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사랑을 느껴 보세요” 재미화가 김원숙 개인전

  • 입력 2004년 4월 11일 17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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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우리가 쌓아 올린 편견들을 누그러 뜨리고 영혼을 치유하는 씨앗”이라고 말하는 서양화가 김원숙씨가 자신의 작품 ‘그림자 천사’(2003년 작) 앞에 섰다. 허문명기자
“예술은 우리가 쌓아 올린 편견들을 누그러 뜨리고 영혼을 치유하는 씨앗”이라고 말하는 서양화가 김원숙씨가 자신의 작품 ‘그림자 천사’(2003년 작) 앞에 섰다. 허문명기자
파란 담벼락 위로 새들이 날아들고 꽃이 만발한 정원 안 연못에는 물고기가 뛰논다. 빨강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새들을 바라보며 나무에 물을 주고 있다. 서양화가 김원숙씨(50)가 21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갖는 개인전에서 만난 ‘정원에서 물을 주면서’라는 작품이다.

그녀의 그림은 쉽다. 어디에 걸어야 할 지, 어느 곳에 놓아야 할 지 어리둥절한 미술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 그림이 이렇게 쉬워도 되나, 당혹감마저 든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생각나는 대로 그린 것 같아 편안하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서슴없이 ‘이발소 그림’이라고 말한다.

●‘이발소 그림’ 같다지만…

‘선물2’ (2003년 작)

“‘그림이 예쁘다, 혹은 장식적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화가들은 자존심 상한다고 하지만, 저는 오히려 기분이 좋아요. 그림도 일종의 언어인데 다른 사람과 소통되지 않는 그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이 말은 얼핏, 그녀가 무조건 남이 좋아하는 그림만 그린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그녀의 그림은 누구보다도 ‘작가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그림이다. 그녀가 겪은 것, 그녀가 좋아하는 것, 그녀가 슬퍼하는 것들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녀도 한때, 남이 좋아하는 것에 몰두했던 적이 있다.

홍익대 미대 1학년을 마치고 혈혈단신 미국 일리노이대학으로 유학 갔을 때, 당시 서구 미술조류를 흡수해 남보다 앞설 수 있다는 자신감과 열망으로 열심히 미국 화단의 주류 양식을 습득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늘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에게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난다.

“대학원에서 판화 제작 강의를 듣는 날이었는데 음악회에 다녀오는 바람에 지각을 한 거예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저는 스케치북을 일기장처럼 갖고 다녔어요. 교수님께 왜 늦었는지 사과한다고 음악회에서 그린 드로잉을 보여 드렸지요. 그랬더니 대뜸 ‘왜 이런 것을 그동안 그리지 않았느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레이스 커튼’ (2003년 작)

이후 그녀는 ‘남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담은 그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그녀의 과거 현재가 모두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가부장적 전통이 강했던 모국과 기독교적 전통이 강했던 집안에서 태어나, 이국인으로서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다양한 역할모델을 경험하며 얻은 개인적 체험들을 그림 속에 녹여내기 시작한 것이다.

●에로틱한 ‘절정의 순간’ 화폭에

전시장에 선보인 그녀의 그림들은 일상을 소재로 하지만, 그녀의 화면은 일상 저 너머에 있는 듯 신비스럽고 몽환적이다. 현실에 기반을 두면서도 제도나 도덕, 이성이 주는 판단과 비난을 최대한 배제한 채 독특하면서도 간결하게 선과 색을 절제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의 화면은 유머러스하다.

작가는 몇 년 전 20여년의 첫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는데 결혼생활의 가장 뼈저린 위기의 장면을 그리면서도 해학과 풍자로 탓하기를 덮었다. 이를테면, 중년여인이 파란하늘을 배경으로 숲 속에서 새 한 마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그린 ‘침묵(silence·90년)’이라는 작품은 부부싸움 끝에 전 남편으로부터 ’너무 따진다‘는 말을 듣고 그린 것이다.

이혼을 전후해 생에서 가장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는 그녀는 최근 삶에서 큰 선물을 받았다. 전생이 있다면 함께 사랑했을, 그런 남자를 만나 재혼하게 된 것. 그래서인지, 이번 개인전에 나온 작품들은 에로틱하면서도 행복의 절정에 이른 순간들이 포착되어 있다.

‘작은 호수’ (2002년 작)

노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어깨동무를 하며 보름달을 바라보는 남녀를 그린 것이나 별이 빛나는 밤에 폭포가 있는 호숫가에 몸을 풍덩 던지는 남녀, 불 켜진 창의 작은 오두막집 위 밤하늘을 남녀가 함께 구름에 휩싸여 날아가는 모습 등은 아름다우며 신비스럽다.

이밖에 지하 1층 전시장에 걸린 '선물' 연작은 몇 해 전 사랑하는 친구로부터 받은 14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하피즈(Hafiz)의 시집 '선물'에서 이미지를 얻은 작품들. 어려움에 처해 있던 작가에게 정신적 위안이 되었던 시구(詩句)들을 그렸다. 2층에 전시된 당사주(唐四柱) 연작은 점치는 사주 책의 민화들을 응용한 작품들로 한국적이면서도 삶의 해학이 담겨 있다.

그녀는 “예술은 우리가 쌓아올린 편견들을 누그러뜨리고 영혼을 치유하는 씨앗이자, 감사와 즐거움의 열매를 맺는 멋진 놀이”라며 “누구나 삶이 답답하면 스케치북 한 권을 사서 좋아하는 그림을 무조건 베껴보는 것도 삶의 여유를 찾는 한 방법”이라고 권했다. 02-734-6111∼3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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