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디팩트] 사후피임약 한번이 꾸준한 경구피임약보다 건강에 무리

  • 입력 2015년 10월 5일 16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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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구피임약의 억울한 ‘누명’, 오히려 자궁건강에 도움주기도
사후피임약, 호르몬 폭탄으로 경구피임약보다 충격 커


“그거, 왜 먹어? 몸에 안 좋잖아.”
스무알 남짓 담긴 조그만 알약이 담긴 판에서 이를 하나 꺼내 먹는 여대생에게 친구가 정색을 하고 ‘절대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다름 아닌 경구피임약이다. 여대생은 “왜?”라고 반문하며 자신은 이를 꽤 오래 복용해왔다고 말한다. 돌아온 답변은 “그냥, 인터넷에서 봤는데 무조건 안 좋댔어”라며 “여차하면 사후피임약 한알을 먹는 게 낫다”고 말했다.

사랑하는 사이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축복이지만 원치 않는 임신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혼 여성은 연인과 성관계를 갖는 동시에 ‘임신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첫경험을 겪은 여성은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제대로 된 피임을 하지 않는 상황이 여성의 괴로움을 부추기는 요소다. 성관계시 콘돔을 착용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콘돔 사용률 꼴찌였다. 바이엘헬스케어가 2012년 국내 성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1%가 질외사정하거나 피임하지 않았다.

관계 후 다음 생리가 시작될 때까지 지옥 같은 며칠간 여성의 마음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상대방은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어찌보면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이 최소 14일 정도 이어진다. 임신 테스트기는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마지막 관계 후 14일 뒤부터 쓸 수 있어서다. 매일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최악의 경우를 상상한다. 괴로운 마음을 달래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스스로 몸을 지켜야 한다.

여성이 주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피임법 중 가장 간편한 게 ‘경구 피임약 복용’이다. 경구피임약은 정상적인 여성이 임신을 피하게 해주는 합성여성호르몬제로 제품에 따라 프로게스테론 역할을 하는 레보노르게스트렐(Levonorgestrel), 게스토덴(Gestoden), 데소게스트렐(Desogestrel) 등 성분·함량이 조금씩 달리 들어 있다.기본원리는 임신 중 배란·임신이 중지되는 같은 원리를 이용한다. 이는 피임뿐만 아니라 생리통 완화에도 효과를 발휘하며 불규칙한 생리주기를 규칙적으로 바꾸는 데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국내서 피임약에 대한 인식은 아직 부정적이다. 과거보다 수요가 높아지고 있지만 국내 피임약 복용률은 약 2.5%로 피임실천율이 높은 서구의 20분의 1 수준에 그친다. 인위적인 호르몬제를 매일 투여하는데 1차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부작용이 있을 것으로 확신하며, ‘문란한 여성들이 복용하는 것’이라는 은연 중의 생각은 끝내 이를 기피하게 만든다.

여성 중 ‘호르몬을 복용하면 불임이 된다’는 속설을 믿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건강한 여성이라면 먹는 피임약은 다른 피임법처럼 중단하면 바로 임신능력이 회복된다. 피임약에 함유된 호르몬 성분은 약을 먹는 기간에만 작용하며 체내에 축적되지 않아 복용을 중단하면 대략 한 달 이내로 정상 임신 능력을 되찾게 된다. 세계보건기구(WHO)도 피임약이 불임이나 태아기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임순 순천향대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경구피임약을 오래 먹으면 임신이 잘 안 된다거나 기형아 출산, 유산 확률이 높다는 얘기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속설”이라며 “다만 피임약을 복용하는 기간만큼 나이가 들어 임신능력이 떨어질 수는 있다”고 지적했다.

2006년 허버트 쿨 독일 괴테대 교수팀의 연구 결과에서도 피임약을 오래 복용한 여성도 경구피임약 복용을 하지 않은 일반 가임기 여성의 임신율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먹는 피임약을 장기 복용한 참가자 중 약 94%는 1년 이내에 임신에 성공했다. 즉 피임약을 복용한 여성과 한번도 복용하지 않은 여성의 가임률에는 차이가 없다는 의미다.

피임약을 오래 복용하면 오히려 자궁건강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영국의 연구 결과 경구피임약을 5년 복용할 때마다 자궁내막암 위험이 25%씩 줄어들었고, 미국 국립아동건강연구소 실험 결과에서도 자궁근종에 어느 정도 치료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연구소는 25~50세의 가임기여성을 대상으로 평가했고, 경구피임약을 복용한 그룹은 자궁근종의 크기가 작아지고 출혈도 줄어들었다.

