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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시위 일으킵시다, 그래야 훗날 웃음거리 면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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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시위 일으킵시다, 그래야 훗날 웃음거리 면할 것이오”

평택=김지영 기자 입력 2019-11-23 03:00수정 2019-11-2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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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81화> 경기 평택
평택의 만세운동은 경기 남부의 인근 지역보다 일찍 일어났고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남부에선 평택역전에서, 북부에서는 읍치(지방 마을의 중심 공간)가 있던 진위면 봉남리를 중심으로 시위가 벌어졌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봉남리 진위초등학교에 모인 초등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는 모습. 평택시 제공
경기 평택시는 최근 국가보훈처로부터 평택지역 독립유공자들이 새롭게 정부 포상을 받게 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진위군 북면 봉남리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유만수 등 9명이다. 이들의 이름은 현덕면 평택호 옆 광장에 세워진 ‘3·1운동 100주년 기념조형물’ 독립유공자 명단에 올려질 예정이다.

현덕면은 평택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안성, 화성, 천안 등 독립운동사에서 주목받은 인근 지역보다도 이른 3월 9일 시작됐다. 기산리와 황산리, 도대리, 방축리의 주민들이 면사무소 뒷산인 옥녀봉에 모여 횃불을 켜들고 목이 터져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평택시항일독립운동사’) 일제의 외무성 기록 ‘불령단관계잡건’에서는 평택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 대해 “가장 광포(狂暴)하다”고 밝히고 있다. 이웃한 곳들에 비해 덜 주목받긴 했지만 평택의 3·1운동은 일찍, 격렬하게 벌어졌고 주변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한번 마음먹은 것은 그만둘 수 없다”




평택읍 비전리에서 미곡상을 하던 30세 이도상이 독립선언서를 보게 된 것은 동창생 안충수를 통해서였다. 안충수는 고종의 인산일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친척 안종각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넘겨받아 갖고 있었다. 서울 곳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가 펼쳐지고 있다는 소식은 이도상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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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안충수의 집으로 동창생들을 불러 모은 이도상은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면서 만세운동을 벌이자고 설득했다. 그는 그날 밤 동생 이덕상에게 일체의 가사를 맡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기회에 조선독립을 꾀하기 위하여 명일이 평택 장날이므로 그곳에 가서 동지와 함께 조선독립을 제창하여 만세를 외칠 작정이다. 그렇게 하면 곧 체포될 것이므로 다시 집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여 달라.” 동생이 만류하자 이도상은 단호하게 말한다. “한번 마음먹은 것은 그만둘 수 없다.”(‘평택시항일독립운동사’)

3월 11일 아침 만세를 부르자는 격문이 평택정거장 앞에 나붙었다. 일제 경찰은 즉각 비상경계 태세에 나섰다. 장날인 이날 오후 5시경 평택역 앞 사거리에 군중들이 모였다. 앞장선 이도상은 군중들에게 “여러분, 우리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만세시위를 일으킵시다. 그래야 후일 웃음거리를 면할 것이오. 여러분은 내 뒤를 따르시오”라고 하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했다. 군중들은 이도상을 이중삼중으로 둘러싼 뒤 만세를 불렀다. 시위에 함께한 학생들도 일제히 모자를 벗어 하늘을 향해 던지면서 큰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를 발견한 소방대가 종을 쳤고, 일제 경찰이 출동해 주도자 10여 명을 잡아간 뒤에야 시위대는 해산했다.

