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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의 실록한의학]임금 무시한 조선 제일침 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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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의 실록한의학]임금 무시한 조선 제일침 허임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입력 2017-08-14 03:00수정 2017-08-14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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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러 난(亂)을 겪으며 각광받기 시작한 침술. 동아일보DB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조선 초중반기까지 한의학은 약물 치료가 대세였다. 한의서로 유명한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동의보감’ 등도 약물 위주다. 그러나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전란을 겪으면서 약물이 귀해지자 값싸고 응급성이 강한 침구 위주의 치료가 각광을 받았다.

그렇다면 조선의 국가대표 침의(鍼醫)는 누구일까. 침에 대해 ‘좀 아는’ 이들은 선조와 광해군 때 어의를 지낸 허임을 지목한다. 악공인 아버지와 사노비(私奴婢)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그는 침 하나로 어의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인생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나 다름없다. 하지만 실록은 그를 임금도 우습게 아는 오만불손의 상징으로 전한다.

“침의 허임이 전라도 나주에 가 있는데 위에서 전교를 내려 올라오도록 재촉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오만하게 집에 있으면서 명을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그 죄를 징계해야 하니 국문하도록 명하소서.”(광해군 2년) “어제 임금께서 ‘내일 침의들은 일찍 들어오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허임은 마땅히 대궐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급히 들어와야 하는데도 제조들이 모두 모여 여러 번 재촉한 연후에야 느릿느릿 들어왔습니다. 임금을 무시하고 태연하게 자기 편리한 대로 한 죄는 국문을 하여 바로잡으라고 명하소서.”(광해군 6년)

천출이라는 사실을 무색하게 하는 행동에 벌을 줘야 할 임금은 오히려 상을 내린다. 그만큼 그의 침술이 대단했다. 실제 임진왜란 중이던 1593년 선조는 자신을 진료한 공로로 녹훈을 내리는데 이때 그의 나이 24세, 약관의 청년이 어의로 발탁돼 당대의 명의들을 모두 제치고 직접 임금을 진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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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부터 26년 동안 허임이 두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장수 어의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의 독창적인 침 기법, 즉 ‘허임보사법(補瀉法)’ 때문이었다. 선조 37년 실록의 기록은 허임이 얼마나 침 기법에 뛰어났는지 보여준다. “임금이 편두통을 앓았는데 허준은 ‘조선에서 침의 제일은 허임’이라며 자신은 병의 원인을 진단하고, 남영은 혈(血)자리를 잡았으며, 침은 끝내 허임이 놓았다.”

허임은 조선의 침구학파 중 침 놓는 기법을 중시하는 수법파에 속하는데, 그 수법파 기술의 결정판이 보사법이다. 그의 보사법은 추후 비법(秘法)으로 인정받아 ‘허임보사법’으로 따로 분류된다. 1748년 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갔던 조선 의사 조숭수는 조선 침구의 특징을 묻는 일본 의원 가와무라 슌코에게 허임의 보사법에 대해 설명한다. “침을 잘 놓는 자는 보사법에 능통하다. 조선에는 허임이 가장 침을 잘 놓았고 김중백이 이어받았다.”

허임이 저술한 ‘침구경험방’은 동아시아에 널리 알려진 국제적 의서였다. 젊은 시절 조선에 유학한 일본 침의 산센 준안은 일본으로 돌아가 침구경험방을 번역했는데 번역본 서문에 “유독 조선을 침에 있어서 최고라고 부른다. 평소 중국에까지 그 명성이 자자하다는 말은 정말 꾸며낸 말이 아니다”라고 썼다. 청나라 말기 명의 요윤홍이 쓴 ‘침구집성’은 침구경험방을 일부 표절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허준이 조선 한의학을 중의학으로부터 독립시킨 인물이라면, 허임은 중국으로부터 침구학의 자주화를 이끈 주인공이었다. 최근 그의 일생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방영된다니 반가울 따름이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조선 제일침 허임#어의 허임#침구경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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