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내라는 최인호 선생님의 뜻 이뤘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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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만에 두 번째 시집 ‘무명시인’ 낸 함명춘씨

17년 만에 묶인 함명춘 시인의 시들은 소박하고 겸손하다. 그는 “앞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17년 만에 묶인 함명춘 시인의 시들은 소박하고 겸손하다. 그는 “앞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작가 최인호가 말했다. “명춘아, 너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뭔 줄 아니?” 내가 말했다. “음, 사랑이요 아니 믿음이요.” 작가 최인호가 말했다. “아니다 죽는 거다.”’(‘시인의 말’에서)

항암 치료로 손톱 빠진 자리에 골무를 끼고 구역질을 참느라고 얼음조각을 씹어가면서 글을 쓰던 고(故) 최인호 선생의 모습을 함명춘 시인(49)은 가까이서 지켜봤다. 최인호 소설을 여러 권 펴낸 여백출판사 편집자였던 함 시인의 자리는 최 선생 바로 옆방이었다. 가까이 온 죽음과 싸우면서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선생을 지켜보면서 그는 글이란 게 머리로 쓰는 아니라 몸으로 쓰는 거라는 걸 알게 됐다. 1998년 첫 시집 ‘빛을 찾아선 나뭇가지’를 내고 문학적 자폐 상태에 빠졌던 함 시인이었다.

19일 만난 함 시인은 “그 모습이 시를 다시 쓰게끔 채찍질을 했다”고 돌아봤다. 17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시집 ‘무명시인’(문학동네)을 들고서였다. ‘가진 것이라곤 푸른 노트와 몇 자루의 연필밖에 없었던/난 그가 연필을 내려놓은 것을 본 적이 없다 (…) 그가 떠난 집 마당, 한 그루 나무만 서 있을 뿐/도무지 읽을 수 없는 몇 줄의 시처럼 세월이 흘러갔다, 흘러왔다.’(‘무명시인’에서)

제목은 ‘시인’으로 붙였지만 ‘연필을 내려놓지 않았던 그’의 모습은 소설가 최인호 선생을 떠올리게 한다. 함 시인은 “세상 모든 글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에둘러 말했다.

함명춘 시인(오른쪽)은 암 투병 중이던 최인호 선생과 여행을 다니곤 했다. 전남 순천의 송광사 불일암에서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있다. 백종하 씨 제공
함명춘 시인(오른쪽)은 암 투병 중이던 최인호 선생과 여행을 다니곤 했다. 전남 순천의 송광사 불일암에서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있다. 백종하 씨 제공
“이 시집은 최 선생님 아니면 못 나왔을 겁니다.” 정신적 자극을 주어서만 아니었다. 오랫동안 시를 놓았던 함 시인에게 최 선생은 시를 쓰라고, 시집을 내라고 독려했다. “싹수가 있는데 왜 안 쓰느냐”면서 선생은 책상에 함 시인을 앉혀 놓고, 시를 쓸 때까지 나오지 말라고 방에 가둬 놓기도 했다. 함 시인의 손을 붙들고 문학동네 출판사로 찾아가선 “명춘이 시 좀 (잡지에) 실어 줘라. 내가 아픈 몸 이끌고 이렇게 왔는데…”라며 떼쓰듯 청했다. 그만큼 애틋했다.

오랜만의 시들은 일상적인 언어로, 어렵지 않게 쓰였다. 난해한 시 세계를 보였던 첫 시집과는 크게 달라졌다. 가령 새우나 물고기를 주인공으로 삼았지만 실은 조직과 제도에 묶인 인간의 모습을 그린 시편들이 그렇다. ‘어느 날 어부들이 풀어놓은 그물에 잡혔는데 덩치가 커서 바로 곡마단에 자기를 팔아넘겼다고 했다 눈을 떠보니 몸엔 흰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가 매어져 있었고 단원이란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눕히곤 다리로 공을 굴리는 일을 시켰다는 것이다(…).’(‘새우전(傳)’)

‘그는 수년 동안 우물가인 듯 정수기 옆자리에서 일을 했다/하루 수십 번씩 물을 마셨고 회전의자에 앉아 한 번은/꼭 천장을 향해 두 서너 바퀴 회전을 했다.’(‘물고기’)

이런 변화에 대해 함 시인은 “일방적인 전달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주는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밝혔다. “언어에 대한 탐구에 몰입했던 예전과 달리 독자와 소통하는 시를 써 나가고 싶다. 더 많은 독자와 공감하고자 했던 최 선생의 글쓰기를 지켜보면서 깨달은 것이기도 하다”고 그는 덧붙였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최인호#함명춘#무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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