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그날, 갑자기 경부고속도로로 방향을 튼 대통령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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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의 ‘어떤 대체역사’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복거일 소설가
복거일 소설가
2017년 3월 10일 12시 21분 대통령은 청와대 본관 앞에 섰다. 헌법재판소의 선고가 나온 때부터 꼭 한 시간 뒤였다.

카메라 앞에서 대통령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이제 청와대를 떠납니다. 모자랐던 저보다 훌륭한 분이 대통령의 직책을 이어서, 국민 여러분께서 평안하게 지내시기를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러면 헌재의 결정에 승복하시는 건가요?” 고개 숙여 인사하고 몸을 돌리는 대통령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대통령은 웃음기 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는 대통령이 ‘헌법의 수호자’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헌재의 결정에 승복한다는 말씀을 명확히 하셔야 되는 것 아닌가요?” 평소에 대통령에게 호의적이 아니었던 기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면서 추궁했다. 얼굴에 적의가 번들거렸다.

“당연한 일을 굳이 얘기하면, 말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이젠 전직 대통령이지만.” 가벼운 웃음을 지으면서, 대통령은 말을 이었다. “말을 낭비해선 안 되는 직책입니다. 재판의 결정에 모두 따른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원리 아닌가요?”

잠시 침묵이 내렸다. 옅은 웃음을 띤 대통령이 맨 앞에 선 기자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통령님께서도 내내….” 당황한 기자가 두 손으로 살점이라곤 없는 대통령의 가냘픈 손을 잡았다.

“이젠 전직 대통령이라고 했잖아요?”

웃음이 터지면서, 무거운 분위기가 문득 걷혔다.

둘러선 비서진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대통령은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비서진에다 기자들과 카메라맨들이 황급히 따르느라, 잠시 소란해졌다.

“미안해요.” 대통령이 옆에서 걷는 비서실장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저희가 각하를 바로 뫼시지 못해서….”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탁했다.

“전에 작은 기업을 경영하시는 분이 그러셨어요. 하도 힘들어서 죽으려 했는데 결국 죽지 못했노라고. 자기를 바라보는 직원들 생각에, 그 사람들 생계를 책임졌는데 혼자 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유서를 썼다 찢었다고. 내가 부족해서 여러분 생계를… 실패한 정권에서 일했다는 사실이 주홍글씨가 되었으니. 아무데서도 받아주질 않을 테고. 정말 미안해요.”

비서실장이 목이 메어 대꾸를 못하고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리고 속으로 통곡했다. “이렇게 어지신 분을 우리가 제대로 뫼시지 못해서….”

정문을 나서자, 대통령은 돌아서서 그리움과 아쉬움이 어린 눈길로 청와대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비극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이 오래 머문 그 자리에, 거기 남겨진 꿈의 조각들에.

“이곳에 다시 올 일은 없겠네요.”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하고서, 대통령이 돌아섰다.

그 결연한 몸짓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서, 비서실장은 흠칫했다. 깊은 정을 결연히 끊어내고 다시는 눈길도 주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듯한 몸짓이었다.

대통령은 정문에서 가까운 마을로 향했다. 경호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가게 문을 들어선 대통령은 주인에게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당황한 주인이 두 손을 비비면서 더듬거렸다.

“주말마다 시위대가 몰려와서, 어려움을 겪으셨죠?”

“아, 아닙니다.” 주인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저희야, 뭐….”

“제가 본의 아니게 영업 방해를 했네요. 그래서 오늘 제가 물건을 좀 팔아드릴게요.”

“예,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을 한 채 주인이 기계적으로 대꾸했다.

“이제 제가 살림을 해야 하니, 필요한 것들이 많을 텐데.” 대통령이 가게를 둘러보았다.


“살림을 해본 적이 없어서, 무엇을 사야 할지 모르겠어요. 좀 도와주세요.”

“아, 예. 알겠습니다, 대통령님.” 주인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비서실장을 흘긋 쳐다보았다. 당황스럽기는 비서실장이 더해서, 그저 뒷머리를 긁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통령은 뒤쪽 라면 봉지들이 쌓인 곳으로 다가가서, 상표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다가온 주인과 비서실장에게 말했다. “저는 평생 남이 해 준 밥만 먹었어요. 그래서 할 수 있는 요리라곤 라면 끓이는 거뿐이에요.”

대통령의 표정과 말씨가 워낙 밝아서, 두 사람은 웃음을 지으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취재 차량에서 몸을 내밀고 방송 기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보도했다. “삼성동 자택으로 돌아오리라는 예상과 달리, 지금 전직 대통령이 탄 차는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뜻밖의 사태에 모두 당황한 모습입니다. 구미로 가는 것 같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부친의 고향이자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그곳에서 재기를 시도할 것이란 얘기도 나옵니다.”

대통령이 탄 차는 그러나 구미까지 가지 않았다. 옥천 요금소를 나온 차는 허름한 여관 앞에 멈췄다. 차에서 내려 둘레를 살피는 대통령을 기자들이 에워쌌다.

“여기서 지내실 겁니까?” 뜻밖의 일이라, 평소 기자들의 눈길과 말씨에 어렸던 적대감은 없었다.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을 마련할 때까진 여기서….”

“왜 여기로 오셨나요?”

“갈 곳이 없잖아요? 서울에 머물면 과거와 단절이 잘 안 되고. 대구나 구미로 내려가면 별 얘기가 다 나올 테고. 그래서 어머님 고향인 이곳에서….” 대통령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곳은 외할머니께서 사셨던 곳이라서, 더욱 정이 가요. 아버님께서 거사하시던 날도 외할머니께서 저희 삼남매를 재우셨어요. 제가 온 것을 아시면 반가워하실 거예요.”

“불편하실 텐데요.”

“불편한 것도 제겐 새 경험이거든요. 열심히 배우면서 사는 거죠.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하잖아요?”

“요새는 인생은 칠십부터라고 합니다.” 한 기자가 용기를 내어 말을 받자, 웃음판이 되었다.

“이 근처에 빈집이 있나 알아보라고 했어요. 허름한 집이라도 고쳐서….” 대통령 얼굴에 기대가 어렸다. “제가 망치 들고 일하는 거, 상상이 되세요?”

역사는 문명의 지형을 따라 흐른다. 그러나 그것은 때로 우연한 사건이나 사소한 결정으로 방향을 튼다. 그렇게 미묘한 길목을 과학소설 작가들은 ‘역사의 분기점’이라 부른다. 분기점에서 나올 수도 있었지만 끝내 나오지 못한 역사는 대체역사(alternate history)라 불린다.

2017년 3월 10일은 긴 하루였다. 그날 여러 대체역사들이 실재역사와 경쟁했다. 위의 일화는 나올 수도 있었지만 끝내 나오지 못한 대체역사들 가운데 하나다. 그 역사 속에선 탄핵된 대통령이 도덕적 권위를 많이 되찾았다. 덕분에 보수 진영은 깊은 성찰을 거쳐 한데 뭉쳤고 새로운 전망과 전략을 마련해서 대통령 선거에 나설 수 있었다.

역사가들은 말한다. 대체역사는 아무리 그럴 듯해도 나올 수 없었던 까닭을 품었다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도 대체역사를 떠올리지 않고서, 우리가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낼 길이 있을까?
  
복거일 소설가
#복거일#어떤 대체역사#박근혜#경부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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