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김현진] 스타일 인 셀럽<16>패션보다 화려하고 섹스보다 달콤한…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6월 3일 14시 00분


코멘트

'섹스앤더시티2' 스타일 분석

● 할스톤, 디오르… 노골적 간접광고의 끝은?
● 미란다의 패션 센스 진화 주목할 만
● 섹스와 패션, 여성의 판타지 충족

유부녀가 된 캐리(세라 제시카 파커·45)가 드레스룸을 여는 순간. 선반 위에 가지런히 놓인 하이힐, 새침한 자태로 옷장을 가득 메운 명품 '신상' 드레스, 주렁주렁 매달린 탐스러운 백들이 마치 말을 걸어올 것처럼 느껴졌다면 당신은 여성(또는 여성에 필적하는 감수성을 갖고 태어난 남성)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패션에까지 관심이 많다면 당신의 눈은 전편 영화에 등장한 캐리의 마놀로 블라닉 슈즈가 선반 어디쯤에 놓여있는지 단 0.1초 만에 스캔해 낼 것이다.

1998~2004년 미국 케이블 채널 HBO를 통해 6개의 시즌으로 제작, 방영됐고 2008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 영화로 만들어진 '섹스앤더시티'는 현대 패션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패션과 섹스를 크로스오버한 네 여자의 수다는 섹시한 마놀로 블라닉 '킬힐'에서 최신 자위 기구까지 아무런 경계 없이 널뛰기한다.

▶ 섹스보다 좋은 패션 이야기

'섹스앤더시티2'는 패션과 섹스에 대한 여성의 판타지를 반영한다. 장 폴 고티에 드레스, 랄프 로렌 백을 매치한 사만사, 알렉산더 왕 톱에 자크 포센 팬츠, 빌 블래스 벨트, 비비안 웨스트우드 모자로 스타일링한 샤를롯, 디오르의 뷔스티에에 랄프 로렌 팬츠를 곁들인 캐리, 에르메스 드레스와 모자, 미쏘니 팬츠, 로베르토 카발리 벨트로 멋을 낸 미란다.(왼쪽부터) 사진 제공 워너브러더스코리아. ☞ 사진 더 보기
'섹스앤더시티2'는 패션과 섹스에 대한 여성의 판타지를 반영한다. 장 폴 고티에 드레스, 랄프 로렌 백을 매치한 사만사, 알렉산더 왕 톱에 자크 포센 팬츠, 빌 블래스 벨트, 비비안 웨스트우드 모자로 스타일링한 샤를롯, 디오르의 뷔스티에에 랄프 로렌 팬츠를 곁들인 캐리, 에르메스 드레스와 모자, 미쏘니 팬츠, 로베르토 카발리 벨트로 멋을 낸 미란다.(왼쪽부터) 사진 제공 워너브러더스코리아. ☞ 사진 더 보기


고백하건데, 지난달 28일 열린 영화 '섹스앤더시티2' 시사회를 앞두고 기자를 더 궁금하게 만든 것은 스토리가 아닌 비주얼이었다. 지난 2년간 달라졌을 캐릭터들의 인생보다 과연 이번 영화에는 어떤 브랜드의 옷을 어떻게 입고 나올지가 더 궁금했다는 뜻이다(비슷한 생각을 품은 독자라면 기사 하단의 화보부터 클릭하시라. 브랜드 정보는 영화 개봉에 맞춰 미국에서 발간된 책 '섹스앤더시티-스토리, 패션, 어드벤처'를 참조했다. 항공우편으로 긴급 공수해 받은 이 책의 절반 이상은 브랜드 정보를 알리는 데 할애됐다).

시사회장에 동행한 패션 스타일리스트 박명선 실장과 기자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심전심으로 캐리와 사만사(킴 캐트럴·54), 샤를롯(크리스틴 데이비스·45), 미란다(신시아 닉슨·44)가 입은 옷과 가방, 구두의 '정체'를 밝히는데 주력했다.

10일 개봉 예정인 영화는 네 명의 주인공이 게이 친구의 결혼식 선물을 사기 위해 뉴욕 맨해튼의 버그도프굿맨 백화점 앞에서 반갑게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됐다. 할스톤의 심플한 화이트 저지 드레스를 입은 캐리에 이어 아이템의 블랙 드레스로 섹시한 멋을 뽐낸 갖춘 사만사, 디올의 핑크 투피스로 고급스러운 ‘어퍼 이스트 사이드’ 패션을 선보인 샤를롯, 보테가 베네타의 에지 있는 골드 드레스로 뽐낸 미란다가 차례로 등장했다.

