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기자의 섹스&젠더]임신, 그 아름다움

  • 입력 2002년 12월 26일 17시 16분


한 해가 저무는 시점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림책을 선물하면 좋겠다 싶어 서울 홍익대 앞 예술전문서점 ‘아티누스’에 갔다.

그 서점은 사람들이 마음껏 책을 고를 수 있도록 같은 종류의 책 중 한 권씩은 꼭 비닐종이로 책 겉면을 싸 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성의가 친근하다.

책장을 넘기면 펼쳐지는 미국 화가 차일드 해섬의 ‘롱아일랜드 이스트 햄프턴의 낡은 집과 정원’,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의 ‘레몬 트리’….

사물의 색채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빛의 반사작용에 의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포착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은 그림에 문외한에게도 생활에 대한 너그러움을 주는 듯하다.

서점 안 아트숍에서는 아기 사진을 통해 생명과 탄생의 신비를 표현해 온 호주 사진작가 앤 게데스의 2003년 캘린더 사진이 눈길을 끈다.

‘퓨어(PURE·순수한)’라는 제목의 캘린더에는 잠자는 갓난아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두 눈을 평화롭게 감고 있는 어머니의 나체, 어머니의 두 손으로 소중히 받치고 있는 아기의 작은 머리, 만삭으로 잔뜩 부른 배와 다리의 곡선을 클로즈업한 흑백 사진 등이 실려 있다.

앤 게데스의 인터넷 홈페이지(http://pure.annegeddes.com)에 실려 있는 그녀의 인터뷰 ‘앤은 퓨어에 대해 말한다’ 중 일부를 옮겨본다.

Q:‘퓨어’에서 당신은 여성의 임신에 초점을 맞췄다. 왜 그런가.

A:여성이 임신했을 때야말로 ‘진실하게(honestly)’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진짜(real)’ 아름다움을 사진 찍는 일은 내게 기쁨을 준다. 임신한 여성은 마땅히 축복받아야 한다. 그것은 기적이다. 아기의 탄생은 수식어가 필요 없는 커다란 체험이다.

Q:갓난아기를 소재로 한 당신의 사진은 전세계적인 공감대를 얻고 있다.

A:아기는 우주의 공통 언어다. 내 사진에 등장하는 아기들은 저마다 다른 인종과 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다. 각각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부모로부터 사랑받는 아기이다. 그들은 셰익스피어, 미켈란젤로, 베토벤이 될 잠재력을 갖고 있다. 아기는 ‘경이로움(a marvel)’이다.

Q:당신은 사람들이 ‘퓨어’에서 무엇을 얻기 원하나.

A: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실제로는 훨씬 더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깨달음, 미래에 대한 희망 등이다.

서점을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을 탔더니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힘드실 텐데 앉으세요”라며 자리를 양보해 준다. 그동안 임신으로 배가 불러오는 내게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은 주로 10, 20대 학생들이었다. 눈 인사로 남자의 호의를 받아들이며 앉는데 기분이 좋았다.

빛의 반사작용에 의해 끊임없이 색채가 변하는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처럼 시간은 흐르고, 나이는 들며, 삶은 제 모습을 바꾼다.

다음달이면 나는 앤 게데스의 말처럼 ‘인생의 커다란 체험’을 하게 된다.

8월말부터 오늘까지 17편 연재된 ‘섹스&젠더’를 쓰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또는 e메일을 통해 진솔한 속내를 들려 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그동안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말을 벨기에 영화 ‘포르노그래픽 어페어’(감독 프레드릭 폰테인)의 대사를 빌려 털어놓고 싶다.

“사람들은 섹스를 아주 좋거나, 아주 나쁘거나 이렇게 극단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요. 실은 대부분의 섹스가 중간인데 말이에요.”

kimsunmi@donga.com

■‘김선미 기자의 섹스&젠더’는 필자 사정으로 당분간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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