경기 평택에서 처음 만세시위가 벌어진 현덕면에 세워진 3·1운동 100주년 기념 조형물.
평택역전의 시위가 의미 있는 것은 평택지역이 주변보다 이른 시기에 만세운동이 펼쳐질 수 있는 요인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3·1운동사’에서는 ‘원래 평택읍은 서울과 교통이 비교적 빈번하였으므로 서울로부터의 연락·정보가 빨랐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 1919년 당시 평택역전은 1905년 1월 1일 경부선 평택역이 세워지고 일본인 이민자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근대적인 도시로 자리 잡아갔다. 또 주요 관공서와 근대시설, 시장이 형성됐고 일제 식민통치의 중심으로 급부상했다.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은 “평택은 철도교통의 발달로 일반 농촌지역보다 일찍 서울의 움직임과 만세운동 소식을 접할 수 있었고, 이후 평택 남부지역의 만세운동이 평택역전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도상의 직업이 미곡상이었던 데서 알 수 있듯 신흥도시 지역이었기에 당시 평택읍 거주자의 상당수가 자영업자들이었다. 일제의 약탈적 식민지 경제정책에 의해 이익을 빼앗기는 일이 많았고, 이는 저항의식의 뿌리가 됐다. 파급력이 컸던 이 장소에서는 3주 뒤에 다시 만세운동이 벌어진다.


○ 면장이 솔선해서 만세운동을 이끌다

4월 1일 오후 9시, 평택역 대합실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얼핏 열차를 타려는 승객들로 보였지만 실은 시위대였다. 10시 반경, 군중들은 평택역 광장으로 나갔다.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 외침을 신호로 평택시 각지의 면민들이 일제히 산 위에 올라 봉화 시위를 벌였다. 이날 평택역에 몰려든 군중은 3000여 명, 만세운동은 밤 12시를 넘기고 이튿날 오전 2시까지 계속됐다. 이날의 시위 상황을 보여주는 경기도 장관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4월 1일 오후 평택시가를 중심으로 하여 1리 내외의 곳인 서남 부용리에 걸쳐 무수한 봉화를 올리며 독립만세를 연호하였고, 그 모인 10여 개 집단 인원이 평택에 쇄도하여 정세가 불온하므로 해산을 명하였던 바, 저항하고 쉽게 해산하지 않으므로 발포하여 오전 2시경 일단 진정하다. 사망자 1명, 부상자 4명 외 경상자가 있는 모양임.’(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평택읍내 조선인 상점들의 활약도 주목할 만하다.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고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전날 조선인 상점 2곳에 평택우체국 소인이 찍힌 우편으로 시위에 참여하지 말라는 내용이 담긴 일제의 협박장이 배달된 상황이었지만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었다. 상점들이 철시하고 시위에 함께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일제 경찰과 군수는 상인 10여 명을 군청으로 불러 모은 뒤 상점 문을 열 것을 설득하다 상인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강요까지 했다. 하지만 상인들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상점 문을 열지 않았다.(김해수·장연환 ‘평택 3·1운동의 성격과 특징’)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일제의 처벌이 아니라 만세의 외침에 참여하지 않았을 때 느껴야 할 부끄러움이었던 것이다.

평택 북부지역의 주도적인 시위였던 진위면 만세운동도 같은 날 벌어졌다. 전날 면소재지인 봉남리에서 주민 400여 명이 면사무소 앞과 주재소 앞을 돌면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면장을 끌어갔고, 일제의 수비병이 자동차를 몰아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시위는 이어졌다. 4월 1일 진위면 은산리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에 대해 ‘독립운동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북면(현재 진위면) 은산리에서는 정재운의 사랑방에서 정경순, 정문학 등이 짚신을 삼다가, 방금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도 남과 같이 만세운동을 일으켜 사람 구실을 하자고 하여 만세시위의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먼저 동리 사람들에게 계획을 알려 호응을 얻어, 이들은 동리 사람들과 함께 은산리 뒷산에 올라가 우렁찬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는 농사꾼들이 집 안에서 일을 하다가 의기투합해 그 자리에서 뛰쳐나갈 만큼 봉남리 지역의 만세운동 열기가 뜨거웠음을 보여준다. 산에 올랐던 이들이 “봉남리 순사주재소로 가서 만세를 부르자”고 외쳤고 많은 군중이 시위 행렬을 이뤄 주재소로 향하면서 봉남리의 만세운동은 이틀간 계속됐다.

