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상준]정부 예산은 ‘화수분’이 아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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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 부채 11년 만에 배로 늘어, 평범한 일본인의 예금으로 경제 버텨
한국 가계 금융자산은 일본 절반 이하, 정부 부채 조금 늘어도 채권에 빨간불
지혜 모아 효율적으로 예산 집행해야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일본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일본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지난주 목요일 국회에서 가진 시정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정부 예산안의 주요 내용을 설명하고 국민과 국회의 이해와 지지를 당부하였다. 현안대로라면 내년 정부 지출은 올해보다 9.7% 증가한 470조 원 규모가 될 것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자유한국당은 정부 예산안에서 5조 원을, 바른미래당은 12조 원을 삭감하는 것이 목표다. 어느 경우이든 내년 정부 지출은 올해보다 큰 폭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경기가 좋지 않고 실업자가 증가하고 있으니 적극적이고 과감한 재정정책이 절실한 상황이고, 따라서 지출을 늘리겠다는 정부의 결정은 너무나 당연하다. 반면 정부 지출의 증가가 국가 부채의 증가로 이어져 재정 건전성을 해치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염려를 의식해서인지 시정연설에도 “국가채무비율을 높이지 않으면서”라는 언급이 있었다. 그러나 향후 몇 년간은 국가채무비율이 어느 정도 상승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한국 경제는 중병에 걸린 환자와 같아서 장기적으로 체질을 개선하는 데에도, 단기적으로 기력을 회복하는 데에도 어쩔 수 없이 적지 않은 돈이 들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정부가 쓸 수 있는 돈에도 한계는 있기 때문에, 한계에 도달하기 전에 효과를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병을 치료하고 기력을 회복하는 데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늘 살피고 챙길 필요가 있다. 정부뿐 아니라 정치권도 이 문제에서는 당리당략을 떠나 함께 고민해야 한다. 지금 한국 경제가 앓고 있는 병은 생각보다 뿌리가 깊고, 병을 치료하는 데 동원할 수 있는 돈은 생각보다 적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정부 부채는 약 700조 원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40% 규모이다. 버블이 붕괴한 1991년 일본의 정부 부채는 GDP 대비 약 50%였다. 그러나 불과 9년 후인 2000년에 100%를 넘었고 100%에서 200%가 되기까지 걸린 기간도 11년에 불과하다. 재정 건전성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난 것은 경기가 나쁠 때는 어떤 수단을 써도 정부 지출을 초과하는 조세 수입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험은 재정 건전성도 경기가 회복되어야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한국도 당분간은 재정 건전성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일본의 정부 부채는 지난 20년간 왜 그처럼 걷잡을 수 없이 증가하였을까. 일본 재무성은 사회보장 지출의 증가를 가장 큰 원인으로 꼽는다. 경제성장은 예상보다 저조했지만 고령화는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사회보장 지출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고, 사회보장기금의 적자를 정부 예산으로 메우다 보니 정부 부채가 늘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저성장과 고령화는 이제 한국이 당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노인의 거의 절반이 빈곤에 시달리고 젊은 여성들이 출산을 극도로 꺼리며 청년의 20%가 자신을 실업자로 생각하는 사회에서 복지 예산을 줄일 수는 없다. 다만 같은 예산으로도 최대의 효과를 얻을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한국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이 일본보다 훨씬 제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그동안 GDP 대비 200%가 넘는 부채를 가지고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정부채 대부분을 일본 국내 금융기관이 매입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부채 매입에 동원된 금융기관 자금의 원천은 평범한 일본인의 예금이다. 일본 가계의 순금융자산은 일본 GDP의 250%를 훌쩍 뛰어넘는 규모이다. 일본은행이 개입하면서 사정이 조금 복잡해지기는 했지만, 가계의 순금융자산이야말로 정부 부채를 지탱하는 주춧돌이었다. 즉, 일본 정부는 가계가 금융기관에 묻어둔 저금을 빌려 쓰고 있었던 셈이다. 반면 한국 가계의 순금융자산은 GDP 대비 100%를 겨우 넘는 정도이다. 만일 정부 부채가 GDP 대비 80%만 되어도 한국 정부 채권의 안전성에는 빨간불이 켜질 것이다. 한국은 일본처럼 20년을 허송할 여유가 없다. 20년은 고사하고 10년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최대한 지혜를 모아서 가장 효율적으로 정부 예산을 집행하여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일본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정부 예산#정부 부채#가계 금융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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