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 뽑아 물류 전문가로”… CJ대한통운의 스펙 파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7일 03시 00분


코멘트

기업들 ‘열린 채용’ 어디까지 왔나

CJ대한통운의 고졸 인재 육성 프로그램인 J트랙을 통해 입사한 이규형 씨(왼쪽)와 권진아 씨가 서울 금천구 CJ대한통운 
택배터미널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권 씨는 J트랙 1기, 이 씨는 지난달 고교를 졸업한 3기다. CJ대한통운은 J트랙을 앞으로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CJ대한통운의 고졸 인재 육성 프로그램인 J트랙을 통해 입사한 이규형 씨(왼쪽)와 권진아 씨가 서울 금천구 CJ대한통운 택배터미널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권 씨는 J트랙 1기, 이 씨는 지난달 고교를 졸업한 3기다. CJ대한통운은 J트랙을 앞으로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국내 1위 물류회사인 CJ대한통운이 고졸 인재 채용 프로그램인 ‘J(Junior)트랙’을 시작한 건 2013년. 당시 고교 1학년생을 선발했고 2년 뒤인 2015년 첫 입사자가 나왔다. 올해까지 기수마다 20∼30명씩 총 세 기수에 걸쳐 고졸 인재들이 들어왔다.

사실 고졸 채용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늘어난 건 2011년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직접 나서 고졸 채용을 독려했다. 고졸 채용은 학력 등 스펙을 타파한 인재 선발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대한통운의 J트랙은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로 바뀐 이후 시행됐다. 고졸자 채용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해진 시점이다.

○ 명확한 인재 육성 목표가 핵심

이런 움직임은 고졸자 채용을 강조한 이명박 정부의 압력에 고졸 채용을 늘렸다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줄인 은행들의 움직임과 대비된다. 국내 주요 은행 6곳(신한·KB국민·KEB하나·우리·NH농협·IBK기업)의 고졸 채용 인원 합산 규모는 2012년 620명이었지만, 2014년 415명으로 줄었다. 지난해에는 272명으로 더 줄었다. 은행들은 “자체 계획에 따른 것일 뿐 정부 방침과는 상관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은행 관계자 A 씨는 “어차피 뽑을 인원이 정해진 상황에서 정부가 압박하자 급하게 고졸자 채용 비중을 늘렸다가 정부가 바뀌자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렸다”고 전했다.

반면 대한통운은 고졸 인재 선발을 앞으로도 확대할 계획이다. 은행들과의 차이는 ‘고졸자 채용을 왜 했는지’에 있다. 박근태 CJ대한통운 사장은 “잠재력 있는 인재를 찾아 맞춤형 교육을 시키고 실무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이 회사가 원하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길이라고 봤다”고 말했다. 즉, 될성부른 유망주를 미리 확보해 회사가 직접 키우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

외부 압력이 아니라 최적의 인재를 찾겠다는 기업의 구체적인 목표가 있을 때 스펙을 초월한 채용이 정착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업과 구직자 모두 ‘윈-윈’하는 모델인 셈이다.

지난달 고교를 졸업하고 J트랙 3기로 입사한 이규형 씨(19)는 “고졸 채용 제도를 통해 특혜를 보려고 한 게 아니라, 물류 전문가를 키운다는 회사의 계획을 보고 미래에 대해 고민한 끝에 이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인재 선발에 있어 명확한 목표를 세운 기업들이 스펙에 연연하지 않는 채용을 실시할수록 구직자들도 진정한 역량 계발에 힘을 쏟게 된다. 박철우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스펙보다 능력 중심 채용이 확산되면 기업은 전문성을 가진 인재를 뽑기 때문에 재교육 비용을 아끼고 구직자 역시 과다한 취업 비용을 줄이게 돼 사회적 낭비가 줄어든다”고 말했다.

○ 늘어나는 스펙 초월 채용

세븐일레븐이 지난해 하반기 실시한 ‘스펙태클 오디션’에서 지원자들이 직접 개발한 도시락 메뉴를 만들고 있다. 롯데그룹 제공
세븐일레븐이 지난해 하반기 실시한 ‘스펙태클 오디션’에서 지원자들이 직접 개발한 도시락 메뉴를 만들고 있다. 롯데그룹 제공

스펙을 초월해 인재를 뽑는 기업들은 최근 몇 년 새 빠르게 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15년 하반기 채용부터 과거에 획일적으로 시행했던 직무적성검사 이외에 실제 직무능력을 보는 제도를 도입했다. 연구개발, 기술 직군의 경우 전공 성적이 좋으면 가산점을 주고 소프트웨어 직군은 직무적성검사 대신 ‘소프트웨어 역량 테스트’를 통해 프로그래밍 개발능력이 우수한 지원자를 선발한다.

