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알화 폭락에 성난 이란 민심… “독재자에게 죽음을” 시위 확산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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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압박에 경제난… 내부불만 폭발

미국이 지난달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에서 전격 탈퇴한 뒤 전방위 압박에 나서면서 이란 리알화 가치가 50% 가까이 폭락하는 등 경제위기 우려가 커지고 있다.

수도 테헤란에서는 그랜드바자르(대시장) 상인 수천 명이 일손을 놓고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시위가 24일부터 이어지면서 민심이 크게 요동치고 있다. 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24일 이란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미 달러 대비 리알화 가치는 9만 리알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이란 핵합의를 파기하겠다고 선언한 지난달 8일(6만500리알)보다 약 48.8% 하락했다. 가게 문을 닫고 의회로 행진한 상인들은 “독재자에게 죽음을” “시리아를 떠나 우리를 생각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반정부 시위는 최소 6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하산 로하니 대통령이 26일 연설에서 “미국이 제재를 부활해 이란 국민의 꿈을 산산이 깨뜨리려고 한다”며 “여론을 선도하는 언론, 학계, 종교계, 의회와 사법부 모두 단합해 이에 맞서 손을 잡아야 한다”고 호소했지만 성난 민심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압박이 위력을 발휘하자 미국은 이란 경제를 더욱 강하게 옥죄고 있다. 미 재무부는 27일 미 정부의 규제를 받는 외국 및 자국 기업의 대(對)이란 민간항공기 부품 수출 면허와 카펫, 피스타치오, 캐비아 무역 면허를 취소했다고 발표했다. 해당 기업들은 제재 유예기간이 끝나는 8월 6일까지 이란과 교역 활동을 중단하지 않으면 미 정부의 제재 대상에 포함된다.

미 국무부는 유럽과 아시아 국가에도 11월 4일까지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지 말 것을 요구하면서 예외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이란산 원유 수입에 대한 제재 예외를 인정받기 위해 미국을 설득해 온 영국, 프랑스, 독일과 유럽연합(EU)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이란은 핵합의를 존속하려는 유럽 국가들의 노력이 사실상 무산되자 핵시설 일부를 재가동했다. 이란원자력청(AEOI)은 27일 육불화우라늄(UF6) 생산 설비를 가동해 우라늄 농축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란이 우라늄 핵시설을 가동한 것은 9년 만이다. 핵합의가 최종적으로 파기되면 언제든 핵개발을 재개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해석된다.

이란 정부는 이번 경제위기가 정책 실패로 인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며 심리적인 것이라며 내부 불만을 억누르고 있다. 미국 이스라엘 등 외부세력의 개입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것도 밖으로 책임을 돌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민생고에 따른 분노가 이슬람 통치 체제 전반으로 확대되면 이란이 내부로부터 붕괴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란에서는 지난해 12월 말 테헤란과 주요 도시 곳곳에서 광범위한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현 정부에 반대하는 보수층뿐만 아니라 물가 상승과 실업으로 신음하는 서민 노동자 계층, 자유를 갈구하는 진보적인 청년층이 대거 시위에 동참했다.

최근 테헤란의 상인 계층이 주도한 반정부 시위 역시 경제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서방은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 당시 테헤란 대시장의 상인 조직이 종교 세력에 자금을 대면서 팔레비 왕정 붕괴에 큰 역할을 한 점에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위기관리 컨설팅업체인 유라시아그룹은 이란 정권이 붕괴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내다봤다. 유라시아그룹의 헨리 롬 연구원은 “최근 벌어진 시위는 이질적이며 조직적이지 못하다”며 “체제 변화를 이끌어낼 중앙 조직이 없고, 명확한 정치경제적 요구가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혼란이 계속되면 결국 로하니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선에서 정리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이스라엘 일간 하아레츠는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경제위기에 대한 책임을 돌리기 위해 로하니 대통령을 퇴출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란 의회는 이미 로하니 정부의 경제팀을 교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란 행정부가 급진적으로 교체될 경우를 가정해 이란 혁명수비대의 정예부대 쿠드스군의 카셈 솔레이마니 사령관을 차기 대통령으로 거론하고 있다.

카이로=박민우 특파원 minwoo@donga.com
#리알화 폭락#이란 민심#시위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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