리의 우수한 건강보험도 머잖아 한계를 맞게 될 겁니다.많은 비례대표와 정당이 간병 등 노인돌봄 체계의 정비를 시급한 필수의료 대책으로 꼽은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보입니다. 김선민 전 원장은 ‘간병비 급여화’를 해법으로 제시했습니다. 김 전 원장은 “지금 국민의 허리를 가장 휘게 만드는 간병비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고, 사적 영역에 맡겨진 돌봄과 간병 서비스를 공적 영역으로 편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나순자 전 위원장은 “간호간병통합서비스를 공공병원과 상급종합병원, 300병상 이상 종합병원 등으로 전면 확대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김윤 교수는 “장기요양 노인이 집에서 받을 수 있는 돌봄 서비스를 확대하고 방문간호, 노인 주치의 제도 등을 전면 도입하면 의료 수요를 대폭 줄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역 의료기관 협력 네트워크 구축’을 필수의료 대책으로 꼽은 비례대표와 정당도 3명(곳)이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한 정책입니다. 김윤 교수는 “지역 내 병원끼리 경쟁이 아닌 협력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해당 지역 병·의원이 다 보상받는 식으로 틀을 다시 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한지아 교수도 “지역 내 의료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네트워크와 협력 체계 구축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여론의 관심은 한정된 자원입니다. 초고령사회를 앞두고 보건의료 분야에서 개혁할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의대 증원은 그중 아주 작은 조각 하나일 뿐입니다. 거기 매몰돼 흘려보내는 이 시간이 너무도 아깝습니다. 이걸 가장 아까워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정부와 의료계입니다. 의료계가 전문적인 식견을 보태고 정부가 이를 세밀하게 조율해 나가야 할 과제가 산처럼 쌓여있습니다. 만에 하나 의료계 일부 강경파의 주장대로 의대 정원을 동결한다고 칩시다. 그럼 과연 여론이 다른 보건의료 분야의 개혁은 용인할까요. 의료소송 부담을 완화하는 제도가 힘을 얻을 수 있을까요. 건강보험료율의 법정 상한(8%)을 높이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까요. 집단으로 사직서를 낸 전공의들의 7대 요구안 중 첫 번째가 ‘의대 증원 계획 및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 전면 백지화’라고 합니다. 어떤 소설에 나온 말처럼 심지가 심지로 남고 초가 초로 남아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