방장훈 호산여성병원장은 “오히려 일반피임약(일반피임약)보다 응급피임약(사후피임약) 남용을 주의해야 한다”며 “사전피임약은 몸에 해로울까봐 평소 복용하지 않으면서 불안한 일이 생기면 응급피임약으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여성이 적잖다”고 말했다.

인재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최근 국민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사후피임약 처방건수는 2011년 3만7537건에서 2014년 16만9777건으로 크게 늘었다. 4년 동안 4.5배 급증한 것이다. 국내 응급피임약 복용률은 대개 경구피임약 복용률의 2배에 달하는 실정이다.

주로 20대 여성이 이를 찾는다. 2014년 기준 20대가 8만7376건으로 가장 많이 처방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30대(4만5522건), 40대(2만226건), 10대(1만5738건), 50대 이상(915건) 순이었다.

사후피임약은 정상적인 피임방법을 사용하던 중 불가피하게 실패한 경우나 강간 등 피치 못한 일을 겪었을 때 사용하는 응급용이다. 오남용하면 예기치 않은 부작용 및 합병증이 초래될 우려가 있고, 임신에 심각한 악영향을 받을 수 있다. 가볍게 ‘실수했으니 이거라도 먹어야지’할 만한 게 아니다.

방 원장은 “사후피임약은 고용량 프로게스테론을 집중 투여해 수정란이 자궁내막에 착상하는 것을 막아 임신을 방지한다”며 “사후피임약은 일반 경구피임약 20알을 한꺼번에 먹는 것과 같다”고 강조했다. 일반피임약에는 프로게스테론 역할을 하는 레보노르게스트렐, 게스토덴, 데소게스트렐 중 하나가 0.075~0.15㎎ 들어있지만 사후피임약엔 레보노르게스트렐이 일반피임약의 10~20배인 1.5㎎이나 함유돼 있다.

또 사후피임약은 아무때나 먹는다고 피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고 언제 먹었는지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 수정란은 수정 후 72시간 이내에 자궁에 착상하는 만큼 적어도 의심되는 성관계 뒤 72시간 안에 약을 복용해야 하며, 최대한 일찍 복용하는 게 관건이다. 24시간 안에 먹었다면 95%, 48시간 이내는 85%, 72시간 이내에는 58%로 점점 낮아진다. 여러번 먹을수록 효과가 떨어지므로 의심되는 상황일 때마다 사용하지 못한다.

고용량의 레보노르게스트렐은 호르몬 체계를 교란한다. 이 과정이 자주 반복되면 자궁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자궁내막에 생길 수 있는 문제뿐만 아니라 자궁근종까지 초래할 수 있다. 반복적으로 복용하면 생리주기가 불규칙해지고 부정기적인 자궁출혈의 위험이 커진다. 이밖에 식욕부진, 구토, 메쓰꺼움, 유방압통, 두통, 어지럼증이 유발될 수 있다.

또 몸무게가 80㎏을 넘는 여성은 주치의와 상담 후 복용해야 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해 ‘사후피임약은 몸무게가 75㎏ 이상인 여성에서 효과가 감소되고 80㎏을 넘으면 효과적이지 않다’는 주의사항을 추가했다. 프랑스 국립의약품건강제품안전청의 안전성 정보 검토결과에 따라 레보노르게스트렐 성분의 긴급피임제에 대한 허가사항 변경안을 마련한 것이다. 다만 울리프리스탈아세테이트 성분으로 제조된 사후피임약인 ‘엘라원정’은 해당되지 않는다.

방 원장은 “일반피임약을 오래 먹는 것보다 사후피임약 한번이 몸에 가해지는 충격이 더 크다”며 “일반피임약은 피임 효과가 우수하고 안전하다”고 강조했다. 일반피임약을 제대로 복용했다면 임신을 걱정할 우려가 거의 없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다면 남성은 콘돔을, 여성은 약물을 복용하는 더블더치(double dutch)를 활용한다.

그는 “내원한 환자 중에는 온라인이나 주변 사람들의 얘기에서 비롯된 근거 없는 오해를 가진 있는 경우가 많다”며 “올바른 정보를 명쾌하게 전달하려면 의사들이 환자와의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을 갖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취재 = 정희원 엠디팩트 기자 md@mdfac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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