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 기자의 談담]“아프리카 자립 이끌 마을 지도자, 이 닭들로 키울 겁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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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농군학교 창설한 故 김용기 선생의 손자 김장생 연세대 교수

《 강원 원주의 산골에서 태어난 그는 집안의 엄격한 정신교육이 지긋지긋했다. 매끼 밥을 먹을 때엔 구호를 외쳐야 했다. ‘먹기 위하여 먹지 말고 일하기 위하여 먹자,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자, 음식 한 끼에 반드시 네 시간씩 일하고 먹자.’ 새마을운동의 모태가 된 가나안농군학교 창설자 일가(一家) 김용기 선생(1909∼1988)의 손자이자, 원주 가나안농군학교 김범일 교장(80)의 차남인 김장생 연세대 원주캠퍼스 교양학부 교수(41). 2일 그를 만나러 원주 가나안농군학교에 다녀왔다. 2008년 이곳에 가나안 세계지도자 교육원을 세운 그는 “빈국(貧國)에 대한 맹목적 원조는 자립을 막는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일군 가나안농군학교 모델을 아프리카에 심겠다”고 말했다.》

김장생 연세대 원주캠퍼스 교양학부 교수가 2일 강원 원주 가나안농군학교 내 양계장에서 건강하게 키운 닭을 들어보고 있다. 그는 다음 달 초부터 ‘정직한 계란’을 팔아 아프리카 지도자를 기르는 데 쓰겠다고 했다. 원주=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김장생 연세대 원주캠퍼스 교양학부 교수가 2일 강원 원주 가나안농군학교 내 양계장에서 건강하게 키운 닭을 들어보고 있다. 그는 다음 달 초부터 ‘정직한 계란’을 팔아 아프리카 지도자를 기르는 데 쓰겠다고 했다. 원주=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원조 중독에 빠진 아프리카

―태어난 집으로 돌아왔네요.

“어려서는 남들도 아버지처럼 새벽에 한 시간씩 산길을 뛰고 낮에 고구마 캐면서 사는 줄 알았어요. 전 중학교 때부터 외지에서 살면서 다시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결국 돌아왔네요.”

그는 서울 감리교신학대를 나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성 어거스틴의 고통에 대하여’란 논문으로 박사학위(종교철학)를 받고 2006년 귀국할 때만 해도 가나안농군학교에 뜻이 없었다. 성장기에 받은 강도 높은 교육에 질려버린 것이다. 그런데 2007년 아버지의 부탁으로 이 학교 국제 콘퍼런스에서 통역을 하다가 우간다에 가본 것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눈앞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마실 물을 뜨러 꼬마들은 노란 물통을 들고 6시간을 걸었다.

―그때는 한 번만 통역으로 일하고 끝내자는 생각이었나 보군요.

“공부를 계속할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아프리카에 가보니 그동안 제 삶의 궤적들이 퍼즐을 맞추는 것 같았어요. 집안 배경, 고통에 대한 공부…. 전 세계 빈곤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비전이 생겨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프리카를 46번 다녀왔어요.”

―아프리카에 가선 뭘 했나요.

“신혼 초기 아내를 설득해 혼자 우간다에 가서 1년 가까이 살다 왔어요. 우간다 정부로부터 ‘선진국 원조공여 평가’ 프로젝트를 맡아 일하면서 깨달았어요. 돈을 주는 사람들이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을 너무나 모른다는 걸요. 그래서 시골로 갔어요. 풍토병에 걸려 누워 있을 때가 많았지만 마을 사람들이 물은 어디에서 뜨는지, 친족 관계는 어떤지 알게 됐어요. 그들은 1달러짜리 말라리아 약을 살 돈이 없어 무당을 찾아가요. 물론 대부분 못 고치고 죽죠. 그때 제 방향이 분명해졌어요.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소득을 늘려야 하고, 그러려면 지도자를 길러내 그들의 ‘원조 중독’을 끊어야겠더라고요.”