이번 영화에서 캐리가 선보이는 토털룩은 총 42개다. 영화의 의상감독이자 유명 스타일리스트인 패트리샤 필드는 "전편 영화에서 120개에 가까운 룩을 선보였던 데 비해 그 숫자는 훨씬 줄었지만 원색적이고 이국적인 아이템이 많아 더 많은 옷을 입은 것처럼 느껴질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치렁치렁한 롱스커트 차림을 자주 선보여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이는 주인공들이 보수적인 중동 국가, 아랍에미리트(UAE)의 아부다비로 여행을 떠난다는 설정 때문.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촬영 허가가 나지 않아 실제 촬영은 모로코에서 진행됐지만 종교적 규범에 맞게 노출을 되도록 줄이려 애썼다는 설명이다. 스타일리스트 필드는 "다리를 가리는 롱드레스, 머리와 어깨를 가리는 케이프와 스카프 등을 많이 활용했다"고 말했다.

이번 영화에서도 네 주인공은 패션을 통해 개성과 성격을 드러낸다. 넷 중 가장 스타일리시한 캐리가 스스로 베스트로 꼽는 영화 속 의상은 아부다비 전통 시장에서 우연히 옛 연인 에이단과 재회할 때 입은 옷이었다. 디오르의 블랙 티셔츠 아래 자크포센의 크리놀린(스커트를 부풀게 하기 위해 버팀살을 넣어 만든 페티코트) 스커트를 받쳐 입은 스타일이다.

가장 개방적인 성향을 가진 사만사의 패션은 여지없이 과감하고 화려했다. 필드가 꼽은 사만사의 베스트 아이템은 호텔 수영장 신에서 선보인 발리자의 수영복. 나이트클럽의 가라오케 신에 입은 레드 드레스(어깨에 놓인 징 모양 장식이 고슴도치나 갑옷을 연상케 했던)도 오십 줄에 들어서서도 여전히 정력적인 사만사의 캐릭터를 설명하는데 적절한 아이템이었다. 이 옷은 비욘세, 리한나 등의 무대 의상을 디자인한 필립 블론드가 제작했다.

네 명 가운데 가장 단정한 '프레피룩'을 선보여 온 샤를롯은 이번엔 '부르주아 레이디 패션'으로 변신했다. 귀족적인 느낌의 디오르 원피스, '퍼스트레이디 드레스'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오스카드라렌타 드레스 등이 대표 아이템이었다.

가장 뒤떨어진 패션 감각을 가졌다는 비판을 받아 온 미란다는 이번 영화를 통해 패션 면에서 가장 개과천선한 캐릭터다. 첫 등장 장면에서 입은 보테가베네타 드레스, 사막신에서 입은 에르메스의 롱드레스, 게이 친구의 결혼식 장면에서 선택한 줄리엔 맥도날드 드레스 등은 고루한 변호사 이미지의 미란다를 패셔니스타로 바꿔놓았다.

▶ 드라마는 '빈티지룩', 영화는 'PPL룩'?…거세진 간접광고 물결
보테가 베네타 드레스, 크리스티앙 루부탱 슈즈로 뽐낸 미란다, 할스톤드레스, 샤넬 클러치, 크리스티앙 루부탱 하이힐, 솔란지 에즈거리 파트리지 목걸이로 멋을 낸 캐리, 아이템의 블랙 드레스, 패트리샤 필드 구두, VBH 핸드백으로 스타일링한 사만사, 디오르의 핑크색 투피스와 백, 크리스티앙 루부탱 슈즈를 선보인 샤를롯.(왼쪽부터) 사진 제공 워너브러더스코리아. ☞ 사진 더 보기
보테가 베네타 드레스, 크리스티앙 루부탱 슈즈로 뽐낸 미란다, 할스톤드레스, 샤넬 클러치, 크리스티앙 루부탱 하이힐, 솔란지 에즈거리 파트리지 목걸이로 멋을 낸 캐리, 아이템의 블랙 드레스, 패트리샤 필드 구두, VBH 핸드백으로 스타일링한 사만사, 디오르의 핑크색 투피스와 백, 크리스티앙 루부탱 슈즈를 선보인 샤를롯.(왼쪽부터) 사진 제공 워너브러더스코리아. ☞ 사진 더 보기

파커는 오프닝, 단독신 등 대표적인 장면에서마다 할스톤의 빈티지 또는 세컨드 라인인 할스톤 헤리티지 드레스를 입었다. 할스톤은 1970년대 미국의 패션피플과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드레스 브랜드로 199 0년 디자이너의 사망과 함께 그 명성도 함께 시들었다. 지미추의 대표이기도 한 태머라 멜론은 2008년 이 브랜드를 리노베이션하면서 '아메리칸 시크'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재도약시킬 것을 선언했다.

