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범의 새창(窓)열기]남친과 단 둘이 있는데 창문 밖 이상한 낌새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14일 11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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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범 기자
권기범 기자
법원에는 매일 사건이 접수되고, 판사는 선고를 내린다. 판결문 중에는 신문이나 TV에 나오진 않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헛웃음을 짓게 하거나, 어처구니가 없어 인상이 찌푸려지는 이야기가 꽤 있다.

최근 내려진 두 개의 판결에 담긴 이야기는 후자의 경우다. 첫 번째는 올해 스물세 살이 된 여성 A 씨의 이야기다. A 씨는 2015년 12월경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B 씨를 만났다. 올해 서른 살이라는 B 씨와 A 씨는 사귀게 됐다. 하지만 만남이 순탄치 않았던 모양이다. A 씨는 이듬해 4월경 전화로 B 씨에게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 순간 B 씨의 거친 대답이 들려왔다.

“X같은 X.” “XX 같은 X.” 섬뜩한 협박도 이어졌다.

“네가 벗는 모습을 몰래 찍은 사진을 갖고 있는데 인터넷에 퍼뜨릴 거다.”

그 후 이별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A 씨에 대한 B 씨의 집착은 계속됐다. 그해 7월, 두 사람은 서울의 모처에서 만났다. 승용차 안에서 A 씨는 B 씨에게 또 다시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는 주먹이 날아왔다. “나랑 헤어지려면 니가 맞아야 돼. 그래야 헤어질 수 있어.” 협박, 폭행 혐의로 기소된 B 씨는 벌금 300만 원을 선고받았다.

또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성 C 씨와 그의 남자친구 D 씨다. 지난해 6월말 두 사람은 서울 송파구의 한 건물 1층에 있는 방에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이 옷을 벗고 잠자리를 하려는 찰나 창문 밖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남자친구가 밖으로 나갔더니 어느 50대 남성이 있었다. 두 사람을 몰래 훔쳐보려다 들킨 그는 결국 벌금 50만 원을 선고받았다. 만일 이 여성이 혼자 있었다면, 50대 남성이 있는 걸 알았어도 제지할 수 있었을까.

요즘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적어도 자기만의 섬뜩한 경험담을 한두 개 쯤은 가지고 있는 듯하다. “집에 혼자 있을 때면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다 사라진다”, “창문을 열어 놓고 샤워하다 창문 바깥에 있던 ‘눈빛’과 마주쳤다”, “어두운 밤길을 걷는데 뒤에서 발걸음이 들려 뛰어 도망쳤다”는 경험담은 식상할 정도다.

판결문에서는 엿보기 어려운 섬뜩함은 현장에서 느껴진다. 지난달 서울 강남구의 한 빌라 주차장에서 이모 씨(35·여)가 전 남자친구 강모 씨(33)에게 폭행당해 숨진 사건이 그랬다. 현장에서 만난 목격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집안에 있었는데 어디선가 ‘퍽퍽’하는 소리와 ‘아아악’하는 비명 소리가 함께 들려왔어요. 살펴보니 반바지 차림의 남자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는 게 보였고. 창문 너머로 누군가 거칠게 내뱉는 숨소리가 들렸죠. 잘 살펴보니 웬 여성이 축 늘어진 채로 엎드려 있었습니다….”

머리와 상체 인근에 피가 너무 많이 흘러, 목격자는 처음에 이 씨가 벽돌 같은 둔기에 맞아 쓰러진 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강 씨가 이 씨의 머리를 발로 밟아댄 것이었다. 이 씨는 두개골 골절 등으로 사경을 헤매다 결국 숨졌다. 강 씨는 살인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해 데이트 폭력 집중 단속·수사로 8000여 명이 입건됐다고 한다. 신고되지 않는 각종 위협까지 친다면 여성들은 더 많은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위협에 저항하려는 이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지속적으로 여성 대상 범죄를 비판한다. 그러면 이내 이들에게 ‘전체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한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쏟아진다. 물론 이유 없이 특정 성별을 비난하고 비하한다면 문제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렇게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트위터 같은 SNS를 중심으로 여성 대상 범죄를 비판하는 강경한 목소리가 계속 나오는 건, 어쩌면 그들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낄 만한 공간이 오프라인(off-line)에 없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라고. “어두운 길로 퇴근할 때마다 심장이 벌렁댄다”는 여성과 더 공감하는 사회가 되길.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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