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탈북자 1호 박사 안찬일 씨,신문기자 출신 북한학 1호 박사와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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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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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체제 낙관론에 비판도 있지만 黨이 군부 누르고 개방 택할 것”

《‘탈북자 출신 박사 1호’인 안찬일 씨(56)가 세계북한연구센터(WINK)를 설립하고 15일 소장에 취임했다. 그는 개소식에서 “북한의 체제전환과 개혁개방 이후 한반도 평화시대가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3월 26일 우리 해군 장병 46명의 생명을 앗아간 천안함 폭침사건으로 대북 낙관론자들의 입지가 크게 좁아진 상태지만 그는 오히려 대북 낙관론의 전도사로 나선 듯하다. 이유가 뭘까. ‘신문기자 출신 북한학 박사 1호’인 신석호 정치부 차장이 그를 만났다. 인터뷰는 16일 오후 3시부터 두 시간 동안 동아미디어센터 11층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왼쪽)이 16일 동아미디어센터 11층 회의실에서 신석호 기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왼쪽)이 16일 동아미디어센터 11층 회의실에서 신석호 기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북한은 올해 9월 노동당 대표자회 개최를 계기로 당의 역할과 기능을 정상화해 김정일의 1인 독재를 완화하고 장마당을 통한 시장경제 기능을 받아들여 중국식 개혁 개방의 길로 나갈 것입니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의 ‘북한 미래 낙관론’은 이렇게 정리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북한이 당의 기능을 회복하겠다는 것은 당을 3대 세습의 들러리로 사용하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안 소장에게 먼저 이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일리가 있는 비판입니다. 북한이 당의 역할과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것은 김정은으로 권력 세습을 하려니까 군대만으로는 안 되겠고 당의 세포조직을 이용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북한 지도부는 경제도 당이 작동하지 않으면 살려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결국 당을 회복해 세습과 경제회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것입니다. 향후 김정일은 당 총비서 자리를 아들에게 주고 자기는 국방위원장과 당 중앙위 군사위원장 자리를 지키며 후견통치를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 중국식 집단지도체제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적 지배에 의한 전통적 사회주의 지배체제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김정일이 당을 통해 선군정치를 견제하려 한다고 지적했습니다만….

“같은 맥락입니다. 김정일이 지난해 장성택 당 행정부장을 국방위원에 임명한 것은 무인집단을 문민화시키고 군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군의 권력이 비대한 상태에서는 세습이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근 한 서방 소식통은 2008년 김정일 건강 이상 이후 군부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가 김정일, 정은 부자와 국가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반론을 폈는데요.

“김정은은 어리지만 이미 당 조직지도부에 기반이 있습니다. 권력 세습은 총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군이 가진 총칼은 도구에 불과하고 진짜 힘은 붓대를 가진 당에 있습니다. 과거 봉건사회에서도 권력이양과 세습은 무인들이 아니라 펜을 쥔 문민이 주도했습니다. 북한에서도 정치의 핵심인 당이 나설 것입니다.”

김정은 후계구도 펼치려면
대외적으로 평화공세 필요
남한도 대화기회 잘 살려야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이 16일 “북한은 노동당의 역할과 기능을 강화해 김정일 1인 독재를 완화하고 중국식 개혁 개방 정책을 펼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이 16일 “북한은 노동당의 역할과 기능을 강화해 김정일 1인 독재를 완화하고 중국식 개혁 개방 정책을 펼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권한을 회복한 당의 경제정책은 어떨 것으로 전망하십니까?

“북한에서는 1990년대 경제난 이후 노동계층이 와해되고 장마당을 중심으로 상인계층이 두껍게 생성됐습니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상태여서 북한 지도부가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장마당에 의한 시장경제체제로 전환될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은 중국처럼 당을 중심으로 개혁과 개방을 할 것입니다. 중국을 따라가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9월 당 대표자회에서 이런 정책을 선언할 수도 있습니다.”

―북한 지배층은 개혁 개방을 두려워한다고 들었는데요.

“군인들은 두려워하지만 당 관료와 내각의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의 개혁 개방 이후 군인들의 지위는 낮아졌지만 관료들은 자신들의 지배시장이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김정은도 서구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개혁 개방을 통해 관료들의 충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안 소장은 향후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낙관론을 이어갔다.

“긴장이 누적된 상황에서는 세습과 경제회복이 어렵기 때문에 북한 지도부는 남북관계도 개선하려고 할 것입니다. 당분간은 리더십 교체기이므로 남한이 바라는 것 같은 혁명적인 제안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천안함 폭침 같은 모험주의도 없을 것으로 봅니다.”

―북한이 당 기능 회복을 통한 군부 견제를 지난해부터 계획했다면 올해 천안함 폭침사건 같은 도발은 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북한이 대남기구를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오극렬(국방위 부위원장)과 장성택, 김영철(인민무력부 정찰총국장) 등 이해관계가 다양한 권력자들 사이에 갈등과 모순이 있었고 그 과정에 사건이 난 것으로 보입니다.”