스타일리스트 필드는 미국 주간지 뉴욕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할스톤은 시크한 뉴요커룩을 대표하는 브랜드라 생각해 이 브랜드의 옷을 많이 활용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파커가 영화 속에서 할스톤의 옷을 자주 입고 등장한 것은, 그가 올 초 할스톤 헤리티지의 대표 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된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영화의 제작에도 참여하는 파커의 입김이 노골적인 간접광고(PPL)에까지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것이 외신의 분석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영화가 노골적인 상업주의를 표방해 특유의 개성을 잃었다며 이를 '섹스앤더시티의 죽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특히 드라마 후반부와 또 두 편의 영화에서 간접광고 마케팅이 더욱 활개를 띄게 됐다는 것이 패션계의 분석이다.

패션정보업체 PFIN 조길우 연구원은 "전편 영화에서도 럭셔리 브랜드들의 컬렉션 의상들이 대거 출동하며 화려한 눈요기 거리를 제공했지만 드라마에서와 같은 '워너비' 스타일을 창출하지는 못했다"며 "이는 지나치게 디자이너 의상에 기댄 나머지 '내추럴 시크'를 지향하는 최근 패션 트렌드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스타일리스트 박명선 실장 역시 이번 영화가 마치 광고 카탈로그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그는 "드라마에서는 적어도 5개 이상의 패션 아이템을 믹스 매치했으나 영화에서는 2개 이상을 매치하지 않는 스타일링이 주를 이뤄 특정 브랜드의 제품이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고 말했다.

필드는 드라마 시즌 초기, 인지도 부족으로 양말 한 쪽 빌릴 곳을 찾기 힘들었다고 증언한다. 캐리 특유의 믹스 매치룩이 탄생한 것도 필드가 뉴욕의 빈티지숍들을 뒤져 적극적으로 스타일링할 아이템을 발굴한 덕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가 패션 아이콘으로 급부상하면서 대형 브랜드들의 본격적인 마케팅 공세가 시작됐다. 스타일리스트의 개인기보다 브랜드의 입김과 상업 논리가 더 크게 작용하는 시대가 온 것. 필드는 "이번 영화 촬영을 앞두고 각 브랜드가 앞다퉈 협찬한 옷들로 체육관만한 크기의 대형 드레스룸이 가득 찼다. 마치 백화점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필드는 특정 브랜드를 선택한 이유로 종종 '디자이너와의 친분'을 꼽기도 했다.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한 할스톤의 디자이너 로이 할스톤 프로윅을 "너무나 보고 싶은 내 좋은 친구"라고 소개했고, 드라마에서 입었던 옷과 똑같은 옷을 한 번 더 입는 특별한 스타일링을 할 때 선택한 디오르의 뉴스페이퍼 프린트 드레스에 대해서는 "내 친구 갈리아노가 디자인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말했다.

캐리가 4~5벌의 옷을 갈아입는 동안 한 번도 바꿔 차지 않아 그 이유를 궁금하게 만들었던 '차한(Chahan)'의 네잎클로버 목걸이에 대해서도 필드는 "내 친구 차한 미나시안이 디자인한 2만 달러(약 2400만원)짜리 제품"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설명했다. 1초만 노출돼도 엄청난 판매 효과를 누리게 된다는 '섹스앤더시티'의 파괴력을 생각했을 때 개인적 네트워크가 제품의 선정 기준이 된다는 사실은 보는 이의 입맛을 다소 씁쓸하게 한다.

▶ 패션과 섹스에 대한 솔직한 수다, 그 영향력은?

