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정훈]공소시효와 과학수사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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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 사회부장
김정훈 사회부장
1998년 발생한 대구 여대생 성폭행 사망사건의 용의자인 스리랑카인에게 11일 항소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됐다. 검찰이 새로운 증인을 찾아내 법정에 세우는 등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법원의 판단은 “신뢰할 수 없는 증언이다”라는 것이었다. 성폭행 혐의만으론 이미 공소시효(10년)가 만료돼 처벌이 불가능해지자 공소시효가 남아있는 특수강도강간죄(15년)를 적용해 기소했으나 유죄 판정을 받지 못한 것이다.

대법원의 판단이 남아있긴 하지만 딸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17년 동안 애를 태워온 유족은 또다시 억장이 무너졌다. 이른바 가족의 억울한 원한을 풀어주는 ‘신원권(伸寃權)’은 여전히 제대로 행사되지 못하고 있다.

2013년 용의자인 스리랑카인을 찾아내 기소할 때까지 대표적인 미제 강력사건 중 하나였던 이 사건은 크게 두 가지 시사점을 주고 있다. 하나는 강력사건의 공소시효를 지금보다 더 늘려서 반드시 단죄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살인죄는 일명 태완이법(개정 형사소송법)의 시행으로 공소시효가 없어지면서 영구히 처벌이 가능해졌다. 나아가 성폭행 같은 다른 강력범죄에도 공소시효를 배제 또는 연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걸 대구 여대생 성폭행 사망사건은 보여준다.

이런 공소시효의 재검토는 과학수사의 비약적인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똑같은 증거물을 놓고도 과거엔 진실을 가릴 수 없었던 것이 시간이 흐른 뒤엔 과학수사 기법의 진화로 인해 새로운 발견이 가능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8년 만에 범인을 잡아냈던 대전 대성동 아파트 주차장 살인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사건 해결의 결정적 열쇠가 됐던 것은 현장에서 발견된 칼집을 감은 테이프 안쪽 접착면에 남아있던 ‘쪽 지문’이었다. 지문이 일부만 남아있거나 훼손된 ‘쪽 지문’은 과거엔 감식이 불가능했으나 2000년대 중반부터 감식이 가능해졌다.

본보가 지난달 27일부터 연재하고 있는 ‘증거는 말한다’ 기사는 유전자 감식은 물론이고 폐쇄회로(CC)TV에 잡힌 걸음걸이 분석, 곤충을 이용한 감식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과학수사 기법이 나날이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찰청이 총경급 간부가 지휘하는 과학수사센터를 67년 만에 경무관급 간부를 지휘관으로 한 과학수사관리관으로 격상시키겠다고 한 것은 이런 시대적 요청에 맞는 대응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를 두고 관련 부처 등에서 경찰의 ‘밥그릇 키우기’라거나 ‘조직이기주의’라는 식의 어깃장 놓는 말이 나온다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사건 현장에 맨 먼저 출동해 초동 수사를 맡는 경찰이 첨단과학수사로 무장하도록 하는 것은 오히려 국가적으로 강력히 추진해야 할 과제다. 과학수사는 진실을 밝혀내 범죄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형사사법체계의 대원칙인 증거주의에 입각한 수사와 재판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자백에만 의존하는 수사에서 탈피하게 해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기능도 할 수 있다. 나아가 잠재적인 범죄자들에게 ‘범죄를 저지르면 반드시 잡힌다’는, ‘완전범죄는 없다’는 인식을 심어줘 강력한 범죄 억제효과도 불러올 수 있다.

졸지에 딸을 잃은 범죄 피해자의 가족이 10년이 넘게 생업을 제쳐놓고 온갖 기관에 탄원서를 넣으며 진실을 밝혀 달라고 피맺힌 호소를 하고 다니고,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한마디 말을 해야 일이 돌아가는 식이어선 안 된다. 경찰청에 따르면 과학수사의 개가로 최근 5년간 중요 미제사건 3200여 건 중 329건이 해결됐다고 한다. 뒤집어 말하자면 2800여 건의 미제사건은 아직도 진실이 밝혀지길 기다리고 있다.

김정훈 사회부장 jnghn@donga.com
#공소시효#과학수사#미제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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