―원조 중독이라고요.

“갈 때마다 아프리카가 새롭게 보였어요. 처음엔 국가, 다음엔 부족, 그리고 씨족이 눈에 들어왔어요. 아프리카 사람들은 국가(國歌)는 몰라도 씨족 노래는 알아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씨족이 구성하거든요. 그런데 오랫동안 가난했던 아프리카는 원조를 안 받아본 곳이 거의 없어요. 마사이족도 외국인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당신은 뭘 줄 수 있는가’ 물어요. 그런데 선진국이 아프리카에 모기장을 계속 갖다 주니까 현지 모기장 사업자는 망해요. 그게 원조의 역설이에요. 가서 같이 살면서 마을에서 한 사람이라도 변화시켜야 했어요. 바로 그게 할아버지, 아버지가 해온 가나안농군학교 교육이더라고요.”

가나안농군학교는 1954년 김 교수의 할아버지인 김용기 선생이 구국·농민운동을 목표로 당시 경기 광주군 풍산리의 3000여 m² 땅을 개간해 가나안농장을 세운 데에서 출발해 1962년 설립됐다. 김용기 선생은 1966년 아시아의 노벨상인 막사이사이상, 1973년 제1회 인촌문화상을 받았다.
해외 12곳에 가나안농군학교 설립
김 교수의 아버지 김범일 원주 가나안농군학교(1973년 개교) 교장도 이날 인터뷰에 동석했다. 김 교장은 오래된 트럼펫을 꺼내 연주해 주었다. 농민들을 오전 5시에 깨워 근로 봉사 희생의 지도자로 길러냈던 그 트럼펫이었다. 경기 양평 가나안농군학교와 원주 가나안농군학교에서 지금까지 기업체 임직원, 학생 등 72만 명이 정신교육을 받았다. 방글라데시 필리핀 등 해외에 12곳의 가나안농군학교가 세워져 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 변화가 있습니까.


“가나안농군학교에서 정신·영농교육을 받은 아프리카인들이 요즘 이런 말을 듣는다고 합니다. ‘너 한국 다녀오더니 미친 것 같아.’ 100명 중 한두 명은 아프리카에 돌아가 여기에서 배운 걸 똑같이 합니다. 일례로 우간다는 길버트 부케냐 전 부통령부터 농민까지 180명이 배우고 갔어요. 이 나라 카치리 마을에서 온 한 청년은 2008년 가나안농군학교에서 배운 뒤 고향으로 돌아가 마을 사람들과 오전 5시에 일어나 뛰고, 양계협동조합과 마을은행을 만들었어요. 한 사람이 활력을 얻어 변하니까 지역사회 전체가 변하더라고요.”

가나안농군학교 본관 맞은편, 가나안 세계지도자 교육원 2층의 외국인 교육생을 위한 카페에 김 교수와 마주 앉았다. 교장실과 달리 현대적 느낌이 났다.

“가건물이던 직원 숙소를 지난해 새로 지으면서 아버지와 갈등이 많았어요. 아버지는 이곳 직원들은 순교자처럼 살아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저는 좋은 일 하는 사람들은 왜 예전보다 좀 더 편한 데서 살면 안 되느냐고 했죠. 이 카페도 아버지는 못마땅해했어요.”

아버지와 아들은 그래도 동병상련이다. 김 교장은 아버지의 혹독한 정신교육에 지쳐 17세 때 가출한 적이 있다. 김 교수도 원주 가나안농군학교에서 태어나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는 생활이 힘겨웠다. 그런데 이 철저한 생활화 프로그램이 둘의 개척자 인생을 이끌게 됐다.

