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신석호]클라우제비츠의 훈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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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호 국제부장
신석호 국제부장
북한 김일성이 중국 마오쩌둥(毛澤東)을 따라 나의 ‘전쟁론(On War)’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알아봤어. 전쟁에 이기려면 전쟁의 본질을 알고 처신해야 하는 법이지. 그런 점에서 1990년대 초반 ‘고난의 행군’ 경제위기로 거의 망했던 북한이 살아나 오늘날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들고 날뛰는 상황에 나(프로이센의 전쟁 철학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1780∼1831)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나를 ‘전쟁광’ 정도로 치부하며 무시한 당신들에게도 문제가 많아.

말이 나온 김에 우선 싫은 소리부터 좀 해야겠어. 1993년 북한 1차 핵위기가 시작된 이후 미국과 한국, 그리고 국제사회는 내가 200여 년 전 설파한 전쟁론의 기본을 전혀 따르지 않았어. 전쟁의 목표는 적을 패배시키는 것이야. 적의 힘의 중심부(the center of gravity)를 찾아내 내가 가진 힘을 집중해야지. 우회하거나 우물쭈물하지 말고 최대한 신속하게 공격을 퍼부어야 겨우 이길 수 있는 거야.

그런데 당신들은 어땠나. 독재국가 북한의 힘의 중심부는 김정일과 김정은 등 독재자의 정치적 의지, 그리고 월등한 후원국인 중국과의 동맹관계라는 것은 알았을 것이야. 그럼 뭐해. 정말 강력한 압박(pressure)도 화끈한 개입(engagement)도 한번 해보지 못하고 이랬다저랬다 하며 시간을 허비했어. 반면 북한은 24년 동안 핵미사일 개발과 거짓 대화를 번갈아 하며 시간을 끌었지. 처음엔 시간이 당신들 편이었지만 이젠 반대야. 북한은 생존의 위기를 넘어섰고 후원국 중국은 주요 2개국(G2)일 정도로 강해졌어.

왜 그렇게 된 것 같으냐고? 구체적인 목적(objective)을 달성할 지휘계통을 통일하라(the unity of command)는 원칙을 어겼잖아. 요즘 당신네 문재인 대통령이 ‘운전자론’을 들고나왔지만 24년을 돌아봐. 미국과 한국 정부는 대화와 공세, 주도권을 놓고 의견이 다른 기간이 더 많았어. 미국도 한국도 진보와 보수로 정권이 바뀌면 정책 자체가 180도 달라졌어. 심지어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1기 땐 공세를 했다가 2기 땐 대화를 하다가, 거의 정신분열 수준이었어.

물론 미국과 한국은 일정 기간마다 정권이 바뀌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나도 알아. 김씨 일가 독재 체제가 더 일관성 있게 목표를 향해 힘을 집중할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해. 하지만 가난한 독재국가가 생존을 위해 핵미사일을 가지면 어떤 위협이 올 것인지 간파했어야 했어. 당신들은 애초에 전략적이지 않았던 거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요즘 하루는 대화, 하루는 전쟁을 들고나오며 헷갈리는 꼴도 마찬가지야.

그렇다고 너무 불안해하거나 비관할 필요는 없어. 북한 핵미사일 저지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아주 중대한 고비가 남아 있으니까. 어떤 전쟁이나 마지막 승리의 최종단계(the last one mile)가 가장 어려운 법이야. 북한은 ICBM 재진입 기술과 정밀유도 기술, 핵탄두 소형화를 입증해야 하는 가장 어려운 관문을 앞두고 있어. 그거, 쉽지 않은 거야.

반면 당신들은 다행히 정신을 차려가고 있잖아? 대화를 강조했던 문재인 정부가 ‘미국 일본과의 최대한의 압박’을 공식 선언하고 내키지 않아 하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발사대 4기의 임시 배치도 결정했지. 박근혜 정부 때보다 일본과의 관계도 좋아졌고 미국은 김정은 정권 교란을 위해 간첩도 들여보낼 기세야. 부디 ‘성공의 역설’이란 행운이 함께하기를. 그건 당신들이 얼마나 단결하느냐에 달렸어.

신석호 국제부장 kyle@donga.com
#김일성#마오쩌둥#대륙간탄도미사일#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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