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구의 옛글에 비추다]公과 私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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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조선 선조 때 일이다. 임금이 경연(經筵)에서 물었다. “근래에 염치가 완전히 없어졌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가?” 장령 김성일(金誠一)이 답하였다. “대신(大臣)으로 남의 뇌물을 받은 자가 있으니, 염치가 없어진 것이 이상할 게 없습니다.” 정승 노수신(盧守愼)이 나아가 엎드려 아뢰었다. “김성일의 말이 옳습니다. 신의 친척이 북방의 변장(邊將)이 되었는데, 신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다고 하여 작은 담비 가죽을 보내왔기에 신이 받아서 어머니에게 드렸습니다.”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 제9권 ‘신도(臣道)’에 수록된 이야기입니다. 간쟁하는 것이 자신의 직무이긴 하지만 새파란 대간(臺諫)이 원로 정승을 향해 대놓고 비난하였으니 한바탕 불꽃이 튈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때 임금의 말씀. “대간은 직언을 하였고 대신은 과실을 인정하였으니, 둘 다 잘했다고 할 수 있다. 신료들이 서로 나무라고 독려하는 것을 지금처럼 해야 나랏일도 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臣僚能相責勵如是時, 國事可爲也).” 노수신 역시 김성일에게 깊이 감사하고 전혀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는군요.

지평 홍가신(洪可臣)은 이조 좌랑 조원(趙瑗)과 어릴 적부터 친구였는데, 조원이 종종 사적인 일을 추구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홍가신이 조원에게 “일이 공적인 것이면 사적인 것은 돌아보지 말아야 하는데 그대는 잘못한 일이 많으니, 내가 사적인 정 때문에 그대를 탄핵하지 않을 수는 없다(事公則不顧私. 君多所失, 我不可循情不劾)” 하고는, 논박하여 조원을 체직시켰다.

인조 때 대신(臺臣) 박계영(朴啓榮)이 일찍이 김상헌(金尙憲)의 옳지 못한 일을 탄핵하여 논죄(論罪)하였다. 후에 김상헌의 손자 김수흥(金壽興)은 호조 판서가 되고, 박계영의 아들 박신규(朴信圭)는 호조의 낭관이 되었다. 김수흥이 “사적인 의리로 보면 서로 사귈 수 없겠지만, 어찌 우리 집안의 사사로운 원수라 하여 조정에서 뽑아 쓴 사람을 폐할 수 있겠는가(於私義, 雖不相交. 豈可以吾家私讐, 廢朝家揀用之人乎)” 하고는, 벼슬에 나오라고 권하여 마침내 일을 같이 하였다.

‘공은 공, 사는 사’입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비판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이런 가치들이 변할 리는 없습니다.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조경구#조선#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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