―아프리카 원조에 대해 할 말이 많다고요.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선진국이 아프리카에 투입한 돈이 6000조 원입니다. 그런데 아프리카는 계속 가난해요. 한국 정부는 수출입은행 대외경제협력기금(EDCF)과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의 각종 공사를 통해 돕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 정부들이 취약해요. 한국도 원조의 역사가 짧다보니 이 정부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하고요. 국가기관 사람들이 자주 바뀌니까 아프리카의 씨족 단위 현상에 대한 이해도 힘들어요. 빨리 실적을 내야 하니까 눈에 보이는 변화를 만드는 데에만 치중하죠. 또 요즘 중국이 아프리카에 ‘돈 폭탄’을 떨어뜨리니까 아프리카 국가들이 다른 나라들에 ‘이것밖에 안 주느냐’고 큰소리를 치기도 해요.”

―비정부기구(NGO)들도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습니까.

“민간 차원의 원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보이게 해야 NGO도 할 일이 많아지니까요. 그러다 보니 원조기구가 빈곤과 싸우는 주인공이 돼 현지인들을 소외시키고 손만 벌리게 한 측면도 있어요. 또 기부자들은 자신의 돈이 곧바로 굶어 죽는 아이들이 먹을 빵으로 직결되길 원합니다. 아프리카 수혜자들이 스스로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고 자꾸 원조에 기대는 원조의 악순환이 거듭되는 겁니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얘기군요.

“아프리카가 가난한 이유는 물고기 잡는 법을 몰라서가 아니에요. 이미 방법을 아는데, 거센 풍랑과 싸우며 바다로 나갈 의지가 없어요. 땀 흘려 농사짓는 것보다 서방 언론에 슬픈 표정을 지으면 훨씬 손쉽게 돈을 만질 수 있으니까요. 가나안농군학교가 하는 일은 어부들을 바다로 나가게 해서 물고기를 잡게 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바다로 뛰어들어야 하죠.”


2일 김장생 교수가 할아버지 사진이 벽에 걸려 있는 가나안농군학교 교장실에서 아버지의 트럼펫 연주를 듣고 있다(왼쪽 사진). 김 교수는 아프리카에서 시범농장을 만들기도 했다. 김장생 교수 제공
2일 김장생 교수가 할아버지 사진이 벽에 걸려 있는 가나안농군학교 교장실에서 아버지의 트럼펫 연주를 듣고 있다(왼쪽 사진). 김 교수는 아프리카에서 시범농장을 만들기도 했다. 김장생 교수 제공
2000마리로 늘려 年60명 교육

김 교수는 가나안농군학교 양계장으로 나를 안내했다. 닭 800마리가 햇볕이 내리쬐는 농장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김 교수는 국내 양계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항생제를 먹이지 않고 건강한 닭을 키우기 때문에 ‘정직한 계란’이라고 이름 지었다. 아프리카 지원 기금을 마련하고 양계를 자립 재원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이 달걀은 다음 달 초부터 판매된다.

―왜 양계사업인가요.

“제 목표는 닭 2000마리를 키우는 것이고, 잘하면 하루 1500개의 달걀이 나올 수 있습니다. 1년에 아프리카 지도자 60명을 키울 수 있는 수익이 생겨요. 후원에만 의존해서는 50년 후를 준비할 수 없습니다. 소비자들이 건강한 달걀을 먹는다는 마음으로 이 달걀을 사주면 좋겠네요. 수익금 사용처는 투명하게 홈페이지에 공개할 예정입니다.”

―가나안농군학교가 시대와 맞지 않는 점은 없나요.

“이제 한국의 굶주림 문제는 해결됐으니 국가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데, 개개인이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화하지를 못했어요. 페이스북으로 소통하는 글로벌 젊은 세대를 위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어요.”

산업구조가 고도화하면서 국내에서는 가나안농군학교의 억척스러움을 적용할 곳이 줄어드는 것 같다. 그래서 이 학교 창설자의 3대손인 김장생 교수는 가나안의 신념을 60년 전의 우리와 비슷한 빈곤국들에 심으려 한다. “지금 당장 아프리카를 변화시키기는 어렵겠죠. 하지만 씨를 뿌려야 합니다. 10년, 20년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보고 일합니다.”―원주에서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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