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에 흰 가운… 질시-조소 경계선에 선 100년 전 ‘모던 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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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신여성 도착하다’ 전시회

현초 이유태가 그린 ‘인물일대: 탐구’(1944년)는 조선미술대전의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다. 서울대 병원의 실험실을 사생해 현실적 공간감을 나타내고, 교양을 갖춘 신여성의 면모를 드러냈다는 평가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현초 이유태가 그린 ‘인물일대: 탐구’(1944년)는 조선미술대전의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다. 서울대 병원의 실험실을 사생해 현실적 공간감을 나타내고, 교양을 갖춘 신여성의 면모를 드러냈다는 평가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경성의 신(新)여성, 경희 씨 전상서

경희 씨.

서울 중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당신을 만났습니다. 이유태(1916∼1999)가 그린 ‘인물일대: 탐구’(1944년)란 그림 속 당신을요. 실험실에서 현미경을 앞에 둔 여성 과학자인 당신의 모습에 넋을 빼앗겼답니다. 사실 당신의 진짜 이름은 몰라요. 한국 최초의 여성 화가이자 작가인 나혜석(1896∼1948)의 ‘경희’와 흡사해 당신을 본 순간부터 ‘경희 씨다’라고 생각했어요. ‘경희도 사람이다. 그 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나혜석의 ‘경희’·1918년).

당시 한국 여성들은 중등교육을 받고도 ‘데파트 걸’(백화점에서 일하는 여성), ‘버스 걸’(버스 차장)과 같은 일을 했죠. 전문직과 사무직은 주로 경성에 사는 일본인이 차지했으니까요. 이 무렵 전문직 한국 여성을 소재로 한 그림은 찾아보기 힘들어요. 회색 한복 위에 흰 가운을 걸친 당신의 모습에서 경성의 신여성이 극복했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신여성 도착하다’ 전시(내년 4월 1일까지)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올해 본 최고의 전시 중 하나입니다. 특히 올해는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캠페인’이 지구촌으로 번져나가며 성 평등사회를 실현하려는 ‘페미니즘’이 대두된 한 해였죠.

[1] 한국 근대 여성 운동가인 나혜석의 ‘자화상’(1928년). [2] 여성 예술가의 위상을 높인 우당 박래현의 ‘예술해부괘도’(1940년). [3] 조선미술대전 수상자인 정찬영의 ‘공작’(1937년). [4] 안석주가 그린 잡지 ‘신여성’(1934년 1월)의 표지화.
[1] 한국 근대 여성 운동가인 나혜석의 ‘자화상’(1928년). [2] 여성 예술가의 위상을 높인 우당 박래현의 ‘예술해부괘도’(1940년). [3] 조선미술대전 수상자인 정찬영의 ‘공작’(1937년). [4] 안석주가 그린 잡지 ‘신여성’(1934년 1월)의 표지화.
‘신여성 도착하다’ 전시에서는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한국에서 ‘신여성’이란 말은 1920년대 중반 이후 빈번하게 사용됐다죠. 구습과 전통에서 벗어나 근대성을 적극적으로 경험하고 실천한 여성! 그런데 이 신여성은 그동안 철저하게 남성의 시선에서 관찰됐습니다. 화장하고 외출하면 실제와 상관없이 사치와 향락에 빠진 여성, 기생이나 첩으로 본 거죠.

독서나 음악과 같은 취미생활을 하되 현모양처의 맥락 안에서 행할 것. 현모양처는 여성을 노예로 만든다며 비판한 나혜석은 이혼당했고, 여성 해방과 자유연애를 부르짖던 1세대 신여성 김일엽(1896∼1971)과 김명순(1896∼1951)은 불교에 귀의하거나 사생활이 과장돼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했죠. 실험적 길을 간 여성은 사회적 형벌을 받아야 했어요. ‘모던 걸’이란 신여성의 별칭은 질시, 조소, 엿보기의 대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한국의 신여성은 편견을 이겨내고 미술의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972년 ‘한국근대미술 60년’ 전시 이후 45년 만에 이번에 공개된 동양화가 정찬영의 4폭 병풍 ‘공작’(1937년), 늘어진 여체의 뱃살을 과장 없이 그린 나상윤의 ‘누드’(1927년), 도쿄여자미술학교 출신으로 운보 김기창의 아내인 박래현이 그린 ‘예술해부괘도’(1940년)를 보면 ‘여자라서 자랑스러워요’란 마음이 절로 듭니다. 특히 이번에 국내에 최초 공개된 예술해부괘도는 해부학 수업을 통해 익힌 탄탄한 미술 실력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경희 씨. 이제라도 신여성을 여성의 관점에서 보게 돼 다행입니다. 당신들이 있어 지금의 현대 여성들이 더 이상 ‘쉬쉬’하지 않고 연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국립현대미술관#신여성 도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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