안 소장은 “김정은이라는 새로운 리더십의 대외적인 모양새를 위해서라도 북한은 9월 이후 적극적인 대남 평화공세를 펼칠 것”이라며 “정부는 북한이 개성이나 금강산 관광 재개, 비료 지원 등을 요청하면 선별적으로 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이 천안함 사건이나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과 관련해 우리 정부가 요구하는 그 어떤 것도 수용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일단 대화를 해서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 좀 더 현실적이고 대승적인 차원에서 대북 협상의 주도권을 쥐자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 안 소장의 탈북과 그 이후… ▼

‘김일성 주석’과 ‘이명박 사장’.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이 1997년 12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주체사상의 종언’이라는 책으로 펴낸 뒤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이 1997년 12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주체사상의 종언’이라는 책으로 펴낸 뒤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의 개인사에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2명이다. 두 사람은 그가 1979년 북한을 탈출해 고려대 정외과 학부(1984년 입학)를 거쳐 북한 연구자가 되는 과정에서 전환점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안 소장은 “31년 전 탈북한 진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탈북 과정에서 김 주석에게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1979년 7월 27일 서부 군사분계선(MDL)을 넘을 당시 저는 휴전선을 지키는 인민군 부대의 부소대장(상사)이었습니다. 25세의 젊은 나이에 노동당원 신분일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제대 후 가장 끗발이 좋은 군관학교인 김일성정치대학에 지원했습니다.”

“능력따라 일할 수 있도록…”
김일성 앞 편지 써놓고 南行

‘사장’ 이명박때 現代입사
국정원서도 18년간 근무


그러나 당은 그를 일반사회대인 김일성종합대에 배정했다. 화가 난 그는 탈북 2주 전 휴가를 내 평양을 마지막으로 둘러봤다. 김일성 독재의 공고화와 함께 쇠락해가는 사회주의 조국을 확인하고 마음속으로 작별을 고했다.

“탈북 전날 김 총비서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총비서님, 능력에 따라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당의 정책이 잘 실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부디 시정해 주십시오’라고요. 다음 날 MDL 철책을 넘으면서 편지를 북측 철조망에 끼워 넣었습니다.”

그가 탈북에 성공한 이틀 뒤 가족들은 모두 요덕수용소로 이송됐다. 편지가 발견됐고 단순 탈북자가 아닌 정치범으로 낙인찍힌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가 탈북한 직후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터져 한국사회는 극도의 긴장상태에 빠졌다. 어수선한 시대에 우선 직장을 잡고 부족한 공부를 더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국가는 그에게 살 집과 함께 중동 특수를 타고 잘나가던 현대건설에서 근무할 기회를 줬다. 1981년 안 소장이 입사하던 날 당시 현대건설 사장인 이명박 대통령이 그를 불렀다. 이 사장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고 물었고 안 소장은 “기회가 되면 공부를 더 하고 싶다”며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에 갈 생각”이라고 답했다. 이를 들은 이 사장은 “이왕이면 내가 나온 고려대에 가라”고 추천했다.

“1984년에 특례로 고려대 정외과 학부에 입학한 것은 오로지 이 사장의 조언 때문이었습니다. 성균관대로 갔다면 아마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을 일찍 만났겠죠? (웃음) 당시 젊은 사장으로 출세를 한 이 대통령을 인생의 역할모델로 생각했고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탈북자들의 역할모델이 되고 싶었지요.”

그는 학부 졸업 후 같은 과 석사과정에 들어가 북한군에 관한 논문을 써 석사학위를 받았다. 다음해인 1991년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특채되는 동시에 건국대 대학원 정외과에 입학했다. 6년간의 노력 끝에 1997년 ‘북한의 통치이념에 관한 연구-전통사상의 수용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가 됐다.

그후 북한학자이자 국정원 분석관으로 일하며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권력 승계, 1990년대 경제난과 ‘우리식 사회주의’ 등장, 1990년대 핵 위기를 거치면서 북한 체제가 양적, 질적으로 왜곡되고 나빠지는 퇴행의 과정을 지켜봤다.

정년을 2년 앞둔 2008년 불행이 닥쳐왔다. 국정원 직원 신분으로 언론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강제 해직된 것이다. “잘한 일은 아니지만 해임은 너무 부당했어요. 즉시 법원에 소송을 냈지만 1, 2심에서 모두 패했고 지금은 상고심이 진행 중입니다.”

안 소장은 해직 후 미국 버지니아대에 초빙교수로 체류하다 올해 귀국했다. 15일 열린 세계북한연구센터 사무실 개소식에는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현인애 NK지식인연대 부대표, 채경희 전 통일부 직원 등 ‘후배’ 탈북자들이 참석했다. 한 참석자는 “안 원장은 탈북자 사회의 봉사하는 리더”라고 평가했다. 그는 겸연쩍어하면서도 “동료 탈북자들이 기다리는 자리는 어디라도 가려고 노력하고 그들을 형제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탈북자가 한국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북한과의 모든 것을 단절해야 한다”며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낸 사람이 한국에 와서 화병을 얻어 건강을 해치는 이유는 아직도 자신이 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많은 탈북자가 북한을 연구하고 가르칠 기회를 가졌으면 해요. 탈북자 2만 명 시대를 맞아 한국 정치에도 탈북자들이 진출하는 미래를 그립니다.”

그는 지금도 탈북자의 역할모델이라는 자신의 비전을 잊지 않고 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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