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의 짧은 소설]<40>어떤 상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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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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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이 어떤 사람들에겐 아, 이제 또 어느새 가을이 왔구나 하는 신호로 읽히겠지만, 글쎄다, 초등학교 교사인 나에겐 아, 이제 또 그놈의 학부모 상담 주간이 돌아오겠구나 하는 압박감으로만 다가온다. 4월 둘째 주와 9월의 셋째 주. 해마다 돌아오는 이 학부모 상담 주간 때문에 나는 심각하게 교직을 떠날까 하는 마음까지 가졌던 게 사실이다. 그걸 뭘 그렇게 심각하게 여겨? 그냥 대충 듣기 좋은 말 몇 마디 해 주고 넘기면 되는 거지. 자긴 너무 예민해서 탈이야. 학부모 상담 스트레스를 선배 여교사에게 털어놓았더니, 금세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난 그래도 말귀 못 알아듣는 애들보단 학부모들이 훨씬 낫던데, 선생 하는 보람도 있고…. 글쎄 말이다, 나도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는데…. 나도 대충 형식적으로 아이가 성격도 좋고 적응도 잘하고 있어요 하는 식의 판에 박힌 말들만 해 주면 좋겠는데…. 성격이 글러 먹어서인지, 그게 잘 안 된다. 학생들한테는 안 그러는데, 이상하게도 학부모들이 생색을 내고 자기 자랑을 늘어놓으면, 그 꼴을 견디지 못하고 굳이 하지도 않아도 좋을 ‘지적질’과 ‘훈계’를 시작해 버리는 것이다…. 지난 학기였던가, 우리 반에서 좀 사는 편에 속하는 정아영 어머니를 만났을 때만 해도 그랬다. 아영이네 아버지가 성형외과 의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하 참, 이 어머니가 첫 만남부터 큼지막한 과일 바구니를 내밀지 않나, 어머, 선생님 피부 관리 좀 받으셔야겠다 하면서 병원 상품권을 내밀지 않나, 자꾸 선을 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래, 나도 안다, 그럴 때 요령껏 웃으면서 거절하고 바로 아영이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면 되는 건데…. 그걸 그렇게 정색을 하면서, 이런 걸 저한테 주시면 어떡하죠? 아영이한테도 이런 걸 선생님한테 준다고 말씀하셨나요? 이게 얼마나 아영이한테 비교육적인 행동이라는 건 알고 계시나요, 어머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계속 어어,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생각했지만, 결국 더 정색을 하면서 아영이 어머니를 대하고 말았다. 아영이 어머니 역시(무안해서 그랬겠지만) 처음엔 웃으면서 수습을 하려고 노력하다가, 결국은 나와 같은 표정이 되어 돌아가고 말았다. 후회만 되는 일들, 조금만 더 참으면 되는 일들을(그러곤 몇 날 며칠 끙끙 신경을 쓰고 만다) 꼭 학부모 상담 주간에 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마음을 다잡고 형식적으로, 매뉴얼대로만 학부모를 대하려고 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몇몇 학부모들을 상담했는데…. 아, 이런, 막판에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생각지도 못한 강적이 찾아오고 말았다. 그러니까 우리 반 박영광, 3학년 2반 14번 박영광의 아버지가 상담을 하겠다고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무언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머리는 며칠 감지 않은 사람처럼 지저분하게 헝클어져 있었고, 티셔츠도 바지 한쪽으로 삐쭉 튀어나온 차림새 그대로 찾아온 영광이 아버지는, 어쩐지 조금 화난 사람처럼 보였고, 조금 위압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전형적으로 몸을 쓰면서 일을 하는 사람 특유의 무뚝뚝함도 묻어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영광이의 평상시 학교 생활, 학습 태도 등을 이전보다 더 사무적인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말해 주었는데…. 이분 반응이 영 아니었다. 뭐, 사내자식이 그럴 수도 있다든가, 지 엄마 사랑도 못 받고 자란 자식이 어련하겠느냐든가, 다 지 팔자 따라 가는 거 아니겠느냐는 식의 말만 늘어놓았다. 그런 말들을 듣고 있자니 또 내 글러먹은 성격이 폭발해 버린 것이었다. 아니죠, 아버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는 거죠, 지금 누가 누굴 탓해요, 그럼 뭐 엄마 없는 애들은 다 학교 다니지 말고 집에서 쉬는 게 낫겠네요, 아버님이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계시나 본데요, 지금 아버님이 영광이한테 제일 잘못하고 계시는 거 아세요? 아아, 이러지 말자, 이러면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한편 겁도 나고, 걱정도 되는 마음이 없지 않아 더 목소리를 높였는데…. 이런…. 언제부터인가, 영광이 아버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어, 이건 아닌데, 이건 진짜 아닌데 하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영광이 아버지 입에선 이윽고 이런 말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선생님, 그러니까요…. 제가 정말 이런 말은 다른 사람들한테 안 했는데요…. 영광이 엄마가요…. 제가 좀 술을 잘 마셔요…. 근데 그렇다고….

그날, 나는 진짜 학부모 상담을 해야만 했다. 학부모만을 위한, 학부모 상담. 계절이 또 바뀌고 있었다.

이기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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