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기대하지 말라”는 김정은[오늘과 내일/신석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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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개혁과 개방 이끌려면
독재 구조 균열에 초점 둬야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1일 조선중앙TV를 통해 보도된 북한 노동당 전원회의 참석자 단체사진 앞줄 정중앙. ‘혁명 선배’들의 것보다 20%는 커 보이는 붉은색 의자에 비딱하게 앉아 인상을 쓰고 있는 서른여섯 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나에게 변화를 기대하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1990년대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식 개혁과 개방을 거부하며 남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 말의 뉘앙스는 이번 전원회의 보도문에도 고스란히 배어 있다.

우선 김정은은 경제난의 책임을 고스란히 내각(한국의 행정부)에 돌렸다. 각 공업부문에 “산적되어 있는 폐단과 부진 상태”를 지적하며 “경제사령부로서의 내각이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심각한 실태”를 질타했다. 지난해 8월 건설공사가 늦어지고 있는 수산사업소를 방문해 “이런 문제까지 내가 나와서 대책을 세워야 하느냐”며 불호령을 내린 것과 같은 맥락이다. 김정일 시대에 이어 김정은 시대에도 그 내각을 책임졌던 박봉주는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 김정은의 왼쪽 옆자리에 얼어붙은 듯 앉아 있다.

북한의 경제난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김일성 주석 시절부터 이어져 온 세습 독재의 파행적 경제 운용과 대미 강경 정책이 핵심 원인이라는 진단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김정은은 그러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잘못된 행태를 답습하고 있다. 실제로 생전의 김정일도 내각의 경제적 책임을 누구보다 강조했다. 하지만 뒤로는 노동당과 군 등 권력집단에 특권을 주고 상납을 받는 기형적인 ‘수령경제’를 확장시켜 내각을 속 빈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최고지도자가 말단 경제현장을 찾아가 이런저런 지시를 하고 이를 관영매체로 홍보하는 독특한 통치 수단인 ‘현지지도의 정치’ 역시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이 시원이다. 회고록 등에는 그가 농수산 사업소 등 현장을 방문해 촘촘히 수치를 읊어대며 현장 반장이 해야 할 만한 구체적인 지시를 늘어놓는 장면이 홍보된다. 북한 말로 ‘위에서 내려 먹인다’고 하는 통치 관행은 최고지도자 이하 간부들의 자율성을 앗아가고 국가 자원을 비효율적으로 배분시키는 정치적 자충수로 기능했을 뿐이다.

지난해 12월 28일부터 무려 4일 동안 이어진 전원회의 결과 김정은은 핵능력을 강화하면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맞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낡은 길’을 택했다. 경제 분야에 대해서도 선대와 마찬가지로 계획과 시장 사이에 어정쩡한 태도를 드러냈다. ‘자립과 자강’ ‘국가의 집행력과 통제력’을 강조하며 인민과 엘리트에 대한 내핍의 강요,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의 회복을 암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경제개혁 브랜드인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의 지속적인 실시를 주장하고 있다. 양문수 북한대학원대 부총장은 “경제정책 기조의 연구와 실행을 담당해야 할 실무자들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라고 전망했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의 사망과 함께 그가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등장했을 때, 많은 전문가들이 그가 ‘스위스 유학파’라는 점을 들어 변화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럴까?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도 민주주의의 고향인 영국에서 유학했지만 귀국 후 변화보다는 아버지가 물려준 독재 권력의 유지에 몰두했다.

문제는 독재라는 구조다. 그 구조 안에서는 개인의 다양성과 자유의지가 실질적으로 제약된다. 그런 의미에서 최고지도자 개인의 생각을 바꿔서 북한을 바꾸겠다는 진보 정권들의 대북정책은 ‘희망적 사고’였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북한을 변화시키려는 어떠한 노력도 3대 세습 독재정치 균열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냉전으로 크렘린 궁전의 금고를 바닥나게 해 소련을 무너뜨린 미국이 대북 경제제재 완화를 거부하는 진짜 이유가 아닐까.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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