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잔향]장미의 이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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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책의 저자이기 때문이야. 그의 책 내용은 하나같이 기독교가 오랜 세월 쌓아올린 지식을 위배하지. 그의 책이 널리 읽혀 공공연한 해석의 대상이 되는 날, 인간은 하느님께서 그어 놓으신 마지막 경계를 넘고 말 거다.”

움베르토 에코(1932∼2016)의 소설 ‘장미의 이름’(1980년)에서 연쇄살인을 저지른 수도사 호르헤가 늘어놓은 변명이다. 그가 동료 수도사들을 독살하며 씌운 죄목은 “악마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을 ‘지혜’라 부른 책을 감히 읽으려 한 것”이었다.

며칠 전 에코의 유작 번역본 소식을 취재하며 ‘장미의 이름’을 잠깐 다시 꺼냈다. 처음 읽은 건 1998년 가을 국군수도병원에 입원 중일 때였다. 어머니께 청해 면회 때 받아 종이학 접기 외에 소일거리가 생긴 걸 안도하며 종일 붙들고 읽었다.

하지만 며칠 뒤 책을 본 병원 정훈장교가 어떤 내용인지 확인하겠다고 가져가더니 돌려주지 않았다. “입원실 생활지침에 어긋난다”는 거였다. 지금 그곳의 ‘지침’은 어떨지. 알 길 없으며 알고 싶지도 않다. 퇴원하며 돌려받은 뒤에는 책장 넘기는 속도가 한참 떨어졌다.

‘서고 지키기’를 ‘정보의 제한’으로 규정해 수행한 호르헤의 망령은 곳곳에서 쉼 없이 암약한다. 사람들이 무지하다고 믿으며 한없이 더 무지해지길 원하는 무도한 권력은, 그 망령의 집합체다.

조기대선 실시가 예상되면서 사회정치 서적에 대한 독자의 관심이 커졌다고 한다. 특히 법 관련 도서 판매가 지난 대선 때보다 2배 이상 늘었다니 반가운 마음이다. 인간이 공동체를 구성하기 시작한 뒤 이른바 권위라 불리는 주체가 한 번이라도 부패하지 않은 적 있을까. 권위는 썩기 마련이며 고단한 저항은 인간의 숙명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오연경
#움베르토 에코#장미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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