SK그룹은 2015년 상반기 공채부터 스펙을 대폭 줄였다. △외국어 성적 △정보기술(IT) 활용능력 △해외연수 경험 △수상 경력 △관련 논문 등을 입사지원서 항목에서 없앴다. 이러한 스펙이 회사에서 요구하는 직무 역량과 크게 상관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는 지난해부터는 학력 제한을 없앴다. 롯데그룹은 2011년부터 공채 지원의 학력 기준을 기존 대졸에서 고졸로 바꿨다.

LG전자는 2014년부터 입사지원서에 수상 경력, 어학연수, 인턴, 봉사활동 등 직무와 무관한 스펙 입력란을 삭제했다. 그 대신 자기소개서의 질문이 직무 역량을 묻는 식으로 구체화됐다. 과거에는 ‘자신이 가진 열정’ ‘본인이 이룬 가장 큰 성취’ ‘본인의 성격’ 등 다소 추상적인 여러 질문을 던졌다. 지금 LG전자 자소서는 본인이 지원한 직무와 관련해 지원 동기와 역량, 그리고 향후 계획만 쓰도록 돼 있다.

○ 창의적 채용 제도 확산

기업들은 채용에서 스펙 비중을 줄이는 동시에 창의적인 인재 선발 방식을 개발하고 있다. 롯데그룹은 2015년 상반기부터 어떤 스펙도 보지 않고 계열사별 오디션 방식의 실무 평가로 신입사원을 뽑는 ‘스펙태클’ 제도를 도입했다. 지난해 하반기 세븐일레븐은 푸드 상품기획자를 뽑기 위해 지원자들에게 새로운 도시락 메뉴를 만들어보게 하는 오디션을 진행했다. 롯데월드는 테마파크 견학 후 공연과 놀이기구의 개선점을 파악해 발표하는 식으로 직원을 선발했다.

우창균 씨(28)는 지난해 상반기에 스펙태클 제도를 통해 롯데백화점에 입사했다. 우 씨는 대학 입학 후 패션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역량을 발견했다. 하지만 공학을 전공한 탓에 기존 공채에서는 역량을 발휘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가 스펙태클에서 받아든 주제는 ‘백화점 옴니채널 활성화를 위한 방안’이었다. 그는 직접 백화점 고객 100명가량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고 발표에 나섰다. 그는 “심사위원들은 정말로 내 과거 스펙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고 발표 내용과 발표를 위해 내가 쏟은 노력에만 집중했다”고 말했다.

현대차는 2013년부터 회사가 직접 인재를 찾아나서는 ‘The H’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현대차 채용팀은 수시로 대학 동아리나 기술 경진대회 등을 찾아다니며 입사 후보를 고른다. 여기에서 선별한 이들을 두 달여 동안 1주일에 2, 3회씩 팀 프로젝트, 토론 등에 참여시키며 평가한다. 이런 방식을 도입한 것은 배려심과 소통능력 등 직원의 인성이 직무능력과 큰 연관성을 지닌다는 회사의 판단 때문이다. 장기간을 지켜보며 인성을 심층적으로 살피는 게 이 제도의 핵심이다.

구직자들의 만족도도 높다. 2015년 빅데이터 분석 동아리에서 연 콘퍼런스에서 눈에 띄어 최종 입사하게 된 남윤이 씨(26·여)는 “전통적인 공채 방식은 1년에 2회로 제한돼 있고 자기가 가진 역량을 제대로 보여주기 힘들어 구직자들의 불만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장기간에 걸친 심층 평가는 역량을 발휘하거나 스스로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도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주요 기업 채용 담당자들은 “스펙에 연연하지 않고 회사가 원하는 방식으로 선발한 사원들이 업무 성과 면에서도 뛰어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한우신 hanwshin@donga.com·정임수·신동진 기자

#스펙#cj대한통운#채용#고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