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지현의 뉴스룸]시위에 반대하면 적폐일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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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현 사회부 기자
노지현 사회부 기자
서울 인왕산 둘레길을 걷다 보면 청와대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 발밑으로는 작은 동네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청운동, 효자동,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 사직동, 체부동, 필운동, 내자동, 내수동…. 옛 동네의 모습을 아직 간직한 곳들이다. 청와대 근처라 경호 목적으로 고층 건물이 들어설 수 없는 터라 갑작스러운 재개발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4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주민도 많다.

기자는 1995년부터 20년간 이들 동네가 있는 종로구에 살았다. 가슴 철렁했던 1968년 1·21사태가 벌어지기도 해서인지 이곳 주민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 동네는 청와대와 운명을 같이한다”곤 했다.

그런데 2008년부터 청와대와 이들 동네는 정말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돼버렸다. 그해 이명박 대통령 취임 직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확대 결정과 관련된 ‘광우병 파동’과 이어진 대규모 시위로 6월 광화문 일대는 시위대로 가득 찼다. 이 동네들에는 골목이 워낙 많아 ‘청와대로 가자’고 외치던 시위대에게 뚫리기 쉬웠다. 경찰은 청와대로 향하는 광화문과 세종로 일대의 길을 경찰버스와 바리케이드로 막았다. 대형 컨테이너를 세종로 사거리에 쌓아 시위대가 ‘명박산성(山城)’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우리 집이 저 너머에 있다”고 호소하면 주민등록증에 주소가 정확하게 적혀 있어야 경찰이 통과시켜 줄 정도였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임금피크제나 공공기관 성과연봉제 도입 같은 굵직굵직한 일들이 있을 때마다 민주노총 등 노동 관련 단체들의 시위도 늘었다. 지난해 10월 말부터는 탄핵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 매주, 조금 과장을 보태면 거의 매일 광화문광장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지하철 3호선 안국역, 경복궁역은 지하철이 정차하지 않고 지나갈 때도 있었다. 버스 노선은 시위대의 이동 경로에 따라 뒤죽박죽이 됐다. 학원에 아이들을 보냈다가 시위 때문에 교통이 마비돼 35분을 걸어서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는 부모도 있었다. 출퇴근이 불편해지고 일상생활이 힘들어졌어도 ‘촛불혁명’이라는 명분 아래 이들 동네 주민들은 불평, 불만을 입 밖에 내기가 쉽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이제 시위가 줄겠구나’ 하며 안도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오산이었다. 종로경찰서에 따르면 6월 325건, 7월 299건으로 하루 평균 10건의 크고 작은 시위가 이 동네에서 열렸다. ‘청와대 앞길을 일상에 돌려주겠다’며 개방한 뒤로 골목골목에서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며 행진한다. “이석기 한상균 양심수를 석방하라”는 정치적 시위부터 개인 민원까지 내용도 다양하다. 위축된 건지 ‘코드’에 맞추는 건지 경찰은 도로 한 개 차로를 무단 점거한 시위대를 멀찌감치 바라보고만 있는 듯하다. 법대로 집행했다가 혹시라도 ‘적폐’라고 비난받을까 봐 두려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

17일 종로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집회와 시위에 지친 종로구 주민들이 ‘이제 그만 시위를 멈춰 달라’는 내용의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다. 이후 이들은 30분간 침묵시위를 벌였다. 문 대통령은 직접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목소리는 더 크게, 더 과격하게 행동하는 것이 직접민주주의의 참모습은 결코 아닐 것이다. 직접민주주의든, 대의민주주의든 법치주의를 원칙으로 한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노지현 사회부 기자 isityou@donga.com
#시위에 반대하면 적폐일까#종로구 주민 호소문#직접민주주의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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