김해규 소장은 “관료층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것도 평택지역의 특징적 요소”라고 말한다. 대표적인 사람이 서탄면장 윤기선이다. 진위면에서 시위가 일어난 다음 날인 4월 2일 새벽 윤기선 면장은 면서기 한성수를 시켜 각 마을의 구장들에게 주민을 인솔하고 서탄면사무소로 모이도록 지시한다. 그가 구장들에게 보낸 격문의 내용은 ‘독립만세 시위를 일으켜라. 만일 불참하면 큰 환(患)이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400여 명 면민들이 면사무소 앞에 모였고 면장은 연설에 나섰다. “세계의 대세로 보면 조선은 독립할 시기에 이르렀다. 다같이 경하할 일이며 복 받을 일이다. 이번에 내가 적에게 잡혀 가는 일이 있으면 면민 전체를 벌주는 일이니 계속 투쟁하라.”(‘독립운동사’) 면장은 일제에 포섭된 관료층으로 분류됐기에 대부분 지역에서 시위대의 공격 대상이 됐다. 하지만 윤기선은 솔선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키고 선두에 나서서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박상복 평택향토사연구소 상임위원은 “평택지역이 안성, 용인 등 다른 지역과 유기적인 연계를 가지고 만세운동을 전개했다는 점도 짚어져야 할 부분”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평택 시위의 전개 과정은 시기와 시위 횟수, 참가 인원 등이 안성, 용인과 유사하다.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평택 주민들이 인근 안성, 용인 등지에서 벌어진 시위에 동참하기도 했다. 이웃한 지역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 평택출신 ‘육삼정 3人’ 원심창, 만세시위하며 민족의식 눈떠 ▼

日공사 ‘육삼정’ 식당 회합 정보… 백정기-이강훈과 암살 시도
거짓정보 속아 무기징역 등 받아


‘지난 3월 17일 검거된 아리요시 공사 암살계획의 피고 조선인 원심창(28·사진) 백정기(38) 이강훈(31) 등 3명의 예심은 일찍이 상해 일본총영사관에서 속행 중이던 바 7월 5일에 예심이 종결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예비 기물파손죄 등에 해당한 것으로 장기지방재판소의 공판에 회부키로 결정되었다.’

동아일보 1933년 7월 12일자에 게재된 뉴스의 일부다. 중국 상하이 주재 일본총영사관의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공사를 암살하려던 ‘육삼정 의거’로 체포된 3명 독립운동가에 대한 예심이 종결됐음을 알리는 내용이다.

육삼정 의거 삼총사 중 한 명인 원심창(1906∼1973)은 경기 평택 출신 독립운동가다.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에서 태어난 그는 평택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집에서 농사일을 도우면서 지냈다. 열네 살 소년인 원심창은 평택에서 벌어진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에 눈뜨게 된다. 이후 그는 고향을 떠나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우회에 가입해 항일운동에 투신한다.

‘육삼정 의거’는 원심창과 백정기, 이강훈이 속한 의열단체 ‘흑색공포단’이 기획했다. 아리요시 공사가 육삼정이라는 식당에서 비밀 회합을 가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원심창 등 3명이 암살자로 투입됐다. 하지만 이는 독립운동가들을 잡기 위해 일제가 꾸민 거짓 정보였다. 현장에서 체포된 이들은 무기징역 등을 선고받았다.

광복 뒤 일제의 형무소에서 출소한 원심창은 일본에서 지내면서 재일동포의 권익 옹호에 힘쓰는 한편 통일운동에도 헌신했다.

평택에서는 팽성읍 안정로 2.9km 구간을 ‘원심창로’로 지정하고 매년 원심창 의사 추모식과 육삼정 의거 기념식을 개최하며 그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평택시는 기념관 건립 등 다양한 사업도 추진할 예정이다.

평택=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3·1운동 100년#경기 평택#만세운동#육삼정 의거#원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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