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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이 떨어지면 뿌리는 더 바빠진다[포도나무 아래서]〈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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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이 떨어지면 뿌리는 더 바빠진다[포도나무 아래서]〈41〉

신이현 작가입력 2019-11-26 03:00수정 2020-02-0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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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왼쪽)와 신이현 작가
가로수 잎들이 떨어지는 계절, 레돔은 낙엽을 쓸어 담아 포대 가득 넣는 사람들을 한참 바라보더니 저것을 좀 얻을 수 있는지 물어봐 달라고 한다. 아, 다 가져가세요! 아저씨들의 흔쾌한 허락에 레돔은 낙엽 포대를 트럭 가득 실어 밭을 향해 날아가듯 달려간다.

“저 나무들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원래 모든 떨어지는 잎들은 다시 그 나무들에게 돌려줘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왠지 뺏어가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가로수 낙엽뿐만 아니라 밭둑에 쌓아둔 들깨 단이나 콩 껍질 같은 것들을 보면 그는 일단 멈춘다. 그러고는 눈을 반짝이며 다가가 황홀한 표정이 되어 손을 갈퀴처럼 뻗어 그것들을 만져본다. 이건 정말 좋은 거름이 될 수 있는데…. 부서지는 마른 가지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으며 이것을 먹고 자랄 나무 열매들이 어떤 향기를 낼지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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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다가 이것 좀 얻어 가면 안 될까. 그냥 버리는 것 같은데.”

귀찮은 일이지만 나는 대체로 그의 뜻에 따라 털고 버린 들깨 단이나 이러저런 마른 식물 무더기 주인들을 찾아 그것을 얻어낸다. 그러면 그는 트럭 가득 싣고 살짝 흥분해서 밭으로 간다. 얘들아. 아빠가 뭘 가져왔는지 한번 보렴, 하고 말하는 것처럼 차에서 마른 지푸라기들을 한 아름 안고 간다. 배고픈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손길과 다름이 없다. 이것 좀 봐, 들깨 가지야. 깨 냄새가 아직도 진동을 하네. 포도 열매에서 들깻잎 향이 배겠다. 자자, 보채지 말고 천천히 먹어. 시간은 아직 많아….

우리 밭에는 이미 이웃 논에서 얻어온 짚들이 골골이 덮여 있다. 이웃 농부께서 볏짚을 그냥 가져가라고 하는 순간 우리는 친구들과 친구들의 친구들,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을 죄다 불렀다. 혼자라면 한 달 걸려도 못할 일을 이틀에 걸쳐 모두 끝냈다. 이윽고 포도 묘목 심기가 시작되었는데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왔다. 사람들은 지금 나무를 심으면 다 얼어 죽는다고 했다.

“이 계절에 나무를 심어도 되는 거 맞아? 모두들 봄을 기다리던데.”

나는 정말이지 걱정스럽다. 나무는 한번 잘못 심으면 몇 년을 공치게 되니까.

“나뭇잎이 다 떨어지니까 사람들은 겨울잠을 잔다고 하는데 사실 겨울은 식물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계절이야. 특히 뿌리가 역동적으로 움직일 때지. 잎마저 떨어뜨리고 모든 에너지를 뿌리로 집중시키는 때야. 바깥은 춥지만 땅은 뿌리와 물 에너지들로 가득해. 인간이 모르는 땅의 세상이지. 이렇게 겨울 땅은 인간의 봄을 미리 준비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묘목은 잎이 다 떨어졌을 때 심어주면 좋아. 그래야 뿌리가 차분하게 땅에 적응하고 봄이 되면 새싹을 잘 틔울 수 있어. 땅이 얼기 전에 심으면 아무 문제없어.”

어찌 되었거나 묘목을 뽑아놓았으니 빨리 심어야 한다. 문제는 땅을 파는 기계다. 동력 굴착기라는 것인데 고장이 너무 잘 난다. 농기계 수리소에서 중고로 산 것인데 시동을 걸 때마다 조마조마하다. 농부는 반응 없는 굴착기 시동 줄을 당기고 또 당기다가 푸욱 한숨을 쉰다. ‘묘목 뿌리를 저렇게 오랫동안 공기에 노출시키면 안 좋은데, 큰일 났다.’ 예초기도 그렇고 농기구들은 대체로 시동이 문제다. 작고 힘세고 고장 안 나는 농기구 만드는 사람이 있으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고 모실 텐데…. 우리는 응답 없는 기계를 들고 수리소에 간다.

수리소 아저씨가 공기를 빼고 기름을 칠하고 갈고 닦는다. 이윽고 고쳐졌다! 수리소 아저씨는 마법사다. 일단 가져가면 어떻게든 고쳐준다. 감사합니다, 최고입니다! 레돔은 돌아와서 땅을 파기 시작한다. 그 뒤를 따라가며 나는 곡괭이로 좀 더 넓게 파서 묘목을 심는다. 뿌리가 편안하게 뻗을 수 있도록 묻은 뒤 흙을 봉긋하게 쌓아 올리고 지푸라기와 얻어온 낙엽으로 푹 파묻어 준다. 낙엽 외투를 입은 묘목이 되었다. 시베리아에서 북풍이 와도 끄떡없을 것 같다. 나는 토닥토닥 두드리며 인사를 건넨다. ‘잘 자라렴. 내년에 만나자.’ 왠지 뽀뽀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이제 눈이라도 펑펑 와주면 좋겠다.

 
신이현 작가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낙엽#볏짚#포도 묘목#동력 굴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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