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육체의 감옥에서도 내 영혼은 자유로우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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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모를 것이다/정태규 지음/276쪽·1만4000원·마음서재

김덕기 작가의 아크릴화 ‘햇빛은 눈부시게 빛나고’(2014년). 침울한 흐름으로 빠져들 수 있는 독자를 배려해 밝은 분위기의 그림을 드문드문 삽입했다. 저자가 책을 통해 전하고 싶은 것이 절망과 회한이 아닌 위로와 희망이었으므로. 마음서재 제공
김덕기 작가의 아크릴화 ‘햇빛은 눈부시게 빛나고’(2014년). 침울한 흐름으로 빠져들 수 있는 독자를 배려해 밝은 분위기의 그림을 드문드문 삽입했다. 저자가 책을 통해 전하고 싶은 것이 절망과 회한이 아닌 위로와 희망이었으므로. 마음서재 제공
병과 죽음은 글에 담기 어렵고 두려운 대상이다. 그것에 대해 다룬 글을 읽는 일도 대개 고단하고 무겁다. 머지않은 죽음을 통고받은 병자가 자신의 병에 대해, 병과 동거하며 보낸 시간에 대해 기록한 글은 어떨까. 그런 글을 묶은 것이 이 책이다.

지은이는 59세 소설가다. 오랫동안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성실히 일하며 밤마다 소설을 집필해 한 일간지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틈틈이 논문을 써 국문학 박사 학위도 받았다. 학교는 생계를 위해 잠시 머무는 곳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속 꿈을 유보하며 ‘큰아이가 대학만 가면, 작은아이가 조금만 더 크면’ 하고 사표를 만지작거리다가 적잖은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6년 전 어느 이른 아침 출근을 준비하다 문득, 셔츠 단추를 자기 손으로 구멍에 끼울 수 없게 됐음을 깨달았다. 칠판에 글씨를 쓰던 팔이 별안간 툭 힘없이 떨어졌고, 밥을 먹다가 젓가락을 놓쳤다. 한 해 가까이 여러 병원을 옮겨 가며 찾아낸 병명은 루게릭병. 근육 운동을 조절하는 뇌세포가 파괴돼 근육이 차츰 소실되고 척수의 운동신경다발이 굳어버리는 병이다. ‘평균 3∼5년’의 여생을 받아 든 그는 그제야 학교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됐다.

“하루 종일 집에 박혀 있는 내게 이제 남는 것은 시간뿐이다. 그러니 글쓰기에 매진할 수밖에.”

발병 초기에는 날마다 온종일 동네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아내의 손을 빌려 소설 작업을 했다. 두 눈을 깜박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후에는 ‘안구 마우스’라는 기계에 의지해 글을 쓴다. 안구의 움직임과 눈 깜박임을 감지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장치다.

“소설은 힘이라고 생각했다. 진실한 영혼이 경박한 현실에 지쳐 쓰러지지 않게 받쳐주는 힘이 소설이고, 그러한 영혼을 응원하며 조용히 펄럭이는 깃발이 소설이라고 나는 믿었다.”

책의 절반은 증세가 처음 나타난 해 가을부터 최근까지의 투병기다. 후반부에는 작가가 구술해 아내가 타이핑했거나 안구 마우스로 완성한 단편소설과 에세이를 모아 실었다.

카페에 앉아 친구들과 시시한 잡담을 나누는 것, 놀이터 옆을 걷다가 아이들이 던진 공을 주워 되던져주는 것, 아내 앞에서 은근히 으스대며 거실 천장의 전구를 갈아주는 것…. 안구를 움직여 더듬더듬 한 글자씩 새겨나간 문장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사소한 시간들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배어 있다. 병상 위 몸에 갇힌 또렷한 정신이 안구를 통해 내놓은 속사정이, 책장 넘기던 손을 자주 먹먹하게 붙들어 앉힌다.

“죽음 자체는 두렵지 않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두려운 것은 죽음에 대해, 육체의 감옥에 갇혀 눈만 깜박일 수밖에 없는 이 불행에 대해, 나 자신이 분노나 공포의 감정에 사로잡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다. 나는 이 감옥에서 자유롭다. 나는 이 자유를 누리겠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당신은 모를 것이다#정태규#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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