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유작 받아들고 가슴 먹먹… 사흘간 아무것도 못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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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정미경 소설가의 유작 출간한 김병종 서울대 교수

김병종 서울대 교수가 28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고 정미경 소설가의 유작 장편소설 ‘가수는 입을 다무네’를 품에 안고 있다. 뒤에 걸린 그림은 김 교수의 작품인 ‘생명의 노래’로 손을 꼭 잡고 춤추는 남녀가 보인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김병종 서울대 교수가 28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고 정미경 소설가의 유작 장편소설 ‘가수는 입을 다무네’를 품에 안고 있다. 뒤에 걸린 그림은 김 교수의 작품인 ‘생명의 노래’로 손을 꼭 잡고 춤추는 남녀가 보인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지난주 책을 받아 들고 가슴이 먹먹해 사흘 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유명 화가인 김병종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64)는 ‘가수는 입을 다무네’(민음사·사진)를 손으로 가만가만 쓸어내리며 말했다. 간암 말기 선고를 받은 지 한 달 만인 올해 1월, 홀연히 세상을 떠난 아내 정미경 소설가(57)의 장편소설이다. 28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만난 그는 아내의 유작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서울대 캠퍼스를 손잡고 산책하는 김병종 서울대 교수(오른쪽)와 생전 정미경 소설가. ⓒ이은주
서울대 캠퍼스를 손잡고 산책하는 김병종 서울대 교수(오른쪽)와 생전 정미경 소설가. ⓒ이은주
이 책은 전설적인 밴드의 리더였지만 10여 년간 침체에 빠진 ‘율’을 대학생 이경이 촬영하는 과정을 정갈한 문장으로 풀어냈다.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선율을 붙잡으려는 예술가와 등록금, 생활비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이의 몸부림이 다르지 않음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제목은 정 작가가 좋아했던 기형도 시인의 동명의 시에서 따 왔다.

“정 작가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이 책의 제목에 집착하고, 소설 속 문장을 고치기를 거듭했어요. 가수가 입을 다문다는 건 더 이상 노래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는데, 돌이켜 보면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 같아요.”

그는 아내를 평소 ‘정 작가’라고 불렀다. 서울대 동양화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한 잡지에 실린 아내(당시 이화여대 영문과 재학)의 소설을 읽고 편지를 보낸 것을 계기로 연인이 됐다. 대학가의 문학상을 휩쓸던 고인과 대학생 때 동아일보를 비롯해 신춘문예에 두 번이나 당선된 그가 주고받은 편지는 400여 통에 이른다. 아들 둘을 낳고 키우면서도 부부는 매일 아침 두 시간씩 문학, 그림, 건축,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예술적 동지였다.

“정서적 교류가 하루아침에 끊어진 게 가장 힘들어요. 시간의 축적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요…. 3, 4년 정도 만났다 헤어진 것 같아요. 내 의식은 이화여대 앞을 서성였던 그 시절을 맴돌고 있어요.”

그는 아내에게 최초의 독자이자 마지막 비평가가 되겠다고 한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못한 데 대해 죄의식을 느낀다고 했다. 요즘 아내의 작품을 다시 꼼꼼하게 읽고 손으로 문장을 한 줄 한 줄 써 보며 문학적 자취를 되짚고 있다. 고인이 19년간 머물렀던 반지하 원룸 작업실에 쌓여 있던 처절한 고뇌의 흔적인 습작 원고 더미도 정리 중이다.

“정 작가에 대한 평전을 쓰고 있어요. 정 작가는 ‘나의 피투성이 연인’, ‘장밋빛 인생’,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등 치열하게 삶과 부딪쳐 깨지고 피 흘리면서도 삶에 대한 긍정의 물줄기를 담은 인물들처럼 살았어요.”

아내와 자신의 여행 에세이를 묶은 책도 준비하고 있다. 고인은 남녀 작가가 번갈아 가며 쓴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처럼 층위가 다른 온도의 글을 담은 여행 에세이를 함께 내자고 제안했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부터 헤어질 때까지 찍은 사진에 글을 엮은 에세이도 출간하기로 했다. 이들 책 세 권은 고인의 1주기에 맞춰 선보일 예정이다. 유고 소설은 ‘목놓아 우네’를 포함해 두 권 더 출간된다. 1주기 행사는 글, 그림, 사진, 영상 등 장르를 가로지르는 형식으로 열 계획이다.

그는 고인의 글 더미를 정리할 때면 영혼으로 교감하는 것 같다고 했다.

“누군가가 책을 읽는 한 정 작가의 문학적 삶은 계속되잖아요. 문학인은 떠나도 떠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빈방의 벽에 기대앉아 하염없이 울곤 하는 그가 조금씩 일어서고 있는 게 보이는 듯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정미경 소설가 유작#김병종 서울대 교수#가수는 입을 다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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