캐리 역의 세라 제시카 파커가 꼽은 베스트룩. 디오르의 빈티지 티셔츠, 자크 포센의 드레스와 블라우스, 영화를 위해 특별 제작된 마놀로 블라닉 슈즈, 중동풍의 빈티지 백을 가장 캐리답게 믹스 매치 했다. 사진 제공 워너브러더스코리아. ☞ 사진 더 보기
캐리 역의 세라 제시카 파커가 꼽은 베스트룩. 디오르의 빈티지 티셔츠, 자크 포센의 드레스와 블라우스, 영화를 위해 특별 제작된 마놀로 블라닉 슈즈, 중동풍의 빈티지 백을 가장 캐리답게 믹스 매치 했다. 사진 제공 워너브러더스코리아. ☞ 사진 더 보기
'섹스앤더시티'가 패션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PFIN 조길우 연구원은 1990년대 중반에는 생소했던 '믹스 매치' 스타일링의 대중화, 마놀로 블라닉을 세계적인 브랜드의 반열에 올린 '슈어홀릭' 붐을 가장 큰 영향으로 꼽았다.

명품 브랜드 마케팅의 최고봉, '잇 백' 열풍을 부채질 한 것도 이 프로그램이었다. 따로 에피소드가 꾸며질 정도로 부각된 펜디의 '바게트 백'은 10년간 베스트셀러로 군림했고 모델명이 보통명사화 돼 영어 사전에 등재되기까지 했다.

여성 성욕에 대한 직접적 묘사로 페미니즘사의 한 장을 열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엇갈린다. 문화 비평가 스테이시 데라스모는 책 '섹스앤더시티 제대로 읽기'에서 "캐릭터들은 정말로 결혼하길 원하고 있지만 이에 대해 순진해보이고 싶지 않을 뿐이다. 불행을 거듭하면서 마놀로 블라닉을 신고 아슬아슬하게 걷는 여성은 그 가냘픈 몸으로 페미니즘은 끝났다는 사실을 입증한다"고 지적했다. 반면 연애, 결혼에 대한 여성의 주체적 입장을 이 작품만큼 솔직하게 드러낸 작품은 없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섹스앤더시티'는 섹스와 패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이번 영화에서도 섹스는 곧 패션이요, 패션은 곧 섹스였다. 주인공들이 잘 관리된 발을 신상 '킬힐'에 끼워넣는 행위는 최신 트렌드와의 만남일 뿐 아니라 성적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작동 버튼'이었다.

또 시들어 가는 중년 여성과 성적 에너지로 가득한 '어린 여자'와의 비교 역시 패션을 통해 부각됐다. 사만사는 17세의 아이돌 스타 마일리 사이러스와 우연히 똑같은 매튜 윌리암슨 미니 드레스를 입고 공식 석상에 등장해 "마일리의 엄마냐"는 굴욕적인 질문을 받는다. 또 샤를롯은 몸에 달라붙는 화이트 티셔츠와 노브라 때문에 'G컵' 가슴의 질량감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20대 베이비 시터가 남편 해리를 자극할까 노심초사한다.

'섹스앤더시티'에서 패션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남녀 사이를 묘사하는 오브제로 활용되기도 한다. 결혼기념일에 남편에게 롤렉스의 빈티지 시계를 선물한 캐리는 답례로 HD TV를 선물 받고 결혼에 대한 회의까지 느낀다.

여자친구 또는 아내의 손에 이끌려 영화관을 찾는 영화 밖 남성들 중 상당수도 "무슨 영화가 옷 자랑만 하고 끝나냐"는 비난을 퍼부을지 모른다. 그러나 주인공들이 탄 50만 달러(약 6억원)짜리 마이바흐 네 대가 사막을 나란히 질주하는 모습에서 침을 꼴깍 삼키게 된다면, 캐리의 옷장에 눈빛이 떨리는 여성을 비난할 자격은 없을 것 같다. 얼마 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 기자 간담회에서 마이클 패트릭 킹 감독이 "우리 영화는 '007'의 여성버전이다. '007 시리즈'에 나오는 스포츠카가 우리 영화의 마놀로 블라닉 구두다"라고 말하기도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남성들이여. 섹스와 패션에 대한 여성의 판타지를 고조시키는 '섹스앤더시티2'의 주인공들이 사막 한 가운데서 옷을 세 벌씩 갈아입는 패션쇼를 하고, 폐경기에 접어들고도 끝내주는 훈남과 자동차 위에서 사랑을 나눈다 해도 놀라거나 분노하지 마시길. 이 영화는 철저한 '여성판 판타지', 그 자체니까.



[관련 기사]더 큰 옷장을 안고 그녀들이 돌아왔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